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유학의 탐구 2-5 전통윤리와 문화적 교섭
삼국시대에는 이미 중국과의 활발한 문화적 교류를 통하여 유교의식의 더욱 높은 수준을 이루었으며, 새롭게 불교와 도교사상이 전래하면서 문화적 다양성과 도덕의식의 복합성을 형성하게 되었다. 또한 고려와 조선왕조를 통하여 각 시대마다 새로운 외래사상과 내부에서 제기되는 종교사상의 상호작용에 따라 때로는 도덕의식의 종합적 인식이 제기되기도 하고 때로는 격심한 갈등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삼국시대는 유교적 사회기반과 도덕규범 위에 불교와 도교가 전래해 옴에 따라 각자의 규범을 제시하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려는 융화론적 입장이 주류를 이루었다. 곧 신라의 승려 원광(圓光)은 청년 화랑들에게 제시한 ‘세속오계(世俗五戒)’는 유교적 도덕규범을 기초로 하면서 불교적 계율과 조화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의 신하이던 이순(李純)은 승려가 된 다음에 임금의 방탕함을 듣고는 대궐문 앞에 나와, 걸(桀)과 주(紂)의 고사(古事)를 들면서 “앞 사람의 실패한 자취를 보고 뒷사람은 마땅히 경계하여야 할 것입니다.”라 간언(諫言)하였다 한다. 유교와 불교가 서로 비난하거나 서로에 무관심한 태도와는 달리 상대방의 도덕규범을 끌어들이는 포용성과 융화적 태도를 보여 준다.
물론 유교와 불교 사이의 차이를 대립적으로 인식하는 견해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신라의 강수(强首)는 유교와 불교 가운데 어느 쪽을 배울 것인지 선택하도록 요구받았을 때, “불교는 세상 바깥의 가르침(세외교, 世外敎)이요 나는 사람 사이의 사람(인간인, 人間人)이니, 어찌 불교를 배우겠는가 유자(儒者)의 도(道)를 배우고자 한다.”고 선언한다. 따라서 불교와 유교규범 사이의 융화는 처음부터 이러한 차이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삼고 있는 융화론이다. 이처럼 다양한 종교사상을 융화시키는 논리로서 최치원(崔致遠)은 「진감선사비(眞鑑禪師碑)」에서 “도는 사람에 멀지 않고, 사람은 나라에 따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의 젊은이들이 불교도 하고 유교도 한다.”고 언명하여, 국경의 분할에 구애되지 않는 인간 성품의 공통성과 그 공통성에 기초한 도의 보편성을 지적하고 있다.
하동(河東) 쌍계사(雙溪寺)에 있는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진감선사비(眞鑑禪師碑)」의 일부
첫머리에 “부도불원인(夫道不遠人), 인무이국(人無異國), 시이동인지자(是以東人之子), 위석위유(為釋為儒)”의 구절이 보인다.
