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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으로 피하다
마 2:13-23
13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19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20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21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
22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23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마 2:13-23 / [아기 예수, 애굽으로 피난] 박사들이 돌아간 후에 ㄷ) 하나님의 천사가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헤롯왕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고 한다. 어서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해서 내가 돌아오라고 할 때까지 거기 있으라.' (ㄱ. 헬라어 원문은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또는 `박사들에게 조롱당한 것을 알고') 14) 그 밤으로 요셉은 마리아와 아기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났다. 15) 그는 헤롯왕이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이는 하나님께서 ㄹ) `내가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다' 라고 하신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ㄹ. 렘31:15) 16) [헤롯이 아기들을 죽이다] 헤롯은 ㅁ) 박사들이 자기 말을 듣지 않고 가버린 것을 알자 몹시 화가 나서 펄펄 뛰었다. 그래서 그는 군인들을 베들레헴과 그 인근 마을로 보내어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하나도 남기지 말고 다 죽이도록 하였다. 그가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알아본 뒤로 2년쯤 되었기 때문이었다. (ㅁ. 또는 `라마 지방') 17) 헤롯의 이 잔인한 행동으로 다음과 같은 예레미야의 예언이 이루어졌다. 18) `비명이 라마에서 들려 왔다. 울며 통곡하는 소리다. 라헬이 죽은 자식들 때문에 울부짖는구나. 아무리 위로하여도 소용없구나.' 19) [아기 예수, 애굽에서 돌아오시다] 헤롯이 죽자 하나님의 천사가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20)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 아기를 죽이려고 하던 자들이 죽었다.' 21) 요셉은 아기 예수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곧 이스라엘을 향해 떠났다. 22) 그는 돌아오는 길에 아켈라오가 아버지 헤롯의 뒤를 이어 유대의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기가 두려워졌다. 그러나 꿈에 다시 지시를 받고 갈릴리 지방으로 피하여 23) 나사렛이라는 동네에 가서 살았다. 이렇게 해서 `그는 나사렛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라는 예언자들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동방박사들은 헤롯을 만나지 않고 다른 길로 고국으로 갔습니다. 또한 예수의 가족은 애굽으로 피신했으며, 헤롯이 죽은 후에 다시 돌아와서 나사렛에 살았습니다.
애굽으로 피하여 거기 있으라(13-15) 동방박사들이 고국으로 돌아간 후 천사는 요셉에게 헤롯이 아기를 찾아서 죽이려 하니 가족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하라고 했습니다. 이에 요셉은 가족을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당하신 첫 번째 박해였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가정에 시험이 올 때 애굽으로 내려가라고 했고, 요셉은 말씀에 즉시 순종하여 밤에 일어나 가족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습니다. 요셉은 시험이 왔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즉시 순종했습니다. 요셉의 가족이 애굽으로 피난한 것은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낼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을 이루게 하여 아기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확실하게 아는 증표가 되게 하고자 하심이었습니다(호 11:1).
사내아이를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16-18) 동방박사들은 꿈에 나타난 주님의 말씀대로 헤롯에게로 가지 않고 다른 길로 고국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가족은 애굽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헤롯은 동방박사들이 자기에게로 오지 않자 자기가 속은 줄을 알고서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하여서 베들레헴과 그 주변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그 결과, 예레미야 선지자가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라고 예언한 대로 이루어졌습니다(렘 31:15).
일어나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19-23) 요셉은 마리아를 데려올 때, 애굽으로 피난 갈 때, 애굽에서 귀환할 때도 주의 말씀대로 모두 순종했습니다. 요셉은 죽은 헤롯의 아들인 아켈라오가 유대의 왕이 되었기에 두려워하여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헤롯의 다른 아들 안티파스가 다스리는 갈릴리 나사렛으로 갔습니다. 이것 또한 예수께서 나사렛 사람이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라는 예언에 대한 성취였습니다.
적용: 요셉은 가족이 위험할 때 애굽으로 피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기게 하시거나 피할 길을 주십니다. 이런 경험을 서로 나누어 봅시다.
예배드리는 자는 진리를 따라 오로지 그 길로만 가는 순례자입니다. 그들의 여정에 성령이 함께하십니다. 우리는 순종과 온순함으로 따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각종 유혹으로 길을 막거나 각종 이유를 대며 따르지 않는 자는 성령을 거스르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유가 없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 순종함에 있어서는 어떤 이유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 설 교 >
성탄절에 들리는 소리
마 2:13~18 / 양은익 목사
성탄절 아침입니다. 성탄의 큰 기쁨과 평화가 우리 교회와 이 땅 위에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의 기쁨은 들뜬 기쁨이나, 철없는 기쁨은 아닐 것입니다. 성탄의 기쁨이 들뜬 기쁨이 아니라면 그 기쁨은 캄캄한 밤에 길을 잃고 헤맬 때 길을 인도하는 하나의 밝은 빛과 같은 그런 빛남의 기쁨일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신앙의 근본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가 왜 이 땅에 오셨는가? 도대체 무슨 권세를 누리시려고 이 땅에 오셨는가? 한순간도 편할 수 없는 이 땅에 왜 오셨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오늘 이 질문에 답을 하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전해 듣는 마태가 전하는 예수께서 오신 삶의 풍경이 하도 기가 막혀서 드리는 얘기입니다. 예수는 Kingdom of God,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이시고, the Son of God,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건데 분위기를 보면 밝지 않습니다.
경배하러 찾아온 박사들에게도, 또 천사의 소리를 들은 목자들에게도, 육신의 부모에게도 기뻤다는 기사는 전혀 없습니다. 세상의 빛으로 오셨건만 짙은 어둠으로 꽉 찬 배경이 있을 뿐입니다. 웃음과 환호 대신에 통곡 소리면 들린다고 오늘 읽은 말씀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이 그리도 슬피 통곡하면서 울고 있습니까! 칼에 맞아 죽어가는 아이들이 울고 있고, 그 죽어가는 아이를 붙들고 절규하는 어미들이 울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이웃들의 숨죽인 슬픔과 놀람이 가득합니다. 세상 울음 중 가장 아픈 울음이 죽은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우는 어미들의 울음일 것입니다. 이 울음은 너무나 구슬프고 애통한 울음인데 이런 울음이 사방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구주가 탄생하신 날, 슬픔과 울음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이 슬픈 모습은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성탄 캐럴 중 이 슬픈 장면을 기억하고 부른 노래가 드뭅니다. 오늘 나누어 드린 코벤트리 캐럴(Coventry Carol)이 죽은 아이를 품에 안고 불렀던 성탄의 노래입니다. 외국에서는 이 캐럴을 상당히 장엄하게 부릅니다. 이 노래의 선율 속에 성탄의 깊은 뜻이 있는 것 같아 소개해 드립니다. 죽어 있는 아이를 보내기 싫어 살아 있는 것처럼 품에 안고 부르는 어미들의 노래입니다. Kiri Te Kanawa 가 부른 노래로 들어 보겠습니다.
[Coventry Carol]
Lully, lullay. Thou liitle tiny Child. 자장, 자장. 내 작고 귀여운 아기
Bye,bye, lully, lullay lullay. 바이, 바이, 자장, 자장, 자장.
Thou little tiny Child. 내 작고 귀여운 아기
Bye, bye. Lully, lullay. 바이, 바이, 자장, 자장.
O sisters too, how may we do. 오 자매들 또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For to preserve this day 이날을 지키려면
This poor youngling for whom we do sing. 이 가엾은 어린 것들을 위해 우리는 노래하네
Bye, bye, lully, lullay. 바이, 바이, 자장, 자장.
Herod, the king, in his raging, 격노한 헤롯 왕은
Charged he hath this day 그로 인해 이루어질 이 날의 예언대로
His men of might, in his own sight, 힘세고 추종하는 자들에게
All young children to slay. 모든 어린아이들을 죽이라 했네.
That woe is me, poor Child for Thee! 비통하도다, 가엾은 아이들
And ever mourn and say, 슬퍼하지도 말하지도 마라.
For thy parting neither say nor sing, 작별을 고하지도 노래하지도 마라.
Bye, bye, lully, lullay. 바이, 바이, 자장, 자장.
어머니들은 눈물이 좀 나셔야 하는데… 이날 베들레헴에서 죽은 아이가 20명 정도이고 인근 지역까지 합하면 30명 정도의 아기들이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숫자가 작아서 실망했습니까? 아닙니다. 너무 작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아이 한 명은 그 어미에게는 전 우주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봐야 하는 것은 숫자가 아닙니다. 봐야 할 것은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삶의 정황, 삶의 현실입니다. 도대체 이 꼴이 무엇입니까? 세상은 왜 이런 것입니까? 힘 있는 자, 헤롯입니다. 잔인한 사람입니다. 자기 아들과 아내도 죽였던 사람입니다. 죽이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사람입니다. 이 힘 있는 자가 자신의 권력이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싹부터 자르겠다고 아이들을 살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성경의 메시지는 바로 이런 세상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세상의 현실은 바뀐 것이 없습니다. 여전히 세상에는 헤롯 같은 무자비한 자들이 있습니다. 그 휘두르는 칼에 맞아 죽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눈물 마를 날이 없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은 그렇게 긴박하게 돌아갑니다. 죽이는 자와 죽는 자 사이의 긴장을 성경은 미화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일차적인 메시지는 세상에는 아픔이 있다는 것, 그것이 만만치 않다는 것, 세상은 불의하다는 것, 자신에게 불리하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세상을 봐야만 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교회와 신앙인들이 성탄을 기뻐하면서도 경거망동하지 말고, 과시하지 말고, 영광과 욕망에 취하지 말고 진중하고 긴장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런 현실 위에 교회와 성도들이 서 있다는 것을 모르게 되면 지금과 같은 수모를 계속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이런 세상의 불의와 아픔에 저항해야 하고, 눈물 가득한 채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눈물을 씻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싸움을 싸우지 않으면 예수그리스도가 왜 이 땅에 오셨는지 그 뜻을 모두 다 놓치게 됩니다. 기독교는 이런 세상에 저항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10:34) 검을 줄 테니 싸우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산속에 들어가 조용히 자신의 안락을 위해 수행하는 고요한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싸움입니다. 싸우지 않는 기독교는 없습니다. 세상이 이러한데, 어떻게 싸우지 않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생은 늘 싸움이었습니다. 싸우다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성탄은 이러한 기독교의 긴박한 시작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 학살에서 살아남습니다. 어떻게 살아남습니까? 헤롯이 죽이려 한다는 정보를 전달받고 애굽으로 피난 가게 됩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나가지 않았다면 그 죽어간 아기들은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기 예수의 도피로 인해서 결과적으로는 무고한 아이들이 죽게 된 것입니다. 이 또한 얼마나 비통한 일입니까! 예수님은 자신으로 인해서 일어난 이런 비극적인 일을 나중에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 비장하게 자신의 길을 가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는 말씀을 오늘 본문의 배경에서 읽게 되면 새롭게 다가오게 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주님의 비장함을 보게 됩니다. 무고한 아기들의 피 값으로 자신이 살아난 것을 아셨기에, 이제는 자신의 피 값으로 자신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성탄절은 이러한 예수님의 삶을 새롭게 보고 도전받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진입하시는 날부터 세상의 지독한 현실과 싸우셨고, 아프셨지만 결국은 이기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부활하셨습니다. 이보다 위대한 사건이 어디에 있습니까!
위대한 일을 믿는다면 우리도 위대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악과 싸워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어떤 일로 힘들어하고 있고, 어떤 일로 눈물을 짓고 있습니까? 지지 말고 예수님처럼 이겨 냅시다. 성탄절 아침에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거기 있으라
마 2:13-15 / 유경호 목사
● 광야학교에 대한 두 가지 질문
하나님의 천사 가브리엘이 먼저 마리아에게, 그리고 요셉에게 각각 나타나 마리아가 성령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게 될 것이라고 했을 때, 마리아와 요셉은 믿음으로 그 상황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렇듯 믿음은 분명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입니다. 하지만, 마리아와 요셉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현실을 수용할 당시 그들은 자신들의 삶이 향후 그토록 힘들게 전개될 것이라곤 미처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겁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 할 정도의 화려하고 잘 갖춰진 그런 집에서 천사들의 영광스런 나팔소리와 함께 아기를 출산하게 될 것이며, 육아와 자녀교육에 관련해서는 최고와 최상의 것을 제공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분명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소명’을 가지고 걸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은 더더욱 힘들고 어려워져 갔습니다. 만삭의 몸으로 강행해야 했던 긴 여행, 머물 방이 없어 짐승의 우릿간에서 맞이해야 했던 출산, 그리고 오늘 말씀 속에서 등장하는 출산 직후에 이스라엘을 떠나 이집트로 향해야 했던 망명생활 등 자신들이 가는 이 길이 정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길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그 길은 험난한 가시밭길이었습니다.
적어도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을 낳은 이 대견한 처녀와 그의 가련한 남편을 조금이라도 생각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산후조리라도 제대로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실 만도 하셨건만, 하나님께서는 단호하게 “일어나 이집트로 떠나라! 다시 지시할 때까지 거기 있으라!”라고 말씀하실 뿐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길인데도 불구하고 왜 어렵고 힘들며, 심지어 고통스럽기까지 합니까?
둘째, 험난한 그 길을 걸으면서도 마리아와 요셉은 어떻게 그 길을 끝까지 순종할 수 있었습니까?
● 광야학교를 거친 사람들
먼저, 첫 번째 질문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길인데도 불구하고 왜 어렵고 힘들며, 심지어 고통스럽기까지 합니까?”에 대한 고찰입니다.
1. 다윗에게 듣는 답변
하나님의 언약 동반자로 선택되었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아들이기엔 너무나도 산만하고 나약했습니다. 물론 수메르, 이집트,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제국의 문명에 이르기까지 그 제국들의 문명과 부와 아름다움에 이스라엘이 흡수되지 않았다는 것이 불가사의하고 기특한 일 중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멍에를 지고 사는 공동체가 되기에는 영적 중심이 견고하지 못해서 주변 세계의 문화적 정치 종교적 힘에 의해 쉽게 지배당하곤 했습니다. 특별히 사사들이 통치하던 200여년 동안은 이스라엘의 공동체의 취약성, 종교적 패역, 그리고 사회적 무질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시기였습니다.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이 활동하던 BC 1000년경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민족들, 주변의 성공적인 민족들, 세계 정상급의 민족들과 같아지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민족들이 가지고 있는 왕정체제로 자신들도 전환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로 기름부음 받아 세워진 왕이 ‘사울왕’이었습니다. 하지만, 준비없이 왕이 되었던 사울왕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누리고, 사수하고자 하는 동안에 어느덧 하나님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행동하는 왕이 되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갈망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 의해 드리워진 어두운 밤의 두꺼운 커튼을 걷고 하나님 나라의 새아침을 열게 할 한 사람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왕으로 준비케 하셨습니다. 그가 바로 다윗입니다.
십대 나이에 차기 왕으로 지목된 다윗은 그 이후 골리앗과의 싸움에서의 승리를 정점으로 하여 계속 인생의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거느리던 군대에 쫓겨 다니며 광야의 바위틈에서, 동굴 속에서 기거하며 오랜 시간을 도망자의 삶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 기간 동안 참 많이도 넘어지고, 쓰러지고 힘들었습니다. 비굴하게 미친 사람흉내를 내어 목숨을 건졌던 적도 있습니다. 자존심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사는 것조차 버거울 뿐이었습니다. 얼마나 이해되지 않는 자신의 삶이었을까요? 분명 이스라엘의 차기 왕이라고 기름부음을 받았었는데, 왕은 고사하고 목숨도 겨우 연명하고 다니는 상태였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시편 37편 23절-24절을 한번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기쁘게 생각하시는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도 넘어진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는 다윗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길이라고 해서 붉은 융단 카펫이 깔린 그런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착각이라는 것을 그의 경험으로 통해 깨달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넘어지고 쓰러졌던 긴 광야생활이 다윗에게 있어 무슨 유익을 갖다 주었습니까? 진 에드워드의 말을 빌리면, 다윗과 사울은 전혀 다른 별개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다윗은 사울이 가지고 있던 특징을 똑같이 가지고 있던 사람, 또 다른 사울이었습니다. 그러나 쫓겨 다니는 광야학교를 통해 다윗은 자신의 속에 내재하고 있던 사울의 독소를 제거하기에 이르렀던 겁니다. 그래서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이라는 준비된 왕으로서 설 수 있었던 겁니다.
2. 요셉에게 듣는 답변
어찌 이런 경우가 다윗 하나뿐이겠습니까?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되었던 요셉은 어떻습니까? 요셉은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이 자신의 별에게 절하는 꿈과 모든 볏단들이 자신의 볏단에 절하는 꿈을 꾼 뒤부터 삶이 꼬여가기 시작했습니다. 17살 나이에 형제들의 미움에 의해 이집트 파라오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함을 받아 감옥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함을 분명 받은 사람이었지만, 요셉 또한 또 다른 광야학교를 13년 동안이나 거쳐야 했습니다. 얼마나 삶이 고달팠던지 요셉은 30살에 총리가 된 후 그의 형제들이 자신에게 나아와 절을 하기 전까지 17살 이전에 그가 꾸었던 그 꿈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정도로 그의 삶은 그 꿈과는 거리가 먼 고달픈 삶이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달픈 삶이 끝나고 총리가 된 요셉은 자신이 13년 동안 노예살이와 감옥살이를 하게 된 이유를 비로소 깨닫고 형제들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곳에 팔아 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창45:5)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고달픈 노예생활 속에 거하게 함으로써 집중적인 재무관리의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하셨고, 나아가 억울한 감옥생활을 통해 만난 정치범들과의 만남 속에서 인사관리와 정치훈련을 받을 수 있게 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겁니다. 그 결과 거대한 이집트 제국을 다스리고 관리하는데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준비됨으로써 모든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던 겁니다. 그래서 자신을 팔았던 형들에게 위와 같이 오히려 감사에 가까운 말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3. 엘리사에게 듣는 답변
BC 849-799년 사이에 활동했던 엘리사 선지자는 그의 스승 엘리야에게 부름을 받을 당시 엄청난 부농이었습니다. 열왕기 상 19장 19절에서는 엘리사가 황소 12겨리(24마리)로 동시에 밭을 갈고 있을 정도로 부자였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엘리야 당시 크고 작은 선지자 학교들이 있었는데, 아마 전체 선지자 학교를 통틀어서 살펴보더라도 엘리사만큼 집안 배경이 괜찮은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엘리사가 자신의 소유를 포기하고 엘리야를 따라 다니며 한 일이라곤 그의 스승 엘리야가 손을 씻으려할 때 손에 물을 붇던 정도가 고작이었습니다. 얼마나 자괴감이 들었겠습니까? ‘아니, 내가 누군데! 내가 고작 여기서 이런 무의미한 일이나 하고 있어야 되냐? 내가 이런 일을 하려고 이곳에 왔나?’고 생각 들지 않았겠습니까? 엘리아의 손에 물을 붓는 그 일을 얼마나 오래토록 했으면 엘리야 승천 이후 엘리사가 엘리야의 후계자가 되어 선지자의 직무를 행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엘리사를 일컬어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엘리사’(왕하 3:11)라고 부르고 있었을 정도였지 않습니까!
그러나 엘리사는 그런 말에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되레 훗날 그는 그를 ‘무의미’라는 광야학교에 입학시켜 특권의식에 젖어있던 자신의 짙은 때를 씻겨주심으로써 참된 섬김의 선지자로서 서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 정도의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엘리사 그는 자신의 스승 엘리야보다도 더 많은 기적과 치유의 역사를 일으킨 장본인이었지만, 정작 자신이 죽을병이 걸려 죽게 되었을 때 자신의 병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았는지 아시면서 어떻게 내게 이런 죽을병을 주실 수 있느냐?’며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왕하 13:14 이하). 그는 엘리사의 손에 물을 붓던 그 광야학교의 시간을 통해 자신을 단련시키셨던 하나님께서 모든 임무를 마쳤기에 이제는 오라고 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명령이 ‘죽을 병’을 통해 왔다는 것을 알았기에 마지막 그 죽음의 광야학교 마저도 기쁨으로 입학했던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길임에도 불구하고 왜 어렵고 힘들며, 심지어 고통스럽기까지 합니까?”는 질문에 대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할 수 있는 대답에 가까이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 광야학교의 이유와 원인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 ‘왜?’라는 것을 규명하는 데는 2가지의 분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원인(cause)'이며, 다른 하나는 ’이유(reason)'입니다. 이 ‘원인(cause)’는 다시 2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궁극적 원인(ultimate cause)이며, 다른 하나는 도구적 원인(instrumental cause)입니다. 그리고 이유(reason) 또한 총괄적 이유와 특정적 이유로 구분이 됩니다. 이 분류에 의거해서 예수님의 이집트 망명을 살펴보면, 망명의 궁극적 원인은 하나님의 ‘가서 있으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리고 도구적인 원인은 ‘헤롯왕의 유아학살’이었습니다.
총괄적 이유를 살펴보자면 이집트로의 망명생활을 통해 말씀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상징적인 계시가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 가족의 이집트로의 피신은 분명 역사적 사건입니다만, 동시에 굉장히 상징적인 사건이기도 합니다. 마태는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하도록 우리를 이끌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역사의 요약이자 성취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로 들어간 후에 비로소 민족을 이루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출애굽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가던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의 중심점이었습니다. 파라오는 이집트에 있던 그 백성을 파멸시키려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 이후 1400여년이 지나 영원한 구원사역의 임무를 띠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방해하고자 또 다른 파라오인 헤롯왕이 유아학살을 단행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속박의 땅에서 이끌어 내었듯이, 모세의 승계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로 인한 죽음의 굴레에서 백성들을 이끌어 내실 것이다는 암시를 하나님께서는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나아가 모세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되어 백성들을 구원했듯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찢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해의 다리를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징조를 예수님의 이집트 체류를 통해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싶으셨던 겁니다. 이 역시 예수님에게 있어 “구원”이라는 절대 절명의 길로 가기 위한 하나님의 광야학교였던 겁니다.
