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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9월 17일에 강호동양학자 '조용헌' 박사와 함께 구례 작업실 입구에서 <자본주의 적>을 들고 찍은 정지아 작가님 -
“우리 아버지를 알아요?”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아는데요?”
흔하디흔한 삼선 슬리퍼를 시멘트 바닥에 문지르며 아이가 머뭇거렸다.
“…… 담배 친군디요.”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여든 넘은 아버지의 담배 친구라니.
기분이 상했는지 아이가 눈만 치켜뜬 채 나를 노려보았다.
“어쩌다가……”
눈꼬리는 사나워도 넙죽넙죽 말은 잘 받았다.
“교복 입고 담배 피우다가 할배헌테 들케가꼬 꿀밤을 맞았그마요. 양심 좀 챙기라대요.
최소한 교복은 벗고 피우는 것이 양심이라고……”
“그래서? 담부터는 양심 챙겼어요?”
“아니요. 학교를 때려쳤는디요?”
학교를 때려친 아이와 아버지는 같이 담배를 피우면서 친구가 된 것이다.
“우리 아버지랑 친했나보다.”
아이가 콜라를 마시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할배가 그랬어라. 엄마 나라는 전세계에서 미국을 이긴 유일한 나라라고. 긍게 자랑스러워해야 한다고.
애들은 천날만날 놀리기만 했는디……”
엄마가 베트남 출신인 모양이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미제국주의 운운, 아버지다웠다.
머리를 샛노랗게 물들이고 담배를 피우고 고등학교를 중퇴한 아이가 겪어왔을 세월을 나는 당연히 알지 못한다.
아버지는 알았을 테고 아버지 방식대로 위로했을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 게 아버지식의 위로였다.
그 위로가 때로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잘 먹혔다.139-141
스무명 남짓한 빨치산들이 한명씩 돌아가며 추도사를 하는데,
한평생 묵혀놓은 말이 넘쳐나는 노인네들이라 좀처럼 말이 멈추지 않았다.
조문객들이 들어오려다 뭔가 이상하다 싶은지 머뭇머뭇 발길을 돌렸다.
나는 그 사람들을 맞으러 접객실로 나갔다.
조문실을 가득 메운 늙은 혁명전사들 주변으로 이상한 결계 같은 게 드리운 듯 했다.
내가 조문객이었다 해도 쉽사리 발을 디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접객실까지 흘러나오는 결의에 찬 그들의 말투도, 통일을 목전에 둔 듯한 흥분도, 나는 불편했다.
내 아버지도 그랬다. 분단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세상이 되었다는 데,
젊은 세대가 민족의 통일을 지상 최대의 과제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 아버지는 분개했다.
“아버지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게 현실인 걸 어쩌겠어요? 있는 현실을 아니라고 우길 셈이신가? 사회주의자께서?”
나는 주로 비아냥거렸고, 아버지는 분노에 찬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며 입을 다물었다.
입을 다문 건 현실주의자인 아버지도 알기는 한다는 의미였다.
아버지는 자신의 신념을 후회하지 않았지만 사람인데 설마 괴물처럼 확장하는 자본주의의 기세 앞에
절망이든 회한이든 어떠한 서글픈 감정을 잠시나마 느끼기는 했을 터였다.
목숨을 건 자신들의 투쟁이 무의미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나는 물어보지도 않았다. 물어보지 않은 건 짐작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에도 목숨을 걸어본 적이 없는 나는 아버지가 몇 마디 말로 정의해준다 한들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옳았든 틀렸든 아버지는 목숨을 걸고 무언가를 지키려 했다.
나는 불편한 모든 현실에서 몇 발짝 물러나 노상 투덜댔을 뿐이다.
그런 내가 아버지를 비아냥거릴 자격이나 있었던 것인가.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미안했다.
들어오는 순간부터 나를 불편하게 한 아버지의 동지들에게도 이 불편해하는 마음이 미안했다.
이 순간에도 아버지의 동지들은 목청 높여 아버지와의 인연을, 조국통일에의 열정을 쏟아내고 있었다.
동지들의 장례식에 갈 때마다 참석한 동지들이 한둘씩 줄고,
십년쯤 지나면 누군가의 부고가 들린다 해도 갈 수 없는 몸이 될 사람들이었다.147-148
마침내 추모제가 끝났다. 이름만 들어본 적 있는 한 노인이 나를 불렀다. 노인의 눈빛은 젊은 나보다 더 형형했다.
“원래 우리 동지들이 가면 통일애국장으로 치르오. 그런데 고 동지는……알겠지만 자수를 한 터라……”
아버지는 1952년 위장 자수를 했다. 위장 자수이므로 당연히 최상급자인 전남도당 김선우 위원장만 그 사실을 알았다.
이대로 가면 빨치산은 전멸한다는 게, 그러기 전에 어떻게든 세상으로 내려가
조직을 재건해야 한다는 게 아버지의 정세판단이었다.
아버지는 조직 재건을 하다 걸려 무기형을 선고받았을 때도 같은 판단으로 어떻게든 세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전향을 했다.
그 판단이 옳았는지 글렀는지 나는 별로 관심이 없다. 판단할 주제가 아니기도 하다.
