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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음의쉼터 천지사 원문보기 글쓴이: 해바라기
사진은 차례로
대전시무형문화재 제8호 매사냥기능보유자로 응사 박용순씨.
고려응방의 스타인 참매 ‘풍’이 공중제비로 꿩을 낚아채고 있다.
세 살배기 참매 ‘풍’의 위풍당당한 모습.
꼬리부분의 흰 깃이 ‘시치미’이다.(위 사진) 국내에서 유일하게 길들여진 송골매.
박용순 응사가 방 안에서 매와 교감하고 있다.
매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는 박용순 응사.
이만훈 기자의 사람 속으로 | 대전의 응사(鷹師) 박용순 씨
`직장도 싫다” 퇴직… 아내는 풀빵·빙수장수로 생활
무형문화재 지정됐지만 꽥꽥 새소리에 전셋집 쫓겨나
[월간중앙] 혹시 매를 가까이에서 본 적이 있는가? 금세라도 심장을 꿰뚫을 듯한 눈빛하며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 날렵한 몸매 등 어느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잘생긴 놈이다. 그렇다면 사냥솜씨는? 최고시속 370㎞로 내리꽂히며 꿩이나 토끼를 낚아채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위대한 ‘퍼포먼스’다.
호쾌하고도 감동적이다. 오죽했으면 한량(閑良)들의 인생삼락(人生三樂:一鷹, 二馬, 三妾) 중 첫 번째가 매사냥이었을까? “얼핏 생각하면 여자가 맨 먼저일 것 같죠? 안 해봤으면 말을 하지 마세요.”초등학생시절 매의 매력에 빠져들어 40년째 함께 살며 매사냥문화를 지켜가는 박용순(50) 씨는 현대판 한량이다.
대전시무형문화재 제8호 매사냥기능보유자로 응사(鷹師·최고의 경지에 오른 매사냥꾼) 소리를 듣지만 집안살림은 나 몰라라 하고 매에만 매달려 사니 말이다.
“사실 매 자체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요즘에는 전통문화인 매사냥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 이러고 있는 겁니다. 매사냥은 맹금류인 매를 길들여 꿩이나 토끼를 잡는 그야말로 자연친화적인 전통의 사냥술이에요. 매사냥은 세계적으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도 마찬가지예요. 5~6세기 고구려 벽화무덤인 삼실총과 무용총에 매사냥 그림이 있고, 백제에서는 아신왕이, 신라에서는 진평왕이 즐겼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고려 때는 아예 매사냥과 매 훈련을 전담하는 ‘응방(鷹坊)’이라는 기구를 설치해 조선 숙종 때까지 존속되는 등 광복 이전까지 왕은 물론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사랑을 받아온 전통문화예요. 세종대왕께서도 재임기간 125번이나 매사냥을 즐기셨습니다. 1930년대 조선총독부 자료에는 매사냥 허가 발급자가 1740명이나 될 정도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성행했죠.”
박 응사는 현재 살림집과 별도로 대전시 동구 이사동 단독주택에서 ‘고려응방’을 운영하며 전통 매사냥문화 전승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03년부터 ‘고려응방’이라는 이름으로 인터넷 사이트도 운영한다. 현재 회원은 450여 명. 지금까지 매사냥에 대해 발표회만 여덟 번 가졌고, 시연회도 일곱 차례나 가졌다.
1월23일 고려응방에서 열린 시연회에는 문화재 관계자와 대학교수, 기자 등 전국에서 200여 명이나 찾아와 높은 관심을 보였다. 돈키호테라는 소리를 들어가면서까지 그동안 그가 기울여온 노력의 결과다.
“TV 드라마 <주몽> <무인시대> <천추태후> 등 사극에 나오는 매사냥 관련 장면도 모두 저의 작품입니다. 옛날에는 매사냥이 최고였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요청이 오면 출연료에 신경쓰지 않고 무조건 달려갑니다.”
현재 국내에서 무형문화재 매사냥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사람은 박 응사와 전북도지정문화재 제20호인 박정오(68) 응사 단 두 명뿐이다.
