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2일(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입엔 달지만 속은 쓰린
산책길에 꿩, 장끼 세 마리가 화려한 깃털 색을 뽐내며 연달아 하늘을 가르며 숲속으로 들어갔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푸드덕 날아 도망치는 뒷모습만 봤지 파란 하늘에서 그렇게 멋지게 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 멋진 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만 봤다. 몇 달 전에는 잠자리 세 마리가 머리 위에서 옹기종기 모여 날면서 내게 미소와 평화를 선물했었다. 그때도 그랬고 어제도 마찬가지로 삼위일체 하느님이 수호천사를 시켜 당신이 나와 함께 계신다고 알려주셨다. 어떤 이들은 직업병이라고 하겠지만 내게는 소박한 하느님 현존 체험이다.
하느님을 믿고 찾고 바라는 이에게 세상은 하느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들로 넘쳐난다. 그중 자연은 언제나 가장 확실한 증거다. 나의 작은 친절에 고맙다고 외국인 노동자 교우가 갖다준 생선 토막에서 하느님 사랑을 느끼고, 매체를 통해 고통받는 무고한 이들 소식을 접하며 수난을 겪으시는 예수님을 본다. 믿는 이들에게 하느님 현존은 상상이나 느낌이 아니라 현실이고 사실이다.
성전은 하느님이 계시는 건물인데,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님이 그 건물, 성전이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과 그분의 뜻 말고는 다른 아무것도 없었던 거처럼 성당은 하느님과 그분을 만나려는 마음 이외의 다른 것들은 다 비본질적인 것이다. 있으면 편하고 없어도 그만인 것들이다. 예수님은 어려서부터 부모와 집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로 성전을 사랑하셨다. 그 사랑이 성전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든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쫓아내게 했다. 하느님과 나 사이 거래란 없다. 오직 사랑과 신뢰만 있다. 다 주고 다 받는다.
기도 시간을 기다려본 적은 없지만, 기도와 묵상 후에 평화를 선물 받지 않은 적 또한 한 번도 없다. 그런데 기도 묵상 피정은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다시 잘 듣고, 하느님 품 안에서 쉬는 시간이다. 장끼 세 마리, 잠자리 세 마리는 하느님 안에 잠시 쉼이었다. 다 쉬었으니 다시 앞으로 간다. 천사가 요한에게 말했던 거처럼 하느님 말씀은 입에는 달지만 속은 쓰리다. “이것을 받아 삼켜라. 이것이 네 배를 쓰리게 하겠지만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묵시 10,9).” 쉼은 달콤하지만 삶은 맵고 쓰리다. 기도와 묵상 중에 들은 하느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건 쉽지 않지만, 듣지 않은 걸 현실에서 알아들을 수는 없다. 하느님이 모든 이가 구원되기를 바라신다고 해서 심판 없이 누구나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건 아니다. 혼인 예복을 갖춰 입지 않은 사람은 쫓겨난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5,14).” 나병이 나은 사람은 열 명이지만 감사하기 위해 예수님께 돌아온 이는 사마리아 사람 외국인 한 사람뿐이었다(루카 17,18).
예수님, 훈련 없이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없습니다. 수련 없이 실제 상황에서 하느님 뜻을 발견하고 따를 수 없습니다. 날이 잘 선 칼이라야 실제로 일할 때 다치지 않는 거처럼 주님 말씀을 제 안에 깊이 새겨주셔서 모든 상황에서 그 말씀으로 식별하고 실천하고 견디게 해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이 이콘을 바라보며 어머니와 함께 이 순례길을 갑니다. 저를 도와주시고 이끌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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