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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고조선,부여,발해 등 고대사토론방 제가 생각하는 고조선의 서계와 왕험성의 위치입니다.(구멍 많음. 비난 사절, 비판 환영^^)
明治好太王 추천 0 조회 1,376 10.07.07 18:27 댓글 43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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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07.08 00:45

    첫댓글 비난은 감히 하지 않겠구요^^. 낙랑군에 대해서는 복잡하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넘기고 일단 저도 님이 말씀하신 낙랑군과 왕험성을 등치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의문이어서 이 견해에는 공감합니다. 그리고 고조선의 전성기 영토는 제가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 분야라 관심을 가지고 보았는대요. 님은 일단 서변을 대릉하 유역으로 보고 있다고 판단이 되네요. 거기에 대해서 주로 한대의 사료를 가지고 설명을 하셨네요. 그런데 연소왕이 고조선과 전쟁하기 직전의 영토를 간단히 살펴보면 의외로 난하 너머 북경 인근이라고 볼 수 있어요. 참고자료에 배진영님의 글을 읽으셨다면 연소왕 시기까지도 연이 북경 일대 영정하를 벗

  • 10.07.08 00:51

    어나지 못했다고 하거든요(배진영님 저서는 읽지 않았고 박사학위논문을 근거로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연소왕시기에 연과 조선이 접하고 있었다는 것은 전국책 연책에 실려있는대로구요. 어떤 이들은 생각보다 서쪽이라고 이상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아마도 연쾌왕 시 자지의 내란때 고조선과 동호가 연을 침공 영토 일부를 빼앗은 것으로 생각되고 진개가 인질로 간 것도 이시기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배진영님이 소왕의 고조선 침공시기에 대해서는 박대재님도 그대로 따르고 있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비판적입니다. 하지만 배진영님의 연소왕의 5군 고증은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참고가 되셨으면 하고요.

  • 10.07.11 04:50

    전국책에서 연과 조선이 연접했다라는 기록이 혹시 [연의 동쪽에는 조선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와 누번이 있으며...] 를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이런 글과 가장 밑의 댓글을 읽어보시는 것은 어떠신지요? http://shaw.egloos.com/1555915 저는 그 포스팅에서 말하는 것이 설득력 있다고 생각이 되나서.. 그리고 연의 내란 시기에 동호나 조선이 연을 침공했다는 사료를 저는 들어보질 못했는데 일단 그 부분을 추론에 의존하셨다면 제 생각에는 연이 내란 상태라고 하더라도 군대 운용단위가 10만 단위가 되는 시점에서 그보다 병력 자원이 떨어지는 동호가 약탈 수준이 아닌 점령이 가능할런지는 모르겠습니다.

  • 10.07.11 04:50

    물론 유목 군대이고 대략 100여년 뒤지만 흉노 묵특선우가 제국을 건설하기 전 가장 경계했던 강국이 동호이긴 해서 불가능하다고까지 할 수는 없겠죠. 그런데 조선 같은 경우는.. 병력 자원도 만 단위 정도고.. 적어도 조선이 내란 상태의 연을 침공해서 영정하 부근에서 연과 연접했다라는 가정은 무리수인 듯 싶습니다. 차라리 동호가 영정하까지 밀고 내려갔다가 그나마 가능성이 있겠는데 그정도 큰 사건이면 기록이 안된 것도 좀 그래서 동호가 실제 소왕 이전에 연을 크게 침공했는지도 저는 좀 의심이 갑니다. 애초에 연의 동계가 영정하 부근에서 왔다갔다 했었다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뭐 제가 연나라 영토 변화를 아는 건 아니니..

