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꽃』
자그마한 꽃
새하얀 그 꽃은 마치 안개와 같아서 손으로 잡으려하면 부서지고 그대로 두면 바람에 흩날려 사라져 버리죠. 홀로는 위태로워 보여 잡아두고 싶어도 그저 바라보며 눈물지어야 하지요.
사람들은 안개꽃이라고 하지요.
이 자그마한 꽃을...
쏴아아.
이른 봄, 신미 대륙에도 봄비가 내렸다. 제법 굵은 빗줄기가 저택의 창문을 두드린다.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보던 청년은 옛날 이야기처럼 속삭이듯 들려오는 목소리를 쪼차 몸을 돌렸다. 그 곳에는 연두빛 원피스를 차려 입은 여성이 서 있었다. 그녀는 작고 새하얀 꽃 한아름이 꽂힌 유리 꽃병을 손에 들고 있었다.
"세나... 였나요?"
"세나 유크리트, 후작 각하를 뵙습니다."
세나라는 여성은 살짝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후작이라 물리운 청년이 다시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 이야기... 나에게 잘 어울리는 군요. 그 꽃병은 책상 위에 놓아 주겠어요?"
"그러죠."
세나는 꽃병을 내려놓고 방을 한 번 둘러보다가 쇼파에 앉았다. 사방에는 책이 꽂혀 있었고 책상과 쇼파, 낮은 탁자가 방 안 가구의 전부였다. 세나는 쇼파에 앉아 침묵을 지켰다. 익숙한 분위기이지만 언제나 어색하다고 세나는 생각했다. 그 때 뜻 밖에도 후작이 입을 열었다.
"나에게도... 저 꽃과 같은 사람이 있지요. 잡아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내 손에 다칠까 염려스러웠고 잡아주지 않으면 혼자 울고만 있기에 나조차 눈물짓는 그런 사람."
세나는 항상 모든 여성에게, 아니 모든 사람에게 차갑기만 했던 후작의 입에서 저런 말이 흘러나오자 약간 놀랐다. 후작은 씁쓸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영천현인影舛賢人, 하르니칼 헬던트 후작에서 이런 말이 나오니 이상한가요?"
"아,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나라는 인간을 이해 못하고는 하지요. 궁정 대주술사인 헬던트 후작이기 전에 최우영이라는 인간인데 말이죠."
후작, 아니 우영은 슬픈 어조로 중얼거렸다. 세나는 그런 우영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듣고 싶네요. 안개꽃을 닮은 그 사람에 대해서."
"왜죠?"
"저라도... 저라도 후작 각하를 이해하고 싶어서요."
우영은 몸을 돌려 세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작은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세나는 왠지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헉... 헉... 역시 한 번에 오는 건 무리였어."
세레네즈의 외각. 작은 숲 속의 공터에는 짧은 섬광이 일며 일곱명의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서희(네프리아)와 윤기, 디켈루인(루이에)와 푸름시 마주교의 네명의 조기 졸업생들이었다. 디켈루인이 드레곤의 자존심이니 어쩌니 하면 안면몰수, 싹 무시해 버리고 윤기 혼자 시전하게 만들어버린지라 홀로 대륙 종단을 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사정을 모르는 동민은 윤기의 엄청난 능력에 놀라 허둥지둥 거렸고 윤기는 샨의 부축을 받으며 디켈루인을 쏘아보았다.
"치사한..."
윤기는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일행은 그 뒤를 따랐고 윤기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서 가자! 황성 안에 가면 저택이 하나 있다! 늙은 노친네 하나 하고 하인들만 살아서 방은 많지. 거기 가면 편히 쉴 수 있다! 제군들! 전진!"
"윤기야. 그 노친네가 시르크 공작 각하시라면 우리는 동의 할 수 없어. 귀족 모독죄거든."
서희는 심각하게 말했다. 윤기를 부축하던 샨 역시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켄트는 윤기를 보며 말했다.
"어이. 브리칸 시르크 씨. 이제 선생 아니니까 말 놓겠수. 근데 당신 아버지를 노친네라고 불러되는 거요?"
"아버지?!"
동민은 비명을 지르듯 외쳤고 윤기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 노친네는 항상 내 속을 썩여서 결국 귀하신 몸을 방문하게 했으니 그렇게 불려도 싸."
"반대겠지..."
서희가 나직하게 중얼거리자 윤기를 고개를 푹 숙이고 말 없이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들의 시야에는 어느 덧 새하얀 외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영은 천천히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현진과 함께 성찬 아저씨 손에 이끌려 용병단을 찾았을 때 작고 귀여워 보였던 짧은 갈색 머리칼의 꼬마 소녀. 항상 현진과 자신을 향해 누나라고 부르라고 요구하던 긴 갈색 머리칼의 소녀. 현진을 홀로 좋아하면 괴로워 하던 소녀.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하던 기억. 프랑드 시에서 했던 고백. 그리고 기나긴 기다림. 그리고 지금의 자신.
"바보였군요. 후작 각하는."
세나는 이야기가 끝나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우영은 세나의 표정을 살폈다. 순간 세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마치 큰 잘못을 하고 선생님 앞에 서서 쭈뼛거리는 학생같은 우영이 너무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우스운가요?"
우영의 얼굴이 완전히 굳어버렸지만 세나는 여전히 미소지으며 말했다.
"후작 각하의 표정이 너무 우스워서요. 그게 뭐예요? 사랑이 죄인가요?"
"죄이지요. 지혜에게는. 그리고 난 바보 맞아요."
"그렇죠. 바보구 말구요. 남자면 남자답데 당당하게 말하지. 그렇게 혼자 끙끙 앓으면 어떻해요. 그건 아니네요. 정말."
"남자면 남자답게... 풋... 현진이 녀석이 떠오르는 군요. 그 녀석이 나에게 주로 하던 소리거든요."
우영은 잠시 감상적으로 변했다. 한껏 부드러워져가는 우영을 보며 세나는 미소지었다. 하나의 조각상 같았던 우영에게 이렇게 인간적인 면이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하며 말했다.
"항상 그런 표정을 지어보세요. 궁정 주술사들이 후작 각하 무섭다고 난리랍니다. 나이 많은 어르신도 벌벌 떤다는 군요."
"그런... 가요?"
"네."
우영은 미소지으며 세나에게 말했다.
"부탁있는 데... 들어주시겠어요?"
"부,부탁이라뇨. 명령하시면 이행하겠습니다. 후작 각하. 전 각하의 비서인걸요."
"아니. 정말 부탁이예요. 후작 각하 소리하지 말고 이름 불러 주겠어요? 푸름식 이름이 어색하다면... 그냥 하르니라고 불러주세요."
"가,각하."
우영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세나는 가슴이 뛰고 얼굴이 달아오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우영은 부드러운 어투로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오늘 일정은 어떻게 되죠? 세나?"
우영이 가볍게 몸을 이르키며 말했다. 속 시원하게 털어놓고 나니 기분이 꽤 괜찮아 진 것이다. 우영이 막 세나와 함께 방을 나서려는 때 노크와 함께 하녀 하나가 들어오며 말했다.
"홍윤기라는 분이 찾아왔습니다."
"그 분께 나중에 다시 찾..."
우영은 윤기를 돌려보내기 위해 뭐라고 말하려 했다. 그 때 하녀 뒤에서 보랏빛 누더기, 정확하게 망토를 걸친 사람이 나타나며 말했다.
"바쁘신가? 최우영."
"아, 홍윤기. 지금은 보시다싶이 궁정 주술사들과 회담을 해야 하고, 이스탈 회의에 참석도 해야 하고... 또..."
"좋아. 그럼 간단하게 해결해 주지. 지금 당장 의장의 권한으로 이스탈 회의는 내일로 미룬다. 궁정 주술사들이야 알아서 연구같은 거 잘하니 신경 쓸꺼 없고. 자 그럼 자리에 앉아서 천천히 이야기나 하지."
윤기는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해 버리고 쇼파에 털썩 주저 앉았다. 세나는 그런 윤기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다가 다가가서 한마디 하려고 했다. 그런데 윤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신가? 레이디."
세나는 순간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위압감 때문에 존칭을 스고 말았다.
"세나 유크리트입니다. 후작 각하께 무례하셨습니다. 법도가 맞지 않습니다."
"유크리트... 유크리트 남작의 영애인가? 아니면 친척? 아무튼 그럼 나도 법도를 갖춰 제대로 소개하지."
윤기는 몸을 이르켜 우영과 세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이름은 브리칸 시르크. 사람들이 거룩한 망나니라 칭해 주는 망나니같은 귀족이지. 현 순백의 위저드 바람의 장로직을 맞고 있으며 지금은 아버지이신 공작 각하의 권한 대행 중이네. 그럼 최우영. 그간 수도 사항이나 들어 보지."
세나는 벌여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서 있었다. 우영은 세나에게 미소지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편하게 하세요. 저 녀석. 실력이 있으면서도 여행이나 할 정도로 어딘가에 구속되는 건 싫어하거든요. 덕분에 모두 깜빡 속았죠."
윤기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혜한테 일러 바칠까? 최우영 바람 피운다고."
"이미 다 봤습니다. 거룩한 망나니 씨."
우영와 윤기는 순간 고개를 돌려 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곳에는 지혜가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우영은 지혜를 보며 약간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오래만이군."
"그래... 오래만이야. 홍윤기. 네 녀석이 부탁한거 다 했어. 수민이가 좀 이상하게도 부탁에 응하지 않더군."
지혜의 말에 윤기는 몸을 이르키며 말했다.
"예상대로군. 나름대로 복잡하리라고 생각하긴 했으니... 자, 시간을 잘못 맞춘 것 같으니 나는 사라지지. 아무래도 나는 빠지는 게 좋은 것 같으니. 거기 레이디도 나가실까요?"
세나는 윤기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윤기는 세나의 손을 놓아주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 안개꽃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멋진 이야기예요."
윤기는 그렇게 말하고는 헬던트 후작가의 저택을 벗어났다. 세나는 바람처럼 스쳐간 사람과의 인연이 이 것이 끝이 아님을 모르고 있었다. 단지 소문처럼 정말 괴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1년만인가? 앉아."
지혜는 조심스레 자리에 앉으며 우영의 얼굴을 살폈다. 변한 건 없는 지 여전히 최우영, 그대로 인지 혹시 아직까지 자신 때문에 아파하고 있지는 않는 지.
"저기... 우영아."
"동정이라면 그만둬. 난 8년 동안 기다린 사람이야 기다림이란 이제 내 생활일 뿐이지. 그러니 동정할 필요는 없어."
"..."
지혜는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인체 말했다.
"그냥 찾아와 봤어. 수도에 와서 네가 생각나서. 그냥 무작정 달려와 봤어. 나도 내가 왜 그랬는 지는 몰라. 하지만... 그냥 그랬어."
지혜는 몸을 이르켜 방을 나서려했다. 우영은 시선을 창가로 돌리며 말했다.
"그래. 아직 내가 부담스러워면 가렴. 하지만 아직은 네가 나에게 하늘이라는 것. 아직 나는 달라진 것 없다는 건 기억해."
지혜는 잠시 망설이다가 방을 나섰다. 그 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 여성이 지혜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세나 유크리트라고 합니다. 에프론 여백작 각하와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까요?"
"당신은 진정으로 후작 각하, 아니 하르니를 사랑하십니까?"
지혜는 조용한 뒤뜰로 들어서자 마자 세나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세나는 당황한 지혜를 보며 말했다.
"하르니에게 들었지요. 두분의 이야기를. 저는 그 분이 아파하시는 게 왠지 싫어요. 아니, 이제는 그 분이 아파하시면 저도 아플 것 같아요. 저는 하르니를 하르니칼 헬던트라는 한 인간을 사랑하게 된 것 같아요."
지혜는 잠시 세나를 바라보았다. 세나라는 이 사람은 지난 번에도 본 것만 같다. 20살이 되던 해. 대륙 전쟁의 ,공로를 인정받아 윤기를 제외한 일행은 작위를 수여 받게 되었다. 그 때 저 세나라는 사람이 후작이 된 우영의 비서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지혜는 어쩌면 지난 3년간 자신보다 더 우영이를 챙겨주던 저 사람이 자신보다 더 사랑할 자격이 많은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학창 시절... 저는 누군가를 많이 챙겨주고 신경 써 주는 편이었어요. 제 친구라면 누구나 세세한 부분, 부족한 부분을 챙겨 주었지요. 하지만 우영이는 그럴 필요가 없었어요. 난 단지 우영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어른스러워서 라고만 생각했었지요. 생각해보면 나 때문이었지요. 우영이는 내가 신경쓰는 게 싫어서 항상 완벽해지려고 했어요. 그리고 오히려 나에게 더 해 주려고 했죠. 그런 것이 우영이었어요. 전 받기만 했죠. 현진이 때문에 울었을 때도 우영이가 위로해줬거드요. 8년전, 그 때 우영이는 저에게 사랑한다 이야기 했죠. 저는 답을 할 수가 없어요. 미얀해서. 부담스러워서..."
"당신은 역시 사랑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네요. 당신은 사랑이 무언지 모를 지도 모르죠."
"그래요! 난 그렇게 살아왔죠. 앞으로도 그렇게 바보같이 살지도 몰아요! 하지만 적어도 사랑이 무언지 알아요! 당신이 나를 그렇게 평가할 자격은 없어요."
"당신이 우영이라 부르는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저에게는 그럴 자격이 충분해요."
세나는 숨을 들이쉬며 말을 이었다.
"사랑할 자신이 없으면 떠나요. 그 사람을 더 이상 힘들게 하지 말고."
황궁 한켠에는 이스탈 회의 일파의 회의장이 자리하고 있다. 바일론 제국은 대대로 무武와 상商에 의해 통치되어 왔고 무신들과 상인들 간의 긴밀한 관계로 정계의 균형이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제4차 왕권 교체 이후 신흥 귀족 세력을 지지하는 네프칼 왕조가 들어서면서 정통 귀족들의 귀족원과 무신들의 칼라이스를 누르기 위해 이스탈 회의가 생기게 되었고 신흥 귀족들은 오로지 무신과 보수적 정통 귀족을 누르기 위해 뭉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힘이 강성해지면서 어느 새 분열이 일어났고 그 결과 바일론 제국의 오랜 역사 동안 오로지 침묵해왔던 체이필드 공작가가 정계의 진출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그래서 이렇게 서둘러 이스탈 회의에 참석하려고 설치는 거지."
황궁 내부, 복도를 지나던 청년이 말했다. 옆에 서 있던 여성은 청년을 보며 염려스럽다는 투로 말했다.
"홍윤기. 넌 아직 시르크 가문의 가주가 아니야. 이건 명백한 월권이라고. 설마 성질대로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럴꺼야. 노친네들이 고분고분하게 안나오면. 아, 그리고 지금 나는 시르크 공작의 권한 대행자 신분이자 후계 서열 1위라고."
윤기의 말에 여성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윤기를 향해 말했다.
"후계자가 너하나 뿐이잖아."
"긍정적으로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그냥 유일한 후계자보다 서열 1위라고 하는 게 더 좋아보이잖아. 보라야 너도 좀더 긍정적인 사고를..."
"말 같지 않은 소리 그만하고 회의장 다 왔으니 들어가자."
윤기는 회의장 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보라가 의아한 눈으로 보자 윤기는 씩 웃어보이고는 다시 얼굴을 굳히며 문을 응시했다. 보라는 얼핏 윤기의 망토자락이 슬며시 날리는 것을 보았다. 그 때.
"[나를 따르는 화염의 의지여. 나에게 그대의 힘을 선사하라.]"
윤기의 입에서 용언 마법이 흘러나오며 문을 날려버렸다. 안에서 시르크 공작을 기다리던 귀족들은 웅성거리며 일제히 윤기를 향해 시선을 모았다. 윤기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시르크 공작 옆으로 보이는 상석에는 후작인 우영이 앉아 윤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걱정이 베어 있었다. 주로 젊은 층인 이스탈 회의 의원들은 윤기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여기가 어디라고 소란을 피우는 것이냐! 황궁 안이니 아무나 들이지 않았을 터. 그대는 누구인가! 크리스찬 후작이 보낸 암살자인가?"
핏발을 세우며 소리치는 작자의 이름은 카르센 남작. 상인 출신이었다. 윤기는 코웃음치며 그를 향해 외쳤다.
"카르센 남작! 근래 칼라이스 방문이 잦은 듯하다던데 어떠신가!"
카르센 남작은 얼굴을 붉히며 더욱 큰 소리를 쳤다.
"누가 누굴 모함하는 것이냐!"
"모함이라. 그대들은 손님을 이런 식을 맞이 하는 가? 거기 리세프론 백작! 어떻게 생각하시요!"
리세프론 백작, 그는 윤기와 만나적이 있었다. 그는 윤기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8년전을 떠올리며 순간적으로 몸을 떨었다. 그 때는 아직 무디기만 하던 눈속의 날카로움이 어느새 매섭게 자라있었던 것이다. 리세프론 백작은 몸을 이르키며 말했다.
"죄송하게 되었소이다. 몇 남지 않은 이스탈 회의의 초기 의원으로서 사죄하는 바이오."
그는 그렇게 말하고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이제 수장이 되실 분이어. 이스탈 회의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리세프론 백작의 말에 회의장이 순간 소란스러워졌다. 윤기는 뒤에서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몰라하는 보라를 무시한 체 백작의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는 모두가 일어서서 웅성거리는 가운데에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헬던트 후작, 우영을 향해 외쳤다.
"헬던트 후작! 내 자리가 어딘지 말씀해 주시겠소이까?"
"우후훗. 브리칸 시르크. 바람의 장로 나으리. 그대는 아직 공작이 아니오. 단지 권한 대행자일 뿐이지. 시르크 공작 각하의 말씀이나 전해 주시오."
의원들은 또한 번의 강한 충격을 입었다. 그들의 상상은 마법 조금 쓸 줄 알아 8년전 공을 세우고 우쭐해져 멋대로 여행을 떠나 실종된 철부지 귀족 소년으로 기억하고 있던 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브리칸 시르크라는 일물은 그들이 상상하던 거룩한 망나니가 아니었다.
"권한 대행자라... 별 수 없군. 물갈이는 다음에 하고 있단 오늘은 한마디만 하겠소."
윤기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방식이었겠지만 나는 내 방식으로 하겠소. 그럼 오늘의 회의를 마치도록 하지."
윤기는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려 회의장을 벗어났다. 보라가 얼 빠진 표정을 하고 있을 때 뒤에서 리세프로 백작이 다가와 말했다.
"미얀하네 로니아 여백작. 내 딸아이도 왔는 가?"
"예? 아... 시르크 공작가에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고맙네."
"훌륭한 아버지시네요. 딸에게 만큼은."
"무슨 뜻인가?"
"아닙니다. 아무 것도..."
보라는 경민, 즉 렉스를 떠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멀어지는 리세프론 백작의 뒷모습이 경민과 꽤 닮았다는 생각이 얼핏 스쳐지나갔다.
지혜는 세나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저택을 나와버렸다. 어쩌면 그녀의 말처럼 자신이 떠나주는 것이 옳을 지도 몰랐다. 지혜는 지금 신분을 숨기고 김지혜라는 이름으로 여관에 틀어 박혀 있다. 그녀는 한숨만 지으며 창가에서 서성였다.
"과연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엄마... 전 어떻게 해야 하죠."
지혜는 엄마가 어릴 적 가르쳐 주었던 한 별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 별은 지혜의 별이라고 했다. 그 별은 시리도록 파란빛을 뿜고 있었다. 예언자였던 그녀의 어머니는 천문에도 능했다. 그녀가 말하던 자신의 미래는 슬픔과 행복이 함께 하리라 했다. 그녀가 말한 것이 이 것일까? 과연... 지혜는 지금 가장 행복하다 해야 겠지만 또한 슬펐다. 또한 지혜는 어머니가 너무도 뛰어난 예언자라는 사실이 이 순간 싫었다. 차다리 그 예언이 현실과 어긋나기를 빌었는 데...
결국 운명을 따라 닿았다. 지혜는 창가의 기대어 고민하다 잠들어버렸다. 그녀의 눈에 알 수 없는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칼론 유크리트 남작.
몰락 귀족으로 정통 귀족이지만 개혁주의적이라 정통파의 배척을 받음. 신흥 귀족 세력에서 역시 정통파라 하여 배척함. 현제 남작은 수도 방위 제3기사단을 이끔. 타고난 무골임과 동시에 지략가.
정계 진출을 위해 딸을 사교계가 아닌 헬던트 후작의 비서로 보낼 정도로 욕심도 있는 사람. 그의 딸, 세나 유크리트는 현제 정계로 진출할 가능성이 높은 귀족 자제 중 하나로 알려짐.
아들도 하나 있으나 멋대로 공부한답시고 떠나버려 사실상 내놓은 자식임. 남작은 아들이 없다고 말하지만 남작 부인은 남편 몰래 그간 돈을 조금씩 보내준 것으로 조사됨. 아들의 행방을 몰라 사실상 유크리트 가문은 대가 끊길 위기에 처해 있음. 조사에 따르면 그 아들이란 녀석이 푸름시에 있을 거라함. 남작 부인의 하녀에게서 나온 말이므로 믿을 만함.
-순백의 위저드 제9연대장, 카타르
"... 푸름시에 있을 거라고?"
시르크 공작의 저택, 아버지를 대신하여 서재를 차지하고 각종 업무를 처리하던 윤리는 예전에 자신을 돕던, 지금의 순백의 위저드 제9연대장 카타르로 부터 보내져 온 모종의 조사보고서를 읽다가 푸름시라는 글자에서 눈을 때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있을 때 푸름식 이름을 가지지 않은 이방인은 넷, 그 중 매튜와 한나는 제외해야 하고 샨 역시 마로드 귀족인 아플론 가문의 후손이라고 했으니 제외해야 한다. 남는 것은...
"설마 켄트 녀석, 본명이 켄트 유크리트라던가 그런건 아니겠지? 하긴... 그러면 난 일을 쉽게 해결할 수 있으니 피곤할 일은 없고 좋지만."
윤기는 혼자 중얼거리다가 잠시 몸을 뒤로 젖혀 기대었다. 윤기는 잠시 잠을 청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바보 같은 최우영... 이번엔 지혜 좀 잡아라."
똑 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문이 열리면서 한 여성이 들어왔다. 사교계의 여성들과는 달리 마치 용병같은 차림의 여성이었다. 짧은 갈색머리는 잘 어울리면서도 왠지 모르게 어색했다. 여성을 맞이한 남자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왠일이지? 나의 하늘께서 나를 봐 주기 위해 와주시고. 황송하군."
여성은 약간 굳은 표정으로 남자를 보며 말했다.
"인사하려고. 작별 인사."
남자는 여성을 보며 잠시 스치듯 슬픈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남자는 여성을 보다가 말했다.
"그래... 난 항상 기다리는 존재니까. 또 기다릴께. 난 이제 1~2년 기다리는 건 그저 취미 생활일 뿐이라고. 너란 존재는, 나에게 김지혜 너는 기다림이니까."
지혜는 남자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계속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눈물만 날 것 같아서 그래서 였다. 지혜는 속삭이듯 말했다.
"우영아... 이제 기다리지마. 아파하지마."
"..."
"나 아마도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 어쩌면 대륙을 떠나버릴지도 몰라. 그저 모든 것이 싫어."
지혜의 말을 듣다가 우영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별인가. 후 후 훗."
우영의 얼굴에는 차가움이 깃들어 있었다. 지혜는 그대로 방을 나섰다. 우영은 그녀가 나가버리고 난 후, 문을 바라보며 한 참을 서 있었다. 그는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기다림은 항상 나의 것이었지.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기다리지 않을 래. 그 것이 너를 위함이라면... 나의 안개꽃과 같은 하늘이어."
헬던트 후작의 저택.
우영은 붉은 빛 와인을 잔에 따라 손에 들고 창가에 서 있었다. 어느 새 밤이었다. 그는 어두워진 밖을 바라보다가 와인을 한 모금 넘겼다. 우영은 그러다가 홀로 중얼거렸다.
"와인이 달군. 오늘 따라 유난히 달아. 그리고 쓰군."
우영은 그렇게 말하고는 와인을 그대로 쭉 들이켜 버렸다. 그는 창 밖 허공을 응시하며 말했다.
"최우영. 아직도 생각하는 거냐. 바보 같은 놈."
우영은 책상으로 향해 술병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와인을 따라 또 한잔을 쭉 들이켰다. 그는 서글픈 어조로 중얼거렸다.
"모든 것이 아니라 내가 싫었겠지. 내가 부담스러워겠지. 하지만 난 그저 너의 사랑이 필요 했을 뿐인데. 왜... 왜 내가 그토록 싫은 거지? 왜..."
우영의 눈은 어느새 눈물이 맺혀 붉게 충혈되고 있었다. 한 편 문 밖에서 문에 기대어 있던 세나는 나직하게 말했다.
"이젠 제가 그대의 사랑이 되어 들리죠. 하르니."
눈을 뜨니 눈이 부시다.
윤기는 잠깐 청했던 잠 탓에 어느새 아침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재빨리 몸을 이르켰다. 어차피 아직은 별로 할 일도 없으니 상관은 없다치더라도. 윤기는 서재를 나서려다가 어핏 어제 읽던 보고서를 다시 한 번 보게 되었다.
-앞 부분 생략-
조사에 따르면 그 아들이란 녀석이 푸름시에 있을 거라함. 남작 부인의 하녀에게서 나온 말이므로 믿을 만함.
-순백의 위저드 제9연대장, 카타르
추신 : 현제 푸름시에 있는 외부인 명단은 다음과 같은 매튜라는 중년은 나 이상 맞지 않아 제외하고, 매튜의 딸인 한나 역시 제외. 그런데 남은 두 이방인이 공교롭게도 남자인데다가 나이도 일치함. 샨과 켄트라는 이름의 소년들로 마주교 학생임. 유크리트 가의 장남은 둘 중 하나로 추정됨. 또한 근래 푸름시에 들어온 사람 역시 넷 뿐임.
"추신도 있었던 가? 나 이 것 참... 결론은 켄트 유크리트라는 놈이 평민이라고 나한테 거짓말을 했다는 것 밖에는 안되는 군. 제길. 어쨌든 오늘로서 그녀석 가출을 종결시켜 주지."
윤기는 조금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서재를 나섰다.
"윽... 무슨 말씀을."
켄트는 아침 식사부터 체하게 생겼냐는 표정으로 윤기를 보고 있었다. 다짜고짜 식당을 쳐 들어온 윤기가 보고서로 보이는 종이를 켄트 앞에 떡 하니 내려놓고는 귀족인 주제에 잘도 속였느니 어쩌니 하면서 켄트를 황당하게 만든 것이다. 샨과 호상, 동민 역시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윤기를 바라보았고 윤기는 그들의 반응에 친히 보고서를 낭독했다.
"으윽... 제기랄."
켄트는 뭐 씹은 표정으로 윤기를 바라보았고 속았었다는 표정의 샨과 호상, 동민은 켄트를 죽일 듯이 쏘아보고 있었다. 윤기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샨과 호상, 동민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자, 그럼 애들아. 조금만 패준다음 유크리트 남작가로 '끌고' 가자꾸나."
아이들과 윤기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주먹을 만지작거리다가 켄트를 향해 주먹을 나렸다. 켄트는 놀란 심장 진정시키며 능숙한 솜씨로 주먹을 피해 식당을 벗어났다. 켄트는 일행을 향해 통쾌하게 웃었다.
"이 켄트 님께서 거짓말은 한 것은 미안하다만, 난 맞기도 싫고 끌려가기도 싫어서 그냥 걸어가련다."
일행은 그냥 둘 수 없다는 시선을 교환하고는 최대한 빨리 켄트를 쫓았다. 그렇게 그들은 조금은 황당한 방법으로 유크리트 남작가로 향하고 있었다.
"... 그 분께서는 떠나셨군요."
세나는 한 청년의 뒤에 서서 속삭이듯 말했다. 청년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요. 이제는 정말 지쳤어요. 기다리지 않을 래요. 붙잡지도 않을 래요."
"여전히 자신을 철저히 포기하시는 군요. 그 분을 위해서라면. 하르니... 하지만 이제 정말로 기다리지 않겠다면. 그렇다면 이제는 자신을 위하세요."
세나의 말에 하르니라 불리운 우영은 말이 없었다. 세나는 예전처럼 침묵하지 않고 입을 열어 말을 계속했다.
"사람들은 안개꽃만을 담아두지 않아요. 그건 죽음이라는 뜻 때문이죠. 다만 죽도록 사랑하겠다고 장미와 함께 담아두기는 해요. 하지만 사람은 안개꽃이 진정으로 무얼 말하는 지 모르죠."
세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자신이 가져다 놓은 안개꽃 꽃병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말을 계속했다.
"사별死別이었던가. 안개꽃과 같은 자를 붙잡아 결국 산산히 깨어지어 다시 볼 수 없었다하더군요. 하르니... 당신은 어쩌면 잘 한 것인지도 몰라요. 그 분은 안개꽃... 잡으면 깨어지고 놓으면 흩날리는 그런 꽃. 그런 꽃이라 쉽게 잡을 수도 놓아줄 수도 없지만 저는 놓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그 사람이 산산히 깨어지지는 않을 테니."
세나는 횡성수설 말을 늘어놓고는 침묵했다. 우영은 그런 세나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당신의 말. 틀린 것인지 혹은 맞은 것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저는 지혜를 놓아주었고 그 것으로 끝일 뿐이랍니다. 끝을 뿐..."
"그 분의 자리... 당신의 마음에 있던 그 분의 자리를 제가 대신하면 안되나요?"
"...!"
"저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아요. 다만... 저도 당신 곁에 서 있게 해 주세요. 저 홀로 사랑할지도."
우영은 알 수 없는 웃음을 터트리며 세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후 후 훗... 알다가도 모르겠군."
우영은 그렇게 중걸리다가 세나를 향해 말했다.
"외사랑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은... 나 하나로 족해요. 레이디 세나."
우영은 그 말을 남기고 방문을 나서려 했다. 그 때 뒤에서 세나가 그를 끌어안았다. 우영은 뿌리치려다가 이윽고 몸을 돌려 그녀를 끌어안아 주었다. 왠지 자신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랬기에.
유크리트 남작가.
남작의 아들이 집을 떠난 후 이상하리 만큼 조용해진 작은 저택이었다. 아니 저택이라기엔 정원도 없고 단지 2층을 이룬 일반 주택보다 조금 클 뿐인 곳이었다. 몇 몇 하녀와 하인들이 오가고 있을 뿐 거실은 조용했다. 그 때 문 쪽에서 노크음이 울렸다.
똑. 똑.
마침 문 쪽을 지나던 하녀 하나가 이 곳의 안주인의 심부름꾼이리라 지레짐작하고 문을 열자 낡은 보라색 망토를 걸친 청년이 서 있었다. 뒤에는 숨을 헐떡이고 있는 네명의 소년이 서 있었다. 하녀는 이상하게 그 중 하나가 낯익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겨 집고는 그들을 일단 집 안으로 드렸다.
"마님의 심부름꾼인가요? 도련님께 돈은 잘 전하셨어요?"
윤기는 하녀의 말에 어색한 미소를 지르여 최대한 위엄있어 보이길 노력하며 말했다.
"본인은 시르크 가문의 사람이오. 남작을 뵙기 위해 왔소."
하녀는 초라한 용병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윤기를 잠시 뜯어 보았다. 남작을 찾아왔다니 일단 군말없이 남작의 서재로 안내했지 영 깨름칙 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녀는 서재의 문을 두드렸다.
"남작님. 시르크 가문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해라."
남작은 잠시 뒤 네 명의 소년을 이끌고 들어온 한 청년을 보며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공작가인 시르크 가문의 사람이라기에 잔뜩 긴장을 하고 있었는 데 지금보니 그저 시르크 가문의 잔심부름이나 하는 용병인 것이다. 정작 윤기는 자신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남작을 보며 인상을 팍 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아들은 안 보이고 나만 보시오?"
"아들?!"
남작은 윤기의 말에 고개를 돌려 윤기를 따라 들어온 소년들로 눈길을 돌렸다. 남작의 얼굴은 일순간의 분노로 타오르다가 잠잠해졌다.
"... 시그니스."
"오랜만에 뵙는 군요. 아버지. 아, 참고로 저는 시그니스 유크리트가 아니라 그저 켄트입니다."
남작은 잠시 켄트를 팍 째려보다가 윤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남작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맙소. 공작 각하에 고용된 용병인가 보군요. 내 아들을 찾아줘서 고맙소이다."
"쳇. 난 찾아주고 싶어서 저 자식을 데리고 온 거 아니니까 그럴 필요 없소이다. 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걸 좋아합니다만..."
윤기는 잠시 말꼬리를 흐리고는 허공에 손짓으로 몇가지 룬어를 썼다. 그러고는 말을 계속했다.
"자, 이제 아무도 듣지 못할테니 이야기하지. 나는 브리칸 시르크, 귀족가의 거룩한 망나니. 몇 칠 뒤 본인은 공작의 작위를 물려받고 이스탈 회의를 대대적으로 뜯어고칠 생각이오. 그대도 돕겠소이까?"
"내가 자네 말을 어떻게 믿지?"
"당신 아들에게 물어보시던지 아니면 헬던트 후작이나 레비던트 후작를 데리고 와 보던지. 아! 시르크 가문이 저택으로 한 번 방문하시는 것은 어떻소이까?"
윤기의 말에 남작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며칠 생각을..."
그 때 또 한번의 노크가 울리면서 남작의 말을 끊어놓았다. 밖에서 늙은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작님. 세나 아가씨와 헬던트 후작 각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남작은 놀라서 몸을 이르켰고 윤기는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르니칼... 헬던트라..."
"하르니칼 헬던트 후작 각하를 뵙습니다."
남작은 우영이 방안에 들어오자 윤기를 대하던 것과는 달리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러나 윤기는 미동도 하지 않은 체 입을 열었다.
"왜... 온거지?"
우영은 순간 윤기의 말에 실린 차가움을 느낄 수 있었다. 윤기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말을 이었다.
"연애라도 허락받으러 왔나?"
"..."
