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지 마세요
내 부엌에는 물과 불이 있어요
얼음과 숯불과 영하 20도와 영상 20도가 살아요
58도의 독한 술과 13도의 순한 술이 있어요
냉동고에는 치미는 분노와 살인적 치욕이 멈춘 채 정지되고
세상에 새면 안 되는 일급비밀이 급냉동되어 무표정하게 굳어 있고
하나의 서랍엔 비상약이 수북하게 약 주인을 향해 위협적으로 수군거리고
한 주먹 털어 넣으면 영원한 안식으로 가는 약이 밤마다 눈인사를 하고
다섯 개의 칼이 번뜩거리며 용도를 기다리고
한 방이면 돌도 깨어지는 쇠뭉치 방망이가 있고
잘게잘게 찢을 수 있는 날선 가위가 세 개
쇠구멍도 뚫을 수 있는 장비가 다섯 개
이름도 예쁜 레몬에이드 주방 세제의 거품은 저를 닦진 못하고
페녹시 에탄올 구연산 나트륨은 내 밥그릇에 얼룩을 남길 것 같고
늘 물이 끓고 있어요
어쩌다 기름이 끓기도 하지요 굵은소금이 슬쩍 쳐다봐요
산 생선이 금방이라도 푹 익는 300도의 끓는 물
가축 뼈를 우려내 밤새 우려내 그 물을 마시면서
쌀도 푹 익혀 잘게잘게 씹어 먹는 내 부엌
누르면 불이 되는 인덕션 옆에는 뼈도 가루가 되는 믹서기가 돌지만
공포와 두려움은 없어요 잘 길들여져
평화롭게 먹고 마시는 내 부엌
이런 게 삶?
전쟁 공부에서 많이 보았던 풍경?
박수근 화백의 엽서 속 소가 보는 앞에서 소고길 잘게잘게 다지는 도마 위
밥이 다 되면 전기솥에서 푸우욱 치솟는 연기가
극초음속 마하 10 탄도 미상일이라고 생각하는
이 전쟁의 핵심은 오늘도 먹는 일
먹을 걸 만드는 일
밤늦도록 평화로운 공포 속
어둠 내리면 붉은 태양 같은 따뜻한 불이 켜지는 내 부엌.
〈신달자 시인 / 사진 '연합뉴스'〉
△ 1943년 경남 거창 출생
△ 1964년 '여상' 신인문학상 받으며 등단, 1972년 박목
월 시인 추천으로 재등단
△ 시집 '봉헌문자' '아버지의 빛' '어머니 그 삐뚤삐뚤한
글씨' '오래 말하는 사이' '간절함' '열애' '북촌' '살 흐
르다'
△ 장편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
△ 수필집 '백치애인' '그대에게 줄 말은 연습이 필요하
다' '여자는 나이와 함께 아름다워진다' '고백' '너는
이 세 가지를 명심하라'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 등
실패의 뒷수습은 쉽지 않았다. 뒷수습의 자리는 살이 터지고 따가운 염료가 부풀고 가시 조각이 가득해서 두 손은 이내 피투성이가 되기 십상이었다. 그렇다고 중단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생의 연습이었다. 멋있고 근사하게 프로답게 살아 본 기억은 없다. 늘 서툴고 뒤틀리고 손에 든 것을 놓치고 넘어지고 혼자 감동하고 벌벌 떨고 변변치 못한 순간과 영원이 고여 있는 삶이었다.
굴욕이 가면을 쓰고 슬금슬금 내 옆으로 다가왔지만 내가 모멸차게 그 가면을 벗기고 굴욕 그 자체를 내 얼굴로 받아 살았으므로 나는 그 모든 것과 대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있을 것이다'라는 그 마음 준비가 넘어진 내 손을 붙들고 일어서게 하는 역동적 힘이었으니까.
영혼의 친화력, 고통의 동거자가 내내 내 안에서 힘을 불려 주었던 것이다. 시는 과거도 미래도 아니고 그날 그 시간에 반드시 필요한 동력자였으며 내 일상의 정신적 빛이었다. 창 사이로 가늘게 스미는 빛살무늬 그것이 나의 시였는지 모른다.
〈신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