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인천 중구를 사랑하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바위솔
2020년 3월 1일 등록.
2019년 9월 17일 (화) 촬영.
전라북도 장성군에 있는 필암서원은 지난 2019년 7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우리나라에서 14번째
등재된 9곳의 서원 중 한 곳입니다.
*9곳의 서원,
안동 소수서원(1543, 회헌 안향), 함양 남계서원(1552년, 일두 정여창), 옥산서원(1573, 회재 이언적)
안동 도산서원(1574, 퇴계 이황), 장성 필암서원(1590,하서 김인후), 대구 도동서원(1605년,한훤당김굉필)
안동 병산서원(1613, 서애 유성룡), 정읍 무성서원(1615, 고운 최치원), 논산 돈암서원(1634, 사계 김장생)
가는날이 장날이라고 벼르고 별러서 방문한 날이 일년에 두 번 봄, 가을에 지내는 추향제 날이어서 경내는
행사로 복잡하여 제대로 돌아 보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사진도 두서없이 올렸으니 위 필암서원 배치도를 보시고 전각의 위치를 가늠하면 되겠습니다.
정문인 확연루를 지나 강당인 청절당을 건너 바로 제를 올리는 사당인 우동사 내삼문 앞 계생비로 왔습니다.
그리고 내삼문을 가로막고 있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재실인 우동사까지 갔네요. 극성맞죠. ㅎㅎㅎ
우동사에서는 추향제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우동사,祐東祠
우동사는 필암서원의 사당이다.
하서 김인후와 그의 사위 고암 양자징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일년에 두 번 제사를 지낸다.
"우동"은 "하늘의 도움으로 동방에 태어난 이가 하서 김인후이다" 라는 의미이다.
사당 내부 북쪽 벽에 김인후, 동쪽 벽에는 양자징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벽면에 그려진 학, 용, 연꽃, 봉황, 잉어, 매화, 국화, 소나무 등은 절개와 장수를 상징한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으로 전형적인 사당 건축 양식을 따랐다. -안내문-
제사 형식이 달라졌나요, 여성들도 제사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YTN에서 나와 취재도 하더군요.
그 틈에 저도 끼어 마구 사진을 찍었네요.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없을테니까요.
사당 내부도 구경할 수 있었다는건 행운이었습니다. 평시에는 사당을 개방하지 않습니다.
사당을 한바퀴 돌아 봤습니다.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이 맞죠.
반칸씩 깔끔하게 구분해 놓아 이해하기가 쉽네요.
사회도 무슨 시상식처럼 남여가 공동으로.... ㅎㅎㅎ 참 멋있습니다.
우동사 현판입니다.
내부도 보통 사당 내부와 달라요. 벽을 빙둘러 그림이 있습니다.
헐, 사당 안에도 여성분이.
앞마당에도 제관들이 있습니다.
뒷벽이 있는 위패가 김인후 선생의 위패이고 동쪽 벽에 있는 위패가 사위 양자징의 위패입니다.
김인후 선생의 위패 앞에 돼지머리가...
사당에서 나와
돌아본 모습입니다.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앞에 계생비,묘정비가 있습니다.
계생비,묘정비.繫牲碑,廟庭碑.
계생비는 필암서원에서 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사용할 가축을 매어 놓는 비석이다
제관들은 매어 놓은 가축을 검사한 후 제물로 사용할지 여부를 결정하였다.
비석 앞면에는 "필암서원계생비"라 새겨져 있는데 송일증 선생이 썼다.
묘정비는 서원의 건립 취지와 연혁, 서원에 모셔진 인물에 대하여 기록하는 비석이며 서원비라고도 불린다.
비석 뒷면 묘정비문은 송병선 선생이 글을 짓고 윤용구 선생이 글씨를 썼다.
내삼문.
내삼문 담을 따라 우측으로 가면
장판각과 한장사가 있습니다. 사진의 장판각 옆 담너머에 지붕만 살짝 보이는 건물이 사당입니다.
장판각.
