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많은 자들이 이 때를 혁명의 시기라 부른다. 대륙 전쟁의 역사가 끝을 맺고 마로드와 바일론이 동맹 및 불가침 협상을 맺은 뒤 9년의 시간이 흐른 후 대륙에는 몇 몇 일이 있었다. 우선 바일론에는 일부 귀족층이 반란을 이르키며 마로드에서는 경제 개혁을 강력히 추진한다. 이러한 일들이 한꺼번에 겹쳐 일어나는 카오스력 9939년의 가을, 대흉년이 대륙을 찾아오고 카르테우스라 부리는 악신의 추종 세력에 대륙에 뿌리 내린다. 결국 이로 인한 굶주림을 이겨내지 못한 사람들의 손으로 민중 혁명이 시작되었다. 바일론의 프랑드 시를 시작으로 9939년의 겨울은 피의 겨울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게 된다. 후 이 시기를 [피의 겨울 혁명기]라 부르게 되었으며 근대 사회로 접어드는 중요한 역사의 전환점이라 한다.
-역사가 샤롯 에리첼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새벽의 거리로 울려퍼져 갔다. 어느새 어둠이 슬그머니 물러가며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느 때와 다름없이 이른 시각, 아직 모두가 잠에 빠져 있을 때에 마차 한대가 급히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바일론의 수도, 세레네즈의 귀족가를 지나 황궁까지 이어진 대로를 따라 달리는 마차에는 어떤 장식도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도 없었다. 마차는 시내를 지나 귀족가에 이르러서야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아직 멀었습니까?"
나직하지만 가는 여성의 음성이 마차 안에서 흘러나왔다. 한 숨을 돌리며 천천히 마차를 몰던 마부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예... 지,지금 거희..."
"조금만 더 빨리 가 주시겠어요?"
"그,그러죠."
마부는 당황한 표정을 지우며 말들을 채찍질 하기 시작했다. 서서히 속도가 붙으자 마부는 채찍을 놓으며 중얼거렸다.
"후... 왠지 모르게 주인님과 대화를 하면 떨린단 말이야."
마차는 어느 새 귀족가를 지나쳐 황궁을 어귀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난 마차의 속도는 줄여질 줄을 몰랐고 마부 역시 익숙한 표정으로 경비병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고 곧장 관문을 지나 갔다. 경비병 중 하는 그 마차를 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로니아 여백작께서 어쩐 일로 이렇게 급히 들어오시는 거지?"
새벽의 여운이 남아있는 아침.
세레네즈의 한 귀족가에 예상밖에 손님이 찾아 들었다.
"... 전에는 못하겠다고 하지않았나?"
귀족으로 보이는 조금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검은 후드를 푹 늘러 쓴 사람에게 말했다.
"크리스찬 후작 각하의 부탁이라 생각을 마꾸었습니다."
검은 후드는 차분하게 눈 앞에 크리스찬 후작을 바라보았다. 크리스찬 후작은 그런 그를 만족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대륙 최고의 암살자, 렛이 날 그렇게 신뢰를 해준다니 감사할 따름이로군. 어쨌든 잘해 보세나."
"다시 말하지만 전 사람 죽이는 일 외에는 하지 않습니다."
렛은 크리스찬 후작이 내민 손을 바라보기만 하면서 말했다. 크리스찬 후작은 손을 슬며시 거두며 말했다.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
"제가 뜻하는 바가 이루어진다면 뭐든 하지요. 하지만..."
"하지만..."
"아닙니다. 어쨌든 사람 죽일 일이 있거든 절 찾으십시오. 당분간 세레네즈의 도둑 길드에 있을 작정입니다."
렛은 조용히 몸을 이르켜 방 한켠의 창문을 열었다. 렛은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바람이 차군요."
렛은 그렇게 말하고는 훌쩍 창 밖으로 사라져 갔다. 크리스찬 후작은 그런 렛의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버지 따위를 닮고 싶지 않기 때문에... 였겠지."
이제 겨우 가을의 시작이지만 찬바람이 대륙을 찾아들었다. 새하얀 벽돌로 짜맞추듯 조심스럽게 하나하나 쌓아 올린 바일론의 수도, 세레네즈의 황궁 중앙에 자리한 궁성 세실리드... 그 아래로 바일론에 세 뿐인 공작 가문의 저택이 자리하고 있으며 뒤 쪽으로는 황실의 거대한 정원이 꾸며져 있다. 세레네즈의 중앙부 나지막한 넓은 언덕 전체를 성벽을 쌓고 그 안으로 중앙부에 황제의 거처인 궁성 세실리드를 그리고 뒤편에는 거대한 황실정원을, 앞에는 세 군데의 거대한 공작가 저택을 세웠다. 그 것이 지금의 황궁인 것이다. 대륙 전쟁의 길고 긴 역사 동안 세레네즈가 함락 되었어도 이 황궁만은 온전했을 정도 그 위용은 대단하다.
그 곳에 자리한 셋 뿐인 공작가의 저택 중 한 곳, 시르크 공작가의 저택에 멈춰선 마차 한 대에서 그다지 화려하지는 않은 수수한 모습의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인이 내렸다. 탐스러운 갈색 머리를 곱게 길러 허리에 이르렀고 그 허리에는 범상치 않아 보이는 레이피어가 걸려있었다.
그 여성은 범도를 모조리 무시하고 반쯤 뛰듯이 걸음을 재촉해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자신을 보고 당황하는 집사를 향해 외쳤다.
"공작 각하께서는 계시는 가?"
"예? 아, 집무실에서 사무를..."
여성은 집사를 본척 만척하고 집무실의 문을 무작정 열어고서 들어갔다. 수없이 쌓인 서류를 결제하던 시르크 공작은 뜻밖에 손님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레이디 미르엔. 그 급한 성격 좀 고치시게."
"공작 각하. 문제는 그게 아니라..."
미르엔은 급히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시르크 공작은 진정하라는 듯 손짓을 해 보이며 집사를 향해 말했다.
"차 좀 가져다 주겠나?"
"예."
집사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는 방을 나섰다. 시르크 공작은 잠시 서류를 미뤄두고 미소지으며 미르엔을 향해 말했다.
"무슨 일이신가?"
"크리스찬 후작 일파에서 암살자들과 접촉이 잦다고 합니다. 도둑 길드에서 나온 정보이니 쓸만한 것일 겁니다."
"그 것 때문에 새벽같이 들이 닥친 건 아닐 것이고. 로니아 백작. 이제 천천히 설명하시게."
미르엔은 숨을 한번 몰아쉬고 말을 이었다.
"로니아 상단에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크리스찬 후작의 장기 용병 고용이 늘어나고 일부에서는 황태자 암살이나 반란을 준비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을 지경입니다. 거기다가 그가 사마死魔의 칸을 찾고 있다는 군요. 만약 칸이 그에 동조하기 시작하면..."
"로니아 백작께서는 앞에다가 대마법사를 놓고 꽤나 무시하시는 군. 그가 마족을 봉인하고 다니기로 유명하다고 하나 대륙 최고의 실력이 어디 간 것은 아니니 걱정 말게. 그보다 그가 반란을 이르킬까 걱정이군."
"문제는 칸 뿐이 아니라는 것에 있습니다. 여러 유명한 용병과 심지어 렛까지..."
시르크 공작은 이 대목에서 미르엔의 말을 끝었다.
"렛이라면 지난 번에 자네를 암살하려다 실패했던..."
"그런 셈이지요. 그 자의 실력이라면 절 베고도 남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는 이상한 말을 남기고 갔습니다."
"무슨?"
"'나와 인연이 있는 자이기에 목숨을 거두지 않는다.' 라고..."
"자네 암살자와도 인연을 맺는 가?"
"아니... 목소리는 처음 듣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그 자가 황태자께 칼을 겨눌 수도 있겠군."
"그렇겠지요."
시르크 공작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알았네. 순백의 위저드에 연락해서 황태자 저하의 호위를 부탁하지."
"그럼 전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아, 그리고 개인적인 부탁이네만 내 아들 녀석을 찾아 주겠는 가?"
"윤기를... 말입니까?"
"부탁하네."
미르엔, 아니 보라는 잠시 망설이다가 밖으로 나갔다. 시르크 공작은 그 행동을 무언의 긍정으로 받아들렸다. 시르크 공작은 가끔 그 망나니 같은 아들 녀석이 수도에 남아 자기 밑에서 마법 수련을 꾸준히 했다면 아마 이미 자신을 넘었을 지도 모른다는 꿈같은 상상을 한다. 아직 끝나지 않은 수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체 세레네즈의 하루가 또 다시 시작되었다. 아직 많은 것이 끝맺지 못한 것이 너무도 많이 남았다.
『축제의 거리』
하늘에 푸른 색 달이 떠올랐다. 푸른색 은은한 빛을 뿜으며 밤을 맞은 세상을 굽어 보고 있다. 빛과 시공의 신이며 운명과 자연의 지기를 관리하는 주신 파이란의 달이 신미 대륙의 밤하늘에 떠오른 것이다.
찬바람이 불지만 가을은 가을인지라 들판은 풍요로 가득찼다. 수확의 기쁨을 나누고 올해의 풍요를 신께 감사하는 파이란 축제의 서막이 다가왔다. 프리스트나 프리티스트의 주도 아래 제례 행사와 절차에 따라 치뤄지는 것이 정상이지만 신미 대륙 북서쪽, 바일론이 변두리 영지 푸름시에서는 그런 것을 따질 수 없다. 그저 먹고 마시며 즐기는 축제로 그 모습이 변형되어 치뤄지고 있는 것이다. 이 계절을 다스리는 파이란과 풍요의 여신 소피아에게 올리는 제례는 이제 각 국의 수도에서나 볼 수 있다.
푸름시의 밤은 꽤 아름답다. 건물과 건물 사이게 끈을 달아 전등을 매달고 불을 밝히면 거리는 환해진다. 그 사이로 축제 때만 들어서는 번잡한 시장이 있고 대로를 따라 쭉 가면 영주의 성 앞에서 각가지 행사가 벌어지고 있다. 영주의 성 앞 광장을 벋어나 마법주술학교(이하 마주교)에 들어서면 학교에서도 나름대로 학생들이 축제를 벌이고 있다.
이런 번잡한 푸름시 시내를 비집고 지나는 한 청년이 있었다. 누더기에 가까운 보라빛 망토를 두르고 푸른 색 머리를 허리까지 길러 한가닥으로 대충 묶어 놓았으며 허리에는 조그만 단도가 걸려 있었다. 그 청년은 이리저리 밀리는 듯 하면서도 빠른 걸음으로 사람들을 뚫고 갔다.
"언제나 이 맘 때 쯤이면 복잡하군."
그는 혼자 중얼거리다가 걸음을 제촉하여 인파들을 뚫고 지나갔다. 인산인해를 이룬 사람들의 무리 속에는 술에 취한 용병도 있었고 재잘거리며 떠들어대는 학생들도 있었다. 아들, 딸을 데리고 나온 부부도 있었다. 호기심 많은 아이들은 연신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청년은 아이들을 보며 피식 미소 지었다. 그 때 앞에 사람들이 길 양 옆으로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헬던트 후작 각하시다. 길을 비켜라!"
청년의 얼굴은 살짝 구겨지기 시작했다. 묵묵히 한 쪽 옆으로 물러나던 청년은 기사들에 둘러쌓여 영주의 성으로 가는 한 귀족을 보며 중얼거렸다.
"최우영... 많이 변했구나."
청년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때 헬던트 후작 일행이 발길을 돌려 어딘가로 움직이는 지 다시 사람들이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청년은 자신을 향해 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자리를 피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기사들이나 헬던트 후작 쪽이 좀더 빨랐다.
"홍윤기!"
발길을 돌리던 청년, 윤기는 그 자리에서 멈춰섰다. 하르니칼 헬던트 후작, 최우영은 윤기를 향해 말했다.
"여기서 널 다시 보는 구나. 모두가 얼마나 널 찾고 있는 줄 알아?"
"..."
"돌아가자. 내가 수도로 갈 때 같이 가자."
"..."
우영은 아무 말 없이 돌아서 있는 윤기의 뒷모습을 보며 조금 나직하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많이... 변했구나."
"너도."
윤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영은 윤기에게 다가서 한 쪽 손을 그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돌아가자. 너라면 충분...."
"손치워."
윤기는 매몰차게 우영의 손을 쳐냈다. 순간 기사들은 당황하여 검을 뽐았다. 기사중에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소리쳤다.
"나는 창공의 기사단 소속 칸트 미쉘이다. 너의 태도는 명백한 하극상이렸다!"
"조용히 하게. 자네가 나서서 함부로 할 수 있는 분은 아니니."
"?!"
우영의 차분한 대답에 칸트는 놀란 얼굴로 우영을 바라보았다. 칸트는 우영을 향해 말했다.
"하오나 후작 각하."
"되었네. 홍윤기. 한마디만 전할게. 시르크 공작 각하께서 건강이 안 좋아지셨다. 부쩍 어지러움을 많이 호소하시고 국정에 나서는 일도 줄어드시고 계셔."
"..."
"네가 곁에 있어 드리는 것이..."
"그럴 수 없어."
윤기는 딱 잘라 말했다. 우영은 이제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소문처럼 너 정치일이나 가문의 명예를 버리고 망나니처럼 돌아다니기만 한 것이냐? 엉!"
"알 필요 없어. 이만 간다. 다음에 다시 보도록 하지."
윤기는 사람들을 비집고 발걸음을 제촉했다. 그러나 좀처럼 길드탑은 가까워지는 걸 느낄 수 없었다. 윤기는 발에 무게가 느껴지는 것을 느꼈다. 어느 새 윤기는 수많은 사람들의 한 가운데 서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가운데에서 윤기는 조용히 자신에게 물었다.
"과연... 난 어디에 서야하지?"
윤기의 중얼거림은 허공에서 흩어졌다. 그 울림은 오로지 윤기에게만 전달되었다. 그는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다. 축제의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윤기는 왠지 모든 것이 텅비어 버린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마死魔의 칸』
화려한 전등이 거리를 밝히고 모든 사람이 먹고 마시며 즐기고 있는 시각, 푸름시의 길드탑에서는 심각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그러니 푸름시에 머물러야 겠다?"
"예. 성찬 아저씨께서 좀 도와 주세요."
푸른 색 머리를 길게 기른 청년, 윤기는 성찬을 보며 말했다. 성찬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스승에게 가 보지 그러냐? 3년전 그 곳에 계신단다."
"3년전 이라면..."
윤기는 잠시 침묵했다. 자신의 스승, 진우는 현제 마주교 교감으로 근무하고 있다. 교장은 자신이 학생 때와 변함없이 광채의 할아버지이신 이평이 맞고 있다.
"꼭 찾아 뵙거라."
"예... 언제가는."
윤기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일어섰다. 성찬은 윤기를 보며 슬며시 미소지었다.
"하려는 일이 잘 되길 빌마."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현진이 녀석 보거든 안부나 전해주렴."
윤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8년전... 어리버리하고 마냥 순진하기만 하던 그 녀석의 얼굴이 떠오르자 윤기는 자기도 모르게 감상적으로 변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그는 다시 걸음 옮겨 길드탑을 나섰다. 그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 속에 뒤섞여 푸름시, 축제의 거리를 걷고 있는 세명의 학생이 있다. 한 녀석은 가벼운 학생 복장에 허리에는 검을 걸친 금발이고, 한 녀석은 검은 색 머리에 검은 색 망토를 두른 마법사였다. 그들 곁에 한 쪽 허리에 책을 끼고 흔치 않은 은발의 학자풍의 학생이었다.
"유호상. 책 치워라. 축제날까지 범생티 내기냐?"
금발의 검사가 학자풍의 호상을 향해 말했다. 호상은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이 책은 오늘 교감 선생님한테 드릴려고 가져온거야."
"넌 책들고 다니면 안 쪽팔리냐?"
호상은 싱긋이 미소지었다. 금발의 검사는 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때 마법사 녀석이 검사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저기, 저 두사람 좀 묘하지 않냐?"
"어디?"
마법사가 가리킨 방향에는 검은 색 로브로 온몸을 가리고 두 눈만을 번뜩이고 있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그 둘 중 하나는 등에 거대한 바스타드를 짊어지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묵직한 오브를 손에 들고 있었다.
"눈빛이... 보라빛이군."
호상이 그 사람들을 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마법사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족이겠지..."
"샨의 눈은 여전히 예리하군."
금발의 기사는 입을 쩍 다시며 중얼거렸다. 마법사, 샨은 둘의 옆구리를 살짝 치며 말했다.
"움직인다. 쫓아가야겠지?"
"당연한 말씀을."
금발의 검사는 오른손을 검손잡이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호상은 적대적인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다들 축제의 분위기에 젖어 있어서 검사를 눈여겨 보지 않고 있었다.
"모두 조심하고. 특히. 켄트 너."
샨은 금발의 검사, 켄트를 향해 말했다. 켄트는 돌아서는 샨의 뒤통수에 다가 뭐라고 나불거리다가 샨이 갑자기 뒤로 획돌아서자 휘파람을 불며 애써 태연한 척 했다.
"켄트!"
"왜? 나 아무 짓도 안했어."
"아니! 저기!"
켄트는 역시 몸을 돌려 샨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그 곳에서는 수십개의 불덩어리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샨은 뭐 씹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메테우스 레인... 7클레스 마법인데... 젠장!"
샨은 망토 속에서 작은 완드를 꺼내들며 소리쳤다.
"모두들 이쪽으로 모여 서세요! [시공을 관리하시는 빛의 파이란이시어. 그대의 성스러운 빛으로 우릴 수호하소서. 실드 이주케이션.]"
사람들은 샨의 외침에 일제히 실드의 범위내로 모여들었다. 켄트는 검을 뽐아들며 샨에게 외쳤다.
"나도 거들지."
"아까 그들 짓일까?"
호상은 샨을 보며 말했다.
"마족이란 녀석들은 알 수 없는 존재지."
샨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이미 운석덩어리들은 가까워졌고 사람들은 축제의 분위기에서 벗어나 비명을 지르며 날뛰고 있었다. 샨의 주위의 사람들은 실드 안에서 긴장한 눈초리로 운석들과 샨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청강기天淸强氣(1)"
어디선가 들려온 외침과 함께 푸름시 전체에 푸른 빛 강기가 드리워졌다. 푸름시와 충돌을 눈앞에 두고 있던 거대한 운석들은 거대한 파공음을 내며 흩어졌다. 샨은 차마 못보겠다는 표정으로 감았던 두눈을 떴다. 실드 막 밖에 선체 부적 한 장을 들고 있는 한 남자가 샨의 시야에 들어왔다. 샨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부적한장으로 무시무시한 7클레스 대량 살상 마법을 가벼히 막아버리다니...
"어떤 녀석이냐! 나와라! 본인은 대 바일론 제국의 궁정 대주술사! 하르니칼 헬던트 후작이다!"
샨은 그를 보며 다시 한 번 놀람의 표정을 지었다. 전쟁의 역사의 막을 내리게 한 영웅 중 한 사람. 현제 대륙 최고의 주술을 구사하는 주술사들 사이에서 영천현인影舛賢人이라 불리는 사람. 하르니칼 헬던트 후작이 자신의 눈 앞에 서 있는 것이다.
"크흐흐... 요란하시군. 나는 영광스런 마라왕의 자식이다. 너 따위와는 볼 일이 없다. 사마의 칸이어! 나와라! 영광스런 마라왕의 재림을 방해하는 자여!"
"사,사마의 칸!"
하르니칼, 아니 우영은 놀라서 소리쳤다. 대륙 마법의 역사를 새로 써야 할지도 모르는 거물, 숱한 마족들을 소멸하거나 봉인했으며 소문에 의하면 대륙 최강인 시르크 공작이나 마로드의 카를로스 베일루스 후작을 넘어섰을 것이라고도 전해지는 인물. 순백의 위저드는 아니나 새하얀 순백색의 이름 모를 로브를 입고 단도를 들고 나타나 전설같은 이야기를 남기기로 유명한 자의 이름이었다.
"여기 있다. 마족이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집중 되었다. 그 곳에는 두 눈만을 내어 놓은 체 새하얀 로브로 전신을 감싸고 오른손에 단도 하나를 거꾸로 쥔 체 서 있는 자가 허공에 떠 있었다.
"칸... 흐흐흐... 내 놈의 목숨도 끝이다."
"나머지 한 놈도 나오라고 해. 똑같이 저승길 구경을 시켜주마."
사마의 칸은 마족을 향해 조소를 보내며 말했다. 마족은 발끈하여 말했다.
"넌 나 제라스가 상대한다. 말라스님은 너딴 잔챙이를 상대하시지 않아."
사마의 칸의 표정은 점차 굳어가며 허공에서 녹아내리듯 등장하는 마족을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그의 힘에서는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죽어."
[용어 풀이]
(1)천청강기天淸强氣
맑은 하늘과 같은 색을 발한다는 주술로서 그랜티스트 실드와 같은 절대 방어 주술이다. 마법의 그랜티스트 실드와 다른 점은 범위가 무척 넓다는 것과 부적이 꼭 있어야 한다는 정도이다. 볼품없고 얇아 보이는 강기라하여 무작정 충달할 경구 그랜트스트 실드와 달리 반탄지기를 형성하여 공격자에게 그 충격을 되돌려주니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용언 주술 4급.
"[시공을 가르는 어둠의 파공성! 다크 썬더(1)!]"
제라스는 거대한 검은 번개를 허공에서 손짓 한 번으로 소환해 내었다. 우영은 천청강기의 부적을 허공에 띄워 유지시켜 우선 사람들을 보호했다. 품 속에서 하이느가 만져졌지만 왠지 지금 꺼내기는 싫었다. 우영은 가볍히 보법을 밟으며 수인을 맺어 갔다. 수인이 맺혀가면서 푸름시 전체를 또 다시 푸른 장막, 천청강기가 감쌌다. 강기 밖의 두 사람을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제라스는 검은 로브를 던져버리고 양손을 모아 검은 번개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콰지직...
한차례 요란한 소리가 일며 잔잔한 검은 빛 쇼크 웨이브가 제라스 근처에서 일었다. 허공에서 가만히 반대편의 제라스를 응시하던 칸의 눈이 치켜져 올라감과 동시에 그의 모습은 잔상만을 남긴 체 허공에서 사라졌다.
"저,저럴 수가! 저게 사람이야!"
"마,말도 아,안돼!"
우영은 사람들의 함성을 들으며 칸이라는 자의 움직임을 쫓았다. 자신의 눈으로도 제대로 뒤쫓을 수 없는 빠르기. 순수한 속도로 움직이는 듯 하지만 마나의 흔적을 조금씩 남기며 움직이는 것은...
"마법이군. 최상급 레비테이션(부유, 또는 비행 마법)이야."
우영은 살짝 몸을 허공에 띄웠다. 주문 없이 중력의 저항을 깨는 것은 칸만이 하는 일이 아니었다. 우영은 위를 올려다 보면서 만약에 대비하고 있었다.
칸은 그 순간 제라스의 양손에서 즉시 튀어나갈 듯 꿈틀거리고 있는 다크 썬더를 향해 단도를 날리고 있었다.
"윈드 샤우팅 커터!"
우영의 눈은 순식간에 커졌다. 칸의 손끗에서 터져 나오는 거대한 바람칼날, 또 다시 재빨리 물러나 거리를 유지하는 동작, 더욱 신기한 것은 어떤 것에도 유래가 없는 저 마법이었다.
"도대체... 사마의 칸이라는 자는..."
우영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서서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칸의 마나는 나에게는 너무 익숙한 것... 혹시!'
우영은 순간 윤기를 떠올렸다. 한 때 천재라고 불리웠으며 8년전 갑작스럽게 모습을 감춰 모두를 당황하게 했던 이. 물론 자신이나 친구들은 윤기가 떠나리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만...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몰랐을 뿐. 우영은 머리를 흔들었다. 윤기라면. 만약 저 정도 강대한 자가 윤기라면 수도에 돌아가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는 가? 우영은 천천히 손을 들어 외쳤다.
"마황살상곡魔凰殺傷曲(2)!"
윤기는 지금 허공에 떠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감추고...
"마황살상곡!"
우영의 외침이 윤기의 귀전을 때리면서 동시에 거대한 검은 빛 날개가 허공에서 피어났다. 그 검은 날개는 봉황이 날아오르듯 치솟아 오르다가 제라스를 감싸고 거대한 폭발을 이르켰다. 윤기는 제빨리 단도를 들어올려 실드를 형성했다.
-에이젤... 마나 상태 체크
-마나는 아주 정상적인데요. 그냥 보내 버리지 왜 이렇게 머뭇거리세요? 사마의 칸 나으리.
-후 후 후... 세상이 날 그렇게 부르니 어쩔 수 없지만... 아무튼 난 듣기 싫어.
윤기는 자신이 만든 에고소드를 들어올렸다. 에이젤 끝에 거대한 얼음의 기운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차가기만 한 극한의 빙결... 13클레스 원소 마법(3)!
"[영혼조차 얼리오는 거대한 빙결, 아이스 플랜(4)]."
에이젤의 끝 자락에 뭉쳐졌던 얼음의 창은 어느새 제라스의 몸을 뚫고 사방을 얼어붙게 하고 있었다. 윤기는 그 장면을 보며 씁쓸히 웃었다. 그냥 웃었다.
[용어 풀이]
(1)다크 썬더
환상계 마법이자 13클레스 원소 마법에 하나.
거대한 검은 번개를 소환하여 적을 공격한다. 겉을 보기엔 전격계이나 실은 정신력을 극한으로 끌어모아 물리적인 존재로 만들어낸 것이다. 강한 파괴력과 폭발력을 지녔으며 전격계 마법의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다.
(2)마황살상곡魔凰殺傷曲
마황이라 불리우는 거대한 검은 봉황의 날개를 소환한다. 마황은 마계의 신수이나 마족보다는 영적인 것에 가까운 존재인지라 주술적인 용도로 자주 이용되고 있다. 강한 파괴의 상징이기도 하다.
(3)13클레스 원소 마법
13클레스를 마스터 하게 되었을 때 사용하게 되며 실제 이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용언 마법의 수준에 들어야 그 마나량을 충당할 수 있다. 대륙에서 이 계열에 든 사람은 없으며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마법 계열, 위로는 전설로만 전해지는 대원소마법과 절대 마법이 있다.
(4)아이스 플랜
13클레스 원소 마법으로 극한의 빙결 원소를 순식간에 모아 거대한 얼음의 창으로 만들어 낸다. 왠만한 건물 하나 쯤은 얼려 버릴 수 있는 파괴력을 가졌다. 다만 대량 살상 마법이 아니라 대인 공격 마법이라 그다지 범위가 넓지 못하다.
제라스는 허공에서 휘청거렸다. 차가운 냉기가 자신의 온몸을 파고 드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죽어간 다른 마족들의 얼굴이 스쳐갔다. 그들도 이렇게 죽어 갔을 까?
"크... 여,역시.... 네 놈은 강했군."
제라스는 씁쓸히 웃었다. 저기 서 자신과 칸을 번가라 보는 헬던트 후작이라는 작자의 공격도 상당했다.
"크하하! 마족의 위협이 되는 인간들아! 사라져라!"
제라스는 광소를 터트리며 자신의 몸을 터트렸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칸의 차가운 미소였다.
"마음대로는 안되지."
칸의 에이젤이 제라스의 몸에 닿는 순간 제라스의 몸이 갈기갈기 찢겨져 허공에서 흩어졌다. 우영은 그런 잔인한 장면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윤기 녀석이라면 절대 저렇게 까지는 못하지... 칸은 칸인가?"
칸은 왠지 모를 슬픈 미소를 지으며 검을 거두었다. 물론 그 미소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차갑게 타오르던 눈동자가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가 이윽고 초점 없이 흩어졌다.
"소멸."
칸이라 불리우는 윤기는 천천히 에이젤을 거두었다. 소르하노르나 포플라이를 이용하면 편하겠지만 정체를 쉽게 밝혀서는 안된다. 윤기는 에이젤을 거두고 사방을 살폈다.
"그만 나오시지. 마장 말라스."
윤기의 중얼거리는 듯한 말과 함께 허공이 잠시 일그러지며 말라스라 불리운 마족이 모습을 들어내었다. 그는 엘프와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만 귀가 짧고 맑아야 할 눈동자는 탁한 보라빛이었다. 그 가느다란 팔에는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가 들려 있었다.
"오랜만이군. 칸이어."
"여전히 인정머리는 없군. 마장 말라스."
윤기의 눈은 다시 천천히 타올랐다. 말라스는 윤기를 응시하며 말했다.
"마장 서열3위. 말라스의 힘을 보여 주마. 지옥에 떨어져라!"
우웅...
거대한 울림과 함께 말라스를 중심으로 검은 파장일 일었다. 동시에 수많은 검기가 윤기를 향해 날아들었다. 윤기는 가볍게 쳐 내려고 에이젤을 꺼냈지만 우영이 더 빨랐다. 우영의 손에는 하이느가 들려있었다. 검기는 우영의 손에 의해 가벼히 부서져 갔다.
"본인은 부끄럽게도 영천진인의 외호를 지닌 사람이다. 칸. 그대 혼자 처리하게 방관하고 있지 않겠다."
윤기는 우영의 당당한 말에 천천히 미소 지었다. 여전하구나. 우영아. 윤기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우영 역시 윤기에 태도에 대해 별 말을 하이느 끝에 천천히 마나를 불어넣었다.
"지옥의 마염. 화염극례火炎劇例 염라마황주炎羅魔皇呪(1)!"
"그랜드 레인보우(2)"
우영의 하이느 끝에서 화염 기둥이 뿜어져나와 말라스를 덮쳤다. 말라스는 묵직한 바스타드 소드를 들어 화염을 쳐내었다. 윤기의 중심으로 무지개 빛을 발하는 원형 고리가 생겨났다. 윤기의 손짓에 따라 쏘아져 나가 말라스를 감싸고 폭발했다. 말라스는 피를 한웅큼 뱉어내고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었다.
'젠장. 정체를 숨기는 건만 아니면 싸이클론 샤우트로...'
-확 밝혀버리세요.
-아직은 안돼. 에이젤.
윤기는 다시 한 번 원소 마법을 쓸 것인가 고민했다. 아니면 아직 세상에 모습도 들어내지 않았다는 대원소 마법으로...
"어둠이어! 재림하라! 어그러진 그림자의 어둠이어! 영천암현주影舛暗現呪!"
우영의 외침이 윤기의 귓가를 때리며 터져나왔다. 순간 말라스 주위에서 검은 안개가 일어남과 동시에 거대한 검은 검광들이 어지럽게 일어났다. 윤기는 천천히 중얼거렸다.
"대륙 최고의 주술사. 최초로 용언 주술 마스터. 그의 최종기라..."
콰광
엄청난 폭음이 들려오면서 천천히 안개가 걷혀갔다. 그 곳에는 반쯤 해부당한 말라스가 지친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이,인간들이 점점 강대해지는 군... 쳇... 다음에 다시 승부를 내야 겠군 칸."
"..."
윤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천천히 손을 들어 말라스를 가리켰다.
"아프로스 버스터(3)!"
순간 윤기 안에 잠들어 있던 마나가 터져 나가면서 윤기의 등에서 얼음 깃털로 이루어진 거대한 날개가 솟아났다. 그리고 윤기의 손짓에 따라 그 깃털들은 말라스를 향해 일제히 쏘아져 나갔다.
"크아!!!"
말라스의 비명과 함께 허공에서는 엄청난 안개가 일어났다. 극한의 냉기를 가진 안개가. 그 안개는 우영이 안전을 위해 푸름시에 친 천청강기마저 얼렸다가 깨뜨렸다.
"소멸."
윤기는 천천히 중얼거렸다. 우영은 말도 안된다는 표정으로 윤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윤기는 씁쓸히 웃으며 외쳤다.
"[이동]"
한차례 짧은 용언이 윤기를 이동시켜 놓았다. 안개가 걷혔을 때는 산산조각 나서 얼어있는 한 마족의 시체와 보기 좋게 깨져 있는 천청강기만이 남아 었다. 우영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윤기의 관한 일 말고도 보고서에 덫붙일 게 늘었군."
어느새 태양은 푸름 산맥을 넘어 푸름시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너무나 길고도 짧았던 밤이 지났다.
[용어 풀이]
(1)화염극례火炎劇例 염라마황주炎羅魔皇呪
우영이 학생시절에 자주 사용하던 화염극례 염라주를 한단계 업시킨 것이다. 파이어 월과 흡사했던 화염극례 염라주와는 달리 어떤 형태로도 사용이 가능한 강력한 용언 주술, 용언 주술 5급이다.
(2)그랜드 레인보우
11클레스의 공격 마법. 시전자를 중심으로 거대한 무지개 빛 원형 고리를 형성한다. 상상외로 상당한 파괴력을 가지며 왠만한 건물하나 무너뜨니는 것은 일도 아니다. 가끔 광산 채굴 따위에 이용되기도 한데. 이는 클레스에 비해 강한 파괴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자주 이용되는 공격 기술로 사실은 대량 살상 마법이다.
(3)아프로스 버스터
아프로스는 불사조 피닉스와는 반대 개념의 신조神鳥이다. 얼음과 극한 냉기로 이루어진 몸을 가지고 있다고 전해지며 이 마법은 그 아프로스의 날개를 소환해내는 것이다. 수백개의 깃털은 일일히 흩어져 쏘아져 나가는 데 대량 살상 용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한 지점으로 한꺼번에 공격하는 일에도 사용된다. 역시 13클레스 원소 마법이다.
『또 하나의 필연』
푸름시 한 골목길.
윤기는 이동을 마치고 가볍게 착지했다. 새하얀 로브를 거두어 아공간으로 밀어넣고 둘둘 말아 올렸던 보랏빛 낡은 망토 자락을 펼쳤다. 망토 안 쪽에 에이젤을 잘 갈무리하여 꽃아넣었다. 푸른색 머리가 바람에 흩어졌다. 윤기는 다시 그 머리를 움켜지고 한 가닥을 묶었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지 시작했다.
"저기... 사마의 칸!"
윤기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누군가의 음성...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는 싫었는 데... 윤기는 천천히 돌아섰다. 그 곳에서는 검은 색 망토를 두른 마법사와 금발의 검사, 학자풍의 소년 셋이 서 있었다. 모두 같은 나이의 학생으로 보였다.
"어째서 당신은 정체를 숨기는 것입니까?"
"알고... 싶은가?"
윤기는 슬픈 어조로 중얼거렸다. 검은 망토의 마법사는 순간 움찔 한 발짝 물러섰다. 윤기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 마법사를 가볍게 응시했다.
"칸이라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군. 홍윤기라고 하네."
윤기는 뜬금없이 말했다. 마법사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샨, 성은 없습니다."
"자네에게는 알 수 없는 기운이 흐르고 있군."
윤기는 샨을 보며 말했다. 옆에 서 있던 금발의 검사, 켄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윤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왠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리?"
"켄트!"
샨은 얼른 켄트를 호통쳤다. 켄트의 모습은... 윤기에게 누구가를 떠올리게 했고 덕분에 아주 오랜만에 기분 좋게 미소지었다.
"하 하 하. 별거 아니네. 이것도 인연이니 그 쪽 검사께서도 통성명이나 하지."
"켄트, 저도 성은 없습니다."
"전 유호상이라 합니다."
윤기는 호상을 잠시 훝어보다가 말했다.
"정령을 다루는 군."
"그런 셈이죠."
윤기는 천천히 중얼거리는 말했다.
"특히한... 파티로군."
샨은 윤기를 향해 무슨 뜻이냐는 표정을 지으며 빤히 바라보았다.
"아니야. 아니야. 음... 이보게들. 그럼 다음번 인연을 기약하며 이만..."
"예? 아 예... 그럼 다음에 인연이 닿거든..."
윤기는 어느새 소리 없이 그들 눈앞에서 사라졌다. 샨은 돌아서서 시내를 향해 걸으면서 말했다.
"내 몸의 마나가 이상하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샨의 중얼거림에 가까운 말에 호상은 궁금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럼 정말로 네 마나에 무슨 문제라도..."
"별 거 아니야."
"야. 인간들아! 지각하겠다. 뛰자구."
"좋아. 아침 조깅 삼아 뛰자구."
샨이 유쾌하게 소리치자 호상은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 아침 조깅은 날마다 하는 거냐."
호상의 푸념 섞인 말투에 샨과 켄트는 폭소를 터트리며 달렸다. 그들은 또 하나의 필연과 닿았다.
"...사마의 칸이라."
바일론 제국의 수도, 순백의 세레네즈의 몇 안되는 공작가 중 하나인 시르크 공작가에서는 몇 몇 귀족이 모여 편지 한통을 개봉해 놓고서 심각한 논의에 들어간 상태였다. 금발의 귀족 하나가 시르크 공작을 향해 말했다.
"만약 저들이 사마의 칸을 포섭한다면 큰일이 아니겠습니까? 마족 장로(마장)를 가벼히 소멸시킨 인물이라면..."
금발의 귀족은 시르크 공작의 대답을 기다리며 말했다. 시르크 공작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아직은... 일단은 이쪽 전력이 크니까. 내 앞에도 이미 대륙 최강 중 하나인 검사가 앉아 있지 않은가? 안 그런가? 레비던트 후작."
파일론 레비던트 후작, 광채는 무안한 표정으로 시르크 공작을 보며 말했다.
"너무 그렇게 방관만 하시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아직 사마의 칸의 정확한 수준도 파악되지 않았으니..."
광채의 사뭇 진지한 발언에 시르크 공작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니. 때로는 방관도 필요한 법이지. 현제 여행 중인 크리스티앙 공작을 찾아 귀환 조치를 내려놓았네. 헬던트 후작도 푸름시에서 아실가르 남작의 동태를 살피는 중이고. 그나 저나 로니아 여백작... 아들 녀석에 행방이 밝혀졌는 데... 가주지 않겠나?"
"..."
미르엔 로니아 여백작, 보라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윤기라는 녀석이 푸름시에 있다는 소식이 우영의 편지에는 분명히 쓰여져 있었다. 보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결국... 결론은 하나일 수 밖에 없으니.