우영은 입을 열지 않고 그대로 윤기를 바라보았다. 윤기는 갑자기 피식 웃어 버렸다. 그리고는 씁쓸한 말투로 말했다.
"우습군. 결국 지치신건가? 8년이라는 세월은 너무 길었던가? 아니... 8년이 아니군 10년도 더 기다리셨던가?"
"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없어."
남작은 그들 사이에서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남작은 저자가 만약 거룩한 망나니라면 한 때 천재라 불리었다해도 짧은 마법 실력으로 대륙 최강의 주술사에게 저렇게 당당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 때 윤기가 우영을 향해 다시 한 번 말했다.
"최우영답지 않은 말이군. 하르니칼 헬던트 다운 말인가?"
"... 결국... 둘 다 나라는 인간일 뿐이야. 이젠... 이젠 정말로 지쳤어."
"그런 말은 너에게 어울리지 않아."
윤기의 말투는 어느 정도 부드러워져 있었다. 여전히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우영은 윤기를 보며 말했다.
"나에게 어울리는 것이라... 나라고 언제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인가? 김지혜, 아니 세이아 에프론. 그 사람을 언제까지 기다리기만 해야 한단 말인가!"
우영의 목소리가 높아져갔다. 우영은 순간적으로 흥분해버렸다. 윤기는 천천히 몸을 이르키며 말했다.
"그렇게 말한다면 이제까지 너의 사랑이 너무 가치가 없어지지."
우영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날렸다. 윤기는 슬쩍 피해내며 우영의 배에다가 자신의 주먹을 꽂아넣었다. 지켜보던 이들은 순간 침묵했다. 우영은 배를 움켜쥐며 윤기를 향해 말했다.
"여전하시군... 브리칸 시르크. 하지만 난 너의 말에 동의할 수 없어. 아니 동의하기 싫어."
"내가 어떻게 네 고집을 꺽겠냐. 한가지 말해두지. 방금은 브리칸 시르크로서 아닌 너의 친구 홍윤기로서의 충고 정도라는 것."
윤기는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려 방문을 열었다. 그 때 켄트와 샨, 호상, 동민은 따라가야 하는 지 말아야 하는 지 판단이 서지 않아 쭈뻣거렸다. 그 때 우영이 윤기의 뒤통수를 향해 말했다.
"지혜는 떠났어. 이별이라 해야 하나.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그녀가... 지혜가 원치 않으니까. 그래서 잊으려고... 더 이상 아파하지 않으려고."
"그래서... 잊기 위해 택한 사람이 세나인가?"
윤기의 말은 무거워져 있었다. 우영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글쎄. 동병상련이라고 할까... 세나가 나를 홀로 사랑하는 걸 보기 싫었어. 나처럼 아프게 될까봐. 많이 아파할까봐."
윤기는 몸을 돌려 우영은 바라보았다. 윤기는 주먹을 들어올렸다. 지켜보던 이들이 말리려 했으나 윤기의 주먹이 더 빨랐다. 윤기의 주먹이 우영의 왼쪽 뺨을 쳤다. 윤기는 우영을 보며 말했다.
"바보같은 놈..."
윤기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방을 나섰다.
바람...
바람이 불어왔다. 아직 관광철은 아닌지라 여객선들이 정박하는 부두는 한산했다. 뒤로는 새하얀 세레네즈의 외성이 있었고 앞으로는 술집과 여관이 즐비하게 늘어선 이 곳이 세레네즈 제1부두다. 세레네즈에는 세 군데의 부두가 있는 데 제1부두와 제2부두는 일반 무역항이었고 제3부두는 특별항으로 두 군데로 나뉜다. 한 군데는 군선들이 대기하는 곳으로 마법을 이용해 해저에서부터 성벽을 쌓아올리고 평소에는 문에 굳게 닫힌 군사시성이었고 다른 한 곳은 국가의 허락을 받은 거상巨商들의 지점이 위치하는 무역항과 각국의 사신이나 귀족들이 드나드는 항구들 겸하여 만든 곳이었다.
제1부두
몇 몇의 여객선만이 정박한 한적한 곳에 짧은 갈색의 머리칼의 여성이 길을 가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김지혜, 혹은 세이아 에프론. 지혜는 길드에 들리기 전에 산책 삼아 항구를 걷고 있었다. 시원한 바다 바람이 스쳐갔다. 지혜는 수평선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떠나는 것이 역시 우영이를 위하는 것이겠지. 나보다 더 사랑해 줄 사람이 있으니까. 아니... 난 사랑이 아니었겠지. 그저 이기였겠지. 철저히 나를 위하는 이기심."
지혜는 혼잣말을 내뱉고는 다시 걸음 옮겼다. 조금 떨어진 무역 부두에서는 여전히 빠쁜 걸음들이 오가고 있었다. 지혜는 삶의 활기를 눈으로 느끼며 살짝 미소 지었다. 무작정 현진이를 따라나섰던 여행. 그 결과가 낳은 것은 저런 것일까? 지혜는 계속 걸었다.
'사람들이 과연 대륙 전쟁의 영웅이 이렇게 한심하고 나약한 인간이라는 걸 알까?'
지혜는 자신에게 묻고는 이내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었다. 이제 세일론 쪽으로 갈 생각이었다. 바다 건너의 섬나라. 그 머나먼 곳에서 그저 김지혜로 살아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영원히 돌아오지 않으리...
"그래도 가끔은 찾아와야겠지."
지혜는 스스로에게 속삭이고는 이윽고 길드로 발길을 돌렸다. 여객선을 취급하는 수많은 길드 중에 지혜가 들어간 곳은 -안개 속의 배- 라는 곳이었다. 안개... 어쩐지 자신을 닮은 단어라고 지혜는 생각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저는 후작 각하를 내 딸의 남편으로 인정해 드릴 수 없습니다."
윤기가 떠나간 후, 결국 남게 된 샨과 켄트, 호상, 동민은 남작과 우영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남작은 우영을 향해 허락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우영 역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그 침묵은 오래가지 않고 켄트에 의해서 깨어졌다.
"나 역시 누나의 남편으로 당신을 인정할 수 없어."
세나는 어느새 돌아와 있는 동생을 보고 눈을 커게 떴다. 우영은 고개를 돌려 켄트를 보며 물었다.
"왜지?"
"당신은 누나를 불행하게 만들 것 같거든. 당신의 눈에는 슬픔과 다른 무언가가 보여. 외로움... 이라고 해야 하나. 당신은 그저 그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누나를 사랑하려고 하는 것 뿐이잖아? 아니 사람에 대한 집착이라고 해야 겠지."
우영은 켄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닮아 있었다. 자신이 아는 누군가와. 그 누군가가 지금 우영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닮았군. 이현진과..."
"?"
"레이논 크리스티앙 공작이라고 하면 알려나. 후 훗. 그 자식이라면 너와 같은 소리를 했겠지."
켄트는 고개를 저으며 우영을 향해 말했다.
"아니. 나는 나지. 나에게서 그를 찾으려고 하지 말아줘."
"하 하 하! 그러지. 이름이 뭔가?"
"켄...트는 아니고 시그니스 유크리트라고 하지."
켄트, 아니 시그니스는 우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맑은 눈동자, 흔들리지 않는 눈망울. 우영은 그를 보며 도저히 현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영은 몸을 이르키며 남작을 향해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따님을... 따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다면 다시 오겠습니다. 유크리트 남작."
우영은 그렇게 말하고는 방문을 나섰다. 세나 역시 그를 따라가려 했다. 그 때 시그니스가 그녀를 향해 말했다.
"누나는... 왜 저런 사람을 사랑하지?"
시그니스의 질문에 세나의 입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는 한마디를 내던지고 방을 나섰다.
"사랑하니까."
세나는 우영의 뒤를 쫓았다. 브리칸 시르크인지, 홍윤기인지 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 후 부터 왠지 힘이 없다고 생각했다. 세나는 과연 자신이 이대로 우영을 사랑해도 되는 지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그 때 문뜩 우영이 멈춰섰다.
"저를 사랑하지 마세요. 저란 사람은 당신에게 상처일뿐 사랑일 수 없을 것 같아요. 세나... 부디 나를 사랑하지 말아요."
세나는 우영의 말에서 슬픔을 느꼈다. 세나는 그 자리에서 멈춰섰다. 우영은 세나를 바라보지 않고 그대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진정으로 세나를 사랑할 자신이 없어요. 언제까지 저에게는 지혜 뿐일테니까."
우영은 그렇게 말하고는 걸음을 계속 옮겼다. 세나는 굳은 듯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제서야 세나는 윤기가 남긴 말을 알 수 있었다. 저 사람은 바보였다. 정말로... 오로지 한 사람을 바라보는 바보.
"안개꽃의 꽃말은..."
세나는 우영의 뒤모습을 바라보며 외쳤다. 우영은 그 자리에서 멈칫 멈춰섰다. 세나는 계속해서 외쳤다.
"안개꽃의 꽃말은 이별임과 동시에 그리움이예요. 사라저간 그 꽃을 그리워하기 때문이죠! 당신은 언제나 그 분을 그리워했잖아요! 쫓아가세요! 그녀를 잡으란 말이예요! 안개꽃이 사라져버리면... 이별보다 더 아픈 그리움만 남을 뿐이예요! 바보같이 굴지 말아요! 당신을 사랑한 나마저 바보로 만들지 말고!"
우영은 세나를 뒤로 하고 계속 걸었다. 그의 걸음은 점차 빨라지고 있었다. 그는 이윽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점차 조급해져 갔다. 저택을 나선 우영은 어느 새 주술력을 퍼부어서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그는 지혜가 묵고 있다던 여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래 내가 바보였어. 미안해. 지혜야. 기다려줘. 떠나지마. 지금 내가 가니까. 비록 너는 나를 봐 주지 않을 지라도 말이야. 이제 더 이상 슬픈 것은 싫어. 이제 항상 네 곁에 있을 께. 네 눈에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비록 너의 옆자리가 나의 자리일 수 없을 지라도 내 마음이 너에게 머무는 때까지... 언제 항상 곁에 있을 께!'
우영은 속으로 외치며 달렸다. 마치 미친 듯이. 그 순간 그의 하늘은... 한 송이 안개꽃과 같이 그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우영은 마치 미친 사람과 같았다. 여관문을 박차고 들어선 그는 카운터 앞에 서서 여관 직원으로 보이는 자를 붙잡고 말했다.
"세이아 에프론... 아니 김지혜라는 사람 있소?"
"예? 아. 저희 여관은 개인의 생활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 그런 정보를..."
우영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 자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우영은 으르렁거리듯 외쳤다.
"본인은 하르니칼 헬던트 후작이다. 당장 대답이나 해."
"다,당신이 어떻게 후,후작... 케엑."
"닥치고 불어!"
"하,하지만..."
우영의 화는 이내 폭발해 버렸다. 덕분에 직원은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고 우영에 의해 던져졌다. 모험가 파티로 보이는 몇 몇이 그냥 두고 보지 못하고 저마다의 무기를 뽐아들고 나섰다.
"모조리 황실 지하 감옥에 쳐 넣어버리기 전에 앉아!"
우영의 노호성에 모험가들은 꼴불견이라는 표정을 하고 자세를 취했다. 그들은 술에 취해 괜히 시비걸고 행패 부리는 건달 쯤으로 밖에 보지 않았다. 우영은 잘 꺼내지 않는 하이느를 꺼내들며 외쳤다.
"죽고 싶다면 소원대로 해 주마! 마황살폭魔皇殺爆!"
그 순간 한 그림자가 여관으로 뛰들며 모험가들과 우영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윽고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며 여관의 한 쪽 벽이 터져 나갔다. 연기가 사라지고 나자 모험가들은 눈 앞에 벌어진 상황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새하얀 망토 차림에 한 마법사가 긴 나무 막대기를 들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를 향해 짧을 나무 스틱을 들고 서 있는 하르니칼 헬던트라 자신을 밝힌 건달... 아니 건달로 보였던 사람. 그리고 완전히 박살 나 버린 여관 내부.
"헬던트 후작. 너무 성급하군."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했을 텐데. 홍윤기."
우영은 윤기를 노려보며 말했다. 윤기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우영을 향해 말했다.
"친히 삭풍대削風袋까지 이끌고 왔는 데 무슨 섭섭한 말씀을."
"바람의 장로의 직속 친위대 말인가?"
"네 놈이 사고 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쭉... 듣고 있었나?"
"바람의 장로의 특권이지."
바람의 장로.
장로의 상징인 일곱 반지는 그 주인에게 자신이 가진 한가지 속성의 힘을 부여한다. 바람의 반지는 바람의 권능을 부여하며 필요하면 바람에 동화되어 몸을 숨길 수도 있었다.
"상당히 좋지 못한 취미군."
"삭풍대에 의하면 지혜는 제1부두에 있다."
윤기의 말에 우영은 윤기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는 미소 짓고 있었다. 우영은 생각했다. 마주교 반장 시절부터 윤기의 저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왠지 차가운 미소가. 아직도 그 생각에는 변함 없다. 저 미소는 마치 모든 걸 안다는 듯한 여유가 실려 있어 기분 나빴다. 열등감... 이려나.
"넌 너무 마음에 안 들어."
우영은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려 주술력을 끌어올렸다. 제1부두까지 곧장 아공행법(주술적인 의미의 텔레포트)으로 이동할 작정이었다. 그러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고마워."
유크리트 남작가.
헬던트 후작의 비서이자 남작의 영애인 세나 유크리트는 오랜만에 찾은 자신의 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세나는 그간 너무 집에 오지 않아 하녀들이 멋대로 치워둔 방에 도무지 적응하기 힘들어 스스로 편한 대로 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똑. 똑.
노크음이 울렸다. 하지만 세나는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노크음이 울렸다. 세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상대방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다시금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세나가 입을 열었다.
"왜 오셨는 지?"
"허락없이 들어와서 죄송합니다. 샨이라고 합니다. 켄... 아니 시그니스의 친구이니 말 놓으십시오."
샨의 말에 세나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허락이 없이 들어와서 죄송하시면 나가 주시겠어요?"
샨은 세나의 대답에 잠시 눈썹을 꿈틀했다. 그리고 샨은 봉투 하나를 꺼내었다. 그리고 세나에게 건내었다.
"선생님. 아니 브리칸 시르크 현 순백의 위저드 바람의 장로께서 전하라시는 군요."
"..."
세나는 말 없이 봉투를 열었다. 그 속에는 안개꽃 한 송이와 편지 한 장이 들어있었다.
안개꽃의 꽃말은 이별... 그리고 그리움. 잘 들었습니다. 이 이별로 그리워하고 아파하지 마시라는 의미에서 드립니다.
B.S
세나는 피식 웃어보이며 편지와 꽃을 움켜 쥐었다. 세나는 구겨진 편지와 찌그러진 꽃을 창문 밖으로 던져버리며 말했다.
"감사하지만... 브리칸 시르크 님. 저는 김지혜라는 그 분 만큼 약하지 않아요."
"... 하지만 아파하시는 군요."
샨은 세나를 지켜보다가 말했다. 세나를 샨을 잠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시그니스의 친구라고 했나요?"
"..."
샨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나는 샨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잠시... 같이 산책해 주겠어요?"
지혜는 잠시 뒤로 돌아 세레네즈를 한 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 생각해 보면 신미 대륙은 자신의 고향이었고... 또 멋진 추억이 살아있는 곳이었다. 지혜는 망설임을 접어두고 돌아서 배에 오르려 했다. 그 때 사람의 손이라 여겨지는 것이 자신의 손을 잡았다는 걸 느꼈다.
"...이제 기다리지 않아. 절대로."
우영이었다. 자신은 떠난다고 했다. 그래서 기다리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이런 의미는 아니었는 데 자신을 다시 붙잡아서 우영이 아파지는 건 싫은 데.
"또 아프지도 않을 거야. 그래서..."
우영은 지혜를 와락 끌어않았다. 그리고 지혜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서 널 보낼 수가 없어. 기다리기도, 아프기도 지쳤거든."
"전 후작 각하를 그렇게 사랑하지 않았어요."
세나의 말을 샨은 묵묵히 듣고 있었다. 세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샨을 바라보다가... 무심결에 말했다.
"아마도... 단지 측은했던 거겠죠. 혼자 아픈 사랑을 하는 그가."
지혜 역시 우영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우영은 말했다.
"이제... 더 이상 울지마."
"우영아. 난..."
"말하지마. 무슨 말이든. 듣지 않고 느끼고 싶어. 그냥 내가..."
"바보같군요. 후작 각하처럼."
샨의 말에 세나는 움찔했다. 샨은 세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사랑은 그런 걸겁니다. 바보같은 것."
"바보..."
지혜는 우영을 향해 말했다. 우영은 피식 미소지으며 말했다. 이제 그 둘은 조금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너도 바보였어."
"그럴지도..."
"누구나 그렇겠죠. 사랑한다면."
세나가 말했다. 샨은 세나의 눈을 응시하다가 말했다.
"당신 눈의 맑음은... 슬퍼도 아름다워 보입니다."
"?"
"우영아."
"응?"
우영은 뭔가 말하려는 지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혜는 우영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짧은 입맞춤.
우영은 얼굴이 붉어지며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주위의 길을 가던 행인들이 멈춰서 박수를 치고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또 사랑합니다."
"후 후 훗... 아닙니다."
샨은 나직한 웃음만을 지었다. 세나는 샨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한테 반했나요?"
"글쎄요."
샨은 세나를 향해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세나는 그런 샨을 보며 말했다.
"피... 난 멋진 기사님이 반해 주길 바랬는 데..."
"허약한 마법사라 죄송합니다."
둘은 그렇게 미소 지었다.
"이제 더 이상 기다리게 하지 않을 께. 슬펐던 지난 시간, 이제 서로 조금씩 감싸주자. 이제 난... 널 사랑하니까."
지혜의 말에 우영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넌 나에게 기다림이 아니었어. 그리움이었어. 그리고 사랑이었지."
지혜는 미소지었다. 우영은 지혜를 다시 한 껴안으며 말했다.
"사랑해."
8년전...
프랑드 시에서의 고백의 결말은 이렇게 끝이 났다. 앞으로 더 이상 슬퍼하지도 아파하지도 기다리지도... 또 그리워하지도 않기를.
안개꽃 같은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겨있었다.
『엄마의 자장가』
아...
들.... 려....
맑은... 맑은 소리가.
아니... 부드러워... 아니 따스해.
뭐지. 이 느낌은.
너무나 따스해. 나가기 싫어. 그런데 멀어져. 소리가 작아져. 너무나 아름다운, 아니 그리운 그 소리가.
안돼. 날 버리지 마.
버리지...
버리지 마세요.
그리운 이어.
그 맑은 부드러운, 따스한 음성의 주인이어.
나의...
나의 어머니.
엄마!
"헉... 헉..."
어느 저택의 침실. 한 청년이 악몽을 꿨는 지 식은 땀을 잔뜩 흘리며 벌떡 몸을 이르켰다. 청년은 침대 옆, 작은 탁자에 놓여 있는 물컵을 들어 물을 들이켰다.
"또 그 꿈이었어."
청년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더듬었다. 손에 잡히는 딱딱한 감촉. 금속이지만 왠지 모르게 차갑지 않은 물건이었다. 청년은 목에 걸린 펜던트를 열었다. 낯설지만 볼 때마다 그리워지는 얼굴이 그려진 초상화가 들어있었다. 한 때 얼굴도 모르는 이를 그리워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워 초상화를 빼버리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마법으로 남겨진 영상이라고 했다.
"엄마..."
청년은 그 초상화를 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펜던트를 닫아버렸다. 몸을 이르켜 테라스로 나아갔다. 별빛과 달빛이 어울려져 비치는 모습이 퍽 아름다웠다. 청년은 눈을 감고서 지난 추억을 들추어 보았다.
-야! 너 엄마 없지?
피식...
지금은 떠올리면 웃음만 나온다. 그 녀석이었다. 귀족 놈 앞잡이나 하는 영주댁 집사의 손자. 이름도 잊어버렸다. 하... 다닥다닥 붙은 집들 사이의 좁은 골목. 그 사이로 아스라이 보이는 저 푸른 하늘... 푸름... 푸르름. 내 고향 푸름시의 영상이었다.
-임마! 너 계집애처럼 목걸이를 걸고 다니냐? 이리 좀 줘봐.
-...
당연히 대답 대신 주먹이 나갔다. 나의 소중한 목걸이, 아니 펜던트. 그러면서도 한없이 싫어지는 물건이지만 때어놓으면 불안해진다. 그 자식의 얼굴에 시퍼런 멍자국을 하나 만들어 주었을 때, 금발 머리 귀족 녀석이 나타났다.
-내 이름은 파일론 레비던트. 넌 뭐하는 놈이기에 집사님의 손자를 패 놓은 거냐.
-귀족 나부랭이. 그 딴 어려운 이름 모르니까 다시 소개해. 내 이름은 이현진이다. 저 자식이 내 어머니 유품에 손을 대려 해서 좀 패줬다
그래.
내 이름은 이현진이었다. 그 때는... 그리고 눈 앞에 있는 저 금발 머리가 바로.
-좋아. 내 이름은 이광채. 이번에는 내 놈의 이유가 타당해서 봐 주겠지만 다음에 또 우리집 하인 식구를 패면 내가 가만 안둬.
-웃기는 군. 귀족 나부랭이.
-그건 귀족 모독죄렸다. 이얍!
그 자식은 손에 들고 있던 목도를 나에게 날렸다. 광채... 그 때만 해도 죽도록 밉던 녀석과 첫 만남은 이렇게 괴팍했다. 그리고 그 날 나는 많이 맞았고 많이 팼던 것 같다. 둘다 퉁퉁 부어서 집으로 돌아갔으니. 그 자식이 남긴 말이 특히 걸작이었다.
-우씨. 넌 내 라이벌로서 자격이 충분해서 봐 준 줄 알어!
-웃기는 소리하지마! 귀족 나부랭이!
"라이벌... 이라."
그 후로 10년도 더 넘게 지난 후의 현진은 지금 마로드 수도, 하르소아의 한 저택 테라스에 서 있다. 그는 광채가 남겼던 말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항상 흐릿한 영상의 여인이 자장가를 불러주는 꿈에서 깨어난 뒤면 으레 떠오르는 기억이었다.
"혼자 실성한 사람처럼 뭐가 그렇게 재밌어?"
"응?"
현진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왼쪽 옆 테라스에 한 여성이 서 서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현진은 피식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냥... 기억에도 없는 어떤 사람이 꿈에 나와서 말이야."
"어머니 말이니?"
"확실히 박지인답게 눈치는 더럽게 빠르지."
현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하늘 위로 시선을 돌렸다. 지인은 현진을 향해 말했다.
"흐릿하지만 너의 어머니께서 너에게 어떤 흔적을 남기셔서 그런 건 아닐까. 사랑... 같은 거."
"그럴 틈이나 있었을 까? 나를 낳고 바로 돌아가셨는 데. 나를 태어나기 위해 사제들의 치료도 거부하신체."
현진의 말에 지인은 입을 다물었다. 현진은 별들을 바라보다가 지인에게 말했다.
"...언젠가 누군가가 말하더군. 저 많은 별 중에는 죽은 사람들이 별이 되어 지상에서 다하지 못한 사랑을 체워가고 있다고. 자신이 사랑했던 이들을 남몰래 지키면서 말이야."
"지혜가... 그랬겠구나."
"후 후 훗..."
현진은 웃음으로 말을 돌렸다. 현진은 그렇게 낮은 웃음을 흘리다가 어느 순간 웃음을 그치고 말했다.
"하지만 난 믿지 않아."
"상당히 부정적이군."
현진은 말이 없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지인은 현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많은 별들 중에 우리 아버지의 별도 있겠지?"
"글쎄..."
"푸름시에 도착하기 전에 나는 오빠에게 물은 적이 있어. 왜 그렇게 열심이냐고. 그냥 이렇게 도망쳐서 아무렇게나 살면 안되겠냐고. 그 때 오빠는 그랬어.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계실 아버지 때문에,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신 아버지 때문에 절대로 그냥 아무렇게나 살 수 없다고. 난 이렇게 생각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은 우리 마음 속에 살아 있다고 믿으면 언제나 함께 한다고 생각해."
"난 엄마라는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 마음 속에 살려둘 그 사람이. 그런데도 그리운 걸 보면 미칠 노릇이지."
"..."
"하늘이 참 맑다. 저 별들 중 어딘가에 엄마의 별이 있다면 나를 보고 있겠지. 대륙 전쟁의 영웅이라고까지 칭송받게 된 자랑스러운 아들을 말이야."
현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묵묵히 별만을 바라보았다. 짧았지만 순간 누군가에게 보란 듯이 빛나는 별이 있음을 누구도 알지 못했다.
카오스력 9939년.
마로드에는 수 많은 민란이 일어난다. 카오스 전야제가 치뤄질 무렵에는 축제 기간임에도 불과하고 굶어죽는 자들이 속출하고 수도를 제외한 모든 도시들은 축제를 치루지 못했다. 심지어는 네크로폴리스의 소행으로 보이는 민란이 일어나 영주의 성이 함락되기도 했었다. 이상한 것은 영주의 식량을 풀어 사람들에게 나눠주고는 조용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 무렵, 수도에서는 밖의 사정을 모른 체 성대한 축제 치뤄지고 있었다. 수도 외곽의 민중들은 쓸쓸히 수도를 등지고 타도시, 혹은 네크로폴리스를 찾아 떠났고 귀족들은 놀라 외성을 폐쇠하기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것이 시작임을 몰랐다. 이미 황족에게 고개 돌린 민중을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것까지도.
마로드의 수도, 불꽃의 하르소아.
그 가운데에는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위엄있어 보이는 거대한 황궁이 자리잡고 있었다. 사람들이 하렌시아라 부르는 그 곳에서 사치스러운 연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수 많은 촛불이 밝혀지고 기름기가 흐르는 음식들이 놓인 테이블 사이로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과 사치스러운 정장의 남성들이 저마다 웃고 떠들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유일하게 단조로운 여행복을 입은 청년은 잔뜩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는 뭐가 그리 불만인지 도무지 얼굴을 펴려고 하지 않았다.
"이현진. 인상 펴. 귀족들이 은근히 째려보잖아."
"그러면 어쩔꺼야. 넘빌 수 있는 용기나 있으면 덤비라고 해. 다 쳐 죽여버릴테니. 내가 귀족만 아니었다면 귀족이라는 것들의 씨를 말려버렸어."
이현진이라 불린 그 청년은 여전히 인상을 팍 쓴 체 말했다. 그를 달래려던 여인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후... 넌 내 수행원으로 위장하고 온 거잖아. 근래에 암살 위헙이 여러차례 있었다고 거짓말까지 하면서. 지금 사고치면 그런 보람이 없어진다고."
"알았어."
"좋아. 스마일!"
현진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때 한 청년이 여인에게 다가오면서 말했다.
"레이디 세레니얼. 저에게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글쎄요..."
세레니얼이라 불리운 여인은 현진의 눈치를 살짝 보았다. 현진은 옆에 놓여 있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면서 말했다.
"네가 언제 내 눈치 봤냐 박지인. 부담스러우니까 그런 눈은 좀 치워주라."
세레니얼, 아니 지인은 현진을 보며 말했다.
"너한테 또 무슨 소리를 들으라고 내가 그래겠니."
"후 후 훗. 레이디 세레니얼. 저 따위 수행원이 무슨 대수라고. 그런데 수행원. 상당히 무례하구나.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오느냐. 아무리 레이디께서 오냐 오냐 해 주셔..."
그 귀족 청년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현진의 손이 어느 틈에 움직여 정확하게 그 귀족 청년의 목 앞에 멈춰선 것이다.
"웃기는 군. 꺼져랏."
"너,너는..."
"살고 싶으면 꺼져. 지금 기분이 더러워서 한 바탕해야 속이 시원해지겠지만 지인이... 아니 세라를 봐서 봐 주는 거니까."
지인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현진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귀족 청년은 씩씩 거리면서 현진의 손을 쳐냈다.
"나 라인 샤이드론 최고의 모욕이었다. 이 자리에서 결투할 것을 신청한다."
"샤이드론 후작의 아들 쯤 되나 보군. 소드 엠퍼러라는 자가 아들 놈을 너무 버릇없이 키웠어."
현진은 그렇게 말하며 검을 뽐아드는 라인을 향해 오른손을 뻗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죽엇!"
현진의 말과 동시에 거대한 마나가 현진의 오른손에 뭉쳐 뻗어나갔다. 라인은 검에 검기를 실어 튕겨내려했지만 현진이 쏘아 보낸 마나는 라인의 검을 깨끗이 자르고 천장으로 쏘아져 올라갔다. 라인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어,어째서 손에서 쏘아져 나온 마나로 검을... 그 것도 드레곤 본으로 만든 검을 자르는 거지."
현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 아버지 데려와. 너랑은 재미없어."
"이,이런 말도 안되는..."
"레이논 크리스티앙!"
순간 어딘가에서 누군가 탄성을 질렀다. 현진은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따. 그는 미소 지으며 그를 향해 말했다.
"오랜만이군. 베일루스 후작. 심심해서 그러는 데 샤이드론 후작에게 비무나 하자고 전해 주겠나?"
현진의 말에 베일루스 후작, 화민은 현진 앞에서 넋이 나가 있는 라인을 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라,라인... 지금 무슨 짓을..."
"카를로스. 정녕 이 사람이 마검황인가?"
화민은 넋이 나간 라인에게 미안하게도 고개를 끄덕여 줄 수 밖에 없었다. 라인은 현진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모든 검사들의 우상이시어. 몰라뵈어서 죄송합니다."
"모든 검사들의 우상이라...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지. 광채가 들었으면 내 목이 떨어졌어. 하지만 기분은 좋군. 후 후 훗."
현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왼손에 들고 있던 와인을 쭉 들이켰다. 화민은 현진을 보며 말했다.
"레이디 세레니얼을 보러 오신 겁니까?"
"겸사 겸사. 참... 아스테르라는 자를 기억하나?"
"물론... 미르 시에서 봤던 그 악마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 작자가 다시 나타났으니 신경 바짝 곤두..."
현진은 잠시 말꼬리를 흐리더니 천천히 손에 마나를 모았다. 현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는 순간 현진의 손을 벗어난 마나 덩어리가 연회장의 허공, 어느 한 점을 강타했다. 순간 보랏빛 머리칼의 활을 든 여인이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상당히 날카로우시군요. 레이논 크리스티앙 공작 각하."
갑자기 나타난 여인의 발언에 연회장은 술렁거렸고 현진은 몸을 띄워 여인과 눈높이를 맞추며 말했다.
"아스테르의 졸개냐?"
"아니지만... 그 분의 명을 받고 온 마장 서열2위 세르. 마신기 신궁 에숄렛의 주인입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세르는 활을 들어 현진을 겨누었다.
"그럼 죽어주셔야 겠군요."
신궁 에숄렛에는 불꽃이 화살 형태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세르라 자신을 소개한 여성 마족은 시위를 놓았고 불꽃 화살은 현진을 향해 쏘아져 왔다. 현진은 코웃음을 치며 손을 뻗어 가볍게 쳐내려 했다. 세르는 씩 웃으며 외쳤다.
"헬 파이어 블레스터!"
세르의 외침과 함께 불꽃 화살 주위에 붉은 빛들이 감돌더니 현진과 충돌하며 거대한 폭발을 이르켰다. 세르는 웃으며 말했다.
"마검황이란 작자가 의외로 쉽게..."
"아스테르 데려와. 애송이랑 놀긴 싫다."
현진은 폭발로 일어난 연기를 손짓으로 흩어놓으며 말했다. 세르는 표정을 살짝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그 말 후회하게 해 드리죠."
세르는 활을 봉처럼 잡고 현진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현진은 그런 세르를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다가 이윽고 모든 이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세르 역시 시야에서 사라졌다. 몇 번의 금속음이 울리고 현진과 세르가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 연회장은 아비규환이 되어 소란스러웠다.
탕. 탕. 탕.
그 때 누군가 거세게 테이블을 내려쳤고 모두의 시선이 그 곳으로 모였다. 최상석인 그 곳에는 엘레나 드 실로테 노르틴 여황이 얼굴을 잔뜩 찡그린체 앉아 있었다.
"그대들이 정년 대 마로드 제국의 귀족인가? 타국의 귀족은 나서서 싸우고 있거늘. 어찌 스스로의 목숨만 부지하기 급급한가!"
여황의 외침에 귀족들은 숙연해졌다. 그들 틈에서 한 인영이 현진의 옆으로 떠올랐다. 알베를 하이시커, 수민이었다.
"너 혼자 힘드냐?"
수민의 물음에 현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혀... 지인이 걱정하니까 내려가 있어. 슬 슬 눈물의 성검, 루이너를 뽑아보실까?"
"대단한 자만심이시군요. 신궁 에숄렛을 맨손으로 받아낸 것이 대단한 일이긴 하지만..."
세르는 현진의 태도에 약간 화가 난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 허공을 가볍게 휘저었다. 그녀의 손을 따라 보랏빛 빛무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빛무리는 이윽고 그녀의 몸 전체에서 뿜어져 나와 마법진을 이루기 시작했다.
"대단히 미안하지만 이제 장난은 끝이랍니다. 죽음의 환상 속으로 떠나보시겠습니까?"
세르의 말이 끝나자 그녀의 몸에서 강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현진은 루이너의 손잡이 오른손에 잡히는 것을 느끼며 왼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옆에 있던 수민은 지인의 곁으로 떨어져내려 지인을 감싸주었다.
"제길... 나의 시야라도 가려보겠다는 거냐? 이 정도에 내가 앞을 못보면 소드 엠퍼러라는 명함은 개나 줘야지. 야앗!"
현진은 루이너에 마나를 잔뜩 불어넣은 후 세르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 순간 빛이 사라지면서 세르가 있던 자리에는 금발의 한 여인이 나타났다. 현진은 멈칫 검을 내리며 그 자리에 멈춰섰다. 금발의 여인은 이렇게 말했다.
"내 엄마란다. 현진아."
