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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조선 시대 요동의 기준과 고조선 전성기 영토
이 지도는 윤내현 교수와 이덕일 소장 등 일부 소수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고조선의 강역을 그린 지도이다.
이 분들이 비정한 고조선의 영토는 문헌상 고조선의 서계는 물론 북계, 남계, 동계가 어디인지, 동쪽의 숙신을 확실히 복속했는 지 등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은 물론 고고학적으로도 비파형동검, 미송리토기, 새감무늬 가락바퀴, 청동장식 간추, 복숭아모양 장식, 긴고리모양 허리띠장식, 장방형 갑편 등의 고조선 관련 유물이 집중 출토 된 지역을 훨씬 초과하기 때문에 신뢰하기 어렵다.
당시 고조선의 서계는 문헌을 통해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위의 지도에서는 요수를 현대의 난하로 보고 있으나, 사기 효무제 본기에 의하면 한무제는 태산에서 봉선의식을 한 후 동북쪽 순행을 하려고 해상을 따라 갈석에 이르러 요서로부터 순행하여 북변을 거쳐 구원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다.
한무제가 봉선의식을 치른 태산은 산동성에 있는 곳이다. 중국에 갈석이라는 지명이 9곳이 있다지만, 태산으로부터 해상을 따라 동북쪽으로 가서 나오는 遼西와 관련된 갈석은 난하 일대의 갈석산 밖에 없다. 당대 사서인 사기에서는 이 갈석산을 요서의 시작점으로 못 밖았다. 난하 일대의 갈석산이 요서의 시작점인 것으로 즉 전한 때도 오늘 날과 마찬가지로 요서는 난하 이동이기 때문에 요수=난하설이 성립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염철론에 연이 요동을 건너 조선을 쳤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고조선의 서계는 요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와 후한서 군국지의 요동군조에 무려현(無慮縣)이 있는데, 무려현은 의무려산과 연관이 깊은 곳으로 현재 요서지방의 북녕시(北寧市)로 비정되고 있는 곳이다. 또한 방현(房縣)은 현 대와현(大窪縣)으로 추정되며 험독현(險瀆縣)은 현 대안현(臺安縣)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모두 요하 이서지역이다.
후한 무렵까지 요동군의 범위가 현재의 요하 건너 요서까지 미쳤다면 고조선 당시의 요동, 요서를 나누는 요수는 대능하일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고조선의 전성기 영토는 연의 소왕이 침공하기 전으로 상정할 수 있다. 아래의 현 국사 교과서에 그려진 고조선의 영토가 전성기로 여겨진다.
2. 만번한과 패수
본인은 노태돈 교수와 서영수 교수의 설을 따라 만번한을 천산산맥 일대로 보고 있다. 문, 번한 두 현의 연칭이 만번한과 통한다. 문현은 독사방여기요에 나온 문현고성에 근거하여 현 개주 일대로 비정되므로 자연히 번한현도 그 일대에서 찾아야 한다. 이에 대해 성경통지에도 번한현에 대한 내용인 번한고성 관련 기록이 있기 때문에 만번한과 패수는 서북한 보다는 요동 일대에서 찾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패수는 압록강과 청천강, 요동의 혼하설(대능하와 난하설은 제외)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패수는 진의 요동외요에서 연의 요동고새로 물러난 후의 고조선과 한의 경계이기 때문에 요동 지역의 강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패수는 어떤 뚜렷한 지역적인 기준을 둬서 바꿔불렀다기 보다는 沛水, 浿水, 溴水 그냥 조선계 지명인 패수를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생긴 혼동일 수도 있다. 沛, 浿는 현대 중국발음이긴 하지만, Pei에다가 성조도 3성으로 차이가 없다. 溴水는 발음도 자형도 앞의 두 패수와 비슷한 점을 찾기 힘드므로 그냥 오기로 여겨진다. 다만, 사기에 나온 浿水와 염철론과 한서지리지, 염철론에 나온 沛水는 요동일대이고 낙랑군조에 나온 浿水는 대동강이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서영수 교수는 한서 지리지와 염철론에 나온 沛水는 전한 말기부터 요동의 패수를 대동강 유역의 패수와 구별하기 위해 임의로 고쳤을 것이라는 견해를 내놓은 바 있다.
한서 지리지 번한현에 나온 즉 요동 일대에 있었을 만번한과 밀접한 강인 沛水는 浿水와 같은 강으로 볼 여지도 있다. 전술했듯이 현대 중국 발음이긴 하지만, 발음도 같고 달리 볼 이유도 없다. 또한 염철론에서 진이 沛水를 건너 조선을 멸했다고 한 것으로 볼 때 기존의 연과 조선의 국경은 沛水이동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사기에서 한은 진의 요동외요에서 후퇴하여 "연의 요동고새를 수리하여 浿水를 경계"로 하였다고 하고, 삼국지 위략에서는 위만이 浿水를 건너 진의 상하장이 설치된 "진의 고지"에 살았다고 하였으니 浿水도 沛水와 마찬가지로 연과 고조선의 경계가 되었던 강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연이 상곡~요동 이렇게 5개의 군을 설치하였다고 하면서 연의 요동진출 지역을 장새, 고새 즉 군사적 요새로 기술한 것은 사실상 연대에는 아직 요동에 대한 군현지배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은 물론 한서 지리지에도 상곡~요동군은 진대에 설치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볼 때, 실질적인 군현지배가 이뤄진 시점은 진의 통일이후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서영수 교수는 연은 전성기인 소왕 이후 국력이 쇠퇴하여 원거리의 군현을 유지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원래 연의 5군도 후대의 한군현처럼 광역의 행정구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군사보급로를 잇는 일종의 군사적 목적의 요새지라고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세죽리-연화보유적을 근거로 요동에 진출한 연의 세력이 점차 청천강 유역에까지 진출하였던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당시 중국 내부에서 연이 처한 상황으로 보아 그러한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하면서 세죽리-영화보 유적은 별도의 검토가 필요하다고 한다. 고고학적인 해석은 새로운 문헌해석이 됐을 때 다시 한번 하게 재검토할 여지가 있기에 나 역시 이에 동의한다.
