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도 보기 싫은 사람은 어떻게 하나?
헬스 이슈&뉴스 이말순 편집위원
2023.10.22
“매일 만나는 사람인데 실은 꼴도 보기 싫거든요.
그렇다고 싫은 내색도 할 수 없어요.
업무상 안 만날 수도 없어요.
어떻게 하죠. 사표를 써야하나요?”
직장인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다.
일이 힘든 것은 견딜 수 있어도 사람 꼴 보기 싫은 것은 견디기 어렵다고…….
왜 이렇게 힘이 들까.
이유는 많겠지만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싫은 내색을 대놓고 할 수도 없고, 더욱이 안 만날 수는 더 할 수도 없고.
상대가 문제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무슨 수로 상대를 바꿀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깨어있는 내가 변할 수밖에.
이 상황에서 내담자는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라는 개념화된 자신에 철저하게 묶인 사람이다.
이런 사람일수록 상대가 더 싫다.
미운 순간 어느 정도 해소를 한다면 그 미움도 어느 정도는 해소가 된다.
하지만 이 내담자는 내색도 할 수 없고 그냥 안으로만 미움을 키우는 것이다.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은 내가 독약을 마시면서 상대가 죽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결과는 누가 죽을까.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은 내가 마신 독약 탓으로 상대가 아니라 내가 죽어가는 것이다.
내가 미워해도 상대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 아니 내가 미워하는지 조차도 모를 것이다.
그러니 희희낙락 즐겁게 살고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가장 어리석게 가장 미운 사람을 위해 나의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때론 착하기도 하고 때론 그렇지 못할 때도 많다.
성실할 때도 있고, 때론 그렇지 못할 때도 있는 것이다.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 연속선상에 있다.
극단적인 착함도 극단적인 나쁨이 아니라 착한 쪽에 기울어져 있으면 착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쓰고 생각하고 사용하는 언어에서 착하다 앞에는 나쁘다가 떠오르고,
날씬하다 앞에는 뚱뚱하다가 떠오르듯이 상반되는 의미가 같이 따라다니는 것처럼
언어가 주는 질척거림이 있다.
내가 착한 사람이라는 언어적 개념에 묶여 있으면
심리적 양면성으로 인해 사람은 착하지 않은 나쁜 사람이 될까봐 과도하게 염려가 된다.
언어로 재구성된 착한 사람이라는 개념 앞에서 절대적인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념화된 자신에 묶여버리면 진짜 자신이 원하는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착한 사람이라는 개념화된 나에서 벗어나 진짜 내가 원하는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내가 상대를 위해서 착한 사람이라 참는 동안 상대는 내가 참는 것을 꿈에도 모른다.
그래서 참다가 폭발을 한다면 상대는 자신의 행위 보다는 상대의 비난에 대해서 억울해 할 것이다.
참지 말라. 참는 것은 문제를 키울 뿐이다.
착한 사람이라는 개념화된 나에게서 벗어나 참지 않는다면
좀 더 편하게 상대에게 가볍고도 작은 내 불편함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조심할 것은 불편한 상황을 상대에게 기술하되 상대를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사람은 평가 받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모든 사람에게 좋은 관계가 되고 싶은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어색할지라도 나중에는 그 정도의 관계가 서로를 편하게 할 것이다.
첫댓글 슬퍼요 ㅠ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말 처럼 저는 제가 떠났어요 ㅠ
사람이 싫어서~~~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슬픈 일 맞습니다
서로 오손도손 살면 좋을텐데
사람 싫은 건 어쩔 수 없는가 봅니다
그냥 무시해 버리기엔
함께한 세월도 있어
마음 비우자니 그또한 보통인간 인지라 잘 되지 않겠지요 저도 해답이 없답니다 이민을 갈수도 없고 ㅎ
군대생활하며 동기가 그랬고
직장생활 중 10살 위 동료직원이 그랬지요
저하고 단 둘이 근무했던 부서
군인교회가서 오르간 친다고
쫄병일 팽개치고 교회로 교회로
군대생활 17개월까지 그랬습니다
둘이서 나눠 탔던 승용차
일요일마다 교회간다고 몰고 갔던 직장동료
그리스도의 교회 장로라고 했습니다
자기들의 믿음을 빙자해서
옆사람 모르쇠했던 두 사람 탓에
저는 지금도 예수교인들에게
알러지가 있습니다
군대동기보다는 교련혜택으로
몇 달 먼저 제대했구요
연상의 직장동료는 2년 후에
제 부하직원이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납작 엎드려 기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