지인은 눈 앞에 일어난 일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환상이었다. 하지만 현진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지인은 안타까웠다. 그리고 현진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저 마족이 미웠다. 현진의 손에서 이윽고 검이 떨어졌다. 아래에 서 있던 귀족들은 소드라치게 놀라며 물러섰고 루이너는 대리석 바닥에 그대로 박혀 버렸다.
"어,엄... 마?..."
현진은 허공을 걸어 조금씩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손에 든 하프의 현을 튕기며 말했다.
"내게 가끔 밤에 찾아가 들려주던 자장가란다. 넌 너무 지쳐보여. 자렴. 아가야. 이 엄마 품에서..."
지인은 당장 저 여인의 뺨이라도 한 대 쳐버리고 싶었다. 현진이의 기억을 훔친 것이다. 가끔 꿈에서 흐릿한 영상으로 나타나는 엄마에 대한 기억을... 현진이를 너무 아프게 하고 있다. 지인이는 그대로 몸을 띄워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지인을 붙잡았다. 수민이었다. 수민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지인은 정말 안타까웠다. 알 수 없는 음이 허공을 매웠다. 숨 죽인 사람들 사이로 음이 울려퍼져 갈 때마다 귀족들은 하나 둘 피를 토하며 쓰러져 갔다. 그리고 하프, 아니 하프로 보이는 활에서 회색 빛 한 줄기가 쏘아져 나와 현진의 가슴에 박혔다. 현진은 순간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향해 뭐라고 하려 했지만 그는 그냥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이윽고 환상이 산산히 깨어지며 지친 모습을 한 세르가 모습을 들어내었다.
"이 마법은 너무 힘드네요. 호. 호. 호. 하지만 마검황 당신은 영원히 자겠네요. 영원히... 죽어서는 그 엄마에 품에서 잠들기를 빌어들이지요."
지인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자신을 잡고 있던 오빠의 손조차 뿌리치고 세르를 향해 날아올랐다. 세르는 자신을 향해 다가온 지인을 보며 놀랍다는 듯 말했다.
"상당한 신성력이군요. 카오스의 사제이신가요?"
"당신은 어떻게 아픈 상처까지... 그의 아픈 상처까지 들추어내는 거죠!"
지인의 외침에 세르는 코웃음을 지쳐 답했다.
"그게 마족의 방식이죠. 약한 자는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어요. 마족들에게는 정신적이든, 물리적이든 절대로 상처나 약점 따위는 용납되지 않아요. 만약 있다면 마검황처럼 남에게 짓밟히는 게 마족의 방식이랍니다. 철부지 아가씨."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죠.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마족이라는 종족은 참 불쌍하군요. 수고스럽게도 스스로 철저히 혼자가 되는 군요. 사람들은 사랑을 알기 때문에 당신들 같지 못하답니다."
지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지인의 몸에서 강한 빛이 뿜어져 나와 세르를 공격했다. 세르는 심하게 인상을 쓰면서 에숄렛을 들어 무형의 기를 쏘아내었다. 지인은 그 기운에 밀려 튕겨져 나갔다. 지인의 입에서는 선혈이 흐러내렸다.
현진은 쓰러진 체 반쯤 눈을 감고 있었다. 지쳤다. 이제 정말로 이대로 그냥 죽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겠지. 저 세상이 있다면 카르차넨 젝슨이나 만나서 한 판 신나게 또 붙는 거야. 그리고 엄마도 만나고... 죽어간 사람들, 내 곁을 떠나간 사람들 만나서 다시 한 번 웃으며 살아보는 것도 괜찮겠지.
그 때 한 여인이 무언가에 밀려 날아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목에 걸린 펜던트 속의 여인과 닮았다. 금발과 부드러운 미소... 아니 저 여인의 얼굴은 고통으로 어룩져 있었다. 그리고 입가에 붉은 피가 흐르고 있다. 붉은 피...
분노...
분노가 솟아오른다. 하지만 난, 난 일어설 수가 없다. 힘이 빠진다. 하지만 저 여인을 내가 사랑하는... 내가 사랑하는 지인이를 살려야 한다. 지인이를 저렇게 만든 이를 내 손으로 죽여버린다.
지인이는 연회장 한 쪽 벽에 쳐 박혀 버렸다. 세르는 지인을 비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떠들어 보아야 인간들은 너무 허약해. 네 놈들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그 사랑조차 지킬 힘이 없다고."
"... 그럴지도..."
지인은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몸을 이르키며 말했다. 세르를 베어버리기 위해 검을 뽐은 수민 역시 놀란 눈초리로 지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몸에서는 밝은 빛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아가씨... 미안해요. 잠시만, 아주 잠시만 당신의 몸을 빌리겠습니다."
지인은 중얼거리듯 말하고는 천천히 귀족들 사이를 지나 세르의 발 아래 쪽으로 갔다.
"내려오시겠어요? 거기 있으면 이야기를 못하잖아요."
"웃기는 군."
세르는 그렇게 말하고는 지상으로 내려섰다. 지인은 세르를 보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수민은 동생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귀족들은 여차하면 모두 달려들 태세를 갖추고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상황이 상황이라 잠시 세레니얼 양의 몸을 빌린 샤르이나 크리스티앙이라고 합니다."
지인, 아니 샤르이나라 자신을 밝힌 여인의 말에 사람들은 탄성을 질렀다. 영혼 빙의, 흔치 않은 일이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 때 한 노인이 귀족들 사이에서 나서며 말했다.
"혹시 카오스의 대무녀, 샤르이나 포르세가 아닌지요?"
샤르이나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 그리고..."
샤르이나는 고개를 돌려 현진을 바라보았다. 쓰러진 체 샤르이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샤르이나는 현진을 향해 미소지으며 말했다.
"레이논 크리스티앙의 어머니 됩니다만..."
귀족들은 다시 한 번 탄성을 질렀다. 그러자 세르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샤르이나를 보며 말했다.
"보아하니 마검황의 수호령 쯤 되나 본데 저 아이니 지킬 것이 왜 당신이 지금 들어가 있는 아가씨는 살려준거지. 그 아가씨는 분명 방금 죽었어야 했어."
"내 아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샤르이나의 말에 세르는 콧웃음을 치며 말했다.
"사랑... 그건 인간, 당신들을 너무나 허약하게 만드는 요소다."
"아뇨. 사랑은 모든 인간들의 가능성의 원천입니다."
"웃기는 군... 인간의 가능성이라...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날 소멸시켜 보시지!"
세르는 샤르이나를 향해 외쳤다. 샤르이나는 세르를 향해 차가운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인간의 가능성이란 단지 힘을 말하는 게 아니랍니다."
"웃기는 군. 갈수록 점입가경이야."
샤르이나는 세르를 무시한 체 현진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는 쓰러져 있는 현진의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리고는 현진의 머리를 들어 자신의 무릎에 올려놓고는 속삭이듯이 중얼거렸다.
잘 자라 우리 아가.
앞뜰과 뒷동산에
새들도 아가양도 다들 자는 데
달님은 영창으로 금구슬, 은구슬을
보내는 이 한 밤.
잘 자라 우리 아가. 잘 자거라.
순간 현진의 눈에서 몇 방울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샤르이나는 자장가를 끝내며 미소 지었다. 얼굴은 지인의 얼굴이었지만 현진은 느낄 수 있었다. 현진은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르켜 그녀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엄마..."
그 때 샤르이나를 향해 회색빛 빛줄기가 쏘아져와 샤르이나의 등에 꽂혔다. 현진의 품에 안겨있던 샤르이나는 울컥 피를 토해내며 옆으로 스르르 쓰러졌다. 세르는 지친 듯한 표정으로 신궁 에숄렛을 샤르이나에게 겨누고 있었다. 수민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세르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수민의 손에 들린 파단신검에서 시작된 불줄기가 세르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화염의 의지, 화염의 신수여! 나를 따르랏!"
수민의 외침과 함께 불줄기들은 세르의 주위에서 소용돌이쳤다. 그 때 또 하나의 인영이 연회장 안으로 쏘아져 들어와서 세르를 향해 마나 덩어리를 퍼부었다.
"소드 엠퍼러, 이카엘 샤이드론 후작. 늦게 도착해서 죄송합니다."
샤이드론 후작은 그렇게 말하고는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루이너를 잡았다.
-누구얏! 내 주인님이 아니면 누구도 날 잡을 수 없어!
-이런... 에고 소드 였군. 지금 네 주인이 위험하니 잠시만 빌리마.
-우씨. 대신 내 능력 빌릴 생각하지마. 절~대! 안 도와줄꺼야.
-꽤나 까다로운 검이군.
-뭐얏!
샤이드론은 명검을 잡아본다는 생각에 미소 지으며 초일월광검을 잔뜩 실어 세르를 향해 퍼부었다. 세르는 점점 자신이 밀리는 것을 느꼈다. 도저히 이길 수 있는 상대들이 아니었다.
"[천상에서 내리신 마魔를 벌하는 빛이어! 내와 함께 하는 빛이 되어라! 세이크리트 이라자드!]"
공식적으로 대륙 최강의 마법사인 카를로스 베일루스, 화민이가 나서면서 세르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거대한 힘이 밀려와 수민과 샤이드론, 화민을 모조리 날려버렸다.
"세르... 역시 너 혼자서는 무리였던 것 같다."
갑자기 세르의 옆에서 나타난 검은 로브의 사내의 말에 세르는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면목없습니다. 아스테르 님."
"괜찮네... 아! 천하의 레이논 크리스티앙께서 누워 계실 정도면, 저 인간 덕분에 지난 번에 지옥 구경 할 뻔 했다네."
아스테르는 그렇게 말하고는 검은 빛 검날의 롱소드, 소울 머더를 불러내었다. 마그나타 피니셔에 금이 갔던 칼날은 다시 매끄럽게 빛나고 있었다.
"나머지는 잔챙이고... 당신께서는 검조차 없으시니 죽음 뿐이겠군요. 공작 각하. 무덤이 연회장이니 딱이지만."
아스테르는 그렇게 말하고는 검을 들어올렸다.
"그럼... 죽엇!"
현진은 눈 앞에 쓰러져 있는 지인, 아니 샤르이나를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일생에서 처음으로 만난 어머니, 비록 영혼이었지만 현진은 기뻤다. 그런데 마족이라는 것이 그 행복을 산산히 깨어버렸다. 지인이조차 눈 앞에서 쓰러졌다. 현진은 지금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 때 어디에선가 강한 살기가 느껴져 왔다. 현진은 반사적으로 오른손을 들어올려 막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그 때...
-태초에 모든 것을 일깨운 아크나한의 주인, 그대의 슬픔의 부름을 받아 계를 깨고 세상의 모습을 들어내노라. 모든 슬픔의 검, 루인 칼리어스.
연회장 전체에 카스의 음성이 공명되어 울리고 현진의 오른손에서는 붉은 반지가 화염으로 변하여 쏘아져 나와 현진을 향해 날아오던 검은 마나 덩어리를 쳐 내었다.
"루,루인 칼리어스! 8년 전, 대륙 최강의 검사 카르차넨 젝슨의 검."
누군가의 외침가 함께 모습을 들어낸 루인 칼리어스는 현진의 오른손에 쥐어졌다. 현진은 몸을 천천히 이르켰다. 현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아스테르와 세르를 쏘아보았다.
"아스테르... 네 놈이 전해준 선물 잘 받았다. 상당히 재밌었어."
현진은 전혀 억양이 실리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는 피식 웃어버리며 말했다. 그의 입가로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럼 나도 보답해주지! 넌 내 생에서 두번이나 마그나타 피니셔를 받는 놈이닷! 마그나타 피니셔!"
현진은 초식을 무시하고 곧장 마그나타 피니셔를 사용해 강한 빛을 사방으로 퍼트렸다. 아스테르는 지난 번에 당한 경험을 떠올리며 세르를 잡아끌고 왜곡된 공간 속으로 사라져 갔다. 현진은 마그나타 피니셔를 거두고 루인 칼리어스에 의존해서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카,카스... 어떻게 나온거지. 넌 분명 앞으로 100년은 본체를 들어낼 수 없을 텐데.
-때가 다가왔으니. 빛과 어둠이 아크나한의 핏줄의 손에 쥐어지는 때가 왔으니 계를 깨었다.
-빛과 어둠? 아크나한?
-하지만 아직 네가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때는 아니지. 아무튼 이제 너는 나의 주인이다.
현진은 실없이 웃다가 쓰러져 버렸다. 그 때 쓰러진 것 같던 지인, 아니 샤르이나가 몸을 이르켜 현진을 안았다.
"역시 넌 강한 아이야... 현진아..."
하이시커 가의 저택.
손님이 머무는 방으로 추정되는 곳에 한 청년이 죽은 듯이 누워 있었고 침대 옆에는 금발 머리를 한 여성이 의자에 앉아 청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나자 여성은 청년의 옆에 엎드려 잠들어버렸다. 상당히 불편한 자세였지만 여성의 지친 몸은 아랑곳하지 않고 잠들어버렸다.
"으윽..."
현진은 신음성을 내뱉으며 몸를 이르켰다. 그와 동시에 옆에서 엎드린체 잠들어있던 금발 머리의 여성이 놀라며 몸을 이르키며 눈을 떴다. 그 여성은 현진을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안 죽고 살았네? 넌 어떻게 된 애가 맨날 픽 픽 쓰러져서 실려오냐?"
"퉁 퉁 부은 눈을 가지고 그런 소리하면 신빙성이 급격히 하락해. 이런, 우리 아름다우신 박지인 양 얼굴에 눈물 자국까지 생겼네?"
지인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현진은 침대에서 일어나 한 쪽 벽에 놓아져 있는 검 두자루를 불러드렸다.
-주인님... 우잉. 저 하나로는 만족 못해서 저런 검을 불렀어요?
-루나. 넌 오빠가 '저런 검'으로 밖에 안 보이지? 앙!
-네. 물론이죠.
현진은 피식 웃으면서 이제 이 둘을 데리고 어떻게 살아갈지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지인을 향해 물었다.
"너 지인이 맞지? 혹시... 그러니까..."
"샤르이나 님은 가셨어. 이제까지 자신이 당신의 자식을 지켰지만... 이제는..."
"후 후 훗. 앞으로 너한테 내 목숨을 맡겨야 하다니... 오! 신이시어!"
현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지인을 보며 말했다.
"으윽... 피 묻은 옷은 싫다. 옷 좀 가져다 주라."
"엉? 어..."
현진은 서둘러나서려는 지인을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하인을 보내. 넌 가서 좀 자둬야 겠다."
"네가 내 걱정을 다하네."
"..."
현진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지인은 미소 지어 보이며 방을 나섰다.
아침 햇살이 대지를 비추고 잔잔한 바람이 불어와 언덕의 풀잎들을 흩어놓았다. 마로드의 황궁, 하렌시아 뒤편의 언던에 젊은 남녀 한 쌍이 도시를 내려다 보며 서 있었다. 바람이 불어와 여성의 금발을 휘날리게 했다. 검은 머리를 부스스하게 흩어놓은 남자는 하늘을 올려다 보며 말했다.
"하늘이 맑아."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공기도..."
"이현진, 어울리지 않게..."
현진은 말 없이 금발 머리의 여성, 지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엄마라는 존재... 나에게는 너무도 애매한 존재였어. 또 생각할 때마다 너무 아픈 이름이었지."
현진은 잠시 숨을 들이쉬고 말을 계속이었다.
"엄마... 엄마란 존재는 나라는 인간을 낳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분이야. 무슨 병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를 가지셨을 무렵 엄마는 피를 자꾸만 토하셨다고 해. 그 때 고위급 무녀의 직위를 가지신 엄마는 스스로 치료하실 수 있었지만 그러면 내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없었거든. 그냥 죽어야 했거든. 그래서 엄마는 그냥 아프셨고 내가 태어났어. 나는 누군가를 아프게 하고 죽게 해서 태어난 존재야."
현진은 습관적으로 목에 걸린 펜던트를 풀어 손에 꽉 쥐었다. 지인은 현진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걸 알았다. 현진은 말을 계속했다.
"그런데 난 바보같이도 엄마를 미워했어. 나같은 걸 낳았다고 미워했어. 내 곁에 없다고 미워했어.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현진은 고개를 돌려 하늘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지인은 현진이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인은 그가 우는 걸 볼 수 없었다. 현진은 돌아서서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는 항상 내 곁에 계셨어. 가끔 꿈 속에 흐릿하지만 나타나 자장가를 들려주셨고 항상 나를 지켜주셨어. 이제 떠나셨지만... 난 그 분의 사랑을 느낄 수 있어. 나에 대한 사랑을..."
지인은 묵묵히 현진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다가 말했다.
"그 분께서 내게 말하셨어. 현진이 너는 항상 밝고 강해 보이지만 속은 한 없이 여린 아이라고. 네가 흔들지 않게 곁에서 지켜 달라고. 자신이 해 주지 못한 사랑을 대신 전해 달라고..."
"... 이 펜던트에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난데. 그 동안은 이 펜던트의 얼굴이 엄마라고 막연히 생각해 왔어."
현진은 다시 돌아서 펜던트를 지인에게 내밀며 말했다.
"하지만 이 펜던트에 있는 건 당신... 제 사랑을 받아주시겠습니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여."
지인은 묵묵히 펜던트를 받아들었다. 지인이 펜던트를 받아서 목에 걸자 펜던트에서 미미한 빛이 세어나오다가 이네 잠잠해 졌다. 지인은 펜던트를 조심스레 열었다. 그 곳에는 밝게 미소 짓는 현진의 얼굴이 들어있었다. 현진은 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그 펜던트의 주인은 너야. 나를 지켜줄 이며, 내가 지켜야 할 이... 네가 보관해 줘."
지인은 얼굴을 잔뜩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진은 다시 한 번 하늘을 올려다 보며 말했다.
"저 하늘 어딘가에서 엄마가 날 보고 계시겠지. 아... 가끔은 그 자장가를 나에게 들려 주시겠지."
지인은 현진의 뒤에서서 현진의 목덜미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지인은 현진의 귓가에다가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럴꺼야..."
현진은 미소 지으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이제 꿈 속의 흐릿했던 영상이 뚜렷히 떠올랏다. 현진은 홀로 나직하게 속으로 말했다.
내가 지켜야 할 이여, 나를 지켜줄 이여.
그대 이 세상 하나 뿐인 사람.
나 사랑합니다.
그 누군가와 너무도 닮아있는 그대...
『영혼의 펜던트』
카오스력 9909년
바일론 제국의 존 바스칼 바일로너 황제는 대륙 전쟁을 단행한다. 수 많은 귀족원 원로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칼라이스와 순백의 위저드의 힘을 빌어 해상 점거와 루드 시, 마로드 국경성까지 함락시키고 파죽 지세로 밀고 들어가 마로드 국토를 유린하기에 이른다. 이에 황제는 '대륙 통일'을 내세우며 국호를 '대 바스칼 제국'으로 개명, 자신을 존 카르세온 바스칼이라 칭하기 시작한다. 이 황제는 후일 사람들에게 여사상 최악의 폭군, 카르세온이라 불리운다.
"성황의 성을 버리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가!"
세네네즈의 한 저택의 지하, 중년의 사내 둘이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흑발에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사내는 푸른 색 머리칼에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는 탁자를 소리나게 내리치며 외쳤다.
"안드레이! 자네는 이 상황에서 그렇게 태평할 수 있는 가?!"
안드레이라 불리운 부드러운 인상의 사내는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를 다독이듯이 말했다.
"자, 자. 진정하게 에밀리앙. 흥분한다고 될 일이 아니지 않은 가?"
"흥분하지 않게 생겼나! 지금 황제는 미쳤어!"
안드레이는 에밀리앙을 잠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럼 또 일을 벌릴 작정인가?"
"자네 도움이 절실하지. 그렇지 않으면..."
에밀리앙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안드레이는 그런 에밀리앙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 반역을 생각하는 건가? 에밀리앙 시르크 남작?"
"안드레이 크리스티앙 공작 각하. 혁명이오."
에밀리앙은 품 속을 뒤저 한 장의 양피지를 꺼내었다. 안드레이는 그 양피지를 펼쳐보고는 놀라서 말했다.
"이,이건?!"
"내가 근래에 만든 이스탈 회의의 모든 귀족들이 서명한 양피지라네. 자네의 서명만 남았어."
안드레이는 에밀리앙을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자네는 항상 나를 놀라게 해. 그래, 체이필드 공작가의 승인을 받았다면 다른 황족을 내세웠겠군. 누군가?"
"누구냐 하면... 하이런이라네."
"헛!"
안드레이는 놀란 얼굴로 에밀리앙을 바라보았다. 안드레이와 에밀리앙이 엄청난 작위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사석에서는 이렇게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은 오래전 젊은 시절 함께 여행을 다녔던 전적 때문이었다. 물론 자신의 자식들이 벌려놓은 일들에 비하면 참 초라한 유희에 불과하지만... 안드레이 크리스티앙, 에밀리앙 시르크, 브라인 레비던트, 하이런 바일로너, 용병 카샤드. 다섯이라면 무엇도 두렵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던 때가 있었는 데... 안드레이는 잠시 회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좋아. 친우를 황제로 만든다는 것이 깨름칙하지만..."
"깨름칙하시다면 저를 황제로 만들어 주시겠습니까?"
안드레이와 에밀리앙은 순간 고개를 돌려 입구로 시선을 향했다. 그 곳에는 별로 반갑지 않은 그들의 두 아들 녀석가 처음보는 청년이 서 있었다.
"귀하는 누구인가?"
안드레이가 근엄한 어조로 묻자 젊은 청년은 짧게 답했다.
"하이런 바일로너의 아들, 네프칼 바일로너입니다."
에밀리앙은 그 말에 잠시 아들을 바라보았다. 파란색의 머리칼은 짧게 잘라 부스스하게 흩어놓고 예의 보랏빛 망토를 걸친 모습을 보아서 그렇게 달라보이지 않았지만 풍기는 분위기 만으로는 많이 달라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안드레이 역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아들... 황실기사단장이라는 막중한 직위를 가지고도 여행이나 다니는 그 아들이 한 없이 밉기도 했지만 지금은 왠지 모르게 자신을 닮아가는 것만 같았다.
"저희는 네프칼 바일로너를 황제로 추대하기 위해 수도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
에밀리앙은 그의 아들, 사이칸트 시르크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리는 하이런을 황좌에 올리 예정이다. 저 아이는 황태자로 만족해야 해."
"그건 본인도 공감하는 바이다."
안드레이의 말에 그의 아들, 스티브 크리스티앙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역시 보수적이시군. 젊은 황제가 저력이 있는 거라고요. 황태자가 뭐냐? 황태자가... 그런 우리가 세워놓은 계획은 뭐냐고! 안 그러냐? 칸?"
"맞는 말이지. 칼을 황제로 만들려고 한달을 고생했어. 깐깐한 마스터 할배 설득시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고."
칸의 말에 칼이라 불리운 네프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늙어가시는 아버지를 골치아픈 자리에 올리기 싫단 말입니다."
안드레이와 에밀리앙은 아주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칸이 그들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네프칼 왕조를 열겁니다. 그리고 대륙 전쟁이 더 이상 이 대륙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여서 피가 흐리지 않게 하렵니다. 그 것이 우리가 일어난 목적입니다."
"칸... 네 녀석은 이제 더 이상 철부지가 아니로구나."
에밀리앙은 약간 감상적으로 말했다. 그 때 그들 사이에 안드레이가 끼어들며 말했다.
"네프칼 하이런 바일로너... 네프칼 1세를 옹립하겠네. 스티브, 칸, 칼... 너희의 뜻은 알겠다만은 어린 칼을 옹립하겠다고 하면 지지를 얻기 쉽지 않단다. 한 발자국 물러서다오."
안드레이의 말을 끝으로 결론은 나버렸다. 스티브는 결론을 내린 후 밖으로 튀어나가 황실기사단을 이용 역으로 황궁을 포위해버렸고 안드레이는 크리스티앙 공작가의 사병으로 내성을 점거했다. 사이칸트 시르크는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스터 전속 친위대를 이끌고 외성과 세레네즈 시내를 점거하기 시작했다.
카오스 력 9909년
바일론 제3차 왕권 교차라는 대 사건이 일어났다.
도중, 마법사 간의 충돌(정확하게 사이칸트와 순백의 위저드 빛의 장로)로 인해 수도의 절반이 날아가고, 내성에서 터져나온 빛(마그나타 피니셔)이 마법사들이 날려버린 자리를 강타하여 그 잔해를 쓸어버리는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이 사건 이후 네프칼 하이런 바일로너 황제가 네프칼 1세로서 옹립되었고 네프칼 칼 바일로너라 개명된 이름의 주인은 황태자로 책봉된다. 시르크 남작가는 순식간에 시르크 공작가로 변모하였으며 황제와 함께 전쟁을 이르킨 크리스찬 공작은 내란 중 사망, 크리스찬 공작가는 후작가로 강등되고 그의 아들인 알프레드 크리스찬이 가주가 되었다.
그리고... 묘하게도 시르크 공작가의 가주 자리는 사이칸트 시르크가 차지했다. 에밀리앙은 이제는 좀 쉬겠다며 저택에 틀어 박혀 독서를 즐기는 평범한 중년이 되었다.
안드레이 역시 스티브에게 가주 자리를 넘기려 했으나 스티브는 마치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 버렸다. 결국 안드레이는 한 숨을 푹 쉬며 계속된 업무에 시달리게 되었다. 에밀리앙의 위로 아닌 위로를 받으며.
다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카오스력 9939년.
푸름시에도 서서히 봄바람이 불고 있었다. 길드탑 내부, 마스터의 방에는 마스터, 이성찬 아니, 스티브 크리스티앙이 흐릿하 영상의 여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게 제3차 왕권 교체가 끝나고, 황태자가 된 칼이 외교 사절로 마로드로 떠나는 행렬을 쫓아 도망치듯 세레네즈를 빠져나왔었지. 아마?"
여인은 그런 스티브를 보며 말했다.
"당신이나 칸이나... 그 때는 정말 멋졌는 데... 지금은 주름살 보이는 노인네가 되어가네요."
"헉! 그렇게 심한 말을! 샤르! 네가 어떻게 나에게! 아직도 멋있지? 그렇지?"
샤르, 샤르이나 포르세는 살짝 미소 지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스티브는 환하게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크리스와 칸, 칼, 당신과 루나... 그리고 나. 우리는 그렇게 떠난 여행에서 또 다른 인연을 만들 줄은 그래서 이렇게 얽히게 될지 어떻게 알았겠어?"
"맞아요. 프란츠 하이시커... 그 사람의 딸, 현진이를... 레이논을 많이 사랑하는 것 같더군요."
"그리고 그 영혼의 펜던트는 다시 하이시커 가문의 사람에게 돌아간 모양이지."
"후 훗 그렇겠지요."
샤르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스티브는 그녀의 미소를 바라보다 나직하게 말했다.
"그 찬이라는 꼬마... 결국 현진이 녀석의 손에 죽었다지. 참, 세상사가 기묘해."
"... 당신이 친 사고 중에 대형 사고 중 하나였어요. 스티브."
"우후훗. 그래도 한 제국의 황제를 갈아치운 것 만 할까?"
"그래도..."
"그래... 그런 때도 있었지. 카오스력 9910년의 봄 무렵이었던가?"
스티브는 다시 샤르와 함께 회상에 잠겼다.
카오스 력 9910년.
그 날은 유난히 따스했던 3월의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네프칼 칼 바일로너 황태자를 호위한다는 목적으로 황실기사단장인 나 스티브 크리스티앙과 사이칸트 시르크 공작, 크리스 에프론, 샤르이나 포르세, 루이아나 세르디오는 마로드의 수도를 방문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 때 당시 그 것을 마지막 여행이라고 염두에 두고 떠났다. 하지만 마로드 수도에서 만난 한 늙은 노인을 통해 우리는 또 다른 모험을 시작하게 되었다. 칼을 따돌리고 우리는 마로드의 수도 방어 도시, 아룬드나얀으로 향하게 되었다.
때는 카오스 력 9910년.
마치 마로드를 멸망시킬 듯한 기세로 밀고 들어와 수도까지 함락시킨 바일론은 갑작스러운 평화조약을 제안한다. 마로드는 이대로 멸망할 수는 없었기에 바일론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고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그 외교 사절이 마로드의 수도, 하르소아의 머물고 있을 무렵, 아룬드나얀의 한 여관 1층 식당에 그 외교 사절의 중요 인사들이 빠져나와 머물고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치 못했다.
"으하... 그래 여행은 이렇게 해야 직성이 풀려. 예의이나 격식은 정말 짜증나는 것이야!
검은 머리칼의 초라한 여행자 복장의 청년이 말했다. 그러자 보랏빛 망토를 걸친 부스스한 푸른색 머리칼의 청년이 그를 보며 말했다.
"스티브... 그래도 넌 귀족이야."
"칸, 여행을 할 때는 나는 귀족이 아니라 '프리 나이트free knight' 이시라고. 나의 공주님만의 프리 나이트..."
스티브의 말에 금발의 여성이 토하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으엑... 닭살 돋는 다. 스티브."
"알겠습니다. 샤르... 나의 공주이시여!"
칸은 도저히 못봐주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음식으로 돌렸다. 갈색 머리칼을 길게 길러 한 가닥을 묶은 청년이 스티브를 보며 말했다.
"너 닭이냐?"
"으윽, 말 다했어! 크리스!"
"다했어."
스티브는 결국 무안해져서 음식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때 여관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금발의 청년 하나와 검은 머리칼의 소년이 들어왔다. 그들은 무척 지친 얼굴을 하고 테이블 앞에 주저 앉았다.
잠시 후, 경갑옷을 착용한 기사들이 여관 안으로 들이닥쳤다. 스티브 일행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방금 전 들어온 청년과 소년을 향해 다가갔다.
"찬, 프란츠! 내 놈들은 우리를 좀 따라가줘야겠다."
대장으로 보이는 기사가 나서서 말하자 청년은 코웃음치며 말했다.
"나 프란츠 하이시커, 내 놈 따위의 말을 들을 이유는 없을 줄로 아는 데... 제네르."
그러자 제네르라 불리운 그 기사는 프란츠를 비웃으며 검을 뽑아들었다.
"그렇다면 무력 행사를 할 수 밖에."
제네르가 검을 날리자 프란츠는 여유있게 검을 스윽 피해버리며 허리에 걸린 검을 뽐았다. 푸른 빛 보석같은 그 검이 뽐혀져 나오자 제네르 뒤에 서 있던 기사들은 주춤 물러섰다.
"파단신검을 아는 자는 나서지 말라!"
프란츠는 그렇게 외치고는 제네르를 향해 검을 날렸다. 제네르는 검을 들어 막으려 했지만 프란츠의 검은 제네르의 검을 두동강 내어 버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스티브는 프란츠를 보며 중얼거렸다.
"검격이 강하지만 검술은 없어. 그럴 경우에는 두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지. 검술이 필요없는 고수거나 검사가 아닌 검을 이용한 다른 클레스라는 것...."
제네르는 물러서는 기사 중 한 녀석의 허리춤에서 검을 뽐아내어 프란츠가 날리는 검을 막았다. 이번에는 검기가 미약하지만 실려있었다. 제네르는 프란츠를 겨냥해서 검기를 날렸다. 프란츠는 재빨리 그 검기를 피했고 그 검기가 가는 자리에 있던...
"실내에서 검기를 난사하면 쓰나... 쯧. 쯧."
검기는 우연히 샤르를 향해 날아갔고 스티브는 재빨리 손을 휘둘러서 기를 쏘아 보내 검기를 소멸시켜 버렸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기사들과 프란츠, 찬이라 불리운 소년은 경악했다. 스티브는 일행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에는 나 말리면 베어버린다."
스티브는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이르켜 프란츠 앞에 섰다.
"어이, 검기를 보낸 장본인... 내 검이 자네 얼굴 좀 보자는 군."
스티브는 허리에 걸린 롱소드 대신 등에 걸린 바스타드 소드를 빼내었다. 스티브는 제네르를 보며 씩 웃으며 말했다.
"새로 산 바스타드 소드를 시험해 보실까."
순간 모두의 시야에서 스티브가 사라짐과 동시에 제네르의 오른팔이 땅에 떨어져 내렸다.
"검을 어느 정도 깨달은 놈이 검기를 함부로 쓰면 안되는 거야. 사람 죽을 뻔 했잖아. 내 놈은 검을 쓸 자격이 없어. 뭔가 다시 깨닫거든 다시 수련하라고 왼팔은 남겼으니 알아서 잘 살라고."
스티브는 그렇게 말하고는 여관을 나서려 했다. 그 때 프란츠가 그를 불러세웠다.
"당신의 이름은 뭐요?"
"스티브... 스티브 크리스."
스티브는 그렇게 말하고는 여관을 나가 버렸다. 동시에 그의 일행도 테이블에서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프란츠와 찬이라는 소년은 혼란한 틈을 타서 여관을 빠져나왔고 기사들은 그 자리에 쓰러지는 대장을 부축해서 스티브 일행이 묵기 위해 예약한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바람 한 점이 지나가듯 그렇게 지나가버린 어느 오후의 일이었다.
"그 때는 당신이 '조금' 은 멋져보였는 데 이제보니 나이먹은 아저씨네요. 호 호 호."
다시 시간은 카오스 력 9939년, 길드탑에서 샤르와 스티브가 즐거운 회상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스티브는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샤르... 그대가 그렇게 말하면 난 슬퍼진다네."
"으욱. 닭살... 항상 과묵하고 점잖은 스티브 크리스티앙, 아니 이성찬 어르신이 정신 연령 15세에 닭살 떠는 사람이라는 걸 사람들은 모르지. 진실은 언제인가 밝혀지리라!"
샤르의 외침에 스티브는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성녀, 대무녀 샤르이나 포르세가 이렇게 희대의 천방지축이었다는 사실을 역사책에 반드시 기록해야해! 진실된 역사 교육이 미래를 만든다!"
샤르와 스티브는 그렇게 한마디씩 주고 받고 피식 웃으어버렸다. 스티브는 가끔은 이렇게 소년으로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스티브는 잠시 샤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말을 계속했다.
