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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2012년 1월 5일 주님 공현 전 목요일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요한 1,43-51)
Nathanael answered him,
“Rabbi, you are the Son of God;
you are the King of Israel.”
말씀의 초대
사랑은 말과 혀로 하는 것이 아니며 일시적인 감상도 아니다. 사랑은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구체적인 것이며, 형제들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까지도 바치는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갈릴래아 지방으로 들어가시는 중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네 번째 제자가 될 필립보를 만나시자 당신을 따르라고 하신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을 보시고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하고 말씀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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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필립보를 만나시자 그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필립보는 『성경』에 관한 지식이 밝은 사람이었던 만큼 이치를 꼼꼼히 따지는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한 성격의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곧바로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리고 친구인 나타나엘을 만나 예수님께 인도합니다. 나타나엘은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열두 사도 가운데 한 명인 바르톨로메오와 같은 인물입니다. 소중한 것을 함께 나누고 싶은 것이 친구 사이라고 하는데 필립보와 나타나엘은 우정이 깊은 사이였나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을 보시자,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대화를 한 후 나타나엘 또한 예수님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이렇듯 오늘 복음에 나오는 필립보와 나타나엘은 예수님의 참모습을 볼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필립보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곧바로 따랐고, 나타나엘은 예수님을 뵙고 신앙을 고백합니다.
이 두 사람이 예수님의 참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던 근원적인 힘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것은 평소 그들이 『성경』의 참뜻을 탐구하고 묵상하였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성경을 모르면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 신앙을 모르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맹목적으로 흐르지 않으려면 평소 『성경』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요즘 많은 사람이 열심히 『성경』을 탐구하고 묵상하면서 예수님을 더욱더 깊이 알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참 아름답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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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나타나엘은 예수님께 승복합니다. 자신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걸 보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셨다는 말에 그렇게 달라질 수 있었을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그의 지난날을 이야기하셨을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는 표현은 나타나엘의 ‘과거를 이야기하셨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말합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시골에서 무슨 걸출한 인물이 나오겠느냐는 말입니다. 그 말은 맞습니다. 문화 시설이 전무했던 나자렛에서 뛰어난 인물이 나올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로마 문화가 판을 치던 시대에 예루살렘 말고는 그 어디에서도 훌륭한 인물이 나올 수 없는 분위기였습니다.
어쩌면 나타나엘은 위대한 스승을 찾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을 읽으셨고, 그의 소년 시절과 앞으로의 꿈을 이야기하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는 표현입니다. 그러자 나타나엘은 고백합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그가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언어였습니다.
나타나엘은 예수님을 꿈을 이루어 주실 분으로 믿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꿈을 이루어 주실 분이십니다. 그분의 제자로서 제대로 살아가면 우리가 바라는 많은 것이 현실이 되어 나타날 것입니다.
새벽을 열며
지금 우리 성당에서는 ‘성경 하루 한 장 읽기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 되는 공동체를 만들자는 취지 아래, 평화신문에서 하고 있는 ‘성경 하루 한 장 읽기’를 우리 성당에서도 하고 있는 것이지요. 방법은 이렇습니다. 지시되는 성경의 장을 읽은 뒤에, 나눠드린 프린트 물에 나와 있는 가로를 채우는 문제를 풀면 됩니다.
저 역시 이 운동을 교우들과 함께 하고 있는데요. 어제 문제를 보면서 교우들이 당황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 창세기 4장을 읽은 뒤에 풀어야 하는 어제의 문제를 적어 보지요.
창세기 4장 : 카인이 자기 아우 아벨을 죽인 후, 주님께서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물으시자 ( )라고 하였다.
정답이 무엇일까요? 정답은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답의 글자 수가 꽤 많은데 반해서 가로의 칸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이것이 정답일까 라는 의구심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바로 정답은 가로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들은 많은 고정관념 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나의 머리를 벗어나시는 분, 나의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분이라는 것이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런 점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나타나엘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는 사람들에게 완벽한 사람이라고 평을 받던 바리사이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철저히 지킨 것은 물론, 사람들의 높은 존경도 받고 있었지요. 그래서일까요? 그는 정작 스스로의 고정관념에 쌓여 있게 되어서, 예수님에 대한 소개를 필립보를 통해서 듣고도 이렇게 말하지요.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나자렛은 그렇게 유명한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그 조그마한 촌구석에서는 유명한 랍비가 도저히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나타나엘 스스로 이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필립보의 말 “와서 보시오”라는 말에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예수님 앞에 나오기 전부터 자신을 쭉 보고 계셨던 주님의 손길을 체험하면서 그는 드디어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만약 나타나엘이 나자렛에서 좋은 것이 나올 수 없다는 자신의 고정관념을 굽히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요? 그는 하느님의 아드님이며, 이스라엘의 임금님인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었겠지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사고를 뛰어넘는 분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자신의 고정관념에 쌓여 있는 한, 예수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고정관념에 쌓이지 맙시다.
