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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II
HERE FOLLOWS THE [YOGA OF]
KNOWING THE MIND, THE SEEING
OF REALITY, CALLED SELF-LIBERATION,
FROM ‘THE PROFOUND DOCTRINE OF SELF-LIBERATION BY MEDITATION UPON THE PEACEFUL AND WRATHFUL DEITIES’
자기 해방이라 부르는
마음 알기와 실재 보기[의 요가]는
‘정적존과 분노존의 명상에 의한 자기 해방의 심오한 가르침’에
의해 비롯되었다.
ACCORDING TO LĀMA KARMA SUMDHON PAUL’S AND LĀMA LOBZANG MINGYUR DORJE’S ENGLISH RENDERING
라마 카르마 숨돈 폴과 라마 롭상 밍규르 도르제의 영역에 의거하였다.
Wakefulness
깨어 있음
‘Wakefulness is the path to immortality; heedlessness is the path to death. Those who are wakeful die not; the heedless are as if dead already.
깨어 있음은 불멸의 길이고, 우둔함은 죽음의 길이다.
깨어 있는 자는 죽지 않고, 우둔한 자는 이미 죽은 것이다.
‘The wise, those who have realized this efficacy of wakefulness, rejoice in wakefulness, and are drawn to such spheres of activity as engage the Noble Ones.
깨어 있음의 이런 효과를 아는 자는 그 깨어 있음 속에서 기뻐하며, 거룩한 자들의 세계로 인도될 것이다.
‘Such sages, ever meditative, ever putting forth strong effort, attain the incomparable security of Nirvāa.
항시 명상하고 힘껏 노력하는 현명한 이들은
열반의 비길 떼 없는 안정에 도달한다.
‘Continually increasing is the glory of him who is wakeful, who hath aroused himself and is ever alert, who performeth blameless deeds, and acteth with becoming consideration, who restraineth himself, and leadeth a righteous life.
깨어 있는 자, 잠에서 일어나 항시 주의 깊은 자,
행위가 순수한 자, 숙고하여 행동하는 자, 자제하는 자,
올바른 삶을 영위하는 자, 그들의 영광은 끊임없이 자라난다.
‘Let such an one, rousing himself to wakefulness by self-restraint and self-subjugation make for himself an island which no flood can overwhelm.
자제와 극기를 통해 깨어 있음을 지향하는 자,
그는 자신을 위해 어떤 큰물에도 휩쓸리지 않을 섬을 만든다.
* * * *
‘As a man of discernment, standing on a rocky eminence, beholdeth those who are below and in distress, so doth the sage, who by his wakefulness hath put to flight his ignorance, look down upon suffering mankind from the Heights of Wisdom which he hath attained.
분멸 있는 자가 바위산에 서서 고뇌하는 아래 세상 사람들을 바라보듯이, 깨어 있음에 의해 무지를 날려버린 현인은 자신이 오른
지혜의 정상에서 고통받는 인류를 내려다본다.
‘Wakeful amidst the heedless, keenly vigilant amidst the sleeping ones, the wise man forgeth ahead, even as a charger outdistanceth a horse of lesser strength.’
우둔함 속에서 깨어 있으며 잠든 이들 속에서 주의 깊은 사람, 현명한 사람은 허약한 말을 앞지르는 날쌘 말과 같이 앞으로 나아간다.
The Buddha, from the Dhammapada, vv. 21–25, 28–29
(based upon N. K. Bhagwat’s Translation). 법구경
This yogic treatise, like the Gospel of St. John, teaches that one needs only to look within oneself to find Truth, for Truth is not—as the mind in its true state is not—a subject of the Kingdom of Time and Space and Māyā.
요한복음과 마찬가지로, 이 요가의 논문은 진리를 발견하려면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진리는 참다운 상태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시간과 공간 및 마야에 예속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The ancient teaching that the Universe is the product of thought, that Brahma thinks the Universe and it is—as Jehovah thought light and there was light—will, when meditated upon, lead the meditant to the realization that the only reality is Mind, the One Mind, of which all the microcosmic minds throughout the Cosmos are illusorily parts, that everything conceivable is, at root, idea and thought, and thus the offspring of Mind.
