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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류열풍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바다샘
<만주족의 기원 여진족은 고대 우리 한민족>
조선 중기 만주에서 앞선 고려시대 금나라를 계승하여 일어난 후금이 이후 국호를 청으로 바꾸
고 서쪽 대륙의 한족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정복 왕조로서 300여년간을 군림합니다.
만주족은 철저한 만주족에 대한 복종을 위해 한족들에게 변발을 강요하죠.
아시겠지만 유교적 이념 국가인 한족 명나라의 풍습에서 이런 변발의 강요는 가히 엄청난 사회
적 변혁과 억압입니다.
현대에 와서 청을 우리 한국사와 직접적으로 연결 시키기는 좀 어려운 감이 있지만
이 청을 한족 중심의 역사로 봐서도 상당히 곤란하죠. 글자 그대로 정복왕조입니다.
그러나 만주를 수천년 지배하며 군림했던 우리의 역사인 고조선, 고구려 발해 이후의 금의 역사
는 이런 조선 중기 후금의 역사와는 정체성이나 문화 종족 면에서 다른 시각으로 봐야 합니다.
<◇말갈(여진족)은 고대 한민족 = 말갈족은 북방 이민족이 아닌 우리 한민족의 일원으로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발해를 건국한 주도세력이었다.
발해가 건국되던 6세기말 7세기초 시기에 지린(吉林)성 등 동북지방에 7개 말갈족 부족이 있었다. 한민족의 원류인 북방 예맥계가 3개 부족, 고아시아 숙신계가 4개 부족이었고 숙신계 흑수말갈을 제외한 6개 부족이 발해에 흡수됐다.
김 교수는 "`말갈(靺鞨)'이라는 부족명은 중국이 이민족을 경시해 붙여준 명칭"이라며 "우리에겐 백제와 신라를 침략한, 문화수준도 낮고 야만적인 이미지를 풍기고 있지만 사실은 고대 한민족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말갈족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었던 예맥계 속말말갈이 발해 건국의 주체가 됐는데 속말수(粟末水.지금의 제2쑹화강)에서 유래된 속말말갈은 부여 계통으로 고구려와 혈연, 지역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우수한 철기문화를 자랑했다. 삼국시대에도 고구려는 오히려 말갈부족과 연합해 신라와 백제를 공격하는 일이 잦았다.
고구려 멸망후엔 고구려 유민들이 속말말갈 사회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발전의 계기를 맞았다. 속말말갈 외에 동옥저, 남옥저의 후예인 백산(白山) 말갈도 역시 예맥계로 발해 건국에 참여했다.
헤이룽장(黑龍江) 일대에 근거지를 둔 흑수말갈은 발해에 복속되지 않은채 발해와 군신관계를 유지하다 여진족에게 흡수돼 후에 여진족의 나라 금, 청나라의 주도세력이 됐다.
◇대조영도 고구려계 =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은 속말말갈 부족장 걸걸중상(乞乞仲象)의 아들로 당시 고구려 영토에서 살던 고구려 유장이었다.
중국이 발해사에 대한 동북공정의 근거사료로 쓰는 구당서(舊唐書)에도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 별종(大祚榮者, 本高麗別種)"으로, 신당서(新唐書)엔 "고구려에 붙어있던 속말말갈 사람으로 성은 대씨이다(粟末靺鞨附高麗者, 姓大氏)"로 기술돼 있다.
고구려 멸망후 영주(營州.지금의 랴오닝 차오양(朝陽) 일대)에 강제 이주된 고구려 유민과 속말말갈은 거란족과 함께 도독의 잔혹한 통치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당의 여제 무즉천은 이들 반당(反唐) 세력을 이간질시키기 위해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에,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에 봉했다. 속말말갈은 이전부터 자신을 진국으로 칭해왔다.
책봉을 거부하고 당군과 맞서 싸우던 말갈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가 전사하고 걸걸중상도 사망하자 걸걸중상의 태자 대조영은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 당군의 추격을 물리치고 고구려, 말갈 세력을 규합해가며 실력을 키웠다.