장판각은 1971년에 세워졌으며 전면 3칸에 측면 1칸의 구조이다. 장판각 안에는
하서선생전집 목판, 초천자문, 백련초해 등이 보관되어 있으며 이들은 전남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한장사.
한장사의 전면.
한장사의 후면.
장판각의 우측면과 후면입니다. 뒤로 보이는 전각이 사당인 우동사입니다.
장판각에서 본 사당의 우측담입니다. 측면에도 사당으로 출입할 수 있는 일각문이 있습니다.
강당인 청절당이 있는 마당입니다. 계생비,묘정비 옆으로 보이는 건물이 동재인 진덕재입니다.
계생비,묘정비와 동재인 진덕재
진덕재,進德齋.
서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생활하며 잠을 잤던 동쪽에 위치한 건물로 현판 글씨는 송준길 선생이 썼다.
송준길 선생이 썼다는 진덕재 현판입니다.
동재인 진덕재의 후면.
진덕재의 후원입니다.
후원이 상당히 넓네요.
안쪽에서 본 강당, 청절당입니다. 필암서원이란 현판이 걸린 강당 안쪽에 청절당이라는 현판이 걸렸네요.
청절당,淸節堂.
서원 유생들이 회의하고 공부하는 공간으로 가운데는 대청이고 좌,우에는 작은 방이 있으며,
옛 진원현의 객사 건물을 옮겨 지었다고 한다. 현판은 송시열 선생이 쓴 김인후 선생 신도비문 중
"청풍대절,淸風大節에서 인용했으며, 글씨는 송준길 선생이 썼다.
청절당, 왼편의 방입니다.
이곳은 청절당의 대청입니다.
송준길 선생이 쓴 청절당 현판이 대청 가운데에 걸려 있네요.
청절당 좌측인 서쪽에는 서재인 숭의재가 있습니다. 용도는 동재와 같은 학생들의 생활공간입니다.
숭의재 현판.
숭의재 옆에 있는 전사청입니다.
전사청,典祀廳.
제사에 필요한 물건을 보관하고, 제사 지낼 때 음식을 마련하던 건물이다.
전사청에서 본 경장각.
경장각,敬藏閣
경장각은 조선 12대 임금 인종이 내린 묵죽도와 그 판각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이다.
정조임금이 김인후 선생을 문묘에 배향하면서 정조10년(1786)에 건립된 것으로 짐작된다.
현판 글씨는 정조가 손수 썼다고 알려져 있다.
임금이 쓴 글씨는 존엄하고 신성하게 여겼기 때문에 현판을 얇은 천으로 가렸다.
건물은 전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형식이다.
경장각의 귀공포의 네모서리에는 용머리가 있습니다. 모서리 기둥위에 용장식이 보이죠.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
정면에 있는 문은 청절당에서 서원의 출입문인 확연루로 나가는 문이고, 좌측문은 고직사 출입문입니다.
고직사입니다. 고직사는 지금의 관리사라 할 수 있는 곳입니다.
고직사 담 너머로 강당인 청절사와 청절사 출입문, 그리고 필암서원의 정문인 확연루가 보이네요.
필암서원 정문인 확연루입니다. 안에서 본 모습이예요.
확연루.(안에서 본 모습)
확연루 앞마당에 있는 매화나무.
필암서원의 정문인 확연루의 현판은 송시열 선생의 글씨입니다.
하마석,下馬石,은
사람들이 말이나 가마를 타고 내릴 때 디딤돌로 사용하기 위해 대문 앞에 놓아둔 넓적한 돌입니다.
호남제일의 사액서원 필암서원 / 사적 제242호.
필암서원은 하서 김인후 선생에 대한 제사의 공간과 교육 및 학문 수련의 공간,
그밖에 장서 공간이나 지원시설 공간 등 조선시대 서원의 기본 구조를 모두 갖추고 있는 전형적인 서원이다
이곳은 호남지방의 유종(儒宗)으로 추앙 받는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와
그의 제자이자 사위인 고암 양자징(鼓巖 梁子徵, 1523~1594)을 배향하고 있다.
