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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18년 8월 5일 주일오전
성경봉독 : 민11:1-15; 행4:23-31
본문 : 시49:1-20
제목 :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주일오전찬송
경배찬송 - 시111편 1,2
십계명 낭독 후 찬송 - 시111편 4,5
사죄선언 후 감사찬송 - 시138편 1,4
설교 후 찬송 - 시49편 3,4,5
성찬식 찬송 - 시84편 2,3
폐회찬송 - 시108편 1,2,4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편 49편은 보통 “지혜시”에 분류되는 시편입니다. 지혜시라는 것은 보통 여러분이 잠언이나 전도서를 읽을 때 느끼는 정서대로 읽으시면 된다는 뜻입니다. 인생에 대한 지혜와 통찰을 담고 있는 시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최근 우리가 오후에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에 대해서 배우느라 땅에서 살아가면서 먹고 마시는 일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는데, 공교롭게도 시편 49편은 바로 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땅에서 부해지는 것, 풍부하게 사는 것, 그에 대해 신자는 무엇이라 할 것인가? 이것이 시편 49편의 주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땅으로부터 들어 올려 하늘에 있는 것으로 우리의 눈을 향하게 합니다. 사실 우리는 땅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땅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주일에 아무리 은혜로운 말씀을 들어도, 집에 돌아갔을 때 공과금 영수증이 쌓여있는 바구니를 보면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보통 사람들의 일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눈을 하늘로 향해 들고 땅의 것에서 마음을 돌리게 하는 이유는 “그렇게 잘 하지 못하는 나를 닦달하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땅의 것의 허망함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하늘의 아름다운 것을 계속해서 비춰주는 이유는, 우리가 너무나 쉽게 참된 아름다움을 경시하고 땅의 가치 없는 것에 마음을 두기 때문에 그로부터 우리를 경성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지적”하시는데 있지 않고, 우리의 마음이 좀 더 아름다운 곳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곳에 있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혜시를 들을 때, “지적”과 “타박”으로 듣지 마시고, 아버지이신 우리 하나님께서 자녀인 우리들을 향하여 좋은 것을 주시고자 타이르시는 것으로 듣도록 합시다. 시편의 지혜를 참으로 잘 받고 우리의 삶을 좀 더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면, 우리의 어리석음이 후회가 되고 하나님을 향한 삶을 좀 더 잘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시편 49편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도록 합시다.
키워드와 중심구절
수수께끼
시편 49편은 시작 부분에 전체 시를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가 들어 있습니다. 시인은 시의 첫 머리에서 “만민들아, 세상의 거민들아”라고 부르면서 자기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시인이 들으라고 하는 말의 중요한 내용이 4절에 키워드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4절에 보면 “오묘한 말”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말은 “수수께끼”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냈던 수수께끼에서도 바로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수수께끼라는 말이 시편 49편 전체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키워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수수께끼”(히. 히다)라는 말을 이해할 때, 우리말 수수께끼가 가지고 있는 뜻 그대로를 여기에 대입해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우리가 수수께끼라고 번역하기는 했지만, 우리는 통상 수수께끼를 심심풀이로, 재미로 사용하지만, 성경에서 수수께끼는 그런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성경에서 수수께끼는 “비밀을 담고 있는 것”의 의미가 강합니다. 오늘 시편에서 이 말을 “오묘한 말”이라고 번역한 것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시편 49편에서 수수께끼는, 단지 말놀이로서 흥미를 위해 행하는 수수께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신묘한 비밀을 품고 있는 말인 것입니다.
이 은밀한 비밀이 예를 들어 시편 78편 같은 곳에는 이런 방식으로 나옵니다.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히다)을 발표하리니” 시편 78편에서 “비밀한 말”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조상들에게 알려주셨던 신묘한 진리를 가리킵니다. “계시”라고 생각해도 되겠습니다. 지금 우리로 치자면 하나님의 말씀의 일부분인데, 이 중에서 어떤 것들을 “묘한 진리를 담고 있다”해서 이것을 수수께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수수께끼”의 참 의미는,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주신 어떤 사실을 시인이 곰곰이 생각할 때, 사람들이 살펴보기로는 대수롭지 않거나, 혹은 무슨 뜻인지 잘 모를 수 있는 이야기인데, 그걸 깊이 묵상하고, 거듭 씹어 보니까, 이게 대단한 의미가 있는 내용이더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여기 시편 말고도 잠언이나 민수기, 하박국 같은 곳에서도 이 말이 사용되었는데, 그 용례를 잘 살펴보면 우리말로 “수수께끼”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의아한 내용들이지만, 사실은 그 내용을 잘 묵상해보면 하나님의 진리가 담겨 있는 그런 내용인 것입니다.
