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마 4:12-25
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마 4:12-25 / [갈릴리 전도의 시작;막1:14-15,눅4:14-15]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은 예수께서는 유대를 떠나 갈릴리 에 있는 나사렛 집으로 되돌아가셨다. 그러나 곧 그곳을 다시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방 갈릴리 호숫가에 있는 동네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셨다. 이것은 14)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15) `스불론 지역과 납달리 지역 곧 지중해 연안의 도로 지역과 요단강 동부의 지역과 이방인들이 사는 갈릴리 지역이 영광에 가득 찰 것이다. 16) 어둠 속에서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이다. 그 빛이 죽음의 그림자에 덮여서 캄캄한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나타날 것이다.' 17) 이때부터 예수께서는 가르치기 시작하셨는데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다. 18) [어부들을 부르시다;막1:16-20,눅5:1-11, 요1:35-42] 하루는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지나다가 배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는 두 형제를 보셨다. 베드로라고도 불리는 시몬과 안드레로.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께서는 그들을 불러 `나를 따라오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20)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 나섰다. 21) 바닷가를 따라 조금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야고보와 요한을 만나셨다. 그들은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 안에서 그물을 깁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라고 부르시자 그들은 22) 일하던 것을 그만두고 아버지를 남겨 놓은 채 예수를 따라 나섰다. 23) [군중을 가르치시다;눅6:17-19] 예수께서는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온갖 병자와 앓는 사람을 고쳐 주셨다. 24) 예수께서 이적을 행하신다는 소문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자 먼 수리아 지방에 있는 병자들까지 병을 고치려고 몰려왔다. 예수께서는 온갖 병에 걸려 신음하는 환자들, 귀신 들린 사람들, 간질병자나 중풍병자들까지 다 고쳐 주셨다. 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온 엄청난 군중이 예수를 따랐다.
40일 동안 금식하신 후에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예수께서는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12-17) 예수의 사역의 시작은 세례 요한이 잡혀간 후입니다(12). 이는 예수의 길을 준비하는 세례 요한의 사명이 끝나고 참 복음이신 예수의 사역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첫 번째 메시지는 세례 요한처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입니다. 이 메시지의 핵심은 천국입니다. 천국은 하늘에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다만 유대인들은 출애굽기 20장 7절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입에 올리기를 꺼렸기에, 하나님 대신 하늘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눅 17:20-21).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라고 했습니다(롬 14:17). 이런 하나님의 나라의 은총을 누리려면 말씀대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매순간 예수를 나의 구원자로 고백해야 합니다.
나를 따라오라(18-25)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이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 갔습니다(20). 본문의 “따르다”는 ‘함께 같은 길에 있다’라는 뜻으로 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제자는 스승과 함께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고기를 잡는 대신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19). 사람을 낚는다는 것은 죄로 말미암아 멸망당할 영혼들을 구한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예수께서 당시의 율법학자 등 유식한 자들을 마다하시고 배운 것이 없는 어부들을 부르신 것은 그들의 중심과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수의 뜻에 호응하여 그들은 가족과 이별하고 전 재산인 배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 갔습니다(20). 예수께서는 이들과 더불어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연약한 것을 고쳐주셨습니다(23).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는 제자들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님의 능력을 받아 이런 예수의 사역을 이어갔습니다(행 2:1-47).
적용: 오늘 밤 송구영신 예배를 꼭 드리시고 금년 1년 동안 “하나님의 나라”가 당신과 당신 가정에 얼마나 임했는지 살펴보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회개함으로 시작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새해를 맞이하길 바랍니다.
