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5. 11. 13. 보람교회 주일낮예배 기회와 축복의 통로 유백선목사 창세기 32:22-30 ybs9191@hanmail.net
비석을 아주 잘 다듬어 문양을 새기는 재능을 가진 어느 석공이 있었어요. 그 석공은 항상 무릎을 꿇고 일을 하는데, 뜨거운 태양이 쨍쨍 내리쬐는 시간에도 무릎을 꿇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비석을 깎고 다듬었어요. 바닥에는 돌가루 먼지가 가득 있었지만 몇 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일하면서 일어날 줄을 모릅니다. 시간이 지나자 거칠었던 원석(原石)이 매끈하고 아름다운 비석 모양으로 갖춰졌어요. 다듬기가 끝나고 석공이 비석에 명문을 새겨 넣고 있었는데 바로 그때 석공의 집 앞을 지나가던 높은 관리가 작업하는 곳으로 들어왔어요. 고위 관리는 석공의 돌 다루는 솜씨가 너무 정교하고, 깔끔하고, 손놀림이 어찌나 빠르던지 그만 넋을 잃고 감탄하면서 이런 말을 건넸어요. “나도 대리석처럼 차갑고 단단한 사람들의 마음을 당신처럼 유연하게 다듬는 기술이 있었으면 좋겠소이다. 또한 돌에 명문을 새기듯이 사람들의 마음에 내 이름을 새겨 넣을 수 있었으면 좋겠소이다.” 그러자 석공이 이렇게 대답하더래요. “그건 어렵지 않답니다. 당신이 사람들을 대할 때 나처럼 무릎을 꿇는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지요.” 그랬어요.
여러분! 살다보면 까다로운 사람들도 만나고 견디기 어려운 시련들도 많이 겪게 되는 게 인생입니다. 인생은 곳곳에 많은 장애물이 있을 뿐 아니라 그 장애물 코스를 통과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장 큰 장애물은 남(타인)이 아니고 자기 자신입니다. 인생의 문제는 다른 사람에게 찾으려고 하면 해결책이 없는 거죠. 다른 사람을 바꾸려고 애쓰지 말고 자신을 바꾸면 해결의 길이 보입니다. 에드먼드 힐러리(Edmund Hillary) 라는 뉴질랜드 청년이 있었는데, 그가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하려고 나섰다가 실패하고 말았어요. 그가 하산하면서 이런 말을 했답니다. “산아, 너는 자라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자라날 것이다. 나의 기술도 자라나고, 나의 힘도 자라나고, 나의 경험도 자라나고, 등반장비도 발전할 것이다. 나는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기어이 너의 정상에 설 것이다.” 그랬어요. 그는 10년 후에 다른 산악인 두 사람과 함께 역사상 최초로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 올랐어요. 여러분! 세상을 바꾸어 보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자신의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인생이 달라지기 원하십니까? 사고(思考)의 틀을 바꾸십시오. 사고의 틀이 바뀌면 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보는 시각이 달라지면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32장은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20년을 살면서 가정을 이루었어요. 야곱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네 사람의 아내를 얻었고, 12명의 자식들을 얻었어요. 집을 나설 때 마른 막대기 하나 들었던 그의 손에 상당히 많은 재물도 얻었어요. 겉으로 보면 그는 자수성가한 사람이요, 별로 걱정할 것도 없어 보이고 삶의 고민도 없어 보입니다.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울 것 같았는데, 실은 그렇지 않았어요.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20년 전에 쌍둥이 형 에서의 약점을 이용해서 장자권을 가로채고 그 때문에 형의 분노를 사고 도망쳐 나왔던 일이 다시 생각난겁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지겠지... 에서의 분노도 풀리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야곱은 답답하고 두려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어요.
