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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를 받으신 예수
마 3:13-17
13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14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 3:13-17 /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다;막1:9-11,눅3:21-22] 그 무렵 예수께서도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리에서 요단강으로 오셨다. 14) 그러나 요한은 사양하며 이렇게 말을 하였다. `당치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주께 침례를 받아야할 사람입니다.' 15)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우리가 이렇게 하여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께 침례를 베풀었다. 16) 예수께서 침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는 순간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같이 자기 위에 내려오는 것을 보셨다. 17)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 왔다. `이 사람은 사랑하는 나의 아들이요,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본문은 죄 없으신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받으시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예수의 겸손과 더불어 세례의 참 의미대로 자신을 쳐서 죽이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13-15)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신 예수께 오히려 자신이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으십니다(15). 세례는 ‘물에 잠긴다’, ‘물로 씻는다’, ‘충만하다’는 뜻으로 죄를 씻는 행위입니다. 세례 받을 때 물속에 잠기면서 더럽고 추한 옛 생활을 죽이고, 물에서 나오면서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신 예수께서는 이런 일들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자신이 죄인과 동일시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그 의미를 정확하게 설명하였습니다(고후 5:21).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16-17)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렸습니다. 이 때에 하늘로부터 다음과 같은 소리가 있었다고 마태는 전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17) 예수의 세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께서 완전한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세례를 받으시는 성자 예수와 이를 기뻐하시는 성부 하나님과 비둘기처럼 임하신 성령 하나님입니다(16). 이것은 성부, 성자, 성령님은 일체이심을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특별히 육신을 입고 계신 예수를 구원자로 믿는 자마다 양자로 삼아주시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롬 8:15). 그리고 성도들을 향하여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갈 4:7)고 축복하셨습니다. 이런 사실을 의심할 수 있기에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신다고 했습니다(롬 8:16). 이로써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로서의 사역을 차곡차곡 열어가셨습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큰 사명뿐 아니라 하나하나 다가오는 크고 작은 모든 일에도 순종하여 이루어가시는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적용: 당신은 세례를 받았나요? 받았다면 날마다 세례의 삶을 살길 바랍니다. 세례의 삶은 자신은 십자가에 못 박고 내 안에 예수가 사시는 삶입니다.
이사야 41장 12-13절 말씀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네게 노하던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너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될 것이며 멸망할 것이라 네가 찾아도 너와 싸우던 자들을 만나지 못할 것이요 너를 치는 자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허무한 것같이 되리니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 하나님은 자기 사람을 보호하시고 이길 수 있도록 함께 하십니다.
< 설 교 >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신 이야기
마 3:13-17 / 박봉수 목사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 중에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두 가지 의문입니다.
하나는 세례요한이 베푸는 세례는 회개의 세례인데, 왜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이 세례를 받으셨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했던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죄를 씻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14-15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예수님께서 명하셔서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푼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당시 사람들이 세례요한을 찾아와 세례를 받은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과 달리 세례를 받으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 이유를 깨달을 때 우리에게 주시는 소중한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모든 의를 이루는 것”
본문 1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이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로 의를 이루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의’란 무엇일까요? 원어로 ‘디카이오쉬네’(δικαισύνη)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것”이라는 뜻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의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일이요, 그 일에 합당한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사람들이 볼 때는 이상한 일이요,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올바른 일입니다.
마 1:23을 보면,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하신 일들은 이런 것들입니다. 우선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인간이 되게 하셨습니다. 다음으로 죄 없으신 분을 죄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 값을 치르시기 위해 죽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한 일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바로 예수님이 죄인의 자리에 서시는 일입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시지만 회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죄인이 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죄 값을 치르시기 전에 먼저 죄인이 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죄인의 자리까지 내려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신 일이요, 곧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한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빌 2:5-8 말씀을 생각하게 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 우선 당신을 비우셔서 인간이 되셨고, 다음으로 스스로 낮추셔서 죄인의 자리에 서셨고,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신 이 이야기는 바로 예수님의 낮추심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 위해 낮추셨다는 것입니다. 죄인의 자리까지 낮추셨고, 자기를 위해 일하는 일꾼에게 세례를 받으시기까지 낮추신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역사는 자기를 낮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결코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높인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모세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모세는 나이 40에 애굽의 왕족이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을 돕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미디안 광야로 쫓겨 가게 하셨고, 그곳에서 양치기로 살게 하셨습니다. 왕족이 양치기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낮추신 것입니다. 그렇게 40년 동안 철저하게 낮아진 채 살던 모세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하게 하셨습니다.
다윗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대신하여 다윗을 택하셔서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그 후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에 나섰습니다. 놀랍게도 다윗은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그후 백성들이 다윗을 높입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다윗을 사울 대신 왕의 자리에 앉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울에게 시기와 미움의 대상이 되게 하셨고, 사울에게 쫓겨 도망자 신세가 되게 하셨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다급한 도망자로 십여 년을 살게 하셨습니다. 낮추시고 또 낮추신 것입니다. 그렇게 낮아진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낮아진 사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결코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다시 말하면 교만한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낮아져서 자기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체험하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훈련과 준비가 된 사람, 그들을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말입니다.
자연을 보며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산은 해발이 무려 8848미터나 됩니다. 그 꼭대기에는 그 어떤 생명체도 살지 못합니다. 사람이 그곳에 등정을 해도 잠시 머물고 빨리 내려와야 합니다. 산소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나무가 생존할 수 있는 한계를 ‘수목한계선’이라고 하는데, 그 높이는 불과 해발 3000미터밖에는 안 됩니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살려면 낮은 곳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의 역사를 이루려면 낮은 곳에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그렇습니다. 높아지면 아무런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낮아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려면 낮아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도 모르게 어느새 높아져 있지는 않는지? 계속 높아지기만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는 않는지? 예수님을 본받아 낮아지기 위해 힘써야 하겠습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아주 특별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어떤 사람이 세례 받을 때 일어나지 않았던 일입니다. 본문 16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예수님께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세례 받을 때 성령이 임했던 일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사 61:1-2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며,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이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메시아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그 후에 메시아로서 여러 가지 사역을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이 강림한 것은 이미 예언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언에 따르면 성령이 강림한 뒤부터 본격적으로 메시아 사역이 시작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을 받으신 뒤부터 본격적으로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례 받으신 사건이 사생애와 공생애를 구분 짓는 분기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30년을 사생애를 사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인간으로서의 삶을 충실히 사신 것입니다. 이제 3년의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메시아로 구원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때부터 성령이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으셨다는 것입니다.
행 19:3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바울이 에베소에 와보니 이미 교회가 있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부족한 점이 있어보였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저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당시 에베소 교인들은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세례를 받았는데 물세례만 받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을 받으신 것처럼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부족해 보였던 것입니다.
배를 생각해 봅니다. 옛날에 노 젓는 배만 있었습니다. 사람이 힘겹게 노를 저어야 배가 물살을 가르고 앞으로 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큰 바다로 나갈 수 없었고, 조그만 풍랑이 일어도 항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범선이 나타났습니다. 큰 돛을 달고, 바람의 힘으로 배가 힘차게 앞으로 나갑니다. 큰 바다로 나갈 수 있습니다. 웬만한 파도나 풍랑은 헤치고 나갈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해 낼 수가 없습니다. 마치 노 젓는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을 덧입을 때 고난도 극복하며 신앙생활을 잘 해 낼 수가 있습니다. 마치 돛단배 범선을 타고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 힘만으로 기도하려 할 때 참 힘이 듭니다. 30분 이상 기도하기가 힘이 듭니다. 집중도 잘 안되고, 기도할 말도 없고, 다리에 쥐도 나는 것 같고... 그러나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의 도움을 힘입고 기도하면, 언제 시간이 갔는지 모르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철야도 할 수 있고, 며칠 금식기도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나는 성령을 받았는가? 나는 성령의 도움을 힘입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또 다른 특별한 일이 있었습니다. 역시 그 어떤 사람이 세례 받을 때 일어나지 않았던 일입니다. 본문 17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려왔다는 것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예수님께만 들려주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세례를 베푼 세례요한은 물론이고, 세례 받기 위해 나온 많은 사람들이 다 듣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공개적으로 선포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이미 구약에 예언된 말씀이었습니다. 시 2:7을 보면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하나님께서 공개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이 말씀이 세상에 선포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공개적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공적으로 예수님께 권세를 주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마 28:18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권세를 위임 받으셨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그 권세를 받으신 것입니다.
병원마다 ‘의사자격증’을 걸어놓았습니다. 성명, 전문 과목, 생년월일, 성별 등을 기재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자격취득의 근거가 되는 법 규정과 취득한 날짜를 표기해놓았고, 보건복지부 장관 직인이 찍혀있습니다. 이 자격증이 의사가 의사로서 진료할 수 있는 권세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허락하신 자격증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메시아로서 권세를 행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세례 받으실 때 공식적으로 이 권세를 받으신 것입니다.
요 1:12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참 많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권세, 아버지께 나갈 수 있는 권세, 아버지께 기도하여 응답받을 수 있는 권세, 주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권세,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권세, 그리고 천국을 상속받을 권세 등입니다. 우리가 이런 권세를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일전에 이해할 수 없는 뉴스를 본 일이 있습니다. 50억 재산가가 노숙을 하고 있다는 뉴스입니다. 부모로부터 토지보상금 50억을 유산으로 물려받고 은행에 넣어두어 매달 1000만원씩 이자를 받고 있는 사람인데, 인천, 서울, 천안을 떠돌며 노숙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뉴스를 들으면서 떠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영적으로도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의 권세를 주셨는데, 그것을 쓰지 못하고 영적인 고아처럼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적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신 후에 하나님께 놀라운 권세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권세를 잘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고,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주님께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 권세를 잘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 풍성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알찬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세례 받은 자의 4대 삶
마 3:13-17 / 이한규 목사
< 세례 받은 자의 삶 >
본문에는 예수님이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는 장면이 나온다. 본문이 주는 교훈으로써 세례 받은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1. 예수님처럼 낮아지라
세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 때 예수님이 갈릴리로부터 요단강으로 가셨다(13절).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서였다. 왜 예수님이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는가?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죄 안에서 육신이 죽고 하나님 안에서 다시 새롭게 산다는 상징적인 표식으로 받으셨다. 예수님은 세례를 통해 낮아지셨다. 성도도 그처럼 낮아져야 한다. 무속적이고 기복적인 종교는 낮아지면 손해라고 하지만 기독교는 낮아질수록 오히려 은혜를 입는다고 한다.
기도할 때 자신만 무조건 좋게 해달라는 기복적인 기도는 응답이 없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집 백 채를 사 놓고 집값이 오르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는다. 사는 집보다 삶의 질이 중요하다. 부동산 가치의 폭등은 절대 다수의 은행에 내는 이자가 많아지게 한다. 그러면 은행은 부유해지고 다수가 가난해지다가 언젠가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 더 많은 다수가 한탄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
나의 기도가 남의 눈물과 공동체의 어둠을 확대시키는 기도가 되지 않도록 이렇게 기도하라. “하나님, 저의 집값은 떨어져도 부동산이 안정을 찾아 나라 경제가 한꺼번에 추락하지 않게 하소서. 지금 위태합니다. 힘든 사람들이 더 힘들어질까 염려됩니다.” 그렇게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며 사랑과 긍휼의 기도를 은밀히 드리는 사람이 곳곳에 있으면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기도할 때 손해와 희생과 낮아짐과 죽음을 각오하고 기도하라. 그런 의로운 기도가 최선의 응답을 가져다준다. 요새 많은 사람이 믿음의 기도를 오해한다. 내용적으로는 기복적인 기도를 드리면서 “믿습니다. 믿습니다.”라고 외치는 것을 믿음의 기도로 오해한다. 그런 기복적인 기도는 더 응답이 없다. 예수님처럼 낮아지고 희생하는 사람의 기도가 능력 있는 기도다. 낮아지기를 각오할 때 더 높아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2.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
당시 세례 요한은 백성들 사이에 몇 백 년 만에 등장한 선지자로 여겨질 정도로 추앙받았다. 그런 그가 세례 받으려고 오신 예수님을 보는 순간 상상을 초월한 고결함과 위엄에 압도되어 자신이 예수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왜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오시느냐고 말했다(14절). 그때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15절).”
왜 예수님은 자신이 세례 받도록 허락하라고 하셨는가? 그렇게 해서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그 뜻대로 하는 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하셨다. 성도가 모든 의를 이루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율법과 도덕 기준에 완벽하게 맞춰 살아야 하는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힘써 사는 삶이 모든 의를 이루는 삶이다.
예수님이 “내가 세례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의를 이루는 것이다.”라는 의미로 말씀하자 세례 요한도 어쩔 수 없이 예수님에게 세례 주는 것을 허락했다. 예수님은 물론 세례 요한도 하나님의 뜻을 앞세웠다. 그처럼 하나님의 뜻을 앞세워 살면 세례 요한처럼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고 더 나아가 예수님처럼 살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이 얼마나 복된 삶인지를 잘 말해 준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가? 일상의 기도를 체질화시키라. 진실하게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이 점차 알아진다. 사실상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최고의 기도 응답이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힘써 순종하려고 하라. 내 권리를 하나님께 드리고 내 자녀와 사업과 성격과 취미와 물질까지 하나님께 드리려는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의 뜻이 알아진다. 그리고 그 뜻대로 살려고 할 때 삶에 기쁨과 평화와 행복이 넘치게 된다.
3. 성령 충만하게 살라
예수님이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셨다(16절).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린다는 표현은 성령님이 내리는 모습이 비둘기가 내려앉는 모습이라는 해석, 성령님의 모습이 비둘기 같은 모습이라는 해석, 성령님이 내릴 때 실제로 예수님의 머리 위에 비둘기가 날고 있었다는 해석 등이 있다. 어느 해석이든지 그 표현이 도전하는 삶은 세례 받은 성도는 성령 충만하게 살아야 하고 성령 충만한 삶의 핵심 내용은 비둘기처럼 평화를 추구하는 삶이라는 것이다.
성령 충만한 삶은 율법적이고 경직된 형태의 거룩한 삶을 의미하기보다 천국 기쁨과 찬란하고 거룩한 비전과 열정이 넘치는 삶이다. 시인 워즈워드는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마음이 뛰논다고 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뛰논다. 젊음과 늙음의 차이는 나이 차이보다 오히려 비전 차이가 크다. 앞날에 대한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찬란한 비전을 향해 나아가면 젊은 것이다.
사람이 성령 충만하게 되면 어린아이처럼 꾸밈이 없고 꿈이 있게 되면서 창조성과 지혜가 넘치게 되고 생명 감수성도 넘치게 된다. 왜 사람에게 음악과 미술 같은 예술도 필요한가? 생명 감수성을 넘치게 하기 때문이다. 식물을 키우거나 동물을 기르는 것도 생명 감수성을 넘치게 한다. 여행을 통해 자연을 음미하는 것도 생명 감수성을 넘치게 한다. 그중에서 성령 충만할 때 가장 생명 감수성이 넘치게 된다. 사람은 비둘기 같이 임하는 성령 충만을 체험할 때 생명을 존중하면서 참된 행복도 얻는다.
4. 하나님의 기쁨이 되라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님이 임하신 것은 예수님이 세례 받으면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으셨다는 암시다. 구약시대에 기름 부음을 받는 사람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였다. 결국 예수님이 세례 받고 성령님이 임하신 장면은 예수님의 대관식 같은 장면이었다. 그때부터 예수님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인 메시야로서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그런 영광스러운 대관식 후에 하늘로부터 이런 말씀이 들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17절).” 이 말씀은 세례 받은 성도에게 지금도 생생하게 들려져야 할 말씀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 먼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때부터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고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기도할 때 하나님을 ‘만군의 하나님,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부소부재하신 하나님’ 등으로 불렀다. 그가 어느 날 갈라디아서 2장 끝부분을 읽다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에 깊이 젖으면서 밤새도록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때부터 그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 굳센 믿음이 되었다. 하나님은 나의 육신의 아버지보다 더 진짜 아버지다. 하나님 아버지는 나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가장 좋은 길을 허락하시 때로 내가 잘못된 길로 가면 고난을 통해 바른 길로 이끌고 결국 복을 주신다.
사람이 처음 원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떠날 때 하나님은 마음이 많이 아프셨을 것이다. 그 후로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는 역사는 하나님의 마음에 큰 아픔이었을 것이다. 그 아픈 역사를 끝내려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죽음의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셨고 죽음의 십자가를 지고 공생애를 끝내셨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인간의 죄를 대속해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길을 열어 주셨다. 그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라.
< 더 나은 세상을 꿈꾸라 >
인류 역사상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한 분이 있다. 바로 예수님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그 기쁨을 억제하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들리도록 하늘의 소리로 말씀하셨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예수님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수많은 일을 행하시면서 병든 사람을 고쳐주고 소외된 사람을 제자로 삼고 낙심한 사람을 일으키고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셨다. 그러나 그런 일을 행하시기 전에 이미 예수님은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기쁨이셨음을 본문은 가르쳐 준다.
앞으로 대단한 성취를 이뤄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려고 하기 전에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라. 내 주변에 있는 신실한 교우도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기쁨이라고 여기고 그를 소중히 여기고 섬겨 주라. 그리고 예수님처럼 낮아지고 십자가를 지라. 그러면 더욱 멋지고 복된 길이 펼쳐질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나중에 보면 그것이 이익이다. 나의 헌신과 사랑은 결코 헛되지 않다.
심은 대로 거둔다. 더 나아가 심은 것 이상으로 거둔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더 나은 세상을 꿈꾸라. 주일에 교회에서 영적인 짧고 깊은 스킨십을 끝낸 후에는 주중에 세상으로 나아가 세계를 지향하며 최선의 땀을 흘려 하나님의 기쁨이 되라. 비록 내일이 불투명해도 살아 계신 하나님이 의롭게 심판하시고 나의 피와 땀과 눈물을 기억하셔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임을 믿고 열심히 선의 씨앗을 뿌려서 좋은 열매를 맺는 복된 심령이 되라.
예수님의 세례
마 3:13-17 / 유영설 목사
오늘 읽은 말씀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푸는 장면에 대해서 기록하였습니다. 이 세례는 예수님의 공생애의 출발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식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심으로 이 세상에 공식적으로 등장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마 3:11)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신을 든다는 것도 감당하기 어렵다고 자신을 낮추는 요한, 그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배워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세상살이가 점점 어려워지는 이유는 경제 때문이 아니라 낮아지는 자가 없고 섬기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 앞에서 내 위치는 어느 정도이고, 내 신분에 맞는 것은 어떤 것이고, 내 자존심을 지키고 능력을 인정받는 길은 무엇인가를 찾는 현실이 되다 보니 아무도 낮아지거나 섬기려고 하지 않는 자기주장만 있는 그런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례를 요청하시는 예수님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예수님과 세례 요한 사이의 대화(마 3:14-15)를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겠다고 허락하라고 했고 요한은 세례를 베풀지 못하겠다고 승강이를 벌이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 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다.”(마 11:11)라고 요한을 높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요한을 신뢰하고, 인정하고, 높여 주는 예수님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으로 요한의 권위가 세워짐과 동시에 예수님은 더욱 존귀해집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을 높이면 나도 높아지지만 다른 사람을 낮추면 나도 함께 낮아집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가져야 할 가장 이상적인 인격은 나도 좋고 상대도 좋아야 합니다(I am OK. Your are OK).
예수님은 세례를 요청하시면서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義)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예수님 세례의 의미는 죄인을 대신한 고난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요한이 세례를 베푼 후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이라 불렀고, 예수님 자신도 대속적 고난을 세례로 표현했습니다(눅 12:50).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을 통하여 철저히 그 백성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행위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을 의미하는 것이 예수님의 세례입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세례는 구원을 확증하는 표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을 통해 중요한 신앙의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첫째, 세례를 받음으로 시작된 예수님의 공생애는 대속적 고난을 감당해야 할 사명을 보다 분명히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기 예수님의 위대함과 담대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철저히 알고 그 길에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미래에 대한 앎이라고 하는 것은 찬란한 영광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어야 하는 대속적 고난입니다. 고난을 받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하나님의 의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을 견디는 이유는 미래를 모르기 때문에 오늘을 견딥니다. 또 하나는 미래가 좋을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견딥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우리들의 차이입니다. 죽음을 향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길이라면 담대하게 용기 있게 순종하셨던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기에 충분합니다.
