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미지화하기
시인은 언어로 인간과 자연과 신과 소통을 꿈꾸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파도여!’하고 부르면 실제로 파도가 밀려오고, ‘멈춰라’하면 조용해지길 꿈꿉니다.
그래서 저도 언젠가 태풍 속에 휘날리는 치자꽃을 바라보며, '모두 나비가 되거라!'고 되뇌며
팔랑 팔랑 하양 팔랑 팔랑 팔랑 하양 팔랑 팔랑 팔랑 하양 팔랑 팔랑 팔랑 하이양 하양 팔랑 팔랑 하양 하양 하이양 팔라당 팔랑 팔랑 팔랑 하이양 하이양 팔랑 팔랑 팔라당 하양 팔랑 팔랑 팔랑 팔랑 팔랑 팔랑 팔랑 하양 하양 하양 팔랑 팔랑 팔랑 하양 팔랑 팔랑 팔랑 하이양…
이라고 원고지 빈 칸을 채워봤습니다. 이 장에서는 이미지화의 필요성과 그 유형을 알아본 다음, 이제까지 써온 자신의 작품들을 이미지화 해보기로 합시다.
1. 이미지화의 필요성
☺ 원시 시대는 언어와 사물이 하나로 결합된 상태였습니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서로 분리하기 시작하여 이를 통합시키려고… |
19세기까지 시는 ‘시인의 사상과 감정을 운율적인 언어로 표현한 것’이라고 정의해 왔었습니다. 그러다가 자유시가 대두되면서 이런 정의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시의 어법이 운율(韻律) 중심에서 이미지(image) 중심으로 바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대시의 입장에서 시를 새로 정의한다면, <시인의 사상과 감정을 심상적(心象的) 언어로 표현한 것>이라고 바꿔야 할 겁니다.
이와 같이 시의 어법이 운율에서 이미지로 바뀐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큰 원인은 아래 도표에서 보는 것처럼 언어가 단지 추상적 기호에 불과하다는 자각입니다.
시 인
↙ (subject : S) ↘
↙ 생 각 ↘
↙ ↘
언 어 ⇠ ┈┈┈┈┈┈┈┈┈ 관련 사물
(Language: L) 자의적 관계 (Object : O)
시인은 위 도표처럼 어떤 생각(S)을 하면 자동적으로 관련된 언어(L)와 사물(O)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사물(O)을 접해도 그에 대해 생각(S)을 하고 언어(L)를 떠올립니다. 사고는 관련된 언어(L)로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근대까지 대부분의 시인들은 표현을 잘하면 독자들도 시인처럼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물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이해하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사정은 전혀 다릅니다. 그들이 처음 접하는 것은 언어(L)입니다. 그리고 언어는 의미와 기호를 강제로 결합시킨 것으로서, 그를 통해 시인이 지시하는 사물이나 관념을 떠올려야 하기 때문에 첫 단계부터 장애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먼저 문맥(context)의 전후 관계를 살피면서 작품에 쓰인 어휘와 자기가 알고 있는 어휘의 의미를 대조합니다. 하지만, 독자들이 적용하는 의미는 <사전적(lexical)>이고, <일상적(ordinary)>이며, <지시적(denotation)>이고, 시인이 사용한 어휘는 <개인적(personal)>이고, <특정적(specific)>이며, <함축적(connotation)>인 의미입니다. 그로 인해 현대시로 접어들면서 시인들이 말하는 대신 언어로 그림을 그려 보여주는 방향으로 바꾸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언어의 자의성(恣意性)이나 추상성(抽象性) 때문에 고통을 받은 사람들은 현대 시인들만이 아닙니다. 과거의 시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로 접어들어 이런 문제가 새삼스레 제기된 것은 자유주의 내지 개인주의 사상이 팽배함에 따라 시의 화제가 <보편적인 것→특수한 것>, <공적(公的)인 것→사적(私的)인 것>, <시적인 것→비시적인 것>, <자연적인 것→기계적인 것>으로 바뀐데 원인이 있습니다. 그리고 독자들 취향 역시 시인으로부터 설교를 듣는 것보다 스스로 보고 판단하려는 쪽으로 바뀌어 운율을 제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9세기 말 러시아의 포테브냐(A. Poteb-nya)는 이미지 없는 시는 상상할 수도 없다면서, 이미지 절대론을 내세웁니다. 그리고 20세기로 접어들면서 흄(T. E. Hulme)을 중심으로 모였던 이미지스트들이 ≪몇 명의 이미지스트 시인들(Some Imagist Poets)≫(1915)이라는 사화집(詞華集)를 통해 아래와 같은 요지의 선언문을 발표합니다.
①일상적이되 정확한 언어(exact word)로 사용할 것. 모호하거나 장식적(裝飾的)인 말은 사용하지 말 것.
②새로운 운율이 새로운 사상임을 자각하고, 새로운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자유시 리듬을 창조할 것. 자유를 위해서 싸우듯, 자유시를 위해 투쟁할 것.