  • 10.07.11 13:42

    솔직히 저 포스팅 보았는데요 오바질하지 말라는 것이 거슬리네요. 어쨌든 조선 요동에서 조선을 건너야 요동이 있으므로 조선이 요서에 있다 무리다 이런 이야기인데 저도 이 이야기 동의합니다. 진작에 나온 반론이죠. 염철론 기록은 어차피 모호. 결국 연의세력변화로 조선과 연의 경계를 정해야 한다고 하는데 제 말이 그겁니다. 애초에 영정하 부근에서 연의 영토가 왔다갔다 했습니다. 그럼 연소왕이 고조선과 싸우기 직전에는 어떠했느냐, 그 때에도 사정은 비슷했습니다.영정하 부근. 그런데 전국책 연문후와 소진의 이야기에서 소진이 연이 조선과 접해있다고 나오지요.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고조선은 연과 접하고 있었고 그것은 영정하

  • 10.07.11 13:46

    부근입니다. 그런데 더중요한 것은 연책의 기록은 실제로는 연소왕의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소진은 사실 연소왕때 활약한 인물이고 전국책이 연대착오가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구요. 결국 연소왕때 연의 그 세력범위란 것이 영정하 부근에 머물러 있었는데 고조선이 연과 접해 있었던 거지요. 그리고 연소왕 직전에 일어났던 내란에 대해 너무 가볍게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요. 자지의 내란은 연 내부에서 연왕실과 자지세려과의 내전에 겹쳐서 제나라가 침공해 왔기 때문에 사실상 수년 동안 나라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연의 군사력을 논의하는 무의미합니다. 그리고 잔개가 동호에 인질로 가 있던것 말인데요

  • 10.07.11 13:54

    진개가 인질로 왜 간 것일까 그것은 내란과 망국(실제 멸망에 가까웠습니다)으로 인해 동호가 일시적으로 우위를 접했기 때문이겠구요. 내란과 제의 침공으로 태자마저 사망해서 조에 있던 공자직이 조의 후원으로 겨우 연을 다시 세우고 왕이 된 것이 소왕입니다. 사실은 조나라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구요. 이 정도 상황에서 연과 접하고 있던 동호와 조선이 그대로 있었다는 것이 더 이상하지요. 소왕은 늘 제나라를 두려워하면서도 굳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제 동호 조선을 공격한 것은 결국 망국에 대한 복수였던 것입니다.

  • 10.07.11 19:56

    어.. 전국책의 연접기사가 위에서 언급한 그것이라면 저 기사가 조선과 연이 국경을 접했는지의 여부를 알 수는 없다는 얘기가 되는 것 같군요. 동쪽에 어떤 나라와 지역이 있단 얘기지 접하고 있다는 얘기는 또 별개가 되니까요. 그러고보니 동호가 왜 나오지 않은 것인지 좀 의아하긴 한데 그 점에서 보면 소진이 대략의 얘기를 한 것일 뿐 저 발언에서 어떠한 지정학적 정보를 뽑아내기란 좀 애매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기본적으로 저는 연과 조선 사이에 동호가 끼어있어서 연접했다라고 생각하치는 않고 이는 비파형동검 출토지역으로도 증빙이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노아호산 서쪽으로 고조선이 나왔다고 하기 그래서요...

  • 10.07.11 19:58

    일단 연의 내란 정국에 대해서는 저도 개론상의 얘기 정도 밖에 모르는 지라 모르는 걸 아는척 할 수는 없어서 언급하긴 그렇습니다만 일단은 동호의 침공이 있었다고 전제한다면 영토를 상실할 정도의 큰 일이 기록에 없는 것이 의아하고 설사 침공했다고 하더라도 동호는 모르겠지만 조선이 그랬을지는 의문이라는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저는 조선과 연이 연접했다고 생각하진 않아서 동호를 넘어 조선이 약탈을 했다면 그건 모르겠지만 영토를 뺐었다라고 하는 것은 제 딴에는 말이 안되서요. 그리고 중앙의 내란이라서 변방 군대까지 소멸되었다고까지 해야할지는 또 모르겠어서...