"크리스티앙 대공 각하이 건강이 걱정이군. 하루 빨리 크리스티앙 공작이 돌아와야 하는 데..."
시르크 공작은 몸을 일르켜 창가로 향하며 말했다. 시르크 공작은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날씨가 좋군."
시르크 공작은 천천히 아들 녀석을 떠올렸다. 이제 와서 그의 마법 실력을 바라기도 힘들어졌다. 우영이 대충 마나를 집어보니 11에서 12클레스라고 보고해 왔다. 다만... 그는 아들이 적어도 자신 곁에 있어 주기를 바랬다. 요즘은 저택이 너무 넓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똑. 똑.
"시르크 공작 각하. 급보입니다."
공작에 집무실로 집사가 뛰어들어 오며 외쳤다. 시르크 공작은 말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크리스찬 후작이 갑자기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한 동안 푸름시를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던 파이란 축제도 그 마지막에 이르렀다. 이날의 행사는 마주교의 졸업식과 입학식, 그리고 새로운 학기의 시작을 알리는 것으로 마친다. 사람들은 학생들의 학기가 시작됨과 동시에 겨울나기 준비를 시작한다.
화려한 전등들이 치워지고 사람들은 분주하게 파이란 축제의 마지막 날의 준비에 들어갔다. 몇 칠전 사마의 칸과 마족, 헬던트 후작의 엄청난 대결 직후부터 사람들은 불안에 떨었다. 때문에 이번 파이란 축제는 조금 조용히 끝나고 있었다. 모두의 불안이 점차 사그러들 즈음. 축제의 마지막 날이 찾아 온 것이다.
"이제 2학년이로군. 새로운 각오로 공부를 해야 겠어."
학자 풍의 소년, 유호상은 반배정표를 훝어보며 중얼거렸다. 그런 모습을 금발의 검사, 켄트가 보며 말했다.
"볼거 뭐있냐? 귀하신 귀족 나으리와 결투 한 번 했다가 우리 셋 모두 특수반에 배정되지 않았었나?"
"후... 그렇지. 그리고 그 뒤로 너희 두 녀석과 친해진 덕분에 아침마다 조깅을 아주 열심히 즐기게 되었지."
호상의 말에 켄트는 머리를 긁적였고, 샨은 약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귀족 나으리 손 좀 본 것까지는 좋았지만 졸업할 때까지 이동민 패거리와 한 반이어야 한다는 사실은 비극이지."
켄트는 고개를 끄덕였고 호상 역시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그 녀석이 웃는 꼴을 못봤지. 기분 나쁜 놈이야. 그 이. 동. 민."
호상의 말에는 약간의 살기가 서려있었다. 동민이라는 녀석은 마주교의 깡패로 이름 높은 녀석으로 어떨결에 특수반에 반장이 된 자신을 아주 귀찮게 하곤 했다. 호상은 동민에게 적대적인 편이었다.
"아무튼, 이번 학기도 열심히 하자고."
켄트가 힘차게 으르렁 거리는 샨과 호상의 등을 두드렸다. 심각했던 두 사람도 결국 웃고 말았다. 그들은 함께 하기 때문에 아침 조깅(?)을 즐기는 것도. 특수반 학생이라고 눈초리를 받는 것도. 평민이라는 이유로 귀족들의 멸시를 받는 것조차도 웃음으로 참을 수 있었다. 그들의 웃음 유난히 유쾌했다.
마주교 뒤뜰에 자리한 한 건물.
마주교의 선생들이 묶는 관사에서 두번째로 큰 한 방. 하나의 주방과 두개의 방, 거실과 넓은 테라스로 이루어진 이 곳은 마주교 교감이자 대륙 최강의 마법사들 중 하나라는 이진우 현 바일론 제국 백작의 거처였다. 이곳에 3년만에 낯설고도 반가운 손님이 찾아들었다.
"...나는 네 녀석이 고작 12클레스라는 말을 믿을 수 없구나. 넌 3년전에 13클레스를 마스터했었어."
진우는 반대편에 앉아 있는 한 청년을 보며 말했다. 낡은 보랏빛 망토를 걸치고 푸른 색 머리를 곱게 길러 한 가닥을 묶은 청년, 윤기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말했다.
"우영이가 그러던가요?"
"그래... 하지만 그러면 앞뒤가 맞지 않아. 예전에 내가 봤을 때 너는 싸이클론 샤우트는 물론이고 하르가이즈 플레임까지 완숙했었지. 거기다가... 씨어 브레이크까지 베워가지 않았는 냐?"
"..."
윤기는 대답이 없었다. 진우는 윤기의 초점 없이 흩어진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하며 말했다.
"네가 사마의 칸이었던 것이더냐?"
윤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진우는 탄성을 지르며 말했다.
"분명 너는 나의 눈에도 12클레스 정도 보일 정도로 철저히 마나를 숨겼구나. 대단해. 물론 나는 3년전 널 본 적이 있으니 추리가 가능했지만... 그런데 푸름시에 오자 마자 나에게 오지 않고 어딜 돌아다닌 게냐. 섭섭하구나."
윤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그런 말을 듣자고 한게 아니지 않느냐? 어쩔 셈이냐. 네가 사마의 칸이라면..."
"정치에는 관심없어요. 전 지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지만... 가까운 시일내에 움직일 겁니다. 때가 되는 그 때. 그 때까지만 여기 머물까 하는 데..."
"해야 할 일?"
윤기는 진우의 물음에 미소 지으며 말했다.
"성찬 아저씨께 여쭈어 보시면 아실겁니다. 그보다 마주교에 빈 선생 자리 없습니까? 그 때가 되기 전까지 놀기는 뭐하거든요."
윤기는 진우를 보며 말했다. 진우는 한숨지으며 말했다.
"수도에는 비밀로 해 주마. 좋아. 대신 그 때가 빨리 오길 바라마. 그리고 한가지 당부 할 것이 있단다. 태양이 되지 말거라. 많은 짐을 혼자 지려고 혼자 자신을 불살라 빛을 비추는 태양이 되지 말거라. 그저 모두와 함께 하는 빛, 그자체가 되거라."
윤기는 진우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윤기는 이미 8년 전부터 자신의 주위의 모든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의 빛이 되기 위해 태양이 되겠다고 스스로 다짐한 사람이었다. 그는 지금 그 무언가의 때를 기다리고 있다. 조금씩 필연적인 이야기 만들어가며.
조용한 밤이 푸름시를 찾아들었다. 이제는 완연한 푸른 빛을 뿜어내는 파이란의 푸른 달에서 아이들은 졸업장을 받으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고 그 아이들의 부모는 학창시절을 떠올리며 잠시 환상에 잠기기도 했다. 그런 학부모와 학생들 틈에서 한 청년은 조용히 학교를 응시하고 있었다.
"참, 오랜만이구나."
그 청년은 바람에 자신의 긴 푸른 머리칼이 하늘에 날리는 것을 느꼈다. 보랏빛 망토를 걸친 이 청년은 다름 아닌 홍윤기였다.
"그 때 그 녀석들도 이 학교에 다니겠군."
윤기는 골목길에서 마주친 그 세명의 학생들을 떠올렸다. 당당한 마법사 샨, 조금은 어뚱해 보이는 검사 켄트, 정령과 친해 보이는 학자풍의 호상. 윤기는 그런 멋진 녀석들을 가르치길 바라고 있었다. 어느덧 졸업식도 끝이나고 졸업생들과 그의 부모들은 자리를 떠났다. 그 빈 자리는 신입생들과 그들의 학부모로 금새 메워졌다.
윤기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조회대 쪽으로 향했다.
"푸름시 마주교, 카오스력 9938년 새학기를 시작하며. 입학식을 거행한다."
교장, 이평의 노쇠한 목소리가 운동장에 울려퍼졌다. 이평은 몇 마디 하다가 이내 지친 표정으로 진우에게 보이리스(일종의 목소리 증폭 보석, 배경이야기 참고)를 넘겼다. 진우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고 이평은 괜찮다고 손들어 보였다.
"올해 입학하는..."
윤기는 어느새 조회대에 위, 선생님들의 상석에 올라섰다. 이미 인사를 나눈 선생들과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정도로 예의를 차렸다. 은영과 이평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신분을 아는 사람은 없다.
"끝으로 새로오신 선생님 한 분을 소개한다."
진우는 손짓으로 윤기를 앞으로 불렀다. 윤기는 조용히 앞으로 나섰다.
"이 분은... 용병 생활을 하시며 많은 경험을 하신 분이다. 앞으로 2학년 8반, 특수반 학생들을 특별지도 하실 것이다."
윤기는 진우에게 보이리스를 넘겨받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홍윤기라고 한다. 사람은 가능성을 가진다. 나는 그 가능성을 키워주기 위해 존재하는 선생이라는 사람이다. 너희의 가능성을 더 키워주기 위해 노력하겠다."
윤기의 짧은 한마디가 끝나고 몇 안되는 박수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것이 더 분위기를 묘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 아래에 선 2학년 8반, 특수반 학생들의 한무리에서 조소에 실린 음성이 흘러나왔다.
"얼마나 버틸까?"
"일주일."
마른 녀석의 말에 야무지게 생긴 한 녀석이 짧게 말을 끊었다. 마른 녀석은 씩 웃으면서 말했다.
"난 이틀. 비실대는 게 영 아니야."
"내기할까?"
"이 김근태님이 내기의 제왕임을 모르는 것이냐? 이동민?"
"웃기는 군."
동민은 마른 녀석, 근태의 말에 코웃음 치며 말했다. 하지만 그들 패거리와는 떨어진 곳, 세명의 소년에게서는 경악성에 가까운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저,저사람은..."
검은 망토의 마법사, 샨의 놀라움에 가까운 중얼거림.
"설마... 저 사람이 우리 담임이라고!"
촐랑대는 금발의 검사, 켄트의 더듬거림.
"이건 인연이 닿은 거야."
학자풍의 소년, 호상의 노인내같은 소리.
마주교의 관사 중, 교감의 관사.
그 안에 교감 선생의 서재에서 교감 선생, 이진우는 성찬과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 그 아이는 결국 모든 걸 혼자 짊어지려고 한다는 건가요!"
"별 수 없지 않은 가. 그 아이는 그 나이에 인간의 경지를 깨버렸어. 용언 마법 4급 마스터, 5급 익스퍼트라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군. 칸이 알면 기뻐하겠지만 그리 좋은 건 아닌가 보더구나. 그 아이는 어느 수준에 이르면 자신의 힘을 조절 할 수 없게 되. 그래서 어느 날 한 마족과 대결하다가 마을 하나를 송두리째 날려 버린 일이 있었다는 군. 그 뒤로 마족을 찾아다니며 처치했다고. 지금 자신은 조용히 마라왕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고. 자신이 힘을 가진 것에 대해 책임을 가지겠다고. 그래서 세상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 마족과 싸움을 시작했고..."
"..."
진우는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이 건 아니야. 아니라고 소리치면서도 도무지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다. 윤기는 녀석의 머릿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 것일까? 진우는 이 순간 제자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너무 혼자서만 가려하고 있었다. 그런 제자에게 좀더 나은, 그리고 좀더 편하고 행복한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없는 자신이 무능하게만 느껴진다. 대마법사라는 자신이 이 순간 너무 무능하다고 생각되었다. 진우는 저대로 윤기에게 맡기는 수 밖에 없다고 결론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아이가 스스로의 필연을 쫓아 만들어가야 한다. 행복이든. 혹은 슬픔이든. 다만 언젠가 혼자서려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기를 빌 뿐이었다. 진우는 푸름시를 떠나 다시 세상으로 나갈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스쳐갔다.
『오래된 사랑이야기』
푸름시에도 새벽이 찾아왔다.
새벽 공기가 스산하게 거리를 매우고 왠지 평소와 달리 썰렁함이 감돌았다. 그 조용한 거리를 지나 오는 마차 한 대가 있었다. 푸름 산맥을 이동 마법이라도 사용해서 지나 왔는 지 제법 깔끔한 마차였다.
다그닥. 다그닥.
조용히 말발굽 소리가 울려퍼져 거리를 메웠다. 그 마차는 영주의 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쩌실거죠?"
꽤나 고운 미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마치 그녀가 허공에 묻고 있는 것처럼.
"어쩌실거죠?"
"네?"
동문서답.
물었던 질문이 고스란히 자신에게 되돌아오자 그 여성은 당황해서 말했다. 상대 역시 여성이었다.
"레이디 네프리아 리세프론. 어째서 이렇게 따라 나서신거죠? 어쩌실거죠?"
상대방에 갑작스러운 질문에 네프리아는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묵묵답답이었다. 그녀와 마주하고 있던 한 여성은 말했다.
"시르크 공작님도 답답하군요. 아무리 그 녀석이 마법 실력도 없고, 정치에는 뜻도 없는 한심하고 멍청한 녀석이라고 해도 두뇌 회전이 당신 자신을 뛰어넘는 다는 걸 모르시다니... 레이디 네프리아를 선생으로 지내기에 왔다는 허울 좋은 명목으로 옆에 두고 감시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실까? 후... 그 잘라신 거룩한 망나니께서."
네프리아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역시 같이 대륙 전쟁의 신화를 세우신 분이라 잘 아시겠군요. 브리칸 시르크 님을..."
"글쎄요. 이제 와서는... 잘 안다고 해야 할지. 모른다고 해야 할지. 후 후 후..."
"미르엔 로니아 여백작님과는 한 때 결혼 상대자로도 소문이 나지 않았었는 지요?"
"?!"
미르엔 로니아 여백작, 보라는 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다. 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듯 했다. 보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 발언을 함부로 한다는 것은 본인에 대한 모독임을 잊지는 않고 계시지요?"
"평민 출신이셔서 안 그러실 줄 알았더니 의외로 딱딱하시네요."
네프리아의 말에 보라는 피식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조용히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오래된 사랑이야기지요. 생각하면 속쓰리지만..."
"네? 그러면 정략적인..."
보라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남들은 다들 그러더군요. 시르크 공작가와 상인 가문에 정략 결혼이라고... 하지만 윤기 녀석은... 그 브리칸 시르크는 잠깐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한 뒤로 되돌아오지 않았고 지난 8년간. 엉뚱한 소문에 많이 시달렸지요."
"그래도. 백작님께 청혼하는 기사들이 엄청나던데요. 지난 번 무도회 때 보니..."
보라는 피식 웃다가 말을 이었다.
"불쌍한 기사님들이지요. 아무리 오래되었어도 전 그대로인데. 오늘도 상당히 두근거리네요."
보라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항상 검을 들고 다니고 기사들과 결투도 서슴치 않고 활발하고 예의 법도 무시하는 백작만 봐 온 네프리아는 여성으로서의 모습을 처음 보고 있었다. 꽤 아름답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고민에 젖어드는 보라의 모습을 보며.
푸름시의 마주교.
2학년 복도의 맨 끝자락에 위치한 2-8반.
어느 교실과 다름없어 보이지만 사실 교칙위반이 많거나 사고를 치고 다니는 소위 문제아들을 모아둔 특수반이다. 그 곳을 향해 오늘도 새로운 선생 하나가 가고 있었다. 특수반 선생은 일주일 이상을 가지 못했다. 덕분에 아이들은 더욱 막나가고 있었다. 낡은 보랏빛 망토에 길게 기른 푸른 색 머리. 손가락 위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교과서. 오늘은 왠지 특별한 선생이 찾아들었다.
"자. 반장 인사하지."
그 특별한 선생, 홍윤기는 돌리던 교과서를 교탁에 내려 놓으며 외쳤다. 호상은 천천히 일어서서 윤기를 바라보며 슬쩍 미소 지어 보였다. 윤기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호상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고 호상은 힘차게 외쳤다.
"차렷!"
"질문 있습니다."
호상의 외침을 끝고 한 학생이 일어서서 윤기를 보며 말했다.
"이름부터 밝히는 것이 예의가 아니가?"
"선생님 먼저 밝히시지요."
"언제 공식석상에서 밝혔는 데 입 아프게 밝힐 필요는 없지 않나?"
다른 선생이었으면 버릇 없다. 어쩐다. 한대 쥐어박으며 앉혔으련만... 일어서 있는 학생의 눈동자는 흥미롭다는 듯 빛나고 있었다.
"이동민이라고 하죠. 라운 파이터입니다. 마법사십니까?"
"그게 질문이었나?"
윤기는 차분하게 동민의 말을 받았다. 동민은 건들거리며 말했다.
"물론 아니죠. 제 질문은 얼마나 버틸 자신이 있으십니까 입니다."
"모르지. 상황은 변하기 마련이고, 항상 변수가 작용하는 게 삶이다. 이건 전투도 마찬가지다. 그대는 싸워본 적있는 가?"
"질릴 만큼."
"의외로 전투 경험이 있나 보군. 대륙 전쟁 당시 의외로 국가간의 전투로 이어지지 않고 마로드 귀족의 반란으로 마무리 지어진 것도 변수이고. 모든 것에 변수는 존재한다. 하지만 때로는 변수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있지. 이런 경우가 어떤 때라고 생각하나? 거기 반장?"
윤기의 물음에 호상은 천천히 말했다.
"필연적인것.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 원리 원칙. 그 자체인 것.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윤기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래. 하지만 전투는 거희 필연적이다. 하지만 변수가 작용한다. 이유는? 이동민?"
"전투는 전투이기 때문이죠."
"전투는 인간이란 지극히 모순적인 존재들 손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윤기의 말에 반 아이들의 눈초리가 윤기에게로 모였다.
"인간은 지극한 모순의 존재이고. 서로 그 모순을 고치기 위해 함께 하는 법이지. 하지만 때로는 혼자 서야 할 때도 있는 법. 그 것 또한 삶에는 언제 어느 때 어떠한 변수가 작용할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들이 전투든 아니든. 그 골치 아픈 변수를 이겨낼 수 있는 인간으로 키우고 싶어서 교단에 섰다. 어떻게 답이 되었나? 이동민. 내가 얼마나 버틸지는 짐작할텐데?"
"충분히."
동민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윤기는 교과서를 집어들며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교과서는 버리자구."
교과서는 마나로 휘감기다가 이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윤기는 교실을 나서며 한마디 했다.
"추신. 난 마법사지. 모두 운동장에서 보자고."
윤기의 말과 함께 아이들의 웅성거림이 울려퍼졌다. 동민은 교과서를 손으로 뜯으며 말했다.
"일주일 버틴단 말 취소하지. 김근태."
푸름시 마주교의 운동장.
개학 첫날인지라 잘 사용되지 않을 법 함에도 이 곳은 유난히 시끄러웠다. 특수반 학생들은 새로 온 특이한 자신들의 선생에 교육 방침에 대한 호기심으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특히 그 선생의 정체를 아는 세 명의 학생은 더욱 흥분해 있었다. 그 때 선생을 기다리며 아이들의 시선이 향하고 있던 현관과는 정반대 방향, 운동장 한 가운데의 허공에서 그 특이한 선생, 윤기는 모습을 들어내었다.
"이동 마법?"
동민은 흥미롭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윤기는 씩 웃으면서 허공에다가 외쳤다.
"트롤 다섯 소환!"
윤기의 외침과 동시에 아이들 앞에 다섯 마리 트롤이 모습을 들어냈었다. 윤기는 이걸로 끝이 아니라는 듯 확고한 어조로 소리쳤다.
"신성 결계. 디바인 실드(1)."
마법사가 신성 마법을 이용하는 것은 보통 10클레스 이상, 고 클레스의 경우였다.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트롤은 아랑곳하지 않고 신기한 듯 자신들 주위에 쳐진 디바인 실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실드 안에 트롤도 함께 있다는 것. 즉 도망칠 길이 없다는 점은 아이들의 여유를 금세 사라지게 했다.
"젠장. 매직 애로우. 타켓 온(목표 지정)!"
검은 망토의 어린 마법사 샨은 다급하게 외쳤다. 그의 손짓을 따라 기다란 푸른 색의 막대기 다섯이 한 마리 트롤를 향해 날아들었다.
콰지직...
기분 나쁜 녹색 피가 튀며서 비릿한 피내음이 퍼졌다. 샨은 손을 교차하여 허공에 마법진을 형성해갔다. 트롤은 분노하여 샨을 손에 들고 있던 글레이브(2)로 내려 치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뒤에 있던 금발의 검사 켄트가 글레이브를 검으로 막아섰기 때문이다. 호상 역시 노드(3)를 소환하여 샨을 급히 보호했다.
한 편, 동민은 근태와 함께 손과 발을 마나로 감싸고 육중한 트롤의 몸뚱이를 내려치고 있었다. 저 쪽에 건방진(동민의 기준에서)반장 패거리가 한 마리, 자신과 근태가 하나. 나머지 세 놈 중 하나는 자신의 패거리가 남은 두 놈은 잔챙이들을 쓸고 다니고 있었다. 위에서 선생은 미소 지으며 아이들을 보고 있었다. 성적을 테스트 하는 지 왠 수첩을 꺼내들고 이 것 저 것 쓰고 있었다. 동민의 몸에서 순간 파지직 하는 스파크가 일었다. 라운 파이터(4) 특유의 원소력(5)이었다.
"라이트닝 어택!"
동민은 육탄 공격으로 트롤과 맞붙이 쳤다. 크지 않은 덩치로 트롤과 부딪쳤는 지라 동민에게도 상당한 타격이 왔다. 하지만 라이트닝 데미지가 상당했는 지 트롤은 그대로 뻗어서 타들어가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옆에 있던 근태가 오른 손에 화염을 잔뜩 머금고 트롤의 목부근을 강하게 내려 찍었다.
화르륵.
크아...
트롤를 거대한 신음성을 남기며 목이 잘려져 갔다. 아무리 재생력이 좋더라도 목이 잘려나갔는 데 버티면 이미 생명이 아니다.
호상과 켄트, 샨이 맡은 트롤도 깔끔하게 난도질 되고 있었다. 샨이 형성한 마법진에서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바람의 칼날과 켄트의 춤추듯한 검술, 그 것에는 소드 미네랄도 조금 실려 있었다. 그런 둘을 호상은 뒤에서 바람의 중급 정령, 노움으로 보조하고 있었다. 트롤이 워낙 재생력이 뛰어나다 보니 그들 셋이 맡은 트롤은 거희 10토막 이상 나뉘어져서야 숨을 거두었다. 나머지 셋은 아이들이 힘겹게 상대하고 있었다. 윤기는 그 장면을 보며 뛰어나다고 여겨지는 다섯을 골라내었다. 샨 패거리와 동민 패거리로 이 반이 나뉘는 이유까지도...
"이거 계속하면 욕들어 먹겠군."
윤기는 조용히 외쳤다.
"[실드 해제], [생명을 가진 자, 나의 적들이어. 숨을 이만 거두어라.]"
윤기는 자신에게만 들릴 만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순간 트롤 셋은 약한 경련을 이르키며 그 자리에 누웠고, 아이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윤기를 바라보았다. 윤기는 순간 켄트와 샨, 호상을 의식하고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용언 마법(6)이 아무리 편해도 저 녀석들 때문에 함부로 쓰기 힘들겠군."
윤기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힘차게 외쳤다.
"어떠냐? 이정도면 쓸만한 실전 경험이 되지 않았나! 오늘 수업은 마친다. 다른 반과 달리 이 반은 수업시간도 정해지지 않았으니 편하더군. 내일은 내가 쓰러뜨려 주는 일도 없고 트롤도 여섯이다. 단단히 각오하고 오도록!"
윤기의 외침에 아이들은 멍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동민은 근태의 어깨를 툭 툭 치며 말했다.
"어떤 것 같냐?"
"나도 이틀 버틴다는 말 취소 해야 되겠군."
푸름시 영주의 성에 오랜만에 손님이 찾아왔다.
항상 조용하던 성은 다시 시끌벅적 해졌다. 레비던트 백작가 시절에는 영주가 평민들을 위해 자주 연회를 열었으나 아실가르 남작이 온 이후로는 조용해졌다. 그가 조용한 성품의 소유자가 아니라 평민과 어울리기를 싫어하는 전형적이고 고전적인 귀족이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무도회나 파티를 즐기는 아실가르 남작은 귀족이라곤 자신의 가문 뿐인 이 곳 생활이 너무 따분했다. 오랜만의 귀족 손님들이 줄지어 오자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물론 반대파에 속하는 사람들이지만.
"어서 오십시오. 본인이 본 영지의 영주인 레시언 아실가르 남작입니다."
"본인은 로니아 상단의 총단장, 미르엔 로니아 백작이오."
미르엔 로니아 백작, 보라는 은근히 눈치를 살피는 아실가르 남작에게 가볍게 목례를 해 보이고 자리에 앉았다. 뒤 이어 따라 들어온 여성이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리세프론 백작의 영애, 네프리아 리세프론입니다."
"레이디 네프리아. 본인의 영지를 방문해 주신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네프리아는 비교적 공손히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아실가르 남작은 두사람을 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헬던트 후작님을 만나러 오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전 사람을 찾아왔습니다."
보라는 간단하게 말했다. 네프리아는 잠시 흐르는 어색한 침묵을 깨며 말했다.
"저는 이 곳 마주교에서 잠시 선생으로 머무를 까 합니다. 남작님과는 자주 뵙게 될 것 같군요."
"네? 아... 예."
남작은 시종에게 차를 내오라고 하며 헬던트 후작, 최우영을 불렀다. 보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크리스찬 후작의 실종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
아실가르 남작은 흠칫 놀라는 표정으로 보라를 바라보았다. 보라는 혹시 크리스찬 후작이 자신의 동료들에게는 무언가 언질을 했으리라 생각하고 살짝 남작을 떠 본 것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의외였다. 계획적이 아니라 실질적인 진짜 실종된 것이라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그 때...
"영주님 한 거지꼴을 한 마법사가 영주님을 뵙기를 청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용어 풀이]
(1)디바인 실드
신성력을 모아 형성하는 방어막. 신성력이 없는 마법사는 마나를 특이한 방법으로 배열하여 사용한다. 영적인 면이나 흑마술 개통에 강한 방어 능력을 보이며 어떤 때는 본문처럼 일정 지역에 사람이나 동물 등을 가두는 결계의 형태로 이용한다.
(2)글레이브
몽둥이에다가 작은 칼날을 박아 놓은 형상의 무기. 트롤 등 몬스터들이 사람의 무기 조각을 굵은 나무 가지에 박아 휘두르는 경우도 이 것에 포함되는 데 인간이 인위적으로 제작한 경우는 드물지만 후자처럼 몬스터 손에 들려 있는 것이 자주 발견되는 편이다.
(3)노드
바람의 중급 정령.
하반신이 허공에 녹아있는 형상의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동 등의 부수적인 용도나 정령 소환이 아닌 정령 마법에 더 흔히 이용되는 정령이다. 파괴력은 한 단계 위인 로이콘보다 떨어지지만 속력은 더 빠르다고 알려져 있다.
(4)라운 파이터
팔 다리 등에 마나를 실어 무기처럼 다루는 이들을 말한다. 검기나 소드 미네랄과 같은 류의 공격도 가능하다고 전해지며 초보 라운 파이터들은 거희 싸움꾼 수준 밖에 되지 않지만 어느 정도 마나를 다루기 시작하면 원소력 중 한가지 속성을 사용하게 되어 마법과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때문에 고 클레스의 마법사에게는 약한 편이다.
(5)라운 파이터 특유의 원소력
라운 파이터는 위의 설명처럼 고유의 원소력을 다루게 되는 데 그 범위는 세부적이지 않다. 빙계와 화계, 풍계, 지계, 전격계의 자연계가 주를 이루며 빛이나 어둠 등 무원소 개통의 속성을 가진 라운 파이터는 드물다. 아니 카오스 력 역사가 시작된 이후 없다고 해야 겠다. 파이란 시대에는 몇 몇이 존재했다고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라운 파이터들이 상급에 이르며 보조로 또 다른 속성을 겸하게 되는 제 수계나 화계와 같은 극성의 속성을 섞어 사용하는 경우에는 크나큰 휴유증이 뒤따른 다고 한다.
(6)용언 마법
일반 마법의 단계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의 마법. 보통 보조 마법 위주이고 마나의 수준을 따지는 정도 밖에 되지 않아 보이지만 시동어 없이 말만으로 여러가지 효과를 발휘하는 이 경지가 결코 단순한 마나의 수준을 따지는 기준은 아니다.
그건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지.
내가 그를 사랑했던 건...
그는 철없는 고아였고, 강인한 소년이었고, 차가운 마법사였지.
따스하다는 느낌은 없었어.
전혀...
그래도 나는 항상 두근 거렸고, 설례였지.
난 나 자신이 바보같았지만 이미 난 사랑하고 있었어.
그도 날 사랑해 주었지.
그러다가 바람처럼 사라졌어. 마치 바람처럼.
웃습지? 이 오랜된 사랑이야기 말이야.
-모든 건 장난과도 같은 영혼의 속삭임
푸름시 영주의 성 앞에서 한 마법사가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그 마법사는 다름 아닌 윤기였다. 윤기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파이란의 사제로서 푸름시 마주교에 머물면서 양호 선생으로서 많은 봉사를 해 온 아이네 사제가 영주에 의해 추방되었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윤기는 불과 30분 전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자. 오늘 수업은 이만 마치지. 양호 선생님께 치료 받도록."
윤기는 그대로 돌아서려 했다. 그 때 샨의 한마디가 윤기의 귀전을 때렸다.
"양호선생님... 추방 당하셨어요."
윤기는 순간 인상을 팍 찡그리며 샨을 향해 무엇 때문이냐 물었다. 그러자 옆에서 보고 있던 동민이 빈정거리며 말했다.
"아이네 사제가 영주에게 꽤나 건방지게 굴었거든. 당신이 아는 아이네 선생은 학생들 뿐아니라 돈없는 평민들도 많이 치료해주지. 지난 여름 뜻하지 않게 열병이 돌았는 데 아실가르 남작의 딸이 열병에 걸려 버렸거든. 부랴부랴 신성력이 높다는 아이네 사제를 찾아왔을 때 아이네 사제는 많은 사람들을 치료하느라 바빠서 갈 수 없다고 정중히 거절했지. 하... 그런데 2년전까지 이 곳에 영주로 있던 레비던트 백작, 아니 이제 후작님이로군. 그 분과는 달리 아실가르 남작은 평민을 벌레만도 못하게 여기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모독으로 여기고 그 날 즉시 아이네 사제를 추방시켜 버렸어. 원래는 귀족 모독 죄로 잡아 죽일 작정이었던 모양인데, 교장, 교감 선생님이 반 협박까지 하셔서 간신히 프랑드 시로 쫓기듯이 떠나실 수 있었어. 젠장..."
동민은 말 끝에 욕을 달았다. 윤기의 인상은 슬슬 무참히 구겨졌고 이윽고 손끝에서 미미한 스파크가 일었다. 윤기는 간단한 회복마법으로 아이들을 치료하고 즉시 발길을 돌려 영주의 성으로 달렸다.
"뭐가 어쩌고!"
윤기는 아실가르 남작이 조용히 물러가면... 어쩌고 하는 투의 말을 했다는 경비병의 말에 결국 한계점을 넘어섰다. 윤기는 천천히 마나를 조절하기 시작했다. 열은 받아도 쉽게 정체를 들어내는 행동을 하면 곤란하니까. 지금 봉인해 둔 상태에서 가장 강력한 것. 딱 한 방을 윤기는 준비하기 시작했다. 뭔가 눈치를 첸 경비병들이 창을 들었다.
"[대지여 울어라. 허공을 수 놓은 바람의 통곡. 싸이클론 샤우트!]"
윤기의 외침과 함께 윤기의 손 끝에서 수백 가닥의 바람의 검날이 성문과 성벽을 향해 쏟아져 들어갔다. 이윽고 강한 폭풍이 불며 경비병들과 부서진 성문을 휘감았다. 경비병들은 놀란 나머지 해자로 뛰어내렸고 폭풍은 주위의 성벽까지 허물며 거세게 몰아지차다 천천히 멈추었다. 윤기는 숨을 몰아쉬었다. 마나를 봉인해 둔 상태라 8년전 그 때 수준의 파괴력 밖에 나오지 않았다. 사마의 칸의 실력을 다 들어내었다면 성 전체를 넘어서 마을의 일부까지 휘감고 완전히 박살내었겠지만(어디까지나 성안에 있는 최우영이 가만히 있는 다는 전제하에.)...
"고 클레스의 마법사였을 줄이야."
경비병을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윤기는 그들에게 싸늘한 눈빛을 전해주고 성안으로 들어섰다. 광채를 방문 했을 때 기억을 더듬어 응접실로 조용히 걸었다.
"뭐야! 그 까짓 마법사 놈이 성벽과 성문을 부수었다고!"
윤기가 응접실에 거희 닿았을 무렵. 아실가르 남작의 외침이 복도를 울렸다. 윤기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소식은 무척 빠르군."
윤기는 천천히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그 곳에는 뜻하지 않는 얼굴도 하나 있었다. 윤기의 얼굴에 순간 놀람이 스쳐 갔다. 하인은 윤기의 얼굴을 알아보는 지 더듬거리며 소리쳤다.
"저,저 자 이,입니다!"
"평민 용병 따위가 어딜 함부로 들어오는..."
윤기는 순간 아실가르 남작의 말을 잘라버리며 말했다.
"김보라..."
윤기의 중얼거리는 듯한 말투에 아실가르 남작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차를 마시던 보라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윤기를 응시했다. 보라는 눈살을 찌푸리다가 어느새 무표정으로 되돌아가며 말했다.
"윤기... 로구나."
윤기는 잠깐 미소 지었다가 이윽고 다시 표정을 굳히며 아실가르 남작을 보며 말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어 이렇게 감히 귀댁의 문을 부수고 들어왔소."
보라는 윤기의 행동이 이미 짐작이 간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었고 그 옆에 앉아 있던 네프리아는 누구냐는 표정으로 보라를 보고 있었다. 남작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로니아 백작 각하와 아는 사이라고 마구 평민이 귀족을 동급으로 대하는 것은 엄연한 하극상이다."
"평민?"
보라는 순간 웃음 참지 못하고 소리내어 웃어버렸다. 윤기는 그런 보라를 여전하구나. 라는 말을 담아 바라보다가 말했다.
"소개 늦어 버렸군. 본인은 브리칸 시르크, 순백의 위저드 소속이지만 특별한 직위는 없소."
순간 아실가르 남작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버렸다. 브리칸 시르크는 사실 천재 마법사로 한 때 이름을 날렸다. 대륙 최강 중 하나인 샤드 베일루스를 처치하고 대륙 최강 마법 중 두 가지(실은 세가지)나 익힌 천재 마법사 말이다. 하지만 갑자기 종적을 감추고 사라져 버려 귀족계에서는 그를 귀족의 수치로 여기고 거룩한 망나니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순백의 위저드 마스터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런 윤기를 여전히 순백의 위저드로 인정하고 있었다.
"브,브리칸 시르크? 대륙 전쟁의 영웅!?"
네프리아는 찻잔을 내려 놓으며 외쳤다. 윤기는 인상을 아주 가볍게 구기며 말했다.
"다른 사람은 그렇게 말하지만 난 그리 좋아 하는 편이 아니지. 저기 뒤에 서 계신 하르니칼 헬던트 후작은 다르겠지만."
윤기의 말에 뒤에 서 있던 우영은 흠칫하며 윤기를 향해 말했다.
"남작에게 무슨 용무라도 있나?"
"아니. 나중에 해야 겠군."
윤기는 보라를 보며 말했다.
"내가 뭐라고 하니 들은 척도 않더니 보라 얼굴보니 달라지는 거냐?"
"난 수도로 돌아겠다고 한 적 없다."
윤기의 차가운 말에 보라와 우영의 시선은 윤기를 향했다. 윤기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장소를 옮기고서 하지. 재수없는 귀족 나으리 댁은 적당치 않아."
아실가르 남작의 눈썹은 잠시 경련을 이르켰지만 윤기는 못본척 돌아서며 보라를 향해 말했다.
"아직... 그대로 였나. 너는."
보라는 흠칙하며 말했다.
"그럼 넌 또 변한 거니?"
"..."
윤기의 대답은 없었다. 윤기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우영이 그 뒤를 묵묵히 따랐고 보라 역시 뒤를 쫓았다. 네프리아는 뭔가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는 듯 하여 그들을 따라나섰다. 아실가르 남작은 짧은 경련을 이르키며 혼자 중얼거렸다.
"시르크 가문 녀석들은 하나 같이 건방져."
푸름시의 한 카페.
낮고 부드러운 선율의 음악이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피아노 앞에는 평소 아르바이트를 하던 학생이 아닌 한 마법사가 앉아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건반 위에서 손을 놀렸다.
"후 후 후... 피아노 치는 솜씨는 여전하네."
거지같은 첫 인상과는 달리 아름다운 선율로 연주하자 사람들은 이네 음악에 빠져 들고 있었다. 그들 중 한 테이블에서 한 여성이 황홀한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윤기 녀석... 피아노도 쳤었나?"
가벼운 평상복 차림한 한 청년이 그 여성을 향해 물었다. 그 여성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윤기 피아노 치는 거 우영이 넌 본적없었나? 음... 마주교 1학년 때, 카오스 전야제 때 한번 치는 걸 본 적있었거든. 그 때 것보다 지금 것이 낳군."
우영은 반대편에 앉아 있는 여성, 보라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보라는 음악에 젖어 있었다. 윤기를 수도로 데려간다기 보다, 윤기를 만나기 위해 온 사람처럼 보였다.
한 편, 두사람의 의외의 호칭에 당황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공석에서는 로니아 백작, 헬던트 후작하며 서로의 존칭을 불렀던 것이다. 사석에서 느닷없이 푸름식 이름이 튀어나오자 듣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어색할 수 밖에 없었다.
"레이디 네프리아는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지..."
살짝 일그러진 네프리아의 어색한 표정에 우영이 물었다.
"두 분... 사석에서는 이렇게 대하셨어요."
"뭐가 이상하신가?"
네프리아는 순간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획 돌렸다. 그 곳에는 어느 새 윤기가 서 있었다. 윤기는 우영 옆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보낸 거겠지?"
"알면서 묻는 군."
보라는 윤기를 보며 말했다. 윤기는 잠깐 한 숨 지었다.