697년 대조영은 동모산(東牟山)에 성을 쌓고 스스로 진국왕(震國王)이 됐으며 713년엔 발해로 개칭했다.
발해 나라명에 `國' 사용은 자주독립 공동체 뜻
독자적 신문자 사용.고구려 풍속 그대로 이어
◇발해 지배층 예맥계가 주류 = 발해 건국 초기의 인구는 78만명에 불과했으나 고구려 유민을 지속적으로 흡수하고 거란족 190만명과 여진족 60만명을 직접 통치하게 됨에 따라 전성기 시절 인구는 300만명으로 늘어났다.
발해사회 지배계급의 주체는 예맥계 속말말갈 대 씨 왕족과 고구려 귀족관료 출신인 고 씨, 말갈 각 부족 추장, 일부 한족 지주들이었다. 중국 학자가 쓴 발해국지장편(渤海國誌長編)엔 발해 지배계급은 모두 317명이었는데 대 씨 90명, 고 씨 56명, 장 씨 30명, 왕 씨 22명, 리 씨 18명 등으로 속말말갈과 고구려가 주축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드물게 눈에 띄는 박 씨와 최 씨도 신라계나 고구려계일 가능성이 있다.
◇이태백도 "발해는 외국" = 당나라 사람들은 당시 발해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발해는 당시 나라명에 `국(國)'을 사용했다. 이는 자주독립 공동체였다는 의미이다. 당시 발해문자에 능통해 발해 외교문서의 번역을 맡기도 했던 시선(詩仙) 이백(李白)도 발해를 고려(고구려의 의미)나 백제로 부르며 외국으로 취급했다는 기록이 이백의 시문집 옥록총담(玉록<鹿+土>叢談)에 기록돼 있다.
이백의 혁만서(하<口+赫>蠻書)에선 또 당나라 사람들이 발해를 습관적으로 고려, 백제로 칭했다는 말이 나온다.
특히 발해가 독자적인 신문자를 사용했다는 점은 어느 나라에도 예속되지 않은 자주성을 갖춘 국가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발해가 한자를 사용하긴 했지만 한글의 원형이라는 알려진 가림다(加臨多)와 유사한 글자를 별도로 만들어 사용했을 정도로 문자 사용에선 중원왕조와는 이질적이었다. 단군 고조선 시대의 석각도 발해문자 창제에 참고가 됐을 것이라고 김 교수는 주장했다.
이와 함께 지배계급인 예맥계 고구려와 속말말갈은 북방 몽골어계통 언어를 사용, 의사소통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김 교수는 또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발해의 토장(土葬) 매장방식이나 제사, 전설, 가무 등을 비춰볼 때 고구려의 풍속을 그대로 이어받은 자주국이었다고 논박했다.
독자적 연호 사용..당도 결국 `國'으로 인정
◇당나라와 전쟁도 불사 = 고왕 대조영에 이어 2대 무왕 대무운(大武芸)은 인근 부족을 정벌, 인안(仁安)을 독자연호로 채택하고 정권을 공고히 한 다음 당 현종이 아직까지 복속치 않았던 흑수말갈 지역에 흑수도독부를 두자 즉각 토벌에 나섰다.
발해가 출격에 나서자 당은 신라로 하여금 발해를 공격토록 했고 이로인해 신라와는 줄곧 긴장관계에 놓이게 됐다. 대무운은 당으로 망명 투항한 형 대문운(大門芸)을 살해하려 낙양에 자객을 보내는 등 당과는 갈등 관계에 있었다. .
대흠무(大欽茂)가 3대 문왕으로 등극하면서 발해는 당시의 최강국 당과의 화평외교에 힘쓰면서 내치 개혁에 주력했다. 762년 당은 발해를 나라(國)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김 교수는 "발해는 계속 독자적 연호를 사용했고 34차례에 걸쳐 일본에 외교사절을 파견했으며 또 당나라와 자주 전쟁을 벌인 점은 독립 주권국가라는 사실을 말해주기에 족하다"고 말했다.