“작고하셨지만 전북 진안에 전영태라는 분이 계셨어요. 그분이 1998년에 전북도지정문화재가 되셨고, 제가 2000년에 대전시지정문화재가 됐습니다. 박정오 씨는 2007년에 문화재가 됐습니다. 매사냥은 원래 문화재 항목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신규로 지정된 겁니다. 문화재가 되려면 역사성은 물론 학술적 가치와 기예성·희소성이 있어야 하는데, 매사냥은 이들 조건을 모두 충족하고도 남죠. 그런데 매사냥은 일부 지방에서만 이뤄진 것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하던 것이어서 사실 국가지정문화재가 돼야 마땅합니다.”
전통 매사냥문화 전승
일반적으로 매목의 매과와 수리과 두 부류를 합쳐 통칭 ‘매’라고 부른다. 고려 충혜왕 때 예문관 대제학을 지내고 시조 “이화에 월백하고…”로 유명한 이조년(李兆年·1269~1343)이 쓴 <응골방(鷹툷方)>에 따르면 매과를 골속(툷屬)으로, 수리과를 응속(鷹屬)으로 나누는데, 수리과에는 참매·뿔매·새매가 있고, 매과에는 송골매·북극매·황조롱이가 있다. 이 같은 분류는 현대의 생물학적 분류와도 일치한다.
“특성과 쓰임새별로는 우선 꿩이나 토끼 사냥을 주로 하는 참매와, 메추리 등 작은 새 사냥에 쓰이는 새매, 오리 종류를 주로 잡는 송골매가 있습니다. 황조롱이도 매과에 속하는데, 저는 황조롱이로는 해본 적이 없습니다. 참매와 새매는 같은 매속입니다. 이놈들은 다 같이 단거리에서 순발력으로 사냥하는 놈들입니다.
개활지가 적고 산악지대가 많은 우리나라 같은 지형에 맞는 종입니다. 반면 송골매는 넓게 트인 데서 사냥을 잘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처럼 가는 곳마다 집들이 닥지닥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송골매 사냥을 했고, 북한에서는 근대까지 명맥을 이어왔습니다. 남한에서는 끊긴 지 오래됐습니다. 스
피드가 제일 빠른 것이 송골매여서 몽골 등 평원이 많은 데서는 송골매를 으뜸으로 치고, 우리나라나 일본·중국의 산악지역에서는 주로 참매를 애용했습니다. 한마디로 참매가 장군감이라면 송골매는 귀공자 스타일이에요. 송골매가 고도 700m까지 올라가 수직 낙하할 때는 최고 시속 380㎞(인공적인 실험에서 나온 기록으로 우주선의 낙하 속도와 맞먹는다.
자연 상태에서는 시속 180~200㎞ 정도)로 빠르다고 해서 일명 ‘날진이’로 불리기도 합니다. 개체수가 적어 1급 보호수로 2급인 참매보다 귀한 대접을 받으며 값도 비싸죠.”
─ ‘해동청’이라는 것도 있지 않나?
“옛 문헌을 찾아 연구한 결과 세종 때까지는 해동청이라는 것이 있어요. <응골방>을 보강해 세종 때 펴낸 <신증응골방>에 보면 해동청을 다른 매와 함께 매과에 한 항목으로 잡아놓고, 주로 고니사냥에 이용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글자 그대로 하면 ‘한국의 청매’라는 뜻인데 그런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해동청 가운데서도 검은 놈을 청송골, 하얀 놈을 백송골, 약간 누리끼리한 것을 노화송골이라고 구분해놓은 것을 봐도 알 수 있죠. 그 외에 반백형도 있다고 돼있거든요. 이를 현대적 분류에 적용해보면 지금의 북극매가 해동청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산진이·수진이는?
“그것은 매의 종류가 아니고 야생이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것일 뿐입니다. 참매가 산에서 어른이 된 것을 산진이라 하고, 수진이란 사람 손에서 묵은 놈입니다.”
과연 막힘이 없다. 대단한 내공이다. 박 응사는 현재 참매 세 마리와 송골매 한 마리를 키운다. 많으면 좋겠지만 천연기념물이어서 허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고려응방’의 매 가운데 가장 잘나가는 스타는 세 살배기 참매인 ‘풍’. 바람같이 날쌔 붙인 별명인데 평소 딴청을 부리고 느물거리기도 하지만 호나우두 같이 어슬렁거리는 것 같다가도 결정력이 높아 실전에 강하다.
