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7일 인내하며 끝까지
예수님은 46년이나 걸려 지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예루살렘 성전이 철저하게 파괴될 것이라고 예고하셨는데, 실제로 그로부터 약 40년 후에 성전은 로마 군에 의해 완전히 무너졌다. 그에 이어 당신 제자들이 박해받게 될 거라고 하셨는데 열두 사도뿐 아니라 그 이후 계속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상 곳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받았다. 그러나 성전 파괴와 전쟁이 세상 종말이 아니었고, 박해가 신앙의 끝이 아니었다. 오히려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었고, 복음이 더 멀리 퍼져 나가게 됐다.
우리 순교자들이 붙잡혀 갔을 때 사는 방법은 아주 쉽고 간단했다. 지금처럼 증거를 찾아내고 법리를 따지는 지루한 법정 싸움 같은 건 필요 없었다. ‘배교합니다.’라는 말 한마디면 풀려나 살 수 있었다. 그 말 한마디를 할 수 없었고, 고문이 너무 고통스러워 그렇게 말한 사람 중 그게 더 고통스러워 다시 돌아와 순교한 성인도 있다.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누가 누구를 신문하는지 모르게 당당하셨던 것은 그분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박해 시대에 붙잡혔으면 배교가 아니면 참형 둘 중 하나였다. 믿음은 곧 죽음이었다. 예수님도 그랬고 제자들도 그렇게 될 거라고 예언하셨다. 거기서 빠져나오는 기적을 말씀하신 적이 없다. 그 대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루카 12,4-5).” 정말이지 그분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셨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다. 아이가 부모를 잃어버리는 거처럼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잃어버린다는 건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한국에서는 신앙 때문에 박해받는 일은 없다. 그래서일까, 신앙에 오롯함과 애틋함이 없는 거 같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거 같다. 그렇다, 박해보다 더 무서운 게 무관심이다. 사이비와 이단 그리고 극히 일부 부정한 사목자들 때문에 우리의 거룩한 신앙 행위들이 코미디 프로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사제는 퇴마사나 정의로 심판하는 싸움꾼으로 그려진다.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다. 아침저녁으로 간단히 기도하고, 하루 중 혼자 있을 때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마음속으로 하느님 이름을 부르고, 일주일 중 하루 이틀 성체를 모시러 성당으로 가는 게 그렇게 어렵고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인가. 밥 먹기 전에 간단한 기도로 하느님께 감사하고, 다 먹고 나서 또 감사하고 불쌍한 연옥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30초 시간도 내지 못한다. 이 세상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세상과 하느님 나라를 가리키지 못한다.
관아에 끌려간 우리 교우들에게는 두 가지 길만 있었다, 배교하거나 순교하거나. 예수님은 신문하는 이들 앞에서 무슨 답변을 어떻게 할지 미리 준비하지 말라고 하셨다.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주겠다고 하셨다. 그것은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들어선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인 것 같다. 그 선물로 목숨을 보전하려는 마음이 이곳으로 결코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바뀌게 되는 가보다. 스테파노 성인에게만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이 보였던 거처럼 말이다(사도 7,55-56). 불의한 세상에서 의롭게, 타락한 세상 속에서 순수하게, 물질주의 속에서 영적인 것을 추구하고, 개인주의 속에서 더불어 살기를 바란다면 그런 삶 자체가 자신에게 박해가 될 거다. 세속의 거센 파도에 자신을 그냥 내맡겨버리고 싶은 유혹을 받고, 주님 말씀을 따른다고 해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고 오히려 나는 손해를 본다고 해도 견딘다. 인내로써 생명을 얻는 줄 알고(루카 21,19), 죽을 때까지 충실하면 주님이 생명의 화관을 주신다고 믿는다(묵시 2,10).
예수님, 금욕, 의로움, 거룩함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 같은 죄인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못하지만 주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제 안에서 하시려는 일을 하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이 이콘 앞에서 기도하며 영원한 나라를 더욱 그리워하게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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