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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류열풍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인천토박이™
1. 광해군은 폭군이었는가?
조선사는 광해군을 폭군으로 기록하고 있다. 우리들도 그리 알고 있다.
벌써 묘호부터 왕도 아니고, 조나 종도 아닌,'군'이다. 조선의 역사에서 군호를 받
은 왕은 단 둘뿐이다. 연산군과 광해군. 때문에 세간에는 당연히 정치를 잘못한 폭
군으로, 쫏겨난 '왕 답지 못한 왕' 을 '**군'이라고 부른다고 알고 있다.
광해군은 아직도 '군'이고, 앞으로도 '군'일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신원복권을 해 줄 조선왕조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고 있고, 한국 정부가 그런
일을 할 것으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역사의 패배자라는 것에 있다. 그는 졌고, 다시는 일어
서지 못했다. 이변이 없는 한 계속 그 상태로 남을 것이다.
'폭정'이란 원래 집권층에게 행사된 정치적 행위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민생을 위
협하는 폭력적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다.
광해군은 일부 왕권 위협 세력을 제거하긴 했으나 민간을 위협하고 학대하는 정사
를 편 일은 없다, 그는 오히려 민생 구체에 주력하여 민생 경제를 일으키는 데 전
력을 쏟은 왕이었다. 아무리 그를 패배시킨 인조측의 사관들이 날조를 해두었더라
도, 광해군조에 그가 이뤄낸 치적 만큼은 어쩔수 없는 것 들이다. 그것을 우리는
역사시간에 분명히 배웠다. 다만 학력고사(요즘 수능에서는 어떤지 모르겠다.)에 출
제 빈도가 낮았을 뿐이다.
오히려 광해군은 사대주의자들에게 밀려 자신의 실리적 외교론과 현실 감각에 바
탕을 둔 정치 이상을 완전히 꽃 피우지도 못한 채 밀려난 불행한 왕이었다.
인조반정은 정당한 혁명인가?
2. 인조반정의 명분
첫째는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고 사대모화를 하지 않았다는 것과, 둘째는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시켜 형제를 죽이고 불효를 저질렀
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내건 이같은 명분은 반정에 성공한 사대주의적 명분
론자들이 자신들의 반란을 합리화한 측면이 강하다.
당시 명은 이미 기울고 있는 나라였고 청(당시 후금)은 일어나는 나라였다. 때문에
조선은 중국의 그런 세력 다툼을 이용해 개국 이후 계속되던 중국과의 군신 관계
를 청산하고 대등한 위치로 격상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맞이하고 있었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명나라가 조선에 파병을 요청했을 당시 조선의
형편으로 해외 파병이 가능했겠느냐 하는 의문이 생긴다.
전쟁 끝난지 얼마나 지났다고 전후복구가 이뤄 졌을 것이며, 농사 지을 장정이 없
어 수확량이 줄어드는 판국에 사람이 어디 있어 군대를 꾸리겠는가 말이다. 광해군
으로서는 의리와 실리 사이에서 정말 고심했을 것이고, 조선내 친명파들의 사대모
화론에 대해 적쟎이 고심했을 것이나, 그는 모양새를 갖춘 실리를 택했다. 파병군
의 사령관인 강홍립에게 후금군을 만나자 마자 무조건 투항하라고 한 것이다.
'파병은 했지만, 후금(청)군이 너무 강해서 야전사령관이 투항해 버렸다. 후금(청)
군이 강한 것은 명나라도 잘 알지 않느냐? 천자의 군대도 이기는 군대를 번국의
군대가 어떻게 이기겠니? 명나라에서 보기에 아니꼬우면 조선에 직접 와서 밟던
지...'
광해군은 이렇게 해서 급조된 파병군의 안전을 확보해서 분명 농사 짓다가 강제로
끌려왔을 농민들과 어마어마 했을 전비를 아끼고 새로이 흥기하는 후금과 친선 관
계를 수립했다. 요즘 생각해 봐도 절묘한 외교기술이다.
이런 사람이 폭군이라고? 폭군이었으면, 이 군대를 맹훈련 시켜서 일당백의 용사로
만들고, 풍부한 실전경험을 토대로 국내의 반대파들을 모조리 숙청하는데다가 썼을
것이다. 광해군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만일 광해군이 그렇게 했으면 인조반정
따위는 일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다음으로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비롯해 능창군, 인목대비 등을 제거한 것을 폐륜으
로 몰아간 부분이다. 조선 정치사를 볼 때 이른바 성군 내지는 명군으로 일컫어지
는 왕들 역시 자신의 정적 세력 제거에는 조금도 틈을 보이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람이 태종과 세조였다.
