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수장되었으면 영원한 국민적 우상이 될 수도 있었겠네요....
지금처럼 국민들 허리 부러뜨릴 일도 안 생겼을꺼구여....
아쉽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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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납치사건
‘한국 정부는 김대중을 재판에 회부할 가능성도 있다. 김대중 망명에 대비하라.’‘사건의 배후조종자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틀림없다.’
한국이 ‘김대중 납치사건’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73년 10월 서울 미대사관이 워싱턴으로 타전한 비밀전문 내용이다. 이 내용에서도 알 수 있지만 김대중 납치사건은 이 당시에 국제적으로 많은 관심을 가지게 한 사건이었다. 이번 주 기획글에서는 김대중 납치사건을 이야기해 보려한다.
1. 김대중이란 사람은?
어린시절 김대중은 1925년 12월 3일 한반도 서남쪽 끝에 위치한 목포에서 34km 떨어진 외딴 작은섬 하의도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이다. 일본인 지주밑에서 소작농을 하던 가난한 농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 곳에서 하의 초등학교 4학년 때, 목포 북교초등학교로 전학하여 1939년 졸업했다. 이어 5년제인 목포상업학교(목포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여 1943년 졸업했다.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제의 강제 징집을 피하기 위해 해운회사에 취직을 하게 된다. 1945년 해방을 맞은 그는 해운사업에 주력하여 사업에 상당한 성공을 거둔 청년실업가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극심한 고난을 가져온 정치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정계입문 그것은 당시 점차 독재화되어 가던 이승만 정권때문이었다. 친일파를 우대하며 무능하고 부패한 독재정권에 맞서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정치역정은 시작부터 불운했다. 1961년 그는 두 번의 실패 끝에 세번째 도전한 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그러나 당선 3일만에 5.16 군사쿠데타에 의해 국회가 해산되고 당선이 무효된다. 그리고 정치규제에 묶이는 비운을 맞게 된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면서 마침내 용기와 희망의 정치인으로 촉망받게 된다. 1965년 민중당 대변인을 거쳐 이듬해에는 정책위의장을 역임한데 이어 1967년 통합야당인 신민당 대변인이 되면서 정계의 주목을 받는다. 특히 국회도서관을 가장 많이 이용해온 그는 철저한 준비로 국회의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그는 전체적인 윤곽에서부터 세부사항에 이르기까지 치밀한 비판과 동시에 항상 정책대안을 제시했다. 국회의 각종 위원회와 재무, 건설, 외교, 예산, 국방 등의 상임위원회에서 전문성을 키웠다. 박정희 정권이 장기집권을 꿈꾸면서 그는 가장 강력한 반대세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 1969년 박정희 정권의 3선개헌을 저지하기 위한 역사적인 장충단공원 집회가 바로 이를 입증하게 된다. 그는 이 날 연설을 통해 패배주의에 젖어 있던 야권의 결속과 민주주의 회복의 희망으로 부상하게 된다. 1971년 그는 드디어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박정희씨와 정면대결을 펼치게 된다. 관권과 금권, 온갖 부정이 난무한 가운데서도 그는 46%의 지지를 얻게 된다. 비록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지만, 국민속에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깊은 인상을 심는 계기가 되었다.
고난기 1971년 박정희의 철권통치에 대한 정면 도전은 그에게 30년에 가까운 고난과 시련의 서곡이 되었다. 부정선거로 간신히 승리한 박정희씨는 마침내 민주선거를 포기하게 된다. 1972년 10월 소위 종신 대통령을 꿈꾸며 유신헌법을 날치기 처리하여 현대판 집정관 독재체제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어서 민주인사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혹독한 억압이 시작된다. 가장 강력한 도전세력이었던 김대중씨는 당연히 그 탄압의 최종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1973년 8월 일본 도쿄호텔에서 중앙정보부의 공작원에 의해 납치당하게 된다. 그를 살해하여 한국 정계에서 완전히 제거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전세계의 강력한 경고로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1주일만에 서울의 자택에 돌아오게 되고 모든 활동이 중단되는 가택연금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을 단행, 꺼져 가던 민주화의 불씨를 다시 지핀다. 이로 인해 5년형을 받고 수감되어 1978년 12월 석방되었으나 또다시 연금된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당하게 된다. 이어 두 달 뒤에 그는 가택연금이 해제되고 사면 및 복권조치를 받게 된다. 그러나 민주화를 향한 '서울의 봄'도 잠시뿐이었다. 1980년 5월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에 의해 또다시 내란음모혐의로 체포된다. 그 해 11월 계엄군법회의에서 날조된 내란음모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그 후 무기에서 20년으로 감형되고 1982년 12월 석방되어 두 번째 망명길에 오른다. 이 과정에서 그는 군사정권의 모진 고문과 탄압, 그리고 온갖 유혹에도 굽히지 않았으며, 미국 망명중에도 조국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그치지 않았다. 1985년 귀국한 뒤에도 그를 둘러싸고 가택연금과 해제는 반복되었다. 한국 민주화의 돌파구는 1987년 6월 항쟁에서 열렸다.