그렇다면 특정적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아들인 아기 예수님이 구원자로서의 사역을 위해 이렇게 준비되어 가셔야 했듯이,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로서 마리아와 요셉 역시 이 광야학교를 통해 자라가고, 준비되어 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겁니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님들의 공통적인 고백이 자녀를 키우며 어른이 되어왔다는 겁니다. 품기에 너무나도 버거운 자녀들의 행동으로 인해 부모님들이 성장해 왔다는 겁니다. 학교의 선생님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의 교과과정을 마쳤다고 해서 진실한 선생님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학교’라는 현장과 ‘학생’이라는 가변적 요소와의 만남을 통해 학생을 제자되게 하는 선생님으로 비로소 서게 되는 겁니다. 대부분의 경우 부모로서 처음 자녀를 양육할 때, 교사로서 학생을 가르칠 때 양육의 대상인 아이들은 부모가 담기에, 교사가 가슴으로 품기에 너무나도 버거운 대상들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가슴이 찢어지지 않습니까? 그리고 찢어진 가슴 속에 비로소 ‘내게 너무나도 버거운 아이들’이 품어지게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역시 양육의 과정에서 반드시 거치는 또 다른 광야학교인 셉입니다.
마리아와 요셉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들 또한 하나님의 광야학교에 입학한 부모들이었습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실 아기 예수님을 양육하기엔 너무나도 작은 가슴이었기에 그들을 위한 특별한 광야를 준비하셨던 겁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걸어감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에게 힘든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께서 분명 허락하셔서 옮긴 직장이며, 학교이고, 결혼생활이며, 유럽생활임에도 불구하고 왜 어려움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궁극적인 구원의 계획을 완성하시고자 우리로 하여금 입학하게 하신 당신의 광야학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 넘쳐나는 독소를 제거하기 위해 거치는 ‘해독공장’이기 때문입니다. 멋진 정금으로 만들어가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제련소이기 때문입니다.
● 뻥튀기의 광야학교 체험기
초등학교 시절 뻥튀기 장사를 하는 친구네 집을 보며 느낀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뻥튀기’하면 갑자기 한순간 부풀어 오른 허풍쟁이라며 평가절하 합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순간 ‘와아’하며 부풀어 오르기 위해 뻥튀기가 거쳐야 했던 인내와 인고의 광야학교 시간을 알기 때문입니다. 단단한 쇠로 꽉 막혀진 통 안에서 밑에는 뜨겁게 가열되는 불덩어리, 끝없이 돌아가는 통 안에서의 어지러움, 그리고 점점 높아져 가는 기압 속에서 한없이 짓누르는 압력을 견디며 강냉이는 몸 안에 있는 습기라는 습기는 눈물삼아 다 내 보내며 긴 인고의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단단한 쇠문이 열려지는 그 순간 “다 이루었다”라는 의미의 “뻥~”이라는 소리와 더불어 흘렸던 눈물을 하얀 김으로 승화시키며 세상에 나오는 겁니다. 눌리고 데인 가슴을 쫙 펴고 지르는 그 환호 속에 인고의 시간 동안에 찢어지고 자란 넓은 가슴이 보이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광야학교를 거친 뻥튀기의 진정한 모습이요, 그에 대한 올바른 평가인 겁니다.
수많은 인고의 시간을 그렇게 “뻥~”하고 소리쳤건만, 오늘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뻥튀기에 대해 오해의 시선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뻥튀기는 자신의 길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그길, 바로 그곳에서 그 광야학교를 거쳐야만 새로운 모습으로 변형(transform)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 광야학교의 준비물 "3 P"
둘째, 험난한 그 길을 걸으면서도 마리아와 요셉은 어떻게 그 길을 끝까지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도 이 땅 가운데 수많은 마리아와 요셉들이 하나님의 “거기 있으라”는 명령에 따라 이집트라는 ‘광야학교’로 향합니다. 기대했던 것보다 예상했던 것보다 다르게 펼쳐지는 상황 가운데 쉬 지치고 어려워들 합니다. 그래서 중도에서 포기하는 사람도 쉬잖게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 앞에 놓인 이 광야학교를 우수한 성적이 아니더라도, 우수운 성적으로라도 졸업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거기”라는 광야학교에 입학할 때 필요한 준비물인 “3가지 P”를 준비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첫 번째 P는 열정(Passion)이며, 두 번째 P는 실행(Peak Performance)이며, 세 번째 P는 목적(Purpose)입니다. 이 세 가지 개념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또한 그것이 서로 연결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광야학교를 졸업하기 힘듭니다. 하나님의 “거기”라는 광야학교를 무난히 졸업했던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같이 이 세 가지의 P를 준비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선 열정은 실행으로 나아가는 전제조건이라 할 수 있는데, 열정 없이는 인생의 만만치 않은 여러 장애들을 극복하고 목표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행은 최선의 무엇인가를 이루기까지 그것을 성실히 이행하겠다는 또 다른 열정, 용기, 의지와 직결되므로 열정과 실행은 따로 떨어질 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목적’은 전체적인 동기부여의 동력이자 졸업에 직결되는 하나의 열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목표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이 열정과 실행과 융합되기 위해서는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 바로 그 목적(사명)이 그들의 열정과 실행을 이어질 수 있게 하는 불길이 되었던 까닭에 “거기”라는 광야학교를 무난히 거칠 수 있었습니다.
● 광야학교의 암초 ‘안개’
그런데 우리가 광야학교에서 “3 P"라는 준비물을 갖추고 걸어가더라도 때로 우리로 하여금 졸업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많은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안개’입니다.
플로렌스 채드윅(Florence Chadwick)은 프랑스에서 영국까지 수영으로 횡단한 최초의 여성입니다. 그녀는 1950년에 양국 간의 해협을 횡단했고, 그 다음해에는 영국에서 출발하여 이전과 같은 거리를 횡단했습니다. 그리고 2년 후인 1952년 7월 4일, 채드윅은 카탈리나 섬에서 캘리포니아 서부 해안까지 21마일(33.79km)을 횡단한다는 놀랄 만한 목표에 임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안개가 너무 심했습니다. 차가운 수온도 문제였지만 안개가 너무 자욱해서 상어로부터 그녀를 보호해주기 위해 함께 동행하던 배들조차도 식별하기 어려웠습니다. 15시간을 멈추지 않고 나아가던 채드윅은 마침내 차가운 수온과 피로에 지쳐 자신을 호위하던 배를 불렀습니다. 선상위에 서있던 그녀의 어머니와 트레이너는 목표지점에 거의 다다랐으니 조금만 더 참아보라고 격려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물 밖으로 끌어올려졌습니다. 나중에 채드윅은 자신이 포기한 지점이 목표지점에서 겨우 반마일(800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채드윅을 포기하게 만든 것은 거리도 아니고 차가운 바닷물도 아닌 바로 안개였습니다. 그녀가 안개로 인해 시야를 잃었을 때 그녀는 계속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까지 잃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목표물이 예상치 못한 그 어떤 것에 의해 가려지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 정서적인 변화를 겪게 됩니다. 그러므로 목표물을 항상 시야에 고정시켜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지속적으로 진행 상황을 검토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자신이 세운 목표가 달성될 경우 자신의 삶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를 그려보는 것은 큰 힘을 발휘할 겁니다. 그것은 목표물을 언제나 마음 속 시야에 두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내가 하나님의 분명한 응답 아래 이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쉽지 않은 인생의 여정 가운데 있습니까?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광야학교에 입학하셨다는 사실을. 지금 내가 하나님의 광야학교에 입학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삶 안에 짙은 안개가, 짙은 어두움이 자리 잡고 있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지금 이때야 말로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목표”에 고정해야 하는 때라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우리에게 주신 신실한 하나님의 약속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하십시다. 모든 상황이 변하더라도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그분께 우리의 초점을 맞추십시다. 그러할 때 우리는 ‘불확실성’과 ‘모호성’이라는 안개를 이기고, 하나님께서 우리로 입학케 하신 “거기”라는 광야학교를 멋지게 살아가게 될 겁니다.
오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89주년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1919년 4월 13일 일본제국주의의 서슬 퍼런 칼날과 압제라는 짙은 안개 가운데 우리 신앙의 선배들과 민족을 사랑하는 분들은 ‘작은 소망의 등불’에 의지해 상해임시정부를 수립했습니다. 비록 광복이후 대한민국 정부의 출범의 연속성에 있어 아쉬운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분들이 마련했던 법안과 틀들이 현 대한민국의 헌법의 기초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분들이 명명했던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오늘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존재의 터는 짙은 안개 속에서도 민족과 나라가 나아가야 할 목표에 초점을 잃지 않은 가운데 긴 광야학교를 무사히 보낸 분들의 희생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 속에서도 그분들이 의지했던 것은 구할래야 구할 수 없었던 서치라이트가 아닌, 희망의 작은 등불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자주 우리 인생의 앞길을 환하게 비춰줄 서치라이트(search light)가 있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왜냐하면, 나아가려고 하는 앞길에 놓인 굽은 길을 모두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편안한 여정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우리에게는 더 이상 그 어떤 창조성도, 지략도, 용기도 필요가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광야학교의 유익함을 체득하도록 search light 대신 당신의 약속의 말씀인 조그마한 등불 하나로 우리 앞걸음을 비취게 하셨습니다. 그 약속의 등불 아래에서 우리의 창조성을 발휘하여 환경을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삶을 재해석하며, 용기를 내어 첫 발을 내딛도록 훈련시키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인생의 전 여정을 밝게 비춰 볼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직 첫발을 내디딜 곳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첫발을 과감하게 내딛습니다. 마치 넘쳐나는 요단의 강물 앞에서 “걸어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첫 발을 요단강물에 내딛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믿음의 발을 “거기”내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등불 아래서 우리의 첫발을 내딛을 때 넘실거리는 요단강이 갈라지는 기적과 더불어 요단의 강바닥까지도 밟아 건너는 감격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거기”라는 하나님의 광야학교를 통해 민족을, 열방과 온 세계를 새롭게 하실 예수 그리스도가 자라나는 거룩한 통로요, 환경이 되었던 마리아요, 요셉으로 서게 될 겁니다.
성지를 가다①: 이집트에 부는 모래바람
마 2:13-18 / 김흥규 목사
<카이로에서 취리히까지>
아시다시피 지난 4월 25일부터 5월 7일까지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저희 부부를 비롯한 18분이 순례단을 구성했습니다. 경비가 조금 비싼데다가 일정 역시 조금 긴 듯해서 더 많은 분들이 참여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행을 끝내고 돌아와 보니 돈이나 시간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의미 있고 유익한 여정이었기 때문입니다.
무슬림들이 일생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규율들을 다섯 가지 기둥들(Five Pillars)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Hajj인데 이슬람 성지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를 순례하는 일입니다. 극심한 가난이나 질병 혹은 신체적인 구금 상태에 빠지지 않은 한 누구나 다 반드시 성지순례를 다녀와야만 합니다. 우리 기독교 역시 온 교인들이 일생에 한번쯤은 성지순례를 하는 것이 신앙생활에 보탬이 된다는 확신을 가집니다.
이번 여행은 이집트→요르단→이스라엘→이탈리아→스위스 순으로 일정이 짜였습니다. 갈 때는 몰랐는데 돌아와서 생각하니 기막힌 코스였습니다. 정반대 순으로 여행을 할 수 있었고 제일 먼저 이스라엘부터 들어가서 요르단과 이집트 쪽으로 나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여행사에서 항공편이나 경비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을 고려해서 만든 일정이겠지만 성지순례를 위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코스였습니다. 그것은 유대-기독교의 야성과 순수성이 이집트 광야로부터 시작해서 요르단과 이스라엘을 거쳐 이탈리아 로마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변질되고 오염되어 온 과정을 보여주는 코스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이번 여행에서 최고의 볼거리는 로마에 다 있었습니다. 성당 하나를 짓는 데에도 당대 최고의 건축가와 예술가를 총동원해서 몇 백 년이 걸려서 지었기에 입에서 저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옵니다. 가히 기독교 예술의 결정판이요 최고봉이 다 로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위해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우상화라고 할 정도로 지나치게 현란하게 꾸몄기 때문이지요. 초대 교황이라고 일컬어지는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과 역대 교황들을 지나치게 우상화시켜 놓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칼뱅과 에라스무스, 츠빙글리 등 종교개혁가들이 몰려들어 개혁운동의 본산지가 된 스위스를 이번 여행의 최종 목적지로 삼은 것은 참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집트에서 발원한 광야의 영성, 즉 신앙의 야성과 순수성을 목숨을 걸고 다시 회복하고자 했던 종교개혁 운동이 바로 스위스에서 찬란한 꽃을 피웠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신기하게도 성지순례의 첫 번째 기착지인 이집트와 최종 목적지인 스위스가 다시 만난다는 사실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기자 고원의 불가사의들>
앞으로 5주간에 걸쳐서 제가 경험한 성지순례 경험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가장 먼저 첫 번째 여행지인 이집트에서 듣고 본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집트에서 4월 25일(금)부터 27일(주일)까지 2박 3일 동안 체류했습니다. 이집트는 이미 창세기부터 자주 언급하고 있는 성지입니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이 기근이 생길 때마다 자주 피신했던 곳이었습니다. 그것은 6,670km나 되는 세계에서 가장 긴 나일강이 이집트에 있어서 천혜의 곡창 지대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되어서 야곱의 식구들이 가나안 땅을 떠나 이집트로 이주한 이유도 다름 아닌 식량 문제 때문이었지요.
이집트의 고대 문명은 주전 3천년부터 주전 30년까지 바로 혹은 파라오라고 일컬어지는 약 30개의 서로 다른 왕조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고대 문명과 관련해서 이집트는 볼거리가 엄청난 나라입니다. 첫날 오전에 우리는 그 유명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부터 먼저 보았습니다. 카이로 근교의 기자 고원 위에는 거대한 산과 같은 세 개의 피라미드가 서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4,600년 전부터 바로의 무덤인 피라미드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쿠푸왕의 피라미드의 경우 평균 무게가 2.5톤 정도인 석회암과 화강암 200만개 이상을 다듬어서 만들었습니다. 어떤 기단석의 경우는 우리키보다도 훨씬 더 큰 15톤 이상의 무게를 자랑했습니다. 현지 가이드에 따르면 노동자 20만 명 정도를 동원해서 한 10년간 공사를 해야지만 하나의 피라미드가 완공될 수 있다고 합니다. 또한 세계 3대 불가사의 중에 유일하게 현존하는 건축물이 피라미드라고 합니다. 피라미드 근처에 서 있는, 얼굴은 사람 모양을 하고 몸체는 짐승 모양을 한 스핑크스 역시 피라미드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는데 참 신기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헤롯왕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한 예수님의 가족은 물론이고 이집트의 왕자로 자라난 모세 역시 이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보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작은 동네 나사렛에서 살았던 마리아와 요셉 부부가 어린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지금 보아도 엄청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보았을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를 잠시 연상해보았습니다.
<Old Cairo에 꽃 핀 콥틱 기독교 유적들>
오후에는 옛 카이로(Old Cairo) 지역으로 이동해서 콥틱 기독교로 알려진 이집트 토착교회 유물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콥틱 기독교는 이집트 원주민들의 토착교회를 말합니다. 아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유적지 중에 하나가 이집트일 것입니다. 그것은 아기 예수님이 피난하신 것을 기념하는 교회가 Old Cairo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아기 시절 한 3년 동안 이곳으로 피난하신 것은 물론이고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지역에 와서 복음을 전파했고 순교해서 콥틱 기독교의 초대 교황이 되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중동국가들 중에 가장 많은 기독교인들을 보유한 나라가 이집트라고 합니다. 전체 인구의 13%나 되는 약 천만 명 정도가 콥틱 기독교 신자라고 하니까요.
오후에 시간이 충분치 않아서 Old Cairo 지역에 밀집된 역사적 교회들을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서둘러 훑어보았습니다. 특히 주후 3세기 경 로마가 이 지역을 정복한 뒤 바벨론 성채(Roman Fortress of Babylon, 벧전 5: 13)를 축조했는데 640년대에 아랍인들이 로마군대를 몰아내고 이집트를 정복했을 때 콥트 기독교인들이 이 성채 안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바벨론 성채 안에다 신기(神技)에 가까운 기술로 많은 예배당들을 건축했는데 그 중에 다섯 개의 교회가 현존하고 있었습니다. 모두 천년 이상의 유장한 역사를 자랑하는 콥틱 교회들이었는데 특히 세 개의 교회가 인상 깊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에 피난 왔을 때 약 45일간 휴식을 취했다는 석굴 위에 세워진 성 세르기우스 교회(Church of St. Sergius, 혹은 Abu Sarga)는 바벨론 성채 안에 지어진 가장 오래된 콥틱 교회였습니다. 불행하게도 인파가 너무 많아 그 석굴 안에 들어갈 수 없었지만 12제자를 상징하는 교회 기둥이 흥미로웠습니다. 11개는 아주 희고 매끈한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데 한 개만 거무칙칙한 화강암이었습니다. 물론 가룟 유다를 상징하는 기둥이겠지요. 기둥 위에 그려진 사도들의 그림 역시 상당히 오래된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매달려 있는 교회(Hanging or Suspended Church) 혹은 성모 마리아 교회(Church of the Holy Virgin, al-Muallaqa) 역시 인상 깊었습니다. 배를 뒤집어 놓은 형상으로 성벽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기이한 교회였습니다.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이 교회는 바벨론 성채의 남쪽 수문 꼭대기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매달려 있는 교회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내부는 물론이고 외부 장식이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습니다. 아마 Old Cairo에 있는 교회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교회가 아닌가 싶습니다. 4세기에 지어졌으나 파괴된 뒤 11세기에 다시 지었다고 합니다. 이 교회가 복원된 경위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콥틱 교황 아브라함 재위 시절(975-78) 이슬람 최고 지도자 칼리프가 찾아와서 겨자씨가 산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만일 입증하지 못할 경우 모든 콥틱 기독교인들을 사형에 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고민하던 아브라함 교황의 꿈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가나한 사람들에게 물을 공급하던 무두장이에게 안내했습니다. 이 무두장이가 무카탐 산을 움직이는 기적을 일으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서 성모 마리아 교회를 비롯한 숱한 콥틱 교회들의 복원을 허락했다는 것입니다.
성 죠지 교회(Church of St. George) 역시 감명 깊었습니다. 죠지는 3세기 로마군단의 장교였는데 디오클레시안 황제가 그리스도 숭배를 금하는 법령을 내렸지만 순응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장렬하게 순교를 당했는데 인간이 가할 수 있는 가장 악랄한 방법들을 총동원해서 고문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죠지가 고문 받고 순교 당하는 그림과 함께 당시에 사용했던 각종 고문기구들을 볼 때 한 인간의 위대한 신앙 앞에 절로 머리가 숙여졌습니다. 죠지는 3세기부터 중동 지역의 기독교인들에게 순교 성인으로 널리 추앙을 받았는데 그의 기념 교회는 10세기경에 지어졌다고 합니다. 시간이 모자라 콥틱 박물관을 비롯해서 더 많은 유적들을 관람할 수 없었음은 두고두고 아쉬웠습니다. 더욱이 성 마가의 전교지요 오리겐과 아타나시우스를 배출했으며 그 유명한 셉츄아진트, 즉 70인역이 태어난 알렉산드리아가 이번 순례길에 빠진 것 역시 아쉬웠습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집트에만큼은 꼭 다시 오고 싶은 마음 간절했습니다.
<모세의 출애굽 경로를 따라>
Old Cairo 지역에 산재한 콥틱 기독교 유적지를 대충 둘러본 뒤, 26일(토) 오후 3시경부터 우리는 카이로를 벗어나 모세의 출애굽 경로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위에는 지중해가, 왼쪽에는 홍해와 수에즈만이, 오른쪽에는 아카바만이 있는 그 유명한 시나이 반도를 따라 움직인 것입니다. 특히 수에즈 운하는 지중해와 홍해를 이어주는 통로가 되고 있었으며 아시아와 유럽 간의 해로를 15,000km 이상 단축시켜준다고 합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운하 밑으로 뚫린 해저 터널을 통과했으며 엄청난 양의 물류를 수송하는 화물선들이 지나가는 수에즈 운하 근처까지 갔지만 군인들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었기 때문에 내려서 직접 볼 수는 없었습니다.
성경에서 시나이 반도는 수르 광야와 에담 광야, 신 광야, 바란 광야, 진 광야를 포함하는 광대한 사막 지대였습니다. 카이로를 벗어나 옛 수르 광야를 한참 동안 달려가니 마라의 쓴 물 사건이 일어난 지점에 도착했습니다. 오늘날 이집트의 아랍인들은 Ain Musa라고 불렀습니다. 출 15장을 보면 홍해를 빠져나온 이스라엘이 수르 광야로 사흘 동안 걸어갔지만 물을 찾지 못했습니다. ‘마라’라는 곳에 도착했지만 물이 써서 마실 수 없습니다. ‘마라’의 뜻이 ‘쓰다’이니 이 지역은 염기가 많은 지역이 틀림없습니다. 현장에 직접 가보니 바로 코앞에 홍해가 있어서 바닷물의 영향으로 물이 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마신단 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자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나무 한 그루를 보여주셔서 나뭇가지를 꺾어 물에 던지니 물이 달아졌습니다. 홍해를 건넌 후 일어난 최초의 기적이었지요.
