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란 텐트
자욱하게 깔린 어둠이 아직 가시지 않은 어느 겨울 아침, 트럭 한 대가 길가에 정차했다.
근처의 전봇대 가로등 아래서 어느 늙은 남자가 차가운 공기 속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담배를 든 굵은 손마디와 이마에 파인 깊은 주름에서 거친 노동의 흔적이 보인다.
트럭의 조수석 창문이 열렸다.
“삼촌, 뭐해? 얼른 타요.”
늙은 남자는 마지막으로 담배를 쭉 빨더니 꽁초를 휙 던졌다. 꽁초는 포물선을 그리며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은 풀숲에 떨어졌다.
트럭으로 향하는 남자의 코와 입에서 하얀 연기가 흘러나와 찬 공기와 섞인다.
남자는 ‘캭’하고 가래를 모으더니 ‘퉤’하고 뱉는다.
트럭 문을 열고 조수석에 올라타자, 천장의 불이 켜졌다.
운전석에 앉은 젊은 남자는 검정 야구 모자를 눌러 쓰고, 두꺼운 검정 패딩을 입고 있었다.
늙은 남자가 히터 앞에서 두 손을 서로 비비다가 데워진 손으로 얼굴을 북북 문지른다.
담배 냄새가 더운 히터 바람을 타고 차 안에 퍼졌다.
젊은 남자는 말없이 차를 출발했다.
늙은 남자는 창을 열어 가래를 한 번 더 뱉어내고는 소매로 입을 닦는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도심의 어느 아파트 단지였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젊은 남자는 패딩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아침 7시가 조금 넘었지만, 아직도 주변이 어둑어둑했다.
⌜주차장에 도착했어요. 준비해서 올라갈게요.⌟
젊은 남자가 어디론가 문자를 보냈다.
“삼촌, 지금은 해체만 하고, 이따 오후에 이사 들어가는 집에 가서 설치하는 거예요.”
“이사 가는 집은 먼가?”
“바로 옆 아파트 단지래요.”
잠시 뒤, 답장이 왔다. ⌜네 오세요.⌟
“가요.”
두 사람은 트럭 화물칸에서 연장들을 챙겨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엘레베이터 안에서 젊은 남자가 말했다.
“여기 2년 전에 우리가 설치한 집이에요.”
“다시 찾아주니 고맙군 그려.”
“대개 이삿짐센터에서 소개해주는 데서 많이들 하는데, 우리가 워낙 일을 잘하잖아요?”
젊은 남자가 히죽 웃었다.
늙은 남자도 따라서 입꼬리가 올라갔다.
현관문이 열리자, 젊은 여자가 맞아주었다.
“죄송해요. 아침 일찍.”
“아니에요. 이따 이삿짐 사람들 몇 시에 온다고요?”
“8시까지 오기로 했어요.”
“그럼 한 시간 안에 작업 마쳐야겠네요.”
거실 한쪽 구석에 스탠드형 에어컨이 보였다.
“벽걸이는 안방에 있나요?”
안방에 들어가니, 남편으로 보이는 사람이 졸린 눈을 비비며 잠옷 바람으로 서 있었다.
꾸벅하고 인사를 하고는 한쪽 벽면에 붙어 있는 에어컨을 확인했다.
단열재로 감긴 배관을 따라 베란다에 설치된 실외기로 향했다.
거실 에어컨과 안방의 벽걸이 에어컨이 한 대의 실외기를 공유하고 있었는데, 안방에서 실외기까지 거리가 멀어 긴 배관이 자칫하면 미관을 해칠 수 있었다.
베란다의 흰색 천장을 따라 깔끔하게 마감된 단열재는 분명 삼촌의 솜씨였다.
“삼촌, 한 시간 안에 끝내야 해요.”
현관에 있던 늙은 남자가 연장통을 들고 실외기 쪽으로 갔다.
젊은 남자는 실외기에 냉매를 모으기 위해 리모콘으로 거실의 에어컨을 동작시켰다.
그 사이, 늙은 남자가 실외기 쪽 단열재를 벗기자 고압 배관과 저압 배관이 드러났다. 저압 배관에 압력 게이지를 물리고, 고압 배관 쪽 밸브를 단단히 잠그니 저압 배관 쪽 게이지의 눈금이 서서히 0으로 떨어졌다. 그는 숫자 0을 확인하고 저압 배관 밸브도 마저 단단히 잠갔다.
늙은 남자는 실외기 해체를 맡았고, 젊은 남자는 에어컨을 철거했다.
두 사람은 묵묵히 작업에만 몰두했다.
어느덧 아침 해가 떠오르자 주변이 밝아왔다.