③제재의 선택에서 자유로워질 것. 그러나 비행기와 자동차 같은 것들만 새로운 제재라고 생각하지 말 것.
④가능한 명확한 이미지로 대상을 개별화하여 그릴 것. 그러나 사물을 그대로 그리는 화가 역할에 그치지 말 것.
⑤견고하고 분명한 구조를 택할 것.
⑥긴축(緊縮)과 집중(集中)을 시의 본질로 받아들일 것.
이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자유시의 화제는 자유로워햐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내야 하고, 본질적인 비유(essential metaphor)를 구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념을 창작과 비평에 적용한 사람은 파운드(E. Pound)의 지도를 받아 문단에 나선 엘리엇(T. S. Eliot)과, 대학 강단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리처즈(I. A. Richards)입니다. 그리고 미국의 밴트빌트(Vanderbilt) 대학의 랜섬(J. C. Ransom) 교수와 그의 제자들인 테이트(A. Tate), 워렌(R. P. Warren), 브룩스(C. Brooks) 등이 체계화하여 현대시의 어법으로 자리를 굳히게 됩니다.
이와 같은 이미지의 기능은, 첫째로 시의 의미를 육화(肉化, incarnation)화는 기능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 작품을 살펴봐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언어는
꽃잎에 닿자 한 마리 나비가
됩니다.
언어는
소리와 뜻이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진다.
꽃의 둘레에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언어가
불꽃처럼 타다간 꺼져도
어떤 언어는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
됩니다.
―문덕수(文德守), 「꽃과 언어」 전문
이 작품에서 ‘언어’는 꽃잎에 닿자마자 한 마리 나비가 되고, ‘깃발’처럼 펄럭이고, 다시 ‘꿀벌’이 되고 있습니다.
시인이 이런 제재를 택한 것은 언어는 단지 의사 전달의 도구에 그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존재이며, 생명과 에너지를 지녔다는 자신의 언어관을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런 화제는 설명적 어법으로는 전달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일상에서 체험할 수 있는 제재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추론하고 사유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유사한 비유물을 내세워 이미지화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대상의 모습을 모방적으로 재현하는 기능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 때 대상은 <시인의 관념 속에 존재하는 것>과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작품은 시인의 내부에 존재하는 관념이고, 다음 작품은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입니다.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 시(市)의 가을 하늘을 생각하게 한다
길은 한 줄기 구려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러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鐵柵)
- 김광균 <추일서정秋日抒情>에서
어때요? 스산한 가을날의 풍경을 직접 보는 것 같지요?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은 가을날의 풍경을 모방적으로 재현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새로운 사물의 창조 기능을 꼽을 수 있습니다. 위 작품과 같이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을 그려도 그 자체만 재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대상을 선택하여 이미지화한다는 것은 그를 통해 무엇인가 이야기하기 위해서이고, 그로 인해 정도의 차이가 있을망정 시인의 정신을 은유하게 됩니다.
반대로 관념을 이미지화해도 허상(虛像)으로 그치지 않고 실재체(實在體)처럼 바뀝니다. 이미지화를하려면 관념의 경우도 시간과 공간을 설정하고, 물질적 감각을 부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관념이던 사물이던 새로운 것으로 바뀝니다.
그것은 다음 작품을 살펴보아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누이가 듣는 음악 속으로 늦게 들어오는
남자가 보였다 나는 그게 싫었다 내 음악은
죽음 이상으로 침침해서 발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잡초가 돋는데, 그 남자는
누구일까 누이의 연애는 아름다와도 될까
의심하는 가운데 잠이 들었다
- 이성복(李晟福), 「정든 유곽에서」에서
이 작품은 나와 누이가 음악을 들으며 잠들기 시작하는데 누군가 누이 방으로 들어오는 것 같아 확인하려다가 그냥 잔 것을 은유화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좀더 꼼꼼하게 읽으면 음악 속에 ‘잡초’가 돋고, 실제로 어떤 사내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실의 풍경을 모방적으로 재현한 것이라고 해도 결과적으로는 이미지의 기능을 이용하여 새로운 풍경을 창조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넷째로, 독자의 자율적 해석권(解釋權)을 확대시키는 기능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미지화하려면 화자는 발언을 자제하고 대상의 모습을 그려야 합니다. 그로 인해 독자들은 그 그림을 통해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 나름대로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섯째, 그 작품을 구조화하는 기능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미지화한 부분은 서술한 부분보다 독자의 시선을 끌어당기기 마련입니다. 그로 인해 설명한 부분은 배경으로 물러나고, 이미지화한 부분이 전경(前景)으로 나서 구조를 이룹니다.
시를 쓰려는 사람들에게는 주제를 고르는 능력 이상으로 이미지화하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근대 이후 모든 예술의 기법은 ‘말하기(telling)’에서 ‘보여주기(showing)’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이미지화하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