둘째, 예수님의 겸손입니다.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로 오신 예수님, 높은 자리에서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신 것이 아니라 낮아질 수 있는 대로 낮아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낮아질 수 있는 대로 낮아지고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기 때문에 구원의 이치에 합당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은 값싼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공로는 없으나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그 마음을 예수님이 잘 이해하시고 순종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한 예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룩하고자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찢기고 죽으셨습니다. 이것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룩한 사건입니다.
셋째,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세례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이 자녀라는 정결한 신분을 회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예수님이 친히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중요성은 회개의 경험이 있는 자만이 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못난 나를 받아주시고 용납하는 아버지의 사랑 앞에 어떻게 할 수 없어 눈물 흘리는 탕자의 모습이 되어 보셨습니까?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이제는 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눅 15:21) 탕자는 이 말 밖에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세례 받으신 예수님에게 세 가지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첫째는 하늘이 열렸는데 예수님의 세례는 많은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의 길을 열으셨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했습니다.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 온유와 친절, 순수함과 도덕적 순결의 상징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의 모난 인격이 변화되든지 통제되든지 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의 자리에 나아가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늘의 음성은 예수님의 권능이나 찬란한 미래나 업적을 쌓을 것을 예언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에서 들린 음성은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감과 예수님의 정체성을 분명히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이심을 분명하게 드러내시며,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하셨습니다. 여러분도 과거에 받았던 세례의 때를 기억해보시기 바랍니다. 온유하고 위로하시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 기쁨을 드리는 자인가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구속의 은총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
마 3:13-17 / 윤태성 목사
남미에 아르헨티니와 칠레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 서로 앙숙처럼 지냅니다. 그래서 양국의 우호를 다지기 위해 국경에 예수 그리스도의 동상을 세웁니다. 그런데 이 동상으로 인해 갈등이 확산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동상이 완성 단계에 이르렀을 때 칠레의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 동상이 칠레에 등을 돌리고 계신다” 사실 동상 전면은 아르헨티나를 향했고 뒷면은 칠레 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기분 나쁘다’ 기분이 나쁘면 감정이 상하고 사람들이 점점 거칠어갑니다. 양국 간의 감정이 나쁜 방향으로 치닫고 있을 때 이를 명쾌하게 극복하는 한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칠레의 한 기자가 신문에 쓴 재치 있는 기사였다. 무엇이라고 썼을까요? “예수님의 얼굴이 아르헨티나를 향하여 서계시는 이유는 아르헨티나가 칠레보다 더 예수님의 보살핌이 필요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참 쉽죠-- 여러분 말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이 기사로 국민들의 고조된 감정을 가라앉힐 만큼 큰 감동을 주었다. 일어난 사건보다도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보여 줍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에게 기독교의 진리를 이해하는 중요한 기초가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이해가 중요합니다. 가장 중요한 기초 따라서할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이 예수님의 성품에는 예수님께는 두 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로마서1: 3-4 절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그리스도 예수시니라” 완전한 인간이시고 완전한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았던 도마는 이렇게 고백을 드립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이런 고백이 여러분들의 신앙의 출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은 “이때에”로 시작을 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이제 하나님의 사역을 시작하는 시점이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시는 사건이 등장합니다. 이 일을 통해서 예수님 사역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현장으로 내려가신다.
13절 “이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예수님께서 육신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와 살던 곳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위해 갈릴리에서 요단강으로 오십니다. 그데 여러분 에수님과 요한중에 누가 더 능력이 맣은 분입니까? 누가 찾아와야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요한 보다 더 능력이 많으신 분이고 요한이 예수님을 찾아와야하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갈릴리에서 요단강으로 오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요단강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으로 내려온 신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굳이 내려가지 않으셔도 되지만,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현장으로 찾아가십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요한이 있고, 주님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세례가 펼쳐지는 곳 이였습니다. 이러한 사역의 현장을 예수님께서 외면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도 사역의 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사역의 자리는 함께 일하는 자리입니다. 어떤 분은 교회 나오신지 오래 되었는데 예배 참석은 잘하십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 관계를 갖는 것을 싫어합니다. 심지어는 셰례받는 것도 거절을 합니다.
그 대답이 거창합니다. ‘자신이 세례 받는 것보다 자신과 하나님과 관계가 중요하기에 온전히 집중하고 싶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가 중요하다 즉 다른 사람의 간섭을 받지 않고 혼자서 신앙 생활하겠다. 그러나 여러분 이분은 신앙을 오해하는 분입니다. 교회는 “에클레시야” 건물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라는 사람들과 직제 공동체성을 결코 무시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요한을 찾아간 것도 그들의 공동체를 인정하고 공동체성 안에서 사역을 사작 하시려는 뜻입니다. 이후에 제자를 부르시고 그 무리가운데 사역을 하셨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사역을 감당하십니다.
우리가 성경의 인물을 보시면 혼자 힘들게 사역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엘리야를 보시면 혼자서 단독 플레이를 합니다. 혼자서 바알과 아세라 신을 850명을 물리칩니다. 그럼에도 혼자서 위대한 일을 하고도 이세벨의 협박에 낙심하고 지쳐버립니다. 혼자서 플레이를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ex)1986년 멕시코 월드컵인가요! 마라도나 선수를 기억하실줄 압니다. 운동장 중간에서부터 질주하는데 여러 명을 제치고 마지막에 골키퍼까지 제치고 골을 넣습니다. 참 대단한 선수입니다. 그런데 마라도나를 축구의 황제라고 하지 않습니다. 위대한 축구의 황제는 펠레라고 합니다. 마라도나는 사생활에도 문제가 있지만 월드컵을 한번밖에 들어 올리지 못합니다. 그에 반해서 펠레가 황제가 되는 가장 큰 조건은 그는 월드컵을 세 번이나 들어 올립니다. 공동체성 가운데 위대성을 평가합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이 엘리야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데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다메섹에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부어 아람왕이 되게하고 예후에게 기름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부어 네 뒤를 이어 선지자가 되게 하라’ 저는 이런 의미를 혼자서 사역을 하는 엘리야에게 특별히 사람을 세우라고 하는 의미는 공동체성을 말씀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세우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이후의 엘리사를 보시면 그의 사역에는 사람들이 등장을 합니다. 종이였던 게하시가 등장하고 선지생도들을 세워서 함께 사역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옆에 계신 분에게 인사합니다. “당신은 나의 동역자입니다.” “당신으로 인해 나는 행복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하신일이 제자를 부르신 일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 사역의 핵심은 제자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가르치신 것입니다. 때때로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 갈등을 일으킨 그들이였지만 예수님은 공동체성을 한 번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제자들과 함께 하심으로 그분의 사역을 마무리하고 계십니다. ex)어떤 분을 보면 기도도 잘하고 말씀도 잘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식당에서 봉사하실 때 혹은 누군가와 함께 해서 일을 할 때 늘 문제를 일으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경건성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온전한 경건은 사람가운데서 공동체성 가운데서 나타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능력은 조금 모자라도 교회 안에서 협력하고 하나가 되는 분이 더 훌륭한 분입니다. “목사님 아직도 부족합니다” 더 배우려는 자세는 좋지만 내가 주님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현장이 있다면, 그곳으로 내려가는 일이 중요합니다. 복음의 현장성 그곳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2. 주님의 의를 이루신다
1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서 나아가셨습니다. 이때에 요한이 극구 반대하며 예수님을 말렸습니다.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예수님은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구태여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죄가 없지만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취하사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죄인이 죄로 인하여 그 벌을 받아야하지만 그것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요한 복음 1:29절에는 요한이 에수님께서 자기에게 나오심을 보고 무엇이라 이야기합니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우리에게 있는 죄를 대신하여 지신 분입니다. 이것을 대속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ex) 독일의 어느 작은 마을에 가난한 피아니스트가 살았습니다. 그는 피아노 독주회를 앞두고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 같은 무명의 피아니스트의 독주회에 사람들이 와 줄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청중을 모으기 위해, 당시 유명한 음악가인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의 제자라고 스스로 소개했습니다. 거짓말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공교롭게도 연주회가 있기 전날, 프란츠 리스트가 이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고민 끝에 피아니스트는 리스트를 찾아가 고백을 했습니다. “선생님! 용서해주세요. 저는 고아 출신으로 어려운 가운데 피아노공부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고 싶은 욕심에, 이번 피아노독주회를 준비하면서 선생님의 이름을 도용했습니다. 내일 사람들 앞에서 모든 것을 밝히겠습니다.” “정말 큰 실수를 했군요. 그러나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는 법입니다. 자, 한번 들어보지요. 내 앞에서 한번 연주해보시오”
의외의 제안에 피아니스트는 벌벌 떨면서 연주를 했습니다. 리스트는 연주를 들으면서 몇 군데를 바로 잡아주었습니다. 그리고 밝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잠시라도 내가 당신을 가르쳤으니, 이제 당신은 분명히 내 제자입니다. 내일 연주회에서 마지막 곡은 제가 연주하면 어떨까요? 마지막 곡을 스승인 리스트가 직접 연주한다고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라 생각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신들매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고백하는 요한의 곁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주님 앞에 한없이 작은자 임을 고백하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자” 그를 동역자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우리는 나의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는데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의 구원에 감사드리지만, 아직도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아직도 세상의 유혹하나 이기지 못하고 늘 넘어지는 우리이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분의 동역자로 초청하고 있습니다.“나와 함께 하나님의 의를 이루자” 오늘 우리가 감당하는 사역은 주님의 의를 이루는 자리입니다. 동역의 자리입니다. 작은 소자에게 한일 주님께서 나에게 한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영혼을 구원한 일을 천국에서 가장 기뻐하십니다. 마땅히 해야할 일임에도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하고 계십니다.
이런 주님 앞에 감사드리며 고백 드리기 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주님의 의를 이루게 하옵소서”
3. 순종함으로 하늘 문을 여신다.
이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위로 올라오십니다. 이때에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16-17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가기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써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하시니라” 오늘 우리가 삼위 일체 주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바로 성부하나님께서 하늘로써 말씀하시고 성자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올라오시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오시는 그림 같은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때 중요한 사건이 하늘이 열렸습니다. 천국 문이 열린 것입니다. 그동안 하늘이 닫혀 있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 교만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범죄함으로 하늘 문이 닫혔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시고 결단하셨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심히 기뻐하사 하늘의 문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예수님 위에 임하였습니다. 죄 때문에 그동안 불화했던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가 마침내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겸손과 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늘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화해의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한 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원수 되었던 담이 허물어지고 화평의 길이 열렸기 때문에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잠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만 사흘 만에 부활하사 하나님 보좌우편에 앉을 것이기 때문에 기뻐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배웁니다. 언제 하늘 문이 열렸습니까? 언제 하나님의 성령이 쏟아져 내리게 되었습니까? 언제 천국 문이 열렸습니까? 예수님께서 겸손히 순종하셨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말없이 복종하셨을 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영접지 않고 대적하고 반발하고 불순종해 보십시오. 우리의 마음 문이 닫힙니다. 기도의 문이 닫힙니다. 성령의 통로가 막혀 버립니다. 별수 없이 이것이 지옥입니다. 지옥은 하나님과 나의 교제의 통로가 막히는 것, 관계가 끓어진 곳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해서 잠시 문을 닫고 하늘을 향해 문을 열어야 합니다. 내 생각과 욕심의 문을 접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향해 순종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겸손하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 하늘 문이 열리게 됩니다. 기도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찬양의 문이 열립니다. 성경을 읽으면 한마디 한마디 말씀이 보석처럼 가슴에 새겨지게 됩니다. 하늘로부터 성령의 은혜가 폭포수와 같이 쏟아지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 수도 없고 줄 수도 없는 하늘의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세미한 음성이 들려오게 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때 우리는 천국의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천국의 샘물이 터지게 됩니다. 순종함으로 하늘문을 열으시기를 바랍니다.
나오는 말)
결론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실 때 언제나 개인적으로만 다루시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개인적으로 다루시는 동시에, 공동체성을 이루어 가십니다. 몸된 교회를 세우고 그곳에서 우리의 믿음이 뿌리 내리기를 원하십니다. 그 교회 안에서 우리는 낮아지고 서로 섬김을 배워야합니다. 교회의 능력은 교회의 사람의 수보다도 건물의 크기보다도 성도들이 얼마나 서로 섬기며 주님의 길을 따르는 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 능력으로 바로 하늘 문을 열어갈 수 있습니다. 하늘 문을 여는 성도 하늘 문이 열린 교회, 주님의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낮아지고 순종함으로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신 예수님을 본받으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왕의 취임식
마 3:13-17 / 이정선 목사
요즘에는 세상이 많이 달라져서 젊은 남자와 여자가 조용히 같이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식이라는 성대한 예식을 치름으로써 그들이 부부가 되었다는 것을 세상 앞에 선언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축복과 기대 속에서 새로운 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두 사람이 만나서 조용히 같이 살아도 부부가 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결혼식을 올려도 부부가 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경우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지요?
선거를 해서 대통령이 선출되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서 일정한 날짜가 되면 대통령의 권한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대통령은 임기가 시작되는 날 거창한 취임식을 거행합니다. 취임식을 함으로써 대통령의 권한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임무를 수행함에 앞서서 대대적인 예식을 갖습니다. 온 세상을 향해서 새로운 대통령이 권한을 가지고 나라를 통치하는 일을 시작한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취임식을 해야 대통령이 되는 것처럼 인식될 정도입니다.
이처럼 의식(세레모니)라는 것은 어떤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을 합니다. 아이들이 기를 쓰고 생일파티를 하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의식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에 의미가 부여되기 때문입니다. 생일파티를 하건 안 하건 그날이 생일인 것은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생일파티라는 의식이 없으면 그 날이 중요한 날처럼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여러분이 활기찬 삶을 살고 싶으면 그런 세레모니를 많이 갖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그것이 너무 많이 남발되면 의미의 크기가 줄어들기 때문에 주의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선에서 그런 행사가 많으면 좋습니다.
우리가 아이들의 생일을 축하하면서 그 아이를 축복하고 존재의의를 부각시킴으로써 아이의 자존감을 북돋아 줍니다. 마찬가지로 아무 일 없이 지나치면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부부가 결혼기념일을 기억해서 서로 축하하고 그 날을 기념하면서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고 함께 살아가는 삶을 공유하는 세레모니를 갖는다면 아주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날에는 중요한 일을 해야 합니다. 그 중요한 일을 하지 않으면 그 중요성이 소실되어버립니다. 우리가 가게를 하나 열더라도 이웃을 초청해다가 개업식을 하는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 왕이 새로 즉위하면서 대관식을 갖지 않고 조용히 왕노릇을 시작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새로 왕이 되었다는 그 중요한 사실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립니다. 마치 왕위를 찬탈했거나 또는 자격없는 사람이 왕이 된 것처럼 말이지요. 마태는 여기서 새로 오신 왕의 취임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왕으로 오셨는데, 그리고 이제 공식적으로 그 사역을 시작하시는데 취임식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성장과정에 대해 성경은 거의 침묵하고 있습니다. 열두 살 때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왔다가 성전에서 선생들과 토론하신 적이 있다는 사건 하나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으로 미루어보아 예수님이 어떻게 성장하셨을 것인지 대략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다른 사람들의 증언들과 기록을 종합해 보면 아버지 요셉은 일찍 세상을 떠난 것 같고, 예수께서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아 목수로 일하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런 사생활이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이 장황하게 기록되었다면 쓸데없는 신화처럼 회자되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마침내 예수께서 그의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려고 나타나셨습니다. 선지자는 기름부음을 받음으로 취임식을 갖습니다. 예수님은 과연 어떤 방법으로 취임식을 하셔야 할까요? 불행하게도 유대의 왕권은 예수님을 잡아죽이려고 했던 헤롯 왕가가 장악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적 지배층은 가장 부패하고 가장 개혁되어야 할 집단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유대사회의 공식적은 채널을 통해서 즉위식을 갖고 사역을 시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반대하고 핍박하는 세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공식적인 취임식으로 선택하신 것은 요한의 세례였습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은 요한이 예수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시는데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와서 시비를 걸었습니다. “도대체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너에게 이런 권세를 주었느냐?” 가르치는 것은 자기들 몫인데 엉뚱한 사람이 나타나서 백성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니까 가만있겠어요?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질문에 대답하면 나도 너희들 질문에 대답하겠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서나?”
이 질문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자기들이 믿지도 않았으면서 하늘로서라고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사람에게서라고 했다가는 그를 선지자로 믿던 백성들에게 맞아죽을 수도 있으니까요. 예수님이 그 질문을 하셨다는 것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라는 의미지요. 즉 예수님은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들은 인정하지 않으시는 반면, 요한은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요한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러 온 사람이고, 그 뒤를 이어서 예수님이 메시야로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요한의 사역과 예수님의 사역은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고,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이 사실을 확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오시자 요한이 펄쩍 뜁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그분은 자기보다 능력이 많으셔서 그분의 신발을 수종드는 종노릇도 감당할 수 없다고 했었습니다.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의 말이 맞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창조자이시며 또한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분입니다. 요한은 단지 그 앞에 달려가면서 그분이 오신다고 소리치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자기에게 오셔서 세례를 받겠다고 하시니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다가 베드로 앞에 왔을 때, 베드로 역시 완강하게 반항했습니다. 절대로 내 발을 씻기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나 세례 요한을 설득하기 위해 많은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단 한 마디에 그들은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도 참 중요하지 않습니까? 우리 생각에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으신다는 것입니까? 요한이나 베드로의 생각에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하면 그것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 한 마디면 우리의 생각을 뜯어고쳐야죠.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되고 또 불편하기 짝이 없지만, 주님이 필요하시다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해요? 예수님이 그렇게 하시겠다는데 베드로나 요한이 끝까지 못하겠다고 버틴다면 그 꼴이 뭐가 되겠어요?
