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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다르크인물별/생애
잔 다르크
관련 문서
1. 개요
2. 어린 시절
3. 위기에 처한 프랑스
4. 나라를 구하다
4.1. 도팽 샤를과의 만남
4.2. 오를레앙 공방전
4.3. 거듭된 승리
4.4. 샤를 7세의 대관식
5. 시련기
5.1. 1차 파리 공방전
5.2. 샤를 7세와의 대립
6. 체포와 탈출 시도
7. 이단 재판
8. 최후
9. 명예회복
1. 개요[편집]
Extra History 채널의 잔 다르크의 생애를 요약한 영상[1]
프랑스의 구국영웅 잔 다르크의 생애이다.
2. 어린 시절[편집]
양치기 시절 잔 다르크를 그린 그림인 양치기 잔
(Joan as Shepherdess, 쥘 외젠 르네프뵈(Jules-Eugène Lenepveu) 작, 1889, 캔버스에 유화). 이미지는 Tijmen Stam가 올렸으며 원본 그림은 19세기 이래 프랑스 팡테옹 벽면에 전시되어 있다.
잔 다르크는 알자스-로렌의 지방에 속한 바르 공국의 동레미(Domrémy)[2]라는 프랑스 동부의 시골 마을에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다르크 가문의 일원이며 양치기인 아버지 자크 다르크와 어머니 이사벨 로메의 5남매 중 막내[3]로 태어났다. 어릴 때는 애칭인 자네트로 불렸다는 얘기가 있다.
아버지 자크 다르크는 1380년생으로, 딸이 화형당한 이후 비통해하다가 2개월 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으며, 실제로는 1431년까지 살았다고 하고 그 해가 잔이 죽은 해이니 소문이 맞을 가능성이 크다. 잔이 계시를 받아 집을 떠나겠다고 할 때에는 자신의 아들한테 "잔을 돌에 묶어놓고 물에 던져야 한다"는 말까지 했지만[4], 랭스의 대관식 때 잔과 재회했을 때는 그런 감정이 다 풀렸던 듯하다. 아무리 아버지라고 해도 감히 구국의 영웅한테 감정대로 화를 낼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어머니 이사벨 로메는 남편보다 어린 1384년생으로, 결혼 전 로마로 성지순례까지 다녀올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고 한다.[5] 교통이 불편하고 위험했던 당시에 일개 농민 여성이 성지순례를 다녀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당시는 중세 시대였고, 교통수단도 발달하지 않았고 도로가 제대로 포장되지도 않았다. 로렌에서 로마까지 지름길로 가려면 알프스 산맥을 넘어야 했고, 아니면 멀리 돌아서 가야 했다. 좋은 길은 통행료가 비쌌다. 도적, 사나운 짐승 등의 위험한 요소들이 도사리는 먼 길을 성지순례할 정도면 분명히 쉽지 않은 일이다.
이사벨 로메는 자녀들에게도 가톨릭 교리와 신앙을 열심히 가르쳤다. 잔이 순교한 이후로는 오를레앙으로 이사를 가서 그 곳에서 살았다. 1458년까지 살아 잔의 가족 중에서는 가장 장수했다. 자신의 딸을 죽인 원수인 잉글랜드군이 프랑스 땅에서 완전히 쫓겨나고[6] 딸이 명예를 회복하는 것까지 보고 죽었다. 잔의 명예회복 재판을 위해 70대의 노구를 이끌고 교황에게 탄원했다고 하며 파리에서 열린 재판에도 참석했다고 하고, 그 모정을 기리기 위해서인지 잔의 고향인 동레미에는 이사벨의 동상도 있다.
잔의 형제로는 자크, 장, 피에르라는 세 오빠와 카트린이라는 언니가 있었다. 자크는 첫째 오빠로, 1402년에 태어나서 1452년까지 살았으며, 둘째 오빠 장은 1404년에 태어나서 1477년까지 살았으며, 언니 카트린은 1405년에 태어나서 1429년까지 살았으며, 셋째 오빠 피에르는 1408년에 태어나서 1467년까지 살았다. 이들의 자손은 적어도 19세기까지는 전해졌다.[7][8]
카트린은 잔보다 7살 언니인데 Greux라는 지역의 시장의 아들 콜린(Colin)과 결혼하고 1429년 당시 첫째 아이를 출산하던 중에 죽은 것 외에는 정보가 없다. 그러므로 잔이 활약할 1429년 즈음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는 것은 확실하다. 피에르는 잔의 4살 오빠인데 여동생 잔을 따라 전장을 누비고 다녔으며, 잔의 마지막 전투에도 동행해서 같이 붙잡혔는데, 잔과 달리 무사히 풀려났다. 사실 잔과 달리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굳이 심문해서 죽여야 할 이유가 없어서 무사히 풀려났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이후 피에르는 잔의 둘째 오빠 장과 함께 1460년대와 1470년대 사이까지 생존했다. 장은 잔과 피에르와 마찬가지로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 왕국의 군인으로서 활동했으며 1477년까지 살았는데 향년 73세로 잔의 어머니[9]와 함께 다르크 일가에서 장수했다. 첫째 오빠 자크는 군인이 되지 않은 대신 카트린 코르비제(Catherine Corviset)[10]와 결혼해서 슬하에 자식이 많았다.
잔의 집안에 대한 묘사는 서로 엇갈린다. 가난한 소작농 집안이라는 인식이 대부분의 학습만화 및 위인전에 나오지만, 실제로는 지방의 부농이며 동레미의 말단 관리[11]였다는 설이 유력하다.[12] 물론 그렇게 부유한 집안은 아니었고, 끼니 걱정을 하지 않는 정도. 집안 생활은 검소했다고 한다.
잔의 부친 자크은 프랑스의 코뮌 세퐁에서 거주하다가 이자벨 로메와의 결혼 이후 동레미에서 정착했으며 마을의 유력자이자 행정, 군사, 근처 마을과 외교 교섭 등 일을 맡은 마을 행정관(dean)이었다.[13] 자크 다르크와 이자벨 로메가 자식들과 같이 살았던 동레미의 집은 동레미에서 유일하게 돌로 지어진 집이며[14], 이자벨의 결혼 지참금이었다 한다.[15] 자크 다르크는 부친 피에르처럼 부유한 농부였는데 동레미에서 50 에이커 (202,350 평방미터)의 토지를 소유했으며 200-300 프랑크를 재산으로 가지고 있었다.[16] 잔의 집안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링크 참조. 잔의 일가에 대한 정보가 정리가 잘 되어 있다.
잔 다르크가 위인전에 나오는 것처럼 시골 출신의 평범한 소작농 출신이 맞다면 대다수의 농부 아이들이 그랬듯이, 잔 역시도 부모의 농사일과 가축 돌보기, 바느질과 요리 등의 집안일을 돕는 평범한 소녀였다. 다만 보통 아이들과 다른 점은,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신앙심이 아주 독실했다는 점. 그리고 대다수의 농부들이 문맹이었고 잔 다르크 또한 문맹이었다. 이 문맹이었다는 점 때문에 이후 잔 다르크의 업적이 하느님의 은총을 입었다는 심증의 근거로 채택되고 있다. 하지만 잔 다르크가 1429년과 1430년 사이 프랑스 주민들에게 편지의 서명을 쓴 정황으로 보았을 때 기본적인 글은 쓸 줄 알았던 것 같다. 그러나 한계가 있어서 서명을 제외한 나머지 글은 휘하 기사 Louis de Contes와 신부 Jean Pasquerel에게 받아 쓰게 했다.
아버지가 양치기였으니 그녀도 양치기 일을 도왔을 가능성이 큰데, 양치기라는 일이 겉보기에는 평화로워 보여도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양은 온순해보이는 외모와 달리 양치기에게 몸통 박치기를 자주 하는 성격이 고약한 동물이다. 또한 양이 먹을 풀이 있는 산과 들에는 양들을 잡아먹으려는 늑대 무리나 한몫 챙기려고 드는 도적들이 언제나 있었다. 따라서 평소에는 수십 마리의 양들을 통제하면서, 늑대나 도적이 나타났을 때는 양들을 지키거나 포위를 뚫고 도주하여 마을에 도움을 요청할 만큼의 싸움 실력과 완력을 요구하는 직업이 양치기였다. 그랬던 만큼, 잔 다르크도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받지 않았어도 또래들보다 싸움을 훨씬 잘했을 것이다. 같은 직업에 종사하던 성서의 영웅 다윗이 전쟁터에서 골리앗을 슬링샷을 이용해 헤드샷 저격 한 방으로 주님 곁으로 보내버린 일화가 괜히 전해지는 게 아니다.
3. 위기에 처한 프랑스[편집]
잔 다르크와 성 미카엘, 성녀 마르가리타, 성녀 카타리나를 그린 그림인 환영과 영감
(The Vision and Inspiration, 루이 모리스 부테 드 몽벨(Louis-Maurice Boutet de Monvel) 작, 1907년과 1909년 사이, 캔버스에 유화).
한편 잔이 살던 당시는 백년전쟁의 막바지로 전황은 프랑스에 대단히 불리했으며[17], 왕이 되어야 할 도팽(왕세자) 샤를은 대관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실제 그가 왕세자라 자칭하기는 했지만, 아버지인 샤를 6세가 그를 호적에서 파버리고 잉글랜드 왕 헨리 5세를 프랑스 공주와 결혼시켜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왕으로 추대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샤를 왕세자는 잔존 아르마냑파와 스코틀랜드의 도움에 힘입어 프랑스 남부에서 여전히 적법한 왕세자로 인정받고 있었고, 북프랑스를 장악한 잉글랜드와 부르고뉴는 이를 토벌코자 하였으나 헨리 5세와 샤를 6세가 같은 해에 사망하고 갓난아기인 헨리 6세가 잉글랜드와 프랑스 왕이 되면서 정국이 어수선해져 본격적인 남하를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전쟁은 장기전, 약탈전 위주로 변하였고 서로 자기 영역권 내에서 기반을 닦는 데에 치중하고 있었다.
