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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연추의병의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
이범윤의 연추의병부대가 조직된 시기를 전후해서 국내는 후기의병 즉, 의병의 최고조기로서 북한지역에서도 의병항전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즉 삼수(三水)·갑산(甲山)·무산(茂山) 등 함경남도 북부 국경지역에는 홍범도(洪範圖)·차도선(車道善) 등 의병부대를 비롯 하여 함경북도 국경·두만강 지역에는 최덕준(崔德俊)·장석회(張錫會)·이남기(李南基) 등 의병부대들이 항일의병투쟁(抗日義兵鬪爭)을 전개하였다. 한편 북간도 와 연해주 해삼위· 수청(水淸)·추풍(秋風) 등지에서도 의병활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연추의병부대는 국내의병부대 뿐만 아니라 북간도 및 연해주 각지의 의병들과 상호 협력, 연계하여 항일전 (抗日戰)을 전개하려고 계획하였다. 이 연추의병부대의 국내진격로는 북간도에서 두만강 상류를 건너 함경남도로, 두만강 하류를 건너 함경북도로, 그리고 동해안을 따라 함경북도로 상륙하는 세갈래가 있었다.
1908년 들어서서 연추의병의 활동이 본격화되었다. 6월에 노국 남(南)우수리 국경정권위원 스미르노프가 연해주 군무지사 플루크에게 한국 의병의 활동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우리 국경에서 조선인들 사이에 항일운동이 미미한 수준이나마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운동은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우리 공민인 한인들, 또한 일본에 의해 잔혹한 박해를 받고 착취를 당하는 자신들의 조국에 대한 동정심에 의해 움직이는 국외 한인들 할 것 없이 모두에 의해 대규모로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중략) 조선의 북부와 서부에서 수개 도시가 그들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5월 초 일본인들에게서 빼앗은 무산(茂山)은 아직까지 반란군(한인 의병-주)들의 점령하에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한인들의 원기를 붇돋우고 있으며, 그들은 동만주와 우리나라에서 자금 모금과 무기 구입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현재 조선 애국지사들의 활동은 블라디보스톡과 수챤·수이푼 진영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한편, 일제는 밀정(密偵)을 연추 등지에 파견하여 연추의병부대의 동정을 파악하고 있었다. 특히 연추 이범윤의병부대에 대한 일본군 수비대의 한 보고는 다음과 같다.
이범윤이 의병을 일으켜 아연안(我沿岸)의 수비대를 습격하려 한다는 정보는 이미 오래다. 1908년 1월 경부터 빈번히 전해 왔으나 당시 전혀 그 실적(實跡)을 불 수 없었다. 본년 4월 30일에 청기소좌(晴氣小佐)가‥‥ 내정(內偵)한 결과 사태가 경시하기 어려움을 알고 5월 4일에는 도문강연안(圖們江沿岸) 각 수비대 병력을 증가하여 연안경비를 엄히 하였다.
연추의병부대는 1908년 4월 이후 산발적인 두만강(豆滿江) 도강작전(渡江作戰)과 정찰행동(偵察行動)을 시도하여 동년(同年) 여름 본격적인 국내진공작전을 감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작전의 목적은 부대를 100명 내외의 소부대로 나누어 비교적 일본군수비대의 경비가 약한 지점을 골라 산발적인 도강(渡江) 상륙작전을 전개하는 것이며 국내진공에 성공한 각 부대는 갑산(甲山)·무산(茂山) 등 예정지점에 집결하여 장기적(長期的)이며 항구적(恒久的)인 국내항쟁(國內抗爭)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연추의병부대는 국내진공작전에 앞서 선발대를 함북일대에 잠입시켜 일본군 수비대의 배치상황을 정탐하였고 회령과 경선 사이의 철도를 파괴하고 전선을 절단하였다. 즉 1908년 음력 4월 초순에는 좌령장(左領將) 엄인섭 부대가 두만강 하류 지역인 상리(上里)(경흥군 노면)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수비대를 급습하여 수비대원 10여 명을 살상하고 그 지역 일대의 지형 정찰을 마치고 본대로 귀환하였다.