마라로 추정되는 사막 지역에 도착해서 내리니 모래 바람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눈을 뜰 수 없는 황사가 불어 닥쳐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군데군데 많은 우물들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 중 하나 마라의 우물로 여겨지는 지점에서 간단한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어느 나라인지 모르지만 백인 순례단이 연이어 도착해서 우리와는 다른 우물가로 가서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버스로 되돌아 올 때 우물 주변에 헛간 같은 상점을 지어놓고 장사하는 사람들의 호객행위가 시작되었습니다. “싸요” “비싸요” “빨리빨리” 등의 한국말을 잘 했습니다. 많은 한국인들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마라를 지나 열두 개의 샘과 일흔 그루의 종려나무가 있었다는 엘림으로 추정되는 지역도 지나갔습니다(출 15: 27; 민 33: 9). 마라에서 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이라고 하나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차창 밖으로 사막 한가운데 종려나무들이 풍성하게 자리 잡은 곳은 어디든지 엘림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출 16장을 보면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만나를 먹었다고 합니다.
시나이 반도를 타고 계속 남하하던 우리는 마침내 르비딤으로 추정되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시나이 반도는 차로 달리는 내내 희뿌연 모래와 갖가지 색깔의 돌산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가이드 목사님에 따르면 수백 수천 가지의 천연광물들이 포함된 천혜의 산맥이라고 했습니다. 웬일인지 이집트 정부는 전혀 개발을 하는 기미가 엿보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가난한 살림에 게으른 처사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순례객의 입장에서 보면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개발해서 경제력을 높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지금처럼 자연 상태로 그냥 놔두는 것이 출애굽 경로를 추적하는 우리에게는 훨씬 더 의미 있고 유익했습니다. 자나 깨나 자연보호라는 말이 입에서 저절로 튀어 나왔지요.
르비딤은 시내산에 이르기 전에 갑자기 나타난 오아시스 지역이었습니다. 시내산에서 약 60km 떨어진 지점이었지요. 르비딤은 해발 2,000m의 세르발 산기슭에 위치한 오늘날 Wadi Feiran으로 알려진 남부 시나이에서 가장 큰 오아시스였습니다. 큰 키의 종려나무 약 3만개가 4km에 걸쳐 숲을 이룬 사막의 옥토였습니다. 차에서 내리자 당장 르비딤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왔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아론과 훌과 더불어 손을 높이 들고 기도한 곳으로 추정되는 야산에 올라가니 더욱 더 분명해졌습니다. 출 17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전투를 한 기사가 나옵니다. 아마도 이 풍요한 오아시스 지역에 미리 살고 있던 사람들이 아말렉 족속 같습니다. 갑자기 2백만 명이나 되는 인파가 쳐들어오니 전투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말렉은 르비딤 오아시스를 지키려고 했을 테고 이스라엘은 어떻게 해서든지 빼앗으려고 했겠지요.
놀라운 사실은 모세가 앞장서서 진두지휘를 해도 승리할까 말까인데 여호수아와 장정들만 나가서 전투를 하라는 것입니다. 산밑에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군대가 아말렉과 열심히 싸웁니다. 모세가 언덕 위 야산에 올라가 지팡이를 든 팔을 올리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내려오면 지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팔은 든 것은 공격신호이고 팔을 내린 것은 퇴각신호라고 해석했습니다. 현장에 가보니 매우 그럴듯한 해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를 비롯한 3인이 올라간 곳으로 추측되는 야산은 전망이 기가 막히게 좋았습니다. 르비딤 동서남북을 손금 보듯이 자세히 내려다 볼 수 있었는데 멀리 산밑에서 전투를 하는 사람들까지도 산위에서 내리는 전투신호를 금방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 사람이 중보기도했다는 해석이 훨씬 더 신앙적인 해석일 것입니다. 결국 아론과 훌이 모세의 양쪽 팔을 붙들어 올려 함께 기도해서 이스라엘이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우리는 그 산언덕에서 수천 년 전의 전투를 생각하며 함께 팔을 들고 기도했습니다. 그 때 전투에서 승리한 이스라엘 군대의 함성이 귓전에 들려오는 듯 했습니다. 르비딤은 이스라엘이 시내 산 지역으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체류했던 장소였습니다. 르비딤 산언덕을 내려오니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고 약 1시간 정도를 달려 시내산 기슭에 있는 호텔로 가 이집트 체류 둘째 날을 보냈습니다.
이집트에서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시내산 등정이었습니다. 르비딤에서 시내산 쪽으로 이동하는 차안에서 가이드 목사님은 시내산 등반 요령에 대해서 자세히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안전사고에 유념해야 할 것을 여러 차례 당부했습니다. 낙타를 타고 한 밤중에 올라가다가 떨어져 다쳤다는 이야기,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이야기 등등 겁이 날만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이미 피로에 지친 일행은 걱정하는 빛이 역력했습니다.
드디어 4월 27일 주일이 되었습니다. 새벽 1시에 기상해서 버스를 타고 한 10분 정도 달려가 시내산 기슭에 있는 성 케터린 기념 수도원(St. Catherine's Monastery)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에는 이미 전 세계에서 온 순례객들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세 분이 몸이 피곤해서 등정을 포기하고 15명이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박승옥 권사님과 박정윤 집사님을 제외한 13분이 낙타를 타기로 했습니다. 납작 엎드려 있던 낙타를 처음 타니 정말 무서웠습니다. 맨 먼저 일어날 때 아주 조심해야 했습니다. 갑자기 공중으로 튀어 오르기 때문에 쌍봉낙타의 앞과 뒤쪽에 있는 뿔을 꼭 잡지 않으면 떨어질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우리 일행 중 누구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잘 타고 올라갔습니다. 11세의 베두인 소년이 저와 황정순 권사님, 이종숙 집사님이 탄 세 마리 낙타의 몰이꾼이었는데 한국말을 얼마나 잘하는지 몰랐습니다.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어두운 달밤에 그 소년의 우스꽝스러운 한 판 코미디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약 1시간 40분 정도 낙타를 타고 마침내 시내산에 오르는 돌계단 앞에 도착했습니다. 휴게실 상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곧바로 가파른 돌계단 700개를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시내산은 아랍어로 Jebel Musa, 즉 모세의 산으로 알려진 해발 2,285m의 성산인데 사방이 시뻘건 바윗돌로 이루어졌습니다. 사실 수도원까지의 해발이 이미 1,530m 정도이므로 낙타에서 실제로 올라가는 거리는 755m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수도원에서 직접 걸어 올 경우 3,700개의 회개의 돌계단을 올라가야 한답니다. 낙타에서 내려 잠시 쉰 뒤 나머지 1/3의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가는데 서서히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둠에 가려져 있던 주변의 돌산들이 일제히 붉은 자태를 드러내는데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시내산 정상에는 이미 먼저 올라온 사람들로 북적거렸습니다. 산 정상에는 6세기에 지어졌다가 허물어진 교회 터 위에다가 1934년에 다시 지은 성 삼위일체 예배당(Chapel of the Holy Spirit)이 있었습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모스크도 있었습니다. 마침내 멀리 태양이 솟아오를 때 그 광경 역시 천하일경(天下一景)이었습니다. 시내산에서 모세는 40주야를 지내며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전수 받았고 정상에 올라가 구름 속에서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려 했을 때 모세가 죽을까봐 그 얼굴을 바위틈에 가렸을 법한 거대한 바위들이 곳곳에 보였습니다. 실로 시내산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만큼 충분히 영험한 성산이요 명산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만났던 모세를 연상하면서 저 역시 하나님을 만나길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시내산 꼭대기에서 우리는 주일 아침 예배를 드렸습니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예배였습니다.
시내산을 내려올 때 사위에 날이 환하게 밝아서 곳곳을 자세히 볼 수 있었습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간 뒤 이스라엘이 기다린 곳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지나칠 때 묘한 감동이 일었습니다. 모세를 기다리는 이스라엘 군중들의 모습이 눈앞에 집히는 듯 했습니다. 하산은 등산보다 훨씬 더 어려웠습니다. 그러면서 이구동성으로 터져 나온 말이 있습니다. 새까만 밤이니까 눈에 뵈는 것이 없어서 세상모르고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밝은 대낮이었으면 절대로 못 올라갔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시내산 등정을 끝으로 이집트 순례는 사실상의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요르단으로 넘어가기 위해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국경을 이루는 타바(Taba)에 도착하기 전 사막에 잠시 내려 싯딤나무와 로뎀나무를 직접 보았습니다. 싯딤나무는 결코 대단한 나무가 아니었지만 언약궤를 만드는데 쓰였습니다. 사막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목재였기 때문이지요. 우리 역시 보잘 것 없어도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힐 때 존귀하게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집트 사막에서 본 로뎀나무 역시 가지가 많지 않은 한 1미터 4-50cm 정도 되는 아주 작은 키의 관목이었습니다.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했다고 해서 대단히 큰 그늘을 제공하는 나무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왕상 19: 4-5). 그러나 사막 뙤약볕에 그 작은 키의 로뎀나무가 만들어지는 손바닥만 한 그늘 아래 몸의 일부만 숨겨도 얼마나 서늘하고 감사한 줄 몰랐습니다.
<잊어서 안 될 광야여>
5개국 순례에서 이집트의 광야가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광야는 사람 살 곳이 못 되었습니다. 모래 바람이 일어나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였습니다. 사방에 싯누런 혹은 시뻘건 바윗돌 천지였습니다. 하늘만 빠끔히 뚫려 하나님만 쳐다보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광야는 유대-기독교 신앙의 발상지였습니다. 우리 영혼이 끝없이 되돌아가야 할 영혼의 고향이었습니다. 광야로 가면 아무 것도 볼게 없기 때문에 저절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광야를 잊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을 청산하고 들어간 가나안 땅은 과연 직접 가보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먼지 나는 사막에서만 짐승처럼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물이 있고 비옥한 땅이 있는 이스라엘 땅은 확실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점점 사막의 영성을 잊어갔습니다. 광야의 야성과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가나안의 농경신 바알을 섬기며 우상숭배에 빠져들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광야의 야성과 순수성을 잃어버리는 그 때 우리는 돈과 향락과 명예라는 현대판 바알신을 섬기게 됩니다. 이번 성지순례의 결론은 광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삽니다!
가이드 목사님이 광야 지대를 통과하면서 차안에서 들려준 이야기 한 토막을 말씀드리고 오늘 이집트 편 설교를 마칩니다. 출애굽 경로로 추정되는 광야 지대를 통과할 때 현지체험을 하라고 차에서 내려 한 1-2km를 사막 위에서 걸으라고 했답니다. 그럴 때마다 교인들의 불평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목사님 한 분만 내려서 대신 체험해보시고 나중에 자기들에게 그 느낌이 어떤지 말해달라고 주문하기가 일쑤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고 편리한 것만 추구하다보니까 광야를 멀리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이 살기 위해 광야로 돌아가야 합니다. 광야는 히브리어로 ‘미드바르’라고 합니다. ‘~~으로부터’라는 ‘민’과 ‘말씀’을 뜻하는 ‘다바르’가 합해진 말입니다. 광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나온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이집트의 시나이 광야는 위대한 성지입니다. 모세의 율법,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그 광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이스라엘에게 모세가 준 당부의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신 8: 11-16).
애굽으로 피신하신 아기 예수님
마 2:13-18 / 이상호 목사
연세가 60이 넘으신 분들은 6.25 한국 전쟁 때 피난을 갔던 기억이 나실 것입니다. 저는 경험을 하지는 않았지만 오래된 필름에서 보니, 아빠는 등에 이불 보따리를 메고, 엄마는 솥단지를 머리에 이고, 양손에 어린 애들을 잡고, 남으로 남으로 피난을 옵니다. 가다가 엄마아빠를 잃고 배고파서 우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또 총이나 폭탄에 맞아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어디로 피난을 간다는 것 좋은 인상은 아닙니다. 힘이 없을 때 하는 수 없이 피난을 하고 굴욕적이고 패배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 예수님이 피난하셨습니다. 13절 하반절에 “애굽으로 피하여” 말씀하십니다. 영어성경에도 ‘escape to Egypt’ 에집트로 ‘도망하라,’ ‘망명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도피 장면은 사복음서에 마태복음에만 나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왕이신 예수님 모습을 말씀하기 위하여 기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피난 생활을 기록한 것은 그 만큼 깊은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종 위급한 때에 애굽에 가서 피난 생활을 했습니다. 일찍이 아브라함이 흉년을 피하기 위하여 애굽으로 갔던 적이 있습니다. 또 야곱의 자손도 가나안의 흉년으로 인해 애굽으로 가서 4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큰 민족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포로시대와 중간시대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애굽으로 내려가 살았습니다. 당시에 애굽에 대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는 주민의 5분의 1이 유대인이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헬라화한 유대인들을 위하여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애굽은 로마의 식민지였지만 유대의 분봉왕 헤롯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므로 예수님의 가족은 안전한 곳이었습니다. 오늘 이 예수님의 가정이 도피하는 과정을 통하여 주시는 교훈이 있습니다. 한마디 한마디 마음에 새기어 말씀을 이루어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 하나님의 때
첫째 예수님의 피난 사건을 통해 주시는 교훈은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사에 계획을 가지고 그 계획대로 일을 진행시켜 나가십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시는 데도 계획을 가지고 순서대로 일을 하십니다. 하늘을 만드시고, 그 다음에 그 하늘에 해와 달과 별을 만들어 두셨습니다. 땅과 바다를 만드시고, 나무와 풀과 채소를 그리고 물고기와 짐승들을 만드셨습니다. 모든 자연의 환경을 갖추고 나신 다음에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질서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설계도에 따라 일을 하나하나 진척시켜 나가십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출생하셨으니 그냥 그 곳에 성장해서 빠르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헤롯이 죽기까지”(15절) 기다린 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간단하게 헤롯을 죽이고 친 유대 경향의 왕을 세우면 될 것이 아닌가?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만사가 때가 있습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을 이룰 때가 있나니”(전3:1)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음”(2절)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음”(3절) 하나님의 때를 알고 그 때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 하신 때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나이가 들면 주름살이 생기고 기억력과 시력이 점점 떨어지는 것 어찌 할 수 없습니다. 요즘 피부를 팽팽하게 해주는 주사를 맞는 것이 유행입니다. 「노화방지 크리닉센타」에서 150만원을 주면 「보톡스」라는 주사를 놓아준다고 합니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팽팽하게 땡겨 달라고 합니다. 우스개 말로 하두 땡겨서 배꼽이 목에 까지 올라 왔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출생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고 젊을 때가 있고 늙을 때가 있습니다. 때에 맞게 살면 됩니다.
본문 속에 요셉은 하나님의 때를 잘 파악합니다. 예수님을 안전하게 자라게 하기 위하여 헤롯을 죽이고 유대를 평화스러운 나라로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님은 애굽으로 피난하여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뚝딱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애굽에서 유아기를 보내는 것입니다. 「아라비아복음서」라는 외경에 보니 3년간 애굽에서 지냈다고 말합니다. 하여튼 수년간 “헤롯이 죽기까지” 애굽에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괴테는 스무 살에 「파우스트」를 구상하여 여든 두 살에 완성했다고 합니다. 에디슨은 전등하나를 발명하기 위하여 십만 번 이상의 실험을 했습니다. 참고 인내하며 때를 기다리는 사람만이 성공의 기쁨을 맞볼 수가 있습니다. 실험실에서 연습실에서 또는 도서실에서 실험도구와 악기와 책과 씨름을 합니다. 수없이 실패를 거듭하고 또 위기를 넘길 때도 있습니다. 이런 과정이 없이는 승리의 때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공과 축복의 때를 바라보세요. 고통이 따르고 쉽지 않지만 견디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앞날에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영광의 때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때까지 기다리며 하루하루 모든 삶에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하나님의 때를 이루기 위하여 엄청나게 큰 고통이 따름을 말씀합니다. 16절에 죄 없고 천진난만한 수많은 어린아이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수를 셀 수 없는 많은 유아들이 학살당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이 피바다가 되었습니다. 아기들의 웃음소리는 없어지고 아이 잃은 부모들의 울음소리만이 천지를 진동합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했을 지도 모릅니다. 「메시야 예수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는 구나!」 한탄 했을 것입니다. 민족을 살리러 예수가 온 것이 아니라 죽이러 온 사람이 아닌가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이런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때가 되기까지 참고 기다리십니다.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때보다 앞서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귀한 뜻을 이루어지기 위하여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기도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보호
두 번째 요셉가정의 피난을 통해 확인시켜 주시는 것은 택한 당신의 백성을 끝까지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역사를 이루는 데 사탄이 방해 공작을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하면 반드시 사탄이 유혹을 하고 핍박을 가합니다. 복음 전하는 곳의 본부인 교회를 망가뜨리는데 힘을 집중시킵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께 사탄의 방해공작은 엄청나게 크게 역사했습니다. 세상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탄생하시고 성장하여 구속의 사역을 이루시는 하나하나에 사탄의 총 세력을 집중하여 방해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요셉의 가족을 없애버리려고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예수님을 없애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탄의 궤계에서 주의 백성들을 보호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미리 꿈으로 알려주십니다. 먼발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전개되는 그 얼마 전에 미리 알려주셔서 해를 받지 않도록 하십니다. 13절을 보세요.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피할 길을 주십니다. 고전10:13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헤롯의 죽음의 칼날에서 피할 길을 주십니다. 완벽하게 보호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가족이 「애굽으로 피난 간」 이 사건을 두고 여러 구전(口傳)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애굽으로 피난 가는 도중에 광야에서 나귀가 먹지 못해 굶주려 죽었고, 아기 예수님이 마리아의 젖을 빨고 있을 때 천사가 내려와 힘을 주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 요셉의 가족이 애굽에 내려가 살 때 무엇으로 생활을 했을까? 궁금합니다. 어떤 성경학자(메튜헨리)들은 동방박사들이 세 가지 예물을 가지고 왔는데 그 예물을 팔아서 생활을 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꿈으로 죽음을 알려주시고, 갈 길을 인도하시며,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이 가는 길마다 하나님의 사자가 함께합니다. 마리아를 데려올 때부터 베들레헴에 갈 때에도, 또 애굽으로 떠날 때에도, 항상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요셉의 가족을 책임지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저와 여러분을 책임지시고 어떤 긴급한 상황이나 어려운 환경에서도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영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영국의 특급 열차가 빅토리아 여왕과 고급관리들을 태우고 안개가 칠흑같이 낀 어두움 밤 헤치며 달리고 있었습니다. 기관수는 시간 내에 무사히 목적지까지 모시려고 신경을 곤두세우며 달렸습니다. 기차가 한참 달리고 있는데 헤드램프 앞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손을 흔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기관사는 급정거를 하고 차장과 열차 승무원들이 밖에 나가보았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누가 장난을 치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으나 이상한 예감이 들어 더 나가보았습니다. 그 앞은 교량이 놓여있었습니다. 그런데 교량 한 가운데가 급류에 휩쓸려 나갔습니다. 만약 그 검은 옷 입은 사람이 아니였다면 여왕을 위시한 수백 명이 강에 떨어져 모두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후 교량이 복구되고 그 열차가 무사히 런던에 도착했으나 그 「이상한 형상」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기관수가 기관차 헤드램프 아래쪽을 살펴보다가 큰 나방 하나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의 날개가 라이트 유리에 붙어서 허느적 거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기관수가 차에 올라가 헤드라이트를 켜보니 바로 그 날개가 깃발을 흔드는 사람으로 보였음을 알았습니다. 여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여왕은 “그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키시는 것이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위급한 상황에서도 우리 모두를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직접 또는 천사를 보내서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자연의 미물까지 사용하셔서도 택한 성도들을 보호하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도 이런 하나님의 보호를 수없이 받았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사자와 늑대의 위험할 골짜기와 또 사울왕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앞에 있다고 해도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목자의 강력한 손에 지팡이와 막대기가 들려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원수마귀의 장난에서 보호하실 뿐 아니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3. 순종하는 요셉
마지막으로 요셉이 피난하는 과정에서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마1:18~25을 통해 요셉의 삶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허물을 가리워 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또 그는 사려가 깊고 생각이 깊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또 하나님과 늘 교통하였던 사람이었고 또 그 말씀에 순종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요셉 자신이 깊이 생각한 끝에 결정한 것이라도 결국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본문은 또 한번 요셉의 삶을 통해 교훈을 주십니다.
이미 1장 후반 마리아를 데려올 때 요셉은 순종의 사람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오늘 애굽으로 피난 할 때도 그는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성경퀴즈에 이런 문제가 나왔다고 생각해 보세요. 성경 속에 나타난 요셉의 삶을 보고 그의 인생관 또는 좌우명을 한단어로 써보세요? 저는 이 문제의 답은 '순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셉의 좌우명이자 인생관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셉을 상황을 생각해 보세요. 성경 속 깊이 들어가서 내가 요셉이 되어 보는 것입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남의 여자 애까지 임신시켜 놓고 이제는 고향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까지 떠나라고요” 난 그렇게 못해요. 또 13절 하반절에 말씀은 “내게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이 얼마나 황당한 말입니까? 우리 같으면 “기한을 정해 주시고 언제 다시 나오게 될 찌 알아야 될 것이 아닙니까?” 정확하고 따지기 좋아하는 우리들은 “언제 어느 때 다시 부를 것입니까? 하나님이 부를 때까지 무한정 있으라구요 말도 안돼요.” 이럴지 모릅니다.
