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구치 조시치는 열세살 무렵에 홋카이도로 건너왔다고 한다.
'소식이 끊긴 친아버지를 찾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을지 모른다.
마키구치는 오타루경찰서에서 사동으로 일하며, 짧은 시간을 아껴 독서와 공부에 힘썼다.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 '공부 사동'이었다. 머지않아 마키구치는
홋카이도심상사범학교(현재 홋카이도교육대학교)에 시험 없이 들어가는 제1종생(第1種生)
으로 입학한다. 군구장(郡區長)이 공교육에 힘쓸 유능한 인재로 추천해 입학할 수
있었다. 사범학교는 전교생이 기숙사에서 지내며 수업료도, 생활비도, 국비로 지원되어
졸업 뒤에는 일정 기간 의무적으로 교직에 종사하게 되어 있었다. 마키구치에게는
그것이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학문은 쌀을 찧으면서도 할 수 있다"라는 말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잠언이다.
후쿠자와나 마키구치의 청년기에 비하면 바야흐로 시대는 크게 변했다.
배우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있으면 배울 수 있는 길은 많다.
마키구치는 1893년에 홋카이도심상사범학교를 졸업하자 이 사범학교 부속소학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한다. 더욱이 모교인 사범학교에서도 지리과 담당으로 교단에 선다.
마키구치는 부속소학교에서 단급(單級)학급을 담당했다. 단급은 전 학년 아동을 하나로
편성한 학급이다. 마키구치는 눈이 내리는 날이면 등교하는 아동을 마중 나갔다.
하교 때에는 몸집이 작은 아이는 업고 큰 아이는 손을 잡고 바래다주었다.
또 학교에서는 따뜻한 물을 데워 살갗이 튼 아이들의 손을 씻어주었다. 이렇게
세심하게 마음을 쓰는 행동은, 아동의 행복을 바라는 마키구치의 마음이 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상대를 걱정하며 마음을 쓰는 일은 진심의 결정이다.
마키구치는 교사로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 1893년 1월, '조시치'라는 이름을
'마키구치'로 개명했다. 스물한살 때 일이다. 마키구치 쓰네사부로는 1899년 7월,
홋카이도사범학교 부속소학교에서 교장 대리가 되었고 이듬해 1월, 사범학교 사감이
된다. 스물여덟살 때 일이다. 더구나 마키구치는 지리학 연구를 거듭해 원고도 썼다.
이 원고를 가지고 도쿄로 건너갔다. 1903년 10월, 그는 '인생지리학'을 출판한다.
이 책은 "지리학은 땅과 인생의 관계를 설명하는 과학이다"라는 관점에서, 풍토와
지형 그리고 기후 등의 지리적 현상이 인간생활에 어떻게 관계하는지를 탐구한 책
이었다. 학자로서는 무명인 마키구치의 저작이었지만 훗날 교토제국대학 교수가 된
지리학자 오가와 다쿠지가 이 책을 높이 평가했다. 사회학자 다나베 스케토시도
"이 책의 출현으로 우리나라 지리학이 그 외모를 일변했다"라고 감탄했다.
마키구치는 '인생지리학'을 출판한 직후부터 중국인 유학생을 위해 설치된 고분학원
에서 지리학을 가르쳤다. 같은 시기에 루쉰도 이 학교에서 공부했다.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중국인을 멸시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일본인도 있었다.
마키구치는 중국인 유학생을 각별히 경애하고 소중히 대했다. 중국 청년들은
마키구치의 '인생지리학'을 번역해 발간한다. 또 마키구치는, 고등여학교에 진학
하고 싶어도 경제적인 사정으로 진학하지 못하는 여자아이들의 교육장으로서
통신교육을 하는 대일본고등여학회를 창립한다. 인간이 원만한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꼭 필요하다. 따라서 '배우고 싶어도 배우지 못하는 사람에게
학문을 닦을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어 배움의 빛을 보내고 싶다'는 것이 교육자
마키구치의 일관된 자세였다. 그의 가슴속에는 눈앞에 있는 아동과 생도
그리고 학생이 '꼭 행복한 인생을 꿋꿋이 살아가기를 바라는' 자애로운 정열의
불꽃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마키구치는 1913년 부임한 도세이심상소학교를 비롯해 다이쇼심상소학교, 니시마치
심상소학교, 미카사심상소학교, 시로카네심상소학교, 아자부신보리심상소학교에서
교장을 역임하게 된다. 마키구치가 처음 교장으로 부임한 도세이심상소학교는
도쿄시 북부에 위치하는 시타야구의 류센지초에 있었는데 가난한 가정이 많아
문방구가 없는 아동도 많았다. 마키구치는 문방구를 일괄 구입해 시가 보다 싼값에
나누어주는 등 마음을 써야 했다. 마키구치는 도세이와 다이쇼, 미카사 그리고 아자부
신보리의 각 학교에서는 야학교 교장도 겸임한다. 야학교는 낮에 일해야 하는
가난한 가정의 아동이 다닐 수 있도록 심상소학교에 병설된 학교다. 그는 모든
어린이에게 애정을 쏟았는데 가난한 아이와 괴로워하는 아이에게는 특히 마음을 썼다.