한편 전쟁의 여파는 잔 다르크가 살던 동레미 마을에도 들이닥쳐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이 동레미 마을에 쳐들어와 약탈하고 불을 지르는 일들이 발생하였고, 잔 다르크의 가족을 포함한 동레미 주민들은 그런 일이 발생할 때마다 인근 마을 뇌샤토[18]로 피난해야 했다. 그리고 동레미는 샤를 7세의 아르마냑파를 지지하는 마을인데 비해 잉글랜드와 부르고뉴파를 지지하는 마을이 근처에 있어 동레미와 그 인근 마을 청년들이 서로 패싸움을 벌이는 일들도 있었다.
그런 혼란이 지속되던 와중 1425년, 불과 13세의 잔 다르크에게 성 미카엘, 성녀 마르가리타, 성녀 카타리나의 모습과 함께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랑스를 구하라"는 목소리에 처음에는 당황해서 거절했으나 그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고, 1428년, 마침내 16세의 나이에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명할 것을 결심하였다.[19]
현대 역사학의 관점에 따르면, 종교관에서 현대인과 많은 차이가 있었던 중세인에게 있어 기적이나 하느님의 음성 등 초자연적인 개념에 대해서 매우 민감했다. 현대인들에게는 당연한 현상도 이들에겐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20] 그렇기에 중세인들은 수많은 사물과 현상을 종교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했다. 잔 다르크가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했을 때, 샤를의 궁정과 이후 잔이 받은 종교재판은 그것이 하느님의 음성인지 사탄의 음성인지 여부를 검증하려 했을 뿐, 음성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잔의 체험은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잔 생전의 유럽 천지는 하느님의 섭리가 만물을 움직이며 그 권능이 성인들을 움직여 이적을 보여주고 있다고 믿는 세계였다.
또한 잔 다르크의 성녀 이미지 어필이 본인이 지휘권을 잡고 통솔하는데 있어 유리하게 작용했었던 점,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른 실제 잔 다르크의 성격상은 가슴이 이끄는데에 충실한 열혈적인 인간형이 아니라 냉철하고 지성미 있고 박력있는, 머리를 앞세워 행동하는 이성적인 인간형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따라서 잔이 마냥 신앙심에 이끌렸던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점을 철저하게 이용한 것이 아니냐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당시는 민중 신앙이 뜨거울 때라 잔의 신앙심은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고, 잔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신앙을 지켰고, 전쟁 중에도 가톨릭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했고, 신앙심이 깊었기에 시성될 수 있었다. 그리고 문맹의 평민 소녀가 어떻게 제정신으로 자신에게 천재적인 군사적 능력이 있는지 알며 목숨을 걸고 성녀 코스프레를 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
사실 그녀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성녀로, 반대편 사람들에겐 마녀로 보일 수 있는 기록도 있다. 잔 다르크는 머리에 대포 포탄을 직격으로 맞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과 석궁에 목[21]을 제대로 관통당하고 다음날 일어나 성을 함락한 것이 잉글랜드군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진짜로 이렇게 괴물 같은 회복력으로 일어나서 적을 공격했는지 정확한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이런 기록이 있다는 것 자체가 적에게는 마녀, 아군에게는 성녀로 보이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당장 잉글랜드가 잔 다르크를 화형시킬 때 가장 먼저 했던 행보가, '잔 다르크가 평범한 여자에 불과하다'는 걸 선전하려는 것이었다.
4. 나라를 구하다[편집]
4.1. 도팽 샤를과의 만남[편집]
잔 다르크의 도팽 샤를 알현을 그린 그림
(<Jeanne d'Arc>, 루이 모리스 부테 드 몽벨(Louis-Maurice Boutet de Monvel) 작, 1896년, 책 삽화).
결심을 굳힌 잔은 곧바로 보쿨뢰르 지방의 영주 로베르 드 보드리쿠르에게 찾아가서, 시농 성에 머무르고 있는 도팽 샤를을 알현하게 할 것을 요청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거절당했으나, 잔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곳에 머물러 지냈다.
영주는 잔이 마녀라고 의심하였기에 구마 의식을 할 수 있는 사제를 보내 시험해 보았으나, 오히려 잔은 그를 반갑게 맞아들여 고해성사를 하며 그 의심을 풀게 했다. 그리고 계속되는 끈질긴 요청에 장 드 메스와 베르트랑 드 폴뤼니를 비롯한 기사들은 잔의 뜻에 동조했고, 결국 영주는 샤를에게 연락을 취한 다음 잔을 시농으로 보내게 된다. 그곳으로 가려면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이 점령한 지역을 지나가야 했는데, 시농까지의 거리는 무려 435km로,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인 425km보다도 더 먼 것이다. 시작부터 그런 어려운 조건이 있었으나, 아무런 신변의 이상 없이 무사히 도착한다.
그러나 샤를 왕세자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해서 자신의 시종에게 화려한 옷을 입힌 다음 자기의 자리에 가게 하고, 초라한 옷을 입고 구석에 숨어서 잔을 불러냈다. 그런데 변장한 시종을 한번 보고 곧바로 외면한 다음 샤를을 찾아내서 예를 갖추었다고 한다. 그래도 마녀의 속임수라는 주장이 측근들에게서 계속해서 나오자, 다시 푸아티에로 보내서 성직자들의 심문을 받게 했다. 물론 잔은 거짓 없는 언변으로 이 심문에도 통과했다.
4.2. 오를레앙 공방전[편집]
잔 다르크의 오를레앙 해방 장면을 그린 그림인 오를레앙의 갑옷을 입은 잔
(Joan in Armor at Orléans, 쥘 외젠 르네프뵈(Jules-Eugène Lenepveu) 작, 1886년과 1890년 사이, 캔버스에 유화).
결국 잔 다르크에게 신비한 능력이 있다고 판단한 샤를 왕세자는 잔 다르크에게 일군을 주고 질 드 레, 라 이르, 장 돌롱 등의 유능한 기사들을 딸려줬고 마침 잉글랜드에게 포위당한 대도시 오를레앙의 포위를 풀도록 출병시켰다.
1429년 4월 29일 잔 다르크는 뒤노아 백작 장이 이끄는 프랑스 왕국군에 합류했다.당시 오를레앙은 루아르강의 요충지로서 잉글랜드군에게 포위당한 상태였다. 잉글랜드군의 계획은 오를레앙을 함락시킨 뒤 루아르강을 건너 대번에 샤를의 본거지인 부르주까지 내려쳐 긴 전쟁을 끝내고자 했던 것인데, 오를레앙 함락이 오랫동안 지체되어 양쪽이 서로 모두 지쳐있는 상황이었다.
출발 전에 기적 같은 일화가 있었는데, 잔은 "천사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트 카트린 드 피에르부아 성당의 제단을 파보면 검이 있을 겁니다."라고 했는데, 정말로 그 곳에서 검을 찾아내어 자신의 지휘용 검으로 삼았다. 오래되어 녹슬은 검이었지만 한번 닦아내자 새 검처럼 되었다고. 곧바로 오를레앙을 구원하러 간 잔 다르크는, 현지 사령관 장 드 뒤노아의 홀대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사람들을 설득해 군대를 조직하여 싸웠다.
한편 오를레앙에 입성할 때도 기적 같은 일화가 있었다. 잔 다르크가 군사들과 함께 오를레앙 성으로 입성하려면 성 앞을 가로지르는 큰 강을 건너야만 했다. 그러나 바람이 잔의 군사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불거나 또는 바람이 불지 않아,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곤란을 겪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잔 다르크가 기도를 올리자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리하여 어려움 없이 잔의 군사들은 강을 건너 오를레앙에 무사히 입성할 수 있었다.[22]
잔이 오를레앙에 처음 입성하자마자, 그녀는 다른 것을 다 제쳐놓고 대성당에 들어가서 그녀의 창조주인 하느님께 경배를 바쳤다.
자크 레바이
떠도는 말 중에 있는 잔 다르크가 오를레앙 전투엔 참전하지도 않았다는 것은 잘못 알려진 사실이며, 영어와 프랑스어 위키피디아에서 오를레앙 전투 항목이나 잔 다르크 항목 어디를 봐도 잔 다르크가 참전하지 않았다는 소리는 없다. 오히려 전장에서 심각하게 눈에 띄는 순백의 갑옷과 옷을 입고 선두에서 싸웠으며[23], 잉글랜드군을 차례차례로 패퇴시켰다. 그렇게 잉글랜드군은 압도적으로 유리한 전황이었으나 실전도 처음이자 17살 소녀 잔 다르크의 용병술과 용맹에 무너진 셈이라 잉글랜드에게는 잔 다르크라는 이름을 확실히 새기게 되었고 이후에도 승승장구하자 가장 두려운 인물이 되었다.
마침내 1429년 5월 오를레앙을 해방[24]한 잔 다르크는 한때 잉글랜드에 충성 서약을 하고 트루아 조약을 지지해서 프랑스 왕실의 의심을 사던 리슈몽 백작이 이끌던 군대를 만나 그에게서 "네가 성녀라도 두렵지 않고 마녀라면 더 두렵지 않다."라는 말을 들었으나, 결국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4.3. 거듭된 승리[편집]
잔 다르크가 이끈 프랑스군의 진격로[25]
1429년 6월 26일부터 7월 17일까지 오를레앙 공성전 이후 잔 다르크가 이끈 프랑스 왕국 원정군은 거듭된 승리를 거뒀다.[26]
오를레앙에서 승리한 후 파테 전투에서 숫적 열세에도 적장 탈보트[27]를 포로로 잡으며 잉글랜드군을 무찔렀고, 루아르 전역[28]을 이끌며 루아르 강변에 주둔하던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을 연달아 격퇴했고, 여러 교량[29]을 확보하였다. 승리를 거둔 후 잔 다르크의 원정군은 포로로 잡은 잉글랜드군 중에서 몸값을 지불하지 못한 포로들은 전부 몰살시켰다는데 자세한 내용은 의문점 참조.
4.4. 샤를 7세의 대관식[편집]
샤를 7세의 국왕 즉위 장면을 그린 그림인 랭스의 잔
(Joan in Rheims, 쥘 외젠 르네프뵈(Jules-Eugène Lenepveu) 작, 1889, 캔버스에 유화).
이미지는 Tijmen Stam가 올렸으며 원본 그림은 19세기 이래 프랑스 팡테옹 벽면에 전시되어 있다.