앞서 본인은 고조선 시대의 요수는 대능하이고 패수는 요동 일대의 강일 가능성이 크다고 언급했는데, 만일 요수가 대능하라면 요수 이동으로 알려진 패수(浿水)는 요하일 가능성도 크다.
이와 관련하여 전한 당대에 쓰여진 사기(史記)에서는 조선과 한의 국경을 패수라고 하였고, 후한 말에 순열이 쓴 전한기(前漢紀)에서는
[朝鮮王反。殺遼東太守。募天下死罪擊朝鮮。朝鮮本秦時屬遼東。漢興以為其遠難守。故遼水為塞]
라고 하여 조선 전한의 경계를 요수라고 하였다. 한편 이 기록에서는 조선왕이 요동태수를 죽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조선이 죽인 사람은 요동태수가 아니라 요동 동부 도위 섭하이다. 이 때문에 순열이 전한과 조선의 국경을 요수라고 한 것을 오기로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조선열전에서도 위만 관련해서긴 하지만, 요동태수가 나오긴 나오고, 요동동부도위는 요동태수를 보좌하는 역할을 하는 만큼 사실 관계에 있어 혼동을 일으켜 오기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혼동을 하려면 요동태수와 요동동부도위처럼 비슷한 구석이 조금은 있어야 하는데, 遼水와 浿水를 혼동했을 만한 개연성은 일단 자음이나 자형은 아닐 것이며 사기와 한서에서는 시종 패수를 국경으로 기록했는데, 전한기에서만 요수를 국경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무작정 오기로 보기는 힘들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순열은 후한 말기 사람이라는 것이다. 본인은 앞서 언급했듯이 후한서 군국지 요동군조를 근거로 하여 막연하게 후한대까지는 浿水=현 요하, 遼水= 현 대능하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르면 반고가 한서를 편찬할 무렵 혹은 늦어도 순열이 전한기를 편찬할 무렵에는 이미 浿水가 遼水로 불려졌기 때문에 遼水와 浿水를 혼동하여 전한기에 이와 같은 기록을 남겼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전술했다시피 요수=대능하 설은 요동군의 범위가 대능하 이동에까지 걸쳐있다는 것에 착안한 것이다. 요수=요하설 관점에서 본다면 요동군의 범위가 대능하 이동에까지 걸쳐있다는 것쯤은 그냥 넘어가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전한기에 나온 고조선과 전한의 국경인 요수를 소요수 즉 혼하로 비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고조선이 연에 반격을 했을 가능성을 전혀 고려치 않았고 또한 한서 지리지에 나온 요동군의 범위가 한무제의 고조선 침입 전과 같을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데, 사기 주발 열전을 보면 한서 지리지에 나온 요동군과 한고조 시기의 요동군의 범위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이 견해는 재고되어야 한다. 패수=압록강설도 고조선의 연에 대한 반격을 고려치 않은 것과 사기 주발열전과 한서 지리지 요동군의 범위의 차이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이다.
사실 본인이 주장하는 요수=대능하 설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우선 당시 遼라는 개념 자체가 무엇인지, 당시 요동과 요서를 나누는 기준이 강이 맞긴 맞는 지, 후한의 구체적으로 어느 시기에 무슨 계기로 요수가 대능하에서 바뀌었는 지에 대해 충분한 규명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서 지리지 요동군 번한현조에 나온 패수 문제도 걸린다. 물론 이 부분은 요수가 현 요하로 지명이 바뀌었을 것이라는 전제가 깔린 상황론에 입각하여 나름 해명이 가능하나, 자의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기에 다른 분들께도 설득력이 있을 지 의문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고조선과 전한의 경계가 되는 패수는 최소 현 혼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해가 있을까 하여 다시 말하지만, 낙랑군은 현 평양일대에 있던 것은 분명하며 낙랑군 치소에 있는 패수는 대동강이 확실하다고 생각된다.
3. 왕험성(왕검성)의 위치
현재 왕험성이 요동일대의 험독(險瀆)이라는 응소의 주석 그리고 당대에 쓰여진 사기에서 한의 수군이 조선을 공격할 때 건넌 곳이 발해라는 기록과 낙랑군이 현 서북한 일대임을 알려주는 여러 기록, 유물들 간의 모순되는 상황 때문에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자신의 주장만 옳다고 하고 있는 상황에 놓여 있다.
<지도로 보는 한국사- 김용만, 김준수 著>
그러나 당대 사서인 사기 조선전(史記 朝鮮傳)에 의하면 한(漢)의 수군(水軍)은 발해(渤海)를 건너서 열구(列口)에 도착하고 왕험성을 공격했다고 한다. 발해를 건넜다는 것은 왕험성은 이미 한반도가 아니라 요동 인근의 해안가에 있었다는 의미이다.
한편 왕험성=평양을 주장하는 관점에서는 한의 수군이 발해만의 입구인 묘도열도를 걸쳐 요동반도 외곽으로 서한만을 끼고 오는 것을 두고 사기에 나온대로 발해만을 건넌 것이 맞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발해만 끝자락이나 마찬가지인 묘도열도를 걸친 정도라면 그냥 서해를 건넌 것이나 다름없을 텐데, 이를 두고 발해만을 건넜다고 기록했을 지 의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일제시대 일본학자인 大原利武에 의하면 고대의 발해만은 지금보다 더 동북쪽에 있었다고 하였다. 본인의 일본어 실력이 얕아 구체적으로 그가 무슨 근거로 고대 발해만의 범위를 지금보다 좁게 잡았는 지 모르겠지만, 그의 견해를 따른다면 고대의 발해만은 묘도열도일대를 포함하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삼국지 동이전 서문부터 자치통감까지 후한 광무제가 낙랑군을 설치할 때와 조위가 낙랑과 대방군을 수습할 때와 수, 당이 고려를 칠 때 단순히 바다 건넜다는 표현은 있어도 전한이 왕험성을 공격할 때처럼 발해를 건넜다는 표현은 찾을 수 없다.