척 보기에도 ‘포스’가 느껴지는 ‘보물’이다. 또 다른 스타는 국내 유일의 길들여진 송골매인 ‘장군이’로, 풍채가 아주 그럴싸한 놈이다. 그가 매와 인연을 맺은 것은 논산에서 초등학교 5학년 때 산에 놀러 갔다 새매집을 발견한 것이 계기였다.
“원래 어려서부터 날개 달린 것은 뭐든지 다 좋아했습니다. 종다리·비둘기 등 새란 새는 안 키워본 것이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새매 새끼를 집으로 데려와 키우다 보니 다른 새들과 다른 묘한 매력이 있더라고요. 맹금류 특유의 의젓한 용모 하며, 멀리서 개구리를 던져주면 날쌔게 낚아채는 용맹스러움이 정말 매혹적이었습니다.
특히 눈을 보면 심장을 녹일 것만 같은 강렬함이 느껴지고, 날카로움이 있어요. 그때 매에 빠져든 것이 쉰이 넘는 이날까지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응사(鷹師)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겁니다.” 박씨는 군생활을 하면서도 매를 키웠다.
“졸병은 면하고 중고참 시절 봄에 훈련을 나갔는데 뭐 눈에는 뭐만 띈다고, 참나무 위 둥지에 뽀얀 솜털이 난 새매 새끼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고참들과 상의해 중대장의 허락을 받아 중대 마스코트로 삼자고 하고 탄창주머니에 넣어 부대로 데리고 왔죠. 먹이는 취사장에서 조달했습니다. 점호 때 침상 끝에서 끝으로 휘익 날리면 주번사관이 기분이 좋아 별 까탈을 부리지 않고 취침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내무반원들이 모두 좋아했습니다. 요즘 애들 말로 인기 ‘짱’이었죠. 1년 남짓 키우다 부대가 이동하면서 자연으로 날려 보냈습니다.”
제대 후 본격적으로 배워
박씨가 매사냥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것은 1984년 군에서 제대하자마자 금산으로 강종석 응사를 찾아가 배움을 청하면서부터.
“그동안은 매를 키우는 것일 뿐 사냥과는 거리가 멀었거든요. 금산에는 예부터 꿩이 많아 매사냥꾼이 많이 있었는데, 강 선생님이 마지막까지 전통을 잇고 계셨어요. 그동안 내 식대로 하던 것을 다 팽개치고 강 선생님으로부터 처음부터 하나씩 다시 배웠습니다. 70대이셨는데 6년간 배웠습니다. 매의 생태적 특성부터 매를 받는(*매는 영물이어서 잡는다고 하지 않고 산신이 주는 대로 받는다는 표현을 쓴다) 법, 먹이 주는 법, 훈련하는 법은 물론 훈련 및 사냥에 쓰이는 도구를 만들고 사용하는 법을 죄다 물려받았습니다.”
스승은 매우 반가워했다. 집안에서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판에 젊은 놈이 배우겠다고 자처하고 찾아가니 그럴 법도 했다. 더구나 그동안 누구 하나 배우겠다는 이가 없었던 터여서 더욱 그랬다. 직장에 다니고 있었지만 승용차로 40분이나 걸리는 거리를 일이 끝나기 무섭게 달려가고는 했다. 휴
일에는 아침부터 가서 아주 살다시피 했다. 스승한테 배운 대로 유성 쪽 산에서 처음으로 참매를 받았다. 그동안은 새매만 키웠다. 매도 받았고, 사냥술도 전수받고 나니 고민이 생겼다. 하고 싶은 일은 매와 노는 것인데 이미 결혼도 한 마당에 먹고는 살아야 하고…. 한번 마음이 동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10년이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웠다. 개인사업을 하면 매와 함께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학원에 다니면서 전기기사 1급, 소방기사 1급 자격을 땄다. 하지만 밑천이 없다 보니 다시 직업전문학교에 시설관리책임자로 취직할 수밖에 없었다.
“매를 데리고 출근했어요. 야생 맹금류를 길들이려면 스킨십을 통한 교감을 깊게 나누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점심 때 먹이도 줘야 하고요. 그런데 내 일을 다 하면서 매를 키우는데도 회사에서는 싫어하는 거예요. 그러니 어쩌겠어요? 또다시 직장을 접었죠. 대전시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지정받은 직후이니 2000년도일 것입니다.”