"미얀해."
윤기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말없이 사라져서 미얀하고. 널 챙겨주지 못해서 미얀해. 하지만..."
보라의 눈길은 어느새 윤기에게 집중되었다. 윤기는 천천히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난 돌아갈 수 없어. 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
보라의 얼굴은 천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윤기의 입에서는 낮은 음성의 말이 흘러나왔다.
"어차피 아무리 고 클레스라고 해도 이미 나는 귀족계에서 설 자리를 잃었어. 수도에 돌아간다해도 소용없어..."
윤기의 말에 보라는 인내의 한계를 느끼고 소리질렀다.
"도대체 넌 뭐 때문에!"
보라의 외침에 모든 이의 시선은 일제히 그들의 테이블로 향했다. 보라는 천천히 호흡을 조절하며 말했다.
"이봐. 브리칸 시르크 전前 순백의 위저드 제9연대장 나으리. 넌 지금 그 실력으로도 문제 될 건 없잖아. 12클레스는 아무나 이루냐? 넌 한 때 천재라고 불렸었잖아. 지금부터 수련해도 용언 마법의 경지 쯤은 쉽게 깰 수 있잖아."
윤기는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몸을 이르켰다. 보라는 이해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윤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윤기의 대답은 생각외로 차가웠다.
"어딘가에 구속될 수 없어. 난 해야 할 일이 있고. 난 그 일에 충실할 꺼야. 그리고 그 일을 해야할 때가 될 때까지 난 마법 선생으로 이 곳에 머물꺼야. 내가 단지 내가 귀족이었기 때문에 날 사랑했고, 그래서 이렇게 내가 돌아가길 원하는 거라면 집어치워! 오래전 그 추억조차 더러워 지니까."
우영은 순간 보라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걸 보았다. 윤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페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영은 윤기를 붙잡아 뺨에 주먹을 갈겼다.
"보라 말은 그런게 아니잖아! 너 이거 밖에 안되는 놈이었나! 말해봐! 홍윤기!"
우영은 윤기를 향해 울부짖었다. 하지만 이어진 윤기의 차가운 말은 우영의 가슴까지 얼어버리게 했다.
"네가 날 알지 못한다면 함부로 짓껄이지 마."
우영은 순간 윤기의 눈가에 스쳐가는 슬픔을 보았다고 느꼈다. 우영은 아무말도, 아무런 항변도 할 수 없었다. 다만 밖으로 나가는 윤기의 뒷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로니아 백작님이 왜 저런 남자를 못잊는 지 조금은 알겠군."
네프리아는 이 모든 상황을 지켜 보며 가볍게 중얼거렸다.
윤기는 자신이 왜 화를 내었는 지도 모른 체 무심코 마주교로 발길를 돌리고 있었다. 조그만 자신의 관사에 들어가서 그저 명상이라도 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걷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에는 평소의 여유나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그는 그저 힘없이 걷고 있었다.
"저기... 선생님."
윤기는 낳익은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그 곳에는 샨을 비롯한 삼총사 세 명이 서 있었다. 왠지 모르게 켄트마저도 심각한 얼굴로 윤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사마의 칸이면서도... 귀족이었군요."
윤기는 움찔하며 샨을 바라보았다. 켄트는 윤기를 보며 말했다.
"카페에서 다 들었어요. 대륙 전쟁의 영웅이자 귀족가의 잊혀진 거룩한 망나니. 브리칸 시르크."
"허..."
윤기는 허탈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자신의 비밀에 대해 절반은 알아버린 녀석들... 기억력이라도 수정해 버릴 까 하다가 충동을 눌렀다. 자칫하면 부작용이 있을 수 있으므로...
"선생님이 사마의 칸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수도로 들어가시면 되잖아요."
호상은 윤기를 향해 말했다. 샨도 거든답시고 한마디 했다.
"거들먹거리는 썩은 귀족들. 싹 쓸어버려 주세요. 돌아가셔서."
윤기의 표정은 제법 씁쓸해졌다. 윤기는 아이들을 데리고 푸름시의 호숫가로 향했다. 아이들은 윤기의 표정을 살피며 묵묵히 그를 따랐다. 이윽고 호숫가에 이르렀다. 윤기는 적당한 곳에 앉아 서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용언 마법 4급 마스터, 5급 익스퍼트."
"!"
아이들은 윤기의 입에서 흘러나온 경지에 경악하며 윤기를 바라보았다. 윤기는 예상했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내 실제 마법 수준이지. 그 옛날 대마법사 위고르도 용언마법3급에 그쳤고, 지금 세계 최강의 역시 3급 수준이니 사람들은 그 경지를 인간의 한계로 치부해 버렸지. 하지만... 난 그 이상을 쫓았다. 쫓을 수 밖에 없었다."
윤기의 중얼거림은 제법 슬퍼져 있었다.
"내가 용언 마법 3급을 마스터 했을 때, 이제는 수도로 돌아가야 겠다고 여겼을 때 한 마족과 싸우게 되었지. 난 나도 모르게 3급의 경계를 어느 순간에 넘어섰다. 그 뒤로 난 나 자신을 어떻게 할 수 없었지. 내가 겨우 폭주를 멈추었을 때 마족은 고기조각이 되어 있고 주위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한 마을이었던 그 곳이... 난 그 뒤로 내가 경험했던 3급 이상의 경지를 쫓았고 그러면서 마족들을 제거해갔다. 일순간 내 실수로 사라져간 이들의 대한 보답으로... 그러던 중 난 지금에 이르렀고 내가 처치한 마족들의 숫자만 해도 엄청나져 버렸지. 그래서 뜻하지 않았지만 브리칸 시르크나 홍윤기이기 보다 사마의 칸으로 사는 시간이 길어졌고 난 이제 마라왕이 지상에 모습을 들어내길 기다리고 있단다."
세 명의 아이들은 멍한 표정으로 윤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윤기는 씁쓸히 말을 이었다.
"힘에는 책임이 따르지. 이제는 나도 지금의 수준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단다. 하지만 지금도 자칫 잘못하면 또 다시 폭주해 버리게 되지."
윤기는 샨을 향해 한마디 던졌다.
"힘을 쫓지 마라. 그 힘에 대한 책임은 힘든 것이다. 특히 나처럼 모든 걸 혼자 짊어지는 사람은... 넌 꼭 예전의 나로 보여."
샨은 천천히 윤기를 바라보았다. 윤기의 눈가는 젖어있었다. 윤기는 그들 셋을 보며 말했다.
"부탁이다. 때가 될 때까지 비밀을 지켜 주렴. 내가 스스로 밝히지 않는 한."
샨과 켄트, 호상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윤기는 호숫가로 눈길을 돌렸다.
"이제 나는 오래된 사랑이야기는 지워가야 겠다."
『빛』
어둠...
어느 누구도 어둡다 밝다 하지 않지만, 끝없는 허무와 공허함 많이 존재하는 그 무엇도 없는 곳. 시공에 존재하지 않는 원초적 무에서 비롯된 혼돈이 아닌 두가지 중 하나 어둠!
그 어둠의 공간 속에 한 청년이 서 있었다. 엘프라 해도 믿을 것 같은 수려한 외모에 깊은 보라빛 눈동자는 꽤 많은 여자들을 울렸을 것이라 짐작하게 했다. 그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 마계는 항상 이런 식이었가..."
그의 중얼거림과 동시의 그 앞에 무언가 녹아내리듯이 생겨났다. 그 형상은 천천히 사람의 모습을 갖추어 갔다.
"늦었군. 세르가스."
청년의 말에 검은 흑발을 어깨 뒤로 넘기며 보랏빛 눈의 여성이 퉁명스레 대답했다.
"여전히 딱딱하군. 그래."
"그런편이지..."
세르가스는 상대에 대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청년는 재밌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마족 치고는 표정이 꽤 다양하군."
"그러는 너는 완전히 석고상이잖아. 석고상 카드라."
세르가스의 말에 카드라는 큰 소리로 웃었다. 둘은 파트너였다. 마족은 언제인가부터 파트너와 동행하며 일을 하기 시작했는 데, 주로 동급에 경우에 그랬다. 물론 마장 서열의 최상위급 마족은 파트너를 따로 두지 않고 행동했다. 세르가스는 이제 겨우 중급에 오른 170살 먹은 어린 마족이었다. 자신의 앞에 있는 자는 마장 중 서열 4위로서 나이가 870이나 되었지만 세르가스는 애교있게 반말을 주로했다. 카드라는 좋을 때로 하라는 식으로 항상 그냥 두었다. 사실 세르가스의 아버지의 입김이 작용하기도 했다. 그 입김 덕에 카드라는 혼자 행동하지 못하고 파트너를 달고 다니고 있었다.
"마라왕께서는 어떻게 지나시나?"
"피... 맨날 그 소리지. 아버지 아니면 마라왕..."
카라드는 전혀 마족같지 않은 저 세르가스에 대해 할 말을 잃었다. 세르가스가 온 것으로 보아 분명히 무슨 소식이 있을 것이다.
"마장 서열 3위 말라스 님이 소멸되셨데. 우후후... 서열 3위 자리가 비었으니 이 기회에 승진이나 해보지 그래?"
"?!"
카드라는 순간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말라스라면 자신의 스승이자 아버지였다. 마족 또한 감정을 가진 생명체 였기에 카드라는 분노하기 시작했다. 카드라는 낮은 목소리로 세르가스에게 말했다.
"잠시. 나 혼자 행동해야 겠다. 그... 말라스 님을 소멸시킨 것이 누구냐? 드레곤이냐? 아니면 그 카르테우스의 사제더냐!"
"인간."
세르가스의 짧은 대답에 카드라는 턱이 빠지는 걸 느꼈다. 인간이라니...
"한 때 떠들썩 했던 사마의 칸이라는 존재에게 소멸 되었다는 군. 네 동생 제라스도 함께."
"크어!!!"
카드라는 표효하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중얼거렸다.
"철저히 파멸 시키주지."
카드라의 낮은 중얼거림에는 엄청난 살기가 실려 있었다. 세르가스는 말라스와 카드라, 제라스가 한 식구였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자신의 실수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 지 뼈져리게 느낄 수 있었다. 카드라는 천천히 몸을 이르켜 지상의 대륙으로 나가는 게이트를 열었다. 카드라는 말없이 그 곳으로 사라졌버렸다.
"젠장! 우린 파트너잖아! 같이가! 카드라!"
세르가스는 소리지르며 막 닫히려는 게이트로 몸을 던졌다. 그 곳에는 이제 어둠만이 남았다.
푸름시 마주교의 운동장.
40여 마리의 트롤이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니고 있었다. 그 트롤들에게는 작은 그림자가 하나씩 붙어있었다.
"이제 트롤 하나는 혼자서 요리하는 건가... 대단한 아이들이군. 왜 특수반이라고 했는 지 의문이야. 특별 영재 반이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며 허공에서 망토를 두른 한 청년이 중얼거렸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다. 네프리아 리세프론이라는 선생이 자신과 함께 특수반을 맡은 후로 유난히 진도가 빨리 나가게 되었다. 첫날부터 트롤 10마리를 소환하려 하자 쪼잔하게 그게 뭐냐면서 30여마리를 소환하게 해 아이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덕분에 이렇게 지금은 아이들 스스로 중상급의 용병의 몫을 하고 있지만.
"쩝... 리아 누나는 하여간 골치 아프게 만든다니까."
이들의 담임, 홍윤기는 네프리아를 보며 중얼거렸다. 어쩌다가 친해져 버린 네프리아를 그냥 리아 누나라고 부르면서 터 놓고 지내게 되어버렸다. 벌써 겨울이건만. 보라와 우영은 영주의 성에 진을 치고 앉아 윤기가 돌아가길 기다리며 버티고 있다.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어느 따스한 겨울 날의 마주교는 여전히 시끌벅쩍하다.
푸름시의 새벽은 언제나 스산하다.
푸름 산맥을 타고 넘어온 새벽의 바다의 찬공기가 거리를 메우고 잔잔한 대기의 움직임은 거리를 조용히 지나갔다. 겨울이라 아직 제법 어두운 거리를 새하얀 달빛이 비추고 있었다. 사람들은 고요속의 안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 거리에 낯선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그는 검은 색 로브로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여긴가... 사마의 칸이 머문다는 곳이."
그는 천천히 중얼거렸다. 사마의 칸이 평소엔 마나를 철저히 감춘다고는 하지만 그는 자신들의 정보망을 뚫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미세한 감각에도 사마의 칸이라 여겨지는 거대한 힘은 어느 곳에도 없었다. 정보기관에서 어떻게 여기 머문다고 단정 지었는 지 신기한 지경이었다.
"후 후 후... 때리고 부수면 그 까짓 놈 하나는 금방 튀어나오겠지."
그는 천천히 로브를 벗어 던졌다. 엘프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수려한 외모, 짙고 깊은 보랏빛 눈동자... 그는 마족이었다.
"천천히 파멸로 몰아가주마. 칸."
마족은 허공에서 자신의 병기, 장창 하르이가를 아공간에서 소환했다. 그는 천천히 허공으로 몸을 띄우며 말했다.
"시작이다. 피의 향현!"
그의 손이 움직이면서 하르이가 크게 휘둘러졌다. 순간 그의 발 아래 건물들의 윗층이 완전히 박살나서 터져 나가며 푸름시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는 마족의 본능을 들어내는 잔인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이 마족은 카드라였다.
콰광...
엄청난 소음에 윤기는 잠에서 깨어냈다. 그는 재빨리 망토를 꺼내 입고 관사를 나서려고 했다. 잠시 사마의 칸이 나가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우영이나 보라를 믿어보기로 하고 그대로 뛰쳐 나갔다.
그가 관사에서 뛰쳐 나왔을 때 이미 입구에서부터 건물이 하나 둘 박살나고 있었다. 윤기가 막 뛰려고 하는 데 누군가 어깨를 잡았다. 우영이었다. 뒤에는 네프리아와 보라가 서 있었다.
"저기까지 텔레포트 가능한가? 기운으로 봐서 마족같군."
"..."
윤기는 말 안해 줘도 알아.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마법진을 생성시켰다. 짧게 외쳤다.
"텔레포트."
그들이 도착한 곳은 이미 완전히 폐허가 된 것이었다. 허공에서는 사람들을 도륙하며 웃고 있는 한 마족이 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좀 특이한 장창이 들려 있었다. 윤기는 본 적 있는 물건이라 인상을 썼다.
"마신기 하르이가."
윤기의 낮은 중얼거림에 우영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윤기를 바라보았다. 윤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륙을 떠돌며 들은 적 있는 물건이지. 마족에게 전해지는 옛 마라왕의 4가지 절대 신기. 신창 하르이가, 신검 차르카, 신궁 에숄렛, 그리고 나머지 하나 현제 마라왕이 지니고 있는 마라왕의 왕관, 신관 네로드. 전해지는 말이 사실이라면 저 녀석은 마족에서 최상급, 서열에 들어가는 장로급은 될거야..."
우영은 범상치 않은 살기에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사마의 칸의 마나는 흔적도 없었다. 이런 때 나와서 마족을 좀 처리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우영의 머리를 스쳐갔다. 우영은 천천히 하이느를 꺼냈다. 자신도 대륙 최강의 주술사. 사마의 칸의 도움을 바라는 것은 어쩐지 수치스러웠다. 그 옛날 윤기에게 도움을 받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도...
"멈춰라!"
"후 후 후... 조무래기는 꺼져라. 사마의 칸이어 나와라!"
마족의 외침에 윤기는 눈살을 찌푸리며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정체를 밝히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윤기는 성질을 누르며 천천히 속으로 캐스팅을 시작했다. 혹시 저 위에 우영이 위험하면 싸이클론 샤우트라도 날려서 어떻게 거들까 해서 였다. 윤기는 옆에서 보라가 에테르를 뽐아들고 디바인 파워를 모으는 것을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태초의 어둠을 다스리는 신, 카오스여! 저기 당신이 거두지 못한 어둠의 조각을 지금 거두소서!"
보라의 기도문과 함께 에테르의 검끝에서 검은 색 가느다란 광선이 뻗어나가서 마족의 어깨를 태웠다. 마족은 노기 띈 목소리로 외쳤다.
"나 마족 카드라의 신체를 손상케 하다니..."
카드라는 우영이 날린 부적을 무시하고 보라를 놀려보며 외쳤다.
"죽어라!"
카드라가 하르이가를 들어 보라를 가리키자 거대한 파장이 카드라의 주위에서 생겨나 우영의 부적을 삼켰다. 그와 동시에 보라는 거대한 충격에 밀려 건물에 쳐 박혀 버렸다.
"컥."
보라는 피를 한 웅큼 뱉어내었다. 윤기가 보라에게로 달려와 부축했다. 에테르를 잡고 있던 손이 걸레 조각처럼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보라는 신음을 상키며 말했다.
"잘라버려야 겠군."
윤기는 어느새 분노로 몸을 떨었다. 보라는 살기로 넘쳐나는 윤기의 눈동자를 보며 걱정스런 눈초리로 말했다.
"흥분하지마. 난 괜찮아."
보라는 왼손을 들어 윤기의 긴 머리 결을 쓰다듬었다. 윤기는 천천히 감정을 가라앉혔다. 순간 뒤에서 엄청난 기운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눈에 보이 않는 무형의 기운이 다시금 몰려오고 있는 것이 분명 느낄 수 있었다. 순간 그 무형의 기운은 산산조각 나서 흩어졌다. 보라는 놀란 눈으로 윤기를 바라보았다. 윤기의 몸에서 은은한 마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윤기는 보라의 다친 오른 팔에 손을 올려놓았다.
"[모든 것을 다스리는 생명의 기운이어. 이 죽음의 육체에 스며들라.]"
윤기의 용언이 짧게 울리면서 보라의 팔은 본래 형상을 찾아 갔다. 윤기는 아공간에서 새하얀 망토와 에이젤을 꺼내었다. 보라색 망토로 보라의 지친 몸을 덮어 주고 새하얀 망토를 걸쳤다. 에이젤을 잡으며 윤기는 소리쳤다.
"[봉인해제] 내가 사마의 칸, 브리칸 시르크 다!"
윤기의 외침과 동시에 거대한 쇼크 웨이브가 윤기 주위에서 일어났다. 카드라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피가 부르노라."
새하얀 망토 자락이 휘날렸다.
윤기는 천천히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마나를 회수하며 마나를 잘 갈무리했다. 우영은 놀란 눈초리로 윤기를 바라보았다. 마나 측정 불가 상태. 우영은 저 상태에서 윤기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윤기는 살기 띈 눈동자로 카드라 바라보았다. 윤기의 몸이 어느새 허공으로 떠올랐다. 윤기는 에이젤을 잡으며 뒤 쪽에 떠 있는 우영에게 말했다.
"뒤를 부탁하마."
윤기의 나직한 목소리에 우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윤기는 심호흡을 했다. 에이젤의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밝힐 거면 진작에 속 시원하게 털어놓지... 젠장할. 칸 때문에 아공간에서 혼자 얼마나 심심한 줄 알아요? 다시 쳐 박아넣으면 그 때는 아는 척도 안 할꺼예요.
-알았으니 잠시만 허리에 얌전히 있어.
윤기는 에이젤을 허리에 꽃아 넣으며 말했다. 에이젤의 불만스런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상대는 마신기 하르이가. 자신이 만든 에고 소드 따위로 막아내기 힘들었다. 다만... 예전에 마신기와 대등히 싸웠던 자신의 무기가 있었다.
"[나와 계약한 공간이여 나에게 시간의 문을 열라]"
윤기의 외침에 허공이 한차례 일그러졌다. 윤기는 그 속에서 자신의 키만한 막대기를 꺼내었다.
"소르하노르?"
우영은 그 막대기를 보며 외쳤다. 보라는 여전히 걱정스럽게 윤기를 보고 있었다. 완전히 형체를 잃었던 팔은 겉으로는 온전했지만 아무래도 신관에게 치료 받아야 할 듯 축 늘어져 있었다.
"준비는 되었나?"
"물론."
윤기의 짧은 대답에 카드라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하르이가를 휘둘렀다. 예의 칸의 짧은 단도가 아닌 새로운 무기가 나왔다면 뭔가 있었다. 자신은 서열은 말라스 보다 낮지만 실력은 서열 1위와 맞먹었기 때문에 말라스를 처치한 인간이라도 쉽게 죽일 자신이 있었다. 물론 오산이었다.
"마신의 힘이어!"
카드라의 외침에 검은 빛 뱀같은 것이 하르이가에서 뻗어나왔다. 윤기는 왼손에 소르하노르를 잡고 오른 손을 내밀어 가볍게 튕겨내었다.
"그랜티스트 실드(1)... 쳇."
카드라는 아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윤기는 양손으로 가볍게 소르하노르를 잡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햇다.
"[모든 것을 불사르는 여섯 가닥의 분노. 버스터 플레임(2)!]"
윤기의 외침에 따라 윤기의 손 끗에서 여섯 가닥 불꽃 깃털이 생겨났다. 윤기는 주위에 엄청난 화기가 생겨나는 것을 느꼈다. 잔잔한 쇼크 웨이브도 터져나가고 있었다. 윤기의 가벼운 손짓에 따라 그 여섯 가닥 깃털은 일제히 카드라에게 날아들었다. 카드라는 하르이가로 세 가닥을 가르고 두가닥을 피했으며 나머지 한 가닥은...
"헉."
윤기는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나머지 한가닥은 카드라의 손에 잡혀 있었다. 카드라는 그 깃털을 간단하게 바스러 뜨렸다.
"제법이지만... 죽을 시간이군."
카드라는 하르이가를 들었다. 윤기는 그 하르이가의 끝보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방심하던 놈들이 소멸되던 시간은 얼마되지 않았지."
"마음껏 떠들어라. 유언이 고작 그 것이라니!"
하르이가는 회색 빛 알 수 없은 마나가 모여들고 있었다. 윤기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대로 공격을 하면 저 것이 터지면서 푸름시가 싹 쓸려나갈 것이다. 우영이가 있다고 해도... 자신도 막기 보다는 깨뜨리기를 택해야할 물건이었다. 아니면 맞고 죽던지.
"마신의 빛이어!"
카드라의 외침과 동시에 회색빛 광선 한가닥이 윤기를 향해 날아들었다. 윤기는 별 수 없이 아래에서 미리 시전한 마법을 터트렸다.
"싸이클론 샤우트!"
우영이를 믿자.
윤기는 우영이를 믿기로 하고 무작정 마법을 사용했다. 엄청난 바람이 폭풍처럼 들이닥쳐 카드라가 쏘아낸 광선을 휘감아 휘어버렸다. 카드라는 짧은 탄성을 내질렀고 이윽고 펼쳐진 수많은 검날에 광선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빛은 흩어졌다. 이윽고.
콰광!
무시무시한 파장이 사방을 메우며 퍼져나갔다. 대륙 전쟁 당시 이미 그 파괴력과 피해가 들어난 적 있던 쇼크 웨이브. 뒤에서 우영의 외침이 들려왔다.
"천청강기."
윤기는 반대편에서 여기 저기 찢어진 상처를 입은 체 떠 있는 카드라를 향해 즉기 공격해 들어갔다. 소르하노르를 오른 손에서 봉처럼 휘두르며.
챙.
금속성이 울리며 하르이가와 소르하노르가 부딪쳤다. 카드라는 지친 표정으로 윤기를 보고 있었다. 윤기 역시 식은 땀을 흘리며 카드라의 공격을 받았다. 십여 차례 부딪친 뒤 겨우 둘은 거리를 유지하며 물러서게 되었다. 윤기는 흡집하나 나지 않은 소르하노르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아무래도 대원소 마법(3) 사용해야 저 녀석을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따질 것도 없다.
윤기 주위에서 화염이 소용돌이를 치며 일어났다. 윤기는 소르하노르를 소용돌이 중심에 세웠다.
"[태초를 지배하던 자가 일깨운 화염의 새여.]"
윤기의 주문에 따라 화염 소용돌이는 더욱 거세게 움직였다. 이윽고 윤기의 발아래 마법진이 생겨 났다. 윤기는 나머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무한한 화염의 이름이어! 그대 피닉스의 날개를 빌리노라! 피닉스 버스터(4)!]"
순간 윤기의 등에서 거대한 화염날개가 돋아났다. 윤기는 카드라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와 동시에 화염의 날개가 깃털 하나 하나로 흩어지며 카드라를 향해 터져 나갔다. 카드라에게 보인 것은 짙은 죽음의 그림자였다.
"크아!!!"
카드라의 비명과 동시에 윤기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마법진을 거두었다. 거대한 쇼크 웨이브가 사방을 메웠고 남은 것은 폐허 뿐이었다. 허무... 거대한 허무만이 남았다. 아름다웠던 제2의 고향 푸름시는 없다.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빛이 비춰지고 있었다.
[용어 풀이]
(1)그랜티스트 실드
절대 방어. 13클레스의 마법이다. 물리적 마법적 방어에 대해 절대적이다. 원소 마법이 아니면 뚫을 수 없을 만큼 사용하기 힘들기도 하다. 덕분 사용하는 자도 드물며 익히기도 힘든 기술.
(2)버스터 플레임
13클레스 원소 마법에서 가장 강력하다 일컫어지는 몇 몇 마법 중 하나. 6가닥의 화염 깃털을 소환하여 한 지점으로 쏘아낸다. 한 나라의 궁성정도도 거뜬히 무너뜨리는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3)대원소 마법
원소 마법의 경지를 넘어선 전설상의 마법이다. 수풍지화의 사대 원소 당 한가지 씩 존재하며 파괴력은 도시 하나는 꺼뜬히 날려버리는 수준이다.
(4)피닉스 버스터
화염의 새 피닉스의 날개를 불러낸다. 수백의 깃털을 빛처럼 뿌려서 도시 하나 정도를 날려버릴 수 있다. 대원소 마법 중 화염계에 해당하며 원소 마법 버스터 플레임의 발전형이다. 일정한 한 지점을 집중 공격할 수도 있다.
카드라는 누더기가 된 자신을 내려 보았다.
추했다.
카드라는 자신의 몸을 뜯어버리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누르며 하르이가를 단단히 쥐었다. 도시의 절반이 날아가 버리고 저 쪽에서는 마법진을 거둔 사마의 칸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인가?"
윤기는 허탈한 표정으로 카드라를 바라보았다. 윤기의 손에 들려 있던 소르하노르는 카드라에게로 향했다. 윤기의 입에서 주문이 터져나왔다.
"[허공을 가르라. 바람의 권능이여!]"
윤기의 용언이 사방을 울리며 소르하노르는 카드라의 오른쪽 어깨를 꿰 뚫었다. 카드라는 순간 충격에 의해 하르이가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하르이가는 지상에 닿지 않고 카드라의 아공간으로 흘러들어가버렸다. 윤기는 손짓으로 소르하노르를 회수했다. 소르하노르를 왼손으로 받아든 윤기의 오른손에는 에이젤이 들려있었다. 카드라는 재빨리 이동 포탈을 열었다. 윤기는 절대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대 안에 잠든 성수를 깨워라]"
윤기의 외침과 동시에 에이젤은 은은한 푸른빛에 휩싸였다. 윤기는 에이젤을 머리위로 던져 올리고 사방에 마법진을 형성하며 주문을 외웠다.
"[세상에 생명이 존재하게 한 그대 물이어! 그대의 고귀한 권능을 내 손안에 주소서! 씨어 브레이크(1)!]"
윤기의 외침과 동시에 에이젤을 중심으로 거대한 푸른 파장이 퍼져나갔다. 사방의 모든 물체는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폐허의 잔재마저 깨끗히 잘려나갔다. 카드라는 자신의 왼손이 산산이 부서져 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분노... 이은 두려움. 카드라는 포탈 속으로 몸을 던졌다. 포탈이 닫히면서 씨어 브레이크는 이네 잦아 들었다.
"놓친 것인가..."
윤기는 허탈하게 아래를 바라보았다. 우영의 보호를 받지 못한 도시의 절반은 완전히 내려앉아 있었다. 회색빛 짙은 모래알처럼 가루가 되어있었다. 윤기는 스스로가 두려워져 왈칵 눈물을 쏟았다. 그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시체조차 남지 않은 그 광경에 윤기는 온몸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망령의 잔재. 백골이어 모여라! 그대의 육신을 여기에 모으라!]"
우영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러자 모래 틈으로 시체들이 형상을 갖추어 나왔다. 그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윤기는 50여구의 시체를 보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자기자신이 너무 싫었다.
눈을 떴다.
흐릿한 시각이 점차 제자리로 돌아갔다. 윤기는 벌떡 몸을 이르켰다. 순간 옆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던 한 여성이 깜짝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보라였다.
"왜 갑자기 일어나고 그래. 아직 밤이야. 좀더 자."
보라는 왼손을 들어 밀쳐진 이불을 끌어올려 주었다. 윤기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녀는 오른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보라는 윤기를 향해 말했다.
"왜 말 안했어. 네가 사마의 칸이라고."
"너도 봤잖아. 난... 난 나 자신을 어떻게 할 수 없어. 내가 있으면 피해만 늘어. 이런 힘. 차다리 마족같은 쓰레기를 벌하는 데 써 버리고 난 죽겠어."
보라는 윤기의 눈에 슬픔을 보았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윤기의 뺨을 쳤다.
"죽겠다는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보라의 입에서 뜻하지 않은 말이 나왔다. 윤기는 뺨을 감싸쥔 체 침묵을 지켰다. 보라는 차다리 감싸 주고 싶었다. 그래서 말을 들을 놈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미얀. 보라야... 너에게 미얀해. 나 때문에 걱정도 많이 했을 꺼고. 원망도 했겠지. 그렇지만 돌아갈 수는 없어."
순간 방문이 열렸다. 우영이 들어와 주먹을 치켜 들어 윤기의 복부를 내리쳤다. 윤기는 컥하는 신음 소리를 내었다. 우영은 소리치듯 말했다.
"잘난 척 하지마! 홍윤기!"
우영은 뭔가 아주 화가 많이 난 듯 숨을 가쁘게 쉬고 있었다. 우영이 이러는 일은 좀처럼 없다. 뭔가 있었다.
"다들었어. 넌 또 혼자 짊어지려고 했지. 그렇게 살지마. 잘난 척 하지말란 말이야. 이젠 우리 모두의 짐이야. 광채도 현진이 녀석도 나서 줄꺼야. 망할 박수민 녀석도 공작 집어치우고 와주겠지. 화민이도. 너 혼자 잘난척 하지마! 알았어!"
윤기는 우영을 바라보았다. 우영의 눈동자에는 우정이라는 것이 담겨 있었다. 역시 혼자 나가려는 것은 무리였던 것일까? 난 함께 해야 하는 것 일까?
"사람... 누구나 나약해. 혼자서는 일어설 수조차 없어."
보라는 윤기의 앞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윤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라와 우영은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윤기는 그런 미소가 보기 싫은 지 딱 잘라서 한마디 덫붙였다.
"하지만!"
윤기는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아직 수도로 돌아갈 수는 없어. 차후에 생각해보자고."
우영은 인상을 팍 썼지만 보라는 여전히 미소지었다. 윤기는 소리로 외쳤다. 최우영 너는 그렇게 인상을 쓰고 있으면 가끔 멍청해보인다고. 그들에게 달빛은 고요히 빛을 비추고 있었다.
[용어 풀이]
(1)씨어 브레이크
이진우가 처음 대륙에 알린 마법으로 거대한 푸른색 파장을 구체처럼 모든 방위를 점하고 퍼져나가 가루로 만들어버니는 마법이다. 대륙 최강의 마법들 중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현제 윤기가 사용할 수 있는 마법 중 최고의 파괴력을 자랑한다. 단, 순수한 물이 있어야 시전 가능.
빛.
아무 색깔없이 그저 밝기만한 것.
그 것을 쫓으려 하지만 어느새 캄캄한 어둠의 한 가운데 서 있다. 그렇게 서 있으면 또 저 멀리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이어서 다시 빛을 쫓아가면 또 다시 어둠 속이다. 빛은 없다.
나는 나도 모르게 혼자 단정지어 버렸다. 갑자기 발아래가 허전해 졌다. 아래로 아래로 떨어졌다. 저위에서 또 다시 빛이 뿜어져 나온다. 나는 자꾸만 아래로 떨어져 간다. 이제 예전처럼 빛을 잡으려 버둥거리지 않는 다. 어차피... 빛 따위는 없다.
나는 조용히 떨어져 내렸다. 아래가 그 무엇도 없는 어둠일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순간 숨통이 조여 왔다. 인상이 일그러져 간다. 난 이 속에서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다. 젠장.
빛이 사방에서 뿜어져 나온다. 하지만 빛은 사람을 나약하게 만드는 것. 홀로서지 못하게 하는 것. 스스로 빛을 뿜지 못하게 하는 것. 그리고 끝없는 허상인 것.
빛은 없다.
어느 순간 숨통을 조여 오던 무형의 존재도 빛도 사라지고 또 다시 어둠만 남았다. 그 순간 내 몸이 산산히 부서져 흩어져 날아갔다.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왜 서 있어야 하는 지. 혼자 발버둥치다가 지쳐 쓰러지고 다시 발버둥쳐야 하는 지. 아무도 의미도 없었기에 사라져버리길 바랄 뿐.
빛은 없다.
나도 없다.
누군가 커튼을 열었다. 따사로운 햇빛이 창문을 넘어 방안을 비추었다. 침대에 누워 있던 한 청년은 눈살을 찌푸리며 상체를 이르켰다. 꿈이었나? 청년의 머릿속에는 한 순간 수많은 장면이 스쳐갔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커튼을 열었던 누군가가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길게 기른 청년의 푸른 머리칼이 흩날렸다.
"상쾌한 아침. 이제 일어났니?"
그 누군가. 아닌 한 여성이 말했다. 그 여성의 얼굴엔 미소가 있었다. 왠지 모르게 답답하기만한 마음이 조금은 시원해졌다. 여성은 방을 나서며 말했다.
"홍윤기. 옷갈아입고 나와. 오늘은 꽤 할 일이 만을 것 같으니까."
청년, 윤기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보라야... 넌 웃을 때가 가장 아름다워."
보라가 나간 뒤 윤기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윤기는 간편한 여행자 복장을 입고 보랏빛 망토를 걸쳤다. 방문을 열고 나섰다. 영주의 성인지 꽤 화려한 복도가 이어지고 있었다. 조금 걷자 식당이 나왔다. 기다란 식탁의 끝에는 아실가르 남작이 앉아 있고 우로 우영이. 좌로 보라가 앉아 있었다. 우영의 옆에는 아실가르 남작의 아들로 보이는 검을 찬 소년 앉아서 우영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남작은 겉으로는 미소 짓고 있지만 속이 쓰릴 것이 틀림없었다. 따지고 보면 남작과 우영은 상극이다.
"왔군."
우영은 윤기를 보며 짧게 중얼거렸다. 윤기는 보라 옆에 비어있던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들어오면서 보았던 소년 옆으로 남작의 부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여성과 딸로 보이는 소녀가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남작은 윤기를 보며 말했다.
"브리칸은 언제 수도로 가실 예정이신지?"
윤기는 무표정한 얼굴을 들어 말했다.
"자네같은 귀족이 이 땅에서 사라지는 때."
순간 윤기와 남작 사이에 차가운 기운이 흘렀다. 남작의 가족은 움찔하여 걱정스런 눈초리로 그들의 가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작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실력도 없는 주제에 꼴에 귀족 행세시군. 브리칸 시르크."
윤기는 씁쓸히 웃었다. 다들 그날의 참변을 사마의 칸의 소행으로 알고 있다. 사마의 칸이 윤기라는 걸 아는 사람은 2명, 아니 샨과 켄트, 호상을 더해 5명이 전부다. 윤기의 당부로 수도에도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였다. 우영은 남작을 향해 말했다.
"생각보다 노골적이었군. 남작. 난 오늘 중으로 떠날 예정이라네. 시르크 공작 각하께 아드님이 어떤 대접을 받았는 지 잘 보고해 올리지."
움찔.
아실가르 남작은 우영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그대로였고 무표정했다. 그 때 남작의 아들이 우영을 향해 말했다.
"전 라스피드 아실가르가 아버지의 무례에 대해 대신 사과드리오니 참으시지요. 헬던트 후작 각하."
윤기는 라스피드를 보았다. 흔들림없는 눈동자는 알 수 없는 욕망으로 가득차 있었다. 몸 안에 감추어진 마나를 가늠해 보건데 상당한 수준의 검사였다. 나이는 어려보였지만 저 정도면...
"왠만한 기사 수준이군. 흠..."
윤기는 혼자 중얼거렸다. 우영은 라스피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참으마."
남작은 순간 수치심과 분노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작위를 잃고 파직 당할 수도 있었기에 참을 뿐.
"남작님!"
그 때 마침 집사가 뛰어 들어오며 외쳤다.
"구조반이 턱없이 부족하답니다. 이대로 시간이 지연되면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죽을 수도... 부디 성의 경비대라도..."
"닥쳐! 지금 그 까짓 평민이 대수야!"
남작의 분노가 애꿋은 집사에게 떨어졌다. 우영과 보라는 인상을 찌푸렸다. 윤기가 그 때 몸을 이르키며 말했다.
"내가 가지."
윤기의 말에 집사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윤기를 데리고 식당을 빠져 나갔다. 윤기의 식사를 가져오던 하녀가 윤기의 모습을 보고 다시 돌아가는 것을 보며 보라도 일어섰다.
"저 녀석만 보내긴 너무 불안해."
보라는 짧게 중얼거리며 윤기의 발걸음을 쫓았다. 푸름시의 폐허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윤기의 속은 조금씩 타고 있었다.
햇살이 유리 파편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폐허. 이제는 어두운 여운만이 남은 그 위를 한 마법사와 정장 차림의 사내가 걷고 있었다. 그 뒤로 수수한 드레스를 입은 한 여인이 발길을 쫓고 있었다. 폐허 곳 곳에서는 구조 작업이 한창이었다. 몇 안되는 마법사들과 마주교 선생들. 심지어 학생들까지 동원하여 조난당한 사람을 찾고 또 구하고 있었다.