물론 해명이 누락되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현존하는 기록상 실제는 서해를 건넌 것을 두고 발해를 건넜다고 표현한 사례는 없다. 굳이 특이사항을 찾자면 삼국지 동이전 서문에서 낙랑, 대방을 공격할 때 몰래 바다를 건넜다는 표현인데, 공손정권을 평정한 조위입장에서 발해라면 내해나 마찬가지일 텐데, 굳이 몰래건넜다는 표현을 썼을 지 의문이기 때문에 왕험성=평양설은 개인적으로 수긍키 어려우며 요동설이 더욱 설득력 있다고 생각된다. 혹자는 왕험성이 요동일대이고 전한과의 경계가 되는 패수가 요하라면 패수와 왕험성이 너무 가까운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재기할 수 있지만, 사기와 한서에 의하면 좌장군이 패수의 군사를 격파하고 앞으로 나아가 성의 서북쪽을 포위했다는 기록을 볼 때 국경인 패수와 수도인 왕험성이 서로 가까이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같은 의문은 해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동설의 대표격인 험독=왕험성 설은 후한대 학자인 응소의 주석에서 비롯되었다. 험독은 크게 진서에서 평곽을 옛 험독으로 보고 한원에서는 건안성을 옛 평곽으로 보는 것을 근거로 한 요동설(개평일대)과 후한서 요동속국조에서 험독현이 요서의 무려현, 방현과 함께 연칭된다는 것과 독사방여기요의 광녕위조에서 험독이 광녕의 동남쪽에 있다는 기록을 근거로 한 요서설(북진일대)로 나뉜다. 험독의 위치에 대해 광의로서의 요동의 범위가 서북한 일대도 포함한다는 김한규 교수의 주장을 근거로 하여 험독을 서북한 일대라는 설도 있지만, 문헌상 험독을 요동 내지 요서로 볼 근거는 있어도 서북한으로 볼 근거는 없기에 이 설은 배제하기로 한다.
본인은 적어도 한에게 조선이 멸망당했을시 험독의 위치에 대해서는 요동설을 지지한다.
진개의 침공 이후 조선과 연의 경계는 만번한(천산산맥)이었는데, 진이 통일한 후 만번한의 인근에 있던 것으로 여겨지는 沛水를 건너서 조선을 멸했다는 기록이 염철론에 있다. 조선을 멸했다는 기록은 분명 과장이겠지만, 이러한 기록이 있는 까닭은 조선의 수도가 함락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때 진에 의해 조선의 수도였던 험독이 요동군에 편입되었다가 진한교체기 때 준왕(혹은 비왕)이 浿水 이동 지역을 회복하면서 험독을 다시 도읍으로 삼은 것이 아닐까 한다. 응소가 요동군 험독현을 두고 朝鮮王 滿都也라고 단 주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만왕이 험독에 도읍했다는 것은 물론 기록상 위만이 준왕을 쫓아냈을 때 천도한 흔적이 없으므로 그 이전인 준왕 역시도 험독에 도읍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기 주발열전을 보면
"燕王盧綰反, 勃以相国代樊噲将, 撃下薊, 得綰大将抵、丞相偃、守陘、太尉弱、御史大夫施, 屠渾都. 破綰軍上蘭, 复撃破綰軍沮陽. 追至長城, 定上谷十二県, 右北平十六県, 遼西、遼東二十九県, 漁陽二十二県."
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상곡이 12현, 우북평이 16현 그리고 요서, 요동 합해서 29현, 어양이 22현으로 나와 있다. 한무제 이후의 군현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서 지리지에는 상곡이 15현, 우북평이 16현, 요서가 14현, 요동이 18현, 어양이 12현으로 한고조 때와 비교했을 때 약간 많다. 한서 지리지에 나온 요둥군 현의 숫자는 한무제가 고조선을 멸한 뒤에야 위만이 도읍했던 험독현 등이 있는 조선의 서쪽 일부 지역을 요동군에 편입하면서 완성된 숫자일 가능성이 있다.
한편 우거왕 때도 험독에 도읍했을 지는 다소 의문이 따른다. 만일 험독이 우거왕 때도 고조선의 수도였다면 만왕이 아니라 우거의 수도였다는 기록이 있을 법도 한데, 그런 기록은 없다. 그리고 사마정은 응소의 주석을 인용했다고 하면서 험독을 두고 조선왕(위만)의 "옛" 도읍이라고 했는데, 정작 인용했다는 응소의 주석 보다 내용이 좀 더 구체적이다. 응소는 험독을 조선왕만의 도읍이라고 했고, 사마정은 험독을 조선왕의 옛 도읍이라고 한 것이다. 물론 단순히 옛날에 조선왕 만이 도읍한 곳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위만 이후에 고조선이 험독으로부터 수도를 다른 곳으로 옮겼을 가능성을 시사해준다고 할 수 있다. 우거왕 때의 왕험성은 좀 더 내륙에 있었을 가능도 있다. 이 이상 우거왕 때의 고조선 수도에 대해 위치비정을 진전할 수 있는 사료가 없으므로 가능성을 꺼내는 선에서 마치도록 하겠다.
이와 더불어 한서 지리지(漢書 地理志)에 의하면 낙랑(樂浪), 임둔(臨屯), 진번군(眞番郡)은 기원전 108년 6월에 설치 되고 현도군(玄菟郡)은 기원전 107년 3월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기와 한서에 의하면 "한사군은 조선이 평정된 이후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낙랑, 임둔, 진번 3군만 설치되었을 때는 조선이 평정 즉 멸망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조선 멸망과는 낙랑군이 포함 된 이들 3군 보다 1년 늦게 설치 된 현도군이 더욱 밀접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조선의 멸망이 1년 연장되었다는 것 뿐만이 아니라 종래의 왕험성이 있었을 것이라고 인식되었던 낙랑군이 조선이 평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설치되었다는 것으로 오히려 현도군이 왕험성과 연관이 깊다는 것이다. 현도군 또한 요동에 있었을 것이라는 기록들이 있다.