뻔한 일이지만 집에서 난리가 났다.
“애들은 커가는데 하고많은 날 매와 씨름만 하니 안 그렇겠습니까? 매만 쳐다보면 밥이 나오느냐 죽이 나오느냐? 그러려면 뭣하러 결혼했느냐? 아예 산으로 들어가라는 등. 이혼 직전까지 갔습니다.
문화재라고 해봐야 당시는 지원금이 월 50만원밖에 안됐는데. 월급 200만원 받던 살림이 되겠습니까? 당시 큰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이었습니다. 몇 달 동안 한마디 하지 않던 아내가 어느 날 조그만 트럭을 하나 사더니 시골로 행상을 다니기 시작하더군요. 참 죽을 맛이었죠. 그런데도 매를 포기할 수 없었어요. 직장까지 때려치웠을 때 이미 각오한 일이었거든요.”
매 길들이기
─ 어떻게 길들이나?
“야생의 매를 받아와 사람과 친해지게 하는 것을 ‘매풀기’ 또는 ‘매고투기’라고 합니다. 선조들이 매 길들이기의 기본 수칙으로 여겼던 것이 있습니다.
우선 ‘주야불이수(晝夜不離手·밤낮으로 함께하며)’하고 ‘좌가측필(坐架側必·좌대는 반드시 가까이 두고 안정시키고)’하며 ‘인중다처(人衆多處·사람이 많은 곳에 데려가 낯설어하지 않도록 할 것)’하라고 했습니다.
고도의 인내력과 집중력이 없으면 매를 길들일 수 없어요. 본능적으로 성질이 날카롭고 드센 데다 자연상태에서 놀던 놈이 사람한테 잡혀왔으니 얼마나 불안하겠어요?
그러니 매가 화내지 않도록 달래가며 자연스럽게 풀어야 하니 시간도 걸리고 밤낮으로 끼고 살지 않으면 절대 곁을 주지 않아요. 인응일체(人鷹一體)가 돼야죠. 매가 사람을 동반자로 여기지 않으면 사냥이 되겠습니까?
날아가 버리면 그만이죠. 매한테 신뢰를 얻기까지는 신주 모시듯 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이겁니다. 매사냥꾼이 매를 굶기고 학대한다는 이들이 있는데, 그건 이 세계를 전혀 모르고 하는 몰상식한 소리입니다. 저는 아무리 매의 상태가 좋아도 절대로 꿩 세 마리 이상은 사냥을 시키지 않습니다.”
─ 매의 크기는?
“참매의 암컷은 보통 머리에서 꼬리 끝까지 65㎝, 수컷은 55~60㎝가량 됩니다. 일반적으로 수컷이 암컷보다 큰데, 맹금류만은 암컷이 덩치도 크고 힘도 훨씬 셉니다. 덩치로 보면 수컷이 3분의 1 정도 작고, 몸무게로 치면 절반 정도밖에 안 됩니다. 몸무게는 야생에서 바로 잡았을 경우 암컷은 1.2㎏인 데 비해 수컷은 600~700g 되죠.
대신 꿩 같은 새 사냥 성공률은 힘은 떨어지더라도 순발력이 좋은 수컷이 훨씬 더 잘합니다. 물론 토끼같이 큰 사냥은 힘이 좋은 암컷이 낫죠. 파워는 암컷, 스피드는 수컷. 그래서 옛날부터 ‘여치매’가 사냥을 잘한다는 말이 있어요. 여치란 여섯 치를 말하는 것이니 수매를 이르는 말입니다.”
‘시치미 뗀다’
─ 몇 살이나 돼야 사냥이 가능한가?
“나이와 관계 없습니다. 어린 매를 보라매라고 하는데, 보라매라고 할지라도 이미 야생에서는 어미한테 생존을 위한 트레이닝을 받았기 때문에 충분히 사냥이 가능합니다. 맹금류는 기본적으로 유전자 속에 사냥본능이 내재돼 있기도 하고요. 다만 나이가 어리다 보니 경험이 부족해 성공률이 낮기는 합니다.