야훼가 빛을 생각하자 빛이 있었고 브라마가 우주를 생각함으로써 우주가 있듯이, 우주는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하는 고대의
가르침을 명상할 때 명상자는 단 하나의 실재는 마음이라고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마음’은 전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소우주적인 마음들로 이루어진 ‘한 마음’이며, 윤회계의 모든 것이 사실은
이 한마음으로부터 비롯된 관념이고 사념인 것이다.
The idea and the thought and the object are inseparable; and all three have their origin in mind.
It was Plato’s belief that ideas pre-exist in the mind, and that, being transcendent over all mundane concepts relating to past, present, and future, they are of that timelessness to which our text makes reference.
관념과 사념과 물체는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이 셋은 모두 마음에서 비롯된다.
플라톤은 마음 속에 관념이 먼저 있고, 그 관념은 과거. 현재. 미래에 관련된 모든 세속적 개념을 초월하여 무시간의 상태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Tibetan Masters of Yoga, by projecting a mental image, and, through yogic power of will, giving to it a form as palpable as that which builders give to the blue-print of an architect, have demonstrated how all external appearances, even the most solid-appearing objective things, are mind-made.
티벳에서는 요가의 달인들은, 정신적인 이미지를 투영하고,
의지의 요가를 통해 건축가가 건축업자들에 건네는 청사진처럼
심상을 물질화함으로써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 심지어 가장
견고하게 보이는 객관적인 것들도 마음의 작용에 의한 것임을 입증했다.
We must not think of mind as something tangible, as the misguided materialists do when they confuse brain substance with mind.
우리는 물질주의자들이 뇌(腦)와 마음을 혼동할 때 흔히 그렇듯이 마음을 유형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In its human manifestation, mind is an invisible energy capable of setting into activity the visible physical brain, just as an invisible vibration sets into activity a radio.
The brain thus activated gives off thought, and the radio sound.
눈에 보이지 않는 전자파가 라디오 소리에서 소리를 이끌어내듯
보이지 않는 인간의 마음이 뇌를 활성화시킨다.
그리하여 라디오는 소리를 내고, 활성화된 뇌는 사념을 일으킨다.
The sound is merely the product of the vibratory impulse to which the radio responds. Likewise, the thought produced by the brain is the product of the vibratory impulse imparted to the brain by an invisible consciousness, which is per se unknowable.
소리는 단지 라디오를 매체로 한 진동성 충격 전파의 산물일 뿐이며, 마찬가지로 뇌가 일으킨 사념은 불가사의 알 수 없는 마음으로부터 뇌에 도달한 진동성 충격 전파의 산물이다.
If Brahma fails to think the Universe, there is no Universe; and if there be no thought, there cannot be such a thing as that which men call a material object. Unless an inventor thinks, and then gives substance to an invention, there will be no invention.
만일 브라마(범천梵天)가 우주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주는 존재하지 않으며, 아무런 사념이 없다면 우리가 물질이라 부르는 것들은 있을 수 없다.
발명가가 무언가를 생각하여 그것을 구체화시키지 않는 한 발명은 없다.
As taught in our text, the One Mind, the cosmic focus of consciousness, is all-in-all; there is nothing other than it, no thought other than its thought, no object or universe independent of it.
의식의 우주적 구심점인 ‘한마음’은 모든 것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며, 세상에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고 그것의 사념 외에 어떤
사념도 없으며 그것과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물체나 우주는 있을 수 없다.
According to The Six Doctrines, all states of consciousness—the waking, the sleeping, the hypnotic, that at death and after death and at rebirth—are not, primordially viewed, true states, being only illusory emanations of the microcosmic mind.
‘여섯 가르침’에 따르면 모든 의식 상태- 깨어 있는 상태,
잠든 상태, 최면 상태, 죽음의 상태, 사후의 상태, 재탄생의 상태- 는 원래 참다운 의식 상태가 아니라 소우주적인 마음의 환상들일 뿐이다.