시편 49편에서 시인은 바로 이것을 이제 말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4절에서 중요하게 보셔야 하는 또 다른 점이 이 “오묘한 말”을 시인이 “나의” 오묘한 말이라고 하고 있다는 점인데, “나의”라고 한 이유는 시인이 이미 이 수수께끼를 모두 이해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베푸신 수수께끼를 시인은 이해했습니다. 통찰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그 지혜를 따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아! 하나님의 뜻이 바로 이것이로구나!” 하면서 그 깨달은 심정으로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수수께끼를 말해 주마! 이 놀라운 사실을 너희가 들어도 알지 못할 텐데, 내 말을 잘 들어봐라! 여기에 기가 막힌 진리가 있다!” 이렇게 하면서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편 49편의 서론이고, 또 한편으로는 시편 49편 전체의 내용을 딱 한 단어로 압축하여 말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시편 49편은 그야말로 “수수께끼에 관한” 시편인 것입니다.
주제구절
자, 그러면 시인이 말하는 수수께끼는 무엇일까요? 수수께끼라는 건 얼핏 봐서는 아닌 것 같은데 잘 이해를 해야만 깨달을 수 있는 것이고 인생의 진리를 담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 수수께끼가 오늘 시편에서는 크게 반복되는 두 주제구절을 통해서 표현이 되었습니다. 이 시는 같은 어구를 반복함으로써 딱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첫째 단락의 맨 끝 절과 둘째 단락의 맨 끝 절이 같은 내용입니다. 이렇게 하고 이 시를 보면 쉽게 문단 나누기를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잘 모르겠는 분은 쉽게 아시려면 우리 선배들이 시를 나눠놓은 것을 참고하십시오. 동그라미가 어디에 되어 있는지를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둘째 단락의 첫 절이 몇 절입니까?
네 13절입니다. 그러면 이 시가 12절까지 한 단락, 그리고 나머지 끝까지가 한 단락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으시겠죠. 그렇다면 이 각 단락의 마지막을 맺고 있는 구절을 보십시오. 여기 반복이 있습니다. 12절과 20절이 주제구절입니다. 각 절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12절,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20절,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는 똑같은 구절입니다. 앞의 문구는 각각 이렇습니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하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이게 참 한글 번역 성경 중에 이런 부분이 많은데요. 왜 한 시 안에서도 같은 구절을 이렇게 다르게 번역을 해 놨는지 모르겠습니다. 원문에서는 둘이 첫 시작이 똑같습니다. 12절도 “아담 비카르 로”이고, 20절도 “아담 비카르 로”입니다. 뒤에 오는 단어만 “야린”과 “야빈”으로 다를 뿐입니다. 그러니까 저렇게 다르게 번역하면 안 되고, 12절은 “존귀한 사람이 장구치 못한다”라고 해야 하고, 20절은 “존귀한 사람이 깨닫지 못한다”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12절과 20절은 모두 “존귀한 사람, 부나 권세를 가진 사람”이 첫째 12절에서는 “장구치 못한다” 곧 오래 가지 못한다. 20절에서는 같은 이 사람이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고, 결국 이 부나 권력을 가진 높은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구절이 이 시 전체의 주제이고, 이 내용이 바로 “수수께끼”의 핵심입니다.
왜? : 그리고 “구속”이라는 주제
힘과 재물
자, 그러면 이제 우리는 자연스럽게 시인이 왜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에 관심이 가게 됩니다. 왜 시편 49편은 “존귀한 자”를 가리켜 “짐승과 같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내용이 이 두 문단의 나머지 내용들 전체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을 한 번 살펴봅시다.