빠다킹신부
진실과 정직
-이중섭 신부-
나타나엘을 두고 하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가짜가 너무 많습니다. 참기름도 가짜, 고춧가루도 가짜, 박사도
가짜. 본당 유물관 건립기금 마련을 위하여 참기름을 만들어 판 적이 있습니다.
하도 가짜가 많아 ‘진짜 참기름’을 팔았는데, 사람들이 믿지 않았습니다. 사는
사람마다 “이거 진짜 맞아요?”라고 꼭 물어보았습니다. “중국 깨 한 톨 안 섞인
진짜 백 퍼센트 참기름입니다”라고 해도 고개를 갸우뚱하였습니다. 얼마나 속고
살았으면 이렇게 되었을까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을 속이고 대충대충
얼렁뚱땅 하는 것을 현명한 처세술로 생각하는 듯합니다. 이렇게 된 것은
가정교육부터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거짓말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전화를 받기 싫으면 아이더러 “아빠 없다고 그래”라고 시킵니다.
이런 부모를 보고 자녀들이 거짓말하는 것을 배웁니다. “다음 주말에 썰매장
데려갈게.” 아이들은 그 말을 믿고 주말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립니다. 그러나
주말이 오면 “바쁘니까 다음에 가자”라고 한다면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남을 속이는 법을 배운 아이들이 커서 사회의
지도자가 된다면 나라는 온통 거짓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어느 사회든
진실이 사라지면 하느님 앞에서 견뎌낼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진실해져야 합니다. 우리 신자들부터 정직하고 성실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미 나를 아시는 분
-주영길 신부(청주교구 봉방동 천주교회)-
창세기가 전하는 창조 이야기 가운데 으뜸은 ‘인간 창조’다.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의 창조를 마치시고 마지막으로 당신 모상을 따라 흙으로 사람을 빚어 코에 당신 숨결을 불어넣어 주셨다(창세 1,26; 2,7 참조). 그래서 고대인들은 인간의 들숨날숨이 하느님과의 보이지 않는 끈이라고 생각했으리라. 하느님과 연결된 우리의 숨결은 불가분의 관계성을 의미한다. 숨이 붙어 있는 한 하느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알고 계시며 이끌어 주신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나타나엘의 첫 만남을 전하고 있다. 처음에 나타나엘은 필립보의 증언을 듣고 비아냥거린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1,46) 곧 나자렛 출신 예수가 메시아일 리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그의 됨됨이를 알고 계셨다. 복음사가는 나타나엘에 대한 선견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시사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잘 알듯이 제자들에 대해서도 잘 아신다. 그뿐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신다(2,25 참조).
예수님은 이미 나를 알고 계신다. 그분이 나를 알고 계심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동의어다. 한때 유행가처럼 번지던 복음성가 중에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노래가 있다. 모 방송에서 지체장애를 가진 이들이 그 노래를 합창하는데 그 어느 때보다 깊은 감동이 밀려왔다. 어떤 형태의 삶이나 인생도 주님은 한결같이 아끼고 사랑하신다. 하느님 앞에 무의미한 인생, 쓸모없는 생명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어렵게 세례를 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던 자매님이 있었다. 자식을 못 낳아 소박을 맞은 이후 외롭게 살아온 분이었다. 세례식이 끝난 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한 그분의 말씀이 가슴 뭉클했다. 늦게야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으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고백이리라. 우리도 ‘주님이 나를 알고 내가 주님을 알기에 세상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했으면 좋겠다.
뻥뚤림
-오상선신부-
가끔 먹은 음식이 체해서 속이 답답할 때가 있다.
평소에는 잘 모르는데 이렇게 체해 보면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알 수있다.
오늘 아침에는 화장실 청소를 하는데, 변기에서 냄새가 많이 난다.
여기도 막혀서 잘 내려가지 않기 때문이다.
속시원하게 뻥뚫림을 체험하면 이렇게 상쾌할 수가 없다.