책봉, 조공, 수작(受爵)은 당시 강대국에 대한 외교방식의 하나였고 당나라식 행정제도 도입은 중원의 선진문화를 흡수한 것일 뿐 이를 당나라에 예속된 일개 지방정권으로 해석하는 것은 억지라는 것이다.
◇`동거란'이 발해 계승 = 10세기초 발해는 귀족 권력투쟁과 국정 불안으로 사회모순이 커지면서 925년 거란의 야율 아보기(耶律 阿保機)의 침략을 초래한다.
1년만에 홀한성(忽汗城)이 함락되고 애왕(哀王)이 투항함으로써 발해는 229년만에 역사에 종언을 고했다. 고구려계인 고영창(高永昌) 등에 의한 발해 부흥운동이 세차례 있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아보기는 그러나 곧바로 발해국 영토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우고 태자를 인황왕(仁皇王)으로 앉히며 발해국 계승을 선언했다.
당시 발해 유민 300만명중 190만명은 동단국에서 거란의 직접 통치를 받았고 나머지 110만명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중 10만여명은 고려로 넘어갔고 60만명은 여진으로 도피했으며 1만명은 일본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왕족 2명, 귀족 25명을 포함 발해 유민이 대거 고려로 들어오자 고려는 이들을 후대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발해는 본래 우리의 친척 국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동단국은 이후 동거란으로 국명을 바꾸면서도 발해의 행정체제와 규모를 그대로 유지했다"며 사실상 동단국은 발해국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발해는 거란 이후 동북지방의 주도세력이 된 여진과도 특수관계를 맺고 있었다. 흑수말갈이 합류한 여진의 금나라는 당시 동북지구에서 최고 문명을 자랑하던 발해를 대거 포섭해 끌어들였다. 금나라의 역대 황제 가운데 발해족을 생모로 둔 황제는 해릉왕, 세종, 위소왕 등 3명에 이른다. >
http://blog.daum.net/cosmicchung/7184773?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cosmicchung%2F7184773
<남북국 시대의 신라 발해의 발해야 이미 고구려의 계승 의식과 외교문서에서 고려국호의 사용 연호, 독자적 문자,, 고구려 5부에 영향받은 5경 도시체계 문화와 고구려 묘를 수호하는등 고구려 연장의 국가임에 말할 필요가 없는 우리 역사입니다.
요나라가 발해를 멸망시키고 동란국을 건설하여 일부가 고려와 주변으로 흩어졌지만 동란국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200여만명의 발해인(고구려인)이 살고 있었고 요나라 역시 행정을 유목 민족적 통치가 아닌 엄연한 정주 도시체계에서 다스렸습니다.
이런 가운데 압록강 일대에서는 고구려 발해 부흥세력들이 여전히 일어나고
신라가 고려로 국호가 바뀌자 신라의 무리가 북으로 올라가 여진족 세력에게 들어가 최고 수장이 됩니다.
그런 가운데 발해인(고구려인)의 반요와 맞물려 힘을 합치고 연합하여 나온게 바로 금나라입니다.
즉 금나라는 발해인(고구려인) 200여만명과 신라의 리드가 연합한 우리 역사의 연장이라고 봐도 전혀 무색하지 않습니다.
실제 금나라의 대국 행정는 발해인들이 맡고 있었고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북경으로 천도하는데 그곳의 도성인 대규모 중도나 오늘날 북해공원등의 도시기반이 고구려인에 의해 직접적으로 설계 건설되었습니다.>
http://cafe.naver.com/coreang.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4( 역사 스페설 금나라 관련 내용)
중공의 '팔천리로의 雲月'라는 드라마
비명은 '동경 승엄사 선사 탑명' 비의 제작연도는 1190년, 스님의 성은 고(高)씨이며 발해인(渤海人)이라 기록되어 있다.
발해인과 여진족은 어떤 관계에 있었을까?