"그렇게 해서... 여관을 옮겨서 식사를 했는 데 하필 거기로 다시 프란츠 녀석하고 그 꼬맹이가 들이닥치더니, 멍청한 기사 놈이 피를 질질 흘리면서 한주먹거리들을 잔뜩 몰고 쳐들어오는 바람에 결국 휘말려버렸지."
"스티브 크리스?"
다시 카오스력 9910년, 스티브 일행은 스티브가 저질러놓은 일 때문에 여관을 옮긴 상황이었다. 그런데 스티브가 사고를 치게 된 원인을 제공한 인물들이 다시 들이닥친 것이었다.
"아직도 쫓기고 있냐? 멍청하기는... 그 정도 해 줬으면 알아서 튀어야지."
스티브는 프란츠를 보며 그렇게 말하고는 음식으로 눈을 돌렸다. 이전 여관에서도 무시무시한 양을 먹어치워 놓고도 또 다시 먹고 있는 그를 보면서 칸은 아주 질렸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우씨, 프란츠 형은 멍청하지 않아!"
"꼬맹이는 입 다물어."
스티브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프란츠 옆에 붙어있던 꼬마, 찬은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난 꼬맹이 따위가 아냐. 내 이름은 카르차넨 젝슨이다! 아룬드나얀의 진정한 영주 가문의 직계 후손이란 말이다."
"그게 어쨌는 데? 그럼 나는 소드 엠퍼러겠군."
스티브가 그렇게 말하자 샤르는 웃음을 터트렸다. 칸 역시 박장대소하며 메세지 마법으로 스티브에게 말했다.
-너 소드 엠퍼러잖아.
-그랬던가.
칸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스티브를 보다가 한숨 짓고는 맥주잔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찬은 모욕 당했다고 생각했는 등에 메고 있던(어린 아이가 검을 허리에 차기는 무리가 있다.)롱소드를 뽐아들었다.
"카르차넨 젝슨,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한다."
"스티브 크리스... 아니 크리스티앙. 그 결투를 받아드리지."
침. 묵.
일순간 여관 1층 식당은 침묵에 휩싸였다. 스티브 크리스티앙, 소드 엠퍼러 서열 1위 사실상 대륙 최강의 검사다. 그리고 바일론 제국의 최고 가문의 차기 가주이기도 하다.
"노,농담하는 거냐?"
찬은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스티브는 살짝 고개를 저어보이고는 제네르라는 기사를 베는 사용했던 바스타드 대신 롱소드를 뽐아보였다.
"파르하. 이 녀석이라면 내 신분은 보장 되겠지?"
그 롱소드는 은은한 푸름 빛을 내뿜는 검날을 가지고 있었다. 블루 드레곤의 드레곤 본으로 만들어진 이 검은 사실상 주인인 스티브보다 더 유명한 녀석이었다. 죽음의 저주가 내린 사신死神의 검 파르하. 스티브를 제외한 그 검의 주인은 모두 1년 안에 죽었다. 하지만 스티브가 그 검을 잡은 이후로는 그런 일이 없었다. 그래서 애고 소드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스티브 크리스티앙, 더 이상 본국의 일에 참견하지 마시오."
그 때, 여관 입구에서 중년의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스티브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 사내에게 말했다.
"당신은 자신을 밝히는 것이 예의라는 것을 모르시오?"
"저는 하르드 나얀, 자작의 칭호를 받아 이 영지를 관리하고 있습니다. 일행 분들도 소개 좀 해 주시겠습니까?"
"본인은 대 바일론 제국의 사이칸트 시르크 공작이다."
칸이 스르르 몸을 이르키며 말했다. 이어 크리스가 앉은 체로 말했다.
"용병들의 그랜드 마스터. 대답이 되었는가?"
"샤르이나 포르세, 카오스 님을 따르는 무녀입니다."
"루이아나 시르크, 시르크 집안의 안주인입니다."
나얀 자작은 순간 비틀했다. 스티브야 알아주는 여행광이라고 소문이 나 있었지만 그랜트 마스터같은 존재나 대륙 최강의 마법사 시르크 공작, 최강의 서열에 드는 포르세 궁정 대마법사의 딸, 샤르이나... 초호화판 거물급 인사였다. 나얀 자작은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하, 하, 하... 정말 거물들이 오셨군요. 성으로 모시..."
"밖에 풀어놓은 떨거지들부터 치워."
흠칫.
스티브의 말에 나얀 자작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프란츠는 나얀 자작을 향해 외쳤다.
"나 프란츠 하이시커, 내 놈이 이 영지의 영주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상인 놈 주제에 감히 젝슨 백작가의 직계 자손이 살아 있음에도 영지를 넘보다니!"
"경비대장 주제에 말이 많으시오. 귀빈들도 계시는 데..."
프란츠는 이를 갈았다. 나얀 자작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저기 서 있는 귀빈들 덕분에 의외로 문제가 쉽게 풀릴 것 같았다. 그 때 프란츠 뒤에서 찬이 뛰어나와 나얀 자작 앞에 섰다.
"프란츠 형, 나 지금 백작이지?"
"어? 으,응. 젝슨 집안의 작위는 되물림되는 것이니까."
"나 카르차넨 젝슨, 대 마로드 제국의 위대하신 황제 폐하께서 본 집안의 하사하신 백작의 작위를 받아 그 권한으로 명한다. 당장 병사를 치워라!"
"꼬맹이 따위에서 허리를 굽힐 내가 아니다."
나얀 자작은 여유만만이었다. 그 때 스티브가 툭 하고 던져놓은 한마디는 폭탄 선언이었다.
"칸, 크리스. 우리 저 꼬마 도와주자."
"칸, 크리스. 우리 저 꼬마 도와주자."
스티브의 폭탄 선언에 여관 내부는 일순간 침묵에 휩싸였다. 나얀 자작은 잠시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저 하르드 나얀, 죄송스러운 말씀을 드립니다만... 본국 내부의 일에는 신경을 쓰지 말았으면 합니다."
"웃기는 군."
칸은 그렇게 말하며 나얀 자작과 시선을 마주했다. 나얀 백작은 순간 흠칫하며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칸의 눈은 깊었고 또 차가웠다.
"우선 본국, 바일론의 귀족을 향해 덤빈 기사 놈이 당신 소속이지. 이로서 우리는 이 일에 끼어들어서 그대에게 보복해도 되는 명분이 생긴 셈이야. 또한 귀국에서는 타국의 귀족을 병사로 포위하고서 맞이 하는 가!"
칸의 일갈에 나얀 자작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체로 굳어버렸다. 칸은 노기를 띄며 나얀 자작을 노려보다가 말했다.
"물론 본인이 귀국의 정권 다툼에 끼어들 이유는 없소. 그러니 길을 비켜주시겠소?"
칸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스태프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는 스티브와 일행들을 향해 외쳤다.
"가자."
칸은 그렇게 말하고는 프란츠와 찬을 향해 미소를 지어보였다.
-저희를 따라오십시오. 당장은 저들이 어쩌지는 못할 것입니다.
"아!"
프란츠는 머릿속을 울리는 음성에 탄성을 지르며 찬의 손을 잡아 끌고 칸 일행을 뒤쫓아 여관을 나섰다. 나얀 자작은 그들이 포위망을 벗어났을 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저,저들을 잡아라! 바일론의 귀족을 사칭하는 악당들이다! 잡아오는 자에게는 한 계급 승진과 후한 포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제길, 칸. 다 쓸어버려도 되는 거잖아."
"시끄러워."
칸은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주위를 살피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룬드나얀의 외각, 숲 속이었다. 프란츠와 찬을 끌고 도망친 스티브 일행은 도시 안에 머물지 않고 그대로 숲으로 도망친 것이다.
"결국 노숙이군."
크리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칸은 망토를 벗어 옆에 깔고는 입을 열었다.
"루나, 이 쪽으로 와서 앉아."
칸은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이르켜 스태프를 들고 주위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루나라 불리는 금발의 여성은 망토를 깔고 앉으며 말했다.
"또 스티브 덕분에 노숙인가. 참~~ 고맙다."
"야! 루이아나 세르... 아니 시르크! 너 뭐야! 내 덕분에 이런 진귀한 모험을 했으면 감사를 해야지!"
"고맙다고 했잖아."
"뭐야 그 태도는..."
"조용히 해라. 스티브."
샤르이나가 한마디 하자 스티브는 표정을 싹 바꾸며 말했다.
"옙! 나의 프린세스."
"느끼해."
샤르이나는 토하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이 광경을 좀 황당하게 바라보던 프란츠가 순간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누가 옵니다. 숫자는 50명 가량."
"기사들이군. 숫자는 54명. 수준은... 떨어지는 군."
크리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검을 뽐아들었다. 그 때 화살 한 발이 날아왔다.
푹. 그리고 누군가의 어깨에 박혀버렸다. 칸은 얼굴을 완전히 굳이히며 말했다.
"누가... 누가 루나의 어때에 화살을 쏜거지."
스티브와 크리스, 샤르이나는 일제히 침을 꿀꺽 삼켰다. 루나는 인상을 팍 쓰면서 어깨에 박힌 화살을 뽐아내었다.
"으윽..."
루나는 신음을 토해내며 상처 부위를 손을 막았다. 무표정했던 칸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며 싸늘하게 변해갔다.
"크크큭... 시르크 가문의 여인을 건딜면... 절대로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지."
칸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루나 주위에 실드를 쳤다. 칸은 천천히 마나를 발산하며 외쳤다.
"바람의 칸, 나 사이칸트 시르크의 이름으로 모조리..."
칸의 주위에서는 엄청난 마나 폭풍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마법진이 사방에서 생겨났다.
"죽여버린닷!"
마지막 외침과 동시에 칸의 발아래에 거대한 마법진이 생겨났다.
"[태초에 대지를 다듬은 창조의 바람이어! 이제 그대 징벌의 함성을 빌리어 나를 거스르는 자를 징벌하라! 싸이클론 샤우트!]"
이어 일어난 엄청난 바람과 그 사이를 난무하는 바람의 칼날은 사방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었다.
다시 카오스력 9939년.
"... 악덕 귀족의 병사를 정의롭게 물리친 사이칸트 시르크 공작 각하는... 이라니?"
샤르이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스티브는 샤르이나가 들고 있는 책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현진이 녀석 학창 시절 교과서군. 거기 나오는 스티브가 나인줄도 모르고 멍청한 아버지보다는 스티브처럼 될거라고 했던가?"
"후 후 훗... 그런데 이건 좀 심했다. 정의감에 불타오르는 일행? 공포감아니었나? 칸이 폭주해버렸으니까. 물론 칸은 분노였겠지만..."
스티브는 갑자기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그 자식 폭주하면 정말 무서웠는 데..."
"너도 만만치 않았어."
"그랬던가?"
"네 녀석은 '칸! 너 혼자 재밌게 놀면 어떻게! 나도 같이 놀자!' 라고 외치면서 무지막지하게 검을 휘둘렀잖아. 광염 소나타... 아마도 찬이라는 꼬마는 글 보고 검술을 익히기 시작했겠지."
"프란츠도 생각나는 군. 보답이라고 던져준게 낡은 펜던트라서 실망했는 데... 지금 생각해보면 더 없이 귀한 물건이었어."
"영혼의 펜던트... '두 개의 고리' 를 있는 물건이었던가?"
샤르이나의 말에 스티브는 이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그래... 두 개의 고리... 그 고리들을 과연 아이들에게 물려 준 것이 잘한 일인지. 그 시절... 우리가 행했던 것은 잘한 일인지.... 모르겠어."
"스티브..."
샤르이나는 걱정스럽다는 듯 스티브를 바라보았다.
"그래... 차다리 아무런 걱정이 없던 그 때는 좋았는 데..."
스티븐 다시 회상에 잠겼다.
[입과 입을 거친 이야기]
카오스 력 9910년
마로드의 수도 방어 도시, 아룬드나얀에서는 한차례의 피바람이 일었다. 폭정을 행하던 영주가 쫓겨나고 진정한 아룬드나얀의 주인인 젝슨 가문의 후계자가 영주 자리를 되찾았다. 후일 전하기를 소드 엠퍼러, 사신의 검의 주인 스티브 크리스티앙의 도움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것이 어떤 방식의 도움이었는 지는 그다지 뚜렷하게 전하는 바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아룬드나얀의 주민들 사이에서는 이 이야기가 부풀려지고 각색되어 입에서 입으로 전하고 있었다.
[당사자, 스티브의 회상]
카오스 력 9910년
당돌한 꼬마 녀석 하나를 도와주다가 나의 절친한 친우인 칸이 폭주하는 변이 생겼다. 그의 부인인 루나가 적의 화살에 맞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폭주해버린 것이다. 평소에는 조용한 녀석이 폭주만 해 버리면 천지를 뒤집어 놓는 다. 나는 녀석을 막을 요량으로 광염 소나타를 극성으로 펼치는 미친 짓을 해야 했다.
"다 죽여 버린다!"
칸의 처절한 외침, 나는 맞대응하기 위해 마나를 더욱 끌어올렸다. 으 윽, 엄청난 무리가 온다. 별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칸을 도와서 분노의 대상을 제거 하는 것이 빠르다.
"우씨! 칸! 너 혼자 재밌게 놀면 어떻게! 나도 같이 놀자!"
나는 이렇게 외치며 검을 나얀 자작이라는 미친 작자에게로 돌렸다. 곱게 꺼졌으면 이런 일 없잖아라고 속으로 불평하면서. 그렇게 우리는 숲 하나를 송두리째 날려 버렸다. 싸이클론 샤우트의 극성과 광염 소나타의 극성... 누가 막을 수 있겠는 가?
"이만... 가야되겠어."
카오스력 9939년, 푸름시 길드탑 내부. 샤르이나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이르켰다. 정확하게는 영혼을.
"여전히 잔인하게 떠나가는 구나. 샤르..."
"미안해. 스티브... 난 우리 현진이의 수호령 역활도 다 해 버려서 더 이상 여기 머물기 힘들어."
샤르이나의 말을 들으며 이제 중년이 된 스티브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래... 가. 먼저가. 곧... 곧 뒤따라 가야 할테니."
"무슨?"
"광염 소나타를 익힌 자는 그 검의 끝을 보지 못하면 다른 사람보다 일찍 죽기 마련이거든. 얼마 남지 않았어."
"그래서 광염소나타를 봉인한거야?"
"현진이 녀석이 깨버렸지만."
스티브는 시선을 돌려 창가로 향했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샤르... 이제 그만 엉터리 절름발이 흉내를 끝내고 세상으로 나서려고 해. 이 생명을 다하기 전에 현진이 녀석에게 아버지로서 뭔가를 해 주고 싶거든. 그리고... 그 일을 마치면 너에게로 갈게. 먼저 가서 기다려. 저 세상에서 너와 내가 웃으며 살 수 있는 곳을 만들어 놓고."
"스티브..."
스티브, 이성찬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샤르이나의 영혼은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스티브는 나직하게 말했다.
"머물려고 애쓸 필요 없잖아. 그만 가. 어차피 넌 죽은 몸이잖아."
"..."
샤르이나는 아무말 하지 않고 그대로 사라졌다. 스티브는 몸을 이르키며 말했다.
"미안... 샤르. 하지만 널 오랫동안 붙잡아두면 내 자신이 약해 져서 말이야."
[다 하지 못한 이야기]
"... 감사의 표시입니다."
프란츠 하이시커는 그렇게 말하며 낡은 펜던트를 건내었다. 샤르이나는 그 펜던트를 받아들려 의문의 시선을 던졌다.
"뭐죠?"
"저희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펜던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어준다는 특별한 힘이 있다지요. 간직해 주셨으면 합니다."
"사랑... 하는 사람과?"
샤르이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펜던트를 받아 목에 걸었다. 펜던트에서 밝은 빛이 세어나오다가 이내 멈추었다. 샤르이나는 펜던트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 곳에는 스티브 크리스티앙의 초상화가 나타나 있었다.
"...스티브... 이건 이제 당신이 간직해 주겠어요."
힘없는 목소리.
스티브는 눈물을 집어삼키며 샤르이나가 건내는 펜던트를 받아들었다. 샤르이나는 자신의 품에 안긴 아기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스티브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샤르이나의 초상화가 담긴 펜던트를 잠시 열어보았을 뿐이었다.
"샤르... 당신은 여기에 잠들어있겠지요? 우리 레이논... 우리 현진이 녀석이 어른으로 성장할 때까지. 그 때가 되면 떠나겠죠. 떠나기 전에 잠시 나를 만나달라고 하면 무리일까요?"
스티브는 그렇게 말하고는 펜던트를 아기의 목에 걸어주었다.
이 아기의 이름은 레이논 크리스티앙, 후일 마검황이라 불리울 사내였으며 소드 엠퍼러가 될 아이였다. 또한 영혼의 펜던트가 이어주는 운명의 고리를 이어갈 자. 하나의 '고리'의 주인이었다.
영혼의 펜던트라 불리울 이 펜던트는 그렇게 운명을 실현하게 될 자에게 전해졌다.
『오랜 추억에 대한 회상』
그대 나를 찾아오던 때
하늘에서는 눈이 내렸습니다.
백색의 달빛
누과 함께 빛나고
저는 행복했습니다.
그대 나를 떠나던 때
새하얀 눈은 녹아버렸습니다.
은월의 시린 빛
대지 위에 부서지고
저는 눈물 짓습니다.
나 추억 합니다.
그대와 함께 한 시간을
나 소망 합니다.
언젠가 다시 만나기를
나 잊으렵니다.
이 모든 시간들을
이제 그저 추억을 회상합니다.
오랜 추억에 대한 회상
이제 그만 잊고 살렵니다.
오랜 기억에 대한 망각
"멋진... 노래군요."
청년은 막 노래를 마친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세레네즈의 한 저택, 서재 창가에 서 서 달빛을 감상하던 중년 사내는 자신의 아들을 보며 말했다.
"... 나에게는 안 어울리는 것이냐?"
"칸이라 불리우던 한 사내에게는 너무나 잘 어울릴 것 같지만... 아버지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긴 머리를 한 가닥으로 묶고 귀족 복장을 차려 입은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중년 사내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부자 사이에 묘한 침묵이 이어졌다. 청년은 침묵을 깨고 입을 였었다.
"방금 그 노래, 아버지가 만드신건가요?"
중년의 사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루나라는 한 여인이 만든 노래지. 브리칸, 너와 매우 닮은 사람, 세상 그 누구보다 너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의 노래란다."
"어머니?!"
브리칸이라 불리운 청년은 순간 놀라며 외쳤다. 중년의 사내는 살짝 미소지으며 말했다.
"놀랐느냐?"
"조금은..."
브리칸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아버지, 사이칸트 시르크 공작. 대륙 최고의 마법사라 불리던 사람이며 바일론 제국 최고 권력자 중 한 사람. 한 없이 냉철하고 날카로운 판단력으로 이스탈 회의를 이끌어가는 의장. 그런 모습만 봐 왔던 브리칸 시르크, 윤기에게는 감상적인 아버지의 모습이란 어색한 것이었다.
"루이아나 시르크. 루나는... 너만 남겨놓고 떠나버렸어. 사내 자식 되어가지고 엄마를 닮아버려서 얼마나 속이 상했던지."
"..."
윤기는 말이 없었다. 사이칸트는 잠시 넉두리를 중얼거리다가 이내 윤기를 보며 말했다.
"칸, 오늘은 네 엄마의 기일이란다."
"!"
윤기는 순간 놀라며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사이칸트는 아무말 하지 않고 윤기를 잠시 바라보았다.
"넌... 아니다. 그만 나가 보거라."
"..."
윤기는 서재를 나와버렸다. 아버지를 그냥 혼자 두는 것이 낳을 것 같아서였다. 어머니라... 자신의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헤르네라는 평민 여인일 뿐이었다. 자신에게 사랑을 가르쳐주었던 사람. 그럼에도 어머니의 기일이라는 사실에 묘한 기분에 젖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윤기는 묘한 기분을 떨쳐버리기 위해 산책에 나섰다.
"후 후 훗. 술맛 좋군."
"앨런드가. 술은 그만 두게."
세레네즈의 또 다른 저택, 두 중년의 사내가 테이블에 서로 마주하고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앨런드가라 불리운 사내는 상대방의 말을 거의 무시하고 무식하게 술만 들이키고 있었다.
"... 알프레드 형님. 당신은 모릅니다. 평안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살아온 형님은..."
앨런드가는 알프레드를 향해 그렇게 말하고 술을 들이켰다.
"그 놈의 가문이 뭔지. 하녀였던 저의 어머니는 당신의 어머니의 질투심 덕분에 돌아가셨습니다. 후 후 훗. 세상 참 더러운 거죠. 평민이다, 귀족이다. 이제 지긋지긋 합니다. 다 갈아업어야죠. 이 따위 세상 따위."
"술이 과하네. 그만하지."
"큭... 술이라는 건 참 묘합니다. 어떤 때는 모든 것을 잊게 해 주다가도 어떤 때는 정말 사람을 돌아버리게 해 버리죠. 흐 흐 흐."
앨런드가는 이제 병째로 술을 들이켰다. 알프레드는 혀 끝을 차며 앨런드가를 바라볼 뿐이었다. 앨런드가는 입을 열었다.
"제가 크리스찬 가문의 이름을 얻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아십니까? 아니... 얼마나 괴로웠는 지 아십니까? 자신의 손으로 자신을 낳아 준 부모를 죽여 보았습니까? 크 크 큭. 절대로 해 본 적 없겠죠."
앨런드가는 그렇게 말하고는 주정을 늘어놓았다.
"20년도 더 전의 일이군요."
"알프레드 형님, 당신의 어머니께서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지요. '네가 정녕 크리스찬 가문의 이름을 가지길 원하거든 내가 시키는 일 한가지 해라.' 라고... 항상 날 구박만 하던 그 계집이 나에게 왜 기회를 주는 것인지 그 때는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않고 덥석 받아드린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길, 그 계집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앨런드가, 하녀들 중 제시카라는 하녀가 있다. 네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 년인데 이 몸의 눈에 거슬려서 말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버려라.' 사람을 죽이라 하기에 잠시 주춤했습니다. 당신의 어머니라는 그 계집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내가 시키는 일을 해야만이 너는 크리스찬 가문의 이름을 자질 수 있다!' 라고 말입니다. 당연히 전 망설이지 않고 그 날 밤, 그 제시카라는 하녀를 죽여버렸습니다."
앨런드가는 이 대목에서 술을 한 모금 더 넘겼다. 알프레드는 자신의 어머니를 '그 계집'이라 칭하는 것이 마음에 안들었지만 묵묵히 들어주고 있었다.
"후 후 훗... 그런데 말입니다. 그 제시카라는 하녀가, 그 하녀가 절 닿은 여자이지 뭡니까. 세상 참 우습지 않습니까? 전 그 까짓 앨런드가 크리스찬이라는 이름을 위해 날 낳은 여자를 베어버렸습니다."
앨런드가는 '어머니' 라는 단어를 피했다. 어쩌면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죄의식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전 그 사실을 알고는 검가의 자식이었지만 검을 버렸습니다. 하긴... 크리스찬 가문이 저의 가문이라고 말하기도 뭐하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저는 겨우 얻은 크리스찬의 이름을 포기해 버리고 집을 뛰쳐나왔습니다."
앨런드가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때가 카오스력 9909년이었을 겁니다. 아직 겨우 15살이었죠. 그 나이에 자신을 낳은 여인을 죽인 소년의 심정이 어떤지 아십니까? 끔찍하죠. 후 후 훗.
저는 그 때 당시 세레네즈 변두리의 뒷골목을 걷고 있었습니다. 좀 불량해 보이는 청년들이 시비를 걸어왔죠.
"야! 돈 가진 거 있냐?"
"..."
전 그런 쓰레기들을 상대하고 싶지 않아 그냥 지나치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작자들이 저를 붙잡아 세우고는 주먹을 날리더군요. 그냥 맞았습니다. 아무말 없이... 아프더군요. 하지만 속은 시원했습니다. 그렇게라도 맞아야 제 자신이 조금이나마 용서가 될 것 같았거든요. 그 때 였습니다. 그들을 만난 것은.
"거기 인간 쓰레기들! 어린 아이를 그렇게 개 패듯이 패면 쓰나!"
"뭐야, 남의 일에 신경 쓰지 말고 꺼져!"
흑발을 한 청년이었습니다. 스티브 크리스티앙, 들어서 아시리라 믿습니다. 바로 그 망할 아버지라는 존재를 죽여준 고마운 사람이지요. 스티브라는 그 작자는 주먹으로 그 쓰레기들을 제압해 버렸죠. 전 간신히 정신의 끈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리커버리!"
푸른 색 머리칼의 청년의 외침, 사이칸트 시르크 였습니다. 지금 저와 대립하고 있는 공작 각하죠. 저는 상처가 조금이나마 낳는 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상처는 다 치료했는 데 저 녀석 왜 정신을 못차리지?"
"글쎄... 정신적으로 불안정이 온 것 같은 데?"
그들의 대화가 제 귓가에 스쳤습니다. 그 때 어딘가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정신을 잃었습니다. 정신을 잃게 전이었지만 전 아직 그 노랫말을 잊지 못하고 있죠. 이런 것 이었습니다.
이제 그저 추억을 회상합니다.
오랜 추억에 대한 회상
이제 그만 잊고 살렵니다.
오랜 기억에 대한 망각
제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세레네즈의 한 여관에 누워있더군요. 금발의 한 여성이 다가와 물었습니다.
"괜찮니?"
"예? 아, 예..."
"너... 가출했니?"
전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가문에 대한 원망, 세상에 대한 분노가 목구멍까지 치솟아올라 쏟아져 나올 것 같았지만 말입니다. 그 여성은 미소지으며 말했습니다.
"말 못할 사정이 있나보구나. 아픈 기억이라면 잊으렴."
"...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것을 쉽게 있을 수 있다면요."
제 대답에 그 사람은 흠칫 놀라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동요가 없는 맑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너무 그 일에 연연하지는 말아라. 돌아가신 어머니도 원치 않으실꺼야."
그 사람은 그렇게 말하고는 방문을 나섰습니다.
"여관비와 식사비는 내놓았으니 식사하고 나가렴. 그리고... 안 좋은 일은 빨리 잊으렴. 그래야 좋은 추억을 더 많이 쌓을 수 있거든."
"... ... 앨런드가입니다."
저는 뭣도 모르고 소개를 했습니다. 그 여인은 미소 지으며 제 소개에 답해 주더군요.
"루이아나 세르디오. 다음에 인연이 닿거든 만나자."
전 왠일인지 그 사람의 뒷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특히 내 손으로 날 낳은 사람의, 어머니의 기일되면 말입니다.
"... 그해 겨울, 폭군을 몰아낸 영웅으로 추앙받는 다섯 사람, 스티브 크리스티앙, 사이칸트 시르크, 크리스 에프론, 샤르이나 포르세, 루이아나 세르디오는 역사를 만들었죠. 그리고 루이아나 세르디오가 루이아나 시르크가 되는 것을 보며 저는 수도를 떠났습니다."
앨런드가는 그렇게 이야기를 끝맺었다. 그 때 였다.
"꽤나 감상적이 되셨군. 앨런드가."
"아이젠... 자네인가?"
앨런드가는 술잔을 다시 채우며 허공에 대고 물었다. 그러자 알프레드 뒤로 검붉은 머리칼에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마족 사내가 모습을 들어내었다. 마장 서열 1위, 아이젠이었다.
"헉!"
알프레드는 순간 뒤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기운에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다음 순간 피를 뿜으며 앞으로 꼬구라져버렸다.
"... 이제 꼭두각시 하나는 확보한 셈인가?"
앨런드가는 싸늘한 시체로 변해버린 알프레드를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곧 죽을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로 상당히 많을 이야기를 해 주더군."
아이젠은 앨런드가를 보며 말했다. 앨런드가는 차가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자신의 어머니 덕분에 지금의 앨런드가 크리스찬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 않을 까 하는 생각에서 말한 것 뿐이야."
"자네의 최종 목적을 뭘까... 지금도 궁금하군. 다른 인간들처럼 권력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황자에 오르려는 목적도 아지 않는 가?"
"처음에는 황제라는 것도 되어 보고 싶었지. 하지만 결국 궁극의 목적은 하나라네. 세상의 파멸."
"... 그래서 카르테우스 님을 돕는 것인가?"
앨런드가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래... 카르테우스라는 신이라면 이 세상을 좀더 다르게 이끌어 갈 수 있지 않을 까 하는 희망 때문이지."
아이젠은 앨런드가라는 인간을 잠시 바라보았다. 볼 때마다 평범한 인간들과는 다른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녀석이었다.
"내일이면 사이칸트 시르크가 아들에게 공작 작위를 물려주는 행사가 있군. 이 행사를 기점으로 실종을 무효화해야 겠어. 그 것이 나라는 인간을 죽음의 문턱에서 삶으로 되돌려놓은 루이아나 세르디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겠지."
앨런드가는 술잔을 들고 창문가로 향했다.
"달이 참 밝군. 이제 점점 붉어지고 있어. 마치 피처럼..."
앨런드가는 술을 한 모금 넘기고는 중얼거렸다.
"얼마나 많은 피가 이 대지를 적실게 될까? 후 후 훗..."
순백의 세레네즈, 황성 세실리드.
지난 8년간 단 한번도 열지 않은 대연회장은 수많은 귀족들로 붐볐다. 초대장을 받고 지방에서 올라온 지방 영주들의 가족들까지 더해서 연회장은 꽤 소란스러웠다. 오늘은 바일론 제국에 셋 뿐인 공작가 중 하나인 시르크 가문의 가주가 자신의 외아들에게 작위를 넘기는 행사 때문에 벌어진 연회였다.
"황제 폐하께서 들어오십니다!"
시종장의 외침과 함께 황제가 살짝 미소지으며 연회장 최상석으로 들어섰다. 황제, 네프칼 2세는 귀족들을 향해 외쳤다.
"오늘의 연회는 본인의 친우이자 소중한 신하인 사이칸트 시르크가 그의 아들에게 작위를 물려주는 행사와 더불어 대륙 전쟁의 영웅, 브리칸 시르크의 귀환을 축하하는 연회요. 모두 마음껏 들기를 바라오."
네프칼 2세는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브리칸 시르크! 앞으로 나오라."
"예, 황제 폐하."
브리칸 시르크, 윤기는 예의 낡은 보랏빛 망토를 입고 푸른색 머리를 길게 길어 한 가닥으로 묶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윤기는 주위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무시하고 네프칼 2세 앞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럼 시작하겠소. 그대는 성황 칼브란의 피를 이어 받아 이 땅을 통치하는 나에게 카오스의 맹약에 따라 충성을 다하겠소?"
"..."
윤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네프칼 2세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충성을 다하겠소?"
"충이라... 폐하께서는 어떤 충성을 원하십니까?"
윤기의 물음에 네프칼 2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윤기는 의미 모를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단지 폐하의 영토를 늘려야 합니까? 그렇다면 제 스스로 막았던 대륙 전쟁을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국가의 부유함이라 한다면 또한 마로드에게 허용하고 있는 해상 통로를 차단하고 무역을 독점해버리는 것이 좋지요. 또한 폐하께서 절대적인 왕권을 필요로 하신다면... 이 자리에서 모든 귀족을 죽여버리는 것도 괜찮은 방법입니다. 또 있습니까? 폐하께서 원하시는 충성은 어떤 것입니까?"
"브리칸 시르크! 어떻게 그런 망언을..."
"거룩한 망나니, 네 녀석은 공작의 작위를 받으면서까지 망나니 짓만 하는 것이냐!"
"나라의 미래가 어둡습니다. 폐하! 당장 공작 작위를 내리심을 거두어주소서!"
네프칼 2세는 쏟아지는 귀족들의 외침을 손을 들어 잠재우고 윤기를 내려다 보았다. 윤기는 여전히 흔들림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프칼 2세는 나직하게 말했다.
"... 그대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후 후 훗. 폐하는 좀 다를 실 줄 알았습니다. 이유를 말씀드리죠. 충성을 다할 수 없습니다. 충성이라는 것들은 제 입으로 말씀 드린 것처럼 해서는 안 될 행위를 군주를 대신해서 하기 때문입니다. 과거... 크리스찬 가문의 가주가 그랬듯이..."
윤기는 잠시 말끝을 흐리고는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말을 계속이었다.
"저는 폐하를 믿음으로 의로 대할 것입니다. 만약 폐하께서 먼저 의를 저버리시거나 저의 믿을 깨뜨리신다면 저는 폐하에게서 가차없이 등을 돌리겠습니다."
침묵...
연회장에는 침묵이 흘렀다. 어떻게 들으면 당장을 당신의 신하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당신의 목을 칠 수 있다는 반역의 의미가 담겨있는 무서운 발언이었다.
"크 하 핫!"
그 때 귀족들 사이에서 커다란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멋진 발언이었소이다! 브리칸 시르크!"
그렇게 말한 중년의 사내는 귀족들 사이에서 비집고 나와 윤기가 앉아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그 때 윤기의 입에서 싸늘한 말이 흘러나왔다.
"물러서시오. 앨런드가 크리스찬 후작. 당신이 끼어들 자리가 아님을 알텐데!"
"...죄송하오."
앨런드가는 순순히 물러섰다. 윤기는 네프칼 2세를 향해 말했다.
"저에게 충을 강요하시겠습니까? 저의 믿음과 의를 받으시겠습니까?"
"... 자네의 믿음과 의를 받겠네. 이제 그대와 나는 카오스 맹약을 따라 서로 맺어졌으며 서로를 믿고 의로 대할 것이다. 그대에게 나는 군주로서 공작의 작위를 수여하는 바이다. 이제 일어나시오. 브리칸 시르크 공작."
윤기는 천천히 몸을 이르켰다. 순간 윤기에게서 강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빛이 사라졌을 때 윤기를 바라본 귀족들에게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윤기의 보랏빛 망토는 사라지고 깨끗한 순백의 망토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망토 안에는 귀족 정장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로서 본인, 브리칸 시르크는 공작으로서 폐하를 향해 제방식의 충을 다할 것입니다. 믿음과 의라는 이름으로."
윤기는 그렇게 말하고는 상석에서 내려왔다. 앨런드가는 윤기를 바라보다가 탄성을 내질렀다.