우리 삶 전체가 이렇게 통해야만 한다.
우리 삶이 어렵고 힘들게 느껴지는 것은 어디엔가 막혀 있기 때문이다.
관계가 막혀 있을 수도 있고 내 마음이 닫혀 있을 수도 있다.
도대체 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답할 때가 많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마음을 닫아 버리면...
그래 우리의 문제는 재물이 적음도 아니요 사랑이 적음도 아니다.
우리의 문제는 마음을 닫아 버리는데 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나타나엘이 무화과 나무에서 메시아 도래를 기다리며
수없이 도를 닦았지만 그분을 만날 수 없었던 이유는
다름 아니라, 이렇게 마음이 닫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닫힌 마음을 열고 나와야만 그분을 만날 수 있고
하느님의 사랑이 그 사람 안에 머물 수 있다.
우리가 소화불량인 듯이 살아가게 되는 이유는
뭔가 정상적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음식을 너무 급하게 먹었거나,
뭔가 상한 듯한 음식을 먹었거나,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억지로 먹었거나...
나타나엘은 참으로 구도자였다.
그러나 아무리 도를 닦아도 막힌 부분이 있었다.
그에게 그 막힘은 지식에 의한 편견이었다.
이론에만 너무 밝았다.
그러다보니 그 이론을 뛰어넘는 그분의 현존을
바라볼 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때 필립보같은 벗이 필요했다.
그런 영적인 벗을 통해 한걸음 빗장을 걷어낼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하였다.
이때 필요했던 것은
우리 주님의 칭찬 한마디였다. 격려 한마디였다.
이렇게 좋은 벗의 인도와
우리의 칭찬, 격려 한마디는
닫힌 마음을 열게 하고
비로소 메시아를 고백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만사형통이다.
유무상통이다.
뻥뚤림이다.
이게 바로 깨달음이다.
나타나엘의 확신에 찬 신앙고백
-김재호 신부-
찬미예수님!
오늘 하루도 이렇게 하루를 허락해 주신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신학생 시절 학교에서 새벽 일찍 일어나 큰 소리로 외치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베네디까무스 도미노!! 데오 그라시아스!!’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주님을 찬미합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때는 이른 새벽이었고 일어나기가 싫었는데도 그 외침소리에 잠을 깨야 했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뭐가 그렇게 감사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을 품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는 것과 맑은 공기를 마시고 있다는 것과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 등....많은 일들이 감사해야 할 것들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학생 시절, ‘하늘이 참 맑고 아름다구나, 꽃들이 너무 아름답구나, 비가 내리는 모습이 아름답구나..’라고 하시는 수녀님을 보고 ‘뭐가 그렇게 아름답나?’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경상도 남자라서 그런지 작은 일 하나하나에 감탄하시는 수녀님의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오늘 복음에도 작은 일 하나에 감격하고 기뻐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작은 일 하나를 보고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바로 “나타나엘”입니다.
나타나엘은 그의 친구 필립보에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습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심지어는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라고 하면서 필립보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나타나엘이 예수님을 직접 찾아뵙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을 단번에 알아보십니다. 이에 나타나엘은 예수님께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작은 체험으로 인해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않았던 나타나엘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까지 고백하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우리 신앙의 선조들에게 있어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분들은 예수님께 대한 작은 체험을 통해 신앙을 고백하고 목숨까지도 바치셨습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나타나엘보다 신앙의 선조들보다 더 큰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직접 내 몸 안에 모시는 큰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에 나오는 나타나엘처럼 기쁨으로 가득차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지 각자 자신에게 물어봐야하겠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시면서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늘 불평만을 늘어놓으며 살아가고 있는건 아닌지 한번 반성해보면 좋겠습니다. 올 한해는 정말 주님께 감사하며 주님만을 의지하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와서 보시오 !!
-이찬홍 신부-
어제와 오늘 복음에 ‘보다’는 의미의 말이 13번 나옵니다.
‘보다’는 의미에 대해 함께 나눠볼까 합니다.
‘보다’의 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총 다섯 가지 의미가 나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용하는 ‘보다’라는 말은 사전적인 의미를 넘어 폭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일예로, ‘영화를 본다.’고 할 때, 실제 영화의 장면 자체를 보는 것만을 뜻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영화가 담고 있는 의미를 보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내용이 어렵거나, 보고 나서도 의미 파악이 되지 않으면, ‘무슨 것을 보았는지 모르겠다.’ 라고 말합니다.