한 차례 폭풍과도 같은 일이 지나간 푸름시의 전경은 대강 이러했다. 정장 차림의 사내를 따라가던 마법사는 갑자기 멈춰섰다. 그 뒤를 쫓던 여인도 멈춰설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그 마법사는 망연히 중얼거렸다. 사방은 폐허였다.
"저... 윤기야."
여인은 마법사, 윤기를 나직하게 불렀다. 윤기는 그 부름에 천천히 답했다.
"나 하나 때문에... 이렇게 많은 피해가 잃어나는 구나... 결국."
"..."
여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윤기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앞서가던 정장 차림의 사내가 어느새 윤기를 보며 말했다.
"이겁니다. 나으리."
사내는 어디에서 날아왔는 지 알 수 없는 거대한 나무와 건물 잔해가 얽혀 있는 것을 가리켰다. 윤기는 흠... 하며 낮은 신음을 토했다.
"마족인지 하고 사마의 칸인지하고 한바탕 할 때 이게 날아와서 이집을 덥쳤나봐요. 그 쇼크 웨이브지. 뭔지 굉장했다던데... 아무튼 마법사 학생이 말하기를 이 밑에 사람이 있다고 하는 군요. 근데 어떻게 치울수가 있어야죠. 그래서 이렇게 제가..."
윤기는 알겠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쇼크 웨이브의 영향으로 푸름 산맥 어딘가에서 나무 한 그루라도 뽐혀서 날아온 것이겠지. 윤기는 천천히 마나를 다스려갔다.
"[눈에 담을 수 없는 것을 마음으로 담게 하라.]"
윤기 입에서 조그마한 용언이 흘러나오자 작은 식탁만한 화면이 허공에서 생성되었다. 윤기는 또 다시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정장 차림의 사내, 집사에게 물었다.
"여기 혹시 여관이었습니까?"
"그렇다고 들었습니다만..."
윤기는 뒤에 서 있는 여인에게 말했다.
"보라야 일단 저 나무부터 두동강 내어 줄래?"
"그 정도야."
보라는 천천히 에테르를 뽐아들었다. 카오스의 디바인 파워가 형성되어 흡사 검기처럼 에테르를 감쌌다. 보라는 가볍게 나무를 한 번 그었다.
스걱.
순간적으로 나무의 일부에 붉은 빛이 감도는 듯하다가 그대로 두동강나버렸다. 보라는 싱겁다는 표정으로 검을 거두었다.
"이제 내차례인가. 레비테드(1)!"
윤기의 외침에 나무는 차례로 떠올라 옆으로 치워졌다.
"처음부터 그냥 들어올리면 안되냐?"
"얽혀있어서 그냥 들어올리면 무너진단말이야. 우리가 사람 구하러 왔지. 나무 치우러 왔냐?"
윤기는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다시 한번 더 시동어를 외쳤다.
"프레임 블레스터!"
윤기의 외침과 함께 여섯 쯤되어 보이는 불기둥이 건물의 잔해를 뚫고 솟아났다. 보라는 기겁을 하며 외쳤다.
"사람 죽이러 왔냐!"
"위치 다 확인하고 쓰는 거야. 호들갑 떨지마."
윤기는 딱 잘라 말하고는 주문을 거두었다. 옆에 서 있던 집사는 놀라서 허둥지둥 막 뚫린 구멍으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그 아래는 멍한 표정을 한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갑자기 옆에서 불기둥이 막 솟아오르니 당연한 일이지만.
"이왕 나온거 제대로 구조 작업에나 뛰어들어볼까?"
윤기는 보라를 향해 말했다. 보라는 윤기의 얼굴의 작은 미소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죄책감같은 거 빨리 던져버리고 현실에 적응하라고. 그래야 더 답지.'
보라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윤기의 뒤를 쫓았다. 그 때 윤기에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윤기는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검은 색의 망토를 걸친 샨이 서 있었다. 윤기는 천천히 몸을 돌리며 말했다.
"너도 나와 있었던거냐."
"예. 저기..."
샨은 잠시 망설였다. 윤기는 샨을 향해 미소지어 보이며 조용히 다그쳤다.
"뭐냐. 말해보거라."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근데 여기는 장소가 좀."
윤기는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옆에 서 있던 보라는 윤기가 갑자기 손을 치켜들자 놀라서 외쳤다.
"뭐 하려는 거야!"
"인덕션 텔레포트(2)"
마주교의 한 관사. 거실 테이블에 세 사람이 앉아서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중 하나. 샨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마의 칸, 브리칸 시르크가 왜 모든 걸 숨겼는 지 조금 이해가 가서요."
샨은 첫마디를 이렇게 시작했다. 보라는 당황했지만 윤기는 그저 미소지을 뿐이었다.
"사실 제 본명은..."
샨은 앞에 놓여져 있는 찻잔을 집어들어 차를 한모금 입안으로 넘겼다.
"샤느트 아플론. 과거 마로드 라Ra시의 영주였던 아플론 백작이 제 할아버지십니다. 그 때 당시 젝슨 후작이 저희 영지에 찾아왔을 때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상의 끝에 저와 어머니를 몰래 탈출시켜 친분이 있던 아룬드나얀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룬드나얀에 닿았을 때는 이미 전쟁 중이었고 아무나 함부로 영지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일단 바이샤로 가기로 하고 바이샤로 향했지요. 그 때 제 나이 4살. 뭘 알았겠습니까. 피크닉 간다고 생각하고 어머니 손에 이끌려 걸음을 제촉하고 있었지요."
샨은 다시 차를 한모금 넘겼다. 이윽고 말을 이었다.
"그 때는 참 굉장했습니다. 병사들이 죽어나가는 소리와 어마어마한 쇼크 웨이브."
윤기는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아룬드냐얀 앞에서의 전투, 윤기에게는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샤드 베일루스와의 일전을 치뤘던 전투. 거대란 쇼크 웨이브와 앞으로 쏘아져 나가는 화염. 하르가이즈 플레임. 윤기는 잠시 과거를 떠올렸다. 샨은 윤기를 보며 말했다.
"그 때 퍼져나온 쇼크 웨이브에 휩쓸려 버린 저는 마나의 상태가 엉망이 되어 버렸지요. 저도... 그래서 선생님과 비슷한 상태입니다."
윤기는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원인 어떠했든 자신 때문에 평생 지울 수 없는 짐을 짊어진 사람이 앞에 있었다. 윤기는 샨을 처음보았을 때부터 마나의 균형이 깨어져 있는 것을 알았다.
"저희 어머니는 제 손에 돌아가셨죠. 저는 그 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고 어머니와 함께 바이샤로 향했었죠. 아버지와 할아버지 모두 돌아가신 걸 알고 차다리 바일론으로 도피해서 평민으로 평화롭게 살자고 생각하셨는 지 어머니는 훌쩍 프랑드 시로 향해는 배편을 잡아버리셨습니다. 길고도 긴 항해 동안이 어머니와 행복했던 마지막 기억이지요. 프랑드 시에 도착해서 여관에 묵을 때 저는 잠시 기억이 없어진 적이 있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어머니는 피투성이고 제 손에는 피가 잔뜩 묻어 있었지요. 붉은 색 마나가 손 끝에 흐르는 것을 보며 저는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윤기는 샨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널 처음 봤을 때 나랑 닮았다는 묘한 느낌에 무심결에 마나를 훝어보게 되었지. 지금 상태라면... 언제 그 흉폭한 힘이 너를 지배할지 모르겠군. 나도 비슷한 경우지. 방대한 마나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힘이라는 건... 무서운거야."
샨은 고개를 들었다. 보라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샨과 윤기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샨은 윤기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전... 선생님처럼 피하거나 무작정 숨기려 들지만은 않아요."
윤기는 순간 뜨끔하며 샨을 바라보았다. 샨은 윤기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전... 사실 저도 처음에는 선생님처럼 숨기고 몸을 사렸어요. 선생님을 만나고 생각이 달라졌어요. 항상 몸만 사리고 모든 걸 숨기는 게 바보같아 보였어요. 그래서 켄트와 호상이에게 털어놨어요. 역시 이런 건 혼자 끙끙 앓는 게 아니었요. 그 녀석들은... 졸업하면 저와 여행을 떠나자더군요. 용병일을 하다보면 상당한 정보 모일테고 제 몸에 마나 이상을 치료할 수 있을 꺼라고..."
"!"
윤기는 이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저 바닥을 응시했다.
"저는 선생님이 태양처럼 보였어요. 다른 사람을 위해 얼마든지 자신을 불사르는 영웅같은 태양. 하지만 그건 바보같은 태양일 뿐이었어요. 저는 그래서 태양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빛으로 남기로 했어요. 전 이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샨은 이제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라는 멍한 눈초리로 샨이 관사 밖으로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윤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역시... 난 바보였나보군."
"저거 혹시 니가 마법으로 과거의 살던 너를 데려다 놓은 거 아냐? 쓸만한 제자가 없으니 심심해서."
윤기는 실없는 소리에 웃음지으면서 말했다.
"닮았냐."
"판에 박았어."
윤기는 천천히 창문가로 몸을 옮겼다. 창문 밖의 하늘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저 하늘의 태양보다... 햇살처럼... 모든 이와 함께 하겠다던 나였지. 하지만 다시 태양이 되어버리는 한심한 바보이기도하고..."
"..."
"사람은 참 괴이한 동물이야. 그 괴이한 동물은 연결하고 있는 인연의 고리 또한 괴이하지... 사람은 참 특이한 생물이야."
윤기는 돌아서며 말했다.
"앞으로는 나도 그저 평범한 '빛'으로 사라야겠군."
"두가닥 '빛'은 평범하면서 특별한 빛이 되겠지."
보라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빛은... 없다.
태양도... 없다.
다만 우리 자신이라는 어둠 속에 존재하는 특이한 빛이 존재할 뿐.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는 보이니까.
빛은... 없다.
빛은... 또한 존재한다.
[용어 풀이]
(1)레비테드
3클레스의 부유마법으로 사실 뛰어난 실력이 아니면 주문 없이 쓰기는 힘든 마법. 자기 자신이 아닌 특정 물체를 부유 시키는 마법이다. 자기 자신을 띄워 비행하는 마법은 레비테이션. 일부에서는 둘은 같이 분류하여 비행&부유마법으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으나 본 소설에는 약간 성질이 다른 것으로 분류하였다. 이 것은 마나 운용의 차이로 자세한 설명은 복잡하다.
(2)인덕션 텔레포트
왠만한 도시와 도시 사이는 가볍게 이동하는 고급 13클레스 이동마법. 윤기 수준에서는 대륙의 절반을 좀 무리하면 이동할 수 있다. 다른 이동 마법에 비해 정확성이나 안정성이 높기 때문에 단거리나 중거리. 장거리 모두 폭 넓게 이용된다.
『적赤의 그림자』
비가 잘 없는 신미 대륙의 겨울.
그러나 새하얀 달이 더욱 하얗게 물들어 갈 즈음이면 거센 눈보라가 신미 대륙 전체에 드리운다. 그 눈보라가 한차례 지나가고 나면 새하얀 달은 점점 붉어져 가며 봄을 맞이한다.
순백의 세레네즈에는 비가 내린다. 눈보라가 휘몰아쳐야 할 시기에 비가 내린다. 빛방울은 검은 빛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혀를 내두르며 집안에 틀어 박힌 체 누구도 나오려 하지 않고 있었다. 검은 먹구름에 의해 낮에도 어둠이 내렸으며 사람들은 신의 분노라 부르짓었다. 궁성 세실리드 못지 않은 위용을 자랑하는 카오스의 대신전에서는 황실의 요청에 의해 쉬지 않고 기도 중이었다.
역사는 바야흐로 대혼란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아름답군. 저 검은 빗줄기... 후후후."
사람의 흔적이라곤 남아 있지 않은 어느 귀족가.
그 곳에 창가에 잠시 그림자 하나가 드리웠다. 그는 스산한 밖의 풍경을 감상하며 기분 나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역시 네 놈들 솜씨인가?"
그림자의 주인공은 몸을 돌렸다. 평범한 응접실 한 가운데 한 남자가 서서 차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림자는 커튼이 드리운 어둠에서 빠져 나오며 말했다.
"카르테우스의 가호와 축복이라네."
그의 용모는 엘프와 필적할만한 것이었다. 후드가 달려 있지않은 검은 로브를 입고 있었는 데 붉은 색의 실로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검붉은 머리에 보랏빛 눈동자. 왠지 음산한 분위기를 연출해내는 남자였다.
"과연... 아이젠. 카르테우스의 가호라는 것은 참으로 대단하군. 민심이 동요하고 있어. 하 하 하."
그의 웃음은 방안 전체를 메웠다. 키가 작은 편이었고 허리에 검을 차고 있는 그저 평범한 전형적인 귀족으로 보였다. 그의 속에 가득찬 욕망을 제외하자면.
"엘런드가 크리스찬 후작. 자네가 좀더 카르테우스 님의 대한 신앙을 더한다면 저런 비를 바일론 제국 전체에 뿌려주는 건 일도 아니라네. 물론 위대하신 카르테우스께서 모든 힘을 되찾으셨을 때 이야기네만. 무슨 소리인지 알겠는 가?"
아이젠은 후작을 응시하며 말했다. 크리스찬 후작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이번에 내가 할 일은 뭔가?"
"간단하네. 세인트 스태프, 파이러너를 찾아주면 되네."
"!"
후작은 순간적으로 입을 떡 벌렸다. 세인트 스태프, 파이러너. 그 물건이라면...
"설마 세라인 노르틴 여왕의 스태프를 말하는 건가? 이보게 아이젠. 난 지금 정치적인 이유로 도피 중이네. 실종된 걸로 처리되 있어서 함부로 나설 수 없단 말이네. 특히나 파이러너라면 마로드 황가에서 보관하고 있을 텐데..."
"훗..."
아이젠은 후작의 말에 순간 실소를 터트렸다. 후작은 기분 나쁜 표정으로 아이젠을 노려보았고 아이젠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라인 노르틴, 그녀라면 함부로 파이러너라는 물건을 후대에 남기지 않아. 마로드 황가에 있다는 파이러너는 껍대기일 뿐이지. 실질적인 힘은 아마 다른 것에 옮겨졌을 거야. 그 다른 것은 수정구일지도 모르고 스태프이거나 그저 다순한 로드나 오브일지도 몰라. 어쩌면 검일지도 모르고. 가장 중요한 건 그 물건이 가진 힘. 그리고 그 힘이 가둬둔 어떤 것이 카르테우스 님께서 힘을 찾는 데 꼭 필요한 것이라는 것이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더 찾기가 힘들어지지 않나?"
아이젠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후작은 그 의미 모를 미소를 보며 말했다.
"단서는 자네가 가지고 있군."
"도구는 자네 손에 있지."
아이젠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자신이 서 있던 곳에서 조금 떠어진 곳에 위치한 창을 향해 말했다.
"적赤의 그림자. 렛. 어서 나오시지요. 등장하실 대목이군요."
아이젠의 말과 동시에 잠시 창 옆의 커튼이 흔들리는 듯했다가 아이젠의 목 앞에 소검이 놓였다. 그 곳에는 소검을 든 붉은 머리결의 청년이 서 있었다. 아이젠의 머리칼이 피빛이라면 청년, 렛의 머리칼은 불타는 불꽃에 가까웠다. 렛은 아이젠을 노려보며 말했다.
"꽤 예리하군. 난 날 도구 취급하는 놈들은 못 참아."
"훗. 마족 앞에서 인간 주제에 오만하군. 좋아. 거래자라고 해두지."
렛은 그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검을 거두었다. 렛은 전체적으로 검은 색 옷을 입고 있었다. 가벼운 여행자 복장이었다. 보통의 암살자들이 택하는 몸에 꽉 끼이는 옷에 비해 조금은 단순하면서도 전문적(?) 이지 못한 복장이었다.
"사마死魔의 칸이란 이름을 들어봤는 가?"
아이젠은 렛을 향해 말했다. 묵묵답답. 그 때 후작이 나서면서 렛을 대신해 말을 받았다.
"마족을 헤치우고 다니며 어줍지 않은 영웅신화를 만드다는 그 놈 말인가?"
"어줍지 않은 이라는 말은 자네 수준을 생각해서 맞지 않는 표현이네. 그는 강하니까. 그런데 얼마전 마장 카드라에게서 재미있는 정보가 들어왔네. 마장 말라스와 그의 아들 제라드에 대한 보복으로 사마의 칸에게 달려들었다가 패했다는 군. 그런 때 흥미롭게도 파이러너의 반응을 느꼈다는 것이야. 흥미롭지 않은 가? 내 목적은 이거야. 렛 자네가 사마의 칸을 처리하고 그에게서 파이러너로 보이는 아티펙트 혹은 수정구나 스태프 같은 마법구를 가져와주게. 마법사니 아공간에 보관할 수도 있어. 그러니 일단 이걸 빌려주지."
아이젠은 렛을 향해 조그만 막대기를 던졌다. 30cm정도의 작그마한 막대기였다.
"내가 만든 마나 스틱(1)이라네. 사용횟수는 10번. 대상의 아공간을 파괴하고 그 속의 물건을 이 현세계로 가져오게 하지. 그대가 지닌 공간을 열라. 라고 외치면 될 걸세."
렛은 마나 스틱을 받아들고 아이젠을 향해 말했다.
"난 거래자의 정체는 꼭 챙겨두는 편이지. 이름은?"
"마장 서열1위 아이젠 카르타고. 마신기 신검 차르카의 주인이다."
아이젠은 그렇게 말하고 공간에 녹아들어가듯 사라졌다. 렛은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위화감에 중얼거렸다.
"아이젠..."
[용어 풀이]
(1)마나 스틱
특정 마법을 실어 만든 막대기. 스크롤과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스크롤이 담을 수 있는 마법이 제안되는 것과 달리 마나 스틱은 그 스틱의 제질이나 만든 마법사의 소양에 따라서 담아내는 마법의 위력이나 수준이 차이난다. 사용횟수가 다하면 스스로 소멸하거나 그냥 막대기로 돌아간다. 일부는 충전해서 사용 가능하기도 하고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도 가능하다. 이 마나 스틱을 담은 물건이 아티펙트(마법적 능력이 담긴 물건)가 된다. 물론 물건 자체에 마나 스틱의 원리를 이용해서 마법을 담을 수도 있으나 매우 힘들 일이라 마나 스틱을 담는 것이 대중화 된 편이다. 이 마나 스틱은 10클레스 이상의 마법사가 아니면 만들 수 없는 물건이라 매우 귀하다.
푸름 산맥의 새벽.
한 그림자가 빠르게 스쳐지나 갔다. 수 많은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 깊은 곳이라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목은 아닌 듯 했지만 그 그림자는 능숙하게 숲을 헤쳐지나갔다. 나무들 사이로 비춰오는 햇살에 그 사내의 모습이 들어났다. 중년의 한 사내는 등에는 제법 큰 컴보짓 보우(1)를 메고 손에는 보우건(2)이 들고서 산길을 능숙하게 달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시야에는 산돼지 한마리가 머물러 있었다. 산돼지가 순간 몸을 틀어 도주 방향을 바꾸는 순간 중년의 사내의 눈이 번뜩였다.
피융.
보우건을 벗어난 퀴렐(3) 하나가 정확하게 산돼지의 목을 관통하고 나무에 박혔다. 사내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자축의 의미로 크게 소리쳤다.
"으하하! 역시 나는 푸름산맥의 레인저! 드레이크 가브리엘이다! 으하하! 백작이란 작위 따위는 역시 너무 거추장스럽단 말이야! 으하하!"
그 사내, 드레이크 가브리엘은 통쾌하게 너털웃음을 지으며 허리 춤에서 롱소드를 뽐아들어 산돼지를 적당히 손질하였다. 드레이크는 자신의 솜씨에 상단한 자부심(?)을 느끼며 롱소드를 거두었다.
"모닥불을 만들어 볼까나..."
드레이크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잠시 보우건을 내려놓고는 등에 있던 컴보짓 보우를 손에 쥐었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대충 끌어모은 나뭇가지를 바라보던 드레이크는 천천히 시위를 튕기며 중얼거렸다.
"파이어 애로우(4)"
팟...
화살없이 허공에서 생겨난 매직 애로우 한가닥이 화염을 이르키며 나뭇가지들에 불을 지폈다. 드레이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 컴보짓 보우를 등에 메었다. 그리고는 산돼지 고기 덩어리에 퀴렐를 박아 불 속에 던져 넣었다. 힘자랑 하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당연히 나중에 먹기 편하자고 하는 짓이었다.
"하... 진우 녀석은 잘먹고 잘사려나? 이몸은 이렇게 총각으로 늙어버렸는 데. 그 망할 놈은 치사하게 장가가서 아들 낳고 잘먹고 잘살고 있다 이거지. 내 이번에 가서 빌붙어서 속을 박박 긁어주마!"
드레이크는 혼자 중얼거리다가 퀴렐의 깃부분을 잡고 고기덩어리를 들어 한입 물었다.
우물우물...
샤샤샥...
"!"
드레이크는 순간 나뭇가지에 옷깃이 스치는 미세한 소리를 들었다. 자신의 뒤. 드레이크는 고깃 덩어리를 이빨로 물어 한 입 뜯어 먹고는 불 속에 다시 던져넣었다. 보우건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며 외쳤다.
"이봐! 불청객! 이만 나오시지!"
드레이크의 외침과 동시에 다시 한번 옷깃이 스치는 미세한 소리가 울려퍼짐과 동시에 드레이크는 눈 앞에서 짧은 섬광이 이는 것을 보았다.
"첫인사치고는 과하군."
드레이크는 어느새 반대편 숲으로 사라진 그림자를 향해 말했다. 그의 손가락은 이미 보우건의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피슝.
퀴렐은 나무와 나무 사이의 미묘한 사각을 파고 들었다. 순간 퀴렐이 살을 헤집는 미세한 소리가 드레이크 귓가에 들려왔다. 그러나 드레이크가 잠시 방심하는 사이 다시 한번 드레이크의 눈 앞에 섬광이 일었다. 드레이크가 겨우 시야를 확보했을 때는 이미 손에 든 보우건이 박살 나고 왼손에는 상처마저 나 있었다.
"좋아... 제법 실력있는 놈인데. 이 포스 마스터(5)이자 레인저 마스터(6)이신 드레이크 가브리엘 백작님께서 친히 애궁愛弓 캐리어 혼(7)을 사용해 주시겠다."
드레이크는 자신만만하게 외치며 등에 메어져 있던 컴보짓 보우, 캐리어 혼을 빼어 들었다. 그림자는 그제서야 모습을 들어내며 말했다.
"하 하 하. 본인은 귀하의 목숨을 거두어가고 모닥불과 식사를 취하려 했던 과객이오."
검은 색 여행자 목장에 소검 하나를 빼어든 그는 타는 듯한 붉은 머리칼의 소유자였다. 드레이크는 천천히 인상을 찌푸리며 외쳤다.
"암살자로군. 그럼 자신의 목표인 목숨만 취하면 되지 않는 가?"
"내 이름은 적의 그림자, 렛. 사실 식사 한끼 얻어 먹고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자세히 보니 내 목표였거든. 거기다가 자신 스스로 내 목표임을 말해 주는 데 물러설 이유는 더더욱 없지."
"쳇... 크리스찬 후작의 졸개인가?"
드레이크는 활 시위를 튕겼다. 순간 한차례의 바람이 일며 일대의 나무를 쓰러넘어 뜨렸다. 하지만 렛은 그 바람에 휩쓸리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 바람이 지나가고 나자 렛은 비웃듯이 외쳤다.
"과연 캐리어 혼. 푸름 산맥에 잠든 4대 비보 중 하나로군요. 소문만큼이나 대단한 물건이군요."
"그 말은 내 실력은 무시한 것이렸다."
드레이크는 캐리어 혼을 등에 다시 메며 외쳤다. 렛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예의 차가운 미소만을 지어보였다. 드레이크도 더 이상 말을 달지 않고 롱소드를 빼어들어 렛에게 달려 들었다.
챙.
소검과 롱소드가 한차례 맞붙이 치면서 소음을 낳았다. 순간 이상한 공명이 주위에 일면서 렛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드레이크는 헛점을 놓치지 않고 검을 밀어넣었으나 확실히 궁사가 검을 다룬 다는 것에는 한계라는 것이 있는 법. 렛은 가볍게 그 검을 피하며 외쳤다.
"안타깝게도 당신을 죽이는 건 미뤄드려야 겠군요. 다른 일이 급해서... 이만."
렛은 유유히 나무와 나무 사이를 지나 드레이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드레이크는 이미 꺼져버린 모닥불 앞에 주저 앉으며 중얼거렸다.
"젠장 고기가 식었군."
드레이크는 검을 거두고 차가운 고기를 베어 물며 중얼거렸다.
"어디서 본 듯한데..."
[용어 풀이]
(1)컴포짓 보우
국궁의 일종이다. 약 70~80센티미터에 달하는 길이에 유연하게 휘어 있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다. 또한 빠른 스피드에 강력한 파워를 겸비하고 있다. 그래서 물체에 관통 또한 엄청난 확율로 터진다. 그렇기에 궁사들 사이에서는 애용된다. 그렇지만 포스 마스터들은 룬보우를 더 애용하는 편이다.
(2)보우건
크로스 보우에서 한단계 발전한 형태이다. 시위를 당겨 쏘는 크로스 보우와 달리 방아쇠를 가지고 있으며 일일히 퀴렐을 거는 수고를 하지 않도록 카트리지라는 일종의 탄창을 보유하고 있다. 카트리지 한개당 퀴렐의 적재 수량은 10~20사이로 보통 13개짜리가 통용된다. 그러나 레인저들은 특별히 최대 수량인 20개 짜리 카트리지를 쓰는 데 이 카트리지는 대부분 국가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가격은 보톡 100소르에 근접하다.
*크로스 보우와 보우건에 관하여
보통 일반적으로 크로스 보우와 보우건을 하나로 보는 경우가 많으며 대상은 보통 보우건으로 본다. 위에서 설명한 보우건과 달리 크로스 보우는 단지 일반 활을 눕혀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 다. 단지 발사시 정확성과 힘, 그리고 사거리를 놉히기 위해 개량된 활인 것이다. 그래서 크로스 보우에는 퀴렐보다 일반 화살이 사용되는 경우가 더 흔하다. 반면 보우건은 사거리나 파괴력 힘면에서 크로스 보우보다 조금 못한 면을 보이지만 화살을 일일이 거는 수고를 덜 수 있고 방아쇠를 당기 때문에 유사시 한 손 만으로도 발사가 가능하다. 또한 리비팅 보우건은 흔치 않은 물건이긴 하지만 연사가 가능하다. 이렇게 보우건이 크로스 보우에 비해 여러면에서 용이하기 때문에 크로스 보우라는 개념이 묻히고 크로스 보우 역시 보우건과 같은 개념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용이하지 못한 탓이 사장되어 버린 크로스 보우는 보우건이 포스 마스터의 마나를 담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가끔 포스 마스터들이 사용하기도 한다.
(3)퀴렐
일반 화살보다 짧고 대가 조금 굵으며 촉이 공기 저항을 무시하고 파괴력 이주로 제작된 보우건 전용 화살이다. 대부분의 카트리지가 퀴렐에 맞춰 제작된 탓에 화살을 사용하는 궁사들은 직접 걸어서 보우건을 발사한다. 퀴렐이라는 물건이 귀하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화살을 사용하지 않는 편이지만. 퀴렐의 촉이 공기 저항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은 보우건의 사거리가 본디 일반 활의 두배는 넘기 때문이다. 다만 정확성이 떨어진다고 할까. 그래서 퀴렐은 파괴력을 높이고 공기저항을 무시하면서 화살이 조금 묵직하게 날아가게 끔 만든 것이다. 그만큼 정확성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것이 화살을 사용하지 않고 퀴렐을 사용하게 된 두번째 이유이다. 물론 카트리지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크게 작용하지만.
(4)파이어 애로우
마법에서 볼 수 있는 파이어 애로우와는 성격이 다르다. 순수한 마나로 쏘아지는 매직 애로우의 마나 속성을 화염으로 바꾼 것이 파이어 애로우라면 마법은 대기 중의 불의 원소를 끌어모아 화살의 형태를 이루게 한 것이다. 마나가 작용했지만 원리는 다르다. 이것은 마법사와 포스 마스터의 차이이기도 하다.
(5)포스 마스터
소드 마스터가 있다면 궁술에도 포스 마스터라는 것이 존재한다. 물론 본인의 소설에서만. 마나를 다루어 대기의 원소를 읽고 그 원소를 화살에 담아 쏘아내거나 그 원소 하여금 화살을 만들게 하여 쏘아낸다. 마나보다는 정신력을 더욱 우선시하기 때문에 포스 마스터의 첫째 조건은 정신 수양이다. 현제는 소드 마스터에 밀려 숫자 점점 줄어드는 추세이다. 해병이나 레인저가 아니라면 되기 꺼려하는 존재이다. 소드 마스터가 되서 검기를 날릴 수 있으면 된다는 사고가 굳어져서라고 할 수 있겠다.
(6)레인저 마스터
신미 대륙 북서쪽에서 북동쪽, 금단의 구역 파라그레이드와 경계까지 이르는 푸름 산맥이 국경을 낀 대륙 유일의 산맥이다. 이에 마로드와 바일론 양측 모두 방어를 위해 레인저를 양성하게 되었고 그 결과에 따라 책임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본디 자유로운 성격의 레이저들을 계급에 묶어둘 수 없어 실력이 가장 뛰어난 자를 마스터로 임명해서 총괄하게 이르렀고 이래서 레인저 마스터라는 칭호가 생겨났다. 반면 군사 위계 질서가 뚜렷한 마로드에서는 레인저에게도 계급이 붙어서 별수 없이 레인저 마스터라는 존재는 하나이게 되었다. 현제 대륙 최고의 포스 마스터라는 바일론의 안드레이 크리스티앙 공작도 레인저 마스터 출신이다.
(7)캐리어 혼
푸름 산맥 4대 비보 중 하나. 그 옛날 푸름 산맥을 뛰어다니며 용들에 대항했으며 바일론의 건국자 칼브란과는 절친한 친우였다는 알카르노의 비보이다. 그의 4가지 비보 중 그가 수많은 드레곤 죽이며 얻은 용의 뼈와 가죽과 힘줄로 이어진 캐리어 혼이 으뜸이며 나머지 3가지는 행방이 묘연해진 두자루의 검 소검 카르자. 롱소드 카리온(이 두검으로 알카르노는 이검류를 구사했다 한다.). 마지막으로 현제 안드레이가 소장 중인 비수 카지트이다. 본디 카르자와 카리온, 카지트는 바람의 검이라 하는 무구였으나 시간이 흐르며 이처럼 흩어져 버렸다. 이 무구는 모두 모였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한다. 캐리어 혼은 그들 셋에 비해 독자적인 힘을 지녔는 데 시위를 튕기는 것 만으로 바람을 이르키는 것은 수많은 능력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 다.
푸름시의 길드탑.
한 탁자를 중심 네 명의 인영이 앉아 있었다. 푸른 색 머리를 길게 길러 한가닥을 묶은 체 보랏빛 망토를 두른 청년과 검은 색 아무런 문양 없는 두루마기를 걸친 검은 머리칼의 청년이 앉아 있었다. 반대편에는 갈색 머리를 길게 기른 한 여성인 깔끔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옆의 붉은 머리칼의 여성은 드레스 복장이었다.
"크리스찬 후작은 강등당하지 않았나? 그런데 아직도 후작이라 불리다니?"
푸른 머리의 청년은 검은 머리의 청년을 향해 물었다.
"알프레드 크리스찬이라면 이미 백작으로 강등 당해서 지난 8년간 자택에서 은거 중이지. 우리가 말하는 크리스찬 후작은 3년전인가? 갑자기 등장해서 단숨에 후작이 된 앨런드가 크리스찬 후작이야. 붉은 고원에서 등장한 다량의 마물을 제거한 마법사로서 수많은 젊은 순백의 위저드의 지지를 얻고 있지. 하... 홍윤기! 네가 수도 있었으면 마법사 세력이 넘어가진 않았잖아."
푸른 머리의 청년, 윤기는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그게 왜 내탓이냐! 최우영."
검은 머리칼의 청년, 우영은 윤기를 보며 간곡히 말했다.
"그러니까 수도로 돌아가!"
"싫어."
우영은 떫은 표정을 지으며 한숨지었다. 붉은 머리칼의 여성은 옆의 갈색 머리칼의 여성을 보며 물었다.
"저 둘... 원래 저랬니? 하... 대륙전쟁의 영웅의 환상이 깨진다. 그런 의미에서 그 영웅들 중 한 분이신 로니아 여백작 님. 당신도 그렇게 영웅적이지는 않죠?"
로니아 여백작, 보라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뭐... 리아 언니. 리세프론 백작님은 언제까지 있다가 오라고 하셨어요?"
"저 녀석 수도로 갈때까지."
윤기는 붉은 머리칼의 여성, 네프리아의 따가운 시선에 얼굴이 굳었다. 우영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이었다.
"현제 수도 상태는 꽤 안 좋아. 크리스찬 후작이라는 작자. 머리통 굴릴 줄 모르는 알프레드 크리스찬하고는 달라서 꽤 머리쓰고 있어. 크리스찬 후작이 실종된 것이 벌써 한달. 후... 그러니까 보라가 윤기를 너를 찾아 푸름시로 오던 그 때 쯤이군. 그를 지지하던 일부 젊은 순백의 위저드들과 귀족원(1) 일파. 칼라이스(2)는 여전히 알프레드 크리스찬 백작이 이끌고 있는 데 친척이라고 앨런드가 크리스찬 후작 편을 들고 나섰지. 거기다가 지금 이스탈 회의(3)도 분열되어 크리스찬 후작에게 빌붙는 놈들이 생겼지. 시르크 공작 각하는 병환을 핑계로 회피하셨고, 귀족원의 수뇌이신 크리스티앙 대공께서는 이미 3년 째 병상에 누워계시니... 이현진이라는 놈이 공작이나 되어가지고 좀 있으면 될 것 가지고... 제길. 아무튼 지금 수도 사정이 매우 안 좋아. 체이필드 공작가(4)가 움직이고 있거든. 크리스티앙 대공이 움직이지 않자 체이필드 공작이 귀족원을 움켜쥐고 있어. 거기다가 크리스찬 후작이라는 녀석 배후에는 마족이 있다는 정보도 있고..."
윤기는 우영의 말을 들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우영은 완전히 굳어버린 윤기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윤기는 스크롤 두개를 꺼냈다. 그러고는 우영을 향해 말했다.
"아직 남은, 아주 강력한 단체가 있지."
윤기는 왠지 모를 미소를 지었다.
"순백의 위저드 장로원과 마로드 귀족들, 그리고 마로드 여왕, 엘레나 드 실로테 노르틴."
윤기의 말에 우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미심쩍어 반문했다.
"박혜진이나 화민이나 수민이는 그렇다쳐도 순백의 위저드 장로원은... 크리스찬 후작이 이미 수중에 넣을 지도 모르는 데?"
"잔말 말고 일단 수도로 내일 떠날꺼지? 그럼 일단 이 스크롤 순백의 위저드 마스터에게 전해."
윤기는 그렇게 말하고는 품에서 반지 하나를 꺼내어 손가락에 꼈다. 그 반지는 투박해 보였지만 녹색의 정교한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이 애사롭지 않았다. 윤기는 반지를 스크롤에 가져갔다. 그러자 반지로 부터 흘러나온 녹색 빛이 스크롤에 스며 들면서 반지에 있던 문양와 같은 특이한 문양이 스크롤 겉에 생겨났다.
"이 스크롤은 이제 순백의 위저드 7장로(5)와 마스터가 아니면 열 수 없어. 안에는 마법으로 음성 기록을 해 뒀으니 안정성도 확실하지. 최우영. 네가 책임지고 전해."
윤기의 말에 우영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스크롤을 받았다. 윤기는 다른 스크롤 한장에 봉인 주문을 걸고 보라에게 넘겼다.
"너도 우영이랑 같이 떠나도록해. 이건 아버지께 전해줘. 아버지면 충분이 봉인을 푸실꺼야. 난... 몇가지 사소한 문제를 처리하고 가마."
윤기는 두개의 스크롤을 넘기고는 미소지었다.
"결론은 이 것 때문에 보자고 한거야?"
보라는 황당한 표정으로 윤기를 바라보았다.
"뭐... 한가지 이야기 해 줄 것도 있고. 이 반지가 말해 주듯. 난 전혀 무능하게 살지는 않았어. 현제 직책은 순백의 위저드 바람의 장로. 제6장로야."
윤기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황당함에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거룩한 망나니라는 칭호가 따라다닐 정도로 윤기는 귀족이라는 작위를 무시하고 여기저기 떠돌았다. 덕분에 귀족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딱히 작위나 정치적인 위치가 없었다. 그런데... 바람의 장로라고 하니 입을 벌릴 밖에.
"야! 그러면서 어떻게! 젠장... 너희 아버지가 정치적인 수 많은 공격을 받고 있을 때 너 뭐한거야!"
우영은 소리를 높였다. 보라도 한 몫거들었다.
"이놈! 너 오늘 살 생각하지마! 그러면서 어떻게 젠장! 죽었어!"
보라는 이제 아예 에테르까지 뽐아들었다. 네프리아는 실드를 펼치고 카오스와 파이란을 부르고 있는 윤기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덥벼드는 두 괴물(?)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
작지고 미세한 파동이 주위에서 일었다. 네프리아는 흠칫 인상을 찌푸렸지만 주위의 상황이 전혀 고요하지 못해 더 이상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렇게 시끄러운 하루가 지나가는 듯 했다.
[용어 풀이]
(1)귀족원
정통파 귀족들과 정계에서 물러난 계승권 밖에 황실 원로들로 이루어진 귀족들의 연합체. 그러나 현제 이르러서는 바일론 3대 권력단체에 하나로 전락했다. 신흥 귀족과 무인 출신들의 압력으로 귀족원은 더 이상 귀족의 연합체 노릇을 하기 힘들었고 그래서 변화를 격다보니 현제 이르러 권력 단체의 하나가 되었다. 최근에는 안드레이 크리스티앙 대공이 그 총수가 되어 귀족들의 단결을 도모하였으나 크리스티앙 대공이 병상에 누운 직후로부터 분열 현상이 심하게 일어나고 있다.