우리가 종종 그런 실수를 저지를 때가 있습니다. 우리 깐에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고집을 부리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거역하는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특히 예수 믿은 지 오래된 사람들은 이런 실수 많이 합니다. 보고 들어서 아는 게 많다 보니까 자기 생각과 판단으로 무엇이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 다 정해놨어요. 그래서 충성을 다짐하면서 그대로 밀고 나가요. 자신의 경험과 판단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그분의 사역의 성격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분은 다스리고 군림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시고 자기 목숨을 내어주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분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자신의 낮아지심을 보이셨다면, 공생애의 마지막 행동으로 역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사역이 어떠한 것인지를 확인하신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요한의 세례의 성격과 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죄인의 회개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게도 그것이 해당될까요? 예수님은 요한의 사역과 자신의 사역의 연속성을 인정하시고 요한과 연합하심으로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신 것이지, 죄의 회개를 위해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죄인들이 하는 것처럼 죄인의 모양으로 오셔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그의 낮아지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시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는 죄의 회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여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러 오신 왕의 취임식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는 순간 하늘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의 모양으로 예수님께 임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예수님의 위대한 구속사역의 개시를 알리는 순간, 여기 성삼위 하나님이 모두 출동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만큼 중요하고 의미있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모두 오셔서 축하하고 기념하는 엄청난 세레모니가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셨고,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는 놀라운 일을 시작하시는 순간, 하늘과 땅에서 일어났던 엄청난 일을 우리가 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찾아오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데, 우리 마음속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생일인지 결혼기념일인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쳐버리는 것처럼, 구세주를 받아들이면서도 아무런 감동과 기쁨이 없다면 곤란하지요? 왕이 오시는데 환영행사도 없이 그저 밋밋하게 바라만 보고 있다면 뭔가 문제가 있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 우리 속에 감동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 기쁨과 감격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식어지거나 없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일하기
마 3:13-17 / 채규현 목사
어느 유명한 설교가가 말하기를 “설교자는 그 시대의 흐름을 잘 간파해서 설교해야 한다.” 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대해서 더 유명한 설교가가 말하기를 “그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용서가 있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면서, “설교자의 일은 각자 그 당대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교정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런 일에 가장 충실한 사람 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례 요한입니다. 그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그 당시의 제사장이나 서기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거슬려서 사는 사람이 세례 요한입니다. 오직 그는 그 모든 사역의 시작부터 끝까지 한 가지만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회개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 너희 세리들도 회개하고, 너희 군인들도 회개하고, 바리새인도 회개하고, 헤롯 왕도 회개하고, 모두 회개하라.” 이런 회개를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있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이지 않고 사람들이 없는 광야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광야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 나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모여서 회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기준으로 이야기한다면, 그는 매우 성공한 목회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이야기하는 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주었고, 순종했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세례를 준 대상이 바로 유대인들이었는데, 원래 그 당시의 세례는 이방인들(유대인들이 하급동물이라 취급했던)이 개종하면 세례를 주었습니다. 원래 유대인은 세례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유대인들에게 세례 요한이 세례를 주면서 죄에 대한 회개를 촉구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는 이 세상에서는 자기의 삶에서 성공한 사람” 이라고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여자가 난 자 중에 그보다 큰 자가 없다.” 고 하셨습니다. 그의 사역의 최고봉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이 그 앞에 오셔서 “내게 세례를 베풀라.” 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니까 요한이 “오히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될 터인데 어찌 제게 세례를 받으려 하십니까?” 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 하실 때에 요한이 세례를 베풉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 위에서 올라오실 때에 하늘에서 비둘기처럼 성령이 내리시고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참고로, 여기서 한 가지만 이야기합시다. “예수님께서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고 이야기하니까 침례교 사람들은 “물 속에 들어가니까 물 위로 올라오는 것 아니냐?” 하면서 ‘잠수’를 이야기합니다. 세례를 받을 때 물 속에 잠수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똑같은 표현이 사도행전에 보면, 빌립이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베푸는 장면에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소위 침례교에서 이야기 하는 대로 예수님께서 물에서 잠기셨으니까 물에서 올라온다고 해석을 한다면, 바로 빌립과 에티오피아 내시가 함께 잠수했다가 물에 올라오는 것이죠? 세례를 주는 사람까지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오느냐는 말입니다. 그걸 가지고 ‘침례가 맞다, 잠수를 해야 된다.’ 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세례를 받으시고 그 때부터 공생애(예수님의 공적 사역들)를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요한은 요한대로 그 사역을 했습니다. 바로 이 예수님과 요한이 만나는 이 접점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큰 특징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제 연말을 맞이해서 주님의 은혜 안에서 새로 일을 할 수 있는 여러 사람들을 뽑고, 또 거기에서 책임을 맡은 사람들을 세우고, 여러 교회의 조직들을 새롭게 할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바로 여기에 나오는 예수님과 세례 요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진정한 리더들, 진정한 사역자들’ 의 품성이 무엇인가를 함께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큰 특징이 겸손함입니다. 예수님에게서도 겸손함이 보이고 세례 요한에게서도 겸손함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이 겸손함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세례를 받으시는 것 아닙니까? 여기서는 세례 요한들이 모든 죄인들에게 세례를 주고 그 다음에 예수님께 세례를 주니까, 많은 사람들이 ‘혹시 예수님도 죄인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면이 예수님께서 죄인과 함께 라는 면을 보여주면서, 죄인은 아니지만 죄인의 대표로서 예수님이 그 모든 죄값을 치르시는 면을 세례에서 물론 볼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메시야이신 그 분이 오히려 종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이것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십니다. 하나님이신 분이 인간에게 세례를 받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러한 겸손함이 세례 요한에게도 똑같이 있습니다. 먼저 자기는 예수님께 세례를 줄 수 없다고 말을 하죠? 자기가 누구인지 아니까 말입니다. 그는 가장 성공한 사람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옵니다. 심지어는 그 몰려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강인함을 가지고 있는 그러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앞에서 스스로 예수님의 신발 끈을 푸는 것도 감당하지 못할 자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비록 성공한 설교자였지만, 능력있는 설교자였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함은 잃지 않았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순간에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임했다고 하셨죠? 그 당시에 로마 제국의 상징은 독수리입니다. 그 로마제국의 상징인 독수리가 지금 현재 독일 제국의 상징으로 자기들이 신성로마제국의 후예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문양도 독수리입니다. 그런데 모든 새들 위에서 군림하는 독수리가 아니고, 가장 연약한 비둘기처럼 성령이 임하십니다. 그리고 비둘기는 이스라엘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속죄의 제사를 드릴 때에 돈이 없으니까 소나 양으로 못하고 가장 값싼 제물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지금도 중동 지방에 가면 비둘기 집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도시에나 촌에 가게 되면 기둥이 높게 서 있고 거기에 구멍들이 뚫려 있습니다. 그게 전부 비둘기 집입니다. 그리고 비둘기를 키우면서 식용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값싸게 얻을 수 있는 것이 비둘기입니다. 바로 그 비둘기를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속죄의 제사를 드렸는데, 바로 성령께서 그 비둘기처럼 예수님께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면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이 바로 비둘기를 이 세상 모든 죄인들을 위해서 드리는 것과도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하튼 죄인과 함께하면서 연약한 모양대로 예수님이 보여지는 것을 볼 때, 가장 겸손한 자세로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바로 예수님처럼, 세례 요한처럼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겸손함이라고 하면 그저 많은 사람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네네….” 하며 굽신거리는 것이 아닙니다. 모양새로만 보여지는 그런 겸손함이 아니고 마음에서부터 우러나는 겸손함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겸손함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겸손함의 특징은 첫째로, 자기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이 자기 주장을 합니까? “아닙니다, 나는 절대로 못합니다.” 하고 끝까지 주장하지 않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결국 끝까지 자기 주장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의 뜻을 이루자.” 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자.” 하시고 자기 뜻을 굽히는 것입니다. 겸손함 속에서 하나님께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겸손함의 특징은 ‘꼭 내 뜻대로 안 될 수도 있다.’ 는 것을 언제나, 어떤 직책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더라도 바로 그 면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 수많은 여러 직책들이 있습니다. 거기서 각자 누구나 자기 주장을 일삼는다면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안 되는 것이죠. 하나님의 모든 일은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할 때 그 겸손함, 내 뜻대로 안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언제나 견지하고 갈 때에 하나님의 일은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겸손한 자의 특징은 상처받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상처받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상처를 받습니까? 자기가 스스로 높아졌을 때에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아니,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알고….” 그렇게 얘기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 감히 나한테?” 이라고 해봤자 “감히 내가” 죄인이지 누구입니까. 누구나 다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상처받는 이유가 “내가 누군지 알고 나한테 이렇게 하느냐?” 이런 마음이 있으니까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본전이 무엇입니까? 더럽고 추한 죄인입니다. 이 본전만 잘 기억하면 누가 뭐라 해도, 누가 나쁜 말을 해도, 사실 내 본전보다는 좋은 말을 하는데 왜 상처를 받습니까? 우리의 기본적인 은혜의 복음을 여러분이 잃어버리지 않으면 겸손할 수 있습니다. “네가 나를 무시했다 이거지.” 이런 식의 생각은 없단 말입니다. 사실 교회 일은-크고 작은 일들 다 말할 수 있지만-궁극적인 교회 일은 대부분이 허드렛일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 일이라는 것이 열심히 비질하고 걸레질하고, 지난번 대청소 때도 그랬듯이 전부 쭈그리고 앉아서 신주 닦고…. 여러분의 직업이 뭔지 상관없이 성도니까 다같이 동참하는 것이죠. 그렇게 청소하는 것, 걸레질 하는 것, 부엌에서 일 하는 것, 설거지하는 것… 수많은 사람들이 합니다. 교회 일이 사실은 전부 그런 겁니다. 기본적으로, 교회를 섬긴다는 것이 “에헴~” 하면서 내가 누구의 대장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낮아진 자세에서 허드렛일 하는 게 교회 일입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 교회 장로님들은 화장실부터 맡습니다. 누구나 함께 교회 일에 동참해야 하고, 동참할 때에는 허드렛일을 할 것을 염두에 두고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일을 하는 사람들의 참된 자세, 겸손한 자세입니다. 제가 서울에서 몇 몇 큰 교회에서 계속해서 가르쳤는데, 거기서 제가 참 감명받았던 일이 한결같이 지도자로 일하던 사람들이 몸에 벤 게 전부 청소하는 것이었습니다. 식당에 같이 가서 앉아도 다 탁자를 닦기부터 합니다. 말을 하면서도 팔은 탁자를 닦으면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쓸고 닦고 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쓸고 닦고 하는 사람이 누구냐면 서울에서 유명한 병원의 병원장 부인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높은 사람, 유명한 사람도 관계없습니다. 교회 오면 다 빗자루질하고 설거지하는 것입니다. 교회 일이라는 것이, 애초에 허드렛일을 내가 하겠다고 마음을 먹을 때에 그 때에 비로소 그 사람들을 통해서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 그것은 아랫사람들이나 하는 것이고 우리처럼 고귀한 사람들은 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리더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 때부터, 세례 요한 때부터, 오히려 그 전부터 겸손한 자들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내년에 새롭게 여러 교회 일을 맡는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어야만 하겠습니다.
우화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천사들이 하늘에서 보니까 어느 나이든 경건한 성도가 보이는데 정말 좋은 분이예요. 그래서 한 천사가 내려와서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에게 신유의 은사를 주겠습니다.” 그랬더니 그 나이든 성도가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낫게 하는 능력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천사가 또 다시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올 수 있도록 회개케 하는 능력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이것도 대단히 매력적인 은사 아닙니까? 가서 말씀만 선포하면 전부 회개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의 하는 말은 “아닙니다. 능력은 오직 성령님께 있습니다.” 천사가 또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당신을 모든 사람들에게 아주 존경받을만한 사람으로 만들겠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니까 내가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래서 천사가 “아니, 그러면 당신이 원하는 게 뭐요?” 물었더니, 그 분이 마지막에 하는 말이 “제가 원하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다른 사람을 돕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 사람을 돕는 것을 그 사람이 몰랐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덕목있는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교회 일 하면서 제일 골치아픈 것은, 교회 일 하다가 서로서로 마음의 상처를 입는 일입니다. 분명히 다 열심을 내서 하는 사람들인데, 서로 마음에 상처를 입고 시험들고 어렵고 그런 일들이 수도 없이 여기저기서 터집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일하는 그 사람들이 먼저 낮아진 자세로 서로 임하게 되면 상처받을 일이 없습니다. 마음에 괴로울 일이 그렇게 많이 없습니다. 물론, 처음에 찔릴 때는 아프다는 소리를 하겠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은혜가운데서 보게 되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겸손한 면이 제일 먼저 보여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는 성령의 능력에 입히우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놀라운 기적을 많이 행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많은 병을 고치시고, 심지어는 죽은 자를 살리십니다. 권세있게 말씀을 증거하십니다. 그런데 그 모든 능력이 예수님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으로 사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능력은 어디서 나오느냐, 여기서 입히워진 성령님의 능력으로 기적을 행하시고 권세있게 모든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능력을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 성령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한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에 말씀하셨죠? “위로부터 능력이 입히올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그 뒤로 계속해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했습니다. 기도할 때에 드디어 성령의 능력이 그들에게 임하여서, 그들이 나가서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들이 그러한 성령의 능력의 입히움이 있기 전에는 두려움에 떨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성령의 능력이 입힌 뒤에는 담대하게 말씀을 증거하고 많은 열매도 맺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마가의 다락방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복음 증거는 없었겠죠. 반대로, 그 위로부터 능력이 입히울 때까지 계속해서 다락방에서 기도하지 않았다면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이러한 성령님의 능력에 의지하는 기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일은 크고 작은 일 어떠한 일이라도 기도해야만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준비하고, 기도를 통해서 주님께 의지하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구하고, 이것이 없으면 우리가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을 마련한다 할지라도, 아무리 좋은 훈련 계획을 갖는다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열매를 거둘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함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무엇을 위해 기도합니까? 구성전을 위해서 기도하고, 교회의 미래와 앞날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 기도에 온 성도들이 마음을 합하고 뜻을 합해서 함께 동참해야 합니다. 같이 금식하고 같이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능력이 없어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없으면 여러분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 입히우면 오늘 이 일도 하고, 내일 저 일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열심히 간구하고 기도하며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를 위해서 함께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이렇게 일을 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잊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프로그램 자체에만 매달리게 됩니다. 거기에만 우리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어서 각각 교회의 수많은 여러 가지 일들이 있고, 수많은 프로그램들이 있고, 수많은 기관들이 있는데, 그것이 전부 하나로 잘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모두다 궁극적인 목표가 영혼의 구원에 있다는 사실로 합쳐져야만 합니다. 그래야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모든 부서마다, 모든 프로그램마다 각자 자기만 주장하게 됩니다. 제가 이번에 결산 ․ 예산 정하는 과정에서 느낀 것은, 많은 부서에서 이제까지 어떻게 하든지 자기 부서의 예산을 무조건 많이 타놓는 겁니다. 부서장의 능력은, 어떻게 하면 예산을 많이 확보하는 것이냐에 따라 능력이 결정된다고 보통 이야기들합니다. 일단 확보해놓고, 확보된 예산은 다 쓰자는 겁니다. 이런 정신들이 있었던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연말이 되면 제로(0)로 만드는 전통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다 서로 먹고 끝납니다. 그런데 그게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이, 각 기관들에서 어떠한 조직이나 어떠한 부서이든 간에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가?” 생각해 봐야하지 않겠습니까? 궁극적인 목표가 영혼의 구원에 있고, 그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 각 부서가 존재한다면 우리가 지금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예산을 놓고도 그렇고, 프로그램을 놓고도 그렇고, 계획을 놓고도 그렇고, 전체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역할을 잘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때에 비로소 조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 궁극적인 공통의 목표를 잃게 되면, 언제나 각 부서마다 각자 각자의 이기주의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역자로서의 위치에서 일을 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세 가지, 겸손함-내 주장을 그렇게 하지 않고 어떠한 일에도 상처받지 않는 그러한 겸손함-이 필요하고, 오직 우리의 모든 일은 결국은 성령께서 능력주실 때 그런 일을 다 할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 열심히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기도, 그리고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영혼의 구원에 있는데 이를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힘을 합하고 조화를 이룰 것인가를 잘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면들이 있을 때에 비로소 우리 교회는 더욱 건강해지고, 강건해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더 힘을 낼 수 있는 교회가 될 줄 믿습니다. 그렇게 해서 복음을 온전히 증거하는 능력의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서, 그렇게 될 때에 참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 모든 성도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는 교회, 어떤 부서에서 일하든지 서로 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교회, 그리고 밖에 나가서는 능력으로 전도하고 그리스도의 빛을 비출 수 있는 그러한 교회, 우리 교회가 새해에는 이러한 교회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마 3:13-17 / 강성찬 목사
세례는 하나님께서 분부하신 명령이며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위대한 복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세례를 받으셨고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분부하신 후 공생애를 마치셨습니다.
세례 요한으로부터 사도 바울에 이르기까지 신약의 위대한 지도자들은 이 성스러운 예식에 참예했고 제자들에게 가르치며 실천하였습니다.
세례는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내적 신앙의 외적인 고백이며 하나님께서는 세례를 통하여 우리가 자기의 백성 됨을 인 처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 안에서 옛사람의 죽음과 새로운 생명의 태어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롬6:3-7)
그러므로 세례증서는 나의 옛사람의 부고장이며 새로운 세계의 시민등록증과 같고,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결혼증서와 같습니다.
베드로는 노아 홍수에서 구원을 받은 것을 세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3:20-22)고 했습니다.
홍수는 죄악된 세상을 심판하는 것이었지만 새로운 생명으로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은 영혼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결단의 표이며 하나님 편에서는 자기의 백성이라는 인침이요 증표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세례가 애굽에서 구원을 받은 사건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고전10:1-5)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아 홍해를 건너 약속의 땅으로 인도를 받은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세례를 받음은 세상에서 나와 구원받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신약의 세례는 광야의 소리 요한으로 부터 시작 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 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마3:1-10) 고 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세례와 그리스도께서 베푸실 세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3:1-12).
요한의 세례는 강력한 회개의 명령이 전제되어 있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길을 예비함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베푸실 세례는 성령과 불 즉 구원하실 생명과 죄에 대한 심판의 능력이 담겨진 세례를 베푸실 분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세례를 주라고 명하심에는 하늘나라 건설에 그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고 했습니다.
세례 받는 것과 제자를 삼는 것은 불과분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에 있어서 세례는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 먼저 세례 요한에게 나아가셔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하셨을 때 세례 요한은 놀라서 자신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받아야만 할 터인데 어떻게 예수님이 저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하시느냐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요한에게 하신 말씀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간이 받아야 할 세례가 필요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의 사적 생애를 마감하고 메시야 직무를 수행하는 공생애로 들어가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의 받으신 세례는 모든 죄인을 대신한 고난입니다.
사실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적 메시지에 따르면 예수님은 고난받는 종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요한은 세례를 베푼 후 즉시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라 불렀고, 예수님 자신도 자신의 대속적 고난을 세례로 표현했습니다(눅 12:50).
세례는 죄와 욕심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과 말씀에 대하여 살겠다는 뜻으로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언약의 예식입니다. 예수님은 죄와 욕심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과 말씀에 대하여는 언제나 사는 사람이 되라는 교훈을 주시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의 방식과 생각대로 살아 자신의 의와 뜻을 이루면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방식과 방법대로 행하여 하나님의 의와 뜻을 이루면서 사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그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며 또한 세례를 받으신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살지 아니하고 자신의 욕심과 뜻대로 살려고 하는 죄악 된 본능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에게도 아주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중요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매우 중히 여겼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바리새인들은 그 율법대로 살려고 얼마나 애를 쓰고 노력을 하였는지 모릅니다. 저들은 말씀과 율법을 중히 여겨 손목에도 시계처럼 말씀을 적어 차고 다녔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띠에 적어 머리에 띠고 다니기도 하고 집안 문설주에도 말씀을 적어 놓고 그곳을 들고 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였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기 위하여 안식일 지키는 규례와 법을 600여 가지나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 저들이 얼마나 말씀과 율법을 중히 여기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구원의 복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롬10:1-3절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니라.(롬 10:1-3)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었으나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부족함으로 결국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 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를 이루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세우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를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께 열심이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저들은 자신의 구원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에 대하여 열심인 사람도 구원받지 못하고 복을 받지 못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매우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단어와 '자기의 의'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교회에 대하여 얼마나 열심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누구의 의를 이루려고 그토록 힘쓰고 애 쓰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그가 하나님과 교회에 대하여 열심이라고 하여도 그 목적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 나타내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의를 이루고 나타내기 위함이라면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마7:21-23절 말씀 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주의 이름을 부른 사람뿐만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까지 쫓아낸 사람까지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왜 저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까지도 쫓아내면서 살았는데도 구원을 얻지 못하였을까요?
그 이유는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 자기의 자랑과 영광을 위하여 그와 같은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의'를 위함이냐 아니면 '자기의 의를 드러내기 위함'이냐 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철저한 자기 부인과 부정입니다. 우리는 철저한 자기 부인과 부정을 통하여 철저한 하나님 시인과 긍정에 이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세례는 바로 이와 같은 철저한 자기 부인과 부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죄와 욕심에 대하여는 죽고 의와 하나님께 대하여 살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겠다는 것입니다. (롬16:11)
자기 의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려고 하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구원을 위하여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우리가 평생을 예수를 믿어도 그처럼 열심히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여도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간증할 구원의 감격이 없는 까닭은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모든 일에 중심과 목적에 자신이 살아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의를 이루려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례의 본래 의미가 하나님의 의를 이룸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의 문이 열렸습니다.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있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예수 그리스도가 닦아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 우리 앞에 펼쳐지고 하늘의 문이 열려서 하늘이 우리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하여 각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행2:37-39).
