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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으아아앙. 엄마 미워!! 머리가 이게 뭐야. 호섭이 같짜나."
"너 호섭이가 뭔지나 알고 하는 소리야? 예뻐. 예쁜데 왜 그래?"
"하나도 안 예뻐!! 흐으윽. 언니이~ 엄마 혼내줘."
"예쁘기만 하고만... 뚝!"
"흐아아앙!!!!!!"
아, 귀야.... 뚝하랬더니 더 크게 울어버리는 라희 때문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리준일 바라보면, 홀로 침대 위에 앉아
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살짝 멍한 표정으로 라희를 바라보는 리준이. 그리고 잠시 후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인상을 찌
푸리더니 약간은 건방지게 손가락을 까딱까딱 거린다.
드디어 아빠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더 상큼하게 변신을 시켜주고 싶어서 손수 가위로 앞머리를 잘라줬더니 그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인지 자신이 호섭이 같다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계속 울기만 하는 라희. 어쨌든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나에게 손짓하는 리준이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머리를 한 번 쓰다듬으며 왜? 라고 물으면, 턱 끝으로 아직도 울고있
는 라희를 가리키면서.
"모야?"
뭐가? 엄만 가끔 너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 리준아. 앞 뒤 자르지 말고 길게 좀 얘기해줄래? 이제 그럴 때도 됐잖니.
"쿠려."
"뭐?"
"쿠려."
아..... 그래. 누나 앞머리를 왜 저따구로 짤라놨냐 이말이지 지금?
"누난테 사가해."
"응."
나는 더이상 군소리 안 하고 리준이가 시키는대로 라희에게 다가가 진심어린 사과를 했다. 앞머리 기장이 너무 짧아서 조금
바보 같아 보이긴 해도 내 눈엔 정말 귀여운데, 아직 세상 사람들의 시선은 내가 보는 것과 많이 다른 듯.
"라희야 미안해 엄마가 잘못했어. 울지마~ 다음부턴 미용실 가서 잘라줄께."
"흐어엉!! 료한테 차이면 엄마가 책임져!!"
"료는 머리 기르고 보면 되잖아~"
"안 돼. 그럼 백밤은 더 자야된단 말이야~ 빨리 보고 싶어. 흐아앙!!"
어째 잠잠하다 했어.... 아, 진짜 미치겠네.
"라희야!! 엄마가 머리 빨리 자라는 샴푸 사줄께. 응??"
"샴푸...??"
"으응. 요술 샴푸~ 내일 결혼식 끝나고 바로 사줄께. 알았지? 이제 그만 울자~ 너무 많이 울면 머리 아파."
"엄마 진짜야? 진짜 머리 빨리 자라는 샴푸 내일 사줄 거야? 그걸로 머리 깜으면 머리카락 빨리 자라?"
"당연하지~"
"그래도... 엄마 미워."
"알아~ 미안해 우리 딸. 엄마가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으응."
"아이구 예뻐라."
하실장 언니 품에 쏙 안겨서 붉어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밉다고 말하는 라희 볼에 쪽 입맞추고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손바닥으로 슥슥- 닦아주었다. 백 번 넘게 사과해도 절대 그치지 않을 것 같던 울음이 요술 샴푸 하나에 이렇게 금방 그칠
줄이야.... 누굴 닮아서 이렇게 귀가 얇은 건지, 나중에 커서 사기나 안 당하면 다행이다.
앞머리가 마음에 안 든다고 정신 없이 울던 라희가 어느정도 진정이 됐을 때쯤 한 번 더 잘 달래서 리준이 곁에 데려다 놓
았더니, 자신의 누나를 안쓰러운 표정으로 한 번 바라보고 평소에 제일 아끼던 로봇 장난감까지 선뜻 양보해주며 사이좋게
잘 노는 리준이. 집안이 조용해지고나니 나도 모르게 다시 또 한숨이 새어 나오고.
"진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에요?"
"아니야~ 일은 무슨..."
"근데 왜 자꾸 한숨이에요? 며칠 전부터 계속 기운도 없어 보이는데... 혹시 로하씨랑 싸웠어요?"