Our apparently solid planet is, accordingly, no more solid or real than the world of the dream-state.
A stone is as hard in a dream as in the waking-state, because the stone and the hardness are mental concepts. Thus, substance per se having no existence apart from mind, the thesis of materialism is fallacious.
우리의 이 단단한 지구도 사실은 꿈 속의 세계에서보다 견고하거나 실제적인 것이 아니다.
돌이 깨어 있을 때만큼 꿈 속에서도 단단하게 느껴지는 것은 돌의 단단함이 마음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결국 마음을 떠나서는 물질 그 자체도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물질주의의 이론은 오류인 것이다.
Wherever there is law, as there is in every manifested aspect and kingdom of nature, from the atom to the cosmos, there is mind.
Mind itself, having neither place nor form, is measureless. As our text repeatedly emphasizes, mind is of the uncreated, timeless, spaceless, all-embracing Reality.
물질 원자로부터 우주에 이르기까지 법이 있는 곳에는 자연계가
있고 표현된 것이 있으며 그 어디든 마음이 있다.
그러나 마음 그 자체는 주소와 형태가 없고 측량할 수도 없다.
되풀이하여 강조하지만 마음은 창조된 적이 없고 시간과 공간에
걸림이 없으며 모든 것을 수용하는 실재이다.
Evolution is a purely mental process.
The microcosmic mind of man fashions for itself ever new mansions; and, in the process of evolution, there is continuous expansion of mind until at-one-ment with the One Mind has been attained.
진화는 순수한 마음의 작용이다.
개인의 소우주적인 마음은 항시 저 자신을 위한 새로운 주거를
만들며, 한마음과 합쳐질 때까지 진화의 과정을 나아가면서 지속적으로 확대된다.
The many illusorily re-become the One, the One illusorily re-becomes the many; and thereby is made manifest the heart-throb of the cosmos, the pulsation of existence, the inbreathing and the outbreathing by Brahma of the cosmic Whole, the eternal tidal rhythm of the Great Ocean.
여럿은 환영 속에서 다시 하나가 되고, 하나는 환영 속에서 다시
여럿이 된다. 그와 같이하여 우주의 심장 박동, 존재의 맥박,
브라마에 의한 우주 전체의 들숨과 날숨, 영원한 대양의 밀물과
썰물이 있게 된다.
Just as we speak of an expanding physical universe when the tide in the Great Ocean is rising, so must we think of an expanding human mind during this Day of Brahma. From the reservoir of Cosmic Consciousness there now flows through the microcosmic mind of man a tiny trickle. As evolution proceeds, this trickle will grow into a rivulet, the rivulet into a deep broad river, and, at last, this river will become an infinite sea.
The rain-drop will have been merged in its Source
대양의 조수가 밀려들 때 팽창하는 물질 우주를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브라마의 낮’ 동안 우리는 확대되는 인간의 마음을 생각한다.
우주의식의 저장고로부터 개인의 소우주적인 마음을 통하여
이제 의식의 작은 물방울이 흐른다.
진화가 계속되는 동안 이 물방울은 개울이 되고,
개울은 깊은 강이 되며, 이 강은 결국 무한의 바다가 될 것이다.
그때 빗방울은 자신의 근원과 하나가 되어 있을 것이다.
The Conquerors of Life and Death vow not to enter Nirvāna until all things are restored to the divine at-one-ment; for They know it is only when They and all beings have awakened from the Earth-Dream and from the dreaming in the after-death and rebirth states that Complete Buddhahood can be attained.
삶과 죽음을 완전히 정복한 사람은
모든 존재가 신성한 하나의 경지에 이를 때까지
열반에 들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왜냐하면 완전한 성불(成佛)은 자신과 모든 존재가 지구-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리고 사후 죽음과 재탄생의 꿈에서 깨어나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Though They themselves have gained the Goal, it cannot be fully enjoyed until all other sentient creatures, who, along with Them collectively form the Whole, have gained the Goal also.
그 자신은 비록 목표를 달성했더라도 다른 모든 지각 있는 생물들과 함께 전체를 형성하는 다른 유정(有情) 역시 목표를 얻기 전까지는 달성된 목표를 충분히 향유할 수 없다.