한편 우령장(右領將) 안중근 부대는 두만강을 건너 홍범도 부대와 연결하기 위해 서두수(西頭水)의 상류지역으로 진출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만주를 거쳐 연해주로 되돌아오다가 4월 22일 두만강연안의 농사동(農事洞)에 도착하였다. 이 때 일본군 무산수비대의 급습으로 큰 타격을 받아 서쪽의 백두산 기슭으로 패퇴하였다. 안중근 부대는 많은 병력을 잃고 밀림 속에서 일본군의 추격을 피한 다음, 천신만고 끝에 연해주로 귀환하였다.
연추의병부대의 국내진공작전은 1908년 7월부터 그 해 9월까지 약 2개월동안 지속되었다. 연추의병부대의 국내진공작전의 중요전투는 다음과 같다.
① 홍의동(洪儀洞)전투(1908. 7. 7)
전제덕 대장 휘하 좌영장 엄인섭과 우영장 안중근은 각기 100여명의 의병을 인솔하여 7월 5 일 연추를 떠나 장고봉(長鼓逢)을 넘어 두만강 하류를 건너 경흥군 증산(甑山)을 지나 고읍(古邑) 홍의동을 점령하였다. 이 때 경흥의 일본군수비대와 첫전투를 벌여 일본군 척후병 4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홍의동전투에 대한 일본군측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7월 6일 약 1백여명의 폭도는 고읍(古邑) 동남 약 20리 지점인 증산(甑山)에서 도문강을 건너 고읍(古邑)서방 산지로 침입하여 왔다. 이 보고에 접한 경흥수비대는 상등병 이하 4명의 척후를 파견하였다. 척후대는 고읍 남방에서 폭도의 손에 의하여 전원이 참살당하였으므로 동부수비구 사령관 환정소장(丸井少將)은 회령 ·웅기 ·경흥 등 각 수비대에게 서로 책웅하여 적을 포위 전멸케 하도록 명령하였으나‥‥‥
일본군과 싸워 승전한 연추의병부대는 일본군 대부대의 출동에 대적하지 않고 작전상 산간으로 피하면서 타의병부대와 합류하기로 한 목적지인 갑산·혜산진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도중에 일본군과 산발적인 접전을 치르기도 하였으나, 이들은 일본군을 격멸하기보다는 목적지에 도착하여 활동 거점을 확보하는 데에 주안을 두고 있었던 만큼, 가능한 한 일본군과의 충돌을 회피하였다.
우영장 안중근은 홍의동전투에서 좌영장 엄인섭부대가 일본군 척후병을 사살함으로써 확실히 국내침투작전(國內浸透作戰)의 최후 목적을 망각하는 과오를 범하였다고 말하였다. 즉 산발적으로 도강(渡江)한 각 부대는 우선 예정된 한 지점에 집결하고 집결 후 대대적이며 장기적인 국내항쟁을 시도한다는 것이 이 작전의 최후 목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급히 소수의 일본군을 공격함으로써 일을 그르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안중근은 작전도중 일본군 수명을 사로잡았다가 이들 포로들을 꾸짖고 나서 '만국공법(萬國公法)'에 따라 모두 석방하였다. 그러나 석방된 일본군 포로들에 의해 부대위치가 노출됨으로써 뒷날 (7월 19일 이후)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안중근부대 등은 패산되어 후퇴하게 된 것이다.
② 신아산(新阿山) 전투(7.10)
연추의병부대의 김모부대장이 2백여명의 의병을 인솔, 허센마꺼우(합십마구(哈什 溝))를 출발하여 역시 두만강 하류를 건너 경흥 북방으로 진격, 신아산을 점령하고(7.9), 이튿날 10일 새벽 신아산 헌병분견대를 습격하였다. 2시간의 교전 끝에 수비대 진지를 파괴하고 일본군 1명을 사살, 5명을 행방불명케 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신아산전투에 대한 일본군측 기록은 다음과 같다.
본부수비사령관(환정소장(丸井少將))은 회령·웅기·경흥 각 수비대로 하여금 적을 전멸케 하도록 명령을 하였으나 아직 행동을 개시하기 전인 7월 10일 오전 5시 폭도 약 2백이 신아산분견대를 습격하여 왔다. 폭도는 극히 표한한 동작으로 분견대를 포위하여 동대 하사 9명은 분전 2시간 만에 탄약이 다하여 부득이 포위의 일각을 돌파하고 경흥수비대 소재지로 패주하였다. 이 전투에서 행방 불명이 된 하사 5, 전사 1명을 냈다.
