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한 번 뿌리 내리면 그대로 정착 되어져 도무지 변할 것 같지 않은 자연도
변할 수 있다는 걸 가지 접붙힘을 통해 설명해 줌으로서 우리로하여금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하나같이 자신들이 확신하는 바는
절대 변할 수 없다는 논리로, 지식으로, 신념으로 가지고 삽니다
나아가 종교인들은 그 신념이 곧 선이요,의요,하나님인줄 알고 섬깁니다
특히 유대인들의 종교성이 그러합니다
그들은 종교성 자체가 하나님이 되어 버렸습니다
자신들이 감람나무를 품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올시다 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꺽어져야만 합니다
그러나 저들은 완강히 버팁니다
그래서 꺽어짐 당하는 거야 말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러할 때 하나님께서는 모사를 펼치십니다
내 속에 이방적인 것들을 꺽어서 그리스도께 접붙히신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전혀 예상치 못한 발상입니다
야생나무 돌감람나무가 이제 눈으로도 완연하게 변환되어질 것이며 또한 열매도 맺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적인 내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의 중심체인 그리스도에게 접붙힘 당했을 때
나는 그분으로부터 진액을 받은 결과 현저하게 보이는 세계속에서 내가 보는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보이는 세계를 살아감에 점점점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살아간 다는 것입니다
보이는 세계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만큼 보여지고 만져지고 느껴지는 것이 있습니까?
말씀이 죄를 못박은 내 육체에 오사 우리와 함께 장막을 치고 사는 셈 아닙니까?
바울은 내 속에 유대교 못지 않은 종교성이 얼마나 다른 신을 섬겼는가를 깨우쳐주게 만드는게
그리스도의 충만한 생명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가 그랬으니깐요
그래서 그는 외면적 유대인이 그러니깐 종교적인 이스라엘이 뉘우쳐
그리스도에게로 돌아 오게 되는 터닝포인트를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내 안에 수많은 이방적인 요소들이 생명 나무 뿌리되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충만히 공급 받아 말할 수 없는 환희와 기쁨이 터져나오게 될 때라 합니다
할렐루야!
그리스도의 생명 충만은 무엇일까요?
곧 말씀 충만을 뜻합니다
나란 것을 구축하고 있었던 모든 지식에까지 새롭게 만드는 생명의 말씀으로 충만해질 때
어찌 내속에 종교성이나 율법적인 행함이나 내 자아의 의가 폭로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가지 접붙힘을 단순히 혈과 육의 지역적인 이스라엘로 해석하게 되면
이스라엘중의 이스라엘이였던 바울이 원하는 바일까? 생각케됩니다
바울이야말로 유대교로부터 꺽어져 나와 그리스도에게로 접붙힌 당한 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꺽어진 바울이 공급받게 된 감람나무의 진액을 현재 먹고 있는 중이라면
이 가지 접붙힘을 어찌 해석해야 될 것인가?
그가 꺽어진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가 이방인이라 꺽어졌습니까?
그는 분명 유대인인데도 꺽어지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걸 바울 스스로가 알아서 꺽어졌습니까?
여기서 누가 꺽어지느냐? 에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처음부터 외면적 이스라엘과 내면적 이스라엘을 설명한 다음
이 둘을 다 함께 그리스도안에서 화해시켜 새사람을 만드시는 하나님을 보도록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속에 종교성이야말로 외면적 이스라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만큼 하나님 섬김을 종교화, 제도화, 정치화 심지여 국교로 만든 민족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들 속엔 하나님과 전혀 이질적인 속성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이 말은 뒤집으면 이방인들과 다름 없었다는 말입니다
내 속 열렬한 종교성과 상관없이 나도 기독교인이 아니라 이방인이라는 말이나 다름 없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들이 하나님과 합할 수 있는 동질적인 요소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못박지 않았습니다
유감이지만 예수를 따르던 수많은 백성들조차 그를 사형시킴에 자기 목숨을 내놓고 반대한 자가 없었음을
기억한다면 쉽게 이해가 갈 것입니다
근데 중요한 것은 왜 성경이 이런 것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게 바로 나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나 바울이였다는 것입니다
가장 이스라엘중의 이스라엘로 잘 믿는다고 믿었던 나 바울이였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분들 더 많으면 많았지 덜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로마 교회를 향해
신령한 은사, 곧 그리스도, 말씀을 기록한 로마서를 오늘의 나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바울이 자기안에 성령으로 쓴 것이니
나 역시 내 안에 계신 성령으로 로마서를 읽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할 때 가지 접붙힘으로 어찌 풀어야 할 것인가?
참 한계를 느끼지요
바로 이 한계야말로 하나님과 이질적인 내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현상이라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말씀을 본 순간 보여지고 쉽게 다가 온다면 내 한계를 덜 느끼겠지요
한계를 덜 느끼는만큼 더 절절히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매번 한계를 느낍니다
특히 나를 아무리 제어 하며 훈련시키며 절제시켜도 여전히 막무가내로 분출되는 그 어떠한 것들,
그리고 아무리 내 속에 있다지만 문 한번 열어 보지 못해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조차
모르는 무의식 세계~
무의식은 그야말로 비언어화로 묶여 있는 광활한 세계라 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이런 것들을 두고 그냥 넘어갑시다
뭐 그리 심각하십니까?
그래야할까요?
이런 영역들이 다 이방적인 것이 아닐까요?
내가 나에게도 이방적이라면 도대체 하나님께는 얼마나 이방적일까요?
그런데 나는 접붙힘을 통해 바로 이런 이방적인 무수한 것들도 그리스도께 진액을 받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충만하게 채워질 것을 약속하고 있다는 걸 발견하도록 만드시니 그분을 찬양합니다
아버지!
누가 당신을 측량할 것이며 누가 당신의 책사가 되려합니까?
우린 너무나 어리석어서 우리가 아버지를 멋대로 말합니다
그리고 어디로 갈지 모르면서도 모든 진리의 길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말씀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용서해주시옵소서
첫댓글 큐티본문(10/13)-로마서11:25~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