(2)칼라이스
바일론 기사단 총연합이라고 보면된다. 그 옛날 바일론 제국을 세운 칼브란 바일로너(현대에 이르러 칼브란 체이필드 바일로너라 높여 부른다)의 애검 칼라이스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현제는 알프레드 크리스찬 백작이 기사단 연합의 총수를 맡고 있다. 과거 8년전 대륙 전쟁에서 마로드의 젝슨 후작과 내통한 협의를 받아 크리스찬 후작에서 백작으로 강등당한 이후 그 힘이 약해져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크리스찬 백작의 친척인 앨런드가 크리스찬 후작에 의해 다시금 3대 권력체로서의 힘을 발휘하려하고 있다. 그러나 칼라이스는 바일론 모든 기사들의 정신적 지주인 브라인 레비던트 전前 백작의 영향력도 커 일부 세력은 파일론 레비던트 후작(광채)의 손안에 있다.
(3)이스탈 회의
신흥 귀족들이 귀족원에 대항하고자 만든 의결 단체. 회의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사이칸트 시르크 공작 하에 움직이는 권력 단체다. 8년전 대륙 전쟁의 공으로 막강한 힘을 자랑하던 이스탈 회의는 근래에 이르러 앨런드가 크리스찬 후작에게 밀리고 있으며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 분열이 심각하다. 일각에서는 이스탈 회의를 국왕의 지원하에 만들어진 단체라고도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일각에서는 국왕을 견제하고 신흥 귀족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도 하니 양면성을 지닌 단체라 하겠다. 현제 의장은 시르크 공작이며 이들의 회의 결과가 실제로 국가 정세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4)체이필드 공작가
바일론의 시조, 칼브란 바일로너의 본래 성씨는 체이필드이다. 나라를 건국하면서 바일로너로 창씨개명한 것인데 바일론에서는 칼브란의 직계 자손이 황실 뿐만아니라 칼브란의 형으로부터 이어진 체이필드 가문에도 황실에 버금가는 대우가 주어졌다. 체이필드 가는 공작가문이면서도 한 번도 정계에 나서지 않고 황실의 일원으로서 자리를 굳혀왔었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 귀족원에 발을 들려놓고 정계로 진출하려는 이가 생겨나고 있다. 실제 체이필드 가문은 황실보다 그 규모나 인원은 많은 편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계승권도 작위를 받을 수 있는 권한조차도 없다. 다만 가주가 공작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현제 가주는 엔드류 체이필드 공작이다.
(5)순백의 위저드 7장로
순백의 위저드는 50여개에 이르는 정규 연대와 수백을 넘어서는 길드, 더 나아가 수만 수천의 용병 길드와도 네트워크 망을 가지고 있는 엄청난 마법사 길드이다. 대륙에서는 순백의 위저드를 제외한 다른 마법사 길드가 사라진지 오래이며 그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도 대단하다. 순백의 위저드는 전 대륙에 걸쳐 있는 도시들 각각 한 곳 마다 소장로라는 직책의 마법사를 배치하여 그 곳의 길드나 정보를 통솔하도록 하고 있다. 그 소장로들을 총괄하는 대장로가 나라마다 한 명씩 있으며 그들은 수도에 머문다. 그 위의 서열이 바로 7장로이다. 서열1위를 빛의 장로, 서열2위를 어둠의 장로, 서열3위를 무無의 장로, 서열4위를 물의 장로, 서열5위를 불의 장로, 서열6위를 바람의 장로, 서열 7위를 대지의 장로라 한다. 이들 일곱의 장로와 대장로 둘, 그리고 모든 길드를 총괄하는 마스터, 이 열사람이 모이는 것을 두고 십장로 대회의라한다. 특히 7장로는 보통 연륜이나 나이를 염두에 두고 서열을 나누는 다른 직책과 달리 순수한 실력으로 뽐히며 어느 특정한 것에 묶이지 않고 마스터의 직접적인 말에만 움직인다. 마스터가 없는 경우 7장로는 서열에 상관없이 마스터와 맞먹는 권한을 가지며 한 나라의 국왕이라도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다
푸름시의 마주교의 관사.
훌쩍 담을 넘는 존재가 있었다. 그는 익숙한 솜씨로 창문을 열고 한 집안으로 들이닥쳤다. 거실에는 한 중년의 사내가 차를 마시며 미소 짓고 있었다. 담을 넘은 존재(=도둑?)는 허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하네. 도둑 흉내내기."
"쳇. 남의 신성한(?) 취미 생활을 모독하지 마라. 이진우."
쇼파에 몸을 묻고 있던 중년의 사내는 천천히 찻잔을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도둑질을 신성한 취미(?)라고 주장하는 사내에게 다가갔다.
퍽.
시원한 주먹 한방이 괴팍한 사내의 복부를 쳤다.
"이건 도둑님에게 내려진 하늘의 응징..."
이윽고 중년의 사내 진우는 팔꿈치를 들어 배를 움켜지고 몸을 숙인 사내의 등을 내리 찍었다.
"이건 오랜만에 보는 친우에 대한 인사다."
"커억..."
괴팍하고 특이한 도둑질을 신성한 취미(?)로 여기는 한 사내는 신음을 내뱉으며 그대로 거실 바닥에 주저 앉았다. 진우는 씩 웃으며 그 사내를 내려다 보았다. 사내는 퉁명스럽게 외쳤다.
"8년만의 인사치고는 과격해."
"뭐... 이게 내 방식이지."
사내는 진우를 멀뚱히 보며 중얼거렸다.
"예전에는 이렇게 말했지. '난 미소로 인사한다.' 젠장할."
"뭐라고?"
사내는 애써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다. 아무것도."
사내의 미소는 꽤 괴이한 것이었는 데 일그러진 얼굴이 미소 짓는 아주 추악한 표정을 상상해보라. 진우는 다시 찻잔을 들어 그 사내를 향해 말했다.
"그래. 드레이크 가브리엘 백작 나으리. 왜 행차하셨는 지."
"아. 백작같은 거 때려치웠어."
괴팍함의 극치를 보여 주는 두 사람, 드레이크와 진우는 씩 웃으며 서로를 마주봤다.
"그러면 레인저들한테나 가보지 여기는 어쩐일이냐?"
"하 하 하. 친구는 총각으로 늙었는 데... 배신하고 결혼 놈 얼마나 잘먹고 잘 사는 지 보려고..."
"한대 더 맞을 래?"
드레이크는 웃으며 고개 저었다. 속으로
'마법사가 무식하게 힘센 이유를 누구 아는 사람 없습니까?'
드레이크는 인상을 순간적으로 굳히고 진우를 향해 물었다.
"사마의 칸이라는 작자가 너냐?"
"응?"
"오다가 적의 그림자, 렛이라는 꽤 유명한 암살자를 만났거든. 소문에 의하면 대륙 최강의 암살자라던데... 재수없게도 크리스찬 후작 나부랭이가 의뢰해서 그녀석 명단에 나도 실려 있더군. 그래서 한판 신나게 붙었는 데 갑자기 바람의 정령의 공명이 울리더군."
"메세지라도 전달되었는 가?"
"그래... 내용은 '사마의 칸은 아직 푸름시에 있는 것이 확실하지만 언제 떠날지 모르니 행동을 빨리 하라였지.' 사마의 칸이라면 수도에도 소문이 자자한 마족을 쓸어버린 대마법사 내지는 마도사가 아닌가. 푸름시에 그만한 실력이라면 자내 밖에 없으니 이렇게 급하게 찾아왔지. 쳇. 그녀석 메세지를 받더니 빨리도 사라지더군. 난 안중에도 없고. 그러고 보니 자네 목숨 값이 나보다 많이 나가나... 제길."
진우는 인상을 구겼다. 그리고 차분하게 물었다.
"그 녀석이랑 마주친게 언젠가?"
"어제 저녁 무렵. 그녀석의 속도라면 어제 자정 쯤이면 도착했을 테고 푸름시에 박아놓은 정보원하고도 이미 교섭이 끝났으니 사마의 칸이 누구든 정체를 알아내고 움직이는 데는 충분하지. 음... 그럼 지금 이자리에 있을 수도 있겠군."
"난 사마의 칸이 아니야."
"엉?"
"사마의 칸의 본명은 브리칸 시르크. 윤기 녀석이다."
드레이크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진우를 향해 따지듯 외쳤다.
"그 녀석은 보고에 의하면 고작 11클레스 쯤 밖에!"
"4급 마스터 5급 익스퍼트. 물론 용언 마법."
"마,말도 안돼!"
진우는 드레이크가 소란을 피우는 것을 즐기며 말했다.
"말돼. 그나저나 암살자 녀석 꽤 불쌍하군. 살아서 돌아가기 힘들겠어."
진우는 창문가로 가서 길드탑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드레이크는 진우를 보며 물었다.
"그럼 윤기 녀석이 여기 있나?"
"물론. 그 암살자는 이미 저승길을 떠났는 지도 모르지. 아니면 지금 피터지게 얻어맞고 있거나. 최우영이나 보라도 있으니까."
"부,불쌍한 놈이군. 내가 그 놈이라도 살기 힘들겠어."
"모르지. 파이란이나 카오스의 가호가 내려서 목숨이라도 건질지. 그러면 그 암살자는 자네에게 다시 비수를 돌릴지도 모르겠군."
"쳇. 윤기 녀석이 처리해 주길 바래야지."
미미한 파동이 계속인다.
네프리아는 수상한 낌새를 알아차리고 윤기와 우영, 보라를 향해 소리쳤다.
"다들 조용! 이 방에 우리 말고 또 누가 있어."
윤기를 향해 달려들고 있던 보라와 우영은 흠칫 긴장하며 감각을 곤두세웠다. 윤기는 실드를 확장하며 주문을 읊었다.
"[내 눈 안에 어둠에 가려진 심연의 그림자를 비추어라!]"
윤기의 눈이 순간 잠시 번뜩이다가 이네 초점이 한 지점에서 멈췄다. 순간 주위에 미세한 파동이 일며 한 청년이 테이블 한 가운데로 뛰어 내렸다.
"눈썰미가 좋군요. 레... 서,설마!"
청년은 자신의 존재를 알아챈 네프리아를 바라보다가 무언가에 놀랐는 지 눈을 크게 떴다. 네프리아 역시 놀라서 그 청년을 올려다 보았다.
"리,리아 누나..."
"렉스... 렉스니?"
잠시 정적이 흘렀다. 윤기는 뽐아들었던 에이젤을 조심스럽게 거두었다. 보라는 인상을 찡그리며 외쳤다.
"적의 그림자... 렛이로군."
"아니. 저 얼굴은 나도 아는 얼굴이야."
윤기는 에이젤을 품안에 꽃아 넣으며 말했다. 우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누군데 그래?"
"강경민. 8년전 프랑드 시에서 만났던 이도류의 검사."
챙...
금속음이 사방에 울렸다.
잠시 사방에 침묵이 흘렀다. 적의 그림자 렛, 경민은 떨리고 있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러나 오른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내,내가... 내가 누굴 죽이려 든거지..."
경민은 냉정을 찾지 못하고 떨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네프리아는 경민의 오른손을 잡아주었다. 경민은 네프리아를 올려다 보았다. 맑은 푸른색 눈동자가 그의 눈동자에 시선을 멈추고 있었다. 경민은 순간 네프리아의 손을 뿌리쳤다.
"난 렉스가 아니야!"
경민은 뒤로 물러서면서 바닥의 소검을 주워들었다. 네프리아는 슬픈 눈초리로 경민을 바라보았다.
"나도 리아는 아니야."
경민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고귀하신 레이디 리세프론이신가?"
"아니. 난 서희야. 강서희. 여기 따뜻한 영지. 푸름시의 아이들이 지어준 이름이야. 가끔 짖꿋은 장난을 치기도 하지만 좋은 아이들이지."
네프리아, 서희는 미소지으며 경민에게 다가갔다. 경민은 소검을 역을 잡은체 중얼거리듯 나직하게 말했다.
"가까이 오지마. 목숨이 소중하다면."
서희는 계속 경민에게 다가갔다. 경민은 순간 소검에 검기를 실었다.
"제길. 다가오지 말랬잖아! 난화난무亂花亂舞!"
경민은 순간 사방에 검기를 뿌렸다. 마치 피빛과 같은 붉은 빛의 검기는 춤추듯 어지러이 경민의 주위를 맴돌았다. 서희는 왠지 모를 미소를 지으며 검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경민에게 다가섰다. 검기 한가닥이 서희의 뺨을 스쳤다. 경민은 흠칫 놀라 물러섰다. 순간 뜨거운 열기가 사방에서 솟았다. 경민은 검기를 거두고 방어자세를 취했다.
"영천암현影舛暗現 초월염超越炎(1)!"
우영의 외침과 함께 경민에 주위에서 마치 공기가 끓어오르듯 강한 열기가 일어났다. 우영은 손에 쥔 하이느의 힘을 주며 말했다.
"리아, 아니 서희 누나의 따뜻함을 모르는 너는 혼좀 나야되! 초월염超越炎 환염幻炎(2)!"
우영의 외침과 동시에 붉은 기운이 사방에서 소용돌이치다가 일제히 경민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경민은 쓴웃음을 지으며 외쳤다!
"젠장할! 난 리세프론 백작의 사생아일뿐이다! 더러운 목숨사라져 주마! 제길 불꽃이 나를 태우라!"
우영은 흠칫했다. 그러나 이미 시전된 주술은 것잡을 수 없이 터져나가 길드탑을 뚫어버렸다. 우영은 하이느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콰광!
진우와 드레이크는 순간 찻잔을 내려놓고 창문가로 향했다. 오직 붉을 뿐이 기운이 길드탑의 한자리를 뚫고 나와 어지러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 붉은 빛 속에 갇힌 한 청년이 소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드레이크는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말했다.
"그 녀석이군. 하... 난 암살자 걱정 안해도 되겠어."
"과연 그럴까? 저길 봐!"
드레이크는 진우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검은 빛 안개에 둘러싸인 한 인영이 빠른 속도로 길드탑을 향하고 있었다. 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최상급 마족이군. 전에 왔던 카드라보다 훨씬 강한."
"전에 왔던이라니?"
드레이크는 진우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진우는 천천히 드레이크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윤기 녀석, 즉 사마의 칸이 푸름시에서 일전에 말라스라는 최상급 마족과 제라스라는 상급마족을 골로 보내버린 일이있었지."
"헛... 마족을 골로 보내다니 대단하군. 윤기 녀석 많이 컸는 데."
"잠자코 들어. 그리고는 말라스라는 녀석의 보복을 하겠다며 카드라라는 놈이 나타났는 데 덕분에 푸름시의 반이 날아가버렸지. 그녀석은 소멸 직전에 도주했고. 중상을 입혔다고는 하지만 대가가 컸어."
"그래서 결론이 뭐야."
"이번에 저 최상급 마족과 부딪치면 아마도..."
진우는 잠시 말을 끊었다. 드레이크는 침을 꿀꺽 삼키며 대신 말을 이었다.
"푸름시가 모조리 날아갈 수도 있다?!"
"그런 셈이지."
진우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 커다란 폭발음이 울렸다. 진우는 흠칫 놀라 다시 시선을 길드탑으로 옮겼다. 그 곳에는 청년을 한 손으로 든체 필사적으로 방어를 펼치고 있는 마족이 떠 있었다. 진우는 그 장면을 보며 중얼거렸다.
"홍윤기, 최우영... 어쩌면 정말로 푸름시가 날아가는 건 쉬운 일일지도."
우영은 다시 하이느를 집어든체 환염을 펼치고 있었다. 윤기는 에이젤을 뽐아든체 사나운 눈초리로 눈 앞에 마족을 노려보고 있었다.
"조금전 그 떨림... 경민이가 떨고 있었던 건 네 녀석의 최면에 저항하려하다가 떨었던거지. 경민의 붉은 색 눈동자를 보면 알 수 있어. 마장 아이젠!"
윤기는 목청을 높여 외쳤다. 우영 역시 하이느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외쳤다.
"가랏! 환염의 폭풍이여!"
아이젠은 윤기와 우영을 지긋히 바라보며 말했다.
"눈치가 빠르시군요. 사마의 칸. 자 자. 그만 흥분하시고 대화로 하지요. 저는 사마의 칸에게 보복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협상하러 왔습니다."
"그러면서 왜 암살자를 보냈지."
아이젠은 기분 나쁜 미소로 윤기의 말에 대답했다. 우영은 환염을 거두며 말했다.
"말만 잘하는 군."
"하 하 핫!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전 파이러너를 가지고 싶습니다."
"파이러너? 세인트 스태프. 파이러너 말인가?"
윤기의 물음에 아이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윤기가 대화를 하는 동안 서희가 은근슬적 바람의 정령을 불러 경민을 구출하려 했다. 아이젠은 혀끝을 차며 말했다.
"쯧 쯧. 레이디께서 조심성이 없으시군요. 어휴. 여기 높은 데 떨어지면 죽기 쉽습니다."
서희는 인상을 찡그렸다. 윤기는 아이젠을 향해 외쳤다.
"나에게 파이러너는 없다! 알다시피 나는 스태프를 쓰지 않는 다. 이 에고 소드 에이젤도 내가 손수 만든 것이다."
"웃기시는 군요. 카드라는 분명 당신이 스태프를 휘두르는 걸 보았다는 데. 그 스태프로 오른쪽 어깨가 심하게 파열되었는 데도 말이죠. 분명 그 때 느낀 기운은 세인트 스태프, 파이러너 라고 하더군요."
윤기는 순간 속으로 '제길'이라고 외치고 말았다. 아이젠은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오늘은 칸께서 협상의 의지가 없으시니 돌아가도록 하죠. 대신 다음에 기다리는 것은 죽음 뿐입니다. 이만."
윤기는 순간 에이젤을 들어 아이젠을 향해 던졌다. 그러나 그를 감싼 무형의 막에 튕겨지고 말았다. 아이젠은 기분 나쁜 미소를 남기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서희는 털썩 주저 앉으며 중얼거렸다.
"렉스..."
[용어 풀이]
(1)영천암현影舛暗現 초월염超越炎
영천암현주의 확장적인 의미이다. 영천암현주는 어둠의 극을 불러들이는 주술이다. 이 어둠을 세분화하면 어둠에서 솟아오른 사원소의 극을 이르킬 수 있게되는 데 초월염은 이 중 화염에 해당한다. 총 3가지의 모습을 나뉘는 초월염은 환염이라 불리우는 붉은 빛의 폭풍, 극염이라 불리우는 화염포, 마황염이라 하는 극성의 초월염이다. 어둠에서 세분화된 사원소의 힘인지라 공격적인 성향이 강하면 특히나 공격적인 성격만을 가진 화염의 위력은 엄청나다.
(2)초월염超越炎 환염幻炎
환염은 환상의 불꽃이다. 환상 속의 불꽃인 만큼 현실에는 피해가 없다. 다만 시전자가 타격점으로 잡은 한 지점에만 강한 타격을 입힌다. 그 때문에 절대 화염은 번지지 않는 다. 또한 환염은 불꽃이라 부를 수 없는 그저 붉은 빛의 폭풍이다. 날카로움과 폭발력을 동시에 지니는 무서운 기술. 간혹 검기처럼 보일 때도 있다.
아주 오래전이었어.
내가 3살 때였나? 나에게는 귀여운 동생이 셋이나 생겨 버렸어. 하나는 나의 친어머니께서 낳은 알렉스 리세프론이었고, 또 하나는 하녀의 배에서 태어난 싸일렉스 리세프론, 너희가 말하는 경민이지. 또 하나는 아버지가 파이란의 대사제 세르니우스님의 부탁을 맡은... 김재광이라는 푸름식 이름을 가진 아이였어. 재광이란 아이에 대한 기억은 없다고 해야 겠네. 내가 7살 나던 해 쯤되어서 다른 누군가의 손으로 옮겨갔거든. 알렉스는 렉스를... 그러니까 경민이를 경멸했고 하인을 대하듯이 했어. 아버지는 알렉스만큼은 아니었지만 은근히 경민이를 무시했지. 나는 왠지 그 아이에게 정이 갔어. 그 아이의 표정은 겉으로는 밝았지만 한 편으로는 그늘져 있었어. 뭐라고 표현할 수 없었지. 그리고... 내가 14살이 되던 해 집을 떠나버렸어. 나는 그 때 그 아이를 잡아줄 수가 없었어. 리아 누나라고 부르는 렉스, 아니 경민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지만 난 말릴 수가 없었어.
그리고 경민의 소식을 들은 건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지. 3년 쯤 지났나? 경민이가 너희들과 함께 있는 걸 아버지가 보시고 잠깐 이야기를 나누셨나봐. 경민이는 차가웠다고 해. 무척이나...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물러섰다고 하시더군. 집으로 돌아와달라는 아버지의 부탁을 뒤로하고 대륙전쟁 종결 직후 또 어딘가로 떠나버렸으니까. 난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출이라도 해서 그 아이를 찾을 까 했어. 하지만 알렉스도 죽어버렸고 나마저 떠나면... 어머니는 알렉스를 낳고 돌아가셨고 경민이의 생모도 경민이를 낳고 어딘가로 떠나버렸거든. 그래서 참아 집을 떠날 수가 없었어.
"김재광이라면..."
윤기는 긴 이야기를 듣다가 중얼거렸다.
"맞을 꺼야. 로니아 상단 리프시 지부장 김재광. 지금은 연락이 안되고 있지만... 5년전인가? 로니아 상단을 그만두고 사라졌거든."
보라는 윤기의 중얼거림에 즉시 대답했다. 우영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김재광이라는 그 사람. 분명 리세프론 백작과 아는 사이였어. 또 푸름식 이름은 드물거든."
"아버지 말씀으로는 세르니우스 사제님이 말해준 이름이라고..."
네프리아, 서희는 망연히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리고는 숨을 몰아 쉬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로서는 오늘 렉스, 그러니까 경민이를 거희 12년만에 만났어. 경민이의 눈동자. 순간적으로 붉은 빛이 사라졌을 때 나타났던 그 표정. 난 쉽게 지워지지가 않아. 섭섭함이라고 할까 그리움이라고 할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표정이 눈동자에 담겨 있었어. 순간 떠올랐어. 창문 넘어로 그아이가 떠나던 모습.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그 모습. 렉스가. 경민이가 집을 나서던 그 모습. 붉은 서양에 녹아 붉어 보이는 그 아이의 그림자조차 잡아주지 못했던 나. 왠지 모르게 쓸쓸한 그 때의 기억. 난 내가 생각해도 한심할 뿐이었지. 난... 과연 그 아이의 가족인지 또 그 아이의 누나인지...
또 다시 침묵이 흘렀다. 우영의 손 끝에서 뻗어나온 환염의 붉은 빛 폭풍이 날려버린 길드탑의 한 쪽 벽으로 바람이 몰려왔다. 윤기는 긴 자신의 푸른 머리칼이 흩날리는 것을 느꼈다. 윤기는 머리칼을 한가닥으로 묶은 끈을 풀었다. 바람이 기분 좋게 몸을 스쳤다. 윤기는 벽이 날아가고 없는 쪽으로 몸을 옮겼다. 간신히 무너지지 않는 가장자리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꽤 높아보였다. 지상 40층의 높은 곳. 길드탑에서도 상부에 속하는 잘 사용되지 않는 방. 그래서인지 푸름 산맥을 넘어 시드란 대륙과 그 아래로 흐릿하게 보이는 대륙의 도시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 대륙. 저 대지를 피로 물들이는 마족들... 내 손으로 반드시 쓸어버릴꺼야. 사람들의 아픔마저도 도구로 이용하는 그들을."
"네가 아니야. 우리야."
우영은 몸을 이르켜 윤기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윤기는 씩 웃어보였다. 네프리아, 서희는 윤기를 보며 말했다.
"사마의 칸... 나도 돕겠어."
"자 자 자. 나도 끼워줘!"
보라가 힘차게 외쳤다. 윤기는 씩 웃으며 몸을 돌려 다시 방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화제를 돌려 서희를 향해 말했다.
"리아 누나, 강서희라는 이름 누가 지은 거예요?"
"반장이라고 했는 데... 누구였더라."
"호상이 녀석인가. 이름은 잘 지었네. 앞으로는 서희 누나라고 부를 께요. 서희 누나."
윤기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서희는 윤기를 향해 말했다.
"그럼 바람의 장로 시르크 님. 저도 윤기라고 불러드리... 아니 불러줄께."
"하 하 핫."
윤기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우영과 보라도 덩달아 미소 지었다. 그 때 성찬이 성치않은 다리를 이끌고 올라와 외쳤다.
"어떤 녀석이 벽을 날린거야! 이실직고 해!"
순간의 우영의 손이 덜덜떠리며 올라갔다. 우영은 성찬을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기... 보상은 어떻게 할부로 안됩니까? 하... 궁정 대주술사 월급이 아시다시피."
"아시다시피 한달에 저택 한채 값이지. 빨리 내놔!"
성찬의 장난스런 말에 모두들 다시 한 번 유쾌하게 웃었다.
아침이 밝았다. 윤기는 부산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마주교 운동장에는 윤기가 그어놓은 각종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뜻보기에는 워프 마법진이었는 데 크기가 좀 컸다. 그리고 어느 정도 변형되어 보이기도 했고 텔레포트 마법진처럼 보이기도 했다.
"음 이만하면 되었군."
윤기는 만족스럽게 생각하며 마법진 가운데에 섰다. 운동장 바깥쪽 밴치에 앉아 있던 보라와 우영이 윤기 곁으로 다가왔다. 서희와 윤기의 반 아이들이 흥미롭게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 김보라, 최우영. 내가 전한 스크롤 잘 챙겨. 자 그럼 간다. 두 달 쯤 뒤에 보자."
"그래."
보라는 비교적 짧게 대답했다.
"제길... 같이 가면..."
우영의 대답은 비교적 길고 중얼거림이 많았지만 윤기는 싹 무시하고 시동어를 외쳤다.
"자! 다들 지켜봐라 나의 창작 이동 마법이다. 인덕션 워프(1)"
윤기의 외침과 동시에 거대한 마법진에서 빛기둥이 솟아 오르다가 이내 사방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윤기는 잠시 생각하다가 외쳤다.
"아차! 좌표하나 잘못 잡았는 데... 저택 지붕에 떨어지겠군. 크..."
서희와 반 아이들은 마법진을 지우다가 순간 멍한 표정으로 윤기를 바라보았고 윤기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마법진을 지우는 데 집중하는 척 해버렸다.
그 시각 보라와 우영은 허공에서 떨어지며 비명을 지르다가 아슬아슬하게 우영의 부유주술로 저택 정원에 착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이구동성으로 외치며.
"홍윤기! 너 죽었어!"
『네크로폴리스』
네크로폴리스.
죽은 자의 도시.
망자의 혼이 떠돌며 만물의 죽음을 힘으로 승화한 자들의 땅.
슬피 우는 영혼의 메아리와 가늘게 떠는 진혼곡으로 가득한 곳.
찬 바람이 도시를 감돈다.
마로드 제국의 수도, 하르소아의 한 저택.
그 곳의 서재에 한 남자가 표지가 낡아 바스러지는 고서를 손에 들고 왔다 갔다하고 있었다. 이 남자가 찾고 있는 부분은 고대라 일컫어지는 파이란 시대에 건설되었다 하는 '네크로폴리스' 에 관한 문헌이었다. 실제로 네크로폴리스는 시드란 시대 후기. 그러니까 지금의 카오스 시대를 막 열어가는 시기에 열린 적이 있었다. 드레곤의 지배에 벗어나고자 발버둥 치던 사람들이 힘을 얻기 위해 연 곳이었다. 그러나 역사에 따르면 지나친 흑마법의 성향과 악마와의 계약 등으로 타락한 이들이 드레곤이 대륙에서 추방한 후 이익을 목적으로 힘을 악용하여 한 곳은 건국왕이자 성검제라 일컫어지는 칼브란에 의해, 또 한 곳은 빛의 마법사 세라인에 의해 봉인되었다 한다. 이렇게 역사에 나타난 네크로폴리스는 두 곳. 현제 바일론의 영토인 푸름 산맥 영역에 하나. 나머지 하나는 대륙 최고봉인 카오스 대륙봉 부근의 모나드리우스 산맥, 즉 마로드의 영토였다.
남자는 역사가 말하는 네크로폴리스의 힘에 점점 인상을 쓰고 있었다. 네크로폴리스의 중심부 존재하는 망자의 돌이라는 2미터에 이르는 수정이 언데드를 일깨우며 망자의 돌에는 가디언으로 데스 나이트나 리치같은 존재가 붙어 있다 한다. 망자의 돌의 영역, 즉 네크로폴리스 안에서는 시체는 모두 일어서 네크로맨서, 소위 샤먼의 한 일족들의 명령에 따르게 된다. 정작 망자의 돌의 힘은 그 뿐이 아니라 생명력을 흡수하거나 환각을 이르키거나 심지어 정신 계통의 공격 마법마저 사용한다고 한다. 일종의 매개체로서 망자의 돌을 만든 자와 정신을 공유하여 망자의 돌의 제작자 즉 실질적 네크로폴리스의 지도자는 망자의 돌이 깨지지 않는 한 망자의 돌의 영역 밖에서도 힘을 발휘한다고 한다.
"제길... 그럼 네크로폴리스라는 영역 안에서는 그 네크로맨서인지 하는 녀석들의 힘이 막강한 건가?"
남자는 책장을 넘기며 중얼거렸다. 몇 달전 막 파이란 축제가 끝나고 시끌벅적했던 축제의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을 무렵 좀비 무리에 의해 모나드 시가 습격 당했다. 과거 네크로폴리스가 모나드리우스 산맥에 위치했었기에 봉인이 느슨해짐에 따라 일시적으로 생겨난 자연적인 좀비로 치부해 버렸다. 그만큼 당시에는 숫자가 많지 않았고 시 경비대의 병력으로도 처리가 가능했다. 하지만 다음에는 모나드리우스 산맥을 통해 수도로 향하던 파이란의 대사제 하나가 리치와 좀비 등 언데드 무리에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되었다. 이어 바이샤에서 아룬드나얀으로 이어지는 무역로가 좀비들에 의해서 차단되버리더니 이번엔 수도가 습격당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물론 수도 방어 도시인 아룬드나얀은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이상하게도 중상층 지역에 몰려있었지만. 그리하여 결국 궁정 마법사들 중 몇 몇을 뽐아 조사 인원을 모나드리우스 산맥으로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똑. 똑.
"공작 각하. 급보입니다."
짧은 노크가 들리더니 기사 하나가 뛰어들어왔다. 겉으로는 사실 기사라고 하기 힘들었다. 로브를 개조하여 검을 휘두르기 좋은 복장으로 바꿔 놓았고 특이한 룬어가 수놓아져 있는 파란색의 옷을 입고 이었다. 그는 공작이라 불리운 사내를 향해 말했다.
"모나드리우스 산맥으로 조사를 나간 궁정 마법사들이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아마도?"
순간 공작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기사는 약간 움추려든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전멸했다고 보는 것이..."
"제길!"
공작은 인상을 쓰며 외쳤다. 기사는 움찔하며 말을 이었다.
"네크로폴리스는 개방되었으며 입구는 카오스 대륙봉 자락의 동굴이라고 합니다. 던전 형식의 입구를 가지고 있으며 함정이 다양하다고 합니다. 네크로폴리스의 내부인은 아마도 형식적인 암호나 숨겨진 마법진으로 출입하는 듯하는 마지막 보고 있었습니다. 이스란시어드의 기사 다섯이 위치를 확보했다고 하니 너무 심려 마십시오. 하이시커 공작 각하."
공작은 여전히 인상을 일그러뜨리고 있으면서 기사를 향해 외쳤다.
"당장 이스란시어드의 모든 병력을 집결하라! 그리고 전국의 용병을 모집하라. 빠른 시일내로 네크로폴리스를 친다!"
"옛! 당장 이행하겠습니다!"
"용병 모집이라."
하르소아의 변두리의 한 술집. 용병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인지라 용병을 구하는 전단이 많이 붙어 있는 곳이었다. 청년 하나가 하이시커 가家에서 용병을 구한다는 전단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여비가 없어 상당히 곤란한데 용병일이나 해 볼까?"
이 청년은 파이란 축제가 막 시작할 쯤에 마로드 바이샤 항에 닿았다. 물론 정상적인 도착은 아니었다. 항구에 다 닿아서 재수없게 배에서 내리다 발을 헛딛어 바다에 빠지고 간신히 살아나왔더니 어디선가 돈주머니를 흘린 것이었다. 그래서 별 수 없이 용병들에 끼어 자신을 '이현진' 이라고 소개하고 하르소아까지 온 것이었다. 이제 그들과도 계속 함께 움직이기 곤란해졌으니 일을 해야한다. 현진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꼼지락 거렸다. 붉은 색 보석이 박힌 단순 투박한 반지였지만 왠지 모르게 붉은 색의 빛이 서려 있는 듯한 느낌이 전해왔다.
-제길! 왜 자꾸 만지작거려! 한참 잘자고 있었는 데!
-미얀. 반지가 익숙하지 않아서.
-8년 동안 뭐한거냐?
-할 말 없군.
현진은 나직하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레이논 크리스티앙 공작. 이 것이 공식적인 그의 직위였다. 비공식적으로는 이현진이라는 방랑검사. 8년 동안 3년 황실기사단장으로 수도에 머물고 이후 5년은 공작이라는 직위를 가지고 이곳 저곳 떠돌아다니길 즐겼다. 처음에는 주위에서 말이 많았으나 어디서 나오는 지 모를 카리스마와 뛰어난 정치 수완으로 한바탕 세레네즈의 정치계를 쓸어버린 이후로 그런 말들도 사라져버렸다. 지금은 그래서 꽤나 한가한 상황. 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빈곤하다. 여기까지 같이 온 용병들이 신세가 안되었다며 건네준 몇 푼이 고작이다.
"후..."
-현진님 신세도 처량하네요.
루나다. 공식적인 명칭. 절대검. 눈물의 검 루이너. 사실상 이 검은 여자라는 이유로 루이너라는 이름을 싫어한다. 루나라고 안 부르면 대답도 안하는...
-루나...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말할 것 같니?
-입 다물어주시겠습니까? 정도.
-정답.
-루나야 그럼 오라버니께서는 뭐라고 하실 것 같니?
현진은 한숨을 푹 쉬며 속으로 말했다. 순간 카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반지가 미미하게 떨리면서
-입닥쳐라! 루나! 라고 하고 싶군.
-정. 답. 인. 가. 요?
순간 손목에 체워진 푸른 색 보석이 박힌 팔찌가 심하게 진동하여 이를 가는 듯한 루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은 다시 한 번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난 빼줘. 남매들끼리 해결해.
현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테이블로 돌아와 주저 앉았다.
'하이시커 가라면 수민이 녀석이 모은 것일텐데... 뭔가 심상치 않기도 하고. 어차피 지인이 만날 목적으로 온거니까 한 번 들려 볼만도 한데. 어쩐지 내키지가 않아.'
현진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반지와 팔찌가 심하게 진동하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또 한바탕 시작했나보다. 카스의 말에 따르면 고대. 즉 파이란 시대에 한 주인 밑에 있었던 적이 있었다는 데 현진은 그 주인이 과연 어떤 인물인지 가끔 존경스러워 질 때가 있다. 물론 지금의 현진은 루이너의 주인이긴하지만 루인 칼리어스의 주인은 아니다. 단지 카스의 자아가 10년간 현진에게 머물며 젝슨의 검술과 기억을 전해 주고 있을 뿐. 하. 단순히 두 자아가 부딪친 것으로도 이렇게 골치 아픈데 그 주인이라는 작자는 어떻게 두 검을 통제하고 다뤘을 까?
"어이 형씨!"
현진이 한참 생각에 골몰하고 있을 때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내 둘이 테이블로 다가왔다.
"술 마실건가? 안 마실꺼면 나가!"
"예?!"
"나가라고! 보아하니 돈없어서 추우니까 무작정 들어왔나 본데 우린 거지 받아주는 곳이 아냐! 나가!"
두 사내는 현진을 불쑥 들어올렸다. 현진이 생각해도 자신의 몰골은 딱 거지 꼴이었다. 바이샤 항에서 바다 물에 푹 젖은 옷을 벗어버리고 선원의 옷을 얻어 입었는 데 하르소아로 오는 길에 몬스터 패거리와 몇 번 부딪친 이후로 거희 거래 조각이 되어 있었다. 거기다가 현진은 광채에 비해 겉으로 검사라는 게 들어나는 체격도 아니고 딱 거지로 보이기 좋은 상태였다.
현진을 들어올려 밖으로 던지려던 사내가 현진의 목에서 빛나고 있는 펜던트를 발견하고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호. 좋은 걸 가지고 있군. 이걸 주면 술도 주고 쫓아내지도 않겠네. 여차하면 재워주고."
"그래. 마굿간이 얼마나 좋은 데."
한마디로 두 사내의 말을 일축요약하면 빼앗겠다는 의미였다. 현진을 든체로 노려보며 펜던트로 손을 뻗었다. 현진은 살짝 인상을 구기며 허공에서 자유스러운 왼발을 휘둘러 사내의 머리를 찍어버리고 익숙한 동작으로 착지해 허리에 걸려 있던 숏소드를 뽐았다.
"다른 줄 수도 있겠지만 이 펜던트는 안돼."
-현진군 왠 과민 반응인가? 별로 좋은 것도 아니던데. 괜히 사고치지 말고 적당히 던져주고 빠져.
-시끄러워요!
현진은 카스의 말을 무시하고 사내를 놀려 봤다. 그 사내는 머리를 만지며 나머지 한 사내에게 곁눈질을 해 보였다. 두 사내는 술집 벽에 걸려 있던 묵직한 바스타드와 무시무시해 보이는 모닝 스타를 휘두루며 현진에게 달려 들었다.
"광염 소나타. 레퀴엠!"
-에구구... 삼각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삼가 고인에게 조의를 표하는 바이오.
