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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 회개를 전파하다
마 3:1-12
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3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4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5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마 3:1-12 / [침례 요한의 설교;막1:1-8,눅3:1-9,요1:19-28] ㄱ) 그들이 나사렛에 살고 있을 때 유대 광야에 침례 요한이 나타나서 설교를 시작하였다. (ㄱ. 글자 그대로 `그 무렵에') 2)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깝다.' 3) 예언자 이사야는 침례 요한을 가리켜 오래전에 이렇게 말하였다. ㄴ) `빈들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들린다.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가 다니실 길을 곧게 하라.' (ㄴ. 70인역 사40:3) 4)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띠었으며 메뚜기와 석청을 양식으로 삼았다. 5) 예루살렘과 요단 강변, 그리고 유대 전역에서 사람들이 요한의 설교를 들으러 빈들로 나와서, 6)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요한에게서 침례를 받았다. 7) 그러나 요한은 많은 ㄷ) 바리새파 사람들과 ㄹ) 사두개파 사람들이 침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소리쳤다. `독사의 자식들아,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주었느냐? (ㄷ.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 ㄹ. 유대인의 정치 지도자들) 8) 침례를 받기 전에 회개하였다는 증거를 행동으로 나타내 보여라. 9) `우리한테 무슨 일이 있을라고,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아라.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하나님은 여기 있는 돌들을 가지고도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 10) 하나님께서 내리치실 심판의 도끼가 이미 열매 없는 모든 나무 뿌리에 놓여 있다. 그런 나무는 다 찍혀 불속에 던져질 것이다. 11)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침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훨씬 위대하신 분이 오시면 그분은 성령과 불로 침례를 주실 것이다. 그분은 너무나도 위대하셔서 나는 그분의 신발을 벗겨 드릴 자격도 없다. 12) 그분은 손에 키를 들고 자기 타작마당의 곡식을 까불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마태복음의 요지는 왕 되신 예수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의 계보로 시작했습니다. 본문은 이어서 예수의 사역을 준비한 세례 요한의 이야기입니다.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1-6) 구약의 마지막 말씀인 말라기를 끝으로 400여 년 동안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세례 요한이 나타나서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독특한 옷차림과 행동, 그리고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메시지를 선포하며 동시에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당시 사람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요한이 외친 말씀의 핵심은 회개입니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회개는 삶의 유턴, 방향전환을 뜻합니다. 즉 죄악 된 삶에서 돌이켜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성도들도 회개의 삶 곧 완전히 변화된 삶을 원하십니다(롬 12:1-2). 탕자처럼 죄악과 저주의 삶 곧 돼지처럼 사는 삶을 청산하는 회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회심, 목욕하는 죄 씻음, 새 옷으로 갈아입는 거듭남, 손에 가락지를 끼어 주어 구원의 보증하는 것입니다. 이로서 하나님의 아들로 살라고 하십니다(눅 15:11-32).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7-12) 광야에서의 외치는 자의 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이 반응하기 시작합니다. 그 소리는 복음이고 깊은 울림을 주는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호기심으로 바라봅니다. 세례 요한은 호기심으로 구경하러 온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외칩니다. 그들은 호기심으로 나왔지만 예수께서는 오는 사람들을 내쫓지 않으십니다(요 6:37). 대신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셨습니다(마 4:17). 특히 세례 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예수는 나보다 능력이 많아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11). 무엇보다도 그분은 참 하나님으로서 죄인과 악한 세상을 심판하신다고 했습니다. 심판 때 쭉정이들은 불에 태우고 알곡들은 곳간에 들이신다고 했습니다(12). 쭉정이와 알곡의 차이는 생명입니다. 즉 그 속에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를 삶에 모시고 사는가?”입니다(요 14:6).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요일 5:12).
적용: 당신은 날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하고 있나요? 2023년의 마지막 주간입니다. 실수와 잘못한 것들을 정리하는 주간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가진 능력으로는 사탄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오로지 성령이 함께함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사탄은 우는 사자와 같이 때로는 거룩한 가면을 하고 각종 이념들이 난 사상들을 숨기고 예배자들을 방해하기도 하고 현혹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말세를 당한 이때에 항상 깨어서 기도하며 말씀으로 자신을 돌아보아 이 시대를 분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 설 교 >
성령과 불로 임하시는 세례
마 3:11-12 / 피종진 목사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주시는 세례에 대해서 왜 성령과 불로 임하시는 세례라고 했을까요? 많은 의미가 있지만 특별히 인간이 죄 아래 태어났기 때문에 성령이 죄에 대해서 죄인된 우리를 어떤 관계와 어떤 역사로서 역사하시는가에 대한 면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서 ‘불’은 모든 것을 소멸하여 근본적으로 전체를 새롭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준다는 의미는 성령 안에서 불로 죄를 소멸하여 깨끗케 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과 불로 임하시는 세례란 성령 안에서
첫째, 죄인의 신분을 변화시켜주는 세례입니다.
우리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기 전에는 죄인의 신분으로 ①마귀의 자식이었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 8:44) ②저주받은 자였습니다.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요 7:49) ③잃어버린 자였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탕자가 아버지 품을 떠났을 때에 그 자식은 잃어버린 자였습니다. ④빛을 미워하는 자였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 3:20) 오늘날 왜 기독교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자들이 있습니까? 저들은 어둠에 속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빛을 미워합니다. 우리가 주님 뜻대로 살려고 하면 핍박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절대로 핍박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핍박을 받을 때 하나님의 상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⑤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있는 자였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게 되면 죄인된 신분을 의인의 신분으로, 마귀의 자식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켜주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제는 저주 받은 자식이 아니라 축복 받은 자녀로서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켜주신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필리핀과 중국, 일본 등 원주민 성회를 인도하면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마귀의 자식임을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 지구촌의 모든 세계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저주의 자식, 마귀의 자식, 버림받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성령 안에서 의인의 신분으로 거듭나도록 새롭게 변화시켜주신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죄인의 성품을 변화시켜주는 세례입니다.
죄인의 성품은 ①불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칼이 강도의 손에 들려지면 산 사람도 죽입니다. 그러나 의사의 손에 칼이 들려지면 죽을 사람을 집도해서 살려냅니다. 우리의 몸은 의의 병기로 사용되든지 아니면 불의의 병기로 사용됩니다. 여러분은 평생을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쓰임 받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손이 일할 수 있을 때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자가 있고, 손이 일할 수 있을 때 악을 도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달려가는 발이 있고, 악을 위하여 달려가는 발이 있습니다. 입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될 수도 있고, 마귀를 위하여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성령님을 모시면 성령의 전이 되고, 사탄이 역사하면 사탄의 소굴이 되는 것입니다.
②추악한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롬 1:29) 우리는 같은 것을 봐도 깨끗한 것을 좋아하고, 의롭고 선한 것을 좋아하고, 착한 것, 아름답고 온유한 것을 좋아하는 그런 성품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비둘기처럼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그러나 사탄이 역사하는 사람들은 불의와 악의가 가득합니다.
③탐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우리는 필요 없는 것에 욕심을 가지면 죄를 범하게 됩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게 됩니다(약 1:15). 우리는 선한 것에 욕심을 가져야 됩니다. 선한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고, 선한 일은 축복의 씨앗이 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착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사도행전 11:24에 보면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착한 사람 바나바 때문에 교회가 부흥되었습니다. 착한 사람은 항상 선과 의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자입니다.
셋째, 죄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는 세례입니다.
죄에서 해방을 받게 되면 회개한 죄에 대해서는 긍휼히 여겨주셔서 ①죄의 흔적도 없게 해주십니다.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사 44:22) ②죄악의 댓가를 주님이 대신 지불해주셨습니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사 53:11) 우리가 우리의 죄의 댓가를 지불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의 죄의 댓가를 대신 지불해주고 담당해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십자가로 옮겨주셨습니다. 성령의 불로 깨끗하게 소멸시켜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이지만 의인이 된 칭호를 받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③죄와 불법을 기억치 않으십니다.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히 10:17) 이것은 해방 받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사람들의 과거의 약점이나 단점을 거론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나간 죄에 대해서는 기억지도 않으시고, 회개한 죄는 용서해주시고, 하나님 앞에 회개한 죄와 불법을 다시는 기억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의 허물을 파헤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지난날에 대해서는 자신의 것이나 남의 것을 덮어주기를 좋아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의 신분을 변화시켜주고, 죄의 성품을 변화시켜주고, 죄에서 해방시켜주시는 이 놀라운 성령과 불로 임하시는 세례를 다 체험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리라
마 3:11-12 / 피종진 목사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증거하고 소개할 때에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11절)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성례(聖禮)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례와 성찬입니다. 이 세례와 성찬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주님께서 그것을 제정하시고 집행하시게 했습니다. 우리 기독교의 베푸는 세례 중에 하나는 물세례입니다. 이 세례는 신앙을 고백하고 주님을 구주로 영접한 자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베푸는 예식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씻음 받는 표시이고, 세상과 단절하고 예수님과 새 생명 가운데 산다는 결심의 표시입니다. 또한 성령과 불로 주시는 세례가 있습니다. 성령과 불로 주시는 세례란
첫째, 육으로 난 자가 영으로 다시 나는 세례입니다.
육으로 난 자는 각각 성이 다 있습니다. 예를 들면 김씨, 이씨, 박씨, 최씨, 오씨 … 등등 말입니다. 그러면 김씨는 왜 김씨일까요? 김씨의 혈통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세례는 바로 육으로 난 이런 많은 다양한 인간을 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합니다. 갈라디아서 5:19,20에 보면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3:6,7에 보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반드시 인간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다고 말씀했습니다(요 3:3,5).
우리가 성령으로 다시 나게 되면 ①신분이 달라집니다. 마귀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로 되고, 지옥 갈 사람이 천국 입국자로, 저주 받을 사람이 축복 받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②성품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의 강퍅성, 포악성, 잔인성, 살인성, 나태성, 교만성 이런 것들이 성령을 받으면 미워하는 마음이 사랑의 마음으로 바꾸어집니다. 그리고 교만한 마음이 겸손한 마음으로 바꾸어집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든지 분노, 시기, 질투가 있다면 아직도 마음이 변화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교리에 관한 말씀이지만 중생은 즉각적으로, 성화는 점진적으로 되어집니다. 신분이 변화되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때 즉각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성화는 즉각적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육의 사람이 한꺼번에 천사처럼 변화되지 않습니다. 은혜 받고 성령을 체험했을 때 기뻐서 찬송하고 감사해서 눈물 흘리고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세’ 하면서 복음을 전하다가도 믿음이 떨어지면 육성이 또 나타나서 세상 근심 불안 공포 환난 질고 고통을 당할 때 낙심하고 연약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내 맘이 약하여 늘 넘어지기 쉬우니’ 이러한 찬송을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또 은혜 충만, 능력 충만 받으면 기쁨이 넘쳐서 ‘내게 강 같은 평화’ 복음성가를 부릅니다. 또 때로는 멀리 멀리 주님을 떠나서 외롭고 슬프고 처량하고 고달플 때에 ‘멀리 멀리 갔더니’ 찬송을 부르며 또 주님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또 다시 회개하고 능력 받아서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하고 열심히 찬송을 부릅니다. 그러다가 또 좌절하고 낙심되면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하고 찬송을 부르며 주님을 의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능력과 은사를 다 동원해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잠시라도 우리는 주님을 부르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 맡기지 않고는 안전이 없습니다. 주님께 의지하지 않고는 보호가 없습니다. 부르짖는 가운데 날마다 주의 손길이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성품이 빨리 변화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느리게 변화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③생활이 달라집니다. 인간의 수단과 방법, 거짓과 속임으로 살던 옛 생활이 변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 안에서 의로운 생활을 하게 됩니다. 손해가 되어도 거짓말할 줄 모르고, 좀 버림을 받아도 혈기를 내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에게 천대 멸시 받아도 겸손하게 살다가 보면 주께서 지위를 높여주시고 영광의 세계로 이끌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④내세가 달라집니다. 안 믿는 사람은 지옥을 향해 가고 있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천국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비록 길이 좁고 험한 길이지만 찬송하면서 걸어갑니다. 요한복음 5:24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왜 주일을 지킬까요? 구원받으려고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 위해서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주의 뜻대로 살려고 합니까? 지옥 가고 멸망 받을까 두려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의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권세를 받는 세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여기에서 권능은 ‘권세’를 의미합니다. 대통령이 되면 그에 준하는 권세가 있듯이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①하늘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저는 고속도로를 다니면서 교통순경의 권세가 얼마나 큰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달리는 차를 손가락 하나로 마음대로 세우기도 하고 보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이 세상 권세는 땅에 관한 것만 좌우하지만 하나님의 권세를 받은 사람은 귀신들과 병마도 내쫓을 수가 있습니다. 환난 걱정 근심 불안 공포도 예수 이름으로 이길 수가 있습니다.
②혀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성령을 받은 이후에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방언으로 말하게 되었고, 그 말에는 권세가 나타났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다 혀의 권세가 있습니다. 잠언 13:2에 보면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을 누리거니와”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함부로 말을 하면 안됩니다. 축복된 말, 은혜로운 말, 감사하는 말, 유익을 주는 말, 위로의 말,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말, 긍정적인 말 등 이런 말을 할 때 하나님께서 그 말에 은혜와 축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혀의 권세를 항상 성령에 사로잡힘 받아서 사용해야 됩니다.
③자녀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우리는 이 세상의 어느 곳에 있어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부자이십니다. 없으면 하나님께 구하세요. 그리고 안되면 하나님께 맡기세요. 그리고 소망이 있으면 하나님께 모든 기대를 가지세요. 사람도 기대를 가지면 거기에 대해서 감동을 받습니다.
셋째, 은사를 받는 세례입니다.
한 순간에 성령 받으면 하나님이 평생에 들어 쓰시는데 그 쓰실 때에 육신의 지혜나 체력, 그가 가진 권세나 물질을 보고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은사를 주셔서 쓰시는 것입니다. 믿음도 우리가 생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받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기적을 창조하는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믿음 속에 하나님이 역사해주십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안 되는 것도 될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은사입니다. 지혜, 지식, 믿음, 병 고치는 은사, 그리고 능력, 예언, 방언, 방언 통역, 영 분별의 은사가 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선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은사를 통해서 큰 일을 하게 하십니다.
병자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여 병자가 일어나 보세요. 동네 사람들이 ‘아, 과연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구나’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은사를 통해 나타나서 믿지 않는 사람도 하나님을 믿게 되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통한 은사는 여러분들의 눈빛에도 나타납니다.
넷째, 사명을 받는 세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이것은 사명의 부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부여하실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라고 말한 이사야 선지자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사명을 감사히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사명자의 첫째조건은 성령 충만입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행 6:3)
리빙스톤은 ‘나에게 사명이 있는 한 나는 결코 죽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먼지도 태양빛이 비치면 빛이 난다’고 말했습니다. 성령이 여러분에게 조명하면 여러분도 빛이 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사명자가 될 수 있습니다. D.L 무디는 5천만 명에게 전도해서 100만 명을 결신시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성령 받고 타락한 영국을 구원하고 그 당시 어려울 때이지만 지구를 열 바퀴나 돌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고 육으로 난 자가 영으로 다시 나며, 하나님의 권세와 성령의 은사를 받아 능력있는 사명자,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마 3:10-12 / 김춘섭 목사
강단 앞에 걸려있는 배너 그림의 주인공은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삶을 살았던 세례 요한입니다. 오늘 대강절 셋째주의 <성서일과>도 역시 세례요한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1. 세례 요한
그렇게 절실한 마음으로 주님의 길을 예비하였던 요한은 헤롯왕의 죄악을 공개적으로 꾸짖다가 감옥에 갇히는 처지가 됩니다. 그 감옥에서 헤롯왕에 의해 목이 잘려 죽게 되는데, 죽기 얼마 전에 있었던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요한은 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음을 일찍이 자각하였습니다. 그분의 신발을 들고 서 있을 처지도 되지 못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서도 많은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의 소식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가 바라던 기대와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의 기대는 분명히 세상을 심판하실 분이셨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마3:10)"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3:12)"고 선포하였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하신 일은 이렇게 마태복음은 요약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들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9:35-36)"
그런 주님이셨습니다. 자기의 기대와는 달랐습니다. 그렇게 조용하게 몇 명밖에 되지 않는 백성들의 상처나 고치실 여유가 없는 분이시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무리를 향하여서가 아니라, 세상 권력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심판의 불을 붙이셔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오게 했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일은 그런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감옥에서 제자들을 보내어 물었습니다.
2.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11:3)" 참으로 기가 막힌 질문입니다. 얼마나 그의 삶이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을 살았습니까? 그의 생애가 바른 삶이었습니까? 백성들의 아픔을 보고 헤롯왕을 꾸짖다가 옥에 갇히기까지 했습니다. 그가 버린 것이 얼마나 큰 것이었습니까? 보장된 삶을 버리고 광야로 뛰어 들었고, 그리고 이어지는 고난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불타는 삶을 살았던 그였습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은 그가 예비하고 기다렸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심판과 새로운 나라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 갇혔어도 담대하였고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들리는 소문에, 그분이 하시는 일은 자기의 기대와는 너무나 다른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약한 메시야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보내어 마지막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11:3)"
얼마나 기가 막힌 질문입니까? 당신이 과연 맞습니까? 이 땅을 구원하실 분입니까? 지금까지 믿어왔던 것을 포기해야 합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믿음의 대상을 바꿀 수 있는 엄청난 충격적인 질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즐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 11:4-6)"
요한은 감옥에서 제자들이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헤롯왕의 생일날 그의 목은 잘렸고, 쟁반 위에 올려져 사람들의 눈요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도 요한의 소망은 더욱 빛났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실족하지 않고 그는 소망 속에서 자신의 불타는 생애를 마감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을 보내고 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들을 보내고 나신 예수님은 무리들을 향하여 질문을 하시면서 스스로 대답도 하십니다. 요한에 대하여 이렇게 말문을 여셨습니다.
3.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기록된 바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마11:7-10)"
오늘 무리들에게 하신 이 말씀을 생각합니다.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라는 물음을 세 번씩이나 던지고 있습니다. 왜 광야에 나갔는지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무리들이 왜 광야에 나갔습니까?
저는 이 무리를 행하여 던지신 주님의 말씀을 우리들을 향하신 말씀으로 다시 새겨 봅니다.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하는 말씀 말입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보려고 이곳에 나와 있습니까?
갈대를 보려고 오돗 쓰레기장 뒤쪽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시들었지만 갈대가 장관이었습니다. 그곳으로 간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해 주신 은총인 갈대를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오직 갈대를 보기 위해 나갔습니다. 그렇지만 세례요한 당시 무리들이 광야에 나갔던 이유는 갈대를 보기 위해서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도 광야에 갈대들이 많이 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갈대를 보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다시 주님의 물음은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을 보려고 나갔더냐?"고 하시며, 바로 대답하시기를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좋은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은 광야에 없습니다. 당시 거기에는 요한을 보기 위해서 온 사람들뿐이었습니다. 오직 선지자를 보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오직 요한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때 요한이 한 말을 기억시킵니다. 그 요한이 주님을 소개하신 것 아닙니까? "나는 다른 분의 길을 예비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서 있기도 감당치 못합니다. 나는 지금부터 쇠하여지지만 그분은 흥하실 것입니다."
이런 요한을 두고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11:11)"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계속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선지자가 바로 자신의 길을 감추고, 뒤로 물러나면서 소개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은 그것을 인정하셨습니다. "맞다. 이제 너희들의 시선이 내게 머물러 있다. 그런데 이런 눈을 가졌던 세례 요한이야말로 참으로 위대한 사람이다. 그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속 말씀하시기를 "그렇지만 천국에서는 아무리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고 하셨습니다.
4. 하나님나라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습니까? 요한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 요한이 누구를 소개했습니까? 예수님입니다. 그 주님에게서 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바로 하나님나라입니다. 요한이 그렇게 큰 자이지만 하나님나라를 이루면 그 사람은 세상의 어떤 자보다도 더 크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광야에 나간 것은 요한을 보기 위해서였지만, 예수님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는 하나님나라를 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얼마 전 너희들은 광야에 요한을 보러 나갔다. 이제 너희들은 나를 보러 이곳에 와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너희들이 하나님나라를 발견하는 것이다. 아니 그 하나님나라를 차지하는 것이다."
이 질문을 오늘 심각하게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음성으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보려고 교회에 나갔더냐?" 어떤 관심에서 우리의 신앙이 시작되었는지 몰라도 우리의 관심은 더 나은 차원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무슨 목적을 위해서 나왔습니까? 그리고 그 목적이 주님 보시기에 괜찮은 것입니까? 지금 그 좋은 목적을 이루고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가 우리 삶 속에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요한처럼 이런 의문을 던지지는 않습니까?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이까?" 지금까지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무엇이었으며, 귀에 들리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런 것들이 하나님나라를 찾는 좋은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과연 무엇을 보기 위하여 이곳에 나왔습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나라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그 나라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이 물음이 우리 심령 속에서 심각하게 들려져야 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
마 3:7-12 / 곽선희 목사
철학자인 파스칼은 그의 팡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천사도 아니거니와 짐승도 아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인간들은 천사처럼 살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짐승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거기에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천사가 아닙니다. 그러나 천사같은 그런 존재로 살아가겠다고 높은 이상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 사는 것은 너무나도 모순적입니다. '짐승처럼, 그것도 가장 사악하고 더러운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다. 여기에 문제가 있고 고민이 있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을 비판하는 확실한 정의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유대교에서는 사함 받을 수 없는 죄가 있다고 합니다. 도저히 사함 받을 수 없는 죄를 많이 열거하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 두가지만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가 회개하기 위하여 범죄하는 거죠. 지금 뉘우치는 것이 있어요. 회개하고 있는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또 다른 죄를 짓는 거예요. 또 하나는 회개하고 같은 죄를 계속 반복하는 것이죠. 회개하고 또 죄짓고 또 죄짓고.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 것처럼 늘 회개하며 늘 같은 죄를 반복하는 이러한 죄는 영영 사함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회개가 없기 때문이요. 회개하지 않는 죄가 사함 받을 수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열매없는 회개는 회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라고 하면 먼저 죄 짓는 죄가 있고, 둘째는 회개하지 않는 죄가 있고, 셋째는 변명하는 죄가 있고, 넷째는 죄를 정당화하는 죄가 있습니다. 다섯째는 정당화하기 위해서 내가 지은 죄를 죄 아니라고 정당화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정죄합니다. 여기까지 나아가면 이제는 강퍅하게 되는 것이요 영영 구제 불능한 운명에 빠지게 됩니다.
심리학자 아들러는 사람이라는 것은 외부적인 요구에 대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보호장치를 몇 가지 가지고 있는 그런 경향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가 변명입니다. 잘못된 것을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밖에서 그것에 대하여 비판할 때에 또 자기 양심도 이것을 비판하게 될 때 변명을 하게 됩니다. 이러면은 영영 영영 구제받을 길이 없습니다. 변명처럼 어리석은 짓은 없습니다. 어떤 일에도 믿는 사람은 변명은 하지 말아야됩니다. 최소한도 변명은 하지 말아야 됩니다. 어떤 일에도 변명은 생각하지도 말 것입니다. 대체로 두가지로 변명을 합니다. 하나는 'Yes, but…' 또 하나는 '단지 …하였더라면' 하는 가정법을 씁니다. 먼저는 보세요. 예컨데 학생이 공부를 잘해서 시험을 잘 봐야 하는데 '잘 보려고 했는데 그러나 다른 과목도 공부해야되기 때문에 이 과목은 망쳤다'는 거요. 그렇다고 인정을 하면서도 '그러나' 하고 무엇 무엇 무엇 변명을 늘어놓아요. 또 한가지는 가정법을 써요. '만일에 나도 대학을 나왔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대학 못 나온 열등의식 때문에 이같은 일들이 있어졌다' 변명합니다. '내가 만일에 돈이 있었다면, 내가 만일에 건강했다면, 나는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의 부족한 처지를 비롯해서 변명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이 일로부터 정직함으로부터 자기를 회피하는 행위입니다.
또 한가지는 공격형입니다.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실패에 대한 원인을 타인에게 돌립니다. 다른 사람에게 돌려서 '너도 그랬지' '너라는 사람이' '너 때문이요' 이렇게. 공격형, 그런 심리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이게 아주 체질이 된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은 반성할 줄을 모릅니다. 회개가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거리를 두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건 딜레이(Delay)형입니다. 회개는 하겠는데 '좀 더 있다. 아직은 이르다. 회개를 해도 하기야 죽기 전에 해야지. 예수님 옆에 있던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도 직전에 회개했는데 아주 직전에 그곳까지 가서 해야지.' 자꾸 미뤄나가는 그런 가운데서 자기와 문제를 이렇게 문제되지 않게 끌고 나가려고 합니다.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게 체질이 됩니다. 이게 성품이 됩니다. 그러면 진실은 아주 멀어집니다.
그런가 하면 배제형이 있습니다. 이건 아예 문제 삼지를 않습니다. '나만 죄인이냐? 죄가 그것 뿐이더냐?' 세상을 탓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 회개할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배제해 버리는 이러한 심리입니다. 이것은 강퍅하게 된 것이올시다. 다시 돌이킬 길이 없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광야에 세례요한은 외칩니다.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합니다. 구약성경에 있어서 회개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회개란 뭐냐? 죄를 떠나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33장 그리고 호세야 14장에서 누누이 설명합니다. 여러 성경에서 말씀합니다. 회개란, 죄를 떠나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먼저는 회개란 후회와 뉘우침만은 회개가 아닙니다. 한평생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려도 그건 회개가 아닙니다. 또한 죄에서 떠나는 행동이 있어야 됩니다. 죄스러운 생활에서 떠나야 되고 두 번째는 하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이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참 엄격한 말씀이올시다. 누가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형벌이 무섭고 비난이 무섭고 아니 지옥이 무서워서 그렇게 회개하는 것, 다시 말하면 강요된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자발적이래야 됩니다. 누가 하라서 하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벌이 무서워서 심판이 무서워서 형무소가 무서워서 그건 회개가 아닙니다. 비난도 상관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강요되어서 억지로 하는 회개, 이런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남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 양심을 내가 살피며 자발적으로 자원해서 회개하는 회개만이 진정한 회개요 또 열매를 맺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회개는 하면서도 이 현실에 안주하려고 합니다. 떠나기를 싫어합니다. 아주 이상합니다. 담배가 나쁜 줄 알면서도 끊지 않습니다. 이건 나쁜 줄 알면서도 여전히 거기서 매력을 느끼고 있어요. 그것을 즐기고 있어요. 심지어는 아주 위험한 모험을 모험을 즐기고 있어요. 언제까지 그럴 것입니까? 벌써 죄악된 생활에 길들어 졌어요. 심리적으로 길들어져서 아주 그 생활에서 떠나기를 싫어해요. 저는 그런 학생을 보았어요. 고3학생이에요. 공부 열심히 하다가 병들어서 병원에 갔어요. 물론 병원에 있는 동안 공부 안했어요. 병은 나았어요. 그런데 자꾸 아프데요. 아픈 동안 모든 문제가 없으니까 그렇게 잔소리하던 어머니도 잔소리가 없고 그 병원에서 나오려고 하질 않아요. 의사는 아픈 거 없다는데 여기가 아파요. 저기가 아파요. 내 그런 놈을 봤다니까요. 정말 딱 하더라고요. 그래서는 아침 늦게까지 안 일어나요. 도대체가……. 가만히 보았더니 여기서 헤어나오려고 하지를 않아요. 그래서 내가 물었어요. "너 낳고자 하느냐?" 그랬어요. "아! 나아야지요." 그래서 "거짓말하지마!" 그랬습니다. 여러분 안주하려는 마음이 무서운 것이에요.
자, 그렇다면 회개라는 것은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얘기할 수가 있는 거예요. 먼저는 회개의 기회를 주셔야 됩니다. 내가 회개하고 싶었는데 그만 갑자기 차사고로 죽었다. 이거 회개 못합니다. 그래서 전 생각합니다. 가끔 그런 지도도 합니다. 병원에 입원해 가지고 몇 달 동안 병원에 있으면서 친구를 불러다가 사과하고 자기 부인에게 내가 그 동안 잘못했소 그런 장면을 내가 볼 때 본인에게 얘기합니다. 당신은 복이 많다고 죽고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오. 회개할 기회가 있잖아. 이게 얼마나 큰 축복이냐 그래요. 그 때 가서 울음을 터뜨리는 걸 봅니다. 만일에 꽝하고 죽었으면 어떻게 되겠냐. 이같은 회개를 할 수 있었겠냐. 회개의 기회를 주셔야돼요. 가룟 유다라는 사람을 여러분이 압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번 여러번 기회를 주셨지만 끝내 회개하지 않고 그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가담을 했고 그 다음에 뉘우쳤지마는 돌이킬 길이 없었어요. 이미 때는 지났어요. 이런 우스운 얘기가 있습니다. 11시에 회개하겠다고 했는데 10시 반에 죽었다고요. 하나님이 회개의 기회를 주셔야 됩니다.
또 하나님이 믿음을 주셔야 됩니다. 무슨 믿음인가. 사랑에 대한 믿음이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아직도 나를 사랑하신다. 내게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 그것을 믿을 때 진정한 회개가 있는 거요. 아무리 때려도 거기에는 회개가 없습니다. 아이들 우는 거 같으면서 잘못했다고 말을 하지만 속으로는 두고보자 그런데요. 참으로 회개는 사랑을 깨달을 때만 있습니다. 어떤 고등학교 학생이 아버지 어머니 잔소리가 싫어서 집을 나가 버렸어요. 어머니는 기가 막힙니다. 그럴 줄은 몰랐는데 한 달을 수소문 해가지고 겨우 아이가 있는 집을 찾았습니다. 계단 밑에 있는 조그만 방 하나를 얻어가지고 거기서 자취를 하고 있는 거예요. 거기에 아이가 없을 때 들어가보고, 보니 방안이 엉망이에요. 냉장고는 텅텅 비어있고 옷은 여기저기 벗어가지고 내던졌고. 어머니가 하루종일 다 청소하고 말끔하게 씻어줬어요. 냉장고를 가득히 채웠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않고 냉장고 벽에다가 그 아이의 백일사진을 떡 붙여놓고 왔습니다. 어머니가 백일 된 아이를 안고 너무 좋아하는 그 모습을 딱 붙여놓고 왔습니다. 애가 저녁에 돌아와서 그걸 보고 통곡을 했습니다. 왜요? 어머니는 지금도 나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돌아왔습니다. 여러분, 말이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이 가야됩니다. 사랑에 대한 믿음이 가야 됩니다. '아직도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구나. 하나님은 지금도 나를 사랑하신다.'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그 사랑을 확인하게 될 때에 그 사랑에 감격하게 될 때에 그때에 흘리는 눈물이 진짜요. 형벌이 무서워서 회개하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내가 무서워서 회개하는 회개가 회개가 아닙니다. 형무소가 무서워서 벌벌 떠는 것도 회개가 아닙니다. 오로지 사랑을 믿으며 회개하기.
