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화(松花) 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대이고
엿듣고 있다.(閏四月, 박목월)
열일곱 소녀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청신한 모습이라는 오월의 아침나절!
숲으로 난 작은 오솔길에 아까시꽃이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아까시꽃이 피면 찔레꽃도 덩달아 구름처럼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아까시꽃이 피기 시작하면 그 소식을 듣고 수만리 태평양 바다 건너 꾀꼬리도 덩달아 숲을 찾아옵니다.
아니 진달래가 피었다는 소식을 듣고 진즉 출발했었겠지요.
아까시꽃이 찔레꽃이 피고지면 계절의 여왕처럼 찬란했던 오월을 보낸다는 설움이 있지만
그만 향기로움에 홀려서는 그런 설움은 잠시 잊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른 아침의 오솔길에서는 코는 기본으로 눈과 귀, 작은 땀구멍까지도,
열려있는 모든 감각기관으로 스며든 향기가 차고 넘쳐나 몸에서도 향기가 묻어납니다.
눈 먼 처녀가 살았다는 산지기 외딴집이 있던 시절처럼 송화가 피었으되
그 송홧가루가 날리는 모습은 보기 어렵습니다.
그 시절에는 송화가 필 이 때쯤으로
송홧가루가 날리는 모습을 '풀석풀석'이라는 약간은 과장돤 것 같은 표현을 할 수도 있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비라도 내려야 빗물이 모여준 모습으로 송화가 피었음을 헤아릴 수나 있습니다.
아까시꽃이 피기 시작하면 송화로 피었던 보리티밥같은 가루주머니들은 춘정처럼 그 꽃가루들을 날려보내고
위에서부터 차례로 떨구어지기 시작합니다.
유년시절, 부지런한 봄바람이 온 산에 풀썩 풀썩 날리도록 그 가루들을 다 털어내기 전에
소나무아래로 이불 홑청을 깔고 흔들어 그 노란 가루들을 모았습니다.
빡빡머리위에도 얼굴에도 분칠하듯 송홧가루가 내렸습니다.
그리고 털어 모은 그 작은 가루들로 어머니는 송화다식을 박아내셨습니다.
한 입 씹어내리면 그 뻑뻑함속에 배어있던 화- 한 솔 향과 달콤함,
이제는 결코 돌아갈 수 없을 그 시절처럼 어머니가 그리워지고
그 맛이 그리워지기도 하지만, 그 시절 얼마간 넘어야했던 보리고개가 있었습니다.
사흘 안 끓어도 솥이 하마 녹슬었나
보리 누름철은 해도 어이 이리 긴고
감꽃만 줍던 아이가 몰래 솥을 열어보네(보릿고개, 이영도)
터널이 생기기 전으로 추풍령보다도 대관령보다도 높던 고개는 보릿고개였습니다.
보리가 익어 고개를 숙일 즈음으로 보리 이삭은 덜 여물었고,
없는 살림에 먹을 것이 없어 나물이나 나무껍질로 목숨을 연명해야 했던
막바지 굶주림의 시기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네 부모세대만 해도 매년 넘어야 했던 험하디 험한 고개였던 것입니다.
그 보다는 험하고 높지는 않았지만 아련하게 넘기도 했던 보릿고개가 있었습니다.
하지를 지나도록 해는 길어져가고 몰래 소댕을 열어보아도 살강문을 여닫아 보아도
군둥내나 나던 짠기가 우러나도록 우물가 자배기에 담가져 있던 짠지뿐이었습니다.
산으로 들로 아까시꽃을 따고 감꽃을 줍고, 찔레순을 꺾고 삘기를 뽑아내고 장다리순을 꺾고
싱아를 꺾고 칡의 새순까지도, 마늘쫑을 뽑고 개울의 돌을 뒤집어 꽁댕이에 알슨
가재를 건져올리기도 개구리를 잡아내기도 하였었습니다.
이제 송화다식의 솔향기와 달콤한 맛도 아련해지고 얼마간 넘어다녔던 보릿고개의 허기도
옛날이야기처럼 아득해진 좋은 세상을 사는가 싶기도 합니다.
숲을 지나면서 작은 소나무를 흔들어 송홧가루를 날렸을 때,
산골 외딴집에 산지기를 아비로 두었다던 그 소녀를 연민처럼 그려보기도 했습니다.
문설주에 기대어 꾀꼬리 노랫소리를 엿듣던 소녀의 외로움과 허기로도 그 시절의 윤사월을 표현할 수 있었을텐데,
꽃향기로 차고 넘치는 이 호사스런 아침나절이었더라도
그 가련한 소녀의 눈까지 멀게 했던 시인이 얼마간 야속도 하였더랍니다.

첫댓글 어린시절 눈만 뜨면 뒷산으로 달려가 소나무에 매달려 송홧가루가 날리기 전의 그것(이름을 몰라서)을 따 먹곤했지요. 그리운 추억입니다. 위 사진 많이 낯익은 풍경이네요.
우물가 자배기에 담긴 짠지, 꽁댕이에 알슨 가재...잊혀진 우리 말이 송화가루 날리듯....
그렇게 힘든 세월에도 들녘에서의 아름다운 놀이는 있었지요. 먹을거리를 찾아 헤매는................
요즘 송화가루가 무지하게 날립니다. 산에도 자동차 지붕에도 온통 노란가루가 풀풀 날립니다. 아토피있는 내 새깽이가 걱정됩니다.
피난길에서 돌아온 그해 봄, 엄니와 함께 산기슭을 오르내리며 송화가루 모아오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가난했던 날의 추억이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