"허... 순백의 날개. 대마법사 위고르가 순백의 위저드를 만들었을 때 후손들을 위해 남긴 마법 무구 중 하나. 대단하군. 저 브리칸 시르크라는 청년..."
앨런드가가 홀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윤기가 앨런드가에게 다가왔다. 앨런드가는 윤기를 정면으로 마주한 순간 속을 탄성을 내질렀다.
'사이칸트가 아니라 그 사람을 닮았다. 머리칼 색이 금발이라면 그 사람이라 착각할 만큼. 루이아나 세르... 아니 시르크의 아들이란 말인가!'
"본인에게 할 말이 있는 걸로 아는 데."
"아, 공작 전하. 전하께서 말씀하신 군신 간의 믿음과 의에 관한 말씀 잘들었습니다."
윤기는 앨런드가의 말을 들으며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앨런드가는 그런 윤기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윤기는 앨런드가에게 말했다.
"당신 눈에는 가식이 담겨있어. 뭔가로 철저히 가려져 있군. 진정한 당신은 어떤 존재지? 앨런드가 크리스찬."
"!"
"후 후 훗. 놀랄 것 없어. 후작. 난 지난 8년 세월을 놀며 보낸 사람이 아니라서 말이야. 그리고 이제 가면을 벗어. 잘도 놀더군. 본인의 아버지를 궁지로 몰아넣기 위해 실종된 척 했다가 상황이 도리어 불리하게 돌아가자 여행을 다녀온 척 둘러대고 다시 나타나시고 말이야."
앨런드가는 한 방 먹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씩 웃었다. 그리고는 윤기를 향해 말했다.
"... 이런 한 방 먹어버렸군요. 하지만 명심해 두세요. 공작 전하. 당신이 느끼신 것과 저란 존재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
"아,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어머니를 아주 많이 닳았습니다."
앨런드가는 그렇게 말하고는 연회장을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 때 였다.
-네 녀석 몸에 마장 아이젠이 숨어있군.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젠에게 전해라. 이 사마의 칸이 친히 소멸시킬 때까지 조용히 지내라고.
앨런드가는 순간 들려온 메세지 마법에 흠칫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 자리에 이미 윤기는 없었다.
-사마의 칸이셨습니까?
앨런드가는 윤기의 마나를 쫓아 메세지를 보냈다. 윤기의 답변은 간단했다.
-나야 말로 네 녀석이 느끼는 것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그 것만 알아둬라.
앨런드가의 얼굴에는 이상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앨런드가는 조용히 자신을 향해 속삭였다.
"저런 건방진 놈에게서 어떻게 누나가 보이는 것인지 모르겠어. 피는 진한 것인가. 후 후 훗."
앨런드가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연회장을 나섰다. 황성 정원을 걷는 그는 회상에 젖어들었다.
오랜...
아주 오랜 추억에 대한 회상.
『붉은 달빛 아래서』
세레네즈.
체이필드 칼브란 바일로너와 세라인 드 실로테 노르틴(흔히 체이필드1세와 세라인 여황이라 한다.)의 슬픈 이야기가 잠든 도시이자 대 바일론 제국의 수도. 황성 세실리드가 중앙에 자리잡고 있으며 새하얀 성벽으로 이루어진 외성 밖으로는 대규모의 항구가 형성되어 있는 곳이다.
어느 새, 밤 하늘의 달은 붉은 빛으로 바뀌었고 카오스 전야제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도시는 축제의 분위기로 물들어 있었고 세레네즈 곳 곳은 활기로 가득했다.
대륙 전쟁이 끝을 맺은 지도 어느새 9년 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 어쨌든 그 아이는 적당하지 않아. 체이필드 공작가의 여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다면 다른 혼처를 찾아보마."
"어머니!"
"넌 귀족이고 그 아니는 평민에 불과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짝이야."
"하지만 처음에 지민이와 약혼하게 만든 건 어머니시잖아요!"
"그 때는 그 아이의 집안이 굉장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고 네 아버지가 그 걸 이용하려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역시... 모두가 다 그런 식이죠! 아버지든! 어머니든!"
"광채야!"
광채는 머리를 새차게 흔들었다. 갑자기 떠오른 기분 나쁜 기억 때문이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채지민의 문제로 어머니와 크게 싸웠던 기억...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세레네즈의 거리는 언제나 시끌버적했다. 광채는 왠지 이런 시끄러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자신에게 내려진 칭호들 때문에 오는 부담스러운 시선이 없어서 일지도 몰랐다. 파일론 레비던트 후작, 대륙 전쟁의 영웅, 소드 엠퍼러, 대륙 최강의 검사, 은월검성銀月劍聖... 광채에게는 너무나 부담스러운 칭호들이었다.
광채가 혼자 생각에 빠져 거리를 걷고 있을 때 였다.
"레비던트 후작 각하!"
누군가가 자신을 부른 것이다. 그 것도 자신에게 부담을 주는 칭호로... 광채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부른 상대를 찾았다. 그 곳에는 에메랄드 빛 머리칼의 가진 여성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가 은근히 며느리로 맞아드리길 원하느 세오나 체이필드, 체이필드 공작의 손녀였다.
"볼일 있으시다면 다음에 듣도록 하죠. 레이디 세오나."
"아, 아니... 그게... 저..."
광채는 두말 하지 앖고 고개를 돌려버리고 가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세오나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하기 싫었다. 광채는 [시르 상단]이라는 간판을 볼 때까지 인상을 쓰고서 길을 걸었다.
세레네즈의 제2부두.
그 곳의 한 창고에는 오늘도 어김없이 수많은 물건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귀족들을 상대하는 상인들과 무역선 사이의 중계 역활을 하는 [시르 상단]이라는 간판을 건 창고였다. 금발은 한가닥으로 곱게 따아서 허리에서 조금 윗부분까지 기른 여성이 창고 앞에서 열명 남짓한 짐꾼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한 중년의 짐꾼이 여성을 향해 말했다.
"아, 피르는 너무 까다로워서 탈이야. 귀족 놈들이 쳐 먹을 꺼 대충하면 안되는 가?"
"나참, 카브 아저씨도... 그런 건 저의 상인으로서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아요. 제 친구인 미르엔에게 뒤질 수 없어요. 절. 대. 로."
중년의 사내, 카브는 피식 웃으며 짐을 안쪽으로 날랐다. 피르엘 시르, 채지민이라는 푸름식 이름을 가진 저 여성을 벌써 9년이라는 세월 동안 알고 지낸 카브는 여전히 지민의 입에서 나오는 허풍을 듣자면 웃음을 참을 수 없다. 대륙 전쟁의 영웅들이 죄다 친구에 다가 실제로 9년전 대륙 전쟁 당시 함께 마로드까지 다녀왔다고 한다. 시르 상단의 짐꾼들은 모두들 그 이야기를 믿지 않았지만 카브는 한 편으로는 사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9년전 지민과 용병 생활을 시작해서 딸처럼 보살피며 8년이라는 세월을 죽자고 돈을 모아 지민의 소원대로 상단을 연 것이 1년전 일이다. 단지 죽은 딸과 닮았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돕고 있는 카브가 보기엔 절대로 지민이 거짓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믿기도 힘든 말이었다.
"오랜만이군요. 카브 아저씨."
카브가 갑자기 짐이 가벼워졌다고 생각했을 때 옆에서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카브는 웃으며 말을 받았다.
"한달만이군. 광채 군. 지민이 보고 싶어서 어떻게 살았나?"
"하 하 핫. 글쎄요."
이광채라고만 밝힌 청년은 지민에게는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다. 카브가 보기에도 지민의 신랑감으로 부족할 때가 없어보였다. 용병인지 자주 없어지는 것이 문제였지만 카브 자신과 지민이 다져놓은 기반을 보면 결혼 후 정착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아 보였다.
"자네... 언제 할건가?"
"뭐 말씀입니까?"
광채는 짐을 내려놓으며 물었고 카브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결혼 말이네. 지민이를 집안에 떡 하니 모셔놔야 자네가 안심하고 살 것 같아보이니 하는 말일세."
"으윽... 아픈 데 찌르지 마십시오. 그게 힘드니까 이러고 있지 않습니까?"
장난기 어린 말투였지만 광채의 얼굴에 그늘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카브는 보았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지 걱정되었지만 일단 광채가 알아서 하는 데로 두기로 하고는 모른 척했다. 그 때...
"이 손 놔요!"
"쯧... 이런 아가씨가 항구에서 썩고 있었다니. 이 카스트 크리스찬이 부귀를 누릴 수 있는 영광을 주지."
날카로운 지민의 목소리가 거리 가득 울려퍼졌고 뒤이어 듣기 거북한 말이 들려왔다. 그 순간 카브가 말리기도 전에 광채는 카스트라는 청년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오랜 용병 생활로 제법 실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카브조차 그 움직임을 볼 수 없었다.
"떨어져라."
카스트의 목에 검을 겨눈 상태에서 광채가 내뱉은 말 한마디였다.
"평민 주제에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나?"
"후훗. 평민이라..."
광채는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민은 카스트의 손을 뿌리치고 물러나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광채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평민이라고 장담할 수 있나?"
"뭐라고! 그렇다면 네 놈이 귀족이라도 된다는 말이냐!"
"정식으로 내 소개를 하지. 내 이름 파일론 레비던트, 황제 폐하로부터 후작의 작위를 수여 받았으며 소드 엠퍼러의 칭호를 받은 몸이다!"
광채의 외침에 카스트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광채는 팔에 힘을 주며 외쳤다.
"나의 약혼녀를 건딘 대가를 가져 가마!"
그 때였다. 한 차례의 검날이 날아들어 광채의 검을 부순 것은.
"네 녀석이 후작 각하라면 성월대도를 가지고 있지 이런 싸구려 검을 가지고 있지는 않겠지."
광채는 잠시 물러서서 자신의 검을 부순 작자를 바라보았다. 얼굴에 건달이라고 써 놓은 듯한 인상의 사내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고 그를 따른 무리들이 카스트를 감싸고 있었다.
"후 후 훗. 재밌군. 월성도, 성월대도가 그렇게 보고 싶은가? 그렇다면 보여주지."
광채는 그렇게 말하고는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성월대도가 기다란 검신을 들어내며 광채에 손에 잡혔다. 광채는 천천히 자세를 잡으며 말했다.
"죽고 싶다면 덤벼라. 얼마든지."
"그만 두시오! 레비던트 후작!"
그 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 곳에는 갈색 머리칼의 여성이 서 있었다.
"미르엔 로니아 여백작..."
카브는 모든 것이 꿈일 것이라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보,보라야!"
지민은 보라에게 달려갔고 광채는 사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날 말리면, 아무리 너라도 죽는 다."
"이광채..."
미르엔 로니아 여백작, 김보라는 광채를 바라보며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광채는 성월대도를 들고 자세를 잡으며 말했다.
"죽어."
광채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과 함께 광채와 보라의 몸이 사라졌다. 잠시 뒤 금속성이 울리면서 카스트를 향해 성월대도를 내리치는 광채와 그 도를 에테르로 막아서는 보라가 사람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분명 날 말리면 결과는 죽음이라고 했다."
"제길... 힘만 더럽게 쌔군. 이광채."
광채는 그 순간 미소 지으며 보라의 검을 튕겨내 버리며 몸을 움직였다. 보라가 광채를 찾고 있는 사이 광채는 어느새 카스트의 목을 향해 도를 날리고 있었다. 그 때 또 한번의 금속성이 울리며 광채의 도를 어떤 검이 막았다.
"후... 내가 만든 검이지만 무식하게 단단하기만 해. 천하의 소드 엠퍼러, 이광채의 일격을 막다니. 거기다가 보통 검도 아니고 성월대도로 내리쳤는 데 말이야."
"..."
새하얀 망토를 걸치고 긴 롱소드를 든 청년이었다. 광채는 순간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검을 움직였고 청년은 몸을 뒤로 빼면서 소리쳤다.
"제길, 검술로는 내 녀석 상대가 될 수 없다고. 수련 기사 수준도 못되는 데 말이다. 아무리 이 에이젤이 내가 만든 명검... 아니지 내구도 최강검이라도 말이다."
"...비켜. 막는 자는 다 죽인다."
"무섭군. 무서워. 후 후 훗. 이광채가 이러면 마장 녀석들보다 무서워진단 말이다. 자 그럼 이걸 받아쳐봐라. [태초의 빙결에서 솟아오른 어둠의 줄기. 아이스 플랜!]"
청년의 외침과 함께 1m를 조금 넘을 듯한 검은 빛이 약간 도는 얼음 줄기가 광채를 향해 뻗어나갔다. 광채는 그 것을 보며 놀란 얼굴로 외쳤다.
"원소 마법을 이렇게 빠르게? 사마의 칸이라는 칭호는 공짜로 얻은 게 아니구나! 홍윤기! 좋다. 나도 제대로 하지. 성월파단지곡聖月破斷支曲!"
광채는 윤기를 향해 수십여발의 검기를 날렸고 윤기는 여유있게 손에 든 롱소드를 들어올리며 외쳤다.
"서피리어 실드!"
"반월참半月斬!"
윤기는 실드로 광채의 검기를 튕겨내고 광채는 윤기의 아이스 플랜을 반월참으로 갈라버렸다. 윤기는 여유있는 표정으로 광채를 향해 말했다.
"아직 내 뒤에 있는 얼간이들을 죽이고 싶나? 시민들에게 소드 엠퍼러의 실력을 구지 다 보이고 싶다면 계속해도 괜찮아. 나는 이 기회에 내 실력을 대륙에 공포하면 그만이야. 지금은 전쟁도 없으니 수도가 절반쯤 날아간다고 문제될 것도 없어. 자 와라. 은월검성, 소드 엠퍼러 이광채. 너의 분노를 뿜어내봐!"
"...무서운 놈."
광채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성월대도를 내렸다. 윤기는 씩 웃으며 에이젤을 한 번 휘둘렀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윤기의 손에 들린 에이젤은 어느새 단검으로 줄어있었다. 윤기가 만들어 낸 에고 소드, 에이젤은 씨어 브레이크의 꼭 필요한 신성한 물을 머금고 있으며 단도, 소도, 대도, 단검, 소검, 장검의 형태를 취할 수 있는 검이라기도 도라기도 에매한 무기였다.
"자, 그럼 채지민, 보라가 너희가 가게 구경시켜 준다고 해서 따라왔거든. 그리고 하녀장 아주머니가 온 김에 시장도 봐 오래. 도대체 한나라의 공작을 뭘로 보는 건지."
"뭐긴. 당연히 '물' 로 보고 있지."
보라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윤기는 인상을 찡그렸고 지민은 어느 새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좋아. 특별히 싸게 해 줄 테니까 우리 물건 사가라고."
"으윽... 내가 왜 장이나 봐야 되! 보라야 네가 대신 해주라."
"그래, 그래. 어차피 아주 먼 미래에는 내가 해야 되니까 실습 삼아 해주마. 후 후 훗."
보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지민과 함께 먼저 시르 상단의 창고를 들어갔다. 윤기는 표정을 바꾸며 광채에게 말했다.
"너희 어머니가 널 설득해 달라는 군. 세오나 체이필드라는 아가씨에게서 중매가 들어왔다고 말이야."
"그럼 날 설득하러 온거냐?"
광채는 차갑게 말했다. 윤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설득은 설득이지만 그런 의미에서의 설득이 아니야."
"그럼?"
"지금 너희 집안의 가주 자리는 비어 있지. 넌 할아버지가 살아계시단 이유로 그 자리를 마다하고 있어. 단지 상징적인 의미라는 이유로. 난 네가 그 자리를 차지하길 바란다. 그럼 몇가지 이점이 생기지."
윤기의 말에 광채는 팔짱을 끼며 윤기를 잠시 노려며 말했다.
"설명해."
"우선 네 녀석이 알프레드 크리스찬을 뒤엎고 칼라이스의 수장 자격을 얻을 수 있게 되고, 집안의 대소사를 네가 처리하게되. 즉, 중매 같을 걸 거절한 자격이나 배우자를 선택할 힘같은거... 훗."
"!"
윤기는 광채의 어깨를 툭치고는 말했다.
"자, 그럼 이제 남은 건 네 녀석이 멋지게 프로포즈 하는 것 뿐이다. 열심히 해봐라. 이광채."
"...고맙다."
"난 네 녀석이 모르는 사실을 알려준 역활 밖에 없어."
광채는 윤기의 말을 듣고는 미소지어 보이며 어디론가로 달려갔다. 윤기는 그런 광채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 녀석이나 현진이 녀석이나 축 쳐져 있는 건 꼴보기가 싫어... 후 훗."
"공작 전하! 전하께 제가 분명히 광채를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근데 어떻게..."
"어떻게 나서서 딱 잘라 거절까지 하냐구요? 글쎄요. 그건 광채 본인의 의지가 아니겠는 지요? 레비던트 부인."
레비던트 후작가의 저택.
레비던트 부인과 대화를 나누던 윤기는 그렇게 대답했다. 레비던트 부인, 광채의 어머니는 윤기를 보며 말했다.
"광채는 한 나라의 후작입니다. 체이필드 공작가라면 알아주는 명문이고요. 혹시 광채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고자 함이십니까? 친구도 정계에서는 소용없는 것인지요?"
"훗. 별 말씀을. 아무리 지략에 뛰어난 시르크 가문의 가주이지만 그 정도의 생각까지는 못한답니다. 부인께서 아주 괜찮은 방법을 가르쳐 주시는 군요. 자신을 위해서는 친구도 버린다? 괜찮은 방법이지요."
"그런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전하!"
레비던트 부인은 언성을 높였다. 윤기는 여유있는 태도로 말했다.
"체이필드 공작가와 인연이 있으면 정계에 함부로 나설 수 없죠. 이건 성황께서 세운 법 이후 불문율이 되어 버렸으니까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광채가 권력을 이르면 저희 이스탈 회의 측도 좋은 동료를 잃는 셈이니 이렇게 나섰죠. 이런 사악한 속셈말고 또 있지만 말해 봐야 부인께서는 좀 이해하시기 힘드실 듯 합니다."
윤기는 그렇게 말하고는 앞에 놓여 있는 차잔을 들어올려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윤기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차 향기가 좋군요. 다만 이야기가 길어서 좀 식어버렸습니다. 하 핫."
윤기는 여유있게 차를 들이켰다. 레비던트 부인은 그런 윤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악한 속셈말고 다른 이유는 뭐죠? 단지 방금 말한 이유 뿐이라면 광채를 설득했어야 하잖아요."
"..."
윤기는 침묵하며 차만을 마셨다. 레비던트 부인은 자신의 차를 마시며 천천히 윤기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윤기는 레비던트 부인을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광채 녀석이 웃지 않는 게 보기 싫었다는 게 정확한 이유입니다."
"웃지... 않는 다구요?"
"광채는... 광채는 진심으로 지민이를 사랑하고 있죠. 벌써 10여년이 넘도록 말입니다. 광채의 첫사랑이 아프지 않게, 깨어지지 않게 지켜주고 싶었습니다. 그 녀석이 화난 얼굴로 인상을 쓰면 그 것보다 보기 싫은 건 없군요. 후... 차 잘 마셨습니다. 부인."
윤기는 그렇게 말하고는 유유히 방을 떠나갔다. 레비던트 부인은 잠시 그 자리에 앉아 있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럼... 최후의 수단인가. 피르엘 시르... 그 아가씨를 좀 만나야 겠어."
지민은 갑자기 찾아온 레비던트 부인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카브에게 부탁해서 차를 내오게 한 뒤 시르 상단의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는 방 가운데의 테이블의 앉았다. 지민은 긴장된 표정으로 레비던트 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민 양, 오래만이네요."
"저도 그렇네요. 아주... 아니 레비던트 부인."
"편하게 불러요. 지민 양."
"아, 네..."
지민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사이 카브가 어느 새 차를 내어왔고 레비던트 부인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차 맛이 괜찮군요. 그런데 지민 양?"
"네, 부인."
"자신이 우리 광채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나요?"
"무슨..."
"광채는 이 나라의 후작이랍니다. 레비던트 후작... 소드 엠퍼러. 화려한 칭호가 따라다니지요. 내 생각에는 지민 양같은 초라한 아가씨에게 어울리는 상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레비던트 부인이 여기까지 말했을 때 느닷없이 카브가 뛰어들어오며 소리를 질렀다.
"아니! 우리 피르가 어때서 그러시는 겁니까! 귀족님들은 다 잘났답니까? 평민이라서 안되는 겁니까? 아니면 초라한 상인일 뿐이어서 입니까? 당신네들과 똑같은 인간일 뿐입니다. 도대체 당신네들이 뭐가 잘났다고 그러는 겁니까!"
"아, 아저씨!"
"후 훗. 꼭 저 아이의 아버지처럼 말씀하시는 군요. 하긴 저 아이의 아버지라는 작자는 가족을 다 버리고 혼자 도피해버리는 '쓰레기' 니까요."
"부인!"
순간 지민은 언성을 높였다. 레비던트 부인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틀린 말을 했나요?"
"방금 말씀 취소해주십시오."
"호 홋. 글쎄요. 전 실수한게 없는 데요."
레비던트 부인이 거기까지 말하자 카브가 다시 소리치며 말했다.
"당장 나가! 당신 따위! 역겨워서 더 이상 우리 사무실에 둘 수 없어!"
"저도 너무 누추해서 나가려던 참입니다. 지민양. 다시 말하지만 절대 저는 당신을 광채의 짝으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레비던트 부인은 하녀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버렸고 지민은 테이블에 엎드려 흐느끼기 시작했다. 카브는 주먹을 꽉 쥐며 중얼거렸다.
"영웅? 레비던트 후작? 웃기고 있네. 다들 똑같은 귀족일 뿐이야. 내가, 이 카브가 저대로 가만 두지 않아!"
실내에는 오직 흐느낌 소리만 가득할 뿐이었다.
광채는 가볍운 발걸음으로 세레네즈의 항구를 걷고 있었다. 이제 정식으로 레비던트 후작가의 가주된 그에게는 부담스러운 칭호가 하나 더 붙은 셈이었지만 광채의 현제 기분으로서는 그 부담을 덜어내고도 남았다. 광채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시르 상단]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 때...
"도대체 무슨 면목으로 그 역겨운 얼굴을 들고 나타났는 지 모르겠군. 이광채, 아니 파일론 레비던트!"
카브의 낮은 음성이 광채의 귓전을 때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엄청나게 빠른 카브의 주먹이 광채의 뺨을 향해 날아왔다. 광채의 눈에는 보였지만 다른 짐꾼들의 눈에는 잔상마저 남는 주먹이었다. 광채는 슬쩍 물러서면서 주먹을 쳐 내었고 카브는 빈정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과연, 파일론 레비던트! 하지만 이 것도 막을 수 있을 까? 극상, 뇌혼격雷魂擊!"
카브의 오른팔에는 전류가 휘감겼고 광채를 향해 굵은 빛 줄기가 쏟아졌다. 광채는 손을 펴서 검처럼 휘두르며 외쳤다.
"수도식手刀式! 은월섬銀月閃!"
한 차례 가는 빛줄기가 허공에서 잠시 빛나고는 카브의 팔에서 뻗어나온 빛줄기는 허공에서 흩어졌다. 광채는 손을 거두며 카브를 향해 말했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유명한 반월참이 아니라 섭섭하군. 은월섬이라 꽤나 날카로운 기술이었다. 정확하게 내 기술의 정 중앙을 꽤 뚫어 흩어놓다니... 명성이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이지?"
"이유를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자네 어머니가 더 잘 아시겠지. 검을 안 뽑겠다면 난 그냥 공격을 계속하겠네. 천뢰붕격天雷鵬擊!"
이번에는 카브의 발이 현란하게 움직이면 위에서 아래로 광채의 머리를 향해 내리찍어 내렸왔다. 광채는 급히 몸을 뒤로 빼면서 다시 한 번 손을 휘저었다.
"은월성단銀月星段!"
그러자 이번에는 작은 빛 무리들이 사방으로 뿌려졌고 카브의 공격로를 철저히 차단하고 뻗어나갔다. 카브의 천뢰붕격이라 불리운 뇌격은 광채의 빛무리에 차단되어 소멸되어 버렸다.
"성월검초식의 상승검초식, 은월검초식을 다 막아내시다니... 카브 아저씨의 정체가 궁금해지는 군요. 단지 용병이 아니십니다. 방금 공격이었으면 왠만한 소드 엠퍼러는 이 세상에 남아있지 못했죠."
"...예리하군. 난 클레이 바즈라는 사람이지. 한 때 장군을 지냈고 바즈 시의 영주였던 몸. 브리칸 시르크와도 안면이 있어 지난 번 들키지 않을 까 고민했는 데 이번에는 결국 들키는 군."
"크,클레이 바즈! 사신의 폭풍, 해상군의 영웅?!"
"오홋, 은월검성께서 날 다 기억해주시는 군. 9년전, 아들 녀석에게 영주 자리를 넘기고 용병으로 나섰다가 지민이를 만났지. 망할 귀족 놈들... 다 죽이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네. 어제 자네 어머니 때문에... 자신이 귀족이라는 사실을 방금 자각한 멍청이이기도 하고."
"바즈 장군..."
"그냥 카브 아저씨라고 불러주지 않겠나? 파일론 레비던트."
"저 역시 광채라 불러주시겠습니까? 카브 아저씨."
카브는 씩 웃으며 광채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주며 말했다.
"지민이를 울리지 말게. 광채 군. 그 때는 자네라도 용서하지 않겠네."
"...카브 아저씨."
광채는 망연히 중얼거렸다. 카브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광채는 묵묵히 중얼거렸다.
"어머니라... 후. 후. 후."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에니칼 왕녀님."
황성, 세실리드.
한 달만에 그 곳을 방문한 레비던트 부인이 한 여성에게 인사를 했다. 금빛 단발 머리에 은빛의 써클릿은 낀 연녹색 드레스 차림의 여성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오랜만이네요. 레비던트 부인. 편하게 부르세요. 저를 딸이라고 부르실 때처럼."
"하,하지만 어찌 감히..."
에니칼 왕녀, 정확하게 네프칼 드 에니칼 바일로너, 제1왕녀는 과거 자신의 양어머니였던 레비던트 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역시... 다신 이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는 물리겠군요."
"죄송합니다."
"아, 아니예요. 제가 괜히 부인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 드렸네요. 오늘 뵙자고 한 건 광채 때문이랍니다."
순간 레비던트 부인은 얼굴을 굳혔다. 그렇지 않아도 광채가 벌여놓은 일들 때문에 골치가 아프던 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소문 때문이라면 신경쓰지 마십시오. 그저 소문일 뿐입니다."
레비던트 부인의 말에 에니칼 왕녀, 빈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예요. 전 그저 광채의 뜻을 따라줬으면 하는 것이랍니다. 지민이와 광채 사이는 제가 잘 알아요. 티격태격 다투던 소꼽친구 때부터 마주교 시절과 9년전 대륙 전쟁을 위한 여행 때까지. 아니 지금 이 순간까지, 10년이 훌쩍 넘은 시간을 광채는 지민이만을 사랑했고 지민이도 광채를 사랑하고 있답니다. 그냥 받아주세요. 이건 왕녀로서가 아닌 광채의 누나이자 부인의 양딸로서 드리는 부탁입니다."
레비던트 부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란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레비던트 부인이 막 뭐라고 대답하려던 때였다.
"왕녀마마. 손님이 오셨습니다."
"아, 부인 제가 손님 한 분을 초대했답니다. 들어오시라고 해요."
빈이의 말이 끝나자 하녀가 물러갔고 한 사내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레비던트 부인은 흠칫 놀랐고 사내는 씩 웃으며 빈이에게 인사했다.
"9년만이군요. 에니칼 왕녀님. 브리칸 시르크 공작. 왕녀님을 뵙습니다.
지민은 많이 수척해진 얼굴을 하고 세레네즈의 거리를 걷고 있다. 세레네즈에는 이른 봄비가 내리고 있다. 카오스 전야제가 어느 새 다가오고 있었고 세레네즈는 겨우내 웅크림을 풀며 점점 활기로 가득차고 있었다.
"그래... 그 때도..."
지민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조금 웅크렸다. 그녀의 품에는 빵과 야채가 담긴 봉투가 들려있었다. 지민은 순간 자신이 너무 초라하다고 생각해버렸다. 정말로 광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지도... 지민은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하다가 이내 고개 저어버리고는 머리칼을 살짝 쓸어넘겼다. 일할 때는 한가닥을 따아놓지만 평소에는 자연스럽게 그냥 풀어놓았다. 어린 시절 지인의 긴 금발이 부러웠었는 데... 같은 금발인데도 짧은 단발이 싫다고 엄마에게 투정도 부렸었는 데. 이제는 그런 어머니도 계시지 않는 다. 묵묵히 미소만 짓고 있던 아버지도. 무책임하게 가족을 버린... 정말 무책임한 그 아버지란 존재도.
"지우하고 지성이... 그 두 아이가 있으니까. 지금은 기사학교를 다니는 어엿한 기사님들이지. 후 훗."
지민은 그렇게 하면 슬며시 미소지었다. 시르 상단으로 가는 길에는 좁은 골목길이 있다. 그 골목길로 접어들었을 때부터 이제와는 좀 다르다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음?"
사사삭.
옷자락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면서 섬뜻한 살기가 지민의 목으로 날아들었다. 지민은 놀라서 빵과 야채가 든 봉투를 떨어뜨렸고 그 때는 두 개의 검날이 지민의 목에 닿아있었다. 그와 동시에 파공성도 일었지만.
챙. 챙.
"후... 조금만 늦었느면 우리 대장한테 죽도록 맞았을 꺼야."
지민은 그렇게 중얼거리는 연녹색 로브의 젊은 마법사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민의 앞에는 놀랍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두 복면의 괴한들과 연녹색 로브의 젊은 마법사와 중년의 마법사가 검 한 자루 씩을 가지고 대치하고 있었다.
"자넨 항상 촐랑거려. 대장도 항상 자네를 염려하지. 우리는 창공 검술을 쓰기도 한단 말일세. 창공 검술은 마법사를 위한 검술로서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
"아참. 제프 아저씨는 항상 잔소리가 심하다니까. 순백의 위저드의 위대하신 이 몸 카르라트님께서 계신 이상..."
"라트. 입 좀 다물어주게."
제프라는 중년의 마법사는 그렇게 중얼리며 손에 든 검을 미묘하게 휘둘렀다. 제프는 괴한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창공 검술의 묘미는 검을 마법진을 그리는 데 쓴다는 데 있지. 동시에 호신되고. 자. 마법진, 윈드 가르드!"
제프의 외침과 함께 검날이 지나간 자리에 빛무리가 생기며 마법진이 생겨났고 바람의 원소 마법, 윈드 가르드가 거센 돌풍을 이르키며 뻗어나갔다. 두 괴한은 시선을 주고 받고는 몸을 피했지만 그 자리에는 각 각 연녹색 로브를 입은 마법사들이 서 있다가 검을 내질렀다.
"훗. 대장이 지원도 보내 주셨군."
"누구시죠? 어째서 절..."
제프는 당황스런 표정을 한 지민을 보며 말했다.
"아, 저희 대장이 당신을 좀 보호해 달라고 해서 말이죠. 저는 순백의 위저드 제6장로, 바람의 장로 직속 친위대, 삭풍대 서열 1위 제프입니다. 대장이 없을 때는 제가 리더 역활를 맞죠. 저기 촐랑거리는 라트 녀석은 삭풍대의 막내고 말이죠. 위에 있는 두 녀석은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아, 텔레포트 해 버렸군요.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들어나 있는 존재가 아니거든요. 장로 직속 친위대라는 건... 이만."
제프는 그렇게 말하고는 사라졌고 지민은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다가 이윽고 시르 상단으로 발길을 돌렸다.
"...대충 이런 일이 있었다더군요. 레비던트 부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에니칼 왕녀, 이빈의 방.
윤기와 레비던트 부인, 이빈은 테이블에 둘러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레비던트 부인은 윤기의 말에 딱딱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시르크 공작 전하"
"후훗... 모른다... 라."
윤기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빈이는 윤기를 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브리칸 시르크, 홍윤기. 언제나 차가웠고 또 지금에 와서 좀 부드러워 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윤기가 레비던트 부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상당히 가식적이셨군요. 당신은... 뭐 좋아요. 대 놓고 내가 했소라고 할 수는 없겠죠. 전 제프를 통해 상당한 증거를 가지고 있어요. 암살자라... 좀 치사한 방법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레비던트 부인."
"..."
"뭐 좋습니다. 없던 일로 해드리는 것. 그냥 증거를 소거해 버리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다만 광채를 막지 말라는 것. 더 이상 나서서 그들을 막을 권리를, 당신은 영원히 잃어버렸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윤기는 그렇게 말하고는 빈이의 방을 나섰다. 이제는 빈이가 고개를 돌리 레비던트 부인에게 말했다.
"제 부탁입니다. 부인. 지민이는 좋은 아이입니다. 부디 허락해 주시길 간청합니다. 부인. 광채가 원하는 건 명성도, 권력도 아님을... 단지 사랑이라는 걸 알아 주십시오."
레비던트 부인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내가... 졌다."
세레네즈의 레비던트 후작가 저택.
응접실에는 중년의 부인과 젊은 남녀가 서로 마주 앉아 있었다. 중년의 부인, 레비던트 부인의 말에 두 남녀는 놀랐다는 표정으로 레비던트 부인을 바라보았다. 광채는 자신의 어머니를 보며 말했다.
"정말... 정말로 허락하신겁니까?"
레비던트 부인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광채는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마치 탄성이라도 지를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민은 고개를 푹 숙인체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었다.
"지민양."
레비던트 부인이 지민을 불렀다. 지민은 얼굴을 살짝 들었다.
"지난번에는... 내가 미안했어요. 정식으로 사과할게요. 받아주실래요?"
지민은 살짝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솔직히 자신이 없어요. 광채에게 정말로 어울리는 사람일지..."
"지민양은 광채를 사랑하지 않나요?"
"예?"
"광채를 사랑한다는 것 하나로 된거라고... 누군가 나에게 말해주더군요. 자신감 같은 건 낄 때가 없다는 거죠. 아, 나도 이번에 많을 걸 베운 것 같아요. 지민양..."
