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빛 찬란한 4월, 해마다 이맘때면 섬은 소리 없는 아픔에 젖어든다. 화사한 꽃무더기 뒤에 감춰진 슬픈 역사, 제주4·3사건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제주4·3사건은 70주년을 맞았다. 꽃비 내리는 어느 날, 흩날리는 꽃잎을 따라 그때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유채꽃 흐드러진 벌판에도, 새하얗게 파도치는 바닷가에도 꽃잎이 닿는 곳 어디든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남아 있었다.
제주4·3사건의 희생자들이 잠들어 있는 제주4.3평화공원 행방불명 희생자 위령지
제주4·3을 배우고 알아가는, 제주4·3평화공원
혹시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오래된 옛 드라마 이야기다. 어릴 적 숨죽이며 보던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지금도 기억나는 장면 중 하나가 초가집들이 불타오르고, 군인들이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끌고 가던 모습이다. 그때는 그곳이 제주도인지 몰랐다. 그 장면이 제주4·3사건(이하 제주4·3)을 나타낸 것인지도 몰랐다.
제주4·3사건을 기억하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공간, 제주4·3평화공원
길을 떠나기 전 문득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여전히 제주4·3이란 역사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 첫 코스로 제주4·3평화공원을 찾았다. 한라산이 멀리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봉개동 언덕배기, 그곳에 펼쳐진 제주4·3평화공원은 제주4·3을 기억하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공간이다. 너른 부지에 4.3평화기념관과 위령탑, 각명비, 위패봉안소 등 여러 시설이 들어서 있다. 매년 4월 3일이면 이곳에서 ‘제주4·3 희생자 추념식’이 열린다.
[왼쪽/오른쪽]오랜 세월 역사의 뒤편에 묻혀 있던 제주4·3사건을 형상화한 백비 / 토벌대를 피해 겨울산 속으로 떠난 사람들의 피난처 전시관마다 제주4·3사건 자료들이 빼곡하게 전시되어 있다.
4·3평화기념관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백비(비문 없는 비석)가 소리 없이 우리를 맞았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순수한 비석. 누워 있는 백비 앞에 ‘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는 문구가 적힌 석판이 놓여 있다. 홀로 조용히 읊자니 가슴 한쪽이 먹먹해지는 기분이다.
백비를 지나면 오랜 세월 아픔의 시간을 보냈던 제주도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여러 개의 테마로 나뉜 전시관마다 제주4·3이 일어난 배경과 원인, 과정 등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해방 이후 이념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 긴 세월 침묵을 강요당해온 가슴 아픈 역사가 이곳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많은 이들이 아직 잘 모르고 있어 더욱 서글픈 역사. 제주4·3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잃어버린 퍼즐 조각 같다.
전시관은 1948년 4월 3일부터 한라산 금족령을 해제한 1954년까지 수년에 걸쳐 이어진 제주4·3사건을 시간 순으로 오목조목 정리해놓았다. 덕분에 처음 제주4·3의 역사를 접하는 이들도 이해하기 쉽다. 이 기간 3만여 명에 달하는 제주도민이 목숨을 잃고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려졌다. 전시는 중산간 지역의 마을이 불타 없어지고, 삶터를 잃은 주민들이 엄동설한에 산으로, 동굴로 숨어들어야 했던 이야기들을 가감 없이 전한다.
[왼쪽/오른쪽]위령탑 둘레에 끝없이 이어진 각명비들 / 희생자 중에는 이름도 갖지 못한 갓난아이와 4세밖에 안 된 여아도 있다.
기념관을 나와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무거워진 마음을 다잡아본다. 봄철 푸릇한 기운이 물씬 풍겨나는 공원 안은 ‘평화’라는 단어에 걸맞게 무척 고요하고 평온하다. 잠시 사색에 잠기며 언덕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 사이 이내 위령탑에 닿았다. 맑은 하늘로 쭉 뻗어난 위령탑 둘레를 각명비가 둘러싸고 있다. 각명비에는 마을별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과 성별, 나이, 사망일시 등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이곳에 적힌 이름만 2만여 명. 끝도 없이 이어진 비석들 위로 수없이 스러져간 이들이 겹쳐 보이며 다시금 아련한 슬픔이 밀려온다.