늙은 남자가 베란다 창밖을 보니 이삿짐센터 차량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단열재 벗겨낸 쓰레기를 거실 한구석에 있는 큰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젊은 남자는 기타 가방처럼 에어컨을 넣어 어깨로 맬 수 있도록 만든 큰 가방에 에어컨을 넣었다.
“철거는 끝났고요. 이사 가는 집이 비어있으면 거기에 미리 갖다 놓을게요.”
거실에서 분주히 짐 정리를 하던 여자에게 젊은 남자가 말했다.
“지금 거기는 비어있어요. 갖다 놓으셔도 돼요.”
“그럼 주소랑 비밀번호 문자로 넣어주세요. 에어컨은 이사에 방해 안 되게 구석에 둘 테니까 이사 끝나면 바로 연락주세요.”
젊은 남자는 스탠드 에어컨이 담긴 가방을 어깨에 메고 현관으로 향했다.
늙은 남자는 실외기, 벽걸이 에어컨, 연장들을 엘레베이터 앞에 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자 젊은 남자는 에어컨이 천장에 닿을세라 허리를 잔뜩 숙이며 탔다. 그가 문을 잡아주고 있는 사이, 늙은 남자는 얼른 남은 짐들을 안으로 옮겼다.
“삼촌, 이것들 갖다 놓고 근처에 해장국이나 먹으러 가죠.”
젊은 남자가 이마의 땀을 훔쳐내며 말했다.
“해장국 좋지.”
늙은 남자의 입꼬리가 올라가자 눈가에 진 주름 옆으로 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젊은 남자는 오후 3시가 넘어서야 이사를 다 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다른 동네의 원룸촌에서 벽걸이 에어컨 설치를 막 마쳤을 때였다.
“삼촌, 아침에 그 집에서 이사 다 했다는데요. 아직 점심도 못 먹었는데, 어쩌죠?”
“내가 얼른 근처 편의점에 가서 빵이랑 우유 좀 사올게.”
늙은 남자가 연장을 트럭에 실으며 말했다.
“날씨도 추운데 라면도요.”
그들은 추운 차 안에서 컵라면과 빵으로 허기를 달랬다.
빈속에 우유가 들어가자 늙은 남자의 뱃속이 꾸르륵거렸다.
둘은 말없이 먹기만 했다.
시계를 보니 6시가 넘어 밖은 이미 어두워졌다.
늙은 남자는 이제 막 에어컨에서 실외기로 이어지는 배관의 단열재 마감을 깔끔하게 끝냈다.
젊은 남자가 냉매를 보충하고 에어컨을 시험 가동하는 것으로 설치가 마무리됐다.
“죄송한데, 혹시 여기 벽에 못도 좀 박아 주실 수 있으세요? 거울 좀 달려고요.”
집주인 여자가 거울과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 여기가 마지막 집이니까, 필요한 거 다 말씀하세요. 못이랑 또 뭐 봐 드릴까요?”
젊은 남자가 늙은 남자에게 손가락으로 지시하며 말했다.
늙은 남자는 말없이 전동 드릴을 들고 시멘트벽에 구멍을 뚫고 앵커를 박았다. 젊은 남자가 진공청소기를 그 밑에 대서 떨어지는 시멘트 가루를 전부 잡았다. 늙은 남자는 입에 물고 있던 나사못을 앵커에 넣고는 거울을 걸었다. 둘의 호흡이 잘 맞으니 일이 금방 끝났다.
이번엔 주방 벽면에 붙은 전기 콘센트 한 개가 안 된다고 해서, 늙은 남자가 콘센트를 뜯어내고는 안에 끊어진 전선을 연결했다.
“우리 삼촌이 예전에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오래 일해서 집고치는 데는 선수예요.”
“이런 것까지 해주시고, 감사합니다.”
집주인 여자가 늙은 남자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늙은 남자는 엉거주춤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받았다.
“에어컨 두 대 철거비랑 설치비하고 냉매 조금 보충한 거 합쳐서 33만원 나왔네요. 여기 계좌번호로 입금해 주시면 됩니다.”
젊은 남자가 주인에게 명함을 건넸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여자가 입금했다고 말했다.
“혹시 현금영수증도 돼요?”
“사모님, 죄송한데요. 저희가 이게 다 일당으로 나가는 거라서 현금영수증은 좀 힘듭니다.”
젊은 남자가 늙은 남자 쪽을 흘끗 쳐다보며 말했다.
“아, 알겠어요.”
“네,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에 필요하실 때 또 연락주세요.”
“오늘 딱 50만원 벌었네요. 맨날 오늘만 같으면 얼마나 좋아.”