잊을 수 없는 삶의 고통을 겪었을 때, 사람들은 “세월이 약이다. 시간이 다 해결해 줄 거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언쟁하고 좋지 않는 감정을 가졌을 때, 무엇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눈으로 안보면 해결될까요?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생각하세요? 세월은 뒤틀린 인간 관계를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인간의 죄의 문제, 상한 감정은 시간이 해결해 주지 않아요. 홍만종이 쓴 <순오지(旬五志)> 에 이런 말이 있어요. “결자해지(結者解之) 기시자(其始者) 당임기종(當任其終)이라.” 했는데, 이 말은 “맺은 사람이 풀고 처음 시작한 사람이 그 끝을 책임져야 한다.” 그런 뜻입니다. 야곱은 20년이 지난 후에도 에서가 감정이 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어요. ‘어떻게 하면 에서의 마음이 풀릴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마음이 풀리도록 예물을 준비했는데, 암염소 200, 수염소 20, 암양 200, 수양 20, 젖나는 약대 30마리와 그 새끼들, 암소 40, 황소 10, 암나귀 20, 그 새끼가 10마리... 이걸 돈으로 계산하면 얼마 정도 될까요? 재물에 관심이 많았던 에서가 이 정도 재산을 주면 감정을 풀 거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에서의 입장에 있다면 분노를 풀 수 있을 거 같습니까? 이 정도 가지고는 안된다구요? 야곱은 자신의 재산을 떼서 에서에게 보낸 후에도 마음이 불안하고, 근심이 되었어요. 본문 21절~24절을 보면, “야곱이 예물을 보내고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 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네놓고 얍복 나루에서 홀로 남아있었다.” 그랬어요. 여기서 “홀로 남아 있었다” 하는 말은 히브리말로 “바이바테르 이야콥 레바도 wayiwather ya'aqob lebado)”입니다. 우리말로 “야곱이 홀로 넘(어야 할 일이 있었)다. 풍부하게 하다. 따로 (정리해야 할 문제가) 남겨 있다.” 이런 뜻이 있어요. 다시 말하면 야곱의 고민은 재물이 해결해 줄 수 없었어요. 야곱의 두려움은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도 아니었구요. 야곱의 문제는 아내들이나 자식들이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였거든요. 야곱의 마음이 답답하고 두려운 것은 과거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죄의 문제는 재물로 해결할 수 없어요.
여러분! 인간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평안이 없어요. 구원의 문제는 어떤 재물이나 명예로도 해결이 안됩니다. 사도행전 4:12절에 보면,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외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그랬어요. 야곱이 안고 있는 과거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이고, 둘째는 형 에서가 배고픈 상황에서 그의 약점을 이용해서 장자권을 빼앗는 기회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남의 약점을 자신의 성공 기회로 삼는 사람은 결코 자유롭지 못해요. 돈을 좀 많이 벌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정당한 게 아닙니다. 세상의 성공이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사람은 가지면 가질수록 불안하고,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외롭고 공허한 겁니다.
야곱이 왜 혼자 얍복 나루에 남아야 했을까요? 야곱은 조부 아브라함과 아비 이삭의 계보를 잇는 장자권을 받았어요. 그는 선대의 믿음, 그 계보를 잇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행할 사람이죠. 하나님의 약속을 이행하는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죠. 장자권은 단순히 재물을 얻는 도구가 아니요,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얻는 도구가 아니예요. 믿음이 재물과 명예, 부귀영화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삶의 진정한 목적을 잃고 사는 겁니다. 재물을 얻고, 믿음을 잃으면 삶의 가치를 잃게 됩니다. 오직 성공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이미 심령이 공허해집니다. 제퍼슨은 말하기를 “인생의 목적은 승리하는 데 있지 않다. 성숙해지고 함께 나누는 것에 있다.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볼 순간이 왔을 때 남보다 앞서거나 남을 이겼을 때보다 그들의 삶에 즐거움을 안겨 주었을 때 더 뿌듯한 마음으로 돌아보게 된다.” 그랬어요.
하나님께서는 장자의 축복을 받은 야곱이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가? 그걸 깨닫기 원했습니다. 세상의 수단과 방법으로 사는 인생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향해 살기를 원하셨던 거죠. ‘내가 세상에 사는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목적을 알게 되면 평안을 얻고, 삶의 활력을 찾게 됩니다. 지금 나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것을 알게 되면 두려울 것이 없고, 남을 의식하고 비교하면서 마음이 답답하지도 않게 되죠.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니까 삶이 기쁘고 즐겁습니다. 어떻습니까? 지금 여러분(내)은 마음이 평안합니까? 아니면 뭔가 답답하고 두렵습니까? 마음이 공허하고 답답하다면 야곱처럼 혼자 얍복 나루에 남아야 합니다. 여태껏 수단과 방법으로 사는 살았다면, 이제부터 목적을 향해 가는 삶으로 방향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으로 생각이 변화(change)될 때, 수많은 기회(chance)를 얻게 될 겁니다. 삶의 태도가 바뀔 때 미로에서 축복의 통로를 찾게 됩니다.