Mind may be regarded from our human viewpoint as being composed of concepts, or ideas, its function being to think, and its products being thoughts; and, correlatively, we may mentally resolve the visible Universe into ideas, and these into mind, the One Mind, which our Teachers assert is the Sole Reality. So viewed, life is no more than an experience of mind.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마음은 개념이나 관념으로 이루어져 있고,
마음의 기능은 생각하는 것이며 마음의 산물은 사념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정신적인 관점에서 물질 우주를 관념으로, 그리하여 이것을 마음으로, 스승들이 말하는 단 하나의 실재인 한마음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When we know mind, we also know matter, for matter is mind; and there is nought else conceivable save mind, as this yoga postulates.
In the One Mind is the summation of the whole of consciousness, the ineffable at-one-ment of all the One Mind’s microcosmic aspects.
우리가 마음을 알 때 우리는 또한 물질을 안다.
물질이 곧 마음이기 때문이며, 이 요가에서 말하듯 마음 없이는
아무것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마음 속에는 의식의 모든 것이 요약되어 있으며, 그것의 소우주적인 모든 측면이 표현 불가능한 하나의 상태로 존재한다.
In transcending the microcosmic mind of the human ego, man transcends himself; he becomes a conscious participator in the all-embracing Universal Mind, the Over-Mind, the Cosmic Consciousness.
에고의 소우주적인 마음을 초월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을 초월하며, 모든 것을 포용하는 보편적인 마음이자 마음을 넘어선 마음인 우주의식의 깨어 있는 동참자가 된다.
The Dream of Existence is for the purpose of enabling the dreamer to attain the Wisdom born of the Full Awakenment of Buddhahood. Ignorance gives way to understanding, illusion to disillusion, the state of sleep to the state of waking, the unreal to the real.
Sangsāric consciousness is compounded of dualities; and beyond the dualism of the dreaming and the waking lies That which is beyond both.
존재의 꿈은 꿈꾸는 자가 꿈을 깰 때 생겨나는 깨달음의 지혜를
얻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때 미망과 무지와 수면과 거짓이 사라지고 미망에 대한 환멸과 이해와 각성과 진실이 찾아온다.
윤회계의 의식은 이원적이며, 꿈과 꿈 깨어남의 이원성 너머에
그 둘을 초월한 상태가 있다.
Through knowing the microcosmic self, his own illusory little self, man attains knowledge of the selfless self, beyond self, the Self of All, the One Mind, beyond mind. This supreme attainment, being possible only when existence itself, as man knows existence, has been transcended, must forever remain, for the unenlightened, mentally incomprehensible, as our text suggests when enumerating the various names men apply to it.
환영에 근거한 소우주적인 자아self를 앎으로서 인간은 자기 너머의 자아, 자아 없는 자아, 모든 것의 자아Self, 마음 너머의 마음,
한마음을 알게 된다.
우리가 존재로 알고 있는 존재 그 자체를 넘어설 때에만 가능한
이 최고의 성취는, 여러 가지 술어로 설명하지만, 아직 무명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의 지성에서는 영원히 불가사의로 남을 수밖에 없다.
So it is that the paths of the lower yogas merge into the Great Path, whereon the pilgrim relinquishes ego and self and even life. The Masters of the Mahāyāna declare that all verbal and symbolic methods of transmitting their teachings are directed to the one end of leading the disciple to that Great Path itself.
요가의 여러 가지 작은 길들은 이 큰길로 합쳐지며,
이 길을 가기 위해 구도자는 에고와 자아를 버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까지도 포기한다.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담은 모든 언어 및 상징 수단들은 오직 이 큰길로 수행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다.
Nevertheless, the disciple must first have exhausted the lesser paths; initially there must be the seed, then the growth, then the blossoming, and then the fruition. The acorn is not an oak as soon as it sprouts.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행자는 초기에 작은 길에서 헤맨 적이 있어야 한다. 최초의 씨앗이 있어야 그것이 싹트고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도토리는 싹이 트는 즉시 참나무일 수 없는 것이다.