[왼쪽/오른쪽]희생자 신위 1만4000여 기가 봉안되어 있는 위패봉안실 / 너른 들판에 약 3890기가 설치되어 있는 행방불명인 표석
공원 가장 윗자락에는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위패봉안실과 행방불명인 표석이 자리한다. 위패봉안실에는 희생자 신위 1만4000여 기가 봉안되어 있으며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추모가 가능하다. 뒤늦게 헌화용 국화를 준비해올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4·3 희생자 중에는 행방불명되거나 시신을 찾지 못한 이들도 많다. 제주4·3 때 체포돼 육지의 형무소로 보내진 이들 대부분이 6·25전쟁 중 총살되어 암매장되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어서조차 편히 눕지 못했을까. 푸른 초원을 까맣게 물들인 수천 개의 표석들을 살피다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제삿날이 같은 마을, 북촌 너븐숭이4·3기념관
제주4·3평화공원에서 차로 30분 정도 달리면 작은 바닷가 마을인 북촌리가 나타난다. 예전에 이 마을을 찾았을 땐 마을 어귀에 서 있는 팽나무 고목이 무척 인상 깊었는데, 이번에 다시 찾았을 땐 제주4·3의 상흔이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매년 섣달 열여드레 밤이면 온 동네가 제삿날이 된다는 이곳 북촌마을은 주민 350여 명이 같은 날 군인들에 의해 집단 총살된 아픔을 갖고 있다. 북촌 너븐숭이4·3기념관에 그날의 모습이 세세히 기록되어 있다. 생존자들이 전하는 눈물 어린 증언들은 여전히 치유되지 못한 이들의 상처를 되돌아보게 한다.
[왼쪽/오른쪽]사건 당시 상황을 자세히 살필 수 있는 북촌 너븐숭이4·3기념관 / 관람객들이 제주4·3사건 관련 영상을 시청하고 있다.
기념관 밖에도 과거의 아픔이 고스란히 서려 있다. 총살이 벌어진 장소에는 어린아이들의 돌무덤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던 모습을 형상화한 ‘순이 삼촌’ 문학비와 비석들이 여기저기 누워 있다. 제주 출신 소설가인 현기영 작가의 ‘순이 삼촌’은 북촌리 사건을 토대로 쓰였다. 이를 통해 금기시되었던 제주4·3이 세상에 조금씩 알려지게 됐다. 위령탑 쪽을 바라보니 벚꽃들이 눈부시게 피어 있었다. 위령탑 너머로 흐르는 푸른 바다가 마음에 위안을 안겨주듯 아스라이 퍼져 있었다. 아픈 가슴을 꾹 누르며, 조용히 북촌마을을 떠났다.
[왼쪽/오른쪽]돌무더기 형태로 남은 어린아이들의 무덤 / 현기영 작가의 단편소설 ‘순이 삼촌’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제주 북촌마을 위령탑과 활짝 피어난 벚꽃
서로 다른 조상들이 묻힌 하나의 묘, 섯알오름 학살 터 & 백조일손지묘
제주 남서쪽에 펼쳐진 알뜨르비행장 끄트머리에는 섯알오름이 있다. 너른 들녘을 드라이브하듯 한참 달려 도착한 섯알오름 학살 터. 6·25전쟁 때 예비검속에 체포된 사람들이 집단 처형된 곳이다. 당시 무작위로 잡혀 끌려가던 사람들은 다가올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 실려가는 트럭 안에서 고무신 같은 소지품을 길가에 던져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고 한다.
추모비 뒤편 철창으로 둘러쳐진 학살 터는 햇빛이 비치는데도 불구하고 왠지 모를 음울함이 느껴졌다. 푹 파인 2개의 웅덩이가 그대로 땅속으로 꺼져버릴 것만 같았다.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무정한 땅에도 봄꽃은 피어났다.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하늘거리는 유채꽃들이 희생자들의 넋인 양 안타깝게 느껴졌다.
[왼쪽/오른쪽]예비검속에 집단 처형된 희생자를 위한 추모비 /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섯알오름 학살 터
“죄지은 자 하나 없고/ 죄 없는 자만 묻혀/ 백서른둘, 뼈가 엉켜/ 한 자손이 되옵니다.”