지민과 레비던트 부인은 서로를 향해 미소 지어보였다. 레비던트 부인이 말했다.
"자, 둘이서 할 이야기 많을 테니 이만 가봐요."
광채는 지민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 그 둘의 뒷모습을 보던 레비던트 부인은 혼자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잘... 한 것일까?
"그럼요. 레비던트 부인."
레비던트 부인이 놀라서 고개를 돌려 보자 카브, 아니 클레이 바즈가 서 있었다.
"카브라고 했던가요?"
"훗... 예의 없이 그냥 들어와서 미안하게 되었소."
레비던트 부인은 미소 지으며 클레이에게 자리를 권했다. 클레이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정식이로 나를 소개하지. 본인은 과거 황제 폐하 아래서 과분한 백작의 칭호를 가지고 해전 총사령관으로서 일했던 클레이 바즈라 하오. 조용히 잠적해서 여행만 하며 살려했건만 시르크 공작의 농간에 휩싸여 다시 정계로 나서게 되었소이다."
"크,클레이 바즈 장군?!"
레비던트 부인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그렇소. 그러니 너무 섭섭해 하지는 마시오. 내가 지민이의 후원자가 될테니까. 아마 조만간 칼라이스의 총책임자 자리는 광채 군에게 돌아갈 것이오. 하 하 핫!"
"그,그런..."
레비던트 부인은 찻잔을 들어올리며 속으로 시르크 공작이란 존재는 참으로 무서운...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뼈져리게 느끼고 있었다.
마법으로 밝혀진 불빛 아래 펼쳐진 넓은 밤의 항구.
붉은... 카오스의 붉은 달이 바다 위에 빛나고 수많은 배들이 마법등을 밝히고 정박해 있는 모습은 퍽 아름다웠다. 세레네즈의 외성 위에 올라 한가롭게 경치를 감상하며 산책을 즐기는 커플들은 제법 많았다. 대륙 3대 미항이라 불리울 정도로 세레네즈는 아름다운 도시였고 전쟁 중이 아닌 만큼은 주민들과 여행자들에게 외성을 개방하고 있었다. 사실 특별한 군사 시설도 없었다. 과거 대마도사 위고르가 자신의 일생 최대의 마법이라 여기고 걸어놓은 방어마법진에 따라 배치되어 있다는 것 뿐이었다. 약 2000년 전만해도 이 마법진을 발동하여 대단위 탐색 마법등, 다양한 분야에 이용할 수 있었다 전해지는 데 현제는 어떤 마법사도 마법진을 발동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튼 외성 위에서 산책을 즐기는 한 커플이 있다.
광채와 지민, 둘은 사뭇 다정한 모습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그 때도 이맘때였네. 내가 처음으로 너 앞에서 맹세를 한 때가..."
광채가 그렇게 말하자 지민 역시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 때는 참 우리도 웃겼어. 그치?"
"후훗... 그래... 하지만 꽤 괜찮은 추억이지 않아?"
지민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지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광채야."
"응?"
"그거 아니? 이렇게 네 옆에서 너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 큰 행복이라는 거."
"지민아..."
광채는 우뚝 멈춰서서 지민이를 바라보았다. 지민이는 피식 웃고 있었다. 광채는 그 동안 꺼내지 못하고 깊숙히 잠재워 둔 말 한마디를 깨웠다.
"사랑해..."
지민은 잠시 얼굴을 붉히다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닭살스러워... 키킥..."
"쿡... 그렇네."
둘은 그렇게 웃어보이며 계속 길을 걸었다. 붉은 달빛 아래... 두 사람은 걷고 있었다.
『카오스 전야제』
-신의 봉인이 깨어지는 때,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아, 새하얀 겨울이 찾아오면 세상은 얼어붙고 새하얀 눈송이 위에 붉은 피가 흐릅니다. 악신의 사도들이 세상에 강림하여 사람들의 눈을 흐리고 세상이 바뀌어 또 하나의 역사가 끝을 맺고 새로운 역사로 거듭나니... 세상을 밝히는... 밝히는 아나드라스?
"아나드라스가 뭐죠?"
-고어로 빛이라는 뜻이죠. 아, 아직 남았습니다. 세상을 멸로 이끄는 세레주얼... 다시금 새세상을 여는 세르가즈. 그 속의 잠든 아나포스. 그 모든 평형의 가운데 절대의 힘, 무극의 마그나트.
"세레주얼? 세르가즈? 아나포스? 마그나트?"
-세레주얼은 파괴, 세르가즈는 창조, 아나포스는 어둠, 마그나트는... 마그나트는 절대자를 상징하는 무극의 힘.
"그렇다면..."
-과거 드레곤들이 세상을 지배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도 세상이 한 번 뒤바뀌었을 때이지요. 그 만큼... 아니 그 이상의 변화나 위기가 세상으로 찾아오고 있다는 뜻이죠.
"전... 전 잘 모르겠어요. 아직은..."
-신의 가호를 받아 모든 라티엔을 인도할 분께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하지만... 파르."
-당신 역시 하나의 라티엔. 라티엔은 작은 빛입니다. 이 빛이 모여야만 카오스 님의 신탁이 말하는 아나드라스. 즉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전 두려워요. 세상이 어떻고 아나드라스니 세레주얼이니 하는 소리도 잘 모르겠구요. 전 그저 어린 소녀일 뿐인데..."
-당신은 라티엔을 인도하는 자이면서 라티엔인 사람입니다. 당신이 원치 않는 다 할지라도 언제인가 잇닿아 행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전 조금 돕고자 할 뿐.
"알겠어요. 파르. 전 얼마간 수도에 다녀와야 해요. 다음에 뵙죠."
-뵙게 될 수 있다면... 당신이 앞으로 가실 길에는 제가 없답니다. 라티엔의 또 다른 뜻은 희생... 부디 이 의미가 맞지 않기를...
세레네즈의 시르크 공작가.
공작의 집무실에서는 이제 사이칸트가 아닌 브리칸, 윤기가 각종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똑. 똑.
"들어오세요."
윤기는 피곤의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윤기의 아버지, 사이칸트 시르크였다.
"어떻게 할 만 한가? 공작?"
"죽겠네요. 좀 도와 주세요."
"지난 9년 동안 이 아버지는 혼자 했다."
찔리는 구석이 많은 윤기는 즉시 입을 다물고 서류에 시선을 집중했다. 처리한 것보다 해야 할 것이 많다는 사실은 윤기를 상당히 괴롭히고 있었다.
"그 샨이라는 아이를 양자로 들이고 싶다고?"
윤기는 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들어올려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내가 안된다고 하면 또 멋대로 처리해버리겠지. 하여간 누구 아들인지 머리는 더럽게 좋아가지고 철저히 숨겨서 일을 진행하고 완벽한 서류로 이 아버지 목을 조르는 솜씨가 뛰어나니까..."
"결론은 뭔데요?"
"공작 마음대로 하시라고."
"후 훗. 감사합니다. 대가로 서류들을 넘겨드리지요. 전 보라에게 이 소식을 알리러."
윤기는 그렇게 말하고는 재빨리 집무실을 나갔다. 사이칸트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양자 드리는 것도 전통인가. 나도 이 집안에 양자로 들어왔으니 흠..."
그렇게 중얼거리며 무서운 속도로 서류를 처리해 나가는 사이칸트였다. 무서운 부자였다. 시르크 부자는...
"어쩐 일이냐? 윤기 네가 먼저 이렇게 놀러나오자고 다하고..."
"내일이 축제라서 그런지 상당히 붐비는 군."
윤기는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옆에서 있던 보라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용건이 있으시겠지?"
"눈치는 하여간..."
윤기는 그렇게 말하고는 보라를 보며 말했다.
"샨이라는 녀석 기억나?"
"너랑 꼭 닮은 그 녀석?"
"그래..."
"그 녀석은 왜?"
윤기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양자로 들였으면 해서."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비틀...
윤기는 순간 발을 헛딛었다. 윤기는 황당하는 표정으로 보라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고는 입을 열었다.
"나 참... 말을 말아야지."
"그러니까 네 말은 그 녀석 엄마가 되달라는 소리였나? 프로포즈 한 번 더럽게 멋없게 하네. 참나..."
"..."
윤기는 할 말을 잃고 빤히 보라를 바라봤다. 보라는 그런 윤기를 보며 말했다.
"와! 완전히 바보처럼 보인다."
윤기는 이제 완전히 넋을 잃고 걸음을 멈췄다. 보라는 그런 윤기를 보며 키득거리며 말했다.
"키득.. 키득.. 농담이야. 농담. 천하의 사마의 칸 나으리에게서도 그런 표정이 나오다니."
"아,아무튼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해."
"으휴... 내가 앞으로 이 바보같은 두 사내 자식들은 어떻게 키우나... 오 전능하신 카오스 신이시어! 저에게 알려주소서!"
윤기는 보라의 말을 듣고 그냥 피식 웃어버렸다. 그 때 였다.
"혹시 로니아 백작님이십니까?"
보라와 윤기가 시선을 돌리자 번뜩이는 풀 플레이트 메일을 입는 청년 기사가 보라 앞에 달려와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 말했다.
"나이트 레이슬이 레이디 로니아 백작을 뵙습니다."
"누구냐?"
윤기는 레이슬이 자신을 밝힌 기사를 보며 말했다. 보라는 레이슬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글쎄..."
윤기는 레이슬을 잠시 바라보았다. 소드 마스터 초입인듯 했다. 윤기는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레이슬을 보며 피식 웃으버렸다. 소드 엠퍼러와도 호각을 이룰 자신을 있는 자기를 도대체 어떻게 하시겠다고?
"어찌 백작님께서 저런 건달같은 용병 따위와 어울리시는 겁니까?"
"거,건달?"
보라는 순간 황당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윤기는 피식 웃을 뿐이었고 레이슬의 이마에는 핏줄 하나가 돋아났다.
"나, 나이트 레이슬. 그대에게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한다!"
"좋을 때로. 음?"
-제프입니다. 말씀하신 카르테우스의 교단을 찾은 듯 싶습니다. 잠시 와 주시셨으면 합니다. 라트 녀석이 혼자 처들어가겠다는 것을 간신히 막고 있습니다.
"후... 귀찮은 일이 생겼군. 기사 양반 바빠서 실래하겠소이다. 텔레포트."
윤기는 그렇게 말하고는 빛무리와 함께 사라졌다. 레이슬이 황당한 표정으로 보라를 향해 물었다.
"저,저 작자는 도대체?"
"도대체 누구냐고? 글쎄요. 내일 저녁이면 아실 수 있을 듯."
보라의 입가에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냥 광신도들이었군."
윤기는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주민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세레네즈 변두리의 한 집에서 마족으로 보이는 카르테우스의 사제와 주민들이 모여 카르테우스의 신앙을 이야기 하는 것이 제프와 라트가 찾은 카르테우스 교단의 전부였다. 마족 녀석은 '사마의 칸...' 어쩌고 라고 중얼거리다가 저 세상으로 가버린지 오래였다.
"저들은 이단자들이니 카오스 신전이나 파이란 신전에 맡기면 적당히 교화시켜 주겠군. 제프, 라트, 수고스럽지만 좀 해 주겠나."
"물론."
"하 하 핫, 대장. 대신 나중에 술사야 되요!"
"내일 저녁 연회에 시르크 공작의 이름으로 초대하는 걸로 하지. 그럼 되겠지. 아... 간만에 데이트를 즐기다가 달려 왔는 데 잔챙이나 걸리다니."
윤기의 중얼거림을 들은 라트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대장 부인은 언제 소개시켜 줄꺼요?"
"험, 험. 부,부인이라니..."
"라트. 그런걸 물으면 못쓴다. 이렇게 묻는 거야. 결혼 날짜는? 주례는? 사회자 자리 쯤은 저에게."
"헛! 제프 아저씨! 당신마저!"
윤기는 쓰러지는 시늉을 해 보이며 말했다. 제프와 라트는 크게 웃으며 주민들과 함께 오두막을 나갔고 윤기는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어디론가로 텔레포트했다.
카오스 전야제.
폴라리스(북극성)와 카오스의 붉은 달은 맹세와 혈연, 피의 맹세, 혹은 사랑의 서약이라는 의미로 자주 해석되며 카오스의 붉은 달과 폴라리스가 위치를 같이 할 때 카오스 전야제가 열린다. 유독 자정이 되면 달빛에 가려 빛을 발하지 못하던 폴라리스가 붉은 달빛을 타고 그 푸른 빛을 뿜어내는 데 붉은 빛과 푸른 빛의 조화로움과 신비로움을 보며 사람들은 흔히 무언가를 약속하거나 맹세한다. 사랑의 언약도 그러했고 군신간의 충성도 그러했다. 자정 이후로 날이 밝기까지 그 빛은 계속 이어지며, 신하는 이 시간 때에 자신의 잘못을 알리고 용서를 구할 수 있으며 피의 서약을 통해 군신 간의 의를 다질 수 있다. 주군이 되는 자는 어떤 잘못이더라도 이 때는 용서를 해야 하게 되어 있다. 카오스 전야제는 항상 하루 저녁을 걸쳐서 열리며 그 다음부터 약 일주일 간 축제가 열게 된다. 이상하게도 축제 기간보다 전야제 행사가 항상 더 성대하였는 데 특히 왕실 아카데미는 항상 이 때 국왕 앞에서 대회를 벌여 많은 어린 학생들의 솜씨를 뽐낸다. 타 도시 마주교 학생 역시 졸업자에 한해서 받아들이고 있어서 평민이 귀족이 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아무튼. 카오스 전야제의 시작을 알리며 대회가 열리는 거대한 콜로세움. 최상석에는 국왕과 대귀족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안드레이 크리스티앙 대공 전하 드십니다."
시종장의 말과 함께 하인에게 의지해서 한 노인이 걸어나와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신, 안드레이 크리스티앙. 이제야 폐하께 문안 인사를 쿨럭. 올립니다."
"어서 일어서세요. 안드레이 아저씨. 하늘에 계신 아바마마께서 저를 욕하시겠습니다. 어서요."
황제는 안드레이가 무릎을 꿇는 것을 보고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서서 안드레이를 일으켜 세워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 안드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늙은 이의 몸이 심하게 안 따라주는 구나. 쿨럭. 큭. 칼... 하이런이 혼자 버티고 있지 말고 어서 오라고 하더구나. 요즘 들어서 그 녀석이 꿈에 자주 나와."
"아바마마께서..."
황제, 네프칼 칼 바일로너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 때 시종장이 다시 한 번 외쳤다.
"브리칸 시르크 공작 전하와 그의 부친, 사이칸트 시르크께서 드십니다."
윤기와 사이칸트는 황제에게 인사를 올렸다.
"신, 브리칸 시르크.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신, 사이칸트 시르크.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는 가볍게 목례로 답하고는 안드레이의 안부를 챙겼다. 윤기와 사이칸트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 모습이 아버지를 걱정하는 아들과 같았기 때문에.
"이 녀석. 네 녀석이 황제 폐하 반만 닮았어도 지난 9년간이 이 아버지를 속 썩이지 않을 것 아니냐!"
사이칸트가 살짝 윤기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말했다. 윤기는 왠지 딱 걸렸다는 기분을 지우지 못하며 속으로 뭐라 궁시렁거릴 뿐이었다.
"파일론 레비던트 후작 각하와 레이디 시르께서 드십니다."
"하르니칼 헬던트 후작 각하와 세이아 에프론 여백작께서 드십니다."
"미르엔 로니아 여백작께서 드십니다."
윤기는 자신에게 미소를 지어보이며 들어오는 그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올 사람은 다 온 것인가. 흠..."
세레네즈의 항구의 한 곳.
한 여객선에서 한 노인과 백금발의 소녀가 내렸다. 차림을 보아서 노인은 소녀를 보좌하는 역활 쯤 되는 듯 했다.
"영주... 아니, 실로테 아가씨."
"차도르.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요. 한지애, 지애라고 부르시라구요."
자신을 지애라고 부르라는 소녀, 지금으로부터 9년전, 프랑드 시에서 대륙 전쟁의 영웅들과 인연을 맺은 공식적으로 프랑드 시의 영주인 실로테 프랑디우 여백작이었다.
"지애 아가씨... 아무튼 왜 그자에게 프랑드 시를 내어준 겁니까?"
"파르의 말씀에 따르면... 전 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이예요. 라티엔... 빛이라고 했던가요? 저는 그들을 찾아야 해요. 빛을. 진정한. 진정한 빛 아나드라스를 위해."
지애는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 황성 세실리드를 바라보았다.
"잠시 뒤... 황실 연회에서 만날 그들은... 과연 라티엔일까요?"
"아가씨..."
"김재광, 그 사람이라면 프랑드 시를 잘 이끌어 주겠지요. 혁명이라... 그 것도 꽤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어쩌면 지금 세상은 멸망이 아니라 단지 변하고 있는 지도 모르지요. 아니, 세상 스스로가 변화를 원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가 실패한다면..."
"작위 박탈, 사형? 뭐 그런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 때라면 저는 이땅에 없어요. 어딘가에서 라티엔들과 아나드라스를 쫓고 있겠지요."
차도르는 잠시 자신의 주군을 바라보았다. 아나드라스. 빛, 불가능이라 여겨지는 빛. 세상을 구원하리라 아니, 변화시키리라 말하는 빛. 그 빛은 없는 것만 같다. 그러나 자신의 주군은 그 것을 쫓고 있다. 전설 속의 아나드라스를... 카르테우스라는 악신의 교단이 세상에 나와 세상을 어지럽히고 과거 성황 칼브란과 성녀 세라인이 만든 봉인이 깨어져 드레곤들이 일어나려 하고 있다. 바다의 해룡족 역시 그 잠에서 하나 둘 씩 깨어나려 하고있다. 이 모든 세상의 혼돈을 잠재우고 안정을... 빛을 가져 올 것이라는 아나드라스... 그 것은 진정 존재하는 것일까? 차도르는 자신의 주군인 지애를 보며 잠시 의문에 빠졌다.
"후... 오랜만에 나오니까 좋은 데..."
가출한 귀족가의 자제일까? 제법 번듯한 차림의 청년은 축제의 거리에 휩싸이며 혼자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등에는 녹색의 숏보우가 걸려 있었다. 그러나 화살은 보이지 않았다. 보아하니 보석으로 만든 멋내기를 위한 물건인 듯 했다.
"샨! 이 망할 자식아. 나 저거 좀 사줘."
그 때 청년의 귓가에 상당히 흥미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한 금발 머리 소년이 흑발의 소년에게 물건을 사달라고 노점상 앞에서 조르고 있었다. 금발의 소년은 등에 묵직해 보이는 대검을 차고 있었고, 샨이라 불리운 흑발 머리칼의 소년은 검은 색 망토 차림이었다. 검사와 마법사라... 청년은 젊은 날에 호기 있게 모험에 나선 녀석들인 것 같아 관심이 갔다.
툭.
청년이 두 소년에게 다가가려다가 한 거한과 부딪치고 말았다. 청년의 예상대로 그 거한 다짜고짜 시비부터 걸어왔다.
"음, 미안하오."
"허참. 이 놈이 사람치고 그냥 가려고?"
"그럼?"
"치료비."
청년은 풋 하고 웃어버리며 등에 걸린 숏보우를 풀어서 왼손으로 잡았다.
"치료비라... 상처가 있어야 줄 수 있거든."
"오, 시위도 없는 활을 가지고 상처를?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미친 놈 다보겠군."
"스승님께서 진정한 포스 마스터는 거리에 구애받지 않는 법이라고 하셨지. 라이트닝 어택."
청년의 외침과 함께 활에서 녹색 빛으로 이루어진 시위가 생겨나며 전기 줄기가 거한에게 뿜어져 나갔다.
"으악..."
거한은 감전 당한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거한의 동료들이 달려와 무기를 뽐고 청년에게 달려들었다. 청년이 막 다시 시위를 당기려고 할 때였다.
"쳇, 궁사 양반, 마법활 가지고 설치면 못쓰지. 혼자 이 덩치들을 다 감당하려고? 미쳤지?"
샨이라는 흑발 소년에게 때를 쓰던 금발의 소년이 대검을 뽐아들고 거한들을 막고 있었다. 어디선가 달려온 갈색 머리칼의 소년이 주먹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 소년의 주먹에는 라이트닝이 잔뜩 실려 있었다.
"동민이 이 녀석! 이건 내 상대란 말이다!"
"켄트, 아니 시그니스. 닥치고 앞이나 똑바로 봐."
금발의 소년, 시그니스는 검에 검기를 살짝 실어 상대의 무기를 두동강내며 동민의 말을 받아쳤다.
"너나 잘해!"
동민은 전신에 라이트닝을 휘감고 폭발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지."
동민은 그렇게 말하며 거한들을 싹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청년은 활 시위를 가볍게 튕기며 중얼거렸다.
"유도 화살... 이거면 끝이지."
청년의 손을 떠난 연녹색 화살이 거한들의 오른쪽 어깨를 차례로 뚫고 날아가다가 허공에서 사라졌다. 전투 불능에 빠진 거한들은 부상당한 동료들을 챙겨 허겁지겁 달아났다. 청년은 시그니스를 향해 씩 웃으며 말했다.
"난 배정두라고 한다. 도와줘서 고맙다."
"내 이름은 시그니스 유크리트. 실력인 장난이 아니던데. 괜히 땀흘렸어."
"난 시그니스란 철딱서니 없는 놈 동료. 라운 파이터 이동민이다."
순간 시그니스와 동민 사이에 한 차례 불꽃이 튀었다. 그 때 흑발의 소년이 나서며 중재에 나섰다.
"으휴... 이 것들이. 저는 파티의 리더인 샤느트라고 합니다. 그냥 샨이라고..."
"네가 언제부터 리더야!"
"허약해서 비실대는 놈이 리더는 무슨..."
청년은 티격거리는 셋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그들 향해 말했다.
"어쨌든 보답을 하고 싶은 데..."
"저거 사줘요!"
시그니스는 노점상을 가리키며 외쳤다. 나머지 셋이 황당한 얼굴로 그를 바라본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헤. 헤."
시그니스는 정두가 사 준 검을 들고 기분이 좋은 지 연신 미소 짓고 있었다. 샨은 정두를 보며 말했다.
"그렇게 좋으니?"
"그럼, 그럼. 이게 바로 6클레스 근력 강화 마법이 걸린 미스릴 제 검이라는 거 아니겠어. 서비스로 헤이스트와 원드 스톰도 걸려있다더라고. 철검만 들고 다니다가 마법검 생기니까 기분 좋다~!"
정두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은인이 기분 좋다니까 나도 기분 좋군. 하. 하. 하."
"은인은 무슨. 저 바보가 안 나섰어도 당신 혼자 싹 쓸어버렸을 거면서."
동민이 정두를 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시그니스는 동민을 보며 말했다.
"넌 왜 나섰냐? 너없어도 나 혼자 쓸어버렸어."
"바보가 사고치면 골치 아프니까."
동민은 시그니스의 말을 가볍게 받아쳤다. 정두는 황당한 표정을 하며 샨에게 물었다.
"쟤네들 호흡은 잘 맞던데 왜 저러는 거냐?"
"안 싸우면 그게 문제 있는 거죠."
샨은 별 것 아니라는 투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정두는 정말 특이한 아이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봐! 자네들이 이 사람들을 이렇게 해 놨나?"
정두와 일행이 막 어느 음식점으로 들어서려던 참이었다. 중년인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모두가 고개를 돌리자 경비대로 보이는 작자들 뒤로 방금전 정두와 시그니스, 동민의 손에 두들겨진 사내들이 쭈볏거리며 서 있었다.
"그렇습니다만?"
"우리와 좀 같이 가야겠군."
경비대장을 보이는 자가 그렇게 말했다. 정두가 샨을 향해 말햇다.
"훗. 골치 아프게 된 것 같지 않나?"
샨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정두의 말에 답했다.
"그런 것 같군요. 사람이 많아서 마법이나 화살을 쓸 수는 없는 데... 저 녀석들은."
샨은 그렇게 말하며 시그니스와 동민을 흘겨보았다. 서로를 의식하며 시그니스는 검을 뽑았고, 동민은 라이트닝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좋았어! 마친 이 마법검을 시험해봐야 하던 참인데!"
시그니스는 외치며 경비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동민 역시 시그니스를 쫓아 경비대들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정두는 활을 손에 잡으며 말했다.
"준비하고 있는 것이 나쁘지는 않겠지?"
샨은 고개를 끄덕이며 캐스팅을 하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 오랜만이네요. 아, 9년전. 가출했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어요. 뭔가에서 해방된 기분. 그 때 그 사람들을 다시 볼 생각을 하니 기분이 묘하네요."
역시 세레네즈, 축제의 거리의 한 곳.
실로테, 아니 지애가 시정 마법사 차도르를 향해 말했다. 차도르는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저도 아가씨가 웃으시니까 기분이 좋군요."
"그런데 저기 왠 사람들이?"
지애가 손가락질한 방향에는 사람들이 물러나서 생긴 공간에서 소년으로 보이는 두 남자와 경비대가 싸우고 있었다. 차도르는 천천히 마나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저 소년들을 돕는 게 좋을 까요? 아가씨?"
"그러는 것이..."
지애의 말이 끝나자 마자 차도르는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소리쳤다.
"썬더 스톰."
콰광.
요란한 효과음이 울리며 두개의 빛줄기가 그들 사이로 떨어져내렸다. 두 소년, 시그니스와 동민은 썬더 스톰이 일으키는 거대한 전기 파장을 중화시키기 위해 각자 검과 주먹을 휘둘렀다.
"샨! 네 짓이냐!"
시그니스가 외쳤다. 동민 역시 샨을 향해 소리쳤다.
"미친 놈! 우리도 같이 죽이겠다는 거야!"
"내가 한게 아냐! 생사람 잡지마!"
샨이 동민의 말에 답하며 전기 파장을 중화시키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전기 파장이 거두어졌을 때 지애가 나서서 물었다.
"무슨 일인데 이러는 거죠?"
"아, 그 것이..."
샨이 나서서 정황을 설명했다. 지애는 이야기를 들으며 인상을 쓰고 경비대 뒤에 서 있는 사내들을 노려보았다. 사내 중 하나가 대표로 나서서 하소연 했다.
"아닙니다! 우린 시비를 건적이 없어요. 절대로! 저들이 먼저 다짜고짜 공격한 거라구요."
"과연 그럴 까요?"
지애는 그렇게 말하며 차도르에게 눈짓했다. 준비해 두라는 신호였다.
"보아하니 귀족가의 레이디이신 것 같은 데 빠지시기 바랍니다. 괜히 참견하셔서 안 좋은 꼴 당하시지 말고."
경비대장의 말을 듣고 지애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래요? 누가 안 좋은 꼴을 당하는 지 봅시다. 차도르!"
"[어둠의 속, 지옥의 업화. 헬파이어]"
차도르의 외침과 함께 거대한 검붉은 불길이 치솟아올랐다. 경비대가 당황하고 있을 때였다.
"[화염이어! 지옥에서 솟아오른 분노한 화염이어! 내 앞에서 타올라라! 헬파이어, 더블 스펠!]"
샨이 다시 한 번 헬파이어를 캐스팅했고 더블 스펠의 효과로 거희 10클레스 헬파이어 블레스터의 위력이 일어났다 경비대들은 혼비백산했고 차도르는 식은 땀을 흘리며 시그니스의 부축을 받고 있는 샨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 나이에... 6클레스 마법, 헬파이어를. 비록 막 익혀 부작용이 커 보이기는 하지만 대단하군."
"차도르, 감탄만 할 때가 아니라구요. 빨리 저들과 함께 여길 피해야죠."
지애가 소리치자 차도르는 급히 정두와 일행이 있는 곳으로 뛰었다. 차도르가 다급하게 외쳤다.
"어디로 가야 하는 가?"
"시르... 아니 여관, [로니아]로..."
샨이 시그니스의 부축을 받으며 외쳤다. 차도르는 급히 텔레포트 주문을 외웠다. 화염이 난무하는 사이로 그들은 섬광과 함께 사라졌다.
여관, 로니아.
세레네즈에서 최고의 여관으로 손꼽는 로니아 상단이 운영하는 여관이었다. 하자드나 세일론으로부터의 사신이 세실리드의 국빈관 대신 이 곳을 선택한 전례가 있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고 모험가들도 한 번 쯤은 들린다는 세레네즈의 명소들 중 하나였다.
그 곳의 1층 식당.
황실연회장과 비교해도 될 정도로 넓은 규모로 수많은 모험가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수많은 정보가 오가는 곳이었다. 한 쪽 구석진 곳에서는 술과 담배와 함께 도박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축제 기간인 만큼 어디에서 어땠고 거기는 어떻다는 말이 주로 오가고 있었고 특히 황실 아카데미에서 개최하는 마법검술대회의 우승자를 놓고 토론하거나 내기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 곳에서 서희와 호상은 축제 구경하겠다며 뛰쳐나가버린 샨과 시그니스, 동민을 기다리고 있었다. 본래는 시르크 공작가에서 머물던 일행이었지만 대회에 참가하면서 선생 이름을 홍윤기라 썼을 정도로 윤기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 꺼려했기 때문에 보라의 배려로 로니아 여관 특등실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러면서 정작, 선생이라는 그 홍윤기라는 분께서는 예선전에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황실 아카데미에서 개최하는 마법검술대회의 룰은 각 지방에서 뽐혀져 올라온 마주교 대표들과 그 아이들의 선생이 파티를 이루어 싸우는 단체전이었다. 물론 수도의 선생들이 더 실력이 좋기 때문에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우승은 세레네즈의 어느 마주교 혹은 아카데미에게로 돌아갔다. 샨 일행은 그 전례를 깨버리는 것이 목표였다.
"늦는 군요."
호상이 입구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서희는 차를 마시며 여유있게 말했다.
"별 일이야 있을 려고. 얼마 안 있으면 본선인데 거기에 늦을 까 그게 걱정일 뿐이야."
호상은 한 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태평할 수 있어요?"
"샨 있잖아."
"으... 그 샨이라는 녀석이 오히려 시그니스나 동민이보다 더 걱정이죠. 한 번 열 받으면 무슨 짓이든 하는..."
호상은 거기까지 말하다가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샨!"
그 때 막 여관 입구로 시그니스의 부축을 받는 샨이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뒤로 동민과 정두, 지애와 차도르가 차례로 들어왔다. 서희가 당황해서 외쳤다.
"어떻게 된거야!?"
"후... 사고 좀 쳤어. 이 샨이라는 미친 놈이 다짜고짜 헬... 아무튼 6클레스 쯤 되는 마법을 갈겨버리는 바람에 이 모양 이 꼴이지뭐."
시그니스는 그렇게 말하며 샨을 내던지듯이 호상 옆에 내려놓았다. 샨이 시그니스를 보며 말했다.
"으윽. 다 누구 누구 때문에 벌어진 일이잖아."
"할 말 없다. 그래..."
시그니스는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샨 옆 자리에 앉았다. 호상이 정두와 지애, 차도르르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람들은 누구냐?"
"아, 그게..."
동민은 호상의 물음에 그간의 상황을 설명했다. 호상은 어떤 대목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숨을 쉬다가 고개를 설래설래 흔드는 등, 다양한 제스처를 보여주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정두가 말했다.
"배정두라고 합니다. 잠시 합석하겠습니다."
"강서희라고 해요. 아, 어떤 못된 녀석 덕분에 제가 대신 이 아이들의 보호자 신세를 맡고 있죠."
"유호상입니다."
호상이 말했다. 지애는 서희를 보며 말했다.
"한지애라고 합니다. 이 쪽은 저를 수행하는 차도르라고 합니다."
차도르는 고개를 살짝 숙여보였다. 지애와 차도르까지 앉자 서희는 음식을 주문했다. 정두는 서희를 보며 말했다.
"아, 그런데 아까 그 못된 녀석이란게?"
"홍윤기라는 녀석있어요. 이 애들은 황실 아카데미, 마법검술대회 본선 진출자거든요. 윤기는 이 애들의 선생님이죠. 그런데 예선전에서는 코빼기도 안 보이고 지금도 감감 무소식이예요. 나참... 뭐가 그렇게 바쁘다가 뻔뻔스럽게."
"거참, 무책임한 선생이군요."
정두는 서희의 말에 맞장구치며 말했다. 그 때 였다.
"그래... 무책임한 선생, 지금 왔습니다. 네프칼 카르타 바일로너 황태자 전하. 그리고 뻔뻔한 놈도 왔죠. 레이디 네프리아 리세프론."
윤기가 훌쩍 나타난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을 놀라게 한 것은 윤기가 아니었다. 바로...
"화,황태자?"
서희는 정두를 보며 외쳤다. 윤기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9년 만이군요. 황태자 전하."
"서,설마. 브리칸 시르크! 돌아왔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정두는 윤기를 보며 탄성을 질렀다. 아이들은 윤기와 정두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불쑥 지애가 끼어들며 말했다.
"전 아는 척도 안하시는 군요. 홍윤기... 아니 브리칸 시르크."
윤기는 살짝 고개를 돌려 말했다.
"그럴리게 있겠습니까? 실로테 프랑디우. 여백작. 오랜만이군요. 시정 마법사 차도르 님."
윤기는 여전히 미소 띈 얼굴로 말했다. 차도르는 오른손을 내밀며 말했다.
"오랜만이군. 거룩한 망나니. 브리칸."
"브리칸 시르크... 세레네즈 귀족계의 거룩한 망나니, 그리고 9년전 대륙 전쟁의 영웅, 시르크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 프로필은 언제나 거창하시군."
차도르는 윤기를 보며 말했다. 윤기는 차도르를 보며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거룩한 망나니라... 사람들은 별명을 왜 그런 식으로 지어내는 것인지. 후 훗."
"본인은 마음에 안드나 보군"
"그런 별명을 누가 마음에 든다고 할까요?"
윤기는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 정두를 바라보았다. 정두는 순간 질끔한 하며 윤기를 바라보았다.
"포스 마스터란 말인가... 흠."
윤기는 정두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정두는 윤기에게 말했다.
"나 잡으러 왔냐?"