엘레베이터 안에서 젊은 남자가 말했다.
“다음 일은 언제지?”
“요즘 비수기라, 주말에 한 건이 있긴 한데. 몇 신지는 이따 수첩을 봐야겠는데.”
“이번 주말엔 안 되는데.”
“아, 그날이에요? 벌써 마지막 주인가?”
“응.”
“알았어요. 그럼 이번 주말엔 나 혼자 하지 뭐.”
“미안.”
“뭘요. 이따가 계좌로 일당 보내드릴게요. 집까지 태워드려요?”
“응, 부탁해.”
엘레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자, 두 사람은 짐을 내려 차에 실었다.
늙은 남자가 차에 타기 전 담배 한 개를 물고 구석진 곳으로 갔다. 그는 깜깜한 하늘을 향해 굴뚝처럼 위로 연기를 뿜었다.
**********
주말이 되자 늙은 남자는 버스를 타고 고향에 갔다.
현재 살고 있는 광역시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어느 작은 군이었다.
어둠이 사방에 낮게 가라앉을 무렵, 그는 버스에서 내렸다.
색 바랜 노란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져 있는 버스터미널은 그가 고향을 떠나던 30년 전부터 시간이 멈춰 있는 듯했다.
그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터미널 옆 시장 골목을 지나 어느 여인숙 앞에 섰다.
낡은 벽에 여러 갈래로 나 있는 금은 마치 늙은이 주름 같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건물보다 더 늙어 보이는 노파가 난로 옆에서 졸고 있었다.
“어머니, 저 왔어요.”
노파는 남자의 말에 잠에서 깬다. 가느다란 실눈으로 남자를 바라봤다.
“응. 이게 누구여? 철구 아녀? 니 엄마 보러 왔냐?”
“내일 가보려고요. 방 하나 주세요.”
“엄마는 좀 워뗘?”
“안 좋아요.”
“이으구, 그노무 여편네. 갈라믄 자식들 고생이나 안혀게 얌전히나 가지. 치매가 뭐여, 지랄맞게시리.”
노파는 남자의 중학교 시절 친구의 어머니다.
고향에서 농사를 짓던 친구는 몇 해 전 술을 마시고 경운기를 몰다가 논두렁에 굴러 떨어져 압사했다.
그날 남자는 노파의 손을 잡고 한참 동안 울었다.
남자는 불도 켜지 않은 컴컴한 방에다 가방을 휙 던지고는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시장 골목 안에서 다른 동창이 하는 소머리국밥 집으로 향했다.
3과 8로 끝나는 날마다 서는 오일장에서 장사꾼들을 상대로 하는 작은 식당이었다.
그가 삐거덕거리는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친구는 텅 빈 홀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왔냐?”
친구가 그에게 곁눈질을 한번 주고는 다시 TV로 눈을 돌렸다.
“...”
그는 아무 말 없이 한 테이블을 잡고 앉았다.
“국밥 하나 줘?”
“소주도.”
친구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친구가 쟁반에 국밥과 밑반찬을 들고 나왔다.
남자가 첫술을 떠먹을 때, 친구는 소주 한 병과 잔 두 개를 들고 왔다.
친구가 두 잔에 소주를 따랐다.
남자는 단숨에 들이켰고, 친구는 자신의 술을 마시기도 전에 남자의 잔을 다시 채웠다.
“어머니는 좀 어떠시냐?”
“안 좋아.”
남자는 얼마 전 병원으로부터 어머니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전화를 받았다.
간병인과 통화해보니, 전혀 거동을 못하고 누워만 있다고 했다.
남자는 다시 소주를 들이켰다.
TV에서 왁자지껄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연예인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명구 형은 찾았어?”
“말도 꺼내지 마라. 그 인간 같지도 않은 새끼.”
명구는 남자의 형이었다. 몇 해 전 그의 어머니 치매가 심해지자 요양 병원에 맡겨놓고는 고향 집과 논밭을 전부 팔아치우고 지금까지 연락두절인 상태다.
“그래도 어머니 돌아가시면 상준데, 장례식에 상주가 없으면 어떡해?”
“시팔, 고향에 와도 어디 잘 데가 없어.”
남자는 동문서답을 하며 고개를 떨궜다. 그러고는 다시 잔을 집는다.
“야, 그래도 상철이네 여관 있잖아. 중학교 때 너랑 상철이랑 거기 빈방에서 고스톱 참 많이도 쳤는데. 상철이 새끼 돈 잃고서 하우스비 내라고 지랄지랄하던 게 엊그제 같다.”
“상철이 얘기 하지 마. 죽은 놈 얘기는 해서 뭐해, 시팔.