또한 회개에는 하나님께서 용기를 주셔야 됩니다. 용기가 없는 자는 회개 못합니다. 구약에서 보면 다윗이라는 사람을 압니다. 그는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남의 아내를 취했을 뿐더러 그 남편을 죽였습니다. 숨겨졌던 악이지만 나단 선지가 와서 당신이 죄인이요 할 때 그는 왕의 보좌에서 아무 거리낌없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 회개의 용기가 있었습니다. 용기 없는 사람은 회개 못합니다. 회개해야지, 해야지, 그리고 한평생 찌그러진 얼굴로 삽니다. 구겨진 얼굴로 삽니다. 병든 양심으로 삽니다. 회개에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떤 용기요? 명예와 지위와 체면 다 내동댕이쳐야 됩니다. 왜요? 진실이 먼저니까. 이까짓 체면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다 내 던져야 됩니다. 그리고 모든 운명을 하나님께 맡길 겁니다. 회개한 다음에 되어지는 일, 그 어떠한 일이었다 하더라도 상관할 것 없습니다. 모든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는 그 용기가 있고야 회개할 수 있어요. 회개가 쉬운 게 아니에요. 회개의 열매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힘을 줘야됩니다. 위선을 벗어버리는 힘을 주셔야 됩니다. 거짓을 활짝 벗어버리는, 체면같은 것 던져버려야 회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회개하지 못하고 그냥 자꾸 미뤄 미뤄 가는 동안에 점점 수렁으로 빠져들고 그 어느 때에 가서는 회개할 수가 없게 되어버립니다. 회개할 때에 비로소 자유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비로소 얼굴이 밝아질 수 있습니다. 참으로 회개할 때에 병도 치료받을 수가 있습니다. 환한 양심 환한 얼굴 온전한 인격을 다시 세우게 될 것입니다. 탈무드에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처럼 마음 가벼운 일은 없다." 어떻습니까? "I am sorry. That's my fault" 하는 순간, 마음은 편안해 집니다. 미안합니다. 그럼 그건 내 잘못이었어요. 이보다 더 신바람 나는 일은 없어요. 그런가하면 자기가 옳다고 고집하는 것처럼 마음 무거운 일은 없다. 알아서 하세요. 어느 쪽을 선택하시렵니까? 내가 옳고 내가 잘났다고 하면서 점점 썩어가는 운명을 갈 것입니까? 아니면 그건 내 잘못입니다, 하고 환하게 광명을 찾을 것입니까? 회개는 사람을 자유케 합니다.
오늘 성경에 말씀하십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지 마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특권의식이 내 죄를 정당화할 수는 없어요. 내 과거에 새운 공로가 오늘의 죄를 정당화 해주지 못합니다. 과거에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했고 아무리 특권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해도 오늘 죄는 오늘 죄요, 오늘 죄인은 오늘 죄인입니다. 그 화려한 과거가 오늘 나의 이 불의함을 씻어줄 수 없다는 걸 알아야 돼요. 또한 조상의 의, 즉 아브라함의 의가 내 죄를 사할 수는 없는 거예요. 그 자손 되었다고 하는 것이 오늘 나의 죄를 씻어줄 수는 없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회개할 수 있습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것, 회개할 용기를 주시는 것, 회개할 깊은 마음을 진실을 주시는 것, 그것이 은혜올시다. 병들어서 회개하든 실패해서 회개하든 감옥에 들어앉아서 회개하든 회개는 복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은총의 기회가 됩니다. 은혜로 회개케 하시고 은혜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게 하십니다. 여기에 승리가 있고 여기에 새로운 능력이 있고 밝은 세상이 있는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를 부르시사 오늘도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회개하도록 말씀을 주시고 우리 마음에 감동을 주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의 사랑 그 용서 그 거룩한 은총을 생각하며 감사 감격한 중에 잃어버린 진실을 찾게 하시고 참으로 회개하게 하사 온전한 자유인이 되게 하시고 밝은 빛을 지향하며 생명력 넘치는 그런 생을 살게 오로지 자유인으로 사는 저희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바리새인은 세례 받으면 안 돼요
마 3:5-12 / 이정선 목사
400년 만에 출현한 선지자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은 대단했습니다. 회개하라는 세례 요한의 외침에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한을 세례 요한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가 이처럼 세례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11절에서 요한은 말하기를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세례는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는 의식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가 세례라고 하면 씻는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그러니까 죄를 씻는다는 상징처럼 받아들여지지요? 그러나 세례는 침례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침례라고 하면 씻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물속에 잠긴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불세례의 개념에서도 불침례라고 하면서 불속에 잠기는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요? 성령 세례라고 할 때 성령으로 죄를 씻는다거나 성령 속에 잠긴다는 개념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세례를 씻는 것이라는 주장과 잠기는 것이라는 주장을 가지고 논쟁하는 것은 사실 별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세례라는 의식이 구약에서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씻는 의식은 구약에서 많이 나타납니다. 유대인들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으면 큰 일이 나는 줄 알 정도로 씻는 데 큰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씻는 의식은 하나님 앞에서의 정결과 결부되어 시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도 구약에서의 씻는 의식의 개념이 많이 반영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어쨌든 세례 요한이 베푼 세례는 죄의 회개의 표시였습니다. 회개하라는 요한의 메시지에 많은 사람들이 나아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예수님도 세례를 주심으로 세례는 기독교의 주요 의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초창기 기독교에서 세례는 기독교로 개종하는 의식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는 세례에 대한 언급이 많습니다. 그러한 구절들을 통해서 세례의 본질과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선 새로 예수를 믿게 된 사람은 세례라는 외적인 의식을 거쳐 내적인 변화를 표시했습니다. 베드로가 설교할 때에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에디오피아에서 온 내시는 빌립으로부터 예수님에 대해 설명을 들은 후에 세례를 받겠다고 자청합니다. 또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초청을 받아 가서 설교할 때 성령이 그 사람들에게 임하시는 것을 보고 즉시 세례를 베풉니다. 이처럼 세례는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외적인 확인 또는 공적 승인의 표시입니다. 즉 세례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에 회원으로 가입하는 필수적이고 유일한 세레모니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4장 5절에서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라고 말함으로써, 세례를 기독교 공동체의 기초석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거룩하고 신비로운 영역 안으로 들어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진심으로 믿지 않으면서 세례를 받을 수는 없을까요? 또 그렇게 엉터리로 세례를 받아도 하나님의 교회에 포함되는 영광을 보장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흔히 군대에서 숫자 채우려고 사역병 모아가지고 세례받게 한다는 얘기 많이 하잖아요? 세례라는 외적인 형식 자체가 우리의 구원을 담보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천주교에서는 그런 경향이 있어요.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믿기 때문에 누군가가 임종하는 순간에는 긴급상황을 감안해서 사제가 아니더라도 세례를 베풀 수 있습니다. 구원은 세례로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 것이고, 세례는 그 믿음의 외적 형식입니다. 내용과 형식을 혼동하면 그런 오류에 빠지게 돼요.
그러면 믿으면 됐지 형식에 불과한 세례를 굳이 받아야 하느냐고 고집을 피우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거예요. 맞아요, 중요한 것은 믿음이지요. 그렇지만 그 믿음을 세례라는 그릇에 담아서 내놔야죠. 에디오피아 내시가 한 말을 보세요.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행 8:36). 믿음에 대한 확신이 있으니까 당연히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치 아닌가요? 세례는 믿음의 표시니까요. 그런데 내용이 중요하지 형식이 왜 필요하냐고 굳이 따지는 사람들의 속셈은 사실은 거리낌이 있기 때문이지요. 세례는 받으면 좋고 안 받아도 상관없는 단순한 형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명백하게 주어진 믿음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 28:19)고 하셨잖아요?
그러면 성경은 세례라는 의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 왜 세례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표시로 사용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또 중요하겠지요? 무엇보다도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상징합니다. 거기에는 먼저 죽음이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함께 장사되었다(롬 6:4)고 말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고, 우리의 옛사람이 죽습니다. 그렇게 죽은 후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던 우리는 다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새 생명을 얻게 되고 새사람이 됩니다. 골로새서에서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2).
그러므로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옛사람이 죽고 새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을 상징하는 영광스러운 절차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부르셔서 ‘너는 내 것이라’고 선언하시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성찬과 더불어 세례를 거룩한 예식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외치는 소리에 많은 사람들이 나아와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고 있었는데,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도 세례를 받기 위해 왔습니다. 그것을 본 요한이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소리를 지릅니다. “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아주 끔찍한 말이지요? 우리 한국말에는 개새끼라는 욕이 있어요. 영어에는 개새끼라는 욕은 없고 대신 son of bitch라는 험한 욕이 있습니다. 이처럼 언어마다 문화마다 욕의 내용도 다른 것 같은데, 유대인들의 문화에서 독사의 자식이라는 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어요. 어쨌든 그것은 우리말의 개새끼나 영어의 son of bitch에 해당하는, 어쩌면 더 심한 욕인지도 모릅니다. 특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뱀은 특별한 상징적인 존재이기도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사탄이 뱀의 모습으로 하와를 유혹해서 인류를 타락에 빠뜨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뱀은 저주를 받았잖아요. 즉 그들을 독사의 자식이라고 한 것은 저주받을 사악한 인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왜 요한은 세례 받겠다고 나온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그런 심한 욕을 퍼붓고 있을까요? 그들의 잘못이 너무 커서 회개하고 용서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까? 용서받을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고, 어떤 사람들은 용서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우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살펴봅시다. 사두개인들은 제사장 집단입니다. 새두개인이라는 말은 의로운 자들이라는 뜻인데,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 사독의 이름을 딴 것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세오경만을 인정합니다. 그러니까 유대 전통의 양대 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 제사장 전통과 선지자 전통 가운데 선지자 전통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유대 전통에 충실하기보다 헬레니즘에 동화되었습니다. 로마의 지배를 지지하는 대가로 유대의 종교권력을 보장받았습니다. 유대의 최고 종교적 권력기구인 산헤드린 공회는 주로 사두개인들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모세의 율법에 철저하게 매달렸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해석하고 실생활에 적용하는 과정에 있어서 사실은 율법의 정신을 몹시 훼손한 장본인들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바벨론에 끌려가는 징계를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율법을 지켜야 하는데, 실생활에서 율법을 손쉽게 준수할 수 있도록 수많은 규범과 조항을 만들면서 실제로는 율법과 거리가 먼 율법주의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율법의 시행규범들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경멸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사람들을 아주 싫어하셨고 책망하셨었지요. 자기들은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가장 노엽게 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권력과 백성들의 존경을 누리고 있었지만, 위선과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태도로 하나님의 저주를 자초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속성으로 볼 때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세례 요한을 결코 선지자로 인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요한이 세례 주는 곳에 나타난 것도 회개하고 세례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슨 조사 같은 것을 하기 위해 나왔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 사람들이 아무한테나 쉽게 머리를 숙일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요한은 이들을 책망합니다.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입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는 말은 “너희가 무슨 근거로 임박한 진노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임박한 진노를 피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설령 그들이 세례를 받으러 왔다 할지라도 진정한 뉘우침이 없이 형식적으로 받는 세례라면 그 세례가 그들에게 닥친 진노를 피할 수 있게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회개는 그에 합당한 열매가 동반되어야 진짜 회개입니다. 아무리 회개를 해도 돌아서면 하던 짓을 똑같이 한다면 누가 그 회개를 진짜라고 인정하겠어요? 그러니까 앉은 자리에서 입으로 하는 회개는 회개가 아닌 것입니다. 잘못했다고 생각되는 것이 회개의 전부가 아니에요. 회개는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눈물 몇 방울로 회개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으로 삶이 변화되어야 회개의 열매가 맺혀질 것입니다. 그래서 금식을 해도 남들 보이기 위해서 하고 기도를 해도 사람들 많이 모이는 곳에서 했던 바리새인들의 행태를 본다면 회개와 세례 역시 그들에게 닥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동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례 받았다고 자동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회개하지 못하는 양심은 우리를 파멸로 이끌어갑니다. 문둥병은 고통이 없습니다. 그래서 손가락을 잘라내도 발가락이 떨어져나가도 아프지 않아요. 괜찮은 것 같아요. 우리가 죄를 범하고 있는데도 우리의 양심이 침묵한다면, 그래서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지도 모르고 회개하지도 않는다면, 결국 도끼에 찍혀 불에 던지우는 나무가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 믿어도 그대로 살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지불할 능력이 없는 부도난 수표일 뿐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나타나는 삶으로 우리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하나님의 사랑하시고 기뻐하신 아들
마 3:3-17 / 김태환 목사
지난 주에는 해바라기 같은 인생을 살았던 사람, 세례 요한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그의 인생이 해바라기 같았던 까닭은 그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삶(a life for the Christ)”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인생은 우리 눈에 기이하게만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살았던 삶이 우리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에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시대에 “명목적(名目的)인 크리스찬(nominal Christians)”은 많습니다. 크리스찬이란 이름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일생을 믿음생활 하면서도 한번도 그리스도를 위한 결단을 해보지 못한 사람들, 늘 눈치 보면서 한번도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해보지 못한 사람들, 크리스찬이라고 하면서도 그의 삶에서 이기주의적(利己主義的)인 냄새가 풀풀 나는 사람들, 참 많습니다.
그런 명목적인 크리스찬들은 차고 넘쳐납니다. 여러분들이 또 다시 그런 명목적인 크리스찬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좀 고민 좀 하십시오. 생각 좀 하십시오. “나는 왜 크리스찬이 되었는가?” 일본이 자랑하는 우찌무라간조 목사님이 쓴 책 제목이지요? 그리고 또 물으세요.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 시대의 크리스찬들은 이런 고민을 하지 않습니다. 너무 쉽게 크리스찬이 되려고 합니다.
어차피 우리의 삶은 선택(選擇)입니다. 내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 각자가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앞에 이렇게 자기 인생을 산 사람도 있다고 하시면서 세례 요한의 삶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묻습니다. “요한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았다고 합시다. 그렇지만 그는 자기 삶이 없지 않습니까?” 자기 삶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는 알게 모르게 개인주의, 혹은 이기주의라고 하는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어 있습니다. 자기를 위한 삶을 살아야 그 사람이 행복하다는 그런 공식(公式)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우리 삶이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永遠)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He has also set eternity in the hearts of men., 전도서 3:11).”
사마리아 수가의 우물 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한 여자의 삶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유야 어찌되었든지 그 여자는 자기가 원하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자기가 원하는대로 살았다고 해서 결코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그렇게 만들지 않았다니까요? 다른 사람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도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여자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14).”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분 안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짧지만 굵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 시간이 없었지만, 그는 행복했습니다. 그는 자기 뒤에 오실 그리스도를 위해 예비(豫備)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대통령이 어디를 가면 그냥 차타고 그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전(事前)에 경호원들이 그 길을 답사(踏査)를 합니다. 그리고 경호에 만전을 기합니다. 그리고 나서 대통령이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한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순조롭게 되도록 미리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전지현과 차태현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엽기적인 그녀」에도 그런 얘기가 나옵니다. 전지현이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을 합니다. “너 하늘이 왜 파란지 알아? 그건 내가 그런 색깔을 원하기 때문이야.” “너 이 세상이 왜 존재하는지 알아? 그건 모두 나를 위해서야.” 이런 주장을 펴다가 차태현을 보고 그러지요? “너는 왜 태어났는지 알아? 넌 나를 위해서 태어난 거야.” “말도 않돼.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은데 어떻게 내가 너를 위해서 태어나냐?” “넌 예비(豫備)라는 말도 모르니? 예수님 전에 베드로가 태어났잖아? 너도 그런 거야.” 참, 웃기는 얘기지요?
오늘 말씀에도 요한의 얘기가 계속됩니다. 요한의 사역이 계속되던 어느날,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 부분에서 복음서의 기록들이 약간의 혼선(混線)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요한이 전에 만난 적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만 보면 두 사람은 처음으로 만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요한의 기록에는 요한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면서 “보라! 저 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요한복음 1:29)” 이렇게 말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요한이 그러지요?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찌 당신이 내게 세례를 받으려고 하십니까?” 요한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전에도 요한은 늘 사람들에게 말해 왔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주는 세례는 장차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기 위한 준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세례는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이 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장면이 요한과 예수님이 처음 만난 장면이라면……참 얼마나 감격적인 장면이겠습니까? 내가 일생을 바쳐서 살아야 할 그 분이 내 앞에 서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사모하는 분이 있습니까? 정말 존경하는 분이 있습니까? 대개 그런 분은 과거에 존재했던 사람이거나 지금 존재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나와 너무 멀리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바로 그 사람이 여러분 앞에 서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상상(想像)이 되십니까?
요한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였습니까? “나는 그분의 실발끈을 풀어줄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마태복음 3:11).” “그 분은 잘 되어야 하고 나는 망해야 합니다(요한복음 3:30).” “그 분은 신랑이시고 나는 신랑의 친구입니다. 나는 그분의 기쁨을 같이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합니다(요한복음 3:29).” 바로 자신이 그렇게 증언(證言)했던 그 분이 자기 앞에 서 계시는 것입니다. 요한이 어떻게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았느냐 하는 것은 뒤로 하고, 아무튼 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거절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하신 말씀은 실로 굉장한 말씀이었습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Let it be so now; it is proper for us to do this to fulfill all righteousness., 15절).” 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만, 여기서 “모든 의(all righteousness)”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세례를 받기 위해서 온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라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는 것이다.” 이런 말씀이 됩니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큰 지장(支障)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도대체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데에 무슨 하나님의 뜻이 있겠습니까? 성경을 좀 읽은 사람들도 종종 이렇게 묻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가 없으신 분인데, 왜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그 말이 맞습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보아서는 뭔가 여기에 중요한 뜻일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그라프(S. G. De Graaf)라는 사람이 「약속과 구원(Promise and Deliverance)」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모두 4권으로 된 이 책이 1977년에 나왔습니다. 이 책이 나왔을 때 굉장했습니다. 크리스찬 투데이(Christian Today)는 이 책을 “성경 해석의 이정표(里程標)”라고 했고, 웨스트민스터 신학 저널에서는 “성경을 정확무오(正確無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해석한 책”이라고 했습니다. 이 밖에도 “이 책의 매 장을 열 때마다 먼저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그 다음에 나를 돌아보게 된다.”고 했고, “신앙의 욕구를 이 책만큼 충족 시켜 준 책을 본 적이 없다”고 격찬(激讚)했습니다.
그라프는 이 책에서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말씀을 “하나님의 백성의 머리(Head of His People)”라는 말로 설명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백성들을 하나로 만들어 줄 머리가 없었습니다(But they still lacked a Head in whom they were one.). 만세 전부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머리로 삼으신 분은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님은 백성의 머리로서 자기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신 것입니다. 요한은 미처 이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세례 주기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의 머리로서 백성과 하나가 되기를 원했던 예수님은 나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고 했습니다.
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지요? 히브리서 4:15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이 말씀에 나오는 “대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직접 우리의 연약함을 체험하시고 우리가 겪는 모든 일들을 겪으심으로써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백성들의 머리로서 그들과 하나가 되셨다는 표시(sign)였습니다. 예수님은 백성들과 이렇게 하나가 되심으로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백성들의 머리가 되심으로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머리 되신 그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모든 백성이 머리 되신 그분과 함께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머리 되시는 그 분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실 때, 그의 모든 백성들도 머리 되신 그 분과 함께 살아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세례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받은 세례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세례를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통과 예식(禮式)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세례를 구원과 동일시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세례의 진정한 의미는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일원(一員)이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세례는 단순한 의식(儀式)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확인하는 감격(感激)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 오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그 위에 임했습니다(16절).” 이것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란, 하나님의 인정(認定)하심을 말합니다. 이제 막 펼쳐질 예수님의 공생애(公生涯)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하심이고,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하나님께서 권한(權限)과 능력(能力)을 주신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사건이 오직 두 사람에게만 보였습니다. 요단강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이 보았던 것이 아니라, 오직 당사자인 예수님과 세례 요한만이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보았고, 체험했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예비한 사람이었고, 예수님은 그리스도였습니다. 요한이 얼마나 이 사실을 확신(確信)하고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요한에게 이 사실은 끝까지 숙제였던 것 같습니다. 요한은 감옥에 갇혀서 자기 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았을 때까지도 이 사실을 확인하려고 했습니다(마태복음 11:2-3). 요한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닙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너희 가운데 계시는 알지 못하는 한 사람(but among you, stands one you do not know., 요한복음 1:26)”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요한복음 1:33-34).” 요한에게 있어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예수를 그리스도와 동일시(同一視)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요한과 마찬가지로, 처음에 예수 그 분은 우리에게 알지 못하는 낯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낯선 분이 조금씩 조금씩 우리에게 다가 오셨습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그분은 나의 마음을 모두 점령해 버렸습니다. 처음에 저 만치 서 계시던 그 낯선 분을 우리는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분을 “주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주님, 당신은 내 생의 전부입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가지셨던 미션(mission)은 나의 미션이고, 주님이 가지셨던 꿈과 비전은 곧 나의 꿈이요, 나의 비전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 그분은 여러분에게 누구입니까? 그분은 아직도 낯선 분으로 저만치 서 계시나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목격했던 요한에게 하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17절).” 이 말씀은 의심할 여지없이 예수님을 향한 말씀입니다. 이제 막 성령의 기름 부르심이 있었던 예수님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가 기뻐하는 사람이다.” 이런 음성이 하늘에서 들려 왔습니다. 이 말씀을 읽는 사람들은 이 말씀 자체만 주목해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왜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을까?” “왜 예수님을 내가 기뻐하는 사람이라고 했을까?” 하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라프가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별 말 아닌 것 같지만 찬찬히 생각해 보세요. 굉장한 말입니다. 말을 좀 바꾸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시고 하나님께 기쁨을 얻었던 것은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를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똑 같은 원칙이라고 할까, 아니면 공식(公式)이라고 할까, 똑 같은 포뮬라(formula)가 적용되지 않을까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얻고 기쁨을 얻는 포뮬라가 있을까요?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깨닫고 그 의를 이루려고 하는 사람, 하나님의 의에 목말라 있는 사람,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5:6).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는 것을 자신의 삶의 목표로 삼고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얻고 하나님의 기쁨을 얻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그리고 많은 것을 성취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를 이루는 삶이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기쁨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의 생은 선택(選擇)입니다. 우리는 어느 편이든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삶을 살 것인가, 자신의 의를 이루는 삶을 살 것인가?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을 얻는 삶을 살 것인가? 스스로 만족을 얻는 삶을 살 것인가?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17절).” 이 말씀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이 말씀은 시편 2:7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시편 2편은 영원한 왕이신 그리스도의 즉위식을 묘사한 시편입니다. 후반부 “내 기뻐하는 자라” 이 부분은 이사야 42:1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유명한 “고난 받는 종의 노래(The Songs of Suffering Servant)”의 일부분입니다. 이 두분을 합해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힘으로 우리를 지배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섬기는 종으로 오신 사랑의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말씀의 포커스(focus)가 좁혀지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의(all righteousness)”라고 하니까 그 개념이 굉장히 브로드(broad)했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었다고 했을 때도 그 개념이 잘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결국 마지막에 보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 결정적인 사역은 섬기는 사역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스스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왔고, 많은 사람의 죄를 대속(代贖)하기 위하여 목숨을 내주려고 왔다(마가복음 10:45).”
“어떻게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습니까?” 하는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아주 구체적으로 포커스를 좁혀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삶은 곧 섬기는 삶이다. 섬기는 삶이란 다른 것 아니다. 너의 가장 소중한 것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는 삶이다.” 이제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그러면, 너는 네 인생을 어떻게 경영(經營)하겠느냐? 내가 가지고 살았던 포뮬라를 너도 가지고 살지 않겠느냐?”
여기에 참된 기다림이 있습니다
마 3:1-6 / 김형준 목사
아일랜드 출신의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가 쓰고 1969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Waiting for Godot],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2막짜리 연극이 있습니다. 이 작품이 노벨문학상을 받게 된 이유는 막연한 구원자를 기다리는 인간 내면을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고도를 기다리며]는 절망하고 있는 현대인의 구슬픈 노래요 약속된 희망의 등불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아 기다리다 못해 지친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해설을 덧붙이기도 합니다.
굳이 이 작품을 거론하지 않고 나 자신을 보아도 우리는 마음속에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를 막연히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성탄의 계절에 “양로원(Nursing Home)”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차를 몰고 입구에 들어서면 각 방 창문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얼굴들이 고개를 내어놓고 열심히 지켜봅니다. 아예 현관에 나온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대했던 사람이 아닐 때 할머니 할아버지 얼굴에서 스쳐지나가던 실망의 표정은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 장면으로 남아있습니다.
누군가가 인생을 ‘기다림의 삶’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인생의 여러 기다림 중에서도 참 기쁨과 행복, 희망을 줄 수 있는 존재에 대한 기대는 단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것입니다.
본문은 세례 요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구원자를 기다리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여러 지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세례 요한의 입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듣고 세례를 받습니다. 그의 외침 앞에 진지하게 자복하며 회개합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이 오실 길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누구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정말 간직하고 사모해야 할 기다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고 기다렸던 이유는 약속된 그 나라는 참 행복이 있고, 인간이 추구하고 가까이 하고 싶어 하는 온갖 아름다움이 다 갖추어진 이상적인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처음으로 전파하신 말씀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가르치신 대부분도 바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초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 메시지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식을 좋은 소식 즉, 복음이라 말했습니다.
윌리엄 바클레이 목사님은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 나라는 첫째 풍요의 나라라고 했습니다. 아모스 9:13-14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그 때에 파종하는 자가 곡식 추수하는 자의 뒤를 이으며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이으며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며 작은 산들은 녹으리라......그들이 포도원들을 가꾸고 그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들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리라’ 즉, 하나님 나라에서는 아무도 주리지 않으며, 아무도 목마르지 않으며, 아무도 가난하지 않은 그런 시대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 나라는 화목과 조화의 나라라고 했습니다. 그 나라에서는 인간과 짐승 사이의 적대 관계가 사라집니다. 이사야 11:6-9 말씀을 보면 “그 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세 번째로 하나님 나라는 고통이 없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즉 땅의 모든 고통이 종식되고 새롭게 건강이 주어집니다. 이사야 25장 8절을 보면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말씀했습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 나라는 평화의 나라라고 했습니다. 모든 전쟁이 끝이 나고 진정한 평화가 있는 나라입니다. 이사야 11장 9절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32장 18절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에 있으려니와” 라고 말씀합니다.
선지자들이 예언했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이 나라를 사모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특히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한 고통과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몹시 가난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굶어죽기까지 했습니다. 여기저기 내부 다툼과 분열이 끊이지 않았고, 적대감이 가득했습니다. 전쟁과 죽음의 소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반란을 일으켰다 하여 형제들이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아픔도 겪습니다. 희망을 가졌던 젊은이들이 삶을 포기하는 일이 여기저기서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볼 때에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는 나라는 눈물의 나라였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더욱 간절히 사모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형편이 이스라엘보다 나을 것은 무엇입니까? 연세 많으신 한 어른이 이런 말씀을 합니다. 당신은 짧은 생애 동안 네 나라의 통치를 받으셨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일본, 다음에는 북한 공산당, 그리고 남한, 현재는 미국의 통치입니다. 고향이 평양으로 일제 시대에 태어나셔서 북한 공산치하에 계시다가 남한으로 월남하셨고 지금은 미국에 살고 계시는 분입니다. 네 나라의 통치를 받는 동안 그 어르신에게는 두려움과 분노, 죽음의 시간이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미군 장갑차에 치어죽은 여중생의 재판문제를 두고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죽은 사람은 있는데 책임질 사람이 없습니다. 자녀를 둔 부모의 그 마음은 그야말로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가정을 보십시다. 보험금을 타기 위해서 교통사고를 위장해 남편을 살해한 사람이 있습니다. 싸움 때문에 속이 상한 나머지 방에 불을 지르고 자신도 죽고 가족도 함께 죽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있습니다. 사회로 우리 눈을 돌려봅시다. 빈부 격차는 갈수록 심해지고,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을 그대로 지켜봐야하는 일이 여기저기에 있습니다. 군대에서 의문사한 자녀를 둔 부모들의 억울함이 있습니다. 남과 북이 대처하고 있고, 반세기가 흘렀지만 가족끼리 만나지 못하는 서러움에 눈물짓습니다. 전쟁의 위협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늘 불안한 곳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입니다.
문제는 우리 힘으로 이 땅의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상적인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스스로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플라톤의 이상 국가론이 제창된 이래 인간의 행복과 유토피아를 위한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공산주의도 ‘어떻게 하면 인간을 행복하게 할까’하는 고민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인간이 제안하고 시도한 제도와 방법이 많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죄로 인한 문제와 고통으로 이 땅은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고 선포합니다. 어디에서 외치느냐 하면,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입니다. 광야는 쓸쓸한 곳입니다. 아무도 살지 않는 버려진 곳에서 선포되는 하나님 말씀은 그곳에 진정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통치하시겠다 함을 뜻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거나 세상 종말에서 볼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광야 같은 이 땅이지만 하나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고 임재하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4장 17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잇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했습니다. 즉 주님의 통치가 있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의가 세워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온전한 평강이 있고, 구원의 즐거움이 있어 희락으로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진정 기다려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나라입니다. 이번 성탄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간구는 ‘주님! 나의 삶과 가정, 우리 교회와 민족위에 하나님 통치가 있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해 주소서!’가 되어야 할 줄 압니다.
그러면 다음으로 우리가 그토록 사모하고 바라는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2절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6절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8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라고 나와 있습니다. 말씀을 정리하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 행해야 할 것, 즉 하나님 통치를 이루기 위해 행해야 할 것이 있는데 우리 죄를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회개라고 말씀하신 ‘메타노에이테’라는 단어를 살펴보겠습니다. ‘메타노에오’는 이동 변화를 의미하는 전치사 ‘메타’와 ‘마음으로 이해하다’, ‘숙고하다’라는 동사 ‘노에오’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마음을 바꾸다’, ‘자기가 행한 것에 대해 유감스럽게 여기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주의할 것은 단순히 머리로만 계획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의지와 전존재를 다해 자신의 계획과 작정 및 행동을 바꾸고 돌이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덧붙여 이 단어가 현재시제로 되어있어 메시야를 맞이해야 할 사람은 언제나 현재로서 자기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는 심령을 가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성경은 자복했다고 말씀합니다. 죄를 인정하고 자백했습니다. 공적으로 인정하는 모습입니다. 바로 세례 받는 행위는 죄인임을 사람들 앞에서도 인정하고 자백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라고 말할 때에 ‘악시우스’의 원형 ‘악시온’은 ‘무게를 단다’는 의미입니다. 나의 죄에 상응하는 회개의 열매, 삶의 변화를 말씀합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은 구체적으로 어떤 죄를 말씀하고 있을까요? 세례요한이 외친 말씀은 이사야 40장 3-4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하라 골짜기 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이사야 40장은 포로 생활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오랜 포로생활에 익숙해져 약속하신 땅에 대한 소망을 더 이상 가꾸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에 대해 조금씩 잊어버렸습니다. 실제로 스가랴 선지자에 의하면 포로 귀환 때에 약속의 땅으로 돌아간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좀더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한 말을 보면 됩니다. 이들은 세례를 받으러 나오지 않았습니다. 세례를 받으면 죄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냥 정탐하러 왔을 수도 있습니다. 혹 스스로 정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깨끗해지고자 나왔을 수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이 이스라엘 민족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 특별한 지위에 있다할지라도 그분의 뜻에 합당치 않으면 폐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질책하며, 임박한 진노를 경고합니다.
이와 같이 이사야 40장이 쓰인 배경과 마태복음에서 말씀의 대상이 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삶을 보면 세례요한이 말한 죄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현실의 삶에 안주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우선에 생활이 편하여 어려움 없이 살만하기에 하나님 나라를 간절히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죄인으로서 이 땅의 포로 생활을 하는 것인데 아무리 편안하면 얼마나 편안하겠습니까?
또한 나 자신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라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까? 오랜 신앙생활로 인해 당연히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리라 자신하십니까? 목사로, 장로로, 안수집사로, 권사로, 구역장으로, 교사로, 성가대원으로 교회 출석하며 직분을 감당하고, 사회적으로 볼 때 도덕적ㆍ윤리적인 죄를 짓지 않는다 해서 주의 임박한 진노를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지금 배우고 있습니다.
주님의 구원에 담긴 본질적인 사명을 잊어버린 그 사람이 회개해야 합니다. 이미 도끼가 뿌리에 놓여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정결하지 못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기를 치거나 거짓된 삶을 사는 등 이중생활을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웁니다. 잘못된 것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삶의 변화는 없습니다. 이미 안주하며 얻은 편안을 잃어버릴까 두려워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후회입니다. 주님은 후회가 아닌 회개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내 것을 변화시킴에 인색한 삶은 아닌지요? 이번 성탄절에 여러분 가슴과 가정과 섬기는 직분 그리고 이 민족 위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도록 간구하십시오. 잃어버린 사명을 다시 찾고 죄인임을 고백하며 주님을 우리 삶에 오셔서 다스리시도록 초청하십시다. 회개는 재림을 기다린다 하는 성도의 마땅한 간구며, 성탄을 맞이하는 바른 자세입니다.