926년 발해가 멸망하고 발해유민들은 거란의 동경과 상경 등으로 끌려 갔다.
당시 발해인과 여진족에겐 反거란이라는 연대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금사》에는 '여진인과 발해인은 같은 조상에서 나왔다(女眞渤海同本一家).'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여진과 발해 사이에는 친연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금나라는 지금의 북경에 대규모 도시를 건설했다.
그 도시 건설 책임자의 이름은 '장호'였다. 《금사》에는 그를 '장호는 요양 발해인이다. 본래 성은 고씨로 동명왕의 후손이다(張浩遼陽渤海人本性高氏東明王之後).'라고 하였다. 장호뿐 아니라 수 많은 발해인들이 금나라의 고위 관료층을 형성하였다. 그것은 여진족과 발해인의 친연관계 뿐 아니라 대제국을 경영하였던 발해사람들의 경험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요양 박물관에는 '통혜원명 대사 탑명'이 있다.
이 비의 주인공은 관찰사 '이후'의 딸은 발해인이었으며, 남편은 아골타의 셋째 아들인 '허왕'이며 아들은 '동경유수 정국공'이었다고 한다. 정국공은 금의 세종을 말한다. 금의 4대 황제 혜릉왕의 어머니 또한 발해인 대씨였다고 한다. 발해인은 금나라의 고위 관료층과 왕비족으로 자리를 잡았다.
<금나라는 발해의 후손인 황비족과 신라 후예인 황족이 낳은 국가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
< 정강지변>
* 정강지변(靖康之變) : 1127년 송나라의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금나라 포로가 되어 북방으로 끌려간 사건
- 1114년 : 팔리성 전투 (출하점 出河店 전투) 아골타가 이끄는 1만 여진족이 10만 요나라 군대를 격파
- 1115년 : 아골타, 金 건국
- 1125년 : 요나라 멸망
- 1127년 : 송나라 수도 개봉(開封) 함락, 송나라 멸망. 휘종, 흠종 포로가 되어 북방으로 끌려감.
금나라가 북방의 패자로 군림하며 100여년간 대륙을 지배
송막기문
女眞酋長乃新羅人號完顔氏 혹은 송막기문 판본에 따라 女眞之主乃新羅人號完顔氏
여진 추장은 신라인이며 완안씨다
송막기문의 저자는 송나라 사람 홍호입니다. 홍호는 포로가된 송나라 황제의 석방교섭을 위해
1129년 금나라에 파견된 인물입니다.
그는 결국 금나라에 잡혀 억류생활을 하는데 그때 경험담과 견문기를 책으로 정리한 것이 송막기문입니다.
여기 나오는 이야기가 100% 정확한 것은 아니겠지만 금나라 영토 내에서 10년 가까이 억류 생활을 했던
사람이 지은 책이라는 점에서 여진-거란-발해 관련 연구에서는 제법 신뢰성이 높고 비중있게 취급되는 자료입니다
女眞酋長乃新羅人, 號完顔氏. 完顔猶漢言「王」也. 女眞以其練事, 後隨以首領讓之. 兄弟三人, 一爲熟女眞酋長, 號萬戶. 其一適他國. 完顔年六十餘, 女眞妻之以女亦六十餘. 生二子, 其長卽胡來也. 自此傳三人, 至楊哥太師無子, 以其侄阿骨打之弟謚曰文烈者爲子. 其後楊哥生子闥辣, 乃令文烈歸宗. -송막기문 원문중-
당주가 안시성에 진군하여 치니, 북부 누살 고연수와 남부 누살 고혜진이 아군과 말갈병 15만 명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하려 하였다. 당주가 시신에게 말하기를 "지금 연수에게 방책이 있다면 세 가지가 있다. 군사를 이끌고 직전하여 안시성과 연결하여 누를 만들고, 고산의 험한 곳에 의거하여 성중의 양식을 먹고 말갈병을 놓아 우리의 우마를 노략하면 이를쳐도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고, 돌아가려면 이료가 장애가 되어 앉아서 오군을 괴롭힐 것이니 이것이 상책이오, 성중의 병을 빼어 밤에 함께 도망함은 중책이다. 지능을 헤아리지 않고 와서 우리와 싸움은 하책이다. 경들은 보라. 저들이 반드시 하책으로 나올 것이니 포로가 됨은 내 눈안에 있다"하였다.