세례는 위대한 대관식의 자리입니다. 옛날 헷 족속은 왕의 대관식을 성대하게 가졌습니다. 부왕이 아들에게 왕관을 물려줄 때 찬란한 금관을 손수 아들에게 씌워주고 주위에 모여 있는 문무백관들과 백성들이 다 듣도록 큰 소리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선언을 한다고 합니다.
세례는 부왕 되신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들 하나하나에게 하늘의 상속자로 선언을 해주시는 행위인 것입니다.
진정한 세례를 사모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의미의 세례를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의를 이루려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온전한 구원을 이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 살면서도 천국을 살며 항상 기뻐하고 늘 감사하며 구원의 감격을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례는 성도가 받을 위대한 복입니다. 이미 세례를 받은 분들도 이 놀라운 복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세례를 받으실 분들은 세례의 중요성을 인식하시고 경건된 마음으로 이 복에 이르도록 애써 주시기를 바랍니다.
요단강 세례
마 3:13-17 / 홍문수 목사
2007년이 시작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제 교회 절기 상 ‘사순절’에 접어들었습니다. 사순절(四旬節 Lent)은 부활절 직전 주일을 제외한 40일의 기간을 가리킵니다. 매년 부활절과 사순절 날짜는 달라집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왜 그런지 궁금해 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그 이유는 교회 역사 상 처음 부활절 날짜를 결정할 때 만월을 중심으로 정했기 때문입니다. 부활절(復活節 Easter)은 춘분 지나고 만월(滿月) 후 첫번째 주일입니다. 그래서 금년은 4월 8일이 됩니다. 역산해 보면 금년 사순절은 2월 21일~4월 7일이 됩니다. 특히 사순절이 시작되는 수요일을 가리켜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라 부르는데, 지난 수요일(2월 21일)이었죠. ‘재’는 회개를 상징합니다. 사순절 기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경건한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그런 점에서 ‘재의 수요일’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 생애의 하이라이트는 아무래도 십자가 죽음과 부활일 겁니다. 그렇게 볼 때 1년 중 가장 중요한 절기는 아무래도 사순절과 부활절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는 사순절 기간 동안 예수님의 십자가에 관련된 말씀을 많이 읽고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그런 취지에서 오늘부터 부활 절 전까지 6주 동안 ‘십자가의 길’이란 큰 주제 하에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지상 생애는 그 전체가 ‘십자가의 길’입니다.
베들레헴 말구유에 오신 그때부터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달릴 때까지 전부가 ‘십자가의 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 중 십자가와 관련된 중요한 몇 가지 사건과 말씀을 뽑아서 소개해 드립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순서로 ‘예수님의 요단강 세례 사건’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더욱 깊이 만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1] 예수님의 요단강 세례 : 요한의 만류와 예수님의 강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30세에 이르기까지는 한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성경에 특별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기간을 가리켜 ‘예수님의 사생애’(사적인 생애 Private Life)라고 부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생애 기록이 30세 이후 십자가에 달리신 33세에 이리는 기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예수님은 구세주로서 공식적인 생애를 사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간을 가리켜 ‘예수님의 공생애’(공적인 생애 Public Life)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공생애가 언제부터 시작될까요? 예수님의 ‘요단강 세례’입니다. 예수님이 고향 갈릴리에서 멀리 요단강으로 오셔서 세례를 받으신 사건입니다. 그때는 마침 선지자 요한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요단강에서 백성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있던 때였습니다. (참고로 세례를 베푼 선지자 요한을 가리켜 ‘사도 요한’과 구별하는 의미로 ‘세례 요한’이라 부릅니다.)
세례 요한이 한참 세례를 베풀고 있는데 예수님이 그곳에 나타나셨습니다. 그 위엄 앞에 세례 요한은 직감적으로 예사로운 분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이미 알아본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확신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세례 요한 앞에서 예수님은 대뜸 세례를 받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는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세례는 죄인이 회개하고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보다 훨씬 거룩해 보이는 분에게 세례를 베푼다는 게 도무지 용납되지 않았던 겁니다. 14절 보면 요한이 난처해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14절.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여기서 ‘말리다’라는 말은 아주 강하게 만류한다는 뜻입니다. 또 이 단어가 문법적으로 미완료시제로 되어 있는데, 여러 번 계속해서 만류했음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요한에게 세례를 베풀 것을 강권합니다. 결국 요한은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게 됩니다. 15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여러분, 한번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세례 요한도 백성들도 아직 예수님이 누구신지 확실히 알지 못하지만 어쨌든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죄인처럼 자진해서 세례를 받는다는 게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보면 우스꽝스럽게 여겨질 정도입니다. 그것도 요한에게 강권하면서 받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만큼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려고 하신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살펴보는 게 중요합니다.
[2]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의미 : 메시야 대관식
먼저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장면을 본문을 읽으면서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행색은 아마 누추한 모습이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당시 외모로 볼 때 영락없는 평민의 모습입니다. 그것도 먼 길을 걸어오셨을 테니까 차림새가 보잘 것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요한이 감히 세례를 베푸는 것을 주저했을 정도로 예수님에게서 풍기는 위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요단강 물 속으로 내려가서 세례를 받으셨지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등 장엄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신학자들이 이 사건을 가리켜 예수님이 만왕의 왕으로, 메시야로 등장하는 ‘대관식’(戴冠式)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요단강 세례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세 가지로 정리해 봅니다.
① 메시야 신분의 공인 :
16절~17절 보면 예수님의 세례 장면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먼저 메시야라는 말에 관해 설명 드리죠. ‘메시야’는 히브리어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 ‘구세주’ 라는 뜻입니다. 헬라어로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메시야, 그리스도는 같은 말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지금 아무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야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요한도 긴가민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분명하게 메시야라는 증표(Signs)가 나타난 겁니다. 세 가지인데,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고 하나님의 음성의 들린 겁니다. 마치 왕이 즉위할 때 왕관을 씌우고, 축포를 쏘고, 빵파레를 울리듯 하나님 아버지께서 증표들을 보여주신 겁니다.
이런 장엄한 장면을 보고 요한이 예수님의 신분에 대해 확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담대히 증거합니다. 그런 경위를 잘 설명해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요1:32~34입니다.
요1:32~34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하나님)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그러니까 예수님이 굳이 세례를 받으시려고 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겠죠?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범상치 않은 분으로 예감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아들인 것으로 100% 확신하지는 못했는데, 예수님이 세례의 과정을 통해 당신의 신분을 확신시켜 주신 것입니다.
요즘 TV 방송사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는 취지로 고구려 시대의 사극을 방영하고 있는데, 많은 분들이 「주몽」을 봅니다. 거기 보니까 고주몽의 아들이 당당하게 찾아가서 자기가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으로 확인합니까? 주위 사람들도 어떻게 그걸 믿을 수 있었습니까? 증표 때문입니다. ‘부러진 칼’이 증표였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세례 요한이 이런 증표를 분명히 보고 들었기에 아무런 의심 없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구세주로 증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턱대고 믿으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차근차근 그리고 분명하게 증거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이 순교하면서까지 예수님을 증거한 겁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사도들이 사도 요한을 제외하고 다 순교했습니다. 사도 요한도 순교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가 기름 가마에 튀겨서 죽이려고 했지만 죽지 않으니까 질겁하고 밧모섬에 귀양을 보냈던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당신이 죄인의 모습으로 낮아지면서까지 요한에게,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이신 증거를 보여주신 예수님의 배려하시는 마음을 헤아려 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분 앞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② 대속주의 사역 개시 :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죄인이 모습이 되신 겁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 중 아주 중요한 것이 바로 대속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이 죄인인 인간들의 대표가 되신 겁니다. 말하자면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이 되기에 앞서 인간의 죄를 짊어지신 것을 나타냅니다.
이런 사실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게 구약 성경의 속죄제사입니다. 구약의 속죄제(贖罪祭)는 대표적으로 레위기 4장, 16장 등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이 속죄제를 드릴 때 양, 염소, 송아지 등으로 제물을 바치는데, 그 절차가 의미심장합니다. 먼저 인간이 자기 죄를 고하면 제물의 머리 위에 안수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가 제물에게로 전가(轉嫁)됨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짐승제물이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난 후 그 짐승은 피를 흘리고 죽게 됩니다. 곧 ‘대속(代贖)의 죽음’입니다. 그때 짐승은 거룩하고 흠이 없는 것을 고르게 되는데, 그 이유는 죄를 대신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은 죄가 없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죄를 대신 짊어지고 자신의 ‘흠 없는 의’를 안수하는 인간에게 전가시켜 줍니다. 물론 그 짐승 자신의 의가 아니라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상징하는 겁니다. 이것을 가리켜 ‘이중전가’(二重轉嫁)라고 부릅니다. 이중전가는 맞교환(exchange), 바꾸기입니다. 그러니까 이중전가는 ‘인간의 죄’와 ‘예수님의 의’를 맞교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거룩하고 의로운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인간의 죄를 다 짊어지신 겁니다. 세례 받으신 게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무라고 증거합니까? 요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고후5:21에도 이런 사실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렇게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예수님이 나중에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겁니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죄값을 다 치르고, 인간은 믿음으로 예수님의 의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을 가리켜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라 부릅니다. 롬3:20 이하를 보면 이런 원리가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롬3:20~24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칭의 稱義)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것은 마치 옷을 바꿔 입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신사와 거지가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신사와 거지가 옷을 바꿔 입는 겁니다. 거지는 누더기 옷을 벗어서 신사에게 주고, 신사복을 입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죄의 옷’을 벗어서 예수님에게 넘겨드리고, 예수님의 ‘의의 옷’을 입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대속해 주셨음을 믿고 예수님의 의의 옷을 입은 성도로서 구원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 되었으니 영생합니다. 이 세상 살 동안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영원한 천국이 우리가 들어갈 본향입니다. 이런 구원의 확신을 갖고 담대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③ 그리스도인 삶의 모델 제시 :
예수님은 또한 믿는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델을 보여주신 겁니다. 하나님의 믿는 자라면 당연히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겸손’과 ‘순종’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 자신입니다. 창조주이십니다. 만왕의 왕이십니다.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요단강에 내려가시고, 세례 요한 앞에 고개 숙여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만큼 자신을 낮추신 겁니다. 겸손이죠. 그리고 그렇게 하신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더 나아가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일거수일투족 모든 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한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겸손과 순종의 모습을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빌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 자신이지만 인간의 낮은 몸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도록 하셨고,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온 세상에 나타나게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너무 중요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그토록 낮아지시고,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셨다면 우리는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은 높으신 분이 낮아지신 겁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본래부터 낮은 자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이란 신분을 취득함으로 존귀한 자가 된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르면 안 되는 것처럼 우리의 본래 모습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본래 흙으로 지어진 미천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은 창주조이십니다. 그리고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 앞에 늘 겸손히 엎드려야합니다. 그게 성도의 당연한 자세입니다.
겸손이란 단어가 아주 흥미롭습니다. 영어로 Humility인데, 이 단어는 라틴어 Humus(땅, 흙), Humilis(땅바닥에 엎드린) 등에서 유래합니다. 이 말처럼 인간은 흙입니다. 그 위치는 땅바닥입니다. 그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의 존귀한 백성이 되었다 하더라도 이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겸손히 순종했을 때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서 십자가 대속의 위업을 이루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만왕의 왕으로 나타나신 것처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겸손한 자세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흔히 우리가 잘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뜻대로 순종하면 위험하다는 겁니다. 손해 본다는 겁니다. 자존심이 상한다는 겁니다. 마음속으로 계산해 보면서 피해의식을 느끼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마치 자동문의 원리와 같습니다. 멀리 서서 머뭇거릴 때는 닫힌 문입니다. 그러나 담대하게 다가가면 열린 문이 됩니다.
그런데 순종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전혀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의 간증입니다. 한밤중에 강도가 침입했습니다. 흉기를 들이대고 위협합니다. “꼼짝 마!” “손들어!” “금고 어디 있어?” “돈 있는 거 다 내놔!” 강도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절절 매면서 순종했습니다. 강도가 간 후 억울하기도 했지만, 자신이 너무 한심스러웠습니다. 강도에게는 절대 순종을 했는데, 평소 하나님께 얼마나 순종했는지 돌아보았습니다. 자신의 이해타산에 따라 순종할 때도 있고 불순종할 때도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살아왔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모습도 대동소이합니다.
성경을 보면 모든 하나님의 역사가 순종을 통해 나타납니다. 행16:6~10 보면 바울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유럽에 건너간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울은 소아시아(터키)에서만 복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자꾸 막았습니다. 바울은 나중에 그것이 유럽으로 건너가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뜻인 줄 깨닫게 됩니다. 그러자 그는 즉시 순종합니다. 마게도냐로 건너가는데, 그때 처음 들어간 도시가 ‘빌립보’입니다. 그 일이 오늘날 유럽을 형성한 겁니다. 그리고 세계 복음화의 초석이 된 겁니다. 우리 한국에까지 복음이 전해지고 우리가 이렇게 예수 믿고 성도로 복되게 살아가는 것도 다 그 덕택입니다. 이처럼 순종은 하나님의 큰일을 이룹니다.
눅5:1~7 보면 베드로가 순종할 때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갈릴리 바다에서 밤새도록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했을 때 순종합니다. 상식적으로 경험적으로 맞지 않았지만 그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그물이 찢어지고 배에 고기가 채워지는 만선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왕하5:8~14 보면 아람 장군 나아만이 순종할 때 하나님의 치유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아람의 제2인자이지만 불치병인 문둥병에 걸립니다. 인간적으로 절망입니다. 그런데 소문을 듣고 이스라엘로 가서 엘리사를 만납니다. 그런데 문전박대를 당합니다. 다만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는 말만 듣게 됩니다. 자존심이 얼마나 상했겠습니까? 대국의 장군이 불원천리하고 찾아왔는데 나와 보지도 않고 요단강에 가서 몸이나 씻으라니! 돌아가려는 그에게 신하들이 만류해서 겨우 자존심, 상식, 다 접고 순종합니다. 일곱 번 몸을 씻으니까 어떤 일이 생깁니까? 어린 아이 피부처럼 치유되었습니다. 순종하는 그에게 치유의 역사가 나타난 겁니다.
여러분, 이처럼 성도의 삶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으로 이뤄집니다. 하나님의 일도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축복도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치유도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기적도 순종함으로 이뤄집니다. 우리는 요단강 세례를 통해 얼마나 철저히 순종해야 되는지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뒤따라가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큰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신 것은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분명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임을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또 한 가지 순종의 삶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무쪼록 요단강 세례의 이런 의미들을 마음속에 새기시고 사순절 내내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예수님을 뒤따라감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의를 이루시는 예수님
마 3:13-17 / 성홍모 목사
우리 한국교회사에 아주 중요한 인물이신 감리교회의 박대선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분은 연세대학교 총장을 지낸 분으로 6대 신자의 가정이며 3대 목사의 집안입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것은 박목사님 가정의 형제가 9남매였는데 부모님과 함께 열한 식구들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가정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박목사님이 젊었을 때, 일본에서 대학을 나와 중등학교 교사 자격증을 받게 되자 일본과 한국의 여러 학교에서 교사로 모셔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청년 박대선에게는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어려서부터 어른들이 “너는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물을 때마다 그는 서슴지 않고 목사가 되겠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대학의 영문과를 나와서 이제 영어 선생이 되면 당시에 90원의 월급을 받을 수 있는데, 이후로 3년 동안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전도사가 되어 교회에 가면 15원의 사례비를 받아야 했습니다. 젊은 사람으로서는 결단하기가 매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이 나지 않아 아버지 목사님에게 의논을 드렸습니다. 아버지가 말씀합니다. “네가 지금 중학생도 아니고 대학을 졸업한 사람인데, 내가 아버지라고 해서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겠는가? 네가 결정하도록 해라. 목사가 되는 것이 이 세상의 대통령이나 장관 되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못하다고 생각되면 신학교에 갈 것 없이 학교 선생하는 것이 좋고, 네가 목사되는 것이 대통령이나 장관 되는 것보다 귀하고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되면 신학교로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말씀해주었습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충고에 너무나 부끄러워 돌아와서 곧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신학대학을 나와서 50년간 목사로, 교단의 감독으로, 대학 교수와 총장으로 한국교회를 섬겼습니다. 위대한 사람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 자기를 낮추는 사람, 손해를 감수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오늘은 주님의 수세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초대교회로부터 주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주현절기를 지키면서 사순절로 들어가기 전에 “주님의 수세주일”로 지켰습니다. 교회력이란 일 년을 보내면서 예수님이 공생애에 있었던 모든 일을 기념하고 재현하는데 목적이 있기에 주님이 세례 받으신 날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로서의 공적인 생애를 보내시기에 앞서 세례요한이 등장합니다. 아직 예수님이 그의 가족들과 함께 갈릴리 나사렛에서 개인적인 삶을 살고 계실 때에 예수님보다 6개월 전부터 세례요한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합니다. 세례요한의 본명은 요한입니다. 그가 세례를 베풀었기에 쉽게 부르기를 세례요한이라고 합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은혜로 돌보신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유대광야에 나가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외쳤습니다. 구약의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 약400년 간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는데, 세례요한이 나타나신 것은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미 말씀하신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선지자요, 주님이 오실 길을 곧게 하라는 사명을 가지고 오는 선지자가 있다고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 석청이었습니다. 그는 유대 광야에 살면서 금욕생활에 힘쓰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백성들에게 회개를 외쳤습니다. 선지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나아와서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사람들 중에는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있었는데, 세례요한은 그들에게 책망하였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들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만한 경고요, 책망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당시 사람들에게 곱게 미사여구를 사용하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외쳤는데, 이 말은 지금 들어도 정말 욕 중에도 욕이라고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요한은 광야에 볼 수 있는 독사를 보면서 간교하여 옛날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던 그 뱀을 상상하였습니다. 당대의 최고의 종교지도자들이요, 정치적인 지도자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곧 “저주받은 뱀의 후손들”이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사탄의 도구요, 사탄의 종들이라고 욕한 것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였다는 표시가 하나도 없는데 무슨 근거로 임박한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욕하는 것은 망하라는 말로 들리지만,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말이었습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구원받고,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회개한다는 생각으로 세례 받는 것으로 치유되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 설 때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칠 때마다 자기보다 뒤에 오시는 그 분, 하나님이 보내신 종,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이,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분, 역사를 심판하시고 인류를 구원하실 분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이 갈릴리로부터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찾아가셨습니다. 그 때에 세례요한이 말렸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이때에 예수님께서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잘 알아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말씀을 듣고 허락하여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하늘이 열리면서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예수님의 머리 위에 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사건을 4복음서가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죄인들이 받는 세례를 자청하여 받으러 가셨는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요한이 증언한대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신데 굳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유대 광야로 나오시고 요단강에서 가서 세례를 받으셨는지 그 깊으신 뜻을 다 알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당시의 죄인들이 나아와 죄를 회개하면서 그 죄를 씻었다는 표로서 물세례를 받았습니다. 물이란 더러운 것을 씻어줍니다. 우리들이 더러워진 손과 발을 무엇으로 씻을 수 있습니까? 물로 그 더러움을 씻는 것입니다.