(1) 고구려현, 상은태현, 서개마현이다. 현도군은 무제 원봉 4년에 설치되었다. 고구려이다. 왕망 때는 하구려라고 했다. 고구려현은 요산에서 요수(현 혼하)가 나와 서남쪽으로 요수에 이르러 대요수(현 요하)로 들어간다. 상은태현은 왕망 때는 하은이라 했다. 상은태라고 읽는다. 또 남소수가 있어 서북쪽으로 새외를 지난다. 서개마현은 마자수(현 압록강)가 서북쪽으로 염난수(현 동가강)로 들어가 서남쪽으로 서안평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2개의 현을 거쳐 2천 1백리를 간다. 왕망 때는 현도정이라 했다. 유주에 속해 있었다.<한서 지리지>
(2) 한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옥저(沃沮)의 땅으로써 현도군을 삼으나, 후에 이맥(夷貊)이 침략하여 고구려(高句麗)의 서북쪽으로 옮기고 다시 옥저를 현으로 하고 낙랑동부도위(樂浪東部都尉)에 소속시킴.<후한서 동옥저전>
(3) 현도군을 다시 고구려로 옮기고, 옥저를 낙랑에 소속시킴<후한서 예전>
(4) 예(濊)와 옥저와 고구려는 본래 모두 옛 조선의 땅이다.<후한서 예전>
(5) 옥저성을 현도군으로 삼았으나, 후에 이맥이 침략하여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고 옥저는 다시 낙랑에 속함.<삼국지 동옥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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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기록들을 종합하여 말하자면 본래 동옥저(東沃沮)는 조선의 옛 땅이었으며 처음에는 기원전 107년에 설치된 낙랑군에 소속되었다. 그리고 1년 뒤인 기원전 108년에 왕검성이 함락되고 설치된 현도군은 처음에는 혼하(소요수) 인근인 고구려의 서북 지역(왕검성이 있던 곳으로 추정)에 위치해 있다가 얼마 안 있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함경도의 동옥저 지역으로 잠시 옮겨졌다가, 기원전 75년에 이맥의 공격을 받고 다시 고구려의 서북 지역으로 옮겨지고 이에 동옥저는 다시 낙랑의 동부도위에 소속되었다고 한다.
왕험성과 현도군은 분명 요동인근에 있었고, 낙랑군은 한반도에 있었기 때문에 유물들이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낙랑군과 왕험성을 등치시키니까 자꾸 모순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둘 중 하나는 거짓말 같아서 무리하게 왕험성을 한반도에 비정하여 기록과 맞지 않게 한의 수군이 서해를 건너는 것으로 표기하거나 한반도에 나오는 유물들 무시한 채 낙랑군을 요동 내지 요서로 비정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사실 현도군=왕험성 설에도 의문이 따르는 것이 어떠한 방법으로 먼저 낙랑, 임둔, 진번을 설치했는 지 등 현도군=왕험성 설은 좀 더 보완할 부분이 있다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틀라스 한국사- 한국교원대학교역사교육과교수진(고조선: 송호정) 著>
<한국생활사박물관 01 고조선 생활관- 한국생활사박물관 편찬회 著>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서의식, 강봉룡 著>
[참고자료]
사기 조선전
한서 조선전
삼국지 동이전
지도로 보는 한국사(김용만, 김준수)
단군과 고조선사(노태돈 편저)
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송호정)
고조선 고구려 연구(조법종)
고조선-고구려의 역사귀속성 논란에 대한 하나의 제안 : 조법종의 『고조선 고구려사 연구』를 읽고(송호정)
漢이 구성한 고조선 멸망과정 재검토- 『사기』조선열전의 재검토-(김병준)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서의식, 강봉룡)
한국생활사박물관 01 고조선 생활관(한국생활사박물관 편찬회)
아틀라스 한국사(한국교원대학교역사교육과교수진)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김성남)
요동군과 현도군 연구(동북아역사재단)
고조선의 역사를 찾아서-국가 문화 교역(고조선사 연구회, 동북아역사재단)
『사기』古朝鮮 史料의 構成 분석과 新 解釋(서영수)
고조선 연구(윤내현)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이덕일, 김병기)
고대 北京과 燕文化(배진영)
중국역사지도집(담기양)
고조선의 浿水와 沛水(오강원)
高句麗의 戰爭과 遼西進出硏究(성신여대박사학위논문- 윤병모)
현도군과 고구려 건국의 건국에 대한 연구(기수연)
제1 玄菟郡의 위치에 대한 재검토(김미경)
한국고대복식-그 원형과 정체(박선희)
첫댓글 비난은 감히 하지 않겠구요^^. 낙랑군에 대해서는 복잡하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넘기고 일단 저도 님이 말씀하신 낙랑군과 왕험성을 등치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의문이어서 이 견해에는 공감합니다. 그리고 고조선의 전성기 영토는 제가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 분야라 관심을 가지고 보았는대요. 님은 일단 서변을 대릉하 유역으로 보고 있다고 판단이 되네요. 거기에 대해서 주로 한대의 사료를 가지고 설명을 하셨네요. 그런데 연소왕이 고조선과 전쟁하기 직전의 영토를 간단히 살펴보면 의외로 난하 너머 북경 인근이라고 볼 수 있어요. 참고자료에 배진영님의 글을 읽으셨다면 연소왕 시기까지도 연이 북경 일대 영정하를 벗
어나지 못했다고 하거든요(배진영님 저서는 읽지 않았고 박사학위논문을 근거로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연소왕시기에 연과 조선이 접하고 있었다는 것은 전국책 연책에 실려있는대로구요. 어떤 이들은 생각보다 서쪽이라고 이상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아마도 연쾌왕 시 자지의 내란때 고조선과 동호가 연을 침공 영토 일부를 빼앗은 것으로 생각되고 진개가 인질로 간 것도 이시기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배진영님이 소왕의 고조선 침공시기에 대해서는 박대재님도 그대로 따르고 있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비판적입니다. 하지만 배진영님의 연소왕의 5군 고증은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참고가 되셨으면 하고요.