- 삼국사기 - 1차 고당 전쟁
무덕 5년에 추장 아고랑이 처음으로 왔다. 태종 정관 2년에는 마침내 신부(臣附)하여
항상 공물을 바치므로, 그 땅을 연주로 삼았다. 태종이 고려(고구려)를 토벌할 때에
그 북부가 반기를 들고 고려(고구려)와 합세하였다. 고혜진 등이 군사를 이끌고
안시(성)을 구원할 때에 싸움마다 늘 말갈병을 앞에 내세웠다. 태종은 안시(성)을
함락하고 (고)혜진을 사로잡은 뒤 말갈병 3,000여명을 모두 묻어죽였다.
-신당서 흑수말갈-
흑수의 땅은 모두 발해에 복속되었다.
-발해고 무왕-
발해가 점차 강성함에 따라 흑수 역시 그 소속이 되었다.
-당회요 말갈-
거란이 또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치니 순(현종)이 여진과 더불어 군사를 합하여 막았다.
거란이 크게 패하여 장족(귀족을 지칭)과 병졸, 수레도 돌아온 것이 드물었다.
관속들도 태반이나 전몰했으므로 유계에 영을 내려 벼슬을 구하던 자와 조금이나마 글을 아는 자를 뽑아 그 결원을 보충했다.
-속자치통감 대중상부 3년(1010년)- 고려시대
其初部長本新羅人...
그 처음 부장은 본래 신라인인데...
- 대금국지(大金國誌) -
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
금 시조의 이름은 함보인데 고려에서 왔다
- 금사(金史) -
本自新羅來姓完顔氏 新羅王金姓 相傳數十世則金之自新羅來 無疑建國之名
... 신라왕성에 의해 국호를 금이라 했다.
-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
女真酋長乃新羅人號完顏氏完顏猶漢言王也
여진 추장은 신라인에서 비롯된다. 호는 완안씨로 완안이란 한자말에서는 왕과 같다.
- 송막기문(松漠記聞) -
神麓記曰女真始祖堪布出自新羅奔阿勒楚喀無所歸遂依完顔因而氏
... 後女眞衆豪結盟推為首領
신록기(神麓記)에서 기록하기를 여진 시조 감포(堪布)는 신라(新羅)로부터 나와
아륵초객(阿勒楚喀)으로 달아났다. 돌아갈 곳이 없어 드디어 완안(完顔)을 의지하였기에
이를 성씨로 삼았다. ... 후에 여진의 여러 호걸들과 동맹을 맺고 수령으로 추대되었다.
-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 -
..이해 여진 아골타가 황제라 했다. ..본래 신라인이다.
..是歲 女真阿骨打稱帝 ..本新羅人
- 宣和遺事(선화유사) -
其初帥長本新羅人
그 처음 수장은 본래 신라사람이다.
-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 -
金之始祖諱哈富(舊作函普)初從髙麗來
(按通考及大金國志皆云本自新羅來姓完顔氏考新羅與髙麗舊地相錯遼金史中往往二國互稱不為分别以
史傳按之新羅王金姓相傳数十世則金之自新羅來無疑建國之名亦應取此
金史地理志乃云以國有金水源為名史家附㑹之詞未足憑耳)...
금(金)의 시조의 이름은 합부(哈富, 예전에는 함보(函普)로 썼다)인데, 고려(高麗)에서 왔다.