결국 국밥을 비우기 전에 소주 한 병이 먼저 비워졌다.
“한 병 더 줘.”
“야 인마, 그만 마셔. 내일 어머니 보러 간다며?”
“내가 고작 이거 마시고 취하는 거 봤어?”
남자는 소주 두 병을 더 비우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봐야 이제 8시를 갓 넘긴 초저녁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남자는 그대로 벌렁 이불에 누웠다.
벌게진 얼굴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봤다.
주변이 고요하니 어느덧 스르르 눈이 감겼다.
잠시 후, 비몽사몽간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옆방인가 싶어 돌아누웠지만, 노크 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 이전보다 더 큰 소리였다.
눈을 뜬 남자는 술기운에 잠기운이 더해져 머리가 어지러웠다.
엉거주춤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
웬 여자가 문을 잡고 잽싸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샛노란 점퍼와 꽃무늬 치마 안쪽에 물 빠진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노란 옷이 낯설어서 신경을 거슬렀다.
“누구요?”
“요 앞에 국밥집 오빠가 보내서 왔어요.”
“뭔데?”
“커피요.”
여자는 웃으며 보자기로 싼 보온병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자리에 앉으며 점퍼를 벗고 보자기를 풀기 시작했다.
남자도 곧 따라 앉았다. 그의 시선이 여자의 손으로부터 가슴까지 훑었다.
“근데, 요즘에도 배달하면서 그런 것도 하고 그러나?” 남자가 물었다.
“그런 거 뭐요?” 여자가 잔에 뜨거운 물을 부으며 되물었다.
“아, 그거 있잖아.” 남자가 커피 향에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에이,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걸리면 큰일 나려고. 우린 그냥 커피만 팔아요.”
“...”
“국밥집 오빠가 이런저런 얘기나 좀 하다가 오라던데. 오빠 마음이 적적할거라고.”
여자가 남자에게 커피 잔을 건네주었다.
입에 가져가자 뜨거운 김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난 유자차. 요즘같이 추울 땐 감기 걸리지 말라고 유자차. 오빠도 좀 줄까?”
“됐어.”
남자는 후후 불어가며 커피를 마셨다.
여자는 남자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남자의 고향이 이곳이라는 말에 여자는 놀랐다.
“왜 고향까지 와서 이런 시장통 여관방에 묵어요?”
“글쎄, 나도 모르겄다.”
“아, 뭔데? 말 좀 해봐요. 궁금해 죽겠네.”
여자는 남자의 팔에 가볍게 손을 얹으며 물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치매 걸린 어머니를 버리고 간 남자의 형 이야기에, 여자는 ‘나쁜 놈’이라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에어컨을 수리하며 번 돈 대부분을 어머니 간병비로 쓴다는 말에 ‘효자네. 효자야.’ 하고 은근슬쩍 팔을 쓰다듬었다.
남자는 여자의 손길이 부드럽다고 느꼈다.
그는 어머니가 곧 돌아가실 것 같다는 얘기까지 했다.
여자는 ‘이제까지 그만큼 했으면 됐다.’고 남자를 위로했다.
이야기를 나는 사이 남자는 커피를 다 마셨다.
“유자차 정말 안 마셔요? 내꺼 마셔요.”
남자는 식은 유자차를 한입에 털어 넣고는 유자 조각들을 우걱우걱 씹었다.
“오빠 핸드폰 줘봐. 나 아는 언니가 대전에서 가게 하는데, 매일 전화 와서 도와달라고 닦달하거든. 나도 왕년에 서울에서 자알 나갔는데, 언제까지 이 촌구석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거기로 가면 내가 한번 연락할게. 자, 오빠 번호 저장했어.”
“이름이 뭐야?”
“내 이름? 알아서 뭐 해. 여기선 그냥 은실이라고 불러.”
여자는 보자기에 잔과 보온병을 다시 싸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여자를 배웅하며 ‘오면 꼭 연락해’하고는 복도 끝까지 걸어갔다.
방 안으로 돌아온 남자는 누워서 여자를 생각했다.
바지춤을 내려 자위를 하려다가 이내 포기하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
두 남자가 낑낑대며 에어컨 실외기를 들고 계단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계단이 좁아 나란히 들 수 없어 각자 실외기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들었다.
3층에 도달하자 아랫부분을 든 늙은 남자의 얼굴이 붉어지며 손아귀에 힘이 풀렸다.
“성훈씨, 좀 쉬었다 가지.”
“아, 난 진짜 엘레베이터 없는 집이 제일 싫어. 나중에 빌라같은 데서는 절대 안 살 거야.” 젊은 남자가 말했다.