In this supreme system of realizing Truth in its undivided unity, by the aeon-old method of knowing the self in the sense implied by the Ancient Oracles and Mysteries, all the ordinary yogic practices or techniques, postures, breathings, exercises, and use of concentration-points are transcended.
The ‘Yoga of Knowing the Mind in its Nakedness’ is, in fact, as the text proclaims, ‘the most excellent of yogas’.
고대의 신탁과 비의(秘意)에 숨겨져 전하는 것과도 같은 오랜 자기 인식 수단에 의하여 분화되지 않은 완전한 합일로서의 진리를 깨닫게 만드는 이 최상의 가르침은 자세와 호흡, 정신집중 등 일반적인 요가의 모든 수행 지침을 초월한다. 사실 ‘마음 알기 요가’는 본문에서 말하듯 ‘가장 탁월한 요가’인 것이다.
Those who are treading any of the lesser paths are unaware, unless under the guidance of a perfected guru, that they are on a lesser path.
작은 길들 중의 어느 하나를 가는 사람은 어떤 완벽한 스승의 인도가 없는 한, 자신이 작은 길 위에 있음을 알지 못한다.
With very rare exceptions, the various teachers of yoga have unknowingly deemed some particular system of conventionalized yoga to be all-sufficient in itself, whereas it is, according to our text, no more than a preparation for the truly Mahāyāna or Great Path.
양식화된 요가의 어떤 특수한 체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잘못 생각한 요가의 스승들이 이따금 있지만 이 책의 본문에 의하면 그것은 참다운 대승(大乘)의 큰길을 가기 위한 준비일 뿐이다.
Thus the teachings herein set forth are presented as being the very quintessence of all yogas; and the Great Path leads from the mundane to the supramundane, from that which is formed and manifested to that which is beyond form and manifestation, from the created, the mind-projected, to the uncreated, the mind-contained, from the phenomenal to the noumenal, from the many to the One, from the Sangsāra to Nirvāna.
그리하여 이 책의 보인 가르침은 모든 요가의 핵심으로 존재한다.
큰길은 세속에서 초세속으로, 형태와 표현에서 형태와 표현 너머의 것으로, 창조된 것과 마음의 투사물에서 창조되지 않은 것과 마음의 함유물로, 현상계에서 실재계로, 여럿에서 하나로, 윤회에서
열반으로 수행자를 인도한다.
Similarly, the Bhagavad-Gītā teaches that the yoga of divine understanding is paramount, and leads to liberation. Since man, as the Greek Sages declared, is the measure of all things, he sees beyond the illusion of the world and of the self once he has attained understanding of what he intrinsically and transcendentally is.
<바가바드 기타> 역시 신성한 이해의 요가가 최고이며 완전한
해방으로 인도한다고 가르친다. 그리스의 현인들이 말했듯이
인간은 모든 것의 표준이며, 그는 자신의 본질과 초월성을 일단
이해하면 세계와 자기의 환영 저 너머를 바라보게 된다.
This yoga teaches that mind and the world are inseparable, that without mind there would be no world, that the world is the child of mind, that, as the Rishis taught ages ago, Mind is the source of all that man perceives as time and space and the Universe.
이 요가는 마음과 세계가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마음 없이는 세계도 없고 세계는 마음의 결과이며,
그 옛날 힌두교의 선인들이 말했듯이 ‘마음’은 시간과 공간과 우주로 인식되는 모든 것의 근원이라고 가르친다.
The Sangsāra being the dream-product of the One Mind, its illusory reality is entirely relative; when the One Mind no longer sustains its Creation, its Creation ceases to be.
윤회는 한마음의 꿈의 산물이며, 윤회의 환상적인 현실은 모두가 상호 연결되어 있다.
한마음이 더 이상 자신의 창조물을 인정하지 않을 때 그 창조물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The time approaches rapidly when occidental scientists, too, will realize that all their so-called exact knowledge is knowledge not of reality, but of an ever-changing, evanescent mirage. Instead of studying the real, they are studying the unreal, the phenomenal instead of the noumenal, appearances rather than the cause of appearances.