또 권력에 영합해 몸의 안태만을 얻으려는 삶을 싫어했다.
도세이심상소학교에서 큰 교육실적을 남긴 마키구치는 옆 마을에 신설된 다이쇼심상
소학교 교장이 되어 그 야학교 교장도 겸임한다. 이곳도 가정이 대부분 몹시 가난했고,
부모가 글을 모르는 경우도 있어 취학률이 낮았다. 마키구치는 직접 아동의 집을 방문해
"학교 따위 가지말고 일해라!" 라고 말하는 부모를 설득하러 다녀야 했다.
이 다이쇼소학교에서 어느 날 그 고장의 유력자가 자기 아이들 특별대우하도록 교장인
마키구치에게 부탁하러 왔다. 거절하자 그 유력자는 도쿄시정을 좌지우지하는 거물급
정치가에게 마키구치를 배척하도록 요청한다. 마키구치에게는 '교육에 관계 없는
사람이 권력의 힘을 빌어 교육에 참견하면 안 된다'는, 일관된 강한 신념이 있었다.
거물급 정치가는 이전부터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 고장 유력자의
의향을 받아들여 마키구치를 좌천한다. 권력에 영합하지 않고 신념을 관철하려 하면,
박해라는 폭풍이 다투어 일어난다. 그것에 지지 않는 강인함을 지니는 것이 곧
개혁자의 조건이다.
다이쇼심상소학교 교사와 학부형은 마키구치가 권력자의 부당한 압력으로, 같은
시타야구의 니시마치심상소학교로 전근 당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누구나 크게 분노
했다. 마키구치의 전임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며 교사는 사표를 제출하고 학부형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겠다며 '동맹휴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인사명령은 철회되지
않고, 마키구치는 니시마치소학교 교장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 니시마치소학교 봉직
중에, 홋카이도에서 도쿄로 올라온 젊은 시절의 도다 조세이를 만난다. 마키구치는
이번 부임때도 교장이라면 가장 먼저 찾아가 문안 드리는 거물급 정치가에게 인사하러
가지 않았다. 거물급 정치가의 노여움은 더욱더 불타올라 도쿄시의 교육과장과 구장
(區長)을 움직여 다시 마키구치 배척에 나선다. 그리고 부임한 지 겨우 석달만에 도쿄시
동부의 혼조구미카사초에 있는 미카사심상소학교로 전임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 학교는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을 위해 세워진 도쿄시의 '특수소학교' 중 하나였다.
수업료는 징수하지 않고 학용품을 제공하고 아동이 목욕하고 이발할 수 있는 시설도
있고, 학교의(學校醫)가 있어 학생들이 아프면 치료도 해주었다. 미카사소학교로 인사
이동이 되는 일은 교사 사이에서는 "그만 두게 하려는 속셈이다"라는 소문이 돌았고
'해고 장소'로 불렸다. 니시마치소학교에서도 교사들이 마키구치의 전임을 반대하며
유임운동을 일으켰다. 마키구치가 힘써, 임시교사로 일하던 도다도 운동의 선두에 섰다.
그러나 유임은 이루어지지 않고 마키구치는 미카사소학교로 전임되었다.
도다는 이미 마키구치를 인생의 스승으로 삼고 있었다. 그 마키구치와 행동을 함께
하고자 뒤를 쫓듯 미카사소학교로 옮긴다. 그리고 이 학교 교사가 되어 사제가 함께
가장 가난한 아이들을 교육하는 데 온 정성을 기울인다. 스승이 최대 궁지에 몰렸을 때
제자가 어떻게 하느냐. 이것이 바로 진정한 제자인지, 스승을 이용하려는 말뿐인
제자인지를 가려내는 시금석이라 할 수 있다.