물을 가지고 우리의 더러워진 몸을 씻을 수 있습니다. 물이 더러움을 씻어주듯이 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죄를 회개하면서 죄의 용서함을 받았다는 상징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죄에서 용서받는 표시로 세례를 받지만, 우리의 신학적인 입장에서 보면 요한의 세례를 받으면 정말 죄를 다 용서받고 구원을 받느냐고 하면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죄의 용서의 길을 열어놓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례요한의 외침과 그의 생애를 통하여 세례를 조명해보아야 합니다. 세례요한 그도 한 사람의 죄인으로 오시는 주님으로 인하여 구원받아야 하는 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세례는 예수님의 구속사에 있어 서막이었고, 예수님의 구속사를 열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죄인들이 죄를 회개하면서 물세례를 받는다고 하면 죄가 없으신 주님은 정말 세례 받으실 필요가 없는데, 세례요한이 거절하는데도 불구하고 세례를 자청하여 받았습니다. 죄 없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는다고 하면 아마 그도 남모르는 죄가 있는 사람이었다고 오해를 살 수도 있고, 죄인으로 취급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에 자신은 죄가 없고, 깨끗하다고 여기던 사람은 세례요한에게 나아가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의롭다고 하던 사람들이 피하고 싶은 자리인데, 예수님은 거절하는데도 자청하여 세례 받으려고 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이 더 낮아져서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을 읽어보면 무언가 순서나 차례가 잘 돌아가지 않고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왜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나아가 세례를 받은 것입니까?
카리스 주석에서는 몇 가지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세례요한의 사역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 것이라고 공적으로 인정해주는 의미였다고 합니다. 요한이 등장한 것이나 그가 회개를 강조한 것이나 죄 씻음의 세례를 베푼 것을 크게 보면 하나님의 구속사에 있어 서막을 알리는 사건으로 인정하시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을 예수님의 생애의 한 사건으로 받아들임으로 세례요한은 예수님 전에 오실 엘리야와 같은 사명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나아가 세례를 받은 것은 우리 예수님 자신이 죄인들과 동일시하시면서 죄인들의 대표가 되어 세례를 받고 있습니다. 장차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은 모든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실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모든 사건은 십자가라는 사건에 연결되고 있으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예표적으로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이후에 세례요한을 예수님을 증언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나아가 세례를 받은 것은 사적인 생애와 공적인 생애의 전환점으로 선포하시는 의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은둔하셨지만, 이제 공적으로 그 얼굴을 보이셨습니다. 지금까지는 가정에 매여서 살아오셨습니다. 세례 받으신 후에 40일 간 광야에서 금식하시면서 기도하셨고, 그 후에 악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시고,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공생애의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세례받기 이전과 이후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공생애에 들어가시면서, 메시아로서, 하나님을 대리하시는 자로 부르심에 응답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15절 말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는 말씀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가 당할 죽음의 세례를 예시하시고 있습니다. 반드시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하는 의지를 표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겠다고 나아오셨을 때에 요한이 거절하다가 이 말씀을 듣고 허락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지금 이 세례가 상징하는 것이 바로 모든 죄인을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요한은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신 말씀대로 예수님은 고난 받는 의로운 종이었습니다. 사53:11에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세례를 받은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이 물에 올라오실 때에 하늘이 갈라지면서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의 머리 위에 임하시는 것이 보였습니다.
하늘이 왜 갈라진 것입니까? 막혔던 장벽이 갈라지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하늘이 열렸습니다. 우리도 하늘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새롭고 산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하늘이 갈라지고 열리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하늘이 갈라졌다는 말은 하늘이 열렸다는 말인데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가 가능해졌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습니다. 이 말은 성령이 강림하시는 방식이 마치 비둘기 같았다는 말도 되고, 이 말은 성령이 비둘기의 모습과 같이 임했다는 말도 되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에게 임하신 성령은 사람들에게 보이기를 마치 비둘기 형상으로 보여졌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성령이 사람들에게 임하실 때에 그 위에 머무는 모습을 비둘기의 형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랍비들은 창1:2을 해석하면서 “하나님의 신은 비둘기 같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참 인간이시며, 참 신이시기에 성령이 임하심으로 가장 은사를 받으신 것이요, 이제부터 성령님이 동사하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자이신 하나님으로 활동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이 정한 나이 30세에 공개적인 절차에 의하여 우리의 그리스도로, 우리의 왕으로, 우리의 제사장으로 우리의 선지자로 그 사명을 다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세례요한이 똑똑히 보고, 자기도 과연 누가 자기 뒤에 오시는 메시아이신지 그동안 궁금하였는데 예수님의 위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시는 것을 보고는 확신을 얻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다”고 증언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하늘이 열리면서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 소리는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이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이런 음성을 들으신 분이시기에 우리의 죄를 대속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달라도 한참 다른 분이십니다. 그 분만이 우리의 죄를 사하실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예언자들을 통하여 구약에서 예언되어진 말씀이 그대로 응하게 된 것입니다.
시2:7에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사42:1에는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고 하셨습니다.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올라오실 때에 성부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성령님이 강림하시고 주님이 장차 십자가를 지실 것을 확신하시고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렇게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 역사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이라고 선포하시면서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된 것입니다.
사람이 사명을 깨닫고 그 사명을 위하여 낮아지고 희생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위대한 일일수록 힘든 것이며, 고통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응답하시는 주님의 희생적인 헌신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면서도 죄인들이 받는 세례를 받으시면서 장차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실 것을 천명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공적인 생애를 시작하는 팡파르와 같습니다.
하늘이 열리는 것이나 성령님이 비둘기 같이 임하시는 일,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린 것은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우리 사람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되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드림메이커라는 책에는 캐나다의 존 캐디 선교사의 일생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존 케디" 라는 선교사는 식인종이 사는 작은 섬 뉴헤브라이즈 군도로 복음을 들고 갔습니다. 그는 생명의 위험을 느끼면서도 식인종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들을 돌보고 언어를 습득하고, 문자를 만들어 가르치면서 성경을 번역하고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가 사역을 마치고 죽고 난 후 사람들은 그의 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그 기념비에 사람들은 이렇게 썼습니다. “1848년에 그가 이곳에 처음 상륙하였을 때에는 이곳에 그리스도인이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난 1872년에는 여기에 식인종이 한 명도 없다.” 선교사님은 26년 동안 그 섬 전체를 복음화하였고,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인 되게 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주님의 결단처럼, 당신은 죄가 없으시지만,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과 동일시하시면서 반드시 십자가를 지시겠다는 결단으로 세례 받으러 나가셨습니다. 낮아지시고, 겸손하시고 희생하시는 순간 하나님은 그를 높이시면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불러주시고 내 기뻐하는 자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주님과 함께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이 가신 길을 가시면서 낮아지시고 희생하면서 주님과 동행하시기를 소원합시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세례를 받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낮아지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기에 이제는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결심하고 주님을 따라가시기를 바랍니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
마 3:13-17 / 성홍모 목사
오늘의 교회력은 예수님 수세 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나아가 세례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매년 주현절이 지난 처음 맞이하는 주일을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로 지켜왔습니다. 주현절이란 하나님이 인간으로 나타나시고 드러내시고, 찾아오신, 즉 현현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주현절이란 영어로 "Epiphany" 라고 하는데 나타남, 현현이라는 뜻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게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내시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주현절의 의미는 예수님이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셨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셨다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주현절은 기독교 초기부터 부활절 오순절과 더불어 기독교 3대 절기의 하나였습니다. 한국교회에는 세상의 달력에 의지하여 살아가고, 또 목회도 그렇게 하다보니 주현절의 의미가 전달되지 않고 있습니다. 주현절은 매년 1월6일로 지켜오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성탄절을 지키고 연말 연시라고 하여 떠들썩하니 지나다보니 주현절은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성탄절보다는 주현절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대림절에서 성탄절, 그리고 주현절까지 이어지는 것이 주님의 탄생에 관한 절기입니다. 지금도 서방교회는 성탄절을 가장 큰 명절로 지키고 있으며, 동방교회는 주현절을 가장 큰 명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주현절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동방박사들의 방문,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 그리고 가나의 혼인 잔치의 기적을 기억하는 절기로 지켜왔습니다.
아무리 교회들이 주현절을 의미 있게 보내려고 해도 지금 우리에게는 아무런 느낌도 없고, 중요한 의미를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현절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나 보이신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주현절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주고 있는 말씀이라고 봅니다. 주현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방인들에게까지 현현하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방인 동방의 박사들에게까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드러내시고 현현하신 것입니다.
아울러 주현절에는 예수님의 세례 받으신 것과 첫 번째 이적인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 되게 하신 것을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요2:11)고 하셨습니다.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바로 나타내셨다는 말이 "에피파니"라는 말입니다. 주현절기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동방박사들의 방문과 예수님의 세례와 처음 이적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주현절을 지키면서 서방교회에서는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받은 것을 강조하고, 동방교회에서는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것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주현절기에는 세례를 많이 베풀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이기에 주님이 받으신 세례의 의미와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의미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므로 하나님이 아들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시고, 어둠의 세상에 밝은 빛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나설 때는 자신을 드러내고 싶고, 과시하고 싶은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나아가서 세례를 받으신 사건은 예수님이 이제부터 공생애를 시작한다는 선언이요, 하나님의 결정적인 때와 시간에 따라 행동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당신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하시며 본질상으로 같으신 분이신 데도 낮아지고 또 낮아진 중에 그리스도의 사역에 임하고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쓰임을 받고, 부르심을 받은 종들은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하지 못하니, 좌충우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들을 높이 들어 쓰고 계속적으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같이 죄가 없으신 분이 왜 세례 요한에게 나아가서 세례를 받았느냐 하는 것은 아직까지도 명확한 해석을 내어놓을 사람이 없습니다. 기독교인으로 좀 생각이 있는 교인이라고 하면 죄가 없으신 주님께서 세례요한에게 나아가서 세례를 받았느냐? 그리고 세례요한의 세례를 어디까지 인정하여야 하며 그 세례가 우리 신앙에 무슨 도움을 주고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세례요한이 베푸는 세례를 받으면 일상 생활에서 지은 죄를 모두다 용서받을 수 있느냐 하는 의문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1. 세례요한은 회개를 위한 세례를 주었습니다.
세례요한이 주는 세례는 회개를 위한 세례였습니다. 자기의 죄에 대하여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나, 죄를 버리고 새롭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요한에게 나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지금까지는 죄를 지으면서 살아왔지만, 앞으로는 새롭게 살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세례는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라는 말하지만, 죄사함까지의 회개의 세례라고 하여, 죄사함으로 인도하는 세례라는 의미입니다.
세례 요한이 베푼 세례 그 자체가 죄를 용서해주는 사죄는 아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유대인들이 메시아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죄를 아파하고, 죄의식을 예리하게 가지고, 회개하라고 세례를 주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주는 세례가 완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로 인도하는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율법의 역할처럼 구원받을 곳은 은혜의 집으로 가는 것이라고 인도하는 몽학 선생과 같습니다.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 많으신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세례요한은 어디까지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존재하는 사람이요, 우리 주님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2.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는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은 세례요한에게 나아가서 세례를 받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하셨습니다. 요한이 세례를 베풀다보니 한 청년이 나아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성령은 세례요한에게 알려주시기를 지금 네게 오는 분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분이요, 지금까지 네가 기다리던 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세례를 받으려고 나아오신 예수님에게 말씀드렸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세례를 줄 수 없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당신이 내게로 나아오시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렇게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왔고,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살아온 세례요한은 지금 말씀하시는 주님은 자기가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는 능력 많으신 분이요, 성령과 불로 세례주실 분이신 것을 확신하면서 순종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영안이 열리고 보니, 자기는 예수님에게 세례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지만, 지금 예수님이 받으시려는 세례는 지금까지의 단순한 회개를 위한 세례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의를 이루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예정하신 의식으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세례 요한이 세례 주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요청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죄가 있어서 세례 받은 것이 아니라,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함"이었기에 "모든 의를 이룬다"는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면 되는 것입니다.
1) 회개의 세례 이상의 큰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번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는 적극적으로 예수님 편에서 요청하셔서 이루어진 것이요, 세례 요한이 베풀던 이전의 세례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세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는 회개를 위한 세례가 아니며, 오히려 예수님 편에서 요청하신 것으로 전에 요한이 베풀던 세례와는 완전하게 구별되는 세례로, 그 이상의 큰 뜻이 포함되어 있는 세례입니다. 그 깊은 뜻을 다 측량하지 못합니다.
2)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어떠한 죄가 있어서 받는 세례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아주 중요한 뜻이 들어 있습니다.
보통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은 옛 사람의 옛 생활을 청산하고 이제부터 전혀 새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결단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사적인 생활을 이제 그만하시고 공적인 생애, 메시아로서의 공생애를 시작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을 그 동안의 사생활을 버리고 이제부터는 공생활로 들어가시는 것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30년 간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사셨습니다. 이제부터는 공생애로 들어가시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3) 수세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사에 예정되어 있는 한 과정입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주는 것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구원사에 있어 꼭 있어야 하는 과정으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모든 사건과 생애의 정점은 그가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피를 흘리시는 것입니다. 모든 의를 이룬다고 하는 것에 하나님의 구속사에 있어서 세례 요한의 세례까지 포함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세례도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있어 포함되고 있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사역을 증언하는 것으로 세례 요한의 사역도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준비과정으로 보는 것입니다.
4)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하는 단호한 의지입니다.
성경을 읽어가다가 해석하기 어려운 본문이 나오면 "십자가"라는 마스터키로 열어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단호하게 지시겠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인간을 위하여, 그 인간을 대표하여 십자가를 지시겠다는 의지로 인간과의 "동일시"하는 순간입니다. 이때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은 죄악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과 "동일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으로 회개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동일시", 또는 "동일화"라는 말은 죄지은 인간과 함께 하는 것이요, 그런 인간의 심정으로 가는 것입니다. 죄인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입니다. 죄인의 심정으로 세례를 받으러 가시고 있습니다. 그런 죄인을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주님은 죄인의 입장에서 죄를 지시고, 세례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앞으로 인간의 모든 죄악을 다 짊어지고 십자가로 나아가시겠다고 하는 단호한 결의로 세례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예표적인 사건으로 세례 받으신 것입니다.
마가복음10:38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라고 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사랑하는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에게 주의 우편과 좌편에 앉혀달라고 할 때 권면하신 말씀입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이 받으시는 세례는 고난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잔이나 세례는 다 같은 의미로 고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받으시는 세례는 단순히 죄에서 회개하라는 목적이 아니라, 장차에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하시는 단호한 의지로 받으신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도 바른 그런 차원입니다. 단호하게 죽음으로 새 생명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한 하나님의 승인절차입니다.
모든 의를 이루신 세례는 하나님의 아들에게 대한 승인 절차로서의 세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승인의 절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는 결정적인 시작인데, 하나님의 보내시는 아들로, 또 그리스도로 보증하시는 하나님의 의지가 세례의식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하늘이 열리면서,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예수님의 위에 임하셨으며, 하늘로부터 큰 소리가 있었는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시었습니다. 하나님의 승인 절차요, 성령이 임하시는 결정적인 시작입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이제부터 하늘이 열리는 순간이요,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을 승인하는 절차요, 하나님은 이 일과 우리 주님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수세주일로 지키지만, 그동안 2000년 기독교 전통은 예수님의 수세만이 아니라, 우리 성도들의 세례 받은 것을 감사하고 기억하는 절기로 지켜왔습니다. 예수님의 수세가 중요한 것처럼, 우리의 생애에 있어 우리가 받은 세례도 아주 중요한 사건으로 기억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으로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므로 우리 앞에 하늘 문이 열려지고,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위에 강림하시고, 하나님의 우리를 받아주신다는 말씀을 내려 주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례를 주라는 명령과 함께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겠다는 약속을 내려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아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형식적인 세례가 무엇이 소중하냐고 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형식이 없이는 내용을 담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막16:15-16에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먼저 믿음이 있어야 하지만, 믿음을 가진 이들은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믿음이 진정한 바른 믿음인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음으로 영접하고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것은 우리에게 영생을 있음을 알게 하는 분명한 근거가 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94문에서는 세례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세례는 성례의 하나로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물을 가지고 씻는 예식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음과 은혜의 언약의 혜택들에 참여함과 우리가 주님의 것이 된다는 약속을 표시하고 확증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세례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세례를 주고 말씀을 가르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세례를 받았으니 당연히 기계적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믿고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것을 믿고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은 세례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세례는 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요, 선포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우리 주님이 먼저 받으신 것이요, 당신의 이름으로 새롭게 제정하셨고, 세상으로 나가서 세례를 주고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기에 세례는 우리의 구원의 과정에 있어 인치시는 것 이상의 깊은 의미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세례를 시시한 것으로 여기고 만다면 그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세례 받을 때 감격 속에서 받고, 세례를 귀중히 여기는 사람, 세례 받은 것을 감사하는 사람, 세례 교인이라는 것을 축복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최종적인 구원에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짧은 시간에 세례에 대하여 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이슬람교에서는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죽음이라는 사실입니다. 결단도 얼마나 비장한 결단인지 모릅니다. 예수를 믿고 세례 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서 죽어야 하는 세상이 이 지구상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세례 받으신 노춘경이라는 사람이 한문 서적을 읽어가다가 서양에 기독교라는 종교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교(敎)라고 하는 비난의 말을 읽었습니다. 세상의 부모도 모르고 임금도 없다고 비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서양 종교이니 서양인에게 물어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헤론 의료선교사를 찾아가 기독교에 관해 이해할 수 있는 책을 구하였으나 그러한 책이 준비된 것이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몇 달이 지나 알렌 의사를 찾았습니다. 그의 책상 위에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만주에서 죤 로스와 죤 매킨타이어 목사님이 백홍준 서상륜을 비롯한 의주 청년 4인과 함께 번역한 복음서였습니다. 노춘경은 그 책을 양심의 가책이 없이 옷소매 속에 감추어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잘 읽었습니다. 노춘경은 드디어 언더우드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언더우드 목사님에게 자세히 전해듣게 됩니다. 언더우드 목사님은 회고하기를 노춘경의 눈초리는 진리를 찾으려는 갈망으로 빛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그가 가지고 있었던 유교의 진리보다 생명을 주는 종교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노춘경은 외국인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고, 신앙을 고백하고 언더우드에게 우리나라 최초의 세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 기독교는 국법으로 금하고 있었고, 외국인들과 접촉하는 것이 금지되고 있었으니, 드러나는 날에는 어떠한 형벌도 각오해야 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는 앞으로 목숨을 걸고 예수를 믿겠다는 서약과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날이 1886. 7. 11일이었습니다. 다음 해 1887년 봄에 황해도에서 서경조, 최명오, 정공빈 세 사람이 언더우드를 찾아왔습니다. 이들은 이미 구원의 확신이 있었고, 세례 받기 위하여 서울로 내려온 이들이었습니다. 이 때 세례를 주던 자리에 헐버트라는 선생님이 대문에 가서 망을 보는 중에 세례를 주었으니 당시의 어려운 상황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미 세례를 받으신 분들이나 아직 세례를 받지 아니하신 분들 중에 세례를 하나의 형식이고 의식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예수님은 친히 요단강으로 내려가셔서 세례를 받으셨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비콕스 (Harvey COX)라는 신학자는 말하기를 " 내가 어려서 받은 세례가 성장한 후에도 늘 힘이 되어 주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장해서 보니까 어려서 받았던 그 세례가 두고두고 힘이 되어 주었고 신앙적인 능력을 체험하게 해주는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한번의 체험은 평생을 좌우하는 것으로 바로 세례의 힘인 것입니다.
세례 받은 것은 나의 일생일대의 전환점을 이룬 사건이었습니다. 세례 받은 사람들은 "내가 받은 세례는 나를 구원하신 인침이었구나"하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도 구원받은 확신을 가지고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세례받으신 예수
마 3:13-17 / 조재진 목사
무슨 일이든지 시작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시작하느냐가 대부분을 일들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시작이 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만큼 시작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또 사람들은 ‘첫 단추를 잘끼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시작이 잘못되면 결국 끝에 가서도 잘못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에 있어서도 시작이 참 중요합니다. 어떤 교회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서 믿음의 삶을 시작하느냐 하는 것이 모든 것을 결정할 수도 있습니다. 처음 믿음생활을 인본주의로 시작하면 하나님의 역사를 제대로 체험할 수 없습니다. 처음 나간 교회가 신비주의 신앙을 가르치는 교회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배울 기회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늘 환상이나 보고, 방언이나 하다가 하나님의 중요한 역사를 놓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 믿음 생활을 부산 제일교회에서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10주간 양육받고 제자훈련 받으면서 바르게 믿음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 사람은 정말 복받은 사람입니다.