두 사람은 서서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실외기를 들고 4층에 도착했다.
“내려가서 에어컨도 좀 가져올게요.”
“...”
젊은 남자가 내려간 사이, 늙은 남자는 계단에 앉는다.
문득, 지난 주말에 보고 온 어머니 생각이 났다.
백발의 어머니는 자리에 누운 채 눈은 뜨고 있었지만, 아들을 알아보진 못했다.
깡마른 어머니의 팔목을 만져보고 그는 죽음을 느꼈다. 저렇게 점점 말라가다 살가죽이 뼈와 닿는 순간 죽는 거라고.
“음식도 먹고 거동도 해야 근육이 유지됩니다. 저렇게 움직이지 못하면 팔다리에 근육이 금방 빠져버려요. 그럼 면역력도 약해지고. 이제 감기라도 걸리는 날에는 폐렴으로 돌아가실 수 있어요. 지금 어머님 상태를 봐서는 길어야 몇 개월입니다. 이제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세요.”
어머니 옆에 서 있던 그에게 의사가 말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의사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귀에 들리기는 했을까?
“삼촌, 뭔 생각을 그리해요? 문 좀 열어줘요.”
젊은 남자가 에어컨이 든 큰 가방을 어깨에 메고 계단을 올라왔다.
늙은 남자가 문을 열려고 뒤돌아 일어설 때 등 뒤에 세워둔 실외기를 밀쳤다. 그는 뒤로 넘어지는 실외기를 잡으려다 그 위로 같이 넘어져 버렸다.
실외기를 피해 손을 바닥에 잘못 짚는 바람에 손목을 삐끗했다.
“괜찮아요?”
“괜찮아.” 남자는 별 일 아니라는 듯이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그날 그는 통증을 참아가며 꾸역꾸역 일을 마무리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약국에 들러 파스 몇 장을 샀다.
며칠 뒤 쉬는 날, 남자는 집에서 혼자 라면을 먹다가 모르는 번호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다음엔 고향에 언제 와요? 오면 연락해요.⌟
왠지 은실이일 것 같았는데, 한번 확인해보고 싶었다.
⌜누구?⌟ 남자가 서툴게 문자를 보냈다.
⌜OO다방 은실이요⌟
남자의 메마른 얼굴에 웃음기가 피어올랐다.
남자는 매달 마지막 주말에 고향에 가서 어머니를 보고 온다. 다녀온 지 아직 한 주 밖에 지나지 않았다.
남자는 한동안 휴대폰 화면을 바라봤다.
반쯤 먹다 남은 라면이 불고 있었다.
⌜다음 주에 가⌟ 남자는 문자를 보내자 가슴 속이 쿵덕거렸다.
⌜네 ^^⌟
남자는 화면에 뜬 ‘^^’를 다시 한참 동안 쳐다봤다.
왠지 모르게 더 이상 배가 고프지 않았다.
식탁에서 일어나 방 한쪽 구석 벽에 기대고 누워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다음 날 그는 일하는 도중에 은근슬쩍 말을 꺼냈다.
“이번 주말에 어머니에게 한 번 더 다녀와야겠어.”
“네? 또요? 왜? 어머님 상태가 많이 안 좋아요?”
“어? 어.” 그는 힘없이 말했다.
“곧 새 학기 이사철이라 일이 많은데. 후, 알았어요.” 젊은 남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아니에요. 별수 없죠, 뭐.”
그날 밤, 남자는 통장에 평소보다 많은 일당이 들어온 것을 확인했다.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주말에 다시 고향으로 향했다.
남자가 여관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노파는 앉아서 졸고 있었다.
문 여는 소리에 화들짝 깬 노파는 남자를 보더니 물었다.
“철구냐? 또 온거여? 느그 엄마 상태가 그렇게 안 좋은 겨?”
“네.”
“하이고, 워쩐다니. 곧 초상 치루는 거 아닌지 몰겄다.”
“...”
남자는 방 열쇠를 받아 위층으로 올라갔다.
여자에게 문자를 보내서 자신이 왔음을 알렸다.
시장기를 느껴서 자장면을 한 그릇 시켜먹고는 TV를 보면서 여자를 기다렸다.
저녁을 훌쩍 넘기고 나서야 여자가 왔다.
“미안해요, 오늘따라 일이 많아서요. 지금도 금방 가봐야 해요.”
여자가 가져온 커피를 타면서 말했다.
“그래? 요즘엔 사람들이 까페 같은데 가서 마시지, 다방 커피는 잘 안마시잖아?”
“왜요? 그래도 어르신들은 아직 많이 찾아요. 여긴 노인네들 밖에 없잖아.”
