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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골목대장서 야구선수로- "최강 해태선수가 될거야"
지난 1979년 2월 15일(음력 1월 19일) 광주시 북구 중흥동에서 태어난 김병현은 다른 또래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학교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골목으로 뛰어나갔다. 매일 구슬치기 딱지치기 ‘다방고’ 등을 즐기며 해지는 줄 모르게 놀았다. 집에 들어올 때는 항상 먼지투성이인 그런 평범한 꼬마였다.
단지 다른 것이 있었다면 공인 태권도 4단인 아버지(김연수씨)의 영향을 받아 일찍 태권도(2품)를 배웠다는 것 정도이다. 이 때문에 김병현은 휘하에 몇 명의 꼬마를 거느린 골목대장 대우를 받았다.
그러던 88년 10월 어느날 김병현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 발을 내딛는 계기를 마련한다. 아버지가 야구를 권유한 것.
“매일 구슬치기에만 빠져 있는 아들을 보니 차라리 취미를 하나 만들어 주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야구를 추천했죠”. 아버지 김연수씨의 회고다. 아들이 공부를 많이 해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던 아버지의 평소 생각과는 달리 이 한마디가 김병현의 인생항로를 바꿔 놓았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프로야구 해태 타이거즈의 경기를 보며 ‘장차 나도 해태 선수가 될거야’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김병현은 쾌재를 불렀다.
일도 척척 잘 풀려나갔다. 다음날 김인호 야구 부장(당시)이 교실로 들어와 선수를 뽑는다며 지원자를 받은 것. 김병현은 주저없이 손을 힘껏 들었고 꿈에 그리던 야구 선수가 됐다. 이때가 수창초등학교 4학년 2학기 소풍을 갖다온 직후였다.
10여명의 지원자들과 함께 운동장에 모인 김병현은 포지션 배정을 위한 테스트를 받았고 투수 겸 유격수로 선발됐다. 골목대장 김병현에서 야구 선수 김병현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수창초등학교 감독이던 심재경씨(현 전남야구협회 심판장)는 “덩치는 왜소했지만 운동 센스가 있고 손목 힘이 좋았다. 마운드에서 뿌리는 공이 다른 선수보다 확실히 달랐다. 그래서 투수를시키게 됐다”고 밝혔다.
김병현은 신이 났다. 야구를 한 것도 그렇지만 투수로 뽑혀 더욱 그랬다. 하지만 벌써 추계 대회가 모두 끝난 후 동계 훈련에 들어갈 시기라 공식 대회에는 출전하지 못하고 해를 넘겼다.
김병현은 겨우내 실력을 갈고 닦아 드디어 5학년 때인 89년 춘계 대회에 수창초등학교의 에이스로 당당히 마운드에 섰다. 야구 선수 김병현의 데뷔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던 6학년 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한다.
[김병현 스토리] 유니폼 반납사건 (2)
초등교 우승 1등공신불구 MVP못받자 화난 아버지 "야구 그만둬"
팀의 에이스로 무럭 무럭 자라며 한창 야구 재미에 빠져 있던 6학년 때인 1990년 4월, 김병현은 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한달간 유니폼을 벗는 뜻밖의 일을 당했다.
광주 전남 지역 춘계대회에 출전한 김병현은 호투를 거듭, 팀을 결승까지 이끌었다.
그리고 모교운동장에서 열린 서림초등학교와의 결승전. 김병현은 선발로 등판, 3이닝 동안 1실점으로 상대 타선을 막아내며 6-1로 리드한 상태에서 마운드를 김 모 선수에게 넘겨주고 유격수로 내려갔다.
김병현과 동기로 팀의 ‘원투 펀치’ 겸 3, 4번을 번갈아 치던 김 모 선수는 매우 부진, 동점을 허용했다. 그러나 김병현은 다시 마운드에는 설 수 없었다. 초등학교선수는 한번 마운드를 내려가면 다시 등판하지 못한다는 규정 때문. 대신 김병현은 결승타를 터뜨려 팀을 13년만에 이 대회 정상으로 이끌었다.
학부모들은 김병현이 당연히 최우수 선수로 뽑힐 것으로 믿었다. 김병현과 아버지 김연수 씨도 그랬다. 하지만 MVP는 뜻밖에도 김 모 선수에게 돌아갔다. 김병현과 아버지는 낙담했다. 팀 관계자로부터 분명 ‘팀우승에 가장 공헌한 선수가 최우수 선수로 뽑힐 것’이라는 말을 들은 바 있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화가난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김병현에게 야구를 그만두라고 지시했다. 팀에서는 부랴부랴 수훈상을 만들어 아버지를 달랬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러나 야구에 눈을 뜨기 시작한 김병현은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몰래 팀 훈련에 참가했다. 아버지의 뜻을 거역한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잡고 직접 합숙소로 들어가 유니폼을 반납하고 모든 물품을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김병현은 야구부 대신 산수 경시반에 들어갔다. 이미 아버지의 뜻을 한번 거스른 적이 있기에 김병현은 할 수 없었다. 수업만 끝나면 야구장 대신 특활반 교실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몸은 산수 경시반에 있었지만 마음은 야구장에 있었다. 김병현은 계속해서 야구를 하고 싶은 마음이 꿀뚝 같았다. 휴식 시간마다 김병현은 물끄러미 창밖으로 야구부의 훈련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런 모습은 한달간 계속됐다. 결국 산수 경시반 담당 교사는 학교 옆에 가게를 가지고 있던 김병현의 아버지를 찾아가 이를 알렸고 야구를 다시 시키라고 권고했다.