프랑스군의 진격로에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곳은 트루아 조약이 체결되었고 잉글랜드 왕실을 지지하는 트루아[30]였는데, 잔이 편지를 보내 평화적으로 일을 해결하기를 권유했음에도 트루아 시민들은 잔과 샤를의 입성을 거부하고 성문을 닫고 리샤르 신부를 잔에게 보낸다. 리샤르가 마녀를 퇴치한다면서 잔에게 성수(聖水)를 뿌렸지만, 잔은 화내거나 겁에 질리지도 않고 경건하게 리샤르를 만났다. 이후 성문을 계속 열지 않아 잔이 할 수 없이 공격 개시를 알리자 트루아 시민들은 알아서 성문을 열고 잔과 샤를을 맞아들였다.
트루아 입성 이후 랭스[31]까지 진격한 잔 다르크는 샤를이 대관식을 거행할 수 있게 해 주어[32] 그를 프랑스의 왕 샤를 7세로 만들었다. 샤를 7세는 잔의 공로를 인정하여 소원대로 고향 마을 동레미에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이리하여 프랑스 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되기 전까지 동레미는 조세 면제구역이 되었다.
5. 시련기[편집]
5.1. 1차 파리 공방전[편집]
파리 공성전 당시 잔 다르크
(Jeanne d'Arc, at the siege of Paris, 앙리 엠마뉘엘 펠릭스 필리포토(Henri Emmanuel Felix Philippoteaux) 작, 1858, 판화)
하지만 영광은 거기까지였다. 점점 더 강해지면 질투를 받는 법. 이후 잔 다르크와 잔의 수행자들은 프랑스 전역을 돌며 소(小) 영주나 국민들이 새로운 프랑스 왕 샤를 7세에게 돌아올 것을 호소했고 그것은 그런대로 먹혔으나 이는 왕실에게 양날의 칼로서 다가왔기 때문이다. 즉, 잔 다르크의 성녀 타이틀을 보고 프랑스 왕실을 지지한 사람들인 만큼 잔 다르크의 말 한 마디에 프랑스 왕실을 흔드는 내부의 적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령 자크리의 난처럼 농민반란이 일어날 경우 농민 출신인 잔이 그들에 동조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고, 게다가 왕실로부터 의심받는 리슈몽 백작을 잔이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도 샤를 7세파에겐 눈엣가시 같은 일이었다. 게다가 잔 다르크가 이전에 보드리쿠르에게 "프랑스 왕국은 왕세자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며, 주님께서 왕에게 맡기신 것에 불과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해석 방식에 따라 샤를과 그 측근들에게 있어서는 대놓고 표현은 못하더라도 내심 불편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33]
이즈음 샤를 7세파의 주교 등이 잔 다르크가 갑옷 위에 입은 금실로 짠 옷과 말 안장 밑을 장식한 비단으로 만든 천 등을 가지고 사치[34][35][36]를 문제삼기도 하는 등, 서서히 잔 다르크와 프랑스 왕실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한다.
게다가 잔 다르크는 오를레앙 전투 및 곧바로 이어진 랭스의 진격처럼 공격적인 전략과 신속한 공세를 취했는데, 이는 대관식 이후 비용이 많이 드는 전투를 통한 승리보다는 협상과 조약 등으로 이득을 취하려 하는 왕실과 상반되는 입장이었다. 물론 잔 역시 협상을 시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먼저 부르고뉴에 협력을 요청했지만 무시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샤를 7세는 "몇 주만 기다리면 파리를 바치고 항복하겠다"는 부르고뉴의 제안에 낚이는 삽질을 하고 만다. 그래서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의 원군이 파리에 들어오도록 시간을 벌게 해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걸 알아차린 잔 다르크는 샤를 7세를 설득하여 생드니 등 파리 주변 지역을 탈환한 다음, 1429년 9월 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37]에 마침내 파리의 생 토노레 성문까지 접근했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을 물리치며 성문을 열고 맞아주리라는 잔의 기대와는 달리, 파리 시민들은 잔을 여자의 모습을 한 괴물, 마녀, 창녀, 탕녀[38]로 욕하면서 입성을 거부하며 오히려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과 합류하고 말았다. 결국 전투가 벌어지고 잔 다르크는 허벅지에 화살을 맞으면서도 지휘를 멈추지 않았지만, 공성전이 조금씩 장기화될 듯하자 불과 이틀만에 냉랭해진 왕실의 지원 부족으로 퇴각하였다.
물론 샤를 7세가 영지를 저당잡힐 정도로 프랑스 왕실의 재정난은 당시 상당한 수준이기는 했지만 파리 함락이 성공할 경우 잔의 영향력이 더욱 커질 경우를 두려워해서 일부러 이른 날짜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부르고뉴인이 쓴 연대기 <파리의 부르주아의 저널>에 따르면, 파리 시민들은 당시 잔 다르크가 군대를 끌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성당으로 가 기도를 올리거나 집에 들어가 문을 닫고 숨거나 무기를 나르는 등 잔 다르크와 맞설 준비를 했다고 한다. 잔 다르크도 이러한 파리 시민의 반응에 열받아서 "저녁 때까지 항복하지 않으면 힘으로 들어가서 인정사정 안 보고 모조리 다 죽인다."고 윽박질렀다고 하는데, 당시 부르고뉴파가 잔 다르크에 대해 적대감을 가져서 과장하거나 왜곡해서 썼을 수도 있고, 설령 파리를 함락시켰다고 해도 그 전이나 그 후의 일을 생각하면 학살이나 약탈을 저질렀을 가능성은 낮아보인다. 이 연대기는 잔 다르크의 화형 모습도 묘사했는데, 딱히 적대감을 드러낸 건 아니지만 다른 증언들과 달리 잔 다르크의 화형대 위에서 십자가를 찾는 등 경건한 모습은 의도적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생략했기 때문에, 명예회복 재판 당시의 기록과 증언처럼 교차검증하거나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잔 다르크의 업적이 그리 큰 영향력을 지속하지 못했으며 잔을 이단자로 몰아넣은 재판이 합법적이었고 공정하다고 얘기하는 등 부정적인 인식을 표현하는 영국의 역사가 줄리엣 바커조차도 자기 저서에 화형 당시 모습에 대해선 십자가를 손에 쥐고[39] 예수의 이름을 외쳤다는 표현을 썼으므로 화형 당시에 십자가를 쥐고 예수의 이름을 외친 일화 자체는 사실인 듯하다.
5.2. 샤를 7세와의 대립[편집]
잔 다르크와 샤를 7세
(<Jeanne d'Arc>, 루이 모리스 부테 드 몽벨(Louis-Maurice Boutet de Monvel) 작, 1896년, 책 삽화).
이후 잔 다르크를 반대하는 국왕 측근 조르주 라 트레무유의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라샤리테 전투에 나섰다가 물자 지원을 못 받으며 또 실패, 생피에르르무티에를 탈환하고 부르고뉴의 기사 강도들을 토벌하는 일 외에는 이렇다 할 승전을 올리지 못하면서 프랑스 왕실에서는 잔 다르크의 성녀 역할에 대해 서서히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 듯 보인다. 결국 샤를 7세는 잉글랜드, 부르고뉴와 휴전을 하면서 잔의 뜻에 반대함을 대놓고 드러냈다. 일단 겉으로는 공로를 치하하며 잔과 가족들에게 귀족의 칭호를 주긴 했지만 그리 큰 봉토나 병사를 거느릴 권한도 없는 사실상 명예직에 가까운 자리를 주었다.
서울대학교 주경철 교수는 잔과 그 가족들에 문장과 귀족위를 내려준 것을 '이거 받고 알아서 좀 빠져라'고 눈치를 줬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정치에는 철저히 무지하고 순진했던 잔은, 이 행동이 가진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샤를 7세는 이전부터 잔 다르크를 껄끄러워 하고 있었다. 중세에는 잔 다르크처럼 자신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주장한 것 자체가 왕권을 위협하는 요소였다. 이 무렵 서양에서 왕이 되려면 형식적이나마 교회의 승인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오직 교회에서만이 왕을 대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홀연히 나타난 잔 다르크가 앞으로의 왕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선택한 것이다. 이는 교회의 권리를 침해했다는 논란이 일기에 충분했다. 샤를 7세는 잔 다르크가 진짜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는지 확신할 수 없는데 마지못해 선택한 상황에서, 섣불리 교회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파리를 비롯하여 잉글랜드와 부르고뉴가 점령한 지역을 공격해야 한다는 잔 다르크와 달리 샤를 7세는 전쟁을 계속할 의지가 없었다. 되도록이면 전쟁을 하지 않고 협상을 통해서 마무리 짓고자 하였다. 외교는 힘의 논리로 통한다는 것을 샤를 7세는 몰랐던 것이다. 그는 조용히 끝내고 싶었다. 한편으로 전쟁으로 잔 다르크의 명성이 계속 올라간다면 역으로 자신의 왕권이 추락할 것을 염려했을지도 모른다.
샤를 7세와 대립할 당시 잔 다르크의 원정군은 프랑스 민간인 및 잉글랜드군 포로를 처우했는데, 자세한 내용은 의문점 참조.
6. 체포와 탈출 시도[편집]
포로로 잡힌 잔 다르크
(Capture of Joan of Arc, 아돌프 알렉산더 딜렌스(Adolf Alexander Dillens 작, 1850, 캔버스에 유화).
원본 그림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1430년 5월 23일 휴전한 사이에 다시 힘을 키운 선량공 필리프[40]휘하의 부르고뉴파 군대가 콩피에뉴에 침입하자 잔 다르크는 왕실의 무관심 속에 대략 200명에서 400명으로 추정되는 자기 휘하의 소수의 병력만을 이끌고 급파, 부르고뉴군을 기습했다.(콩피에뉴 공방전)
초반에는 이들을 물리쳤지만 증원군 6천 명이 나타난 뒤 상황이 역전되어 성으로 후퇴하면서 후방을 방어해야만 했다. 잔은 자신이 먼저 성문으로 들어가는 대신에 자신의 병사들을 최대한 먼저 성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하지만 잔이 들어오기 전에 성문과 연결된 다리가 끌어올려져 고립되었고[41], 리니 백작 소속의 병사가 쏜 화살에 맞은 뒤 옷을 잡혀 낙마당하면서 포로로 잡힌다. 훗날 지원군이 뒤늦게나마 오면서 콩피에뉴의 방어에는 결과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잔 다르크 본인에겐 치명적인 상황을 맞은 것이다.