여자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그래도 은실이 보러 멀리서 왔는데, 금방 가면 섭섭하지.”
“아, 주인 언니가 일찍 오라고 했는데.”
여자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알았어. 알았어. 내 금방 마실게.”
남자는 여자가 타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앗 뜨거.”
“천천히 마셔요. 그러다 입천장 다 까지겠네.”
“아, 빨리 마시라며.”
“내가 언제 빨리 마시라고 했어요. 빨리 가봐야 한다고 했지.”
“그게 그 소리지 뭐여.”
“그러지 말고, 오빠가 두 시간 정도만 끊으면 나 천천히 있다가 가도 되는데. 커피도 천천히 마셔도 되고, 응 오빠?”
“두 시간? 아, 알았어.” 남자가 침을 꼴깍 삼키며 말했다.
여자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휴대폰을 들어 어디론가 문자를 보냈다.
**********
찬 기운이 물러나고 어느덧 봄이 찾아왔다.
유난히 따뜻한 봄 날씨에 사람들은 벌써부터 여름이 얼마나 더울까 걱정했다.
가전회사들은 호들갑을 떨면서 마케팅에 열을 올렸고, 예년보다 에어컨 설치 수요가 늘었다.
그사이 늙은 남자는 여자를 보러 주말마다 고향에 갔다.
하지만 어머니를 보지도 않고 돌아오는 경우가 점차 늘어났다.
남자의 방문 횟수가 뜸해지자 의사는 전화로 어머니께서 의식이 가물가물하다고 전했다. 몇 해 전 여름, 기록적인 폭염에 노인들의 사망률이 증가했다는 뉴스를 들은 적이 있냐고 물었다. 아마도 올 여름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했다.
늙은 남자는 이제 버는 돈 보다 쓰는 돈이 많아졌다.
통장의 잔고가 점점 줄어들었다.
이대로 가면 어머니 장례식 비용으로 쓰려고 모아둔 돈까지 손을 대야할 판이었다.
그는 정신이 번쩍 들며 위기감을 느꼈다.
여자에게 이번 주는 바빠서 못 갈 것 같다고 연락했다.
⌜다음 주에 와. 기다릴게 ^^⌟
젊은 남자는 주말마다 고향에 가는 늙은 남자가 안쓰러웠다.
어머니 상태가 많이 안 좋고, 버는 돈 대부분을 어머니 간병비로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주 반복되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밀려드는 일을 혼자 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그래서 늙은 남자 대신 주말에 같이 일 할 사람을 구했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어린 남자였고 일도 새로 가르쳐야 했다.
처음엔 손발이 맞지 않아서 많이 혼냈지만, 이제는 눈치껏 보조를 맞추는 수준이 되었다.
그는 가끔 늙은 남자에게 주말에 일하는 친구에 대해서 불평을 했다.
그의 말을 듣고 늙은 남자는 조금 서운했다. 하지만 별수 없는 일이었다.
주말에 할 일 없이 집에만 있자니 여자 생각이 났다.
결국 참지 못하고 남자는 다시 고향으로 향했다.
여자가 남자의 팔베개를 베고 나란히 누워 있다.
남자는 한 손으로 여자의 가슴을 조몰락거렸다.
“대전에 아는 언니가 일 좀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어?”
“왜? 나 거기 가면 오빠가 먹여 살려줄 거야?”
“못할 것도 없지, 뭐.”
“근데 아직.”
“왜?”
“그런 일이 있어.”
“뭔데?”
“빚이 좀 남았어. 여기에.”
“얼, 얼마나?”
“아직 2천 정도 남았어.”
“...”
“그것도 많이 갚은 거야.”
남자는 문득 어머니 장례식 비용으로 모아둔 돈 천만 원이 생각했다.
급히 팔베개를 풀고 옆에 벗어둔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뭐야, 오빠보고 도와달라고 안할 테니 걱정 마.”
“생각 좀 해볼게.” 그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아냐, 괜히 말했네. 신경 쓰지 마.”
“...”
남자는 돌아가는 대로 젊은 남자에게 주말에도 자기가 일하겠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저야, 삼촌이 주말에도 일해주면 좋죠. 그런데 어머니는 괜찮아요?”
“돈이 좀 더 필요해서.”
“알았어요. 그럼 걔한테는 잘 말해서 이제 나오지 말라고 해야겠네요. 애가 아직 일이 서툴러서 저 혼자 일하는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늙은 남자는 그 후로 몇 주 동안 여자를 만나러 가지 않고 일했다.
그사이 비가 몇 번 오더니, 어느덧 산과 들이 푸른색으로 뒤덮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가 대전에 온다고 연락이 왔다.