  • 10.07.11 20:02

    그리고..진개가 인질이 된 이유는 동호의 침공 때 포로로 잡혀갔다는 것이 님의 추측이 그렇다는 것이지 그것을 뒷받침할 근거가 미약한 이상 추론은 추론 이상이 되기 어렵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인질로 간 사정이 다른 이유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도 있으니까요. 음.. 아무튼 제가 연의 내란에 대해서 정황을 정확히 모르는 한 뭐라 말하긴 어렵겠군요. 기회가 닿는다면 배진영 선생의 책을 읽어봐야지 알겠습니다만 전국책의 연접 기사는 좀 확대해석한 감이 없지 않은 듯 싶습니다.

  • 10.07.11 21:29

    노로아호산은 요서에서 가로지르고 있는데 굳이 노로아로산 서쪽으로 고조선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해가 안되네요. 노로아호산 북으로 고조선이 넘어가는 것이 이상하다면 이해가지만, 노로아호산을 경계로 북에는 동호 남에는 조선이 있다고 하면 쉽게 설명이 되는데요, 게다가 복기대씨에 따르면 청동기 초기 문화인 하가점 하층문화가 노로아호산을 경계로 북으로는 하가점상층문화 남으로는 릉하문화로 갈라지고 릉하문화는 비파형동검문화를 특색으로 하지요. 게다가 노로아호산 북쪽으로 유병식 동검과 공병식 동검이 주로 출토되지요. 특히 공병식은 노로아호산 북쪽에 주로 분포하여서 동호로 보아도 크게 이상이 없습니다

  • 10.07.11 21:30

    굳이 복기대씨의 연구결과가 아니라고 해도 중국의 연구자도 비슷하게 설명을 합니다. 본래 노로아호산 남북을 통합하고 있던 전기청동기문화가 서기전 천년경 이후 노로아호산을 경계로 남북으로 나누어져 서로 다른 성격을 띄게 된다고, 이것은 점차 이 지역이 건조화되면서 노로아호산 이북지역이 오늘날 보는 것처럼 초원지대화 됨으로써 남의 농경지대와 분리되게 된다고. 이 지역의 문화는 이전부터 요동지역의 문화와 친연관계에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고조선이 이 지역으로 점차 진출 적어도 서기전 4세기 이전에는 이 지역을 장악하여 연과 접하게 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10.07.11 23:09

    노노아호산은 요서를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가로지르는 산맥이라 그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그래서 남북으로 나누든 동서로 나누든 큰 의미는 없지요. 그리고 꼭 지형의 제한을 두고 얘기하기 보다 비파형동검 분포지역을 가지고 얘기하는 것이죠. 연 소왕 이전에는 영정하 부근에서 연의 영토가 왔다갔다라고 하신 것은 세머리매님이셨는데 그러면 조선과의 접점이 없는게 아닙니까? 유병식 동검을 사용한 산융이 이후부터 연에 복속되어서 이후 조선과 경계를 접했다라고 전제를 한다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제 환공 때 산융이 정복되고 나서 이후에는 산융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요? 제가 그 책을 읽어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군요.

  • 10.07.12 04:01

    사실 전성기 고조선의 영토 문제에 대해 댓글로 모든 문제를 정리한다는 것은 어렵겠지요. 저는 저의 생각의 일부를 밝혔고 님의 대체적인 의견은 잘 알겠습니다.

  • 10.07.12 04:19

    세머리매님이 연 소왕 전에는 영정하 부근에서 왔다갔다라고 하시기에 좀 의아해서배진영 선생의 박사학위 논문을 인강 듣기 전에 잠깐 검색해 훓어봤습니다. 보니 중심 권역이 영정하 북쪽을 넘지 않았다란 얘기지 영토 북한계가 영정하 부근에 있다는 얘기는 아니었는데 혹시 이 부분을 잘못 이해하신 것은 아니신지요? 일단 조선이 연과 연접하지 않았다고 제가 입장을 세운 것은 조선이 그러한 논의 하에서 영정하 부근까지 왔다고 하기에는 비파형동검 출토권역과 안맞기도 하고 연 소왕 전의 연의 영토가 너무 작아지기 때문에 문제제기 수준에서 반론을 한 것이었는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굳이 연접을 부정할 이유가 없어지겠군요. 음....

