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로 배우는 인정교육
김학영
이상은 높게! 가슴은 뜨겁게! 사랑은 깊게!
새해 벽두에 외쳤던 건배 내용이다. 눈이 많아 설국 같은 아름다운
도시 강릉에서 격월간지 '수필과 비평'이 개최한 해변 수필대학 강좌에
참석했다. 시상식과 축하식을 마치고 저녁 식사 후 달려간 경포대. 택
시 운전사가 먼길을 달려 기껏 소개해준 식당을 마다하고 그 옆에 자
리한 충청도 집이라는 간판이 눈에 띄어 그것만으로 들어간 곳. 싱싱
한 횟감을 앞에 두고 건배를 하는 자리에 평소 유우머가 대단하신 우
리 고장의 수필가 B선생님의 건배 구호가 폭소를 자아낸다.
잔을 이마에 대고 이상은 높게! 심장에 대며 가슴은 뜨겁게! 여기까
지는 좋았다. 누가 들어도 신선한 내용이요 문인들다운 체면이다. 그
런데 다음의 ‘사랑은 깊게’가 문제였다. 사랑은 깊게라는 내용이야 좋
지만 잔을 왜 하필 사타구니에 갖다대고 사랑은 깊게! 라고 외치는 것
인지 모르겠다. 어찌 했거나 좌중으로 하여금 배를 움켜잡게 만들었
다.(그것이 작으면 사랑을 깊게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것 아니겠는
가 말이다.)
내가 한가지 더 추가를 한다면 잔을 가슴에 대고 인정은 따뜻하게!
라고 외치고 싶다.
올해는 '인정의 해'다. 대통령 님은 신년 메시지에 평화와 풍요와
망의 시대를 만들어가자고 강조한 모양이다. '인정의 해'는 우리 충북
대학 사회교육원이 정한 의미 있는 새 천년의 구호다. 사람과 사람사
이의 정이 메말라 버거운 시대인지라 가슴을 촉촉이 적시는 인정의 비
가 그립다.
평화와 풍요와 인정의 시대를 여는 것도 깊이 생각해보면 나보다 남
을 먼저 생각하는 작은 인정을 가질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글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보다는
한결 따뜻하다는 것이 평소 나의 생각이다.
수필교실에서 만난 K선생님의 호의로 ‘대청호 옆 미술관'이라는 화
랑 까페를 갔다. 지난 일 학기 때 수업을 마친 후 약속시간이 늦어 어
쩔 줄 몰라하시기에 내 차로 운행해 드렸더니 고맙다면서 커피 한 잔
사주겠다던 약속이 무려 천 년만에 지켜진 것이다.
홀 가운데 자리한 난로에서 널름거리는 불길이 불 그림자를 만들고
있는 사이, 벽면 가득 걸려있는 그림들을 둘러보았다. 작품 중에 이제
는 제법 지방에서는 유명해 대학의 강사로 나가는 친구의 그림이 있어
반가움에 차근차근 감상한 후 자리에 앉으니 통째로 낸 북쪽의 창 너
머로 보이는 대청호가 또 한 폭의 살아가는 그림이다.
커피 한잔에 삼 천 원 하는 것이 비싸게 느껴질 즈음 예쁜 접시에
군고구마가 놓여 나온다. 꽤 큰 것을 길게 세로로 반을 갈라 작은 수
저로 퍼먹을 수 있도록 해준 주인의 세심한 배려가 고맙다.
다소 비싸게 느껴지던 커피 값이 아깝지 않게 생각되었고 사이를 두
고 아지랑이 닮은 따뜻한 기운이 모락모락 피어올라 정겨웠다. 이 작
은 정성. 난 딱 한 개를 나누어 대칭으로 두 개가 된 고구마의 역할이
이 까페의 중심 이미지라 생각될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사랑은 나눌 때 두 배로 늘어난다고 했다. 동안의 소식을 나누고 커
피를 나누고 간단한 요기까지 곁들이며 정을 나누는데 삼 천 원 이라
면 어찌 비싼 가격이겠는가.
내게 기억되는 고구마의 이미지는 인정이다. 내가 처음으로 고구마
라는 소재의 글을 접한 것은 중학교 시절이다. 교과서에 수록된 글로
제목이 고구마다. 어느 시골농촌 상록수에 나오는 선생님처럼 사명감
에 불타는 젊은 남자 선생님이 등장하고, 고지식한 아버지가 딸이 중
등과정을 배우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것으로 글은 시작된다.
“자고로 여자가 너무 되바라져서는 못쓰는 법이고,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살아야 되는 법이여” 대물림 해 받은 봉건적인 사고로 굳게 닫혀
있는 농촌을 계몽 시켜 가는 과정을 그린 희곡으로 기억이 생생하다.