리니 백작은 포로로 잡은 잔이 탈출을 시도하자[42] 더 굳게 가두는 한편 자기 집안의 여자들과 같이 식사하게 해주는 등 정중히 대접도 했다. 이때 잔 다르크와 가까이 지내던 리니 백작의 이모 '잔'[43]은 잔 다르크에게 친절했는데 조카에게 "잔 다르크를 잉글랜드에 넘기지 마라. 이 말을 듣지 않으면 영지를 상속하지 않겠다."고 경고 섞인 설득을 했으나 불행히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 해 9월에 사망했다.
한편 리니 백작은 샤를 7세에게 전형적인 중세 유럽식 포로 처리법대로 "몸값을 내고 잔 다르크를 데려가라"고 제의했지만, 왕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샤를 7세에게서 잔의 정치적인 용도는 이미 다 사라져 버린 후였던 것이다. 심지어는 체포당하는 과정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왕의 측근들이 콩피에뉴 전투 당시 체포되도록 배신 혹은 방관했다는 말도 있다. 결국 기다리다 지친 리니 백작은 1만 리브르 트르누아(Livre tournois)[44]의 거액을 받고 잉글랜드 측에 잔 다르크를 넘겨버린다.[45]
7. 이단 재판[편집]
잔 다르크와 이단 재판
(<Jeanne d'Arc>, 루이 모리스 부테 드 몽벨(Louis-Maurice Boutet de Monvel) 작, 1896년, 책 삽화).
파리로 호송된 잔 다르크는 당시 잉글랜드파 및 부르고뉴파에 소속되어 있던 파리의 이단심문관들에게 넘겨져 이단 재판을 받았다. 흔히 잔 다르크가 마녀재판을 받았다고 하나, 실제로는 이단재판이었다. 이 재판을 위하여 피에르 코숑 주교가 이끄는 무려 70여 명의 이단심문단이 만들어졌으나 잔 다르크의 혐의를 입증하거나 자백을 받아내는데 실패했다. 주교 이하 신학 전문가 70명이 달려들었지만, 말 그대로 일자무식인 시골 소녀 한 사람에게 말빨로 발린 셈이다. 1대 70이라는 수적인 열세, 재판 성립부터 과정까지 당시 기준으로도 말도 안 되게 잔 다르크에게 불공평했던 상황이었던 것은 물론, 건강까지 악화된 상태인 등 모든 면에서 잔에게 극도로 불리한 조건이었음에도 말이다.
잔 다르크에 대한 이 재판의 특이한 부분은 바로 첫 번째 재판은 공개재판으로 했지만, 그 공개 재판에서 얼마나 심하게 잔 다르크에게 발렸는지 다음 재판부터는 비공개 재판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재판 과정의 자세한 기록들이 오늘날까지 남아있으며, 논리정연하고 침착한 대응으로 인해서, 해당 내용에 의거해서 잔 다르크가 정신병을 가지지 않았다는 유력한 증거로서 사용되고 있다.
잔 다르크는 "검과 깃발 중에 어느 것이 더 좋냐"는 질문에 사람을 죽이는 것을 피하고 싶어서 깃발을 들었으며, "한 번도 사람을 직접 죽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있느냐"는 질문에는 "만약 제가 은총 상태에 있지 않다면 하느님께서 제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만약 제가 은총 상태에 있다면 하느님께서 제게 계속해서 은총을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했다. 은총을 받았다면 함부로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다고 몰고 갔을 것이고 반대로 은총이 없다고 말하면 저주에 들렸다고 몰아갈 의도로 파놓은 함정이었지만, 도리어 종교재판관을 당황하게 만든 것이다.
또 "미카엘 대천사에게 털이 있냐", "천사가 옷을 입었냐" 등등 천사의 외형에 관한 질문도 함부로 외형을 논하면 이단으로 몰릴 만한 질문이나, 오히려 상대에게 외형에 대해 역으로 논하게 만드는 답변을 했다. 글을 전혀 모르는[46], 즉 수사학에 대한 지식을 구하기 매우 힘든 상태인 어린 소녀가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었던 사제들의 악의적인 추궁을 물리친 건데, 현대적으로 비유하자면 무학의 미성년자가 변호사 한 명 없이 혈혈단신으로 당대 최고의 재판관과 검사를 상대로 재판을 대등하게 벌이는 정도이다.
그 일부를 직접 살펴보자. 다음은 실제로 코숑 주교를 비롯한 재판관들이 던졌던 질문과 그에 대한 잔 다르크의 답변을 간추려서 재구성한 것이다.
문. 주님의 기도를 이 자리에서 외워, 그대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임을 증명하라.[47]
답. 주교님께서 저의 주님의 기도 암송을 들을 만큼 독실한 신자임을 신앙고백하여 먼저 입증하세요.
문. 다른 성직자들을 불러서 암송하게 하겠다.
답. 저에게 질문하신 주교님께서 직접 하셔야 합니다.
문. 넘어가겠다.
문. 법정에서 항상 진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하는가?
답. 저는 언제나 진실을 이야기할 것이지만, 필요하지 않은 부분에는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문. 천사의 목소리를 얼마나 자주 듣는가?
답. 제가 필요한 때에 못 들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문. 그대가 목격했다는 천사들이 옷을 입고 있던가?
답. 주님께서 천사들에게 옷을 입힐 능력이 없다고 믿으시는 건가요?
문. 성 미카엘의 몸엔 털이 나 있던가?
답. 그럼 밀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문. 성녀 마르가리타는 프랑스어로 말을 하던가?
답. 성인들이 잉글랜드의 편에 서 있지 않은데 왜 영어로 말을 하겠습니까?
문. 그분께서 잉글랜드를 미워하신다는 말인가?[48]
답. 저로서는 하느님께서 잉글랜드인을 미워하는지 사랑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분께서 잉글랜드인들을 프랑스에서 쫓아내시리란 것만은 압니다.
문. 천사들 앞에서 순결을 맹세했던데, 만약 그대가 결혼하면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될 거라 보는가?
답. 그것은 지금으로선 저도 알 수 없으나, 저는 우리 주님을 믿습니다.
문. 천사들이 그대가 심판받을 것이라고 미리 위험을 경고해주진 않던가?
답. 제가 무슨 위험에 처해 있나요? 천사들의 목소리는 재판하는 동안 제가 자유로울 것이라 말했습니다. 저의 것이 될 천국을 위해, 저의 순교에 대해 불평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문. 지금이라도 도망칠 생각은 없는가?
답. 문이 열려 있으면 나가야지요. 그것은 주님께서 허락하셨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문. 왜 남자의 옷을 입고 다니는 금기를 저질렀는가?
답. 옷보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일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49]
문. 왜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한낱 소녀인 그대에게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냈다고 생각하는가?
답. 그 한낱 소녀를 쓰는 것이 그분의 기쁨입니다.
문. 어떤 상황이건 그대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가?[50]
답. 그분의 은총을 받지 못했다면 제게 내려주시기를, 은총을 받고 있다면 그분께서 계속해 주시기를. 그분의 은총하에 없다는 것을 제가 알았다면, 저는 세상의 가장 슬픈 존재입니다.
문. 피고가 행한 일에 대해 교회가 내리는 결정에 승복하며 순명하겠는가?
답. 저를 보내신 주님과 동정녀 성모 마리아와 천국의 모든 성인의 뜻에 순명하겠습니다. 저는 교회를 사랑하지만, 당신들은 저를 심판할 권리가 없습니다. 제 말과 행동은 모두 주님과 그분의 천사들에게만 호소할 뿐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저를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문. 교회의 결정에 불복하겠다는 말인가?
답. 여러분, 제가 보기엔 주님과 교회의 뜻은 하나입니다. 따라서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 문제를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은 바로 당신들입니다.
결국 이렇다 할 혐의를 입증해내지 못한 코숑 주교는 마지막으로 잔 다르크에게 남장 혐의를 추궁했다. 죄라고 절대 할 수 없는 전혀 말도 안 되는 이유지만, 괴상하게도 당시에는 여성이 남장을 하거나 남성이 여장을 하는 일은 동성애 예비음모로 보아 성경에 위배되는 종교적 범죄였다.[51] 이에 잔 다르크는 "순결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잔의 재판 이전에 순결을 지키기 위해 남장을 한 여성이 무죄 판결을 받은 사례가 이미 있었으므로, 잔의 주장은 정상적인 재판이라면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그러나 재판 자체가 교회법적으로 문제가 많았다. 대표적인 것만 예를 들자면 먼저 종교재판의 판사 노릇을 하려면 일종의 자격증 같은 것이 필요했다. 하지만 코숑은 그런 게 없었다.[52]
또한 잔 다르크에게 불리한 증거나 증언이 나오지 않았다면 재판을 열 수가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는 "일단 재판부터 열고 보라"는 지령을 내려보냈고, 잉글랜드 측은 70명에 달하는 법률 고문들의 도움을 받으며 재판에 임했지만 잔 다르크 측에 유리한 증인이 1명도 없었다. 잔은 이것을 알아차리고 이의를 제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이 또한 교회법을 어기는 일이었음은 당연.
불리한 상황에 처해진 잔은 교황청에 항소를 신청했지만[53] 재판정에서는 이를 저지했다. 게다가 재판에서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잔의 고향 동레미의 조사관으로 보낸 니콜라 바이이는 잔에 대한 나쁜 소문이나 증거를 전혀 얻지 못했다. 결국 코숑은 바이이가 빈손으로 돌아오자[54] 그에게 화를 내고 욕을 퍼부으며 여행 경비[55]를 주지 않았다.