이미 여러 차례 주위 사람들로부터 아들의 행동을 듣고 있던 아버지는 아들을 불렀다.“계속 야구를 하고 싶냐”고 묻기가 무섭게 김병현은 “예”라고 대답했다. 아버지의 허락도 떨어지기전에 김병현은 곧 바로 운동장으로 달려가 다시 빨간 모자, 흰색 상하의의 수창초등하교 유니폼을 입었다.
[김병현 스토리] ③잠수함 투수로 변신
중2때 투구폼 바꿔…구속·제구력 살아나 성공
한달 만에 다시 야구를 시작한 김병현은 수창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야구 명문 무등중학교로 스카우트 됐다.
그리고 김병현은 2학년 초 자신의 야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변신을 하게 된다. 정통파 투수에서 사이드암 스로 투수로 투구 폼을 바꾼 것. 이것은 훗날 김병현이 메이저리그 스타로 떠오르는 디딤돌이 됐다.
“병현이는 투수와 유격수를 번갈아 맡았습니다. 그런데 유격수를 보면서 역모션으로 공을 잡아 2루로 던지는 폼이 아주 부드러웠습니다. 공도 정확하고 빨랐고요. 그래서 한번 투구 폼을 바꿔 보기로 했습니다.”
당시 김병현을 가르쳤던 최양식 무등중 감독의 회고이다. 최 감독은 김병현이 언더 핸드스로형 투수가 아니라 사이드 암 스로라고 한다.
또 최 감독은 “당시 프로야구 선수들을 보면 신장이 최소 180센티미터는 됐습니다. 대형화 추세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병현이는 키가 크지 않았습니다. 또프로에서는 사이드 암 스로투수는 희소 가치가 있어 통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상의, 결정했습니다”고 설명했다.
김병현의 변신은 대성공이었다. 오버 핸드스로로 던질 때보다 제구력이 훨씬 좋아졌다. 포수가 미트를 갖다대는 곳에 정확히 꽂아 넣었다. 구속도 정통파 때와 비교, 전혀 떨어지지 않는 120㎞를 웃돌았다. 타자들의 방망이가 김병현의 공끝에 밀리기 시작했고 변화구의 각도도 좋아졌다.
최 감독이 밝힌 또 하나의 재미있는 사실 하나. 김병현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이때부터 볼배합을 자신이 직접 했다는 것이다. 최 감독은 “상대타자들의 마음을 읽는 타고난 재주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벤치에서 전혀 간섭을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밝혔다.
만약 투구폼을 바꾸지 않았으면 김병현은 어떻게 됐을까. 최 감독은 김병현이 워낙 운동 신경이 뛰어나고 손목 힘이 좋았기 때문에 정통파 투수로도 어느 정도는 성공했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메이저리그에서도 통하는 큰 투수로는 성장하지 못했을 것으로 내다봤다.
[김병현 스토리] ④우승제조기 BK
청룡기 우승·청소년대표선발 등 광주일고서 야구인생 활짝
김병현의 야구 인생이 만개하기 시작한 것은 광주일고 유니폼을 입은 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1994년 광주일고에 입학한 김병현은 그 해 처음으로 생긴 무등기 대회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서서히 주목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해 김병현은 ‘초고교급 투수’라는명성을 얻으며 일약 고교 야구 최고의 투수로 자리 매김한다.
제 50회 청룡기 대회에서는 덕수상고를 5-3으로 꺾고 팀을 7년만에 전국대회정상에 올려 놓으며 최우수 선수에 선정됐다. 특히 김병현은 결승전까지 43개의 탈삼진을 잡아내며 방어율 0.035를 기록, 야구 관계자들을 깜짝놀라게 했다.
석달 후인 95년 8월 김병현은 난생 처음 태극 마크를 다는 영광을 안았다. 그해 보스턴에서 열린 세계 청소년 야구 선수권대회에 출전하는 국가대표팀에 김선우(보스턴 레드삭스)등과 함께 선발된 것.
또 이 대회를 계기로 김병현의 꿈이 해태 타이거즈 선수에서 메이저리거로 바뀌게 된다. 올 시즌이 끝날 때쯤 김병현은 “당시메이저리그 구장에서 경기를 가진 후 나도 언젠가는 미국에 진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호텔 방에서 잘때도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꿈을 꾸었다”라고 털어 놓기도 했다.
탄탄대로를 달리던 김병현은 고 3때인 96년 봄 대통령배 대회에서 오른 팔꿈치의 통증을 느끼며 야구 인생의 큰 고비를 맞는다. 너무 많이 던진 후유증이 발생한 것이었다.
그래서 김병현은 야구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4개월간 마운드에 서지 못했다. 이 때의 부상으로 인해 ‘김병현의 오른 팔꿈치에는 뼛조각이 들어있다’는 악성 루머가야구계에 퍼졌고 이는 아직도 진실처럼 믿어지고 있다(97년 대학 진학시, 99년 애리조나와 계약을 맺은 후 받은 신체검사에서도 뼛조각은 발견되지 않았음).
그러나 김병현은 약 반년만에 당당히 재기, 10월 춘천에서 열린 전국 체전에서 다시 팀을 정상에 올려 놓았다.