루나와 카스의 목소리가 현진의 머릿속을 울리는 순간 현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동작으로 두 사내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이어...
쿵.
요란한 소리가 울려퍼지며 두 사내는 쓰러져 버렸다.
조금 짙은 갈색 머리에 허리에는 투박한 롱소드를 찬 한 용병 사내는 흥미롭게 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거지 행색을 하고 온 한 청년이 용병을 고용한다는 전단을 훝어보더니 테이블에 주저 앉았다. 한참이 지나도 주문은 하지않고 앉아 있자 여기 술집의 일꾼들이 쫓아내려 한 것에서 사건은 시작되었다. 술집이기에 항상 자질구레한 다툼이 일어났고 주인들은 그 피해를 좀 줄려보고자 소위 '일꾼' 이라는 용병들을 고용해 두었다. 그러나 아무리 수도 하르소아의 술집이라도 변두리의 허름한 행색을 해가지고 남는 게 없기에 그 일꾼들의 월급도 작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덕분에 행패가 점차 늘어 거지 꼴을 한 청년처럼 좀 비실비실해 보인다 싶으면 약탈하는 게 관례였다.
그러나 청년은 예사 인물이 아니었던 모양인지 검을 뽐아 들었다. 사건은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 ...... ...퀴엠!"
용병 역시 꽤 수련을 해서인지 낮은 목소리의 일부를 읽어내었다. 청년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몸을 움직였다. 색도 없는 빛이 이는가 하더니 검의 섬광이 잠깐 스치듯 지나갔다. 용병은 소드 마스터 초입에 들었지만 왠만한 놈이 아니면 자신을 따라 올 수 없으리라 자부하는 인물이었다. 물론 용병이라는 조건하에. 그러나 청년의 움직임은 경험을 짜여지는 어설픈 용병의 검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귀족의 겉멋만 든 검법도 아니었다.
쿵.
꽤 요란한 울림이 이는 데는 불과 1분을 넘지 못했다. 청년은 차가운 미소를 뿌리며 검을 허리에 꽃아넣으며 밖으로 나섰다. 이 장난아닌 청년, 현진은 씁쓸한 표정으로 돈주머니를 꺼내었다.
"제길... 이 돈 술 마시자고 퍼쓰면 필요할 때 못쓰는 데. 좀 앉아 있는 다고 테이블이 닳냐고! 제길."
현진은 혼자 욕지기를 내뱉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패신거예요?
-안 죽을 정도만.
현진의 딱딱한 대답에 루나의 말이 쏙 들어가버렸다. 카스는 꼭 이럴 때만 연륜을 자랑하며 말했다.
-그리 현명하진 않았어. 자네 검술을 함부로 들어내다니. 조용히 여행하는 게 싫어졌나? 아니면 피가 보고 싶어졌나? 바일론의 크리스티앙 공작. 대륙 최강의 검사. 아무리 우방국이라도 마로드에는 아직 반 바일론 세력들이 널렸어. 자네 밤마다 자객들과 춤추며 달밤에 체조하고 싶어졌나? 물론 자네가 걱정되서 하는 소리는 아니야. 다 왔다가 시체가 되서 돌아갈 놈들이 불쌍해서 하는 소리야. 그냥 그 까짓 펜던트 던져주고 조용히 처리하면 된잖...
-그 까짓 펜던트가 아니란 말예요!
현진의 외침에 오른손이 부르르 떨렸다. 정신적인 대화였기 때문에 밖으로 소리가 세지는 않았지만 루나와 카스의 자아가 상당한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루나는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다.
-숙녀가 있는 데 소리지르는 게 남자가 할 짓이예요!
"으윽."
현진은 순간 머리가 울리는 것을 느꼈다. 카스는 점잖을 빼며 말했다.
-그 펜던트가 뭔데.
-어머니 유품이라고요! 알았요!
현진의 외침에 카스와 루나는 일제히 침묵을 지켰다. 어머니. 현진은 얼굴조차 모르지만 왠지 모르게 그리운 존재. 사실 현진이 이렇게 철없이 큰 것도 자신을 낳고 세상을 떠나버린 어머니 탓도 있었다. 물론 현진이의 내면에는 누구보다 냉철한 검사의 두뇌가 자리하고 있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현진의 지난 5년 동안의 여행은 어느 정도의 홀로서기였다. 좋아하지도 않는 지혜에게 어머니같다는 이유만으로 상처를 줄 수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고. 할아버지인 크리스티앙 대공도 그 점은 인정해 버렸다.
"이보게."
현진이가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 생각에 잠시 속으로 눈물을 삼키고 있을 때 누군가 현진을 불렀다. 현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상대와 마주하며 말했다.
"그 펜던트... 소중한건가? 술집에서 사고쳐서 술맛 떨어지게 할 만큼."
"물론. 어머니의 유품이니까."
"그자들에게 말하지는 않았지."
순간 현진은 갈색 머리칼에 롱소드를 찬 중년의 사내를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현진은 상대가 움찔하는 것을 보며 말했다.
"나이 꽤나 먹은 용병이군. 그 정도면 사람을 볼 줄 알겠지? 그 두 사내가 과연 그런 말을 들을 성 싶던가? 사람 목숨은 소중하기에 살려뒀지만. 한 번쯤은 혼이 나봐야지. 그런 인간들은."
순간 사내의 눈이 이체롭게 빛났다. 사람 하나는 잘봤군! 처음에는 잠시 여행을 즐기는 귀족 자제로 생각했었다. 그래서 평민 따위야 어찌되든 하는 생각으로 사내들을 때려 눕혔으리라 보았다. 물론 겉멋이 안들었으니 무가 출신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혹시 뛰어난 인재가 아닐까하는 생각에 접근한 것이었는 데... 결과는.
"오호! 내가 하여간 사람 하나는 잘보는 군! 자네 나와 일해보지 않겠나? 보수는 넉넉히 주지."
현진은 속으로 쾌제를 부르며 표정관리에 힘을 쏟아부었다. 앞으로는 용병들이 득실거리는 술집에서 시비걸고 실력을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을 하는 데?"
"물론 용병일. 나는 에스페란드 용병단의 단장, 타지에 에스페란드. 요번에 우리 용병단이 네크로폴리스 토벌에 참여하게 되었거든. 하이시커 가로 직접가는 방법보단 낳을 꺼야? 우리는 여황 폐하와 직접 거래를 했거든."
"혜... 아니 여황이라면 엘레나 여황을 말하는 건가. 제주도 좋군."
현진은 아차했으면 '혜진'이라고 말할뻔한것을 누르고 말했다. 중년의 용병, 타지에는 씩 웃으며 말했다.
"직접 알현한 건 아니고... 어떻게 저렇게 선이 좀 닿아 있거든. 하나의 부대 쯤으로 대우해 줄꺼니까 보수도 괜찮아. 자네 실력을 봐서 내 부장으로 임명해주지. 어때?"
"좋아. 타지에.... 아니. 타지에 단장님!"
"그래. 그런 태도가 좋지. 너 이름은 뭐냐?"
"이현진. 잘 부탁합니다. 타지에 단장님!"
신미 대륙을 이분하는 두 개의 제국 중 쇠퇴의 길을 가고 있는 마로드 제국. 지난 대륙 전쟁으로 바일론 제국과 불가침의 조약을 채결하고 1만년에 이르는 역사 속의 갈등을 풀어 더 이상의 전쟁을 막았으나 결과는 조국의 쇠퇴로 다가왔다.
혁명의 가까웠던 역사상 마지막 대륙 전쟁을 치른 후 노쇠한 황제가 서거하고 엘레나 드 실로테 노르틴이 여황으로 등극함과 동시에 공작으로 추대된 하이시커 공작에 의해 경제 개혁이 단행되었다. 이에 공식적을 세번째 용언 마법 3급(알려진 바로 인간 한계의 최고점) 마스터에 도달한 궁정 대마법사, 베일루스 후작이 동참하였으며 새로이 공작으로 추대된 미르네 공작 역시 동참하게 되었다. 여황 역시 이들을 신뢰하여 권력은 하이시커 가家에 집중되었고 마로드 정치계의 균형이 서서히 깨어지기 시작했다.
또한 경제 개혁은 지나친 개방과 한 상단에게 국가적인 지원이 집중되어 그간 육로로 간신히 상단을 유지하던 마로드의 상인들은 바일론으로 망명해 로니아 상단으로 흡수되거나 국가의 지원을 받는 거상들의 발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경제계 역시 균형이 깨어져 버려 코스타인이라 불리우는 한 상인에게 모든 상권이 쥐어지게 되어 버렸다. 국가는 당장의 수입을 거둘 수 있는 있었으나 상권의 독점으로 물가는 치솟고 국민들의 생활은 피폐해져 갔다. 이에 일부 농민들은 소규모의 반란을 이르켜 영주의 성이나 상인의 저택 따위를 불사지르기에 이르렀다.
네크로폴리스의 등장은 평민 층에게는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개방된 아룬드나얀과 네레프, 바이샤를 있는 상로가 차단되고 상단이 계속해서 막대한 피해를 보게 되었다. 소문에 의하면 상단이 불법으로 운송하던 인간 노예들이 있었는 데 그 것을 리치나 좀비 따위가 구해서 어딘가로 사라졌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좀비나 리치 따위가 되더라도 좋으니 그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이들이 속출하였고 어느새 가난한 평민층에게 네크로폴리스는 이상향이 되었다.
"경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보시는 가?"
마로드의 황궁, 하렌시아의 집무실에는 여섯 명의 사람이 원형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있었다. 화려한 드레스 복장의 젊은 여성은 이 하렌시아의 주인, 엘레나 황후였다. 그 옆으로는 하이시커 공작과 베일루스 후작, 카르포르틴 공작, 샤이드론 후작, 미르네 공작이 앉아 있었다.
"일단 소신의 개혁 방안에 문제점이 많은 듯 합니다. 수정 혹은 폐지해야 할 듯합니다."
조금 힘없는 어조로 말하는 하이시커 공작, 수민은 차분하게 설명을 해 나갔다. 일단 지원을 분사시킬 재정이 마로드 황실에는 없다. 그러나 이 개혁이 아니면 지금의 재정마저도 유지하기 힘들다. 하자드 섬의 식민지의 반응으로 보아 2~3년 이내에 폭동이나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시점에서 국가 재정의 하락은 곧 패전을 의미한다. 로니아 상단의 원조를 구해 지원을 분산시키거나 제도를 폐지한 후 재정의 일부를 로니아 상단을 통해 보충한다. 수민의 힘 빠진 설명이 끝나고 나자 샤이드론 후작이 입을 열었다.
"결국 다시 바일론에 원조를... 하지만 원조를 받는다고 하여도 지금 본국의 경제는 황실이나 정치계에서 개입할 수준을 넘었습니다. 빌어먹을 코스타인. 그 작자가 틀어쥐고 있습니다. 제길."
샤이드론 후작은 입을 험하게 놀리며 탁자를 내리쳤다. 베일루스 후작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도를 폐지, 로니아 상단의 도움으로 재정을 충당하더라도 코스타인의 독주는 막을 수 없습니다. 차다리 제도를 이렇게 수정하시는 것은 어떠 하시옵니까? 코스타인 상단은 이제까지 국가가 키웠음으로 의무적으로 지금까지의 세금을 유지하라. 그러나 이제부터 국가는 새로운 상단을 키울것이다. 경제는 상호 경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정당한 경쟁이 되길 바란다. 라는 방식으로 말이옵니다. 저들이 아무리 용병을 끌어모아도 이스란시어드나 하프레소르가 있는 이상 우리 말을 거역하기는 힘듭니다."
미르네 백작은 베일루스 후작, 화민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하면서 수민을 향해 말했다.
"베일루스 경의 고견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당장 시급한 것은 네크로폴리스의 토벌입니다. 하이시커 공작! 토벌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소?"
"현제 이스란시어드 총10연대 중 2연대와 10연대를 제외한 모든 병력을 투입해 속전속결로 쳐들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수도 습격 사건의 시발점인 바이샤와 아룬드냐얀의 무역로에 하프레소르에서 모집된 용병단이, 그리고 파이란의 대사제 피살사건의 장소로 에스페란드 용병단이 향하기로 하였으며 출발 시일은 내일입니다."
하르소아 변두리의 술집.
왠일로 손님이 부적거리는 가운데 한 테이블에서 두 사내가 술잔을 기우리며 큰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한 사내는 중년으로 롱소드를 허리에 찬 갈색 머리였고 한 사내는 이제 갓 20살을 넘은 듯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도 그 청년에게서는 늙은 용병에게서나 느껴지는 묘한 느낌이 흐르고 있었다. 경험으로 쌓여진 듯한 예리하고 냉철함, 그리고 자신감으로 가득찬 알 수 없는 카리스마.
"하 하 하! 현진군의 사정도 참 딱하게 되었군! 바다에 빠져서 돈주머니를 흘려버리다니... 어지간히 고생했겠어."
살짝 이마에 주름을 긋던 청년, 현진은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테이블 위에 맥주잔을 내려 놓는 사내의 손목을 잡았다. 사내는 놀란 눈초리 현진을 보며 말했다.
"왜,왜 그러십니까? 아직 화가 안 풀리셨습니까... 어제는..."
"아직도 피묻은 옷을 입고 있군. 어지간히 어려운 가봐. 이거 가져가. 물론 혼자 꿀꺽하지 말고 어제 그놈하고 나눠가져."
현진은 금화 몇 개를 집어 사내 손에 쥐어 주었다. 건너편의 사내, 타지에 역시 현진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사내는 아무말 없이 고개를 넙죽 숙이고 문 밖으로 사라졌다. 타지에는 그 모습을 보다가 현진을 보며 말했다.
"성격하나는 좋구만."
"이광채라는 어떤 바보같은 놈한테 배운거예요. 그 때 그 때 풀고 지나가면 쪼잔하게 연연하지 않기. 그 멍청이가 보고 싶을 때가 가끔 있는 데, 어제처럼 돈없을 때랑, 심심할 때, 그리고 혼자서 상대하기 힘든 놈이 있을 때죠."
현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맥주를 들이켰다. 순간 광채는 귓구멍을 열심히 팠었다는 후담이...
"그 친구도 꽤 강한가 보군. 어느 정도인가?"
"소드 마스터 최상급."
현진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번 맥주를 홀짝거렸다. 광채는 소드 엠퍼러(1)라 칭해지는 경지의 검사로서 현제 대륙에 공식적으로 네 뿐인 검객이므로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자신의 정체도 들킬 수 있었다. 물론 현진 역시 소드 엠퍼러의 칭호를 받은 몸이다. 용병단장이 눈이 있어 자신을 소드 마스터 최상급으로 보았기 때문에 광채도 같은 경지로 설명해 버렸다.
"최상급 둘이라... 둘이서 콤비를 이루면 무적이겠군."
'으이그... 그래 무적이다. 소드 엠퍼러 둘이 덤비는 데 막겠다고 설치는 미친 놈이 어딨냐고.'
"그런 셈이죠."
현진은 남은 맥주를 한꺼번에 들이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타지에는 그런 현진에게 씩 웃어보이며 말했다.
"내일이면 좀비 놈들이랑 한바탕해야 되니까 푹 자두라고."
현진은 씁쓸히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후... 저 단장. 의외로 피곤한 스타일이야. 이것저것 캐묻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세요. 자상하다던가, 섬세하다던가.
현진은 루나의 수다를 들으며 여관으로 향했다.
[용어 풀이]
(1)소드 엠퍼러
공식적으로 이 경지에 이른 사람은 현제 넷이다. 본래 카르차넨 젝슨을 포함하여 셋이었으나 현제는 넷이다. 가장 뛰어나다고 여겨지는 자는 레이논 크리스티앙(이현진)과 파일론 레비던트(이광채)이다. 그리고 그 뒤를 있는 자가 스티브 크리스티앙(이성찬)이며 나머지 하나는 하프레소르의 단장인 샤이드론 후작이다. 이들과 소드 마스터 최상급의 차이는 실로 크며 최상급 대마법사들과도 맞먹는 수준이라 한다.
*검사의 경지 관계
검사의 경지는 일반적으로 소드 마스터로 통일된다. 이는 검술에 있어 마스터에 이르러 검기를 다룰 수 있게 된 경지를 표한다. 일부에서는 소드 익스퍼트(검기를 다루는 수준은 익스퍼트, 완벽하게 통달하여 흔히 사람들이 최상급, 혹은 그 이상의 경지를 마스터라 함)나 그래듀에이트(일반 적으로 소설에 등장하는 마스터와 같다고 보면됨. 그 다음을 소드 마스터라 함) 등이 있다. 솔직히 판타지 소설의 세부적인 요소는 창작으로 대체되므로 그렇게 신경 쓸 필요는 없으나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 언급하고 넘어간다. 소드 마스터 이상의 경지의 이름은 다양한 편이데, 거희 작가마다 다르다고 보면 된다. 그레이트 실버, 소드 마스터(이는 소드 마스터의 경지를 소드 익스퍼트라 했을 때), 그랜드 소드 마스터 등이다. 본 소설에서는 소드 마스터 이상의 경지를 소드 엠퍼러라 한다.(처음에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 쓸려고 했음)
"낌새가 이상한데."
새벽부터 바쁜 행보로 모나드리우스 산맥의 한 자락에 도달한 에스페란드 용병단은 몇개의 조로 나뉘어 근방을 조사 중이었다. 현진은 단장인 타지에와 마법사라는 켈릭과 함께 적당한 곳에 캠프를 치고 용병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건가?"
현진의 낮은 중얼거림에 타지에가 물었으나 현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아무것도."
현진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사방의 기운을 읽어나갔다. 루나와 카스 역시 낌새를 차렸는 지 오른팔에 미미한 진동이 전해져 왔다.
-이건 망자의 돌의 힘이 아니야.
카스의 나직한 목소리가 현진에게 전해졌다.
-그러면?
-잠깐! 전 좀 익숙한데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마족에 가까운.
루나의 목소리가 전해지는 찰나, 묘한 향기가 사방에 진동을 했다. 결코 유익하지는 않은. 그러면서도 익숙한.
"시체 냄새가?!"
현진은 그렇게 소리치며 몸을 이르켰다. 테이블에 앉아 지루하게 부하들을 기다리던 타지에는 놀란 눈초리로 현진을 바라보았다.
"좀비가 다가옵니다. 정확한 거리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100여구의 시체들이..."
현진의 말이 끝을 맺기 전에 병장기가 붙이치는 소리가 울렸다 현진은 반사적으로 허리에 걸린 숏소드를 뽐아들고 밖으로 뒤쳐나갔다. 타지에와 켈릭 역시 뒤를 따랐다.
"아!"
타지에는 순간 탄성을 내뱉었다. 시체 냄새에 단순히 좀비일 것이라 생각했던 가설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데스 나이트로 추정되는 기사들이 50명의 좀비들을 이끌고 있었다. 정찰을 위해 나갔던 용병들은 이 거대한 언데드 부대에 쫓겨 온 것인지 힘겹게 데스 나이트를 상대하고 있었다. 용병의 수는 20명, 데스 나이트 다섯, 좀비 50...
"제길... 분명 망자의 돌이 아니게 맞아?"
-분명. 내 기억으로는 여기는 네크로폴리스의 영향권 밖이야.
현진은 카스의 말을 되씹으며 검에 세인트 블레이드(소드 미네랄의 상승 경지)를 이르켰다.
"자... 오랜만에 몸 좀 풀어야 겠군. 레퀴엠!"
현진은 최대한 본전을 아끼는 의미에서 술집에서 사용했던 초식을 휘둘렀다. 찬의 이스칼리어와 광염소나타가 만나서 이루어낸 초식 중 하나로 본디 이도류인 이스칼리어에 광염소나타의 파괴력을 더한 초식이었다. 물론 세인트 블레이드에 검이 두자루라면 파괴력은 강하지만 검 하나로 펼치거나 세인트 블레이드를 불어넣지 않는 다면 그저 뛰어난 검술 하나다.
현진은 왼손에 약간의 마나를 실어 이도류를 펼쳤다. 실력을 감추는 상황이 아니라면 마나 소드(1)라도 만들어서 사용하겠지만...
-인간이 제법이구나!
데스 나이트는 현진의 레퀴엠을 그대로 받으려하며 외쳤다. 순간 현진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광란狂亂!"
현진의 외침과 동시에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현진의 양손이 교차했고 데스 나이트는 쉽게 분해 되었다. 그러자 용병들을 좀비들에게 맡긴 일부 데스 나이트가 현진에게 몰려들었다.
"쳇, 너무 빨리 와주면 싱거운데... 그럼 광풍狂風!"
현진은 양손을 양 옆으로 각각 내뻗으며 외쳤다. 두 손은 빠른 속도로 회전하여 무시무시한 검풍을 이르켜 데스 나이트 넷 모두를 조각내었다. 현진은 타지에를 보며 외쳤다.
"물러나요!"
타지에는 현진의 무시무시한 검술을 보며 용병들을 향해 외쳤다.
"모두 퇴각하라!"
좀비들의 시독 때문에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던 용병들은 병장기를 집어 던지고 달리기 시작했다. 느려터진 좀비들은 현진의 의도대로 범위 안에 몰려들었다. 문제는 그 범위가 워낙 넓어 용병들도 들어있다는 것이지만.
"알아서 잘 하겠지. 마무리! 광폭狂爆!"
현진의 외침과 동시에 빛무리가 사방에서 모여들다가 이윽고...
쾅!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엄청난 양의 검풍이 들이닥치며 사방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좀비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용병들은 마법사들의 도움에도 불과하고 저마다 상처를 입고 여기 저기 처박혀 버렸다.
현진은 숨을 몰아쉬며 마나를 거두었다. 루나의 목소리가 울렸다.
-전체 마나 안정도 79%. 에구... 이도류를 검 하나로 펼치니까 탈이 나죠. 마나 소비량은 얼마 안되는 군요. 음... 그 숏소드 버리셔야 겠네요.
루나의 말과 동시에 파열음이 울리며 검날이 깨어져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제,젠장."
현진은 검집을 풀어 손잡이 함께 던져 버리고 자신의 검으로 몸을 지탱하고 있는 타지에에게 다가갔다.
"가벼운 숏소드 하나 있음 줘요."
"무시 무시하군... 하마트면 우리들도 좀비 놈들하고 같은 꼴이 될 뻔했어. 자네. 우리 용병단과 재계약하는 건 어떤가? 부단장, 아니 아예 자네가 단장이 되어보겠나?"
"사양하죠. 기분 나쁜 기운이 몰려오니까 검이나 빨리..."
현진은 말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완전히 와해되어 버린 것 같았던 데스 나이트 무리가 어느새 재생하여 몸을 이르키고 있었다. 현진의 얼굴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제길."
현진은 대충 자세를 잡으며 데스 나이트를 노려보았다. 그 때 낯익은, 그리고 매우 듣기 싫으며, 저주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 하 핫! 뜻밖에 불청객이 찾아왔군요!"
"제길... 8년 동안 잠잠하다 했더니..."
현진은 천천히 주위를 훝어보며 살기에 가득찬 말을 내뱉었다.
"내가 이 계곡을 날려버리게 할텐가 아니면 나올 텐가!"
순간 목소리의 주인공은 데스 나이트 무리의 가운데에서 솟아나듯 생겨났다. 그는 현진을 향해 비아냥 거리듯 말했다.
"레이논 크리스티앙 공작 각하. 8년만에 뵙사옵니다."
"그래... 오랜만이지. 징그럽게 오랜만이지. 아스테르."
현진의 손은 어느새 푸른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용병단은 그 둘의 모습을 멍한 눈초리로 보고 있었다. 타지에는 현진을 향해 말했다.
"그,그럼... 소드 엠퍼러, 마검황魔劍皇 레이논."
현진은 타지에의 말을 묵살하고 루이너의 손잡이를 오른손으로 움켜쥐었다. 카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상대의 마나 상태로 봐서는 마족이다.
-현진님. 제가 기운 익숙하다고 했던 것은 한 때 아스테르가 절 이용한 탓이예요. 물론 그 때는 봉인 풀리지 않았고 단지 쇠덩어리이긴 했지만.
현진은 세인트 블레이드를 검에 잔뜩 실으며 아스테르를 향해 말했다.
"무덤은 여긴가?"
아스테르는 현진의 중얼거림에 가까운 말에 순썹이 꿈틀했다. 현진은 여유 있게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네 놈의 취향은 그렇게 좋은 편이 못되는 군."
아스테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글쎄요."
[용어 풀이]
(1)마나 소드
일정 수준 이상의 사람들은 마나를 이용해서 검의 형태를 띈 무언가를 마나 소드를 만들 수가 있다. 그래서 고수들은 왠만해서는 검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 편이다. 현진의 경우 일반 용병처럼 보이기 위해 검을 휴대한다. (루이너는 눈물의 성검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서 검 좀 쓴다는 인간들은 다 알아봄. 성월대도 역시 월성도이라는 이름으로 유명)
"글쎄요."
아스테르는 현진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제 취향은 아니군요. 하지만 당신 마음에는 들었으면 좋겠군요."
아스테르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순간 공간이 약간 뒤틀리는 듯하다가 검은 빛 검날의 롱소드 하나가 떠올랐다.
"이 검의 이름은 소울 머더. 영혼의 살인자라고 하는 물건입니다만... 고귀한 눈물의 성검과 부딪칠 수나 있을 지요."
현진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검에 잔뜩 실린 세인트 블레이드를 사방에 뿌렸다. 아스테르는 여유있게 발을 뒤로 빼며 되살아난 데스 나이트들을 앞세웠고 조금 전과는 달리 데스 나이트들은 허무하게 무너져 버렸다.
"오호! 처음부터 강하게 나오시는 군요. 자 이제 일 대 일입니다. 뒤에 서 계시는 인형들은 치워주시겠습니까?"
아스테르의 비아냥거림에 타지에는 순간 욱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검을 뽐아들고 아스테르에게 달려들었다.
"우리 에스페란드 용병단은 인형 따위가 아니다! 이 사악한 네크로맨서여!"
타지에의 검과 아스테르의 소울 머더가 부딪치려는 순간 소울 머더의 검날이 허공에 녹아내리듯 검을 그냥 지나쳐 버렸다. 타지에는 검으로 허공을 가르며 왼쪽 가슴에 강한 통증을 느껴야 했다.
'제,제길... 이건 꿈인가? 아니면 현실인가? 거,검이 검을 통과하다니.'
풀썩...
타지에는 한손으로 가슴을 움켜 쥐고 다른 한손으로 검을 잡고 일어섰다.
"그럴 듯한 인형이로군요. 몸풀기로는 딱이었습니다. 하 하 하. 당신에게서 돌려된 영혼의 일부. 소울 머더가 거두어가도록 하죠."
"아스테르..."
현진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루이너를 들었다.
"슬슬 시작하지. 레퀴엠."
현진은 양손으로 루이너를 잡았다. 순간 마나가 이르키는 오오라가 현진의 현진의 몸을 타고 검에 까지 이르렀다. 아스테르는 재밌다는 표정으로 소울 머더를 양손으로 잡았다.
"처음보는 기술이군요. 당연히 마그나타 소르드로 나오실줄 알았는 데..."
아스테르의 몸에서도 검은 빛 오오라가 일어났다. 역시 그 오오라도 어느새 검에 이르르고 있었다. 현진은 검을 들며 외쳤다.
"[신을 따르는 영혼의 계율이어. 인과 율을 파하는 자 명하노니. 그대, 슬픔의 목소리로 영혼의 검을 이루라. 죽은 자 망령의 외침. 레퀴엠(진혼곡)]!"
순간 현진의 몸을 타고 흐르던 푸른 빛 오오라가 검끝으로 모여들았다 이윽고 아스테르를 향해 뻗어 나갔다. 아스테르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내 안에 잠든 영혼의 고통이어. 신을 거부하는 자 명하노니. 영혼의 절규여. 내 안에서 메아리치라!]"
아스테르의 외침과 함께 아스테르를 감싸고 무섭게 회전하던 푸른 빛들이 깨어져 나가며 검은 오오라가 사방을 감쌌다. 현진은 순간 어지러움에 주저 앉았다. 검은 오오라가 시야를 가릴 즈음 현진에게로 검은 빛 검날이 날아들었다. 현진은 반사적으로 루이너를 들어 막으면서 목구멍으로 치솟아오르는 피를 삼켰다.
"독기毒氣..."
현진은 순간 루이너를 바라보며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마나 상태는...
-레퀴엠인지 뭔지... 그냥 검술이 아니었군요. 아무튼 그 것 때문에 마나 고갈이 심해요. 마나 회복 속도도 느리고 이미 안정도는 측정할 필요가 없는 수준.
-그럼 미친 짓 삼아 해보지 뭐. 용병단을 다 죽일 순 없잖아.
-혀,현진님!
-현진군! 미친 짓이네 자네 설마!
-네.... 미친 짓이죠. 그럼 간다. 아스테르. 마그나타 소르드.
현진은 다시 한 번 날아드는 검을 쳐내며 사방으로 세인트 블레이드를 날려 검풍을 이르키기 시작했다. 도저히 하나의 검으로 만들어낸다고 믿기 힘든 엄청난 검풍이 사방에 휘몰아치며 검은 오오라를 밀어내었다.
"오홋! 마그나타 소르드, 소르드 토네이도라..."
아스테르는 검풍을 막아내며 중얼거렸다. 현진은 서서히 검풍을 거두며 외쳤다.
"포가튼 소르드!"
"허 헛! 이런 마그나타 피니셔란 어떤 초식일까."
아스테르는 현진이 빛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서히 세인트 블레이드를 모아가는 것을 보며 비아냥 거렸다. 현진이 마그나타 피니셔를 일생에 사용한 적은 젝슨 후작과의 전투에서 뿐이었으니 아스테르는 한 번도 격어보지 않았다. 그러니 간 크게 섰있는 것이고.
"마그나타 피니셔!"
이윽고 현진의 마지막 외침과 동시에 사방은 빛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아스테르는 여유있게 소울 머더로 깨어버리려고 하다가 소울 머더의 검날이 강하게 진동하며 금이 가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이,이럴 수가!"
아스테르는 씁쓸한 미소를 지은 체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검을 손에 들고 있는 현진을 보며 외쳤다.
"제길. 다음에 뵙죠."
현진은 아스테르가 일그러진 공간 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풀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루이너는 현진의 손에서 떨어짐과 동시에 물로 변하여 사라졌다가 어느새 현진의 손목으로 돌아가 있었다.
"아스테르... 이번에 진 빚은 반드시 내 손으로 갑아주마."
털썩.
현진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쓰러져 버렸다. 현진의 입에서는 검은 빛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크... 어지럽다.
망할 아스테르 놈 때문에 마나를 너무 많이 소비한 덕분이다.
피도 쏟을 만큼 쏟았고...
근데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없는 어둠이다. 오로지 나 자신만 보인다. 대강 짐작은 간다. 무無의 공간, 오로지 빛만 가득차서 어두운 곳, 반사할 것이 없던 빛이 나를 반사한 덕분에 나 자신은 보인다는 소리다. 즉, 빛을 반사하는 공기 한 줌 없다...
켁! 그럼 난 왜 살아있지.
생각하고 보디 가슴이 답답해진다. 제길... 이런 바보같은 경우가 있나. 마주교 시절 밥 먹듯이 졸던 덕분으로 무의 공간에 대한 설명을 까먹었다. 그 것만 기억해도 살 수 있는 데. 갑자기 망할 녀석 하나가 생각난다.
"이 망할 현진스. 공부 좀 해! 공부! 이런 식으로 하면 언제가 한 번은 상당히 고생하게 될 꺼야!"
최우영...
그 녀석은 아직도 지혜를 좋아하고 있겠군. 난 그 지혜를 사랑으로 울리고, 이 둔탱이. 너무 둔해서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다. 지혜가 날 좋아한다는 거, 지인이도 날 좋아하고 있다는 걸, 또 나 스스로가 지인이를 좋아한다는 거. 지인이?
저 앞에 어떤 사람이 보인다. 허리 아래까지 길게 기른 금발, 내가 아는 사람이다. 박지인...
녹색 드레스, 잘 어울린다. 푸름시에서는 못보던 지인이의 또 다른 모습이다. 근데 왜 저런게 보이지. 나도 죽을 때가 된건가.
윽... 세상하고도 good bye군.
저 세상으로 가는 특급 마차를 타고 있군.
제길. 난 아직 할게 많단 말이야. 지혜 앞에서 당당해지지 못하는 멍청한 우영이 녀석도 머리도 한대 쥐어 박아야 되고, 건방지게 현진님을 뛰어 넘고 대륙 최고라고 자부하는 광채 녀석 콧대도 꺽어줘야 되고, 내가 다치게 만든 지혜의 아픈 마음도 아물게 해 줘야 되고, 지인이랑 행복한 나날을... 이건 아니고, 사라진 윤기 녀석 찾아다가 죽을 만큼 패주면서 이렇게 말해야 되 '왜 김보라 울렸어! 나쁜 자식!' 멋지게 돌아서면 윤기 녀석 이를 갈며 '싸이클론 샤우트~~!' 라고 외치려나.
왜 이렇게 시야가 흐려지지. 환상처럼 아른거리는 지인이의 모습도 사라져간다.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으악!"
현진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이르켰다. 그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잠꼬대가 환상적인데. 다들 함께 들었으면 뭐라고 할까? 광채는 검을 뽐아들고 침대로 뛰어들었을 것 같은 데."
현진은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그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연녹색 드레스 차림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금발의 소녀가 앉아 있었다.
"바, 박지인..."
현진은 더듬거리며 그렇게 외쳤다. 지인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큭. 큭. 여전히 그대로군. 1년이나 지났는 데."
"어,어디서 부터 들은거야? 내 잠꼬대."
이걸 광채나 최우영이 알면 꿈이 아니라 실제로 황천길로 가는 마차를 타게 된거나 다름 없다. 지인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원래 저런 애가 아닌데 라고 생각하며 현진은 지인을 바라보았다. 그 미소는 왠지 사악해 보였다.
"'제길. 난 아직 할게 많단 말이야.'부터."
현진의 인상은 순식간에 구겨져 버렸다. 일단 이광채, 알면 성월대도를 뽐아들고 달려온다. 루이너로 막는 다. 그럭저럭. 그 때 최우영, 영천암현주를 날리며 달려온다. 막을 자신 없다. 8년전에 알렉스 리세프론처럼 조각조각 나려나. 만약 어떻게 막는 다 치면 광채가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만월풍을... 그러면 시체도 안 남는 다. 거기다가 실종된 홍윤기라는 놈이 이야기 듣고 나타나서, 정말로 싸이클론 샤우트라도 갈기면. 거룩한 망나니라는 칭호처럼 아무리 수련을 안하고 떠돌아다녀 8년전 그대로라도 솔직히 상처 하나 안 입고 살아나기 힘들다. 세 명의 화려한 협공... 끔찍하다.
"애들한테 이야기 안 할꺼지."
"너 하는 거 봐서."
현진은 순간 지인의 미소에서 살떨리는 공포를 느꼈다. 사실 지인은 처음부터 다 들었다. 앞 대목에서 주절거리며 지혜 걱정하는 것도 자기에 대해 떠들던 것도... 지인은 장난스럽지만 왠지 모르게 진지한 저 현진이라는 녀석 좋다. 사랑이라고 하나. 이런 걸...
"그나저나 내가 왜 하이시커 공작가에서 일어난거지?"
"말하자면 길어. 용병단 단장. 타지에라는 사람이 널 업고 왔거든."
"타지에가? 그 사람 심장을..."
현진은 미심쩍다는 듯이 지인에게 물었다. 지인은 의아해 하며 말했다.
"글쎄. 가슴에 상처가 있기는 했는 데. 아, 치료하던 사제가 영혼의 상처 어쩌고 하긴하던데...."
"제길... 소울 머더."
현진은 침대에 다가 무심결에 주먹을 내질렀다. 지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현진을 바라보며 말을 계속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 지는 모르겠지만 용병단의 절반이 완전히 전멸해버리고 할 수 없이 오빠가 이끄는 본대로 함류했다가 오빠가 시체처럼 하얗게 질린 널보고 용병단과 함께 저택으로 텔레포트 시켰데. 그 다음부터는 내가 너를 내 방으로 끌고 와서 간호 중이었지. 무슨 일이 있었길레 용병단이 절반이 죽어나고 나머지도 다 반 시체가 되었냐고. 오빠말로는 네가 함께 있던 용병단 켐프 자리를 중심으로 그 계곡 일대가 완전 초토화되었다던데..."
"마그나타 피니셔를 썼으니 그 정도로는 양호한거야."
"..."
지인은 순간 완전히 굳어버렸다. 현진이 사용한 마그나타 피니셔는 대륙 전쟁 때 본적이 있었다. 대륙 최강이라는 젝슨 후작을 저 세상으로 보내고 일대 황무지, 아니 거희 사막처럼 되어 버렸다. 완전히 초토화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지인은 알고 있었다. 생명을 잃게 된다. 마그나타 피니셔의 빛에 들어가면. 그 대지는, 대지 위의 생명은.
"도대체 왜 사용한거야..."
지인의 음성은 낮아져 있었다.
"제길... 아스테르. 8년만에 그 재수없는 얼굴을 다시 봤거든. 첫인사치고는 꽤 과격했지 뭐."
"그 카르테우스의 사제 말이야?"
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진은 어느새 몸을 이르켜 침대를 벗어나 있었다. 지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좀더 누워있어."
"아니... 너희 오빠가 걱정되서 말이야. 수민이 녀석 의외로 무식하게 밀어붙이거든. 어쩌면 네크로폴리스라는 거. 아스테르 같은 녀석들의 본거지일지도 모르거든."
현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몸 속의 마나를 움직이려했다. 순간 현진의 얼굴은 똥씹은 표정이 되고 말았다. 지인 역시 왜 그러느냐는 표정으로 현진을 바라보았다.
"마나가 움직이지 않아."
현진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저 앉아버렸다.
모나드리우스 산맥.
대륙의 남동쪽에서 시작하여 북동쪽으로 뻗어올라가 파이란 성역에 이르러 끝나는 산맥이다. 최남단. 산맥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곳에는 대륙 최고봉이 자리잡고 있지만 위로 올라가 산맥이 끝날 무렵에는 언덕 수준에 이른다. 또한 파이란의 성역, 세르바즈와 끝없는 얼음의 대지, 금단의 구역 파라그레이드라는 두 빙원과 마로드의 넓은 땅의 경계이기도 하다.