그러나 요셉은 13절에 말씀을 듣고 14절에 잠에서 깨어 바로 밤에 애굽으로 떠납니다. 다음날도 아닙니다. 바로 꿈에서 지시를 받고 꿈에서 깨자마자 “여보 갑시다.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소” “갑시다.” 마리아도 투덜거림이 없습니다. 보통 아내같으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니 이양반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이 밤에 어딜 가자는 거에요? 당신 몽유병 환자 아니에요?” 그러나 요셉의 부부은 즉시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께 세상에 여러 종류의 마귀들이 있다고 합니다. 질투마귀, 음란마귀, 불치병마귀, 등등 그런데 그 마귀에서 제일 악질 마귀가 있다고 합니다. 그 마귀의 이름은 「차차마귀」라고 합니다. 기도하라고 하는데 차차하지, 성경을 보려고 하는데 차차 이 담에 하지, 전도하라고 하는데 차차 시간이 나면하지, 「차차마귀」는 우리를 게으름으로 몰아넣고 불순종으로 몰아넣습니다. 여러분 “내일하지”는 분명히 내일 가서는 “내일 안하지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순종하는 것입니다.
지금 호적하러 베들레헴에 잠시 와있습니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방향도 다른 타국 땅으로 떠나야 합니다. 내 생각과 맞아 떨어지는 것을 하는 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내 경험과 맞지 않지만 말씀에 권위를 인정하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심히 고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생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각도 바르고 의롭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마지막 겟세마네 언덕에서의 기도는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14:36)였습니다. 이 순종의 극치가 인류를 구원하셨고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기도를 드려야 되요. “내 주장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십시요. 나는 순종하겠습니다.” 이런 신앙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도 이 예수님의 신앙을 배웠습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히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옥에서 나와 다시 백성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다시 붙잡아다가 공회 앞에 세우고 대제사장이 겁을 주면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베드로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6:29)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드립니다.
중국 순나라에 한 임금이 하루는 신하들을 불러 모아놓고 이렇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제 내가 너희들에게 망태기 하나씩을 줄 터이니 우물에 가서 물을 하나 가득 담아 가지고 오너라!” 열 댓 명의 신하들이 망태기를 하나씩 받아들더니 제각기 흩어졌습니다. 망태기에 물을 담아 보았자 쏟아져 내릴 것이 분명하였는지라 아무도 물 담을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한 신하만이 우물가로 가서 하루 종일 물을 퍼 담았습니다. 그도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으나 어찌 임금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으랴 하는 마음으로 하루 종일 물을 퍼 담았습니다. 이윽고 해질녘이 되자 우물의 물이 다했는지 아무리 두레박을 내려도 물을 길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하는 허리를 펴고서 우물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바닥 한 가운데에 황금덩어리가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신하는 얼른 그것을 올려다가 임금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임금은 “수고했다! 내 말에 순종하는 자가 너뿐이구나. 그것은 순종하는 자에게 주려고 내가 마련한 상급이니라. 그것을 네가 차지하도록 하여라.” 황금덩어리와 함께 높은 관직을 하사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사람을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순종하기 위하여 애쓰고, 혹 잠시 불순종하며 넘어질 때도 있지만 다시 돌아와 말씀대로 살기를 애쓰는 사람을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미국에 「하트포트신학교」의 종교조사연구소에서 미국의 성장하는 교회를 대상으로 조사를 했습니다. 성장하는 교회들은 ①셀그룹이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②보수주의 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③독립교단이라는 점입니다. 또 교단에 소속되어 있다하더라도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 교단의 색을 강하게 나타내지 않고 있다고 했습니다. ④네 번째는 보고서에 있는 그대로를 읽겠습니다. 성장하는 교회들은 “목사 중심으로 운영되는 교회라는 데 특징이 있다.”고 했습니다.
크기에 상관없이 성장하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미국에 성장하는 교회의 장점들을 보고 배워야 할줄 압니다.
셀그룹을 활성화해야 합니다. 구역교회 활성화를 위해 애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또 복음주의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에 기초하되, 내 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폐쇄적인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목회자의 리더쉽을 인정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합니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기를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다”(호11:1, 마2:15)하셨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님의 가족이 애굽으로 내려가십니다. 하나하나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죄의 땅 애굽에 살다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축복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장래의 구원 계획을 위한 영적인 모형도입니다. 애굽과 같은 죄악을 땅에 살고 있던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애굽으로 내려가십니다. 옛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린양의 피를 발라 구원을 얻은 것처럼 저와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피로 죄에서 해방되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받았던 모형을 실제로 이루기 위하여 예수님의 삶을 애굽에서부터 시작하십니다.
(▶요셉은 이 귀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때를 알아 잠잠히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우리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 하루하루”는 하나님의 보호아래 있음을 성경이 약속하고 있습니다. ‘헤롯의 박해’와 ‘여행의 위험’과 ‘새로운 곳에 생활의 대책’ 등등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십니다. 주님의 손에 맡끼세요.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이끌어주시고 보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다윗왕의 후손으로 명문집안의 자손입니다. 유대인의 철저한 교육을 받아 똑똑하고 생각이 깊었던 사람 요셉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이라면 머리를 숙여 순종했던 사람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모두 순종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신임을 받을 것입니다.
▶당신의 예수님은 어디 계십니까?
지금 여러분의 예수님은 여러분 마음속에 모시고 있습니까? 아니면 마음 밖으로 쫓아내었습니까?
i) 우리가 구체적인 문제 앞에서 내가 주인이 되어서 내 맘대로 행할 때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에서 쫓겨나십니다.
ii) 우리가 세상의 것에 집착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지 못하고 확신하지 못할 때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에서 쫓겨나십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와 북한이나 중공의 지하교회를 비교해 보면, 우리 한국교회는 좀 부유하다고 너무나 세속적으로 물들어서 세상의 것을 더 중시하며 종종 예수님을 마음 밖으로 쫓아내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고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요약인데 너무 길어서 괄호 처리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 속에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순종하며 살았던 요셉의 귀한 신앙을 본받아,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고 순종으로 요셉처럼 하나님의 쓰임과 축복을 받은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다림이 없는 사람들
마 2:13-18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은 태어난지 얼마 안 된 아기 예수를 그의 부모가 밤에 급히 애굽으로 피신시킨 일과 이어서 발생한 어린이대학살의 참극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사건의 원흉은 헤롯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고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이로서 하나님께서 여러 예언자들을 통해서 이미 오래 전부터 예언하신 메시야였습니다. 따라서 온 이스라엘 백성은 그의 오심을 오래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탄생은 그 기다림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고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으로서 모든 사람들에 의해 받아들여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메시야의 탄생소식을 듣고 기뻐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메시야의 오심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그에 대한 기다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헤롯 왕입니다.
헤롯은 순수한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선조에 관해서는 에돔사람이었다는 것 외에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헤롯 가문은 일찍이 갈릴리와 유대 등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의 헤롯, 즉 헤롯1세 또는 대헤롯이라 불리는 헤롯은 밖으로는 로마의 실권자들이 바뀔 때마다 아부와 충성다짐과 탁월한 설득력으로, 안으로는 무자비한 숙청과 효과적인 반란진압으로 로마의 신임을 얻어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그의 지배권을 확보하고 확대하며 철권통치를 통해 그의 지위를 공고히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신이 병들어 쇠약해지기 시작했고 가족 안에서의 권력투쟁이 일어나 그의 통치권이 흔들릴 마당에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찾아와 묻기를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2절) 했던 것입니다. 굴종과 흥정과 계략 등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해 다져놓은 그의 왕권에 도전하는 새 왕이 태어났다는 말은 그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것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의 평생의 대업이 일시에 위협받고 수십 년 동안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갈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3절) 한 것은 이해가 되고도 남는 것입니다. 여기서 헤롯과 더불어 소동했다는 온 예루살렘은 예루살렘 안에 살던 모든 유대인들이라기보다는 헤롯에 붙어서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있던 그의 모든 수하들을 일컫는 말일 것입니다. 그저 "소동했다"는 것은 약한 표현입니다. 헤롯은 경악하고 극도의 불안과 위협감에 사로잡혔다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를 상대로 거래하며 자신의 왕국을 세워온 관록의 헤롯이었습니다. 순순히 물러날 그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기민하게 대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절반 유대인으로서 유대교에 관해서 더러 들어 알고 있는 바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이 그들의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다는 정도는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문제해결의 첫 조치가 메시야가 어디서 나올 것인지를 아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내기 위하여 찾아야 할 사람들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즉시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고 물었습니다(4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그것이 유대 베들레헴일 것이라고 헤롯에게 알려주었습니다(5-6절). 헤롯은 이제 베들레헴의 어디일지를 더 정확하게 알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동방에서 온 박사들을 가만히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는(7절) 그들에게 헤롯 특유의 속임수로 말하기를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8절) 하며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냈습니다. 자칫하면 헤롯의 덫에 걸려 아기 예수가 살해당할지 모르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헤롯은 갓 태어난 아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감히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는 어처구니없고 불가능한 일을 획책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참살당하도록 그냥 계실 리가 없었습니다. 적어도 그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을 이루시기 전에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방박사들에게 꿈에 나타나셔서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셨고, 그들은 다른 길로 그들의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12절).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동방박사들이 떠난 후에 이번에는 아기 예수의 아버지 요셉에게 꿈에 나타나셔서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어라" 말씀하셨습니다(13절). 요셉은 즉시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갔습니다(14절). 이렇게 헤롯이 예수님을 잡기 위하여 설치한 덫을 하나님께서는 가볍게 들어올리심으로써 그의 계략이 허사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능란한 처세술과 계략으로 수십 년간 난공불락의 왕국을 구축해온 헤롯이 겪은 가장 큰 실패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실패는 천인공노할 흉악한 범죄를 자행하는 또 하나의 실패로 이어졌습니다. 즉 동방박사들이 자기의 말을 듣지 않고 다른 길로 이미 돌아가 버린 사실을 알게 된 헤롯은 격노해서 수하의 군사들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들 중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인 아이들을 다 죽이게 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끔찍한 희생을 양산해내고서도 헤롯은 화가 풀리지 않았을 것이고 유대의 왕이 나셨다는 첫 소식의 충격과 함께 그의 왕권에 대한 미래의 도전자를 확실하게 찾아내 제거하지 못한 불안감에 시달리다가 두 해쯤 후에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구원자를 기다림이 없는 자가 행하는 모든 일은 허사가 될 뿐 아니라 엄청난 비극을 만들어낼 뿐임을 우리는 이 불행한 역사를 통하여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바로 섬기지도 않으며 세상적 탐욕을 따라 사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관심이 없거나 또는 이를 적대시하며 결국은 그를 저지하거나 제거하는 일을 벌이다가 자신과 많은 생명을 파멸로 이끌어가고 마는 것임을 우리는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헤롯의 폭거는 역사의 주인이시고 의로운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원대하고 영원한 구원사역에 반기를 드는 모든 악한 세력을 결코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응징하심을 분명히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헤롯의 이야기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림이 없었던 또 한 무리들이 있었음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헤롯의 긴급호출을 받고 모였던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은 율법과 예언서 연구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지도자들이고 신앙의 교사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마땅히 이스라엘 민족의 숙원이고 대망의 대상인 메시야의 오심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관심을 가지고 역사적 상황의 변화를 예의주시하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뜻밖에 동방에서 찾아온 박사들로부터 유대인의 왕의 탄생소식을 뒤늦게 듣긴 했어도 당연히 그 소식에 환호하며 곧바로 그 아기를 찾아 나섰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은 왠지 소극적이고 미온적이었던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들은 헤롯의 호출을 받고 모여 그로부터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하는 질문을 받고서야(4절) 비로소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메시야의 오심에 관하여 지식적으로는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도 이에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사람들 같고, 남의 일에 대해 말하듯이 태연히 대답할 뿐 그 일로 인하여 흥분하거나 빨리 그 아기 메시야를 영접하거나 확인하러 나서려는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이 놀라울 정도의 무관심과 미온적 반응은 그들과는 여러 점에서 많이 달랐던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인 반응과 대조해볼 때에 더욱 뚜렷해집니다. 이들은 밤에 밖에서 양을 치던 한 떼의 목자들입니다. 그들은 주의 천사가 그들에게 나타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눅2:10-12) 하고 떠나자, 서로 말하기를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눅2:15) 하고는, 즉시 달려가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했으며(눅2:16-17),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렸던 것입니다(눅2:20).
천하게 여겨지고 소외된 사람들이었던 목자들의 열광과 고위성직자이고 지도자였던 자들의 무관심과 미온적 반응, 이 얼마나 역설적인 대조입니까? 이에 대해 우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메시야의 오심에 대하여 지식은 갖고 있었으나 간절한 기다림이 없었던 사람들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어쩌면 헤롯 치하에서 백성들에 대한 영향력과 지배권을 일정 부분 나누어 받고 누리는 동안 그 상황에 만족하며 안주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겠는가 생각됩니다. 그뿐 아니라 어쩌면 진정한 주권자인 메시야가 온다면 그때까지 자신들이 누리고 있던 그 모든 권세와 명예와 특혜를 다 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기다림을 상실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그로부터 30년 후 장성하신 예수님께서 메시야로서의 구원사역을 펼치기 시작하시자 그에게 종교적 주도권을 빼앗길까 두려워했으며, 그래서 그를 경계하고 견제하며 그를 흠집 내고 비방하며 급기야는 그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이방세속권력을 비롯한 모든 종교세력들과 결탁하여 끝내 그들의 참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장본인들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메시야 대망신앙의 자연적 소유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야에 대한 진정한 기다림이 없었던 그들은 세속권력자 헤롯의 협력자들로 전락했을 뿐 아니라 헤롯보다 더한 범죄자들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오늘날 이 땅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 각자는 한번 스스로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진정한 기다림이 있는지를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 오신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즉시 그를 찾아 나서고 그의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하며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던 목자들의 흥분과 열광이 과연 나에게 있는가? 기다림이 없는 사람들, 그건 바로 나를 가리키는 말은 아닌가?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냉냉한 지식의 소유자일 뿐 그 간절한 기다림이 없었던 사람들, 이 세상에서의 일정한 영향력과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상황에 만족하고 안주하며 진정한 주권자 메시야의 오심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그리고 결국은 세속권력과 결탁하여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장본인들, 그들이 실상은 이 땅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냉철하게 되짚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다림을 가져야 합니다. 뜨겁게 기다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를 위한 구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만이 오늘날 우리의 사회와 나라와 민족을 구하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합니다. 찾아야 합니다. 찾고 전해야 합니다. 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며 전해야 합니다. 이 기다림과 찾음과 전함이 없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 곧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헤롯당이거나 헤롯에 빌붙어 사는 거짓 신앙인일 뿐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의 힘과 명예와 부와 즐거움에 취하여 현실에 안주하고 세속권력과 적당히 타협하며 지내느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을 다 잃고 지낸다면 결국은 그를 반대하고 그의 오심을 방해하며 그를 비방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밖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 그들은 그저 그리스도를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대강절 둘째 주일을 맞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뻐하며, 그를 기다리고 찾고 전하며,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려야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새롭게 하고 분명하게 하며 확고하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다림은 우리의 믿음이요 소망이고, 우리의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입니다.
죽음 속에서 지켜진 생명
마 2:13-18 / 안효관 목사
『대지』(大地, The Great Earth)라는 소설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국의 여류 소설가인 '펄 벅'(Pearl S. Buck)여사의 작품 중에 『크리스마스 이야기』란 소설이 있습니다. 그 소설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떠들썩하던 크리스마스 전날 밤의 소란스러움이 잠잠해진 늦은 저녁이었습니다. 잠을 자기 위해서 침대에 누워있던 여섯 살 된 샌디는 정원에 화려하게 꾸며져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와 트리 주변에 놓여진 선물 꾸러미들을 구경하고 싶어졌습니다. 조용히 방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온 샌디의 눈에 크리스마스 트리 주변을 산책하고 있는 생쥐 한 마리가 보였습니다. 신기하듯 생쥐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데, 문득 고양이 한 마리가 생쥐를 덮칠 것만은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샌디는 재빠르게 고양이를 쫓아주고, 생쥐의 목숨을 건져 주었습니다.
생쥐의 목숨을 건져주고 침실로 들어온 샌디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생쥐의 목숨을 건져준 것은 참 잘한 일이야. 불쌍한 생쥐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는데…." 샌디는 생쥐를 구해준 일을 생각하느라고 크리스마스에 대한 것은 생각할 틈도 없었습니다.
여러분, 비록 6살짜리 꼬마 아이의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성탄절을 맞는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같지 않습니까? 말은 성탄절이지만, 사실 성탄절의 본질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어지고, 주변 것들에만 관심을 갖고 성탄절을 맞지 않았나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루돌프 사슴을 타고 온다는 산타클로스와 산타클로스가 가져다 준다는 선물에는 관심이 많지만, 말구유에 조용하게 누워 계신 아기 예수는 보이지 않습니다.
젊은이들에게는 친구와 멋진 추억을 만들고 싶은 기대감이나 크리스마스 캐롤에 심취되어서 왜 우리에게 성탄절이 있는지를 생각해보지도 못하고 성탄절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어른들에게는 피곤한 몸을 하루쯤 쉴 수 있는 날로, 또는 성탄 카드를 주고 받으며 연말 인사나 하는 날쯤으로 생각하고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이게 성탄절의 주인공인 아기 예수 없는 공허한 성탄절을 만들기 위한 사단의 전략임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런 사단의 전략은 이미 2,000년전 첫 번째 성탄절 때에도 보여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이런 내용입니다. 먼 바벨론에서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가 탠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우리는 새로운 왕으로 태어나신 분께 경배하러 온 사람들인데, 그 태어나신 새로운 왕이 어디 계시느냐"고 묻습니다 동방박사들의 질문에 가장 큰 충격을 받는 사람이 헤롯왕이었습니다. '분명 이스라엘의 왕은 자신인데, 자신말고 새로운 왕이 태어났다니!' 정말로 새로운 왕이 태어났다면 자신의 위치가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헤롯왕은 동방박사들에게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으로 예언되었기에 만약 왕이 태어나셨다면 베들레헴일 것'이라고 가르쳐줍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베들레헴에 가서 새로 태어나신 왕을 찾거든 내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그분께 경배드려야겠소." 물론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 그의 속셈은 따로 있었습니다. 새로운 왕 - 메시야가 태어났다면 언제 자신의 왕좌를 빼앗을지 모르기에, 자신이 먼저 손을 써서 그를 죽이겠다는 속셈이었던 것입니다.
헤롯왕은 기다렸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베들레헴에 가서 왕을 만나고 자신에게 와서 '베들레헴 아무개네 집에 아기가 태어났는데, 그분이 새로 태어난 왕입니다' 하고 보고해 줄 것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베들레헴으로 갔던 동방박사들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동방박사들은 "헤롯에게 가지 말고 바로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천사의 지시를 받고 예루살렘 헤롯왕에게 가지 않고, 곧바로 고국으로 가버렸기 때문입니다.
잔뜩 두려움과 긴장 속에 기다리고 있던 헤롯왕은 초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동방박사들이 자신의 요구를 무시하고 고국으로 돌아가버렸다는 것입니다. 동박박사들에게 속은 헤롯왕은 뭔가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급하게 군사들을 풀었습니다. 메시야가 태어나기로 약속되어 있는 베들레헴에 군사를 급파해서, 그 지역에 있는 갓난 아이들 - 태어난 지 2년이 되지 않는 2살 아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만왕의 왕으로 태어나신 아기 예수는 이미 애굽으로 피난을 떠난 후였습니다. 천사가 꿈에 요셉에게 정보를 알려주었던 것입니다. "지금 화가 난 헤롯이 군사를 풀어 아기 예수를 죽이려 하니 빨리 애굽으로 피난을 가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위기 일발의 순간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까지의 거리는 불과 9km밖에 되지 않습니다. 20리가 조금 넘는 거리입니다. 헤롯의 명을 받은 군사들이 창과 칼을 들고 달려온다면 1시간 안에 충분히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 1시간 안에 요셉은 태어난지 채 6개월도 지나지 않는 아이와 아내를 데리고 머나먼 애굽으로 피신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것 저것 준비할 틈도 없었습니다. 전쟁보다도 더 긴급하게 상황이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요셉이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데리고 베들레헴을 빠져나온 순간 베들레헴 지경에는 헤롯왕 보낸 군사들의 고함소리로 가득찼습니다. 곧 이어서 여기저기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군사들에게 아이를 빼앗긴 엄마들의 절규, 싸늘한 시체가 되어버린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절규하는 엄마들의 정신 잃은 고함소리, 아이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정신 없이 도망치는 엄마들과 그들의 뒤를 좇아가며 호통치는 군사들의 호통소리, 도망치는 엄마의 품에서 불안을 느낀 아이들의 '앙앙'대는 울음 소리까지, 베들레헴은 온통 울음소리와 목놓아 절규하는 소리들로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지옥으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런 죽음과 통곡으로 가득찬 지옥에서 아기 예수는 무사히 피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베들레헴에 있던 2살 아래의 죄없는 아이들이 왜 죽임을 당해야만 했습니까? 만왕의 왕이신 아기 예수가 탄생하신 기쁨의 날에 왜 그렇게 많은 아이들이 죽임을 당해야만 했습니까?
저는 여기에서 사단의 몸부림을 보게 됩니다. 사단은 근본적으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사단은 세상의 권력자인 헤롯을 앞장 세워서 만왕의 왕이신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아기 예수를 죽여야만 인류 구원이라는 거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방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아기 예수를 죽이지 못합니다. 아기 예수를 죽이지 못한 대신 수없이 많은 다른 생명들이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여기에 세상의 비극이 있습니다.