산을 보는 것도, 그림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이는 그 모습, 현상을 넘어 산이 지닌 깊은 멋, 그림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볼 수 있을 때... 보고 깨달을 수 있을 때, 참되게 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어제 오늘 복음에 나오는 ‘보다’ ‘보고는’ ‘보라’는 말에 의미 역시, 단순히 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보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요한의 제자에게 ‘와서 보시오.’ 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의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요한의 제자들 역시, 자신들이 보고 느끼는 그 무엇이 있었기에... 그 느끼고 알게 된 것을 토대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 필립보를 제자로 부릅니다. 예수님을 본 필립보는 바로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하여 제자가 됩니다. 그 후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가서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일이 나올 수 있겠소?” 라고 대답합니다. 나타나엘의 말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나타나엘이 보는 나자렛이란 마을은 아주 조그마한 마을이기에... 적어도 자신이 보고 느끼는 것으로는... 눈으로 보면서 알게 되는 나자렛 마을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나올 만한 마을이 아니었기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자,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말합니다. “와서 보시오.” 곧 ‘함께 가서 예수님을 봅시다. 가서 내 말이 틀렸는지 맞는지, 당신이 가서 보고 확인해 보시오.’ 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본, 나타나엘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며 예수님을 따릅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알려주는 ‘와서 보시오.’ 라는 방법은,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수되어 제자들 역시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할 때, 똑같이 사용합니다. “와서 보시오. 와서 당신이 귀에 들리는 말이 아니라, 당신에게 진실을... 참된 것을 알려주는 당신 눈으로 보고 판단하시오.‘ 라며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합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전하는 방법은 많습니다. 책과 글을 포함한 말, 예수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현하는 행동, 보고 드는 매스컴, 쉽게 접속되는 인터넷 등 모든 것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예수님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때, 예수님께서 친히 사용한 방법인... 제자들이 사용했던 방법인, 보고 느끼는 것을 알려주는 방법이라야 참되게 예수님을 전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아는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 서적에 나와 있고 알려주는 예수님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며 느끼는 그 무엇을 전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빵에 모습으로 우리에게 보여 지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그 예수님을 몸과 마음에 모시고, 함께 살아가며 느끼는 그 감동을.. 그 기쁨을 이웃들에게 전해 줄 수 있어야 진정 이 시대가 바라고 원하는 참된 선교가 아닐까 합니다.
“와서 보시오. 와서 내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당신이 보고, 느끼고, 판단하고 믿으시오.” 라며 예수님을 알려주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스스로가 예수님을 보고, 모시는 신앙생활 속에 참된 기쁨과 감동을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믿음과 선포
-이중섭 신부-
요한 복음에서 필립보는 예수님에게 “나를 따라라”(요한 1,43)는 부르심의
말씀을 들은 첫 번째 사람입니다. 필립보는 예수님의 소명을 받자마자 나타나엘을
만나서 곧바로 전했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요한 1,45).
안드레아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 하고
자신 있게 말했던 것처럼, 필립보 역시 자신이 체험한 것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앙체험이란 본래 그런 것입니다. 내가 믿고 체험한 것을
전하지 않으면 참된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필립보의 확신과 선포에도 나타나엘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습니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합니다(요한 1,46).
이 초대는 이미 예수님께서 요한의 두 제자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만큼 첫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은 감동 그 자체였던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나타나엘도 감동하여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했습니다.
믿음과 선포, 이 둘은 함께 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구요비 신부(가톨릭대학교)-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참으로 다양하다. 예지인(Homo sapiens), 공작인(Homo faber), 노동하는 인간(Homo exercens), 놀이의 인간(Homo ludens), 전례의 인간(Homo liturgicus) 등.
그런데 ‘나는 누구인가? 무엇하는 존재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구체적으로 우리가 한 인간의 됨됨이나 인격, 그 삶에 대한 평가는 주관적이며, 때로는 아주 단편적이다. 내가 알고 있는 나와 타인이 평가하는 나 또한 다르다. 나에 대한 타인의 평가는 내 전 실존이 아니라 극히 일부분에 해당된다.
오늘 복음에서 나타나엘이 예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은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말씀하신다(48절). 그렇다. 나를 참으로 잘 알고 계신 분은 주님뿐이시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제 생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십니다”(시편 139,1-2).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인간이 누구인지를 참으로 알려면 먼저 하느님을 알아야 한다”고 갈파했다.