전국책에서 연과 조선이 연접했다라는 기록이 혹시 [연의 동쪽에는 조선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와 누번이 있으며...] 를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이런 글과 가장 밑의 댓글을 읽어보시는 것은 어떠신지요? http://shaw.egloos.com/1555915 저는 그 포스팅에서 말하는 것이 설득력 있다고 생각이 되나서.. 그리고 연의 내란 시기에 동호나 조선이 연을 침공했다는 사료를 저는 들어보질 못했는데 일단 그 부분을 추론에 의존하셨다면 제 생각에는 연이 내란 상태라고 하더라도 군대 운용단위가 10만 단위가 되는 시점에서 그보다 병력 자원이 떨어지는 동호가 약탈 수준이 아닌 점령이 가능할런지는 모르겠습니다.
물론 유목 군대이고 대략 100여년 뒤지만 흉노 묵특선우가 제국을 건설하기 전 가장 경계했던 강국이 동호이긴 해서 불가능하다고까지 할 수는 없겠죠. 그런데 조선 같은 경우는.. 병력 자원도 만 단위 정도고.. 적어도 조선이 내란 상태의 연을 침공해서 영정하 부근에서 연과 연접했다라는 가정은 무리수인 듯 싶습니다. 차라리 동호가 영정하까지 밀고 내려갔다가 그나마 가능성이 있겠는데 그정도 큰 사건이면 기록이 안된 것도 좀 그래서 동호가 실제 소왕 이전에 연을 크게 침공했는지도 저는 좀 의심이 갑니다. 애초에 연의 동계가 영정하 부근에서 왔다갔다 했었다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뭐 제가 연나라 영토 변화를 아는 건 아니니..
솔직히 저 포스팅 보았는데요 오바질하지 말라는 것이 거슬리네요. 어쨌든 조선 요동에서 조선을 건너야 요동이 있으므로 조선이 요서에 있다 무리다 이런 이야기인데 저도 이 이야기 동의합니다. 진작에 나온 반론이죠. 염철론 기록은 어차피 모호. 결국 연의세력변화로 조선과 연의 경계를 정해야 한다고 하는데 제 말이 그겁니다. 애초에 영정하 부근에서 연의 영토가 왔다갔다 했습니다. 그럼 연소왕이 고조선과 싸우기 직전에는 어떠했느냐, 그 때에도 사정은 비슷했습니다.영정하 부근. 그런데 전국책 연문후와 소진의 이야기에서 소진이 연이 조선과 접해있다고 나오지요.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고조선은 연과 접하고 있었고 그것은 영정하
부근입니다. 그런데 더중요한 것은 연책의 기록은 실제로는 연소왕의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소진은 사실 연소왕때 활약한 인물이고 전국책이 연대착오가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구요. 결국 연소왕때 연의 그 세력범위란 것이 영정하 부근에 머물러 있었는데 고조선이 연과 접해 있었던 거지요. 그리고 연소왕 직전에 일어났던 내란에 대해 너무 가볍게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요. 자지의 내란은 연 내부에서 연왕실과 자지세려과의 내전에 겹쳐서 제나라가 침공해 왔기 때문에 사실상 수년 동안 나라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연의 군사력을 논의하는 무의미합니다. 그리고 잔개가 동호에 인질로 가 있던것 말인데요
진개가 인질로 왜 간 것일까 그것은 내란과 망국(실제 멸망에 가까웠습니다)으로 인해 동호가 일시적으로 우위를 접했기 때문이겠구요. 내란과 제의 침공으로 태자마저 사망해서 조에 있던 공자직이 조의 후원으로 겨우 연을 다시 세우고 왕이 된 것이 소왕입니다. 사실은 조나라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구요. 이 정도 상황에서 연과 접하고 있던 동호와 조선이 그대로 있었다는 것이 더 이상하지요. 소왕은 늘 제나라를 두려워하면서도 굳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제 동호 조선을 공격한 것은 결국 망국에 대한 복수였던 것입니다.
어.. 전국책의 연접기사가 위에서 언급한 그것이라면 저 기사가 조선과 연이 국경을 접했는지의 여부를 알 수는 없다는 얘기가 되는 것 같군요. 동쪽에 어떤 나라와 지역이 있단 얘기지 접하고 있다는 얘기는 또 별개가 되니까요. 그러고보니 동호가 왜 나오지 않은 것인지 좀 의아하긴 한데 그 점에서 보면 소진이 대략의 얘기를 한 것일 뿐 저 발언에서 어떠한 지정학적 정보를 뽑아내기란 좀 애매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기본적으로 저는 연과 조선 사이에 동호가 끼어있어서 연접했다라고 생각하치는 않고 이는 비파형동검 출토지역으로도 증빙이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노아호산 서쪽으로 고조선이 나왔다고 하기 그래서요...
일단 연의 내란 정국에 대해서는 저도 개론상의 얘기 정도 밖에 모르는 지라 모르는 걸 아는척 할 수는 없어서 언급하긴 그렇습니다만 일단은 동호의 침공이 있었다고 전제한다면 영토를 상실할 정도의 큰 일이 기록에 없는 것이 의아하고 설사 침공했다고 하더라도 동호는 모르겠지만 조선이 그랬을지는 의문이라는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저는 조선과 연이 연접했다고 생각하진 않아서 동호를 넘어 조선이 약탈을 했다면 그건 모르겠지만 영토를 뺐었다라고 하는 것은 제 딴에는 말이 안되서요. 그리고 중앙의 내란이라서 변방 군대까지 소멸되었다고까지 해야할지는 또 모르겠어서...