서양의 과학자들 역시 스스로 정확하다고 생각했던 지식들이 실재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덧없는 신기루에 관한 지식임을 알게 될 때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그들은 실재가 아니라 비실재를, 본질이 아니라 현상을,
상황의 원인이 아닌 상황 자체를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
In the True State of the One Mind, the pluralistic Universe has no existence; and therein man, as man, together with his mind-begotten world of sensuousness and all his mundane sciences, will have vanished into the Voidness.
한마음의 참다운 상태에서는 다원론적 우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상태의 인간은 인간으로서 자신의 마음이 낳은 감각의 세계라든가 자신의 모든 물질 과학과 함께 공(空) 속으로 이미 사라져버린 상태일 것이다.
The Yoga of Knowing The Mind
[PART I. THE INTRODUCTORY PRELIMINARIES]
제1부 예비 지식
[THE OBEISANCE]
귀의
To the Divine Ones, the Tri-Kāya,
Who are the Embodiment of the All-Enlightened Mind Itself, obeisance.
모든 것을 비추는 마음의 화현인 삼신(三身),*
그 신성한 존재들에게 절하나이다.
* Sku-gsum(pron. Kū-sūm), the three states in which the Buddhas,
the All-Enlightened Ones, exist, namely
쿠숨, 모든 것을 밝히는 자인 붓다들이 존재하는 세가지 상태를 가리킨다.
(1) the humanly incomprehensible, transcendent at-one-ment of the Dharma-Kāya(‘Divine Body of Truth’), the primordial, unmodified, unshaped Thatness, beyond the realm of descriptive terms, and knowable solely by realization;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인 하나의 상태에 있는 법신(法身), ‘진리의 몸’.
오직 깨달음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원초적이고 한정할 수 없으며 형상화되지 않는 진여(眞如).
(2) the celestial state of the Sambhoga-Kāya(‘Divine Body of Perfect Endowment’),
the reflex or modified aspect of the Dharma-Kāya; and
천상의 상태에 있는 보신(報身), ‘완전한 자질의 몸’, 법신의 반영되거나 한정된 측면.
(3) the state of divinely pure human embodiment, the Nirmāa-Kāya(‘Divine Body of Incarnation’).
신성하고 순수한 인간의 상태에 있는 화신(化身)-육화(肉化)한 몸.
The personifications of the Tri-Kāya vary according to sect or specialized doctrine. Amitabha, the Dhyānī Buddha of Boundless Light, Who presides over the Western Paradise of Sukhāvatī, very often personifies the Dharma-Kāya. In the Bardo Thödol series of texts, to which this text belongs, Samanta-Bhadra, the Primordial Buddha of the Nyingma School, personifies the Dharma-Kāya, Avalokiteshvara the Sambhoga-Kāya, and Padma-Sambhava the Nirmāna-Kāya, as in Illustration VII.
삼신의 의인화는 종파나 특수화된 교의에 따라 다르다.
끝없는 빛을 상징하는 서방 정토의 선정불 아미타바는 흔히 법신을 나타낸다.
이 원본을 포함하는 일련의 <바르도되돌> 원본에서는 낭마 종의 본초불 보현(普賢)이 법신, 관자재(觀自在)가 보신, 파드마삼바바가 화신이다.
[THE FOREWORD]
서문
This treatise appertains to ‘The Profound Doctrine of Self-Liberation by Meditating upon the Peaceful and Wrathful Deities’.
It expounds the Yoga of Knowing the Mind, the Seeing of Reality, Self-Liberation.
By this method, one’s mind is understood.
이 논문은 ‘정적존과 분노존의 명상에 의한 자기 해방의 심오한
가르침’에 속한다.
이 논문은 마음 알기와 실제 보기와 자기 해방의 요가를 설하니,
이 방법에 의해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있노라.
[THE GURU’S FIRST CHARGE TO THE DISCIPLES AND THE INVOCATION]
제자에 대한 스승의 첫번째 훈령과 기도
O blessed disciples, ponder these teachings deeply.
Samayā; gya, gya, gya.