이윽고 코숑 측은 잔 다르크를 도와주려는 사람들에게까지 위협을 가하기 시작했다. 푸아티에의 종교심문에서 잔에게 문제가 없다는 걸 환기시킨 성직자 니콜라 드 우프빌은 감옥에 갇혔다가 영향력 있는 친구의 보증으로 겨우 풀려났다. 재판 자체의 정당성에 이의를 제기한 장 로이에라는 성직자는 살해 위협을 당했고, 결국 로이에라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로마로 도망치고 만다. 또한 잔의 고향 출신으로 꾸며낸 사람을 독방에 갇힌 잔에게 보내어 위로하고 대화하는 척하며, 엿보기 구멍을 통해 잔에게서 이단으로 보일 수 있는 말이나 행동을 얻어내려는 수작까지 부렸다.
그나마 이상베르 드 라 피에르와 마르탱 라드브뉘라는 사람들은 잔을 이단자라고 여기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녀의 목숨만은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감옥에 여러 번 찾아와 회개하라며 잔을 설득하려고 했다. 하지만 코숑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두 사람에게 해명을 요구하며 닦달했고, 심지어 워릭 백작은 드 라 피에르에게 "센 강에다 던져버리겠다"고 말했다. 즉 "잔을 조금이라도 도우려는 의도가 보이면 죽여버리겠다"는 뜻이다.
다만 이들이 잔 다르크를 처음부터 죽이려고 재판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 잔 다르크의 재판은 처음엔 공개재판을 통해서 그녀에게 엄청난 망신을 주고, 그 권위를 깎아내림으로서 잔을 농락해 무력화시키는 것에 중점을 뒀다. 아무리 중세 시대라고 해도 일반적으로 잔 다르크에게 내려진 범죄 혐의만으로는 사형을 언도할 수 없었다. 특히 샤를 7세가 잔 다르크에게 무관심했던 이유 중 하나도 "잔 다르크를 별 것 아닌 일로 사형시킬 순 없다"라고 여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잔 다르크의 사형 소식에 프랑스 전체가 충격에 빠졌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잔의 죄목은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에 잉글랜드도 이 재판의 부조리함을 모르지는 않았다.
문제는 첫번째 공개재판에서 오히려 잉글랜드 측이 개박살나서 이후 모든 재판이 비공개 재판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당시 기록된 재판 내용을 토대로 보면 잔 다르크가 굉장히 논리 정연하고 좋은 대응을 했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죽일 생각이 없이 모욕하고 권위를 떨어뜨릴 생각이었지만, 재판이 진행되어감에 따라서 잉글랜드에 협력하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라는 극단적인 선택지만 남게 되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당연히 잉글랜드 및 부르고뉴파의 시각에서 진행된 재판이 공정하기는 힘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당파도, 잔 다르크의 요청으로 당시 재판관이 프랑스 왕실에 잔이 바라는 증거물들을 제출하라고 요청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잔 다르크를 구할 만한 문헌 기록 및 증거자료들을 전혀 제출하지 않았다. 또한, 당시 프랑스는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이미 잉글랜드군 총사령관인 탈보트를 포로로 붙잡은 상태였다. 당시 잉글랜드군 측은 탈보트와 잔 다르크를 교환할 의사도 있었지만 당시 관례였던 포로 교환 제의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몇 년 후 잔 다르크의 부하이기도 했던 프랑스 장군 장 포통 드 생트라유가 붙잡히자 바로 포로 교환을 제의해 성사시켰다.[56] 이걸 봐도 사실상 샤를 7세는 잔을 구해줄 생각 자체가 없었고 아무것도 안 한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오를레앙 시민들이 자신들을 구한 잔 다르크를 구해내기 위한 몸값을 자발적으로 모금하자 그걸 몰수해버렸다.[57] 다만 잉글랜드가 잔 다르크를 1만 리브르 트르누아나 혹은 1만 파운드라는 거금을 들여서 데려온 포로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프랑스에 억류되어 있는 잉글랜드인 포로 중 1만 리브르 트르누아나 1만 파운드의 가치가 있는 포로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잉글랜드 지배하의 노르망디에서도 잔 다르크를 손에 넣기 위해 특별세를 도입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 어머니 이자보 드 바비에르 대비는 한술 더 떠 잉글랜드에 잔 다르크를 죽일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다만 이자보 대비는 트루아 조약 이후 부르고뉴파를 지지하였기에 아들 샤를 7세와 관계가 좋지 못해 적대적 수준으로 거리를 두고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역사가 줄리엣 바커는 잔 다르크의 재판은 공정하고 합법적이었으며 잔은 이단의 혐의를 결코 피할 수 없었고 잔의 편을 드는 사람도 많았다고 주장하지만, 이 사람이 잉글랜드 사람이고 자신의 저서에서 아쟁쿠르 전투 등 잉글랜드의 승리를 강하게 묘사하고 잔 다르크가 나오는 책 제목도 "정복(Conquest)"으로 다분히 잉글랜드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위에 있는 언급처럼 그 당시에 내부에서조차도 공정하지 않다고 비판이 있었던 재판이었고, 영국인 변호사 브라이언 해리스도 자신의 저서 인저스티스에서 잔 다르크의 재판을 두고 사법살인이라고 비판했다. 이후 프랑스 왕당파 학자들은 이 재판을 맹렬히 비난했다.
재판을 받을 때 잔은 "7년 안에 오를레앙에서의 패배보다 더 큰 재앙이 잉글랜드에 닥친다"고 경고 혹은 예언을 했는데, 단순히 전투에서의 참패는 아니었지만 정말로 잔의 죽음 몇년 안에 잉글랜드 왕의 섭정 베드퍼드 공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급사하고, 아라스 조약에 의해 부르고뉴파가 프랑스 왕실에 협력하면서 파리까지 잃게 된다.
감옥에서 심문을 받는 잔 다르크를 그린 그림인 감옥에서 윈체스터의 추기경에게 심문을 받는 잔 다르크
(Joan of Arc is interrogated by The Cardinal of Winchester in her prison, 폴 들라로슈(Paul Delaroche) 작, 1824, 캔버스에 유화). 원본 그림은 19세기 이래 프랑스 미술관 Musée des Beaux-Arts de Rouen에 전시되어 있다.
잔은 고문과 화형 위협을 포함한 협박을 받아 교회의 처분을 따르겠다는 문서에 서명했다. 잔 다르크도 재판이 진행될수록 점점 총명함이 사라지고 증언이 오락가락하고 빌미를 잡힐 만한 말이 나오는 등 약간 실수를 범하기도 했는데, 나이 어린 소녀를 험악한 감옥에 가두고선 심심할 때마다 재판에 관련된 사람들이 인신공격과 고문 위협을 비롯한 협박 등으로 정신적 고통을 지속적으로 주니까 정신이 멀쩡할 리가 없다.
잔은 문맹이었으므로 자신이 어떤 문서에 서명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 때 잔이 살짝 웃었다고 하는데, 도대체 무슨 의미였는지 알 수 없다. 일단은 살아났다는 기쁨일 수도 있겠지만, 문서의 내용을 짐작하고 자신의 신념을 포기했다는 허탈함과 멘탈붕괴로 쓴 웃음을 지었을 가능성도 있다.
"서명하면 수녀원[58]에 감금한다"는 약속과 달리, 여전히 군사 감옥에 가둬놨고, 여자 옷을 입게 하고선 병사들을 보내 위협을 가했다. 이 상황에서 순결을 지키지 못하면 악마와 관계를 맺은 마녀로 몰 것이 뻔했다. 결국 자신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잔은 남자 옷을 다시 입을 수밖에 없었고, 그걸 빌미로 재판정은 이단 판결을 내린다.
가혹한 감옥 생활로 병에 걸린 잔은 화형 선고가 아니더라도, 감옥에 계속 갇혀 있으면 병으로 목숨을 잃을 확률이 높았다. 설령 종교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어도 잉글랜드에게는 군사재판이나 정치재판을 통해 포로나 반역자라는 죄목으로 처형하는 방법, 또는 독살이나 암살 등의 방법도 충분히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잉글랜드 측이 잔을 이단자이며 마녀로 몰아 종교재판을 고집한 이유는, 잔이 감옥에서 자연사하거나 다른 죄목으로 처형당하거나 암살당하면 프랑스 측에게 오히려 영웅의 이미지로 민중들에게 보일 수도 있고, 샤를 7세의 위신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단자나 마녀로 몰아서 죽이면 샤를 7세의 위신 실추가 제대로 될 것이고, 다른 처형 방법에 비해서 민중들의 반발심이 상대적으로 적었음을 계산한 일. 물론 결과적으로 이 계산은 소용없게 되었다. 오히려 역효과만 제대로 불렀을 뿐이다.
만약 잔 다르크가 화형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확실하게 인정한 수감자로 계속 남았으면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더니 목숨을 위협받자 바로 포기하고 죄를 인정한 어리석은 소녀"라고 조롱거리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잔 다르크가 화형에 처해질 때 오히려 경건한 태도를 보이는 바람에 기존에 잉글랜드에 반대하던 프랑스인들의 반잉글랜드 감정만 제대로 불러일으키고 잉글랜드는 어린 소녀를 석연찮은 재판으로 잔인하게 죽였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8. 최후[편집]
잔 다르크의 화형 장면을 그린 그림인 루앙의 화형대에서의 잔 다르크
(Joan at the Stake in Rouen, 쥘 외젠 르네프뵈(Jules-Eugène Lenepveu) 작, 1889, 캔버스에 유화).
이로써 잔 다르크는 화형을 선고받아 1431년 5월 30일, 루앙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잔은 마지막 소원대로 화형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루앙 시민들과 잉글랜드 병사들 몇몇으로부터 십자가를 받았고, "나를 화형대로 몰아넣은 사람들을 용서한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경건한 태도로 죽음을 받아들였다. 수백 년 후 잔다르크가 시성되면서 루앙의 화형장 터에는 잔에게 봉헌된 성당이 지어졌으며, 특히 화형이 집행된 바로 그 지점에는 대형 십자가가 세워졌다.
그런 잔 다르크의 화형식을 본 군중들과 잉글랜드 병사들, 재판관들 대다수, 심지어 헨리 6세의 비서까지 눈물을 흘렸고 "성녀를 죽였다"라며 탄식했다고 전해진다. 잔 다르크를 화형시키기 전부터 수많은 이들의 처형을 집행한 베테랑 사형 집행인인 조프리는 훗날 잔 다르크의 명예회복 재판에서 "잔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증언했다.