(안: 통고(通考) 및 대금국지(大金國志)에서 이르기를 원래 신라(新羅)에서 왔으며,
성은 완안씨(完顔氏)라고 하였다. 신라(新羅)와 고려(高麗)를 상고해 보니,
옛 땅이 서로 섞여 있고 요사(遼史)와 금사(金史)에서는 종종 두 나라를 혼동하여
분별하지 않았던 것이다. 역사기록(史傳)을 통해서 생각해보면, 신라 임금의 성(姓)은 김(金)이요,
서로 전하기를 수십 대에 이른즉 금(金)나라가 신라(新羅)로부터 나왔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고
나라이름은 응당 여기에서 취한것이다. 금사(金史) 지리지(地理志)에서 말하기를
“나라에 있는 금수(金水)의 발원지를 국명으로 삼았다”라고 하는 것은 역사를 짓는 자들이
억지로 갖다붙인 견강부회의 말이라서 믿을 것이 못 된다)...
-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
癸丑金主阿骨打遣阿只等五人. 寄書曰: “兄大女眞金國皇帝致書于弟高麗國王.
自我祖考介在一方謂契丹爲大國高麗爲父母之邦小心事之契丹無道陵轢我疆域奴隸我人民屢加無名之師.
我不得已拒之蒙天之祐獲殄滅之. 惟王許我和親結爲兄弟以成世世無窮之好.” 仍遺良馬一匹.
"형인 대여진금국황제(大女眞金國皇帝)는 아우인 고려국왕에게 글을 부치노라
우리의 조상은 한 조각 땅에 있으며 거란을 대국이 라 하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공손히 하였다..."
- 고려사(高麗史) -
庚子御宣政殿南門引見褭弗史顯等六人宣問來由. 褭弗等奏曰: “昔我太師盈歌嘗言: ‘我祖宗出自大邦至于子孫義合歸附.’
今太師烏雅束亦以大邦爲父母之國. 在甲申年*閒弓漢村人不順太師指諭者擧兵懲之國朝以我爲犯境出兵征之復許修好故我信之朝貢不絶.
不謂去年大擧而入殺我耄倪置九城使流亡靡所止歸.
故太師使我來請舊地若還許九城使安生業則我等告天爲誓至于世世子孫恪修世貢亦不敢以瓦礫投於境上.” 王慰諭賜酒食.
옛날 우리 태사 영가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우리 조종이 대방(고려)에서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러서도 의리상 귀부함이 마땅하다’고 했고 지금 태사 오아속도 역시 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삼나이다.”
- 고려사(高麗史) -
新羅宗室金俊의子克守를迎立하고部落의名을完顔이라하야因하야써姓이되니完顔은女眞語에王子라
蓋金俊이新羅亡한後에平州에서僧이되였다가女眞地로入하야新羅王子의禮遇를受하며
克守가阿之古村에居하야...
신라의 종실 김준의 아들 극수(克守)를 맞아 왕위에 앉혔는데, 부락의 이름을 완안(完顔)이라 하고,
그들의 성이 되었다. 완안은 여진 말로 왕자라는 뜻이다. 어찌하여 김준이 신라가 망한 후에
평주에서 승이 되었다가 여진땅으로 들어가서 신라왕자의 예우를 수하며 극수가 아지고촌에 거하여...
- 신단민사(神檀民史) -
本書以為滿族本三代遺風,民風純厚,源遠流長,各項習俗皆足以垂訓後世,除此之外,因滿族自新羅、渤海之時便有文字,其有許多習俗
본서는 만주족의 본래 3대에 걸친 유풍이 되는 바로서, 백성의 風俗이 순수하고 인정이 도타우며,
먼 곳에서 비롯되어 길게 흘러가며, 각각의 習俗이 모두 후세에 이어지도록 가르치기에 모자람이
없는 것이니 이 외에의 것은 빼기로 한다. 만주족은 신라로부터 왔고 발해의 때에 쉬운 文字를 가졌고
수많은 慣習과 風俗들을 지녔으므로 제도는 모두 아래에 담아 남기기로 한다.
-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
是月生女眞完顔阿骨打稱皇帝更名旻國號金. 其俗如匈奴諸部落無城郭分居山野無文字以言語結繩爲約束.
