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봄볕에 꽃들은 화려하게 피어나고, 살랑이는 봄바람에 춘정이 이니 어디론가 떠나야 할 것만 같다. '어디로 갈까?' 고민하던 차에 지난달 종영한 드라마 <화랑>이 생각났다. 신라의 화랑들은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심신을 수련하고 국토애를 길렀다고 하는데. 그들이 다녀간 곳이라면 훌륭한 여행지가 되지 않을까? 울산 태화강의 지류, 대곡천 기슭에 있는 울주 천전리 각석(국보 제147호)이 바로 그런 곳이다.
새도, 물도, 꽃도 봄기운을 받아 제 소리와 색을 뽐내는 지금, 오감을 활짝 열고 봄이 오는 대곡천을 따라 걷는다. 신라의 화랑이 된 것처럼.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영화보다 흥미롭고 생생한 역사의 두 장면을 만난다.
울산암각화박물관
울산암각화박물관에서 천전리 각석 미리보기
울산광역시를 가는데 내비게이션은 '경주IC'로 나가란다. 경주IC로 나와 20여 분 갔을까. '천전리 각석'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그냥 지나치고 잠시 후 '반구대암각화, 울산암각화박물관' 쪽으로 들어선다. 박물관에서 암각화와 각석에 대해 공부를 하고, 대곡천을 따라 20분 정도 걸어서 천전리 각석에 도착하는 게 천전리 각석을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박물관의 메인 테마는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이지만, 천전리 각석의 실물 크기의 모형도 전시되어 있어 볼 만하다. 실제로 천전리 각석은 접근에 한계가 있으니 특별히 암각화의 문양에 관심이 있다면, 박물관에 꼭 들러 천전리 각석의 모형을 꼼꼼히 살피고 가면 좋다.
천전리 각석 모형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동물 문양
천전리 각석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암각화다. 천전리 각석을 발견함으로써 대한민국에 '암각화'라는 연구 분야가 개척되었다. 1970년 12월 24일 동국대학교 박물관 조사단이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진 반고사지를 찾기 위해 이곳에 왔다가 마을 주민의 안내로 천전리 각석을 발견했다. 이듬해인 1971년 12월에 천전리 각석에서 2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를 발견했다. 주민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각석과 암각화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이것이 선사시대와 삼국시대의 유적인지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호젓한 최고의 봄 산책길
대곡천
박물관을 나와 대곡천을 건넌다. 다리를 건너 좌측으로 가면 천전리 각석, 우측으로 가면 반구대암각화다. 천전리 각석 방향으로 길을 잡으니 대곡천을 내려다보며 호젓하게 걸을 수 있는 명품 산책로가 방문객을 맞는다. 졸졸졸 물소리와 제 짝을 찾는 새소리, 어미를 찾는 새끼 염소 소리가 최고의 음향을 제공한다.
대곡천 곳곳에 피어난 봄꽃과 대나무
대곡천 산책로에는 곳곳에 보물이 숨어 있다. 따사로운 봄볕을 받으며 걷는 것 자체가 대자연의 선물이고, 무채색의 산책로에 연보랏빛 진달래와 노란 산수유, 푸르른 대나무가 봄의 색을 한껏 뽐내고 있다. 박물관 앞에는 매화와 홍매, 성급한 목련이 꽃망울을 터뜨렸다.
천전리 각석으로 가는 길은 산책로 종합선물 세트와 같다. 옛 시골길은 물론, 잘 정비된 데크길, 적당한 경사의 오르막길과 내리막길, 대곡천을 따라가는 강변길, 폭신한 흙길과 트레킹의 맛을 돋우는 돌길까지, 이 모든 길이 1km 남짓한 산책로에 다 들어 있다.
천전리 각석으로 가는 다양한 산책로
산책로 위에서 바라본 천전리 각석
천전리 각석 앞 바위
산책로에 들어서 20분 정도 걸었을까? 멀리서 작지만 제법 웅장한 물소리가 들린다. 폭포라 부르기엔 쑥스럽지만, 어른 키 정도의 바위 아래로 계곡물이 세차게 떨어진다. 수량도 제법 많아 계곡물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각석 앞을 휘돌아 하류로 흘러간다. 이제 나무계단을 내려가 대곡천을 건너면 천전리 각석이다. 나무계단 앞에 서니 개울 건너 각석이 보이고, 좌측으로 공룡 발자국이 있는 널찍한 바위가 한눈에 들어오며 시원한 풍경이 펼쳐진다. 작은 폭포와 각석, 너럭바위와 계곡을 한 번에 담을 수 있는 포토 포인트이기도 하다.