먼저 6절에 시인이 대상으로 하고 있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입니다. “의지하다”라는 말은 구약성경에서 기본적으로 “믿음”을 말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히. 바타흐). 우리에게 있어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6절은 은연중에 이 사람에게는 재물이 하나님과 같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 대신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를 더 말하자면 여기 “재물”이라고 되어 있지만 이 말은 근본적으로는 “힘”입니다. 재물도 되고 어떤 때는 “군대의 힘”도 됩니다. 그러니까 재물이라 생각하셔도 되지만 포괄적으로는 “자기의 힘”을 믿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자긍하다”라는 말은 우리가 “할렐루야”라고 할 때의 그 “할랄”입니다. “찬양하다”이지요. 무엇을 찬양합니까? “풍부함”을 찬양합니다. 앞에서 “재물”을 제가 “힘”으로 이해하시라고 말씀드렸는데, 진짜 재물은 요 단어에 나옵니다. “풍부함”은 “많다”와 “부”의 두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그야말로 “많은 부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6절을 직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그는 자기의 힘을(재물을) 믿는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많은 부를 찬양한다.” 여기 다 접미사가 붙어 있습니다. 3인칭으로 붙어 있으니까 제가 “자기의”라고 번역했습니다. 시인이 말하는 대상이 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자기의 힘을 하나님처럼 믿고, 자기의 재물을 찬양하는 사람입니다.
왜 시인은 이들을 짐승 같다고 말하는가?
여러분! 그러면 지금 시인이 그 주제가 되는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이 대상이 되는 사람, 제가 오늘 설교에서는 이 사람들을 “6절의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자 이 6절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자기 힘을 믿는 사람, 그리고 자기의 많은 부를 찬양하는 사람입니다. 마치 자기 힘을 하나님처럼 신봉하고, 자기가 많은 부를 가진 것에 대해서 찬양하고 칭송하는 사람, 이 사람을 향해 시인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한 것입니다.
아마 이런 이야기를 신자인 우리가 아닌, 보통의 불신자들이 들으면 분명히 이렇게 반문할 것입니다. “자기 힘을 믿는 것이 뭐가 잘못이야? 그게 지혜로운 거 아니야? 많은 부를 찬양하는 것이 틀렸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재물 아닌가?”
시인은 마치 이런 질문을 듣기라도 한 듯,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왜 시인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이렇게 자기의 힘과 자기의 재물을 좇아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멸망하는 짐승 같다고 했는지, 그것을 이어지는 7절과 8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 순서를 따라서 시인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봅시다. 이 두 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6절에 이 사람이 나오니까 6절을 제가 읽고, 7절과 8절을 여러분이 읽어봅시다.
6절, “자기의 힘을 믿고, 자기의 많은 부를 찬양하는 자는”
7,8절,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여러분 여기에서 “속전”이라는 단어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에서 “힘”이나 “재물”, 즉 6절의 사람이 믿고 찬양하는 것의 효력을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선택된 단어가 바로 이 “속전”입니다. 왜냐하면 속전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그 죄에 대해 받을 벌로부터 풀어주기 위하여 지불해야만 하는 돈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용어로 하자면 “보석금” 정도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7절은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네가 힘과 재물이 많아도, 그걸로는 한 푼도 보석금을 지불할 수가 없다.”
그렇습니다. 6절의 사람은 자신의 힘과 재물을 의지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궁극적인 문제에 부닥쳤는데 그 힘이나 돈이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감옥에 갇혔거나, 벌을 받거나, 심지어는 곧 사형을 당해야 하는데, 속전을 내려고 해도, 하나님이 받으실 속전은 “힘이나 재물”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들로는 한 푼도 지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저희 생명의 구속은 너무 귀해서 절대 마련이 안 된다.” 바뀐 개역개정은 이 구절을 개역한글보다는 좀 더 쉽게 번역했습니다.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나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그러니까 7절과 8절은 일종의 비웃음 같은 것입니다. 6절에는 이 땅에서 자신의 힘과 재물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정작 생명의 문제, 영원한 삶과 죽음의 문제에 도달했을 때는 자기가 그렇게 힘으로 삼고 자랑하던 이것을 하나도 사용하지 못합니다. 구속의 값은 권력이나 재물로 치를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고,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걸로 한 사람의 구원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속전”, 즉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그따위 돈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12절이 “존귀한 사람이 장구치 못하고, 멸망하는 짐승 같다”고 했는지 아시겠습니까?