사단과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은 아기 예수를 거부합니다. 죽이려고 합니다. 어둠이 빛을 싫어하는 것처럼, 세상의 빛으로 오신 아기 예수를 어둠의 공중권세 잡은 자들이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세상은 진리를 싫어합니다. 진리가 오면 자신들의 불의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불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자기들은 마음껏 욕심을 채울 수가 있습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자기들 마음대로 세상을 주무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가 오면 자기들 마음대로 세상을 주무를 수가 없습니다. 자기들의 죄가 다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진리의 빛이 비춰지는 것을 그렇게도 싫어합니다. 그 진리의 빛을 제거하려고 온갖 음모와 술수를 꾸미기도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진리와 정직과 정의는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던 시대가 올고 바른 세상이었다면 그런 피비린내는 살인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는 올바른 세상 - 정의와 진실이 통하는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어둠이 판을 지고, 불의가 지배하고, 죄악이 관영한 세상이었습니다.
그런 세상이었기에 더욱 진리가 필요했고, 빛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기 예수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세상에 진리의 빛이 비춰지기 위해서는 희생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그래도 이만큼 사회적으로 성숙하게 된 것에도 그만큼 많은 희생이 따랐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4.19의거를 통해서 수많은 학생들이 희생당함으로 우리 사회를 한 걸음 성숙시켰습니다. 80년에 있었던 광주항쟁, 86년의 6.10 민주화 운동 등 수없이 많은 희생들이 오늘 우리 사회를 만들어 온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습니다. 학생들이 놀고 싶을 때 놀지 않고 열심히 공부해야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게임, 놀기)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에 희생하고 고생해야 나중에 보람된 인생을 사는 사람이 됩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도 사업에 숱한 어려움을 겪은 후에야 사업에 성공할 수 있다.
그건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기독교 신앙을 지켜내기 위해서, 또 그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서 목숨을 내놓은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에게 복음이 전달되어 왔고, 우리가 이렇게 평안한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순교의 피가 한국교회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가장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서 온 세상에 생명이 들어왔고, 죄로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가 영생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희생이 없는 열매는 없습니다. 조금은 비약적인 추론일지 모르지만, 어쩌면 베들레헴 지경에서 죽어간 수많은 어린 생명들의 희생이 아기 예수의 생명을 살리는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는 오직 한 사람 뿐입니다. 아기 예수를 살리기 위해서 수많은 어린 생명들이 조연으로 죽어가야만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게 성경에 예언한 것을 이루는 것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방법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없지만, 그게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온누리에 울려퍼지는 성탄의 기쁜 찬송이 있기 위해서는 어린 생명들이 죽어가야만 하는 슬픔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어쩌면 그런 희생과 죽음을 통해서 얻어진 생명이기에, 그런 죽음과 희생을 강요하는 세상에 생명을 가져다 주신 예수님이기에 그 예수님이 더욱 찬송과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또 하나 성탄절에 우리가 깊이 묵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 속에는 가슴 아픈 영혼들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기 예수님은 애굽으로 피난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모른 평범한 소시민들 가정의 어린 아이들은 권력의 칼날 앞에서 무참하게 죽어가야 했습니다. 수많은 부모들이 아기를 읽고, 슬픔과 통곡 속에 살아가야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기쁘게 성탄 찬송을 부르고 있을 때에도 이 나라 이 민족 구석구석에 가슴 아픈 영혼을 쓸어안고 고통당하는 수많은 영혼들이 있음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들의 그 아픔 가슴을 우리가 감싸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기쁘게 부르는 성탄의 노래는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성탄감사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 순간에도, 법의 사각지대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인권이 무시당하고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있는 외국인 근로자들은 탄식의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습니다. 미군의 장갑차 아래에서 무참하게 깔려 압사당해 죽어갔던 두 여중생의 부모들은 개죽음과도 같은 자식들의 죽음을 가슴에 묻고 한숨짓고 있습니다. 행복하고 희망찬 발랄함을 가지고 친구들과 뛰놀아야 할 나이에 부모를 잃고 한 가정의 책임을 맡고 연탄불과 라면에 연연해 살아가야 하는 소년소녀 가장들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돌보아주는 사람 없이 나라에서 지급되는 몇푼 안되는 돈에 의지해서 인생의 마지막을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노인들도 있습니다. 그들의 그런 아픔 마음이 실제적인 손길을 통해서 위로받지 못한다면 우리가 부른 성탄 찬송이 그들에게는 어떤 음악으로 들리겠습니까? 백성들의 피와 원성으로 담겨진 술을 퍼마시고 있는 변사또의 풍악 소리와 뭐가 다르겠습니까?
이번 성탄절에는 아기 예수만 쳐다보던 우리의 눈으로, 아기 예수를 대신해서 죽어간 수없이 많은 어린 영혼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귀에도 들려져야 합니다.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정말 의미 있는 성탄절을 보낼 수 있는 것입니다.
마냥 기쁘기만 한 성탄이기보다는 기쁨을 누려야 할 세상을 함께 마음에 품을 수 있는 성탄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아기 예수보다는 숱한 영혼들의 죽음을 자초하는 어둠의 세력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 어두운 세상에 아기 예수가 가져다 주신 평화와 생명을 전하는 작은 예수들로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애굽의 기억을 떠올리며
마 2:13-23 / 이병일 목사
올해 성탄절에는 다른 해보다도 더 조용히 지내고 있습니다. 제 자신에게는 한 해를 돌아보면서 담임목사로서의 목회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시간들입니다. 앞으로 한 주간 더 남은 시간들도 기도하면서 2007년을 준비해야겠습니다.
원주에 제가 자란 마을에 어렸을 때부터 다니며 신앙생활을 한 교회가 있습니다. 그때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람들이 저의 목회적 삶을 돌아보면서 제일 많이 떠올랐습니다. 어떤 때에는 지금과 그 때의 기억들이 서로 교차해 가면서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그 때 그 곳인데, 등장인물들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들과 그 때의 사람들이 마구 섞여서 나옵니다.
제가 처음으로 교회에 다니게 된 것은 초등학교(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동네 형의 인도로 시작했습니다. 한 시간을 넘게 걸어서(고등학생 때에 걸음으로 40분쯤 되었습니다) 다니다가, 동네에 지금의 교회가 생겼습니다. 지역사회나 가정에서 특별한 문화적 혜택이나 배려를 받지 못하던 저에게 교회는 그야말로 삶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때의 기억들 중에서 가장 많이 떠오르는 것은 성탄절의 기억입니다. 성탄축하를 위해 준비하면서 노래뿐만이 아니라 연극까지도 실제로 할 수 있었던 경험은 생각할수록 소중한 것입니다. 밤늦도록 연습하다가 하늘의 오리온 별자리를 보면서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뿌듯함으로 기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시골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분들은 이런 경험을 공유할 것입니다. 12월이 시작되면 학교에서 돌아오면 바로 교회로 달려가서 팀별로 찬양과 율동과 연극을 연습합니다. 그리고 24일에는 온 동네 분들을 초청하여 축하잔치를 합니다. 그날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분들도 모두 와서 함께 박수치며 즐거워하고, 작은 선물을 받아들고 기뻐하며 돌아갑니다. 훈훈한 시골 동네의 성탄절 풍경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고향이 시골이든 도심이든 그 고향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기억은 경제적으로는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언제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어렵고 힘들 때, 그 기억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지금의 나에게 은근한 힘을 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은 만나지 못할 지라도 그 때 그 친구들과의 만남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사람들을 누구나 한두 명쯤은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꼭 “그 때를 아십니까?”나 “그 때 그 시절” 풍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아무튼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 때 그 시절, 그 사람들에 대한 기억은 오늘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깊은 샘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은 망각함으로써 행복해지기도 하고, 기억함으로써 풍요롭기도 합니다. 망각과 기억은 서로 다른 것이지만, 오늘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 기억하지 않아야 좋은 것은 잊어버리고 기억하면 좋은 것은 잊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큰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기억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기억은 지금 여러분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활동하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후에, 그리고 부활하고 승천한 후에, 이 땅에 남겨진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났을 때를 기억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을 모아서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기억할 수 있는 집단적 경험으로 함께 했습니다. 그 기억들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그 이야기는 조금씩 다르기도 합니다. 다르다는 것 때문에 그 이야기들이 전혀 의미 없거나 꾸며낸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기억이나 경험이 자기의 현재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기억과 경험은 어떻게든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예수님이 떠난 후에 남겨진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에 대한 기억들은 그들의 미래를 꿈꾸게 하는 원천이며 바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단순히 그 시절의 일들을 서술한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에는 그와 함께 했던 사람들의 희망과 꿈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희망과 꿈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난 의미이며, 우리가 이날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에게 희망을 걸었던 사람들, 그러나 이미 예수님은 떠나고 이 세상에 남겨진 사람들, 유대인들이었던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탄생은 이스라엘의 역사적 공동체험의 바탕인 출애굽(Exodus)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공동체를 이루는 근본적인 체험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때에는 언제나 이집트에서 노예로 있을 때 그들을 해방시킨 야훼 하느님과, 40년 동안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훈련하던 광야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하느님 앞에 새롭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출애굽의 경험은 언제나 미래를 향한 출발,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추수하여 첫 곡식을 바칠 때에나, 한 해가 지나고 새 해가 시작되었음을 알릴 때에나, 주변의 부족들에게 억압을 당할 때에나, 언제든지 감사와 회개의 순간에는 출애굽을 기억했습니다. 이것을 “역사신조”라고 합니다.
'내 조상은 떠돌아다니면서 사는 아람 사람으로서 몇 안 되는 사람을 거느리고 이집트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몸 붙여 살면서, 거기에서 번성하여, 크고 강대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집트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강제노동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부르짖었더니, 주님께서 우리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우리가 비참하게 사는 것과 고역에 시달리는 것과 억압에 짓눌려 있는 것을 보시고,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 곳으로 인도하셔서,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내게 주신 땅의 첫 열매를 내가 여기에 가져 왔습니다.'
마태복음의 본문에서는 별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왔던 동방의 박사들이 돌아간 이후에 예수님의 가족들이 헤롯의 수배령을 피하여 이집트로 피신했습니다. 헤롯이 죽은 후에 예수님의 가족은 돌아와서 나사렛이라는 마을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 나사렛은 예수님의 고향이며,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왜 이집트이며, 나사렛이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족은 왜 이집트로 피신했을까요? 당시 이집트는 아우구스투스의 속주였으므로 헤롯이 의지만 있다면 그의 영향력이 미칠 수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또한 거리도 멀었습니다. 상식적으로 가족은 안전을 위한 피신이라면, 로마나 헤롯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파르티아로 가는 것이 더 안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그 이유를 “내가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러냈다.”는 예언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마태는 여기에서 예수님의 탄생과 출애굽을 연결시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들의 해방을 위한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돌아온 예수님의 가족이 나사렛에 정착을 합니다. 그 때에 헤롯은 죽고 그의 아들인 헤롯 아켈라오스가 유대를 통치하고, 헤롯 안티파스가 갈릴리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아켈라오스나 안티파스나 모두 예수님의 가족에게 위협적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아켈라오스가 두려워서 안티파스의 지배 영역으로 가서 정착했다고 하면서, ‘나사렛 사람이라 불릴 것이다.’라는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립니다(마가 1:24; 10:47; 요한 18:5,7; 사도 2:22; 3:6). 나사렛은 갈릴리 지방의 한 촌읍으로 도시 세포리스에서 남동쪽으로 6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세포리스는 과거 헤로데 대왕의 군사 요지 중의 하나로, 그가 죽자 갈릴리의 민중 지도자 헤제키야의 아들 유다가 민중과 더불어 이 도시를 점령하여 봉기의 거점으로 삼았던 적이 있습니다. 이 봉기는 곧 로마에 의해 진압되었는데, 이 때 세포리스는 초토화되었고 그 주민들은 수백 명이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이렇게 반역의 고향으로 점 찍힌 나사렛은 멸시와 천대의 대상이었고 한(恨) 많은 고장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나사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라고 반문 했듯이, 유다로서는 반역이 끊이지 않는 문제의 고장이었습니다. 후에 나사렛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바울까지도 “나사렛 도당의 괴수”로 고발됩니다. “우리가 알아 본 결과 이 자는 몹쓸 전염병 같은 놈으로서 온 천하에 있는 모든 유다인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려는 자이며 나사렛 도당의 괴수입니다”(사도 24:5).
이렇게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시절의 이야기를 이집트와 나사렛에 연결하는 것은 예수님의 탄생과 삶과 죽음이 이스라엘의 해방과 연관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그것을 읽는 우리들에게 미완성의 역사적 가능성에 대한 희망과 헌신으로 끊임없이 손짓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유월절에 자기의 희생으로 수많은 히브리 민중을 살린 어린양으로 죽었다는 모티브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마태와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로마 제국과 유대 지배자들에 의해서 핍박당하던 사람들에게 해방(구원)과 기쁨의 소식이었으며, 그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출애굽(해방)을 주도하신 야훼 하느님에 대한 기억과 미래의 희망과의 매개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활동 속에서, 그리고 죽음과 부활 사건을 통해서 그 사실을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의 탄생 혹은 출현 그 자체를 복음(기쁜 소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강남향린교회 신앙고백 중에서 하나를 보겠습니다.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교회 -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를 위하여 지역사회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며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교회가 된다. 일주일에 한 번 예배드리고 닫아놓는 교회가 아니라 주중에도 계속해서 지역사회의 유익한 모임들을 위해 교회 공간을 개방하며, 민주시민들을 위한 모임들이 계속되는 교회가 된다.”
“함께 더불어”라는 화두는 공동체성을 잃어버린 현대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입니다. 송파동에서 이곳으로 교회당을 옮기면서 지역조사를 통해서 세웠던 지역사회를 위한 선교계획은 지금 주춤거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현재 우리교회와 교우들이 지역사회를 위해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선교는 교육과 문화 부문입니다. 이것은 지난 전교우 수련회 때에 제가 발제한 내용에 자세하게 들어 있습니다.
우리 교우들은 자녀들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럽게 교육에 대한 관심으로 모여 져 있습니다. 교우들 중에서 학교 선생님도 많고, 학교운영위원회에 참여하여 학교교육을 정상화하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교육과 관련한 일이나 봉사를 하고 있는 분들이나 송파꿈나무를 통해서 저소득층 자녀들에게 꿈을 심어주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교우도 있습니다. 교우들이 어떤 부분에서 일하든 공통적인 관심이 비슷합니다. 교우들의 이러한 관심과 경험을 바탕으로 강남향린교회가 지역사회에서 다양한 경험과 대안적 교육을 일정정도 담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교회가 거여동에 자리 잡은 이후에 아직 지역사회를 위한 역할을 어떻게 담당할지를 모색하고 있는 중입니다. 또한 교통이 불편한 이유도 있지만, 주중에 교회 공간을 개방하는 일이 활성화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역사회를 향한 선교를 더욱 적극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 “교육․문화 공동체”를 이루는 일은 든든한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교육과 문화 공동체를 형성하는 구성원들 간의 연대와 그 공동체를 매개로 하는 다른 지역단체와의 연대는 자연스럽게 교회가 지역사회에서 담당해야 할 부분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 자체가 교회 공간을 최대한 개방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지역사회를 위해 공헌하는 교회가 되겠다는 신앙고백에 담겨져 있는 궁극적인 목적은 단순한 전도만을 위한 것을 넘어서 생명과 평화를 향한 공동체를 형성하고 해방의 경험을 공유하는 일입니다. 예전의 마을 공동체에서 가능했던 일들을 도심의 지역사회에서도 교회를 통해서 가능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전통적인 공동체성을 위해서 지금 송파꿈나무와 계속하고 있는 단오한마당이나 대보름 풍물굿, 지신밟기 등을 통해서 지역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또한 강남향린교회에서 함께 하는 각자의 삶이 지금 이 순간뿐만 아니라 미래의 삶에서도 해방의 기억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누는 기쁨의 경험이 교우들뿐만 아니라 지역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의 소식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의 기억처럼, 처음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기억처럼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되고, 미래의 희망을 품을 수 있는 바탕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강남향린교회에서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강남향린교회에서 지내는 한 시간 한 시간이, 이 공동체에서 경험하는 모든 일이 우리 모두와 지역의 주민들에게 구원의 기쁨, 해방의 희망이 되는 그날까지 함께 기도하며 열심히 노력합시다. 그렇게 더불어 함께 일할 때에 이 땅에 예수님이 원하셨던 평화를 실현하는 날이 가까울 것입니다.
왕의 피난
마 2:13-23 / 이정선 목사
여러분 장기 둘 줄 아시죠? 장기를 둘 때 왕이 죽으면 그대로 게임이 끝납니다. 아무리 다른 말들이 많이 남아 있어도 왕이 없으면 게임을 할 수가 없지요. 장기에서는 사실 왕이 아무런 힘이 없어요. 포(包)나 차(車)는 막강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지만, 왕은 궁궐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중요하기는 왕이 가장 중요합니다. 포나 차가 죽어도 게임은 끝나지 않습니다. 즉 나라가 망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왕이 없으면 나라도 없습니다.
우리 민족은 5천년의 역사를 통해서 약 900번의 외침을 받았다고 하지요. 그중에서도 가장 혹독한 침략을 당했을 때는 왕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기까지 했습니다. 왕이 붙잡히거나 죽으면 나라의 운명도 그렇게 되기 때문에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왕을 살려야 합니다. 적군이 쳐들어오는데 막을 힘이 없으면 왕이 서둘러 피난을 가야죠.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은 한양을 떠나서 의주까지 피난을 갔습니다. 또 병자호란 때는 인조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가서 버티다가 결국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을 하기도 했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몽고의 침략에 대비해서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기까지 했습니다. 왕을 보호하기 위해서지요.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왕의 피난 이야기입니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묘사합니다. 별을 보고 찾아온 동방의 박사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라고 묻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왕으로 오신 분이 야밤에 황급히 피난을 가야 했던 것입니다.
구약성경 사무엘하 15장에 보면 다윗 왕이 예루살렘을 떠나 도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왕의 피난길은 초라하고 슬프기 짝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이라고 불리는데, 많은 면에서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 됩니다. 아들의 반란군에 쫓겨서 피난을 가는 다윗의 모습은 어쩌면 아기 예수께서 급하게 피난을 가야 했던 사건을 예표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다른 나라의 침략을 당해서 쫓겨간다면 덜 억울하고 덜 슬플지도 몰라요. 자기 몸에서 난 자식이 반란을 일으켜서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쫓아오는데, 그 아들을 피해서 피난을 가는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로부터 영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요한은 말하기를 그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고 했어요(요 1:9). 동방의 박사들은 먼 곳에서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이를 찾아왔는데, 그 왕을 죽이려고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 피난을 가셔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를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칼을 들고 저항하려 할 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3). 또 빌라도 앞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요 18:36).
그런데 왜 그 왕께서 피난을 가셔야 했습니까? 언제 왕이 피난을 가십니까? 그것은 자기 백성들이 그를 영접하지 않을 때입니다. 백성들이 왕을 거부하는데 왕이 그들에게 왕노릇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마음속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요 3:20)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끝내 그분을 영접하기를 거부한다면 그는 쓸쓸하게 떠나실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우리의 욕망과 거짓된 모습, 죄악의 성품을 부인하면서, 그것들과 싸우면서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른다고 말로만 떠들면서 우리 삶 속에서 그것이 실행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또 다시 주님을 피난길로 몰아내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회개하지 못하는 강퍅한 마음과 변화되지 못하는 삶이 우리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피난길로 몰아내는 것입니다.
박사들이 떠난 후에 다시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났습니다. 즉시 아기와 아기 엄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라는 것입니다. 일이 꼬이면 앞으로 넘어져도 뒤통수가 깨진다는데, 지금 요셉의 삶은 꼬일 대로 꼬이고 있습니다. 막 결혼하려고 했던 여자가 덜컥 임신을 한 것으로 드러나 간이 떨어질 뻔했는데, 하필이면 그때 호적하라는 명령이 내려와 만삭이 된 아내를 데리고 나사렛에서부터 베들레헴까지 멀고도 위험한 여행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자리 한 구석을 찾아 아내가 순산을 해서 잠시 한시름 놓는가 했더니, 당장 일어나 아기와 아기 엄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난을 가라는 것입니다. 이거 사람 혼을 빼놔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 지금 이 지경에 피난을 가라고 하십니까? 애를 막 낳았는데, 산모는 몸조리도 해야 하고, 아기도 안정이 필요한데 피난을 가라구요? 그것도 애굽이라니요? 애굽이 무슨 옆 동네인 줄 아십니까? 최소한 삼칠일은 지나야 산모가 바깥바람을 쐴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요셉이 불평하고 짜증낼 만도 하지 않아요? 정말 왜 요셉의 인생이 이렇게 꼬이는 걸까요?
여러분의 인생이 꼬인다고 생각될 때가 있지 않습니까? 특히 하나님 때문에 꼬일 때가 있단 말이지요. 올바로 살려고 할 때 더 꼬이는 수가 있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려고 하니까 꼬이는 일들이 막 생겨요. 바로 그 꼬이는 순간이야말로 우리의 순종이 테스트를 받는 아주 중요한 순간입니다. 바로 그 꼬이는 순간에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했던 마음, 정직하고 바르게 살려고 작정했던 결심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시험을 치는 것입니다. 만일 요셉이 불평만 하고 순종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될 뻔했습니까?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평가가 내려지는 순간들은 모두 그의 인생이 뒤틀리고 꼬이던 순간들이었습니다.
사실 전체적인 큰 그림을 보면 꼬이는 게 아니지요. 그러나 어렵고 고통스러운 문제가 닥쳤을 때 우리는 그 문제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그 어둡고 힘겨운 문제 뒤에 펼쳐지는 밝고 아름다운 광경을 보지 못해요.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과 고통스러운 순간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려는 그 선한 결과로 가는 디딤돌일 수 있습니다. 만일 일이 꼬인다고 생각되면 한 걸음 물러서서 하나님께서 준비하고 계시는 그 복되고 아름다운 결과를 볼 수 있도록 하십시오.