잠시 주춤했던 김병현 스카우트 전쟁이 다시 불을 뿜은 것은 당연지사. 고려대 인하대 성균관대 등 대학 감독들과 연고 구단인 해태 김경훈 스카우트는 매일 아버지 김연수씨를 쫓아다녔다.
해태는 당시 기준으로 역대 고졸 선수 최고 대우(3억원)를 약속하며 김병현의 스카우트에 총력을 기울였지만 뜻밖에도 최후의 승자는 2억원을 베팅한 성균관대였다. 대학 진학 스카우트비 2억원은 야구판에서 아직도 깨어지지 않는 최고액으로 남아 있다.
[김병현 스토리] ⑤김병현이 타격왕(?)
광주일고 시절 김병현은 투수로서 뿐 아니라 타자로서도 명성을 날렸다. 특히 타격왕에 오른 적도 있을 만큼 방망이에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이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특히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팀 동료들은 더욱 그렇다.
지난 8월18일 시카고 커브스전에서 메이저리그 진출 후 첫 안타를 우익수 앞에 떨어지는 2타점 적시타로 작성한 후 동료들이 “저런 엉거주춤한 폼(투구에 맞을까 봐 오른 발과 엉덩이를 뒤로 뺐다)으로 어떻게 안타를 쳤는지 모르겠다”라며 웃음을 터뜨리자 김병현은 “나도 아마 시절 방망이를 잘 쳤다. 4번 타격 타이틀을 거머쥔 적이 있다”라고 항변한 적이 있다.
이 말을 들은 루이스 곤살레스는 “나도 그 리그에서 뛰고 싶다. 신문에 난 내용을 보고는 깜짝 놀라 아침 먹던 것을 모두 토할 뻔했다. 김병현의 말이 맞는지 확인해 보고 싶다”라고 말했다.
커트 실링은 아예 은박지로 둘둘 말은 은색 배트를 4개 만들어 김병현에게 실버 슬러거 상(메이저리그에서 포지션 별로 타격이 가장 뛰어난 선수에게 주어지는 상)을 수여, 동료들의 배꼽을 잡게 하기도 했다.
김병현의 말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확인해 보자. 김병현은 광주일고 1학년 때인 94년 5개의 전국 대회에서 33타수 7안타 타율 2할1푼2리, 2학년 때는 4개 전국 대회에 출전, 38타수 12안타(3할1푼6리)를 기록했다. 자랑할 것이 없다.
하지만 3학년 때 김병현의 방망이는 그야말로 대폭발을 일으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한야구협회 공식 기록에 따르면 김병현은 96년 5개 전국 대회에 출전, 14경기에서 53타수 28안타 4홈런 16타점 타율 5할2푼8리를 기록했다. 김병현은 “한 경기마다 2개 정도 안타를 친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내심 이영민 타격상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하지만 그 해 이영민 타격상은 51타수 20안타로 타율 3할9푼2리에 그친 박태형(경동고)에게 돌아갔다.
김병현이 고교 시절 전국 대회에서 받은 공격과 관련된 상은 95년 무등기 타격상 3위, 96년 4월 대통령배 최다 안타상, 96년 7월 대붕기 타격상 등 3개다. 여기에다 지역 예선이나 초중학교 시절 받은 것을 더하면 4번 이상이다. 물론 김병현의 말처럼 타격 타이틀을 4 차례 차지한 것은 아니지만 방망이로 일궈낸 상인 것만은 분명하다.
재미있는 사실은 고교 시절 김병현이 투수로서 받은 상은 94년 무등기 우수 투수상, 95년 청룡기 최우수 투수상 두 번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만하면 김병현이 투수보다는 타자로서 더 명성을 날렸다고 봐도 될까.
[김병현 스토리] ⑥시련의 대학무대
해외선 '펄펄' 국내선 '빌빌'…'김병현은 국제용'
2억원의 거금을 받고 성균관대에 진학한 김병현은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이렇다할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오른 팔꿈치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지만 “부상 때문에 앞으로 계속 힘들 것”이라는 소문만 자꾸 번져 나갔다.
김병현은 급기야 대학 신입생이던 지난 1997년 5월 대만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 출전할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지 못하는 좌절을 겪었다. “당시 나는 당연히 대표팀에 포함될 줄 알았고 그렇게 들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나 대신 다른선배가 뽑히는 걸 보고 회의를 느꼈다”라는 것이 김병현의 설명.
고교 2년 때부터 ‘아마 야구 최고의 잠수함’ 이라는 소리를 듣던 김병현은 자신이 대표팀에서 빠진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의욕도 사라졌고 등판 기회도 줄어들었다. 그 해 7월초 열린 한ㆍ미 국가대표대항전에 다시 ‘물’을 먹었다. 내세울 만한 성적이 없었기에 당연지사였다.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김병현에게 낭보가 날아든 것은 7월 24일. 8월 일본오사카와 고베에서 열리는 애틀랜타 올림픽 기념 4개국 친선대회에 출전할 국가대표팀에 선발된 것.
당시 처음 국가대표 사령탑에 오른 주성로 감독이 자신의 현역 시절과 비슷한 스타일의 투수인 김병현의 자질을 높게 평가, 선발 기준에 미달됐음에도 감독 전권으로 대표팀에 합류시켰다.