태종은 자신의 배다른 형제를 2명 죽이고, 동복 형제도 유배시켰으며 또 자신의 장
인 민제의 집안 4형제(처남)를 모두 죽였다. 사실 이 4형제는 죄 없이 죽었다 하겠
다. 또한 충녕대군(세종)이 세자가 되자 그 장인인 심온의 집안 역시 민제의 집안
처럼 풍지박산 난다.(거의 사돈 혐오수준) 또 그가 가장 아끼던 신하이던 이숙번도
귀양보낸다. 그리고 계모 강씨(신의왕후)의 무덤을 일개 후궁의 무덤으로 전락시키
는 행위를 자행하고, 능침의 장식을 위해 설치된 석물들을 뽑아다가 백성들이 밟고
다니는 다리를 놓기도 했다. 심지어 장자인 양녕대군까지 왕이 될 인물이 아니라
하여 폐세자를 단행한다. 그리고 세조는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조카(단종)를 죽
이고, 형수인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쳐 관을 없애고 자신을 반대하는 모든 신하들
을 죽이거나 유배보냈으며, 왕권에 대한 도전이 두려워 철저한 심복 정치를 실시하
기도 했다. 친형제인 안평, 금성 대군을 죽이고, 세종 후궁 소생의 많은 왕자들을
죽였다. 고려 시대에 그런 왕을 찾아보자면... 광종이 있다. 광종은 중국에서 귀화한
쌍기의 의견을 받아 들여 과거제를 도입하고 노비 안검법을 실시한 명군으로 알려
져 있다. 또한 중국이 혼란스런 틈을 타 스스로 황제의 지위에 오르고 독자적인 연
호를 사용한 자주성도 강한 군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연호를 자주 바꿔가며 능수
능란한 외교를 펼친 군주로도 평가받고 백관제도 실시한다. 또 문화도 발전시키고
병력도 증강시키고 영토도 넓힌다. 이러한 광종은 태종과 세조는 비교되지도 않을
만큼... 엄청난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누구도 광종을 폭군으로는 평가하지 않고 오
히려 명군으로 평가한다. 뿐인가? 후일 영조는 사도세자를 굶겨 죽인다. 그는 형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추문(사실 상당한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다.)과, 숙종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악질적인 추문에 평생을 시달린 사람이다. 아무도 영조를 폭군이라고 하
지 않는다.
광해군을 이들의 행적에 비해 극악스럽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는 오히려 인목대비를 죽여야 한다는 대북 세력의 강력한 주장을 물리치고 살려
두었고, 영창대군을 죽인것도 반대한 인물이다.
고금의 역사를 통틀어 명군이라 이름 붙여진 자 치고 자신의 친족을 해치지 않은
자가 없고, 폐륜을 저지르지 않은 자 없다. 폐륜아가 정치를 하는게 아니고 정치가
폐륜이다. 정관의 치라는 보기 드문 훌륭한 통치를 했던 당 태종도 형과 동생(그리
고 그들의 자식들까지)을 죽였고, 명 영락제(조선 태종과 동시대 인물)도 조카를
죽였다.(그 후 조카를 따랐던 어마어마한 인원의 사람들을 숙청했다.)
절대권력의 세계는 일반인들의 정서와는 다른 세계이고, 형제 이전에 정적이고, 권
력 투쟁에서 패배하면 죽이고, 죽어야 하는 세계인 것이다. 권력에 도전했다가 패
배한 정적을 살려주었다는 왕의 이름을 나는 오늘 날까지 들어 본 적이 없다.
영창대군이 선조의 적실소생이라 왕통을 이어야 한다는 말도 안되는 주장이 어디
있는가? 오히려 조선왕조의 계보도를 보면 적통의 장자 상속으로 왕통이 이어진
예가 더 희귀하다.
광해군은 민생을 짓밟는 폭정을 했는가?
궁궐 중건을 문제로 삼아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다는 내용과 선조를 독살 했다는
두 문제가 남아있다.
