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4일(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예수님을 섬기는 사제들
지도자가 된다는 건 참으로 크고 무거운 십자가다. 지도자는 공동체로부터 섬기고 봉사하는 직무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요즘 대통령 부부를 보면서 부글거리는 가장 큰 이유는 그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말로만 국민을 섬기고 국민의 명령을 따르겠다고 하기 때문일 거다. 권위는 섬김과 봉사에서 나온다.
전례력으로 한 해를 마감하는 주일에 우리는 예수님이 온 누리의 임금이라고 고백한다. 다른 종교를 가졌거나 무신론자들은 이런 우리 고백이 불쾌하게 들릴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자기를 진심으로 섬기고 봉사하는 이를 신뢰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거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섬기고 봉사하셨다. 그분은 한없이 낮아지셔서 우리에게 한없이 높은 분, 임금님이 되셨다. 하느님이셨지만 피조물인 사람들에게는 종으로 사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다(필리 2,10-11).” 부모가 자녀들 앞에서는 한없이 그리고 끝까지 낮아지고 작아지고 약해지는 건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자녀들에게는 영원한 임금으로 남는다. 부모의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 예수님의 낮아짐과 섬김을 가리킨다. 하느님이 높은 분이거나 마지막 날에 나에게 선고를 내리는 판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낮아질 수 없을 데까지 낮아지고, 자신이 아니라 외아들을 희생시키기까지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의 하느님, 나의 영원한 임금이시다.
오늘 복음에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신문한다.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요한 18,33)” 이 질문을 두 번이나 한다(요한 18,37). 이에 예수님은 ‘예, 아니오’ 대신 그에게 되물으시거나 그를 가르치신다.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누가 누구를 신문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이상할 정도로 예수님의 이 당당한 모습은 관아에 끌려가 신문을 받던 우리 순교 성인들, 교우들의 목을 베면서 두려워했던 망나니들, 큰 지진으로 감방 문이 다 열렸는데도 도망치지 않았던 바오로와 실라스 앞에 무서워 떨며 엎드렸던 그 간수(사도 16,29)를 떠올리게 한다. 예수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리는 좌도 우도, 구불구불하지도 않고 똑바로 하느님을 가리킨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세상처럼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는다. 우리는 바로 이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신문 끝에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예수님께 되물으며 그에게는 죄가 없다고 판결한다(요한 18,38). 예수님은 죄가 없지만 백성들이 원하니 죽게 한 거다. 바라빠라는 죄인은 풀어주고. 죄 없는 예수님은 사형 선고를 받으셨다. 예수님은 죽고, 죄인은 살았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나는 영원히 살게 됐으니 그분은 나의 영원한 임금이다.
빌라도와 예수님 사이 이상한 신문 모습은 마지막 날 나와 예수님 사이 만남을 상상하게 한다. ‘형제여, 당신은 나를 임금으로 모셨습니까?’ ‘나를 임금이라고 부른 건 형제의 진심이었습니까?’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숨기거나 교묘한 말재주로 그분을 속일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그런 건 여기서나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모두 세례를 통해 사제직을 받았다. 그리스도인은 하나하나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께 제사를 봉헌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피로 우리를 죄에서 풀어주셨고, 우리가 한 나라를 이루어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셨다(묵시 1,5-6).” 그분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 나라는 속임수와 반칙이 난무하고 이랬다저랬다 하는 이 세상과 완전히 다르다. 사실 그곳에서는 재판이 필요 없다. 모든 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영원하신 하느님께 받은 이 고귀한 품위를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이를 위해 내가 섬기는 분이 어떤 분이신지, 내가 마지막 날에 어떤 질문을 받는지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제로 이웃을 섬기고 가장 작은 이들에게 잘 해주라는 사명을 받았다. 우리는 이렇게 세상을 다스리며 그분의 영토를 확장시켜 나간다.
예수님, 주님은 저의 영원한 임금님 저의 하느님이십니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세상을 위해 기도할지언정 그 안에 너무 깊이 빠지지 않게 해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굽은 자로도 직선을 그으시는 주님을 신뢰하게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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