오늘은 2003년 첫 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세례받는 것을 시작으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신 오늘 본문의 말씀은 앞으로 예수님의 사역이 어떤 사역이 될 것인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한 해의 첫 주일에 예수님이 어떻게 사역을 시작했는지를 배우고, 복된 한 해의 시작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
우리는 제일 먼저 예수님이 언제 사역을 시작했는지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 강에 이르러...”라고 시작을 합니다. 여기서 ‘이 때에’ 라는 말은 예수님의 사역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3:23에 보면 “예수께서 가르침을 시작할 때에 삼십세쯤 되었더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한 것은 나이가 30세 정도가 되었을 때부터였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이 땅에 몸을 입고 오시고 난 후 거의 30년 동안 어떻게 자랐으며 무엇을 했는지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나이 30살 정도가 되었을 때 비로소 사역을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기간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30세가 되기 이전에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을까? 어떤 사람들은 이 기간동안 예수님이 인도에 가서 불제자가 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위경에 보면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흙으로 새를 만들었다든지, 자기를 괴롭히는 아이들을 기적적인 능력으로 혼내주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다 믿을 수 없습니다. 성경이 이 시기에 대해 기록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이 하나님의 구원 사건과 아무 연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나이 30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역의 현장으로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이 때에” 라는 말은 하나님이 정하신 바로 그 때에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때”라는 말을 주의 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나님의 시간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언제나 정확한 때에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늦는 법도 없고 결코 빠른 법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기분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행동하지 않으시고 우연히 행하시지도 않으십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약속을 먼저 주시고 그 약속대로 행하십니다. 정확한 때에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정확하게 알았고 그 때를 따라 행동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 혹은 “때가 되었다”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때에 따라 사람들은 기적을 바랐지만 기적을 행하지 않기도 했고, 또 그 때에 따라 십자가의 죽음도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 있어서는 믿음의 삶에 있어서 시간이해는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기다릴 때와 행할 때를 아는 것, 말할 때와 침묵할 때를 아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은 조급해 하거나 초조해 하지않습니다. 동시에 게으르지도 무관심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 내시고 놀라운 축복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아브라함의 그 약속대로 아들을 갖게 된 것은 25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모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 때의 훈련을 시켰습니다. 나이 40살이 되었을 때 모세는 자기 때인 줄알고 나섰다가 오히려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는 많은 이유들 중의 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시간을 모르는 것입니다. 모세는 자기 계획, 자기 시간에 움직였다가 실패했습니다. 반면 하나님은 모세 나이 80살이 되었을 때 비로소 그를 불렀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 80살이 된 노인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달랐습니다. 여든이 된 모세를 사용해서 이스라엘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새로운 해에 하나님보다 앞서지 말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성령님보다 앞서지 말자.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자 라고 결단해야 합니다. 믿음은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조급하거나 초조하지 말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기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세례받으신 예수
우리가 본문에서 두 번째 봐야 할 주제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받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받은 것은 성경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세례란 죄를 씻는 행위입니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그 회개의 표시로 죄를 씻어 정결케 하는 것이 바로 세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례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이재철 목사님이 쓴 “참으로 신실하게”라는 책에 있습니다. 한 마을에 장로교 목사와 침례교 목사가 살면서 형제처럼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두 사람이 대판 싸움을 벌였는데 바로 세례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침례교 목사는 세례란 반드시 온 몸을 물에 담그는 침례라야 진정한 세례이지 머리에 물을 뿌리는 것이 참된 세례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주장에 장로교 목사가 이렇게 대들었습니다. ‘아니 성경 어디에 반드시 침례여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까?’ ‘왜 성경에 없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세례받으러 요단강에 내려갔잖아요. 그것은 물속에 잠겼다는 말이 아닙니까? 성경대로 해야지요, 성경대로’ ‘좋습니다. 성경대로 해봅시다. 그럼 침례교는 왜 성경대로 요단강에서 침례를 하지 않고 목욕탕에서 합니까? 목욕탕에서 하는 것이 제대로된 침례입니까? 성경대로 하자면서요?’ ‘요단가에 못갈 형편이니까 목욕탕에서 하지요 침례란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물에 잠기는 것입니다.’ ‘좋아요 그렇다면 물에 잠긴다고 말했는데 침례교는 침례를 줄때 도대체 어디까지 잠겨야 한다는 말입니까?’ ‘무릎까지입니까? 허리까지 입니까? 도대체 어디까지 잠겨야 한다는 것입니까?’ ‘물론 머리까지입니다.’ ‘머리까지라고요? 분명히 머리까지지요?’ ‘그렇다니까요’ ‘그 보세요 그러니까 장로교에서도 머리에 물을 뿌리잖아요’ 장로교 목사의 판정승으로 끝난 것을 보니까 이 이야기는 장로교에서 만든 것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세례에서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닙니다. 세례의 본질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세례의 중요한 의미를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십자가 못박히고 또 부활에 참여하여 다시 사는 것이 세례라면, 이런 세례는 반드시 죄인이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죄없는 예수님이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온 것은 세례요한에게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요단강에 이르러 세례를 받으려고 오자 세례 요한은 당황한 것 같습니다. 본문 14절에 보면 세례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네게로 오시나이까” 그러자 예수님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받는 분명한 목적과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이 세례를 받는 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의를 이루는 것이라는 말속에는 아주 중요한 구원의 진리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결국 본문에서 말하려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죄 때문에 세례를 받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세례를 자청하신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바로 예수님께서 세례받는 이 순간에 인간들의 모든 죄를 다 짊어졌다고 말했습니다. 마치 속제제사를 드릴 때 제사장이 제물인 짐승에게 안수하여 사람의 죄를 짐승에게 전가시키듯이 예수님이 세례받을 때 하나님은 인간들의 모든 죄를 그에게 전가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실 메시야에 대해서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3) 세례요한은 이 예수님을 가리켜 말하기를 “보라 세상죄를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5:21에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를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세례를 받았습니다. 인간들의 죄를 짊어지신 것입니다. 새해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짊어져야 할 것입니다. 피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한 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례는 겸손함의 극치
세 번째 우리는 예수님의 세례에서 예수님의 겸손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기 비하, 자신을 낮추신 모습입니다. 빌립보서 2:9-11에서는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자신을 비워...”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자신을 비우다는 말은 희랍어로 ‘케노시스’라는 말입니다. 세례받으시면서 또 한번 당신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세례받는 모습속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겸손함의 극치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단순히 세례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은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한번은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찾아와서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한 아들은 예수님의 우편에, 한 아들은 예수님의 좌편에 앉게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라고 되물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례는 십자가의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례란 본질적으로 자기의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물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십자가의 고난도 함께 질 수 있겠느냐고 야고보와 요한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세례요한의 물 세례로부터 시작된 예수님의 사역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고난의 세례까지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세례의 사역이었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셔서 죄많은 사람들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만이 아니라 인간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고, 결국에는 인간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는 것이 예수님의 사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은 이 한해의 시작을 예수님의 겸손한 모습을 본받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서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화를 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 체면에 손상을 받았다라든지, 정당한 대접을 못받았다고, 교회에서 상처받았다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교회에 시끄러운 문제가 생기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우리들이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고, 우리의 콧대를 꺽지 않고 믿음의 삶을 살려고 하기 때문에 수많은 장애들이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그러나 올해는 이런 이야기들이 우리 교회에서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대접을 받으려고 교회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올해는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을 잘 섬길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내가 더 낮아져서 주님처럼 섬기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좀 이런 마음으로 시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느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태리에 안셀모라는 사람과 마리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친구로써 한 마을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안셀모는 가난하여 배우지 못하였으므로 상급학교에 갈수가 없었고, 친구 마리오는 부자집 아들이었으므로 상급학교에 진학 할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오는 공부를 열심히 하였고 나중에는 중세 시대에 유명한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반면 안셀모는 배운 것이 없어서 수도원의 청소부가 되었습니다. 수도사가 된 마리오는 좋은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에 감동을 받고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수도원으로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유명한 설교자가 된 그를 교황청에서 불렀습니다. 그는 로마 교황청의 대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 사제가 된지 1-2달이 지나면서 갑자기 마리오는 설교에 아무런 능력도 나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마리오 자신도 많은 애를 썼지만 설교의 능력은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알아본니 마리오가 로마의 대 사제가 될 즈음에 절친했던 친구 아셀모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안셀모의 죽음과 함께 친구 마리오의 설교가 능력을 잃은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안셀모는 비록 수도원의 청소부에 불과 했지만 그는 사랑하는 친구 마리오를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가난한 청소부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나의 친구는 좋은 수도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그가 말씀을 외칠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많은 사람이 감동되게 하옵시고 그의 설교가 죽은 영혼을 살리게 하옵소서” 끊임없는 안셀모의 기도가 마리오로 하여금 능력의 설교자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오가 로마의 대 사제가 되는 그때를 기점으로 친구 안셀모가 죽자 기도가 끊겨서 그의 친구 마리오는 설교의 능력을 상실하게 되고 만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물론 마리오도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드러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면 보다 더 중요한 사람은 숨겨져 있었던 안셀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교회에도 마리오 같은 인물이 나오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저는 더 바라는 것이 아셀모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나오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실 한 교회의 성장의 열쇠는 그 교회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어 집니다. 목사나 장로등과 같은 직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마리오처럼 드러나고, 높아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드러난 사람들, 높아지려는 사람들에게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높아지려고 하지 말고, 드러나려고도 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늘이 열리고
네 번째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세례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에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세례받으신 예수님을 하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받고 물에서 나왔을 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보십시다. 16절에 보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더니”라고 말합니다. 세례받음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시작하는 예수님에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저는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새해의 시작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보다 앞서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세례받은 주님처럼 겸손하게 낮아질 때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성경에 보면 하늘이 열리는 경험들이 몇몇군데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야곱은 꿈에 하나님을 만나고 너무 놀라서 고백하기를 ‘하나님이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에스겔서 1:1-9절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제 삼십년 사월 오일 내가 그발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에스겔 선지자는 하늘이 열렸다고 고백합니다. 스데반이 순교당할 때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사도 요한은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합니다. 여러 가지 하늘의 환상을 본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셋째 하늘까지 올라간 것을 고백합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보좌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순교자들이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며 순교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믿음의 선배들이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하늘이 열리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나왔을때 두 번째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가 바로 성령이 임하는 경험이었습니다. 성령이 비둘기처럼 예수님에게 임하였습니다. 성령의 임하심의 체험은 너무 중요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다음 제자들이 바로 사역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마가 다락방에서 기도하면서 성령의 임하심을 체험했습니다. 기도하는 그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성령님이 바람같은 소리와 함께 그들이 모인 자리에 충만했습니다. 그리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위에 임하여 있었다고 말합니다.
특별히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성령의 임하심을 먼저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귀신도 쫓아내고 기적을 행하고 병자를 고치는 능력의 사역을 위해 성령님이 예수님에게 임하여야 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지 않았다면 이런 것은 필요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의 자리를 비우고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처럼 성령의 임하심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도 성령의 임재와 충만함이 필요했다면 우리야 오죽하겠습니까? 새로운 한해 성령의 임하심을 체험함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어찌 성령의 임하심없이 목사로, 장로로 속장으로 교회를 섬길 수 있겠습니까? 성령의 능력없이 어떻게 선교회장으로 교사로 성가대로 전도팀으로 사역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하늘의 비젼과 환상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임하심을 체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17절을 보면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확인하는 음성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세례를 받음으로 시작되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하나님이 기뻐하셨다는 말입니다. 이 하나님의 음성은 예수님에게 놀라운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목사님의 칭찬 한마디 때문에 교회에 헌신하기도 합니다. 목사님의 인정하는 말한마디에 어려운 사역도 해나갑니다. 사람들의 격려와 칭찬은 참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은 장세동씨를 잘알고 계시지요. 이번 대선에 출마한 것도 화제거리였습니다만 더 화제를 불러 일으킨 것은 전두환 전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는 것입니다. 그가 저질렀던 많은 잘못을 욕하는 사람도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만은 인정해줍니다. 한번은 어떤 잡지 기자가 물어보았답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전두환 전대통령에게 그렇게 충성합니까?”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나를 인정해 줍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인정해 줄 때 자신의 인생을 던집니다. 나를 인정해 주는 사람이 있을 때 몸바쳐 충성합니다.
우리가 잘아는 찰스 스펄젼 목사이 그렇게 뛰어난 설교자가 된 데에는 이런 시절 자신을 인정해 주는 목사님 한 분의 말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아마 영국에서는 어린이들이 설교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모양입니다. 한번은 스펄전이 설교를 했는데 그 교회 목사님이 작은 선물을 주면서 귀에다 대고 “너는 설교를 참잘하는구나 장차 너는 자라서 훌륭한 설교자가 될꺼야”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 한마디가 그의 가슴에 꽂혔습니다. 11살에 들었던 이 말한마디가 그로 하여금 1세기에 한번 나올까 말까하는 위대한 설교자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약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나타나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은 예수님의 사역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면서 체험했던 것처럼 이 한 해의 시작을 이런 체험으로부터 시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늘이 열리는 체험, 성령이 우리 위에 임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한해가 축복의 한 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주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
마 3:13-17 / 이수영 목사
구약성경 사40:3에는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는 예언이 있고, 말3:1에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는 예언이 있습니다. 복음서기자들은 이 예언이 바로 세례요한을 가리킨 것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마3:1-3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요한이 태어났을 때 이미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기를(눅1:67)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리라"(눅1:76) 했습니다. 세례 요한 자신도 스스로를 그렇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세례 요한을 찾아와 "네가 누구냐?" 물었을 때에(요1:19) 그 자신의 증언이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요1:23)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예수님께서도 세례 요한을 그렇게 인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마11:10, 14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확인해주셨습니다: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이렇게 세례 요한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주의 길을 준비하기 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예언대로 세상에 태어나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삶을 철저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어떻게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삶을 살았습니까? 그 한 면모를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일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에게는 예수님께서 자신에게서 세례를 받으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나아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말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또 평소에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막1:7-8)고 말해왔었습니다. 따라서 자기가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푼다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서 그에게서 세례를 받으려 하시자 본문 14절에서 읽는 대로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반문하며 예수님을 말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예수님께 세례를 행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15)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이며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행하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것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고 그 죄인들과 하나되기를 원하신 뜻을 표하시는 것이었으며, 메시아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처럼 영광스러운 정치적 승자로서 오는 것이 아님을 공포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행한 것은 금방 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서 세례를 받으셔야 하는지 이해가 되어서라기보다는 그것이 주님의 말씀이었고 그 말씀에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의 사고와 논리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일지라도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 할 때 순종하는 것이 주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의 올바른 자세인 것입니다. 내 생각과 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주님의 말씀을 앞세우는 것이 주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살기 위하여 나를 기꺼이 죽일 줄 아는 것이 주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의 삶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와서 말하기를 "선생님,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분, 즉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그 이가 세례를 베푸니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갑니다" 하자 요한이 뭐라고 답했습니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3:26-30)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는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사역은 이렇게 전적으로 그의 뜻을 따르는 일꾼들의 준비와 함께 시작된 것입니다.
본문 16-17에 보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장엄하고 놀랍기 그지없는 광경입니다. 하늘로부터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고 아들 하나님 위로 성령 하나님께서 임하시는,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현현은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바 있지만 동방정교회에서는 예수님께서 진정 자신을 이 세상에 나타나신 것은 바로 이 세례 때라고 여기며 그래서 1월 6일 주현절을 성탄절로서 지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나심은 주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순종에 뒤따른 것이었음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 외에도 세례 요한의 삶 속에서 주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의 모습으로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세례 요한은 주님께서 전하실 말씀들을 전했습니다. 특히 그는 예수님에 앞서 죄의 회개를 외쳤으며 죄 사함의 도리를 전했습니다. 막1:4는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처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위선과 불신앙에 대해서 단호하고 신랄한 비판을 가했습니다. 마3:7은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죄와 불의를 폭로하고 고발하는 일에 있어서 세상의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헤롯이 그의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차지한 일에 대해 그것이 옳지 않다고 비판하기를 서슴치 않았고 그로 말미암아 헤롯에 의해 목이 잘려 죽임을 당했습니다(마14:4, 막6:17-18).
세례 요한은 이러한 의로운 삶을 택한 반면에 안락한 삶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고 복음서는 전합니다(막 1:6).
이러한 세례 요한에 대해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11:9, 11을 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이미 다 아시듯이 우리 교회의 금년 표어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자"입니다. 우리가 빛의 자녀들로서 하나님의 빛을 어떻게 발할 수 있겠습니까? 세례 요한처럼 주의 길을 준비하는 삶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삶의 한 모습일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사람들에게 비칠 "돋는 해"(눅1:78)로서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실 예수 그리스도, 그 빛을 준비한 주의 종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그의 아들에 관해 예언한 것을 다시 봅니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눅1:76-79). 사도 요한은 요1:5-8에서 세례 요한에 대해 뭐라고 증언했습니까?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아예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요5:35) 말씀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의 생각과 달랐던 주님의 뜻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에 순종했습니다. 그는 주님을 결코 앞서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상의 죄와 불의에 대해 눈을 감지 않았습니다. 그는 안락한 삶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로지 주의 길을 준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세례 요한을 주님께서는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 세례 요한에게서 이 세상을 향해 빛을 발해야 할 우리의 사명을 위한 지혜와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
>성경본문|
마03장 13절 ~ 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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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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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이수영목사
>비 고|
>첨부파일|
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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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사40:3에는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는 예언이 있고, 말3:1에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는 예언이 있습니다. 복음서기자들은 이 예언이 바로 세례요한을 가리킨 것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마3:1-3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요한이 태어났을 때 이미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기를(눅1:67)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리라"(눅1:76) 했습니다. 세례 요한 자신도 스스로를 그렇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세례 요한을 찾아와 "네가 누구냐?" 물었을 때에(요1:19) 그 자신의 증언이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요1:23)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예수님께서도 세례 요한을 그렇게 인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마11:10, 14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확인해주셨습니다: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이렇게 세례 요한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주의 길을 준비하기 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예언대로 세상에 태어나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삶을 철저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어떻게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삶을 살았습니까? 그 한 면모를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일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에게는 예수님께서 자신에게서 세례를 받으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나아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말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또 평소에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막1:7-8)고 말해왔었습니다. 따라서 자기가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푼다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서 그에게서 세례를 받으려 하시자 본문 14절에서 읽는 대로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반문하며 예수님을 말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예수님께 세례를 행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15)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이며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행하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것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고 그 죄인들과 하나되기를 원하신 뜻을 표하시는 것이었으며, 메시아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처럼 영광스러운 정치적 승자로서 오는 것이 아님을 공포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행한 것은 금방 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서 세례를 받으셔야 하는지 이해가 되어서라기보다는 그것이 주님의 말씀이었고 그 말씀에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의 사고와 논리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일지라도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 할 때 순종하는 것이 주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의 올바른 자세인 것입니다. 내 생각과 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주님의 말씀을 앞세우는 것이 주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살기 위하여 나를 기꺼이 죽일 줄 아는 것이 주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의 삶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와서 말하기를 "선생님,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분, 즉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그 이가 세례를 베푸니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갑니다" 하자 요한이 뭐라고 답했습니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3:26-30)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는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사역은 이렇게 전적으로 그의 뜻을 따르는 일꾼들의 준비와 함께 시작된 것입니다.
