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 忠烈王 때의 儒學者. 우리 나라에 性理學을 최초로 도입한 분. 初名은 裕였으나 珦으로 고쳤고 다시 朝鮮 文宗의 諱字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본래대로 부르게 되었다. 字는 士蘊, 號는 晦軒. 本貫은 順興. 慶北 順興 출신. 安孚의 아들.
18歲 때인 1260年(元宗 1)에 科擧에 及第, 校書郞·監察御史가 되었다. 1290年(忠烈王 16) 高麗 儒學提擧가 되어 王을 扈從, 元나라에 가서 처음으로 「朱子全書」를 보고 儒學을 正統이라 여기게 되어 그 책을 베끼는 한편, 孔子와 朱子의 畵像을 그려 가지고 돌아와 朱子學을 연구하였다.
그가 忠烈王 24年 世子(忠宣王)를 따라 元나라에 가서 性理學을 論辨하니 朱子學說과 符合되는지라 學官들이 놀라면서 東方의 朱子라고까지 극찬하였다. 그 후 文敎振興과 人材養成을 위하여 贍學錢을 설치하였으며, 博士 金文鼎을 中國에 보내 孔子와 72賢의 肖像과 祭器·樂器·經書·諸家書 등을 구해오게 하는 등 高麗 말기 儒學振興에 큰 功績을 남겼다.
그가 전한 朱子學은 당시 元나라의 學風을 이끌어온 許衡의 學風으로 宇宙論적인 理氣보다는 心性修養을 중요시하는 實踐的인 것이었다. 그는 聖人의 道는 日用倫常 속에서의 孝·忠·信·敬·誠이라는 實踐的인 德目이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佛敎는 부모를 버리고 집을 떠나 倫理를 경시하고 義理에서 벗어났다고 배척하고, 朱子는 저술을 통해 佛敎를 배척한 功이 높았으며 孔子의 學問은 바로 朱子의 學問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하였다. 또 朱子의 화상을 벽에 걸어 두었으며, 朱子의 號인 晦庵의 晦字를 따서 스스로 晦軒이라 하였다.
죽은 뒤 1318年(忠肅王 5)에 王이 선생의 功績을 기념하기 위하여 元나라 畫家에게 命하여 초상화를 그렸는데, 이 초상화는 國寶 第111號로 현재 紹修書院에 奉安되어 있으며, 益齋 李齊賢의 초상화와 더불어 高麗의 가장 오래된 그림이기도 하다. 또 朝鮮 中宗 때 周世鵬이 順興 白雲洞에 그의 祠廟를 세우고 紹修書院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 書院의 始初가 되었다. 文廟를 비롯하여 長湍의 臨江書院, 谷城의 晦軒影堂, 順興의 紹修書院 등에 祭享되었다. 諡號는 文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