인간의 성숙, 인격의 완성 역시 마찬가지다. 성경이 계시하는 하느님과 인간관계는 계약으로써,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인간의 신뢰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래서 현재 미완성의 존재로서 되어가고 있는 인간의 참모습, 진정한 ‘나’는 사실은 하느님의 언약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콜로 3,3).
- 권우영 신부-
우리는 주님의 공현 대축일을 준비하는 한 주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동방박사의 방문으로 예수님의 탄생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그분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임이 밝혀지기 시작합니다. 특히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그분의 길을 준비해야 할 사명을 띠고 왔음을 증언하며, 그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심을 확신시켜 주고 그분만을 따를 것을 제시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까지 많은 사람들로부터 메시아가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던 요한은 여러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던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지요. 범국민적인 쇄신운동과 회개 운동이 전개되고 요르단 강에서의 세례 예식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중적인 인기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결코 자신의 사명을 혼동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옴을 확인한 요한은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임을 분명하게 증언합니다. 요한의 노력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자 그의 제자들은 인간적인 섭섭함을 드러냅니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요한3,26)
제자들의 말속에 끓어오르는 질투심과 시기심이 엿보입니다. 요한이 대답하였습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26-30)
이렇듯이 요한은 그의 삶을 오직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드러내는데 바칩니다. 이러한 요한의 증언에 따라 그의 제자였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라.??(요한1,43)하고 필립보를 부르시자 필립보는 즉시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따라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가 안드레아와 베드로의 예수님의 증언에 관한 말씀을 듣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다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경은 ??필립보는 안드레아와 베드로의 고향인 벳사이다 출신이었다.??(요한1,44)라고 필립보와 안드레아가 한 고향 출신으로서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사이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한편 예수님을 따르게 된 필립보는 나타나엘을 만나자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요한1,45)라고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그러나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1,46)하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하지요. 그러자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예수님께서 첫 번째 제자들인 안드레아 일행에게 하셨던 말씀을 그대로 따라합니다.
“와서 보시오.??(요한1,46)
확신에 찬 필립보의 제안에 나타나엘은 예수님에 대한 관심을 높입니다. 그때 필립보와 대화하며 다가오는 나타나엘을 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요.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1,47)
예수님의 칭찬에 깜짝 놀란 나타나엘이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요한1,48)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요한1,48)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율법서를 읽으며 메시아를 대망하던 나타나엘은 그 순간 예수님이 누구이신 지 깨닫고 그 분을 구세주로 모시게 됩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1,49)
동방박사에게서 시작된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의 신원이 이렇게 사람들에게로 점점 퍼져 나가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확신하고, 다른 이들에게 증언했듯이 주님 공현 대축일을 준비하는 우리가 해야할 일 역시 그 분이 구세주이심을 전하는 일입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을 준비하는 우리의 자세는 분명해졌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확신하고 주님을 세상에 증언했듯이 우리 역시 복음을 선포해야 하겠습니다. 복음 선포는 우리의 믿음을 한층 성숙시키고 주님을 깊이 체험하도록 이끌어 줄 것입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양승국신부-
<두 달간 기쁘게 하는 한 마디 칭찬>
지난 연말, 큰 교통사고를 겪었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크게 다치지 않은 한 가족의 가장이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이렇게 누워서 지난날을 돌아보니, 그간 별 의미를 두지 않았던 하루 일과, 부담스럽게만 느껴졌던 가족, 귀찮게만 여겨졌던 직장업무, 스트레스로 다가왔던 거래처 사람들이 그렇게 소중해 보이더군요. 이제 가까운 사람들 더 사랑하며, 매일 매일에 좀 더 의미를 부여하며 그렇게 살아가라는 표시겠죠?”
들떴던 연말연시가 어느새 지나가고 다시금 삶의 현장에서 고생들이 많으시겠지요?
한 조사에 따르면 고된 업무 속에서 그나마 희망을 안겨주는 것은 직장 상사나 동료들의 따뜻한 한 마디 말이랍니다.
그러나 칭찬에 유독 인색한 우리들이지요. 선진국에서 상사란 존재는 부하직원을 격려하고 지원하는 사람인 반면, 한국에서 상사란 존재는 ‘스트레스의 요인’일 가능성이 많답니다.
칭찬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마크 트웨인이란 사람의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나는 한 마디의 칭찬으로 두 달을 기쁘게 살 수 있다.”
올 한해 서로 서로에게 이런 말 좀 더 많이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요즘 많이 힘들지?”
