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5일 천국 본향
‘신앙생활’이란 말이 귀에 거슬리고 때론 언짢기도 하다. 사람은 아는 대로 살지 않고 믿는 대로 산다. 이 건물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믿으니까 그 안에서 생활하고, 가보지 않은 곳을 도로표지판과 네비게이션이 지시하는 대로 따라간다. 그리스도인에게 ‘신앙생활’이란 말은 동의어 반복이다. ‘역전(驛前) 앞’처럼 말이다. 우리에게 신앙이 곧 삶이고, 삶이 곧 신앙이다.
신앙이 가리키는 곳은 아주 간단하고 명확하다. 하늘나라고 천국이다. 우리는 그곳을 본향이라고 부른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진짜 고향이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님 덕분에 고향이 바뀌었고, 그곳은 지상 고향보다 더 좋은 곳이다. 어느 형제가 말한 대로 설령 세상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지 않을 만큼 좋은 곳이다. 영화에서처럼 죽은 뒤에 나를 위해 울고 애통해하는 이들을 보게 된다면 그러지 말라고 그리고 당신이 아무리 나를 그리워해도 나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예수님은 천국을 위해 당신 인생 전부를 거셨다. 아니 여기서 사실 때부터 이미 하늘나라 시민이셨다. 하늘나라에서는 시집 장가 가고, 사고팔고 이문을 남기고, 불안한 미래를 위해 보험과 노후 계획을 짜는 수고가 필요 없고, 그리고 온갖 껄끄러운 인간관계와 미움과 원망으로 괴로워하며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일이 없다. 예수님은 그런 곳을 완전히 알고 계셨다. 하느님을 보셨다. 그분은 한없이 좋은 아버지보다 더 좋은 분이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생활비 전부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그 과부의 마음을 아셨다. 그 마음이 바로 당신 마음이었다. 하느님께 삶을 내어 맡기고, 천국으로 가는 길에 대한 확신을 가진 그런 마음이다.
요한이 환시 중에 본 하늘나라 시민들 이마에는 예수님과 하느님 이름이 적혀 있었다고 했다(묵시 14,1). 모두 144,000명이었다고 했는데, 이 숫자는 상징적인 숫자다. 이스라엘 12지파가 각각 12,000명, 모두 144,000명이다. 이 숫자는 하늘나라에 가득 찬 하느님 백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들은 예수님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고, 그들의 입에는 거짓이 없고 흠 없는 사람들이다(묵시 14,4-5). 한 마디로 그들은 예수님과 하느님께 온전히 속하고, 당신 나라가 그런 이들로 가득 찰 때까지 하느님은 기다리실 거다. 나는 이런 희망으로 산다. 우리 모두 그러기를 바란다. 그런 삶이 구원이다. 보이지 않고 증명될 수 없는 걸 희망하게 된 걸 보면, 믿음은 선물인 게 분명하다. 바오로 사도는 증언한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로마 8,24)”
예수님, 주님 말씀을 팔뚝 이마 문설주에 붙여놓는 대신 몸에 성호를 긋고 벽에 십자고상을 걸어둡니다. 저보다 뛰어난 자들이 저를 유혹하지 못하게 십자가의 주님과 십자가 길을 묵상합니다. 오늘도 하늘나라의 신비 속에 살게 해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무한을 응시하는 어머니의 눈길을 따라 저도 그곳을 바라보며 살게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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