이상의 두 전투는 연추의병부대의 대표적 승첩이다. 초기 의병들의 사기가 충천되어 있었고, 전투력 또한 비교적 강력하였으며 선제공격이 주효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반면에 연추의병의 국내진공작전에 참패한 일제는 그 대책에 부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일제는 청진수비대에서 파견된 장교 이하 70명은 11일 오전 기선으로 웅기에 상륙하여 그곳 수비대와 함께 출동시키고, 또 회령 보병 제49연대 제9중대를 신아산으로 출동시켜 10여일이나 연추의병을 수색하였으나 의병부대의 은현출몰이 민첩하여 찾지 못하였다. 일본군 수비사령관 환정소장(丸井少將)은 다시 용당(龍堂) 신아산(新阿山) 부근의 도하점(渡河點)에 병력을 증가하여 도문강 좌안으로 의병이 이동하는 것을 방지함과 동시에 재 경성(鏡城) 삼원중좌(三原中佐)에게 전기 방면의 '토벌지휘'를 시키기 위하여 7월 16일 회령으로 출발시키는 등 광분하였던 것이다.
홍의동 및 신아산 전투 후(7월 20일 전후), 일본측 기록을 바탕으로 종합한 전황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연추의병부대의 김정위·현진현 등이 인솔한 2백여명은 역시 연추를 출발해 두만강을 건너 홍의동과 신아산 방향으로 진격하였으며, 지운국 등 인솔한 6백여명은 두만강 하구의 녹둔(鹿屯)에서 중국선편을 이용해 청진과 성진 사이의 해안으로 상륙하였다. 육로를 이용한 전자는 무산 혹은 삼수를 진격 목표로 설정하였고, 해로를 택한 후자 역시 내륙으로 들어가 갑산으로 진격하는 공격루트를 설정함으로써, 육해 양면의 동시진격으로 북한지역을 교란시킨 두 의병부대는 삼수나 갑산, 혹은 무산 등지에서 다시 합류하기로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이들 의병부대들은 회령지역으로 계속 진격해 갔던 것이다.
③ 철도(鐵道)·전신(電信)·전선(電線)파괴 공작(7.11-12)
연추의병부대의 150명이 경원 남쪽 융동(隆洞)(소재불명 - 주)지역까지 신출귀몰(神出鬼沒)한 작전으로 진격하여 일본군과 교전하면서 11일에서 12일 사이에 회령-경성 간의 경편철도를 파괴하고 동시에 일본군 통신 및 전선을 절단하여 경원일대의 일본군 운수와 통신시설을 마비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에 다급해진 일제는 경원우편취급소 직원들을 훈융(訓戎)으로 긴급 대피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경원(慶源) - 종성(鍾城) 중간에 북창평(北蒼坪) 역시 의병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1일 오후에는 다시 경원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④ 고건원(古乾源)전투(7.13)
연추의병부대는 2백여명의 병력으로 경원군 고건원의 일본군수비대를 습격하여 일본군 5명을 전사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⑤ 계상사(溪上社)전투(7.14)
연추의병부대는 100명의 병력으로 경성군 계상면 일본군수비대를 습격하고 그 곳 전주를 파괴하였다.
⑥ 용성사(龍成社)전투(7.16)
의병부대는 회령 용흥면 용성사를 점령하고 행영(行營)지역의 일본군 침략시설인 통신·전설을 파괴하였다.
⑦ 회령(會寧)전투(7. 18)
7월 17일 연추를 출발한 김영선(金永先) 연추의병부대장은 100명을 인솔, 회령남방 2㎞지점까지 진격·점령하였다.