"아니, 그냥. 발이 아파서 요즘 좀 기운이 없나 봐."
그날 이후로 자꾸만 한숨이 나오는 걸 차마 아로하한테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는 말도 못하고 혼자 속앓이만 하는 나. 그냥
지호오빠랑 아는 사이고 아로하의 여자친구라는 것 밖엔 모르는 그 여자와 잠깐 동안 불쾌한 대화를 나누다가 아로하가 통
화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기 전에 나 먼저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한 번쯤은 먼저 연락이 올 줄 알았는데 며칠이 지나도록 연락 한 번 안 오는 걸 보고 더 많이 실망한 듯 가슴이 더
답답해지고,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절대 뺏기지 않을 자신 있다고 당당하게 얘기하긴 했어도 이대로 정말 끝일까봐 걱정
도 되고 무섭기도한 지금.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아로하의 태도를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아로하를 원망 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굳이 내 앞에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아가씨. 내일은 제가 못 챙겨주는데, 혼자 잘 할 수 있죠?"
"내가 앤가~ 걱정하지 말고 오늘은 일찍 자.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잖아."
"그렇긴 한데... 저 지금 너무 떨려서 잠이 안 와요. 이러다 한숨도 못 자면 어떡해요?"
"에이. 그럼 안 되지!! 내가 허브차 끓여줄 테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푹 자. 내일 화장 안 먹으면 어쩌려구~"
표정만 봐도 설레임이 가득한 하실장 언니의 등을 떠밀며 같이 1층으로 향했다. 막상 결혼식이 하루 앞으로 다가오니 정말
좋아죽겠는지 오늘따라 안절부절 못하고 계속 기분이 붕 떠있는 하실장 언니. 벌써 8년 넘게 한 가족처럼 같이 지내왔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이다.
누가 커플 아니랄까봐 결혼식 앞두고 들떠있는 건 우리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약 한시간 전쯤 '아빠 떨려?' 라고 물어봤더
니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은지, 금방 발그레진 얼굴로 '응!!' 이라고 말하며 고개를 힘차게 끄떡거리던 우리 아빠. 그리고
는 정말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며 내일이 너무 기대 된다고, 가슴이 너무 떨려죽겠다고 한참동안 날 붙잡고 얘기하던 귀여운
아빠다. 나도 3년 전에 제대로 결혼식을 올렸다면, 저런 기분이였을까...?
"하아... 모르겠다~ 잠이나 자야지."
방으로 돌아와서 한참동안 천장을 바라보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무릎 사이에 베개 하나를 끼고 옆으로 돌아 누워 잠을
청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아이들을 준비시키고 이제 막 밖으로 나와 차에 타려고 하는 찰나 아로하한테 걸려온 전화. 내
가 한국에 들어온지 벌써 2주가 다 되어가지만 이렇게 먼저 전화가 걸려온 건 오늘이 처음이다. 묘한 기분에 아로하의 이름
이 떠있는 액정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아이들을 먼저 차에 태우고 문 밖에 서서 전화를 받으면.
-5분 후에 나와.
"나 벌써 나왔는데..."
-그럼 기다려.
"아니, 그냥 따로 갈래. 그게 더 편할 것 같애."
-부부가 따로 가면 이상하지 않냐. 보는 눈도 많은데.
"...."
-내일 아침 신문에 나고 싶지 않으면 기다려.
그토록 다정했던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제 놀랍지도 않지만, 이렇게 변해버린 아로하를 대할 때마다
가슴이 시린 건 어쩔 수 없는 듯 이번에도 어김없이 서글픈 웃음이 새어나온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투와 차가운 한
마디 한마디가 고장난 내 심장을 얼게할 것만 같은 느낌. 도대체 우리가 언제부터 남들 시선과 기사 따위나 신경써야 하는
가식적인 사이가 되버린 거지...?
"엄마! 안 가??"
전화를 끊고 차 문에 기대서서 그저 멍하니 땅만 바라보고 있는데, 창 밖으로 고개를 불쑥 내밀고 나를 재촉하는 라희.