하지만 응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것이 보라매입니다. 사람도 젊었을 때 물불을 가리지 않듯, 매도 보라매일 때 패기가 가장 넘치기 때문이죠. 보라매고 산진이고 개체의 성격에 따라 달라요. 보라매라도 순한 놈은 잘 풀리고, 산진이라도 엉성한 놈도 있고 그래요. 그래서 옛날에는 길이 잘 들어 꿩을 잘 잡는 매는 황소 한 마리 값과 맞먹었다고 그래요.”
─ 매사냥은 어떻게 하나?
“혼자서는 절대 안 되고 팀을 이뤄야 합니다. 단체로 즐기는 레포츠인 셈이죠. 매사냥이 마을 단합에 도움이 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꿩을 몰아주는 ‘몰이꾼(털이꾼)’, 매를 다루는 ‘봉받이’, 매가 날아가는 방향을 봐주는 ‘배꾼’으로 구성됩니다. 보통 몰이꾼 대여섯 명에 배꾼이 두세 명은 돼야 하니 한 팀에 열 명 정도는 있어야 합니다.
이 중 봉받이는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있다 몰이꾼이 꿩을 발견하고 “매요!”라고 소리치면 “매 나간다!”는 고함과 함께 매를 날립니다. 매는 500m 밖에서 신문 글자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시력이 좋은 데다 날갯짓 없이 바람만 이용해 내리꽂힐 수 있기 때문에 시간만 잘 맞으면 대부분 사냥에 성공합니다.
그런데 꿩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면 이를 뒤쫓는 매도 잃어버릴 염려가 있기 때문에 항상 배꾼이 매가 날아가는 방향을 잘 봐줘야 합니다. 매가 꽂힌 방향으로 가급적 빨리 달려가 매를 찾아야 하는데, 너무 늦으면 사냥감이 남아나지 않기도 하거니와 배가 부르면 주인이 불러도 말을 듣지 않고 엉뚱한 곳으로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죠. 매
사냥에서 특히 필요한 것이 사냥에 성공한 매를 먹이에서 떼는 일이에요. 맛도 보기 전에 너무 빨리 떼면 화가 나서 도망가버리기 때문에 조금은 먹도록 해줘야 맛은 아는데 감질나 또 다른 사냥감이 나타나면 덤벼들게 되죠. 몸통은 사람이 먹어야 하니 주로 골을 파먹도록 하죠. 그것을 ‘골단장’이라고 합니다.
매가 멀리 날아갈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매사냥에서 꼭 필요한 것이 ‘시치미’라는 것입니다. 시치미는 매 주인의 이름표(소뿔을 갈아 길이 5㎝ 정도의 조각에 이름을 새김)이기도 하지만, 수풀 속에 있는 매를 찾는 데도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장치입니다. 시치미에는 두 개의 방울과 함께 가운데 흰 깃(고니나 거위 깃)을 달아 놓는데(꼬리 깃이 12개로 6, 7번 울대에 매단다), 청각과 시각을 동원해 매를 찾기 쉽게 하기 위한 겁니다.
옛날 매사냥이 활발하던 시절 매가 산 너머 멀리까지 날아가 어떤 사람이 발견하고는 주인의 이름표가 달린 시치미를 떼어버린 뒤 자기 매라고 우기는 경우가 왕왕 있었어요. 매꾼은 자기 매를 훤히 아는데도 말이에요. 우리말 가운데 뻔한 데도 거짓으로 우기는 경우 ‘시치미 뗀다’고 그러잖아요?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겁니다.”
─ 사냥갈 때는?
“사냥갈 때는 평소 매놓은 끈을 풀어 데리고 나갑니다. 그때부터는 모든 것이 매 마음대로입니다. 그래서 매사냥은 응사와 매의 교감이 원활하지 못하면 할 수 없습니다. 매는 저를 주인으로 생각해줘야 하고, 저는 매를 믿어야 합니다. 매가 수틀리면 날아가면 그만이니까요. 그래서 평소 정성을 다해 매를 돌보고 사랑을 느끼도록 해줘야 하는 겁니다. 한번 사람한테 놀라면 절대로 그 매는 길들여지지 않습니다. ‘옹고집’이라는 말의 유래가 ‘응(鷹)고집’인 것이 무리가 아닙니다.”
─ 사냥 가기 전에는 굶기나?