土饒猪羊牛馬馬多駿或有一日千里者. 其人鷙勇. 爲兒能引弓射鳥鼠及壯無不控弦走馬習戰爲勁兵諸部各
相雄長莫能統一. 其地西直契丹南直我境故嘗事契丹及我朝. 每來朝以麩金貂皮良馬爲贄我朝亦厚遺銀幣
歲常如此. 或曰: “昔我平州僧今俊遁入女眞居阿之古村是謂金之先.”
或曰: “平州僧金幸之子克守初入女眞阿之古村娶女眞女生子曰古乙太師古乙生活羅太師. 活羅多子.
長曰劾里鉢季曰盈歌盈歌最雄傑得衆心. 盈歌死劾里鉢長子*烏雅朿{烏雅束}嗣位*烏雅朿{烏雅束}
卒弟阿骨打立.”
이달에 생여진 완안부의 아골타가 황제를 일컫고 국호를 금이라 했다.
혹은 말하기 를 ‘옛적 우리 평주(平州) 승(僧) 금준(今俊)이 여진에 도망해 들어가
아지고촌(阿 之古村)에 거주했으니 이가 금의 시조다’라고 하며
혹은 말하기를 ‘평주 승 김행 (金幸)의 아들 극기(克己)가 처음에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여진의 딸에게 장가들 어 아들을 낳으니 고을(古乙) 태사(太師)라 하고
고을이 활라(活羅) 태사(太師)를 낳 고 활라가 아들이 많아 장자를 핵리발(劾里鉢)이라 하고
계자(季子)를 영가(盈歌)라 했는데, 영가가 웅걸(雄傑)이어서 중심(衆心)을 얻었다.
영가가 죽자 핵리발의 장자 오아속(烏雅束)이 위를 이었고 오아속이 졸하매 아우 아골타가 섰다고 한다.
- 고려사(高麗史) -
昔金完顔氏以本出高麗。遇高麗甚厚。終不侵暴。愛州今義州本高麗地而陷於遼。及金滅遼。
以愛州畀高麗
옛날 금의 완안씨는 본시 고려인이었기 때문에 고려에 매우 후하게 대했고 끝내 침 범하지 않았다.
의주는 원래 고려 땅이라 금이 요를 멸한 뒤 고려에 돌려주었다.
- 지봉유설(芝峰類說) -
金傅雖降而麗王幷其外孫完顔阿骨打卽權幸之後乃宰割中國傳世百年豈非所謂神明之後者耶
... 김부金傅가 비록 항복하여 고려왕에 병탄되었으나 그 외손인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
곧 권행權幸의 후예가 중국을 분할하여 백년이니 어찌 이른바 신명神明의 후예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 권행은 본래 김행으로 후백제를 치는데 도왔다하여 고려왕에게 권씨성을 하사 받는다.)
- 해사록(海槎錄) -
부안(부령)김씨는 고려에 귀순한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 김일을
시조로 하는 성씨로 경주김씨의 계파인데 이 부령김씨세보(扶寧金氏世輔)의
구전 기록에 의하면 김일의 아들이 기로인데 후에 승이 되어 법명은 정원대사라
했는데 아우가 여진으로 가자고 청하니 나라를 버릴 수 없다 하므로
기로를 두고 갔다고 전해진다고 한다.
이들 형제를 기록한 마의태자 유적지의 불서에는 정원대사, 보림대사,보현대사가 있으나
여진으로 떠난 형제가 포함되었는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다고한다.
마의태자는 김일 외에도 김분이 있었고, 경순왕에게는 마의태자 김일, 김분을 포함한
9남 3녀가 있었다. 해사록에 따르면 금의 시조가 경순왕의 직계후손이 아닌
외손 김행(당시 친족혼이 가능하였다)의 후손이라 하기도 한다.
- 부안김씨족보,마의태자유적,신라삼성연원보,경김족보,해사록 근거설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