결국 잔 다르크는 불길의 열기와 연기에 질식해 사망한다. 그러자 잉글랜드 측은 일단 불을 끄고 죽은 19살 소녀의 옷을 전부 발가벗긴 채, 잔의 알몸을 구경하러 모인 군중들에게 그녀의 시신을 전시하며 잔을 모욕했다. 이는 잔 다르크가 성녀도 마녀도 아닌 평범한 여성이라고 부각하려는 술수였다.
잔 다르크가 죽는 순간 비둘기가 몸 속에서 나타나 날아갔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성해(聖骸)를 가져가지 못하도록 잔 다르크의 몸이 3번씩이나 태워졌고 그 재는 세느 강에 흘려보내졌다는 것 뿐이다. 19세기 무렵에 잔 다르크의 화형 장소에서 잔의 유해로 추정되는 갈비뼈가 발견되었다며 보관했으나, 2006년 조사 결과 고대 이집트 미라의 것으로 밝혀졌다. 아마도 프랑스 국민, 신자들의 자작극이나 착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잔 다르크의 죽음 이후 루앙 시민들은 재판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수군댔다고 한다. 루앙이 친잉글랜드파 도시였음에도 잔 다르크를 지지하거나 동정하던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잉글랜드 정부가 당시 재판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잔의 재판과 화형 때문에 책임질 일이 없으리라고 보증서를 발급해줬는데, 이게 잔의 재판에 대해 당시에도 비판적인 말이 많았고 민간 여론도 그리 좋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실제로 피에르 보스키에라는 수도자는 잔의 화형 당일 "악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했다가 처벌 받기도 했다.
당시 재판을 주도한 파리대학교가 잔 다르크를 화형한 후 교황과 교황청에 보낸 서한(국역본). 마치 잔 다르크를 배려하면서 공정하게 재판을 하고 자신들은 원래 잔 다르크를 살리고 싶어했는데 잔 다르크가 이단이 재발한 탓에 할 수 없이 화형을 판결하고 집행해서 괴로워한 것인 양 교황과 교황청에 사기를 치고 있다.
9. 명예회복[편집]
잔 다르크의 고향인 동레미라퓌셀에 세워진 잔의 어머니 이사벨 로메의 동상.
샤를 7세는 25년이나 지나서야 잔 다르크의 명예 복권을 선언하였고, 교황청은 프랑스 왕실[59]의 요청을 받아들여 1456년에 잔 다르크에 대한 복권재판을 지시했다.
장기간에 걸쳐 파리, 루앙, 오를레앙, 동레미 등 잔 다르크와 관련된 지역에서 자료를 수집하고 전 유럽에서 성직자들을 초청해서 재판에 참여시키고 주민들에게 증언을 듣는 등의 조사한 다음, 잔 다르크 생존 당시 휘하에 있던 병사들과 관련 지역 주민들, 그리고 재판에 참여했던 재판관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을 증인들을 불러모아서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명예회복 재판을 실시한다. 이 재판에서 이단자이자 마녀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 잔 다르크에게 내려진 판결을 무효화하였으며, 잔 다르크에게 내려진 이단, 마녀 혐의 및 파문 조치를 철회하여 무죄라는 결론을 내리고 잔 다르크를 이단으로 판결내렸던 피에르 코숑을 이단자로 선언하고 주교직을 면직했다.
그런데 이건 이단자이자 마녀로 판결받은 잔의 도움을 받았던 것이 꺼림칙한 샤를 7세와 유족들의 이해관계가 합일된 면도 있다. 정작 잔에 대한 종교재판에 참석했던 사람들 중 아직 살아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코숑을 포함한 이미 죽은 관계자들이나 잉글랜드인들에게 죄를 떠넘기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등 얼버무리며[60] 처벌을 피한다. 이 때 잔에 생전의 모습과 행동이나 화형 당시에 대한 증언은 분위기상 찬양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교차검증해서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잔이 당하던 종교재판보다는 공정했지만 말이다.
재심 요청에서 실제로 재판이 열리기까지는 몇 년 걸렸다. 그 이유는 잔 다르크의 재판에 대한 증거를 수집해야 하고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당시 재판에 참여한 사람들 중, 핵심 인물 대다수는 이미 죽은 뒤여서 증언이나 증거를 찾는게 쉽지 않았으며 생존자들은 당연히 자기에게 불리한 증언이나 증거를 내놓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교황청에서도 오스만 투르크의 유럽 침입을 막는 데에 지원해준 잉글랜드의 눈치를 보느라 재판을 여는 것이 늦어졌다.
사실 헨리 6세와 베드퍼드 공작, 워릭 백작을 비롯한 잉글랜드 측의 인물도 거의 파문당하지 않았다. 게다가 피에르 코숑이 재판을 맡긴 했지만 실질적인 우두머리로 관여한 종교인은 잉글랜드 왕실 인사이기도 한 윈체스터 교구장이자 추기경인 헨리 보퍼트였다. 헨리 보퍼트는 잔 다르크의 화형 당시 잔의 알몸을 군중에게 보여주고, 그녀의 뼈를 태운 잿가루를 센 강에 버리라고 지시하기까지 한 인물이다. 일부 기록에선 화형이 정해진 잔에게 "잘 가라, 교회는 더 이상 지켜줄 수 없다"고 위로의 말을 건네고 잔의 죽음을 보고 울었다고 하는데 그게 잔 다르크의 부당한 재판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순 없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추기경 명단에 당당히 적혀있으며, 심지어 윈체스터에는 이 사람의 이름을 딴 학교가 설립되어 있다. 참고로 헨리 보퍼트는 작정하고 잔 다르크를 죽이기 위한 재판에 관여한 것뿐만 아니라, 독신을 고수해야 하는 종교인이면서 사생아 딸까지 둔 위선자이기도 했다. 업보라면 업보랄까 헨리 보퍼트를 자신들이 배출한 위인으로 여기던 잉글랜드 가톨릭계는 훗날 헨리 8세의 종교개혁으로 성공회가 세워지면서 거의 몰락한다. (이는 성공회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오류이다. 가톨릭에 속했던 영국교회(Church of England)가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 가톨릭에서 분리독립해서 세워진 교회가 성공회이다. 이후 영국의 가톨릭교회는 새로 만들어진 조직이다.)
피에르 코숑이 잔 다르크에게서 반지를 빼앗아 헨리 보퍼트에게 바쳤는데, 이 반지는 이후로도 영국에서 쭉 소유하고 있다가 2016년 2월 프랑스에서 경매로 약 24만 파운드(한화 4억 원 가량)에 구입하여 반환되었다.(기사 1, 기사 2)
반지의 출처를 기록한 문서가 있으나, 이것이 진품인지에 대한 논란은 여전했는데 어쨌거나 프랑스에서는 잔 다르크 반지의 귀환을 성대하게 축하하는 행사까지 열었다. 다만 영국 정부가 행사에 찬물을 뿌릴 뻔 했는데, "영국 법률상 문화재를 국외로 반출하기 위한 허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반지를 반환하라는 명령을 할 수 있다"면서 경고한 것이다. 이에 발끈한 반지의 구매자는 군중에게 공개적으로 "여러분, 이 반지가 영국의 것입니까? (군중 야유) 아니면 프랑스의 유산입니까? (군중 환호) 야이 영국 놈들아! 갖고 싶으면 와서 가져가 봐라! It's too late![61] 이건 우리 거다!"라며 응수해 주었다.
그녀의 사망 이후 478년이 지난 후인 1909년에 교황청에 의해서 시복, 이어서 1920년에 시성되었다. 이로써 한 나라의 구국 영웅을 넘어 교황청에서도 공식으로 인정한 종교적 성인이 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잔 다르크/평가에 서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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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 고증에 맞춰서 금발벽안이 아닌 동그란 흑발머리의 소녀로 묘사했다.
[2] 잔다르크를 기념하여 1578년에 동레미라퓌셀(Domrémy-la-Pucelle)로 개칭되었다. 프랑스 국내에 이름이 같은 곳이 여럿(이곳 외에 동레미-라-칸(Domrémy-la-Canne), 동레미-랑데빌(Domrémy-Landéville)이라는 곳이 있고, 동레미-오-브와(Domrémy-aux-bois)라는 곳도 있었는데 합병개칭되어 소멸) 있는 것도 원인인듯. 인구 125명(2015).
[3] 하술하겠지만 잔에게는 오빠 셋과 카트린이라는 누이 하나가 있었는데, 이 카트린이 잔의 언니인지 동생인지가 불명이었으나 이후 카트린이 1405년에 태어났다고 밝혀졌으므로 카트린이 언니가 맞다. 즉 잔은 막내.
[4] 시대상을 감안하자면 딸을 마녀 재판에 회부하자는 의미로 보인다. 진심일리는 없지만 여튼 당시에 그 정도로 화가 났다는 듯.
[5] 그래서 이사벨의 성씨 '로메'는 '로마'에서 따왔다는 설이 있다. 정확히는 동레미에서 40km 떨어진 Romé이란 이름의 연못에서 유래되었다.
[6] 칼레 제외
[7] '어느 시골신부의 일기'라는 책으로 프랑스 문학사에 남은 조르주 베르나노스(1888-1948)가 잔 다르크 일가의 여자인 잔 탈베르 다르크와 결혼하였는데, 그녀는 후에 잔다르크의 중세식 이름 스펠링인 Jehanne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500년 후에도 그 집안에서는 잔다르크의 환영이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8] 피에르 다르크의 후손은 적어도 20세기 말인 1990년대까지 추적됐다.# 또한, Quora에서 잔의 후손을 묻는 질문에 자신이 피에르 다르크의 후손이라고 밝힌 사람이 있다. #
[9] 74세까지 살았다.
[10] 1405년 출생, 1430년 사망.
[11] 세금을 거둬들이고 영주와 마을 사람들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다. 현재로 치환하면 동네 이장 정도겠지만, 사형 제도와 귀족 모독죄가 있던 시절이라는 걸 잊으면 안 된다. 영주가 기본적으로 지주라는 걸 유념한다면 마름 정도의 포지션이 됐을 것이다.
[12] 동레미에는 잔 다르크의 생가라는 곳이 있다. # 일부러 구경하러 갈 정도는 아니지만 이 근처로 간다면 지나는 길에 들르는 정도의 가치는 있다는 듯. 화요일은 휴관.