어쩌면 박사들이 찾아온 것은 요셉으로 하여금 애굽으로 피난을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요셉은 물론 나사렛을 떠나면서 여행 준비를 단단히 했겠지만, 애굽으로 피난갈 준비까지는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요셉이 급하게 피난길을 떠나는 데 있어서 박사들이 가져온 선물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큰 부피가 나가지 않으면서도 값이 나가는 그 선물들은 갑작스러운 피난을 위해서 아주 요긴했을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에 가서 얼마나 있었는지는 잘 모릅니다. 몇 개월이었는지 아니면 몇 년이 지났는지 모릅니다. 그러던 중에 다시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납니다. 천사가 자꾸 요셉에게 나타났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요셉과 하나님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힘들고 캄캄한 때는 언제인지 아세요?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되어 있을 때입니다. 하나님과의 통로를 항상 확보하고 사세요. 그래야 우리가 범죄하지 않을 수 있고, 또 실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번에 천사가 나타나서 하는 말은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명백한 대조를 볼 수 있지요? 아기를 죽이려던 자들이 죽었습니다. 반면에 죽임을 당할 뻔했던 아기는 애굽에 안전하게 숨어 있습니다. 권력을 가지고 무자비하게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심지어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까지 죽이려고 했던 헤롯이 마침내 죽었습니다. 하나님과 헤롯의 전투에서 하나님이 최후의 승리를 선언하고 계시잖아요.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헤롯은 내장이 썩는 중병에 걸려 아주 끔찍하게 죽었다고 합니다. 헤롯은 난폭하고 잔인하기로 유명한 인물이었습니다. 자기 어머니와 아들까지도 죽인 비정한 인간이지요.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그런 헤롯의 잔인함을 빗대어 헤롯의 아들이 되는 것보다 개가 되는 것이 낫다고 했어요. 세상의 구세주로 오신 메시야를 잡아 죽이겠다고 수많은 아기들을 학살한 인간이 벌을 받지 않으면 누가 받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을 끔찍하게 죽였으면 자기도 끔찍하게 죽어야지요. 심은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못된 짓을 했다면 자신도 언젠가 그런 일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은 자신도 그런 아픔을 당해도 싸지요. 다른 사람이 아픈 것은 나에게도 아프다는 것을 알아야지요.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악한 말을 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곳이야말로 지옥이 아니겠습니까? 반대로 서로가 상처를 싸매어주고 서로 위로하면서 사랑하는 곳은 바로 천국일 것입니다.
헤롯은 죽었지만 그의 아들 아켈라오가 유대의 임금이 되었기 때문에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고 나사렛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요셉은 꿈에 지시하심을 받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로 알려지게 됩니다. 메시야의 고장은 베들레헴이지 나사렛이 아닙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동네, 왕의 고향이지만, 나사렛은 천대받고 무시당하는 곳이에요. 예수님은 베들레헴 출신이면서 동시에 나사렛 출신이 되셨습니다. 그것은 고통 속에 신음하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왕이라는 이중의 의미를 충족시키는 상징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왕이 피난을 간다는 것은 매우 비정상적인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요셉의 순종하는 믿음이 돋보이고, 또한 그 사건을 통해서 마태는 그분이 구약의 예언대로 오신 왕이심을 증거합니다. 저는 그분이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온전하게 왕노릇하시고, 또한 우리가 왕이신 그분 앞에 겸손히 순종하고 복종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불순종과 불신앙으로 왕이신 그분이 다시 피난길에 오르는 일이 없어야겠지요.
나사렛 사람
마 2:16-18 / 유경호 목사
● 야생성을 잃어버린 교회
지난 4월 24일자 스위스 국제방송을 번역한 연합뉴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스위스 개혁교회가 "원만한 부부관계 정리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며 앞으로 스위스 교회에서 `이혼식'을 거행할 수 있게 된다는 내용의 뉴스였습니다. 결혼한 부부 중 절반 이상이 이혼을 겪는 스위스에서 아직까지는 비공식적이지만 개신교회들에서 결혼식뿐만 아니라 이혼식도 거행하는 방안이 점차로 호응을 얻어 가고 있다는 내용과 더불어 스위스 개신교회연맹은 이러한 것이 이혼을 조장하려는 게 아니라 고통을 겪는 부부들을 도와주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됐으며, 이혼식이 어떤 부부들에게는 유용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도 담겨 있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취리히 개혁교회의 뤼디 라이히 의장은 “결혼종료 의식(이혼식)은 부부가 원할 경우에 가능하며, 이런 의식을 거행하는 것은 결혼의 종료를 하나님에게 알려주는 하나의 방식"이라며 그런 의식이 사람들을 책임있는 부모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도울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모든 기업들은 예외없이 소비자의 성향조사와 모니터링을 합니다. 그리고 소비자의 필요와 요구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예전에 뛰어난 매출을 올리는 기업이었다하더라도 곧 과거 역사 속의 하나의 기업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의 필요(needs)와 요구(wants)에 반응해야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시대적인 요구를 반영해서 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높이를 맞춰야 합니다. 교회의 오랜 신학용어로 굳이 표현하자면, 성육신(incarnation)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스위스 개신교회연맹의 교인들의 필요와 요구에 반응하려는 노력은 탁월할 뿐만 아니라, 선구자적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주 훌륭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도 철저히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필요와 요구가 무엇이냐? 즉, 하나님 그분께서 뜻하시고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를 묻지 않고, 알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결혼 종료를 하나님에게 알려주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표현하는 그것들은 실상 인간의 무지함과 오만함을 드러내는 무지몽매한 제도적 죄악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요구에 반응하는 것이 아닌, 사람들의 요구와 필요에 반응하는 진리와는 무관한 모습입니다. 이쯤 되면 이러한 교회는 본질, 즉 ‘야생성을 잃어버리고 인간에 의해 길들여진 교회’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 야생성의 회복과 하나님의 계획
저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자기 내면의 깊은 곳에 “잠자는 거인”을 갖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 거인은 가만 두어도 나이가 들고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드러나는 거인은 아닙니다. 땅 속에 숨겨져 있는 보물은 곡갱이질이 되어 흙이 찢어지는 아픔을 겪어야 비로소 지상 위로 올라오듯이, 대리석 속에 숨겨져 있는 놀라운 조각상의 모습은 망치와 정질이 되어야 아름다운 예술품의 모습으로 나타나듯이, 우리 속에 잠자고 있는 거인을 깨우기 위해서는 때로 우리의 요구(wants)와 필요(needs)에 역행하는 시련의 채찍이, 때로 훈련의 혹독함이 필요합니다. 아이의 교육에 있어 다들 경험해 보셨지 않습니까? 아이가 원한다고, 하기 싫어한다고 하고 싶은 대로 다 놓아두면 아이 속에 잠자고 있는 거인은 그 아이의 일평생 동안 깨어나는 법이 절대 없을 것입니다. 잠자는 거인은 안정과 균형이 깨어질 때 비로소 ‘이대로 잠자고 있어서는 안되겠구나’라고 놀라 일어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우리 속에 잠자는 거인을 깨워야 합니까? 왜 삶의 안정과 균형이 깨지면서까지 거인을 깨우며 살아야 합니까? 우리 인생이 안정과 편안함만을 추구할 정도의 가치밖에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번 뿐인 우리의 인생은 안정과 편안함보다도 훨씬 높은 가치가 있는 소중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동물원 속에서 사육사가 던져주는 먹이를 받아먹고, 가끔 구경꾼들을 향해 “어르렁”하고 소리지르는 사자가 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프리카의 밀림과 사바나의 초원을 헤치며 질주하기 위해, 온 천지 초목들을 향해 포효하는 사자가 되기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이와 같은 인식에 동의하신다면 우리에게서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할 것은 “야생성”입니다. 사람에 의해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성의 회복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이 길을 걸어가는 데 있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에게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성, 오직 한분 하나님에게만 길들여진 이 본성은 우리가 회복하고 추구해 가야 할 가장 우선시 되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한분께만 길들여진 야생성을 가진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은 진정한 크리스천으로 살기 위함입니다. 크리스천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내가 구원얻었다는 데만 만족하며 살아가는데 생의 의의가 있지 않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의 생의 의미는 하늘이 부르셔서 하나님 그분 앞에 서기까지 우리 안에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나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전해지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데 우리 생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것을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잊고 살려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수영을 배우는 목적은 얕은 실내 수영장에서 고무튜브를 타며 놀려고, 또는 땅 짚고 헤엄치기 위해 수영을 배우지 않습니다. 물론 건강때문이기도 하지만, 언젠가 있을지도 모를 위기 상황에서 생명을 건지기 위해 수영을 배웁니다. 우리는 겨우 저녁식사 후 천천히 산보할 정도의 능력을 키워주기 위해 운동장에서 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우리의 인생을 향한 계획과 목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레미야 12:5이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
하나님께서 크리스천이라고 불리는 우리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와 함께 길을 걷는 보행자와 함께 달려서 이기는 수준이 아니라, 적어도 달리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말과 더불어 경주해도 이길 정도의 강인한 하나님의 자녀로 훈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넘실거리는 요단강의 강물 앞에서도 전혀 주저치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믿음으로 첫발을 내딛을 수 있는 그런 용사로 우리를 세우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목표와 계획이라는 겁니다.
● 하나님의 아주 특별한 메시야 만들기
1. 관광비자가 아닌 거주증
우리 앞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 분명한 목표와 계획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인간의 몸으로 보내셔서 이 땅의 오랜 인간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하셨던 하나님께서는 단번에 성인의 몸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그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살아갈 크리스천들에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계획임을 아셨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면 사람들은 이렇게 소리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죠?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의 삶과 무슨 상관이 있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한 여인의 모태를 통해서 태어나시는 것부터 시작해서 성인이 되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인간 생활의 틀 한 가운데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것도 제일 열악한 조건만을 옵션으로 선택하시기 까지 하시면서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삶은 이 땅을 살면서 그분의 삶을 따라 살려는 사람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모델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부모인들 자식을 좋은 환경 가운데서 키우고 싶지 않은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좋은 마을, 교양있는 이웃들, 그리고 학군 좋은 곳에서 양질의 교육을 받으며 키워서 그야말로 남들이 알아주는 그런 학교에 보내고 싶은 것이 대부분 부모들의 마음 아닙니까? 하나님 역시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이 땅에 내 보내시면서 부모로서 그런 마음이 왜 없으셨겠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왜, 무엇 때문에 인간의 몸으로, 인간의 틀 속으로 보내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한 분명한 목적을 잊지 않고 계셨습니다. 그렇기에 가슴 아프지만,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고난의 장으로, 훈련의 장으로 돌리시면서 아기 예수님과 그 가족들이 광야학교를 거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이 땅에 관광 비자를 가지고 유람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거주허가증을 가지고 오셔서 사셨습니다. 그저 시간날 때 여행하며, 사람들 하고 수다 떨며 먹고 즐기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이 목적이었다면 굳이 예수님께서는 그 험난한 코스들을 옵션으로 선택해서 오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의 몸을 찢어 사람들에게 먹여 그들로 하여금 새 생명을 얻게 하고, 당신의 피를 짜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생명의 피를 소유케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메시야 예수님이심을 한시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러하기에 안락한 삶 가운데서 사람에게 길들여지고, 물질에 끌려 다니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해 오직 그 한길을 걸어가셨습니다. 하나님 그 분에게만 길들여 진 야생성을 키워가시기 위해 고난과 훈련의 과정을 기꺼이 겪으셨던 겁니다.
2. 나사렛 학교
하나님께서 ‘예수님 메시야 만들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예수님 가족을 첫 번째로 입학시키신 학교가 ‘이집트 광야학교’였다면, 그 다음 진학시키신 학교는 ‘나사렛 학교’였습니다. 나사렛은 구약성경에서 그 지명이 단 한 체례도 등장하지 않았던 마을이었습니다. 워낙 작디작은 마을이었을 수도 있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의 포로귀환이후에 비로소 형성된 마을일 수도 있습니다. 나사렛은 예루살렘에서 북으로 92㎞, 갈릴리 바다에서 서남 19㎞, 가나에서 남쪽 13㎞에 위치하고 있는 해발 350m의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나사렛은 인구 200명 미만의 고립된 도시였으며, 로마군인들이 국경선의 문제가 생기면 출동하기 전에 쉬어가는 점령군의 주둔지로 사용되어있었기에, 혼합주의와 그에 따른 문화에 의해 주위 동족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당하곤 하는 곳이었습니다.
‘나사렛 출신’이라는 말이 얼마나 동족들에게 무시를 당했느냐하면, 요 1:45-46에 보면 빌립이 자기 친구 나다나엘에게 메시야를 만났다며 전도할 때, 나다나엘이 예수님의 출신고향이 ‘나사렛’이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사렛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없다.’라고 단언하지 않았습니까? 그만큼 나사렛은 보잘 것 없고, 천대받는 낮고 낮은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굳이 자기 동족들에게조차도 인정받지 못하고, 천대받는 이런 마을로 예수님을 살도록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읽은 마 2:23은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고 적고 있는데 실은 구약성경 어디에도 예수님께서 나사렛(나자레드 Nazarevq) 사람으로 불려지게 될 것이다고 예언된 곳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거짓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게는 볼 수 없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사야 11장 1절에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예언한 것에서 “가지”라는 것이 ‘나짜르’( rx'n)인데, 언어기교로서 사 11:1에서의 이 호칭과 나사렛이란 동네와의 음성적 일치를 이루어 표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학자들에 따라서는 하나님께 ‘구별되다’, ‘성별된, 봉헌된’이라는 뜻을 지난 나실인(나자르: ryzIn:)이 나사렛과 그 음에 있어서 비슷하기에 마태가 그렇게 표현을 했다고 하기도 합니다.
여하튼 지금은 인구 5-6만의 광역도시로서 이스라엘 중 잘 사는 도시로 포함되지만, 예수님 당시 인구 200명 미만의 도시로서 멸시와 천대를 받던 나사렛으로 내려가신 예수님께서 30세가 될 때까지 그곳에서 사셨던 것을 가만히 묵상해 보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위로와 격려와 희망이 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베들레헴 예수’, 혹은 ‘예루살렘 예수’라고 불렸다면 훨씬 더 사람들에게 무게감 있게 매력적으로 다가갔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이기를 더 기뻐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 속에서 동족들에게조차 멸시받고 인정받지 못한 나사렛의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삶과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빠리의 예수, 예루살렘의 예수"보다는 "나사렛 예수"가 우리에게 한없이 더 정감 있게 들리고 감격있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외되었던 나사렛이 오늘날과 같은 광역도시가 된 가장 주된 이유는 마리아와 요셉의 원 고향이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성장장소였다는 것 때문입니다. 이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아랍인들 중에서도 복음을 받아들이고 크리스천이 되었던 사람들은 사랑하는 주님께서 사셨던 곳에서 살고자 하는 소망 때문에 그 땅을 가꾸며 살아 왔습니다. 오늘도 예수님 그분께서 자라고 생활하셨던 그 삶의 정취를 느끼고자 세계각지에서 수많은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나사렛을 향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보며 또 다른 감동을 느낍니다. 소망없던 한 작디작은 마을을 소망 가득한 마을로 바꾸어주신 예수님, 멸시받고 인정받지 못하던 마을을 희망의 장소로 바꾸어 주신 예수님. 그리고 오늘도 소망없이 살아가는 세계 수많은 곳의 초라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마음에 소망의 한 가지(나짜르)가 되어 주시고 생명의 한 가지(나짜르)가 되어주시는 “나사렛 사람” 예수님의 손길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바로 소망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의 생명과 희망이 되시기 위해 기꺼이 “나사렛 사람”이 되셨던 것입니다.
● 희망의 가지, 생명의 가지 “나사렛 사람”
100여년전 유태인들이 현재의 이스라엘 땅에 살기 위해 들어갈 때만 하더라도 그 땅은 거의 버려진 황무지 투성이였습니다. 성경에서 분명 팔레스틴 그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이라고 했건만, 자신들이 경험하는 땅은 그것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곳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젖”이라는 것은 “목축업”을, 그리고 “꿀”이라고 하는 것은 “과일(포도, 석류, 무화과)”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지만, 이스라엘의 농촌으로 향하는 유태 엘리트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분명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만들어진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이기에 그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어가야 할 땅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그 믿음 때문에 그들은 황무지를 살리고자 싸우다가 죽어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이 주신 땅이라는 신앙과 약속의 땅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 그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천대받고 소외받던 “나사렛”으로 내려간 “나사렛 사람”이었습니다. 희망없던 황무지에 소망을 심고, 생명을 불어넣은 한 가지 “나짜르”였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 우리도 나사렛으로 내려가십시다. 낮고 낮은 곳으로 기꺼이 선택하신 예수님을 그 낮은 나사렛에서 만납시다. 소외와 천대와 멸시를 받던 곳을 진리의 전당으로 바꾸어주신 생명의 예수 그리스도를 그곳 “나사렛”에서 만납시다.
너무 만들어진 진 예루살렘만을 좋아하고 선호하지 맙시다. 만들어 가는 아름다운 즐거움 “나사렛”을 가지십시다. 그리하면 믿음이 현실보다 아름다울 때에 그것이 현실로 드러나는 일을 우리 눈으로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훈련받기를 주저하지 마십시다. 나사렛으로 내려가는 것을 겁내지 맙시다. 우리 인생의 보다 궁극적인 성공과 형통을 위한 가장 위대한 자산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훈련”입니다. 훈련을 통해서만 숙달이 되듯이, “나사렛”으로 가는 훈련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생명의 가지가 될 수 있습니다. 희망의 가지 “나짜르”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목표를 형의하학적인 것에서부터 벗어나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원하시는 높은 이상을 추구하십시다. 안정과 편안함만을 추구하기 위해 사람에게 길들여져 왔던 것에서 벗어나 하나님 한분께만 길들여진 야생성을 회복하십시다. 그저 숨쉬고 먹고 마시는 것, 캠핑카 몰고 놀러다니는 그런 수준의 꿈에서부터 떨쳐 일어서서 내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꿈을 꾸십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죽은 육체에 생기를 불어넣으시자마자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듯이, 내가 머물고, 만나는 곳에서 나의 호흡하고 숨쉬는 것으로도 생명이 유통되는 그런 꿈을 꿉시다. 나의 손이 닿는 곳마다 죽음이 물러가고 새 생명의 꽃이 피워지는 부활의 꿈을 꾸십시다. 이제 내 속의 잠자는 거인을 흔들어 깨울 준비가 되셨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오직 하나님 한분께만 길들여진 희망의 가지(나짜르), 생명의 가지(나짜르) “나사렛 사람”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나사렛 예수
마 2:19-23 / 박지온 목사
오늘 제목을 나사렛 예수라 그랬습니다. 속된말로 '촌놈 예수다!' 그런 뜻이에요. 여기 성경에 배경을 굳이 제목을 삼았느냐! 제가 이 늘 그 하나님의 계획을 이야기하면서도 성경은 마태복음 1장에 읽으면서 어쩌면 하나님이 믿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이렇게까지 자세히 하나님이 하신다는 사실을 설명을 해 나가시고있다는 것을 마음에 너무 느끼고 있습니다. 원래 그 여기 선지자로 그랬는데, 특별히 성경에 선지자라 하는 어떤 선지자가 말했다는 부분은 아닙니다. 이 부분은 원문으로 "챠르" 이렇게 해석되어있습니다 만은... 그래서 성경에 원래 이 나사렛 선지자로 하신 말씀은, 이것은 '선지자들로...' 라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선지자가 나사렛에서 예수께서 사신다! 그런 말씀으로 직접 예언한 것이었고 지금까지 말씀하신 바 이것을 전체로 묶어 가지고, 전체 선지자들이 그 말씀 속에 '나사렛에 살겠다!' 라는 뉘앙스가 나왔다! 그런 어떤 배경이에요. 그러니 마태에 선지자로 통해서 사시겠다! 여기 나사렛에 산다는 사실에 대한 말에 해석은 마태 자신에게 언급을 하고 내렸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데로 헤롯대왕이 학정을 했습니다. 또 너무! 유대나라 국민도 아니고 자기가 이제 에돔 족속이기 때문에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굉장히 여러 가지로 유대를 핍박하고 학정을 했는데, 그 아들 아켈라오가 더 악한 학정을 했습니다.
악한 왕이기 때문에 헤롯 대왕 때에 예수님이 나셨고 예언하신 바대로, 말씀하신 바대로 하나님이 애굽으로 예수님을 피난 시켰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돌아 왔는데 어디로 가겠습니까? 오니까 더 악한 왕이 지금 유대를 집권하고 있으니까, 피해서 숨어간 곳이 바로 이 '나사렛' 입니다. 예를 든다면 여러분 그 피하면서 다니는 사람이 요즘처럼 대도시에 나올 수는 없죠. 차라리 어떤 면에서 요즘 서울에 숨었다! 이러면 괜찮은데, 그때는 그렇게 도시 형성이 그렇게 많지를 않으니까! 이 나사렛이라는...
조금 제가 이렇게 상고를 해 보니까, 거의 뭐 사람이 없어요. 인적이 없는 그런 곳에 깊은 산골짜기입니다. 그 속에 들어가서 사람과 사람사이에 관계도 다 끊고 그렇게 들어가셨습니다. 그래서 뭐 옛날로 말하면 우리가 강원도에 갔다! 아니면 뭐 저기 옛날에 그 귀향 보낼 때에 멀리 제주도라던지, 특별히 남해나 서해 어떤 섬으로 보냈던 것들이 그런 배경들이 있잖아요. 강원도 그러면 촌놈이라고 그러잖아요. 우리 교회에도 뭐 강원도 분들이 계시는데, '감자 바위!' 라 그러고 그런 어떤 별칭까지 붙이고 있는 배경이... 그래서 예수께서 '나사렛에 사셨다! 나사렛 예수다!' 그러는 배경은 막말로 하면, 요즘 속어로 '감자바위 예수다!' 이런 식으로 아주 촌사람이라는 사실을 지적해서 한 말씀이 여기 배경입니다.