살 수 없는 것을 저축하는 이는 어리석습니다. 어떤 아이가 바닷가에 가서 예쁜 돌멩이를 아무리 많이 모았다고 해도, 그것을 트럭 째 갖다 준다 해도 그걸로 짜장면 한 그릇을 사 먹을 수 없습니다. 비교의 가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살 수 없는 재화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아무도 돌을 준다고 물건을 내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구속과 돈의 관계는 마찬가지입니다. 구속은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구속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사람의 결국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귀합니까? 얼마나 값진 것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입니다. 트럭 째 돈을 갖고 와서 쏟아 부어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6절의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것도 모르고 “자기 힘을 하나님 대신 믿고”, “자기의 많은 부를 찬양하면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구속의 일은 중요합니까? 여러분에게 영원한 삶을 위한 준비는 중요합니까? 여러분에게 하나님과 그리스도, 교회와 그분의 나라는 중요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멸망하는 짐승처럼” 살지 말아야 합니다. 힘과 명예, 부와 귀를 숭상하는 어리석은 세상 사람들처럼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7절과 8절을 기억하십시오. 그 교환수단으로는 구원을 한 톨도 살 수 없다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재물은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셨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며 살도록 합시다.
구속은 어디에서 오는가?
결국 죽음
이 구속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13절부터는 둘째 문단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14절을 보면 그들의 이 어리석음을 “죽음”과 연결하여 말합니다. 앞에서는 “구속을 살 수 없다”라고 간접적으로 이야기했다면, 이제는 보다 직접적으로 “죽음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14절을 자세히 보십시오. 14절에는 “목자와 양”이 나옵니다. 이 목자와 양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앞 절인 13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아마 이 말씀들을 보면 6절의 사람은 자신의 태도를 포기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분명히 힘과 재물로는 구원을 살 수 없는데, 그 태도를 버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사실이 13절에 나오고, 그에 대한 역전이 14절에 나옵니다.
13절의 시작이 중요합니다. 히브리어에서 13절은 “이것이 그들의 길이다”라고 시작합니다. 우리 번역으로는 “저희의 이 행위는” 이라고 되어 있지만, 뉘앙스가 약합니다. 정확하게 직역이 더 좋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길이다.” 바로 이것이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들의 이 길은 사실은 우매합니다. 우리는 조금 전에 바로 이 사람들의 이러한 어리석은 숭상이 진정한 속전을 위해서는 아무런 보탬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그 뒷 구절에 보면 “후세 사람이 오히려 저희 말을 칭찬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후세 사람”은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말은 “뒤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문맥 안에서 보자면 뜬금없는 “후세 사람”보다는 “그들을 따르는 이들”, 즉 “지지자”라고 해야 옳습니다. 자 어떻습니까? 그들의 행위, 즉 힘이나 돈으로 구원을 사려는 행위는 우매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따르는 이들이 칭찬을 합니다. 살 수 없는 재화를 탐닉하는데도, 세상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것이 매력 있어 보이니까 그것을 칭찬합니다. 돈과 명예, 그것이 아무런 영적인 것을 구입할 수 없는 재화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는, 그들을 따르는 지지자들이 보기에는, 그것이 아주 매력적으로 보이니까 그것을 지지합니다.
하......정말 이 말씀을 따라 세상을 생각해보면,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란 것이 정말 그런 것 같지 않습니까? 13절의 말씀은 마치 블랙코미디 같은 것입니다. 앞의 사람이 함정에 빠지는데, 따라오는 사람들은 그 사람이 잘 가는 것처럼 보이니까 자기도 환호하면서 같은 함정에 빠집니다. 그렇게 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다 열광하면서 그 함정으로 다 빠져 들어갑니다. 구원을 위하여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것, 궁극의 삶을 위하여 한치도 가치 없는 것들, 그것을 위하여 너나 할 것 없이 열광하면서 살다가, 종국에는 모조리 다 멸망으로 쓸려 들어가는 것! 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동성애 풍조나 여혐이나 남혐 문화를 보면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지지자들은 모릅니다. 환호하면서 같이 망합니다. 정말 단 1분이라도 영원한 삶에 대해 생각한다면 자세가 바뀔 텐데, 어떻게 이렇게 다들 어리석은지 모르겠습니다. 구속은 결코 힘과 재물로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6절의 사람들과 그 지지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환호를 하면서 똥과 같은, 더러운 배설물과 같은 그것들을 서로 추켜세우면서 그렇게 함께 망하는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그야말로 “멸망하는 짐승들” 같습니다.