다만 나는 살아남은 얼마 안 되는 빨치산들이 전향의 여부를 따지고,
위장 자수의 진위를 가리며 편을 나누고 뒷담화를 하는 게 기껍지 않았다.148-149
그이가 밥숟가락을 놓고 멀뚱멀뚱 허공을 바라보면서 나지막이 웅얼거렸다.
“노동이…… 노동이…… 힘들어.”
그때까지 위태위태 잘 참고 있던 나는 노동이 힘들다는 빨치산의 고백에 그만 풉, 웃음을 뿜고 말았다.
스스로도 염치가 없었는지 그가 비식 웃으며 덧붙였다.
“사흘 노가다 뛰고 석달 입원했네. 나는 암만해도 노동과 친해지질 않아.”
“저놈의 부르주아 근성은 머리가 희캐져도 뿌리가 안 뽑히그마이. 그런 놈이 멀라고 뽈갱이는 돼가꼬……”150
“자네가 북에 가면 멋을 하겄능가. 가난한 인민들 밥이나 축내겄제. 즈그 묵고 살 것도 읎는디……
글지 말고 여개서 자네 잘허는 공부함시로 통일운동에 일조하먼 될 것 아닌가!”
그는 동경제대 법학과를 나온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다.
“다 늙은 우리가 무슨 통일운동을 하겠는가?”
“우리가 살아온 세월을 시상에 알리는 것도 통일운동이요, 젊은이들 지대로 크게 쓴소리허는 것도 통일운동이여!
달리 멋이 통일운동이당가?”
부르주아 빨치산이 얕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제 좀 대접받고 편안히 살고 싶네. 나는 자네처럼은 못 살겠어.”
부르주아 운운이 나올 법도 하건만 아버지는 더는 뭐라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나와 어머니가 아니라면 아버지도 북을 선택했을까?
거기서는 목숨 걸었던 자신들의 청춘을 인정받으며 살 수 있을까?151-152
그는 아버지를 믿어야 한다며 내 손을 힘주어 잡았다.
설령 자수를 했다 하더라도 나는 아버지든 누구든 비난할 생각이 없었다.
살기 위해 자수한 것이 무슨 죄가 된단 말인가. 그러나 그이 생각은 달랐다.
전향을 하고 안 하고, 자수를 하고 안 하고가 한 사람의 생 전체를 판단할 좌표와 같은 모양이었다.153
북한으로 떠나는 그가 반드시 위장 자수의 진실을 알려줘야 했듯−그것도 행여 누가 들을세라 아무도 없는 집 안에서−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한 이들에게도 아버지의 자수는 심각한 문제였다.
그건 고결한 혁명가로서 있을 수 없는 변절이고,
전향서 한 장 때문에 몇십년씩 감옥살이를 했던 자신들과는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는 중차대한 타락인 모양이었다.
나는 그들과 생각이 같지 않았으므로 대답하지 않았다.
노인이 나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거기에는 ‘통일애국인사 고상욱 추모제’라고 적혀 있었다.
아버지는 그들의 동지가 아니라 인사, 그러니까 함께 통일애국운동을 하기는 했던 어떤 사람에 불과한 것이었다.154
아이고, 동지들! 학수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어르신들을 향해 걸어갔다. 뒷모습이 듬직했다.
저런 아들을 두었다면 아버지 가는 마음이 조금은 더 편했을까?
어린 시절, 큰고모부는 내가 옆에 있는데도 어디 가서 아들을 하나 낳아 오라며 자주 아버지를 들볶았다.
한 귀로 흘려듣던 아버지는 짜증이 난다 싶으면 나를 번쩍 들어 무등을 태웠다.
“나는 요놈만 있으면 돼라. 아들 필요 읎당게 징허게 말도 많소이. 아리야, 니가 아들 노릇꺼정 다 헐 거제이?”
초등학교 삼학년이었지만 말귀 밝았던 나는 그 참에 얄미운 고모부 약 올리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하모, 기동이는 이번에 삼십등 했는디?”
기동이는 큰고모네 막둥이이자 유일한 아들로 나와 같은 반이었다.
“우리 아리는?”
“일등!”
“아들보담 낫구만.”
아버지가 소리 내어 웃으며 마당을 빙 둘러 내달렸다. 새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뭐가 그리 좋았는지 나는 아버지의 목 위에서 등허리가 흠뻑 젖도록 웃어젖혔다.
우물가에 핀 달큰한 치자꽃 향기에 숨이 막혔다.
아무 걱정 없이 행복했던 그런 날도 있었다. 이듬해 아버지는 감옥에 끌려갔고, 나는 아버지를 잃었다.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더 불행했다. 광주교도소에 있다는 걸 알았지만 만날 수 없는 아버지는 없는 것과 같았다.
몸 약한 어머니를 대신해 온몸으로 놀아주던 아버지를 잃고 나는 세상 전부를 잃은 느낌이었다.
그때 잃은 아버지를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도 되찾지 못한 게 아닐까?