천전리 각석 정면 모습
천전리 각석 상단의 기하학적 모습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역사 이야기
대곡천을 건너 각석 앞에 선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상단의 동심원과 마름모꼴의 암각화다. 천전리 각석은 상단과 하단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상단에는 동물 그림과 동심원, 마름모, 나선형 등 선사시대 암각화가 그려져 있다.
하단에는 신라시대의 세선화와 300여 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명문 중에는 문첨랑, 영랑, 법민랑 등 신라 화랑들의 이름이 눈에 띈다. 신라 진흥왕(534~576) 때 창설된 화랑도는 대개 15~18세의 청소년으로 구성되었다. 화랑들은 경주 남산을 비롯해 금강산, 지리산, 천전리 계곡 등과 같은 명승지를 찾아다니면서 심신을 수양하고 단련했다. 천전리 각석에 새겨진 화랑의 이름 중 '법민랑(法民郞)'이 바로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문무왕의 화랑 시절 이름이다. 천전리 계곡이 신라 서라벌 귀족과 화랑이 즐겨 찾던 명소이자 수련지였음을 알 수 있다.
천전리 각석의 원명과 추명(모형)
각석 하단 중앙에는 이른바 '원명(原銘), 추명(追銘)'이라 불리는 두 가지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두 명문의 시간차는 14년으로 원명이 먼저, 추명이 나중에 쓰였다. 두 명문 모두 영화보다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 525년 을사년에 쓰인 원명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을사년에 갈문왕이 놀러 와서 처음으로 골짜기를 보았다. 오래된 골짜기인데도 이름이 없는 골짜기였다. 좋은 돌을 얻어 글을 짓고 계곡을 '서석곡'이라 하고 글자를 새기게 하였다. 함께 온 벗은 누이인, 아름다운 덕을 지닌 밝고 신묘한 '어사추여랑님'이다."
원명의 내용은 한 편의 'Sad Movie'다. 배경은 신라 법흥왕 12년(525), 등장인물은 법흥왕의 동생인 갈문왕과 그의 연인이자 누이였던 '어사추여랑'이다. 학자들은 어사추여랑은 갈문왕의 사촌누이로 둘은 혼인을 기약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신라 왕족 사이의 근친혼은 일반적인 일이었다. 갈문왕은 사랑하는 어사추여랑과 결혼하지 못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 결혼의 상대는 형님의 딸, 즉 법흥왕의 딸 지몰시혜비(지소부인)다. 갈문왕은 조카와 결혼한 것이다. 이는 아들이 없던 법흥왕과 신라 왕실이 기획한 정략결혼이었다. 하지만 결국 갈문왕은 왕위를 잇지 못하고 죽었다. 539년 기미년에 쓰인 추명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정사년(537년)에 갈문왕이 죽었다. 그 비 지소부인이 갈문왕을 사랑하고 그리워하여 기미년 7월 3일, 갈문왕과 누이가 함께 보았던 서석을 보러 계곡에 왔다. 이때 셋이 왔는데, 무즉지태왕비 부걸지비(법흥왕비)와 사부지왕자(갈문왕의 아들)가 함께 왔다."
갈문왕은 왜 사랑했던 누이와 결혼하지 못하고 조카와 정략결혼을 한 것일까? 근친혼은 당시 왕가의 혈통을 지키고 권력을 배타적으로 소유하는 최고의 정치 이벤트였다. 그렇다면 법흥왕의 정략혼은 성과를 거두었을까? 갈문왕과 지소부인의 아들, 즉 539년 어머니와 함께 천전리 각석에 행차했던 사부지왕자가 한강 유역을 확보하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진흥왕이다.
여행정보
- 주소 :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산 210-2
- 문의 : 052-229-7653(울주군 문화예술과)
- 주소 :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반구대안길 254
- 문의 : 052-229-4797
첫댓글 정보고맙습니다
아름답고,소중한 인연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