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기인물 한국사]27ㅡ1.
어물전 장사꾼들 장희빈에게 올인하다!①
우리나라의 역사인물들 중 사극의 주인공으로 가장 많이 등장한 인물이 누굴까? 정답은 숙종의 후궁이었던 희빈 장씨, 장희빈(張禧嬪)이다. 1961년 영화 <장희빈>으로 첫 스타트를 끊었고(1대 장희빈으로 김지미 주연), 뒤이어 1968년 임권택 감독이 연출을 한 <요화 장희빈>이 다시 한 번 스크린으로 상영되게 된다(2대 장희빈으로 남정임 주연). 그 뒤 스크린에서 브라운관으로 활동영역을 옮긴 장희빈은 1971년 7월 일일연속극 <장희빈>으로 무려 154회나 방영되게 된다(윤여정이 장희빈 역이었다). 그 후 10년이 지난 1981년 MBC는 <여인열전>으로 다시 장희빈을 꺼내든다(이미숙이 장희빈 역), 이렇게 장희빈으로 쏠쏠히 재미를 본 MBC는 한국인의 기본 승부정신인 삼세번을 관철시키겠다는 의지로 1988년 다시 한 번 장희빈 카드를 꺼내든다. 조선왕조 5백년 시리즈의 제8화 <인현왕후>를 꺼내 든 것이다. 이때 장희빈 역으로 캐스팅 된 것이 전인화였다. 이 정도 했으면, 그만 나올 만도 한데, 1995년 SBS가 다시 장희빈을 꺼내든다.
"너네만 재미 보냐? 우리도 장희빈으로 재미 좀 보자!"
이런 생각이었을까? 어쨌든 정선경을 제6대 장희빈으로 내세운 SBS의 <장희빈>도 나름 소기의 성과를 거두게 된다. 이렇게 되자 방송 3사 중 유일하게 장희빈을 만들지 않은 KBS가 발끈하게 된다.
"새 천년의 새로운 장희빈을 만들겠다!"
이리하여 캐스팅 된 것이 김혜수! 제7대 장희빈 김혜수를 내세워 2002년 KBS는 '장희빈'을 내놓게 된다. 방송 3사가 다 한번씩은 만들었고, MBC는 재탕에 삼탕까지 한 장희빈…. 이 정도면 사골국물이라 말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어째서 사람들은 장희빈에 열광하는 것일까? 드라마적으로 봤을 때 장희빈은 시청자들이 원하는 모든 미덕을 지니고 있다. 주부시청자들이 열광하는 처첩갈등에 권선징악(장희빈은 첩이었기에 응징당해야 하는 악으로 규정된다), 아들에 목매다는 남아선호사상의 문제점(이 때문에 본처가 쫓겨나지 않았는가?),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싸움 때문에 거덜 나는 나라 등등 드라마가 가져야 할 모든 미덕이 다 담겨져 있는 것이다 (조선의 역사를 규방암투의 역사로 한정짓는 문제점도 있지만, 어쨌든 재미는 있다).
이렇게 사극으로 만들어진 장희빈을 보면, 40여 년 간 그 나물에 그 밥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숙종은 언제나 여자들 치마폭에 휩싸여 나라를 말아먹고, 인현왕후는 가정교육 제대로 받은 조선의 국모답게 언제나 온화한 이미지, 장희빈은 없이 자란 한을 풀려는 듯 표독한 모습을 보여준다. 과연 이 모습이 옳은 것일까?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 오해들을 하나씩 풀어봐야겠다.
첫째, 숙종은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치마폭에 휩싸여 나라를 말아먹었다? 분명 말하지만, 숙종이 두 여자를 이용하면 이용했지, 이용을 당하지는 않았다.
"서인 색희들 맘에 안 들어서 남인 애들로 물갈이 했더만, 똑같잖아? 정치 한다는 놈들은 전부 메이드 인 차이나야? 공장에서 찍어내 대량 납품한 것도 아니고…."