본문 16-17에 보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장엄하고 놀랍기 그지없는 광경입니다. 하늘로부터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고 아들 하나님 위로 성령 하나님께서 임하시는,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현현은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바 있지만 동방정교회에서는 예수님께서 진정 자신을 이 세상에 나타나신 것은 바로 이 세례 때라고 여기며 그래서 1월 6일 주현절을 성탄절로서 지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나심은 주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순종에 뒤따른 것이었음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 외에도 세례 요한의 삶 속에서 주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의 모습으로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세례 요한은 주님께서 전하실 말씀들을 전했습니다. 특히 그는 예수님에 앞서 죄의 회개를 외쳤으며 죄 사함의 도리를 전했습니다. 막1:4는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처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위선과 불신앙에 대해서 단호하고 신랄한 비판을 가했습니다. 마3:7은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죄와 불의를 폭로하고 고발하는 일에 있어서 세상의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헤롯이 그의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차지한 일에 대해 그것이 옳지 않다고 비판하기를 서슴치 않았고 그로 말미암아 헤롯에 의해 목이 잘려 죽임을 당했습니다(마14:4, 막6:17-18).
세례 요한은 이러한 의로운 삶을 택한 반면에 안락한 삶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고 복음서는 전합니다(막 1:6).
이러한 세례 요한에 대해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11:9, 11을 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이미 다 아시듯이 우리 교회의 금년 표어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자"입니다. 우리가 빛의 자녀들로서 하나님의 빛을 어떻게 발할 수 있겠습니까? 세례 요한처럼 주의 길을 준비하는 삶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삶의 한 모습일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사람들에게 비칠 "돋는 해"(눅1:78)로서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실 예수 그리스도, 그 빛을 준비한 주의 종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그의 아들에 관해 예언한 것을 다시 봅니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눅1:76-79). 사도 요한은 요1:5-8에서 세례 요한에 대해 뭐라고 증언했습니까?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아예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요5:35) 말씀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의 생각과 달랐던 주님의 뜻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에 순종했습니다. 그는 주님을 결코 앞서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상의 죄와 불의에 대해 눈을 감지 않았습니다. 그는 안락한 삶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로지 주의 길을 준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세례 요한을 주님께서는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 세례 요한에게서 이 세상을 향해 빛을 발해야 할 우리의 사명을 위한 지혜와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의
마 3:13-17 / 박지온 목사
우리 교회에 지금까지 1년 내에 한번도 그런 기적은 없었는데, 2부보다 1부가 오늘 훨씬 더 많이 왔습니다. 기적이에요. 그것도 아마 1부에 오신 분들은 최소한 우리 교회에 예배라도... 그건 '예배라도' 이지 예배라도 드리고 가고싶다! 그래서 아마 1부에 오셔서 고향으로 많이 가신 것 같아요. 2부 예배도 그럴 분이 있을 줄로 압니다 만은, 일단은 성령의 인도 받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그렇게 가라고 장려하고 싶지는 않아요.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의' 라 그랬습니다. 상당히 그 오늘은 좀 뭔가 우리가, 혹시 여러분 지금까지 메시지를 쭉 들으면서, 그 다음에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말씀과 함께, 하나님의 통치다! 인도다! 메시지를 쭉 들으면서 조금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 뭔가 해결 안 되는 부분들이 좀 남아 있을 겁니다. 또 남게 되고요.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실제로 응답하셔서 그 뭔가 미진하고 '이것은 이상하다! 잘 안 된다! 이해가 잘 안 된다!' 그런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너무 귀중한 말씀이라서 또 어느 것이 뭐 귀중 안 할 수 있습니까 만은, '참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를 원합니다!' 하는 그런 마음으로 섰습니다.
성령의 인도 없이는 또 이해도 안 될 그런 말씀이죠. 왜냐하면 여기 하나님의 의라 그럴 때는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또 '모든 일, 모든 의!'라 이럴 때는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의라는 것에서 모든 의라 그럴 때에,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바로 의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은, 오늘 우리 예수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정말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런 과정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왔었고, 하나님이 인도가 왔었고...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 적인 역사가 계속 설명이 되고 그랬습니다 만은, 여러분 정말 그 하나님의 의를 따라,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따라 살아가는 하나님의 통치 받는 우리가 도대체 어떤 관계이고, 어떤 자리에서야 되는가! 그래서 이것이 이해가 되면, 해결되면 기도응답이라는 것은 저절로 와집니다. 이건 뭐 와진다는 그런 배경 이전에 벌써 다 된 겁니다. 그래서 '모든 문제 해결자다!' 늘 말씀을 하는데, 나는 늘 가면 해결이 안 되고 늘 헤매고 있는 이런 문제들 어떻게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문제가 오느냐? 이런 것이 아마 구체적으로 말씀 속에서 오늘 붙잡아야 되겠습니다.
배경은 오늘 말씀이 예수님께서 이제 그 공적으로 나타나시기 전에 세례요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그런 과정까지 나오죠.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오신 일에 준비하는 그런 메시지가 나옵니다. 그런 중에서 우리 3장 2절에 보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그렇게 했고 그 회개라는 말씀은 제가 구체적으로 설명을 했고, 돌이키는 것 아닙니까! '뭐, 우리 작년에 회개했던 것 올해도 또 한다!' 그런 배경이 아니고 '하나님께로 돌아온다!' 그런 배경!
그 다음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반드시 하나님께로 여러분 돌아왔다! 그러면 영적으로, 육적으로 바꾸어집니다. 변화가 옵니다. 만약에 변화가 오지 않는다 그러면 그건 뭐 안 돌아왔다는 이야기거든요. 그래서 뭐 전도한다! 안 한다! 이전에 돌아와야 됩니다. 그 다음에 무슨? 문제가 구체적으로 되어지고 일이 이루어지죠. 그러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면은, 반드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그 배경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돌아온다! 그럴 때에 어디에 들어간다 그랬습니까? 하나님의 통치 속으로 들어간다! 그런 배경입니다. 왕이라는 것은, 통치라는 배경이 바로 이어집니다.
예를 들어서 뭐 이 땅에서 우리 통치라 그러면 대통령이 있고, 그런 어떤 배경이 아니고 또 국가가 있고, 그런 배경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 졌다! 그 배경입니다. 여러분과 제게 하나님의 나라라 그랬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그래서 적은 간섭도 비로소 우리가 이 일에 눈이 열리면 감사할 수밖에 없죠. 우리는 하나님의 간섭에 감사할 수 있는 이 눈이 안 열리면 여러분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늘 다른 것이 나와요. 그래서 차라리 사단에게 메여 살던 그때가 그립고 좋아지는 이런 이상한 역현상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이면서 이 땅에 죄 없으신 분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시는 일에 나오셨어요. 세례 요한에게 나가서 나한테도 세례를 달라고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이분이 누구 신지를 벌써 영감을 통해서 잘 알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당신을 어떻게 세례를 주겠느냐? 도저히 세례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례라는 것은, 요한의 세례라는 것은, 회개의 세례입니다! 죄 씻는다는데 상당히 중점이 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내가 죄인이라는 고백의, 세례의 중요한 것이죠.
그래서 제가 물세례를 준다고 그럴 때에, 뭐 물을 찍어 가지고... 사실은 여러 가지로 이 세례에 대해서도 뭐 교파가 나누어지고 이랬어요. '퐁당 물 속에 들어갔다가 나와야 된다!' 이래가지고 그 침례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아니다! 뭔가 이 상징이기 때문에 물만 뿌려도 된다!' 그래서 세례에서 여러 가지 이제 나옵니다. 만약에 꼭 침례를 말한다하면 보통 물 가지고는 안 되고 어디가야 됩니까? 요단강까지 가야 돼요. 그것도 옛날에 그때 흘러갔던 물을 다시 끌어 와야 되는데 그건 다 상징이에요. 물세례 준다는 것은,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필요합니다! 곧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이 고백이 세례의 고백입니다.
제가 물세례 준다고 그래서 물 이렇게 찍어 가지고 물 이렇게 머리에 잠깐 얹어 주는데는, 이것은 의미가 뭐냐하면, 머리까지 뭔가 이렇게 물에 잠겨졌다는 것보다도 완전 뭐냐? 옛날 사람이 죽었다! 이겁니다. 물에 빠뜨려 죽었다! 그 다음에 이 로마서 6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세례는, 그러면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은, 누구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그것이 세례에 대한 중요한 의미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때 당시에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러 왔다! 그러면 '내가 죄인입니다!' 고백하는 것인데, 어떻게 이 세례 요한이 그것을 알고 죄 없으신 예수님한테 세례를 주겠다고 그러시겠습니까! 안 되죠.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당신에게 세례를 줄 수 있습니까? 이러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하면, 우리가 이렇게 해서 모든 의를 이루어야 하리라! 모든 의를 이루어야 하리라! 그래서 여기는 뭐 하나님의 공의와 연결되고 다 연결됩니다 만은, 그런 부분에 신학적인 부분에 설명을 하려고 그러면 시간이 없어서 안되고요. 이렇게 말씀했을 때에 단지 여러분이 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이 땅에서 오시게 된 배경이 창세기 3장에 죄인 된 여러분과 저의 문제를 직접 하나님이 해결하지 않으면 내게 안 되기 때문에 해결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는데, 이 땅에 오셨다면 누가 되어야 됩니까? 참 인간이 되어야 됩니다! 무슨 말씀인줄 알죠. 참 인간이 되어야 돼요.
그래서 크리스마스라고 하는 것은, 성육신 한 것은, 참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임마누엘 뭐? 육으로 우리에게 함께 하셨다!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하셨다! 그런 배경이 안 됩니까! 그렇게 오셨다면, 참 인간이 되셨다면 구체적으로 예수님은 참 인간이 되시는 모든 과정을 지금 겪고 있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예수님께서 죄는 없지만, 참 인간이 겪어야 될 모든 과정! 그러니까 죄인이라는 고백조차도 예수께서 지금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회개의 세례를 지금 받으신 거죠. 받으시면서 물 속에 들어갔다가 나오시니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시면서 하나님께서 '너는 네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렇게 증거가 나올 수 있죠.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왜, 하나님이 이렇게 하셔야 되느냐?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야 되는데, 이제 그 첫 번째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그 의가 이루는 과정에서 첫 아담을 만드시고,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시고 그 첫 아담에게 첫 번째 시험이 악한 사단의 시험이, 들어온 시험이 뭐냐하면, 창세기 3장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해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떠나라! 하나님을 떠나라!' 그게 이제 창세기 3장 아닙니까! 그럴 때에 아담이 실패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범죄하고 그 범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아담에게 속한 아담의 후예는 전부 뭡니까? 죄인으로 태어난다! 그랬습니다. 이것이 대표의 원리입니다.
아담이 범죄 했는데, 그러면 내가 왜! 나는 도적질도 안 하고 거짓말도 안 했는데, 하긴 많이 하고 돌아다니지 만은, 그러면 금방 아이가 태어났을 때에 도적질도 안하고 거짓말도 안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도 그러면 왜, 죽느냐? 죄인으로 죽느냐? '죄인이다!' 라는 원죄의 배경이 있다는 그 배경이 뭐냐? 아이가 죽는다는 자체가 벌써 뭡니까? 죄인이라는 배경입니다. 죄 없다! 그러면 죽을 이유가 없죠. 그래서 죽는 이유는 뭐냐하면, 아담이 범죄 하는 동시에 사망이 뭐라 그랬습니까? '왕 노릇하리라!' 사망이 지배해 버렸습니다. 그 후로 인간은 육신이 나왔다가 죽게 되어 있습니다. 아이가 낳다 죽는다는 것은 벌써 사망의 지배를 받았다는 그런 이야기죠.
그래서 뭐 이 문제 가지고 아이도 뭐, 나면 아이도 첫 번부터 나면, 첫 번부터 뭐 성선설이라든가, 이런 뭐 배경들이 있더라 구요. 아주 착하게 난다! 아예 악하게 난다! 이런데 성경은 '악하다! 착하다!' 그런 배경과 상관없이 태어나자 말자 아담의 후예로 나는 자에게는 뭐가 있습니까? 원죄라! 죄인으로 태어난다! 그 다음에 크고 성장할 때마다 죄인이기 때문에 응당히 따라오는 뭡니까? 이것은 따라오는 죄악! 이런 것이지 죄인이라는데 대해서는 이설이 없어요.
그러면 여러분 잘 아셔야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는 중요한 것이,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그럴 때에 죄 문제가 해결된다는 그것도 뭐냐? 원죄의 근본적인 죄가 해결된다! 창세기 3장이 해결된다! 이런 배경입니다. 뭐 도적질 안 한다. 뭘 안 한다. 이런 배경이 아닙니다.
여러분 여기에 와서 혹시 모릅니다. 마음으로 무슨 죄를 범했던지 안 그러면 또 육체적으로 무슨 죄를 범했던지 간에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문제가 해결됩니다. 창세기 3장! 죄인이 뭐로 변합니까? 의인으로 변한다! 의인으로 바꾸어졌다! 그래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할 때에, 내가 사망에서 어디로? 생명으로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었다! 옮겨졌다! 믿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누리는 축복과 은혜의 배경입니다.
이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를 그냥 버려 둘 수 없어 로마서 5장 8절에 보면 '아직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예수그리스도 못 박히심으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확정하여 주셨다!' 그랬습니다. 바로 그 로마서 5장에 보면 그렇게 하는 배경이 대표원리로 이 사용을 합니다. 아담을 통해서 인류가 전부 망했듯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전부 이 땅이, 생명이 왕 노릇 한다! 대표로 주신 겁니다. 그 대표에서 지금현재 여기에, 예수께서 나오신 겁니다. 인간대표! 인간, 말하자면 아담은 사망의 대표요.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 오셔서 무엇의 대표입니까? 생명의 대표입니다. 그것을 대표의 원리라 그럽니다.
성경에 우리 여러분 로마서 5장 한번 찾아봅시다. 쭉 여러분 보셔야 되니까 뭐 여러 가지 대표 원리는 비유를 들 수 있고 들 수 있습니다 만은, 다른 것은 뭐 들어봐야 소용이 없고 로마서 5장 12절 말씀부터 우리 한번 교독을 해 봅시다. "(롬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 5: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여기 12절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 그랬는데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담을 말합니다. 아담을 말하고...
그 다음에 14절입니다. "(롬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그렇죠 아담처럼 선악과 안 따먹고 아담처럼 뭐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뭐 거역하고 그렇지 않았지만은,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죄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뭐라 구요? "표상이라!" 하나님께서 뭔가 대표 원리에 있어서 아담을 주시고 그 다음에 오신 아담과 같은 원리를 가지고 이 땅에 보내시겠다는 하나님의 계기를 말씀했죠. 표상이라!
그 다음에 15절 다같이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오실 자의 표상이 누구라 그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이 왕 노릇하는 이 축복이 있다고 약속했죠. 또 16절에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롬 5: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할렐루야!
한 사람이 범죄해서 사망이 왕 노릇했어요. 그런데 한 사람! 그로 말미암아 생명이 왕 노릇하리라! 한 사람 누구라 그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18절"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롬 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할렐루야! 그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
그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이루시는 그 예수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의가 이 땅에 다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세례 받는 사건으로 공적 역사가 지금 시작이 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공적인 역사가 이 한 사람 그 의를 이루시는 그 역사가 세례 받는 것을 통해서 그 것이 벌써 시작해서 공적으로 그것이 이루어진다. 세례는 공적으로 '내가 사람이다! 완전 사람이다!' 라는 사실이 이렇게 증거가 되고 이루어지는 과정에 있음을 봅니다.
그러면 이제 문제는 이 예수님께서 이렇게 구체적으로 이 땅에 오셔 가지고 아담이 해결하지 못했던, 아니 아담이 빠졌던 그 범죄에서, 예수께서 그 범죄를 완전히 해결하시고 생명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또 대표적인 원리에서 아담은 창조함을 받아 가지고 하나님의 이 다스림의 약속에서 거역을 하게 되죠. 거역하게 되는 배경에 누가 들어옵니까? 개입합니까? 사단이 개입을 합니다. 사단이 개입하면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떠나라! 그게 뭐냐하면,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단순한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겁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떠나는 겁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겁니다.
그러다가 아담이 꼬임을 받아 가지고 범죄 하게 됨을 통해서 여러분과 제가 범죄를 하게 되는 이런 일이 이 땅에 왔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야 되는데 한 사람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시면서 바로 하나님 자신이 이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셔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셔서 그리고서는 바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즉시, 이 공적인 역사가 시작된 즉시, 똑같은 배경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누가 찾아옵니까? 누가 역사 합니까? 사단이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 상당히 재미있는 것은 사단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이 하나님께서 뭔가 의를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일을 이루신다는 사실이 너무 확실하게 나옵니다.
예수께서 사단의 시험을 받을 때에, 사단이 찾아왔습니까? 예수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서 사단의 시험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완전히 예수그리스도를 생명의 왕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인도하시는 구체적인 역사가 벌써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일어나게 되게 이것이 진행이 되는 과정이죠. 그러니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시험을 받는데, 사단이 와서 사단이 시험을 하지 않습니까! 시험할 때에 중요한 것은 문제는 뭐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 버려라!' 그 다음에 '하나님의 명령을 버려라!' 그 다음에 뭐냐하면, 하나님 섬기지 말고 누구를 섬리라고 그랬습니까? '나를 섬겨라!' 첫 번과 같은 배경이 나옵니다. 그럴 때에 예수께서 이 사단의 역사를 완전히 깨뜨리셨습니다.
잘 들어보셔야 합니다. 한 사람 아담을 통해서 사단의 유혹 속에서 범죄 함을 통해서 저주와 죽음이 왕 노릇 하는 이 엄청난 이 재앙의 역사 속에 여러분과 제가 하나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고자,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바로 여러분과 제가 빠졌던 그 곳에서 예수그리스도 그 분으로 통해서 창세기 3장에 사단이 찾아와서 인간에게 짊어지웠던 그 죄악의 멍에를 완전히 깨뜨리시고, 벗기시고 예수께서 승리 하셨습니다. 그 승리하시는 과정 속에서 예수님이 중요한 것은 뭐냐하면, 예수님께서 승리하신 그 완전한 승리가 어디까지 이어집니까?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서 죽으시고 그 다음에 죽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거기서 끝나버리면 여러분과 저는 승리할 수 없어요.
죽었다가 다시 거기서 피를 흘리시고, 완전 메시아의 피 흘리는, 양의 재물! 말하자면, 영원한 재물 되시기 전에 구약에 묘사된 양의 재물, 피 흘리는 재물이 되셔서 죽으셨다가 다시금 어떻게 했어요? 부활하셨습니다. 이것까지 끝나도 안됩니다. 부활하셔서 여러분과 제게 그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누구로? 성령으로 내 안에 우리 안에 사실적으로 오셔서 여러분과 저를 하나님의 통치를 받도록 인도하시는 바로 장본인이 되십니다. 바로 그 분이... 그 분을 누리고, 그 분을 통해서, 그 분에 의해서 이것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관계가 이루어지는 그때부터 뭐가 오느냐? 기도가 나옵니다. 기도가 응답이 되어지는 겁니다.
이것이 이해가 안 되니까? 많은 교인들이 어떤 문제가 나오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 지시고, 나를 위해서 생명 주시고, 나를 위해서 구원주가 되시고, 나를 위해서 고통을 다 참으셨다! 이 예수님이 죽으셨다! 이런 배경으로 해 가지고 예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 죽으시고, 나를 위해서 다 해 주셨는데 나는 지금 뭘 할까? 나는 지금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이런 배경으로 신앙이 이어집니다. 그래가지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데 나도 이렇게 해야지, 나도 이렇게 해야지!' 보상 심리입니다.
그래서 뭔가 헌신이나 충성이라는 것은 뭐냐하면, 내가 예수님 위해서 아무것도 못해서 '예수만큼 나는 안 돼!' 예수님처럼 자라자는 그런 경우 속에서 막 예수께서 내게 하신 일이 너무 위대한데, 내가 예수님처럼 내가 예수님께 뭔가 보답하고 뭔가 예수께 이렇게 해야된다. 이런 것으로 우리 신앙생활이, 뭔가 보상적인 신앙 생활이, 우리 가운데 열심히 있다고 할 때에 거의 다입니다. 거의 다 이걸 깔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응답도 열심히 뭘 전도하고 열심히 뭘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기도응답이 잘 되고 열심히 안 하면 기도응답이 아닌 것 같고...