“여자도 배워야 됩니다. 아버님 그래야 농촌도 잘 살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 끈길 기게 설득하는 동안 밤은 한없이 깊어가고 돌부처같이
미동도 하지 않던 아버지가 선생님의 농촌을 사랑하는 순수한 봉사정
신에 서서히 감동하면서 글을 이렇게 끝을 맺는다.
(애꿎은 담배만 피워대고 시종 들은 체도 하지 않던 아버지) “아니
임자 무엇하고 있나! 선상님 오셨는데 고구마라도 내오지 않고.” 고구
마라는 낱말은 단 한번 이렇게 등장하면서도 많은 의미를 함축시키고
있다. 그것은 딸이 야학에 나가겠다는 것에 대한 허락이요 딸을 가르
쳐 주겠다는 선생님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 읽고 난 뒤 어린 가슴에
도 가슴 가득 따뜻한 인정이 저며오고 흐뭇한 정서가 느껴져 삼십년
이 가까운 세월임에도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진한 감동으로 남아있는 것을 보면 정말 글다운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듯 고구마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이어주고 가
까운 사이를 친숙하게 만들어주는 요소가 다분히 있는 것 같다. 어린
시절 시공에서 찐 고구마를 식지 않게 하느라 대소쿠리에 담아 아랫목
에 넣고, 이불로 덮어놓던 정경이 그립다. 으레 마실꾼이 오면 만만하
게 내놓을 수 있는 것이 고구마요 먹거리가 넉넉지 않았던 시절 군것
질 대용으로도 훌륭한 역할을 했던 것이 고구마 아니었겠는가.
새해 수필교실 첫 수업시간 고구마를 한 상자나 선물로 받았다. 다
른 고구마와 달리 농촌을 도와주어야 된다는, 그래야 농촌이 산다는
교수님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고구마이기에, 실제로는 한 상자의 인정
이라는 씨앗을 받은 것이다.
어둠이 잔뜩 깔린 청천 길을 더듬어 찾아가 제때에 값이 맞지 않아
팔지 못한 농부들에게 자비를 들여 저녁까지 대접하고 사오신 귀한 고
구마다.
말로만 떠드는 농촌정책이 무엇이나 제대로 농민들을 위해 바람직한
결실이 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행동으로 보여주신 과감한 결단이
라 하겠다.
성경에는 집을 비우고 먼길을 떠나는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
기는 비유가 나온다.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을 맡게
되는데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은 열심히 일을 하여 다섯을 더 남기고,
두 달란트를 받은 종은 둘을 더 남겨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과
함께 더 많은 달란트를 맡기리라는 약속을 듣는다. 그러나 유독 한 달
란트 받은 종만 게을러 땅 속에 묻어 두었다가 한 달란트마저 다섯 달
란트를 남긴 종에게 넘겨지게 되어 그 종을 일컬어 게으르고 악한종이
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이제 우리 수필 반 회원 똑같이 한 상자씩의 고구마를 선물로 받았
다. 과연 누가 얼마만큼의 인정을 수확할지 자못 궁금하다. 개개인의
가슴속에 들어있는 인정의 그릇을 얼마나 키워 나갈지 기대와 함께 조
바심도 든다. 나는 얼마나 키울 수 있을까? 악하고 게으른 종처럼 전
혀 소출이 없어 그나마 눈곱만큼 남아있는 인정마저 없어지는 것은 아
닌지 모르겠다.
한 천년이 가고 새 천년이 시작됨으로 너 나 할 것 없이 각오들이
새로운 것 같다. 사랑은 첫사랑이 소중하게 생각되고, 아들도 첫 아들
을 더 귀하게 여기게 된다고 했다.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는 첫해요 첫
해가 시작되는 첫 달이다.
내 작은 신앙의 그릇을 키워 넉넉한 마음을 만들어 주시고, 자신보
다 남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귀한 사랑을 주셔서, 인정이 늘 풍족해
목소리만 들어도 가슴 훈훈해지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머리
조아리는 이 시간. 제 머리통 만한 고구마 한 개를 거의 반을 퍼먹고
도 작은 고구마를 손에 쥔 채 잠이든 이제 네 살 된 ‘예찬’이가 칭얼댄
다. 아마 꿈속에서도 제 누나와 고구마를 놓고 다투는 모양이다.
2000년 7집
첫댓글 농촌을 도와주어야 된다는, 그래야 농촌이 산다는
교수님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고구마이기에, 실제로는 한 상자의 인정
이라는 씨앗을 받은 것이다.
어둠이 잔뜩 깔린 청천 길을 더듬어 찾아가 제때에 값이 맞지 않아
팔지 못한 농부들에게 자비를 들여 저녁까지 대접하고 사오신 귀한 고
구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