김인후 선생이 죽은 후 30년이 지난 선조 23년(1590), 호남의 유림들은 그의 도학을 기리기 위해
장성읍 기산리에 사우를 짓고 그의 위패를 모셨다.
그러나 1597년 정유재란 때 서원이 소실되자 인조 2년(1624)에 황룡면 증산동으로 옮겨 세웠다.
효종 10년(1659)에는 유생들의 요청에 따라 필암이라는 액호를 하사받고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또 수해를 입어 현종 13년(1672)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 지었고 1786년에 양자징도 함께 모셔졌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도 없어지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른다.
정면의 2층 누각인 확연루 정면에 나붙은 현판은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며,
필암서원 청절당 및 동재와 서재에는 동춘당 송준길의 글씨로 청절당의 당호와 진덕재, 숭덕재라 쓴
현판이 걸려 있고, 숭의재 옆으로 인종이 하사한 묵죽의 판각이 소장되어 있는 자그마한 경장각이 있는데
경장각의 현판은 정조의 어필을 하사한 것이다. -필암서원-
필암서원에 모신 인물.
하서 김인후 선생 / 중종 5년(1510)~명종 15년(1560)
본관은 울산이며 자는 후지(厚之)이고, 호는 하서(河西), 담재(澹齋)이다.
호남 유림의 종장(宗匠)으로 추앙받는 김인후 선생은 성균관에 들어가 이황과 함께 학문을 닦았다.
중종 35년(1540)에는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고
중종 38년(1543)에는 세자시강원의 설서(說書)가 되어 인종의 세자시절 스승으로의 중임을 전담하였다.
인종 1년(1545) 인종이 승하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난 뒤에는 병을 이유로
고향인 장성에 돌어가 성리학 연구에 정진하였고, 누차 교리(校理)에 임명되나 취임하지 않았다.
성경(誠敬)의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하고 이항(李恒)의 이기일물설(理氣一物設)에 반론하여,
이기(理氣)는 혼합(混合)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천문, 지리, 의학, 산수, 율력(律曆)에도 정통하였다.
문집에 <하서전집> 저서에 <주역관상편> <서명사천도> <백련초해> 등이 있다.
고암 양자징 선생 / 중종 18년(1523)~선조 27년(1594).
본관은 탐라이며 자는 중명(仲明)이고 호는 고암(鼓巖)이다. 소쇄원 주인 양산보의 아들로 창평 출신이다.
어렸을 때부터 소학 공부를 철저히 하여 실천하였으며,
하서 선생의 제자가 되어 선생의 딸을 처로 맞아 들이고 학업에 더욱 더 정진하였다.
퇴계 이황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율곡 이이 선생과 우계 성혼 선생에게서 강의를 받았다.
선조 때 박순 등의 천거를 받아 관직에 나아가 의영고직장(義盈庫直長), 거창현감, 석성현감 등을 역임했다.
임진왜란 때 아들 양천운을 시켜 금전과 식량을 의병장이던 김천일과 고경명 장군에게 실어 보내기도 했다.
정조 10년(1786)에 양자징 선생은 필암서원에 배향되었다.
서원의 개요.
서원은 선현에 대한 제례와 학생에 대한 교육을 수행해 온 교육기관이었다.
서원이 제도로 정해진 것은 송나라에 들어와서이다.
특히 주자가 도학연마의 도장으로 세운 백록동 서원이 유명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중종 38년(1543)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려 말 학자 안향을 배향하고 유생을 가르치기 위해
백운동서원을 창건한 것이 효시이다.
서원은 제례와 교육이라는 두 가지 기능 외에도 원임과 유생들이 모여 향촌과 나라에 관한 일들을 논의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장소였으며, 도서를 간행하고 보관하는 곳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사회에서 서원은 정치사적, 사회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으며 현재까지도
역사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서원의 성립.
고려말 이후 성리학이 확산되면서 선비들은 지방에 서재(書齋)라는 학교를 세우고 자제들을 가르쳤다.