  • 10.07.12 04:17

    확실히 알아보고 얘기를 해야했는데 제가 전제 확인을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에서 얘기를 하다보니 뭔가 얘기가 산으로 가서 제가 무리한 얘기를 해버린 감도 없지 않네요. 이 부분은 좀 죄송하군요.

  • 10.07.08 01:00

    저도 비난은 사절이예요.^^ 소심 소심*^^*잘 읽었습니다.

  • 10.07.08 13:40

    저도 요수 난하설을 신봉하지 않지만 님께서 이를 부정하는 근거로 제시한 갈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합니다. 님께서 말씀하시는 갈석산은 현재 창려의 갈석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수경주에서 여도원과 위소가 설명하고 있는 ‘한무제가 찾았던 갈석’은 바닷가의 천교주(天橋柱)로 현재 창려의 갈석산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이 천교주의 위치가 난하의 어느 쪽에 있었는지 수경주 상에서는 알 수 없습니다. 만약 천교주가 난하의 서쪽에 있었다면 요서(최소한 그 일부가)가 난하의 서쪽에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 10.07.08 13:40

    따라서 현재의 갈석산이 난하의 동쪽에 있으므로 난하 요수설이 타당치 않다는 결론은 성급해 보입니다.
    설사 현재의 갈석산이 한무제의 갈석이라 하더라도, 님께서 지적하셨다시피 요동과 요서의 기준이 요수였는가를 알 수 없고, 요수의 동쪽을 ‘요’(요동+요서)라고 하였을 가능성도 있고 수경주 류수편에서 언급하고 있는 제환공의 일화를 설원(説苑)에서는 요수라고 기술하고 있으므로(有水曰遼水表之) 요수 난하설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 작성자 10.07.08 15:08

    현재의 갈석이 사기에 나온 갈석이 아니라는 것은 뚜렷한 증거는 없어보입니다. 거론하신 수경주도 명확하지 않지요. 설원 변물편에 나온 내용은 관자를 재해석한 것인데, 정작 원전이 되는 관자에는 요수 관련 내용이 없습니다. 桓公北伐孤竹, 未至卑耳之谿十里, 闟然止, 瞠然視, 援弓將射, 引而未敢發也, 謂左右曰:?見是前人乎??左右對曰:?不見也. ?公曰:?事其不濟乎?寡人大惑. 今者寡人見人長尺而人物具焉; 冠, 右袪衣, 走馬前疾. 事其不濟乎?寡人大惑. 豈有人若此者乎??管仲對曰:?臣聞登山之神有兪兒者, 長尺而人物具焉. 霸王之君興, 而登山神見; 且走馬前疾, 道也; 袪衣, 示前有水也; 右袪衣, 示從右方涉也.

  • 작성자 10.07.08 15:16

    이는 유향이 관자를 편집하다가 임의로 기술한 오류로 봐야 할 것입니다. 제가 요동과 요서를 나누는 기준이 뭔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그렇지, 저는 요수가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단순히 遠의 의미로써 遼가 특정한 지명(혹은 수명)이 아니라 단순히 遠의 의미라면 遼東, 遼西 말고도 遼北, 遼南이라는 사례도 있어야 하는데, 이러한 사례는 제가 아는 선에서는 전무합니다. 요수의 동쪽을 ‘요’(요동+요서)라고 하였을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합니다. 요수의 동쪽이 요동+요서 다 포괄하는 개념이라면 굳이 요서, 요동을 구분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 10.07.08 16:39

    유향이 요수로 잘못 기술한 것이다라는 설은 서영수 선생이 제시한 것인데, 서영수 선생의 의견은 조금 궁색해 보입니다. 유향은 전한 때 살았으므로 당시의 요수가 어디에 있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환공이 산융과 고죽국을 정벌하여 얻은 땅을 연나라에 주었는데 이 때 요하(설원의 요수=한의 요수로 생각하면)를 건넜다고 한다면 지금의 난하 부근부터 요하 동쪽까지의 땅을 점령하여 연에 주었다는 것이 되는데 이런 터무니 없는 이야기를 자신의 저서에 남길 까닭이 있을까요?

