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일 플레이오프 패배 후, 감독, 팀원, 관계자, 응원선수까지 모두 모였다. 안녕히, 우리는 모두 당당합니다. |
스마트오로, 2012바둑리그를 마치며 “끝나기 전에는 끝난 것이 아니다.”
뉴욕 양키스의 전설적인 포수 요기 베라(Yogi Berra)의 명언을 떠올리게 하는 선전이었습니다. 진검의 승부세계에서 그 어떤 패배도 아쉽고 아프지 않은 패배는 없습니다. 칼집에 칼을 다시 꽂지 못하는 자에겐 그 어떤 말도 변명과 핑계일 뿐입니다. 하늘 아래 아름다운 패배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오늘 이 순간만큼은 아름다운 패배를 입에 담고 싶습니다. 사이버오로의 한국리그팀 ‘스마트오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한방울의 땀마저 죄다 쏟아부었기에 아름다운 패배, 멋진 퇴장이었습니다. 락스타리거를 포함한 이 팀은 침몰하는 순간까지 진한 팀워크로 저에게 감동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락스타리거로 선발되었지만 한국리그 정규시즌 내내 주전으로 기용된 민상연 선수는 2012한국리그가 배출한 최고의 신인스타입니다. 전반기 3승3패, 후반기 5승4패로 기대 이상 맹활약을 보여 ‘팬더곰’이란 애칭까지 얻은 그는 한국리그에서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국수전 도전자결정전에까지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연구생시절 입단 못하고 올 1월, 스무 살에야 입단한 햇병아리 기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행보였습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준플레이오프를 앞둔 시점부터 컨디션 난조를 보이더니 모든 기전에서 급격한 하강그래프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신안천일염의 변상일에게 플레이오프 1차전을 질 때까지 무려 9연패. 이 과정에는 최철한 9단과의 국수전 도전자결정전 패배0:2)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탓입니다. 뭔가 손에 잡힐 듯 목표물이 눈앞에 가까워졌다 싶을 때 경험이 부족한 초년병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 '울보팬더'가 될 뻔한 민상연, 대국 전 승부의 긴장을 콘트롤하고 있다. 져도 좋다, 마음껏 싸워라!…한종진 감독의 용병술
정작 제몫이 긴요해진 포스코LED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 2연패, 신안천일염과의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도 또 졌습니다. 항상 이길 순 없습니다. 문제는 자신감을 잃고 전혀 자기의 바둑을 두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물러서는 모습이었습니다. 스승인 한종진 감독의 눈엔 이 점이 심각했습니다. 변상일에게까지 졌을 때 민상연은 그야말로 ‘멘붕상태’에 빠졌습니다. 대국장을 빠져나오는 민상연을 한종진 감독이 따로 데리고 가 대화를 시도했을 때 민상연은 울먹이며 간청했습니다. 더 이상 팀에 누를 끼치기 싫으니 제발 플레이오프 2차전에는 빼주세요.
제3자가 보기에 꼴찌나 안하면 다행이라던 스마트오로. 정규시즌에서 실력 이상의 성적을 거뒀으니 나머지 (준)플레이오프는 즐기는 자세로 두면 된다고들 격려했습니다만, 세상에 부담 없이 거저 즐기는 승부는 없습니다. 정규시즌에서 그토록 방방 날았던 김승재도 그러하거늘 (김승재는 정규시즌 14승4패, 전체다승 1위를 거둔 스마트오로팀의 주장 같은 2장입니다만 신안천일염과의 플레이오프전에선 심적 부담이 역력한 모습을 보였고, 해서 한종진 감독은 1승을 먼저 올리는 게 절실한 최종전에서 실질적인 에이스를 1,2번 타순에 못넣고 3번으로 기용했던 것입니다) 하물며 민상연 같은 새내기에겐 오죽 버거운 무게였겠습니까. 이러한 때, 한종진 감독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이 과정과 이 순간 감독의 결정, 그리고 다음날의 결과를 곁에서 목도한 저는 한종진 감독에게서 초보감독이란 수식어를 깡그리 지웠습니다.
“민상연 선수가 없었으면 현재의 스마트오로팀도 없다. 져도 좋으니 마음껏 싸워라!”