16세기에 사화가 빈번히 일어나자 선비들은 유명한 유학자들을 기리고 제사하는 사당과 서재의 교육기능을
합하여 서원이라는 새로운 교육시설을 만들어 냈다.
서원 건립은 지방 선비들이 앞장섰으나, 기능이 인재양성과 교화정책에 깊이 연관되어
조정에서 서원의 명칭을 부여한 현판과 서적, 노비들을 내렸으니, 이를 사액서원이라 한다.
1550년 이황의 요청으로 명종이
<백운동서원>에 대하여 <소수서원>이라는 현판과 서적, 노비를 부여한 것이 효시가 되었다.
서원의 발달과정.
서원의 발달과정은 명종까지의 초창기, 선조~현종에 이르는 발전기, 숙종~영조 초까지의 남설기(濫設期),
영조 17년 이후의 쇠퇴기 및 철폐기 등의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서원은 16세기 중엽에 등장하여 양반사족들의 교육기관이자 향촌기구로 존속해 왔다.
17세기 이후에는 서원이 당쟁의 배후기지로도 활용되어서 당색과 양반들의 이해관계가 결합하여
곳곳에서 남설되었고, 사액이 남발되어 여러가지 폐단이 일어나자,
영조 17년에는 사설된 서원 일부가 철훼되었고
그 뒤 대원군에 의하여 만동묘의 철폐, 미사액서원의 철폐, 사액서원의 철폐라는 단계를 거쳐
47개만 남기고 모두 정리되었다.
교육내용.
서원의 교육내용은 성리학적이고 도학적인 것이 중심을 이루었다.
관학에서의 교육이 과거와 법령 규제에 얽매인 것과 비교할 때, 서원교육은 사학 특유의 자율성과 특수성이
존중되었다.
그러나 대체로 이황이 이산원규(伊山院規)에서 제시한 교재의 범위와 학습의 순서가 정형이 되었다.
사서오경으로 본원(本原)을 삼고, <소학> <가례>를 문호(門戶)로 삼는다는 것이 상례로 되었다.
이는 서원의 일반적인 교육과정이라고 하겠다.
위의 사서오경 외에도, 여러 가지 경사자집(經史子集)속에서 서원의 성격에 따라 선별하여 교육하였다.
그리고 성리학, 도학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과거에 응시하는데 필요한 사장학적(詞章學的)인 유학도 교육과정 속에 포함시키는 서원도 있었다.
그러나 불학(佛學), 서학(西學) 등 이른바 이단에 관계되는 서책이나 음사(淫邪), 도참(圖讖), 미신(迷信)에
관련되는 내용은 철저히 금하였다.
교육방법.
원생에 대한 교육은 원규에 의한 규제와 원생 자신의 자율적인 실천과 학습의 조화속에서 이루어졌다.
원규에서는 수학규칙(受學規則), 거재규칙(居齋規則), 교수실천요강, 독서법 등
유자로서 지켜야 할 준칙이 실려 있다.
독서는 다독과 기송만을 일삼지 말고 정독과 사색에 힘쓸 것과 지와 행이 반드시 일치하여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원생 각자에게 선악양적(善惡兩籍)과 같은 일종의 생활기록부를 만들어,
경우에 따라서 출재(出齋-기숙사에서 쫓아냄)를 명하기도 하였다.
서원은 전통적인 교수방법으로는 배운 글을 소리 높여 읽고 의리를 문답하는 강(講)이 있다.
강은 대개 순강(旬講), 망강(望講), 월강(月講) 등으로 나뉜다.
또한 그 방법에 따라 암송낭독인 배강(背講)과 임문낭독(臨文朗讀)인 면강(面講)으로 분류된다.
낭독 뒤의 질의응답은 단순한 암송위주의 학습법을 극복하는 단계이다.
봉심록 / 보물 제 587-13호. / 인조 2년(1624)부터 숙종 27년(1701)까지 필암서원을 찾은 방문객의 명단.