  • 10.07.08 16:46

    만약 그렇다면 연소공 때 2000리 땅을 얻어 설치하였다는 요서, 요동군을 유향은 어디라고 생각하였을까요?
    저는 유향이 고대의 요수를 난하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긴 중요한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패수의 이동처럼, 요수의 위치도 변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유향이 오류를 범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타당성이 있어 보입니다.
    갈석에 대해서는 어차피 정확치 않고 또 많은 학설이 있으니 설왕설래는 무의미하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 작성자 10.07.08 17:04

    만일 오기가 아니라면 이렇게 보면 어떨까 싶군요. 고죽국은 사료마다 다른 곳에 위치해있습니다. 그 범위는 연산산맥부터 조양까지 다양합니다. 이는 고죽국의 위치가 유동적이며 점점 동쪽으로 이동했다는 추측이 가능하지요. 저는 본문에 적었다시피 고조선 시기 요수에 있어서 현 요하설을 지지하지 않으며 대능하설을 지지합니다. 고죽국이 대능하 이서의 객좌 쪽에 있고 요수가 대능하라면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요수=난하 설은 사기에서는 요서의 시작점을 갈석이동이라 하였고, 염철론에서는 고조선과 전국시대 연의 경계를 요동으로 잡은 이상 성립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 10.07.08 20:12

    요서의 시작이 갈석부터라는 사기의 기록을 모르겠습니다. 2세 황제나 시황제의 순행이라면 갈석이 요서에 있다는 정도의 의미라고 생각됩니다만...제가 모르는 기록이 있다면 알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고죽국을 대릉하 이서로 비정해도 진개의 정벌로 얻은 천리 또는 이천리의 땅에 요동과 요서군을 설치하는 부분에서 문제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염철론에 연은 갈석에 의해 막히었다는 표현을 진개 이전의 기록으로 보더라도 제환공으로부터 받은 땅은 난하를 넘을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유향이 생각한 고대의 요수는 난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 작성자 10.07.09 01:01

    갈석에 이르러 요서로부터 순행했다는 기록은 사기 효무제 본기에 있습니다. 요수=대릉하로 봤을 때 연이 조선으로 침략할 때 요동을 건넜다는 것으로 봐서 당시 연이 조선에게서 얻은 성과는 요서, 요동 2군이 아니라 요동군 하나로 대릉하부터 요하 일대까지로 별 문제는 없어보입니다. 그리고 갈석에 의해 막혔다는 표현으로는 연의 서계를 갈석으로 단정지을 수 없습니다. 전국책에서는 연의 남쪽에 갈석이 있다고 했으니까요.

  • 10.07.09 09:05

    한무제가 갈석에 이르러 요서로부터 순행했다는 기록은 갈석이 요서에 있다는 내용으로 보아야지 갈석이 요서의 시작점이다로 보는 것은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연이 세운 동북방의 5군은 진개의 정벌 이후로 보는 것이 대부분 사가들의 공통된 의견 아닌가요? 아무튼 님의 답글에 약간의 오류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요서(난하에서 대릉하 사이)는 제환공으로부터 얻었고, 요수(=대릉하)를 건너 얻은 요동은 진개의 정벌 이후로 대릉하부터 천산산맥까지로 이해하면 될까요? 이게 님의 본 글의 논지와도 일맥상통해 보입니다.