96년 세계 청소년 선수권 대회 이후 약 1년만에 태극 마크를 다시 단 김병현은 펄펄 날았다. 8월 26일 오사카에서 열린 1차리그에서 아마 세계 최강 쿠바를 20년만에 꺾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2⅔이닝 동안 1피안타1실점 4탈삼진으로 구원승을 일궈낸 것. 또 호주전에서도 2이닝 6K로 구원승을 따냈다.
하지만 김병현은 98년에도 국내 무대에서 실적이 지지부진했다. 춘계리그서 2승1패 방어율 5.76, 대통령기서 1패 방어율 18.00에 그쳤다.
그해 7월 이탈리아 세계선수권을 앞두고 이것이 또 문제가 되었지만 ‘김병현은 국제용’이라는 명성 덕분에 국가대표 팀에 선발됐다. 그리고 당당히 일본을 꺾고 팀을 결승까지 이끌었다.
또 한국이 일본 대만을 모두 꺾고 우승한12월 태국 방콕 아시안 게임에는 프로 선배들과 함께 초대 드림팀을 이뤄 출전, 중국전에서 8연속 탈삼진을 잡아내는 등 국제대회에서는 ‘언히터블’‘닥터K’의 명성을 발휘했다.
이렇듯 국제 무대에서는 국가대표 팀의 에이스 노릇을 하던 김병현이지만 국내에서는실속이 없었다. 성균관대에 2년 다니는 동안 팀은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다.
기억에 남을 만한 호투라곤 98년 10월 8일 동대문 구장에서 열린추계리그서 경희대를 상대로 8이닝 노히트노런(일몰 콜드게임)을 기록한 것 정도였다.
[김병현 스토리] ⑦BK는 괴짜
대학시절 감독 골탕먹인 반항아
대학 시절 김병현은 감독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김병현은 자신의 성적이 나빴던 이유 가운데 한 가지도 바로 감독과 심판들의 불화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당시 유모 감독은 심판들의 기피 대상이었다. 성격이 강직했던 유모 감독은 평상시 심판들과 전혀 유대관계를 갖지 않았다. 게다가 판정에 대해 사사건건 물고 늘어져 심판들에게 ‘찍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성균관대는 성적을 내지 못했고 그 피해가 일정 부분 김병현에게 돌아갔다는 말이 야구판에 공공연히 돌았다. 아버지 김연수씨도 “경기가끝난 후 심판이 찾아와 죄송하다고 밝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라고 말할 정도이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할 만하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던 김병현은 대학 시절 감독의 지시에 여러 번 반발했다. 아마 야구에서 감독의 명령을 거역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김병현은 갖은 방법을 동원해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1학년 때인 1997년 제 31회 대통령기 대회. 김병현은 이 대회에서 단 한타자만을 상대하고 마운드를 내려오는 사건(?)을 연출했다. 감독의 지시를 받고 등판했지만 김병현은 별로 던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첫 타자를 상대로 연거푸 공 2개를 백스톱에 던져 버렸다. 감독이 한번 마운드에 올라와 경고를 했지만 김병현은 개의치 않았다. 결과는 스트레이트 볼넷. 감독은 자신의 지시를 어긴 김병현을 당장 교체해 버렸고 김병현은 미련없이 마운드를 내려왔다.
2학년 때는 다른 방법을 동원했다. 불펜에서 몸을 풀다 쓰러지는 연기를 펼쳤다. 허리가 아프다며 동대문 구장 3루측 불펜에서 피칭 도중 큰 대자로 드러누워 버린 것. 선수가 허리가 아프다는데 별 대책이 없었다. 김병현은 그날 경기에 출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몇 달 후에는 경기 도중 마운드에서 주저앉았다. 발목이 아프다, 허리가 아프다는 이유였다. 이번에는 감독도 물러서지 않았지만 김병현은 더 이상 던지지 못하겠다고 하소연(?), 다른 선수로 교체됐다.
이를 보고 화들짝 놀란 모 기자가 김병현의 아버지에게 “아들이 다쳤다”며 취재를 시도했지만 아버지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아들의 마음을 꿰뚫고 있던 아버지는 이미 아들이 꾀병을 부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김병현 스토리] ⑧나를 건드리지마
상대의 간섭을 극도로 싫어해
김병현이 마운드에서 ‘연기’를 펼친 것도 알고 보면 그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 김병현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간섭받는 것을 죽기 보다 더 싫어한다. 마음에 내키지 않는 지시는 절대로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 가운데 한 부류가 기자들이다. 김병현이 시즌 중 가끔 “나는 특파원들이 없으면 지금보다 더 야구를 잘할 수 있다”며 농반 진반으로 말했던 것도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이 특파원들 때문에 간섭 받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자신을 가만히 놓아두는 사람을 가장 좋아하고 존경한다. 그리고 반드시 성적으로 이에 보답한다.
국제 대회에서 김병현이 좋은 성적을 올린 것도 김병현의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던 당시 코칭스태프의 노력 덕분이었다.
1997, 98년 김병현이 국가대표로 활약할 때 코치를 맡았던 신현석 포스틸감독은 “가만히 놓아두면 신이 나는 선수가 김병현이었다. 그래서 전혀 터치를 하지 않고 놓아두다시피했다”며 “대신 식사 시간 때만은 강제로 깨워 밥이나 라면을 먹도록 했다”고 밝혔다.