[13] Taylor, Larissa. 2009년 작 <The Virgin Warrior: The Life and Death of Joan of Arc> 5-6쪽 참조.
[14] Harrison, Kathryn. 2014년 작. <Joan of Arc: a life transfigured> 22쪽 참조
[15] Scott, W.S.. 1974년 작 <Jeanne d'Arc> 14쪽 참조.
[16] Taylor, Larissa. 2009년 작 <The Virgin Warrior: The Life and Death of Joan of Arc> 7쪽 참조.
[17] 1422년까지 헨리 5세가 프랑스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었고, 그후로도 접전이 계속되었다. 큰 것만 해도 크라방 전투(1423. 07. 31.)와 베르뇌유 전투(1424. 08. 17.)를 들 수 있고, 잔 다르크가 시농 성에서 샤를 7세를 만난 것이 1429년 3월, 오를레앙 입성은 같은 해 4월의 일이다.
[18] Neufchâteau. 동레미 근처에서는 비교적 규모 있는 마을로, 2007년 기준 인구 7,000명 정도다.
[19] 이 때 잔에게서 결혼 약속을 받았다는 청년이 법정에 나타나 주장을 하는 바람에 잔이 그걸 해명하고 반박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걸로 보아 사귀는 남자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20] 과학이 발전한 현재에도 깜짝 놀라는 소리나 기괴한 소리가 들렸을 때 온갖 카더라나 음모론이 나도는 걸 생각해보자. 아폴로 10호의 우주비행 중 들린 괴음성 사건이 있다. 이것의 정체는 라디오 주파수끼리 부딪혀 생긴 소리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하물며 태어날 때부터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받아온 중세시대에는 사소한 일에도 신앙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21] 정확히는 가슴 위
[22] 사실 영국군은 잔 다르크가 이끄는 프랑스 군사가 오를레앙에 입성하도록 놔뒀다. "원군으로 와봤자 이미 바닥나고 있던 성 안의 식량만 축내서 우리에게 더 유리하게 흘러갈 것"이라고 여겼고, 게다가 '실전 경험이 전혀 없는 소녀 따위가 이끄는 군대가 뭘 할 수 있겠냐?'고 비웃고 만만히 본 모양이다.
[23] 특히 투렐 요새 전투에서는 갑옷의 목과 어깨 사이 틈을 정확히 파고든 석궁 화살을 맞아 중상을 입기도 했다. 근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심각한 부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응급처치만 하고 얼마 후 전장에 돌아와 전투를 지휘했다는 점.
[24] 사실 오를레앙 해방 과정이 참으로 먼치킨스러운데, 오를레앙 공방전은 1428년 10월 12일부터 1429년 5월 8일까지 계속되었으며, 잔이 참전한 날은 1429년 4월 29일이었다. 즉 잔 다르크가 등장하기 전까지 반년 넘게 계속되었던 공방전이, 소녀 1명의 등장으로 열흘도 채 되지 않아 결말이 난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현대의 과학 상식과도 같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시대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유닛의 등장은 아군에게 실로 엄청난 사기 버프를 주었을 것이다.
[25] 설빨간 화살표가 1429년 6월 26일부터 7월 17일까지, 오를레앙 전투 이후 랭스(Reims)까지의 잔의 진격로다.
[26] 이 승리들은 오를레앙과 루아르 강 원정도 포함된 수치이며, 샤를의 측근들이 가장 걱정했을 랭스 진군은 거의 무혈행군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27] 공교롭게도 탈보트에게는 잔이라는 이름의 딸이 있었다.
[28] 오를레앙 공방전 이후 잔은 '곧바로 랭스로 진격하여 샤를 왕자를 왕으로 옹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샤를의 측근들은 '노르망디 탈환이 먼저'라고 주장했다. 이에 논의를 거듭하던 끝에 '랭스로 진군은 하겠는데, 먼저 루아르 강 연안부터 탈환한다.'는 대안이 나온 것.
[29] 당시 프랑스는 잉글랜드와 부르고뉴에게 털리고 털린 끝에, 루아르 강을 건너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랭스와 파리를 탈환하기 위해서는 루아르 강을 건너야 하는데, 오를레앙 공방전 당시 오를레앙이 중요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루아르 강에 면한 도시로 아직껏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 도시이며 교량이 있었다는 것. 하지만 이 교량은 공방전 도중에 파괴되고 말았고, 루아르 강 연안부터 차지한다는 것도 '교량부터 확보해야 랭스고 파리고 갈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이유에서였다.
[30] 트루아는 이자보 드 바비에르가 도팽 샤를의 계승권을 박탈한 곳이었다.
[31] 서프랑크 이래로 프랑스 왕이 대대로 대관식을 한 도시다.
[32] 왕관이나 왕홀 등 국왕의 상징물은 없었지만, 그리스도교 국가의 국왕 대관식의 핵심은 주교가 축성한 성유(聖油)로 도유(기름 바름)를 받는 것이다. 도유를 받아야만 비로소 합법적인 국왕이 되는 것이다.
[33] 재밌는 건 이러한 잔의 의견이 후대의 종교개혁가들인 장 칼뱅, 존 녹스, 테오도르 베자, 앤드류 멜빌 등이 주장한 것과 똑같단 점이다. 실제로 종교개혁가들이 주장한 교회론에 있어, 그 당시 나라를 다스리던 왕들 역시도 다른 평범한 이들과 똑같은 신의 나라의 한 일원임에 불과하단 사실을 분명히 했으며, 더 나아가 만일 그들이 온전한 통치 의무를 수행하지 않을 경우 신에 의해 그 자리를 찬탈당할 것이란 정치 저항론을 펼쳤다. 당연히 이러한 그들의 주장은 그 당시 군주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기 충분했다.
[34] 사실 시골에서 올라온 소녀가 자신이 진짜로 공을 세우게 되자 들뜨게 되고, 화려하고 비싼 물품 등을 보고 관심을 가지게 되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대관식 이후 샤를 7세의 측근 귀족들과 마찰이 더욱 본격화되면서 그들에게 시골 소녀라고 무시당하기 싫어서 그런 듯. 소녀다운 일면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35] 다만 전쟁에서 갑주를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은 단순한 데코레이션 이상의 위력을 지닌다. 이걸 대표적으로 사용한것이 나폴레옹 휘하 기병 지휘관인 조아킴 뮈라. 임진왜란의 홍의장군 곽재우, 동오의 하제 등이 있다. 연전연승하는 잔 다르크의 네임드는 실로 강력한 것으로, 잔 다르크를 상징하는 치장은 적이 잔 다르크를 알아보고 공포심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뮈라 말고도 전투기나 갑옷을 화려하게 치장해 자신을 돋보임으로서 적에 공포를 심어준 사례는 제법 된다. 특히 대단히 공격적인 지휘관인 잔 다르크에겐 필요한 행동이었을것이다. 아래부분의 "잔 다르크가 묑에 다가가기만 하자 수비군이 일제히 도망쳤다."는 등의 일은, 자신을 상징하는 치장을 함으로서 "잔 다르크가 여기 있다."는 것을 시각화시켜 줌으로서 사기를 폭락시킨 것으로, 당시 이러한 활약상은 소문을 타고 뻥튀기가 되기 때문에 잔 다르크의 존재만으로 당시 잉글랜드군 눈에는 무적불패를 자랑하는 공포의 상징으로 보였을 것이다.
[36] 그러나 반대로, 대관식 이후 파리 탈환이 성공하지 못한 이후 적군에게는 잔 다르크가 눈에 띈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두려운 상대로 느끼지 않고 오히려 자신감을 가졌을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결과적으로는 하단에 있는 언급처럼, 콩피에뉴 전투에서 부르고뉴군이 화려한 옷을 입은 잔 다르크를 쉽게 알아보고 옷 끝자락을 잡아당겨 사로잡을 수 있었다. 차라리 화려한 옷을 걸치지 않고 그냥 갑옷을 입고 나섰으면 탈출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비싼 몸값을 받을 수 있는 잔 다르크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적군이 그냥 평범한 기사인 줄 알고 공격해서 전사했을 수도 있긴 하다. 물론 잔 다르크가 실제로 들떠서 사치를 부리려던 목적이 있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37] 원래 이런 날에는 전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교재판에서 집중적으로 추궁당했다. 잔은 "그 날의 전투는 하느님의 뜻으로 한 게 아니라 나의 의지로 한 것이며, 그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38] 중세 시대, 서양에서는 주로 남성들이 전쟁에 참여했다. 그런데 전쟁으로 인하여 살 곳을 잃고 생계가 막연한 민간인들 중에서 일부 여성들은 전쟁하는 군 부대를 따라다니며 요리와 세탁, 잡일을 하거나 몸을 팔아서 돈을 벌었다. 따라서 잔 다르크도 창녀로 오인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잔 다르크가 죽은 뒤에도 여러 창녀들이 잔 다르크 행세를 하면서 군 부대 내에서 매춘을 벌였다.
[39] 그런데 "동정심 많은 잉글랜드 병사"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보아, 오히려 잉글랜드의 관대함과 자비심을 강조했을 의도도 있다.