  • 작성자 10.07.11 16:33

    갈석이 요서의 시작점이라는 것은 제가 편의상 말했습니다. 사실 요서군의 서계가 난하 이서까지 살짝 걸치기는 합니다. 갈석이 요서에 있다는 뜻으로 보더라도 그 갈석은 현 난하 이동입니다. 난하 이동이 현재처럼 요서로 칭해졌던 것이지요. 나머지 사항은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 10.07.08 16:49

    고조선이 한나라와 같이 있던 시대보다, 하나라-은(상)나라-주나라와 접해있던 시기에도 존재해온 나라인데,
    그 당시의 지역도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네요.
    지형은 보고도 잘 모르겠네요. 많이 배우겠습니다.

  • 10.07.09 20:43

    대요수를 현재 란하의 동북지류인 폭하로 비정하는 사람입니다.

    님께서 요동과 요서를 나누는 요수를 대릉하로 볼 수 있다고 하였는데,
    그렇게 보는 근거로 어떤 기록이 있는 것인가요?
    담기양의 지도집을 보니 대릉하로 요서와 요동을 나누었는데, 혹시 저 지도집을 근거로 하는 것인가요?
    저 지도집은 어양군 이동 군들의 면적을 지나치게 표시하여 지금의 요하를 넘겼다고 보고 있습니다.

    한서 지리지에서는 염난수와 대요수가 요동군 서안평현과 안시현에서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또 염난수는 2100 리,대요수는 1250 리 길이라고도 기록해 놓았습니다.
    따라서 대요수의 하류에는 대요수보다 더 길고 큰 염난수가 나란히

  • 10.07.09 20:46

    흘러야 한다고 보는데, 현재의 대릉하를 대요수로 본다면 하류에서 가까이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염난수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 작성자 10.07.10 02:14

    댓글을 다시려거든 본문 정독해주시지요. 저는 담기양 지도를 근거로 한 적 없습니다. 담기양의 지도는 시각자료일 뿐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후한 어느시기에 빠르면 반고가 한서를 편찬하던 시기에는 요수가 대릉하에서 요하로 바꼈을 것이라고 분명히 언급했습니다. 두 곳에서 같은 말 반복하는 것은 저도 힘들고 님과의 토론은 시작했으니, 블로그에서 마저 하시는 것이 어떻겠는지요? ^^;

  • 10.07.11 15:29

    거의 마지막 질문일듯 합니다.
    진이 연을 멸하고 패수를 넘어 조선을 멸하였다 하였고, 한이 옛장새를 수리하여 패수를 경계로 하였다 하였으니 연과 조선의 경계를 패수(한자를 어찌 썻던...)로 보시는데 대해 이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 때 문현과 번한현의 위치를 고려하신 때문인지 만번한이라 일컷는 경계를 천산산맥으로 보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차라리 패수(요하)를 연과 조선의 경계로 보시고, 만번한을 요하의 서안으로, 왕검성을 요하의 동쪽 어딘가로 비정하시면 진의 조선 침공으로 왕검성이 함락되었고, 요하부터 천산산맥까지 요동외요를 설치하였으나 곧 조선에게 다시 빼앗겼다....로 보시는 건 어떨지요?

  • 작성자 10.07.11 15:54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이래 위략에 나온 만번한은 한서 지리지의 문현과 번한현을 연칭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위략에서는 조선과 연의 경계가 처음이었는데, 진개의 침략이후로는 만번한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염철론에 의하면 진이 연을 멸하고 조선을 칠 때 건넌 강이 패수이지요. 패수가 혼하이든 요하이든 만번한으로 비정되는 천산산맥 이서지역입니다. 저는 연이 소왕이후 약해지자, 자연스럽게 만번한에서 물러나서 조선이 패수수 이동 지역을 회복했다고 생각합니다. 잡소리가 길었는데, 만번한을 요하이서에서 찾아야 한다는 어떤 근거가 있으신지요?