"그럼 누구 잡으러 왔겠습니까? 가출 소년 씨?"
"하. 하. 하."
정두는 황당하는 표정의 일행들의 시선을 일제히 많으며 뒤통수를 긁적이며 웃으었다. 그 때 지애가 대뜸 윤기에게 말했다.
"왜 수도를 떠나 있었으며 왜 이제야 돌아온 것인지 묻는 다면 실례일까요?"
"훗, 별 말씀을... 더러운 정치판이 싫어서 떠나 있었고 지금은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서라고 해야 하나."
지애는 잠시 윤기의 얼굴 표정을 살폈다. 잔잔한 미소가 어려있는 표정은 전혀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지애는 그를 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어렵군요... 당신이라는 사람은."
"예?"
"아니,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나중에 연회장에서 뵙도록하죠."
지애는 그렇게 말하고는 일어서서 차도르와 함께 여관을 나섰다. 차도르가 지애를 쫓아가며 말했다.
"과연... 그는 라티엔일까요?"
"글쎄요... 어려워요. 그는, 그는 너무도 어려운 사람이예요. 전혀 알 수가 없어요."
"그의 마나를 살짝 살펴봤습니다. 12클레스 중반 정도 되겠더군요. 거룩한 망나니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수련에 신경쓰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 때 천재라고 불리던 청년인데... 안타깝군요. 아나드라스를 찾는 여정은 힘겨울텐데 과연 그가 도움이 될까요?"
"진실일까요?"
지애가 문득 차도르에게 질물을 던졌다.
"예?"
"그의 대한 소문들... 진실일까요? 변화없는 표정 속에 날카로운 눈빛, 깊은 눈동자 속에 과연 무엇이 들어 있을까요?"
"글쎄... 브리칸 시르크, 홍윤기라는 그 친구는 워낙 특이한 사람이라서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군요."
지애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그렇게 어디론가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전 선생님이 자꾸 숨기시려고만 하는 게 이해가 안되요."
지애와 차도르가 나가자 샨이 윤기를 향해 말했다. 호상 역시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밝히실 때도 되지 않았어요?"
"이런 것도 어딘가 이용해 먹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겠지? 내가 사마의 칸이라는 사..."
순간 옆에서 듣고 있던 정두가 놀라서 윤기의 말을 자르며 외쳤다.
"네가 뭐라고?!"
"이런, 황태자 전하를 잊고 있었군. 뭐 상관 없겠지? 어차피 내가 바라던 건 황태자 전하가 놀라는 것이 아니라 앨런드가 크리스찬 밑에서 굽신거리는 얼간이 몇 명하고 배신하려는 준비를 하고 있는 일부 이스탈 회의의 썩을 놈들이니까."
"그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려고..."
서희가 윤기를 보며 말했다. 윤기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빙고. 누나는 역시 똑똑하시군요."
"그건 세살먹은 어린애도 알겠다. 다 말해 놓고는..."
시그니스가 윤기를 보며 투덜거렸다. 윤기는 그런 시그니스를, 아니 시그니스 일행을 보며 말했다.
"근데, 지금 본선대회 시작할 시간 다 되었지 않았나?"
"헉!"
"선생님은 어쩌실꺼예요?"
샨이 윤기에게 물었다. 윤기는 서희를 보며 말했다.
"...누나 잘 부탁해."
"으이그. 알았다. 가마. 자! 샨 텔레포트로 날아가자!"
서희의 외침과 함께 샨이 주문 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옅은 빛무리와 함께 그들은 여관에서 소리없이 사라졌고 윤기는 정두를 보며 말했다.
"슬 슬 우리도 가야 겠지요? 가출 소년 황태자 전하?"
"빨리 텔레포트인지 뭔지나 해봐. 여기저기 영웅신화를 만들고 다니시는 잘난 사마의 칸이라며."
"알았다고. 텔레포트!
윤기의 외침과 함께 그들도 여관에서 사라졌다.
황실 아카데미. 마법검술대회.
각 도시에 자리 잡은 마주교의 대표들이 모여 실력을 황제 앞에서 실력을 겨루는 대회로서 바일론에서는 일종의 등용문을 작용하고 있었다. 본선에 오르는 8개 팀에만 들어도 기사나 궁정 마법사, 혹은 궁정 주술사로 일할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운만 좋다면 고위 귀족의 눈에 들어 권력의 가도로 들어설 수도 있었다.
지금, 그 대회의 본선의 제1회전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푸름시! 푸름시 마주교 대표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나오지 않으면 실격 처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심판의 목소리가 시합장에 울려퍼졌다. 관중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터져나왔다. 푸름시 마주교 대표팀과 싸울 예정이었던 팀의 한 소년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훗, 지각이라... 별 볼 일 없는 놈들이겠군."
그 소년에 손에는 묵직한 투 핸디드 소드가 들려 있었다. 소년은 검을 땅에 박아놓고 기대어 중얼거렸다.
"지루하군."
"실격 처리 합니다!"
심판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려퍼졌다. 그 때 경기장에 빛무리가 일어나며 네 명의 소년과 한 여성이 모습을 들어내었다. 검은 머리칼의 검은 로브의 소년이 비틀거리며 중얼거렸다.
"으윽... 역시 장거리 텔레포트는 무리였나."
"대마도사로 소리칠 때는 언제고."
한 소년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를 부축했다. 마법사 소년은 한 숨 돌리며 심판을 향해 물었다.
"늦었습니까?"
"이번만은 봐 주겠지만 다음부터는 안 됩니다."
마법사 소년, 샤느트 아플론은 심판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보이고 소리쳤다.
"서희 누나는 후방으로 시그니스, 이동민 전진 배치, 유호상 불의 상급 정령 준비. [깊은 어둠 속의 화염이어. 지금 깨어나라! 헬 파이어!]"
"화염의 의지를 머금은 나의 친구들아. 그 의지를 나에게 빌려다오!"
샨과 호상의 외침과 함께 거대한 화염이 뿜어져 나갔다. 마법사와 정령사의 조화로운 공격이라고 할까? 샨의 헬 파이어에 호상의 정령 마법이 보태어져서 한 층 더 거세어진 화염이 상대편을 향해 뻗어나갔다.
"훗... 지각이나 하는 별 볼 일 없는 놈들 치고는 쓸만하군. 하이넬!"
"차가운 친구들아! 나 좀 도와주렴!"
투 핸디드 소드를 가진 소년의 외침에 그 뒤에 서 있던 소녀가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푸른 빛 무리가 샨과 호상이 쏘아보낸 화염 줄기를 가볍게 차단하였고 이어 허공에서는 요란한 폭발이 일어났다. 투 핸디드 소드의 주인은 순간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검을 보고 재빨리 땅에 박아두었던 검을 뽐아 올렸다. 시그니스는 거대한 검에 자신의 검이 막히는 것을 보고 뒤로 살짝 몸을 뺐다.
"굉장한 실력이군. 난 시그니스 유크리트다. 네 이름은 뭐지?"
시그니스가 소년을 보며 물었다. 소년은 시그니스를 보며 말했다.
"아카인... 아카인 바즈다."
"바즈 시 대표팀인가? 귀족 나부랭이 치고는 꽤 하는 데?"
"너도 귀족이잖아."
동민이 시그니스의 옆에 서며 말했다. 시그니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헤. 헤. 그런가? 아무튼 넌 빠져라. 저 녀석은 내가 상대할꺼야."
"... 이번만 넘어가주마."
"쳇, 크게 선심 쓰는 태도잖아."
시그니스는 그렇게 말하며 아카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황당한 표정으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카인은 달려오는 시그니스를 막을 준비를 하며 뒤에 서 있는 소년과 소녀에게 소리쳤다.
"하이넬! 정령 마법으로 저 뒤에 마법사하고 정령사 좀 견제해라! 아카드! 넌 저 라운 파이터를 맡아!"
아카인이 소리치자 아카드라는 소년이 동민을 향해 뛰어갔고 하이넬이라는 소녀는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아카인은 시그니스를 향해 검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붕격崩擊!"
붕. 붕. 붕.
요란한 파공성이 일어나며 시그니스를 향해 투 핸디드 소드가 떨어져 내렸가. 시그니스는 재빨리 투 핸디드 소드를 피하며 아카인에게 파고들어갔다. 순간 시그니스는 검을 휘두르며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뇌격승천雷擊昇天...."
시그니스의 중얼거림과 함께 검은 수 많은 잔상을 남기며 휘둘러졌다. 아카인은 소용돌이 치듯 날아드는 검격을 간신히 막아내며 주춤 물렀다. 그 때 시그니스가 착지하며 외쳤다.
"풍風!"
그 외침과 함께 검기가 터져나와 사방을 휩쓸었다. 아카인은 검을 세워 공격을 막아내며 외쳤다.
"괴,굉장하군."
관중들은 그 장면을 보며 넋을 잃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창 치열한 접전을 펼치던 다른 선수들 역시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다시 파공성이 일어났다. 아카인이 과감하게 시그니스에게로 달려든 것이었다.
"검식劍式, 천뢰붕격天雷鵬擊!"
거대한 뇌격이 투 핸디드 소드가 떨어지는 자리로 떨어졌다. 그 장면을 보던 샨이 놀라서 외쳤다.
"이런! 7클래스 기가 라이트닝 급이다! 시그니스! 피해!"
시그니스가 샨의 외침을 들었을 때는 이미 뇌격에 적중 당한 뒤였다. 시그니스는 여기저기 그을린 체로 몸을 간신히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나... 시그니스는 웃고 있었다.
"일났군."
동민은 아카드의 주먹을 막으며 중얼거렸다. 샨과 호상은 시그니스를 보며 군침을 꿀꺽 삼켰다.
"헤. 헤. 헤. 많이 아프네. 난 빚지고는 못 사는 데... 너도 아프게 해 줄게. 기다려."
시그니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카인을 향해 다가갔다. 아카인은 순간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시그니스가 말했다.
"노망난 마법사 선생이 가르쳐준 수련법의 힘을 가르쳐주지. 그리고... 이 것이 유크리트 가문의 가전 검술, '가르드' 다!"
시그니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거세게 검을 휘둘렀다. 엄청난 양의 검풍이 일어나 사방을 휩쓸었다.
"노망난 마법사 선생이 가르쳐준 수련법의 힘을 가르쳐주지. 그리고... 이 것이 유크리트 가문의 가전 검술, '가르드' 다!"
관중석의 최상석, 귀족들 중에서도 상석에 앉아 있던 윤기는 입에 머금었던 와인을 그대로 뿜어내었다. 윤기는 시그니스를 보며 중얼거렸다.
"저 자식... 감히 나를 노망난 마법사라고 했겠다. 으드득."
윤기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옆 자리의 정두가 윤기를 보며 말했다.
"네가 저 녀석들을 저렇게 방치한 대가라고 생각해라. 노. 망. 난. 마. 법. 사. 양. 반."
윤기는 이를 갈며 말했다.
"지금 너 잡아왔다고 복수하는 거냐?"
"당연하지."
정두는 그렇게 말하고는 여유 있게 와인을 들이켰다. 윤기는 정두를 보며 씁쓸한 표정으로 와인을 마셨다. 윤기는 와인을 한 모금 넘기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시그니스 녀석 무리하는 데."
윤기는 경기장을 주시하고 있었다. 시그니스 주위로 거대한 검풍이 일어나 아카인과 시그니스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경기장 밖으로 날아가버리고 있었다. 시그니스는 그 검풍을 일으킨 상태로 아카인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굉장하군. 은월성단으로도 저렇게는 못하는 데..."
광채가 탄성을 내질렀다. 그 옆에 앉은 클레이 바즈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손자 놈, 오늘 완전히 깨지는 구만. 쩝. 광채 자네는 꼭 기술이 아니라도 검풍이 일어나지 않나?"
"할 말 없네요."
광채는 그렇게 말하며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 편 최상석, 귀족들 틈에서 최하석에 자리잡고 있던 유크리트 남작은 속을 태우며 홀로 중얼거렸다.
"시그니스... 제발 적당히 해라. 상대는 바즈 백작가 사람이란 말이다. 네 아비 목이 왔다갔다 한단 말이다."
천하의 시르크 가문이 있는 데 쓸 때 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 유크리트 남작이었다.
"저런!"
클레이 바즈는 순간 탄성을 내질렀다. 자신의 손자, 아카인이 시그니스의 검풍에 휘말려 공중에 떠올라 경기장 밖으로 튕겨나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너무나도 간단하게... 시그니스에 의해서 일어나 검풍이 천천히 가라앉자 경기장 밖에서 황당한 표정으로 서 있던 심판이 외쳤다.
"푸,푸름시 마주교 대표팀 스,승리!"
"헤. 헤. 이겼다."
시그니스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털썩 쓸어졌다. 클레이 바즈가 흥분해서 외쳤다.
"굉장해. 굉장해. 저 나이에 저런 위력의 검술을 아무렇지도 않게 휘둘러대다니. 이봐, 유크리트 남작!"
"예... 클레이 바즈 장군."
유크리트 남작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슬슬 불똥이 자신에게 튈 차례가 된 것이라 믿고 있었다. 적어도 유크리트 남작, 그 스스로는.
"굉장하군. 가르드라고 했던가? 가전 검술이라고 하던데... 상당히 뛰어나군. 자랑스럽겠구만. 저런 아들 놈을 둬서. 허. 허."
"예? 아, 매우 자랑스럽습니다. 감사합니다."
유크리트 남작은 십년감수했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클레이는 피식 웃으면 광채에게 말했다.
"자네는 어떻게 보는 가? 저 가르드라는 검술."
"마검황의 광염 소나타와 같은 유형이군요. 강한 파괴력을 중요시하는 검기 위주의 살상검이라고 할까요? 아, 물론 실제 광염 소나타의 쾌검이 보여주는 파괴력은 가르드의 수십배를 넘어가겠지만 가르드라는 검술만으로도 상당히 난해하고 강해보이는 군요."
"자네 성월검초식과 비교하면?"
"성월검초식은 제 검술의 가장 기본이자 최상위의 검초식이지요. 꼭 비교를 해야 한다면 가르드라는 검술은 쉽게 깰 수 있을 겁니다. 성월검초식은 태크닉 위주, 특히 상승 초식인 은월검초식이라면 가볍게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광염 소나타와는 달리 파괴력에 치중하는 바람에 빈틈이 많거든요. 힘으로 밀어붙여도 적월검초식이라면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겁니다."
"오, 그렇게 들으니 광염 소나타 보다 더 뛰어나 보이는 군. 그 성월검초식이..."
"글쎄요. 정식으로 대결한 적이 근래에는 없어서..."
"하 하 핫. 참아 주시게나. 소드 엠퍼러 둘이서 제대로 된 대결을 펼쳤다가는 남아나는 것이 없을 것이 아닌가!"
광채는 미소 짓는 것으로 대신 답했다. 실제로도... 이현진과 자신이 정식으로 싸운다면 세레네즈 쯤은 금방 지도에서 사라질 것이다. 광염 소나타의 파괴력과 성월검초식의 화려한 기술과 정확성, 둘 검이 만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광채는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뭐, 자신이 현진을 이기고 크게 웃고 있는 자아도취적인 결말로 끝날 생각이기는 했지만.
"훌륭했다. 가르드란 검술... 그리고 확실히 아프군."
아카인이 샨에게 부축을 받고 있는 시그니스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시그니스는 그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큭... 나는 빚지고는 못산다고 했잖아. 이기니까 기분 죽이는 데."
아카인은 시그니스의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동민이 다가와 시그니스의 어깨를 툭 툭 치며 아카인에게 말했다.
"원래 이런 놈이니까 이해해라... 멋진 경기였다. 아카인 바즈."
"으악! 이동민 이 망할 자식아. 아프잖아!"
시그니스가 엄살을 부리며 소리쳤다. 아카인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상당히 재밌는 녀석이야. 시그니스, 넌."
"욕이냐? 칭찬이냐?"
시그니스가 말했다. 그 때 불쑥 아카드가 나서며 말했다.
"훗, 욕일껄? 우리 형은 욕하는 게 전문이거든. 욕쟁이 할아버지를 둔 덕분인 것 같지만."
"아. 카. 드. 바. 즈."
"아예... 제가 어떻게 존엄하신 형님의 말씀을 어기겠습니까? 콱 찌그러져 있겠습니다."
아카드가 웃으며 말했다. 하이넬이라는 정령마법사가 나서며 아카인에게 말했다.
"아카인 오빠는 맨날 아카드만 구박하네?"
"하이넬, 너마저!"
아카인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서희는 그 아이들 넘어, 바즈 시 마주교 선생을 향해 말했다.
"말이 없으시네요?"
"아이들이 잘 하니까."
"전 네프리아 리세프론이라고 합니다. 그 쪽 성함을 여쭈어봐도 될까요?"
"훗, 에드워드 녀석 딸이셨군. 난 저 아카인, 아카드 두 아이의 아버지인 세루인 바즈라고 하지. 친구 녀석 딸을 이런 식으로 보게 될 줄이야. 후 훗."
서희는 놀라 소리쳤다.
"영지에서 잘 나오지 않아 사교계에서 따돌림 당한다는 소문까지 있다던 세루인 바즈? 아버지가 매일 궁상떠는 놈이라던?!"
"하 하 핫. 그 망아지 놈이 그랬단 말이지?"
세루인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한편 최상석에서 그 장면을 보고 있던 보라가 윤기를 보며 말했다.
"네 제자들... 꽤 괜찮은 애들이네? 경기 승패를 떠나서 친구가 된다는 것이 저런 것인가?"
"글쎄. 제자들이 어디있는 데? 난 스승을 노망난 마법사라고 부르는 제자들 둔 적 없어."
윤기가 이를 갈며 말했다. 의외로 사소한 것에 목숨거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마의 칸, 브리칸 시르크 공작이었다.
"다들 만만치 않아 보이는 데... 흠."
본선 1차전, 총 4회전 경기를 모두 마친 뒤, 윤기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본선 2차전, 즉 준결승 전에 오른 4개 팀은 푸름시 마주교 대표, 리프시 마주교 대표, 왕실아카데미 귀족부 대표, 왕실아카데미 용병부 대표였다. 특히 왕실아카데미 귀족부 대표팀은 각 가문의 가전 검술이나 창작 마법들로 압도적인 승리를 보여 주었다. 윤기는 은근히 제자들이 걱정되고 있었다.
"훗, '스승을 노망난 마법사라고 부른 제자는 둔 적 없다.'라고 말하지 않았었나? 걱정되나 보네?"
보라가 윤기의 속을 긁으며 말했다. 윤기는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공작이라는 이 짜증나는 감투만 안 뒤집어쓰고 있었어도 내가 나가서 직접 도와줘야 되는 건데... 후..."
윤기가 그렇게 중얼거릴 때 쯤, 본선 2차전, 1회전, 왕실아카데미 귀족부와 용병부의 대결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결승전에서 왕실아카데미 소속의 두 팀이 맞붙을 지도 모르는 상황을 방지하자는 뜻에서 배정된 대진표였다.
"흠... 생각보다 빨리 끝나겠는 걸."
윤기는 심판의 경기 시작 선언을 기다리며 각자 전투 준비를 하고 있는 두 팀을 보며 중얼거렸다. 용병부의 학생들은 실전 위주의 수련을 한 듯 좀 어수선한 자세를 잡고 있었다. 총 5명으로 구성된 팀이었다. 사제나 마법사, 정령사를 배제한 전사만으로 구성된 파티로서 무기도 각자 개성있는 무기를 선택하고 있어 헛점이 많이 들어나 보였다. 반면, 귀족부는 귀족의 자제들답게 깔끔한 자세로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카오스의 대사제 중 아르네 사제의 손녀라는 견습 사제 아르민과 검가, 크리스찬 후작가의 가전 검술의 소유자 카스트 크리스찬, 현 대궁정 마법사, 카알 네르온 백작의 아들, 네루파 네르온으로 이루어진 파티... 결과는 뻔했다.
"[썬더 프레아!]"
윤기의 예상의 한치의 오차없이 네루파가 날리 거대한 전격이 견습 용병들을 흩어놓았고 아르민의 신성 마법과 카스트의 검기가 그들을 적중시킴으로서 경기는 싱겁게 끝나버렸다.
"적어도 4클레스 마스터. 샨 녀석보다는 못해도 어진간해서는 천재소리 듣겠군. 카스트 저 건방진 놈은 시그니스보다 위인가? 흠... 아르민의 신성 마법은 아직 위력을 잘 모르겠군."
"저 정도면 아마 샨의 공격마법하고 맞먹을 꺼야. 아르민이라는 아이도 굉장히 강한 편이야."
보라가 윤기의 말을 듣고 말했다. 윤기는 생각에 잠기며 중얼거렸다.
"옛날 우리에 비하면 다들 너무 약하지 잖아. 뭐..."
"지금부터 본선 2차전, 2회전을 시작하겠습니다."
심판의 외침이 경기장에 울렸다. 경기장으로 양 팀이 들어서자 관중들의 환호성이 울렸다. 샨은 군침을 꿀꺽 삼키면서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샨은 그렇게 천천히 긴장을 풀며 속으로 천천히 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전투 중에 주문 외우며 캐스팅할 시간이란 없다고 봐야하기 때문이다. 샨은 천천히 자신의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무표정한 동민, 여전히 기분 좋은 웃음을 잔뜩 머금은 시그니스, 자신의 시선을 느끼고 미소 지어보이는 호상... 그리고 네프리아 리세프론, 강서희 누나.
샨은 전방을 주시하며 심판의 경기 시작 선언을 기다리고 있었다. 샨은 자신 만만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심판을 바라보았다.
"경기... 시작!"
심판의 외침과 함께 샨은 캐스팅 해 두었던 마법의 시동어를 외쳤다.
"가볍게 가지! 썬더 스톰!"
콰 콰 광.
샨의 외침과 함께 세 줄기 번개가 떨어져 내렸고 스파크가 일어나며 경기장을 뒤덮었다.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반대편의 한 소녀 마법사에게서 화염 줄기가 뻗어나왔다.
"베리어! 가랏, 체인 라이트닝! 썬더 프레아!"
샨의 외침과 함께 화염 줄기가 튕겨져나가며 빛줄기가 소녀를 향해 날아갔다. 그와 함께 위에서 거대한 뇌격이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소녀는 가볍게 실드로서 두 마법을 막아내었다.
한 편, 동민은 마이트라는 검사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은은한 검기와 라운 파이터 특유의 원소력은 호각을 이루고 있었다.
"대단시군요. 이동민이라고 했던가요?"
"마찬가지군. 마이트라고 했지?"
둘은 기분 좋은 미소를 교환하며 검과 팔을 맞대었다. 동민의 팔에는 전류가 휘감겨 전혀 상처가 나지 않고 있었다. 동민은 씩 웃으며 외쳤다.
"뇌룡폭투雷龍爆鬪!"
"이,이런!"
순간 동민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전력이 거세지면서 동민의 동작들이 마이트의 시야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마이트는 난타를 맞고 뒤로 물러섰고 동민은 천천히 난타를 멈추며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역시... 너무 힘들 기술이군."
"제 차례군요. 타앗!"
마이트는 기합성을 터트리며 동민에게 달려들었다. 동민은 양팔을 교차하여 그 공격을 막으며 중얼거렸다.
"귀찮군. 시그니스 그 녀석처럼..."
동민의 말의 주인공, 시그니스 유크리트는 패러딘 지망생으로 보이는 한 소년을 상대로 상당히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시그니스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제길... 왜 방어만 하냐고. 동민이 녀석처럼 화끈하게 밀어붙여보란 말이다. 재미없잖아..."
라고... 경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으으... 역시 이런 놈은 재미없다니까. 멸천섬격滅天閃擊!"
시그니스는 검을 내지르며 외쳤다. 패러딘 지망생은 아슬아슬하게 시그니스의 검을 피해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듯 했다. 하지만.
쾅.
폭발음이 들려오며 패러딘 지망생은 옆으로 튕겨나가버렸다. 시그니스는 씩하고 웃으며 말했다.
"헤. 헤. 보통 찌르기 하고는 차원이 달라서 말이야. 그런 식으로 피하면 안되지. 자. 멸천참滅天斬!"
시그니스는 검으로 패러딘 지망생을 내리베었다. 마이트가 그를 보며 외쳤다.
"아스히. 피해!"
패러딘 지망생, 아스히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시그니스의 공격을 피해내었다. 동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마이트를 향해 준격이 가득 실린 주먹을 내지르며 말했다.
"여유 있나 보군?"
"전혀!"
마이트는 그렇게 외치며 검을 세워 동민의 주먹을 막아내었다. 한편 호상은 한 소년을 상대로 고전하고 있었다. 바람의 상급 정령, 제드를 이용해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하고 있기는 했지만 상대 역시 그리 만만치 않은 듯 했다.
"이번건 좀 아플꺼야. 아마도."
소년은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서 무언거라를 꺼내 들었다. 검은 덩어리가 무슨 석탄같기도 했고 반짝 거리는 것을 보니 질 좋은 보석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럼 지상 최고의 연금술사, 카르너의 위력을 감상하시길! 블러드 익스프로젼!"
소년이 던진 그 묘한 검은 덩어리가 터지면서 붉은 액체가 튀어올랐고 이어 그 곳에서 화염이 치솟아올랐다. 카르너는 당황하며 제드로 화염을 막는 호상을 보며 말했다.
"쿠 흐 흐.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걸?"
"글쎄요. 아직 최후의 수단이 남아서 말이죠. 후훗. [물을 다스리는 존재여, 지금 세상에 나타나 나에게 힘을 빌려주소서. 정령왕, 아틀란트!]"
"저,정령왕?!"
보라가 놀라서 외쳤다. 윤기는 호상을 보며 중얼거렸다.
"인간이 정령왕을 소환하다라... 호상이 녀석, 정령술에는 천재라고 할 수 있군."
"도대체 네 제자들은 얼마나 괴물인거야?"
"글쎄. 아직 나도 잘 모르겠어. 샨은 예전의 나만큼은 되고 시그니스도 천재 검사라고 하기 부족함이 없지. 동민이 녀석의 주먹은 시그니스의 검과 맞먹는 편이고 호상이는 눈으로 보는 봐와 같지."
보라는 다시 경기장으로 눈을 돌렸다. 시그니스는 패러딘, 아스히를 데리고 장난치고 있었고 동민은 어느새 점점 마이트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샨은 소녀 마법사의 네 방위를 점하고 연속으로 라이트닝을 난사하고 있었으며 경기장에 모습을 들어낸 물의 정령왕, 아틀란트는 카르너를 기분 좋게 두들기고 있었다. 그 때.
"그랜드 크로스, 그랜드 스톰."
리프 시 마주교 대표팀의 선생으로 보이는 한 청년이 소리친 것이다. 땅이 갈라지고 돌덩어리들이 솟아올라 맹열이 회전하며 아틀란트를 공격하자 아틀란트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호상 역시 그와 동시에 지쳐 쓸어졌고 카르너는 아틀란트가 사라진 자리에서 간신히 정신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애? 정령왕의 힘이 저렇게 약했어?"
"아니. 물의 정령왕이 제대로 된 공격을 할 수 있다면 씨어 브레이크를 초월하는 공격도 할 수 있어. 하지만 물질계에 소환된 정령왕은 소환자의 힘에 비례하거든. 아무래도 호상이 녀석이 약한 탓일 꺼야."
윤기는 그렇게 말하고 서희 쪽으로 시선들 돌렸다.
"한가지 덫붙이자면 서희 누나 열 받았어."
윤기의 말과 동시에 서희의 고함소리가 경기장에 울려퍼졌다.
"아르젠! 선생들은 함부로 경기에 끼어들루 수 없다는 걸 모르거야!"
"미안. 리아 누나! 하지만 난 내 학생이 다치는 걸 볼 수 없어... 그리고 무엇보다 리프 시를 떠나서 다른 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는 누나를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 가랏! 플레임 캐논, 이주케이션!"
아르젠의 외침과 동시에 거대한 화염 줄기가 서희를 향해 뻗어나갔다. 그 때 였다. 어떤 막에 의해 그의 화염 줄기가 막힌 것은.
"후훗. 지금은 경기 중입니다. 사적인 감정은 나중에 해결하시지요. 아르젠 선생."
샨은 실드를 펼쳐 서희의 앞을 막아 선 체 말했다. 아르젠이 발끈하여 소리쳤다.
"닥쳐! 너같은 녀석이 낄 자리가 아니다!"
"... 서희 누나는... 레이디 네프리앙 리세프론은 제가 지켜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식의 말 따위를 들을 이유는 없다고 보는 데요."
"뭐야! 건방지게! 프레임 블레스터!"
아르젠의 외침과 함께 사방에서 화염 기둥이 솟아올랐다. 샨은 살기를 피워올리며 소리쳤다.
"그렇게 나오시면 저는 막아야지요!"
샨은 자신과 서희를 포위하고 밀려오는 화염 기둥을 보며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화염의 의지를 꺽어라. 태고의 어둠 속에서 깨어나 이제 내 앞에 모습을 들어낼 빙결의 숨결이어! 가랏! 콜드 브레싱!]"
샨의 외침과 함께 샨을 중심으로 형성된 냉기가 프레임 블레스터의 화염 기둥을 몰아내고 있었다. 아무런 아티펙트 없이 주문에만 의존하여 써서 일까? 샨의 이마에는 식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때 였다.
"화염을 찢어라. 뇌격이어! 뇌룡강림雷龍降臨! 파천뢰破天雷!"
동민의 외침이 들려오며 강한 뇌격이 프레임 블레스터를 가격했고 포위망이 뚫리며 샨의 마법이 사방으로 터져나가 화염 기둥을 소멸시켜버렸다. 동민은 지친 얼굴로 샨을 보며 말했다.
"넌 정말 마음에 안드는 범생이지만, 네가 쓸어져 버리면 우리가 지잖아?"
"뒤에 조심!"
샨의 외침과 함께 동민은 오른팔을 휘둘렀다. 마이트가 동민의 오른팔에 막힌 검에 더욱 힘을 주며 외쳤다.
"방심은 금물입니다."
"쳇, 금방 뻗을 것 같은 시덥지 않은 녀석인줄 알았는 데. 뇌룡강림에 위력을 보여주지."
동민은 아직도 자신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 뇌력을 더욱 끓어올리며 말했다. 동민은 뇌룡강림 상태에서 뇌룡폭투로 마이트를 난타하기 시작했다. 샨은 마이트가 동민에 의해 물러나는 모습을 보며 조금은 안도했다.
"이번에는 플레임 트위스터!"
아르젠의 외침이 어김없이 샨의 귓전을 때렸다. 샨은 한숨을 내쉬며 허공에 손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샨의 시야는 서서히 모습을 들어내기 시작한 거대한 화염폭품이 닿아 있었다.
"[잊혀진 대지의 원한 서린 차가운 뼈가루여! 그대의 분노로 내 앞을 가루 막는 화염을 멸하라! 스컬 블리자드!]"
샨과 서희를 집어삼킬 듯 다가오던 화염폭풍 새하얀 가루를 머금은 냉기 폭풍에 휩쓸려 사라졌다. 아르젠은 샨을 보며 말했다.
"어린 나이에 제법이군. 과연 사람들이 브리칸 시르크 이후 처음 나온 천재 마법사라고 할 만해. 굉장해. 하지만 날 방해하기 때문에 난 자네를 쓰러뜨려야 겠군."
"저도 쉽게 쓰러져드릴 수는 없을 것 같군요. 저도 나름대로 마법사라로서의 긍지라는 것이 있으니까요. 당신이 아무리 13클레스 마스터라도!"
흠칫.
아르젠은 자신의 경지를 눈치 챈 샨을 보며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과연 천재라 속으로 경탄을 마지 않고 있었다. 샨은 천천히 캐스팅을 시작하며 말했다.
"당신과 서희 누나, 아니 네프리아 리세프론 간의 일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관중석에서 우리를 보고 있을 그 누군가 때문에 전 당신에게서 쉽게 물러설 수 없습니다. 그 것은 제 이름이 샤느트 시르크이기 때문입니다. 전 시르크라는 이름은 준 그 분 때문에 쉽게 물러서거나 좌절해서 안되는 겁니다. 그럼 받아보십시오. 시르크 가문이 자랑하는 대륙 최강의 마법을!"
샨의 외침에 관중석의 사람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아르젠 역시 놀라는 한 편 긴장하며 샨을 바라보고 있었다. 샨의 주위로 거센 돌풍과 거대한 마나 유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왠지 불안해진 서희가 샨을 향해 외쳤다.
"그만둬 샨!"
"이 것이 전설적인 바람의 마법! 싸이클론 샤우트입니다! [바람조차 가르는 태고의 바람이어! 나 그대를 내 안에 담고 나를 그대 안에 담노라! 억겁의 세월 속에서도 변치 않을 존재. 그대의 힘을 보여라! 싸이클론 샤우트!]"
샨의 주문이 끝나자 샨의 주위에서 일어나던 거센 돌풍이 아르젠을 덥쳤다. 아르젠과 샨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그 돌풍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모두 경기장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윤기는 그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쳇, 샨이 나보다 더 어린 나이에 싸이클론 샤우트를 완성하게 되는 군. 저 녀석 정말 천재잖아."
"꼭 어릴 때 누구누구 같다."
보라가 윤기를 보며 말했다. 사이칸트 시르크는 황당한 표정으로 윤기에게 말했다.
"누가 멋대로 가전마법을 전수하라고 했냐?"
"제 마음입니다. 아버지. 어차피 제 양자라구요."
윤기는 그렇게 말하고 경기장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일어나기 시작한 바람의 칼날이 사방에서 일어나 아르젠을 향해 날아갔다. 아르젠은 10클래스 서피리어 실드를 시전하며 중얼거렸다.
"이 것이 대륙 최강의 반열에 오른 네 가지 마법 중 하나의 위력이란 말인가. 제길. 나도 무리를 해야 겠군. [일곱 가지 모습을 가진 빛이어. 그대가 발하는 힘을 나에게 빌려주소서! 그랜드 레인보우!]
아르젠의 외침과 함께 허공에서 생겨난 무지개빛 고리가 떨어져내렸다. 샨은 그 고리를 느끼면서도 싸이클론 샤우트를 멈추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결국 그랜드 레인보우는 지상으로 낙하하여 샨에게 적중되었다.