그리고..진개가 인질이 된 이유는 동호의 침공 때 포로로 잡혀갔다는 것이 님의 추측이 그렇다는 것이지 그것을 뒷받침할 근거가 미약한 이상 추론은 추론 이상이 되기 어렵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인질로 간 사정이 다른 이유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도 있으니까요. 음.. 아무튼 제가 연의 내란에 대해서 정황을 정확히 모르는 한 뭐라 말하긴 어렵겠군요. 기회가 닿는다면 배진영 선생의 책을 읽어봐야지 알겠습니다만 전국책의 연접 기사는 좀 확대해석한 감이 없지 않은 듯 싶습니다.
노로아호산은 요서에서 가로지르고 있는데 굳이 노로아로산 서쪽으로 고조선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해가 안되네요. 노로아호산 북으로 고조선이 넘어가는 것이 이상하다면 이해가지만, 노로아호산을 경계로 북에는 동호 남에는 조선이 있다고 하면 쉽게 설명이 되는데요, 게다가 복기대씨에 따르면 청동기 초기 문화인 하가점 하층문화가 노로아호산을 경계로 북으로는 하가점상층문화 남으로는 릉하문화로 갈라지고 릉하문화는 비파형동검문화를 특색으로 하지요. 게다가 노로아호산 북쪽으로 유병식 동검과 공병식 동검이 주로 출토되지요. 특히 공병식은 노로아호산 북쪽에 주로 분포하여서 동호로 보아도 크게 이상이 없습니다
굳이 복기대씨의 연구결과가 아니라고 해도 중국의 연구자도 비슷하게 설명을 합니다. 본래 노로아호산 남북을 통합하고 있던 전기청동기문화가 서기전 천년경 이후 노로아호산을 경계로 남북으로 나누어져 서로 다른 성격을 띄게 된다고, 이것은 점차 이 지역이 건조화되면서 노로아호산 이북지역이 오늘날 보는 것처럼 초원지대화 됨으로써 남의 농경지대와 분리되게 된다고. 이 지역의 문화는 이전부터 요동지역의 문화와 친연관계에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고조선이 이 지역으로 점차 진출 적어도 서기전 4세기 이전에는 이 지역을 장악하여 연과 접하게 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노아호산은 요서를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가로지르는 산맥이라 그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그래서 남북으로 나누든 동서로 나누든 큰 의미는 없지요. 그리고 꼭 지형의 제한을 두고 얘기하기 보다 비파형동검 분포지역을 가지고 얘기하는 것이죠. 연 소왕 이전에는 영정하 부근에서 연의 영토가 왔다갔다라고 하신 것은 세머리매님이셨는데 그러면 조선과의 접점이 없는게 아닙니까? 유병식 동검을 사용한 산융이 이후부터 연에 복속되어서 이후 조선과 경계를 접했다라고 전제를 한다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제 환공 때 산융이 정복되고 나서 이후에는 산융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요? 제가 그 책을 읽어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군요.
사실 전성기 고조선의 영토 문제에 대해 댓글로 모든 문제를 정리한다는 것은 어렵겠지요. 저는 저의 생각의 일부를 밝혔고 님의 대체적인 의견은 잘 알겠습니다.
세머리매님이 연 소왕 전에는 영정하 부근에서 왔다갔다라고 하시기에 좀 의아해서배진영 선생의 박사학위 논문을 인강 듣기 전에 잠깐 검색해 훓어봤습니다. 보니 중심 권역이 영정하 북쪽을 넘지 않았다란 얘기지 영토 북한계가 영정하 부근에 있다는 얘기는 아니었는데 혹시 이 부분을 잘못 이해하신 것은 아니신지요? 일단 조선이 연과 연접하지 않았다고 제가 입장을 세운 것은 조선이 그러한 논의 하에서 영정하 부근까지 왔다고 하기에는 비파형동검 출토권역과 안맞기도 하고 연 소왕 전의 연의 영토가 너무 작아지기 때문에 문제제기 수준에서 반론을 한 것이었는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굳이 연접을 부정할 이유가 없어지겠군요. 음....
확실히 알아보고 얘기를 해야했는데 제가 전제 확인을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에서 얘기를 하다보니 뭔가 얘기가 산으로 가서 제가 무리한 얘기를 해버린 감도 없지 않네요. 이 부분은 좀 죄송하군요.
저도 비난은 사절이예요.^^ 소심 소심*^^*잘 읽었습니다.
저도 요수 난하설을 신봉하지 않지만 님께서 이를 부정하는 근거로 제시한 갈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합니다. 님께서 말씀하시는 갈석산은 현재 창려의 갈석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수경주에서 여도원과 위소가 설명하고 있는 ‘한무제가 찾았던 갈석’은 바닷가의 천교주(天橋柱)로 현재 창려의 갈석산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이 천교주의 위치가 난하의 어느 쪽에 있었는지 수경주 상에서는 알 수 없습니다. 만약 천교주가 난하의 서쪽에 있었다면 요서(최소한 그 일부가)가 난하의 서쪽에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현재의 갈석산이 난하의 동쪽에 있으므로 난하 요수설이 타당치 않다는 결론은 성급해 보입니다.
설사 현재의 갈석산이 한무제의 갈석이라 하더라도, 님께서 지적하셨다시피 요동과 요서의 기준이 요수였는가를 알 수 없고, 요수의 동쪽을 ‘요’(요동+요서)라고 하였을 가능성도 있고 수경주 류수편에서 언급하고 있는 제환공의 일화를 설원(説苑)에서는 요수라고 기술하고 있으므로(有水曰遼水表之) 요수 난하설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갈석이 사기에 나온 갈석이 아니라는 것은 뚜렷한 증거는 없어보입니다. 거론하신 수경주도 명확하지 않지요. 설원 변물편에 나온 내용은 관자를 재해석한 것인데, 정작 원전이 되는 관자에는 요수 관련 내용이 없습니다. 桓公北伐孤竹, 未至卑耳之谿十里, 闟然止, 瞠然視, 援弓將射, 引而未敢發也, 謂左右曰:?見是前人乎??左右對曰:?不見也. ?公曰:?事其不濟乎?寡人大惑. 今者寡人見人長尺而人物具焉; 冠, 右袪衣, 走馬前疾. 事其不濟乎?寡人大惑. 豈有人若此者乎??管仲對曰:?臣聞登山之神有兪兒者, 長尺而人物具焉. 霸王之君興, 而登山神見; 且走馬前疾, 道也; 袪衣, 示前有水也; 右袪衣, 示從右方涉也.