  • 10.07.11 16:34

    아하~ 질문은 제가 드렸는데 다시 질문으로 답을 하시면 곤란합니다. 요동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자연계선은 요하 혹은 의무려산 이외에는 찾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후 북위와 고구려, 당과 발해 모두 이 곳을 경계로 하였습니다. 의무려와 요택, 요하를 모두 건너 그 동쪽에 실제 운용도 않았다고 여겨지는 요동군을 설치 유지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울 것으로 여겨집니다. 님께서는 어떤 이유로 이런 역경을 무릅쓰면서까지 연이 천산산맥을 경계로 하였다고 생각하시는지요?

  • 작성자 10.07.11 16:45

    아니 뭐, 궁금하니까 질문을 드린 거죠.^^;; 천산산맥도 험준한 편이라서 경계선으로 할만 합니다. 1차 고당전쟁 때 당이 천산산맥 넘으려고 무진장 애썼으니 결국 못 넘었죠. 뭐 여튼 연이 설치한 요동군 안에 현이 아니라 군사적 거점 식의 요새를 설치한 것이라면 천산산맥을 경계로 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사료에서도 실질적인 요동군의 시초를 연대가 아닌 진대부터 보니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블로그에서 녹초가 될 정도로 토론했는데, 참조해도 나쁘지 않을 듯 싶습니다.^^;(http://ekrrkdwjd.egloos.com/2528627)

  • 10.07.11 15:48

    진이 연을 멸한 해가 222년 따라서 왕검성을 포함한 요동외요를 설치한 해가 220년, 진이 멸망한 해가 206년이니 실제 요동외요가 존재했던 기간은 최대 15년에 불과하므로 이 동안 조선은 임시수도로 옮겨 있었고, 진을 요동외요에서 몰아낸 후 패수 동안의 왕검성으로 돌아와 계속 수도로 사용하였다고 본다면 큰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천산산맥을 연과 조선의 경계로 보면 진개의 침입 때 왕검성을 점령한게 되므로 조선을 멸했다는 기사가 사서에 있어야했지 않을까요? 진때의 기록을 고려하면...

  • 작성자 10.07.11 16:13

    진이 아니라 한으로부터 (진이 설치했던)요동외요를 빼앗은 것입니다만...^^:; 여튼 연이 조선을 복속했다는 표현으로도 왕험성을 점령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이때 연이 함락한 왕험성이 요서에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 10.07.11 16:49

    중국사가들의 표현방법을 고려할 때 수도를 점령하였다면 복속정도로 표현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조선왕 만의 수도라 하고, 조선왕의 구도라고도 표현하는 점으로 볼 때 왕험성은 하나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도망간 준왕이 설치한 조선의 또 다른 수도가 존재하였으므로 위만이 도읍한 왕험성이 조선왕(위만 이전)의 옛 수도였다는 점을 보충 설명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작성자 10.07.11 16:55

    사료에서는 험독이 요서와 요동 두 곳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조선 수도가 동진했기 때문에 생긴 기록이라고 생각하거든요.

  • 10.07.11 17:26

    요서와 낙랑 두 곳 아닌가요? 아 ~~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과거 삽질한 생각이 떠올라 머리가 지끈거리네요. 장시간 답변 감사드립니다. 블로그는 방문해 보았는데, 세죽리-연화보 소리만 나오면 머리가 빙빙돌고, 무엇보다 한단인님이 무서워서 발들여 놓기 꺼려지네요.

  • 작성자 10.07.11 19:33

    기본적으로 험독현은 요동군과 요동속국 쪽에 속해있으며 낙랑군에 험독이 있었다는 사료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요동설에는 진서와 한원에 나오며 요서설은 독사방여기요에 나옵니다. 저도 세죽리-연화보만 나오면 머리가 지끈합니다.-_-;; 그나저나 한단인님을 무서워하셨군요.^^;;

  • 10.07.11 20:04

    청골, 명치호태왕 님/ 아.. 아니 제가 뭘... 저는 그저 3류 듣보잡에 불과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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