시인은 이 사실을 14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여기 “목자와 양” 비유가 나옵니다. 양은 이 사람들입니다. 6절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지지자들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양은 목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갑니다. 여기 언급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힘과 재물을 좇아 어리석은 것을 향해 가는 사람들인데, 마치 목자를 좇아가는 양 같습니다. 이들이 다 그 목자를 따라 갔습니다. 환호하고 열광하면서, 마치 그것이 최고의 대답인 양, 그렇게 갔습니다.
그런데 14절을 보십시오. 앞에 가던 목자가 갑자기 몸을 돌려 양들이 있는 쪽으로 얼굴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목자가 누구였다는 것입니까? 14절을 읽어보십시오. 그 목자가 “사망”이었던 것입니다. 소름끼치는 상황입니다. 자기가 쫓아가고 있던 것이 부귀와 영화와 재물과 만족일줄 알았는데, 그렇게 자기를 이끌고 가고 있던 목자가 고개를 휙 돌려서 자기를 쳐다보는데, 그 목자가 영화와 만족이 아니라, 죽음을 향하여 자기를 이끌고 가던 사신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우리 인생의 실제 모습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습니까? 죽는 순간까지도 목자의 얼굴을 모르고 살다가 갑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삶의 목표도 있고, 살아가는 방향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그렇게 꾸역꾸역 평생을 산 결과가 무엇입니까? “영원한 멸망, 영원한 죽음”이지요. 이것이 누구의 결국입니까? 세상을 살아가면서 힘과 재물이 참된 가치인줄 알고 살아가던 세상의 사람들의 결국인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가? 이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인생은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모르고, 내 맘대로 살면서, 죽어 눈을 감기 직전까지 “나는 양심껏 살았고, 세상에서 명망도 있었고, 돈도 벌 만큼 벌었다. 자식들에게도 잘 했고, 건강하고 유복했다. 만족이다.” 이렇게 하고 눈을 감았는데, 죽으면서 무엇을 깨닫겠습니까? 자기를 앞에서 손잡고 끌고 가고 있던 그 인생의 주인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보여주는데, 사신, 즉 영원한 멸망, 죽음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모르는 인생, 힘과 재물이 최고인줄 알고 살아가는 인생의 결국입니다.
구속과 가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래서 이 시에는 “구속”이라는 말이 대조적으로 사용되면서 참 구속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대로 구속의 첫 부분은 7절과 8절에 나옵니다. 여기서 구속은 저희가 힘과 재물을 아무리 좇아도 “구속은 없다”라고 말씀하기 위해서 이 구속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둘째 문단에 보면 이제 그 구속이 다시 나옵니다. 어디에 나옵니까? 15절에 나옵니다. 함께 15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
이 말씀은 첫째 문단의 사람들, 그리고 우리가 방금 살핀 13절과 14절의 사람들과 정반대편에 있는 “나”의 고백입니다. 저들은 힘과 재물을 자신의 믿음으로, 찬양으로 삼고 그렇게 살아왔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결국은 멸망입니다. 그런데 15절을 보십시오. 여기 등장하는 “나”, 즉 시인, 그리고 우리들의 운명은 어떤 것입니까?
“나”는 하나님께서 영접하십니다. 여기 “영접”은 “라카흐”, 즉 “취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창세기 5장에서 에녹에게 사용된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녹을 하늘로 데려가셨습니다. 이와 같은 말입니다. 시편은 많은 경우가 그렇지만 머릿속으로 장면을 상상하면 마치 그림과 같은 것이 그려질 때가 많습니다. 앞의 사람들은 목자의 손을 잡고 룰루랄라 하면서 갔는데 결국에는 그 목자가 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나, 시인은 어떻습니까? 15절은 의도적으로 이들과 대비시키기 위하여 에녹에게 사용했던 단어를 썼습니다. 에녹을 하늘로 취하여 올리신 그 하나님께서 “나”도 취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데려가십니다. 앞의 사망 목자처럼, 이 목자도 우리를 데리고 가십니다. 그런데 사망과는 다른 곳으로 데려가십니다. 어디로 우리를 데려가십니까? “구속”으로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 “구속”이라는 말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앞의 사람들에게 구속은 “도달할 수 없는 곳”, “그들이 가진 것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에게 구속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됩니다. 힘과 재물을 갖고 있는 이들은 결코 도달할 수 없었던 것이 나에게는 옵니다. 나는 그것을 얻고,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멸망하는 짐승이 아닌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땅에 계시면서 의도적으로 “가난”에 대해 많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산상수훈의 팔복 중 처음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임을 알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심령”이 빠지고 그냥 “가난한 자는”으로 되어 있는 곳도 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심령”보다 “가난”이 더 중요한 요소임을 알려줍니다.