지난 주간 중에 기적의 100달러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데니 & 리사 벨레시 목사님 부부가 쓴 체험적인 글입니다. 미국 남가주 한 교회 목사님이 하나님 나라가 우리 삶 속에 이뤄지도록 해야겠다는 마음의 뜻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인 100명을 선정하여 100달러를 주고 그 돈을 어떻게 사용하였는지 결과를 함께 나누었고, 이를 담은 것이 책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돈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체험토록 한 이유는 우리를 주님으로부터 가장 쉽고도 멀리 떨어지게 만들 수 있는 요소가 돈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몇 사람의 지원으로 만 달러를 모았습니다. 4부 예배를 드리는 동안 각각의 예배시간마다 25명의 신청자를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믿지를 않았습니다. 겨우 겨우 100명을 채웠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백 달러와 함께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첫째 그 백 달러의 돈은 하나님의 재산임을 잊지 말 것, 둘째 그 돈을 하나님의 사업에 투자할 것, 셋째 그 사업의 결과를 시작한 날로부터 구십일 되는 날에 보고할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보고회 날 온 교인이 엄청난 축복과 변화 앞에 놀랐습니다. 석 달 동안 만달라에서 십만 달러로 늘어났고, 수 천명되는 사람들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제공받았으며, 지역 사회 전체가 변화되었음은 물론 미국 NBC방송 데이트 라인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이 사실이 미국 전역에 보도되었습니다.
그 중에 스티브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위스콘신 출신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했습니다. 능력을 인정받아 마흔넷에 꽤 큰 회사의 사장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는 정말 잘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스티브에게는 6살짜리 알렉스라는 딸이 있었는데 어느 날 런던으로 출장간 사이에 딸이 죽었습니다. 그는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방황하는 중 교회를 찾아가라는 음성을 듣게 되었고 교회에 왔지만 한동안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인가 말씀을 듣고 주를 그리스도로 영접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백 달러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사는 동네에 딸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소원을 들어주는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해주고 싶지만 못해주는 대상과 선물을 적은 리스트를 받았습니다. 모두 80개였는데 나무에 매달아 두었습니다. 그리고 동네사람들에게 소원을 들어주는 나무의 취지를 설명하면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80개의 소원 종이는 동네사람들에 의해 다 없어졌습니다. 며칠 뒤에 약 팔천달러 어치의 선물과 상품이 모아졌고 스티브는 모인 선물로 온 동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바로 이 운동에 100여 가정 이상이 참여했고, 참여한 사람들 마음속에는 잔잔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스티브 부부는 생애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크리스마스를 보냈다고 간증했습니다.
주님은 오늘에 안주하고 종교생활로써 그저 교회만 왔다 갔다 하라고 우리를 선택하고 구원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필요한 사람에게 나를 보내어 당신의 뜻을 이루시려는 계획이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잊고, 곧잘 매일 반복되는 교회 생활이 다 인줄 아는 우리에게 일깨워주십니다. 내 삶의 현장에 주님 나라가 선포되도록 날마다 깨어 있지 않을 때는 누구든지 바리새인과 사두개파 사람들에게 주어진 경고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세례요한의 외침을 마음으로 듣고 진정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백성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번 성탄에 먼저 깨달은 우리 통해 하나님 나라의 기쁨이 이웃과 지역사회에 전해지기를, 또한 계속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 맺기를 기원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 3:1-4 / 이정선 목사
우리가 예수님 이야기를 할 때 결코 빠뜨릴 수 없는 한 사람은 세례 요한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요한의 출생 이야기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여기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 후에 선지자의 모습을 한 세례 요한이 갑자기 튀어나옵니다. 그가 어디서 왔는지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말하지 않고 먼저 그의 활동을 소개합니다.
우선 마태는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묘사합니다. 그는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매고 있습니다. 이것은 선지자의 복장입니다. 선지자가 메뚜기와 꿀만 먹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광야에서 메뚜기와 꿀을 먹고 사는 모습은 유대인들에게 매우 강한 선지자의 이미지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선지자가 광야에서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가 광야에서 활동하는 것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충족시키는 조건이 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달하는 자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런데 400년 동안이나 선지자가 끊어져버렸습니다. 말이 쉽게 400년이지 그 긴 세월은 사람들의 생각과 기대를 바꾸어놓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선지자란 전설에나 나오는 존재가 되었을 거란 말이지요. 그러던 중에 광야에서 선지자가 나타났으니 백성들의 반응이 얼마나 대단했겠어요? 그런데 400년 만에 선지자가 나타난 이유는 무엇이었고, 또 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일까요?
마태는 선지자 이사야를 인용해서 400년 만에 나타난 선지자의 존재를 설명합니다. 그는 주의 길을 예비시키는 사람으로서 온 것입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는 말라기입니다. 그 말라기의 예언서 맨 마지막에 보면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선지 엘리야를 보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말 4:5).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입니다. 그는 죽지 않고 불마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때가 되면 그 엘리야를 다시 보내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언젠가 엘리야가 다시 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더냐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의 대답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엘리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메시야가 오기 전에 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메시야로 오셨는데도 왜 그 전에 엘리야가 오지 않았는지 제자들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엘리야가 분명히 왔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예수님이 세례 요한을 가리켜 엘리야라고 하신 것을 알았습니다(마 17:13).
그러면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400년 만에 나타난 선지자가 무슨 말을 했을까요? 그가 선포한 메시지는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천국이 가까웠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요. 그렇지만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은 무슨 소리입니까? 여러분, 천국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천국이 가까이 올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이해하는 천국은 어떤 것입니까? 여기서 세례 요한이 말하고 있는 천국은 어떤 것일 것 같습니까? 우리가 이해하는 천국의 개념과 같은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것입니까?
우리는 보통 예수 믿고 천국에 간다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하고 있네요. 예수님이 마귀의 시험을 받으신 후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선포하셨던 메시지 역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이 바로 이 천국의 선포였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서의 핵심은 예수님에 의한 천국의 선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 있는 사실은 오직 마태복음에만 천국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가나 누가, 요한은 천국이라는 단어 대신 하나님 나라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마태도 하나님 나라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천국(하늘나라)이라는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한 이유는 이 복음서가 유대인을 대상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너무 신성시하는 하나님이라는 단어 대신 좀 더 편한 단어를 쓴 것이지요. 그러니까 천국, 즉 하늘나라와 하나님 나라는 동일한 개념입니다.
그러면 천국, 즉 하늘나라, 혹은 하나님 나라는 무엇이고 어디에 있습니까? 저는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친 후에 가게 될 내세, 즉 부활한 몸으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되는 그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보통 천국이라면 그 천국을 떠올립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나라를 그러한 개념으로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세례 요한이 말하는 천국은 그 개념이 아니잖아요?
세례 요한이 선포했던 가까이 다가온 천국은 그러면 어떤 것일까요? 이 천국의 개념을 가장 알기 쉽게 말씀하신 것은 귀신 쫓아내는 것에 대해서 바리새인들과 논쟁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귀신들린 사람 고쳐주시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입어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천국이 가까웠다고 했었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하십니다. 천국은 이렇게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마치 왕이 군대를 거느리고 들이닥치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도 그렇게 우리에게 들이닥치는 것이란 말이지요. 전에는 귀신이 왕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귀신이 왕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이 왕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왕이신 곳,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미치는 곳,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한번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할 것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질문을 한 바리새인은 아마 혁명이나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었나 봅니다. 마치 모세나 여호수아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꿈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다윗 왕국의 회복이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임했고, 또 제자들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오심으로 그 하나님의 나라가 제자들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천국은 지금 우리 안에도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천국, 또는 하나님의 나라를 살고 있나요? 하나님이 왕 되시고 다스리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라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당연히 현재 진행형으로 천국을 살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져오신 그 천국이 우리 안에 있어야지요.
요한이 천국이 가까웠다고 한 것은 물론 예수님의 오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을 가지고 오십니다. 하나님의 왕 되심을 이루시려고 오십니다. 잃어버린 백성들을 되찾으시려고 오시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잃어버렸는가 하면 죄와 사망의 권세에게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잃어버린 백성들을 되찾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로 막힌 그 장벽을 허시고 우리를 다시 자녀로 삼아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에 대하여 하신 일은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공짜로 용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에게 그 죄를 담당시키시고 그 값을 치르시게 하심으로 우리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이 하신 일이 용서였다면, 그 죄에 대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바로 회개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가 가로놓여 있는데, 그 죄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회개 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감추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지요. 죄를 부인하고 죄가 없다고 우기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죄가 별 것 아니라고 자신을 정당화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일 뿐이지요. 우리가 그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정직하게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것이 회개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우리가 먼저 죄를 회개해야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회개하는 것이 시간적인 순서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천국을 살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죄의 회개입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고는 하나님과 함께 동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거리끼는 것을 품고 있으면서 하나님께 기도가 제대로 나올 수 있던가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오늘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그 천국은 이미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하나님의 나라를 오늘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천국을 기쁨으로 충만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막힌 담을 허물어야 합니다. 죄를 가슴에 담고 살아간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주님 앞에 내어놓고 용서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행복하게 천국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광야의 사람
마 3:1-4 / 김삼환 목사
이스라엘 성지에 가서 가장 충격을 받고 놀라는 것은 광야 때문입니다. 낙심이 될 정도입니다. ‘이 땅이 무슨 성지냐? 이런 땅이 무슨 가장 축복받는 가나안이냐?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는데 물도 안 흐른다. 이런 땅이 어디 있느냐?’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성지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땅은 면적도 얼마 안 되거니와 거의 광야입니다. 낮에는 40도 50도 오르내리는 뜨거운 열기가 용광로 같고, 찜질방보다 더 훨씬 뜨거운 열기가 막 솟아오릅니다. 1분도 서있을 수 없습니다. 밤에는 한없이 춥습니다. 과일나무, 곡식하나 심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오늘날까지 곡식하나 심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지의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헤브론 브엘세바는 광야입니다. 저주의 땅입니다.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을 보기 좋게 우리가 그러지 그 주변이 전부 광야입니다. 사해바다에서 저 요단강까지 요단강을 거쳐서 갈릴리까지 남북 다 동서남북 어디를 봐도 삭막하고 메마른 저주의 땅입니다. 설수 없는 깎아지는 듯 한 절벽 칼날 같은 먼 계곡들이 천천만만을 이루고 있고 높은데서 돌 하나 구르면 몇 백 미터 바로 떨어집니다. 전갈과 뱀이 있는 그 광야, 이스라엘은 다 광야라고 보아도 됩니다. 왜 하나님은 이곳으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왜 이곳으로 선민을 다시 이끌어 내셨습니까?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은 왜 이 땅을 이렇게도 좋아하고 미국같이 영국같이 좋은 곳에 살면서도 이스라엘의 꿈은 시온이즘입니다. 여기서 사는 것입니다. 이 땅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엄청난 전쟁, 별의 별 일 겪으면서도 지금도 팔레스타인이 성지로 몰려들며, 이 땅 아무 가치 없는 이 땅을 왜 이렇게도 좋아합니까? 이 땅이 어떻게 이렇게 축복의 땅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보는 것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의 힘은 바로 이 광야에 있습니다. 광야는 성경이 말해주는 바로 모든 신비한, 숨은 비밀이 말할 수 없이 숨겨져 있는 거룩한 영적 보고의 땅입니다. 이스라엘의 축복과 능력은 바로 이 광야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광야를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 영적 힘은 바로 이 광야에서 나옵니다.
오늘날 세계에 이스라엘 민족이 우뚝 선 배경에는 광야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광야는 은혜의 땅입니다. 축복의 땅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 놀라운 일들은 광야에서 일어나지 않습니까? 오늘 읽어드린 세례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입니다. 세례요한은 원래 제사장의 아들입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아들이지만은 이 세례요한은 광야로 들어가서 오늘 무엇을 먹었다고 나옵니까? 메뚜기 잡아먹고 몸에는 뭘 걸쳤습니까? 짐승 가죽을, 약대 털옷을 간단하게 두르고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0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목마르게 갈급하게 기다렸습니다. 끊임없이 말씀해 주시던 선지자가 뚝 끊어지고 400년 동안 메시아를 기다리고 선지자를 기다렸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의 소리를 광야에서 들리게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광야로 몰려들었습니다. 가보니까 완전히 수염이 온 얼굴에 가득한, 털이 나있는 형편없는 옷을 입은 세례요한이었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잘 먹고 평안을 누리며, 부유하게 잘 입고 아주 영광스러운 삶을 살 텐데 제사장의 옷을 벗어 던지고 약대 털옷을 입으며, 양다리를 뜯어야 할 사람이 지금 메뚜기를 잡아먹으면서 광야에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세례요한이 위대한 선지자였고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찾아 광야로 가서 만나서 세례를 받지 않습니까? 오늘 안 읽어드렸지만 이 다음 세례요한에게 예수님이 세례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던 자리를 저희들이 가 보았습니다. 요단강 지역인데 거기도 완전 광야입니다. 거기 가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세례 받으시고 바로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가셔서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십니다. 예수님도 광야, 세례요한도 광야, 광야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이끌어 가셨다 그랬습니다. 성령이 인도하는 곳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광야입니다. 광야로 간 사람들은 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에 쓰임 받고 인류역사에 최고의 큰일을 했습니다. 광야로 간 사람들, 광야를 귀히 여긴 사람들은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이 광야 출신이지 않습니까? 사도바울도 갈라디아서 1장 17절에 보면 광야로 가서 예수님 믿고 3년 동안 광야에서 기도하고 은혜 받으며, 새 사람 되고 변화되며 주의 일을 했습니다. 3년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광야에서 3년, 모세는 40년 광야에서 양을 쳤고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인도했으니 그의 생애는 80년을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곳이 어디입니까? 광야입니다. 광야는 메마른 곳입니다 삭막한 곳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곳입니다. 광야는 모든 생명이 살 수 없는 식물 동물이 죽어가는 곳이지만 영적으로는 내 영혼이 사는 곳이 광야입니다. 광야로 들어가면 내 영혼은 살게 되어져 있습니다. 아무것도 먹을 것, 입을 것이 없는 메마른 황폐한 땅이지만 영적으로는 내 오아시스가 터져 나오는 생수가 터져 나오는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겉모양은 약대 털옷을 입고 형평 없지만은 그의 심령은 거룩하고 새로워지며 정결함을 입는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광야를 찾아서 불행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이 도시를 찾고 유흥가를 찾으며, 연락의 장소를 찾고 사람 있는 곳으로 가서 모두 불행해지고 고통당하며 슬픔이 오는 것이지, 광야로 간 교회 광야를 찾은 사람은 망한 일도 없고 불행한 일이 일절 없습니다. 현대문명이 우리로 하여금 광야를 없이하게 하고, 인간의 지식과 물질과 능력으로 에덴동산같이 아름답게 꾸몄지만 우리의 가정은 파괴되고 실질적인 우리의 삶은 광야같은 비참함이 왔습니다. 광야로 간 사람들은 다 새로움과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는데 이러한 현대문명 속에서 만족을 얻으려고 하는 현대인들은 소돔성을 찾았던 롯과 같이 패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갈 곳은 바로 광야입니다. 예수님은 40일 금식기도를 하실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광야에서 복음을 전하셔서 오병이어의 기적도 광야에서 베푸시고 끊임없는 광야와 관계된 삶을 사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광야의 은혜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광야로 들어가는 사람은 새로운 삶을 얻습니다. 주님을 만납니다. 엘리야도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모세도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광야에 들어간 사람은 모두 하나님을 만납니다. 광야를 거쳐야 담대해집니다. 그런 곳을 지나야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용기가 생깁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은 염려가 너무 많습니다. 두려움이 왜 그렇게 많습니까? 조그만 것도 참지 못하고 요사이는 얼마나 자살을 많이 하는지, 부모가 조금 꾸중해도 죽어버립니다. 부부간에도 조금 다투면 아파트에서 나가떨어집니다. 시험 떨어졌다고 죽고 대학 못 갔다고 떨어지며, 얼굴 성형 수술했다가 계획대로 안됐다고 죽고 전부 죽습니다. 안 죽어도 조그만 일에 흥분하고 조그만 일에 좌절하며 조그만 일에 인생을 포기합니다. 다 광야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현대인들은 광야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왜 죽습니까? 살아야지.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데 광야를 거친 사람은 어떤 일, 환경에 적응합니다. 광야에 그 모든 어려운 환경이 있기 때문에 어떤 일에도 적응합니다. 여러분! 자녀를 그냥 얼렁얼렁 길러놓으면, 그 아들은 그 자녀는 광야 생활에 승리할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광야를 거쳐야 광야 같은 세상을 잘 살 수 있습니다. 이 광야 같은 세상에 얼마나 환란, 시험, 재난, 사고, 불행한 일이 많습니까?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지 않고는 세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광야를 거쳐야 광야를 이길 수 있습니다. 광야를 감당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광야를 거쳐야 감사한 마음이 생깁니다. 광야를 지나봐야 모든 것이 감사합니다. 메뚜기 하나 잡아먹어도 감사하고 이만한 과일 하나 있어도 감사하며, 집에서 밥을 주어도 감사하고 밥 안주면 라면 끓여 먹고도 감사하며, 먹을 것 있는데 왜 감사 안 하겠습니까? 옷을 입으면 입어서 감사하고 잠을 자면 잠을 자서 감사하며, 걸어가면 걸어가서 감사하고 차타면 차타서 감사하며, 버스타면 버스타서 감사하고 다 감사합니다. 건강하게 살아있는 이 모든 삶에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데 항상 감사가 넘치는 줄로 믿습니다.
광야를 거쳐야 오직 주님입니다. 주님 중심한 삶, 사람 믿을 거 없습니다. 내 주변에 사람 이글이글하고 인기가 많고 먹을 거 입을 거 많은데, 하나님 찾습니까? 주님 있습니까? 실제로는 예수님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광야로 가야하고 광야가 소중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은 광야로 인도합니다. 교회는 항상 광야와 같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갈 곳은 어디입니까? 우리의 설 곳이 어디 입니까? 한국 교회가 살려면, 우리 모든 성도들이 살려면, 영적으로 승리하려면, 광야로 가야합니다. 광야에 가서 기도해야 합니다. 광야에 가서 부르짖어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 살아날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눈물 흘리고 광야에서 회개하며, 광야에서 성령 충만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복음을 증거 하는 증인으로 사명을 다하고 하나님의 몸 된 교회에 충성하는 기둥 같은 성도들이 될 수 있습니다. 광야 없이 하나님을 만나니 예배의 기쁨이 없습니다. 교회 나와도 은혜를 못 받습니다. 광야를 떠나서 주님을 만나지 않고 세상으로 나가니 만신창이가 되어서 돌아옵니다. 얻어터집니다. 하나님 없이 광야를 거치지 않고 사람 만나니 사람에게 속고 사기당하며, 사람에게 온갖 상처 다 받습니다. 하나님은 만나지 않고 사업하니 사업이 짐이 되어 사업 때문에 고민하고 걱정하다가 그만 자살해 죽습니다. 하나님 만나지 않고 부부간에 만나니까 오히려 싸움만하다가 세월 다 보냅니다. 만나 참 사랑을 하나도 못하고 동물적인 사랑이나 하고 그 외에 정말 인간적인 성숙한 사랑 하루도 못하고 톡탁 거리다가 툭 끊어집니다. 광야를 거쳐야 이 모든 축복을 축복으로 알고 은혜를 은혜로 알고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광야는 소중합니다.
우리 한국교회 축복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광야에서 왔습니다. 일제시대 때 그 많은 환란, 순교, 엄청난 핍박, 6.25사변의 그 많은 전쟁, 우리 한국 교회는 광야가 있는 민족입니다. 많은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눈물로 모두 밤을 새워 부르짖고 우리 믿음의 어머니들, 믿음의 선조들,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저는 60년대부터 목회를 했는데 설교하면 90%가 웁니다. 웃는 일은 없습니다. 기도한번 하고 일어나 보면 마룻바닥에 콧물, 눈물, 다 떨어집니다. 누구는 울고 누구는 안 우는 게 아닙니다. 다 웁니다. 우리는 콧물, 눈물 흘리며 살아왔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힘입니다. 그럴 때 교회는 살았습니다. 광야가 있으니까 삽니다. 광야가 있으니까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광야를 잃어버렸습니다. 너무 많은 축복 속에 은혜 속에 부유함과 번영 속에 광야에다 나무를 심어 교회마다 에덴동산 같습니다. 풍성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위기입니다. 저는 우리 한국 교회에 안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그런 세계를 잘 모르는데 많은 분들이 그런 분들에 대해서 증오하고 모이면 막 욕하고 저주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안티가 있어야 됩니다. 권력도 환란도 부딪히고 안티를 어디서나 만나야 교회가 삽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항상 안티가 있었습니다. 이걸 나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한국 교회는 끝까지 안티가 있어야 됩니다. 그냥 두면 안 됩니다. 잡초는 가만히 두지만은 곡식을 그냥 두면 안 됩니다. 항상 가만히 두면 안 됩니다. 교인은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교회가 되고 능력 있는 교회가 되려면 안티하고 같이 있어야 됩니다. 교회가, 교회 지도자가 나라를 이끌어 가면서 형님 먼저 아우 먼저 이렇게 하면 교회가 살줄 압니까? 그러면 더 위기가 옵니다. 한국 교회에 앞으로 그런 일이 와서는 안 됩니다. 권력의 주변에 주의 종들이 얼렁거리면 안 됩니다. 왔다 갔다 하면 안 됩니다. 교회는 항상 광야에서 주님과 함께 외롭게 ‘아버지! 우리를 살려주세요.’라고, 하나님 앞에 눈물로 부르짖어야 목사도 살고 교회도 살며, 성도가 사는 줄로 믿습니다. 교회가 오는 어려움, 성도들이 오는 어려움은 축복의 자원입니다. 광야가 이스라엘의 영적 힘이라면, 여러분 주변에, 여러분의 가정에, 여러분의 앞날에, 여러분 자녀에게 오는 이 광야는 여러분에게 영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주실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인 줄로 믿습니다.
세계 육상계를 잡고 있는 나라들이 많은데 그 중에 대표적인 나라가 에티오피아입니다. 에티오피아는 여러분이 잘 아는 대로 맨발의 선수, 1960년 로마 올림픽에 금메달을 따고 그때까지 세계 기록이 2시간 26분입니다. 그런데 이 기록을 십 분 대로 처음 단축한 사람이 바로 에티오피아 선수 아베베라고 하는 선수입니다. 아키라 비킬라 아베베라고 하는 이 선수는 맨발로 뛰었습니다. 여러분 자동차로 가도 42Km 한참 갑니다. 한참은 아니지만은 42Km 가 보십시오. 보통 멉니까? 60Km로 자동차로 달려도 40분 가야 됩니다. 42Km 얼마나 멉니까? 신을 신고 가도 다 해어지는데 맨발로 42Km를 뛰었습니다. 맨발의 청춘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분이 아베베입니다. 이 분은 한번만 이긴 게 아닙니다. 1964년 동경 올림픽에서 또 금메달을 땄습니다. 역사에 없는 일입니다. 올림픽에서 어떻게 두 번이나 다 금메달 딸 수 있습니까? 그때는 2시간 12분대. 십 분대 또 단축을 시킬 수 있는 기록을 이 아베베가 혼자서 다 놓습니다. 놀라운 일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십분 정도를 벌려놓는 똑같이 뛰는 사람, 십분 간격으로 떨어뜨린다는게 보통 잘 달리는 것이 아닙니다. 육상은 아베베만 아닙니다. 2004년 세계 육상 올해의 선수로 뽑힌 사람 케니시아도 에티오피아 사람입니다. 5,000m, 10,000m 세계 기록입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또 10,000m, 3,000m에 우승한 사람 베켈라도 에티오피아 사람입니다. 데파르라고 하는 이 여자는 3,000m, 5,000m, 10,000m 3개에서 1위입니다. 여자인대도 3개 다 메달 갖고 있습니다. 최고입니다. 최고의 선수입니다. 그 외에도 굉장히 많습니다.
세계적인 선수들이 많이 있는 곳이 바로 에티오피아입니다. 우습게 알면 안 됩니다. 에티오피아에서 왜 이렇게 세계적인 선수가 많이 나오느냐? 모르는 분은 모릅니다. 이게 진리입니다. 저는 에티오피아를 많이 갔기 때문에 압니다. 왜 그렇습니까? 에티오피아는 수도 아디스아바바는 2,700m 넘습니다. 도시가 이렇게, 산에 이렇게 되 있는데 제일 윗동네로 올라가면 3,000m로 올라갑니다. 그러니까 산소가 얼마나 부족한지 모릅니다. 여기 하고는 비교가 안 됩니다. 그런데서 늘 걸어 다니고 그런데서 훈련 받으니까 과학적인 훈련을 안 해도 그 지역이 과학적인 훈련보다 열배나 더 좋습니다. 산소가 없는 그 어려운 곳에서 살아가고 뛰어 다니니, 밑에 내려오면 새가 됩니다. 못 당합니다. 지난번 2004년 그리스에서도 러시아 선수가 아무리 따라가도 3,000m를 달리는데 마지막 100m를 남겨두고 육상 100m같이 뛰어가 버립니다. 힘이 남습니다. 못 당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보면 이 높은 곳, 산소가 부족한 것, 매일 숨차게 사는 것, 어려운 것 같지만은 그것을 활용하는 민족, 영적으로 그것을 잘 활용하는 민족이 세계적인 지도자가 되고 성공하는 사람이 되며, 세계를 움직이는 놀라운 과학과 문화가 스포츠 할 것 없이 거기서 나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나쁜 환경을 원망하고 불평하면 안 됩니다. 감사함으로 이겨내면 거기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엘리야도 엘리사도 다 광야 출신입니다. 광야에서 힘들게 어렵게 거칠게 살면서 저들은 아합과 싸워 이길 수 있었고, 별의별 어려움 환란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도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원수 마귀가 방방곡곡에서 얼마나 많은데 우리 한사람 여러분을 다 넘어뜨리려고 하기에 광야 정신이, 야성이, 근성이, 헝그리 정신이 있어야 됩니다. 교인은 약할 때는 어린 아이한테도 지지만은 믿음을 지킬 때는 세계가 달려들어도 못 이겨야 그게 진짜 교인입니다. 말 한마디에 나가 뚝, 뚝 떨어지고 공갈치면 뚝, 뚝 떨어지고 어려운 시험 오면 뚝뚝 떨어지는 거 교인 아닙니다. 광야를 거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성도는 노예 근성이 있어야 됩니다.
벤허라는 영화에 보면 막 그 채찍에 맞으면서 마지막 경주할 때 막 때려도 달리는 이런 정신이 있어야 됩니다. 할렐루야! 십자가의 정신,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이 세상을 살 때에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예수 안에서 누가 나를 대적하겠느냐?’ 이 험한 세상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우린 모든 일에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보라 능력의 주님 바라보아라 주의 이름 부르는 모든 자를 힘 주시고 늘 지켜 주시리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 주시리.♬
우리 교회 3월 특별새벽집회, 9월 특별새벽집회는 27년 지나오면서 우리 교인들에게 엄청난 힘든 시간이고 여러분이 너무너무 고생을 많이 하십니다. 그러나 저도 말할 수 없이 어렵습니다. 얼마나 어렵나 하면 하여튼 몸이 몇 kg이 항상 줍니다. 빼짝 마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잠을 못 자서 그렇습니다. 첫째, 4시에 시작하니까 3시부터 일어나야 합니다. 12시까지 원고 준비 다해 합니다. 어렵습니다. 못 견디게 몸이 줄고 금식하며, 그러니까 얼마나 긴장하고 벌써 3월이지 만은 12월 넘어서면 내년 3월 걱정합니다. 아휴~ 3월전에 주님 오시면 좋겠다. 이런 마음, 너무너무 힘듭니다. 세상에 3월이 오는 것처럼 내게 힘든 일이 없습니다. 원고정리도 어렵고 이거 감당하기가 설교도 몇 번 해야 되며, 그러면서 다 일해야 되니 너무너무 어렵습니다. 그러나 지나고 나면 얼마나 제가 새로워지고 제 위치로 돌아가며, 제가 주님을 다시 붙잡게 되고 제가 약함을 알면서 주님을 의지하니 여러 가지로 얻는 은혜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은혜를 얻습니까? 잘 먹고 좋은 곳에 가 대접받고 그런데서 우리가 은혜를 받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잔을 기쁨으로 받고 인도하는 곳 광야라고 하여 피하지 말고 나가면 그 곳에서는 다 황금을 캐냅니다. 황금을 캐러간 사람은 돌도 못 캡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는 너무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광야를 버리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광야를 피해 삽니다. 광야 없는 곳에 가서 지상의 낙원을 누리고 행복하게 살려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흥청거리며 놀고먹고 마시는데서 이걸 축복으로 착각합니다. 교회마저도 그렇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거는 종말론적으로 하나님 앞에 저주받는 길입니다. 안 되는 길입니다.
여러분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금 전에 에티오피아 육상선수 아베베는 원래 황제 근위병이었습니다. 쫄병 병장이었는데 이거 갔다 오고 뭘 얻었느냐 장교가 되었습니다. 셀라세 황제가 장교로 만들었습니다. 그때 선물을 주는데 황제가 무슨 선물을 하느냐하면 폭스바겐이라고 하는 독일제 차를 줬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성공하면 인기도 따라오고 영광도 따라오며, 사병이 장교가 되고 돈이 많아지며 여자도 생기고 흥청거립니다. 폭스바겐 타고 막 다니다가 교통사고 나서 평생 아베베가 불구자가 됩니다. 이걸 잘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면 차오고 집 따라오며, 명예 따라오고 인기 따라옵니다. 성공해 보십시오. 인기가 오면 인기 따라 다 따라오고 출세하면 출세를 따라 돈 생기고 집 생기고 명예 생기고 안 생기는 게 없습니다. 다 따라옵니다. 교회도 주의 종들이 기도해서 교회 일으키고 나면 부흥하고 나면 교인들이 은혜 받았다고 자가용도 집도 선물해주고 돈도 가지고 옵니다. 그러나 그거 날름날름 받으면 거기에 올라타다가 목사는 사고 납니다. 죽습니다. 그걸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저는 개척하고 저 있는데도 얼마나 차가 많이 들어왔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안탔습니다. 저는 17년 동안 전세 살았습니다. 몇 만 명 모여도 전세 살았습니다. 우리 장로님들이 좋은 집들 얼마나 구하러 다니고 ‘이거하세요.’해도 제가 끝끝내 안 받아 줬습니다. ‘장로님과 나와의 관계는 개척했기 때문에 긴장관계 사는 게 좋아. 형님 먼저 아우 먼저 이런 식으로 우리 교회 가면 안 돼. 나는 주의 종으로 내 사람 하나 없이 외롭게 살아야 되고 장로님들도 그렇게 살아야 돼.’ 그 집 가지고 지금 갔더라면 40-50억 되었을 것입니다. 필요 없습니다. 그게 다 폭스바겐 됩니다. 폭스바겐 안합니다. 끝까지 난 안 합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됩니다. 할렐루야! 우리 교인들도 성공하고 가정을 버리는 분들 제가 너무 많이 봤습니다. 우리 교인 중에도 남편 위해서 눈물로 부르짖고 낮에도 회사 가서 일하해 남편 성공했습니다. 사무실에 가보니 어마어마하게 벌었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 집사님은 부인 버리고 비서하고 살림 차려 이혼하고 새 가정 꾸몄습니다. 그래서 저는 남편위해 기도할 때 돈 잘 벌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꼭 잘 사는 거보다도 어쨌든 잘 믿는데 맞추어서 믿음 달라고 기도해야지 돈 벌게 하면 남편 잃는다고 말합니다. 남편 잃습니다. 그렇다고 또 망해라 그런 말은 아닙니다. 잘 믿게 해야 됩니다.
