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산대군묘 및 신도비(月山大君墓─ 神道碑)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新院洞)에 있는 조선의 종친 월산대군 이정(1454~1489)의 묘 및 신도비.
1986년 6월 16일 고양시 향토유적 제 1호로 지정되었다. 덕종(추존)의 장남인 월산대군 이정의 묘로 신원동 능골에 자리잡고 있다. 이정은 일찍 월산군에 봉해지고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서책을 가까이 하고 문장에 뛰어났으며 고양 북촌에 별장을 두고 자주 찾았다.
월산대군의 봉분 뒤에 부인 순천 박씨의 봉분이 있다. 봉분 앞에 묘비와 상석, 문인석, 망주석, 장명등 등의 석조물이 배치되어 있다. 묘비는 직사각 모양의 대석 위에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는 비두를 얹었으며 규모는 높이 180cm, 폭 74cm, 두께 32cm이다. 상석은 3매의 장판석 (長板石)을 놓았는데 가로 270cm, 세로 155cm의 규모이다.
신도비는 1498년(성종 20)에 왕명으로 세웠으며, 약 90cm 규모의 이수(용의 형상을 새겨 장식한 비석의 머릿돌)와 긴 사각 모양의 비좌를 갖추고 있다. 비신의 규모는 높이 218cm, 폭 94cm, 두께 32cm인데, 전액(篆額)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심하게 마멸되어 있다. 비문과 전액은 임사홍(任士洪)이 짓고 썼다. 주변 명소로 월산대군 사당, 서삼릉 효릉(孝陵), 원당 종마목장, 고려 공양왕릉 등이 있다.
월산대군사당 - 문화재자료 제79호
소재지 : 고양시 덕양구 호국로 1243-39 번지
월산대군 이정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처음 창건된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숙종 19년(1693)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현재의 건물은 정조 10년(1786)에 중수한 것이다. 네모난 담장 중앙에 삼문을 세우고 그 안에 사당을 모셨는데 담장은 개인 사당에서는 보기 드물게 장대석을 하단으로 축조하였고 석조 배수구까지 갖춘 특이한 구조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민도리 맞배기와지붕 건물이다. 건물의 앞면은 齋戒行事에 알맞도록 1칸을 개방하였고, 영조 대왕이 친히 ‘錫光祠’라는 편액을 내렸다. 신주를 운반할 때 쓰던 요여가 당내에 보존되어 있다.
경기도 덕양구 신원동 427
월산대군(月山大君)
자 자미(子美), 호 풍월정(風月亭), 시호 효문(孝文)
출생 – 사망 : 1454년(단종 2) ~ 1488년(성종 19)
조선전기 제9대 성종의 형인 왕족.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미(子美), 호는 풍월정(風月亭). 추존왕 덕종(德宗)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韓氏)이다. 성종의 형으로, 평양군(平陽君) 박중선(朴中善)의 사위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일찍이 아버지를 잃고 할아버지인 세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궁정에서 자랐다. 7세 때인 1460년(세조 6) 월산군에 봉해졌고, 1468년(예종 즉위년) 동생인 잘산군(乽山君: 성종)과 함께 현록대부(顯祿大夫)에 임명되었다.
1471년(성종 2) 월산대군으로 봉해졌고, 같은 해 3월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봉되어 전지(田地)·노비·구사(丘史) 등을 왕으로부터 받았다. 이러한 좌리공신의 책봉은 월산대군이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었던 왕위를 상실한 것에 대한 배려에서 나온 조처였다.
예종 사후에 왕세자인 제안대군(齊安大君) 이현(李琄)과 월산대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종이 왕위에 즉위한 것은 어떤 정치적 내막이 깔려 있었다. 곧, 성종의 즉위는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세조의 유명을 받들어 시행한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당시의 최고 권신이자 성종의 장인인 한명회(韓明澮)의 주선에 의한 것이었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성종의 즉위에 대한 종실의 반발을 막기 위해 종실의 대표자격이며 당시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던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권신들은 스스로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조치의 하나로 좌리공신을 책봉하였다.
당시의 왕위 계승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월산대군은 권신들의 농간에 의해 왕위를 놓치고 좌리공신에 책봉되는 비운을 맞자, 이로 인해 현실을 떠나 자연 속에 은둔해 조용히 여생을 보내야만 하였다.
이후 서호(西湖)의 경치 좋은 양화도(楊花渡) 북쪽 언덕에 위치한 희우정(喜雨亭)을 개축해 망원정(望遠亭)이라 하고, 서적을 쌓아두고 시문을 읊으면서 풍류생활을 계속하였다. 그 뒤 어머니인 덕종비 인수왕후(仁粹王后: 뒤에 소혜왕후로 추존)의 신병을 극진히 간호하다가 병들어 35세로 죽었다. 적자는 없고, 측실에서 난 두 아들이 있었다.
1473년 이후 덕종을 추존하고 종묘에 부묘(祔廟)하기 이전에는, 월산대군이 별묘를 세우고 봉사(奉祀)해 덕종의 맏아들로서 행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덕종이 종묘에 부묘되면서 월산대군의 위치는 종실의 한 사람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일찍부터 학문을 좋아해 종학(宗學)에 들어가 배웠고,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두루 섭렵했다고 한다. 성품은 침착, 결백하고, 술을 즐기며 산수를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부드럽고 율격이 높은 문장을 많이 지었으며, 시문 여러 편이 『속동문선(續東文選)』에 실릴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저서는 『풍월정집』이 있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월산대군묘및신도비
위치도
월산대군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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