그랬다. 숙종은 조선 후기 왕들 중 가장 강력한 왕권을 행사한 '철권군주'였었다. 그는 심심하면, 환국(換局 : 판국이 바뀌다)을 일으켜 집권세력을 교체했다. 경신환국(庚申換局 숙종6년 1680년), 기사환국(己巳換局 숙종 15년 1689년), 갑술환국(甲戌換局 숙종 20년 1694년). 이 세 번의 환국을 통해 숙종은 언제나 국정의 주도권을 꽉 틀어 쥘 수 있게 되었다.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 조선에서 숙종은 카리스마 그 자체였던 것이다. 당시 숙종의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증거가 하나 있는데, 바로 신하들의 존호(尊號 : 왕이나 왕비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올리는 호칭으로, 왕이나 왕비 사후에 신하들이 지어 올렸다) 주청사건이다. 보통 왕이 죽은 다음에 지어 올리는 것이 존호였는데, 살아있는 왕에게 존호를 올리겠다고 신하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어유, 우리 전하는 완전 킹왕짱이라시니까, 이런 분이 존호를 받으셔야지. 안 그래?"
"그럼, 그럼 우리 전하 천세! 천세! 천세!"
"전하, 저희가 전하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존호를 몇 자 적어봤는데, 꼭 좀 받아주세요. 예?"
"야, 네들 왜 오바하고 그래? 그거 원래 죽은 다음에나 받는 거 아냐?"
"아유, 저희가 전하를 사모하는 마음에 미리 좀 땡겨서 지어 봤슴다. 꼭 좀 받아주세요. 예?"
"야 쪽팔리게 존호는 무슨 존호야?"
"에이, 즉위 40주년 기념으로도 한번 지어 봤슴다. 꼭 좀 받아주세요. 전하, 알라뷰!"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살아 있는 왕이 존호를 받은 경우는 딱 두 번 있었다. 한번은 광해군 시절이었는데, 이때는 광해군이 신하들의 옆구리를 찔러 강제로 받은 것이고, 숙종 만이 자발적으로(?) 존호를 받은 것이었다. 신하들이 보기에 숙종은 너무도 무서운 임금이었다. 수 틀리면 다 엎어버리는 그의 정치 스타일을 겪었던 신하들은 이제나 저제나 숙종의 눈치를 봤던 것이다. 그리고 그 대표선수들이 바로 장희빈과 인현왕후였다. 숙종은 이 두 여인을 입맛대로 휘두르다 결국 장희빈을 죽이고, 서인을 국정파트너로 낙점하게 된 것이다.
둘째, 인현왕후는 온화하기만 했었냐는 의문인데 인현왕후 나름 성격 있었다.
(상략)장씨의 교만하고 방자함은 더욱 심해져서 어느 날 임금이 그녀를 희롱하려 하자 장씨가 피해 달아나 내전(內殿)의 앞에 뛰어 들어와, '제발 나를 살려주십시오.'라고 하였으니, 대개 내전의 기색을 살피고자 함이었다. 내전이 낯빛을 가다듬고 조용히, '너는 마땅히 전교(傳敎)를 잘 받들어야만 하는데,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할 수가 있는가?' 하였다. 이후로 내전이 시키는 모든 일에 대해 교만한 태도를 지으며 공손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불러도 순응하지 않는 일까지 있었다. 어느 날 내전이 명하여 종아리를 때리게 하니 더욱 원한과 독을 품었다.(하략)
- 조선왕조실록 숙종 12년(1686년) 12월 10일
장옥정이 숙종의 승은(承恩)을 입고 한참 끗발을 올리던(이때 숙원淑媛이 된다), 그때 인현왕후가 장옥정의 종아리를 때렸던 것이다. 분노의 한방이었을까? 아니면 훈계를 위한 체벌이었을까? 이유야 어떻든 인현왕후가 장옥정을 때린 건 사실이었다. 인현왕후도 나름 성격이 있었던 것이다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숙종의 후궁이었던 희빈 장씨, 장희빈(張禧嬪)의
이야기가 시작 되는 모양 입니다.
재미있을 역사 이야기 기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