대강 오늘 배경 설명을 이쯤 해 놓고 제가 한번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좀 던져 보겠어요. 뭐냐하면, 여러분 아이가 낫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이 아이를 창조하셨다!' 고 믿습니까? 아니면 '내가 아이를 낳았구나!' 이게 더 가깝습니까? 여러분 대강 생각이 어디로 돌아갑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그것은 믿고 알기는 하지만 그렇게 별로 생각을 안 해요. '아, 오늘 아이를 낳았구나! 당연히 수고해서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보통 이제 말하죠.
가을이니까 잠자리가 이렇게 날아가면 '아, 하나님이 정말 아름답게 창조하셨네!' 이렇게 잘 이야기가 안 돌아가요. 그런데 사실은 좀 신학적인 언어가 보편적으로,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고,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흙으로 빚어서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이것을 창조라 그러죠. 그런데 이 인간이 계속해서, 또 사람이 사람을 낳고, 낳고 해서 여러분과 제가 낳잖아요. 그러니 마태복음 1장에 낳고, 낳고의 산물들이 여러분과 저희들입니다.
그 다음에 지금 '아~' 감탄사로 '아, 가을인가 봐!' 오늘 7시 30으로 당긴다는 소식은 가을이 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분명히 여러분 보면, 이 산과 들이 이제 바꾸어지죠. 그러면 시절을 따라서 이렇게 바꾸어지고 모든 창조에 대한 그런, 아름다운 그런 천하만상이 움직여 나가는 이것을 가지고 이것은 창조라고 말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그렇게 보통 말을 합니다. 창조와 보존! 그래서 지금 창조에 있어서 보통 쓰는 말이죠.
그 다음에 이 보존하셔서 가을이 오고 그 다음에 봄이 오고 이렇게 쭉 나가는 이런 모든 문제... 그래서 세상살이 모든 일어나는 이 일들 세대, 세대마다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합쳐서 우리는 보통 뭐라 그러냐 하면, 하나님의 섭리라 그럽니다. 섭리라! 그러니 인간사에 일어나는 것도 같이 섬리라고 말하고있습니다 만은, 그렇게 말하죠.
그 다음에 이제 구체적으로 여러분과 제가 구원과 직접 관계되어져서 하나님이 그 주권배경에서 나를 구원해 주시고 너를 구원해 주시고하는 구원과 이런 직접적인 배경에서는 뭐라 그러냐 하면 '하나님의 예정!' 이라 그럽니다. 예정설! 구원관에도 예정설 아니면 또 말하는 보편적인 만인 구원 설이라든지, 안 그러면 예지, 예정에도 먼저 알고 이렇게 또 여러분과 저를 믿을 줄 알고 먼저 이렇게 또 계획하셨다! 그런 어떤 부분들로 또 교단까지 나누어지는 그런 부분들도 아마 굉장히 중요한 그런 내용이 되겠죠.
그러나 구원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문제들로는 보통 이제 예정! 우리 장로교에서는 제가 믿고 여러분들이 믿고 있는 그런 보편적인 믿음의 배경에서는 예정이라 그럽니다. 예정!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이제 말씀한 것처럼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보존하시고 그 다음에 모든 하나님의 그 보존하시는 섬리와 예정 속에서 여러분과 저의 때에 시절이라고 때가되매 이런 상황과 현상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창조라는 말이 나와요. 새 창조가 되는 그런 상황이 나옵니다. 그게 뭐냐하면, 여러분과 제게 생명 들어가는 순간 하나님께서 '보라 새로운' 뭡니까? '피조물이라!' 그럴 때에 이것이 새로운 창조물이다! 그런 말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생명이 들어가는 때에 누구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들어가는 때에, 이걸 일컬어서 '새 창조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여러분 생명 들어간다는 사실이 이건 엄청난 변화예요. 그래서 흔히 그러잖아요. 홍해가 갈라졌다! 그것보다 더 큰 기적이 여러분과 제가 믿는다는 사실입니다. 믿는다! 구원받았다는 사실! 이건 뭐 홍해가 갈라졌다는 문제가 문제 아니에요. 그리고 여러분 주변에 뭐 기적이다. 그것보다 더 큰 기적이, 전혀 불신앙이었던,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구원받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믿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에 저 천국의 소망으로 우리 가슴속에 확 정립이 되는 것! 이것이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 가을 맑은 하늘 어디에 천국 있습니까?' 이러면요. 할말 없어요. 그러면 천국 가봤냐? 할말 없어요. 가 봤어요? '가봤다!' 그래요. 우리는 확실히 아니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과 제게 이루어 졌습니다. 이게 여러분과 제가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확신하는 만큼 뭐가 옵니까? 응답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확신이, 생명의 확신이 응답하는 만큼, 응답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성경은 주로 이제 '씨라, 생명이라!'
그래서 이제 구약에 보면 창세기 22장 예수 그리스도를 확인하고 그 예언의 역사가 나오죠. 이삭을 드리는 것으로 수양이 죽게 되는 그런 사건이 모리아 산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이 이 22장 18절에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그리고 17절에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그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네 씨로 말미암아, 네 씨가...' 이래서 이것은 생명 예수그리스도! 이렇게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조금 마음을 열어서 지금까지 그 하나님의 계획이라든가, 그 다음에 하나님의 구체적인 여러분과 저를 향한 그런 하나님의 상세한 그런 어떤 배경들을 설명했어요. 이것이 완벽하게 깔려 있지 않으면 자꾸 뭔가 우리가 다른 데로 뭔가 빠질 수 있어요. 다른 데로... 이것 사실 자체를 우리가 잘 못 믿는 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의 맹점이거든요. 이걸 거의 안 믿어요. 안 믿으니까 뭐냐? 내가 나오고, 네가 나오고, 교회 안에도 자꾸 우리 자신이 나오고, 교만하고 또 실망하고, 또 교만하고 또 실망하고 지금 이것이거든요. 내가 하고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닌데...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상세한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 이번에 그 신학교 교수들 모임에 있어서 세미나에서 창조학회 그 교수로 계시던, 창조학회를 담당하고, 주로 그 진화론과 창조론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교수로, 한동대 교수로 '김 명 현 교수' 라고 와서 강의를 좀 하셨습니다. 하셨는데, 그 신학교에도 강의를 하시고 그러는데 제가 그 강의를 들으면서 '아, 너무 세밀하게 나를 계획하고 있구나!' 이게 너무 절실하게 마음에 와 닿는 것이...
그래서 그랬어요. 제가 1부 예배는 좀 부탁을 했습니다. 우리 박 경 호 집사님이 관계하고 있으니까, 혹시 연결이 되면 우리 교회에서 구체적으로... 이 분이 그 슬라이더 가지고 이 비춰주고 그래요. 간단하게, 여러 가지 말하면 복잡하니까! 진화론에 대해서 한 몇 분만, 얼마만, 몇 마디만 해 버리면 진화론이 여지없이 엉터리라는 것이 금방 판명이 돼요. 그 다음에 창조하셨다! 이게 너무 절실하게 나와요.
그래서 그 1부에도 조금 물어봤습니다. 물어봅시다. 여러분 TV에서 두 사람이 면담을 하는데, 한 분은 과학자고 한 분은 목사입니다. 누구 말을 더 믿겠습니까? 예, 맞아요. 인간 심리가 과학자를 더 믿습니다. 목사 말은 거의 안 믿어요. 우리 성도들이 믿습니다. 그러는 것은, 그것은 신앙이라는 배경으로 믿습니다. 그것은 잠시 후에 믿을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말할게요. 왜, 과학자의 말을 더 믿느냐? 과학자는 증거를 가지고 나와요. 증거를 가지고... 그러니까, 과학자의 말을 믿는 겁니다. 그 목사의 말은 증거를 가지고 나와도 내게 증거가 없으면 그게 인식이 안돼요. 그러나 우리가 목사의 말을 확실히 더 믿습니다.
이야기 나올 때에 우리 입장에서는 믿을 수 있는 배경이 뭐냐하면, 내가 그 말씀에, 내게 뭐가 있습니까? 증거가 있을 때에 믿습니다.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일반 모든 사회에서 과학자라 그럴 때는 거기에는 일반적으로 과학적인, 교과서에 나오는 증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믿는 것이죠. 그러면 이제 보통 목사님들은 그런 증거를 일반적으로 안 대주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못 믿고...
그 다음에 창조하셨다는 말도 우리가 말씀가지고 그냥 이렇게 증거를 하는데, 이걸 과학적으로 증거를 해 주면요. 특별히 대학생들 뭐, 진화론이냐? 창조론이냐? 저는 간단하다 싶어요. 그래서 혹시 우리 교회에서 우리 창조학회에서 교수가 나와서 강의하신다! 그러면요. 여러분 몽땅 나오세요. 아이들 다 데리고 나오세요. 여러분 믿음에 정말 사실적인 증거를 가지고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는 이런, 이런 과학적인 증거가 있다! 창조학회에 자료 과학이라! 그래서 그런걸 설명할 수 있도록...
예를 약간 든다면 쥐가, 박쥐가 되었습니다. 과학에서 진화론이라 그러죠. 그러면 쥐가 박쥐가 되었다! 그럴 때에 쥐가 박쥐가 되는 과정에서 날개라는 과정도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발이 변해서 이런 과정도 있어야 되고 이걸 쭉 거쳐 가지고 박쥐가 되어야 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쥐에 화석뿐이고, 박쥐의 화석뿐입니다. 중간 과정이 전혀 없어요. 그러면 우리가 진화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느냐? 중간 과정이 없는데... 화석을 하나 제시했는데 뭐냐? 지금의 박쥐 화석 그대로입니다. 나오지를 않아요. 쉽게 말해서 우리가 인간이, 원숭이가 인간이 되었다! 그러면 원숭이가 인간이 되는 무수한 과정을 설명을 해야 되는데 그게 설명이 없어요. 말하는 설명은 엉뚱한 설명이에요.
뭐 이상하게 나오는데 뭐 누구한테는 되지 뼈다귀가지고도 증거를 대 놓고 하다가 나중에 그것도 밝혀지고 그랬습니다. 증거가 나오지를 않아요. 모든 종은 아메바에서 나왔다! 말, 새, 그 다음에 인간! 이렇게 해 가지고 아메바에서 나왔다! 뿌리는 하나예요? 그런데 아메바에서 나왔다는 증거가 없어요. 왜? 밑에만 딱 잘라 버리면, 화석에 지금까지 말이면 말에 대한 종류뿐이고, 새면 새에 대한 종류뿐이고, 사람도 사람에 대한 흑인종, 황인종... 종류뿐이지, 그것의 중간단계가 없어요. 그래서 딱 밑에 것을 떼 내어 버리면, 말은 말대로, 채소는 채소대로, 씨 맺는 열매는 열매대로, 종류대로 날수 있다! 창조론 그 대로입니다. 밑에 것을 떼어버리면 아메바는 그대로... 우리가 황당한 이야기예요. 이것을 같다가 붙여 가지고 진화론을 설명을 합니다.
제가 잠깐 들으면서 그것을 구체적으로 슬라이드를 비추면서 하는 것을 들으면서요. '야, 우리 학생들은 잠깐만 들어버리면 해결이 되겠다!' 그런데 나는 그 중에 뭘 말하고 싶으냐 하면, 다른 게 아니고요. 나는 하나님이 계획하셨다! 여러분과 저의 인생을 계획하셨다는 말이나 절실하게 느껴지는 창조론에서 그런 내용이 나와요. 어떤 것이냐 하면, 대장균에 세포를 떼어 가지고, 보이지도 않죠. 뭐, 우리 머리카락의 1/10도 안 된다 그러는데 그것을 떼어 가지고 조사를 하니까! 소위 말하자면 세포에서 나오는, 그게 뭐냐하면 대장균의 세포 속에서 그 대장균에 대한 성격이라든가, 그 다음에 어떻게 다음에 나올 것인가, 그것에 대한 어떤 그 설계도가 그 안에 기록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설계도가 세포하나 안에... 그러면 그 설계도에 의해서 죽고 살고 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 설계도의 부수가 글로 치면 그 안에 부수가 얼마나 되느냐 하면, 그 1,000페이지, 1,000장! 글자수가 하여튼 그렇게 많지는 않더라 구요. 그런 어떤 정도로 글 내용이, 설계도가 그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람의 적혈구에 있는 세포를, 적혈구 하나를 가지고 딱 분석을 했는데, 그 안에 그 사람의 성격, 그 사람이 어떻게 될 것인가, 어떤 후손을 낳을 것인가! 다 설계도가 그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 안에 그렇게 되어 있는데 그 설계도가 어느 정도냐 하면, 약한 성경 한 권 정도! 그러니까 말하자면 대장균에 있는 것은 성경 한 권 정도 내용이 수록이 되어있고 그 다음에 사람에게는 얼마나 분량이 많냐? 이 정도의 성경 한 권이, 천 권의 분량이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생각을 한번 해 보세요. 세포하나에...
그 다음에 그 안에 그것이 그 수록이 되는데 거기서 뭐냐하면, 자기 후손까지, 나올 것까지 다 이걸 가지고... 우리가 뭐라 그랬냐 하면, 요즘 학자들이 이걸 발견을 해서 '그놈' 이라 안 그럽니까! 게놈 프로젝트! 게놈, 이것도 이제 뭐냐하면 딱 세포마다 이제 다 그렇게 유지가 되는데, 유지에 보니까 아미노산 종류로 유지가 있고, 또 뭐 이렇게 그 마치 벽돌도 우리가 적 벽돌, 흑 벽돌처럼 종류가 있더라 구요. 그러면 이제 쌓여 가지고 이 세포가 쌓여있는데 인간에게는 100조정도의 세포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100조라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 이것은 우리가 상상도 못할 그런 겁니다.
그러면서 뭐냐하면 아담, 하와를 하나님께서 흙으로 창조하셨지만 창조하시면서 아담하와에게 뭐냐하면, 창조하시면서 인생 전체와 세계 전체 인간에 대한 모든 설계도가 아담 하와 속에, 설계도에 의해서 쭉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지금 현재 나왔다? 하나님께서 벌써 한 인간, 한 인간 뭡니까? 벌써 위에서부터, 창세 전부터 다 설계한 설계에 의해서 진행된 것입니다. 개개인을 분석하려고 그럴 때에 그것을 가지고 게놈 프로젝트라 그럽니다.
그래서 앞으로 이것이 해독이 되면, 이제 해독이 된다 안 그럽니까! 그러면 이 사람은 뭐가 약하고, 병에는 뭐가 약하고, 이런 병이 올 수 있고, 후손은 뭐가 오고... 그래서 이 상당히 문제되는 것도 안 있습니까! 아예 안 좋은 사람은 후손도 없애 버리고, 아예 안 좋은 사람들은 보험도 안 들어주고, 이런 문제가 생긴다 안 그럽니까! 그래서 내가 났다고 그럴 때에 나에게 대해서 모든 설계도가 벌써 쫙 나한테 나오는 겁니다. 여러분 창세 전에 여러분 계획하셨다는 말이 좀 이해가 됩니까? 세밀하게...
그런데 우리는 엄청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세웠다! 세계복음화에 계획 속에 세웠다! 언제부터?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제게 영적으로 완벽한 설계도를 딱 우리 인생 속에 개입을 시켜놓고, 그 다음에 그때부터 어디에? 세계복음화까지 가도록 하나님 뭐합니까? 세밀하게 인도하신다는 사실이 너무 나는 과학적으로이게 너무 너무 증거가 되더라 구요. 그렇게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생명이 생명!
그래서 여러분 그 제가 우리 남3 전도회에서 좀 메시지 전하면서 책을 제가 인용을 통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만은, 여러분 아이를 놓고 아이가 이렇다 저렇다 그럴 때에 그걸 뭐 흔히 '지 애미 닮았다! 지 애비 닮았다!' 그러는데 성경에 사상이 어떤 사상이냐 하면, 아이의 생명은 구가 줍니까? 하나님의 주시는데, 하나님이 누구를 통해서, 아버지입니까? 어머니입니까? 아버지를 통해서 생명을 주었습니다. 그러니 성경은 여자 이름이 없어요. 누가 누구를 낳았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그리고 사라 이름을 빼어 버렸어요. 남자가 낳는 걸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과연 그 책에 보니까! 제가 그 "아빠가 된 당신의" 책을 제가 보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아이를 10달 동안 가지고 어머니가 태 중 교육이 전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요즘 우리가 이걸 알고 아주 교육을 많이 하죠. 그래서 아빠가 밖에 갔다가 와도 '야, 네 아빠 왔다!' 이게 벌써 배속에 이름을 지어놓고, 그래놓고는 뭐 이야기도 하고 오늘 회사에 무슨 일 있었다. 그러고 두 부부 앉아 가지고 배를 붙잡고 이야기하고 옛날 어른들은 웃기는 이야기이지만 요즘 젊은 사람들은 상당히 보편화되어 가는 그런 추세 아닙니까!
그래 가지고 뭐 영재를 일찍부터 만든다고, 뱃속에서부터 영재를 만든다고 야단하는데... 영재는 하나님이 준비 해 놓았습니다. 너무 사람이 만든다고 오해하지 마세요. 그러나 우리가 그걸 믿고 뭔가 우리가 행동하는 자체조차도 하나님이 계획하셨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여러분 아무리 뭔가 내가 세계복음화 계획하셨다. 그 계획에 실제적인 지금 현재 증거가 뭐냐? 내가 예수 그리스도 믿는다는 사실 자체가 벌써 증거입니다. 이게 안 되었다! 그러면 아무리 해도 말이 안 되거든요. 그것도 계획하셨다. 그런 계획이 돼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10달 동안 아무리 교육을 잘 한다 그래도 10달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데요. 그게 뭐냐? 어떤 씨를 받느냐? 이겁니다. 어떤 남자의 씨를 받느냐? 이게 10달보다도 더 중요한... 예를 들어서 책에 어떻게 이야기를 했느냐 하면, 정자가 난자를 만나기 전에 정자가 준비될 때에 그 남자의 성격, 생각, 마음, 뭐 알콜 중독이면 알콜 중독 인자! 그 다음에 마약 중독자면 마약 중독 인자! 그 모든 남자의 것이 다 거기에 들어 간데요. 그래서 그 남자의 씨가 여자에게 들어가면서 어떤 씨를 받았느냐? 여기에 10달 뿐 아니라 아무리 애를 써도 어떤 씨냐? 여기에 결정이 되어 버립니다.
남자 분들 진짜 회개해야 됩니다. 그때에 내가 어떤 마음으로 내 아내와 함께 했느냐? 이것이 그 후손에 있어서 전 인생에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된다! 이것을 이해하셔야 돼요. 나는 그게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왜? 아이를 배 안에 않고 서양 사람을 생각하면서 '너는 키가 엄청나게 크고 눈이 새파랗고 앞뒤통수가 튀어나오고...' 아무리 기도해도 안 됩니다. 왜, 안됩니까? 씨가 아닌데... 만약에 여러분들이 아이를 낳았다! 앞뒤가 툭 튀어 나왔다. 키가 크다. 눈이 새파랗다. 놀라 자빠집니다. 왜? 씨가 아닌데... 그것은 반드시 뭔가 이상한 일이 있었던 것이지.
여러분 제가 이 말 할 때에 잘 알아 들으셔야 합니다. 문제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여러분 지금 현재 내가 예수를 잘 믿기 위해서 이것 한다. 저것 한다. 뭘 한다. 노력한다. 애 쓴다. 상관없어요. 가장 중요한 것이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들어가야 됩니다. 그게 안 된 상황에서 기도 백 번, 천 번하고 막 철야를 맨 날 밥먹듯이 한다! 그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오늘 아침에 1부를 마치고 나서 사과를 딱 먹었어요. 먹으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아, 맛있다!' 그러면서 뭔 생각을 하느냐 하면, 씨가 입에 딱 들어가더라 구요. 여러분 사과가 종족 번식을 위해서 뭘 만들었느냐? 맛있는 과일을, 그 사과 육질을 만들어 내잖아요. 그러니까, 그 육질을 먹기 위해서 우리는 먹지만은, 사과의 입장에서는 뭡니까? 씨를 퍼트리기 위한 방법이고 수단입니다. 그러면서 '아, 사과 참 맛좋다.' 이 맛좋은 것을 그대로 나게 해야 되겠다! 그러면서 씨는 다 빼어버리고 맛 좋은 사과를 땅에다가 육질을 한 입 물고 이걸 땅에다가 심었다! 철야기도를 아무리 해도 싹이 납니까? 안 납니까? 안 나게 되어 있어요.
왜? 씨가 없어요. 아무리 맛좋은 포도를 가지고, 껍질만 딱 해 가지고 '아, 껍질 참 아름답다! 이런 포도를 맺어라!' 그래가지고 막 땅에다가 심고 거름을 계속 더 주면요. 더 썩어 버리지. 뭐가 안 나와요? 싹이 안 나옵니다. 우리 신앙에 계속 우리가 율법이 어떻고, 그 다음에 뭐 종교가 어떻고 막 말을 많이 했는데, 이게 얼마나 여러분 절실하게 마음에 부닥치는 줄 모르겠어요.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애를 쓰고, 아무리 기도하고, 아무리 노력한다는 정도가 아니고 생명을 바친다 할 지라도 그 속에 예수의 생명이 없다! 안됩니다. 이것이 안 된 것이 오늘 우리의 문제거든요.