이 산맥의 최남단, 모나드리우스 산맥 유일의 도시 모나드 시에는 대병력이 집결하는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8년전 대륙 전쟁 이후로 대륙에서 소집된 최대의 병력이었다.
아직 이른 새벽임에도 도시의 사람들은 이 대규모 병력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나와 있었다. 일부의 얼굴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민중들이 이상향이라 생각하며 꼭 한 번 가보기를 꿈꾸는 네크로폴리스. 저 병력이 토벌해야할 대상이었다.
500여명의 성기사와 100여명의 사제. 그리고 거희 모든 병력이 집결한 대륙 최고의 기사단 이스란시어드. 그리고 150가량의 마법사였다. 그리고 그들을 총괄하는 이는 이스란시어드의 단장, 시어드 알베르 하이시커 공작이었다.(시어드란 이스란시어드 내부에서 단장을 높여부르는 칭호.)
"시어드.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공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채찍질하며 외쳤다.
"전군 출발!"
"출발!"
하이시커 공작, 수민은 약간 굳은 얼굴로 천천히 말을 몰아 도시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빌어먹을 귀족 놈아 이거나 먹어."
철퍽.
수민은 순간 얼굴에 차가운 것이 얼굴에 닿는 것을 느꼈다. 미미한 마나도. 수민이 고개를 돌려 차가운 것이 날아온 쪽을 보았을 때, 압축된 물덩이가 다시금 날아오고 있었다. 수민은 반사적으로 검을 빼어들어 물덩이를 갈라버렸다.
"제길... 쓰레기들. 민중들의 희망마저 밟아 뭉겔 참이냐! 쓰레기 같은 놈들 한테 돈 퍼줘서 밑에 놈들 굶는 건 안 보이지! 미친 것들아! 벌레만도 못한 것들. 내가 마법만 제대로 익혔다면 너희들 모가지를 따버리를 것을! 빌어먹을... 워터 볼!"
수민은 가볍게 검을 들어 날아오는 워터 볼을 갈라버렸다. 수민의 얼굴에는 씁쓸함이 베어 있었다.
"저 자식이 시어드를! 시어드. 제가 가서..."
수민은 한 기사를 가로 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수민은 행군을 멈추게 하고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는 사람을 살폈다. 흰 수염을 잔뜩기르고 머리는 대머리에 농부들이 입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실패한 마법사가 낙향해서 농사를 짓는 듯. 그 노인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한 동안 말이 없던 노인은 수민을 향해 양손을 뻗으며 외쳤다.
"파이어 버스터!"
수민은 굵은 화염 줄기를 보며 검을 휘둘렀다.
쾅.
폭발음이 일어나며 순간 소란스러웠으나 수민은 검을 거두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네크로폴리스. 그대들의 이상향이라 할 수 있으나 또한 신의 섭리를 깨는 일. 그대는 죽은 자의 망령에게 안식조차 허락치 않겠는 가? 그대가 지향하는 정의, 그대가 바라는 세상은 그렇게 이기로 가득한가? 죽은 자, 그대들의 소망을 위해 안식조차 없어야 하나?"
노인의 대답은 없었다. 노인은 다시 한 번 마법을 사용하려고 들어올린 팔을 슬며시 내렸다. 수민은 말을 이었다.
"세상에 양과 음이 어찌 나뉘지 않을 수 있으랴. 모두가 웃을 수 있다면 좋겠으나 신이 허락치 않아 이루어질 수 없음을... 만약 그대와 내가 입장이 바뀌었다해도 그대가 지금처럼 할 수 있을까?"
노인은 수민의 말에 발끈하며 외쳤다.
"당신이 귀족이니까 그 따위 말이 나오는 거요! 당신이 굶어보았소! 당신이 뭘 아시오! 난 신의 섭리 따윈 모르오!"
"그대는... 죽어가는 부모에게 약 한 줌 주지 못하고 산길을 걸어 보았는 가? 신음하는 부모에게 줄 약 한 줌 없이. 주린 배를 움켜쥐고 산길을 걸어보았는 가?"
수민은 어머니를 업고 푸름 산맥을 달리던 그 때를 떠올리며 외쳤다. 노인의 말은 없었다. 수민은 말을 이었다.
"그래. 난 귀족이다! 하지만 그 전에 인간이다! 내가 어찌 그대들의 슬픔과 고통을 모르겠는 가. 하지만... 내가 당장 밀가루 한 줌, 빵 한 조각을 줄 수 있어도 그대들의 배를 영원히 배부르게 할 수는 없지 않는 가? 나는 이 나라를 이끄는 공작, 알베르 하이시커다! 난 그대들 모두가 영원히 배부르고 웃을 수 있는 마로드 제국을 건설하고자 한다. 8년전, 대륙전쟁의 마지막 페이지를 쓰던 그 때 이전엔 나도 그대들과 같았으니까. 내가 8년 동안 해 온 일은... 오직 모두가 웃을 수 있는 마로드 제국 건설이었다."
노인은 말이 없었다. 시민들도 침묵을 지켰다. 이스란시어드와 성기사, 마법사들 모두 숙연해져 버렸다. 수민은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며 외쳤다.
"진군!"
수민의 병력이 도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알베르 하이시커 공작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은 땅바닥에 침을 탁 뱉으며 중얼거렸다.
"제길. 귀족 나부랭이가 아니라 현자님을 건드려버렸군."
모나드리우스 산맥의 한자락. 카오스 대륙봉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해안 절벽들이 형성된 곳에 때 아닌 대규모 병력이 집결했다. 이는 불가침 조약을 맺은 바일론에 대한 마로드의 도발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를 감수해야 할 만큼 마로드 황실의 사정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엘레나 여황은 전국에 네크로폴리스 토벌령을 내리고 경제 정책이 변경되었음을 공포했다. 일시적으로 민심의 혼란이 가라앉은 듯 하였으나 일부 혁명주의자들이 네크로폴리스 토벌은 엄연한 국민 탄압이라 외치며 테러 횡위를 일삼았다. 심지어 이 테러 행위는 황궁에서까지 벌어졌고 엘레나 여황은 그럴수록 더욱 강경책으로 밀어붙였다. 혁명주의자, 테러리스트들이 처형 당해 피비릿내가 도시를 가득 메우고 불길한 검은 먹구름은 전운을 감돌게 했다.
막 봄이 시작되는 겨울, 훗날 역사의 기록될 카오스력 9939년이 시작되고 있었다.
마로드 제국의 수도 불꽃의 하르소아.
황궁 앞, 황궁에 버금가는 하이시커 공작의 저택의 응접실에서 한 남녀가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남자는 갓 스물살을 넘긴 청년으로 어깨에 이르는 검은 머리를 부시시하게 퍼트리고 있고 여성은 제법 숙녀 티가 나 보이는 금발의 소녀로 한 참 기사들의 구혼을 받을 나이였다.
"그 머리 좀 어떻게 해. 내 친구들 앞에서도 그러고 있을 꺼야?"
금발의 소녀가 차를 한 모금 들이키며 말했다. 그러자 청년은 눈을 가리는 앞 머리를 아무렇게나 넘겨버리며 대답했다.
"나 마검황 레이논에게 시비거는 간 큰 레이디라도 있으려구."
"내 친구들이 지금 딱 그 모습을 보고 어떻게 전설의 마검황이라고 믿겠냐? 딱 철부지 수련기사로 보이지. 아주 어리버리한."
소녀의 말에 마검황이라 칭해지는 청년, 현진은 뭐 씹은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안 믿으면 믿게 만들지 뭐."
"무슨 수로? 내가 이야기 했지. 마나가 일시적으로 폭주해서 네 몸 속을 헤집고 다니기 때문에 당분간 네가 검기를 쓰기는 힘들꺼라고. 아예 마나를 다루는 것 자체가 안 될텐데?"
"안되면 되게하라. 그 것이 내 사고 방식이야."
퍽.
순간 현진의 손에 들려있던 찻잔에 푸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듯 하더니 이윽고 부스러져 나갔다.
"박지인, 너는 고정관념을 좀 깰 필요성이 있다니까.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소드 마스터 최상급 수준까지는 회복했어. 물론 카스 녀석하고 루나 도움으로."
"아직도 카스라는 그 검의 자아, 같이 있는 거니?"
지인의 물음에 현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슬며시 미소지었다. 지인은 아직도 이 이현진이라는 인간 대해 다 알지 못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똑. 똑.
노크 소리와 함께 두 소녀가 들어왔다. 한 명은 연녹색의 머리를 짧게 기른 여성이었고 다른 하나는 검은 머리를 좀 길게 기른 여성이었다.
"세라야. 안녕. 엇... 오빠 손님이시니? 실례했습니다."
검은 머리가 현진을 향해 허리를 살짝 굽혔다. 지인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여기 오는 남자 손님은 다 오빠 손님인 줄 알아? 내가 오늘 소개 시켜 준다는 사람이야."
지인은 두 친구를 보며 말했다. 현진은 몸을 이르키며 말했다.
"본인은 바일론 제국의 황제 폐하로부터 공작의 작위를 수여 받은 레이논 크리스티앙이라 하오."
"저, 저는 세르인 카르포르틴이라 합니다. 남작의 영애옵니다."
검은 머리가 당황스러워 하며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처음에는 이 댁의 주인을 찾아온 용병단장 쯤으로 여겼는 데, 알고 보니 일국의 공작인 것이다. 그 것도...
"저는 로라 샤이드론이라 합니다. 후작의 영애입니다. 대륙전쟁의 영웅, 마검황 크리스티앙 공작 각하를..."
"푸 하 하... 이현진, 내 예상과는 달리 내 친구들이 믿어주네?"
"야. 박지인, 너도 그렇게 웃을 줄 알았냐? 8년 전만해도 얌전한 아가씨로 알았는 데 말이야."
세르인과 로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현진과 지인을 바라보았고 그 둘은 손님의 눈을 의식하지 못하고 티격태격거렸다. 오랜 시간을 그래왔듯 이...
"저기인가?"
수민은 절벽 아래를 내려다 보며 부관에게 물었다. 부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예, 시어드. 절벽의 굴곡진 지형에 교묘하게 숨겨진 입구이옵니다. 이스란시어드의 정예들과 성기사들은 충분이 침투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사제나 마법사들은 이동 마법을 사용해야 하는 데 대규모 부대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반나절 이상은 마법진을 설치하는 데 투자해야 합니다."
"좋다. 그렇다면 척후 몇 몇을 보내고 그 동안 마법진을 설치하라. 그리고 본국과 바일론 황실에 통신을 연결하라."
부관은 수민의 발언에 의아해 하면 다시금 물었다.
"바일론에 말입니까?"
"그래."
수민은 그렇게 말하고는 절벽 아래 바다로 눈길을 돌렸다. 시리도록 푸른 바다. 겨울 바다가 수민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반나절이 흐르고 이윽고 8년간의 침묵을 깨고 다시금 전쟁이 시작된다. 소규모라 할지라도.
"연결되었습니다."
-여기는 바일론 통신부. 거기는 어디인가?
-여기는 마로드의 하이시커 공작. 레비던트 후작과 통신을 원한다. 가능한가? 아니면 헬던트 후작이라도.
-자,잠시 기다리십시오.
수민은 눈 앞에 펼쳐진 스크린의 사람이 잠시 사라진 것을 보며 느긋하게 팔짱을 낀 체 기다렸다. 이윽고 낳익은 얼굴이 보였다.
-광채... 이광채로군. 오랜만이야.
-그렇군. 박수민.
-지금부터 우리는 대규모 병력을 움직일 것이다. 소문을 들어서 알겠지만 목적은 네크로폴리스 토벌. 불가침 조약에 위해가 가는 것이 아님을 알린다. 너라면 다른 소리 못나오게 막을 수 있겠지?
-글쎄. 여기도 상황이 안 좋아. 앨런드가지 뭔지 하는 놈이 정치계를 장악해서. 크리스티앙 대공은 지병이 악화되셨고, 시르크 공작 각하는 자택에서 나오시질 않는 다. 아. 주위에 아무도 없는 가? 비밀리에 전할 말이 있다.
수민은 고개 짓으로 병사들이 물러가도록 했다. 수민 역시 할 말이 있던 참이었다.
-사마의 칸이라는 마법사에 대한 소문을 들어보았는 가?
-마족들을 수없이 처리했다는 전설적인 마도사를 말하는 가? 나는 부풀려진 이야기로 알고있다. 그 소문은 왜...
-사라졌던 거룩한 망나니 브리칸 시르크, 그가 사마의 칸이다는 정보, 아니 그의 편지를 받았다. 우영이 녀석이 두 눈으로 보고 왔으니 할 말 다 한 셈이지.
수민은 순간 스쳐가는 윤기의 얼굴을 되새겼다.
-그가 돌아와야 마로드에게도 좋은 소식이 있겠군. 정치계에서 우리측에 압박이 들어오지 않게 막아줄테니.
-그래...
-아차. 현진이 녀석이 여기 와 있다. 크리스티앙 대공이 편찮으시다는 소식 전하마.
-그래, 인연이 닿는 다면 언제 한 번 만나자고.
-그래... 인연의 실타레가 닿거든.
수민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통신을 종료했다. 그 때 병사들의 함성과 병장기가 붙이치는 소리가 났다. 부관이 달려오며 소리치고 있었다.
"적입니다! 대규모 좀비 부대가 몰려왔습니다!"
"성스러운 빛의 이름, 파이란의 가호여!"
"파이란 여신의 광휘여! 망자들을 잠재우라!"
"빛, 어둠마저 삼키는 빛의 권능으로!"
파이란의 성기사들의 외침이 울린다. 1천 이상으로 여겨지는 수많은 좀비들과 성기사, 이스란시어드 기사들의 접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수민은 파단신검破斷神劍을 휘두르며 좀비들을 베어나가고 있었다. 시체가 부스러지면서 영혼의 족쇠를 깨부스고 나타난 영혼들이 하나둘 파단신검의 깃들고 있었다.
"영인진影引陣!"
수민의 외침과 동시에 검 속에 깃들던 영혼들이 터져나가며 진세를 펼쳤다. 진세의 크기는 점점 커져나가 이윽고 좀비와 사람. 모두를 가두었다. 수민은 파단신검을 땅에 내려찍으며 외쳤다.
"구천을 떠도는 망자들이어! 영혼의 인도자의 부름에 응하라. 그대들이 있어야하는 곳으로 떠나라!"
영혼의 인도자, 샤먼인 수민의 부름에 좀비들이 하나 둘 쓰러지며 영혼들 떠올라 진세에 함류하기 시작했다. 점차 진세가 강해지며 끝까지 저항하던 좀비들도 결국에 쓰려져 진세로 흡수 되었다. 모든 좀비들이 쓸러지고 나자 이제 산 자를 향해 진세의 기운이 흐르기 시작했다. 수민은 파단신검을 뽐아 하늘을 향해 치켜 올렸다.
"죽은 자의 대지! 카오스의 품을 돌아가라!"
수민의 외침과 동시에 진세가 거두어졌다. 영혼들은 빛무리가 되어 승천하기 시작했고 성기사들과 기사들, 사제와 마법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후... 이,이젠... 지쳤어."
수민은 가뿐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그 때 영혼들이 사라진 자리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검은 로브를 둘러쓴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으 하 하! 오랜만이군요. 알베르 하이시커 공작 각하!"
수민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보는 순간 다시금 파단신검을 뽐아들었다.
"아스테르..."
"자, 자... 이현진. 그만하고. 자 이쪽은 내 친구 세인, 저 쪽은 로라야. 인사해. 고리타분하게 말고."
지인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현진 역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레이논이라고 합니다. 이현진이라고도 하고... 지인이, 아니 세라의 친구죠."
현진이 그렇게 말하자, 표정이 굳었던 두사람은 표정을 풀며 지인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검은 머리결의 세인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레이논이라... 마검황과 이름이 같으시군요. 처음부터 장난치시다니..."
세인은 지인의 반응을 되새기며 현진에게 물었다. 순간 현진은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가 마검황입니다만... 레이논이라는 이름이 흔한 건가?"
"아니... 봐, 내가 그랬지 왠만한 사람은 의심할꺼라고."
지인의 말에 현진은 몸을 이르켰다. 세인과 로라는 아직도 미심쩍은 표정으로 현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무리하면 안 좋지만... 루이너!"
현진의 부름에 루나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루나라고 불러주면 안되요. 그리고 쓸 때 없이 나오라고 하고...
-빨리 나와!
현진은 루나라는 알 수 없는 자아에 대해 다시 한번 되새기며 익숙한 무게의 물건을 잡았다. 현진은 적당히 검기를 실어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광염소나타, 세르나디우."
현진은 몇 걸음 옮기며 초식을 펼쳤다. 그러자 이 미터에 이르는 검기가 솟아오르며 사방에 검광을 이르켰다. 현진의 차분하게 초식을 끝맺으며 검기를 흩었다. 검기가 사방으로 뻗어나가자 세인과 로라는 비명을 질렀고 지인은 의외로 차분하게 검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현진은 다시 바닥에서 발을 때 움직였다.
"레퀴엠..."
이번에는 로라나 세인의 눈에는 현진의 동작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조금 달라진 검기가 먼저 뻗어나간 검기를 소멸시키며 사라지는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보았을 뿐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군... 광염 소나타..."
지인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현진을 바라보았다. 세인과 로라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현진을 바라보았다. 지인은 세인과 로라를 향해 말했다.
"내가 이야기 했었지. 오빠가 날 정략적인 도구로 결혼시키려 한다하더라도 달려와 줄 사람. 내가 진정으로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
현진은 루이너를 다시 팔찌로 되돌려 놓았다. 세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륙 전쟁의 영웅, 마검황... 그 칭호가 붙은 이유를 알겠네."
"정말 너희 오빠 조심해야 겠다. 널 어떻게 이용하려고 덤비다가..."
현진은 로라의 말을 들으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박수민... 그 자식이? 그랬다간 이 세상 하직해야지. 아예 하르소아를 초토화 시켜 버릴 꺼야."
로라는 갑자기 느껴져 오는 미미한 살기에 입을 다물었다. 왠지 모를 섬뜩함.
"우리 오빠가 그럴 사람 아닌거 알잖아. 마주교 시절에도 홍윤기 다음으로 고지식했던 사람인데."
지인의 말에 현진은 표정을 풀며 말했다.
"쿡쿡쿡... 그래. 갑자기 윤기 녀석 생각나는 군. 아. 두 분도 아시죠. 사라진 영웅, 거룩한 망나니. 브리칸 시르크... 그 녀석이 학창시절에 우리반 반장이었는 데, 떠들면 책상에다가 썬더 스톰을 떨어뜨리고... 어쩌고 저쩌고..."
현진은 그렇게 분위기를 전환하며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세인은 이야기 도중...
"어머, 그럼 대륙 전쟁. 그 전설같은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모두 같은 마주교 출신인건가요?"
로나는 이야기 도중...
"그런 그 아스테르라는 악마같은 자가 다시 나타난 건가요? 세상에..."
이런 식이었다. 지인 역시 이야기에 동참하면서 이야기는 점점 길어졌다. 세인과 로라 역시 지난 8년간 마로드 사교계에 있었던 일, 주로 세레니얼 하이시커의 화려한 등장과 사교계 평정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현진과 지인의 이상한 반응에 웃음 참지 못했다.
그렇게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모나드리우스 산맥에서는 혈전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수민은 지친 몸을 이르키며 아스테르를 노려 보았다. 평소보다 몇 배는 더 큰 영인진을 불러들인 까닭으로 몸 속의 마나가 요동치고 있었다.
"현진이 녀석과 계곡에서 맞붙었다는 게 당신이었군요."
"오호... 크리스티앙 공작 각하와는 달리 경칭을 써 주시다니 미천한 제가 몸들바를 모를 겠군요."
"여전히 빈정되시는 군요."
수민은 빠르게 검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현진이나 광채처럼 검기를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자연 속에 잠든 영혼이어. 그대 나와 함께하라."
수민은 신수(1)를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녹색의 빛무리가 수민에게 몰려들며 미미한 파장을 이르켰다.
"숲에 잠든 자의 힘. 포이즌 블레스터."
수민의 외침에 따라 녹색 빛무리는 아스테르를 향해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파단신검에는 이제 푸른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물과 영원을 함께 하는 자여. 워터 크라이."
푸른 빛은 은은한 파장을 동반하고 파단신검에서 쏘아졌다. 아스테르는 녹색 빛무리에 갇힌 체로 그대로 푸른 빛과 붙이치고 말았다. 수민은 파단신검을 땅에 꽃은 체로 주저 앉아 버렸다.
"헉. 헉. 나에게 이게 최선이군... 제길."
수민은 파단신검에 몸을 기댄체로 허공에 떠 있는 아스테르를 쏘아 보았다. 아스테르는 어느 새 빛무리들을 떨쳐버리고 여유로운 자세로 서 있었다. 아스테르는 수민을 향해 말했다.
"하 하 핫. 다 하셨나요?"
"아직 아니다!"
그 때 였다. 수민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조용히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병사들의 당황스런 비명이 들려왔다.
"공작 각하! 또 다른 언데드는 부대가!"
"시어드... 데스 나이트와 스켈레톤들이... 그 중에는 리치와 메이지 스켈레톤까지 섞여 있습니다."
병사들의 당황스런 외침들과는 달리 두번째로 등장한 언데드 부대는 병사들을 공격하지 않고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는 뼈로 이루어진 와이번에 올라탄 한 청년이 있었다. 그의 손에는 소검이 쥐어져 있었다.
"모든 영혼의 소망, 죽어간 자들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열어버린 금단의 도시, 신성한 네크로폴리스의 이름을 더럽히는 자. 사라져라!"
수민은 그 외침을 듣고도 도무지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본 와이번에 올라탄 청년은 검은 빛 로브를 벗어던져 버리며 외쳤다.
"전군 1급 대기령!"
그 청년은 그렇게 외치고는 본 와이번을 몰아 아스테르를 향해 날아갔다. 아스테르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검기를 막아내며 가사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8년전... 잊을 뻔한 얼굴이군. 김재광... 로니아 상단 리프시 지부장. 대륙 전쟁에서 큰 공헌을 세우고도 작위를 마다하고 실종된 인물... 이런데서 다시 볼 줄이야!"
"닥쳐라!"
재광은 그렇게 외치고는 다시 한 번 소검 시르카를 휘둘렀다. 금빛 검기가 대기를 찢으며 아스테르를 향해 날아갔다. 본 와이번은 가죽이 사라지고 기다란 뼈만 남은 날개를 퍼덕이며 아스테르에게 서서히 접근하고 있었다. 재광은 시르카를 본 와이번의 등뼈에 가져다 대면서 외쳤다.
"하타르시즘(2), 카메이시스!"
재광의 외침과 함께 시르카로 소혼되던 골드 드레곤, 카메이시스의 영혼은 어느 새 본 와이번에 빙의되었다. 뼈만 남았던 본 와이번은 황금빛에 뒤덮였다.
"홀리 브레스(3)!"
재광의 외침과 함께 굳게 다물어져 있던 본 와이번, 아니 카메이시스의 입이 열리면서 황금빛이 뻗어나왔다. 아스테르는 그 빛을 뒤집어쓰면서 중얼거렸다.
"오늘의 만남은 이정도로 해야 겠군요. 갑자기 할 일이 생겨서... 8년만에 세상에 나왔더니 상당히 제가 바쁜 신세군요. 하 하 하."
재광은 아스테르가 사라져간 허공을 허망한 눈초리로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을 내뱉었다.
"아스테르... 이 고약한 재회는 반드시 되값아주마."
마로드 군의 막사.
수민은 병사들을 물리고 테이블에 재광과 마주앉아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래만입니다."
어렵게 꺼낸 수민의 첫마디 재광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째서... 언데드 군대를 이끄는 지, 아스테르는 뭔지. 아시고 싶은 모양이군요."
수민은 재광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재광은 천천히 말을 꺼냈다.
"하... 사실. 당신들이 악행이라고 생각하는 일들을 벌인 것은 저희가 맞습니다. 단지... 파이란의 사제를 습격한 것은 아스테르였다는 것이죠. 그들은 네크로폴리스를 방패막으로 내세우고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었는 데 아마도 수도로 향하던 사제가 그걸 발견했던 모양입니다. 아스테르와는 몇 번이고 붙이쳤었습니다만... 매번 오늘처럼 도주해 버리더군요."
수민은 당황하면서도 차분하게 물었다.
"당신같은 사람이 왜 국가와 황실에 도전하는 겁니까?"
"국가에 도전한 적 없습니다. 다만 황실에 도전하고, 썩어빠진 정치세력에 도전합니다. 당신은 겉으로 좋은 귀족으로 보이만... 당신이 내어놓은 경제 개혁으로 많은 이들이 굶어 죽었습니다. 네크로폴리스의 좀비, 스켈레톤... 모두 그렇게 죽어간 이들의 마지막 부탁으로 눈물을 삼키며 만든 것들입니다. 그들의 육신으로... 데스 나이트나 리치들... 뜻 있는 모험가들이 자결하며 몸을 내어 놓더군요. 부디 좋은 세상을 만들어 달라며... 세상은 혁명을 원하고 있습니다. 귀족? 황족? 평민? 그런 것 없는 사회 말입니다. 꿈이고 이상일 뿐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그 꿈을 현실로 만들려 합니다. 빌어먹을 코스타인, 그리고 알베르 하이시커 공작 당신도 그 때가 된다면, 내 손으로 교수대에서 죽어간 이들에게 사죄하게 만들어 드리죠."
다음날 아침.
수민은 부관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재광을 네크로폴리스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군대를 되돌려 수도로 향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어제의 빚, 그리고 내 죄악의 대가로 그냥 돌아갑니다. 다음에 전장에서 만난다면... 나는 옳지 않을지도 모른 다는 것을 알면서 당신과 검과 영혼의 춤을 춰야겠군요. 이 나라, 이 황실이 오기까지 너무 많은 피가 흘렀습니다. 8년전 그 때... 그냥 무너지게 하기엔 그들에 대한 죄악이 너무 큽니다. 용서하시길.'
수민은 막 떠오르는 해를 뒤로 하고 발길을 돌리고 있었다. 모나드리우스 산맥의 해안 절벽... 그 곳의 동굴로 여명이 비춰지고 있었다. 언제가 벌어지게 될 피의 역사를 예감하지 못한 체...
네크로폴리스는 죽은 자의 염원을 담고 존재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용어 풀이]
(1)신수
죽은 자들 중 깨끗한 영혼은 가진 이는 자연에 깃들게 된다. 그 존재들은 샤먼의 의해 부려지게 되는 데 이들은 드루이드의 일부로도 해석되고 있으며 소서러의 일부로도 해석된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필멸의 섬에 일정 지역은 이 신수들이 많이 존재하여 신수의 땅이라 불리고 있다.
(2)하타르시즘
소혼을 하기 위한 주문의 일종이다.
영혼을 불러드려 자신이나, 매개물에 강림시키는 데 이용된다.
(3)홀리 브레스
골드 드레곤의 브레스 중 하나.
극신성의 속성으로 적에게는 강한 파괴, 적이 아닌 이에게는 치료의 힘을 지닌다. 골드 드레곤이 태어나면서 가장 먼저 가지게되는 브레스이다. 드레곤들은 웜급, 에이션트라는 단계로 나이를 먹어가며 다른 종류의 브레스는 더 사용하게 된다. 물론 본인의 창작이지만. 자세한 구조는 다음 기회에 설명하도록 하겠다.
『추억이라는 이름의 사랑』
두. 두. 두.
꽤나 요란한 소리로 빗줄기가 창문을 때린다.
이제 겨우 1월, 겨울 임에도 흔치 않은 비가 내렸다. 이 곳은 신미 대륙의 북쪽, 푸름 산맥의 한 가운데 자리한 푸름시였다. 평상시의 날씨라면 비가 아닌 눈이 내려야 정상이었다.
때 아닌 비에 묵직한 문위기가 흘렀다.
푸름시 마주교의 관사, 교감 선생 이진우의 방. 거실 테이블에는 두 남자가 마주 앉아 차를 즐기고 있었다. 한 명은 이제 중년의 나이에 이른 이진우였고 반대편에는 푸른 머리칼의 청년이 앉아 있었다.
"윤기야... 이제, 너도 세상에 나서야 할 때인듯 하구나."
푸른 머리칼의 청년, 윤기는 스승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다만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넘길 뿐이었다. 진우는 윤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로드에서 아스테르가 나타났다는 구나. 악신 카르테우스, 아니 마신이라 해야 겠구나. 그의 사제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이상 이제는 더 이상 이렇게 너 자신 안에 모든 걸 가두려 해서는 안된다."
"..."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다만, 윤기의 짙은 남청색 눈동자가 살짝 번뜩였다. 날카로운 눈매에 차가운 겨울 바다를 닮은 눈동자는 사람을 빨라드리는 듯 하다가도 흠칫 놀라 물러서게 만드는 괴이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손에 들린 찻잔을 내려 놓았다.
"카르... 테우스."
윤기는 그 이름을 더듬어 보았다. 마법사이기에 지식적인 면에서는 일반인의 수준을 넘어선 윤기였다. 물론, 떠돌아다녔기에 궁정 대마법사로서의 삶을 사는 화민이나 자신의 아버지, 그리고 눈 앞의 진우와 같은 대마법사들의 시식에 비할 바는 아니다.
카르테우스.
신화에 따르면 카오스와 파이란이 대륙을 만들 당시에는 수많은 신들이 이 차원에 자리잡고 있었고 그들도 나름대로 자신들의 대륙을 만들어내었다 한다. 그리고 전쟁의 발발. 이른 바 혼돈이 지상을 뒤엎었던 때라 한다. 수많은 신들은 전쟁을 이르킨 카르테우스의 손에 산산히 부서져 나가거나 카르테우스에게 흡수 당했다 한다. 카르테우스의 파괴 행각에 질려버린 종족들, 인간과 드레곤, 엘프와 드워프를 비롯한 요정족들은 최후에 살아남은 신의 진영에 자신들의 필연과 운명, 숙명이라 하는 삶의 끈을 맡겼다. 전세는 카르테우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듯 하다가 어느 새인가 카오스와 파이란 아래 모인 신의 진영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후의 전투. 그 때 카오스와 파이란은 자신들의 신성력을 최대로 발휘하여 카르테우스를 차원의 가장 어두운 곳,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 봉인하는 데 성공한다. 카오스와 파이란의 신성력이 남아 세상을 지탱하게 되었으며 신들은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힘을 최후의 전투에서 다 소비한 탓으로 휴식의 공간을 찾아 떠난다. 이리하여 카르테우스가 봉인당한, 가장 어두운 곳은 하계라 했으며 휴식의 공간은 신계, 천상계라 불리우게 되었다. 그리고 그 두 공간 사이의 뒤틀림, 혼돈의 잔해라 할 수 있지만 그 공간의 생명 스스로가 지상계라 칭한 지금의 대륙들.
"마족들의 움직이 최근 활발한 것도 관련있다할 수 있겠군요."
윤기의 말에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테우스가 신화라 불리우는 이 시대가 지난 이후 하계에서 한 일은 자신을 따를 새로운 생명체를 창조하는 것, 신들이 아름답다하는 존재 빛을 모아 탄생한 요정족들의 반대되는 어둠에서 탄생한 마족들. 그리고 카르테우스는 스스로 마라왕, 즉 마왕이 되어 마수들의 12마왕과 마족의 마장들을 거늘이고 전쟁을 준비하기에 이르른다. 신들에 대한 복수 전쟁을... 그러나 그 것은 인간들에 의해 무산되고 카르테우스는 소멸인지 봉인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지금, 그가 부활해서 돌아왔다.
"이제, 대마법사. 사마의 칸은 세상으로 다시 한번 역사를 쓰기 위해 나가시겠는 가?"
"그래야겠죠?"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서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봄이면... 카오스 전야제 이전까지는 수도로 떠날 예정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욕심이 좀 많아서 교사직도 버리기 싫군요. 아이들도 데려가려합니다. 저희 반 아이들 중 대표를 뽐아서, 수도에서 벌어지는 카오스 전야제, 황실 아카데미 마법 검술 대회에 출전할까 합니다. 교감 선생님께 보고했으니 제 멋대로 합니다."
진우는 윤기의 뒷모습을 보며 씩 웃었다. 꽤 마음에 드는 소리였다. 저 녀석... 왠지 공작 각하보다 나를 더 닮아가는 것 같단 말이야. 라는 흐믓한 생각을 하며 진우는 남은 차를 목으로 넘겼다.
똑. 똑.
노크음에 울렸다.
관사 306호실. 홍윤기 선생이라는 문패가 달린 방에 노크음이 울렸다. 윤기는 짧게 말하며 책으로 눈을 돌렸다.
"들어오세요."
윤기가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고 있는 동안 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은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좀 진한 갈빛의 머리칼을 짧게 자른 여성이었다. 허리에는 롱소드 하나가 걸려 있었고 검사같지 않은 원피스 차림이었다.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은 그녀는 눈 앞에 앉아 있는 홍윤기를 보며 외쳤다.
"반장!"
윤기는 갑작스러워 놀랐다기 보다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 곳에는 낯익은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머리길이는 많이 짧아졌지만, 윤기는 잠시 거희 10년전이라 할 수 있는 때를 떠올리며 미소지으며 말했다.
"여전하구나. 김지혜."
"오옷. 우리 반장은 많이 얌전해 지셨어. 교실 가운데 썬더 스톰 떨어뜨리던게 어제 같은 데... 그 때 보라만 멀쩡했던건 감정이 실려서 그렇지."
"그 때 나는 너에게 유감은 없었지만, 보라한테 호감이 있었던 건 사실이야. 그리고 우리반 녀석들치고 이 홍윤기 님의 뇌전 줄기를 피한 녀석은 없었어."
"두 녀석 있잖아."
윤기는 그 말에 잠시 추억에 잠겼다. 엄청난 속도로 떨어지는 썬더 스톰을 피해버리는...
"이현진, 이광채... 맨날 싸우면서도 사랑의 뇌전은 잘도 피하더군. 뇌전 줄기는 그렇다고 쳐도 뇌력 폭풍도 동반하는 데 말이야."
윤기는 그렇게 말하며 지혜를 자리에 앉게 하고 차를 준비했다. 지혜는 윤기를 보며 물었다.
"머리는 왜 길렀어. 반장?"
"자르기 귀찮아서... 전에도 그냥 기르려고 했는 데 황궁에 있을 때 시르피가 잡아당겨서 말이지. 그리고 나 이제 반장이 아니라 선생이야."
윤기는 그렇게 말하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지혜는 윤기를 보며 사뭇 심각하게 물었다.
"왜 보자고 하셨지? 사마의 칸 선생?"
"켁... 이제 보는 사람 족족 그 소리군.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이 위안이 되지만."
윤기는 장난스럽게 지혜의 말을 받으며 말을 이었다.
"마로드에 좀 가줘야 겠어."
"마로드?"
"정확하게 알베르 하이시커 공작 각하에게 말이지. 아, 그리고 현진이 녀석도 그 곳에 있을 테니 편지도 좀."
"참 잔인한 심부름이군. 좋아."
지혜는 그렇게 말하면서 두 통의 편지를 받아들었다. 윤기는 걸어나가는 지혜를 보며 한마디했다.
"지금처럼 계속 마음에 품고 있는 것 좋지 않아 지혜야."
"충고 고마워 반장."
지혜는 그렇게 말하고 방을 나섰다. 윤기는 잠시 현진과 지인, 지혜와 우영을 떠오리며 중얼거렸다.
"바보들..."
네크로폴리스는 아스테르가 멋대로 넘볼 수 있는 영역이 아닌 듯 하다.
네크로폴리스 자체도 샤머니즘의 신앙을 가진 샤먼의 일파가 세운 곳으로 네크로폴리스의 입장에서는 프리스트의 도시다.
모든 신과 역하는 카르테우스의 사제가 침범할 곳은 아니지.
다만...
네크로폴리스에 대한 이 때까지의 좋지 않은 소문을 아스테르가 악용할 수도 있다. 그 점에 유의하며 되도록 평화적으로 네크로폴리스의 대표와 접촉하라. 물론 귀족들의 반발이 거셀 테니 비밀리에.
아스테르의 등장이 대륙의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모르는 일이다.
이 것이 최근 왕성해진 마족의 움직임과 관련있는 것이라면, 초대 마라왕인 카르테우스의 재건 혹은 카르테우스 교단의 재창립이 비밀리에 추진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마족들은 바일론, 아스테르는 마로드. 이렇게 분열된 움직임으로 보아 목적이 다를 수도 있다. 조사가 필요할 듯하니 이스란시어드의 병력을 움직여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만약 마족과 카르테우스의 사제들의 목적이 다르다 하면 그 둘의 이해관계를 이용할 필요가 있다. 소수의 강자만이 존재하는 우리 인간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대륙이 피로 물들 수도 있는 법이다.
또한 현진의 귀환은 빨리 해 주길 바란다. 내가 수도에 도착함과 동시에 본격적으로 움직일 것이다. 그 전까지 네크로폴리스 측과의 접촉, 그리고 마족과 카르테우스의 사제들에 관한 조사가 끝나 있기를 바란다.
-사마의 칸, 브리칸 시르크.
쾅!
하이시커 가의 저택, 짧은 머리칼을 한 이십대 초반의 여검사를 앞에 세워둔체 수민은 책상을 내리쳤다. 종이를 든 오른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듯 하다가 이네 부스러져 사라졌다.
"홍윤기. 8년간 이리저리 뒹굴다가 온 주제에 누구에게 이래라 저래라야!"
쾅!
수민은 다시 한 번 책상을 내리쳤다. 짧은 머리칼의 여검사는 수민을 보며 말했다.
"너무 하는 거 아냐? 윤기도 생각이..."
"생각? 네크로폴리스는 이미 반역자로 확정된 녀석들이야. 그 놈들과 뭐? 최대한 평화적으로? 미친 녀석. 거기다가 이스란시어드를 이용해서 조사나 하라고? 수도를 비우면 쳐 들어와서 대륙 통일이라도 할 작정이라던냐! 엉?! 말해봐 김지혜!"