"아빠 온데. 아빠 오면 아빠 차 타고 가자."
"아빠!?"
"응. 차에서 잠깐만 기다려 아빠 금방 오실 거야."
"와, 신난다!!"
"라희야... 그렇게 좋아?"
"응!! 엄마. 라희가 보고 싶다고 아빠 빨리 오라고 해!!"
정말, 저렇게 좋을까...? 아빠 얘기만 나오면 얼굴에 급 화색이 도는 라희. 그리고 잠시 후 집 앞에 차를 세우고 자상한 아
빠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다가오는 아로하. 언제나 그랬듯, 만날 때마다 이산가족 상봉하듯이 격하게 반겨주는 라희를 안고
내 옆에 뚱한 표정으로 서있는 리준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지만, 여전히 아무 대꾸도 없이 그냥 고개
를 홱 돌려버리는 리준이. 어쨌든 그렇게 한 차를 타고 꽤 화목한 가족인척 흉내를 내며 같이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식장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을 아로하한테 맡겨놓고 제일 먼저 내가 향한 곳은 바로 신부 대기실.
입구에서부터 눈이 부시는게 주변에서 온통 빛이나고, 언니를 보고 있는 내 가슴이 왜 이렇게 떨리는 건지 나까지 설레이는
느낌. 웨딩드레스 차림의 언니에게서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정말 아름답다는 말 밖에는 떠오르지 않을 만큼.
"아가씨. 저 이상해요?"
"아니... 너무 예뻐. 진짜 너무 예뻐. 내가 남자였으면 언니한테 반했을 걸?"
"정말요?"
"응~ 우리 아빤 좋겠다. 이렇게 예쁜 신부랑 결혼도 하고."
"아니에요~ 제가 복 받았죠. 그렇게 멋진 신랑한테 시집도 가고."
"치... 암튼 닭살이야."
언니는 너무 겸손해서 탈이다. 한 번도 가식이란 걸 보여준 적 없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진실 된 사람. 오늘은 분명
아빠가 결혼하는 날이지만 꼭 아들 장가보내는 기분이랄까? 그래도 마음이 무겁기보단 너무 상쾌한 기분. 아빠의 짝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실장 언니라는게 너무 마음이 놓인다. 나이는 아빠보다 한참 어리지만 잘 이끌어주고 잘 보듬어줄 수 있을
것 같은 좋은 사람. 그리고 평생.... 우리 아빠만 사랑해 줄 것 같은, 마음이 너무 예쁜 사람.
"나 언니 한 번만 안아봐도 돼?"
평소 같았으면 이런 거 물어보지 않고 그냥 덥썩 안겼겠지만 오늘은 서로에게 특별한 날인 만큼 조심스레 물어보면, 웃으면
서 흔쾌히 허락해주는 하실장 언니. 난 혹시라도 몇 시간 동안 공들여서 한 머리가 망가지지 않게 살며시 목을 끌어안고 한
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마워... 우리 아빠랑 결혼해줘서."
"고마워요. 나 같은 사람, 아빠 짝으로 받아줘서."
"이제부터 언니 말고 엄마라고 부를께. 그래도 되지 새엄마?"
"아가씨...?"
"대신, 언니도 이제 나한테 아가씨라고 부르면 안 돼. 존댓말은 당연히 안 되고~"
"...."
"언니 울어??"
헐..... 언니가 원래 이렇게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였나? 매일 웃는 모습만 봤지 우는 건 처음이라 당황스러우면서도 뭉클
해지는 가슴. '아니에요. 안 울어요!' 하면서 옆으로 고갤 돌리고 애써 참아보지만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한게 벌써 코 끝
까지 빨개져서 귀여워 죽겠다. 엄청 강하기만 한 여자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여린 면이 있을 줄이야.
"뭐 그런 걸로 울어~ 화장 번지니까 울지마. 식 얼마 안 남았잖아."
"진짜 감동했어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언니를 엄마로 인정하는 건 쉬워. 나한텐 그거 어려운 일 아니야."
"고마워요 정말..."