시각장애자로 미국 연방정부 최고위 공직자가 된 강영우 박사가 <도전과 기회 3C 혁명> 이란 책을 썼는데요. 그 책에서 그가 이런 말을 했어요. “인생사에서 고난과 역경은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기 위한 연단이다... 공평하신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는 한 가지 특별한 재능을 주셨다. 하나님은 그 능력을 계발해서 이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기 원하신다. 내게 주신 재능과 능력을 사용하기 원하시는데, 그게 바로 3C이다. 결국 실력(Competence)과 인격(Character)과 헌신(Commitment)를 갖춘 사람에게 축복이 임한다. 첫째, 실력은 꿈을 실현하는 도구이다. 실력은 집중력과 시관 관리 능력을 개발하고 배움에 대한 열정을 유지할 때 실력이 자란다. 하나님께서 언제 사용하실지 모르기 때문에 평소에 부지런히 준비하고 실력을 키워야 한다. 둘째, 인격은 지적인 교육보다 태도와 가치 교육에 달려 있다. 어렵고 힘들다고 피하지 말고, 시련과 역경을 통해 인간의 고귀한 가치를 배우라. 셋째, 헌신은 학습되는 것이다. 헌신의 자세를 기르면 편견과 차별을 극복하다. 헌신하는 사람은 교육에서 성공하고 인생에서도 성공한다. 리더쉽은 헌신으로 길러지며 준비된 사람에게 기회의 문이 열린다...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문을 열어주시기 위해서 하나의 문을 닫기도 하신다...” 그랬어요.
오늘 본문 24절~25절, 31절을 보세요.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 되었더라... 해가 돋은 후에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그랬어요. 여기서 “어떤 사람” 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이쉬(’iysh)” 인데, 우리말로 “사람, 투사, 동료, (선한, 위대한, 힘센) 사람, 누구든지, 가치 있는...” 이렇게 다양하게 번역할 수 있어요. “씨름하다” 하는 말은 히브리말로 “아바크(’abaq)” 인데, 원래 “안개같이 사라지다.” 라는 뜻이었어요. 그런데 “먼지에 싸이다. 붙잡다. 씨름하다” 하는 뜻으로 사용되었어요. 이 말은 고대 레슬러들이 싸움하기 전에 몸에 분말가루를 발라서 싸웠는데, 그때 먼지가 나고 먼지가 안개처럼 사라진 것을 말한 겁니다.
여러분! 야곱과 씨름하던 그 사람이 야곱을 이기지 못하자,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힘을 빼버렸다고 했어요.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사람의 마음에 두 법이 서로 싸웁니다. 하나는 육신의 생각과 육신의 법을 따르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영의 생각과 성령의 법을 따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육신의 생각과 그 법을 따르게 되는데, 그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결국에는 삶이 곤고하다고 고백합니다. 반면에 영의 생각과 성령의 법을 따르면 생명과 평안을 얻게 되죠. 선한 뜻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서 약삭빠른 꾀를 가진 사람을 이기지 못합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남을 속이고 자기 야망과 수단과 방법을 가진 사람을 이길 수가 없어요. 그런데 약삭빠르고, 꾀가 많고, 수단과 방법으로 사는 사람은 빛이 없는 어두운 곳에서 이깁니다. 참빛이 비치고, 진리의 빛이 비치고, 목적이 드러나면 잔꾀들은 다 부서지게 되죠.
야곱은 얍복 나루에 오기 전까지 그의 성공은 남을 속이고 얻은 것들이었어요. 잔꾀에 능숙했던 야곱은 20년 전에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었고, 20년 후에 마하나임에서도 하나님을 만났어요. 하지만 야곱은 기질이나 생각은 전혀 변하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살려고 하지 않고, 오직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서 부를 축적했어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재물이 많아지는 것을 통해 즐거워하였어요. 야곱이 답답하고 두려워했던 진짜 이유가 뭐였나요? 20년 동안 피땀으로 얻은 재물을 잃게 될까봐서 두려웠던 거죠. 에서가 자신의 행복을 에서가 파괴할까 봐서 답답한 겁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도 지금 이 좋은 환경을 잃게 될까봐서 그런 거 아니겠어요? 현대 교인들 중에는 은혜받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은혜받고 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더 봉사하고 섬기라고 더 많은 걸 요구하면 어떡하나?’ 지금 여기가 좋사오니... 이 상태가 좋은 데... 왜 자꾸 바꾸라고 그러는 겁니까? 답답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원인도 이와 비슷하지 않나요?