지혜는 허리에 걸려 있던 검을 뽐아 수민의 책상에 냅다 꽃았다. 수민은 지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참 특이하게 변했군. 성격 많이 더러워졌어. 좋아. 바람의 장로께는 실패했다고 전해 드리지."
지혜는 그렇게 말하고는 방을 나섰다. 수민은 지혜가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책상에 엎드려 고개를 파묻었다.
"지금 나에게는 대륙 따위는 생각할 머리가 남아있지 않아. 아버지, 젝슨과 베일루스 후작.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피, 그 피의 강을 건너 지금에 이른 나로서는... 대륙 전쟁이란 상처가 너무 크군... 크 흐 흐. 김재광. 당신의 이상. 꼭 이루시오. 이 못난 사람의 피를 헤치고 말이오. 크 흐 흐 흑... 흑..."
수민의 중얼거림은 흐느낌이 되어갔다. 수민은 지금 이 순간 무엇이 나라를 위하는 길인지 혼란에 휩싸였다. 민중의 자유를 위해 싸워야하나, 황실의 안위를 위해 자리를 지켜야 하나...
재광의 말은 수민에게 큰 충격으로 자리 잡았다.
혁명... 그 두 글자가 점차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지도 모른다.
지혜는 한숨을 내쉬며 집무실을 나섰다. 그 때 반대편 복도에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지혜는 가만히 귀를 기울여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네 친구들 꽤 예쁘던데?"
"너 바람 피울 생각이면 죽어."
"아, 알아모시겠습니다. 나의 여왕님."
능청스러운 사내의 목소리와 부드러운 여성의 음성, 지혜는 그 자리에 딱 멈춰서게 되었다. 이윽고 반대편에서 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나져 쓸쓸한 표정이 지어졌던 얼굴은 점점 미소로 바뀌어갔다. 거짓 미소일지라도 지금은 미소 지어야지. 지혜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박지인. 여기까지 와서 못보고 갈 뻔했는 데 때마침 딱 하고 마주쳤는 걸."
"지혜? 김지혜? 지혜 맞지? 머리칼을 그렇게 잘라버리다니! 못 알아볼 뻔 했잖아!"
"6개월만이군. 김지혜..."
현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일부러 지혜의 시선을 피했다. 지인은 조용하던 성격이 많이 활달해진 반면 현진은 이상하리 만큼 조용했다. 지혜는 자신 때문인 줄 알면서도 무심코 내뱉었다.
"이현진답지 않게 그렇게 풀이 죽었냐? 지인이가 구박 많이 하냐? 우리 용병 아저씨 한 분도 마누라한테 바가지 긁히고 오면 너처럼 되더라."
지혜의 웃음.
현진은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인은 차라도 한 잔 하자며 오던 길을 되돌려 지혜를 자신의 방으로 이끌었다. 현진은 농담을 주고 받으며 웃고 있는 두 레이디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젠... 그저 추억이겠지. 가슴 아픈 이야기 따윈...'
흐릿하게 한 소년이 시야에 들어왔다.
뭐지...
"우앙! 지혜야... 아랫 동네 자식들이 이렇게 만들어 놨어잉!"
그 소년은 어느 소녀를 향해 뛰어가며 투정을 부렸다. 그 소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 소년의 머리를 콩 한 대 쥐어 박았다.
"바보. 혼자서 키 큰 오빠들한테 넘비니까 지지."
"씨... 그 자식들... 그 자식들이..."
그 소년은 가뿐 숨을 들이쉬며 분하다는 듯 옆에 있는 나무를 주먹을 내리쳤다가 아픈지 눈물을 찔끔거리며 말을 이었다.
"윽... 아프다... 그 자식들이 엄마 없는 자식이라고 놀렸어! 제길... 더러워서."
소년은 침을 딱 뱉었다. 소녀는 멍으로 얼룩진 소년의 얼굴을 쓰다듬는 다. 소녀의 눈에는 작은 눈망울이 맺혀 있었다.
"그래... 그랬구나."
소녀의 침울한 표정에 소년은 어리둥절하다. 평소의 소녀라면... 사고쳤다고 잔소리를 늘어놓아야 하는 데... 아는 다음 소녀, 아니 내가 내뱉었던 한마디를 너무 잘 안다.
-내가 네 엄마가 되어 줄게.
"내가 네 엄마가 되어 줄게."
소녀는 소년을 꼭 끌어 안으며 중얼거렸다. 소년은 나직하게 속삭였다.
"지혜야... 울지마."
-네 눈물은 보석이란다. 보석은 함부로 흘리고 다니는 게 아냐.
소년, 아니 어린 시절의 현진...
나의 첫사랑... 아팠던 외사랑의 기억.
현진의 말이 귓가에 스친다. 눈물이 보석이라... 어린 녀석이 참 시적인 표현을 썼던 것 같다. 과거의 조각. 그 파편이 지금 내 가슴을 찌른 이유는 뭘까. 아직 잊지 못한 것일까. 그래서 아직 8년전 우영이의 고백의 대답조차 하지 못하는 것일까? 아직도 재자리 걸음인 건가? 난 나약할 뿐인가?
-사랑해.
!
누군가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친다.
최우영. 이현진보다 더 바보같은 녀석.
난 내 상처만 생각하고 내가 주는 상처를 보지 못하고 있겠지. 8년전에도 지금도.
지금도... 혼란스럽다.
아직까지는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주지는 못한 것 같다.
아직까지는...
지혜는 침대에서 몸을 이르켰다. 무의식적으로 뒷쪽의 머리칼을 쓸어내리려고 했다. 손은 허공을 쓸어내리고 지혜는 머리를 자른 사실을 상기하며 몸을 이르켰다.
바이샤 항의 여관.
머물다가라는 지인의 권유를 뿌리치고 다시 돌아가기 위해 나섰다. 육로를 이용해 푸름 산맥의 용병단 진지로 돌아가야 하는 몸이지만 왠지 세레네즈에 가 보고 싶어졌다.
최우영이라는 또 하나의 바보 얼굴도 볼 겸.
이제는 추억일 뿐이다.
다짐하고 또 하지만 힘들다.
지혜는 검을 꺼내 허리에 차고 여비가 든 돈주머니를 챙겼다. 검의 일정 경지에 오르니 갑옷이나 특별히 무거운 검이 필요없어졌기에 몸도 가벼운 편이다. 달려서 가도 금방이지만 해로에 비해 골치 아픈 출입국 절차가 기다리고 있기에 배를 탔다.
바다 바람이 불어오는 항구는 세계 3대 미항이라는 명성 못지 않게 퍽 아름다웠다.
'추억이라... 이걸 그렇게 부를 수 있을 까?'
지혜는 그렇게 자신에게 물었다. 그러다가 결국 혼자 머리를 흔들며 생각을 지웠다. 아니다. 이건 사랑이지.
추억이라는 이름의 사랑.
추억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 아까운 사랑.
그래서... 지혜는 이 마음을 곱게 접어두기로 했다. 언제인가 아름다운 마음, 아름다운 추억으로 불리울 때까지.
『가짜 드레곤 소동』
이제 봄이 다가온다는 것이 몸에 다가올 정도로 공기가 제법 따스해졌다. 찬바람만이 감돌던 푸름 산맥의 푸름시에도 어느새 훈훈함이 찾아 왔다. 밤이면 여전히 찬바람이 감돌지만 사람들은 참 많이 따뜻해졌다고 혀를 내두른다.
마주교 교감인 이진우 선생과 새로 들어온... 아무튼 용병 출신으로 보이는 선생 하나가 몇 칠을 뛰어다니며 친 날씨 조절 결계도 제 역활을 하고 있어서 푸름시는 어느 겨울보다 따뜻했다. 날씨 조절이라고 해 봐야 조금 공기를 훈훈하게 한 것이지만 몸을 떨며 밖에 나가길 꺼릴 정도는 아닌 것이다.
사람들은 이 결계가 어느 스승과 제자의 어의없는 내기에 의해 생겨난 것을 모르고 있었다.
푸름시의 어느 술집.
잘해 놓고도 내기에 져 버린 한심한 스승이 제자들을 이끌고 술을 퍼 마시고 있었다.
"제길... 얼마나 차이난다고... 억울해."
그 한심한 스승, 홍윤기 선생은 기분 좋게 술을 들이키는 제자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특수반 깡패들의 우두머리 격인 동민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정확해야죠. 0.01 사이오닉 테라도 용납 못해요."
윤기는 인상을 팍 쓰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성인식도 안 치룬 놈들이 술 퍼마셔도 되는 거야?"
"선생님 있으니까 괜찮잖아요? 안 그러냐? 이동민."
장난스러운 켄트의 한마디, 윤기의 속을 박박 긁고 있었다. 샨은 다시 한 번 결계를 가늠해보면서 중얼거렸다. 특히 '자칭' 이라는 말에 힘을 주면서.
"'자칭' 대마법사라시는 분이 결계에 마나 양 하나 딱 못맞추실까..."
윤기는 얼굴이 붉어지면서 뭐라고 한마디 외칠 태세를 갖추었다.
"어른스럽지 못하게 그런 것 가지고 물고 늘어지냐? 이미 끝난 문제고 기분 좋게 맥주 한잔씩 마시면 좋은 거아냐?"
선생까지 특수한 이 못말리는 특수반의 반장, 유호상의 한마디에 윤기는 헛기침을 하며 목 끝까지 올라오던 외침을 삼켰다. 그 때 동민의 단짝 근태가 씩 웃으며 말했다.
"뭐 어때? 재밌잖아. 반장. 이보다 더 멋진 안주는 없음이야!"
"크크큭... 오랜만에 바른 소리 하는 군."
켄트의 빈정거림. 근태는 켄트의 머리를 한대 쥐어박으며 말했다.
"형님에게 그런 소리하면 못써."
"엇. 누가 형님이라는 거야!"
"정신 연령이 나보다 한참 떨어지는 녀석인지라 형님도 못 알아보는 군. 형~님! 해봐!"
크크큭.
아이들의 낮은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때 한 소녀가 술잔을 들고 와서 윤기 앞에 소리나게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조용~히 마시고 가라시네요. 자꾸 시끄럽게 떠들면 교감 선생님께 이른다나 뭐라나?"
"아잉... 한나. 그건 너무했다."
켄트의 닭살 돋는 소리에 아이들은 다시 한번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한나는 인상을 팍 쓰며 말했다.
"정말 교감 선생님께 이른다."
"걱정마. 걱정마. 이진우 그 늙은 노인네 한테 허락 받았어! 마셔 마셔!"
윤기의 말에 아이들은 다시 한 번 웃음을 터트리며 술을 들이켰다. 사고를 치고 다니는 건 주로 남학생들인지라 특수반은 남자 녀석들 뿐이었다. 덕분에 윤기가 마음 놓고 수업이랍시고 운동장에서 뛰어다니게 만들지만. 한나는 특수반 아이들과 같은 학년의 학생으로 특수반 아이들과 어울리는 몇 안되는 여학생이었다.
"이봐! 홍윤기! 너무 시끄러워서 다른 손님들이 뭐라고 하잖아!"
"죄송합니다. 매튜 씨. 저도 내기에 진 처지라 별 수 없군요."
윤기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고 한나의 아버지 매튜는 윤기 옆에 털썩 주저 앉으며 한나를 향해 말했다.
"한나야. 나도 맥주 한 잔 다오."
"예."
한나는 매튜에게 대답하면서도 켄트와 눈싸움을 하다가 매튜의 주문에 혀를 내밀어 보이고는 주방 쪽으로 사라졌다. 켄트는 분하다는 표정으로 그 쪽을 바라보다가 이내 술로 관심을 돌렸다.
"흠... 몰래 마시던게 더 맛있었는 데..."
"뫼야! 그럼 네 녀석은 이 위대하신 스승님 몰래..."
"많이 마셨죠."
켄트의 뻔뻔스러운 대답과 똥씹은 표정의 윤기. 그 둘 사이에서 매튜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냥 술이나 마시지 그러나."
윤기는 내일 수업 시간에 죽었다는 메세지를 아이들을 향해 전달했고 아이들은 일제히 켄트를 쏘아보았다. 그나마 처음에는 깡패 녀석들에 의해 엉망진창이던 반이 지금처럼 화기애애(?)해진 것은 윤기가 가르친 조그만(?) 성과였다.
그 때...
쨍그랑...
"꽤 예쁘게 생겼군. 좋아 이 몸에 품에 안길 수 있는 영광스러운 기회를 주도록하지."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아이들은 그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쫓았고 그 곳에는 호위병 쯤으로 보이는 두 사내에게 양 팔을 붙잡힌 한나가 서 있었다. 뒤에서는 귀족 쯤 되어보이는 한 청년이 느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친 놈."
켄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허리에 걸린 검을 뽐아들었다. 귀족 청년은 켄트를 보며 말했다.
"거기 꼬마! 무슨 불만 있나? 이 아이가 네 애인 쯤 되나 보지."
켄트는 귀족의 말을 흘려들으며 슬쩍 한나를 바라보았다. 겁에 질린 얼굴로 몸을 떨며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켄트가 막 검을 날릴려는 찰나 한 그림자가 켄트 뒤 쪽에서 튀어나와 귀족 청년의 턱을 후갈겼다.
"행동은 빨리 하는 게 신상에 좋아."
동민이었다. 켄트는 씩 미소지으며 말했다.
"이동민. 요즘 들어서 마음에 드는 짓만 골라서 하는 군."
"..."
동민은 말 없이 주먹을 호위병 쪽으로 돌렸다. 켄트도 다른 호위병을 향해 달려들며 외쳤다.
"귀족 나부랭이에게 밥 받어먹는 쓰레기야! 이거나 먹어랏!"
켄트의 검을 미쳐 피하지 못한 호위병은 왼팔에 작은 검상을 입었다. 호위병은 분노하며 켄트의 오른팔을 잡고 꺽었다. 켄트는 고통을 참으며 외쳤다.
"샨! 뭐해! 파이어볼이라도 갈겨!"
"이,이놈들... 감히 나 카스트 크리스찬에게 덤비다니! 모두 감옥에 쳐 넣어주마!"
윤기는 그 귀족 나부랭이의 외침 속에 들려온 '크리스찬' 이라는 성을 드고 꿈틀하며 중얼거렸다.
"크리스찬 가에는 항상 쓰레기들 뿐인가..."
윤기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이들에게 공격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아이들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저마다의 무기를 뽐아들고 덤벼들었다. 호위병들은 막 켄트와 동민을 떨궈내고 다시 한나를 붙잡으려다 아이들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귀족은 얼굴을 붉히며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거기 서시요. 카스트 크리스찬!"
멈칫.
카스트는 순간 멈춰서며 뒤도 안 돌아보며 외쳤다.
"평민 따위가 내 이름을 멋대로 부른 것을 후회하게 해 주마."
"좋소. 단, 멋대로 남의 술집에서 행패를 부린 것도 내가 친히 응징해 주겠소. 나를 후회하게 만들겠다면 이름은 들어두셔야 겠군."
윤기는 아이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카스트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
"브리칸 시르크라 하오. 기회가 닿으면 수도에서 보도록 하지."
꿈틀.
카스트는 몸을 획 돌려 윤기를 쏘아보았다.
"귀족을 사칭한 죄도 넣어주마!"
윤기는 차가운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호위병들은 자신들을 벌이고 간 주인을 뒤쫓아 급히 가게를 벗어낳고 한나는 그제서야 울음 터트리며 매튜의 품에 안겼다.
"카스트... 크리스찬이라..."
윤기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선생님!"
샨은 매튜의 가게를 벗어나 관사로 향하는 윤기를 향해 소리쳤다. 아이들은 저마다 집으로 돌아가고 매일 뭉쳐 다니는 삼총사 녀석들이 윤기의 뒤를 쫓은 것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귀족이라고 떠벌리신거예요? 대충 거짓말이라고 무마했으니 괜찮지만... 나중에 저 쪽에서 귀족 사칭죄라도 물어오면, 크리스찬 후작 가문과 한 판 붙기라도 하시겠단 말씀이세요!"
"목소리 낮춰라. 샨."
윤기는 흥분에서 펄펄 뛰는 샨을 향해 말했다. 샨은 여전히 씩씩거리며 뭐라고 한마디 하려고 했다. 그 때 켄트가 나서면 샨의 입을 틀어막았다.
"선생님이 떠벌리신 건 둘째치고 너 때문에 천하의 거룩한 망나니께서 푸름시에 있다는 거 다 소문 나겠다."
샨은 계속 뭐라고 소리쳤지만 켄트의 손에 입을 막혀 아무런 목소리도 세어 나오지 않았다. 그들을 묵묵히 따르던 호상이 사뭇 진지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이제... 수도로 돌아가실 때가 다 되었군요."
윤기는 어색한 헛기침을 하며 관사의 문에 들어섰다. 세 녀석들이 따라들오는 것을 뭐라고 하지 않고 계단을 걸어올라갔다. 어느새 3층에 이르른 윤기는 복도를 따라 걸었다. 호상이 말을 이었다.
"대충 들어서 알고 있어요. 크리스찬 후작의 실종, 시르크 가문에 정치적 매장, 거기다가 대공 전하의 병환이 깊어지셨다죠?"
윤기는 호상의 말을 못들은 척 306호실의 문을 열었다. 윤기가 방안에 들어서자 세 녀석이 우르르 따라 들어섰다. 맨 뒤에 들어오던 호상이 문을 닫자 켄트가 샨의 입에서 손을 때며 중얼거렸다.
"우씨. 더럽게 침묻었잖아."
그러면서 샨의 망토에 쓰윽, 손을 닦자 샨이 기겁을 하며 외쳤다.
"손 씻어! 이게 뭐하는 짓이야."
"귀찮아서."
켄트의 대꾸에 기가 막힌 듯 샨은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윤기는 바닥에 털썩 주저 앉으며 말했다.
"앉아라. 이 녀석들아. 정신 사납게 서 있지 말고."
윤기의 말에 셋은 윤기 옆에 주저 앉았다. 윤기가 씩 웃으며 말을 꺼냈다.
"호상이 말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윤기는 그렇게 말하며 세 녀석을 쭉 훝어보았다. 윤기는 장난끼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일단 내가 수도로 돌아가는 것은 맞다. 크리스찬 후작의 실종 사실도 맞어. 대공 전하께서는 필멸자인 인간으로서의 명운이 다 하신 것이고, 하지만 과연 시르크 가문이 정치적으로 매장된 것일까? 조용히 함정을 파고 있는 것일까?"
윤기의 말에 셋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윤기를 바라보았다. 윤기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버지도 아직은 많이 안 낡으셨단 말이야. 아무리 크리스찬이라는 작자가 설쳐 봐야 이 쪽에는 자금력의 로니아 여백작, 군사력의 레비던트 후작, 마법사들 정도는 가볍게 누를 수 있는 궁정 대주술사 헬던트 후작, 여행이나 다니는 철부지로 보이지만 황실 근위대를 이끄는 크리스티앙 후작, 그리고 저들은 모르지만 순백의 위저드의 중립을 깨뜨릴 수 있는 나도 있고... 처음엔 밀리는 게 사실이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다르지. 크리스찬 후작을 아버지가 암살했다고? 그런 소문으로 정치계에서 매장 시키겠다고? 크리스찬 후작을 반역자라 처단했다고 하면 그만이야. 알프레드 크리스찬 백작이 덤비겠지. 그러면 그 역시 반역자라고 목을 잘라버리면 되. 오히려 칼라이스를 꿀꺽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꼴이지. 저들이 아버지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워놓고도 쉽사리 떨어뜨리지 못하는 이유는 벼랑 아래로 떨어져도 살아남을 사람이라는 알기 때문이지."
호상과 샨은 이해가 간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켄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켄트?"
드르렁...
순간 켄트를 제외한 셋은 뒤로 넘어간 것이... 아니라 켄트 녀석을 화장실로 끌고 가서 묵사발을 만든... 것도 아니라 욕조에 처 박아 놓고 찬물을 부었다. 그래도 잘자는 켄트...
"이야기... 우리끼리 계속하죠?"
샨은 아주 어의없어 하며 윤기를 향해 말했다. 윤기도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호상은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며 중얼거렸다.
"이야기 하는 그 찰나에 잠들다니..."
"... 자 어떠냐! 멋진 계획이지 않니? 그 싸가지 녀석 골탕 좀 먹이자고."
윤기는 한시간 동안 샨과 호상을 데리고 카스트 크리스찬이라는 귀족 놈을 골탕 먹일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러나 윤기의 계획에 호상은 질린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드레곤이라뇨? 드레곤 흉내를 내다가 진짜 드레곤한테 걸리기라도 하면..."
"에이션트 급만 아니면 1:1로는 어떻게 해 볼 실력은 된단다. 용언마법 4급 마스터 5급 익스퍼트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실력이 아냐."
윤기의 말에 같은 마법사인 샨은 혀를 차며 말했다.
"자만이 하늘을 찌르는 군요."
"땍! 스승님한테 못하는 말이 없어!"
"쳇. 선생이면 단가?!"
"다닷! 어쩔 테냐!"
샨과 윤기가 토닥거리며 싸우고 있을 때 욕실 쪽에서 물을 질질 흐리며 켄트가 어그적 어그적 기어나오고 있었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 잠 좀 자자... 애취!"
"풋..."
"큭..."
"..."
푸하하 하 하
관사 306호에서 웃음 소리가 울려퍼질 쯤 해가 뜨고 있었다. 이 못말리는 한심한 스승과 세 제자는 사악한(?) 음모를 꾸미며 밤을 지센 것이다.
콰광...
아침부터 푸름시는 시끄럽다.
조용하기만 하던 시골 도시에 아침부터 폭발음이 들려오고 아직 잠을 덜 깬 이들이 눈을 부비며 폭발음을 쫓아 영주의 성 앞으로 몰려들었다. 사람으로 보이는 한 존재가 허공에 떠서 영주의 성, 정원을 향해 손짓을 하고 있었다. 그의 손짓에 따라 여기저기 폭발이 일어 났고 하인들은 혼비백산하여 하나 둘 성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영주인 아실가르 남작과 그의 아들 라스피드는 남작 부인과 남작의 영애를 하인들과 함께 도망시키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늘에 떠 있는 존재는 손짓을 멈추고 남작과 그의 아들, 라스피드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의 긴 머리가 바람에 날렸다. 검은 빛의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신이 선택한 필멸의 존재들이여 들어라!"
그 존재는 아래에 보이는 인간들을 보며 외치고 있었다. 군중들은 그를 보며 웅성거렸고 손가락질을 해 보이는 이도 있었다.
"나 블랙 일족의 카르시엔은 이 곳을 레어로 삼고자 한다. 하찮은 필멸자들이어. 당장 이 곳에서 나가라."
순간 사람들은 벌때가 일어난 것처럼 웅성거렸다. 말투를 보아 폭악하기로 유명한 블랙 드레곤임이 분명했다. 영주는 그런 군중들을 조용히 시키며 자신을 카르시엔이라 밝힌 블랙 드레곤을 향해 외쳤다.
"이 곳은 나의 주군이신 네프칼 2세 현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신 영지. 나는 귀족이나 하나의 기사로서 이 곳을 그대에게 내어줄 수 없었다!"
'짜식... 꽤 멋진 말을 하잖아.'
그 존재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눈꼬리를 살짝 치켜 올리며 손으로 남작의 바로 옆을 가리켰다. 군중들은 남작을 가리킨 것으로 보겠지만...
콰광.
다시 한 번 폭발음이 울렸고 남작은 바로 옆에서 화염이 치솟자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져 나갔다. 라스피드는 아버지가 튕겨나가는 것을 보고 겁에 질린 체로 외쳤다.
"내,내가 당신의 제... 제물이..."
"네 놈이 제물이 될테니 내 아버지를 살려주고 영지도 그냥 두라고? 네 놈은 노예로 가치가 좀 떨어져. 부려 먹을 맛이 안 난단 말이야. 좋아. 대신..."
"크윽... 선생님 인간 맞어? 유희 나온 드레곤 아냐?"
"목소리 낮춰. 바보야."
군중들 속에 파묻힌 세 학생은 상황을 즐기며 서로 속삭이고 있었다. 켄트와 샨, 호상이 그들이었다. 샨은 켄트의 입을 막은 뒤 위의 상황을 올려다 보았다.
"... 대신 이 몸이 오셨는 데도 건방지게 성안에 쳐 박혀 있는 인간을 내놓아라."
샨은 약간의 환상 마법으로 푸른 색의 머리칼과 눈동자 색을 바꾼 윤기가 귀족들을 약올리는 모습을 보며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고 있었다. 그 때 옆에서 강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샨은 흠칫 살기의 행방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 바로 옆에는 붉은 머리칼의 젊은 여성이 서 있었다. 퍽 아름답다고 할 만한 여성이었음에도 지금 순간에는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로 인해 공포스러움 그 자체였다.
"필멸자... 주제에... 으득... 우리 일족의... 으득... 흉내를... 으득... 내다니... 으드드득."
샨은 결국 염려하는 일이 터졌노라고 생각하며 호상과 켄트의 손을 붙잡고 무턱대고 사람들을 비집고 그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막 군중들의 틈을 벗어나는 순간 한계점을 벗어난 그녀의 인내가 터지면서 엄청난 쇼크 웨이브가 일어났다. 그리고 잠시후 샨은 하늘로 치솟아오르는 붉은 빛을 볼 수 있었다.
여유롭게 상황을 즐기고 있던, 카르시엔 아니 윤기는 부들부들 떨며 밖으로 나온 카스트 크리스찬을 거만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귀족이라는 놈이 저렇게 겁이 많아서야... 윤기는 속으로 혀를 차고 있었다.
"겁많은 버러지 같은 놈... 내 놈은 노예로 부리면 재밌을... 응?!"
윤기는 순간 뒤통수를 향해 쏘아져 오는 강한 살기와 엄청난 마나를 느끼고 몸을 순간적을 위로 피신했다. 윤기가 떠 있던 자리로 붉은 빛무리가 지나가 성에 적중하며 어마어마한 폭음을 만들어내었다.
"흠... 헬 파이어 블레스터. 9클레스..."
그 장면을 바라보는 윤기의 표정은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상대방은 그런 윤기를 바라보며 살기를 뿜고 있었다.
"나는 레드 일족의 디켈루인 세비지. 필멸자 주제에 우리 드레곤 일족의 흉내를 낸 것을 뼈져리게 후회하게 해 주마!"
윤기는 그녀의 이름을 듣고 일그러진 얼굴을 펴며 중얼거렸다.
"저 빨갱이 도마뱀을 또 만나다니... 묘한 인연일세."
윤기는 레드 드레곤이라는 여성을 보며 살짝 미소 지어 보였다. 평소 같지 않게 약간은 사악해 보이는 미소 였지만.
"[모든 지상의 화염이어 내 안에서 깨어나라!]"
윤기는 천천히 용언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여성은 묘하게 얼굴을 일그러 뜨렸고 윤기는 다시 한 번 미소 지으며 주문을 완성시켰다.
"[대지를 태우고 강마저 매마르게 한 태초의 화염이어. 나를 따르라!]"
순간 영주의 성, 정원의 바닥이 갈라지면서 화염 기둥이 솟아올라 여성을 향해 쏘아져 갔다. 여성은 슬쩍 피하면서 입을 움직였다. 윤기는 순간 주문을 외우는 줄 알고 피하려다가 귓전에 낯선 언어가 들려오는 것을 느끼고 멈췄다.
-@$%&?*?!@$#
-하 하 핫... 이런... 전 인간입니다. 디켈루인 세비지.
윤기는 그 낯선 언어가 '진짜 용언'인 시드란 어 임을 느끼고 메세지 마법을 시전했다. 여성, 정확하게 레드 드레곤 디켈루인 세비지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윤기를 바라보았다. 윤기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8년만이군요. 접니다. 브리칸 시르크.
윤기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했다. 엄청난 기억력의 소유자인 드레곤답게 짧은 인연을 떠올린 디켈루인은 여전히 황당한 표정이었다. 머리길이는 그렇다쳐도 푸른 색 머리칼이 검게 될 수는... 그리고 저 인간에게 느껴진 마나는 에이션트 급과 맞먹는. 즉 적어도 자신보다는 3000살은 더 먹은 드레곤이라는 소리였다.
-환상 마법으로 잠깐 눈속임한 것 뿐입니다. 얼굴 형태도 좀 바꿨죠. 그나저나 어쩐 일이십니까? 그 때 세르반 님께 돌아가신다고...
-쳇! 인간 주제에 마나는 드릅게 많구만... 근데 왜 우리 종족 행세를 하고 있지?
-뭐같은 녀석이 있어서 혼줄을 내주느라 쇼를 좀 벌렸습니다. 잠시만 저를 도와주십시오. 알고 있던 드레곤인 척. 친구인 척 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윤기에 말에 디켈루인은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내가 안 도와주면 그 막대한 마나로 어차피 공격할꺼잖아. 협박! 이지 부탁!이 아닌거 아냐?
-빈센트 님의 얼굴을 봐서라도 그렇게는 못합니다. 그러니 부탁하지요.
-쳇. 말이라도 못하면 뭐라고 하지 않지. 빈센트랑 잘 놀고 있었는 데, 세르반 할아버지 부탁 아니었으면 여기 오지도 않았어. 어쨌든 이 일 도와주면 같이 좀 가야겠어.
-그건 좀... 일단 저기 빤히 쳐다보는 사람들부터 어떻게 좀 하죠.
"이런... 죄송한 일이. 블랙 일족의 지혜롭기로 소문나신 칸 카르시엔 님을 몰라뵈다니. 모든 드레곤 일족의 스승이시어! 어찌 분노하고 계시옵니까... 이 칼 루이에가 도울 일은 없는 지요."
한참 침묵을 지키던 두 사람, 갑자기 여성 쪽에서 이런 말이 흘러나오자 사람들은 '어쩌면 둘이 싸우다 물러나지 않을 까' 하는 희망을 버릴 수 밖에 없었다.
-모든 드레곤 일족의 스승은 세르반 님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디켈루인, 아니 칼 루이에.
-후 훗. 원래 본명은 잘 안 밝히는 거니까 들어둬. 그리고 세르반 할아버지 하면 로드보다 더 존경받으시고 드레곤 일족을 통틀어 가장 영향력이 크신 분이지. 신에 버금간다는 소문도 있고. 절대 고룡의 칭호를 받으신 실버 드레곤, 테라칸 세르반 하면 당연 드레곤 일족을 통틀어 가장 위대하신 스승이시지. 로드의 스승이기도 하걸.
-그,그런가요?
루이에의 장황한 설명에 잠깐 당황한 윤기는 대답하는 걸 잊고 있다가 허둥지둥 카스트 크리스찬을 가리키며 외쳤다.
"아니, 아니. 됬단다. 그나저나 저 자식을 노예로 받고 이 분노를 가라앉힐까 하는 데 내 의견은 어떠냐?"
"칸 카르시엔 님 알아서 하십시오."
윤기는 카스트 크리스찬을 잠시 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난 마음에 안드는 녀석이니 너에게 선물 하마. 알아서 부리거라. 그럼 이만."
-크윽... 정체가 들킬 것 같아. 대충하고 사라지니 뒷처리 부탁합니다. 참 성을 부순다거나 사람에게 해가 가게 하지 마시고 저 녀석만 족치세요.
윤기는 그렇게 두 가지 말을 남기고 허공에서 사라져 관사로 이동했다. 이동을 마쳤을 때는 환상마법을 해제되어 원래의 윤기로 돌아와 있었다. 윤기는 과다한 마나의 소비로 피로를 느끼며 침대 위로 털썩 쓰러졌다.
윤기는 그대로 눈을 감고 잠에 빠졌다.
윤기와 루이에.
지금 마주교 관사에서 탁자 하나를 사이놓고 치열한 신경전을 펼치고 있었다. 루이에는 엄청나게 건방진 필멸자 하나 때문에 살짝 돌아버리기 일부 직전이었으며 그 필멸자는 태연하게 말하고 있었다.
"거래하실 거예요? 마실 거예요?"
"야! 가짜 드레곤! 너 지금 나 협박하냐?"
루이에가 크게 소리치자 윤기라는 녀석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미친 놈."
"미치지 않았으면 혼자서 마족하고 싸울 생각도 안했었구요. 미치지 않았었으면 우영이하고 보라 앞에서 정체를 밝히지도 않았겠지요. 인정하죠. 미친 놈이라는 거."
으드득.
이가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려오자 윤기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샨과 켄트, 호상은 식은 땀이 등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윤기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거래하셔야죠. 아니면 세르반 님께 혼나실거잖아요? 세르반 님이면 로드보다 강할 텐데..."
으드드드득.
루이에는 이를 갈면서도 말했다.
"거래하지. 조건은 세가지라고 했지? 뭐지? 말해봐."
"하나는 세르반 님께 가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을 도와달라는 것. 두번째는 드레곤 본을..."
"뭐시라?!"
루이에는 순간 윤기의 말허리를 자르며 외쳤다. 이번에는 윤기도 조금 당황했는 지 루이에를 보며 말했다.
"왜 그러시는 지. 드레곤은 나이를 먹어갈수록 마나로 몸을 재구성하기 때문에 뼈 정도는 쉽게 얻을 수 있다던데..."
"우씨. 그건 고룡들이 그렇고. 나는 아직 팔팔한 청춘. 아직 마나가 아니라 살과 뼈로 몸을 이루고 있다고. 뼈 하나 뽐으면 얼마나 아픈데. 다른 걸로 해! 오리하르콘 정도라면 드워프들 족쳐서 얻어줄께."
"거래는 없던 걸로...."
"알았어! 알았어! 대신 딱 필요한 만큼. 조금만이다. 뭐 만들건데."
윤기는 루이에를 보며 사악한 미소를 지으었다. 자신이 만들려는 것은 평범한 검의 길이 조차 넘어서고 드레곤 본으로 절대 만든적이 없는 물건이었다. 왜냐고? 그러기에는 너무 아까운 제료니까. 또 그 물건에 적합하다고 볼 수도 없는 제료였다. 그 물건이란...
"스태프."
푸름시 길드탑의 지하. 깊숙한 방에서 젊은 남녀가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길죽한 붉은 금속에다가 손을 올려놓고 주문을 외운다거나 마법진을 그리고 그 위에 금속 막대기를 올리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마법사가 쓰기에는 무거우니까 경량화 마법도 걸죠. 용언으로 할까요?"
"우씨. 말시키지마. 마나 집어넣는 것도 힘들단말이다. 근데 어떻게 드레곤 본으로 스태프를 만드는 거냐? 다른 인간들은 아까워서 못하던데... 검같은 거 만드는 데 쓰는 거 잖아."
이 둘은 다름 아닌 윤기와 루이에였다. 드레곤 본을 노리는 이목 탓에 성찬이 마련해 준 곳에서 제작을 하고 있었다. 윤기의 거래 조건 세번째는 스태프에 마나를 불어넣어 달라는 것이었다. 윤기는 루이에의 물음에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제가 들고 다니던 나무 스태프 기억하세요?"
"물론."
"그 스태프의 이름은 소르하노르. 범상치 않았다는 것은 않았지만 제료가 실버 드레곤의 드레곤 본이었고 놀랍게도 드레곤 하트가 함께 녹아 섞여 있었지요. 놀라운 것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드레곤 본은 그 것에 세기는 마법의 증폭, 혹은 봉인의 힘이 있었습니다. 소르하노르는 지금 상태에서는 일종의 방어마법만이 걸려 있지만 아마도 일종의 봉인을 풀면 다른 마법들도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어디서 들은 적 있는 것 같군. 그런데 그런 좋은 스태프가 있으면서 왜 이런 건 만들어서 날 고생시켜. 뼈 뽑아서 마디가 쑤시는 구만..."
루이에는 이제 어느 정도 형태를 갖춘 스태프에서 손을 때며 말했다. 윤기는 차분히 말했다.
"다른 사람 줄꺼예요."
"이진우라는 네 스승?"
"아뇨. 제자한테요."
"제자?"
"샤느트 아플론... 그 녀석에게요."
"그래... 좋다 그럼 내가 멋진 이름을 주지! 넌 지금부터 카르시엔이닷!"
"그,그 이름은..."
"왜? 가짜 드레곤 씨. 불만이신가?"
"아니... 어쩌면... 좋아요. 심판의 불꽃. 카르시엔으로 하죠."
다음날.
푸름시의 마주교, 2학년 8반 학생 네 명이 조기 졸업을 하는 기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아이들은 입을 떡 벌리고 학교 교문을 나서는 그들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와 함께 2학년 8반 선생, 홍윤기 역시 길을 나섰다. 2학년 8반 녀석들은 새로 담임이 된 이진우를 싹 무시해버리고 교문까지 나와서 배웅했다.
"이동민... 우승 못하면 죽인다."
윤기의 손에 이끌려 조기 졸업을 하게 된 동민. 고아로 뒷 골목에서 소매치기로 커온 그가 이제 당당한 마주교 졸업생이 되어 수도에서 열리는 황실 아카데미 마법 검술 대회에 출전하러 간다. 그의 동료로는 샨과 켄트, 호상이 동행하게 되었다.
"김근태, 너도 빨리 졸업해라."
동민은 무심히 근태를 향해 한마디 툭 내던졌다. 윤기는 수업을 땡땡이 친 아이들을 허탈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진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감히 나를 무시하다니.' 라고 얼굴에 써 놓은 체 한숨을 쉬고 있었다. 윤기는 씩 웃어보이며 말했다.
-선생님, 이제 다시 떠나렵니다. 더 이상 숨지만은 않을 께요. 혼자서 끙끙 거리지도 않을 께요. 선생님이 자랑하실 제자가 되겠습니다.
-그래. 스승보다 잘나서 아이들을 선동하는 '잘난' 제자니 잘하겠지. 가거라.
윤기는 미소 지으며 발길을 돌렸다. 다시 한 번 바일론 제국의 수도, 순백의 세레네즈를 향해. 8년이 지난 신미 대륙에서 펼쳐지는 새로운 이야기는 지금부터가 진정으로 시작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