1920년 6월, 미카사심상야학교 교장에 취임한 마키구치는, 주거도 가족과 함께 교내
사택으로 옮겼다. 마키구치는 명문학교 교장이 되고 싶은 바람은 전혀 없었다.
가장 불행하고 어려운 생활환경에서 살아가는 아동에게, 교육의 빛을 비추는 일이
교육자가 해야 할 사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카사소학교는 깨진 창문을
판지로 막아 바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 놓는 등, 시설을 충분히 고칠 수 없는
열악한 소학교였다. 그러나 마키구치는 온 몸에 정열을 불태우며 아동을 위해
심혈을 쏟았다. 당시 미카사소학교는 "15개 학급에 약 800명 아동이 3부로 나뉘어
수업을 받는다. 즉 4학년 이하는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뉘고 5, 6학년은 전부 야간
으로, 수업시간이 21시 또는 24시다"라고 되어 있다. 수업은 놀랍게도 오전 0시까지
있었다. 교장인 마키구치가 교내에 있는 사택에서 생활한 이유는 바로 24시간
아동을 위해 힘쓰자고 각오했기 때문이다.
또 학부형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학부형은 모두 노동자 계급이어서 교육보다 먹고 사는 일을 더 크게 걱정한다.
따라서 아동은 대부분 거기에 상응하는 노동에 종사해야 한다. 그리고 얼마 안 되는
품삯을 받아 생계를 돕는다. 이러한 상태이므로 출석률도 평균 75.35로 낮은 비율이다.
학부형 중에 6년 동안이나 학교에 보내는 가정은 좋은 부류다. 개중에는 전혀 학교에
보내려 하지 않거나 혹은 보내지 못하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는 가정도 있다."
마키구치는 이곳에서도 아동의 집을 찾아 다니며 자녀가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부모를 설득했다. 아동의 장래를 위해, 배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힘주어 말했다.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부모들도 마키구치의 자애 넘치는 진지한 호소에 결국 등교
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진심을 담은, 정열 넘치는 대화가 사태를 해결하는 지름길이다.
마키구치는 배를 곯고 도시락도 없이 등교하는 아이들을 위해 콩떡 등을 준비해
자유롭게 먹도록 했다. 당초 그 비용은 모두 마키구치가 냈다. 머지않아 급식을
협력해주겠다는 독지가도 나타났다. 1921년 12월 8일자 요미우리신문에 이런 커다란
제목이 달렸다.
"소학교에서 가난한 아동에게
무료로 점심 급식
혼조의 미카사소학교에서 시도
야학 아동에게도 급식 계획
=빵과 국 두 그릇"
기사에는 "혼조 미카사소학교에서 최근 이 학교 생도 중에 환경이 열악한 생도
약 100명 정도를 골라 점심을 주기로 결정해, 경비와 설비 사정상 당분간 약 130그램의
빵 한개와 두부나 야채를 넣어 끓인 국 두 그릇을 무료로 급식한다"라고 씌어 있다.
게다가 공장에서 집으로 가지 않고 바로 학교로 오는 야학 생도에게도 급식하는 것을
검토 중이라고 보도했다.
교장인 마키구치의 담화도 있다.
"얼굴색이 창백해 매우 약해 보이는 생도는 모두 먹지 못해 생긴 결과로, 게다가
어쩌다 점심을 먹어도 변변한 것을 먹지 못하니 영양불량에 걸리기까지 한다"라고
말했다. 또 마키구치는 공장에서 집에 가지 못하고 바로 학교로 오는 야학생에게
급식하는 일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하고 "배가 부를 정도로 주지 않는데 '너는 학교에서
먹고 왔잖니'라며 집에서 밥을 주지 않는 일이 생기지나 않을지 걱정이다."라고도
말했다. 그는 어디까지나 아이들이 처한 현실에서 생각하고 고민하며 불굴의 투혼
으로 개선을 추진했다. 철인 에머슨은, 가난한 여성이 한 말에 크게 감명해 그 말을
써서 남기고 있다. "고난이 커지면 커질수록 사자와 같은 용맹심을 일으킨다.
이것이 내 주의(主義)입니다." 그것은 바로 마키구치가 지닌 신념이기도 했다.
첫댓글 창가 3대 영원의 스승 이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