98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세계 야구 선수권대회에서 김병현은 죽을 힘을 다해 팀에 봉사했다. 예상을 깨고 한국이 일본을 꺾고 결승에 진출한 것도 김병현의 덕택이었다.
당시 입이 짧았던 김병현은 라면만 먹고도 쿠바와의 결승전에 선발로 등판, 세계 최강 타선을 5회까지 4피안타 1실점으로 막았다. 코칭스태프의 믿음에 보답하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에도 김병현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해프닝이 한번 벌어졌다. 매일 서울 스포렉스에서 체력 훈련을 하던 김병현은 장소가 언론에 노출되자 아예 훈련을 중단해 버렸다. 기자들로부터 훈련을 취재 당하기 싫어서였다.
그러면 김병현의 이런 성격은 누구로부터 물려받았을까. 아버지 김연수씨이다. 김연수씨는“예전에는 몰랐는데 병현이가 나이를 먹어갈수록 나의 젊었을 때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라며 웃었다. 하던 일도 옆에서 잘한다고 칭찬하면 걷어 치워버리는 것, 한대를 맞으면 10대를 때려줘야 화가 풀리는 성격 등등 이루 말할수 없다고 한다.
사실 월드시리즈 5차전에 다시 등판, 스코트 브로셔스에게 9회말 2사후 동점투런 홈런을 허용한 것도 김병현의 성격 탓이었다. 전날 동점 홈런과 끝내기 홈런을 맞아 열을 받았던 김병현은 63개의 공을 던져 출장이 불가능한 상태였지만 ‘복수’를 하기위해 다시 자원 등판했지만 최악의 결과로 이어졌다.
[김병현 스토리] ⑨닥터K의 탄생
1998년 한·미 선수권 6⅔이닝 15K '기적'
메이저리그에서 김병현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탈삼진이다. 그래서‘닥터 K’‘K머신’ ‘K아티스트’ 등 김병현의 닉네임도 모두 탈삼진과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김병현이 ‘닥터 K’라는 명성을 처음 얻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97년 오사카에서 열린 애틀랜타 올림픽 기념 4개국 초청 국제 대회부터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김병현은 호주전(8월 25일)에서 7회 2사후에 등판, 1⅔이닝 동안 4타자 연속 탈삼진 포함 아웃 카운트를 모두 K(볼넷 2개 허용)로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 대회에는 뉴욕 양키스 존 콕스 주니어 등 메이저리그 스카우트 10여명이‘될성부른 떡잎’을 찾기위해 구장을 찾았고 김병현은 이들에게 확실하게 눈도장을 받았다.
그리고 근 1년 후인 98년 7월 1일. 김병현은 메이저리그로 진출할 수 있는디딤돌을 놓는 아주 중요한 삼진 퍼레이드를 펼쳤다. 애리조나주 투산의 하이 코베트 필드(콜로라도 로키스의 스프링캠프 구장)에서 열린 한ㆍ미 선수권대회에서 김병현은 3회 1사 2루서 등판, 6⅔이닝 동안 15개의 삼진을 쓸어 담았다.
당시 선발 투수였던 박정진(현 한화 이글스)은 “병현이 공이 자유자재로 휘어졌고 미국 타자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기억이 난다. 한마디로 인간이 던지는 공이 아니었다”라고 회상했다.
한국 선수들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백스톱 뒤에서 레이더 건을 쏘던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타자 앞에서 활처럼 휘어지는 ‘BK표 슬라이더’에 충격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김병현을 잡기 위한 메이저리그 30개 구단의 물밑 스카우트전이 이 때부터 불을 뿜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알루미늄 배트를 사용하는 아마야구에서, 그것도 힘이 좋은 미국 타자들을 상대로 6⅔이닝 동안 15K를 잡아냈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메이저리그에서 구원투수 최다 탈삼진 기록이 올 해 7월 19일 랜디 존슨이 세운 7이닝 16개이니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김병현은 12월 15일 방콕 아시안 게임 중국과의 준결승전에서 다시 한번‘K머신’의 명성을 뽐내며 메이저리그행을 거의 확정짓게 된다. 6이닝 퍼펙트를 기록했을 뿐 아니라 8타자 연속 탈삼진을 포함해 12개의 K를 뺏어낸 것.
그리고 두 달 후인 99년 2월 19일, 97년부터 김병현의 피칭을 쭉 지켜본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는 김병현에게 225만 달러라는 거금을 제시, 김병현 스카우트에 성공하게 된다. 225만 달러는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는 한국 출신 선수 최고액 계약금이다. 뛰어난 탈삼진 능력에 애리조나가 홀딱 반한 결과였다.
[김병현 스토리] ⑩영광과 치욕의 땅 뉴욕
데뷔전서 세이브 '기염' WS선 9회말 홈런 두방 '악몽'
스프링캠프가 끝날 무렵인 1999년 3월30일. 김병현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스프링캠프지인 투산에 도착해 곧바로 팀 훈련에 참가, 미국 생활의 첫 발을 내디뎠다.
배정 받은 팀은 마이너리그 더블 A 엘파소 디아블로스. 그러나 ‘주머니 속의 송곳은 숨길 수 없는 법.’ 한달 만에 트리플 A(5월10일)로 올라선 김병현은 다시 보름만에 바비 슈나드 대신 전격적으로 메이저리그에 입성(5월28일)했다.