여러분! 우리 아이들 성공하게 해 주십시오. 좋은 대학, 좋은 곳에 취직해 돈 벌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자녀 잃습니다. 부모하고도 원수 됩니다. 아이도 망칩니다. ‘너는 먼저 크리스챤이 되라.’ 예수 잘 믿고 성령 충만한 아들 되면 천리만리 갔다가도 돌아오지 만은, 예수님 없으면 옆집 아파트에 살아도 안 찾아옵니다. ‘바빠요. 아빠 바빠요.’ 안 옵니다. 그저께 어떤 분이 그럽니다. 한국 사람으로 세계적으로 성공한 최고의 사람인데 그 어머니가 6.25사변 때 이 아들을 길러서 그렇게까지 성공했습니다. 어머니는 권사님입니다. 밤, 낮으로 눈물 흘려 기도합니다. 이 아들이 그렇게 성공하고 국회의원 몇 번을 해도 이 어머니한테 전화 한마디 안 합니다. 며느리가 들어와서 어머니의 나쁜 것만 늘 일러줍니다. 그래서 너무 화가 나 목사님이 찾아 갔습니다. 딱 가서 인사하면서 그랬습니다. ‘당신 그럴 수 있냐, 당신 유복자인거 내가 안다. 당신 어머니 우리 교회 나와. 당신 어머니한테 전화 한 통화 안하고 그럴 수 있어? 당신 어머니를 그렇게 대할 수 있느냐? 어머니는 너무 낙심해 그러는데 당신 그럴 수 있냐?’고 그랬더니 울며 회개하더랍니다. ‘목사님! 잘못했습니다. 다음 주일날 교회 나가겠습니다.’ 그래 와 가지고 어머니한테 절하고 사죄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국회의원 됐다고 다 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저버리고 천하에 나 혼자 잘난 척 하면 안 됩니다. 광야를 거쳐야 됩니다. 할렐루야! 지난 주 신문에 미국의 제2의 몬로라고 하는 스미스라는 여자분이 서른 아홉 살에 의문의 죽음을 가졌습니다. 영화계나 세계 미인계도 세계적인 미인도 늘 나오는 게 아닙니다. 몬로가 간 다음 30년 지나서, 몬로 같은 인물을 그렇게 기다렸는데 바로 몬로를 닮은 분이 스미스입니다. 1992년 플레이 보이지에 표지에 모델로 나오면서 세계가 열광하는 15년 동안 전 세계 연예계를 주름잡는 분이 이 스미스라고 하는 여자입니다.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그런데 모든 자라난 배경이 몬로하고 비슷합니다. 17살에 이미 아이를 낳았고 몬로하고 다 비슷합니다. 또 이혼하고 끊임없이 상처를 받으면서도 인기를 얻어 전 세계 최고의 미인이 됩니다. 그러면서 드디어 이 분도 석유재벌 89세 되는 마셀이라고 하는 분과 20대에 결혼을 합니다. 또 이분이 마셀하고 결혼하려고 막 여러 가지로 그랬습니다. 마셀은 89세인데 당치도 않는 일을 그렇게 합니다. 마셀은 열넉달 살고 돌아갑니다. 여러분! 80대에 조용하게 사십시오. 그거 안 될 일, 그거 살 수 있겠습니까? 그 분하고 스미스는 온갖 영광 누리고 그 유산 물려받으며 인기도 다 얻었지만은 17살에 난 첫 아들이 지난해 10월에 죽었습니다. 이번 2월 달에 이분은 불행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러분! 너무 인기 얻고 너무 잘살고 너무 높이 되고 너무 성공하고 너무 예쁘고 그러면 한없이 올라가고 좋을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분이 인기가 조금만 덜해도 팔십 구십세 까지 잘 살터인데 너무너무 높이 올라가서 다 일찍이 끝납니다. 적당하게 만나서 예수님만 잘 믿으면 되지, 인물 성형수술 어지간하면 되지, 아예 코 없으면 야 붙이지 그러나 있으면 있는 대로.
할렐루야! 내 모습 이대로 주님이 좋다는데 왜 우리가 자꾸 바꿉니까? 스미스를, 인기를, 명예를 따라가면 안 됩니다. 세상으로 나가면, 아름다움을 쫓아가면, 좋은 것을 따라가면 안 됩니다. 하늘 문 열어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나가야 합니다. 한국 교회 주의 종들도 신학교에서 광야가 없습니다. 요사이 목사는 일 년에 만 몇 명이 목사 안수를 받는데 일할 곳은 십분의 일밖에 없고 9000명은 그 다음에 할 일이 없습니다. 한국이고 미국이고 목사들이 할 자리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광야를 거치지 않아서 일이 없습니다. 광야를 거치면 일이 너무너무 많은 세상인데 나 잘 먹여주고 편히 어디 목회할 자리 찾으니... 시골을 안가, 서울 아니면 서울 수도권이라도 이글이글 머물려고 그럽니다. 교인들도 장로님을 세울 때도 좀 뭐 헌금한다고 세우는데 그러다가 큰 일 납니다. 광야를 거쳐야 됩니다. 저 분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확실히 영접했는지 금식기도 몇 번했는지 영적으로 이런 절차가 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 감당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일에 협조하고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에 도와주며, 더 좋은 나라 만드는 일에 일익을 감당하고 고아원 양로원 하나 세웠다 해서 교회 사명을 다하는 게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철저하게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류를 위해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고 믿고 의지하고 그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 내는 곳입니다. 할렐루야! 세상이 아무리 좋다 해도 세상은 변화될 수 없습니다. 더 좋은 대학, 더 좋은 사회, 더 좋은 자동차가 나오고 집이 나와도 우리 인간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은 예수를 떠나면 길이 없습니다. 예수 아니면 승리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의 사람을 만들어서 믿음으로 사는 이런 심령을 만들 때만이 교인도 교인이고 교회도 교회이며, 우리는 이 나라와 이 민족을 건져낼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시간 나온 모든 성도들은 주님을 바라보고 항상 시간이 있을 때는 기도하기 바랍니다. 며칠 전에 저가 어떤 분하고 식사를 했는데 아주 우리나라 국회에 인기 있고 힘이 있고 그런 분인데, 일주일을 기도원에서 금식하고 간답니다. 그건 자기가 알아서 합니다. 이것은 광야로 누구를 보러 가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1월1일이 되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갑니다. 그래야 광야 같은 세상을 국회의원을 하면서도 상처받지 않고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악한 세상 전갈이 이글거리는 세상 광야를 거치지 않으면 이겨낼 수 없습니다. 기도해야 됩니다. 영적으로 깊이 들어가야 육적인 삶이 피곤하지 않고 독수리 같은 새 힘을 얻어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마음에 오시는 주님
마 3:1-3 / 김광일 목사(벧엘교회)
미국 워싱턴 대학의 토머스 홈스 교수가 사람들의 마음과 생활에 변화를 가져오는 때를 조사했더니 가장 큰 변화가 오는 것은 배우자가 죽었을 때로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경우를 수치화 하여 발표하였는데 배우자와 이혼했을 경우 73%, 임신했을 때40%, 집을 옮기거나 고쳤을 때 25%가 마음과 생활에 변화를 가져왔으며 성탄절 때는 12%가 마음과 생활이 변화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매년 맞이하는 성탄절이 12%의 사람들의 마음과 생활을 긍정적으로 변화하게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직도 이 땅에는 크리스마스를 그저 먹고 마시고 즐기는 향락적인 명절로 착각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탄절을 즐거운 파티를 즐기는 기분으로만 넘어간다면 이는 예수님의 성탄과 아무런 관계가 없고 나 자신에게도 긍정적인 변화를 주지 못하는 허망한 시간과 절기가 되고 말 것입니다.
길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제가 서울에 24년 만에 돌아오니 곳곳에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주행시간들이 많이 단축된 것 같습니다. 길을 잘 닦아야 합니다. 좋은 길은 계속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수많은 길들이 놓여져 있습니다. 생명의 길이 있는가 하면 죽음의 길이 있습니다. 대로가 있는 가하면 소로가 있습니다. 길에 따라서 미래와 운명이 결정되고 성공과 실패가 결정됩니다. 그러면 어떤 길이 좋은 길입니까? 예수님 당시에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이는 한 마디로 “주님의 길을 예비하라” 즉 “주님을 모셔드릴 마음의 길을 만들라”는 뜻입니다.
본문의 세례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습니다. 회개는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고쳐서 마음의 길을 평탄하게 만들고 주님을 모셔들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잘못된 것을 끊어버리고 부정해야 합니다. 무엇을 얻을 것인가 생각하기 이전에 버릴 것이 무엇인가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지난 일년동안 내가 버리지 못한 것, 청산하지 못한 것, 고치지 못한 것들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야 복된 성탄절이 되고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도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마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마음의 골짜기를 메워야 합니다.
낮은 곳을 메워서 평탄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가는 축복의 길을 만들려면 우선 심령의 골짜기를 메워야 합니다. 사람마다 남이 알지 못하는 부정적인 골이 있습니다. 이런 부정적인 골짜기가 깊이 있는 사람은 마음에 평화가 없습니다. 축복의 길이 없습니다.
독일태생의 유명한 조각가인 댄네이커는 2년 간의 노력 끝에 예수님의 모습을 조각하였습니다. 자기 작업실에서 일하는 소녀에게 그 조각품을 보여주면서 ‘너는 이 조각이 누구의 상인지 알겠니?’하고 물었습니다. 소녀는 ‘어떤 유명한 사람 같아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소녀가 예수님의 상을 알아보지 못하자 댄네이커는 자기작품은 실패작이라고 생각하고 그 작품을 부셔버렸습니다. 다시 6년간 기도하는 심정으로 새로운 작품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는 새로 들어온 다른 소녀에게 이 조각품이 누구의 상인지 알겠느냐고 물었습니다. 한참 말없이 조각품을 들여다보던 소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으더니 ‘주님 저도 여기 왔어요’라고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조각품은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하시면서 어린아이들을 맞아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댄네이커가 기도하며 준비할 때 주님의 이 모습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그가 2년 걸려서 만든 첫 번째 작품은 실패작이었습니다. 기도가 부족하고 정성이 부족하고 시간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그후 6년간 그는 더 기도하고 더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그때서야 성공적인 조각품이 이루어졌습니다. 먼저 부족의 골짜기들을 메워야 합니다. 기도가 부족하면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열심히 부족하면 더욱 열심을 내야 합니다. 헌신이 부족하면 시간과 정성과 노력을 더욱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부족하면 더 잘 믿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의 길, 은혜의 길, 축복의 길, 성공의 길이 열립니다.
사람마다 정말 주님이 아니면 메꾸어 줄 수 없는 깊은 골들이 있습니다. 마음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허전하기만 한 골이 있습니다. 그 골이 메꾸어져야 합니다. 절망의 골짜기를 소망으로 메꾸고 불신의 골짜기를 믿음으로 채울 때 비로소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사람들로부터 많은 배신을 당했더라도 예수님만은 믿어야 합니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어도 예수님께 대한 소망과 믿음은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상하고 찢겨졌어도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만은 믿어야 합니다. 절망과 불신의 골짜기를 주님께 대한 믿음과 소망으로 채울 때 능력과 치유의 길이 열려집니다.
둘째로 마음의 높은 산을 낮추어야 합니다.
산은 높은 곳입니다. 산이 있어서는 길이 될 수 없습니다. 산은 교만을 의미합니다. 교만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축복의 길이 생겨집니다. 벧전 5:5은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운동회 때 매스게임을 위해서 발을 맞추며 걷는 연습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며칠을 연습해도 발을 맞추지 못하고 반대로 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고쳐 주려고 여러 날 애를 쓰다가 그만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이윽고 운동회 날이 되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연습 때 발을 못 맞추던 그 아이가 그 날도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운동회가 끝난 후, 그 아이의 어머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세상에, 이 학교 아이들은 우리 아이 빼고는 발 하나 제대로 맞추는 아이가 없네요. 글쎄 우리 아이가 왼발을 내딛으면 다른 아이들은 모두 오른 발을 내딛고 있네요. 정말 바보 같은 아이들이네요.”
독선과 교만에 빠지면 잘못을 잘못으로 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불의를 기뻐하고 정의를 배척하게 됩니다.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모두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정작 메시야가 오셨을 때 그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멸시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왜 그들은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했습니까? 마음속에 있는 교만의 높은 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명예, 자기 존중, 자기 우월감에 빠지면 주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교만의 높은 산을 깍아서 낮은 겸손의 평지를 만들 때 주님도 보이고 진리도 보이고 은혜도 받습니다.
성지 순례시 베들레헴에 가보니 예수님이 나신 곳을 기념해서 주후 4세기에 큰 예배당을 지어 예수 탄생교회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돌로 튼튼히 지었고 그 안에 들어가면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성화를 그렸고 강당 밑에는 예수님이 나신 곳이라고 대리석에 별표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예배당의 특색은 들어가는 문이 하나밖에 없고 그 문은 대단히 작고 낮아서 엎드리고 들어가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유는 주님께 나아가는 자는 겸손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나라고 하는 높은 교만의 산을 낮춥시다. 그래야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마음이 됩니다. 주님의 성탄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셋째로 마음의 굽은 것이 곧아져야 합니다.
길을 잘 닦으려면 굽은 곳은 될 수 있는 대로 곧게 하여야 좋은 길이 됩니다. 마음이 굽은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이 삐뚤어지고, 생각이 삐뚤어지면 말하는 것이 남에게 상처를 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길을 닦으려면 굽은 것을 곧게 하여야 합니다.
사람마다 마음을 들여다보면 상처투성이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출생상처’라는 말을 합니다. 누구나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올 때는 상처를 받는 다고 합니다. 그래서 출생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상처가 아물기 전에 또 상처가 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상처가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상처 나게 하는 말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은 상처가 있는 증거입니다.
한 어린 소녀가 거미줄을 쓸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소녀는 자신을 생각하며 기도하기를 ‘주여, 내가 방을 깨끗하게 하는 것처럼 온전히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소서’ 그때 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딸아. 매일 거미줄을 치운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거미줄을 치는 거미를 잡아죽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그때에는 거미줄을 쓸 필요가 없어진다” 소녀는 그때부터 마음의 거미를 죽이는 일에 노력하였답니다. 비뚤어진 마음의 거미는 자아 중심적입니다. 비뚤어지고 굽은 것을 평탄한 길로 만들기 바랍니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마음이 구부러진 사람은 모든 것이 구부러져 보입니다.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도 나쁘게 봅니다.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은 매사에 부정적이고 비판적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바로 된 사람은 매사를 바로 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깨닫고, 그 은혜 속에서 밝고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구부러진 마음은 말씀의 빛이 굴절되어 은혜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시험을 받습니다. 그러나 바른 마음을 가진 사람은 무슨 말씀을 하든지 아멘 하며 은혜를 받습니다.
나사렛 동네의 사람들은 편견과 왜곡의 구부러진 마음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치 아니하고 배척하였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그곳에 아무 은혜도 베풀지 아니하셨고, 그곳 사람들은 주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마음의 길이 중요합니다. 마음의 편견과 왜곡을 펴시기 바랍니다. 평탄한 길을 만들어 주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주님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새 사람이 됩니다. 복된 사람이 됩니다.
주의 길을 잘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골짜기를 메우고, 높은 산은 낮추고, 굽은 곳을 바로 잡아 시온의 대로를 만드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평강과 은혜의 주님께서 금번 성탄절에 여러분의 삶과 마음가운데 오시는 은혜와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준비하는 신앙 -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마 3:1-12 / 이상호 목사
집안에 손님이 오신다면 그 손님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준비하는 자세가 다를 것입니다. 아주 귀하고, 내게 있어서 소중한 분이면 좀 더 잘 준비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즉 안방으로 모실까? 거실로 모실까? 꽃을 좀 사다 예쁘게 놓을까? 차는 뭘로 대접하며 식사는 밥 하고 소고기국을 끊일까? 아니면 불고기에다 면을 준비할까? 그 분이 전에 뭘 좋아하였는가? 하며 기억을 더듬게 되겠지요. 어떻게 하든지 잘 모셔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가득찰 것입니다. 또한 내게 있어서 귀하고 소중한 분이시기에 준비하는 마음에는 기쁨과 설레임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3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 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말씀입니다. 언젠가 우리에게 가장 신나는 날, 그날은 주님 다시 오셔서 만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그 분을 어떻게 잘 맞이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최대의 관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 내게 오시면 나 어찌 대할까?"♬
우리는 그 옛날 그렇게 애타게 오랫동안 메시야(구세주)를 기다리던 유대인들이 막상 오셨을 때는 알아보지도 못하고, 구박만 하다가 결국 죽이고 말았던 사건을 잊으면 안될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렇게 기다려 놓고 잘 맞이하지 못했을까요? 원인을 잘 살펴본다면 우리는 그런 잘못된 전철을 밟지 않아도 되겠지요.
예수님 오시기 6개월 전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이 나타나서 외치기 시작했지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즉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라 예수께서 곧 오신 단다"라는 것이지요.
주님 맞이하기 위해서는 현재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이 사는 삶에서 되돌아서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으로 전환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표시로 세례요한이 베푸는 세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의 외침을 듣고 그에게 와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를 받으러 왔을 때는 상황이 많이 달랐습니다. 갑자기 세례요한의 안색이 변하면서 그들에게 호되게 나무라시는 것입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7) 그러면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순종치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고 말았기 때문이지요.
첫째 "회개하라, 그리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2, 8)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요한 외침이 나옵니다. 그것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입니다. 아울러 이 말씀은 주님의 첫 번째 메시지이기도 합니다(4:17). 천국은 마태복음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회개를 통해 펼쳐지는 천국을 생각해 봅시다. 진정한 천국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이 회개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천국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 천국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회개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한 천국은 없습니다. 진정한 천국은 마음에 주어집니다. 그러나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천국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다윗의 회개시가 시편에 있습니다.
시32:3-5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죄를 고백하지 않을 때의 고통을 그는 경험하였습니다. 아울러 죄를 고백하고 나면 구원의 즐거움이 회복된다는 것도 그는 알았습니다.
시51: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세례 요한은 유대광야라는 황량한 곳에 살았습니다. 그런 곳에 살면서 그는 천국을 말합니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환경에 살면서도 요한은 천국을 누리고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죄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죄로부터의 자유가 곧 천국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주님의 말씀을 살펴봅시다.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누가 청결한 자입니까? 죄 없는 자가 아닙니다. 회개한 자를 말합니다. 회개한 자는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천국이지요. 회개를 통해 청결한 마음을 갖게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을 목베어 죽인 헤롯은 왕궁에 살지만 늘 불안했습니다.
헤롯은 세례요한에게 자신의 죄를 지적 받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호화스런 잔치를 벌이고 좋은 음식을 먹은들 천국을 누릴 수 있었겠습니까? 회개하지 않은 헤롯은 늘 불안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결국 요한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눈에 가시 같던 요한이 없어지니까 편안해졌을까요? 아닙니다. 예수의 소문을 들으며 그는 요한이 다시 살아 난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함에 빠졌습니다.
막6:14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가로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느니라" 회개 없이는 아무리 좋은 환경에 살아도 천국을 누릴 수 없습니다.
회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불안합니다. 교회에 앉아 예배를 드리지만 참된 회개가 없다면, 그래서 늘 마음에 거리끼는 죄를 간직하고 산다면 결코 천국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회개를 통해서만 천국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천국을 내다본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친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회개란 무엇입니까?
요한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그 자리에 오는 것을 보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7,8절,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여기서 요한은 진정한 회개가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회개란 단순한 후회나 반성이 아닌 '진정한 삶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을 때 그것을 참된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 받고 눈물 콧물 흘리면서 잘못했다고 회개하고서는 다시 돌아가서는 여전히 똑같은 생활을 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회개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잘못을 고백했으면 내 생활에서 회개에 합당한 선한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형식적인 회개는 주님을 맞이하는 자로서 옳지 못합니다. 회개는 180° 돌아서서 그대로 삶을 유지해야 하는데, 다시 180° 돌아버리면 원위치가 되고 맙니다. 다시 돌지 말고 그대로 유지해 나가는 삶이 곧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이지요.
요한은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자기에게 나오는 것을 보고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말씀하였습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 있는 말씀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특징이란 의식적인 율법생활에도 불구하고 삶의 열매는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형식적인 신앙인들에게 회개의 열매를 강조한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중심 주제 중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의'입니다. 7장에서도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라고 하여 열매를 강조하셨습니다.
열매란,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우리의 정체를 입증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마태는 이 복음서를 통해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의 전형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란 삶이 얼마나 달라지는가를 통해 열매로 입증해야 합니다.
가난한 자도, 부자도, 배운 자도, 못 배운 자도 회개해야 합니다. 누구에게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여기에 살 길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는 능력입니다.
둘째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3)
우리가 여기에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표현한 것을 잘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광야에 외치 는 자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에게서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 것인데 요한복음의 서두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이시니라"하는 말씀이 나오고 곧 이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고 되어 있지요.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일컬어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격적이고 생명적인 변화의 능력이 있는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그 "말씀"을 증거 하는 "소리"라는 것입니다.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그 근본적인 주체성을 가진 이성과 사려(思慮)에서 나오는 인격적인 것을 말하지만 소리는 단순히 그것을 반향(反響)시켜 줄 뿐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하나님의 음성도 "소리"라고 표현한 적이 있기는 합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그리고 변화산에서 예수님을 증거하였던 하늘로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 또 베드로가 고넬료의 보냈던 사람을 따라서 가고 싶지 않아서 가지 않을까 했는데 보자기 환상을 보여 주시면서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리면서 그 보자기 안의 곤충들을 먹으라고 하신 적도 있고 또 요한복음 18장 3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말씀을 소리라고 표현한 적이 있기는 합니다마는 특별히 세례 요한을 가리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말한 것은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자 일 뿐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세째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9)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을 말하면서, 아브라함의 본을 받지 못하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답게 사는 것이 중요하고 그렇게 살 때에 비로소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가치가 들어 나는 것이지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즉 돌들로 만들어도 너희보다 더 좋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겠다. 이 '돌들만도 못한 녀석들아' 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도 어떤 이는 양반집안이라는 것을 내세우면서 생활은 상놈같이 사는 자가 있습니다. 그런 자는 양반으로서 가치 없는 자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치 있는 만큼 생활이 그에 합당할 때 그 가치는 들어나는 것입니다. 욕심이 가득하여 인색하고, 남을 이해할 줄 모르고 자기 것만 알고, 나눔과 섬김이 없는 그리스도인들 어떻게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까? 잘 맞이하기는커녕 주님 오시면 쥐구멍이라도 찾아야 될 것입니다.
넷째,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10)
때가 임박함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있으면 찍기만 하면 나무는 잘립니다. 준비하는 단계가 아니라 준비완료 단계입니다. 이제 찍히면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좋은 열매맺는 나무는 찍히지 않고, 그렇지 못한 나무는 찍혀 불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때가 급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12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라는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열매 맺음과 맺지 못함, 알곡과 쭉정이! 당신은 어느 쪽입니까? 키를 까불릴 때 쭉정이가 날아가는 것 보셨지요. 거름으로 들어가든지 불 속에 들어가든지 하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주님은 내가 속히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는 정말 기쁨으로 잘 맞이해야 합니다. 그리고 함께 기쁨으로 천국으로 가야 됩니다.
이제 창조절이 지나면 대림절과 성탄절이 옵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에 따라 신앙적이지 못한 삶에서 신앙적인 삶으로 전환하여 주님 오실 때 기쁨과 감격으로 맞이할 수 있는 준비 하는 신앙이 되도록 합시다.
주님의 경고장
마 3:1-13 / 양인순 목사
우리가 살고 있는 주변에는 다양한 경고가 있습니다. 운동경기에도 경고가 있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여자 분들은 축구를 싫어했습니다. 남편이 군대 애기를 하면
싫어하고, 군대 가서 축구한 이야기를 하면 경끼(?)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우리나라 여자축구 선수들이 세계를 제패하고, 각종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면서 축구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축구 경기를 보면 상대방 선수에게 거친 태클을 하거나 비신사적인 행위를 하면 심판이 옐로우 카드(Yellow Card)를 내밉니다. 앞으로는 그런 비신사적인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그런데도 또 다시 비신사적인 경기를 하면 Red Card를 받습니다. 그러면 바로 경기장에서 퇴출됩니다.
고속도로를 운전하다 보면 다양한 경고 표지판이 보입니다. 어떤 곳에는 사망사고 지점이라는 표시도 있습니다.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입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나 약품에도 다양한 경고의 글귀가 있습니다. 최근에 담배포장지에 폐암으로 죽은 사람의 모습이나 고통당하는 모습을 인쇄했더니 흡연인구가 줄었다는 소식도 있습니다.
우리 몸도 다양한 경고의 신호를 보냅니다. 수분이 부족하면 입술이 마르고, 입에서 냄새가 납니다. 심장이 좋지 않으면 어지럽거나 쓰러지기도 합니다. 계단을 오르면 숨이 찹니다. 빨리 몸에서 보내는 경고를 알아채고 치료를 해야합니다. 몸이 보내는 경고를 무시하면 건강에 치명적인 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경고를 하는 이유는 위험성을 알리고, 사고를 예방하기 위함입니다. 경고를 받아들이면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유익합니다. 그러나 경고를 무시하면 자신은 물론 공동체 전체에 재앙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도 하나님이 보내 주시는 영적인 경고가 있습니다. 갑자기 예배드리는 시간이 지루하거나 오기가 싫어진다면 어딘가 문제가 있다는 경고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말씀을 대하는 시간이 줄어든다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문제가 있다는 경고입니다. 내 입술에 원망이 불평이 많아지고 있다면 이것 역시 영적 빨간등이 켜진 상태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다양한 경고 메시지를 보내십니다. 대림절 마지막 주를 맞이하는 우리를 향하여 주님은 이 시간 경고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세례요한을 통하여 주시는 “회개하라”는 메시지입니다.
400년간의 침묵을 깨고 주님의 오심을 선포했던 세례요한의 일성은 바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입니다.
세례요한은 당시 에세네파의 삶을 살았습니다.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도시가 아닌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 한 복판이 아닌 광야에서 말씀을 선포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광야는 준 사막지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어갔던 광야 40년의 세월은 험악한 시간이었습니다. 그곳은 뜨거운 태양과 모래벌판, 물이 없고, 전갈이 있는 곳입니다. 풀 한 포기조차 자라기 힘든 열악한 곳입니다.
제가 지난 번 성지순례 때에 광야에서 잠깐 쉰 적이 있습니다.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숨이 막혔습니다. 온통 사방이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 보이지 않습니다. 거친 바위투성이의 산과 모래뿐입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메마른 광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고, 세례요한을 다시 그곳으로 부르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곳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훈련하시는 특별 훈련장입니다. 만약 40년 동안 광야의 길을 걸어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그들은 살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고, 목마르다고 아우성칠 때마다 반석에서 물을 주셨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특별 훈련장입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낮추어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도록 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을 광야대학 고난학과에 입학시키셔서 훈련하십니다. 우리 생각 같아서는 축복대학 풍성학과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로 이끄셔서 교만한 마음을 낮추십니다. 세상을 의지하고 바라보던 시선을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도록 조정하십니다. 광야는 해바라기처럼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바라보도록 하는 가난한 마음의 훈련장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세례요한을 광야로 이끄셔서 말씀을 선포하게 한 이유입니다. 당시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종교적인 기득권을 가지고 부를 누리던 사람들입니다. 율법을 지키며 자기 의에 빠져있던 자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면서 자신들만 의인이라는 특권의식에 사로잡혔던 자들입니다.
바로 그들을 향하여 세례요한은 독설을 퍼붓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7절) 겉으로 볼 때는 가장 의롭고, 하나님을 잘 믿는 것처럼 보였지만 임박한 진노를 피할 수 없는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외칩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 가슴이 뜨끔하지 않습니까? 어쩌면 세례요한 앞에 서있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모습이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나는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주님 앞에서 이런 추상같은 말씀을 듣는다면 얼마나 가슴 떨리는 일입니까?
오늘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회개하라” 주님의 경고를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회개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회개’ 라는 단어의 히브리어 ‘슈브’는 ‘(되)돌아가다’ ‘회복하다’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약 1000번 정도 등장합니다. 신약성경에서 ‘회개’라는 단어는 ‘메타노에오(metanoew)’로 34번 사용됐습니다. ‘메타’는 ‘변화, 이동’을 뜻하고, ‘노에오’는 ‘자기의 마음을 바꾸다’ ‘자기가 행한 것에 대해 유감스럽게 여기다’라는 뜻입니다.
자기 행동에 대해서 잘못된 것을 유감스럽게 여기고, 자기의 마음을 바꾸는 변화나 이동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생각으로 혹은 입술로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의지와 전존재를 다해 자신의 계획과 작정 및 행동을 바꾸고 돌이키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의 되돌아가는 곳은 어떤 공간적인 장소가 아닌 인간의 근본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의 의미가 ‘과녁을 벗어났다(하마르티아)’인데 하나님의 품을 떠난 자들이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회복하고, 새롭게 거듭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잘못된 방향을 바르게 잡는 의미입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방향이 틀리면 헛수고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을 내서 주를 위해 충성해도 방향이 잘못되면 역시 헛수고입니다. 잘못된 열심은 오히려 자신뿐만 아니라 교회에 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방향을 다시 재정향(re-orientation)하는 것입니다.
북한에서 파송되어 간첩 행위를 하다가 붙잡히면 심문하기 전에 먼저 서울 시내를 구경시킨다고 합니다. 어디든지 가고 싶은 곳으로 데리고 다니며 자유 대한의 실체적인 모습을 체험케 한답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돌아선다고 합니다. 이것을 전향(轉向)이라고 부릅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김정일에 속고, 주체사상에 속고 살았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 자유민주주의 시민으로 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도 이런 전향이 필요합니다. 잘못된 방향을 바로 정하는 재정향이 필요합니다. 내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얼마나 잘못된 방향으로 달려왔는지를 깨우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닫는 순간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을 향하여 다시 돌아서는 것입니다.
비록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받아서 세상에 나가 방탕한 삶을 살다가 모든 것을 탕진했지만 아버지는 그 아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은 바로 회개를 기대하는 마음입니다. 언제라도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은 용서하십니다. 탕자가 돌아올 때 아버지는 기쁨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아들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채색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주고, 소를 잡아 잔치를 베풉니다. 이것은 바로 죽었다가 살아온 아들을 다시 법적 지위와 신분을 회복시켜주는 행위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향하여 간절히 기대하시고 바라시는 은총의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돌이켜 아버지의 품으로 오기만 하면 언제나 웰컴(welcome)하십니다. 육신의 부모는 때때로 싫어하기도 하고, 멀리하기도 하지만 우리를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을 지불하시고 구속해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언제 변함없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대림절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기대하고 계신 한 가지가 있다면 우리의 삐뚤어지고, 잘못된 삶의 방향을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여 돌이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길을 잃고 방황하는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그 양을 찾았을 때 기쁨과 감격의 눈물을 흘리십니다.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잔치를 베푸십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15:7)
우리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죄인을 불러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아버지 하나님 앞에 용서받지 못할 죄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들이 너무나 많은 죄를 지어서 천국에 못가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캄보디아 크메르루즈 정권시절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주범 다섯 명이 프노펜의 킬링필드 특별법정에 섰습니다. 수많은 양민을 학살한 그들은 사회주의 성취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정당화했습니다. 그러나 카잉 궉 이압(67)은 대학살의 책임을 인정하고 자신의 잘못을 구했습니다.
카잉은 22살 대학생 때에 크메르루즈에 가입했습니다. 그는 크메르루즈의 핵심 간부가 되어 ‘도익’ 이라는 이름으로 공작과 고문을 자행했습니다. 1975년 크메르루즈가 쿠데타에 성공하자, 도익은 수도 프놈펜에 S-21이라 불리는 교도소를 세우고 ‘반동분자’들을 끌고 와 고문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는 가장 잔혹한 인물로 최소한 1만2000명을 S-21에서 고문을 하고, 강제 수용소로 보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자신의 처남들도 포함됐을 정도로 잔인한 자였습니다. 그 결과 강제 수용소에서는 수백 만 명이 노역에 시달리다 질병과 기아로 죽어 ‘킬링필드(죽음의 벌판)’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S-21 교도소는 현재 ‘킬링필드 대학살 기념관’으로 바뀌었습니다.