이 연추부대는 김영선을 대장으로 하고 그 아래 김찬호(金鑽浩), 김규명(金奎明) 등이 지휘를 하였고, 그 아래에 임일록(林日錄)·정성삼(鄭成三)·허근(許謹)·김수천(金守千)·홍봉익(洪奉翼)·이두용(李斗用)·남병성(南丙星)·황학섭(黃 學燮) 등이 말단 지휘를 맡았다. 이들 의병 역시 진격 목표지를 무산(茂山)·갑산(甲山)을 설정해 국내 의병과의 연계를 도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김영선 부대는 회령 영산(靈山)으로 가는 도중에 용성에서 탄약을 제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⑧ 영산(靈山)전투(7. 19)
국외의병과의 연합을 위하여 무산·갑산을 목표로 진격하던 연추의병부대들(전제익 휘하 엄인섭·안중근·김영선 부대 등)은 회령에서 합류하여 영산 창대평(蒼大坪)에서 전열을 정돈하기도 전에 일본군수비대와 맞서 두차례의 교전끝에 패배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연추의병부대들은 패산하여 차츰 연추 등지로 귀환하게 됐으며 국내 진공작전은 일단 중단되고 말았다.
영산전투 패배는 오랜 행군과 연전으로 인한 의병의 전력소모와 국내 함남·경성의병부대의 열세 등 전반적 의병세의 약화에다가 의병부대간의 군의(軍議)가 맞지 않아 합동(合同)작전에 실패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막강한 일본군의 공세에 말미암은 것으로 판단된다.
⑨ 멱사동(覓沙洞)전투(7, 21)
연추의병부대는 지난 용성사(龍成社)·영산사(靈山社)전투 후에 일본군의 추격을 현혹시키면서 21일에는 멱사동에서 일본의 전신(田申)·소관(小管)·빈도(濱島) 등 부대와 교전하여 격퇴하였다. 때마침 짙은 안개로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본군은 아무 소득없이 퇴각하고 말았다.
⑩ 장풍동(長風洞) 1차(次)전투(7. 25)
연추의병 약 80명이 두만강을 도강하여 경성군 장풍의 일본군수비대와 교전 끝에 일본군을 격퇴하고 장풍을 점령하였다.
⑪ 회령군전투(7. 29)
연추의병 약 100명이 회령군내의 각지에 진공하여 의병의 기세를 높였다.
⑫ 서수라(西水羅)전투(8. 4)
엄인섭부대 휘하 이명호(李明虎) 인솔의 2,30여명의 의병부대는 두만강 하류 경흥군 노서면(蘆西面)의 서수라(西水羅)를 기습하여 점령하였다. 일인경영의 어장 대성조(大成組)를 습격, 일인 어부 14명을 살상(殺傷)하고 어망 등 어구를 노획하였다. 그리고 현지의 다수의 한인들을 데리고 연해주로 회군하였다. 이에 일제는 웅기경흥 등지의 수비대· 순사대를 출동시켰으나 연추의병부대는 이미 철수한 뒤였다. 일인어장 습격은 일제의 경제침략을 응징한 것이다.
⑬ 중도(中島)전투(8. 9)
연추의병 50명이 회령군 중도(中島) 북방 약 10리 지점에서 수 미상의 일본 척후장교들과 교전하여 격퇴하는 전과를 올렸다.
⑭ 장풍(長風) 2차(次)전투(8. 25)
병력 미상의 연추의병부대는 경성군 장풍에서 일본군수비대와 교전하여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⑮ 명천(明川)전투(9. 3)
연추의병 등 연해주의병부대는 대한협회(大韓協會) 경성지부(鏡城支部) 회원(會員)들과 연계된 경성(鏡城)의병부대와 상호연합하여 명천주둔 일본군수비대를 기습, 일본군을 격멸시키고 명천읍을 하루동안 일본군으로부터 해방· 장악한뒤 이튿날 철수하였다. 경성의병 참모 장인 김정규(金鼎奎)는 이 날의 전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 날(9월 3일-주) 저물녘에 입석장(立石場)(명천읍 북동리 15리-주)에서 온 사람의 말을 들으니, 지난밤 새벽 4시경에 관리군(管理軍)이 명천읍(明川邑)을 에워싸고 사격을 가해 하루 밤낮 전투에 성내(城內) 왜적(倭賊)의 사망자는 그 수를 알지 못할 정도라고 한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대단히 기뻤다. 일역서(日譯書)(일본신문…주)가 오지 않았으므로 비록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장(壯)할시고 관리군(管理軍)! 힘내라 의군(義軍)들아! 어찌 후에 두고보지 않겠는가?