E-ma-ho!
오, 축복받은 (영적)제자들이여, 이 가르침을 깊이 음미하라.
사마야, 갸, 갸, 갸.
에마호!
[SALUTATION TO THE ONE MIND]
한마음에 대한 인사
All hail to the One Mind that embraces the whole Sangsāra and Nirvāna,
That eternally is as it is, yet is unknown,
That although ever clear and ever existing, is not visible,
That, although radiant and unobscured, is not recognized.
윤회와 열반을 모두 수용하는 한마음에 절하나니,
그것은 지금 이대로 영원하지만 알려지지 않으며,
그것은 항시 투명하고 항시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으며,
그것은 빛나고 명료하지만 인식되지 않도다.
[THESE TEACHINGS SUPPLEMENT THOSE OF THE BUDDHAS]
이 가르침은 붓다들의 가르침을 보충함
These teachings are for the purpose of enabling one to know this Mind.
All that has been taught heretofore by the Buddhas of the Three Times, in virtue of Their having known this Mind, as recorded in ‘The Door of the Dharma’, consisting of the Eighty-Four Thousand Shlokas, and elsewhere, remains incomprehensible.
The Conquerors have not elsewhere taught anything concerning the One Mind.
Although as vast as the illimitable sky, the Sacred Scriptures contain but a few words relating to knowledge of the mind.
This, the true explanation of these eternal teachings of the Conquerors, constitutes the correct method of their practical application.
이 가르침은 그 마음을 알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
그 마음에 의해 삼세(三世)의 붓다들이 지금까지 가르친 모든 것은
팔만 사천 법문과 다른 곳에 기록되었으니 이해되지 않고 남아있도다.
승리자들은 한마음에 관해 따로 가르친 적이 없고,
신성한 경전은 많으나 그 마음에 관해 별로 언급하지 않도다.
승리자들의 영원한 가르침에 대한 참다운 설명인 이 글은 그것의 올바른 실제 적용법이로다.
[THE GURU’S SECOND CHARGE TO THE DISCIPLES]
제자에 대한 스승의 두 번째 훈령
Kye! Kye! Ho!
Blessed disciples, harken.
케! 케! 호!
축복받은 제자들이여, 귀를 기울이라.
[THE RESULT OF NOT KNOWING THE ONE MIND]
한마음을 알지 못하는 결과
Knowledge of that which is vulgarly called mind is widespread.
Inasmuch as the One Mind is unknown, or thought of erroneously, or known one-sidedly without being thoroughly known as it is, desire for these teachings will be immeasurable. They will also be sought after by ordinary individuals, who, not knowing the One Mind, do not know themselves.
They wander hither and thither in the Three Regions, and thus among the Six Classes of beings, suffering sorrow.
Such is the result of their error of not having attained understanding of their mind.
Because their suffering is in every way overpowering, even self-control is lacking to them.
Thus, although one may wish to know the mind as it is, one fails.
세상에는 마음이라 불리는 것에 관한 지식이 만연되어 있지만,
한마음을 모르거나 잘못 알거나 온전히 알지 못하고 편파적으로 아는 한,
이 가르침에 대한 갈망이 무한하리라.
한마음을 모르고 자신을 모르는 평범한 사람들 역시 이 가르침을 찾게 되리라.
그들은 슬픔을 겪으며 삼계(三界)와 육도(六道)를 이리저리 헤매나니,
그것은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과실의 결과로다.
그들의 고통은 어느 모로 보나 너무 커서 자제할 수 없으며,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고 싶어도 그럴 수 없노라.
[THE RESULTS OF DESIRES]
욕망의 결과들
Others, in accordance with their own particular faith and practice, having become fettered by desires, cannot perceive the Clear Light.
They are overwhelmed by suffering, and are in darkness because of their suffering.
Although the Middle Path contains the Twofold Truth, because of desires it finally becomes obscured.
Desires likewise obscure Kriyā-Yoga and Seva-Sādhanā, and even the greatest and sublimest states of mind.
자기만의 신앙과 습관에 따르면서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들 역시 투명한 빛을 감지할 수 없나니,
고통으로 짓눌리고 그로 인해 어둠 속에 있노라.