“이번 일 마무리하느라 정말 수고 많았어요.”
“자네가 역시 최고야!”
“자네, 정말 일 잘 하는군.”
최근 큰 프로젝트를 제대로 성사시킨 한 회사원의 이야기입니다. 직속상관은 여러 차례에 걸쳐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 회사원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지요. 그 회사원은 성과 자체보다 상사가 인정해준 점이 더 기뻤답니다. 상사로부터 인정과 격려를 받은 그 회사원은 그날부터 출근시간이 기다려졌답니다. 멀리서 직장건물이 눈에 들어오기만 해도 가슴이 뛰기 시작했답니다.
보십시오. 칭찬 한마디가 이렇게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칭찬하는 CEO로서의 예수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공생활이 시작되자마자 예수님께서 역점을 두신 프로젝트가 ‘인재 양성’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예수님은 타고난 리더였습니다. ‘인사가 만사’란 사실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제자단 모집과 양성을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십니다.
부족한 사람들, 때로 아직 기본적인 교양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을 뽑아 교육시키느라 예수님은 많은 고초를 겪으셔야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다양한 교육적 접근 방식입니다. 각 사람의 취향이나 성향, 수준, 상황에 적합하게 개별적으로 접근하십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타나엘(하느님의 선물이란 의미를 지닌 이름)은 진리를 향해 개방되어 있는 제대로 된 신앙인이었습니다.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 당시 보기 드믄 유다인이었습니다.
나타나엘의 인간됨됨이를 즉시 파악한 예수님께서는 그를 당신 제자단에 꼭 포함시키고 싶으셨던 나머지 즉시 효과를 보는 칭찬이란 도구를 사용하십니다. 칭찬도 보통 칭찬이 아니라 들으면 입이 찢어질 정도의 칭찬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칭찬의 강도가 얼마나 세었던지, 나타나엘은 그 ‘한방’에 완전히 돌아서고 맙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자 사람은 거짓이 없다.”
올 한 해 동안 이렇게 사람을 살리는 칭찬,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칭찬. 사람의 품위를 드높이는 칭찬을 보다 많이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가정 안에서도 혹시 실직 중에 계신 가장에게 실망의 눈초리를 보내기보다는 이런 말씀 한번 던져주시기 바랍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있어도 당신의 존재가 제게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답니다.”
“아빠, 힘내세요. 아직 우린 견딜만해요.”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요한 1, 43-51)
-유 광수신부-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하고 대답하셨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지난번 피정 때 나는 어느 형제분과 인사를 하면서 "아무개 아니냐. 만나서 반갑고 이 피정에 와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였다. 그 형제는 내가 자기를 어떻게 아느냐고 말하면서 매우 놀라는 모습이었다. 사실 그 형제와 나는 한번도 만난 적은 없다. 다만 그 형제가 말씀 학교의 직원이 지도 하는 묵상 나누기에 매우 열심히 나오시고 아주 충실하게 준비하신다는 말을 듣고 나는 나대로 그 형제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기회가 되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리라고 생각했었다. 그 형제에게서는 뜻하지 않았던 일이었던 것이다. 우선 신부님이 자기를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해 놀랬고 그것이 무척 고마웠던 모양이다. 직원의 말에 의하면 지금도 가끔"신부님이 자기를 알아보았다."는 것에 대해 매우 자랑스레 이야기하곤 한다는 것이다.
누가 나를 알아 준다는 것은 참으로 기분 좋은 일인가 보다. 그것도 전혀 예기치 못한 사람이 평소에 자기가 존경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를 알아보고 먼저 인사를 한다는 것은 놀랠만한 일인가 보다. 왜 그럴까? 자기의 존재를 인정받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가 자기를 알아준다는 것은 그 사람한테 사랑을 받고 있고 자기가 그 사람한테 관심의 대상이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우리도 이런 경험을 많이 하였을 것이다. 어느 낮선 곳에 갔을 때 누군가 나를 알아보고 다가 와서 인사를 하거나 반갑게 맞아준 경우 말이다.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나에게 나가와서 아! 누구시군요, 나는 평소에 선생님을 존경했습니다. 제가 뭐 도와드릴 일이 없나요. 아무튼 누군가가 나를 알아준다는 것은 무척이나 기분 좋은 일이다.
오늘 나타나엘이 예수님한테 처음으로 갔을 때 "보라, 저 사람이야 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라는 칭찬을 듣고 감격하여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예수님께 묻는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라는 말씀을 묵상하자.