“아뇨. 대신 ‘솜밥’을 먹입니다. 안에 솜을 집어넣고 거죽만 얇게 고기로 싸 전체를 고기덩어리로 보이게 한 것이 솜밥입니다. 배가 고프니 얼른 받아먹는데 포만감을 느끼기 무섭게 소화돼버리니 금세 다시 허기를 느낍니다. 특히 솜은 소화가 안 돼 18시간 정도 지나면 토해냅니다. 맹금류는 먹이를 먹을 때 깃털과 뼈까지 먹고는 소화가 안 되는 것들은 토해내는 습성이 있습니다.
일종의 생명을 보호하려는 본능적 장치인 셈이죠. 이를 ‘티 뱉는다’고 하는데, 솜이 심지 역할을 해 위에 남아있던 기름기까지 싹 훑어내는 통에 매는 배가 고파 환장하게 되는 겁니다. 그 상태에서 데리고 가야 제대로 사냥을 하는 겁니다. 매 한 마리가 하루 생닭 반 마리는 먹습니다. 보통 몸무게가 1200~1500g 정도 나가는데 사냥할 때는 500g가량 줄여야 합니다.
체중을 줄이는 것을 ‘살 맞춘다’고 합니다. 그런데 너무 살 맞춤을 하면 힘이 없어 사냥을 하지 못하고, 몸무게가 많이 나가면 배가 부르다는 이유로 사냥을 하려 들지 않기 때문에 살 맞추기가 매사냥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기즉부인 포즉양가(饑卽附人飽卽쿷家·배고프면 사람을 따르고, 배부르면 산으로 달아난다)’입니다.”
─ 실제로 종종 팀을 이뤄 매사냥을 하는가?
“매사냥은 주로 겨울철에 하는데, 아시다시피 시골에 젊은이들이 많지도 않을 뿐더러, 있어도 모여서 화투나 치면 쳤지 추운데 산으로 쏘다니면서 하려고 들지 않아요. 그래서 1년에 한두 번 동호인들과 함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호연지기를 키우고 자연친화적인 레포츠임에도 형편이 이렇다 보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고유민속이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매사냥은 이미 끊긴 겁니다.”
겨울철 레포츠
─ 매의 수명은?
“참매와 송골매는 15~20년, 새매와 황조롱이 같이 덩치가 작은 놈들은 10년 정도 됩니다. 사냥은 어차피 먹고 살아야 하니 죽을 때까지 하겠지만 저는 길어야 3~4년 정도 하고 다시 자연으로 돌려보냅니다. 지난해에도 시연회를 끝내고 2월 초 ‘창’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던 참매를 방사했습니다.
5년 데리고 있던 놈인데, 사냥을 기막히게 했던 선수 중의 선수였습니다. 지금쯤 어딘가에서 잘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동안 제가 받은 매만 어림잡아 50~60마리쯤 되는데, 훈련 도중 날아가 잃어버린 놈들도 10여 마리는 족히 됩니다.”
매사냥꾼과 관련해 ‘삼 뜯기’라는 말이 있다. 매는 꿩의 털을 뜯고, 매꾼의 옷은 나뭇가지가 뜯고, 매꾼 마누라는 땔거리를 위해 사립문을 뜯는다는 말이다. 요즘 박 응사의 생활이 꼭 그 짝이다. 부인이 행상이며 음식점 종업원, 풀빵장사, 빙수장사, 고속도로 검표원, 정수기 관리인 등 안 해본 일 없이 억척을 떤 덕분에 두 아들을 대학에 보내고 간신히 입에 풀칠하는 신세다.
응방에서 온 식구가 매와 함께 살다 애들이 크면서 전세로 들어간 20년 된 15평짜리 아파트도 원금(2000만원)을 야금야금 빼먹어 절반 조금 넘게 남았고, 그나마 가스비가 밀려 지난 겨울에도 툭하면 냉방신세가 되고는 했다. 빚이 3000만원을 넘어도 눈 하나 꿈적하지 않고 아파트 거실에서조차 매와 잠을 자는 강심장이니 말해 무엇하랴.