대통령으로 이에 따라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되었고 그는 실형면제와 복권조치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될 때까지 여러번 실패를 경험했다. 1987년과 1992년 선거에서 그는 패배했지만 좌절하지 않고 준비된 대통령이 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가 네번째로 도전한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드디어 40.3%의 지지를 얻어 당선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8년 2월 25일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2. 김대중 납치
이철희와 하태준국장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하 중정부장)이 불러서 궁정동 안가에 갔다. 이후락 중정부장이 일본에 있는 김대중 문제를 이야기하며‘죽일가? 살릴가?’라는 이야기를하며 동경에 있는 김대중을 무조건 데려오라고 이 둘에게 명령한다. 김대중 납치의 계획은 하태준 해외공작국장이 총괄하고 윤진원 공작단장이 현장 지휘를 했으며 김기완 주일 공사 등이 동원되었다. 동원된 인원은 동경에서 25명, 오사카와 부산에 오는 용금호 선상 21명 등 총 46 명이 직접 행동에 나섰다. 실행팀은 9개조로 편성되었다.
이들은 김대중을 납치하기 위해 사전 미행을 하기 시작한다. 미행은 주일한국대사관 유충국, 홍성채, 유영복, 김기도 등이 담당했다. 어느 정도 계획이 세워지자 73년 8월 8일 13:19 현장 납치조가 행동을 개시한다. 윤진원이 현장을 지휘하고 주일대사관의 한춘, 김정찬, 홍성채 그리고 유영복, 유충국 가담한 6명이 그랜드 팔레스 호텔 2212호실에서 양일동을 만나고 나오는 김대중을 납치하여 2210호로 끌고 들어갔다. 이들은 김대중을 침대에 눕히고 마취제를 묻힌 수건으로 코를 막아 그를 기절시킨다. 기절한 김대중을 이들은 엘레베이터에 태워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간다. 여기서 김병찬과 유충국은 사라지고 나머지 4명이 김대중을 승용차 뒷자리 바닥에 깔고 오사카 중정 안가인 오카모토 빌딩 302호 총영사관 숙소로 이동한다. 안가에는 박승민, 김기도 가 김대중을 기다리고 있었다. 윤진원이 김대중을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여 다른 다다미방으로 옮겼다. 안가에서 김대중은 코만 남기고 화물 포장용 테이프로 얼굴 전부 포장하여 차에 태워 오사카 부두로 데려간다. 9일 새벽 한 시경, 김대중의 눈에는 안대를 쓰게 하고 몸을 검은 보자기에 쌓아 로프로 선창에 실었다. 김대중이 자해를 못하도록 붕대 감은 막대기를 재갈로 끼웠다가 막대기는 김대중의 요청으로 제거한다. 9일 오전 8:45 오사카 출발한다. 10일 현해탄을 건넌배는 11일 밤 부산 도착하고 12일 오전 7시 부산 부두 진입한다. 부두에는 김진수 중정 일본과장, 강재원 공작과장, 윤석만, 김선대 의무실장 등 나와있었다. 간단한 신상 체크를 받은 김대중은 엠블러스(사실은 중정의 위장차)로 서울로 호송되어 안가 감금된다. 안가에서 하태준 국장이 직접 와서 김대중임을 확인하고 다음날 동교동 집 앞에서 놓아주었다.
이것이 김대중 납치의 처음과 끝이다. 여기에는 당사자와 피해자의 대립되는 의견이 있다. 첫 번째는 비행기 출현설이다. 납치자는 비행기 소리 들었다고 증언하였지만 선원들은 엔진롬 옆방이라 엔진 가속 소리를 비행기 소리로 들었을 것이라고 증언하였다. 당시 미국 대사관 관계자들도 미국 비행기 출동설 부인하였고 납치자 자신도 후에 미대사관측에 물었으나 대사관측이 부인하였다. 두 번째는 납치자 현해탄 수장설이다. 납치자는 수장설 주장하지만 이철희는 죽이려고 했으면 해외공작팀이 아닌 다른 팀이 투입되었을 것이라며 수장설 부인하였고 선원들도 수장설은 부인하고 있다.
이상으로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해 잠시 알아보았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한국현대사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사건의 하나이다. 이 사건은 그 당시의 우리 정치의 낙후성을 보여주는 한 사건이었다. 우리는 이 사건 책임자들의 처벌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김대중도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이 사건의 처벌을 원하지는 않았지만 진실이 밝혀지는 것은 원했다. 이제는 말할때가 왔다. 이 사건의 역사의 미스테리로 남기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