중도(中道)는 비록 이중의 진실(자연계의 일반적 진실과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진실)을 포함하지만 욕망으로 인해 결국 모호해지며,
욕망은 크리아 요가(계율과 행위)와 세바 사다다나(봉사 수행),
가장 위대하고 숭고한 마음까지도 흐리게 하도다.
[THE TRANSCENDENT AT-ONE-MENT]
초월적 합일
There being really no duality, pluralism is untrue.
Until duality is transcended and at-one-ment realized, Enlightenment cannot be attained.
The whole Sangsāra and Nirvāna, as an inseparable unity, are one’s mind.
사실 이원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다원론은 진실이 아니니,
이원성을 초월한 합일을 알지 못하는 한 깨달음에 이를 수 없노라.
윤회와 열반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며, 자신의 마음이로다.
[THE GREAT SELF-LIBERATION]
위대한 자기 해방
Owing to worldly beliefs, which he is free to accept or reject, man wanders in the Sangsara.
Therefore, practising the Dharma, freed from every attachment, grasp the whole essence of these teachings expounded in this Yoga of Self-Liberation by Knowing the Mind in its Real Nature.
The truths set forth herein are known as ‘The Great Self-Liberation’; and in them culminates the Doctrine of the Great Ultimate Perfection.
자유로이 수용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세속적 신앙들로 인하여 인간은 윤회 속에서 방황하나니.
모든 집착을 떠난 법(法)을 실천하여 마음의 본성을 깨닫고
이 자기 해방의 요가에 담긴 가르침의 핵심을 이해하라.
여기 보인 진실은 ‘위대한 자기 해방’으로 불리며, 그것은 ‘대구경(大究徑 족첸)의 가르침’에서 절정에 이르나니,
[THE GURU’S
THIRD CHARGE TO THE DISCIPLES]
제자에 대한 스승의 세 번째 훈령
Samayā; gya, gya, gya.
사마야, 갸, 갸, 갸.
[THE NATURE OF MIND]
마음의 본성
That which is commonly called mind is of intuitive Wisdom.
Although the One Mind is, it has no existence.
Being the source of all the bliss of Nirvāna and of all the sorrow of the Sangsāra, it is cherished like the Eleven Yānas.
마음은 직관적 지혜이고,
한마음은 있어도 존재를 갖지 않노라.
열반의 모든 축복과 윤회의 모든 슬픔인 그것은
십일승(十一僧)처럼 소중하도다.
[THE NAMES GIVEN TO THE MIND]
그 마음에 주어진 이름들
The various names given to it are innumerable.
Some call it ‘The Mental Self’.
Certain heretics call it ‘The Ego’.
By the Hīnāyanists it is called ‘The Essentiality of Doctrines’.
By the Yogāchāra it is called ‘Wisdom’.
Some call it ‘The Means of Attaining the Other Shore of Wisdom’.
Some call it ‘The Buddha Essence’.
Some call it ‘The Great Symbol’.
Some call it ‘The Sole Seed’.
Some call it ‘The Potentiality of Truth’.
Some call it ‘The All-Foundation’.
Other names, in ordinary language, are also given to it.
그것에 주어진 이름은 무수하여,
어떤 이들은 그것을 ‘진아眞我’라 부르고,
어떤 이교도들은 그것을 자아(自我에고)라 부르며,
소승들은 그것을 ‘가르침의 핵심(종지宗旨)’이라 부른다.
유가행(瑜伽行; 無着)파에서는 그것을 ‘지혜’라 부르고,
어떤 이들은 그것을 ‘지혜의 피안(彼岸)에 이르는 수단’이라 부르며,
어떤 이들은 그것을 ‘불성(佛性)’이라 부른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위대한 상징’이라 부르고,
어떤 이들은 그것을 ‘유일한 씨앗’이라 부르며,
어떤 이들은 그것을 ‘진리의 잠재력’이라 부른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모든 것의 기반’이라 부르며,
일반 언어의 또 다른 이름들이 그것에 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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