너의 활약 덕분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여기 플레이오프까지 올 수 없었다. 그러니 지든 이기든 연연해하지 말고 네 바둑을 둬라. 그러고선 한종진 감독은 애제자 민상연을 그나마 승패에 가장 부담 없을 1번타자로 내보냈습니다. 다른 팀원들도 모두 극심한 스트레스에 힘들어하는 민상연에게 일제히 힘내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결과는 2차전 서전(대 이호범)을 장식하며 9연패의 사슬을 끊었습니다. 전날 예상을 뒤엎고 1차전을 2-3으로 진 데 이어 또 첫판을 빼앗긴 신안천일염으로선 간담이 서늘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 민상연의 대국 후 인터뷰, "모든 팀원들이 제게 일제히 응원 메세지를 보내왔습니다"
▲ 스마트오로팀, 정규리그에서 가장 잘 웃고 가장 떠들썩한 팀으로 유명했다. 심지어 팀이 너덜너덜하게 깨질 때도 분위기는 좋았다. 화기애애한 사진 속 이날도 실은 패배한 날이다.
줄에서 떨어질 것을 생각지 않는다!
비록 이후 세 판을 내리 져 종합전적 4-5로 분루를 삼키긴 했으나 이영구, 김승재, 홍기표의 판도 시종 아슬아슬한 접전양상이었습니다. 특히 전날 상대팀 주장 이세돌의 대마를 잡으며 파란을 일으킨 홍기표 선수는 공교롭게도 이세돌 선수와 다시 만나 이번에도 양곤마를 몰아치며 대마포획 직전까지 가 또 한번 쓰나미를 몰고 오나 했습니다. 제 아무리 줄타기의 명인도 줄을 탈 때 “어떻게 하면 떨어지지 않을까”에 골몰하면 떨어진다고 합니다. 이세돌과 대진이 결정되었을 때 홍기표는 위축되기는커녕 “꼭 만나고 싶었던 상대”라 말했고, “2차전을 앞두고 잠을 못이뤘지만 그 누구와 붙든 진다는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고 합니다.
스마트오로팀의 전사들은 고공의 줄을 타는 순간에도 누구하나 떨어진다는 생각을 털끝만큼도 하지 않은 채 ‘미친 듯이’ 전진하는 폭주기관차 같기만 했습니다. 상대의 기를 죽일만한 원투펀치를 보유하지도 못한, 고만고만한 선수들로 스크럼을 짜고 전장에 나섰어도 도무지 한계를 종잡을 수 없는 ‘도깨비팀’으로 종횡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불굴의 정신력과 더불은 고조된 팀워크와 분위기였습니다.
스마트오로의 대국이 있는 날에는 락스타리거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팀의 선수들까지 함께 해 늘 북적거렸습니다. 직제에는 없는 코치까지 둔 팀입니다. 한종진 감독과 아삼육인 최원용 6단이 처음부터 끝까지 선수들을 함께 내조했습니다. 고백하자면, 이번에 바둑리그 스마트오로의 담당임원으로 6개월간 함께 하기 전까지, 저는 바둑의 단체전적 요소를 그다지 인정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솔직히 바둑은 개인전 색채가 아주 강한 종목입니다. 다섯 명이 나서는 단체전이라지만 역시 일대일 싸움의 바운더리인 것입니다. 양궁처럼 앞서 쏜 팀원의 점수를 이어받아 슈팅하는 것도 아닙니다. 엄밀히 말해 일대일 싸움의 승패를 종합해 가리는 단체전은 원론적으로 개인기력이 우수한 선수를 한명이라도 더 확보한 팀이 승리를 가져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막상 프런트의 일원으로 함께 경기에 참여하여 울고 웃다보니 오더에 따른 변수, 부담감(내 패배가 전체에 영향을 미칠 테니 개인전에 비해 엄청날 수밖에 없습니다) 등 확실히 뭔가 다른, 단체전 특유의 요소가 있고 이것이 작용하기에 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마트오로는 이러한 요소를 십분 구축했고 이것이 분명 승부에 기(氣)를 불어넣었다고 확신합니다. 순전히 한종진 감독의 역량입니다.
▲ 박지연(오른쪽), 오로의 락스타리거는 거의 모든 판의 검토를 함께했다. 앞줄 맨 왼쪽에 오로팀 락스타리거 김누리
▲ 팀 관계자, 팀원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한종진 감독, 리그 최연소 감독이라 졍규리그 내내 타 팀의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팀은 몰라도 한종진 감독의 오로에겐 질 수 없다'는 분위기, 그러나 포스트시즌에 오면서 팀은 가장 많은 응원을 받았고, 한종진 감독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 감독은 "많은 분들이 응원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몇 차례나 말했다. 우리는 한배를 탄 팀원이다!