나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몇 가지 질문이 일어난다. 예수님이 나타나엘을 보시고 금방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라고 말씀하셨다면 과연 예수님이 아시고 계신 나는 어떤 사람일까? 예수님이 나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단 한번이라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생각해 보았다면 과연 그 때의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는가? 예수님이 나에 대해서 알고 계신다면 나는 과연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는가?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나는 나에 대해서 아는가? 내가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나와 예수님이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나의 모습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등 여러 가지 질문이 일어난다.
여기서 몇 가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묵상해보자.
누군가가 나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했을 때 반갑고 기분이 매우 좋은 경우도 있을 것이다.
또 반대로 두렵고 떨리고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숨고 싶은 심정일 때도 있을 것이다. 나는 나 말고는 아무도 나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무척 당황스러운 일일 것이다. 내 어두운 과거가 다 드러날까 봐 두렵고, 나만이 고이 간직해왔던 비밀이 탄로 날까 봐 두려울 것이다. 우리는 그럴 때 나도 모르게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당황해하며 질문할 것이다.
이 세상에는 누구에게나 자기 안에 "네 구역"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을 Jonari(요나리) 창이라고도 부른다. 첫째는 나에 대해서 나만이 알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부분이 있다. 둘째, 나에 대해서 나는 모르는데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 부분이 있다. 셋째, 나도 알고 다른 사람도 아는 부분이 있다. 넷째, 나도 모르고 다른 사람도 모르고 오직 하느님만이 아는 부분이 있다. 이것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부분이 결코 많지 않다. 어쩌면 나 자신도 나에 대해서 잘 모르는 부분이 더 많은 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나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남을 알겠으며 또 내가 안다고 한들 얼마나 알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양,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양, 말하고 판단한다.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가? 무지한 사람이 용감하다고 했던가?
나는 나에 대해서 정말 얼마나 아는가? 내가 알고 있다고 하는 그것이 정말 나인가? 언젠가 텔레비젼에서 만덕 스님이 일년간 만행을 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한 말이 "다른 사람도 모르는데 내가 나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라는 말이었다. 만행은 불교에서 자기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그렇다. 나는 나 자신을 알 수 없다. 왜 그런가? 내가 나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만들지 않았는데 어떻게 나를 알 수 있는가? 나를 아는 분은 오직 나를 만드신 창조뿐이시다. 따라서 내가 나를 알고 싶으면 나를 만드신 하느님을 알아야 하고 그분을 통해서만이 나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은 나의 원형이시고 나를 만드신 분이시다. 그래서 시편작가는 이렇게 노래한다.
주여, 당신은 나를 샅샅이 보고 아시나이다.
앉거나 서거나 매양 나를 아옵시고, 멀리서도 내 생각을 꿰뚫으시나이다.
걸을 제도 누울 제도 환히 아시고, 내 모든 행위를 익히 보시나이다.
말소리 내 혀 끝에 채 오르기 전에, 주는 벌써 모든 것을 알고 계시나이다.
알으심이 너무나 놀랍고도 아득하와, 내 힘이 미치지 못하나이다.
당신의 얼을 떠나 어디로 가오리까, 당신 얼굴 피해 갈곳 어디오리까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주는 계시옵고, 지옥으로 내려가도 거기 또한 계시나이다.
새벽의 날개를 이 몸이 친다 하여도, 저 바다의 먼 끝에 산다 하여도
거기에도 당신 손은 나를 인도하시고, 그 오른손이 몸을 잡아 주시리다.
당신은 오장육부 만들어 주시고, 어미의 복중에 나를 엮어 내셨으니
묘하게도 만들어진 이 몸이옵기, 하신 일들 묘하옵기, 당신 찬미하오니
당신은 내 영혼도 완전히 아시나이다.
은밀한 속에서 내가 지음 받았을 제, 깊숙한 땅 속에서 내가 엮어졌을 제,
당신은 내 됨됨이를 알고 계셨나이다. (시편 138)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김태오 신부(마리아회) -
◆예수님은 필립보를 부른다. 필립보는 “나를 따라오너라” 하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참된 목자의 소리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매우 들뜬 마음으로 예수님을 소개한다. 비록 나타나엘이 확신에 찬 자신의 말에 의심을 품지만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멋진 말을 던진다. “와서 보라!” 와서 보라! 얼마나 멋진 초대의 말인가. 많은 설명보다는 한번 와서 보라는 것이다. 내가 말한 분이 얼마나 권위가 있는지 그리고 이스라엘이 애타게 기다리는 분인지 직접 와서 보라는 것이다. 사실 이 말은 요즘 성소자들에게 매우 인기있는 모토와 같다. ‘와서 보라!’ 그렇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와서 보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머리로 당신을 믿게 하시지 않고 당신의 말씀과 행동으로 우리들이 무릎 꿇고 믿음을 고백하게 한다.