16) 칠반동(七班洞)전투(9. 18-19
9월 18일 약 100명의 의병부대는 경성과 명천사이의 칠반동(七班洞)에서 성진국(城津局)으로부터 출장나온 일인 통신공부(通信工夫)의 일행을 습격하였으며, 동시에 이날 원산-경성 사이와 북청(北靑)-경성사이의 전선도 파괴하였다 . 다음날인 19일은 50여명의 의병이 일본군 '토벌대'와 교전을 벌여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7월-9월의 2개월에 걸친 연추의병부대의 지속적인 국내직공작전은 우선 함경도 내륙의 삼수·갑산·무산지역을 목적으로 집결하여 이 일대에서 활동하던 경성 또는 홍범도 의병부대와 합세함으로써 항일공동전선(抗日共同戰線)을 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장기적이며 항구적인 국내항쟁을 시도, 국권을 수호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연추의병부대의 국내진공작전을 정탐한 일본 경찰측의 정보는 다음과 같다.
이범윤의 계획은 갑산(甲山)·혜산진(惠山鎭)·무산(茂山) 등을 기점으로 하여 비밀리에 대안(對岸)지방(국내(國內))과 각지의 폭도와 연락하여 이상 삼개소(三箇所)에 삼삼오오 잠행집주(潛行集注) 할 책(策)을 강구하고 있다고 한다. 이리하여 적도(賊徒)가 800명에 이르면 일제히 활동을 개시할 계획이다. 더욱이 주창(主唱)하는 바에 의하면 되도록 다수(多數)의 토벌대(討伐隊)와의 충돌을 피하고 소수(小數)의 군대·헌병·경찰관의 주차에 대해서는 극력 습격을 가하여 목적을 달성하려 하고 있다고 한다.
연추 이범윤의병부대의 국내진격작전으로 함경북도 북부지역인 경원·경흥·온성·회령 등에 의병의 기운이 충천하게 됨에 따라서 이에 당황한 일제는 7월 초에 이미 일본군 한국주둔 동부수비관구(東部守備管區) 사령관은 압록·두만강 일대의 연안경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수비대병력을 증강 배치하였고 진해만방비함대(鎭海灣防備艦隊)의 일부를 북한(北韓) 연해경비(沿海警備)로 돌리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7월 25일, 흥남 서호진(西湖津)의 일본군 기병중대(騎兵中隊)와 산포소대(山砲小隊)들을 군함 '인천환(仁川丸)'에 태워 급히 청진으로 출동시켜 경성수비구사령관 태전대좌(太田大佐)부대에 예속시키고, 태전(太田)사령관은 26일 회령으로 집결하였다. 28일에는 야본해군소장(野本海軍少將)이 군함 '명석호(明石號)'를 지휘하여 성진을 출범, 청진으로 출동했으며 서울 주둔 보병까지 중원군으로 '사림환(士林丸)'에 태워(27일) 신포(新浦) 독진(獨津)에 집결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함경도 북부지역에서 활약하던 연추의병부대 등의 국권수호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국내 진격한 연추의병부대는 국내의 함경남도(홍범도·차도선 등)·함경북도(최덕준·이남기 등) 의병부대와의 연합작전이 실패하면서 분산·지구전을 폈으나 전력의 한계로 대일항전이 여의치 못하였다. 특히 화력과 수적으로 일본군에 비해 열세였던 의병부대들은 그 활동이 위축 내지 저조할수밖에 없었으므로
자연히 이들 의병부대들은 연추 등 연해주 또는 북간도 서간도 등지로 귀대 철수하거나 망명길에 올랐다. 그리하여 1908년 가을 이후 연해주를 근거로 한 국내진공작전의 의병운동은 퇴조기에 들어갔다.
자료정리. 민족자주연맹 상임의장 강석현
첫댓글 각나라에서 가장 자랑스럽고 비중을 두는 역사분야가 독립무장투쟁사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나라에서만큼은 역사연구자들에겐 금기의 영역으로 연구논문으로 통과가 않된다 하며 같은 연유로 교과서에서도 잘 다뤄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니 답답함 그지 없습니다ㅠㅠ 이때의 역사는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음이 역사학도로서 자연스레 알게 됩니다!!!
둥근이님 의견에 동감합니다.
위정자들의 역사바로잡기 의식 부재와 부족의 결과입니다
* 역사를모르는자 이민족의 지도자가 될수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