포스트시즌 3위를 차지한 스마트오로팀은 1억원의 상금을 확보했습니다. 어떻게 분배할 것이냐 물었다가 또한번 감동을 받았습니다. 일단 상금의 10퍼센트를 락스타리거들의 몫으로 떼어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5등분. 락스타리거들에게 상금을 내놓자고 사전에 약조한 팀이 있다는 얘긴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5등분에서 또 궁금했습니다. 내내 주전으로 뛰다시피 한 민상연의 몫은 따로 없는가? 했더니 ‘얄짤없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하기야 락스타리거로서 큰 무대에서 뛸 수 있는 기회와 엄청난 경험을 쌓은 가치가 상금 이상일 것입니다. 최원용 코치에게는 한종진 감독이 자신의 3위 감독상금을 나눠줄 생각인가 봅니다.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에 익숙해진 프로의 세계에서 보기 드문 ‘공동체정신’인지라 신선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 한국리그 최고령(59세) 조훈현 9단도 오로팀이었다. 최연소 감독에 최고령 선수의 찰떡궁합
조훈현 9단의 얘기 역시 빠뜨릴 수가 없습니다. 바둑리그사상 한종진은 최연소(79년생) 감독입니다. 이 때문에 일부 중년기사들로부터 말이 조금 돌았습니다. 감독은 가급적 40세 이상 기사들이 맡도록 하자는 애초의 언약이 양건(75년생), 김성룡(76년생)으로 하향하더니 79년생인 '한종진' 선까지 내려갔으니까요. 그런데 하이트진로와 영남일보 두 개팀이 막판에 한국리그 불참을 통보하면서 10개팀을 맞추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급조한 한국기원 자회사(스마트오로) 팀이다 보니(그래서 박치문 기자는 ‘미운오리새끼 팀’이라는 별칭을 붙였습니다) 더는 신생팀의 감독선임에 대해 이의를 달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도 이번에 한종진 감독이 마음껏 역량을 보여주어 다행입니다.
여하간 최연소 감독에게 이번 바둑리그 최고령자인 조훈현(실제나이 52년생) 선수는 그 명성을 떠나 부담스런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포스트시즌을 앞두고 미디어데이에서도 “조훈현 9단을 어떻게 관리했느냐?”는 질문이 나왔고 한종진 감독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조국수님은 내가 관리할 수 있는 그러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국수님이 초보감독이 맘껏 작전을 펼칠 수 있도록 일체 무간섭, 맡겨 주심으로써 외려 나를 관리하셨다. (웃음) 리그 첫판에서 넷마블팀에 1-4로 대패한 다음 또 졌으면 신생팀으로서, 또 초보감독으로서 많이 흔들렸을 거다. 다행이 두 번째 티브로드팀과의 경기에서 3-2로 이겨 자신감을 얻었는데 그때 조국수님의 승리(대 이원도)가 참으로 값진 결정타였다. 조국수님은 우리팀의 거대한 정신적 지주였다.”
실제 그랬습니다. 조훈현 9단은 정규리그에서 기본판수(6판)만 채웠고 성적도 2승4패를 기록했으나 이 2승이 주저앉느냐 마느냐의 분수령에서 터뜨려준 영양 만점의 히트였습니다. 오더를 짤 때 대선배의 출전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새까만 후배감독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 조9단은 만날 때마다 “나는 없다고 생각해. 외국 가고 없는 거야.”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아직도 귀에 생생합니다. 리그2라운드에서 이원도를 꺾고 검토실로 들어오던 조훈현 9단이 씨익 웃으며 던졌던 말.
“기적이 일어났나?”
그렇습니다. 2012바둑리그에서 스마트오로팀은 기적을 보였습니다. 스마트오로가 놀라운 활약을 펼치지 않았다면 올해의 바둑리그는 앙꼬 없는 찐빵처럼 볼 맛이 없었을 겁니다. 이것이 승부다! 이것이 팀정신이다!,를 보여준 스마트오로팀이 자랑스럽습니다. 당당하고 멋진 그대 승부사들에게 경의를!
(추신) 아, 주장 이영구 선수에 대한 치사를 빠뜨릴 뻔했습니다. 매년 한국리그에서 70%대의 경이적인 승률을 올리던 그가 올해에는 9승8패, 반타작(52.9%)을 조금 웃도는 성적에 머물렀습니다. 이 바람에 많은 이가 아쉬움을 드러냈습니다만, 주장의 존재감은 꼭 성적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팀의 상위 지명 선수들이 중국갑조리그로 '위안화 벌이'를 나갈 때 스마트오로의 1지명은 꿋꿋이 한국리그에 올인해 주었습니다. 이영구는 중국 갑조리그 항저우 팀 소속 선수입니다. 항저우 팀에서 필요하다며 계속 출전요청을 했지만 고민 끝에 번번이 양해를 구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의 보이지 않는 헌신이 팀원들에게 얼마나 큰 버팀목이 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다들 2012한국리그에 '영구 없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영구, 있습니다!'
[ 글 | 정용진/사이버오로 이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