⌜오빠가 안 오니까 내가 가야지 뭐⌟
남자는 여자가 오는 버스터미널로 마중 나가기 위해 하루 휴가를 내야했다.
젊은 남자는 혼자 일 할 생각에 짜증이 났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날 그는 혼자 실외기를 들다가 문득 화가 치밀어 올랐다.
늙은 남자는 버스터미널 근처에 있는 돼지갈비 집에 여자를 데리고 갔다.
“내가 이 동네 저 동네 많이 돌아다니잖아. 요 근처에서는 이 집이 제일 맛있어.”
“옷에 냄새 배는데.” 라고 말하면서도 여자는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두 사람은 배불리 밥을 먹고 근처 강가의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햇살이 따사로웠다.
근처 잔디밭 곳곳에 텐트를 치고 노는 사람들이 보였다.
“나 여기 TV에서 본 적 있어. 지역 방송에서 종종 나오더라고. 나도 저렇게 텐트 치고 놀아보고 싶었는데.”
“나중에 대전에 오면 그렇게 하자.”
“정말? 약속이야.” 여자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남자가 쑥스럽다는 듯이 굵은 새끼손가락을 여자의 손가락에 갖다 대었다. 여자가 손가락 고리로 남자의 손가락을 잡아 당겼다.
“오빠랑 이런데서 살면 참 좋겠다.”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때마침 불어오는 강바람에 남자는 기분이 좋았다.
기다리던 월말이 되자, 남자는 고향에 가서 여자를 만났다.
남자는 여자를 품고 욕정을 풀어냈다.
여자는 남자의 기세가 한풀 죽자 조용히 말을 꺼냈다.
“오빠, 나 부탁이 있는데.”
“뭔데?”
“나 천만 원만 빌려주면 안 돼?”
“빚 갚으려고?”
“응, 내가 천만 원은 어떻게 구했거든. 이제 딱 천만 원만 있으면 여기 빚 청산하고 대전에 가서 오빠랑 같이 살 수 있는데.”
“...”
“그냥 달라는 거 아니고, 빌리는 거야. 어차피 나도 거기 아는 언니네 가서 일 할 거니까, 금방 갚을 수 있어.”
“음, 생각해 볼게.” 남자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여자는 남자의 팔을 베개 삼아 옆으로 누웠다.
남자가 대전으로 돌아가려고 터미널로 가는 길에 국밥집 친구를 마주쳤다.
그는 화들짝 놀랐으나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다.
“왔냐? 뭐여, 가는 길이야?” 친구가 물었다.
“어.”
“너 종종 왔다 갔담서? 이제 여기와도 우리 집엔 들리지도 않냐? 어머니만 보고 가는 거야? 좀 어떠셔?”
“안 좋아.”
“알겠다. 잘 가고 담에 오면 밥이나 먹고 가라.”
“그래, 간다.”
남자는 서둘러 버스에 몸을 실었다.
며칠 뒤, 여자에게 연락이 왔다.
⌜오빠, 돈 빌려주는 거 생각해봤어?⌟
⌜그래, 알았어.⌟
남자는 어머니 장례식 비용으로 모으는 돈을 깰 작정이었다.
‘또 부지런히 모으면 되겠지.’
곧 여자에게 전화가 왔다. 돈만 부쳐주면 곧바로 대전으로 갈 거라고 했다. 여자는 이제 곧 오빠랑 같이 살 수 있게 돼서 꿈만 같다고 말했다.
“나 대전 가면 제일 처음으로 강가 잔디밭에 텐트치고 오빠랑 노는 거 하고 싶어.”
“텐트?”
“아, 그때 말했었잖아. 나 그거 해보고 싶었다고. 오빠 텐트 있어?”
“아니.”
“이참에 하나 사자. 요즘엔 얼마 안 한 대. 난 노란색이 좋던데.”
“그래.”
뒤이어 돈을 부칠 계좌번호가 문자로 날아왔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 근처 은행으로 향했다.
적금을 깨고 싶다는 말에 은행 직원은 이자를 얼마나 받을 수 있는지 알려주었다.
뒤이어 여자가 알려준 계좌번호를 정성껏 적어 건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평상시 눈에 보이지도 않던 캠핑 용품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전시되어 있는 파란색 텐트가 마음에 들었다.
텐트 앞에서 두리번거리며 살펴보자 점원이 나와서 이것저것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거 노란색도 있나요?” 그가 물었다.
“그럼요.”
그는 파란색을 더 좋아했지만 같은 디자인의 노란색 텐트를 샀다.