-고성기 시인이 백조일손지묘 위령비에 적은 추모시 중
섯알오름 희생자들은 대부분 인근 묘역에 함께 안장됐다.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 서로 다른 132분의 조상들이 한날 한시 한곳에서 죽어 뼈가 엉기어 하나가 되었으니 그 후손들은 이제 모두 한 자손이라는 의미다. 예전에는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라고 불렸다. 사건을 숨기기 위해 학살 터 일대를 출입 통제한 탓에 유족들은 몇 년이 지나서야 시신을 찾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시신들이 썩고 뒤엉겨서 결국 두개골과 팔, 다리뼈들을 적당히 맞춘 132구의 시신을 한데 안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보다 슬픈 사연이 또 어디 있으랴. 제주4·3사건이 남긴 상처는 생각보다 깊고 어두웠다. 묘소를 돌아 나오는 길에 코끝을 찌르는 알싸한 마늘향이 가슴 깊이 박혔다.
[왼쪽/오른쪽]섯알오름 학살 터에서 희생된 이들을 안치한 백조일손지묘 / 뼈가 뒤엉겨 누구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어 한 묘소에 안장한 희생자들 위령비 너머로 산방산이 우뚝 솟아나 있다.
여행지에서 엿본 제주4·3의 흔적, 광치기 해변 터진목 & 다랑쉬굴
성산일출봉 일출 명소로 꼽히는 광치기 해변. 이곳에서도 제주4·3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옛적 ‘터진목’이라 불리던 이곳은 과거 물때에 따라 육지와 길이 연결되고 끊어지기를 반복했던 곳이다. 제주4·3 당시에 성산면 주민이 많이 희생됐다고 한다. 지금은 그런 일이 언제 있었냐는 듯 사위가 고요하고 평화롭기만 하다. 혼령들을 위로하는 공간만이 무뎌지는 기억을 잊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다. 광치기 해변을 들른다면 잠시 묵념의 시간을 가져보자.
[왼쪽/오른쪽]터진목에서 성산일출봉이 훤히 보인다. / 제주4·3 유적지인 광치기 해변의 터진목
성산일출봉에서 차로 약 20분 거리에는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 다랑쉬오름이 있다. 오름 아래에 100년 남짓한 유래를 가진 다랑쉬 마을이 있었다고 하지만 제주4·3 때 모두 불에 타서 지금은 무성한 대나무 숲만이 그 흔적을 엿보게 한다. 도로에서 한적한 오솔길로 접어든 길 끝에 다랑쉬굴 유적지가 있다. 흙먼지를 날리며 달리는 중에 십여 년 전 굴 안에서 제주4·3의 희생자 시신이 발견돼 충격과 아픔을 안겼던 뉴스가 어렴풋이 기억났다. 다랑쉬굴은 인근 세화리, 종달리 주민들이 숨어 살던 도피처였다. 지금은 굴 입구가 막혀 들어갈 수 없다. 앞서 다녀온 제주4·3평화공원 특별전시관에서 본 굴 내부 모습을 떠올려봤다. 아무리 노력해도 좁고 험한 굴속에서의 도피생활이 상상이 가질 않았다. 그저 절박했을 그들의 심정만큼 심장이 쿵쾅거리며 울릴 뿐이다.
다랑쉬굴이 발견된 터 [왼쪽/오른쪽]입구조차 좁고 험한 다랑쉬굴 / 희생자 유골과 유품을 재현한 발굴 당시의 다랑쉬굴. 제주4·3평화공원 특별전시관에서 볼 수 있다.
그 모든 시간을 묵묵히 지켜봤을 다랑쉬오름은 여전히 위풍당당하고 넉넉한 모습이다. 깊은 상처에도 새살이 다시 돋아나듯, 이 봄과 더불어 앞으로 다가올 모든 제주의 봄이 찬란히 빛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다랑쉬굴 유적지에서 보이는 다랑쉬오름
여행정보
-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명림로 430
- 문의 : 064-723-4344
너븐숭이4·3기념관
-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북촌3길 3
- 문의 : 064-783-4303
주변 음식점
- 찜이야기 : 문어아구해물찜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평대리 3347 / 064-782-9969
- 오늘은 와플데이
- 성산국수
첫댓글 접때 한번갈러고 했어는데
뱅기시간때문에............
아름답고,소중한 인연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