그래서 여러분들이 뭐 보통 우리 교인들 생각할 때에 '목사님은 기도응답 잘 받을 것이고 나는 뭐 기도응답 못 받을 것이다!' 이런 생각하는 사람들 많아요. 똑같습니다. 이것이 이해가 안 되어서 그래요. 그러니 내가 뭘 하는 만큼, 내가 뭐 예수님께 대해서 '내가 막 보상하는 만큼, 내가 하는 만큼 나한테 보상해 주고 뭔가 이루어 질 것이다!'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뭐가 오느냐? 예수 그리스도 위해서, 이 예수 그리스도 이 역사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 전하라! 그랬으니까 전도하러 갈 때는 막 전도! 얼굴을 막 붉히면서 그 다음에 얼굴에 미소를 띄워가면서, 막 애교를 떨어가면서 천사처럼 합니다. 돌아왔다 마귀처럼 무서워지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저도 어떤 면에서 여러분 잘 알잖아요. 강단에 섰다. 참 여러분 강단에 선 박 목사 징그럽죠... 이면에 있는 나를 전혀 못 생각합니다. 집에 가면 나는 폭군인데... 요즘에는 많이 변했다! 그러더라 만은, 마찬 가지예요. 그래서 전도하고 간증하는 그 순간만큼은 너무 아름답습니다. 진짜 저 사람 천사 같습니다. 없어요! 천사 한 사람도 없어요. 그런 사람일수록 더 무섭습니다. 더 성질 더러울 수 있습니다. 뭐가 안 되느냐? 우리가 근본 배경이 안 됩니다. 뭐가 안 되느냐? 여러분과 제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십자가 지시고 다 열어놓고 두고 떠났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분이 내게 오셔서, 그 다음에 내 조직 속에서, 내 생각 속에서, 내 기관 속에서, 내 움직임 속에서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와 뭐가 됩니까? 하나가 됩니다. 그게 뭐냐? 성령으로 오셔서 이것이 완성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멀리보고 아 그렇게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천사 나팔소리와 함께, 이 땅에 재림하실 때에 늘 그 말을 말씀했잖아요. 예수님이 저 멀리 어디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딴따라~' 그러면서, 나팔불면서 모여라! 그게 아니고 이미 여러분과 제게 성령으로 오셔서 내 생각이 되시고, 내 인격이 되시고, 내 조직 속에서, 내 건강 속에서, 내 판단 속에서, 예수그리스도 충만하게 구체적으로 인도해 나가시다가 그 날이 와서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니라 벌써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 받아서 어디까지? 천국까지 가는 겁니다.
여러분 뭐 지금 세상이 어떻다 이럴 때에 겁내는 것 없죠. 두려워 할 것도 없어요. 저 뭐 미국에 터졌다! 그럴 때에 우리는 두려워 할 것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이제 일을 이루어 나가시는 구나!' 예수께서 친히 나와함께 계시는 사건 속에서 두려워하고 염려할 것 없잖아요. 이런 배경에서 예수님께서는 여러분과 저를 위해서 뭔가 구원주 식으로 약속하고, 그것을 이루어 놓고는 떠나버리고 그런 것이 아니고, 여러분과 제게 지금 사실적으로 오셔서 예수그리스도의 인격과 실체와 사실로 나를 이끌어 가시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성경이 뭐라 그러냐 하면요. 이 사건을 누리고 이것이 배경이 안 된 상황에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님이 나를 위해서 생명까지 주셨는데 내가 뭘 해야 되겠다! 이렇게 될 때에 종교로 빠지게 됩니다. 여러분 참 묘하게 돼요. 우리도 모르게 그래서 뭔가 열심히 하는 것으로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좀 열심히 하면, 좀 편안하고... 그와 상관이 없어요. 그래서 이런 사실들을 구체적으로 예수께서 설명하시면서 뭐라 그랬냐하면요. 골로새서 2장 19절에 보면, 그런 관계를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배경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어떤 관계를 말씀 할 때에 뭐 우리를 인도하는, 구원시키는 일을 다 해놓고는 떠나고 우리와 상관없는 그런 분이 아니고 여러분과 저를 구체적으로 내 안에 오셔서 내 인격이 되고, 내 판단이 되고, 내 생각이 되고 구체적으로 그렇게 하시는데, 그렇게 하는 것을 몸으로 비유했어요. 그러면서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면 여러분과 제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게 되는 그 순간에 벌써 우리는 뭐라 그랬습니까? 하나님의 교회라 그랬습니다. 성전이라 그랬습니다. 그 다음에 이 성전에 여러분 모일 때에 사람이 쭉 모였다! 이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몸으로...
그 다음에 그 몸에 실제적으로 머리되신 분, 인도하시는 주관자가 누구냐?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교회에 뭐가 되셨어요? 머리가 되셨다. 그러니 머리에서 명령하면 전부다 움직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관계를 유기적인 관계라 그럽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우리가 연결된 것, 유기적인 관계입니다. 예를 들어서 성령의 영감 설을 말할 때에 여러 가지 영감 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기계적 영감이라 그럽니다. 기계적 영감이라 그럴 때는 내 의지와, 내 생각과, 내 판단과, 내 지식과 상관없이 마음대로 쓰는 겁니다. 마음대로! 하나님이 직접 내 손을 잡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막 써내려 갑니다. 로마서도 써 내려가고, 고린도 전서도 써내려 가고 이걸 가지고 기계적 영감이라 그럽니다.
유기적 영감이라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느냐 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 생각, 판단! 그 다음에 가문 배경, 모든 것이 전부 녹아 내려서, 녹아 내려서 이것을 전부 뭔가 활용이 되어 가지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인도와 함께,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이것이 함께 녹아 내려서 그것이 기본이 되어 가지고 표출이 됩니다. 표현이 됩니다. 이것을 가지고 유기적인 영감이라! 그러면 우리 인간과의 관계는 기계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유기적인 관계입니다.
예를 들어서 머리에서 '먹어야 되겠다!' 생각을 안 합니까? 그러면 '먹어야 되겠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손이 물을 먹어야 될 것 아닙니까! 들고 꾹꾹 밀어 넣습니다. 그러면 나는 먹어요. 먹었습니다. 그러면 전혀 이 손은 뭔가 내가 지금 물먹는 일에 큰일을 해 내었다! 생각 안 합니다. 마땅히 할 일을 한 것뿐이거든요. 전혀 이것은 개면 적으로 내가 뭘 했다! 이런 것이 없습니다. 그냥 머리에서 나오면 같이 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먹습니다. 그러면 입은 막 먹어놓고는 내가 이 먹었으니까! 그러고 이것도 자랑할 것도 없어요. 모든 기관이 이걸 먹고 이렇게 하는 것을 통해서 전체가 힘을 얻습니다. 손이 힘을 잃게 되면 손이 아프면 다른 기관도 아픕니까? 안 아픕니까? 다 아픕니다.
여러분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또 중요한 것은 손이 일을 했다고 손만이 자랑하고 그럴 수가 없죠. 우리가 복음에 의해서 정말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되면, 내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가지고, 내 마음이 열려서 가게 되는 모든 그런 과정 속에서, 생각과 마음과 느낌과 심지어는 모든 조직 할 것 없이, 전체적으로 모든 전 인격이 그리스도로 녹아서 하나가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생각과 뜻과 명령들이 바로 누가? 하나님이 내려 주는 겁니다. 복음 전파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말세에 저절로 이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때부터 뭐냐하면요. 간증을 해도 내가 예수그리스도 간증한다고 그럴 때도 간증하는 사람이 막 내가 잘했다. 안 합니다. 내가 물 먹였다고 손을 이렇게 흔드는 사람 봤어요? 내가 막 밥 먹었다고 입만 살이 퉁퉁 부어 가지고 이만큼 나온 것 봤어요? 살쪄도 전체가 다 찌는 겁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을 했을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전 인격 속에서, 전 생각과 마음이 하나님의 뜻과 같이 전 인격 속에서 녹아 내립니다. 그 다음에 그로 통해서 터져 나오는 전도가 비로소 참된 전도입니다. 그럴 때에, 전도할 때에 싹 웃고 돌아서서 딴 짓 하는 것이 아니고 전도할 때에 역시 감사하고 기쁜 것처럼 내가 전도하지 않는 생활 속에도 똑같이 뭡니까? 삶 자체가 전부 기쁘고 감사하고 찬송입니다.
이 눈이 열려지게 될 때에, 이때부터 뭐가 나오느냐? 내 생각은 전부 기도가 되는 겁니다. 내 느낌이 전부 감사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 이때부터 뭐냐? 다른 사람에게 말하게 되는 그 순간에 전에는 기도응답을 받아야 되겠다 그 말이 아니고 이런 생활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그때부터 가는 걸음마다 벌서 이루어 졌어요. 성취되었어요. 다 이루어 졌습니다. 나는 가기도 전에 벌써 하나님께서 다 준비해 놓았어요. 그러면 이 눈이 열리게 될 때에 그때부터 '다 되었네, 다 이루어 졌네!' 뭐가 나옵니까? 감사밖에 나올 수 없죠. 감사밖에...
그래서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구원 주셨다. '그 분 떠났다! 나와 멀리 계신다!' 그 말이 아닙니다. 그 분이 오셔서 구체적으로 내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분 누린다! 안 그럽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역사와 그 축복과 인도를 완전히 받도록 사실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뭐 세포가 되고 말하자면, 말이 좀 어폐가 됩니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될지... 그런 게 그 다음에 생각이 되고 판단이 되고 전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안에 녹아 내리는 겁니다. 이런 축복과 역사가 바로 뭐가 되느냐? 오늘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과 제게 이것이 사실이 됩니다. 이것이 안 되면 뭐가 되느냐? 자꾸 종교로 빠져요.
그래서 이렇게 되면 뭐냐하면, 관계가 자연스럽게 예수께서 내게 막 이렇게 하시는데 '나는 뭘 합니까? 나는 뭐 해야 되겠는데...' 이런 것도 없어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초 신자도 예수 영접했다? 뭘 그 상관없어요. 그냥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이웃에 있는 아이를 참 예쁘다고 맨 날 머리를 쓰다듬어 줘도 그 아이가 구하고, 그 아이가 바라고 그 아이의 모든 요구를 채워주지는 않습니다. 예쁘다! '참, 예쁘다!' 그러고 말죠. 그러나 내 생명을 낳게 되는 순간 쉽게 말해서, 내 아들을 낳게 되는 순간 그때부터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쓰다듬어 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심지어는 뭐 저 같은 경우에는 아이를 낳아 놓고 그때는 무슨 마음인지... 하여튼 집안도 안 돌보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래 가지고 그때는 예수 그리스도 안 되어 있으면서도 신비 배경이 되어 가지고 애들 우는 것도 싫고 그 다음에 그 때부터는 뭐냐? 우리 집사람하고는 완전히 별거해 가지고 '너는 저 방에 있거라, 나는 여기 있을게! 내가 준비하는데 장애 되지 마라!' 아이들이 조금 컸을 때에 내 방에 들어오면, '들어오지 마라, 가라!' 그러고 아예 문도 못 열게 하고 이렇게 해도 말하자면, 내가 내 입장에서 내가 내 아이에 대해서 필요와 내 아이에 대한 모든 것들은 나는 책임을 졌습니다. 관계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예수 그리스도가 내 속에 내 안에 성령으로 사실이 되었다! 그럴 때에 하나님과 이런 관계가 이루어지면서 모든 것이 여기서 녹아 나는 겁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내가 뭘 구했으니 들었다? 아닙니다. 내가 뭘 이걸 잘해 가지고, 뭐 헌신했더니만 이게 왔다?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기적인 관계가 맺혀지는 순간에 다시 말해서 내가 너에게 내 생명 주는 순간에 나와의 관계가, 유기적인 관계가 이루어지는 순간에 구체적으로 그의 모든 필요와, 그의 모든 간구와, 그의 모든 것들이 내 것이 되는 겁니다. 내 마음이 자기 마음이 되고 자기 마음이 내 마음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가는 동안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러분에게 모든 문제 해결되었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풍성한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이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다스림이라 그랬습니다. 이것이 지금 이해가 안 되니까 하나님은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안 좋은 것은 안 받아들이고 이런 식입니다. 이것이 안 되니까 여러분 자꾸 뭔가 율법적인 배경에서 내가 뭘 잘하면 응답할 것 같고, 내가 못하면 응답 안 할 것 같고, 이상한 짓을 해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저게 내 인간인가! 저게 네 인간인가? 사단의 역사인가?'
그래서 성경에 말씀했잖아요.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 하시는 말씀이 꼭 그것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 없이 아버지라 그랬으니까! 그렇게 되면 뭐가 안 되느냐? 구체적으로 이런 관계 속에 이루어지지 않고, 인격이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이 응답하실 그런 관계가 안 이루어지기 때문에 너는 사단을 너희 아비라 그렇잖아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니까, 하나님과 상관없다. 나 없이 별 짓을 다하고, 별 소리를 다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나님 할아버지라! 그래도 하나님은 안 듣는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거든요.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생명이 아니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어. 하나님의 뜻을 아무리 보여줘도 몰라! 아닌 겁니다.
그래서 이것이 조금 이해가 될 때에 여러분 비로소 뭐가 보이느냐? '아, 하나님의 뜻이구나!' 사건 속에, 일 속에 하나님의 손이 나와 함께 하시는 구나! 조금만 다스림 속에 하나님의 손이 같이 하시는 구나! 기쁨과 감사가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서 뭐가 나옵니까? 전도라는 것은, 곧 전도할 때만 내가 열심히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고 내 삶 전체가 생각과 느낌과 마음이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누리는 하나님의 그 은총을 누리는 삶이 되면서 전도라는 열매가 되는 것뿐이고, 하나의 오는 과정일 뿐이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채워주시고 역사 하시고 이루시는 겁니다. 그 그리스도가 확인되는 만큼, 나한테서 능력과 권세가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추석 명절 전입니다. 확실히 사람을 만난다. 뭘 만난다. 내가 막 전도할 때에 하나님 힘주시고... 아닙니다. 전도하기 전에 벌써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유기적인 머리로서 나의 온몸 전체에 구체적으로 뭡니까? 힘줄이 붙고, 살이 연결되고, 근육이 연결되어서 여러분과 저는 완전히 하나님의 응답 받을 수밖에 없는 관계가 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응답하시고 역사 하는 것 아닙니까! 뭐 지금 응답해 주옵소서 역사 해 주옵소서. 이런 기도는 벌써 우리 차원이 아닙니다. 그러면 감사밖에 안 나오죠. 가보니 벌써 여기도 계셨네, 가보니까 여기도 계셨네, 벌써 다 이루어 주셨네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여기에 터져 나오는 것 아닙니까! 우리 교회에 이 교회를 이제 매각을 할 때에 뭐 10억이라 그러고 15억 받자! 그러고 여러 사람들이 막 마음은 있는데, 특별히 우리 다락방에서 마음은 있는데 이 돈이 잘 안되니까 구체적으로 이게 거리가 잘 안되더라 구요. 그런데도 다른 사람보다 많이 받은 것도 아니고, 별로 뭐 그런 것도 아닌데 또 이 반 나누어서 교회하고 사택하고 나누어서 판다는 것은, 아예 우리 생각도 안 했고 그런데 누가 이 거래를 시작을 했습니다. '김 희 식' 목사님이 '해주십시오!' 이렇게 했단 말이죠. 그러니 우리 교인들이 이 건축 위원회도 그렇고 김 목사라 그러는 데는 그만 힘이 없어져 가지고 '고만 좋다 뭐 해버려라!' 다른 데서 말할 때에 '우리는 왜 해 달라니까 안 해주고...' 왜, 그러냐?
뭐가 안 되는 겁니까? 관계입니다. 김 목사와 우리 교회는 관계입니다. 이 관계입니다. 여러분 잘 아셔야 합니다. 사단의 자식들 아무리 뭘 하고 싶어도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것 아닙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는 지금 잘 들어야 돼요. 이것이 자꾸 곤란하게 되면 이것은 잘못되어집니다. 왜, 신비주의를 자꾸 배경으로 하느냐? 성령의 역사는 뭔가 와 가지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속삭이면서 '이것해라, 저것 해라!' 나를 끌고 다니는 역사는 성령의 역사 아닙니다. 잘 알아들어야 돼요.
성령의 역사는 뭐라 그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우리의 인격이,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판단이, 우리의 모든 결정이, 우리의 모든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녹아 있는 유기적인 관계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이 내가 '원한다, 안 한다!' 그게 상관없어요. 하나님의 마음이 내 안에 왔을 때에 내 모든 마음이 하고싶다. 해야 되겠다. 이렇게 해야 되겠다. 나도 모르게...
여러분 동기 정도가 아닙니다. 자연적으로 생명 건다는 말을 들어봤습니까? 나는 '생명 건다!' 는 말이 조금 어색해요. 왜 그러냐? 예수 그리스도 확인 안 되면, 생명 건다는 말이 그 실감이 안 되는 겁니다. 내가 하고싶다 그래서 하는 겁니다. 하면서 뭐가 나옵니까? 하면 할수록 감사와 기쁨! 헌신도 기쁨! 내가 막 돈을 투여해도 기쁨! 내가 막 몸을 투여해도 기쁨! 그 헌신과 그 모든 일에 내게 예수그리스도로 통해서 그 은혜들 속에서 그 은혜를 누리고 사는 생활 속에서 모든 것이 뭐냐? 감사로, 찬송으로, 기쁨으로, 드리면 드릴수록 감사로, 찬송으로, 기쁨으로 그렇게 나오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악한 영이 뭐냐하면요. 오늘 혹시 뭔가 나는 안 그럴려고 그랬는데 뭐 성령이 나를 강제로 이끌고 갔다. 그것은 악한 영이에요. 다른 영이에요. '안 그럴려고 그러기는 뭐 안 그래' 안 그럴려고 하면 그것은 악령이지! 성령의 역사는 내게 임하셨다. 말씀하실 때에 내 마음과 생각과 뜻이 전체가 뭡니까? 기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잘 보세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과정 속에서 여러분 보시면, 나는 안 그럴려고 그랬는데 어느 날 갑자기 손이 막 흔들고, 발도 막 뛰어다니고 이래서 되었다! 아닙니다. 내가 즐겁게, 내 전심을 다해서 이루어 졌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모든 판단으로 결정할 때에 복음에 유익 된 것이 있느냐? 좋다. 다 버려도 좋다! 판단합니다. 그러면 결정합니다. 내 자신이 기쁨으로 결정하게 됩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되어야 됩니다. 이게 잘 이해가 못 되어 가지고 뭐 자꾸 끌려 다니면서, 자꾸 성령의 인도를 받는 줄 압니다. 막 귀에 뭐가 들려지고 내 마음속에서 이상한 생각이 나서 해 버리고, 해놓고 나면 후회하고, '내가 왜, 이러냐!' 그것은 전부 순간, 순간 속이는 겁니다. 여러분 절대로 기도하면서 성령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인격에, 그리고 내 생각에, 내 삶에, 내 모든 기관에 구체적으로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약한 부분, 부족한 부분들,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채워 가시고 그러면 성령의 역사는 병 안 낳게 하냐? 그런 역사 아닙니다.
들어오시게 되면, 내 속에 들어오셔서 모든 부분을 그 역사 속에 이루어 가는데, 그 역사 속에 이루어 갈 때에 내가 '이게 낳다, 이게 낳다!' 그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 그 사실 자체를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 아닙니까! 그러니 여러분 만날 때 내가 잘하겠다! 상관없어요. 오늘도 성령 충만 주시고 성령의 인도 주시옵소서. 여러분 생각이 다 응답되는 하나님의 배경의 역사입니다. 그때부터 뭐가 나옵니까? 내게서 조용히 기도하는 기도마다 어떻게 됩니까? 믿어지게 됩니다. 이루어집니다. 성령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