“가족이 응방에서 함께 살 때 매를 산에서 받아오면 매가 놀랄까 봐 어린 애들이 마음대로 뛰지도 못하게 했거든요. 애들이 환장하죠. 그래서 겨우 아파트를 얻은 것입니다. 매를 키울 집을 얻는 것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에요. 매란 놈들이 꽥꽥 울어대니 시끄러워 이웃들이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죠. 지금 이곳도 비교적 외진 곳이어서 그나마 어렵사리 얻을 수 있었습니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가능성
문화재가 되고 나서 그동안 쫓겨 다닌 것만 다섯 번입니다. 처음에는 뭣 모르고 빌려줬다 툭하면 나가라니, 매는 있고…. 잘 데가 없어 변두리로 집을 찾아 돌아다니기를 수십 번 했어요.
2004년에는 구도동 산 밑에 독채가 비어있기에 전세 계약을 하고 들어갔다 한 달 만에 쫓겨나기도 했어요. 지금의 이 자리도 집사람이 어떻게 아는 이를 통해 2005년에 간신히 얻은 것입니다. 보증금 없이 월 20만원에 쓰고 있어요.
응방 유지비만 최소 월 100만원은 듭니다. 시에서 문화재전승지원보조비로 70만원 받는 것으로는 먹이 값도 안 됩니다. 정말 어려움이 많습니다. 어려운 분야일수록 맥이 끊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도 지쳐 고민 끝에 대전 동물원에 코너를 마련해달라고 말해봤더니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합디다. 가장으로서는 빵점이죠. 아내 입장에서 보면 이혼감이에요. 그런데 제 입장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돼요. 교감을 하고 훈련하려면 ‘투 잡’을 할 수 없어요.”
하지만 박 응사에게도 최근 한 가지 희망이 생겼다. 매사냥이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제안으로 매사냥을 하는 몽골·체코·벨기에·오스트리아·요르단·프랑스·모로코 등과 함께 우리나라도 포함돼 5월 요건 심사를 거쳐 9월쯤 판가름나는데 이변이 없는 한 통과될 것으로 기대한다.
“지난해 8월 대전시에서 신청해놓은 상태예요. 어쨌든 되기만 하면 저 개인의 영광은 둘째 치고 국격(國格)을 높이는 일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찜찜한 구석이 있어요. 한 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 지방문화재 차원에서 다뤄진다는 점입니다. 매사냥이 어느 특정지역에서만 이뤄진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 전역에서 성행하던 우리의 대표적 수렵문화 아닙니까?
격이 맞지 않아요. 그래서 유네스코 건을 계기로 문화재청에 국가지정문화재로 해달라고 했더니 이미 지방문화재로 돼있어 곤란하다는 겁니다. 전남지방문화재인 ‘옹기장’과 전북지방문화재인 ‘한지장’은 국가 지정으로 승격을 시켜주면서 말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한마디 하죠. 얼마 전 이명박 대통령이 원전 수주를 위해 아랍에미리트에 갔었잖아요?
그런데 국왕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국왕이 매사냥 이야기를 꺼내더랍니다. 지금도 그 나라에서는 고려 때의 응방(鷹坊) 같은 기구를 설치해 놓고 매사냥을 즐기거든요. 이 대통령이 우리도 매사냥을 한다고 맞장구를 쳤대요. 당연히 그 바람에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을 것 아닙니까? 결국 매사냥이 무려 400억 달러짜리 원전 수주에 일조한 셈이죠. 일국의 전통문화란 이런 겁니다. 그러니 제가 국가지정문화재가 못돼서 환장한 놈도 아니지만 제발 높으신 분들이 사리에 맞게 일을 처리해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박 응사는 매한테서 옛 선비의 상을 본다. 호랑이는 주려도 풀을 먹지 않듯, 매 역시 굶어 죽어도 벼 이삭은 먹지 않는 것은 올곧은 자존심 하나로 사는 선비와 같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도 매의 해맑은 눈동자를 볼 때마다 가슴이 설렌다. 그는 말한다. 하늘의 왕자와 친구가 되고픈 어릴 적 꿈을 이뤘고, 지금도 그 꿈을 먹고 살므로 비록 출세는 하지 못했을망정 성공은 했노라고.
글 이만훈 월간중앙 기획위원 [mhlee@joongang.co.kr]
사진 최재영 월간중앙 사진부장 [presscom@hanmail.net]
/월간중앙/조인스
첫댓글 대단한 분이시네요. 아내되시는 분이 고생 많이 하셨을 거 같은데.. 그래도 그런 내조 덕분에 오늘까지 해내실 수 있었겠단 생각도 들구요. 나라에서 적당한 대우를 해주셨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