봉심록 <제1책> 조선 인조 2년(1624)~현종 9년(1668)
봉심록 <제2책> 조선 숙종 6년(1680)~숙종 27년(1701)
봉심록에 정재두란 이름을 보고 강화에서 하곡 선생이 다녀간 줄... 자세히 보니 오천 정재두라고 써 있네요
하서 김인후의 생애.
문정공 하서 김인후 선생은 공자를 모신 사당(文廟)에 신주를 모신 우리나라 18분 선정(先正) 가운데
한분으로서 중종 5년(1510) 장성현(長城縣) 대맥동(大麥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울산(蔚山), 자는 후지(厚之)요, 호는 하서(河西) 또는 담재(澹齋)이고, 명종 15년(1560) 51세에
돌아가셨다.
호남유림의 종장(宗匠)으로 추앙받았으며 22세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31세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34세때 세자시강원설서가 되었으며 정조 20년(1796)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김인후 선생은 열살 때 김안국에게서 소학을 배웠고 1531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
이황 등과 교우가 두터웠으며 세자 보도의 중임을 맡았다.
정조는 영의정을 증직하고 문정이란 시호를 하사하였다.
기묘사화 때 죽음을 당한 선비들의 원한을 신원하였고 인종이 죽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고향 장성에 돌아 갔다. 그후 모든 벼슬을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오직 성(誠), 경(敬)의 실천궁행을 학문의 목표로 삼았다.
논설과 의리가 명백했던 선생은 내실에 소홀하고 밖으로만 열심인 선비들을 호되게 꾸중했다고 하며
도의와 절개로 일관했던 선비의 표상이었다.
그래서 선생은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에 있는 문묘에 모셔진 우리나라 18명의 현인 가운데
유일한 호남 출신으로 이 지방 유림들의 큰 어른으로 추앙받아 왔다.
하서 선생의 기념관 내부 모습입니다.
인종과 하서선생.
하서와 인종은 각별했다.
하서는 인종의 세자 시절 세자를 모시고 공부하는 곳인 세자시강원에서 세자보도라는 직책으로 인종에게
글을 가르쳤다.
인종은 하서의 강의에 매료됐고, 의기가 상통하여 그 정표로 세자가 직접 친 묵죽도를 하사 했다고 한다.
이 묵죽도 하단에는 하서가 지은 시가 적혀 있다.
인종이 재위 9개월만에 병사하자 그 충격으로 하서는 낙향하고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그는 고향 장성으로 돌아와 성리학 연구와 시작(詩作)으로 마음을 달래며 후진을 키우는데 전념했다.
하서는 인종이 서거한 음력 7월 초하루가 되면 술병을 가지고 집 남쪽에 있는 산에 올라
<한 잔 마시고 한 번 곡하고...> 를 거듭해 밤을 지새고 내려오기를 평생동안 거른 일이 없었다고 한다.
이곳은 교육센터입니다.
석류가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네요.
고직사입니다. 추향제가 끝난것 같아서 다시 서원으로 갔습니다.
이번에는 고직사를 통해 들어 갔습니다.
옥수수 씨앗.
그동안에 사당인 우동사의 내삼문은 잠겼네요.
아직 잠기지 않은 측면에 있는 문으로 들어 갔습니다.
조금 전까지도 사람들로 가득했던 마당에 정적이 흐릅니다. 뒷정리 중인 분께 청해서 내부를 다시 보았어요.
내부도 깨끗하게 정리가 됐네요.
우동사에서 본 내삼문.
내삼문입니다.
강당 앞마당에는 아직도 행사 중입니다.
오늘 추향제에서 초헌관을 맡은 전북대학교 총장이 강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답사 중에 만난 조선대 사범대 겸임교수 김용하 선생과 함께 기념사진도 찍었어요.
준비한 점심 식사도 함께하자고 했지만 사양했네요. 필암서원에서 만난 사람들은 참 친절했습니다.
이제 장성시내로 나갑니다. 콜택시를 불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