1979년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으로 크메르루즈 정권이 무너지자, 도익은 동료들과 함께 쫓기는 신세가 됐습니다. 그러던 그가 기독교를 접한 것은 1992년 프쾀이란 시골에 피신해 있을 때였습니다. 그는 ‘항핀’이라는 가명을 쓰면서 학교에서 수학과 프랑스어를 가르치던 중, 이웃에 살던 수온시토라는 농부를 따라 동네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그곳에서 거듭남을 체험한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누구를 만나든지 예수님을 전했고, 마침내 학교 옆에 건물을 얻어 교회를 개척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늘 쫓기는 신세였습니다. 그는 주변에서 만류했지만 도망을 다니면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결국 그의 정체가 밝혀졌고, 자신이 대학살을 주도한 도익임을 인정했습니다. 다른 동료들은 증거 불충분을 내세워 죄를 부인했지만 도익은 스스로 자신의 죄를 입증하며 재판을 도왔습니다. 옛 동지들을 고발하는 일이었지만 자신의 죄를 참회하며 항상 기도했습니다. 재판정에 선 그를 향해 청중들은 비난과 야유를 퍼부었지만 담담한 표정의 도익은 “S-21에서 벌어진 모든 일, 특히 고문과 살인은 모두 저의 책임입니다. 너무 늦었지만 이제라도 희생자들에게 용서를 빌고 싶습니다. 학살 명령은 폴 포트나 어느 한사람만이 한 것이 아닙니다. 중앙위원회에 있던 우리 모두가 그 결정에 동참했고 책임을 져야합니다.”
아무리 수많은 사람을 죽여 킬링필드를 만든 주범이라 할지라도 진심으로 참회하고 돌이키는 자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비록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의인 아흔아홉 명보다 한 영혼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기뻐하십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9-10).
우리가 먼저 죄를 회개해야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모두 허무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회개하는 것이 시간적인 순서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사랑을 덧입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스스로 주님 앞에 나아와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씻어주십니다. 우리 주님은 진실한 마음의 회개를 받으시고, 기쁨으로 안아주시고, 반겨주십니다.
문제는 죄를 짓고도 여전히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을 항변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죄를 전가하는 자들입니다. 자신의 의를 주장하며 남을 정죄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성경에 등장하는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을 받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직 내 안에 남아 있는 죄의 찌꺼기들이 있습니까? 주님 앞에 모두 내려놓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내 안에 남아있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이 시간 우리를 은혜의 보좌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 어떤 죄와 허물이라도 주님 앞에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참회하면 주님은 십자가의 보혈로 정결케 하십니다. 새롭게 변화시켜주십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이미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정과 욕심을 못 박으시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회개를 통한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주님 앞에 고백했다면 이제는 구체적인 삶의 변화로, 삶의 열매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의 회개는 종종 머리로만 입술로만 그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제자리를 맴돌 때가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삶의 열매로 나타나야 합니다. 삭개오는 주님을 만나고 난 후에 자신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었습니다. 불의하게 거둬들인 것은 되돌려 주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의 열매입니다.
세례요한은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향하여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고 선언합니다. 만일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지 울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만큼 시대가 악하고, 하나님의 진노가 가까웠음을 의미합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모습을 말씀의 거울에 돌이켜 보며 주님께로 회개하고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누가복음 3:11-14절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입을 것과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요, 정해진 세금 외에는 걷지 않는 것이요, 거짓으로 고발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마땅히 실천해야 할 윤리적인 것입니다.
왜 성탄절을 앞둔 이 시점에서 회개에 관한 말씀을 하는 것일까요? 왜곡된 성탄의 이미지를 가지고 우리 예수님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성탄을 기다리는 이 시대의 비극과 허물 때문이 아닐까요? 성탄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인간의 상업주의화 이기적인 냄새만이 풍기는 현실 속에서는 아기 예수님을 결코 맞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대림절의 시간은 우리에게 경고의 시간입니다. 다름아닌 한 해를 돌아보며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회개할 때 우리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해를 소망 중에 기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장벽이 있으면 주님의 사랑으로 무너뜨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욕심 때문에 손을 펴야 할 곳에 사랑의 손길을 펴지 못했다면 손을 펴서 주님의 사랑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안에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아픔이나 상처가 있다면 상처를 주고받은 분과 관계의 회복을 통하여 참된 평화가 이뤄지기를 원합니다.
진정한 회개를 통해 합당한 열매가 맺힐 때 주님은 우리에게 천국을 허락하십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조화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넘치는 곳입니다. 눈물과 고통이 없는 곳입니다. 기쁨과 감사와 찬송이 있는 곳입니다. 언제나 평화가 넘치는 곳입니다.
이 천국의 주인공은 바로 말씀 앞에서 자신의 부족과 허물을 깨닫고 전심으로 회개하며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입니다. 주님의 용서와 은혜를 덧입는 자입니다. 그 속에 주님의 풍성한 은혜가 있고, 참된 자유와 평화와 안식과 기쁨이 있습니다.
대림절 마지막 주일 아침입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셔서 우리게 기쁨과 소망을 주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경고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 참된 회복을 맛보는 은총의 시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 정결한 맘 주시옵소서 오~주님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X 2)
나를 주님 앞에서 멀리하지 마시고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마옵소서
그 구원의 기쁨 다시 회복시키시고 변치않는 맘 내 안에 주소서 ♬
회개에 합당한 열매
마 3:1-12 / 박지온 목사
오늘 장로님 기도 속에서 그 교회를 짖고, 뭔가 그 새 성전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는 정도가 아니고 너무 은혜의 역사를 감사하게 되죠. 그리고 그 지역에 있는 그런 그 많은 사람들이 지금 상당히 '방황을 하고 있다!' 그런 이야기를 좀 듣고 있습니다. 마침 우리 김 성 화 목사님이 지난 전도캠프에 택시 운전하시는 분한테 메시지를 전했는데, 그렇게 메시지를 잘 받더라 그래요. 그러면서 너무 고맙다고 그러면서 내가 오늘 참 감사한 말씀 고맙다! 그러면서 돈을 2만원 주더랍니다. 전도캠프하고, 복음 전하고 돈 받아 본 적은 처음이랍니다.
그런데 그 돈을 준 사람이 누구냐? 장로님이었어요. 장로님인데 너무 말씀을 받아서 '참, 귀하다! 복되다!' 그러면서 우리 교회가 들어온다는 이야기를 장로님한테 하시고, 그러니까 그 분이 뭐라 그러냐 하면, 내가 이제 택시 운전 하니까 알 것 아닙니까! 그 쪽 지역에 아파트 군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아파트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못 정해서 방황하더라!' 그래요. 지금 여러분 확실한 말세에 답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세워 놓으면요. 이것은 때거리로 몰려온다는 경우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메시지를 못 전해서 문제이지, 오는 것은 하나님이 말세에 예비해 놓으셨어요.
보세요, 한번만 흔들어 버리니까 뭐 주일날 그렇게 놀러 다니던 사람들이, 미국! 막 몰려들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그들에게 복음을 바로 못 전했다! 이게 저주 아닙니까! 지금 우리가 몰려오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몰려오는데도 복음을 바로 못 전했다? 이게 지금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 앞에 정말 말세에 여러분과 저를 어떻게 쓰실 것인가 이런 배경에서 오늘 뭔가 심각한 질문을 좀 던져 봐야되겠다!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제목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 입니다. 그래서 뭔가 심각해지면 소리가 낮아지는 경우가 있잖아요. 약간 성이 덜 나야 고함을 지르고 그러죠. 진짜 성나면 고함을 지르고 그럴 여가가 없어요. 조용히 말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될 수 있으면 내가 조용히 말을 하려고 그랬는데, 뭐 열 받히면 말이 또 크게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정말 조용히 가슴에 진짜 한번 질문해 보셔야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정말 예수 믿는 것이 사실이라면, 내가 정말 예수를 믿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합당한 열매가 나옵니다.
그러니 회개라는 것이 뭐냐? 돌아온다는 말이거든요. 성령의 역사로 내가 정말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왔고, 내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라 그러면, 열매가 나와야 될 것 아닙니까! 돌아온 자로서의 합당한 열매가, 그에 해당되는 열매가 나와야 될 것 아닙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정말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 맞습니까! 예수 믿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입니까! 그러면 열매가 나와야 될 것 아닙니까! '내가 하나님의 자녀다!' 그러면서 맨 날 망하고 있다! 이건 말이 안 되거든요. '하나님 부자인데...' 그러면 하나님 부자인데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그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어야 되는데, 그게 안 된다? 여기에 우리가 큰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배경에 보면요. 엄청난 문제를 여기에 말씀하고 있어요. 열매라는 것은 저 나무 위에서 맺혀지잖아요. 그런데 그 열매라는 것은 좋은 나무냐? 나쁜 나무냐에 따라서... 좋은 나무면 뭡니까? 표식으로 좋은 열매가 맺혀집니다. 나쁜 나무면 나쁜 나무의 표식으로 뭘 맺습니까? 나쁜 것이 맺혀져요. 감나무라면 감나무라는 표식으로 뭘 맺혀져요? 감이 열리게 되는 겁니다. 사과나무라면 사과나무의 표식으로 사과가 달려요.
그래서 오늘 성경에 정말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축복된 자녀라면, 반드시 자녀의 열매가 나옵니다. 축복의 열매가 나오도록 되어 있어요. 그게 아니라 그럴 때는 뭐냐?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말씀했느냐 하면, 여기에 3장에 10절 말씀입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무슨 말입니까? 열매를 맺지 않으면 가지를 꺾어 버린다! 이런 말이 아니고 열매가 없다! 그럴 때는 존재 자체가 아니라! 이겁니다. 그러니까 도끼는 어디 있습니까? 나무 뿌리에 있습니다.
철야 시간에 제가 요나에 대한 메시지를 좀 전했습니다. 상당히 도전적인 그런 메시지였죠. 하나님의 명령이, 말씀이 임했을 때에 말씀을 안 들어도 될 줄로 아는 믿음! 그게 요나의 지금 문제거든요. 이 사명자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명을 주셨을 때에 니느웨에 가라는 전도의 사명에 피할 줄 아는, 피할 줄로 착각하는 이게 요나의 문제거든요. 그러니 피하려고 도망쳤단 말이죠.
받아합시다. "하나님의 낮을 절대로 피할 수 없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 앞에서 삽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말씀했다? 말씀을 피할 수 없어요. 명령했다? 사명을 피할 수 없어요. 사명을 피할 줄로 착각한 요나에게 이어서 따라오는 것이 뭡니까? 대풍이 준비되었더라! 큰 풍랑이 준비되었더라! 그로서 오는 것이 뭡니까? 요나가 돈은 돈대로 들고, 선가를 주고, 지불하고 배를 탔지만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지만, 피곤에 지쳐있는 모습!
여러분 교회 안에 많은 성도들이, 열심히 성도들이 신앙 생활하고, 헌신하고, 돈도 내고 그런데도 왜 피곤하냐? '귀찮아! 예수 믿는 것이 힘들어! 너무 너무 피곤해...' 전부 이게 현재의 우리 문제입니다. 하나님 없어서 피곤하고, 하나님 알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 낮을 피할 수 있는 줄로 착각해서 피곤해지는, 이게 지금 문제거든요. 그렇다 그러면 오늘 말씀 속에서 근본적으로 나쁜 열매가 맺혀 졌다! 우리에게 어떤 열매가 맺혀지냐? 따라서 나쁜 열매 맺혀졌다! 그것은 본래부터 아니라 이겁니다. 생명이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것은 재앙정도가 아니고 완전히 잘라버렸습니다. 오늘 제가 이 말씀하면서 여러분 참 주의 깊게 들어야 될 것은, 정말 내가 예수 믿는다면 복 받아야 됩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이 이 새 성전! 그래서 하나님의 계획 속에 나를 세우셔서 이 일에 내가 세워짐을 받았다 그러면 복 받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현재 뭐 기도 난을 저기 만들어 놓고 있는데, 억지로 기도시키고 이러고 싶은 마음 솔직히 없어요. 왜? 전부 10월 달에는 기도 릴레이, 기도한다! 이렇게 해 놓았지만 정말 하나님의 자녀다! 여러분들이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나가면 응답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걸 뭐 억지로 기도하니까, 기도하니까 얻었다는 배경하고는 또 다릅니다. 여기 말씀에 뭐라 그랬느냐?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신다!'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 권능과 권세 속에 여러분을 세웠다! 그러면 내가 기도한다. 합당한 열매가 맺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회개하라! 돌아 오라!' 이 말이거든요. 회개하라! 하나님 품으로 돌아 오라! 이 말이거든요.
그러면 돌아왔다 그러면 돌아온 자에게 합당한 열매가 나올 것이 아니냐? 여러분 진짜 예수 믿고 복 받았습니까? 진짜 예수 믿고 축복 받았습니까? 아니다. 진짜 예수 믿고 성공했습니까? 아니다. 한번, 두 번 혹시나 실수할 수는 있지만, 계속해서 안 되고 있다? 진짜 생각해야 됩니다.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 있습니다. 근본 자체가 안 될 때에...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금 우리가 이 시점에서 우리 자신을 한번 볼 수 있어야 되고, 그러면 뭐 세대가 이러니까, 말세가 이러니까! 여러분 성경보세요. 환경과 사건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눈동자 같이 여러분과 저를 지키신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의 자녀라 그럴 때에 '하나님이 인도하신다!' 그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여러분이 쓰인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필요를 채워주신다! 그랬습니다. 넘치도록 주신다! 그랬습니다. 이게 전부다? 아니다! 이것은 근본 문제를 살펴야합니다. 그 뭐, '전도된다, 안 된다!' 이 문제가 따라 오는 것이지만은, 이 문제 이전에 참 생명의 역사, 오늘 본문에서 이것이 안 된 대표적인 사례들이 열심히 다니고, 열심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이것이 안 된 대표적인 사례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 신앙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이 신앙을 바라보면서 바로 세례 요한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세례 요한이 '독사의 새끼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예수께서 어떻게 하셨느냐? '화 있을 진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우리가 뭔가 참 마땅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살아간다? 정말 그러면 화 받은 겁니다. 왜? 반드시 이런 축복과 열매가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것이 안 되었다? 그것은 화 받은 겁니다. 그러면 '뭘 잘하자! 노력하자!' 그런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잘 알아들어야 돼요. 믿어야 돼요. 회개라는 말이라던가, 믿음이라는 말이라던가, 은혜라는 말이라든가, 오늘 여기에 축복이라는 말이라던가, 그것은 내 입장에서 내가 결정하고 내가 요구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이걸 뭐라 그럽니까? 하나님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허락하신 겁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뭡니까? 믿음이라는 그 사실적 배경은 '내가 진실하고 신실하기 때문에 믿는다!' 그 말이 아니거든요. 누가?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하나님은 신실하시니까! 그분의 신뢰를 내가 믿는다! 신실하심을 믿는다! 믿음의 배경이 이겁니다.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회개다! 그럴 때에 내가 이것 잘못했고, 이것 잘못했고, 이것 잘못했다! 그런 배경이 아닙니다. 근본 회개라는 것이 오해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오늘 성경에 뭐라고 말씀했느냐 하면, 이런 배경에서 요한이 와서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신다! 그렇게 말씀했거든요.
그래서 오늘 이런 배경에서 정말 돌아왔다! 어떻게 하느냐? 성령으로 세례 받는 자다! 이런 배경입니다. 그러면 요한이 물로 세례를 받는다! 그럴 때에, 그러면 그것은 의미가 없느냐? 중요한 겁니다. 물로 세례를 주었을 때와 성령의 세례를 받았을 때와의 어떤 차이를 조금 이해를 할 필요가 있어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물론 하나님이 다하시지 만은, 우리의 책임이, 세례 받는 것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에 우리 책임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은혜 받는데 우리의 책임이 있어요. 그것은 신학적인 교리에서 또 뭐 설명이 되겠지 만은 그런 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탕 적으로 믿고 있어야 되느냐? 이런 배경입니다.
물세례를 베푼다! 그럴 때에, 원래 세례라는 말은 물에 담구었다가 빼내는 겁니다. 그 다음 여러분 이제 목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그럴 때에 여기에 저는 '내' 라는 말을 빼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내가 세례를 주노라!' 이런 그 문구가 좀 들어갑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왜냐하면, 물세례라는 그 배경에서 어떤 배경이냐 하면, 깨끗하게 해야 된다. 죄를 씻어준다. 씻는다. 이런 개념이 거의 따라 오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 이제 보통 옷을 더럽다! 그러면요. 때가 묻고 이런 속에서 옷이 이제 오염이 되어서 빨래를 안 합니까! 빨래를 하면, 빨래하는 개념이 뭐냐하면, 옷에 묻은 때를 어떻게 해 줍니까? 없애주는 것이거든요. 분리시켜 주는 것이다. 때를 떼어 내어버리는 겁니다. 이게 세례의 개념 아닙니까! 그래서 물세례라! 그러면 죄 씻어 주는 것, 죄를 씻는 것, 이런 개념이 많습니다. 그런데 사실상 물세례와 성령 세례와 다른 것은, 성령의 세례다! 성령이 임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받았다! 이런 문제는 그런 것과 다릅니다.
물세례는 '분리 시켰다, 떼어 내었다!' 이런 것으로 끝났지 만은, 성령 세례라는 것은 로마서 6장에 보면, '연합한다!' 이겁니다. 연합한다! 그러면 내가 떼어 내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떨어져 가지고 어떠냐? 이동해 연합한 겁니다. 그래서 이것이 성경에 보면 뭐라고 말씀했느냐 하면,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뭐라 그래요?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왜, 그렇게 되느냐? 옷에 묻은 때를 제거해 준다! 그럴 때는 옷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뭡니까? 이것은 완전하다고 봐야 되거든, 말하자면... 그런데 옷 그러니까, 그 세례를 받는 그 본체가 더러워 졌다! 이것은 지금 문제가 달라지거든요. 예를 들어서 옷 전체가 삭았다. 완전히 섞었다. 이러면 씻어서 떼어낼 문제가 아니거든요. 바로 그런 배경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세례 받았다. 그래가지고 씻어내어서 될 것 같으면 문제가 괜찮습니다. 이런 생각으로 많은 경우 세례라는 것, 그 다음에 복음이라는 것을 오해를 하더라 구요. 그래서 내가 뭔가 회개하고, 뭔가 이 죄를 씻어내면 죄가 떨어져 나가고, 회개하면 없어지고 그게 뭐냐하면 미사배경이고, 고해 성사하는 것이라든가 그렇게 느껴지는 것 아닙니까!
그래가지고 될 것 같으면 뭐가 그렇게 염려됩니까! 우리 자체가 더러워 졌어요. 우리 자체가 썩어졌어요. 우리 자체가 썩어 문드러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뭐 떨어 낼 것도 없고 이것은 뭐 낼 것도 없어요. 이래서 뭐냐하면, 근본 그 자리에서 옮겨져야 됩니다. 옮겨 져 가지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하느냐? 뭔가 완전한 것과 하나가 되어야 돼요. 이것이 바로 뭡니까? 세례라는 성령 세례의 개념입니다. 여러분 회개! 돌아왔다! 그러니까 멸망에서부터 돌아왔다. 그러면 돌아와 가지고 누구한테? 하나님과 만난다! 그럴 때에 하나님과 하나 된다! 하나님의 통치 속에 하나가 된다! 이런 개념이 서야 됩니다.
여기에서 여러분 정말 중요한 것이 내가 돌아와서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를 받도록... 그런데 그렇게 되자면 하나님과 같이 되고, 하나님의 뜻과 같이 되고,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같이 되게 하시고 그러면 결국 뭡니까? 하나님이 된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속성이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즉시, 그때부터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속성으로 인도를 받습니다. 여기에서 세례라는 것이 바로 이해가 됩니다.
이점에서 중요한 것이요. 여러분과 제가 완전 멸망에서부터 하나님께로 이동해서 하나님의 계획과 뜻과 그 통치 속에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설 수 있도록, 하는 길이 누구라 그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내가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께 은혜 받고, 하나님의 역사 속에 설 수 있는 모든 장애물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다 해결했습니다. 그 예수로 말미암아 내가 하나님을 만나 게 됩니다. 하나님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가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의 통치 속에 서게 됩니다. 그때부터 성령의 인도라는 사실이 나오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화 있을 진져 바리새인들아 그럴 때에 배경이 뭐냐하면, 그 예수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그러니까! 이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 특별히 요한복음 8장 좀 찾아볼 필요가 있어요. 한번 찾아봅시다. 요한복음 8장에 41절부터 한번 교독을 합시다.
"(요 8:41)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분 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요 8:42)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요 8: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줄 알지 못함이로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 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요 8: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요 8: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요 8: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아멘.
자 여기에 중요한 말씀이 뭐냐하면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반드시 누가 길이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길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나한테 오신 그 예수를 영접하고, 맞이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걸 종교라 그럽니다. 여러분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여기에 전부 빠져 있어요. 모든 성도들이 말로는 그러면서 그리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거든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시키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 이게 바리새인들이거든요.
그래서 예수께서 이 바리새인에 대한 문제를 말하면서 참 길로 오지 않고 이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너희는 예수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통해서 들어오지 아니하니까 뭐가 옵니까? 도적놈이요, 사기꾼이라! 그랬습니다. 담 뛰어 넘어온 놈이다! 왜? 길로 오지 않았어요. 반드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위해서는 누구를 보냈습니까? 하나님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장애 되는 모든 문제를 십자가에서 해결했습니다. 왕으로 오시고, 제사장으로 오시고, 선지자로 오셔서 이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시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 없다고 그랬는데, 유대인들은, 이 바리새인들은 예수 없이 '하나님 아버지! 그랬단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께서 '이 도적놈들아!' 이겁니다. '이 사기꾼들아!' 이겁니다. '이 죽일 놈들아!' 이겁니다. '이 화 받을 놈들아!' 그 이야기 아닙니까! 여러분 지금 모든 삶에, 생활에 이것이 바로 안 되면 합당한 열매가 나올 수가 없다! 그 이야기입니다. 정말 모든 일과 사건에 주 예수 그리스도! 이게 지금 이루어져야 되거든요.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여러분 한번, 진짜 한번 마음속에 이 심각하게 질문해야 됩니다. 내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앞에 나왔습니까! 그러면 열매가 나옵니다. 그 열매에서 중요한 것이 성령의 인도 아닙니까! 누구든지 예수를 성령으로 아니고서는 주라 시인할 수 없어요. 그러면 이때부터 뭐냐?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통해서 모든 역사, 인도함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간섭이 나오고, 하나님의 역사가 확인되고, 긍정하는 그 순간부터 나와 여러분의 생각과 뜻이, 걱정과 근심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다 하나님께 의뢰하고, 신뢰하고, 나갈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여러분 보세요.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되지 않으니까, 모든 범사에 자기생각입니다. 자기들이 갖고 있는 하나님께 맡기고 인도를 못 받는 것이요. 저는 뭘 시간 가면서 느끼느냐 하면, 여러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 의지하고, 하나님께 나간다! 그러면서도 전혀 아니라는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왜? 무슨 문제를 당하던지 내 생각, 내 결정, 내 뜻, 내 뜻이 안 이루어지면 기분 나쁘고, 하나님이 간섭하는 것이 성령의 인도! 왜? 근본적으로 안 되어 있으니 성령의 인도가 안 돼요. 여러분 성령의 인도 정말 여러분 진짜 여러분 생각과 뜻 이것은 다 없어져야 됩니다.
그래서 차라리 어떤 면에서 멍청하고 바보라도 좋습니다. 그러면 그때, 그때 성령의 인도 받는 일에 내 마음이 열리면 걱정과 근심 나올 필요가 없죠. 이게 안 되니까, 미리 다 정해놓고 '하나님께 이것 이래야 됩니다! 이것 이렇게 이루어져야 됩니다! 이것 이렇게 해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리고 조금만 이상해지면 '하나님 왜 이럽니까! 왜 안 이루어집니까!' 하나님의 뜻과 상관이 없어요. 그래가지고는 하나님께 '이것 이렇게 이루어 주옵소서!' 방법까지 자기가 다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완전히 뭐냐? 하인 취급합니다! 안 이루어놓으면, 하나님이 혼이 납니다!?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 있냐! 여러분 진짜 아닙니다.
바로 그렇게 되는 순간,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 받고, 통치에, 간섭에, 역사 속에 인도 받고, 그 역사 속에 세워져서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하나! 누구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내 뜻이 하나! 하나님의 세계 복음과 내가 하나! 그렇게 되는 순간에 여러분 뭐가 감사해지느냐? '뭐가 이루어 졌다! 이것이 성취되었다!' 그 말이 아닙니다. 나도 모르게 '전능하신 하나님! 그 축복된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다!' 라는 사실만 가지고도 감사가 나옵니다. 여러분 혹시 여기에 교회 오셔서 '하나님 아저씨!' 하나도 없을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속에 벌써 새 힘이 와 버립니다. 여기 더 바랄 것이 뭐 있습니까! 감사가 나왔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세밀한 간섭, '힘들다! 어렵다!' 상관없어요. 감사가 나옵니다.
솔직히 말해서 뭔가 '주 예수 그리스도!' 이 한마디 속에 새 힘 얻어야합니다. 말씀 읽을 때마다 새 힘 얻어야 합니다. '아버지!' 새 힘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여러분 그렇잖아요. 참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분명히 여러분과 저를 간섭해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이 믿어진다면, 이것을 믿는다면 걱정할 것이 뭐 있습니까! 걱정 없어야 됩니다. 그리고 또 모든 문제와 사건이 있을 때에 나도 모르게 뭡니까? 하나님께 저절로 기도 나옵니다. 성령의 인도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상하다, 어렵다!' 전혀 걱정할 것 없어요. 하나님 부족합니까! 머리가 모자랍니까! 지혜가 없습니까! 하나님은 완벽합니다. 내가 의지할수록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이게 안 되면 내가 조금 헌금하고 내가 조금 뭘 잘하고 '하나님 나 잘했죠!' 이랍니다. 여러분 보세요. 자식들이 부모한테, '아빠, 나 돈 벌어 가지고 아빠 호강시켜 줄게! 유럽여행 시켜주고...' 이러면 부모가 뭐라고 그러는 줄 압니까? '야, 이 자식아! 너나 잘 먹고 잘 살아라! 너나 나 걱정시키지 마라! 네가 잘 살면 다 된다!' 부모의 마음입니다. 전혀 그것을 기대하고 그것 때문에 뭐 한 것 아닙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뭡니까? '자식이, 아빠, 너무 감사해요. 나한테 아빠가 계신다는 것 너무 감사합니다. 난 부모가 이 땅에 계신다! 너무 감사합니다. 나는 아빠가 내 아빠 된 것 너무 감사합니다!' 이러면요. 아버지 홀딱 넘어가 버립니다.
여러분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이 뭐냐? 소요리 문답에 뭐라고 하는 줄 압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그를 기뻐하는 것이다!" 그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누림이에요. 우리가 뭘 많이 드렸다! 아닙니다. 적고 큰 문제 속에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고, 그분이 나의 아버지 된 것이 새 힘나고,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힘이 나와야 됩니다. 그리고 지금현재 나와 함께 누가 역사 합니까? 회개에 합당한 열매! 하나님의 통치 속에서 성령의 인도! 하나님의 그 역사 속에 내가 인도 받고, 적은 문제, 큰 문제 하나님이 지금 나를 간섭하시는 일에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이 눈이 열렸다! 다 끝나는 겁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어디로 가느냐? 세계복음화의 역사와 나와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뭐 우리 자녀들, 우리 뭐 재산 걱정, 그런 문제 아버지가 조금만 복음에 눈만 열려도 자녀들 저절로 되게 되어 있습니다. 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다 이루어 주신다." 안 믿으니까! 이 말해도 그저 성경구절은 외웠지만 안 믿으니까! 나도 안 믿지만 여러분도 참 안 믿더라 구요. 어쩌면 그렇게 똑같이 안 믿는지 몰라요. 안 믿으니까! 조금만 믿으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 하나님의 자녀로 세우신 일에, 하나님이 영광스럽게 역사가 나올 것이다가 아니고 나옵니다. 이때부터 기도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 복음역사 위해서 내게 뭐가 필요합니다! 내가 뭐 필요합니다!' 그것을 들어주실 것 아닙니까! '아들을 주신 아버지께서 아들과 함께 네가 구하는 성령을 은혜로,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냐?' 약속했습니다.
오늘 이 약속을 붙잡고 길게 할 것 없어요. 여러분 정말 하나님 앞에 진실한 마음으로 참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오늘 나와 여러분에게 약속 받은 것이기 때문에 이 약속을 누리지 못하고 방황하는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합니다. '누려라!' 그리고 아버지 오늘 이 자리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이 순간, 이 사실이 이루어지게 될 때에 그때부터 비로소 참 된 예배가 이루어지게 되고, 참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고, 참 찬양이 나오잖아요. 찬양이 왜 안 되느냐? '찬양 열심히 하십시오!'. 열심히 한다고 되나! 열심히 한다고 목만 아프지. 배 가죽만 땅기지. 진짜 하나님 앞에 찬송이 나온다? 저절로 되는 것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 거기에 있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길이 열렸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마다하고 제외시키고 아버지 그러니까! 나쁜 놈이지. 너 사기꾼이라! 이게 도적놈들이거든요. 그래서 뭔가 행동으로, 뭔가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종교입니다. 오늘날 교회 다니는 많은 사람들 속에 오랜 묵은디이일수록 예수 그리스도 없이 아버지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는 이 엄청난 사기꾼들이 모여있는 집단으로 화해 가는 것이 오늘날 현실 문제입니다. 이 일에 정말 우리가 눈이 열려 가지고 하나님 앞에 조금만 사실적인 일에 합당한 열매 맺도록, 성령의 인도 받게 되면 엄청난 축복이 지금 뭐 '이래라 저래라!' 강요할 것 없어요. 하나님의 역사가 나와 여러분에게 약속되어 있습니다.
조용히 이제는 문제 닥칠 때마다, 사건 있을 때마다 당황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고 아버지! 그분이 아버지입니다. 아버지! 주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 모든 이름을 그 이름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 모든 사건이 여기서 이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자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시고, 그 뜻과 하나가 되게 하시고, 그 계획과 하나가 되게 하시고 세계복음화의 그 영광과 하나가 되게 하신 이 축복! 아버지입니다.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마 3:1-12 / 박지온 목사
우리 지난 시간에 '나사렛 예수' 라 했는데 '촌놈 예수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을 따라서 아무리, 아무리 왕권을 가지고 사단이 농락을 하고 죽이려고 해도 하나님이 기어코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사실을... 그래서 씨로 오신 예수님! 그 다음에 그 씨로 오신 예수님! 생명의 예수! 그 분이 오셨다. 이랬을 때에 사단이 너무 놀라 가지고 왕권을 동원해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만은, 기어코 하나님은 그 사단의 역사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이루어 가시는 현장! 그 속에 우리를, 여러분을 세우시고 이 축복으로 인도하시는 그 은혜를 확인하는 그런 귀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 이런 의미에서 1장, 2장에서는 예수님이 누구시냐?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오셨다! 그런 배경에서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주로 메시지가 나갔고 그 다음에 3장에는 그 분이 무엇을 하러 오셨느냐? 그런 내용이 오늘 3장에 이야기가 되겠고, 4장에는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셨느냐? 하신 일에 대해서 쭉 4장부터 진행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보면, 그 분 예수님이 왜 오셨느냐? 하는 문제를 세례 요한을 통해서 보여주시고 있어요.
그것이 우리 한번 3장 1절부터 2절까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마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아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그런데 여기 본문에 보면 그때에 그렇게 말씀을 했어요. 성경은 그 때라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게 말씀되어지는데, 우리는 그때에 그럴 때는 마치 그 1장, 2장에 이어서 바로 같은 시간이다! 하는 그런 어떤 개념이 많아요. 우리 그 의예 법으로는...