"안돼!"
서희가 비명을 질렀다. 윤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샨의 이름 불렀다.
"샤느트 시르크!"
윤기는 연기가 걷히며 쓰러져 있는 샨이 들어나는 것을 보았다. 윤기는 황제를 향해 외쳤다.
"황제 폐하. 죄송한 말씀이지만 제 제자들을 위해 나서야 할 것 같습니다. 레이디 네프리아에게 맡겨 놓는 것이 그다지 옳다고 생각되지도 않고 말입니다."
"그렇게 하시게나. 브리칸 시르크 공작."
"칸. 성질대로 하면 안된다. 난 이 경기장이 날아가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아."
"이하동문, 내 팔 다쳤을 때처럼 날뛰면 네 얼굴 안 본다."
윤기는 보라와 아버지를 향해 씩 웃으어보이며 관중석에서 경기장으로 그대로 뛰어내렸다. 윤기는 레비테이션 마법으로 여유있게 샨과 아르젠 사이에 착지했다.
"후... 노망난 마법사 선생 등장. 그 동안 대리를 서 주신 서희 누나에게 감사드리며..."
윤기는 아르젠을 쏘아보며 말했다.
"모두가 그대에게 진 빚은 내가 갚도록하지."
"당신 누구지?"
"이 아이들의 진짜 스승, 대 바일론 제국의 거룩한 망나니, 브리칸 시르크 공작이다."
윤기의 말을 듣고 아르젠은 잠깐 움찔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윤기는 아르젠을 보며 말했다.
"진정한 싸이클론 샤우트가 어떤 것인지 궁금하지 않나?"
윤기는 그렇게 말하며 샨을 일으켜 세워 던지듯 경기장 밖으로 보내었다. 아르젠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물론, 대륙 최강 마법에 호기심을 느낍니다. 마법사로서 당연한 호기심이지 않습니까? 공작 전하."
"크흣. 다들 날 망나니라 부르는 데 공작이라니. 웃기지도 않는 군. 그냥 편하게 부르시게. 그럼 간다."
윤기는 그렇게 말하고는 천천히 마나를 인도했다. 윤기 주위에는 샨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마나가 유동하기 시작했다. 얼마지나지 않아 녹색 빛무리로 이루어진 마법진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사이칸트는 그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일났군. 이보게 대궁정마법사, 네르온 백작. 13클레스 그랜티스실드를 대단위로. 관중석을 다 덮을 정도로 준비해 두시게. 용언 마법 규묘의 대단위 극성 사이클론 샤우트의 위력은 잘못하면 세레네즈를 날려버릴 정도니까. 레비던트 후작, 헬던트 후작. 그대들도 준비해주시게나. 지상 최고의 마법사의 마법에는 그만한 대우를 해줘야 하는 법일세. 어서 빨리!"
"지상 최고의 마법사는 당신이지 않습니까?"
네르온 백작이 의문을 표했다. 사이칸트 시르크는 그랜티스트 실드를 캐스팅하며 외쳤다.
"보면 알거 아닌가!"
한편 아르젠은 거대한 마나 유동은 느끼며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쓸 수 최고의 그랜티스트 실드를 준비하고 있었다. 윤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 것이 진정한 싸이클론 샤우트의 위력이다. [시공을 거슬러 태고에서 현제로 억겁의 세월을 거슬러오른 바람의 함성이어. 바람조차 가름의 외침의 이 땅에 선사하라! 극성, 싸이클론 샤우트!]"
윤기의 외침과 함께 경기장은 거대한 돌풍에 휩싸였다. 장외에 있던 사람들은 서둘러 사이칸트와 네르온 백작이 펼친 실드의 범위로 몸을 피했다. 거대한 돌풍은 끝없이 솟아올라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거대한 폭풍은 사람들에게는 경탄과 공포를 불러왔다. 네프칼 2세, 칼은 그 기둥을 보며 사이칸트에게 말했다.
"네가 루나가 다쳤다고 설치 때가 생각나는 군. 아니 그 때는 이 것보다 더했지. 수도의 절반을 날려버리는 놈이 어딨냐고?"
"황제 폐하... 체통을 지키시지요."
이를 갈려 말하는 사이칸트였다. 점차 돌풍은 사그라들고 초토화된 경기장이 사람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서 있는 아르젠과 미소 짓고 있는 윤기 마주 서 있었다.
"정신 나간 녀석! 용언 마법 2급 짜리 싸이클론 샤우트를 그렇게 쓰면 재밌냐?"
사이칸트가 윤기를 향해 달려오며 소리쳤다. 윤기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4급 짜리가 더 재밌어요. 짜릿하잖아요?"
"... 너 내 아들 맞냐?"
"당연히 천하의 바람의 칸의 아들이니까 이런 거죠."
윤기의 말에 사이칸트는 할 말 없다는 듯 떫은 표정으로 뒤로 물러섰다. 아르젠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윤기는 그를 보며 말했다.
"구경 잘 했는 가? 아르젠?"
"이, 이건..."
아르젠은 윤기를 보며 중얼거렸다. 사이칸트가 겁에 질린 그를 보며 도저히 못봐주겠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혼돈 속의 잠든 영혼이어! 깨어라!]"
용언 마법이 울리며 아르젠의 눈동자에는 사라졌던 눈동자가 돌아왔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아르젠을 보며 윤기가 말했다.
"자네의 마법에는 감정이 실렸어. 검은 모르겠지만 마법이란 자연, 그 자체를 재배열하고 다스리는 일이지. 감정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자연의 이치 속에 감정은 없거든. 감정은 자연이 만들어낸 생명체가 가진 것이야. 감정은 말로 해결하라고. 결승전에는 내가 나설 꺼니까. 알겠나?"
아르젠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충고 잘 들었습니다... 대륙 영웅이라는 이름, 허명은 아니었군요."
아르젠은 그렇게 말하며 경기장을 벗어나 서희에게로 향했다. 그 때 였다. 아르젠은 누군가 자신의 팔을 잡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아르젠이 고개를 돌리자 쓰러져 있던 샨이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우고서 자신의 팔을 잡고 있었다.
"그 분 역시 나의 스승... 함부로 한다면 역시 가만 있지 않겠습니다."
아르젠은 피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보이고는 서희에게로 걸어갔다. 사이칸트 시르크가 그 장면을 보며 중얼거렸다.
"과연 이 몸의 손자다운 태도야. 암."
윤기는 그의 말을 들으며 혼자 툴 툴 거렸다.
"양자 들인다고 뭐라고 하실 때는 언제고..."
"아르젠... 네가 그러는 걸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서희는 아르젠을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경기장 근처의 찻집, 아르젠은 찻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단지 순간적으로 실수한거예요. 공작 전하께서 일깨워주신 거지요. 전 선생으로서도, 마법사로서도 역부족이고... 또."
아르젠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사랑을 할 자격도 잃어버렸군요."
"아르젠, 넌..."
"제가 리아 누나를 왜 좋아했는 지? 왜 조금전에 그렇게 이성을 잃었는 지 아세요?"
아르젠이 서희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서희가 뭐라고 대답을 하지 못하자 아르젠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전 항상 밝게 웃는 누나가 좋았어요. 경기 중에 누나는 웃고 있었죠. 전 우리를, 리프시의 마주교를 떠난 후 누나가 웃고 있다는 게 싫었어요. 항상 우리 곁에 있을 때만 웃어야 한다는 이기심? 뭐 그런 거였겠지요. 무엇보다 누나가 저에게 인상을 쓰며 소리치는 모습에 화가 나 버렸어요. 제가... 제가 잘못하거예요. 제가 바보예요."
"아르젠..."
"훗, 그 녀석들은 괜찮은 녀석들이더군요. 시그니스라는 아이, 동민이라는 녀석, 호상이라는 아이... 그리고 그 샤느트 시르크. 누굴 닮았는 지 고집도 세고 의지도 강하고 천재적인 솜씨까지... 그리고 무엇보다 성격이 마음에 들더군요."
"아마... 아마... 윤기를 닮았을 꺼야."
서희가 가만히 중얼거렸다. 아르젠이 윤기가 누구냐는 표정으로 서희를 바라보았다. 서희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언제나 굽힘이없어. 막힐 지라도 꺽김이나 휘어감도 없지. 한 줄기의 빛처럼 밝고, 또 강해. 그러면서 자기 희생적이지. 자기만 잘난 줄 아는 짜증나고 싸가지 없는 놈이기도 하지. 지상 최고의 마법사이고 대륙 전쟁의 영웅이며 또 하나의 전설을 만들어가는 사마의 칸, 그리고 현 바일론 제국의 브리칸 시르크 공작... 용언 주술 4급 마스터 5급 익스퍼트의 괴물이 홍윤기라는 자의 정체야."
아르젠은 탄성을 내질렀다. 거룩한 망나니라 불리우는 브리칸 시르크가 사실은 인간의 한계를 돌파한 지상 최고의 마법사, 사마의 칸이라니! 아르젠은 놀란 표정으로 서희를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마족과 일전을 준비중이야. 아마 조만간에 역사서에는 새로운 전설이 쓰여지게 될껄? 마검황과 은월검성이 검을 들고 영천현인의 오묘한 주술 아래 진리가 열리고 사마의 칸의 마법의 이치 앞에 진실이 비추어지며 베일루스 후작의 손짓 아래 마족들이 하나둘 쓸어지고 하이시커 공작의 술법 아래 마족들은 영원한 방황의 길로 가게 되겠지. 대륙 전쟁 때와는 차원이 다를 꺼야."
아르젠은 그녀의 말을 듣고 중얼거렸다.
"왠지 이 엄청난 역사의 현장에 서 있다는 것이, 그 영웅 중 한 사람을 만났다는 것이 커다란 행운으로 느껴지는 군요."
"그럴꺼야. 앗! 좀 있으면 결승전 시작인데... 같이 보러가자! 빨랑 텔레포트 좀 해봐!"
"여전하네요. 누나는."
아르젠은 피식 웃으며 마법진을 생성시켰다. 그는 테이블에 찻값은 내려놓고 시동어를 외쳤다.
"텔레포트!"
"지금부터 황실 아카데미 마법 검술 대회의 결승전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양팀의 소개를 간략하겠습니다."
심판이 보이리스라는 특이한 목소리 증폭 보석을 들고 말하고 있었다. 관중들은 막 경기장으로 들어서는 양팀을 보며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먼저 황실 아카데미, 귀족부의 학생들입니다. 카오스의 사제, 아르민, 검사, 카스트 크리스찬, 마법사 네루파 네르온입니다. 카샷 제피노스 선생께서 지도하고 계십니다."
관중들의 환호성 소리가 약간 줄어들었다. 귀족들로 이루어진 파티다 보니 역시 반응이 주는 것은 당연한지 모르겠다.
"다음은 이번 대회에 처음 대표를 보내온 먼 북쪽 끝의 푸름 시의 학생들입니다. 라운 파이터, 이동민, 검사, 시그니스 유크리트, 마법사, 샤느트 시르크, 정령사, 유호상입니다. 브리칸 시르크 공작 전하께서 친히 지도를 맡으셨습니다."
관중들의 환호성 소리가 터져나왔다. 이 쪽도 귀족들이 섞여있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귀족부 녀석들보다는 호응도가 좋았다. 제피노스 선생은 은근히 윤기를 견제하며 뒤로 물러섰다. 윤기는 씩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아이들이 서로를 마주하고 준비 자세를 잡았다.
"경기 시작!"
심판이 소리치자 시그니스가 무서운 속도로 카스트에게로 쏘아져 나갔다. 카스트는 그를 보며 말했다.
"알고보니 푸름시의 그 꼬맹이군. 이런 걸... 악연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닥치고 내 공격이나 받아라. 가르드 인스톨. 가르드 소드."
시그니스의 주위에 거센 바람이 일어나며 시그니스의 움직임이 놀라울 정도로 빨라지고 있었다. 이른 바 가르드 인스톨! 카스트는 무작정 마구잡이식으로 난타해 들어오는 시그니스의 검을 잘라버릴 심산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카스트의 검은 시그니스의 검에 부딪치지도 못하고 튕기져 나가버렸다. 시그니스의 검 주위에 검풍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르드 소드였다.
"이제 초식이라는 걸 써 주지. 폭풍... 증오의 폭풍!"
시그니스의 주위에 또 다시 거대한 검풍이 일어났다. 본선 첫 경기에서 아카인을 날려버린 그 기술이었다. 하지만 카스트는 아카인과는 달리 너무도 가볍게 검기를 분쇄해버렸다.
"겨우... 겨우 이 정도냐?"
"재밌군. 그래... 난 강한 녀석이 좋아."
시그니스는 그렇게 말하며 검을 꽉 쥐었다. 그 때 동민이 훌쩍 카스트 뒤에서 모습을 들어내었다.
"뇌룡강림, 뇌룡폭투!"
카스트는 갑작스러운 난타를 어찌하지 못하고 그대로 받아내어버렸다. 시그니스는 그 틈을 노려서 검을 날렸다. 카스트는 가볍게 시그니스의 공격을 받아내며 말했다.
"비겁하군..."
"비겁한 놈은 비겁하게 상대하는 거야."
"오랜만에 바른 말 하는 군. 시그니스."
"이동민... 이 자식 패고 나면 너부터 요리해주마."
"기다리던 바다."
동민과 시그니스는 그렇게 말하며 카스트에게 달려들었다. 둘의 무시무신한 난타로 카스트의 혼이 빠질 지경일 무렵. 샨은 네루파라는 녀석을 마법으로 쉽게 요리하고 있었다.
"[천상의 뇌격! 썬더 스트라이크!]"
"실드. 체인 라이트닝, 이주케이션!"
주문을 외우는 네루파... 주문 생략하고 두가지 마법을 사용하는 샨. 모른 사람이 봐도 실력 차이는 분명한 것이었다. 네루파가 체인 라이트닝에 적중당하는 장면을 보고 있던 샨은 갑자기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빛줄기를 느끼고 실드를 치려고 있다.
"아틀란트! 저걸 막아줘!"
호상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윤기 옆에 서서 처음부터 물의 정령왕, 아틀란트로 맹공을 펼치고 있는 호상이었다. 사제, 아르민이 쏘아낸 신성 마법은 물의 정령왕에 의해 박살이 나버렸다. 샨은 호상에게 슬며시 미소 지어 보이고는 천천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모두 조심! 대단위 공격주문이다! [천지를 흔들어라. 천상의 뇌격이어! 그대의 폭풍이 대지를 뒤엎을 지어다! 썬더 스톰, 이주케이션!]"
샨의 최고 클래스 범위인 6클레스 급 썬더 스톰에 5클레스 급 증폭 마법, 이주케이션이 뒤섞인 빛줄기들이 경기장을 뒤덮었다. 사방에서 스파크가 튀겼고 뇌격 폭풍이라는 이름처럼 주변을 뇌격이 휘감고 있었다. 윤기는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어째... 조금전 경기보다 시시하다는 생각이 드는 데?"
아틀란트에게 뻗어버린 아르민 사제, 실신해 버린 네루파... 그리고 장외패 당하기 딱 좋은 위치에서 시그니스와 동민의 난타를 먹고 있는 카스트... 결승전은 상당히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경기장 한 가운데.
모든 귀족들과 황실 일족이 모여 있는 장소에서 시상식이 열렸다. 시그니스와 동민, 샨과 호상은 묘한 기분을 느끼며 앞으로 나섰다.
"폐하, 이번 황실 아카데미, 마법검술대회의 우승은 푸름시 마주교 팀입니다. 상금으로 10만 소르를 지급하며... 본래 아이들의 선생에게는 궁정 마법사의 자리, 혹은 황실 기사단의 단원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황실 아카데미 원장이 네프칼 2세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황제는 미소지어보이며 푸름시 마주교 대표를 바라보았다. 아직 땀투성이인 동민과 시그니스, 정령왕 소환으로 인해 지쳐버린 호상은 샨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황제가 말했다.
"자네들 같은 젊은 이들이 있다는 것은 나라의 복일세. 자 가까이 오게."
황제가 말하자 아이들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황제가 눈을 찡긋하며 그들에게만 속삭였다.
"마음에 안드는 귀족 놈 자제들을 날려버린 건 통쾌했네. 큭 큭 큭."
그들은 황제의 말에 황당한 표정을 교환하다가 피식 웃으버렸다. 황실 아카데미 원장은 샨에게 10만 소르와 우승컵을 건내었다. 샨이 앞으로 나서서 관중석을 향해 우승컵을 들어보이자 엄청난 환호성이 경기장을 가득메웠다.
"폐하, 신, 브리칸 시르크. 본 가문의 양자를 소개하겠습니다."
윤기가 황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윤기에게로 모였다. 샨이 윤기 옆에 무릎 꿇으며 말했다.
"샤느트 시르크입니다. 폐하."
"제 양자입니다. 폐하."
황제는 둘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시르크 가문은 양자 들이는 것이 전통인가 보구려. 공작의 아버지도 양자로 들어갔으니까. 대단한 가문이오! 샤느트 시르크는 먼 훗날 황태자가 황제가 되었을 때 대륙 최고의 마법사로 성장해 공작으로서 그를 도와주겠지?"
샨은 잠깐 인연이 있었던 정두를 힐끔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분이 황제 되시었을 때에도 지금의 마음을 잊지 않으신다면. 언제나 한결 같이 저에게 믿을 주실 분이라 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껄. 껄. 껄. 과연 시르크 가문의 사람다운 대답이군."
황제가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윤기가 문뜩 샨의 앞에 서서 말했다.
"[나 안에 잠든 공간이어. 열려라!]"
윤기의 외침과 함께 붉은 색 기다란 막대기 하나가 모습을 들어내었다. 매끄러운 금속같은 재질었는 데 겉표면에는 룬어와 용언 빽빽히 적혀있었다. 샨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윤기를 바보았다.
"심판의 불꽃, 카르시엔. 너에게 주기 위해 레드 드레곤의 드레곤 본으로 제작한 스태프다. 대륙 최강 마법의 하나인 하르가이즈 플레임과 드레곤의 마나를 잔뜩 불어넣어놨다. 하르가이즈 플레임의 사용법도 들었으니까 알아서 익혀. 아티펙트에 의존하는 것도 안 좋아."
"선,선생님... 이건..."
"쯧. 이제부터 아버지라고 불어야지."
"이건..."
"아버지의 선물이다. 샤느트 시르크."
윤기는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 말했다.
"그리고 이 자리를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해 손님들이 많이도 찾아오셨군. 안 그런가? 최우영, 이광채?"
"그렇군. 푸름식에서 도망친 카드라라는 마족의 기운도 있어. 그리고 아이젠이라는 자의 기운도..."
"엄청난 양의 마수들도 추가해라."
우영은 하이느를, 광채는 성월대도를 뽑아들었다. 그들의 말에 귀족들은 놀라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 때 알프레드 크리스찬이 그들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크 크 큭. 어떻습니까? 나의 화려한 쇼가? 지금 제가 아닌, 알프레드라는 인형을 이용하는 게 안타깝군요. 이 세상이 마음에 안들어서 좀 쓸어버리려 합니다. 귀족이니 평민이니 가르는 게 웃기지 않습니까? 정말 마음에 안드는 이 세상 쓸어버리겠습니다! 카르테우스의 가호가 함께 하라!"
알프레드의 입에서 앨런드가 크리스찬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알프레드의 몸이 폭발하며 피가 사방을 튀겼다. 그 것을 신호로 허공에서 앨런드가와 마족, 마수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들어내었다. 수많은 마수가 모습을 들어내자 관중들은 겁을 먹고 경기장 밖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마수들은 그런 인간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 귀족들만 포위하기 시작했다. 마족 하나가 나서며 말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마의 칸이시어."
"그렇군... 마장 아이젠."
귀족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이어졌다. 거룩한 망나니 브리칸 시르크가 그 이름도 유명한 사마의 칸이었다? 그 때 한 녀석이 나서며 말했다.
"아버지의... 스승님의 원수를 오늘은 기필코 갚아주겠다."
"마장 카드라, 흥분하면 못쓰는 거야."
우영이 하이느로 카드라를 겨냥하며 말했다. 광채 역시 성월대도로 누군가를 가리켰다.
"저 마기를 풀 풀 날리는 인간은 내가 맡아야 겠군."
"그럼 난, 카드라를..."
우영이 말했다. 윤기는 허공에서 소르하노르를 꺼내며 말했다.
"난 아이젠과 결판을 내야겠군."
"이런... 이런... 죄송하지만 전 나서지 않을 겁니다. 앨런드가에게 힘을 빌려줄 뿐. 자 그럼 한 번 싸워 보시지요. 여러분들이 지면 마수들에게 모조리 뜯겨버릴 테고 도망치려고 해도 그럴 겁니다. 이기면 전 조용히 사라져 드리겠습니다."
"큭... 그렇다면."
윤기는 소르하노르를 들어 앨런드가를 가리켰다.
"사마의 칸의 명예를 걸고 친히 처단해드리지요. 앨런드가 크리스찬!"
"원하던 바다. 나는 나의 누나의 선택이 옳았는 가를 보아야겠다!"
막 숙명적인 대결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그 때 리세프론 백작이 마기를 풍기는 검사를 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싸일렉스 리세프론... 렉스!!!"
『아버지』
"싸일렉스 리세프론... 렉스!!!"
리세프론 백작의 외침에 귀족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윤기는 마기를 풍기는 검사, 싸일렉스 리세프론, 강경민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 사람과의 인연도 상당히 질겨져 버렸군."
아이젠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인간의 번민과 고통을 이용하는 것은 마족의 하잘 것 없는 능력들 중 하나랍니다. 사마의 칸이시어."
"하잘 것 없다? 웃기지도 않는 군. 세상의 어두운 영역의 최고 생명체의 능력이 그렇다 한다면 누가 믿을 까?"
우영이 아이젠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윤기 역시 소르하노르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슬슬 시작하지. 시간 끌 것도 없어. 자, 어느 쪽부터 시작할텐가?"
"저 쪽부터 하지."
광채가 성월대도를 뽑아들며 말했다. 리세프론 백작과 서희는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경민을 바라보았다. 아이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한꺼번에 싸워서 득이 되는 쪽은 아무도 없으니까. 좋습니다. 그럼 시작하시죠. 은월검성, 파일론 레비던트 후작 각하."
광채는 검을 들어 경민을 향해 달려들며 외쳤다.
"은월섬격銀月閃擊!"
어둠으로 가득 찬 공간 가운데 붉은 머리칼의 소년 하나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어떤 목소리가 공간 전체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아파하고 있군. 한심해... 인간이라는 것들은 이래서 한심해.
"..."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목소리는 계속해서 울려퍼졌다.
-그리워 하는 것인가? 훗, 역시 웃기는 군. 아버지란 존재... 죽여버리겠다고 내 앞에서 외치지 않았다던가?
"...사라져."
-기분 나쁘신가 보군. 아직 넌 어린 시절에 갇혀있어. 한 없이 아버지를 미워하고 그리워했던. 육체는 그걸 부정할지라도 적어도 내 영혼은 그래. 보라고. 지금 너의 모습을.
"남의 일에 참견하지마."
-언제까지 머무를 거지? 난 내 계약자가 좀 빨리 성장했으면 좋겠어. 싸일렉스 리세프론, 적의 그림자, 강경민 군.
"크흣.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들이군. 싸일렉스... 혹은 경민."
-암살자 렛에게서 꽤나 감상적인 말이 나왔군. 하긴... 지금의 모습 자체도 그렇게 어울리지 않아. 바보같아 보이거든.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존재의 틀에 갇혀 허우적거리는.
"닥치고 꺼져!"
소년은 크게 소리질렀다. 순간 검은 공간이 산산히 깨어지면서 시야가 밝아졌다. 현실로 되돌아 온 소년은 이제 하나의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경민이었다.
"은월섬격銀月閃擊!"
광채의 외침이 경민의 귓전을 때렸다. 경민은 재빨리 몸을 뒤로 빼며 롱소드를 뽑아 그의 검을 걷어내었다.
"영환影幻.... 살상곡殺傷曲!"
"만만치 않군. 프랑드 시 때와는 달라졌어. 적월검식赤月劍式! 파월무破月舞!"
검은 검기와 붉은 검기가 어울어져 사방에 난무했다. 요란한 폭음이 일어나며 한 차례 쇼크 웨이브가 사방을 휩쓸었다. 사이칸트에 의해 귀족들은 쇼크 웨이브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다. 윤기는 광채와 경민을 보는 한 편 아이젠과 카드라, 앨런드가를 견제하고 있었다. 우영 역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듯 했다.
"밑천 다 들어 낼 수 밖에. 은월성단銀月星段! 성월참聖月斬!"
광채는 거세게 검을 휘젖었다. 수십개의 은빛 검기들이 경민의 모든 방위를 점하고 날아들었다. 이어 반월참에서 은월참으로 이어지는 성월참이 펼쳐졌다. 내리베는 반월참에서 가로로 베는 은월참... 단순간 동작이었지만 그 파괴력은.
"크억!"
경민은 귀족들을 포위하고 있던 마수들의 일부와 함께 관중이 도망치고 빈 관중석에 쳐박혀 버렸다. 윤기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순간 윤기는 소르하노르를 머리 위로 들어올리며 소리쳤다.
"서피리어 실드! 그랜드 레인보우!"
윤기의 외침과 함께 귀족들의 머리 위에 실드가 펼쳐졌다. 그와 함께 불티 붙은 거대한 암석들이 떨어지며 실드에 부딪쳤다. 윤기가 쏘아낸 그랜드 레인보우는 앨런드가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다가 실드에 막혀 분해되었다.
"앨런드가!"
윤기가 언성을 높였다. 앨런드가는 키득거리며 말했다.
"정정당당한 대결이라도 바랬던가? 우리는 여기서 귀족들만 쓸어버리면 된다네. 큭 큭 큭. 사마의 칸도 의외로 멍청하셨... 헙!"
"주문 생략! 버스터 플레임!"
원소 마법, 버스터 플레임의 여섯 불꽃 깃털이 앨런드가에게 날아들고 있었다. 그 때 불쑥 카드라가 마신창 하르이가를 앞세워 버스터 플레임을 갈라버렸다. 카드라는 사마의 칸을 보며 말했다.
"이렇게 된거 슬슬 시작하지. 난 당신에게 빚진게 많거든. 사마의 칸."
그 때였다. 요란한 폭발음이 일어나며 쇼크 웨이브가 카드라를 덮친 것은. 카드라는 창을 휘둘러 쇼크 웨이브를 잠재우고 쇼크 웨이브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광채과 경민이 너덜너덜한 옷을 입고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과연... 은월검성! 하지만 이 것도 막을 수 있을 까?"
"마족 따위에게 쉽게 영혼을 넘긴 놈의 공격이라면 얼마든지 막아주마."
둘은 서로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카드라는 고개를 돌려 다시 윤기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그러나...
"당신 상대는 나야."
우영이 하이느를 오른손에 쥐고 카드라를 막고 있었다. 카드라는 이를 갈며 말했다.
"내 앞길을 막다니... 각오는 되어 있을 테지?"
"글쎄. 당신은 영천현인을 넘을 자신이 있으신가? 마장, 카드라!"
우영의 외침과 함께 카드라가 하르이가를 들고 우영을 매섭게 찌르고 들어갔다. 우영은 재빨리 뒤로 몸을 이동시키며 부적을 뿌렸다. 수십장의 부적이 원을 그리며 우영의 주위에 회전하며 하르이가를 튕겨내었다. 우영은 하이느로 상대를 카드라를 가리키며 외쳤다.
"염라마황주炎羅魔皇呪!"
여러가닥의 화염줄기가 카드라를 향해 뻗어나갔다. 마치 그물처럼 카드라의 모든 방위를 점하고 뻗어나갔다. 카드라는 전신에서 마기를 뿜어내러 화염을 튕겨내었다.
"공간을 초월한 어둠의 섬광이어! 빛나라!"
경민은 그렇게 외치며 불연듯 검을 땅에 내리꽂았다. 광채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성월대도를 꽉 쥐었다. 그 순간이었다. 모든 바람이 멈추며 시야가 뒤틀리는... 아니, 지금 모두가 서 있는 공간이 뒤틀리고 있었다. 그와 함께 사방에서 검기가 난무하고 있었다. 광채는 살점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며 간신히 버텨내고 있었다.
"공간을 일그러뜨린 것인가!"
윤기는 엄청난 쇼크 웨이브를 견뎌내며 중얼거렸다. 그 때였다.
"그만해!"
서희가 별안간 소리질렀다. 경민은 검을 땅에서 뽑아내었다. 그리고는 온몸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광채를 스쳐지나 서희 앞에 섰다. 그는 그녀의 목에 검을 가져가며 말했다.
"왜... 왜 아직도 날 멈추게 하려는 거지? 나에게 신경쓰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 데, 레이디 네프리아."
"렉스! 너 이 녀석!"
리세프론 백작이 소리쳤다. 경민은 서희에게 겨눈 검을 거두지 않은 체로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왜? 딸은 소중하신가? 리세프론 백작."
"레,렉스... 그만둬. 지금 넌 저 마족에게 이용당하는 것 뿐이야."
"닥쳐!"
경민이 검면으로 서희를 내리쳤다. 네프리아는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쓰러졌다. 경민은 서희의 목에 검을 겨눈 체 외쳤다.
"난 모든 게 싫어. 그래, 난 하녀의 몸에서 태어난 천한디 천한 몸이시지. 그게 싫다는 건 아니아.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자식을 동물보다 못하게 여겼다는 사실이! 내 눈 앞에 있는 이 계집만을 아꼈다는 사실이! 나에게서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빼앗아 갔다는 사실이! 그리고 다신이 내 아버지라는 것이 변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어떤 저주보다 더 잔인해!"
리세프론은 당장 경민을 베어버릴 기세로 뽑아들었던 검은 내렸다. 경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왜? 죄책감이라도 느껴지는 가? 당신 탓에 한 인간이 망가졌다는 사실이? 아니면 과거의 죄악이 자신의 딸에게 돌아간다는 사실이?"
경민은 그렇게 말하며 검을 들어올렸다.
"나도 당신에게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빼앗아주지!"
경민의 검이 서희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그 때 어디선가 검 한 자루가 나타나 경민의 검을 막았다. 피투성이인 광채였다. 광채는 재빠르게 경민의 가슴을 노리고 은월섬격을 날렸다. 경민은 코웃음을 치며 그 공격을 피해내었다.
"느리군."
"가장 늦었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가장 빠른 때인 법이다! 성월파단지곡聖月破斷支曲!"
광채의 검이 허공에서 휘저어졌다. 수많은 검기가 사방에 흩날렸다. 윤기는 앨런드가 쏘아내는 화염을 받아내며 중얼거렸다.
"저거 제대로 쓰면 막기 힘든 데..."
윤기의 예상은 그대로 맞아들어갔다. 경민은 온 몸에서 피를 뿌리며 쓸어졌다. 광채가 검기를 잔뜩 실은 상태에서 반월참 자세를 자세를 잡았다. 그 때 서희가 광채의 팔을 잡고 말했다.
"그만둬. 부탁이야."
광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성월대도를 칼집을 돌려놓았다. 서희는 천천히 경민에게 다가갔다. 경민은 다친 몸을 일으켜 서희에게서 떨어지려고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희는 경민을 잡아놓고 천천히 말했다.
"넌 아버지가 너의 소중한 사람... 네 어머니와 나를 빼앗아갔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아니야. 네 어머니가 돌아가신 건 사고였어. 그 분이 돌아가시날 아버지는 술이 좀 과해져버리셨지. 아버지는 널 보면 그 분 생각이 났는 지 널 멀리하려고만 하셨어. 그래서 그 날 널 내쫗아버린 거야. 사실은 자신과 너무 닮은 널 보면서 뒤에서 항상 미소지으셨지. 아버진... 널 그리워하고 계셔. 아버지와 가까워지려고 애쓰는 널."
"..."
경민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서희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도... 나도 네가 그리워. 나의 동생, 싸일렉스 리세프론이."
"난..."
"너도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지 않니?"
"난... 그리워... 아니 절대로 그렇지가... 크아악!"
경민은 별안간 비명을 질렀다. 서희는 놀라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아이젠을 그를 보며 혀 끝을 찼다.
"쯧. 쯧. 쯧. 인형 노릇만 제대로 하면 그냥 두려고 했건만. 별 수 없군. 저 세상으로 가랏!"
아이젠이 손을 휘젖자 검은 빛줄기가 경민에게 날아갔다. 그 때 였다. 한 금발의 여성이 그 앞을 막아서며 외쳤다.
"신에게 부정된 존재여! 여신의 이름으로 명 하노니 사라져라!"
네프칼 에니칼 바일로너, 대륙 전쟁의 영웅 중 하나인 이빈이었다. 빈이가 아이젠을 쏘아보며 소리쳤다.
"당신은 사람의 감정을 인형으로 밖에 보지 않나요!"
"이런... 그 유명하신 대사제, 에니칼 왕녀님이 아니신가!"
아이젠이 빈정거리며 말했다. 빈이는 그를 잠시 노려보다가 몸을 돌려 경민의 몸 위에 손을 올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사랑의 여신, 세레넬이시어. 부디 이 얼어버린 마음을 가진 이에게 따스한 사랑의 마음을 나눠주소서!"
빈이의 손에 빛무리가 일어나 경민의 몸에 스며들었다. 경민은 몸을 꿈틀거리다가 이내 평온하게 잠들었다. 빈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이젠은 허공에서 검 한자루를 꺼내며 말했다.
"변수가 생겨버렸군요. 내가 나서야겠어요."
"마신검 차르카! 이런... 그랜티스트 실드!"
윤기는 쉼 없이 날아드는 앨런드가의 마법을 막으며 소리쳤다. 아이젠은 우선 빈이를 향해 날아들었다. 광채가 외쳤다.
"누나! 조심해!"
챙.
광채의 걱정과 달리 아이젠의 차르카는 푸르스름한 빛의 검에 막혀버렸다. 그 검의 주인은 여유 있는 어조로 말했다.
"사신검, 파르하의 주인, 소드 엠퍼러 스티브 크리스티앙 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