"고맙긴! 나 이제 아빠한테 가볼께 언니. 이따 너무 떨지 말고, 결혼 축하해~"
"네. 이따 봐요~"
자신이 오늘의 주인공이라는 걸 인증이라도 하듯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밝게 웃어주는 언니와 인사를 하고 대기실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아빠 옆에 서서 착한 사위인양 손님 맞이를 하고 있는 아로하와 그 옆에 서서 생글생글 웃으며 예
쁘게 배꼽인사를 하고 있는 라희. 그리고 왜인지, 잔뜩 인상을 구기고 서있는 리준이 앞에 몸을 숙이고 앉아있는 한 남자.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뒷모습만 봐도 누구인지 대충 알 것 같아서 조용히 다가가면.
"얌마. 삼촌이 말하는데 그냥 쌩까?"
리준이의 볼을 쿡쿡 찌르며 장난을 치고 있는 아류. 리준이는 그런 아류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팍 쓰면서 아류를 노
려보기 시작한다. 말은 안 해도, '넌 뭔데 와서 귀찮게 하냐' 는 듯한 그런 표정.
"아씨..."
"뭐!? 야, 덤벼."
마치 이런 반항적인 모습이 더 귀엽다는 듯이 계속 장난만 치는 류와, 점점 승질이 나는지 자신의 볼을 자꾸만 툭툭 건드리
는 류의 손을 계속 거칠게 쳐내는 리준이. 그와중에도 눈은 정확히 류를 향하고 있는게 다른 또래 아이들에게선 볼 수 없는
카리스마를 풍기고 있었다. 정말 못말린다니까.... 뭐, 리준이는 저게 매력이긴 하지만.
"리준아."
내가 가까이에 있어도 오직 류만을 노려보느라 내 존재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리준이를 조용히 불렀다. 그럼 다행히 귀는 열
어놨는지 눈만 살짝 돌려서 나를 보고 잘됐다 싶어 얼른 내 앞으로 뛰어오더니.
"엄마. 쟤가 자꾸 귀찬케해..."
어느새 잔뜩 구겨져있던 얼굴이 울상이 되어, 어디갔다 이제 왔냐는 듯이 나를 바라보며 내 품에 쏘옥 안기는 리준이. 그리
고 그와 동시에 뒤돌아 서서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먼저 인사를 건네는 아류.
"오랜만이다."
"으응..."
사실 이렇게 먼저 인사해줄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너무나도 생생하다.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도저히 자신이 없어서 못하겠다며 아로하에게 또 한 번 실망과 상처를 안겨줬던 날, 웨딩드레스가 들어있던 상자를 집어던
지며 넌 왜 항상 니 생각만 하냐고 이기적인 날 욕하면서 다신 안 보겠다고 말했던 아류. 그래서인지, 혹시 우연히 마주치
더라도 나 같은 건 쳐다도 안 볼줄 알았는데 정말 의외였다.
그런데 너무 오랜만에 만난 탓일까? 아류가 먼저 인사를 건네줬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은 죄가 있어서 그런지 그냥 어색
하게 웃으면서 인사하는 것 말고는 선뜻 다른 말을 할 수가 없던 나. 결국 짧은 인사를 끝으로 이 어색한 자리를 내가 먼
저 피해야했다. 그리고, 조금은 긴장 된 모습으로 시종일관 웃으면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는 아빠에게 다가가 가벼운 포
옹을 해주고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건드리는 느낌에 살며시 뒤로 돌아보면, 씨익 웃으면
서 안녕이라고 말하는 아민이.
"오빠..."
갑자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아무 걱정 없이 예전처럼 웃으면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그래서 나도 모
르게 눈물이 글썽글썽한 얼굴로 반가움을 표시하면.
"우와. 방금 나한테 오빠라고 한 거야?"
"으응. 나 철들었어."
"아..... 이건 비밀인데."
다짜고짜 뭐가 비밀이라는 건지,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얼굴을 내 귀에 가까이 대고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난 아직도 류한테 맨날 혼나. 이제 그만 철 좀 들으라고."