[40] 선량공의 아들이자 후계자가 용담공 샤를인데, 샤를 7세의 뒤를 이은 루이 11세 때 자신의 서로 떨어진 영지인 플랑드르와 부르고뉴 사이를 가로지르는 땅을 차지함과 더불어 아예 그 정복을 통해 부르고뉴 왕국의 왕이 될 것을 노리고 반란을 일으켰다. 잔 다르크를 재판에서 몰아넣은 주교 코숑의 관할 구역이었던 보베를 공격하던 중 잔 다르크의 명예회복이 된 해인 1456년에 태어난 잔이라는 소녀가 농성하는 도중 도끼를 들고 닥돌해서 부르고뉴군의 깃발을 빼앗아버리는 믿기지 않는 일로 인해 군사의 사기가 떨어져 보베 점령에 실패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로렌의 낭시라는 지방에서 로렌 공의 군대를 상대로 직접 전투에 나섰는데, 스위스 용병이 휘두른 무기에 얼굴이 쪼개져 전사하고 시체가 늑대와 까마귀에게 뜯어먹히고 말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낭시는 잔 다르크의 고향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고, 용담공이 전사한 날은 잔 다르크의 생일 하루 전날인 1월 5일이다. 결국 이 일로 인해 부르고뉴 공국과 그 가문은 쇠락했고, 용담공 샤를의 유일한 상속자인 공녀 마리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1세와의 결혼으로 합스부르크에 흡수당해 독립된 부르고뉴 가문의 나라는 사실상 멸망한 거나 다름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 결혼 덕분에 프랑스는 루이 14세 치세까지 합스부르크 막느라 온갖 똥꼬쇼를 다 해야했다
[41] 이거에 대해 "국왕과 그 측근이 잔이 적에게 잡히게 만들어서 제거하려고 했다"는 말이 많았다. 게다가 성주 입장에서도 잔이 입성하면 지휘 체계가 복잡하게 돌아갈 수도 있을 테니깐. 물론 현실적으로는 잔까지 들여보내다가 적군까지 같이 휩쓸려서 성이 함락당할까 봐 그런 거라고 봐야 한다. 지휘관과 병사들의 가치를 비교하면 잔이 가장 먼저 입성하는게 맞고, 그런다고 잘못되었다 해서도 안 되지만 잔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튼 하필이면 잔이 입성하려고 할 때 다리가 올려지고 성문이 닫혀졌다는 것이 절묘하다.
[42] 높은 탑에서 뛰어내렸는데, 외상은 없었지만 의식을 잃고 쓰러져 결국 다시 붙잡혔다. 나중에 재판에서 이걸 자살 시도로 규정 짓고 몰아붙였다. 참고로 이 때 언급된 다른 죄는 상리스 주교의 말을 훔친 혐의와 부르고뉴의 도적 기사들을 토벌할 때 포로를 처형한 것이었는데, 잔은 "상리스 주교의 말은 내가 타기에 적합하지 않아 값을 지불하고 돌려줬다"고 해명했으며, 도적 기사 포로 처형은 "적군에 붙잡힌 아군 포로와 교환을 시도했으나, 아군 포로가 죽자 재판에 넘겨서 합법적으로 처리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43] 샤를 7세의 대모이기도 하다.
[44] 리브르 트르누아(Livre tournois)는 시대에 따라서 다르지만 1262년 정해진 도량형으로는 고순도 은 80.88g이거나 금화 6.74g으로 정해져 있는 화폐다. 프랑스 위키피디아를 보면 1549년부터 해당 화폐의 도량형 수정이 있다고 하기 때문에 잔 다르크 당시에도 은화 80.88g이거나 혹은 금화 6.74g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은화로 따지자면 은 808.8kg이 잔 다르크의 가치가 되며 금으로 따지자면 금화 67.4kg(현재가치 50억상당)로 잔 다르크의 몸무게보다도 더 나가는 금이라고 할 수 있는 엄청난 액수라고 할 수 있다. 단 프랑스어 위키피디아는 리브르로 표기하는데 이게 도량형 리브르인지, 영국 파운드화와 같은 가치를 지니는 리브르인지, 리브르 트르누아인지, 은화의 하위 단위인 리브르인지 제대로 된 구분이 안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독일어(독일어 위키피디아는 프랑으로 표기하며, 당시 프랑은 리브르 트르누아와 같은 가치를 지닌 화폐였다고 평가받는다.), 영어 위키피디아에 나온 리브르 트르누아로 대체한다. 만약 파운드와 같은 가치를 지닌 카롤루스 대제 시절의 리브르를 뜻한다면 잔 다르크의 몸값은 1만 파운드 무게의 은으로 4톤에 달하는 무게이다. 아무튼 굉장한 양의 액수로, 이 정도 몸값이면 적국의 왕자를 포로로 잡았을 때 몸값 수준이다. 다만 잔 다르크 역시 프랑스 군의 총사령관이긴 했다.
[45] 뒤노아, 라 이르 등 잔의 장교들이 잔을 무력으로 구출하려고 4차례나 시도했고, 이 때문에 부르고뉴 측에서 프랑스에 넘기는 것을 거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46] 전술했듯 성녀로 활동하기 시작하고서부터 좀 배우기는 했는데, 결국 자기 이름을 쓸 줄 아는 게 고작이었다.
[47] 이 당시엔 성경이 번역되지 않았고, 기도문과 미사가 모조리 라틴어였다. 자국어로 미사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은, 1960년대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부터다. 오늘날처럼 의무교육, 제지술, 인쇄술, 유통 등이 발달하지 못해, 책을 가질 수 있는 사람,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 심지어 성직자와 수도자 중에도 라틴어를 잘 모르는 사람이 있었다. 중세의 문맹률은 꽤 높았기 때문이다.
[48] 긍정한다면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으로 모두를 사랑하시는 분인데 그 사랑을 부정했으니 죄인이고, 부정한다면 미워하지 않으신데 너가 존재하니 너는 하느님의 뜻을 어기는 사람이라는 죄목을 뒤집어 씌울 수 있는 날카로운 질문이다.
[49] 사제복과 법복을 입은 사람들을 비꼰다고 볼 수 있는 대답.
[50] 이 또한 예 아니오로 대답한다면 "하느님의 은총=하느님의 뜻에 대해 감히 관여하려 한다"는 죄목을 뒤집어 씌우기 딱 좋은 질문이다. 가톨릭 칠죄종 중 오만의 대표사례가 감히 하느님의 뜻에 대해 개개인이 단언하려는 것이 대부분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어느 상황이건 기도하겠다"는 독실함으로 받아쳐버렸다.
[51] 여자는 남자의 옷을 입지 말고 남자는 여자의 옷을 입지 마라. 이런 짓을 하는 자는 모두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역겨워하신다.(신명기 22:5)
[52] 한 예로 잔 다르크가 붙잡힌 곳은 콩피에뉴고, 코숑의 교구인 보베는 그 콩피에뉴와 인접한 곳이기에 명목상 그가 자기 교구 가까에에서 체포된 잔 다르크를 재판했다. 그러나 재판은 보베가 아니라 루앙에서 열렸는데, 물론 루앙이 프랑스 내 잉글랜드 점령지 중에서 가장 안정적인 탓도 있지만 보베는 이미 잔 다르크의 활약 때 잉글랜드와 부르고뉴가 아니라 프랑스의 관할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원칙대로 보베에서 재판을 하면 코숑이 오히려 체포당할 판국이었다. 그래서 보베의 주교가 자기 교구가 아닌 루앙에서 재판을 하는 촌극이 벌어진 것이다.(링크)
[53] 당시는 교황들이 분열되어 있던 시대인데, 잔 다르크는 로마의 교황을 지지했다. 잔 다르크의 재판이 있었을 당시 로마 교황 마르티노 5세가 사망하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을 때고 그래서 윈체스터 추기경과 친잉글랜드파 프랑스인 보베 주교 피에르 코숑이 정치적으로 제멋대로 재판을 진행할 수 있었다. 물론 잔 다르크의 항소 시도 자체가 막혔고, 교황청에 전달되었다고 한들 잔 다르크의 운명이 크게 바뀌었으리라 장담하기는 힘들었지만 말이다. 나중에 명예회복 재판은 교황청에서 정식으로 열었다.
[54] 어떻게든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 조사관이 빈 손으로 돌아왔다는 것도, 잔과 그 집안이 신앙적으로나 평소에나 마을에서 꽤나 평판이 좋았다는 얘기다. 잔과 그 가족들이 평소에 부농이라고 제멋대로 하고 다녔으면 같은 고향 사람들이라도 원한을 가졌을 테고, 조사관이 온 틈을 타 잔에 대해 나쁘게 말하거나 동네 교회 사람들도 뭔가 한 몫 하고 싶어서 잔이 이단이라고 말했을 테니깐 말이다.
[55] 정확히 말하면 수고비.
[56] 풀려난 탈보트는 이후 뛰어난 지휘로 프랑스군을 계속해서 물리치며 백년전쟁의 조기종결을 막다가 마지막 카스티용 전투에서 전사한다. 헨리 6세 1부와 오를레앙의 처녀 등의 작품에서는 잔 다르크의 강력한 맞수로 나온다. 이렇게 적이지만 프랑스인들에게 인상을 크게 남겼는지, 그가 주둔했던 보르도 지방에는 그의 이름을 딴 샤또 딸보라는 와인이 있다고. 여담으로 거스 히딩크 감독이 좋아하는 와인이라고 한다.
[57] 이 외에도 구출 시도가 없던 건 아니어서 잔 다르크의 전우 라 이르가 잔 다르크가 갇혀 있는 루앙으로 군사를 이끌고 닥돌했지만 실패하고 포로가 되고 만다. 한편 이 구출대의 배후에 질 드 레가 있다는 설이 있다. 라 이르는 나중에 풀려났지만 잔 다르크는 끝내 구출되지 못했다.
[58] 원래 잔처럼 종교재판을 받는 여성은 수녀들이 관리하는 수녀원에 수감시켜야 한다. 그러나 잔은 잉글랜드에 넘겨지고 나서 처음부터 남자 간수들이 관리하는 군사 감옥에 갇힌다. 이것은 매우 불공평한 일이다. 물론 수녀원에 수감되어도 엄격하거나 종교적으로 강한 신념을 가진 수녀들이 있었다면 잔 다르크를 호의적으로 대했을지, 아니면 괴롭혔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최소한 군사 감옥보다는 대우가 나았을 것이다.
[59] 프랑스 왕실도 움직였겠지만, 그보다는 잔의 어머니인 이사벨 로메가 교황청에 직접 호소한 것도 한 몫 했다. 이에 교황은 파리에 조사단을 보냈는데, 이 때도 이사벨은 70대의 노구를 이끌고 파리로 향해 조사위원들에게 다시 한번 호소했고 그것이 끝내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를 기리기 위함인지 오늘날 잔 다르크의 고향인 동레미에는 이사벨 로메의 동상도 서 있다.
[60] 뻔뻔하게도 잔의 종교재판 당시에 잔을 고문하자는 주장을 한 사람도 그 중에 있었다.
[61] 위 영상 8분경부터이다. '이미 늦었다'는 말을 친절하게도 영어로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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