이틀 후인 5월 30일. 김병현을 위한 무대가 뉴욕 메츠의 셰이 스타디움에 마련됐다. 8-7 한점 차로 앞선 9회말 마운드에 오른 김병현은 메이저리그의 간판 타자 가운데 한명인 마이크 피아자를 헛 스윙 삼진으로 처리, 빅리그 데뷔전 세이브를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그것도 그 해 최연소, 한 점차 리드 상황, 데뷔전 세이브에 마지막 타자가 피아자였다는 점 등에서 ‘깜짝 스타’로 떠오르기에 충분했다.
다음 날 미국이 발칵 뒤집어졌다. 미국 유일의 전국지인 USA투데이는 ‘꿈이 실현되다’라는 제목으로 김병현이 세이브를 올린 직후 팔을 치켜드는 모습을 실었다.<사진①> AP통신 ESPN 패스트볼 등도 ‘스무살의 한국인이 메이저리그 데뷔전서 세이브를 따냈다’ 며 야구면 톱기사로 처리했다.
이로부터 정확히 2년 5개월 후인 2001년 11월 1일. 셰이 스타디움에서 약 15㎞ 떨어진 양키 스타디움에서 김병현은 또 한번 미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물론 김병현에게는 영원히 잊지 못할 치욕적인 날로 기억되었지만….
김병현은 동양인 최초로 등판한 월드시리즈 4차전 9회말 투 아웃에서 뉴욕 양키스의 티노 마르티네스에게 중월 동점 투런 홈런을 허용한 후 연장 10회말 데릭 지터에게 우월 끝내기 홈런을 맞고 패전 투수가 됐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다음 날 김병현은 다시 9회말 2사후 스코트 브로셔스에게 2점 홈런을 두들겨 맞고 강판하는 ‘소설’같은 일이 벌어졌다. 이틀 연속 9회말 2사후 동점 홈런은 월드시리즈 역사상 처음이었다.
세이 스타디움에서 오른 주먹을 불끈 쥐며 세이브를 올린 기쁨을 표현했던 김병현은양키 스타디움에서는 마운드에 쪼그리고 앉아 머리를 감싸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사진②>
이렇듯 뉴욕은 김병현에게 영광과 치욕을 동시에 안긴 도시였다.
[김병현 스토리] ⑪희대의 '파스사건'과 그레이스
데뷔전 세이브 열흘뒤 파스붙여 퇴장
데뷔전 세이브로 미국 언론으로부터 격찬을 받은 김병현은 10여일만에 다시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그러나 이번에는 불명예스런 일 때문이었다. 메이저리그 130여년의 역사 동안 단 한번도, 그리고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희대의 ‘파스 사건’을 일으켜 퇴장당한 것.
1999년 6월10일 뱅크원 볼파크에서 열린 시카고 커브스전. 8회초 무사1, 2루에서 선발 랜디 존슨에 이어 마운드에 오른 김병현은 다섯 타자를 상대, 2피안타 2탈삼진 1실점(비자책)으로 커브스 타선을 막아내며 공수교대를 위해 3루 덕아웃으로 들어갔다.
동시에 1루측 덕아웃에 있던 커브스 1루수 마크 그레이스는 평상시대로 송진 가루를 손에 묻히기 위해 마운드쪽으로 걸어갔다. 마운드 근처에 다다른 그레이스는 이상한 물체(파스)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 집어 들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난생 처음 보는 것이었다(미국에는 붙이는 파스가 없다).
그레이스는 즉시 마이크 윈터스 구심에게 이를 알렸고 약품냄새가 나는 것을 확인한 구심은 ‘투수가 이물질을 붙이거나 갖고 있는 것이 발각될 경우 즉시 퇴장 시킨다’라는 야구 규칙 8.02조 b항에 따라 김병현에게 퇴장을 명령했다.
이 파스는 김병현이 이날 피닉스 인근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 한국 슈퍼마켓에서 구입, 라커룸에서 오른쪽 어깻죽지에 붙인 후 그대로 등판, 2번 알렉산더에게 3구째를 던지는 순간 떨어져 나온 것이었다.
그로부터 1년 8개월 후인 올해 2월 14일. 김병현은 야구를 시작한 이래 난생 처음 퇴장이라는 불명예를 안긴 그레이스와 뜻밖에도 다시 만나게 된다. 시카고를 떠난 그레이스가 애리조나 유니폼으로 갈아 입은 것.
악연으로 맺어진 김병현과 그레이스는 현재는 팀내서 가장 가까운 동료이다. 올해 37살인 그레이스는 팀내서 가장 어린 김병현을 친동생처럼 대해 주고 있다.
정규 시즌 동안 김병현이 세이브를 올릴 때 제일 먼저 다가가 글러브로 엉덩이를 툭툭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선수가 바로 그레이스다.
또 지난 11월 월드시리즈 5차전에서 이틀 연속 9회말 투아웃 후 동점 홈런을 허용한 김병현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자 마운드로 올라가 얼굴을 감싸 안으며 “괜찮다”라고 위로해준 선수도 바로 그레이스였다.
[김병현 스토리] ⑫복숭아와 부상
메이저리거 첫 해였던 지난 1999년 김병현은 여러가지 해프닝의 주인공이었다.
첫 번째가 ‘파스 사건’이었다면 두 번째는 ‘복숭아 사건’이었다. 이 때문에 김병현은 부상자 명단에 올랐고 그 해 팀이 100승을 거두며 지구 1위를 차지, 포스트시즌에 올라갔음에도 엔트리에서 빠지는 아픔을 맛보아야 했다.