왜 주님께서는 “가난”을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요소로 말씀하셨을까요? 성경에 부자인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경계”를 받습니다. 외국의 개혁교회 성도들이 한국교회 성도들을 이해 못하는 부분 중에 하나입니다. 외국의 개혁교회 성도들은 “땅에서 가난하고 검소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가르침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순복음 교회의 영향으로 “땅에서 잘 되는 것이 영적 복의 지표”라고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거짓입니다. 성경에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고 말했지 “부자에게 복이 있다”하신 적은 없습니다. 성경에서 부자는 항상 경고를 받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간단합니다. “가난”이야말로 참으로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열기에 아주 결정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6절의 사람들이 가진 “풍요의 근본”을 봅니다. 이들의 풍요는 땅의 것, 물질적인 것, 세속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풍요의 근본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들의 풍요는 “하나님 없음”에 그 근본을 두고 있습니다. 6절에서 보았듯이 이들이 “믿고”(신앙하고), “찬양”하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힘입니다. 재물입니다. 모두 다 넘어지고 스러질 것이며, 부질 없고 영원하지 않은 것들입니다. 홍수가 나서 모두가 다 떠내려갈 때, 떠내려가고 있는 지푸라기에 내 몸을 매어봤자 그것만큼 부질 없는 짓이 없습니다.
떠내려가지 않으려면 튼튼하고 흔들리지 않는 것에 몸을 매야 합니다. 6절의 사람들이 가진 “풍요의 근본”이 떠내려가는 것이라면, “가난”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부유한 자들은 하나님 없이 스스로가 부유하지만, 가난한 자들은 가난하고 궁색하기 때문에 자기를 믿을 수 없고, 세상을 믿을 수 없고, 아무데도 기댈 데가 없습니다. 가난한 자들의 핵심은 하나님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가난의 핵심은 “아무 데도 기댈 데가 없으니, 하나님 밖에는 의지할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난”의 핵심이요, “속전”의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힘과 재물은 속전에는 아무 쓸 데 없습니다. 하지만 가난만이 유일하게 속전에 도움이 되는 보석금이 됩니다. 가난이 무엇이라구요? 나도 믿을 수 없고, 세상도 믿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 믿는다는 것.......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16절과 1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람이 치부하여 그 집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 말지어다.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심으로 “그리스도가 있으니 부요하다!”는 것을 서로 고백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사가 되어 성도들을 살피면 늘 이중성을 경험합니다. 물질적으로 타격을 입으면 다들 슬퍼하고 어려워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속에서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어 할렐루야!” 하는 사람이 많으면 좋겠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목사로서 성도를 위로할 때에도 이런 말을 하면 상대가 별로 탐탁지 않아 하는 것 같습니다. 거꾸로 세상적인 일들이 잘 될 때는 또 다들 너무 기뻐합니다. 멸망할 것들이 더 잘 되어 본들 믿음이 자라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거꾸로 이런 분들에게 축하를 건넬 때는 목사로서 또 반대로 마음이 착잡합니다. “저렇게 세상적으로 잘 되는 것보다 믿음이 자라는 것이 더 중요한데”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것이 좀 없어지더라도,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믿음과 은혜가 자란다면 진짜 기뻐하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몸이 아파지고, 돈을 좀 잃고, 세상적으로 힘든 일이 좀 생겨도, “저는 이 일 때문에 더욱 하나님과 가까워졌습니다!”라고 하면, 다른 성도들이 “축하합니다! 집을 잃어서 축하합니다! 직장을 잃어서 축하합니다! 세상에서 인정 받지 못해서 축하합니다!” 이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시편 49편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더욱 소망하고, 보이는 것들에 대담해지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주께서 복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