그래서 여러분 지속해서 뭔가 일이 안 된다, 뭐가 안 된다! 그럴 때에 다른 것 돌아보지 마세요. 뭐가 안 되느냐?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과연 있느냐? 그리고 복음이 없다는 것을 회개하는 것뿐입니다. 그 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고, 모든 것이 다 거기서 나오니까! 그래서 오늘 성경에 창세기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시면서 아브라함에게 뭐냐? 씨라 그랬습니다. 씨라! '네 씨를 통해서, 네 씨로 말미암아, 네 씨로 축복의 근원을 삼고' 전부 이런 배경입니다. 이 사실이 그렇게 강조해도 잘 안 되는 것이 왜? 사단의 역사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구원 복음의 역사를 말씀해보면 이게 안 되거든요. 그래서 이것이 안 되면 씨가 심어졌다 그러면 그때부터 뭐냐? 변화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생명이 들어갔다! 변화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천지 만물을 보세요. 왜 그렇게 변합니까! 만약에 산이 죽었다. 변화가 없습니다. 산이 살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변화가 무상이 나옵니다. 여러분 아무리 힘들지만은 땅에다가 생명 있는 씨가 들어갔다 그러면 이것이 땅을 뚫고 나옵니다.
그래서 뭔가 이집트에서 그 뭔가 미라 속에서 찾아낸 씨를 몇 백년 후에 100년이라던가, 500년이라던가? 후에 땅에 심었는데 싹이 났다고 안 그럽니까! 생명이 있는 씨가 심겨지면 싹이 나게 됩니다. 싹이 나면, 이것이 터서 싹이 올라오면서 줄기가 되고 잎이 나오고 꽃이 피게 되고 열매가 맺게 되어 있습니다. 조용히 변합니다. 그 변화는 떠들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용히 변합니다. 여러분 우리자녀들에 다른 것 물려주려고 하지 마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심어 놓아 놓으면 조용히 변합니다. 뭐, 떠든다! 어떻다! 상관없어요. 조용히 변합니다.
나의 남편 생명 들어가면 조용히 변합니다. 나의 아내 생명 들어가면 조용히 변합니다. 뭐 사업 잘 된다, 못 된다! 상관없습니다. 생명 들어가면 하나님의 계획이 그 속에 들어갑니다. '게놈 프로젝트' 라 안 그럽니까! 세밀하게, 어떻게 너와 네 후손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조용히 내 속에...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그 생명이 들어가는 순간에 '게놈 프로젝트! 영적인 게놈 프로젝트!'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 속에 여러분과 저를 세워놓고, 기어코 어디에? 세계복음화에 세밀하게 인도해 가십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이 2장에 보면서 다시 이 말씀을 꺼내어 놓는 것은 제가 이 자리에 섰다! 사실은 이 자리에 섰다는 사실까지 많은 순서와 많은 사건을 거쳤잖아요. 제가 1부에도 말씀 드렸습니다 만은, 종종 그 이야기했죠. 제가 고향가면서 우리 집 사람과 같이 가다가 '아직 더 가야 됩니까? 아직 더가야됩니까?' 몇 번을 더 묻더라 구요. 또 모퉁이에 가면 '아직 더 가야 됩니까?' 또 모퉁이에 가면 '아직 더 가야 됩니까?' 그래서 '아직 더 가야 된다!' 그러니까 이 집사람이 뭐냐? 앉았다가 뒤로 제치면서 '와~ 목사님 출세했네!' 그러더라 구요. 여기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말씀 보면서 그 생각이 문뜩 나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 깊고 깊은 골짜기에, 왜? 숨어야 되니까! 완전히 강원도 감자바위가 문제 아닙니다. 깊고 깊은 골짜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 때문에? 사단의 방해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어떤 면에서 사단이 역사 하면요. 완전히 없어져 버리고, 완전히 무너져버리고, 완전히 죽었다! 할 정도로, '큰일났구나!' 그럴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상관없습니다. 그 깊고 깊은 골짜기에 쳐 박아 놓았다가 하나님의 계획 속에 딱 끄집어내어서 어디에서? 예루살렘에서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여러분과 저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악한 흑암의 권세를 완전히 깨뜨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모습을 보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아, 그렇다!' 이 사단은 생명에 대해서 얼마나 방해하는지 모릅니다. 예수가 이 땅에 오실 때에 그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역사! 그 생명의 역사 나올 때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가!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냥 그것도 약한 사람을 통해서 아닙니다. 가장 강한 헤롯왕을 통해서 완벽하게 없애 버리려고, 그것도 어떻게 하느냐? 낳았다는 사실이 얼마 안 되었잖아요. 6개월 이하로 죽였다! 그래도 되겠는데 어떻게 했느냐? 넉넉잡아 1살 아래로 죽여도 괜찮은데, 넉넉잡아 몇 살로 2살 아래로 다 죽여 버렸습니다. 한번 보세요. 얼마나 싹쓸이하려고 그랬습니까! 그러나 이런 선지자로 하신 말씀, 하나님의 계획 속에 벌써 다 준비해서 싹 빼어 가지고 어디로? 애굽으로 살짝 옮겨 놓았습니다.
나는 말세에 주님이 오시기 전날, 주님이 오시기전 때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 것인가? 성경이 너무 잘 말씀했어요. 막 홍수도 나고, 지진도 나고, 그 다음에 악할 때로 악하고, 문제가 극성스럽게 일어나고, 불신앙이 팽배해 지고 여지없이 무너지는 이때에 그래도 하나님의 선택한 생명 가진 자들을 어디서든지 붙잡고 다 보호하시고 어디서든지 끄집어내어서 인도하시고, 어디 가 있던지 기어코 이 자리에 앉혀 놓으시고... 옆에 사람 봅시다. "축하합니다!" 어디 쳐 박혀 있더라도 끄집어내어 가지고 하나님의 엄청난 계획이... 이것이 아니면 이 자리에 앉을 수 없어요. 나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요.
늘 말합니다. 내가 과연 뭐 10억만 있다! 그래도 여기 앉아 있는 사람이 있겠냐? 나는 많지 않지 싶어요. 200억이 있다! 뭐 나 자빠집니다. 뭐 어떤 면에서 뭐 한 1천억쯤 있다! 절대로 안 믿지 싶어요. 그래서 예수께서 '부자가 하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뭐로?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어렵다' 고 안 그랬습니까! 그 말이 뭡니까?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은혜 주셔야 된다!' 그 말입니다. 이런 엄청난 은혜와 축복을 여러분 받고 이 자리에 세워 놓고 '게놈 프로젝트!' 어디까지? 하늘나라까지! 그리고 여러분 통해서 뭐로? 세계복음화에 완전한 계획 속에 말세를 걸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신문을 통해 큰일났네. 큰일났네. 이렇게 나올 이야기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런 자 중에 여러분 어떻겠습니까! 하나님 후손 만대에 또 믿는 자를 불러모아야 되니까 엄청난 교회를 건축한다! 이 정신 없는 일이 아니냐? 이럴 수 있어요! 안 믿으면요, 불신앙이 들어오면요.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이 말세에 엄청난 계획에 교회를 세우시고 주님께서 이 말세에 택한 자들을 불러모으시는 은혜의 프로젝트! 누가? 하나님이 지금 이 자리에 앉았다. 이게 조금만 이해되면 감사 정도가 아닙니다. 어쩌다가 내가 이런 자리에 앉았느냐? 이것을 알게 되면요. 지금부터 성내지 않아도 돼요. 이걸 모르면 성냅니다. 망했다! 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합니까? 그 자리에 엄청난 계획을 가지고 여러분 이루십니다.
그래서 혹시 어떤 어려움이 있었다! 문제 생겼다! 받아 합시다. "하나님의 프로젝트, 게놈 프로젝트!" 세밀하게 이 사실을 이루어 가게 될 것이에요.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 나사렛 예수라! 촌놈 예수라! 굳이 이 말이 일어나기까지... 그러면서 세계를 살리기 위해서 그 골짜기에 있는 촌놈들, 어부들, 갈릴리 어부들 다 불러모아 가지고, 그리고는 때가 될 때에 하나님께서 엄청난 세계 석학 바울을 세우고 누구의 프로젝트입니까? 하나님이 이런 엄청난 자리에 여러분과 저를 앉혀서, 지금 무슨 문제가 있다? 하나님의 프로젝트! 무슨 사건이 이로 통해서 이루어 질 것인가? 그게 우리 하나님의 계획 아닙니까!
그래서 전반적으로 다 포함해서 이것을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이라 그럽니다. 말하자면 섭리다! 그 다음에 예정이다. 그 다음에 전부 막 통틀어서 말하기를 보존이다! 할 것 없이 다 틀어서 이걸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이다! 그랬습니다. 이걸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과 여러분 생활과 삶과 생각이 완벽하게 차이가 납니다. 세상이다 무너져도 상관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계획하시고 그 속에서도 계시록에 있는 절대로 보호하시겠다는 약속이 또 계시록입니다. 성경 전체에 어렵다, 힘들다! 그 생명을 하나님께 붙잡았다. 거기에서 다 해결되는 것 아닙니까!
바로 그 생명 어떻게 얻습니까?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면 돼요. 이걸 '안 믿는다!' 그럴 것 없고 믿으면 돼요. 받아합시다. "나는 안 믿어지는데..." 이 마음이 드는 것조차도 벌써 믿기 때문에 안 믿어진다는 생각 아닙니까! 이게 아예 안 믿으면 생각도 없어요. 의심도 안 나와요. 받아합시다. "나는 하나님이 참으로 계신가 이상하게 의심이 나온다!" 그게 뭡니까? 믿는다는 증거예요. 제가 이 말을 드리면서 옛날 이야기 할 때는 좀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한강에서 그때 빠져 죽으려고 그럴 때에 천국을 안 믿었거든요. '하나님 없다! 죽으련다! 천국도 없다!' 그러고 죽으려고 그랬는데... 그런데 내가 죽으려고 그럴 때도 뭐냐하면, '지옥이 있으면 어떻게 하지!' 이래가지고 못 죽은 것이지...
벌써 이게 뭐냐? 믿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받아합시다. "이상하게 부인하고 싶어도 믿어진다!" 믿어지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 없다!' 그래놓고도 이상하게 가슴 찔립니까! 믿는 겁니다. 벌써 왜, 이것은 내가 믿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이 들어가면 믿어집니다. 게놈 프로젝트! 하나님께서 믿게 하시고 그 믿음을 통해서, 그 다음에 이것이 확신되어지는 만큼 뭔가 기도응답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확신되어지면 가는 곳마다 그때부터 뭐합니까? 기도 안 합니까! 그러니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 이 엄청난 축복! 그러면 게놈 프로젝트 그랬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게놈 프로젝트!' 그게 뭐냐하면, 예수 생명을 받았을 때 뭡니까? 흔히 7가지 축복 속으로 들어와 버립니다.
그러니 여러분과 제게 있어서 된다, 안 된다! 상관이 없거든요. 이것을 믿으면 됩니다. 그걸 믿고 그때부터 뭐냐? 기도하면 됩니다. 그래서 제가 흔히 무슨 생각을 했느냐 하면, 이때는 뭔가 '조용히 산에 가 가지고 기도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불쑥 들거든요. 내가 '속지 말자!' 왜? 조용히 산에 가고 싶다는 것은, 내가 현장을 피하고 싶다는 이야기예요. 그것은 도망치고 싶다는 이야기거든요.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 현장에 서서 하나님의 계획을 붙잡고, 그러면 뭐 합니까? 정 기도할 시간 없으면 '주 예수 그리스도!' 그러고 그냥 다녀요. 그러면서 이 순간 하나님이 내가 하는 일 마다 '하나님 지금 내게 뭘 하시렵니까? 뭘 이루시렵니까? 안 되고 있습니다. 실패하고 있습니다.' 그렇게만 기도만 해도 하나님이 역사 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내 마음대로 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고 싶습니다. 이 마음만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봐도 됩니다. 기도입니다. 조용히 하나님이 이루실 것입니다.
그런데 또 별별 사람이 안 있습니까! 그런 사람도 '됩니까? 됩니다!' 문제는 뭡니까? 생명이 역사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가짜냐? 진짜냐?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 생명이 들어갔다! 일순간 다른 것 같아도 바른 생명 들어갔다! 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요. 참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갔다 그럴 때는 어떤 장소에라도 괜찮습니다. 바위 밑에라도 뚫고 나옵니다. 어떤 장애도 뚫고 나옵니다. 이단 속에 빠져도 괜찮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는 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이 사실을 붙잡고 정말 나와 여러분에게 계속해서 어떤 어렵고 힘들거든 다른 것 찾지 마세요. '주여 지금 내게 하나님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영접합니다.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조용히 자신을 보고 이 사실이 확인이 안 되면 하나님 앞에 '믿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내게 이 축복을 허락해 주셨사오니 믿음 주시옵소서!' 그리고 다시 거듭 거듭 내 마음에 확신이 있을 때까지 계속 기도하시고 그런 중에서 하나님께서 위에서부터 주시는 믿음의 역사, 그 다음에 위에서부터 뭡니까? 증거주시고 은혜 주실 때에...
그러니 내가 적은 증거 하나 둘 내가 살면서 생겨나게 되면 그때부터 과학이 증거 때문에 믿듯이 그때부터 '아, 맞네!' 그렇게... 그 다음에 신문을 펼치면 '맞네 말세에 그러리라고 그랬으니 맞네, 말씀이 성취되는 사실이 맞네!' 그러면 적은 문제, 큰 문제 할 것 없이 조용히 믿음에 확신이 깔려옵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여러분 기도한다고 그럴 때에 전에는 뭐 의심가지고 될까? 안될까? 이렇게 했지만 그때부터는 한마디 딱 기도하면 '아!' 금방 마음에 들으시리라는 믿음이 딱 마음에 자리 잡혀 집니다.
그때부터 뭐 염려될 것이 없잖아요. 모든 걱정 근심 다 맡겨 버리세요. 왜? 나를 인도하시고, 여러분을 인도하시고, 여러분 가정, 자녀, 모든 인도는 누가 하십니까? 하나님이 하십니다. 받아합시다.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내 자식도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내 남편도, 내 아내도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누가? 하나님이! 어떤 것으로, 뭐로? 성령으로! 뭐 때문에? 생명 들어갔다는 이유 때문에, 생명 때문에!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마 2:45-50 / 김홍도 목사
어느 날 영국의 스펄전 목사님이 길을 가다가 한 소년이 참새가 든 새장을 가지고 흔들며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얘, 너 그 새로 뭘 할래?”. “이 새를 괴롭히며 가지고 놀다가 죽여버릴래요”. 그래서 그 새를 달라고 하니까 안 주겠다고 하며 돈 2파운드만 주면 주겠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2파운드를 주고 사서 새장을 열고 놓아 보냈습니다.
사탄 마귀는 우리를 괴롭히다가 영원한 멸망으로 끌고 가려고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죄 값으로 사탄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온갖 고난을 받으시다가 죄 없는 피를 다 쏟아주시고 죄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1.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시는 고통의 절정에서 큰소리로 부르짖기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셨는데 그 뜻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연극도 아니고 과장도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께 버림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버림당해야 될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버림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천길만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 같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부르짖은 말씀입니다.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① 육체적인 고통
예수님은 빌라도 법정에서 고문을 받으실 때 끝에 쇠붙이가 달린 채찍이 사정없이 내려칠 때마다 등이 파이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며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죄 값을 치러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올라가실 때 얼마나 무거웠으면 몇 차례나 쓰러지셨겠습니까? 머리에는 유대인의 왕이란 죄목 때문에 굵은 가시덩굴로 엮은 가시관이 콱 눌러 씌워져 계속 피가 흘러내려 얼굴과 어깨를 붉게 물들였습니다. 골고다 산언덕에 올라가서는 십자가 형틀을 눕혀 놓고 예수님의 팔을 벌려 그 위에 눕히고 대장간에서 만든 대못을 양손에 망치로 뚜드려 박고 양발을 모아 못을 박았습니다. 또 거의 운명하실 즈음에 완전한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를 때 심장이 터져 피가 다 나온 다음 물까지 다 나왔다고 했습니다. 누구 때문에 이 고통을 받으셨습니까? 우리의 생각으로 지은 죄 때문에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손으로 못할 짓, 안 할 짓 하며 지은 죄 때문에 못 박히시고, 발로 안 갈 곳, 못 갈 곳 다니며 지은 죄 때문에 발에 못이 박혀 고통을 받으시고, 마음으로 지은 죄 때문에 옆구리를 창에 찔려 심장이 파열되어 피와 물까지 쏟는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피를 많이 쏟으면 심한 갈증을 느끼는 법입니다. 주님은 “목마르다”라고 외치셨습니다. 구약의 복음서인 이사야 53장 4~5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을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 죄인들이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② 정신적인 고통
예수님은 육체적인 고통 못지않게 정신적인 고통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되신 분이지만 그 영광과 권세를 다 벗어놓고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멸시와 수욕을 당하셨습니다. 이사야 53장 2~3절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예언대로 예수님이 얼마나 멸시를 당하시고 업신여김을 받고 침 뱉음을 당하셨나 하는 것을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큰 이적 행하심을 보고 귀신 집혔다고 비방하고 온갖 멸시천대를 다 했습니다. 우리가 보는 그림이나 영화에서는 십자가에 달리실 때 앞을 천으로 가리운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발가벗겨 못 박히셨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극악무도한 죄인들을 죽이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겠습니까? 사도 바울도 도끼로 목을 쳐 죽이는 극형을 받으시고 수모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억울한 일당하고 비방과 수치를 당하는 것은 예수님이나 바울이 당한 수치와 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③ 영적인 고통
예수님이 받으신 육체적인 고통이나 정신적인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은 영적으로 당하신 고통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버림받지 않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하나님께 버림받으신 것입니다. 본문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부르짖으신 것입니다. 아버지께 버림받는 그 영적인 고통은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비웃기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라고 조롱했지만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면 우리는 영영 버림받고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목마르다” 하신 것은 영적으로 버림받는 고통이 더 컸기 때문이라고도 해석합니다.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실 때 세 가지 사건이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첫째는 성전 휘장이 한 가운데가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 것입니다. 이는 지금까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혔던 담이 무너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9~20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했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 것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지 인간의 노력으로 받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둘째는 지진이 일어난 것입니다. 지진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실 때 일어났는데(출19:16-) 갈보리산에서 지진이 일어난 것은 시내산의 율법을 만족시켜 주고 율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셋째는 무덤 문이 열리며 죽은 성도가 부활한 일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후 죽은 성도가 있었을 것이고 그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을 패배시킨 하나의 증거로 몇 개의 무덤 문이 열리면서 부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부활 때까지 3일간은 예루살렘을 방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2. 왜 고난 받으셨나?
한마디로 우리 죄 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히브리서 2장 14-15절 말씀이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해산의 고통이 없이는 생명체를 탄생시킬 수 없음같이 멸망의 자식들을 영생을 얻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극심한 고통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에(출10:21) 어린양을 죽여 그 피를 문인방과 문설주에 발라 장자가 죽는 재앙을 면하고 심판에서 구원받은 것처럼,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심으로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값없이 영생을 얻고 천국의 후사가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할 때 어린양이 죽임을 당하면서 3일 동안 흑암이 덮였던 것같이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죄를 위하여 죽으실 때 3시간 동안 흑암이 온 땅을 덮었는데 그 흑암이 오기 전에 3번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맡기나이다” 하고 고개를 떨구셨습니다.
① 대속의 죽음입니다(atonement)
“대속”이란 말은 “대신”(substitution)이란 뜻입니다. 우리 대신 고난당하시고 우리 대신 심판받으시고 우리 대신 죄의 값을 치르시고 우리 대신 죽으셨다는 말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한 말씀이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빵을 뜯어 나눠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눅22:19)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빨간 포도즙을 나누어 마시게 하면서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8)고 하셨습니다.
우리 대신 죽어주시고 피 흘려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5장 9절에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하신 말씀대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죄인이 의인 되며, 지옥의 형벌 받을 사람이 천국 가게 되는 것입니다.
Charles Dicken(찰스 디킨스)의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Charles Darney(찰스 다르네)란 프랑스 사람이 죄를 짓고 단두대에 올라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의 친구 Sidney Carton(시드니 카튼)이란 미국인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이 변호사는 독신이고 사형당할 Charles Darney(찰스 다르네)는 처자식이 있어서 죽으면 안 되기 때문에 이 변호사가 친구 대신 죽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사형 집행하기 전날 변호사 옷을 입고 형무소에 찾아가 면회를 하면서 옷을 바꿔 입고 그 프랑스 친구를 대신 내보냈습니다. 죄수복을 입은 그 변호사는 마침내 끌려 나가 단두대에 올라 사형을 당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3절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한 말씀대로 그 변호사가 대신 죽어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 죄인들을 대신해서 죄 값을 치르시고 대신 심판을 받으시고 대신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므로 누군가 죄 값을 치르지 않고는 구원해주실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마침내 당신의 독생자를 육신을 입고 오게 하셔서 대신 속죄의 재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② 구속의 죽음입니다(redemption)
“구속”(redeem)이란 말은 “값을 지불하고 사온다”라는 뜻이고 또 전당포 같은데 잡혀 있는 물건을 “값을 지불하고 되 사온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나라의 빚을 갚다”라고 할 때 “redeem a national debts”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구속”(救贖)이란 말은 우리 죄를 갚아주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라는 헬라어는 “테 텔레스타이”라는 말인데 “다 갚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 인류의 죄 값을 다 갚았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구원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른편의 강도 한 사람은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죄 없는 피를 흘려 우리 죄를 갚아주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교리와 부활의 교리는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입니다. 이 두 교리 중의 어느 하나도 부인하거나 믿지 않으면 결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1년 365일 중에서 오늘 고난주일부터 다음 주일, 부활절까지 한 주간이 가장 중요한 한 주간입니다. 우리가 금식이나 고행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이 고난주간은 육신의 쾌락을 추구하지 말고 너무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고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며 검소하게 지나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