이는 유향이 관자를 편집하다가 임의로 기술한 오류로 봐야 할 것입니다. 제가 요동과 요서를 나누는 기준이 뭔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그렇지, 저는 요수가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단순히 遠의 의미로써 遼가 특정한 지명(혹은 수명)이 아니라 단순히 遠의 의미라면 遼東, 遼西 말고도 遼北, 遼南이라는 사례도 있어야 하는데, 이러한 사례는 제가 아는 선에서는 전무합니다. 요수의 동쪽을 ‘요’(요동+요서)라고 하였을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합니다. 요수의 동쪽이 요동+요서 다 포괄하는 개념이라면 굳이 요서, 요동을 구분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유향이 요수로 잘못 기술한 것이다라는 설은 서영수 선생이 제시한 것인데, 서영수 선생의 의견은 조금 궁색해 보입니다. 유향은 전한 때 살았으므로 당시의 요수가 어디에 있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환공이 산융과 고죽국을 정벌하여 얻은 땅을 연나라에 주었는데 이 때 요하(설원의 요수=한의 요수로 생각하면)를 건넜다고 한다면 지금의 난하 부근부터 요하 동쪽까지의 땅을 점령하여 연에 주었다는 것이 되는데 이런 터무니 없는 이야기를 자신의 저서에 남길 까닭이 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연소공 때 2000리 땅을 얻어 설치하였다는 요서, 요동군을 유향은 어디라고 생각하였을까요?
저는 유향이 고대의 요수를 난하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긴 중요한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패수의 이동처럼, 요수의 위치도 변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유향이 오류를 범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타당성이 있어 보입니다.
갈석에 대해서는 어차피 정확치 않고 또 많은 학설이 있으니 설왕설래는 무의미하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만일 오기가 아니라면 이렇게 보면 어떨까 싶군요. 고죽국은 사료마다 다른 곳에 위치해있습니다. 그 범위는 연산산맥부터 조양까지 다양합니다. 이는 고죽국의 위치가 유동적이며 점점 동쪽으로 이동했다는 추측이 가능하지요. 저는 본문에 적었다시피 고조선 시기 요수에 있어서 현 요하설을 지지하지 않으며 대능하설을 지지합니다. 고죽국이 대능하 이서의 객좌 쪽에 있고 요수가 대능하라면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요수=난하 설은 사기에서는 요서의 시작점을 갈석이동이라 하였고, 염철론에서는 고조선과 전국시대 연의 경계를 요동으로 잡은 이상 성립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요서의 시작이 갈석부터라는 사기의 기록을 모르겠습니다. 2세 황제나 시황제의 순행이라면 갈석이 요서에 있다는 정도의 의미라고 생각됩니다만...제가 모르는 기록이 있다면 알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고죽국을 대릉하 이서로 비정해도 진개의 정벌로 얻은 천리 또는 이천리의 땅에 요동과 요서군을 설치하는 부분에서 문제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염철론에 연은 갈석에 의해 막히었다는 표현을 진개 이전의 기록으로 보더라도 제환공으로부터 받은 땅은 난하를 넘을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유향이 생각한 고대의 요수는 난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갈석에 이르러 요서로부터 순행했다는 기록은 사기 효무제 본기에 있습니다. 요수=대릉하로 봤을 때 연이 조선으로 침략할 때 요동을 건넜다는 것으로 봐서 당시 연이 조선에게서 얻은 성과는 요서, 요동 2군이 아니라 요동군 하나로 대릉하부터 요하 일대까지로 별 문제는 없어보입니다. 그리고 갈석에 의해 막혔다는 표현으로는 연의 서계를 갈석으로 단정지을 수 없습니다. 전국책에서는 연의 남쪽에 갈석이 있다고 했으니까요.
한무제가 갈석에 이르러 요서로부터 순행했다는 기록은 갈석이 요서에 있다는 내용으로 보아야지 갈석이 요서의 시작점이다로 보는 것은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연이 세운 동북방의 5군은 진개의 정벌 이후로 보는 것이 대부분 사가들의 공통된 의견 아닌가요? 아무튼 님의 답글에 약간의 오류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요서(난하에서 대릉하 사이)는 제환공으로부터 얻었고, 요수(=대릉하)를 건너 얻은 요동은 진개의 정벌 이후로 대릉하부터 천산산맥까지로 이해하면 될까요? 이게 님의 본 글의 논지와도 일맥상통해 보입니다.
갈석이 요서의 시작점이라는 것은 제가 편의상 말했습니다. 사실 요서군의 서계가 난하 이서까지 살짝 걸치기는 합니다. 갈석이 요서에 있다는 뜻으로 보더라도 그 갈석은 현 난하 이동입니다. 난하 이동이 현재처럼 요서로 칭해졌던 것이지요. 나머지 사항은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고조선이 한나라와 같이 있던 시대보다, 하나라-은(상)나라-주나라와 접해있던 시기에도 존재해온 나라인데,
그 당시의 지역도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네요.
지형은 보고도 잘 모르겠네요. 많이 배우겠습니다.
대요수를 현재 란하의 동북지류인 폭하로 비정하는 사람입니다.
님께서 요동과 요서를 나누는 요수를 대릉하로 볼 수 있다고 하였는데,
그렇게 보는 근거로 어떤 기록이 있는 것인가요?
담기양의 지도집을 보니 대릉하로 요서와 요동을 나누었는데, 혹시 저 지도집을 근거로 하는 것인가요?
저 지도집은 어양군 이동 군들의 면적을 지나치게 표시하여 지금의 요하를 넘겼다고 보고 있습니다.