99년 7월 30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의 원정 경기를 마친 김병현은 팀과 떨어져 LA로 이동, 에이전트 전영재씨 집에 묵게 됐다. 아버지 김연수씨와 어머니 최옥자씨가 아들을 보기위해 미국으로 건너왔기 때문.
다음날 늦게까지 잠을 잔 김병현은 점심 때쯤 일어나 약 4개월 만에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한 후 다시 2층방으로 들어갔다.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해 낮잠을 자기 위해서였다.
곧바로 곯아 떨어진 김병현이 한참 꿈속을 헤매고 있을 때쯤 어머니 최옥자씨가 방으로 들어왔다. 접시에는 아들이 좋아하는 복숭아가 가득 담겨 있었다.
어머니는 잠자고 있는 아들을 흔들어 깨웠다. 더 자고 싶었던 김병현은 잠결에“싫어”라며 목을 심하게 돌렸다. 이것이 부상으로 이어질 지는 아무도 몰랐다.
김병현은 처음에는 목이 조금 뻐근해 괜찮을 것으로 여겼지만 더욱 더 심해졌다. 트레이너가 집중적으로 마사지를 하며 노력했지만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목을 움직일 수조차 없을 정도였고 결국 8월 2일 김병현은 7월29일자로 소급돼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
약 한달 보름만인 9월 8일 김병현은 다시 메이저리그에 복귀했지만 포스트시즌 엔트리는 이미 결정돼 있었다. 대신 김병현은 대기조에 들어갔고 팀이 뉴욕 메츠와의 디비전 시리즈에서 패하는 바람에 결국 국내 선수로는 최초로 PS 마운드에 오를 기회를 놓쳐 버렸다.
이 모든 것이 복숭아 탓이었고 나중에 이를 안 팀 동료들이 박장대소를 터뜨린 것은 물론이었다.
지난 해에도 김병현은 부상으로 큰 곤욕을 치렀다. 후반기 첫 경기였던 텍사스 레인저스전에서 오른 손목에 물혹이 생기는 바람에 ⅔이닝 동안 5점을 내주며 패전의 멍에를 뒤집어 썼다. 전반기 팀의 마무리 투수였던 매트 맨타이가 부상으로 빠지는 바람에 이를 대신하기 위해 무리한 탓이었다.
[김병현 스토리] ⑬건망증
3시즌동안 휴대폰·지갑 10번씩 분실
김병현은 건망증이 있다. 그래서 나이에 걸맞지 않게 잘 잊어 버리고 잃어 버린다. 이제까지 분실한 금품을 다 합하면 상당한 금액이 될 것이다. 휴대폰 지갑 옷 가방 한약 등 품목도 가지가지이다.
아마 시절에는 후배나 동료들이 챙겨주는 경우가 많았지만 모든 것을 혼자 알아서 해야 하는 메이저리그에서는 거의 한 달에 한번 꼴로 ‘사고’를 쳤다. 팀 동료들도 워낙 잘 까먹고 분실하는 경우가 많은 김병현이기에 두손 두발 다 들었다.
가장 잘 잃어버리는 품목은 휴대폰과 지갑이다. 메이저리그 3시즌 동안 각각 10여차례씩 분실했다. 이는 잠과도 무관치 않다. 김병현은 공항까지 이동하는 버스와 비행기에 앉기만 하면 잠을 잔다. 그냥 가만히 자는 것이 아니라 몸부림을 친다.
그러다보니 뒷주머니에 넣어둔 지갑과 핸드폰이 잘 빠진다. 가끔 동료들이 주워 주는 경우도 있지만 잠꾸러기 김병현은 잠에서 깨자마자 부리나케 내리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기 때문에 의자에 떨어진물건을 챙길 여유가 없다.
김병현의 건망증을 잘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음악을 좋아하는 김병현은 자신의 벤츠 승용차 트렁크에 6-CD 체인저를 설치했다. 하루는 트렁크를 열고 CD를 바꾸는 도중 핸드폰이 울려 통화를 끝낸 김병현은 휴대폰을 트렁크에 내려 놓은 채 닫아 버렸다.
다음날 휴대폰을 쓰려던 김병현은 어디에 놓아 둔지를 알 수 없었다. 결국 새로 구입했고 1주일 후 다시 CD를 교체하기 위해 트렁크를 열었을 때 휴대폰을 발견하고는 혼자 너털웃음을 지었다.
지난 해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8월 말 뉴욕-몬트리올로 이어지는 원정을 떠나기 전 루이스 곤살레스는 김병현을 불러 “여권을 꼭 가져오라”고 신신당부했다. 몬트리올은 외국(캐나다)이기 때문에 모든 선수들이 반드시 여권을 가져가야 한다.
8월 25일 뉴욕에서 곤살레스는 “여권을 가져왔냐”고 물었다. 김병현은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전날 자기 전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것을 깜빡한 것이었다. 김병현은 부랴부랴 피닉스의 지인에게 부탁, DHL로 여권을 전해 받고 겨우 캐나다로 이동할 수 있었다.
올해에도 김병현은 지난 9월초 샌프란시스코 공항 화장실에 큼지막한 가방을 그냥 놓고 호텔로 돌아온 적이 있다. 다행히 이때는 청소부가 발견, 구단에 연락해 돌려 받았다.