"...."
"가끔은 내가 자기 형인게 부끄럽다는 막말도 하는데, 그래도 어쩌겠어. 내가 형이니까 참아야지."
아..... 그래? 류가 무서워서 참는 건 아니고?
"그리고, 이건 진짜 비밀인데....."
"으응."
"원래 남자는 서른 전에 철드는 거 아니야. 그럼 매력 없어."
"아...."
이상하네..... 원래 아민이가 이정도로 철이 없는 애였나? 아님, 너무 오랜만이라서 내가 적응을 못하는 건가? 원래부터 좀
엉뚱한 면이 있는 건 알았지만 어째 더 심해진 것 같다. 어쨌든 오랜만에 만난 내가 반가웠는지 계속 싱글벙글 웃으면서 이
상한 얘기를 쭈욱 늘어놓는 아민이와 장난도 치며 즐겁게 떠들고 있는데, 아직은 조금 무섭기도 하고 조금 부담스럽기도 한
두 분과 눈이 마주치고. 순간 뻣뻣하게 굳어서 경직 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어렵게 인사를 건네는 나. 그리고....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그래. 못본 새 더 예뻐졌구나."
예전과 다름 없이 나를 좋은 눈으로 바라봐주시는 아로하네 부모님이였다. 먼저 찾아뵙고 인사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다
시 한 번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내게, 어깨를 두드리며 괜찮다고 말씀해 주시는 아저씨. 갑자기 왜 이렇게 마음이 울컥하는
건지 자꾸만 눈물이 차올라서 하마터면 울뻔 한 상황에 리준이가 내 원피스를 쭉쭉 잡아당기며.
"엄마. 나 쉬이."
아, 맞다.....
"라희야! 이리와서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인사드려. 리준아 너도."
"시러."
"꺄아악~ 할머니!!"
철퍼덕.
"아!!!!"
진짜 누가 내 딸 아니랄까봐.... 호들갑스럽게 소리를 지르며 뛰어오다가 보기 좋게 넘어진 라희. 그리고는 눈물 한방울 안
흘리고 곧바로 벌떡 일어나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헤헤 웃으며 다시 달려오는 씩씩한 내 딸. 잘 우는 것 만큼은 날 닮
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덤벙거리는 건 나보다 한수 위.
어쨌든, 이번에도 역시 라희는 마치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하듯이 할머니 할아버지 품에 안겨서 그동안 못한 애교를 떠느라
정신이 없었고. 딱 한 사람, 이 상황 자체가 이해 안 되는지 뭔가 못마땅하면서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한참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뒤로 돌아서 휘적휘적 어디론가 혼자 걷기 시작하는 리준이. 사람들도 많은데 갑자기 혼자 어딜 가는 건지 깜짝 놀
라서 얼른 뒤따라 걸으며 어딜 가냐고 물으면, 아주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가 쉬 마렵다고 해찌."
"아... 미안. 엄마가 깜빡했어. 가자, 엄마가 데려다줄께."
"시러. 혼자 가꺼야."
"엄마가 미안해~ 정신이 없어어 그랬어. 응?"
"따라오지마."
이 자식, 아주 단단히 삐졌구만? 남자가 쪼잔하게 진짜.
"근데 리준아, 너 그거 알아?"
"모."
"화장실 그쪽 아니야."
"...."
절대 타협은 없을 것 같던 삐돌이 리준이도 내 말을 듣고 아차 싶었는지 갑자기 우뚝 멈춰서 천천히 뒤돌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몇 번의 표정 변화가 있은 후 또 나지막한 목소리로.
"가."
"응?"
"빨리이! 급해."
"아, 알았어!!"
웬만해선 잘 흥분하지 않는 우리 리준인데 정말 급하긴 급한 모양이다 이렇게 소리까지 치는 거 보면. 어쨌든 얼굴이 점점
빨개지는게 지금 이 순간 정말 내가 업고 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아예 들쳐업고 화장실로 전력질주 하는 나.
