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羅 景德王 때의 대표적인 儒學者이자 문장가이다. 字는 聰智, 號는 氷月堂이며, 慶州 薛氏의 시조이다. 元曉大師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瑤石公主이다. 新羅 10賢의 한 사람으로, 强首, 崔致遠과 함께 新羅 三大 文章家로 꼽힌다. 벼슬은 翰林을 지냈는데 주로 왕의 자문 역할을 하였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經史에 능통하였다. 처음에는 沙門(승려)이 되어 불서를 탐독하였으나, 나중에 환속하여 小性居士라 칭하며 유학에 힘썼다. 당시는 文武王이 삼국을 통일한 후 문화가 꽃피기 시작한 시기였다. 神文王 때 國學이 설립되고 五經으로 國子(세습 시대에 있어서 다음에 정치를 맡아서 해나갈 공경· 대부들의 아들)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설총은 일찍이 이 국학에 들어갔다. 746년(景德王5년)에는 박사로서 强首와 함께 九經을 처음으로 우리나라 방언으로 강론하여 학생들을 가르침으로써 儒學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중국 文字에 吐를 다는 방법을 창제하여 당시 신라의 중국 학문 섭취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와 행정·문화 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吏頭를 창제했다고 하나 그의 생존전인 眞平王때의 薯童謠 善德女王때의 風謠 北漢山 진흥왕순수비문 등에 이두(吏讀) 표기가 나타나는 점으로 미루어 그가 창제한 것이 아니라 집대성한 것으로 보인다.
「三國史記」에 문장에도 능해 그가 쓴 碑銘도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알아볼 수 없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花王戒(화왕계)」가 있다. 이는 왕의 비행을 경계하고 자성을 촉구하는 글이다. 문체는 漢賦나 六朝의 駢文, 그리고 『莊子』·『列子』의 寓言 등을 본떴으며, 문장으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는 孟子와 馮唐을 예로 들어, 임금이 군자를 멀리하고 소인을 가까이하면 재능 있는 신하가 뜻을 펴지 못하고 독선에 그친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문장가이면서 동시에 義理를 숭상하고 德治를 강조하는 정치가적 면모를 보였으며, 유교가 동방(신라)에 널리 퍼지고 정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사후 고려 顯宗 13년(1022)에 弘儒侯에 追封되었으며, 文廟에 配享 되었다. 또한 慶州 西岳書院에도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