임진왜란으로 궁궐이 타버린 바람에 종사를 월산대군(성종의 형님이므로 이 집이
얼마나 낡았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더 윗대의 사실까지 알아 보자면, 월산대군은
세조의 손자이므로 바로 세조가 살았던 집, 즉 세종 시대에 지어진 집이란 뜻이
다.)의 사저에서 보았다. 대궐의 건축은 왕실의 위상을 높인다는 점에서도 바람직
한 일이었다. 민생수탈 이전에 통치권의 권위 확보에 직결된 문제이다.
조선왕조 태조-태종조를 보자.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이 두 왕은 개경 클래스의 도시로 한양을 만드는데, 단
3~4년 만에 모든 공정을 끝냈다. 누구도 두 왕의 도성 건설을 민생을 억압한 폭정
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 추진력에 감탄할 뿐이다. 이때는 민생이 도탄에 빠진 정도
가 아니고 부역자들 사이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으며,
아무리 전근대적인 사회라고 해도 금기시 했던 한겨울의 부역동원이 상상을 초월
하는 규모로 이뤄 졌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태조였음에도 불구하고 중들까지 부역
에 동원했다. 3~4년 만에 걸설된 한양의 규모는 어떠 했는가? (요즘에 신도시 하나
개발해서 사람이 거주하도록 만드는 데도 3~4년은 넘게 걸린다.)임진왜란으로 불타
버린 한양의 시설을 전쟁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데, 광해군때 시작해서 영조때 끝
이난다. 150년이 걸린다. 그것도 경회루에서 보듯이 그 전의 화려함과 웅장함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그러고 보니 경복궁은 흥선대원군때 다시 지은 것이다.) 대궐
중건으로 민생에 도탄에 빠졌다니.
대궐은 단순한 왕의 숙소가 아니다. 정부 전 기관이 모여 있는 나라의 두뇌이다.
요즘 공무원의 논리로 반박하자면 대궐 신축 탓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진게 아니고,
대궐이 없어 일을 할 수 없으므로 민생이 도탄에 빠진것이다.
인조반정이후 득세한 인물들 중에서 잘 집칸이 없어서 남의 집에 얹혀 살았다는
양반놈 이름을 들어 보질 못했다. 오직 광해군만이 왕 씩이나 되 가지고서도 집 칸
이 없었다. 그걸 안 짓고 뭘 하라는 이야기 인가? 그리고 대궐을 지어서 거기서 광
해군과 그 일족만 사는가?
광해군은 임진왜란중에 선조의 지시로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함경도와 평안도 등
으로 모병을 따나 청소년기를 전쟁 난민들과 보낸 사람이다. 조선조 어떤 임금 보
다도 피페해 질대로 피폐해진 민생의 현실을 잘 알고 있는 군주이고, 실제로 경험
해 본 사람이다. 왕자의 몸으로 딱딱하게 굳어버린 깡보리 밥에 물을 말아 막 된장
과 함께 씹어 넘긴 군주가 이 사람 말고 또 있을까. 이런 사람이 민생을 억압할 수
있다고 보는가. 민생을 억압하는 왕이 민생을 구제하고 백성을 질병으로부터 구원
하고자 전의에게 조선만의 의서(동의보감)를 편찬하라고 지시를 하는가?
또한 선조를 독살했단 것은 터무늬 없는 이야기다. 이 말을 인목대비가 하는 바람
에 서궁에 유폐된 결정적 원인이 된다.(인목대비가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
데, 어느 미친 신하가 나서서 죄 주자고 주청을 드릴수가 있는가.) 말이 좋아 대비
고, 어머니뻘이지 광해군이 첫사랑에 실패만 안했으면(?) 그 만한 딸이 있고, 인목
대비가 재수가 없었다면(?) 광해군과 맺어져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연배이다.
그 나이에 할아버지에게 시집 왔다가 청상이 되고, 핏덩이(영창대군)의 어머니가
되었다. 그 나이에 자식을 본 정력을 자랑하는 사람이 어찌 그리 급히 죽을 수 있
느냐고 하겠지만, 조선의 국왕은 하루 5끼의 식사를 하고, 식사후 물 마시듯 보약
을 마셨다. 선조의 주치의가 누군가? 동의보감의 저자, 하늘이 내린 '신의'이라는
허준이다. 독살? 아무리 황당하고 분하고 억울(?) 했더라도 할 말이 있고 못할 말
이 있다.
말 한마디에 목이 날아가고, 집안이 박살나는 세상이 전근대의 절대군주정 사회다.