‘와서 보라’는 필립보의 초대를 받은 나타나엘은 예수님의 진실하고 예언자적인 능력에 감탄한다. 예수께서는 나타나엘이 거짓이 조금도 없는 진실한 이스라엘 사람이라 하시면서, “필립보가 너를 찾아가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신다. 구약성서에서 포도나무나 무화과나무 아래라는 표현은 평화스러움의 상징이다. 어떤 사람이 누구의 방해도 없이 포도나무나 무화과나무 아래 있으면 평화의 물결로 대치된다. 더 나아가 성장한 잎으로 그늘진 무화과나무 아래는 기도 및 묵상의 장소이기도 했다. 분명 이스라엘의 구원을 갈망하고 구세주를 기다리는 나타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서 자주 묵상하고 기도하였을 텐데, 예수님은 그것을 지적한 것이다. 실제로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는 것보다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묵상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말씀한 것이라 하겠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하느님의 천사가 하늘까지 닿는 층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야곱의 꿈 이야기를 인용하시면서 당신이 바로 하늘로 우리를 인도하는 사다리이심을 암시하신다.
Vision
-이인옥-
예수께서는 오늘 필립보를 만나시고 그를 제자로 부르신다.
"나를 따라라.”
필립보는 나타나엘을 찾아가 말한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경전 속에 있던 인물을 실존으로 만났다며 감격해 하는 말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분을 보니 경전과는 다른 무엇인가도 있었다.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들의 기록에는 한번도
'나자렛'이라는 지명이 언급되지 않는다.
나타나엘은 당시의 관습대로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경전을 공부하던 율법학자들의 일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타나엘은 대뜸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와서 보시오" 필립보는 나타나엘을 이끈다.
경전이나 분석하고 있지 말고 직접 그분을 체험하라는 것이다.
그렇다.
성경을 아무리 파헤치고 자르고 분석해도
그분에 대해 다 이해할 수는 없다.
문자를 읽고, 외우고, 행간의 의도를 다 알아챈다해도
그분을 다 안다고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나타나엘은 예수, 그분이 누구신지 직접 확인하러 나섰지만
오히려 나타나엘 그 자신이 누구인지 그분에게 읽혀진다.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예수, 그분을 만난 사람은 누구나 이렇다.
사실 경전을 올바로 읽는 사람도 모두 이렇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를 읽는 것이다.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그가 과거에 '무엇을 하던 사람인가' 하는 것을 알아보시는 분.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그의 현재의 내면의 세계도 꿰뚫으시는 분.
나타나엘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나서야
그가 경전에서 뵙고 그리워하던 바로 그분임을 알아보게 된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스승, 하느님의 아드님, 이스라엘의 임금님!
그의 고백은 점점 더 깊이를 더해 간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그분은 나타나엘의 미래에 관해서도 말씀하신다.
나타나엘이 보게 될 엄청난 Vision.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옛날,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게 된 야곱은
하느님의 집이라는 '베델' 에서
하늘과 땅을 잇는 층계 위를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참 이스라엘'이라는 칭찬을 듣는 나타나엘은
꿈이 아닌 현실로 그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 그분은 죄악으로 끊어진 하늘과 땅을 잇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며
그 일을 완수하고 다시 하늘 위로 올라가실 분이시다.
그분은 경전에서나 볼 수 있는 분이 아니며,
꿈에서나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며,
저 천상에만 계신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사람의 아들’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마침내 하늘을 열고 거룩한 주님의 품으로
우리를 데리고 올라가실 '하느님의 아들'이신 것이다.
그분이 바로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다리요 길이요 문이시다.
아니, 그분 자신이 벧엘 - 하느님의 집- 성전인 것이다.
주님! 나타나엘에게 보여주셨던 최고의 Vision,
그 천상 세계를 우리에게도 보여주소서.
그 환희의 고백을 우리도 외치게 하소서.
하느님의 집, 당신 안에서 항상 우리가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