여러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빠지지 않고, 남들보다 열심히 기도생활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정을 지키고, 가족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입니까? 내가 수고하고 땀흘려 이루어 놓은 것들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재난이 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겁니까? 아니면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진리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서 그런 걸까요? 하나님께서 원하신 선한 목적을 이루기 말씀을 사모하고 은혜를 사모하십니까? 타성에 젖은 사람은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타성에 젖은 신앙은 불의로 진리를 막고, 진리보다 비진리를 더 좋아합니다. 믿음의 본질보다 비본질적인 문제에 더 매달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그랬어요. 신령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사람은 늘 심령이 새롭습니다. 진리의 빛이 심령을 비출 때 심령이 변화됩니다. 심령이 변화되면 사고의 틀을 바꿉니다. 생각이 1분 동안 바꿔지고, 변화되면 1분 안에 수많은 기회(찬스)가 주어집니다. 변화는 기회의 통로요, 축복의 통로입니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말하기를 “일류 기업이 과거에 성공을 거두는 데 도움을 주었던 제품이나 프로세스, 조직 형태가 이제는 파멸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생존 기업의 제 1 법칙은 과거의 성공을 미래의 가장 위험한 요소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랬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한때 위대한 성공이 자만을 낳고 자만하는 사람은 외부 환경 변화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죠. 마이클 해머 교수는 말하기를 “자신이 잘한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여러분은 이미 죽은 사람이다. 성공으로 가는 요체는 겸손이다. 겸손은 과거의 성공이 미래의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음이다. 세상이 너무 많이 변해서 어제의 성공전략이 내일의 실패를 위한 분명한 처방이 될 수 있다.” 그랬어요.
여러분! 지금까지 야곱이 어디서 재물을 모았습니까? 그가 자수성가 할 수 있었던 배경이 어디였나요? 외삼촌 라반의 집이었어요. 외삼촌의 배경 안에서 재물을 모으고, 가정을 이룬 겁니다. 그러나 야곱이 앞으로 갈 곳은 가나안 땅이요, 혈연이나 신앙적인 환경이 전혀 다른 곳이었어요. 야곱의 성품, 그의 사고, 그 경험, 그의 믿음을 가지고 미래를 헤져나갈 수 없었던 거죠. 야곱은 에서를 두려워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않고, 불의로 진리를 거스리는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이 더 두려웠던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이름을 바꿔주시면서 변화되기를 원하셨어요.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지금 저와 여러분이 성령의 법을 따르는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본문 28절~29절을 보세요.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그때 야곱이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그건 네가 알아서 뭐하느냐? 네가 변화되면 되는 것이지... 하고 말한 후에 그 사람이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그랬어요.
기회와 축복의 통로에는 하나님의 저울이 하나 놓여 있어요. 그 저울에 인간의 삶을 올려놓고 저울이 어디로 기울고 있는가? 그걸 보십니다. 야곱의 인생을 하나님의 저울에 올려 놓았을 때, 야곱은 수단과 방법으로 얻을 것을 행복으로 여긴 것이 52%였어요. 자신의 꾀와 수단과 방법으로 2%가 기울어져 있다는 것은 마음의 평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2%가 부족하다.” 하는 말이 있죠? 2% 때문에 저울은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게 됩니다. 그릇(마대) 용량이 같으면 잘 안들어 가죠? 같은 용량의 마대 하나를 구겨 넣어야 하죠. 그때 아주 자존심 상하기도 하고, 모욕을 견디지 못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 들어갈 때 더 안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면서 52%가 하나님과 더불어 살면서 승리하기를 원하셨어요.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사람은 자기를 낮추고 겸손합니다. 프레이어 스타크는 말하기를 “예의범절이란 수학의 0과 같은 것이다. 그 자체로는 가치가 없어 보이지만 다른 것에 붙여지면 가치를 크게 더해준다.” 그랬어요. 0에 아무리 많은 0을 더해도 0입니다. 그러나 1에 0을 더하면 더할수록 그 가치가 달라지는 겁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고 자신을 낮추니까 에서도 변화되고 이스라엘을 에스코트 하겠다고 했어요. 겸손은 아무 것도 아닌 거 같은 데, 그게 사람을 얻게 합니다.
여러분! 축복받은 삶이 계속해서 지속하고, 보전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변화를 요구하실 때 자존심을 내려놓으세요. 욕망과 수단, 죄와 허물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변화에 순응하십시오. 변화는 기회의 통로요, 축복의 통로입니다. 축복의 통로는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사람에게 열립니다. 야고보 기자는 말하기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4:8,10) 오직 주님을 향한 마음으로 성결케 하십시오. 그러면 생명의 보전되고, 주님을 향한 삶의 변화가 축복의 통로로 인도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