정말 왕의 계모만 아니었어도 능지처참 감이다. 영조때 경종독살설(개인적으로 가
능성이 없다고 보지 않는다.)을 떠들고 다닌 사람은 다 그렇게 죽었다. 오히려 그
사람을 죽이지 않고 살려둔 광해군의 인내가 다 신기할 지경이다. 설령 광해군이
선조를 독살 하였다 하더라도 군주 입장에서는 죽여 마땅한 반체제인사인 것이다.
고금의 역사상 폭군이라 규정된 임금을 폄하하는 가장 편리한 수법이 부왕을 독살
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추문이다.
또한 광해군은 도성을 파주의 교하로 옮길 것을 결정했었다.
광해군이 교하로 천도할 계획을 세운 것은 정말 기발하고 좋은 발상이었다. 교하는
위치적으로 임진강을 끼고 있어 물 걱정이 없는 곳이고, 대평야로 둘러싸여져 있어
식량 사정도 걱정 없었다. (아직도 이만한 땅이 없다고 하고, 제법 명당인 모양이
다. 통일이 되면 땅 값이 무진장 오를 곳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최전방인 관계로
군인들이 많이 산(?)다. 그래서 그간 그렇게 많은 군인 출신 대통령들이 나오고, 군
대의 입김이 강했나 보다.) 또한 중국과의 해상 교통도 가능해 새로운 문물을 받아
들이기엔 적당한 곳이다. 또 임진강이 가로막고 있어 중국의 침략을 막기에도 좋았
고 조금이나마 북쪽에 있어 일본의 위협도 덜어졌다. 또한 주위의 산이 낮아 산성
으로 사용하기에도 아주 적격이었다. 물론 중국과의 거리가 가까워 수군의 위협이
있긴 했으나 중국은 해전에 약하디 못해 무딘 나라였다. 또한 한족이 물러나고 여
진이 등장함에 따라 그 위협이 더 없어졌다. 이 천도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해
주는 기발한 발상이었다.
또 사라진 서적 간행에도 박차를 가한 인물이었다. 폭군? 폐륜아? 의리도 모르는
후안무치한 인물?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다.
성종 이후로 이만한 군주가 조선에 나온적이 있는가?
3. 인조 반정은 쿠데타에 불과한 사건이다.
다만 성공 했을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인조반정을 중종반정과 대등한 관계로 설정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솔직히 표현하자면, 정말 '개무식'한 발상이다.) 왜냐하면
연산군이 철저한 폭군이었던 것에 비하면 광해군은 일부 사대주의자들과 단지 정
치적 이념을 달리한 현실적 왕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중종은 반정 세력의 추대를
받았지만 인조(능양군 - 광해군에게는 조카가 된다. 누가 누굴 더러 폐륜 운운한단
말인가? 누워서 침을 뱉는다.)는 스스로 반정을 주도했다. 그래, 다 좋다 치자. 성
공한 쿠데타는 처벌 받지않는 다는 전제로 생긴 나라가 조선이다.
그럼 누가 임진왜란 후 겨우겨우 복구되던 나라를 망쳐 먹었는가를 생각해 보자.
광해군이 계속 집권했으면 정묘, 병자호란 같은 일은 생길 이유가 없었다. 이때 안
그래도 척박하던 나라가 완전히 박살이 났고, 명나라에 의리를 지키자던 사람들은
제일 먼저 남한산성으로 보따리를 쌌다. 그들의 마누라, 딸년들은 한양에 남겨두고
말이다. 차마 쪽팔려서 역사책에 적지를 못했겠지만, 후금 군대는 남한산성을 포위
하고 한양에서 생포한 그들의 부인들과 딸, 며느리 들을 남한산성 앞으로 끌고 가
서 그들이 보는 앞에서 집단 강간을 했다. 그래도 화살 한 대 못날리면서 '항전'이
랍시고 전전긍긍하던 이들이 인조와 그 일당들이다. 이때 생긴 말이 그 유명한 '환
향녀(화냥년)'이다. 잘났다는 의리와 명분의 양반님네들은 이 여인네들에게 가문의
명예를 위해 자결하라고 했고, 이혼을 요구했다. 얼마나 많이들 자살하고 버림 받
았으면, 인조가 어느 강물에 가서 목욕을 하면 '환향녀들이 처녀로 환생한다.'라고
하고 이런 여인들을 버리면 국법으로 처단한다고 조서까지 내렸다. 그 조서로 인해
처벌 받았다는 양반놈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다.