그러나 우리가 계속 성경에서 보는 데로 때라고 말할 때는, 누구의 때를? 하나님의 시간표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그때가 이르렀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같은 어떤 그 1장, 2장에 이어서 같은 어떤 시간표를 볼 수 없는 이유가 너무 분명한 것은, 그때에 한 말씀 속에서 원래 1장, 2장은 예수님이 나신 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어릴 때죠. 세 살 아래로 다 죽이는 이런 어떤 어릴 때, 그건 뭐 예수님께서 나신 그런 때가 연령으로 봐서 어떻게 되었냐 하면 1, 2살 이렇게 되죠.
그런데 지금 그때에, 그리고 세례 요한이 증거 하는 예수는 연세가 어떻게 됩니까? 30세입니다. 그러면 그 동안 얼마나 걸렸어요? 적어도 29년 내지 30년이 흘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그때에 하는 것은 하나님이 드디어 이 땅에 보내신 생명의 역사를 이루시는 때가 왔다. 그런 배경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역사다! 그래서 그 뒤에 보면 "(마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마 3:3)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또 하나님께서 그냥 이 말씀이 그때하고 이런 계획을 하신 다는 말이 아니고 벌써 하나님이 오래 전에 계획하신 그 계획이 지금 그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하나 하나 성취되어 가는 과정이다. 그런 배경이 말씀되어지죠.
그래서 지난주에는 하나님의 프로젝트 게놈프로젝트가 아니고 하나님의 프로젝트 여러분 개개인이 전부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프로젝트가 지금 내재되어 있는 것이고 지금 그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 이제 움직여 가고 있다. 그런 배경입니다. 그러니까, 참 복음에 서서 있을 때에 정말 우리가 염려하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가 실감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안 되면 '염려를 뭐 같이' 가 아니죠. 그러나 여러분과 제게 이런 배경...
그 다음에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대체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러 오셨느냐? 하는 배경에서 세례 요한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회개하라 뭐가 가까웠어요? 천국이 가까웠다. 그랬습니다. 우리는 그 천국 그러면 죽음 이후를 많이 생각해요.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 그러면 예수 믿고 사는 동안에는 별로 감격이 없어요. 그러니까 항상 갈등이 오고 그런 문제가 생깁니다. 천국은 현재의 천국도 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데로 빌립보서 3장 20절에 보면 "(빌 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랬습니다. 우리가 지금 현재 이 땅에 사는 것 같지만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사는 것은 이미 벌써 천국 백성으로 산다!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문으로 천국(天國)이지 원래는 우리나라 그대로 직역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그래서 제가 이 "하나님의 나라!" 그렇게 제목을 정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나라라 부른다! 국가라 부른다! 그러면 무슨 개념이 있느냐 하면, 국가다! 그러면 주권이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영토가 있어야 되고 뭐가 있어야 되냐? 국민이 있어야 되고 3대 요소라 안 그럽니까!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 그럴 때는 통치개념입니다. 누가 다스리느냐? 이게 중요한 핵심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누가 다스립니까? 하나님이 다스리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가 누구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제게 현실적으로 실행이 된다! 이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가까웠다! 왕권을 가지고 통치하시는 그 분이 왔도다!' 이 선언이 바로 세례 요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선언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이 말씀 앞에서 참 감사한 것은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많이 오해되는 부분이 이겁니다. '하나님의 나라!' 라 그러고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그럴 때에 구체적으로 우리가 이 땅에서부터 저 하늘나라에 가서 뭐 거기 가서 천국 복낙을 누린다! 그게 아니고 이 땅에서부터 그 행복한 하나님의 나라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여러분과 제게 이루어 졌다! 이 가까웠다는 것은 예수님이 이제 공식 석상에, 공적인 역사가 나타났다! 시작이 되었다! 이것이거든요. 이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생명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여러분과 제게 뭡니까? 이루어 졌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에도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주옵소서' 그게 뭡니까? 하나님의 통치를 지금 이루어 주시옵소서. 이미 여러분과 저는 어디에 가 있습니까? 어디 있어요? 천국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망에서 어디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이미 벌써 옮겼습니다. 그래서 이런 과정 때문에 우리가 지금 죽어도 영원한 천국이지만, 이런 과정 때문에 앞으로 우리는 어디 가느냐? 하나님 나라의 생명은 얻었고, 하나님의 통치를 이미 받고 있기 때문에, 죽어서 천국 간다! 이런 이야기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지 않는 과정 속에 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상관이 없어요.
그런데 이 축복을 누리는 사실이 여러분과 제게 너무 귀중한 현실적인 사실인데도 이걸 다 놓쳐버려요. 우리 믿는 사람들이 예를 든다면 여러분 통치를 받는다! 간섭을 받는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간섭을 받는다! 이 얼마나 위대한 역사라는 사실을 우리는 몰라요. 예를 들어서 이런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 어떤 고아가 고아원에서 도망을 쳐 와 가지고 저 구석에서 쭈그리고 이상한 포대기를 덮어쓰고 자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아이를 향해서 '일어나 밥 먹어라!' 고 간섭하는 사람도 없고 '깨워 가지고 세수하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머리 감아라!'고 하는 사람도 없어요. 이 실컷 늘어지게 자고 아침 햇살이 중천에 떴을 때에 부스스 일어났습니다. 아무런, 그에게 간섭이 없습니다. 그를 향해서 옆에 섰는 사람이 보고 '너는 행복하다!' 이럽니까? 안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데로 집이 있고, 부모가 있고, 또 학교 가야 되고... 그래서 빡빡한 일정 속에서 아침에 아이가 일어나면, 아이가 일어나기도 전에 벌써 부모가 '야, 일어나라! 엉덩이도 차고, 안 되면 코도 비틀기도 하고, 안 그러면 꼬집기도 하고, 안 그러면 입을 막기도 하고...' 안 이럽니까! 그러면 막 싫다고 그러면, 이래도 안 되면, 고만 벌떡 팔 잡고 당기면 일어나잖아요. 그러면서 일으켜 세워 가지고 세수도 시키고, 또 눈 꼽지도 떼게 하고, 그 다음 밥을 먹입니다. 밥을 먹이고 또 어떻게 합니까? 학교에 가라고 등을 떠밀어서 보냅니다. 그 아이가 '아, 나는 왜 이렇게 불행하냐?' 꼭 우리의 입장이 그래요!
하나님이 엄청난 축복의 계획가지고 여러분 인도하시기 위해서 막 일으키고 그 다음에 눈 꼽지도 떼고, 그러면 세수도 시키고 떠밀어 가지고 지금 현재 우리는 싫지만, 교육도 받게 하고, 훈련도 받게 하고, 이러면 '아, 나는 왜 불행하냐!' 꼭 이와 마찬가지예요. 이 일에 우리가 조금만 하나님의 통치라는 사실이 인식만 되어도 엄청난 여러분과 제게 향한 축복과 은혜를 우리가 누린다는 정도가 아니고 이 역사가 구체화 될 터인데, 이것이 지금 이해가 안 되어서 모든 우리 신앙들의 불평이 그런 것이거든요.
보세요. 여러분 예수 믿자마자! '저 안 믿는 사람들은 돈만 잘 벌이고 일만 잘 되고...' '그런데 나는 왜 예수 믿는데 이렇게 안 되느냐?' 그리고 주일날도 마음대로 좀 산으로 들로 쫓아 다녀야 되겠는데, 주일날 교회 안 오면 죽을 것 같지! 교회 안 오고 어디 갔다가는 잘못하면 약간만 엎어지면 다리가 부러질 것 같지! 이건 뭐 지금 죽을 지경이라! '하나님 내게 자유를 주옵소서!' 속으로 어떻게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왜 이렇게 참 불쌍하다!'
여러분 이 사실, 현실이 여러분과 제게 지금 놓여진 현실입니다. 믿는 자들이 이게 안 되어요. 하나님이 지금 통치하고 계신다! 축복된 역사와 영광의 길로 인도하는 과정 속에 있다는 사실을 이 이해가 안 되어요. 암만 말을 해도, 이 믿으라고 해도 안 믿어요. 지금 계속 그 이야기 아닙니까! 안 믿어요. 안 믿는 정도가 아니고 뭐 '싫다!' 이겁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벌써 여러분 여러 번 했습니다 만은, 첫 번에 기억나는 것이어서, 저 서울 삼각산에 죽으려고 하다가 못 죽고 이렇게 라도 하나님이 뭐 있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고, 그런데 또 몰라 '있으면 살아야 되고, 없으면 죽어 버린다!' 그러고 서울 삼각산에 올라가 가지고 그 추운 2월 초순입니다. 죽어도 추워서 죽으면 곤란하니까! 이불도 하나 가지고 가고 먹는 것도 가지고 가고 추울 것까지 걱정해 가지고 올라갔어요.
그래가지고 기도했던 그 배경이 뭐냐하면, '하나님 당신 때문에 내 인생 망쳤습니다! 왜, 이럽니까! 놀러 가는 것을 마음대로 갑니까! 먹을 것을 마음대로 먹었습니까! 내 인생을 왜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고 왜 이렇게 됩니까! 도대체 당신이 누구입니까! 있으면 나아 봐라!' 그때에 내가 하나님 앞에 대항했던 것이거든요. 그래가지고 뭐 쌍 시옷 자를 2시간, 3시간 계속하고 막...
그런데 보세요. 하나님이 그때 나를 간섭하지 않았다면 오늘 제가 여기 있겠습니까! 오늘에 천국의 축복과 행복을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섰겠습니까! 그때 그 일이 그렇게 싫었던 것이거든요. 하나님이 나를, 내 인생을 왜,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왜, 내 마음대로 못하게 만들었습니까? 이게 이제 불평이었거든요. 오늘 똑같습니다. 여러분 너무 행복하고 축복된 자리에 있지만, 이 불평이 교회에 하는 불평이요. 여러분 가만히 놓아두어서 됩니까? 건드려야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 개념이 뭐냐하면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늘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난주에 우리 이 시 영 목사님 오셨을 때에 그런 이야기 하니까! 그렇게 좋다! 안 그랬습니까! 예수 이야기 좋다고만 하고 예수를 통해서 오는 이 축복을 못 누려요. 이게 지금 문제 아닙니까! 여러분 창세기 2장 17절에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어떻게 했어요? '죽으리라!' 그랬습니다. 그 죽음이라는 배경이 그 죽음이라는 개념이 뭐냐? 성경에서는 생물학적으로 죽는다는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났다? 망한다!' 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떠났다? 영원한 죽음인데, 현실적으로 망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다? 현실적으로 내가 하나님의 간섭을 받는다! 축복이다! 이어지거든요. 생명이라는 개념이 하나님을 만나는 겁니다. 하나님을 깨닫는 겁니다. 하나님을 떠났다? 죽었다! 그렇게 했습니다. 보세요. 하나님 떠났다? 죽었다! 그때부터 모든 생이 허무해지고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 떠났다? 그때부터 세상은 점점 허무와, 허망과, 거짓과, 그 다음에 속임과, 그 다음에 폭력과... 이게 지금 세상 돌아가는 것 아닙니까! 결국 그래서 어디냐? 마지막 날에 영원히 멸망 받습니다. 지금 어떻게 하느냐? 망해가고 있는 것! 하나님 떠난 겁니다. 불신자의 6가지가 망하는 시간표 아닙니까!
이 죽음과 멸망 속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했습니다! 생명 주셨습니다! 이 생명 주셨다는 데에서 충격이 되어야 되죠. 너무 감사합니다. 이걸 가지고 은혜라 안 그랬습니까! 은혜 개념을 설명했습니다. 제가 이 저 선교사 훈련원에서도 은혜에 대해서 물으니까? 몰라요. 모르는 것이 당연하죠. 은혜 개념이 뭐냐? '오늘 뭘 받았다. 기분이 좋다!' 그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내가 영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았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았다! 알았다! 믿었다! 이것이 내 힘으로, 내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완전히 하나님의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나를 하나님이 천에 하나, 만에 하나 불렀다! 세웠다! 예수를 알게 하셨다! 불가항력적 은혜거든요. 그 예수그리스도를 알았다? 은혜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은혜로 이해가 되었을 때에 그때부터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뭐가 오느냐? 하나님의 통치 속에 성취와 승리의 통치 속에 이 사실이 이해되는 순간, 순간 우리는 은혜라는 것이 얼마나 귀중하다! 그때부터 불평이 없죠. 여러분의 삶이 여러분 생애가 바로 지금 어느 순간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통치 속에 있다! 이겁니다. 하나님의 통치 속에 있다! 이것이 안 되니까 하나님의 통치와 인도를 자꾸 괴로워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자유를 달라! 그건 뭐 통치를 벗어나겠다는 것이거든요. 아버지 오늘도 뭐 내 마음대로 하겠습니다. 기도는 하나님 뜻대로 그래놓고는 실제로는 내 마음대로 하겠습니다. 이것이거든요. 그래서 교인들의 모든 불만과 불평이 뭐냐? 전부 이겁니다. 하나님의 통치! 가장 축복되고 은혜로운 자리에 서 있어서 하나님의 인도와 간섭을 받고 있는데, 그것이 싫다! 이것이 교인들이 불평이더라 구요. 전부 교인들의 불평입니다. 이게 이해되면요. 만사 OK입니다. 전부 감사 아닙니까!
바위가 눈을 맞든지, 비를 맞든지 불평이 안 나와요. 암만 눈을 맞고 추워도 바위는 춥다하고 움츠리는 것이 없어요. 감각이 없어요. 그러나 여러분, 밖에 눈 속에 1시간만 세워 놓으면 춥다고 고함을 지를 겁니다. 감각이 있어요. 무슨 이야기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간섭 속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을 느끼는 자체가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소망은 세계복음화입니다.
그래서 나는 너무 감사한 것은, 시간이 갈수록 참 마지막 내 인생의 마지막인데, 또 어떤 면에서 이 땅에 마지막 이 종말에 하나님께서 많은 백성을, 구원하실 백성을 모을 수 있는 교회를 건축한다! 이것은 여러분 있다, 없다와 상관없이 얼마나 하나님의 귀한 축복의 역사죠. 그 계획 속에서 여러분과 저를 쓰시고자 세웠다! 엄청난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여러분과 제게, 하나님이 명령하실 때에,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지고, 이루어지는 사실을 지금 내가 인식하고, 그 통치를 받는다고 눈을 뜰 때에 그 자체가 복입니다. 왜? 성취되고 이루어지기 때문에...
보세요. 요나를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라!' 그랬거든요. 요나가 하나님께 대번에 '싫습니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낮을, 하나님의 간섭을, 하나님의 통치를 피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했다? 죽음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착각을 하고 도망을 갔다 할지라도 요나가 멀리 피할 수 있느냐 하면, 그것은 착각이지, 피할 수 없어요. 받아합시다. "기어코 만들어 놓으신다!" 이게 바로 하나님 통치요, 계획입니다. 그래서 요나가 마침 갔더니 뭐가 왔습니까?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었습니다. 돈주고 망합니다. 돈을 내고 배에 올라탔잖아요. 그러니 여러분이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낮을 피하면요. 돈주고 망하고, 인생 전부 희생하고 망합니다. 이게 우리 참 착각이거든요.
그래서 요나가 선가를 주고 배에 올라탔단 말이죠. 하나님께서 뭘 준비했어요. 대풍을 준비하시고, 그러니 너무 이 풍랑이 일어나는데, 요나는 올라타자마자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저 배 밑창이면 하나님 낮을 피할 줄 알고, 저 배 밑창에 가서 그것도 하나님께서 눈뜨고 있으면 또 하나님이 볼 줄 모른다 싶어 가지고, '깊은 잠에 빠졌다!' 그랬어요. 그런데 야단이 났어요. 배는 막 뒤집어 지려고 그러고 모든 사람들이 자기 신을 부르고 야단인데, 뭔가 이 선원이 와서 보니까, 이상한 인간이 배 밑창에서 늘어지게 자고 있거든요. 그래서 질책을 하는 겁니다. '자는 자여 어찜이뇨. 지금 죽을 지경인데 어찜이뇨. 이 어려움 속에서 너도 네 하나님께 부르짖어 봐라!'
이것은 마치 성도가 하나님의 낮을 피하고, 도망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간섭 피해 갈 때에 누구한테 조롱받느냐? 불신자한테 조롱받습니다. 불신자한테 조롱받아요. 우리가 참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간섭을 떠날 때에 하나님의 통치를 떠날 때에 불신자한테 손가락질 받아요. 이게 지금 오늘 현실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세계복음화에 여러분과 저를 세웠습니다. 여기에 낮을 피할 줄 알고 도망을 간다? 이건 말도 안 되는 겁니다. 가도 못하지 만은, 가다가도 두드려 맞고 돌아와요. 받아합시다. "어차피 가야할 길 순종하자!" 맹물 먹고 마음 돌리는 것이 아니고 말씀 듣고 순종하세요. 진짜 순종하세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요나를 들어서 바다에 던졌습니다. 거기 보면 우리는 고래라고 그랬는데 고래가 아닙니다. 무슨 고기인지 몰라요. 큰 고기라 그랬어요. 어느 정도로 크냐? 던졌는데 입하고 이 넘어가는 창자가 얼마나 컸던지, 위통이 얼마나 컸던지, 그대로 직통을 해 버렸어요. 그대로 뭐 밥통 속에 들어가 버렸습니다. 거기서 밤낮 사흘, 회개하면서 믿음으로 고백하면서... 여러분 벌써 요나가 고기 뱃속에 들어가 산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역사 아닙니까! 간섭 아닙니까! 절대로 하나님 간섭은 죽이는 간섭이 아닙니다.
너무 너무 이렇게 안에 들어앉아서 발버둥치고 고함을 지르고 허우적거리니까! 고래도, 살아있는 고래도, 뭐 큰 고기가 괴롭지 않을 겁니까! 너무 괴로우니까, 이것이 저 니느웨 앞 바다에 가서 토해 내어 버렸어요. 어디에 왔습니까? 기어코 니느웨에 왔습니다. 받아합시다. "하나님의 낮을 피할 수 없다. 하나님의 통치를 피할 수 없다!" 여러분 이 사실이 인식이 되어야 됩니다. 피할 줄로만 아는 착각! 말세에 하나님께서 남종과 여종에게 무엇을 부어줘요? 성령을 물 붓듯이 부어주시고, 부어주시는 배경이 뭡니까? 세상 끝 날까지, 내 뭐가 되어요? 증인이 되라! 그랬습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 이 사실에 여러분과 제가 조금만, 느낌만 있어도 하나님은 축복하시고 은혜 주신다는 사실이 약속이 되어져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 뭘 느끼느냐 하면, 주일날 교회에 안 나오면 어디에 좀 놀러가고 싶다! 이래서 가잖아요. 가면 무슨 생각이 드느냐 하면, 뭐 조금만 일이 생기면 '아이고 오늘 교회 안 갔더니만 화투치니까 맨 날 잃게 되는 구나!' 이런 생각이 항상 나와요. 그 다음에 저 뭔가 등산 가다가도, 뭐 약간만 이상하면 '아이고 오늘 교회 안 갔더니만 다리가 부러질라! 벌받는가 보다!' 이런 게 오거든요. 그래가지고 보통 보면요. 한 4주간, 한 3주간 있다가 한번 씩 온 사람! 거의 그런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염려하지 마세요. 바위는 느낌이 없습니다. 죽은 것은 느낌이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서 느낌이 있다? 축복입니다. 생명입니다. 이 사실을 인식만 하면 이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식만 되면 그게 뭡니까? 복입니다. 그게 은혜 속에 은혜요.
그래서 지금 뭐 우리가 전도하는 사역을 하고있으니까! '아, 전도 못한다. 전도 안 된다!' 이래가지고 고민하는 사람도 있어요. 고민하는 자체가 은혜 중에 은혜입니다. 아무나 고민하는 줄 압니까! 불신자들에게 물어보세요. 고민하는가? 안 합니다. '된다, 안 된다!' 문제가 아닙니다. 내게 생명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느끼고 산다! 이 사실 자체가 인식이 안 되어서 그렇지 이게 느끼기만 하면 깨닫기만 하면 여기에 모든 것 준비 해 놓았습니다. 여러분과 저를 기어코 말세에 이 땅을 정복하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세워 놓았다는 사실이거든요.
1부 예배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만은, 우리 젊은 목사님들이 우리 교회에 오셔서 많이 힘든 것이 '설교하기가 참 힘든다!' 그러더라 구요. 메시지를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아멘 소리도 잘 안 하고... 뭐 그렇다 그러면서 그래요. 그래서 이 뭐 옆에서 소리를 다 잡아 먹으니 그런지 모르지만 찬송소리도 뭐 힘이 없는 것 같고 뭐 그렇다 그러면서 그래요. 이걸 뭐 한번 왔다 간 사람이 왔다가서 속으로만 그러면 괜찮은데, 또 이 공고를 하더라 구요.
그런데 우리 교회에서 내가 뭘 느끼느냐 하면, 내가 전에도 좀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지난주에, 지난번에 우리 이 시 영 목사님 와서 설교하실 때에 너무 은혜를 받더라 구요. 그래서 이 시 영 목사님 지금 카세트 테이프를 복사를 해 가지고 돌립니다. 들어보세요. 힘 빠질 때 한번씩 듣고, 그리스도 희미할 때 한번씩 들어요. "다락방에서 그리스도가 지금 보다도 10배 더 선포되어야 된다!" 그 말이 맞습니다. 할 말은 그것뿐이에요. 우리는 너무 배가 불러 가지고 자꾸 그리스도 말하면, '자꾸 반복한다!' 그러고 반복한다고 하는 사람 자체가 아닙니다. 하나님 은혜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를 우리가 바로 봐야 합니다. 그걸 말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이 분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느냐? 지난 과거에 너무 안 되니까, 고함을 지르고 막 기도하다가... 저는 그 겪어보니까, 고함을 지르고 기도하다가 보니까, 음성이 터져 버리더라 구요. 막히다가, 막히다가 터져 버리는데, 이 분은 막히다, 막히다 안 터지고 터지기 전에 아마 다락방을 만난 것 같아요. 음성이 목쉰 소리인데 이게 본 음성이 안 나와요. 그러다가 그리스도를 받고 난 후에 너무 좋아서, 너무 좋아서! 지금 그 분이 뭐 소개를 받았습니다 만은, 현재 합동 측에 미주 총회에 부 총 회장입니다.
총회 안에 그런데도 이 사람에게 나가라는 소리를 안 해요. 왜? 너무 맞는 말 하고있으니까! 그리스도 전하는데 누가 나가라고 하겠습니까! 그 다락방 소리도 안 하니까, 잘 모르지 만은, 그런데 이 분이 설교를 하고 난 후에 다른 사람들은 와 가지고 '힘 빠지고 힘든다!' 그러는데 너무 설교하면서 자기가 너무 힘 얻었다! 그래요. 그리고 메시지 속에서 너무 우리 교인들이 원래 야단스럽게 잘 안 받잖아요. 그 날 보니까, 조금 야단스러워 진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너무 잘 받더라 구요. 제가 은연중에 이렇게 표정을 보니까, 전체가 다 잘 받아요. 힘을 얻었다고 전부다 은혜 스럽게...
제 마음속에 무슨 생각이 드느냐 하면, 그래 일단 지난 과거 신비에도 빠졌다가, 또 사건, 여러 가지 겹쳐서 밤에 가서 고함을 지르다가, 그래도 안 되어 가지고 다락방까지 왔거든요. 왔다가 '예수 그리스도!' 이제 뭔가, 어떤 사람은 눈을 뜨고, 어떤 사람은 알 듯 말듯하고, 어떤 사람은 눈을 감고 예수 그리스도 하기도 하고, 이렇지 만은 그러나 이 사람이 이런 과정을 다 겪은 중에서 메시지를 전할 때에 뭐가 오느냐? 메시지에 힘이 있더라 구요. 힘이 있더라 구요! 그리고 그런 메시지가 우리 교회에는 잘 받더라 구요.
제가 뭘 느끼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간섭이 여러분 과거 속에서 얼마나... 어떤 분들은 혹독한 간섭이 있었고, 어떤 분들은 이상한 간섭도 있었고... 그런데 그건 지금까지 '왜, 이럽니까!' 하나님의 간섭이 축복으로의 인도인 과정인줄 모르고 계속 거부하는 동안에 우리가 힘 빠지기도 하고, 그 다음에 우리가 넘어 지기도 하고... 그랬다 아닙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왕으로 오시고, 제사장으로 오시고, 선지자로 오시고 아니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완전히 해결하시고, 바로 지금 내 안에 오셔서,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시고 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통치였구나! 지금도 내가 그 통치를 받고 있구나! 지금도 싫어하는 이 모든 것도 하나님의 손이 내 위에 있구나!' 깨닫는 순간에 여러분 지나간 모든 과거들이 내게는 지금 현재 무엇으로 남아요? 힘으로 주체됩니다. 힘으로...
그래서 여러분 힘이라는 것이 어디냐? 성도의 힘이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누리는 것이 힘입니다. 그리고 기도로 누리는 것이 힘입니다. 힘이라는 것이 뭐 돈을 얼마나 받았다? 돈 없으면 힘 빠지는 것 아닙니까! 그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로 내게 사실적인 능력으로 임했습니다. 그러면서 힘이라는 것이 누구냐? 나와 내 수준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지금 나를 인도하시고 이끌어 가시고 간섭하시고 통치하신다. 지금 죽을 것 같은 이 문제 속에서도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이 사실을 깨닫고 기도하면서 그 사실을 누리는 순간, 순간 과거에 모든 것들이 전부 힘으로 주체됩니다. 역사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그가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말하는 것이나 만남 속에서 우리가 이야기하는 속에서 뭐가 나옵니까? 내가 힘있게 고함을 질러서 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조용, 조용히 말해도 뭐가 됩니까? 능력으로 역사 하게 되어 있습니다. 권능으로 역사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그 입에서 뭐가 나옵니까? 계속 거기서 나오는 말은 감사합니다. 찬송합니다. 이 말밖에 더 나올 수가 없어요. 오늘 정말 여러분과 제게 중요한 것, 예수 그리스도 이 땅에 오심은, 예수 그리스도 이 땅에 오셔서 하실 일은, 뭘 위해서? 왕으로 오셔서, 나와 여러분에게 뭐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루어지게 하시기 위해서, 그 위에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길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바로 그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 일에 제일먼저 첫 외침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라! 그 말은 다른 게 아닙니다. 지금까지 내 생각, 내 나라, 내 뜻이 성취되고, 내 일이 이루어지는 일에 전심을 해 오다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는 아니다 어떤 문제와 사건이 와도 하나님의 통치다! 누리는 순간, 순간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것이 다 배경이 되어서 힘으로 여러분의 삶에, 여러분의 생활 영역에, 여러분 모든 학업에, 여러분 모든 사업에 구체적으로 역사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서 여러분과 저를 선택해서 세계를 바꾸기 위해서 엄청난 계획을 세우고 지금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진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모든 상황과 환경은 하나님이 만들어 나가실 것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 속에 누가? 하나님이 간섭하십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실 때에 기뻐하는 눈만 열리면 바로 힘입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실 때에 감사할 수 있는 눈이 열리면 바로 힘입니다.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의 간섭이다! 이 사실을 누리면 힘입니다. 모든 문제 뛰어넘는다는 것이 아니고 정복하게 될 것입니다.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준비했던 사람
마 3:1-13 / 김태환 목사
영어에 “훠러너(forerunner”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구자, 선각자, 전주자(前走者)라는 뜻이 있습니만, “the Forerunner”라고 하면 세례 요한을 가리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 전에 와서 뛰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세례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마태복음 11:11).”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세례 요한에 대한 최고의 찬사(讚辭)입니다. 여자가 낳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여자에게서 낳았습니다. 그 중에 별 유명한 사람들이 다 있었습니다.
문학가, 예술가, 과학자, 체육인, 정치인, 군인들 중에 정말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국에도 반만년 역사 중에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최근에 결혼 정보회사인 비에나래에서 전국의 20-30대 미혼 남녀 554명에게 “결혼 후 2세가 어떤 사람과 닮기를 원하는가?” 하는 질문을 조사했습니다. 결과는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1.7%로 남자 1위에 올랐고, 여자는 김주하 아나운서가 27.3%로 1위에 올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자 2위는 18.8%를 받은 권상우(텔런트 겸 영화 배우)가 차지했고, 3위는 18.2%을 받은 손석희(아나운서)가 차지했고, 4위는 13.7%를 받은 고승덕(변호사)가 차지했고, 5위는 9.4%를 받은 이승엽(야구선수)이 차지했다고 합니다.
여자 2위는 26.5%을 받은 이효리(가수), 3위는 12.4%를 받은 강금실(법무부장관), 4위는 9.2%를 받은 송혜교(탤런트), 5위는 6.0%를 받은 신인령(이화여대 총장)이 차지했다고 합니다. 이 중 대중들의 이목(耳目)을 끄는 가수가 탤런트를 빼면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이나 고승덕 변호사의 경우는 예외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윤종용씨는 왜 그렇게 인기가 있는지 잘 모르지만, 고승덕 변호사(42세)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법고시 최연소 합격, 외무고시 차석, 행정고시 수석, 그는 서울대 법대 재학 시절에 고시 3관왕이 되었습니다. 하바드와 예일에서 법학석사, 콜럼비아에서 법학박사, 미국 4개 주의 변호사 자격증, 세계 최대 로펌 회사 B&M에서 근무한 화려한 경력 때문인지 몰라도 현재는 변호사로, 방송인으로, 베스트셀러 작가로, 인기 CF 모델로, 펀드메니저로 각 방면에서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 고승덕 변호사가 바로 우리 교회 출신입니다. 1990년 경에 우리교회에 출석했었습니다. 그 때는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 줄 몰랐습니다. 그냥 괜찮은 사람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 후에 이렇게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신화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최근에 정치권에서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 고승덕 변호사를 끌어들이려고 했는데, 통쾌하게 거절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요한 이전에도 훌륭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똑똑하고 신화적인 인물들을 통틀어 봐도 세례 요한처럼 훌륭한 사람은 과거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 이유는 그의 삶이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젊은 나이로 짧고 굵게 살았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forerunner”로서 자신을 위한 삶을 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최고의 찬사를 보냈습니다. 훗날 태어난 사도 바울 같은 사람도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For me to live is Christ and to die is gain., 갈라디아서 1:21).”
하여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야말로 우리의 생의 열쇠가 되시는 분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한 제사장의 말이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 될 것입니다(누가복음 2:34).” 오늘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게 되면 여러분의 생은 아름다운 삶이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관계 없는 삶은 결코 성공적인 삶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사렛 사람(Nazarene)”으로 사시는 동안 요한이라는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요한의 사역의 무대는 유단강 부근의 유대 광야(曠野)였습니다. 그의 사역의 무대로 선택한 곳은 예루살렘 도시가 아니라 유대 광야였습니다. 이것부터가 사람들의 고정 관념을 깨는 신선한 발상(發想)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범을 잡으려면 범의 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속설(俗說)을 깼습니다. 이 점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의 불만은 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시골에 묻혀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요한복음 7:3-5).
요한은 사람들을 찾아 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광야로 불러냈습니다. 사두개인들, 율법학자들, 제사장들, 바리새인들 같은 도시의 사람들을 유대 광야로 불러냈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나온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이 세례자(the Baptist)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상식(常識)과 관행(慣行)을 깨뜨리는 파격적(破格的)인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오히려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그는 낙타 털옷을 입었습니다. 허리에는 가죽띠를 찼습니다. 그리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石淸, wild honey)을 먹었습니다. 요한의 차림새와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상상이 가십니까? 하여튼 요한의 등장은 유대 나라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요한을 보기 위해서, 아니면 그의 메시지를 듣기 위해서 유대 광야로 모여 들었습니다.