최치원은 화랑의 정신적 바탕에 민족 고유의 현묘한 도를 지닌 것으로 제시하고 이 도를 ‘풍류’라 규정한다. 이 ‘풍류’는 ‘들어오면 집안에서 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하라’는 공자의 가르침, ‘무위(無爲)의 일에 처하며 불언(不言)의 가르침을 행하라’는 것은 노자의 가르침,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라’는 것은 석가모니의 가르침 등 유(儒) · 불(佛) · 선(仙) 3교의 도덕규범을 포함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고유정신이 외래의 다양한 종교사상들을 모두 수용하여 융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백제 근구수왕(近仇首王)의 태자가 고구려 영토로 깊숙이 진격해 가자 장군 막고해(莫古解)는 『노자(老子)』의 “족(足)한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한 말을 인용하여 진격을 중지하도록 간(諫)하였다 하며, 고구려의 을지문덕이 침략해 온 수나라 장수 우중문(宇仲文)에게 보낸 시에서도 『노자』를 인용하여 “족한 줄 알면 그만 둠이 어떠리.”(지족원운지, 知足願云止)라 읊고 있다.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사냥에 심취하자 김후직(金后稷)은 왕에게 간언하면서 “말 달리고 사냥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한다.”는 『노자』의 구절과 “안으로 여색에 빠지고 밖으로 사냥을 일삼으면 그 중의 하나만 있어도 혹 망하지 아니함이 없다.”고 한 『서경』(오자지가, 五子之歌)의 구절을 인용하여 사냥을 못하도록 만류하였다. 이처럼 『노자』의 격언이 다른 사상과 어울려 이 시대 도덕규범을 더욱 풍성하고 생동하게 하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유(儒) · 불(佛) · 보(道) 3교를 정족(鼎足)처럼 서로 의존하여 하나도 빼놓을 수 없는 관계로 보고 도교의 수입을 촉구하기도 하였으며, 고려 태조의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는 유 · 불 · 도 3교를 비롯하여 도참설과 점복술에 이르기까지 배려하고 있다. 다양한 종교사상의 융화는 그 사회의 통합을 위한 규범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들어오면 유교와 불교 사이의 균형 속에서 긴장과 갈등이 일어나는 현상을 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최승로(崔承老)는 28조목의 상소에서 “3교는 각각 추구하는 바가 있으니 뒤섞어 하나로 만들 수는 없다.”고 선언한다. 여기서 그는 불교의 수행이란 자신을 닦는 근본으로 다음 세상을 위한 밑천이요 유교의 실천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으로 오늘에 할 일이라 파악하여 양자를 대비시키고 있다. 이에 따라 그의 기본 입장에서는 지극히 가까운 오늘을 버리고 지극히 먼 다음 세상을 구하는 일이 그릇된 것임을 역설함으로써 유교를 옹호하고 불교를 견제하였던 것이다.
고려 말 조선 초에 오면서 주자학(도학)이 전파되면서 유교의 정통성을 강화하고 불교를 비판하는 이론이 강력하게 대두하였다. 정도전(鄭道傳)은 『불씨잡변(佛氏雜辨)』에서 불교가 유교적 인간관계의 규범, 곧 ‘인륜’을 부정한다고 비판하며, 가까운데에서 먼 데로 점차 확장시키는 유교적 ‘인(仁)’의 실천과 달리 불교의 ‘자비’는 가까운 인간관계를 끊고 멀리 동물에 대해 베풀고 있는 것이라 거부하였다. 이러한 정통주의적 규범은 사상과 종교의 다양성을 거부하고 도학적 신념을 독단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며, 도덕규범의 매우 엄격한 권위적 기준을 요구하였다.
도덕규범의 정통적 권위를 확립함과 더불어 행동양식에서 의례의 형식적 엄격성을 요구하면서 조선사회는 활발한 기상보다 섬세한 규범과 의례의 틀에 자신을 구속하고 있었다. 도덕규범의 신념적 권위가 강화되고 이에 따른 의례절차가 엄격하면 할수록 한편으로 서로 비판과 대립이 강화되어 학파의 분열은 물론이요 심각한 사회분열을 겪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배척과 옹호가 강화되어 안팎으로부터 새로운 사유의 등장에 대해 강력하게 억제함으로써 보수적 폐쇄성에 빠져 들게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조선 후기에 서양문물이 전래되고 기독교가 수용되면서 새로운 도덕규범과 사회질서가 제기되었다. 이 때 유교적 윤리전통에서는 기독교적 규범을 가정에서 부모의 권위와 국가에서 군왕의 권위를 파괴시킨다고 인식하여 ‘아비를 아비로 여기지 않고(무부, 無父)’, ‘임금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무군, 無君)’ 이단사설(異端邪說)로 규정하여 엄격히 배제하였다. 한말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의 경우도 서양문물의 수용에 대해 전면적 공격 태도를 취함으로써 전통윤리의 순수한 계승의지는 발휘하였으나 조화와 통합의 새로운 규범질서를 창조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출처] 한국유학의 탐구 2-5 전통윤리와 문화적 교섭
[출처] 한국유학의 탐구 2-5 전통윤리와 문화적 교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