전두환과 그 일당도 이렇게 까지 무능하고 수치를 모르지 않았다. 우리 역사상 이
렇게 무능하고, 뻔뻔스러운 정권이 이때 말고 또 존재 했었나.
쿠데타, 그 이후
그리고 나서 나라가 어찌 됐는지 잠시만 살펴보자. 후금에 끌려간 소현세자와 봉림
대군(효종)은 그곳에서 서양과의 활발한 교류하는 역동적인 청나라를 보았고, 오랑
케라 부르던 그들이 얼마나 훌륭하게 중원을 지배하는지를 보았다. 명나라(중국 역
사에서 명나라를 '암흑'이라고 표현한다. 명나라때 중국의 오늘날(?)이 결정되어
버렸다는 이들도 있다.)와는 비교도 안되게 말이다.
이때 청나라의 황제들인 순치제,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는 중국 역사상 찾기 드물
정도로 훌륭한 정치를 펴서 '삼세의 봄'이라 불리는 장기간의 아주 훌륭한 정치를
폈다. 사실 청나라의 황제들은 마지막 황제인 '애신각라 부의' 정도를 제외하면, 무
능한 군주라고 할 만한 사람이 별로 없다. 구한말의 청나라를 생각하면 좀 이상하
게 들리겠지만, 그 시기에 세계 어느 나라도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러시아 연합
군을 상대로 한꺼번에 전쟁을 해서 이길 수 있는 나라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
다.
때문에 소현세자는 그런 훌륭한 정치를 하는 청나라의 황실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반면 왕위계승에서 밀려난 봉림대군(훗날의 효종)은(세자도 아닌데, 청나라 황실에
입조하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공연히 만리 타향에 볼모로 잡혀와 있다는
울분에 청나라에 대한 분노를 삭였을 것이다.
그러나 인조의 왕통은 효종이 잇는다.
병약해서 소현세자가 일찍 죽어서라고도 하고, 너무 청나라의 문물에 심취한 소현
세자를 보고 인조가 화가 나서 집어던진 벼루에 맞아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서라
고도 한다.(그게 사실이면 인조도 결과적으로 아들을 죽인 것 아닌가?)
개인적으론 소현세자도 독살, 내지는 거세당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귀국하자 마자 죽을 정도의 체력으로 어찌 장기간 타국에서 볼모살이를 하였을 수
있는가?(그랬으면 가다가 죽건 오다가 죽건 둘중의 하나 였을 것이고, 태어나길 약
골로 태어 났으면 세자 책봉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 몸이 약한 이가 어찌 청
나라의 수도에서 외국의 사신들과 사절들을 두루 만나며 서양문물에도 심취할 수
있는가? 어쩌면 소현세자가 보위에 올라서 별 탈 없이 자신의 이상을 실현했다면,
최소한 러시아의 표트르대제 정도, 못해도 성종 정도의 군주는 되었을 것이다. 인
조의 일당들로 봤을 때 광해군이 하나 더 나오는 결과에 다름아니다. 어찌어찌 하
야 봉림대군이 왕위에 올라서 그 유명한 이완대장과 함께 '북벌'을 준비 하셨다.
잘 알겠지만, 변방에서 200여명의 조총수가 러시아 좀도둑들과 교전(소위 나선정
벌)한것 말고 10여년의 북벌 준비로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때 나라가 얼마나
웃겼는지는 '허생전'을 볼 것) 오히려 그렇게 키운 군대로 왕권을 강화하려는 움직
임이 보이자 어느 날 갑자기 쌩쌩하게 북벌 준비 하시던 효종대왕께서 승하 하신
다. 이상한 일이다. 조선의 국왕은 뭔가 일을 해볼려고 하면 죽는다.
예종도 그랬고, 소현세자는 왕도 못 되봤고, 효종도 그랬고, 사도세자가 그러했으
며, 정조도 40대 한참 나이에 어느날 갑자기 홀연히 죽는다. 하늘이 이 나라를 시
기하시는 것인가? 그리 갑작스레 죽을 사람들의 자손인 순조는 어떻게 왕위를 34
년이나 지켰을까, 하는 일이 없어서 건강 상할 일이 없었나...
그렇게 나라를 말아 먹은 것이다.
출처: 디씨인사이드 '대왕세종' 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