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꽃
김영숙
작은 꽃밭에 봉숭아꽃이 활짝 피었다. 파티에 나갈 때 입는 고운 드레스같이
겹겹이 소담스럽게 웃는다. 빨강, 분홍, 하얀 꽃잎들을 바라본다.
여름 태양같이 뜨거움고 소낙비처럼 시원한 그런 사랑이 그리웠던 시절에 우
리들이 살았던 한 쪽에는 수수한 촌 새악시 같은 수줍은 꽃밭이 있었다. 척박
한 토양에서도 분꽃은 지천으로 푸짐하게 되었었고 맨드라미, 앙증스런 채송
화, 멋없이 키가 큰 해바라기, 흔히 만나는 정겨운 여름 꽃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나는 분꽃을 사랑하였다. 꽃, 색깔과 장난감 같은 나팔모양하며
새까만 열매의 콩 같은 우툴두툴한 모양 속에 숨어있던 결이 고운 하얀 분가
루. 하지만 그것보다 억센 마디의 줄기에서 여기저기로 뻗어나가는 그 세력확
장이 가냘프지만은 않아 보여 더 정이 갔었다.
무료하도록 조용한 한낮은 모든 것들이 정지된 듯 고요하기만 했었다. 마치
꽃들도 졸고 있는 듯, 바람도 나비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문득 가슴에 스미는 내 이십대는 꽃봉오리가 꽃
을 틔우는 시간을 지나고 있었다.
나에게 있어 그리움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 누군가가 나란히 엄마와 같이
걷는다든지, 사랑이 듬뿍 담긴 눈길로 자식을 바라보는 여인의 모습을 대하게
되면 부럽다 못해 고통으로 이어지곤 했었다.
점점 자라면서 더욱 절실히 갖고 싶었던 어머니의 정은 어느 때는 단념이 되
다가 어느때는 서럽고 괜히 누구에겐가 투정하듯이 했지만 실은 잘 포장된 물
건같이 보일 뿐 쉽사리 내 감정을 타인에게 내보이고 싶지는 않았었다. 아버
지께서는 집안의 일은 오빠와 나에게 상의를 하시곤 했지만 아버지의 외로움
을 눈치 챌 만큼 나는 성숙하지는 못했었다.
어느 날 이였다. 아버지께서는 아침에 나가시며 친구 분 댁에가 사진을 찾아
다 놓으라고 이르셨다. 약방을 하시는 그 아저씨 댁에 가려면 시장을 가로질
러가야 하는데 복잡하도록 사람이 많았지만 연신 손님을 부르는 그 싱싱함이
가득 차 있는 시장길이 나는 좋았었다.
키가 크고 마르셨지만 안경을 쓰고 계신 모습엔 언제나 인자한 웃음이 다른
사람들도 편하게 해주신 아저씨였다. 하지만 아저씨는 안 계셨고 아줌마께서
반겨주셨다. 가지고 나오신 액자는 조금 커 보였다.
“아버지도 재혼하시라구해. 원 쯧쯧…”
혼자 중얼거리듯 말씀하셨지만 그때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액자를 받아 살
펴보았다. 약30명 정도 찍은 사진 이였는데 아버지 친구 분들은 모두 부인들
과 같이 찍어 동그랗게 한 쌍임을 강조했던 바 아버지만은 그 동그라미에 혼
자 쓸쓸히 계셨었다.
그 순간 이제까지 태연한 척 숨겨두었던 뜨거운 덩어리가 저 아래에서 목구멍
까지 차 올라 오고 있었다. 나는 허수아비가 된 양 몸 따로 마음 따로 마치 정
신이 나간 듯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큰소리로 울음을 터트렸다. 갑작스러운
일에 놀라 형제들이 모여들었다. 오빠는 나를 흔들며 누가 너를 울렸냐며 다
그치다 문득 옆에 놓인 액자를 보더니 아무 말이 없어졌다.
내 울음소리는 커졌고 그 누구도 감히 말릴 수가 없었다.
어떠한 때는 돌아가신 엄마에 대한 미움이 원망이 또한 서러움이 길게 통곡으
로 이어졌다. 고요하던 꽃밭도 나비도 나를 쳐다보았지만 나는 내내 그 설움
덩어리를 눈물과 콧물이 되어 사라져 버리기를 바라며 울었다.
시간이 한참 흘렀다. 어디선지 매미가 길게 길게 울어댔고 나를 위로하는 듯
분꽃들이 일제히 활짝 피어있었다. 어느 시간 멀리 가버렸던 조용함이 다시
곁에 다가와 일상의 시간은 아무 일 없는 듯 흐르고 있었다. 내가 서러워한다
고 어머니가 살아 오실 건가 아버지께서 외롭지 않을 건가 나의 울음은 누구
에게 항변한 것인가! 이렇게 하지 말자 스스로 다짐했다.
저녁때가 되어도 하늘이 까맣게 색깔이 칠해졌어도 오빠는 오지 않았다. 아
버지께서는 연신 걱정하시고 계셨지만 낮의 일은 도저히 말씀드릴 수가 없어
혼자 애를 태우고 있을 때 시간은 자정이 훨씬 넘어가고 있었다.
누가 대문을 황급히 두드릴 때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듯 했다.
아버지는 급히 그 사람을 따라 나서며 오지 말라고 하셨지만 나도 모르게 걷
는 듯 나는 듯 뛰어가고 있었다. 오빠는 한 마리의 사자였다. 이제까지 내가
보지 못했었던 모습으로 길에 누워 포효하고 있었다. 술에 취한 채 눈에는 눈
물이 가득 고여 흐르고 연신 엄마를 구슬프게 찾고 있었다.
어쩌란 말인가? 늘 당당하게만 생각케 했던 오빠였는데-.소리 없는 눈물이
내 볼을 타고 흘렀다. 그가 부르는 애간장 녹이는 엄마라는 소리, 엄마 엄
마. 어떡해야하나? 호령을 하실 줄 알았는데 아버지는 말없이 오빠를 부축
해 데리고 오셨다. 나와 아버진 서로 아무 말이 없었다. 담배 연기만 저 홀로
허공을 향해 날아갔다.
아버지 방에서 나와 마루에 앉아 깜깜한 꽃밭을 바라보았다. 낮에 피었던 분
꽃이 고즈넉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귀하지도, 어여쁘지도 않는 꽃, 아무
도 귀히 여기지 않지만 잡초처럼 건강하고 씩씩한 꽃, 그 꽃을 바라보노라니
차츰 마음이 차분해져 갔다.
가너리지만 강함이 있는 분꽃은 나에게 속삭이듯 말을 걸었다.
"나를 보아, 그리고 용기를 가져."
다독이듯 타이르고 있었다.
2000. 8집
첫댓글 가너리지만 강함이 있는 분꽃은 나에게 속삭이듯 말을 걸었다.
"나를 보아, 그리고 용기를 가져."
다독이듯 타이르고 있었다.
고귀하지도, 어여쁘지도 않는 꽃, 아무도 귀히 여기지 않지만 잡초처럼 건강하고 씩씩한 꽃, 그 꽃을 바라보노라니
차츰 마음이 차분해져 갔다.
가너리지만 강함이 있는 분꽃은 나에게 속삭이듯 말을 걸었다.
"나를 보아, 그리고 용기를 가져."
다독이듯 타이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