요한의 사역 말기와 예수님의 사역 초기가 겹치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초기만 해도 사람들에게 요한의 인기가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요한을 보러 황량한 광야로 갔을 때에 그를 어떤 사람으로 기대하였느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느냐? 아니면 왕궁에 있는 왕자처럼 화려하게 차려 입은 사람이기를 바랐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예언자라고 생각하였느냐? 그렇다. 사실 그는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다. 그는 성경에 이미 예언된 사람이다. 그는 내가 올 것을 백성들에게 알리고 나를 영접하도록 준비시키려고 나보다 앞서 보내어진 주 하나님의 사자이다(마태복음 11:7-10).”
성경 말씀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광야”라는 말은 낯설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3가지 유명한 광야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다윗의 엔게디 광야 이야기입니다(사무엘 23-24장). 엔게디는 이스라엘의 남동쪽 외딴 곳에 있는 작은 소금물 호수입니다. 서쪽으로 조금 가면 높이가 600m 이상이 되는 높은 절벽이 있고 그 절벽 위에 협곡과 동굴들로 형성되어 있는 넓은 엔게디 광야가 있습니다.
「다윗: 현실에 뿌리 박은 영성(Leap Over a Wall)」이라는 책을 쓴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은 다윗의 생애를 연구하기 위하여 엔게디 광야에서 몇 시간을 머물렀던 경험을 이렇게 썼습니다. “광야에 있은지 한 시간 정도 지나자 나의 감각-시각, 청각, 후각_이 예민해지기 시작하였다. 광야에서는 그렇게 된다. 당신은 이곳에서 더 많은 것을 보고 들으며, 더 많이 믿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영성 전통에서 광야가 그토록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이다.” 여러분, 그가 광야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광야에는 소음(騷音)이 없습니다. 사람도 살지 않습니다. 짐승들이 살긴 하지만 눈에는 잘 띄지 않습니다. 그러나 광야의 환경 속에서 평소에 느끼지 못하던 거룩애 대한 감각(感覺)이 생겨납니다.
다윗은 자기가 원해서 엔게디 광야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원수에게 쫓겨서 들어갔습니다. 광야의 삶을 즐기기 위해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원수의 손에서 목숨을 건지려고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닉 하게도 다윗은 엔게디 광야가 진리의 장소요, 아름다움의 장소요, 사랑의 장소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서 보낸 세월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좋았던 시기에 속합니다.
두번째 광야 이야기는 모세의 광야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광야에서 우상(偶像)과 살아계신 하나님을 분별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 생활의 체험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사는 삶을 준비하는 축복의 기간이었습니다.
세번째 광야 이야기는 예수님의 광야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40일 간의 광야 생활은 시험(testimg)과 유혹(temting)의 기간이었습니다. 예슈님은 광야에서 종교(宗敎)와 참된 영성(靈性)을 분별하는 법을 배우셨습니다. 종교는 형식과 타성에 박힌 믿음생활입니다. 종교는 믿음을 앞세워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속된 행위입니다. 그러나 참된 영성이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생활에서 종교와 영성,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분별하는 법을 배우심으로, 주님은 우리의 협력자, 충고자, 좋은 친구를 넘어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실 준비를 갖추셨습니다.
이것이 광야입니다. 광야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 시켜주는 장소였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을 더 가까이 느끼고 체험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광야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과 친밀하게 되면 될수록 사람들은 가장 사람답게 변화되었습니다. 다윗은 광야 생활을 통하여 가장 다윗답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답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광야 생활을 통하여 예수님답게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 광야로 사람들을 불러냈습니다. 인간의 감각이 가장 예민해지는 곳으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시각과 청각과 후각이 예민해지는 곳으로 사람들을 불러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강력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으니 회개하라고 촉구했습니다. 회개하지 않고는 누구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요한의 말은 아주 과격했습니다. 자기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몰려 오는 사람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욕설을 퍼 부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 광야는 요한을 보려고 오는 사람들로 메워졌습니다. 누가는 그 때 상황을 이렇게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그리스도가 곧 오시리라고 기대하고 있던 모든 사람들은 요한이 혹시 그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 사실 여부를 묻는 질문이 사방에서 쏟아져 나왔다(누가복음 3:15).”
전에 언젠가 전도관을 만든 박태선 장로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마침 그가 나가던 교회의 목사가 서울로 출장을 가야해서 교회를 비우게 되었답니다. 목사가 교회를 비우는 동안 그 교회의 장로였던 박태선 장로가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났더니 그 교회의 목사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교인들이 몰려와서 “장로님의 설교가 목사님의 설교보다 훨씬 더 은혜롭습니다.” 이렇게 칭찬을 했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도 교인들이 이렇게 칭찬을 하자 그 사람들을 데리고 전도관을 창설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말 한마디로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달라져서 그는 이단(異端) 교주가 되고 말았습니다.
요한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백성들이 그렇게 자기에게 몰려와서 세례를 받고 열광할 때, 그리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의 입에서 세례 요한이 우리 민족이 기다렸던 메시야일지도 모른다는 말들이 나왔을 때, 그가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그의 인생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 때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온지 아십니까?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나보다 훨씬 더 능력 있는 분이 곧 오십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릴만한 자격도 없습니다. 그분은 여러분에게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내어 쭉정이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고, 알곡은 곳간에 모아 들이실 것입니다 (11-12절, 누가복음 3:16-17).”
요한은 자기 분수(分數)를 잘 알았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그리스도를 위해서 준비하는 삶을 살았지 그 자신이 그리스도가 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삶을 살았지 자신이 그리스도가 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자기에게 맡겨진 사역과 그리스도가 하실 사역을 혼동하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맡겨진 사역은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어서 회개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11절).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그분은 나보다 훨씬 더 능력이 많으신데 그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11절). 유대 사람들은 메시야 시대의 특징 중의 하나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이사야 44:3, 에스겔 36:26-27, 요엘 2:28-29). 그러니까 물로 세례를 주는 내가 그리스도가 아니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내 뒤에 오시는 그분이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해바라기(sunflower)라는 꽃이 있습니다. 이 꽃의 특징은 꽃이 아닙니다. 이 꽃의 씨도 아닙니다. 씨에서 나오는 기름도 아닙니다. 이 꽃은 신기하게도 태양을 향해서 돕니다. 이 꽃이 향하는 방향에는 늘 태양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해바라기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해바라기의 삶으로 만족했습니다. 결코 그 자신이 태양이 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손 끝은 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요한이 제자들과 함께 있는데, 예수님과 마주쳤던 모양입니다. 요한은 그냥 지나가지 않고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저 분을 보라. 저 분은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내가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저 분을 세상에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다(요한복음 1:29-31).” 그 후에도 몇 번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요한은 자기 제자들에게 “저 분을 보라. 저 분은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복음 1:36).” 그가 하도 그러니까 그의 말을 듣고 제자 두 사람이 예수님께로 가 버렸습니다. 그 때도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 잘된 일이다. 그분은 흥(興)하셔야 하고 나는 망(亡)해야 한다(요한복음 3:30).”
요한은 요즘 관점에서 보면 결코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는 매우 짧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30살, 혹은 많아야 31살에 그는 죽었습니다. 그것도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겨준 사명을 모두 감당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그렇게 기록하지 않았습니까? “이사야 말씀에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이 요한을 통해서 이루어졌다(3절).”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한 개인의 생을 통하여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는 자기 분수를 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행복의 비결(秘訣)입니다. 자기 분수를 알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불행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 분수를 넘으려고 하는데서 불행해집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윤종용 삼성 전자 부회장이나 고승덕 변호사 같은 사람은 참 굉장하겠다라고요. 사람들이 다 자기들을 부러워하고 자기 자녀들을 그렇게 키우고 싶어한다니, 얼마나 굉장한 인생입니까?
그러나 우리 모두가 그런 식으로 행복해 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아시지요? 고승덕 변호사가 쓴 에세이 「포기하지 않으면 불가능은 없다(2003)」가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이 글에서 자기 성공 스토리와 후배들에게 자기가 공부한 방법들을 소개했습니다. 그 책을 본 어떤 학생이 이런 독후감을 썼습니다.”저는 그 책을 보고 그만 기가 질려 버렸습니다.”
맞습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극소수의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행복을 누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행복마저도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인생을 살 수 있는 길이 있을까요? 그 길은 요한같이 해바라기 같은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녀들에게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가치(價値, values)입니다. 우리는 성경적인 가치 위에 우리의 삶을 건설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삶을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합니다.
나라가 임하옵소서
마 3:1-12 / 박조준 목사
오늘 아침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가운데서 두 번째 말씀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 말씀 속에서 모든 인간이 마음 속 깊이 갈망하는 소망이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 다. 성경에 말씀하신 대로 인간이 범죄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습 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자신이 알게 모르게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자기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사람이라도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사실 짐승이나 다름이 없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 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내가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받게 될 때 자신 의 가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그 동안 20여 년에 걸쳐서 100만 이상의 우리 동포가 미국에 이민을 갔습니다. 미국 이라고 하면 살기 좋은 나라라는 생각이 있어서 부푼 희망을 안고 갔습니다. 물론 우리 나라보 다 여러 면으로 나은 조건이 있은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디에 가나 얼른 보기에는 좋 아 보이지만 정작 거기에 발을 붙이고 살려면 어려운 점도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 리 한국 사람은 세계 어느 민족보다 생활력이 강한 집념을 가지고 이민 생활을 개척해 나가는 것을 볼 때 대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오랜 이민 역사를 가진 유대인이 미국에 처음 갔을 때 채소 가게, 생선 가게, 구두 수선, 세 탁소 같은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제는 보석상을 위시해서 미국의 금융계를 주름잡고 있습니다. 요사이 미국에 있는 한국 교포들이 유대인의 이민 역사를 뒤따르고 있는데 보통 한국 사람이 유 대인보다 생활력이 강하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20년밖에 되지 않은 이민 역사지만 이 제 상당히 많은 분들이 미국 사외에 정착을 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 민족은 정 말 훌륭하고 강한 민족이라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는 살아가는데 별로 걱정할 것이 없게 되었는데 그 다음은 살아가는 보람 입니다. 식생활이 문제가 되어 Job을 둘씩 가지고 잠을 자는 거까지도 절약해 가면서 뛰어서 차 도 사고, 집도 사고, 먹고 사는 걱정도 없어지게 된 것까지는 좋은데 그 다음에는 무엇이 있나? 하는 것 때문에 문제에 부딪친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사람의 사는 것이 가산이 넉넉 한 데 있기 않다는 성경 말씀이 옳습니다. 의식주의 걱정이 없어졌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사는가? 하는 것이 사람에게는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내가 이 사회에서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삶의 의미와 보람을 느끼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사회에서 필요하지 않은 존 재다 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사실 이 사회에서 자기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지 못하고 사 는 사람처럼 불행한 것은 없습니다. 요사이 소위 역이민 이란 말을 합니다. 잘 살아 보겠다고 포부를 가지고 본국을 떠나 외국에 이민을 갔던 분들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분들이 적지 않 다고 합니다. 왜 그 분들이 다시 돌아옵니까? 거기서 사는데 보람과 의미를 찾지 못해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어떻습니까? 주 안에서 거듭 나서 새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 억누를 수 없는 정열이 솟아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사랑 은 다른 사람의 문제를 나의 문제처럼 생각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사 실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셨나 하는 사실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참된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게 합니다. 가만히 보세요.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어려운 형편에 있는 이들을 돌보는 사람이 누굽니까? 거의가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인의 마음 속에는 사랑이 불타고 있어서 그럽니다. 나의 삶은 다른 이를 위한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사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이 직면하고 있는 어려운 문제에 동참하게 되고 자신의 십자가 를 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자기 자신이 필요한 존재임을 느끼며 자기 자신의 존귀 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은 새로운 자기 가치를 줄 뿐더러 이 를 위해 희생적 봉사를 기쁜 마음으로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이루어지이다. 이 말씀은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보상을 간단히 요약 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이십 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보다 크고 아름다운 꿈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의해서 통치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될 때 자신의 개인적인 무의미와 삶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자리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꿈이 있는 한 절망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꿈이 있는 한 포기나 좌절이 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 다. 너무너무 귀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하신 놀라운 계 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큰 기대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증명이 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필요에 따라서 세워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 녀인 우리가 인간 세계 모든 방면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등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살며 일하 도록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알아보려면 인간의 나라를 알아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나라는 모두 내 적으로 불안하고 병적으로 권력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의해서 세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권력의 아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며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이나 다름없이 생각합니다. 무신론과 유물주의 사상에 의해서 세워진 공산 진영의 나라들을 보세요. 사람을 사람으로 생 각하는 것이 아니라 물건으로 다룹니다. 이와 같은 자세는 비단 공산 진영의 독재자들에게만 있 는 것은 아닙니다. 권력에 지나치게 집착하다 보면 이와 비슷한 오류를 자유 진영에서도 얼마든 지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사이 우리 나라에서도 소위 오공비리 문제 때문 에 고민하고 있습니다마는 권력에 지나치게 집착하다 보면 보통으로는 상상도 살 수 없는 일을 저지르게 되고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나약한 영상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며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존엄성을 침범하면서 자기의 권력을 유지하려 하기 때 문에 언제나 불안정하고 공포 분위기에 쌓여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사실 자기 자신도 바로 대접하지 못하는 비극 가운데 빠지고 맙니다. 그 저 사치와 안일에 빠지고 치부에 혈안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기 자신을 바로 대접하는 것 이 아닙니다. 사실은 그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불안감, 초조감, 그리고 공포심을 메워 보려 는 데서부터 오는 하나의 허세입니다. 이런 나라의 정권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와 반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자기 자신의 긍지와 자존심이 인간 관계의 기초와 방법과 전략 그리고 정신 속에 뚫고 들어가는 사회입니다. 개인의 존엄과 가치가 받아들여지는 사회입니다. 그러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주 안에 있으므로 정죄 받지 않는 구원받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말합니다. 이와 같은 내적인 새로운 삶 은 세상에서 그 모습 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개인 생활에서나 사회 생활에서나 자신의 삶의 가치를 높게 하려는 자 세는 존경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싹이 트는 것이 씨앗의 본성인 것처럼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는 것은 사람 의 본성이며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존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에 적극적으로 영향을 주는 비제도적인 거룩한 유기체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이 땅 위에 사는 사람을 모두 귀하게 대하는 말입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 치고 천하고 무가치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우리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해 서 그런 것뿐입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이 기도 속에는 모든 인류가 인종과 종교, 경제적, 정치적 계급에 관계없 이 서로서로 존경하며 대하게 되는 날을 고대하며 구원받는 사람의 수가 날로 더해 교회가 번성 할 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범한 사람을 대했을 때도 그들을 모독하거나 멸시의 눈으로 보시거나 천대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주님은 어느 사람이던지 그 사람의 존귀함 을 인정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기본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나라의 그림자가 되어야 할 교회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옛날 초대 교회 때에 이런 부조리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야고 보서 2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돈 많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 너희가 아름다운 옷 입인 자를 돌 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가지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고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 냐?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 키면 잘 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꼭 같이 대하시는데 사람은 사람들을 차별하는 경우가 교회 안에서도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국회 의원이나 장관은 교회에 와서도 자기 자리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행사에서는 장관석이 따로 있고 국회의원 자 리를 마련하지마는 하나님의 교회에는 누구나 똑 같은 교인입니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이 없 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우리 모두가 없어서 안 될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획 안에 들어 있는 우리가 우리 한 사람의 책임을 바로 감당하지 못하면 그만큼 하나님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는 것을 기억할 때 우리 하나 하나의 책임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경하며 대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를 통해서 세워지고 있고 그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보잘 것 없이 보여도 그 한 가지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 나 라가 작년에 역사적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고 나서 국제적으로 좋은 인상을 주게 되었습니 다. 이제 외국의 손님들이 많이 한국에 들어오고 금년부터 여행의 자유화로 인해 우리 국민이 세계 어디든지 자유스럽게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생활이 한국에 대한 세계인에게 비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도 명심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그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십니 다. 어떤 이가 평생을 돌 깎는 일을 하다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의 유언장에 이런 글 을 남겼다고 합니다. 나는 맏아들에게 내게 있어서 가장 귀한 재산, 내가 평생을 돌 깎을 때 사 용했던 연장을 남긴다. 이 겸손한 석수는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 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놀라운 역사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 았습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자세가 필요합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삶의 보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꿈을 통해 전달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가능성 있는 영 감에 넘치는 생각이나 놀라운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겸손과 모순되지 않 을까 하여 염려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옛날 경건주의자들처럼 하나님의 기대를 깨닫지 못하고 귀한 영감을 던져 버리고 욕망을 억제해 버릴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어떤 훌 륭한 생각이 자기 충족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것을 버리는 잘못을 범하지 않아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 하나 하나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십니다.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사십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귀하고, 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이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이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는데 가자 필요한 것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의 구심점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십자가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우리의 구원의 핵심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을 위한 하나님의 희생의 표적입니 다. 만일 주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면 나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말로 다할 수 없이 귀한 존재 임이 틀림없습니다. 더구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범한 어떠한 죄라도 용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선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용서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죽인 사람들을 용서하실 수 있다면 또 몸소 희생의 제물이 되 셨던 예수님께서 그를 죽인 사람들을 위해 자비를 베풀 것을 간청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서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나를 못 박은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단순한 우리의 표어만은 아 닙니다. 그것은 자랑스럽고 적극적인 십자가의 선포로서 하나님과 우리 그리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수직적으로 그리고 수평적으로 교차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 님과 사람 사이의 교차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치를 인정하고 높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 리도 이웃에게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꿈을 받아들이고 우 리 안에 있는 가능성을 개발시켜 나아가야 합니다. 어떠한 꿈이든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자발적 으로 험한 십자가를 지는 대가를 지불해야만 합니다. 적극적인 삶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실현하려는 우리는 값비싼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 대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그러면 그 보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위해 아름다운 일을 했다는 자부심입니다. 우리가 면류관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쓰려 고 하면 먼저 겸손의 골짜기를 지나야만 합니다. 요한복음 12장 32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서 들리우면… 모든 사람을 내게 로 이끌겠노라 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영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공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성공하셨습니다. 그러나 교만으로 오해될 수 있었던 것이 십 자가의 수치를 통해서 완전해졌습니다. 희생이 없는 성공이란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이란 없는 법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것을 믿으십니까? 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러나 이 계획을 이루시는 데는 반드시 십자가를 지녀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 십자가는 하나님 의 계획을 이루기 위한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는 성공을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꿈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가 지불해야 할 대가입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계획의 마지막은 성공입니다. 성공이란 우리가 신실되게 자기를 부정하고 희생적인 봉사를 하므로 다른 사람에게 인간의 깊은 의미를 심어 줄 때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샘솟는 보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성공은 항상 이기며 실패하지 않는 것 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성공이란 내가 목표한 것이 예정대로 이루어지는 것 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란 이길 수 있고 질 수도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계획을 성실하게 따른다면 우리는 자신에 대하여 긍지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공입니다. 그러므로 실패할 때도 우리는 긍지를 느낄 수 있 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어떤 이는 나는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고 성공하기보다는 위대한 일을 시도하여 실패하는 쪽을 택할 것입니다 라고 한 말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해 하나님 앞에나 사람에게 부끄러울 것 없이 성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광야의 소리
마 3:1-10 / 송영태 목사
교회가 갱신되어야 한다는 말은 교회가 교회 되고 말씀이 말씀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한번 개혁하고 끝나 버리는 완성된 개혁이 아니라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생명체요 살아 움직이고 있으며 미래를 향하여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갱신의 의지는 한순간 정지될 수가 없는 법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몸에 가시가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이 가시가 있음으로 인하여 항상 자기의 교만을 꺾는 무기로 사용했던 것처럼 우리 개신교가 개혁주의 교회라 함은 바로 이와 같은 가시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개신교의 가시는 바로 "자기 비판"의 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냉정하고 정확하게 판단하는 능력이 바로 성령께서 교회 위에 허락하신 커다란 은사임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처럼 세계적으로 부흥한 이 마당에 무슨 갱신이 필요한가 하는 자기당착은 금물입니다. 그러한 무비판과 안일한 사고가 오늘날 교회가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으며 성장이 멈추어져 있는 상황이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갱신할 것이 없다고 하는 사고 방식은 바꿔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갱신의 의식화 작업이 가장 절실히 요청되는 시대에 살고 있고 갱신에 따른 철저한 진단과 그에 따른 책임적인 결단을 서둘러야할 순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사실 갱신의 함성은 옛날부터 끊임없이 들려오던 것이었습니다. 기라성 같은 구약의 예언자들의 폭포 같은 음성이 바로 갱신의 소리였습니다. 다윗 왕의 간음죄와 살인죄에 대하여서는 나단 선지가 외쳤으며, 아합 왕의 독재적인 횡포에 대하여서는 엘리야가 외쳤습니다.
여로보암의 물질주의와 군국주의에 대하여서는 아모스가 빗발치듯 외쳤으며 아하스 왕의 사대주의적인 정치에 대하여서는 이사야가 외쳤습니다.
여호야긴 왕의 숙명론에 대하여서는 예레미야가 눈물로 외쳤던 사실을 보게 됩니다. 이러다가 구약과 신약사이에 우리는 저 중간사라고 하는 370년간의 침묵의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구약의 마지막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이후에 세례요한까지 약 400년간의 침묵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예언자들의 함성이 그리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그 약 400년간의 침묵을 갑자기 깨뜨리고 광야에서 메아리치는 우렁찬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게 바로 세례요한의 광야의 소리였습니다. 30년 동안 갈고 닦은 광야의 전생애를 한마디 소리로 증발시켜 버린 사나이였습니다. 그 광야의 소리 중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신들메를 풀 자격도 없다"는 소리였습니다. 아마 익은 곡식은 고개를 숙이기 때문에 이런 소리가 나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세례요한의 소리 가운데 이런 말도 있습니다. 요3:29절에 보면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나는 신랑의 들러리다"는 뜻입니다. 결혼식이 끝나면 들러리는 소용없듯이 이 소리도 그리스도를 소개하고는 조용히 사라지겠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세례요한의 소리 가운데 요3:30절 말씀에 보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합니다.
요즈음에 가치관은 어떻습니까? 네가 망하고 내가 흥해야만 하는 요즈음과는 근본적으로 다른데가 있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됩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우리는 내가 높아져야하고, 사람들이 나를 알아줘야 하는 것 때문에 갈등이 있습니다. 마음에 불편함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진정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이 귀하고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모든 것들이 은혜일 따름입니다.
지금에 시대를 은혜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음란과 강포와 체포와 기근과 무질서의 소리만이 귀아프게 들려오는 이 강산에 정말로 소리 같은 소리에는 허기가 날 정도로 굶주리고 있습니다. 침묵의 소리만이 부풀어 있는 중간사를 맞이하고 있는 듯 싶은 시대입니다.
이따금 때에 따라 늦가을 모기소리 같은 미세한 음성이 귓전에 들리는가 싶지만 그것도 방음 장치가 잘 된 나라이기에 그것마저도 삼켜버리고 말았습니다.
검찰의 독립이 없기에 가장 양심적 이어야할 검찰들이 권력에 눈치를 봅니다. 정치권에서 이리 치고 저리 쳐도 할 말이 없습니다. 스스로 귀를 막고 있습니다. 젊은 피가 있는 젊은 검사들의 소리가 묻혀 버리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한국 교회의 강단도 허약해졌습니다. 너무 교인들 아픈 곳을 긁어 주기만 합니다. 고름이 살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부를 째서 고름과 피를 짜내야 하는데 그저 덮어주기에 급급합니다.
때문에 신자의 신앙이 허약합니다. 조그만 시험과 환란에도 넘어집니다. 쓰러집니다. 교회를 떠나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 옛날 400년의 침묵을 깨뜨리고 홀연히 광야에 메아리친 세례요한의 소리를 오늘 함께 묵상하며 6月은 특별히 국가적으로 더욱 깊이 나라를 생각하며 기도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신앙의 모습도 살펴보는 귀한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첫 번째, 세례요한이 당시 군중들에게 외쳤던 소리입니다.
눅3:7절 이하의 말씀에 보면 "독사의 종류들아 누가 너희를 하나님의 진노에서 피하라 하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보이라 이미 도끼는 나무 뿌리에 놓여 있다. 좋은 열매 안 맺는 나무는 다 찍어 불에 던지리라 옷 두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누어 주라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하라"
성도여러분!
남들은 아무 것도 없는데 혼자만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이걸 축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은행에 수 십억 내지 수 백억을 저축해 놓고 토지에 수만평을 묻어 놓고 수십 억대 최호화판 저택과 이태리 침대에서 기지개를 펴고 일어나 프랑스 향수를 몸에 뿌린 뒤에 상어지느러미로 입맛을 돋우고 외제 승용차를 타고 헬스클럽을 찾아 나서는 특권층 여인들이 오늘 정녕 세례요한의 설교를 들어야할 것입니다.
눅16:19절 이하에 보면 한 부자가 자색 옷과 고운 배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잔치하며 지낼 때 "나사로"라 이름한 거지는 온몸에 종기가 나고 터져서 고름이 줄줄 흐르는 몰골로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굶주린 창자를 채우려고 합니다. 두 사람 다 죽어, 거지는 아브라함 품에 안겨서 천국에 가고, 부자는 음부에서 고생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불꽃 가운데 고민하는 부자가 물방울을 찍어 내 혀를 적셔달라고 부탁하는데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부자야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으로 마음껏 누리고 살았는데, 그것을 가지고 너! 자신만을 위해서 썼다는 것입니다. 나누질 못한 것에 대한 준엄한 심판의 소리를 우리는 들어야합니다.
둘째, 관리들에게 외치는 소리를 들어 보겠습니다.
눅3:12절 말씀에 보면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며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고 하십니다. "법에 정해있는 것 밖에는 딴 것을 받아먹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 시대는 산에 가면 이리가 있고 들에 오면 세리가 있다는 속담이 유행하던 시대였습니다. 당시의 최고의 매국노가 바로 세리들이었습니다. 세금을 징수하되 서너 배를 착취해야 수지 맞는 시대였습니다.
6-70년대 故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공무원, 경찰 등 월급을 최소화 해놓고 월급만 가지고는 살수 없는 계층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유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착취하고 뜯어먹는 인간 좀벌레를 키우는 온상을 정책적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 여파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자격증을 남발하다 덜미잡힌 교육공무원들, 감투는 경제적 치부와 직결되어 있는 현실과 교회에서조차 많은 헌금을 하는 신자가 좋은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판단하며, 교회의 신앙 좋은 처녀들조차 좋은 신랑감은 많은 재산과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으로 직결되어 인정하며, 부자만을 골라 다니면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정당화하는 성직자들이 있으며,
암 환자에게 기도한번 해주고 5천만원을 요구하는 타락한 목사가 있는가 하며, 하나님께로 거저 받은 신유의 은사를 치부의 수단으로 삼는 기도원 원장들이나 목회자들이 있다면,
분명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외쳤던 "화 있을 찐저!"라는 저주가 임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개국이래 가장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부가 백성들의 신뢰를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의 아들들의 비리로 시작한 부패의 사실은 정치권과 고위 공무원 그리고 국가정보원과 검찰까지 어느 곳 하나 연루되지 않은 곳이 없을 지경입니다.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부도덕한 사건들과 미신을 조정하는 정부는 단군 우상화 작업과 은연중에 기독교 탄압으로 교회 재단에까지 세금을 징수하겠다고 입법 추진되어 있습니다. "법에 정해진 것 밖에는 딴 것을 받아먹지 말라"는 것이 세례요한의 외침입니다.
지난 월요일 40년간을 건설교통부에서 근무하시다 정년 퇴임하신 한 장로님께서 토지신학에 대한 강의를 하시면서 자신은 37년간을 3급 공무원으로 계시다가 퇴임하셨다는 신선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셋째, 군인들에게 외치는 광야의 소리입니다.
눅3:14절에 보면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고 하십니다.
즉 "사람들에게 강포하지 말고 사실 무근한 것으로 송사하지 말고 받는 급료로 족한 줄로 알아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막강한 로마 병사와 그 권력에 붙어 횡포를 부리던 유대인 군인들을 향하여 삿대질을 할 수 있었던 세례요한이 요즈음은 없는 것일까요?
핵무기로 중무장한 오늘의 군사력을 향하여 맨 주먹으로 찾아가 아닌 것은 아니라고 대답하게 외칠 수 있는 현대판 세례요한이 그립습니다.
부귀영화의 심볼이요 군사력의 상징적인 존재였던 다윗 왕은 침상이 다 젖도록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하였던 나단 선지의 그 대담한 힘은 과연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애당초 미국의 막강한 힘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작금의 현실을 보면서 과연 우리는 언제 자주의 힘으로 민족의 문제를 풀어갈 수 있을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한국 공군의 전투기 구입문제도 결국 미국정부의 입김 때문에 미국 F-15기로 결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갔습니다. 한국 공군 장교들 가운데서 늦가을 모기소리 같은 미세한 소리를 외쳤던 사람들은 다수의 권력의 힘 앞에서 억울하게 감옥으로 가야하는 현실입니다. 군인은 군인의 위치에 족한 줄로 알라고 외치던 세례요한이 소리는 지금도 외쳐져야합니다.
쟁반에다 자기 목을 바쳐 들고 헤롯의 궁궐을 향하여 불의를 규탄하던 세례요한의 음성이 그립습니다.
넷째, 통치자를 향하여 외치는 광야의 소리입니다.
막6:18절 말씀에 보면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고 하십니다.
내용인즉 당시의 최고 통치자 헤롯 안디바가 자기의 제수 헤로디아를 아내로 삼기 위해서 동생 빌립 왕을 죽이는 짓을 저질렀습니다. 이러한 불륜을 저지르는 것을 어느 누구도 꾸짖는 이가 없었는데 기어이 그 일을 세례요한이 해내고야 말았습니다. 헤롯의 가장 아픈 곳을 찔렀습니다.
그러자 막바지에 이르러 이것을 규탄한 세례요한을 헤롯왕은 사해 근방 마키러스 산성 토굴에 부자유의 몸으로 깊숙이 가두어 버렸습니다. 더 이상 세상에 떠들고 다니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최고의 통치자를 꾸짖기는 지극히도 위험한 일이었지만 진리 하나로 사는 사람은 비록 그의 목이 잘려나가 쟁반에 올라앉는 한이 있어도 외쳐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보세요! 결국 승리한 것은 헤롯이 아니라 잘려진 세례요한의 목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플라톤은 말하길 "지혜 있는 자는 부정보다 죽음을 택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해롯 대왕이 세례요한을 가두기는 했으나 그의 소리는 가둘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도덕적인 진리의 함성은 그가 갇힌 토굴을 슬며시 빠져 나와 유령처럼 광야를 메아리치며 사람들의 입에서 입을 통해 헤롯을 닮은 오늘날의 권력을 가진 자와 통치자들을 향하여 계속해서 규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권력이란 무엇입니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려야 한다고 주님께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에 입각해서 분명 권력은 가이사의 것입니다. 그러나 이 권력이 타락해서 백성을 괴롭게 하고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도구로 전락되어 버렸을 때도 교회는 그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그대로 보고만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성도여러분!
교회는 백성과 더불어 함께 백성을 위한 존재이므로 타락한 권력이 나를 누르고 나를 착취하는 수단으로 전락했을 때에는 그 피해를 극소화하기 위해 교회는 역할차원이 전개되어야 할 것입니다.
권력이란 것은 누구나 갖고 싶어하는 인간 본능에 속하며 그 권력은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어지는 아주 못된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번 권력에 맛을 들이면 끝장을 볼 때까지 무한히 갖고 싶어지는 것이므로 권력을 갖는 순간부터 벌써 부패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를 숙명처럼 안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세례요한은 반대로 악을 무섭게 규탄했습니다. 왕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바리새인, 서기관도 거침없이 비난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예언자적인 광야의 소리를 잃어 버렸을 때에는 그야말로 이빨 없는 사자나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회개 없는 용서, 교회 훈련 없는 세례, 신앙고백 없는 성만찬, 십자가 고통 없는 은혜를 남발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삐뚤어진 벽이 무너져 큰 상처를 입기 전에 처음부터 벽돌을 한 장 한 장 다시 쌓아 올리는 대 수술의 역사를 전개해야 하겠습니다.