8월 말 샌디에이고에서는 호텔에 옷을 그냥 걸어놓은 채 나왔고 냉장고에 넣어둔 한약도 고스란히 남겨놓고 체크 아웃을 한 바 있다.
그래서 김병현을 아는 사람들은 물건을 챙겨주는 비서를 한명 고용하는 비용이 잃어버리는물건이나 돈보다 쌀 것이라며 농담을 한다.
[김병현 스토리] ⑭영어 실력
브리핑 80% 이해…의사소통에 문제없어
BK 팬들의 궁금증 가운데 하나는 김병현의 영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다.
미국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월드시리즈를 중계했던 폭스 TV의 한 해설가는 김병현이 영어를 하지못해 의사소통이 안된다고 아주 자신있게(?) 말하기도 했다. 이는 분명 오보였다.
김병현은 미국에 5년 먼저 진출한 박찬호만큼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팀 동료들이나 감독, 투수 코치 등이 하는 이야기는 다 알아 듣는다. 이들은 김병현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고 짧게 요점만 이야기 해준다.
만약 폭스 TV 해설가의 말처럼 김병현이 하나도 알아듣지 못한다면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라도 99년과 지난 해처럼 통역을 구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올 해는 구단이 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통역이 없어도 의사 소통에는 거의 문제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김병현은 코칭스태프의 브리핑을 80%정도는 이해한다. 다만 아직 말을 잘하지 못한다. 미국 기자들의 질문은 이해하지만 얼른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단어 위주로 아주 짤막하게 대답할 뿐이다.
지난 1999년 5월 29일 메이저리그에 진출했을 때 김병현은 영어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다. 불펜에서조차 짬짬이 영어책을 들고 다니며 공부했을 정도다. 그러나 박찬호처럼 개인 교습은 받지 않았고 현재는 특별히 영어 공부를하지는 않는다. 팀 동료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영어 공부의 전부다.
영어와 관련된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다. 메이저리그 진출 후 얼마되지 않은 99년 6월8일. 김병현은 경기에 앞서 “자주색 점퍼를 입어야 된다”는 구단 직원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혼자 검정색 점퍼를 입고 불펜에 대기, 벌금 25달러를 낸 적이 있다.
김병현이 영어를 너무 잘해 보브 브렌리 감독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적도 있다.
올해 시즌이 끝날 무렵인 9월 28일 뱅크원 볼파크에서 열린 밀워키 브루어스전에서 김병현은 9회초 2사후 제로미 버니츠에게 우월 투런 홈런을 두들겨 맞은 다음 다시 제임스 무턴에게 볼넷을 내주며 위기를 맞았다. 브렌리 감독은 마운드에 올라가서 김병현을 다독거린 후 덕아웃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때 김병현은 분에 못이겨 마운드에서 S자로 시작하는 욕을 내뱉었다. 이를 들은 브렌리 감독은 경기가 끝난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오늘 김병현은 그동안 배운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했다."라고 밝혀 기자들이 폭소를 터뜨린 적이 있다.
[김병현 스토리] ⑮ 가족 사랑 -끝-
어머니 앞에선 '장난꾸러기' 동생에겐 '엄한 오빠'
김병현도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바로 가족이다. 아버지 김연수씨(52) 어머니 최옥자씨(48) 그리고 두 여동생과 누나는 광주의 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가족들 가운데 김병현이 가장 좋아하고 친한 사람은 어머니이다. 지난 달 13일 인천공항에서 아들을 포옹하기위해 다가온 어머니를 피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많은 기자들 앞에서 쑥스럽고 어색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장면을 TV로 본 사람들은 친엄마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악성 헛소문을 퍼뜨리기도 했다.
시즌 중 최옥자씨가 아들 뒷바라지를 위해 미국에 건너온다고 하면 김병현이 말리는 것도 어머니가 싫어서가 아니다. 자신이 원정을 갈 경우 운전을 하지 못하는 어머니는 고스란히 1주일 동안 집만 지킬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마음이 아파서다.
김병현은 “만약 내가 있는 곳이 LA나 뉴욕 같았으면 자주 엄마를 불렀을 것”이라고 말한다. 올 해 가족들이 피닉스에 왔을 때는 지인이 뒷바라지를 해주어 마음이 편했다.
김병현은 가족들만 있을 경우 어머니를 ‘아줌마’라고 부르며 막내아들 마냥 장난도 잘 친다. 어머니는 아직 아들을 ‘애기’라고 부른다. 전화로 “애기야. 낮게 낮게 던져라”“자꾸 그런 말 하면 높게 던져 버리겠다”라며 어머니와 농담을 주고받기도 한다.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은 역시 아버지이고 김병현에게 가장 많이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야구를 시작한 것도 아버지의 권고에 의해서였다. 남들 앞에 나서기를 싫어하는 성격을 빼다 박았기 때문에 아버지가 해소책으로 야구를 권유했다.
오늘날 야구 선수 김병현이 있기까지 가장 든든한 후원자는 아버지였던 것이다.
김병현은 대학생인 두 여동생(김진경ㆍ김진선)에게는 아주 엄한 오빠다. 두 동생이 잘못한 것을 보면 따끔하게 혼내준다. 집에 전화를 걸 때마다 반드시 두 동생에 관해서 묻는 것도 멀리 있지만 오빠 노릇을 하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