아버지를 영원히 잃은 지금, 어쩐지 뭔가가 억울하기도 한 것 같았다.(157-159)
화환을 보낸 국회의원과는 어떤 관계인가, 정교수인가 강사인가, 이 많은 조문객이 다 네 손님인가,
취조와 다를 바 없는 노빨치산들의 질문 공세를 받느라 나는 식은땀을 흘리는 중이었다.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고 목숨을 건 그들 역시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출세한 사람들과의 관계가 중요하고,
나의 출세 역시 중요한 관심사인 것이다. 나는 조소 또한 식은 땀과 함께 흘려보냈다.
아버지도 그랬다. 내가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 시답잖은 학술서 한권을 출판했을 때,
아버지는 내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사논문과 책을 스무권이나 보내달라 했을 뿐이다.
아무도 읽지 않을 그 책을 동네방네 돌리고 거하게 술턱까지 냈다는 것을, 뒤에야 어머니에게 들었다.
사회주의자라면 농민 자식, 노동자 자식을 자랑 삼아야 되는 것 아닌가,
박사라고 좋아하기는, 이러니 사회주의가 망했지,
뭐 그런 정도의 생각을 하면서 나는 기개가 조금도 꺽이지 않은 혁명가처럼
지리산을 바라보며 담배를 태우는 아버지를 내심 비아냥거렸다.159-160
“누군데?”
“이, 느그 아부지 첫 번째 마누래 동생이여. 니는 본 적 없냐?”
우리 집 족보는 이런 식이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재혼을 했다.
그 무렵 대부분이 그랬듯 둘 다 초혼은 중매결혼이었다.
당시 마음에 둔 여자가 있던 아버지는 어른들끼리 잡은 결혼식 날, 집안 어른들에게 끌려가 영문도 모른 채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이 다 끝나기도 전에 도망친 아버지는 다시는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여자는 아버지가 입산을 하고 감옥에 가 있는 동안에도 홀로 기다렸다. 아버지는 면회조차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도 여자는 매주 찾아왔고,
마침내 면회를 허락한 아버지는 창살 너머 여자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동안 냉정하게 말했다.
“이녁이나 나나 봉건제도의 희생양이었을 뿐이오. 그러니 나 같은 건 잊어불고 좋은 사람과 새출발하시오.”
그게 두 사람의 끝이었다.161
그때 그 여자의 동생이, 그러니까 한때는 아버지의 처제였던 양반이,
자기 언니를 불행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형부의 현재 마누라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형부의 장례식에까지 찾아온 것이다.
어머니는 누구보다 반갑게 아버지의 옛 처제를 맞았다. 허리 때문에 다른 사람과는 나누지 않았던 맞절도 했다.
두 여자는 한동안 손을 맞잡은 채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말없이 나누고 있는 마음이 어떤 것일지 나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고맙소이.”
한참만에야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이리 가실 줄은 참말 몰랐그만이라. 메칠 전에 딸내미가 하는 슈퍼에서 뵀을 적에만 혀도 쌩쌩하셨는디요이.”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오거리슈퍼였다.
그보다 멀 게 분명한, 옛 처제의 딸이 운영하는 슈퍼를 아버지는 일부러 찾아서 갔을 것이다.
구례라는 곳은 어쩌면 저런 기이하고 오랜 인연들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엮인 작은 감옥일지도 모른다.163
공교롭게도 아버지의 옛 처제가 막 나간 문으로 이번에는 어머니의 옛 시동생이 아내는 물론 아이들 셋을 데리고 나타났다.
속 모르는 사람이 보고 개판이라고 욕을 해도 할 말이 없을 집안사였다.
어머니의 옛 시동생을 나는 어릴 때부터 만났다. 어머니의 전남편은 남부군 소속으로 낙동강 전선에서 연락이 끊겼다.
십중팔구 도강을 하다 죽었을 것이다.
감옥에서 나온 뒤, 방물장사로 시어머니와 시동생을 부양하던 어머니는 내 아버지를 만났고,
전남편 가족들의 동의를 얻은 뒤 아버지와 혼인신고를 했다.
결혼하고도 어머니는 간혹 전 시어머니와 시동생들을 찾아가 만났다.
군인이었다는 큰삼촌은 무뚝뚝해서 좀처럼 입을 여는 법이 없었지만 지갑은 잘도 열었다.
만날 때마다 어머니 용돈은 물론 내 용돈까지 두둑이 챙겨줘서 어떤 관계인지도 모른 채 나는 삼촌을 잘 따랐다.165-166
어머니의 옛 시동생 가족들이 아버지의 영정을 향해 절을 올리는 모습을 나는 어쩐지 처연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저들에게 내 아버지는 평생 함께할 줄 알았던 형수를 빼앗아간 사람만은 아닐 터였다.
형의 친구이고 동지였으며, 운명이 조금만 달랐다면 형과 친구의 처지가 뒤바뀔 수도 있었다.
어쩌면 이건 어디에나 있을 우리네 아픈 현대사의 비극적 한 장면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대단한 것도, 그렇다고 이상한 것도 아니다.
그저 현대사의 비극이 어떤 지점을 비틀어, 뒤엉킨 사람들의 인연이 총출동한 흔하디흔한 자리일 뿐이다.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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