인간이 만든 우상 중에 가장 큰 우상은 "정치"라는 우상입니다. 정치가 회개한다는 것은 그 구조적 성격 때문에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부정부패를 정당화하고 아집에서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때문에 6월달은 온 이 땅에 그리스도인들이 미스바에 모여 정치를 대신하여 회개 운동이 일어나야 하며 부정부패들을 몰아내기 위해서 회개의 미스바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해야할 것들이 무엇일까요?
첫째, 가진 것을 나누지 못하고 빈익빈, 부익부를 회개합시다.
둘째, 미신을 조장한 일과 인권 부제를 회개합시다.
셋째, 권력형 부정 축제를 회개합시다.
넷째, 진실을 은폐한 죄를 회개합시다.
다섯째, 독재를 가능케 하고, 권력에 아첨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백성들의 수준이 저급하면 정치적 수준도 그만큼 저급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비춰보고 끊임없는 자기 갱신을 시도해야합니다. 나라도, 교회도, 성직자도, 평신도도, 잘못된 부분을 과감하게 수술하는 광야의 소리가 전국에 메아리 치며 회개의 운동이 일어나는 6월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주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마태복음 3:1-12 / 이종철 목사(빛과생명의교회)
대림절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영어로는 Advent라고 하는데 라틴어로 ‘오다’, ‘출현하다’라는 단어에서 유래했습니다. 원래는 로마 황제가 즉위한 후 지방을 순시할 때 사용되었던 용어로 황제의 출현을 His Advent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황제가 오면 황제를 영접하기 위해서 그 지방은 부산을 떱니다. 군대에 다녀온 경험이 있는 남자들은 잘 알 것입니다. 그 부대에 사단장이나 대대장이 방문한다고 하면 정말 난리가 납니다. 온 연병장을 빗질하듯이 쓸고, 정말 부대 내에 먼지 하나 없을 정도로 청소하고 정비를 합니다. 사단장도 이러할 진데 황제가 오면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 지역의 지도자나 사람들은 수십 킬로미터 밖까지 나가서 영접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 바울에게도 이런 영광스러운 영접 행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온갖 고난 끝에 로마 가까이에 이르자 “거기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저자와 삼관까지 맞으러 왔다”고 사도행전은 전합니다. 압비오 저자는 로마에서 65km 떨어졌고, 삼관은 50km 떨어졌습니다. 이 먼 곳까지 로마 성도들이 영접을 나옵니다. 사도 바울에 대한 대단한 환영이었고, 바울에게는 승리의 입성이었습니다.
사람의 경우도 이러한데 이제 곧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대림절은 4주간입니다. 대림절이 시작되면 교회당마다 성탄 장식을 합니다. 한 주간마다 초를 켜기 시작하여 넷째 주에는 촛불 4개를 밝힙니다.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기념하며 그분을 맞으려는 의식입니다. 성탄절과 연말연시가 겹쳐 사람들이 흥분되기 십상이지만 원래는 경건과 침묵 속에서 이 기간을 보냅니다.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해야 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보다 회개하며 죄를 씻는 것입니다. 중요한 손님이 올 때 집안을 청소하듯 하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마음과 행실을 정돈하고 깨끗하게 하는 일입니다. 네 개의 복음서는 공히 예수님의 사역 이전에 세례 요한의 사역을 언급하고 있는데, 세례 요한이 했던 중요한 사역은 메시야가 활동하시기 전에 사람들의 마음을 청소하는 일이었습니다. 마태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3) 지금 주님이 행차하시는데 길이 힘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산은 낮아지고 골짜기는 높아져야 합니다. 길이 구부러져서도 안 되고 거칠어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길은 곧게 펴져야 하고 그 바닥은 평평해져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키기 위해서 그들의 죄를 인정하고 그 죄를 씻는 세례를 행했습니다. 물속에 푹 잠겼다 나옴으로써 그들은 과거의 죄를 씻고 과거의 자기는 죽고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맞이하기 위해 목욕재계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례라는 것이 사실은 이방인들에게 주로 행하던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유대민족으로 개종할 때 행해야 될 것이 세 가지가 있었는데 할례와 세례와 성전에서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자신들이 이방인과 같이 죄 많고 더러운 존재임을 인정하는 행동입니다. 세례가 상징하는 것은 회개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를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2)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8)
주님을 맞는데 다른 무엇보다 회개 하나면 충분합니다. 회개라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영향력 있는지 모릅니다. G. F. 무어는 “회개는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의 회복에 유일하고 불가결의 조건이며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가 참된 회개자에게는 결코 거절되지 아니 한다.”라고 말씀합니다. C. G. 몬테피오레는 “회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위대한 화해의 증서”라고 말합니다. 유대의 한 랍비는 “죄를 회개하는 자는 크도다. 그가 세계의 상처를 고칠 것이며, 죄를 회개하는 자는 크도다 그가 영광의 왕좌에 이를 것이다.”고 역설합니다. 회개에 대한 예찬은 유대인들의 창조론에서도 빛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이 위대성을 강조하기 위해 율법은 만물이 창조되기 2천 년 전에 창조되었다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회개라는 것은 율법이 창조되기 이전에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창조 이전에 창조된 것들이 6개가 있는데 회개, 낙원, 지옥, 하나님의 영광스런 보좌, 천상의 성전, 메시야의 이름 등입니다.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율법보다 먼저입니다.
그러니 회개라는 것이 하나님께 나아가기에 얼마나 좋은 수단입니까? 유대의 한 랍비는 “사람은 활을 가지고 불과 200미터 정도밖에 쏘지 못하나 회개는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이른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 것은 회개뿐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공적을 자랑하는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세리의 겸손한 회개의 기도가 하나님께 열납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세리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 하나님께 나아가는 우리의 기도도 이러해야 할 것입니다. 중세 시대에 유행했고, 또 정교회에서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예수 기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란 짧은 기도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회개라는 말의 원래 뜻은 ‘돌이키다’입니다. 죄로 향하던 길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대림절을 맞으며 우리가 회개해야 할 것들이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불안하고 염려했던 우리의 불신앙을 회개합시다. 우리의 게으름과 나태함을 회개합시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자기 이기적으로 살아온 것에 대해서 회개합시다. 하나님보다는 물질과 권력과 힘과 사람을 의지했던 것을 회개합시다. 우리가 죄에서 돌이켜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실 수 있습니다. 철저히 돌이킨 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한 나라와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 곧 철저히 돌이켜야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한나라의 회개는 과거청산입니다. 과거의 구태와 잘못을 반성하고 뿌리 뽑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근대 역사에서 우리 민족에게 두 번의 회개의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철저히 돌이키지 못했습니다. 하나는 친일잔재의 청산입니다. 해방과 더불어 친일 부역했던 세력을 일소하고 친일 문화를 청산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일제시대에 부와 권력을 누리던 자들이 해방된 나라에서도 여전히 그 권력을 누렸고, 모든 것을 내어놓고 싸웠던 독립군들은 해방된 나라에서도 오히려 피해 다녀야 하고 가난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정반대였습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세력이 – 이들은 철저히 하나님 말씀으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이런 이들을 ‘골라’라고 불렀습니다 – 이 ‘골라’가 그 땅에 거주했던 혼합토착세력을 몰아내고 유대교 개혁의 주력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철저한 개혁과 독립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또 한 번을 저는 1987년도의 민주화 항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87년 체제를 기점으로 독재와 반민주적인 악습들과 철저히 결별하여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분열과 지방색의 기승으로 독재세력과 민주세력이 구분 없이 혼합되어 버렸습니다. 그 결과 여전히 우리는 언론 통제, 권위주의와 권력 전횡, 거짓과 불법, 자본의 횡포 등과 맞서 싸워야 하는 형편이 되어버렸습니다. 철저한 회개, 곧 돌이킴이 없이는 민족의 평화와 발전을 기약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앞에는 통일이라는 또 한 번의 민족사적 전환의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이 귀한 선물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에 합당한 회개의 과정을 거처야 합니다. 지금처럼 형제의식도 없고, 사랑과 나눔, 정의와 민주를 배우지 못한다면 그 길은 요원할 것이며, 설사 어떻게 통일이 이루어진다 하여도 그 후유증은 만만찮을 것입니다. 철저히 회개하는 자나 민족에게 하나님은 그 축복의 손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
회개는 말로만 그쳐서는 안 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8)고 외치고 있습니다. 요나서에 보게 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기로 했던 니느웨를 용서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은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욘3:10) 하나님은 결코 니느웨 백성이 삼베 옷을 입은 것이나 금식하는 것을 보고 심판을 면하게 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곧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은 것을 보시고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말로만 회개하고 실제적으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유대의 한 랍비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만일 사람이 불결한 것을 손에 쥐고 있다면 전 세계 모든 바다를 돌아다니며 씻어도 결코 정결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그 불결한 것을 내던져 버린다면 소량의 물이라도 충분할 것이다.” 이 사람은 말로만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실상 자기 손에 있는 가장 더러운 것을 버리기 아까워하기 때문에 그 회개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반복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 한국 교회가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회개한다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까? 2천 년대 들어와서 대형 집회 때마다 단골처럼 등장했던 것이 바로 이 회개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회개의 합당한 열매는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쇠퇴하는 것 같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회개한다는 말도 식상한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자기 손에 더러운 것을 놓지 못하고 입술로만 회개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손 안에 있는 권력과 물질, 이것은 가장 유혹적이면서도 또 우리를 결정적으로 타락시키는 것인데 이것을 놓지 못합니다. 그러니 아무리 회개한다고 해보았자 깨끗해지질 않습니다. 이 땅에서 영광을 취하면 저 천국에서는 설 자리가 없다고 경고하여도 그때뿐입니다. 그 손에 있는 권력과 물질을 놓지 못하면 이 세상의 모든 물을 동원해도 우리 더러움을 씻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답은 십자가에 있습니다. 십자가의 가난함, 무력함, 겸손함, 거룩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렇게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을 맞을 수 없고, 예수님이 우리를 맞이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 손 안에 우리를 더럽게 만드는 욕망과 권력의 덩어리가 있는데 아무리 회개한다한들 되겠습니까? 한국교회가 이것을 내려놓지 않는 이상 아무리 회개한다고 하여도 그 회개는 불완전할 것입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의 모습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다음과 같이 이사야서를 들며 아홉 가지를 언급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며,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1:16-17) 이 안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의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특별히 이웃에 대한 관계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랍비의 말입니다. “하늘과 이웃에 대하여 선한 자는 선한 의인이다. 하늘을 향해서는 선하나 이웃에 대해서는 선하지 못한 자는 나쁜 의인이다. 하늘과 이웃에 대하여 악한 자는 나쁜 죄인이다. 하늘에 대해서는 악하나 이웃에 대해서는 악하지 않은 사람은 나쁜 죄인은 아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회개한 자는 과거의 자기 죄에 대해서 단호해야 합니다. 회개한 자의 모습을 유대 랍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허물을 보상하고서 사죄를 구했을 때에 용서되는 것이다. 진정하게 회개하는 자는 같은 죄를 같은 환경에서 다시 범할 기회가 되어도 그 죄를 범하지 않는 자이다.” 피해자에게 적절한 보상을 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 다시는 그런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물론 회개하고 싶어도 인간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할 수밖에 없고 우리 아버지 되신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그런 연약함을 이해하고 우리를 돕기 원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돌아오라 그러면 그 나머지 길은 내가 갈 것이다.” 탕자가 돌아올 때 그 아버지가 어떻게 했습니까?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15:20) 탕자는 죄송스러워 쭈뼛쭈뼛 걸어오는데 아버지는 버선발로 달려갑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회개가 진실되다면 그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보다 우리에게 성령을 부으시는 분입니다.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11) 물은 씻고 나면 사라집니다. 마르고 나면 원상태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불은 변화를 일으킵니다. 우리는 약하여 또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의 불을 주셔서 죄를 태우고 죄를 이길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성령의 불이 임하면 세상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만드십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열정입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 때문에 하나님과 진리에 대한 열정이 부족합니다. 성령은 이 열정을 일으킵니다. 성령을 주셔서 우리가 다시는 죄를 기억지도 않고, 죄를 기뻐하지도 않고, 죄보다는 의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만드십니다. 그래야 온전한 회개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회개의 열매는 ‘맺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처럼 ‘맺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우리 민족에게도 하나님께서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성령의 불을 우리 국민들에게 부어주시길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국민들의 마음에 불을 지펴야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거짓과 불의에서 정의의 길로, 이기적이며 물질중심적인 데서 사랑하며 나누며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랑의 길로, 폭력과 분열과 갈등에서 평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각 사람들이 노력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정의의 영, 사랑의 영, 평화의 영을 부어주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능히 이 돌들로도
또한 우리가 가져야 할 중요한 마음의 자세는 은혜의식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황제나 어떤 위대한 영웅이 우리 지역을 방문해도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 세계를 방문했습니다. 지구라는 이 땅을 방문하셨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메시야의 방문을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는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잘 아는 세례 요한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11) 나는 예수님의 종이 될 자격도 없다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또 한편 우리는 두려워도 해야 합니다. 10절입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지금 농부의 손에 도끼가 들려 있습니다. 열매는 없고 땅만 해치는 나무를 찍어 버리기 위해서입니다. 12절입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이것은 타작마당의 그림입니다. 한쪽에서는 알곡을 모아 곡간에 들이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쭉정이를 모아서 불에 태우고 있습니다. 지금은 기회의 때입니다. 지금은 돌이켜도 늦지 않습니다. 그러나 머뭇머뭇하다가는 그 기회를 잃고 말 것입니다. 민족의 운명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실 때 바꾸어 가야지 과거의 구태를 반복하다간 언제 도끼에 찍히고 불에 태워질지 알 수 없습니다.
초림 때 오셨던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품에 안으시고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자비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님은 그 입에서 말씀의 검이 나오고, 타작마당에서 쭉정이 걸러내 불에 태우는 심판자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대림절을 맞으며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설렘도 있지만 다른 한 편 두려움도 있습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손에 쥔 자는 기쁨으로 기다릴 것이지만, 손에 아무런 열매가 없거나 아름답지 못한 열매들이라면 그 기다림은 두려움일 것입니다. 모두 기쁨으로 하나님을 맞는 대림절이 되시길 바랍니다.
성령 충만한 가정
마 3:1-12 / 김필곤 목사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도둑이 있었답니다. 도둑질하여 부자가 되어 자식을 낳아 아내와 함께 해외 여행도 다니고 좋은 차도 타고 다니며 자기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중병에 걸렸답니다. 중병에 걸렸는데 그래도 의리가 있는 아내가 끝까지 자신 곁을 떠나지 않고 간호를 해 주었답니다. 그래서 죽기 직전 너무 고마워 도둑이 아내에게 유언을 남겼답니다. “여보, 평생 애만 먹였는데 이렇게 곁에 있어주어서 고맙소. 그래서 당신한테 주먹만 한 루비 하나 남기고 가리다.” 이 말을 들은 아내가 대번에 “어디에 놔뒀지?”라며 물었답니다. “아, 옆 동네 강 회장 집 안방에 장롱이 있는데 거기 세 번째 서랍에 들어 있소.”라고 말하며 죽었답니다. 세상은 정직한 사람들이 잘 살고 도둑놈들, 악당들, 나쁜 놈들이 잘 못 살아야 하는데 때로는 그런 사람들이 더 잘 사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날 때도 그랬습니다. 당시 최고 통치자는 헤롯 대왕이었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대단한 토건 사업을 하여 46년간에 걸쳐 예루살렘 성전을 지었습니다. 토목 사업을 벌려 성채와 수로, 극장, 공공 건축물을 세웠습니다. 경제도 부흥하고 영토도 확장하고 유대 나라에 평화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약점이 있었습니다.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혈통이 순순 유대인이 아니라 부계나 모계나 다 이방인이었습니다. 유대인이 아닌 개종한 이두메 출신이었습니다. 아주 폭력적이었습니다. 권력의지가 강했습니다. 자신의 고모부를 처형한 김정은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베들레헴에서 2살 이하의 아이들을 죽인 것처럼 성격이 아주 잔인하였습니다. 32년 동안 통치하였는데 10명의 아내를 두었으나 정적으로 의심되는 아내와 장모, 동서 등 관계된 인물 45명과 함께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왕자 3명과 측근들을 처형하고 재산까지 몰수해 버렸습니다. 이런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새 시대가 오기를 간절히 고대합니다. 세상 확 뒤엎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게 됩니다. 그 정의로운 통치를 하는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신분제도가 철폐되는 사회, 경제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 악이 징계받고 정의가 승리하는 사회를 꿈꾸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메시아이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메시아는 오시지 않고 그가 병들어 죽자 세 아들이 땅을 나누어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활동하던 갈릴리 지방을 통치한 왕은 셋째 부인의 소생인 헤롯 빌립 1세였습니다. 약 40여년 동안 그 지역을 통치한 인물입니다. 백성들은 외국 물을 먹은 아들이니 그래도 개방적이고 인간적일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릴 때 일종의 인질로 로마에 잡혀 로마에서 자라며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기대를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닮아 부도덕하고 잔인한 왕이었습니다. 로마로 가다가 배다른 동생 집에 갔는데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가 너무 아름다운 것입니다. 벌써 살로메라는 딸이 있는데도 서로 눈이 맞아 전처와 이혼하고 제수씨와 결혼하나 것입니다. 원래 조카였습니다. 그런데 삼촌이 조카인 동생의 아내와 살게 된 것입니다. 콩가루 집안이 된 것입니다. 그 범죄는 율법에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레 18:16, 20:21), 인륜에도 위배되는 파렴치한 범죄였습니다. 부당하게 이혼하고, 근친상간을 하니까 백성들이 수군거리는 것입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최고 통치자가 명백하게 법을 어긴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부소불의의 절대 권력 앞에 아무도 대놓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이 때 한 의로운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아주 담대하게 최고 권력자의 잘못을 지적하였습니다. 바로 그가 세례 요한입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정통 제사장 출신의 집안사람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기 6개월 전에 탄생하여 예수님을 예비한 사람이 있습니다. 한 시대 행복하게 살면서 위대한 일을 한 세례 요한의 가정의 원동력은 무엇이었겠습니까? 담대하게 최고 권력자의 잘못을 지적하며 백성들을 올바른 길로 살길을 가르쳐주었던 세례 요한의 가정의 특징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인 특징이 성령 충만한 가정입니다. 성령에 이끌이는 가정이었습니다. 성령에 지배받는 가정이었습니다. 성경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사가랴는 어떠했습니까? 누가복음 1장 67절을 찾아 밑줄을 그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눅1:67)” 어머니가 엘리사벳인데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41절 말씀입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눅1:41)” 성령 충만한 부모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세례 요한입니다. 요한은 어떠했을까요? 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눅1:15)” 성령 충만에 밑줄을 그러 보시기 바랍니다. 아버지도 성령 충만, 어머니도 성령 충만, 아들도 성령 충만한 가정입니다. 우리 가정도 요한의 가정처럼 성령 충만한 가정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도 권력의 횡포에도 불구하고 정의롭게 살고, 부도덕한 사회 환경으로부터 거룩한 삶을 유지하려면 무엇보다 가정의 성령 충만이 필요합니다. 세례 요한의 가정은 예수님의 초림을 예비하는 가정으로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았는데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예비하며 사는 가정으로 역시 성령 충만한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가정은 성령 충만한 가장이었는데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은 성령 충만한 가정에서 자란 그리고 자신도 성령 충만한 삶을 산 세례 요한의 삶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1. 우리 가정은 성령 충만하여 사역의 열매가 풍성하게 열리는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야 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부패하고 부도덕한 절대 권력 앞에 새로운 세상을 외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최고 통치자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할 일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침묵하고 머리 좋은 이기주의자들은 이인직이나 이완용처럼 야합합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담대하게 개혁을 부르짖습니다. 새로운 세상, 하나님의 정의가 통치되는 세상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3절은 보십시오. 그런데 그 사실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말 3:1)”라고 예언해 놓았습니다. 그 선지자가 올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부어 주신다고 했는데(욜2:28) 바로 세례 요한은 성령 충만한 선지자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세례 요한은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일생을 두고 한 주 사역이 무엇입니까? 큰 교회 이루어 은퇴금 200억 받는 것입니까? 자식에게 교회를 상속하는 것입니까? 신문사 만들어 주고 학교 만들어 주어 대대로 잘 먹고 잘살게 하는 것입니까? 회개를 촉구함으로 주의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주인공이신 예수님께 가는 길을 내는 것입니다. 살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왕되신 주님이 갈 수 있도록 길을 곧게 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치면서 예수님의 사역을 예비하는 일입니다. 성령 충만한 세례 요한은 이 일을 어떻게 감당하였습니까? 자신에게 맡겨진 사역을 성공적으로 감당하였습니다.
(1)양적으로 성공적이었습니다. 5절 보십시오.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왔다고 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요한이 설교를 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말입니다. 사업을 하는데 많은 고용창출을 하였습니다.
(2)시간적으로 성공한 것입니다. 여기서 나왔다는 말은 계속 나왔다는 말입니다. 한 번 나오고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하여 백성들이 요한에게 나왔습니다.
(3)질적으로 성공한 것입니다. 그들이 모여 무엇을 하였습니까? 6절 보십시오. 자기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질적인 변화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4)모든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겼습니다.
"그러면 사람으로부터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하는지라(막11:32)"
(5)예수님을 메시아로 소개하고 사람들은 예수님께 이끌었습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
안드레가 바로 세례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좇았고 베드로를 전도하였습니다.
요한을 따르던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 예수님께 갔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요3:26)"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성공적으로 감당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비결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세례 요한이 성령 충만하였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도 세례 요한처럼 성령 충만하여 한 평생 맡겨준 일을 성공적으로 감당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이 시대 우리가 우리에게 맡겨준 사명을 성공적으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힘으로 능으로 못하지만 성령의 능력이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4:6)”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성도님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입니까? 공부입니까? 예술입니까? 운동입니까? 사업입니까? 직장입니까? 전도입니까? 양육입니까? 내 힘으로 안 된다고 좌절하지 말고 성령 충만하여 풍성한 사역의 열매를 맺혀야 합니다. 성령 충만하여 사역의 풍성한 열매가 있는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야 합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성령의 충만을 받자 사람이 할 수 없는 기적을 일으켜 사명을 완수합니다. 브사렐이 성령에 충만하여 당시까지 한 번도 만들어 보지 않은 성막을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충만히 임하니까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를 발휘하여 성막을 짓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가 되어 안수를 받을 때 지혜의 영이 그에게 충만히 임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령 충만하여 백성들을 다스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그의 말을 순종하였습니다(신 34:9)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죽음의 두려움을 물리치고 순교하며 사명을 이루어 드렸습니다(사도행전 6:5절 행7:55) 사도바울은 성령 충만하여 엘루마의 본성을 알았고 그를 꾸짖은 결과 엘루마는 소경이 되어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행13:9) 인식의 한계를 초월하게 합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성령 충만한 바울은 아시아에서 전도하고자 했으나 성령께서 허락하지 않으시자 성령의 인도에 따라 마게도냐로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성령 충만하여 바른 방법으로 사역을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1:24의 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여 육신의 욕망을 물리치고 성령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힘없다고 인식의 한계, 능력의 한계 앞에서 좌절하지 말고 기도하여 성령 충만을 받아 주어진 사명을 다 이루어 드리는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령 충만하여 재림하실 예수님을 예비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2. 우리 가정은 성령 충만하여 도덕적으로 거룩한 삶을 사는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세례 요한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1)그는 생활이 검소했습니다. 성경 4절을 보십시오. 약대 털옷을 입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돌꿀)을 먹고 살아갑니다. 부패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검소하게 살아갑니다. 끝없는 욕심의 노예가 되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통제를 받으면 절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의 통제에서 벗어나니까 욕심의 노예가 됩니다. 호화 호식하지 않았습니다. 인기 있는 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얼마든지 부하게 살 수 있는 여건이 됩니다. 지금 말하면 3만명, 10만명 교인이 출석하는 목회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2)그는 사생활이 깨끗합니다. 파리의 여인이 있지 않았습니다. 명예와 부를 위해, 인기를 위해 일하지 않았습니다. 청렴결백하였습니다. 그는 술 취하고 방탕하지 않았습니다. 눅1:15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눅 1:15)"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않았습니다.
(3)자신이 흠잡혀 매도될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권력 앞에서 비굴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헤롯이 왕이었습니다. 그는 포악한 왕이었습니다. 동생의 아내를 빼앗았습니다.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막 6:18)" 헤롯이 얼마나 요한을 죽이려고 했겠습니까? 권력자들이 자신의 부당한 권력을 합리화하기 위해 쓸 수 있는 방법은 상대를 매도하는 것입니다. 김정은이가 자신의 고모부를 처형하기 위해 개방주의 자, 부정부패 주의 자라를 딱지를 붙입니다. 우리나라는 용공, 종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매도하였습니까?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자신의 허물을 감추기 위해 검찰총장의 사생활을 뒤집니다. 자신의 조상의 허물을 덥고 자신의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교과서를 바꿉니다. 종교인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정보기관을 통해 종교인의 허물을 들추어냅니다. 헤롯도 얼마나 요한의 제거하기 위해 그의 사생활을 조사했겠습니까? 그런 그는 깨끗하였습니다. 포악한 군주이지만 세례요한을 두려워했습니다. 막6:20절을 보십시오.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막6:20)"
우리는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을 삶으로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야 합니다. 아무리 오염되고 더러운 세상일지라도 성령 충만하면 도덕적으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자살론(自殺論)]으로 유명한 듀르켕은 욕망을 억제시키는 공통의 가치와 도덕 기준을 상실한 혼란 상태를 아노미 현상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도시화, 기계화, 핵가족화 등 근대화 과정이 빚어낸 자기중심적인 욕망으로 머리통만 크고 이 욕망을 자제하는 도덕적 가슴은 새가슴만큼 작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웃을 모릅니다. 인간된 참 가치를 모릅니다. 도덕적 기준을 상실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상대화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거룩성을 유지하려면 다른 비결이 없습니다. 성령 충만입니다. 오늘날 도덕적 위기의 특징인 선정성(음란성), 폭력성, 사기성으로부터 보호받으려면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해야 사람을 노리개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해야 사람의 생명의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성령 충만해야 음란한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지 못하면 힘센 삼손도 금방 무너집니다. 성냥불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계속 기름을 공급받는 등불이 되어야 세상을 오래도록 밝힐 수 있습니다. 성령의 기름을 공급받아야 마지막까지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돈 충만, 쾌락 충만, 권력 충만, 물질 충만하면 결국 거룩성을 상실합니다. 성령 충만해야 맘몬 숭배자, 돈 숭배자가 되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해야 쾌락 숭배자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혹으로 벗어나 오랜 세월 깊은 산속에 들어가 수도한 수도자가 제자들을 모아 놓고 "우리가 앉아 있는 이 들판에 잡초가 가득하다. 어떻게 하면 잡초를 모두 없앨 수 있느냐?"라고 물었답니다. 제자들은 "삽으로 땅을 갈아엎으면 됩니다." "불로 태워 버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 "뿌리째 뽑아 버리면 됩니다." 그 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답니다. "이것은 마지막 수업이다. 모두 집으로 돌아가서 자신이 말한 대로 마음속의 잡초를 없애 보거라. 만약 잡초를 없애지 못했다면, 일 년 뒤에 다시 이 자리에서 만나기로 하자." 일 년 뒤, 제자들은 무성하게 자란 마음속 잡초 때문에 고민하다가 다시 그곳으로 모였답니다. 그런데 예전에 잡초로 가득했던 들판은 곡식이 가득한 밭으로 바뀌어 있었답니다. 그곳에 가보니 스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이런 글귀가 적힌 팻말 하나만 꽂혀 있었습니다. 『들판의 잡초를 없애는 방법은 딱 한 가지뿐이다. 바로 그 자리에 곡식을 심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속에 자라는 잡초는 성령을 좇아 행할 때 몰아낼 수 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5:16)
오늘 이 시대는 세례 요한처럼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많은 것이 있어도 도덕적으로 거룩하지 못하면 행복한 가정이 아닙니다. 우리 가정이 도덕적으로 거룩한 삶을 사는 비결은 성령 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은 세례 요한의 가정처럼 성령 충만하여 거룩한 사람을 만드는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우리 가정은 성령 충만하여 예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 명예도 얻고 돈도 많이 벌고, 권력도 쌓았고 맡겨진 분야에서 일인자가 되어 도덕적으로 흠없이 살아갔다할지라도 예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행복한 가정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마11:11)
마태복음 11장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마 11:11)" 수많은 선지자들이 메시아 예수님에 대하여 예언을 하였지만 요한은 직접 예수님을 보고 증거하였습니다. 받은바 은혜와 계시에 있어 당시 요한 만큼 명확하게 하나님의 뜻을 헤아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요한은 참으로 큰 자였습니다. 물론 우리는 더 명확하게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오직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세례 요한의 인기가 한참 올라갔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보며 혹 그리스도가 아닌가 의논합니다(눅3:15). 그 때 요한이 뭐라고 합니까?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눅 3:16)"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자신이 메시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주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소개합니까? 예수님은 무명의 사람이고 자신은 인기가 하늘을 치솟을 때입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
나중에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갑니다.(요 3:26) 그 때 요한이 어떻게 합니까? 그들을 저주하고 욕을 퍼부어 대지 않습니다. 배신자라고 낙인찍지 않습니다. 그 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요 3:30)"
그가 예수님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지금 말하면 자신이 안수하여 목사를 세웠습니다. 나이도 많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모든 성도님이 다 그 제자에게 가버렸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고백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는 분명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았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았습니다. 주의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막 1:2)"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요 1:6)" 그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을 분명히 안 사람입니다.
당시 신약 성경이 기록되지도 않았는데 무엇으로 이것이 가능했겠습니까? 성령충만입니다. 성령에 이끌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교만하지 않습니다. 분별력을 잃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않습니다. 성령이 떠나 버리니까 사울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다 망합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한 가정이 되어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며 주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헤롯 왕조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왕은 헤롯이 아니라 예수님이십니다. 김일성이 살아 온 날 수를 계산하여 25550개의 돌로 주체탑을 세우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 김일성 왕조 영원하지 못합니다. 권력도 잠깐입니다. 부모, 명예도, 인기도 지식도, 아름다움도 무한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시대는 '자기 피알(PR) 시대'인데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생존의 문제이고 다른 사람에게 지배당하는 것보다 지배하는 삶을 숭배하고 있는 시대에서 힘만이 최고의 덕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타를 만드는 문화에서 자기선전은 미덕이고, 자기선전 없이 스타가 되기는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과시하고 싶은 욕망이나, 남보다 돋보이고 싶은 감정은 지칠 줄 모르는 자아도취로 일종의 자기 숭배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만은 모든 죄악의 어머니다'라는 표현했습니다. 교만은 죄의 한 특성이라기보다는 죄의 본질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 함으로써 교만을 드러내었습니다. 하나님 보다 높아지려는 영적인 암이 교만입니다. 헤롯처럼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다가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교만은 이 세상에 들어온 첫 번째 죄이지만 그것은 또한 정복되어야 할 마지막 죄이기도 합니다. 교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어떤 인간도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고 어떤 공동체도 건강하게 존속될 수 없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때 왕으로 삼으려는 군중의 인기에 예수님은 영합하지 않았습니다(요6:15). 베드로나 바울도 자기들을 향해서 절을 하거나 경배하려는 스타의 유혹에 빠지지 않았습니다(행10:26,14:15). 그러나 헤롯왕은 자기를 신격화시키는 무리들에게 넘어가 파멸했습니다(행12:22-23).
성경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고 말씀하십니다.
세례 요한은 초림하신 예수님을 예비하면 산 사람이라면 우리는 언젠가 재림하실 예수님을 예비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하겠습니까? 제국 시민이 아니라 천국 시민으로 성령 충만하여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붙들고 그 사명을 다 이루어 드리는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령 충만하여 거룩한 가정을 만들어 하겠습니다. 성령 충만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