한서 지리지에서는 염난수와 대요수가 요동군 서안평현과 안시현에서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또 염난수는 2100 리,대요수는 1250 리 길이라고도 기록해 놓았습니다.
따라서 대요수의 하류에는 대요수보다 더 길고 큰 염난수가 나란히
흘러야 한다고 보는데, 현재의 대릉하를 대요수로 본다면 하류에서 가까이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염난수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댓글을 다시려거든 본문 정독해주시지요. 저는 담기양 지도를 근거로 한 적 없습니다. 담기양의 지도는 시각자료일 뿐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후한 어느시기에 빠르면 반고가 한서를 편찬하던 시기에는 요수가 대릉하에서 요하로 바꼈을 것이라고 분명히 언급했습니다. 두 곳에서 같은 말 반복하는 것은 저도 힘들고 님과의 토론은 시작했으니, 블로그에서 마저 하시는 것이 어떻겠는지요? ^^;
거의 마지막 질문일듯 합니다.
진이 연을 멸하고 패수를 넘어 조선을 멸하였다 하였고, 한이 옛장새를 수리하여 패수를 경계로 하였다 하였으니 연과 조선의 경계를 패수(한자를 어찌 썻던...)로 보시는데 대해 이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 때 문현과 번한현의 위치를 고려하신 때문인지 만번한이라 일컷는 경계를 천산산맥으로 보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차라리 패수(요하)를 연과 조선의 경계로 보시고, 만번한을 요하의 서안으로, 왕검성을 요하의 동쪽 어딘가로 비정하시면 진의 조선 침공으로 왕검성이 함락되었고, 요하부터 천산산맥까지 요동외요를 설치하였으나 곧 조선에게 다시 빼앗겼다....로 보시는 건 어떨지요?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이래 위략에 나온 만번한은 한서 지리지의 문현과 번한현을 연칭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위략에서는 조선과 연의 경계가 처음이었는데, 진개의 침략이후로는 만번한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염철론에 의하면 진이 연을 멸하고 조선을 칠 때 건넌 강이 패수이지요. 패수가 혼하이든 요하이든 만번한으로 비정되는 천산산맥 이서지역입니다. 저는 연이 소왕이후 약해지자, 자연스럽게 만번한에서 물러나서 조선이 패수수 이동 지역을 회복했다고 생각합니다. 잡소리가 길었는데, 만번한을 요하이서에서 찾아야 한다는 어떤 근거가 있으신지요?
아하~ 질문은 제가 드렸는데 다시 질문으로 답을 하시면 곤란합니다. 요동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자연계선은 요하 혹은 의무려산 이외에는 찾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후 북위와 고구려, 당과 발해 모두 이 곳을 경계로 하였습니다. 의무려와 요택, 요하를 모두 건너 그 동쪽에 실제 운용도 않았다고 여겨지는 요동군을 설치 유지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울 것으로 여겨집니다. 님께서는 어떤 이유로 이런 역경을 무릅쓰면서까지 연이 천산산맥을 경계로 하였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아니 뭐, 궁금하니까 질문을 드린 거죠.^^;; 천산산맥도 험준한 편이라서 경계선으로 할만 합니다. 1차 고당전쟁 때 당이 천산산맥 넘으려고 무진장 애썼으니 결국 못 넘었죠. 뭐 여튼 연이 설치한 요동군 안에 현이 아니라 군사적 거점 식의 요새를 설치한 것이라면 천산산맥을 경계로 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사료에서도 실질적인 요동군의 시초를 연대가 아닌 진대부터 보니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블로그에서 녹초가 될 정도로 토론했는데, 참조해도 나쁘지 않을 듯 싶습니다.^^;(http://ekrrkdwjd.egloos.com/2528627)
진이 연을 멸한 해가 222년 따라서 왕검성을 포함한 요동외요를 설치한 해가 220년, 진이 멸망한 해가 206년이니 실제 요동외요가 존재했던 기간은 최대 15년에 불과하므로 이 동안 조선은 임시수도로 옮겨 있었고, 진을 요동외요에서 몰아낸 후 패수 동안의 왕검성으로 돌아와 계속 수도로 사용하였다고 본다면 큰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천산산맥을 연과 조선의 경계로 보면 진개의 침입 때 왕검성을 점령한게 되므로 조선을 멸했다는 기사가 사서에 있어야했지 않을까요? 진때의 기록을 고려하면...
진이 아니라 한으로부터 (진이 설치했던)요동외요를 빼앗은 것입니다만...^^:; 여튼 연이 조선을 복속했다는 표현으로도 왕험성을 점령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이때 연이 함락한 왕험성이 요서에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사가들의 표현방법을 고려할 때 수도를 점령하였다면 복속정도로 표현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조선왕 만의 수도라 하고, 조선왕의 구도라고도 표현하는 점으로 볼 때 왕험성은 하나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도망간 준왕이 설치한 조선의 또 다른 수도가 존재하였으므로 위만이 도읍한 왕험성이 조선왕(위만 이전)의 옛 수도였다는 점을 보충 설명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료에서는 험독이 요서와 요동 두 곳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조선 수도가 동진했기 때문에 생긴 기록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요서와 낙랑 두 곳 아닌가요? 아 ~~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과거 삽질한 생각이 떠올라 머리가 지끈거리네요. 장시간 답변 감사드립니다. 블로그는 방문해 보았는데, 세죽리-연화보 소리만 나오면 머리가 빙빙돌고, 무엇보다 한단인님이 무서워서 발들여 놓기 꺼려지네요.
기본적으로 험독현은 요동군과 요동속국 쪽에 속해있으며 낙랑군에 험독이 있었다는 사료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요동설에는 진서와 한원에 나오며 요서설은 독사방여기요에 나옵니다. 저도 세죽리-연화보만 나오면 머리가 지끈합니다.-_-;; 그나저나 한단인님을 무서워하셨군요.^^;;
청골, 명치호태왕 님/ 아.. 아니 제가 뭘... 저는 그저 3류 듣보잡에 불과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