이제 곧 결혼식이 시작할 시간이라 급한 마음에 더 빨리 뛰었더니 숨까지 헐떡일 정도였다. 게다가, 아직 발도 다 낫지 않
은 상태에서 무리를 해서 그런지 거의 다 나았다 싶었던 발이 다시 아파오기 시작하고, 갑자기 무슨 삘을 받았는지 내친김
에 똥까지 싸겠다는 리준이를 앉아서 기다린지 벌써 20분 째.
"리준아... 아직이야?"
"기달려."
"엄마 발 저려."
"기달려."
그래. 얼마든지 기다리긴 하겠다만.... 계속 쪼그리고 앉아있었더니 다리도 저리고, 이러다 결혼식 끝날 때까지 안 나오는
건 아닌가 완전 똥줄이 타는 느낌. 그리고 결국, 설마했던 일이 현실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아니, 그럴 뻔 했다. 화장실에
있는 동안 어찌나 속이 타들어가던지, 내가 오늘 본 아빠의 결혼식 중에서 기억에 남는 거라곤 반토막난 주례 선생님의 말
씀과 양가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우아하게 퇴장하는 정도? 지독한 변비에 걸린 귀한 아들 때문에 아빠 결혼식을 진짜 못 보
게 될 줄이야.... 충격이 너무 커서 눈물이 앞을 가린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사실은, 결혼식이 다 끝나고 나서야 아민이랑 같이 손잡고 나타난 리준이였다. 나 대신 고통의 시간을
함께 보내서인지 짧은 시간 안에 부쩍 친해진 듯한 두 사람. 남자라면 모두 천적으로 생각하던 우리 리준이랑 어쩜 이렇게
빨리 친해졌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후련하고 개운한 표정으로 싱글싱글 웃으면서 걸어오는 리준이를 보고 또 한 번 눈물
을 왈칵 쏟아낼 뻔한 나. 오늘 처음으로 리준이가 살짝 밉다. 왜 하필 똥이 그때 마려워가지고... 젠장.
"리준아. 초록 음식만 먹으면 똥 못 싼다고 엄마가 얘기 했지!"
"몰라."
"이제 고기반찬도 먹고 그래. 기름진 음식을 너무 안 먹으니까 자꾸 똥이 안 나오는 거 아니야."
"싸써."
"엄마 말 잘 들으면 똥이 더 잘 나온다고 아들. 응!?"
"똥 싸써 엄마."
"아니, 그러니까 엄마 말은...!!"
"왕건이야."
"뭐라고?"
난 순간 내 귀를 의심해야 했다. 왕건? 지금 왕건이라고 한 거니 리준아? 니가 어떻게 그런 어려운 말을... 한 번도 리준
이 앞에서 쓴 적이 없는 말이였기에 이런 말은 어디서 배웠을까 내가 제대로 들은게 맞나 잠시 생각하고 있는 사이, 무슨
비밀 이야기 하듯 손으로 입을 가리고 내 옆에 바짝 붙어서 조그맣게 얘기하는 아민이.
"내가 봤는데, 변기가 막힐 정도야. 난 애기 똥이 그렇게 큰지 몰랐어."
그래서....
"완전 왕건이던데?"
결국 너였구나. 우리 리준이한테 그런 말을 가르친게.
"내가 진짜 못살아..."
내가 없는 사이 아민이가 어떤 말로 리준이를 현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어깨를 으쓱할 일은 아니잖아 리준아!!
마치 자기 똥이 대단하다고 착각이라도 하고 있는 듯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계속 왕건이라고 말하는 리준이를 보며 완전 할
말을 잃은 나. 이제부터 절대 아민이한테는 애 맡기지 말아야겠다. 확실히 더 이상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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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만날 사람들은 다 만난 것 같네요.
아빠도 결혼했으니 지애도 빨리 결혼해야 할 텐데 과연 할 수 있을까요. ㅠ ㅋㅋ
(업쪽 = 숫자)
ㅋㅋㅋ 곧 (?) 돌아오겠죠 ㅠ ㅋㅋ
곧올듯 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 그런가요? ㅋㅋ 앞으로도 지켜봐주세요~~
잘봣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