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아리랑 가사중의 <야답새 두 번걸이>의 뜻
야답새 두 번걸이 열두폭 치매
신작로 다 씰고 임마중얼 가네.
아리아리랑 서리서리랑 아라리가 났네 !
아리랑 응~ 응~ 응~ 아라리가 났네 !
진도아리랑비석에도 새게져가꼬 있는 아리랑 가산데라 야답새가 먼말잉가 저도 몰라가꼬
한창을 찾아 댕기다가 지구다나 알어내가꼬 역다 알레디립니다.
야답새는 표준말 여덟새의 사투리로 국어사전에는
-날실 160올로 천을 짜는 방식. 또는 그렇게 짠 천- 으로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그랑께 야답새 두 번 걸이라 하믄 베짤쩍에 날실이 160올이 들어가는 베로 일상용베 축에 끼는 베가 되능갑습디다.
4새 두번걸이믄 상복용베고 5새 두번걸이로는 일할쩍에 입는 등거리같은 옷을 맨들고
일곱새 두번걸이부텀 야답새가 보통 옷감이고 고급이로는 열두새 보룸새(열다섯새)까장있었능갑습디다.
여그서는 열두폭이라 적어졌는데 진도서는 폭을 푹이라고 씨기도 해가꼬 치매푹, 야달푹, 열두푹 고케도 불렀어라.
이전에는 길쌈을 엥간한 집서는 다덜 했었겄제만
요새는 민속박물관에나 가사 보겄제 좀체 못 보게 됭께 진도아리랑에 나오는 구절도
인자 먼말잉가 잘 몰루겄길래 여러 향우님덜하고 한테 하고 잡어가꼬 일로 잔 욍게 왔구만이라.
<옮겨온 글 >
길쌈(삼 삼기)
모내기를 하기위해 쪄낸(잘라낸) 삼은 여름날 갱변(강변)에서 삼곳을 만들어 쪄내서
커다랗게 타래를 만들어 광에다 주렁 주렁 달아두었었다.
모내기를 끝내고 애벌논매기와 두벌 세벌 논매기는 주로 남정네들이 하기에
그 동안 아낙들은 삼을 꺼내어 개울에 담가 불려서 가늘게 쪼개었다.
삼이 잘자라 곱게 찢어지기도 했지만 마디가 굵어 잘게 찢으면 툭 끊어지기도 해서,
삼베를 짤때 고운 베바닥이 되는 보름새를 만들 삼은 찢는 과정에서 특별히 구분해서 뽑아 냈었다.
이렇게 구분되어 나온 것이 고급 삼베가 되어 시집가는 큰애기들 몫이 되고,
열두새 정도면 고운 편에들어 출입하시는 남정네들 도포감이 되었었다.
보통 시골에서 많이하는 삼베는 여덟새 정도였는데 주로 삼베 홑이불 감이 되었다.
아주 하품으로 닷새짜리가 있었는데 머슴들의 잠뱅이(경상도 지방에선 등지개라고들 불렀다)를 만들어 주곤 했었다.
물에 담구어 불어있는 상태에서 삼에다 엄지를 뺀 네손가락을 넣어 죽 훑어 내려 찢어낸 삼은 이제 실모양이 되어갔다.
아직 삼껍질이 붙어 있는 상태로 찢어둔 삼은 이때부터 시간나는대로 삼기(실잇기)시작한다.
지금 이름이 가물 가물하지만 전기다리라 불렀던 것 같은데
(등잔대 같이 생긴 나뭇판에다 가운데 구멍을 내어 70cm내외 길이의 막대기를 박았다)
그끝의 가운데 부분에 틈을 내어 두개를 세워놓고 삼실을 끼워 삼을 삼았다.
삼삼는 작업은 이웃끼리 가족끼리 아낙들이라면 거의 다 동원이 되었는데,
시어머니 며느리 시누이까지 저녁먹으면 가물거리는 호롱불 빛에 의지해 작업을 하곤 했다.
큰애기들은 제몫의 삼을 들고 이웃 친구네로 마실 삼삼기를 하러 가기도 했었다.
삼은 삼실은 고리광주리에 잇는대로 동그랗게 내려놓았었다.
여름내 겨우내 틈만나면 삼을 삼는 것은 길쌈이 자녀들의 학비를 마련할 길이 없었던
농촌 현실에선 유일한 돈줄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삼 삼기는 삼의 머리쪽(뿌리)이 굵고 꼬리는 가는 특성상 머리쪽을 톱(나무 켜는 톱이 아님 톱니가 없는
밋밋한 손안에 쏙 들어간 크기)으로 도마에 놓고 훑어 내어 하얗게 만들었었다.
먼저 머리부분을 쑥 뽑아 이빨로 물어 뜯어 두갈래를 만들고 꼬리부분도 이빨로 끊어내고 갈래 사이에 넣고
한쪽실과 꼬리를 한데 비비고 다시 나머지 실을 보태서 내려 비볐다가 올려 비비면 삼실이 이어졌다.
그래서 길쌈하는 집 여인네들은 무릎위 넙적다리가 피가 맺히도록 삼을 부벼 대었던 걸로 기억된다.
이 삼실들은 돌껏이라고도 불리는 실감개에 둥그렇게 걸어 실타래를 만들어 양잿물에 삶아 껍질을 벗겨내면
하얗게 바랜 실이 탄생한다.
보통 가을날 많이 하는 도투마리에 올리는 작업은 마당에 길게 왕겻불을 피워놓고 실을 날라
베 한필 혹은 두필 길이로 편다.
한쪽 끝엔 도토마리(큰 실패처럼 생긴 나무로 만든 기구)가 다른 한쪽엔 여러가닥의 실을 함께
(가즈런히 만들어 바디에 들어갈 수만큼 날랐었다) 뭉쳐서 무거운 돌을 달아 작업하는 동안 쉽게 딸려 오지 않게 만들었었다.
왕겨 위의 실들은 치자물들인 풀을 붓꽃뿌리로 만든 솔에 듬뿍 묻쳐 쓱쓱 칠을 하면 작은 실오라기들을 붙여서 매끈하게 만들었다.
실빛을 황금색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마르는 대로 도투마리를 감으면 실꾸러미는 딸려오고 또 뭉치를 풀어 놓고 하는 작업이 꼬박하루는 걸렸던 것 같다.
실을 차례로 한가닥은 위로 한가닥은 아래로 해서가운데 나뭇가지를 넣고 마지막 끝의 실을 바디에 하나씩 끼우고 베메기는 끝났다.
몇 필 할양을 했던지는 기억에 없다.
남은 왕겻불은 쓸어모아 그속에 항아리를 묻고 메주가루와 여러가지 채소를 두어 집장을 만들기도 했었다.
이 집장이 또 기가 차게 맛이 있어서 집장을 담근 날은 아이들의 배가 봉긋하니 참외배꼽이 되는 날이기도 했었다.
이렇게 매어진 베가 겨우내 집집마다 베짜는 철꺼덕 탁탁하는 소리로 가득찼던 날들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리운 소리로 남는다.
아홉살까지의 아슴아슴한 기억이니 많이 다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기술해 둔다.
이상은 누리틀에서 <새앙골 아낙>님의 글을 옮겨왔습니다.
첫댓글 존 자료를 올려주셔가꼬 몰랐던 것을 알게 해주신께 참말로 감사디립니다.
찰로 이런 글을 올려중께 째깐 알지라 어짜던지 힘 닷는데로 애써주이쇼 잘 읽어 부럿소 감사 하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