좀 전에 은행에서 떨리던 마음과는 달리, 텐트를 사들고 집에 가는 길은 왠지 모르게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온 남자는 텐트를 펼치고 사진을 여러 장 찍어서 여자에게 보냈다.
며칠 뒤, 여자는 자기 짐을 부칠 테니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
남자는 사는 집 주소를 문자로 보냈다.
여자는 오는 일요일 오후에 대전으로 온다고 했다.
그때 거닐었던 산책로 옆 잔디밭에 텐트를 치고 기다리면 찾아가겠다고 했다.
남자는 주말에 또 휴가를 내야했다. 어머니가 위독해져서 꼭 고향에 다녀와야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젊은 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아침부터 텐트를 들고 강가로 향했다. 제일 좋은 위치에 텐트를 칠 작정이었다. 벌써 곳곳에 텐트를 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늘에 구름이 좀 끼었지만 그 사이로 내려오는 햇살은 따뜻했다.
고요한 텐트 안에 누워 있던 남자는 점심때가 지나자 출출해졌다. 마침 문자 알림이 울렸다.
⌜출발.⌟ 여자의 문자였다.
이제 여자가 올 때까지 한 시간 남짓 남았다.
남자는 점심도 먹을 겸 터미널 근처로 갔다.
어느 해장국집에서 뜨거운 콩나물 해장국을 천천히 식혀가면서 먹었다.
길 건너 터미널 안으로 들어간 뒤, 대합실에 앉아 여자를 기다렸다.
밥을 먹은 뒤라 그런지 연거푸 하품을 해댔다.
졸다가 시계를 보니, 이미 여자가 도착할 시각이 지나 있었다.
남자는 잠이 확 깨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대합실과 터미널 주변을 둘러봤지만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 자신을 지나쳐 강가 산책로로 갔을까봐 강가 쪽 텐트로 급히 뛰어갔다.
강가에서 이리저리 사방을 돌아다녀봤지만 여자를 찾을 수 없었다.
뛰어다닌 탓에 등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그때 남자의 전화벨이 울렸다.
병원이었다.
“지금 어머님이 위독하시니까 빨리 오세요. 빨리요.”
남자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숨을 헐떡이며 한동안 텐트 앞에 서 있었다.
하늘엔 구름이 점차 많아지면서 회색빛이 짙어졌다.
남자는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자는 받지 않았다.
다시 걸었다.
또 받지 않았다.
⌜어디야? 도착했어?⌟ 라고 문자를 보냈다.
여자는 답이 없었다.
남자는 초조하고 불안했다. 이마에 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그는 여자를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여자에게 연신 전화를 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어느덧 하늘이 구름으로 뒤덮이더니 어디선가 습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제 사람들은 하나둘씩 텐트를 접었고, 강가에서 산책하던 사람들도 눈에 띄게 줄었다.
남자는 이제 간절한 마음을 담아 여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거 보면 연락 좀 줘⌟
남자는 텐트에 앉아 휴대폰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때마침 문자 오는 소리가 들렸다.
⌜삼촌, 저 오늘 일하다가 허리 다쳤어요. 지금 병원 왔어요. 괜찮아질 때까지 당분간 일 못할 것 같아요.⌟
남자는 문자를 보자 울상을 지었다.
그때 텐트 위로 툭툭 소리를 내며 빗방울이 떨어졌다.
잠시 후, 갑자기 솨 소리와 함께 비가 쏟아졌다.
빗소리와 함께 텐트안 분위기가 차분해지자 남자는 자책하기 시작했다.
“병신 새끼. 이 병신 새끼.”
남자가 멍하니 앉아 중얼거렸다.
이제 강 주변에 아무도 없이 남자만 텐트 안에 남아 있었다.
다시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이철구씨 어머니, 황순자님 임종하셨습니다.”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찌그러졌다.
“엄마.”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남자는 엉엉 소리를 내며 오열했지만 텐트 밖 거센 빗소리에 묻혀버렸다.
눈물로 가득 찬 두 눈에 어둡고 희미한 노란색이 들어왔다.
“시팔, 난 파란색이 좋았는데.”
-끝-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쓰다 보니 아래 소설 ⌜시체가 나타났다⌟의 프리퀄 같이 되어버렸네요.
믿고 싶은 것을 믿어버리는 어리석은 인간의 심리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첫댓글 다방 레지에게 당하고 어머니 마져 돌아가셨다 "병신새끼"라고 자책하는 남자
순진한 남자가 다방레지에게 순정을품고 어머니 임종마져도 못뵈었구먼 늦은 사랑이 무섭긴무서운모양입니다
늘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소설을 '듣고'싶은 분들은 제 Youtube 채널을 방문해 주세요. https://www.youtube.com/@read-me-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