옛날 종교개혁자들은 ‘새가 우리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새가 우리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마귀의 유혹을 피할 수는 없지만 마귀가 우리 안에 집을 짓지 못하게 할 수는 있습니다.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쳐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 17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영적전쟁을 할 때 성도들의 유일한 공격의 무기는 ‘성령의 검’입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시험을 받으시는 예수님]
< 설 교 >
큰 은혜를 예비하는 길
마 4:12-17 / 이한규 목사(분당샛별교회)
< 광명한 새벽은 찾아옵니다 >
지난주에 북한의 2인자인 장성택의 실각 소식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 금년에 수많은 북한 권력자들이 쫓겨나고 자살하고 처형되었습니다. 결국 북한의 고위직은 고위직이 아닌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시한부 인생’입니다. 그렇게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 왜 아무도 거사를 단행하지 않을까요? 김정은이 사라지면 고위층도 자기 기득권을 다 잃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역사를 보면 그렇게 되지 않을 때가 훨씬 많았습니다.
1975년부터 4년 동안 캄보디아의 급진 폴 포트 공산정권에 의해 전 국민의 4분의 1인 2백만 명이 학살당했습니다. 그 학살을 보다 못해 후견인 노릇을 하던 베트남 정권이 등을 돌리자 폴 포트 정권은 곧 무너졌습니다. 그 후 학살 주도자와 기득권층이 다 죽었습니까? 대부분 기득권을 유지했고 심지어는 정권을 잃고 북부 산악지역에서 게릴라전을 하다가 붙잡힌 폴 포트조차 사형되지 않고 가택 연금 상태에서 병사했습니다.
해방 후 친일파 기득권층이 다 죽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해방 전 가졌던 지위와 재산으로 해방 후에도 상당히 많은 사람이 각계 요직에 등용되었습니다. 역사를 보면 극단적인 독재자가 한풀이로 대량학살을 하지 않는 한 기득권층은 대개 살아났습니다. 기득권층은 변화에 빨라서 정권이 바뀌면 어느 새 그 정권 친향적으로 변하면서 대부분 기득권을 유지합니다. 아마 김정은이 사라져 북한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사회가 되면 북한 기득권층은 극히 일부분만 단죄를 받고 대부분은 기득권을 유지할 것입니다.
결국 김정은이 사라지면 자기 기득권도 빼앗길 것이란 북한 고위층의 염려는 기우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것을 깨닫고 북한 고위 기득권층이 김정은을 제거하면 지금처럼 김정은 한 명 때문에 평생 불안에 떨 일은 없게 될 텐데 왜 아직도 김정은의 제거 소식은 안 들릴까요?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만간 하나님은 단순히 독재자 한 사람을 제거하는 것 이상의 한민족 전체를 위한 최적의 때가 오게 하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북한 주민은 60년 이상을 흑암 중에 살았지만 이제는 북한이 곧 열릴 것 같습니다. 지금 젊은 김정은을 제거하지 않으면 그가 80세까지 산다고 해도 앞으로 50년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고 고위층도 고위층이 아니고 기득권층도 기득권층이 아닌 상황에서 불안에 떨며 살아야 합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김정은 한 명을 제거하고 숨 좀 쉬며 살겠다는 누군가가 나올 가능성이 큽니다. 그것은 역사의 순리입니다.
얼마 전 김정은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한 군인은 정신무장이 썩었다. 우리의 충성스런 백만 군인이 진격하면 다 도망칠 것이다.” 과연 그럴까요? 절대 충성하는 것 같은 경직된 북한 군인에 비하면 여유로운 우리 젊은 군인들은 오합지졸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은 체제와 경제 우위가 뒷받침되면 가능한 말이지만 지금처럼 체제가 공포정치와 감시로 간신히 유지되고 경제가 남한보다 현저히 떨어지면 통하지 않는 말입니다. 또한 그 말은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쉽게 변할 수 있는지를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챠우세스크 부부가 왜 1989년에 총살당했습니까? 24년을 철권통치를 한 챠우세스크의 독재가 어디서 깨졌습니까? 개신교 대형교회 하나 때문에 깨졌습니다. 대형교회가 강자 편에 서서 떡을 취하면 욕먹다가 결국 몰락하지만 정의 편에 서서 떡을 나누면 역사의 전진에 큰 보탬이 됩니다. 그런 대형교회라면 누가 교회 크기로 욕하겠습니까?
1987년, 전임 목사가 정권에 동조하면서 교인 수가 50명까지 줄은 루마니아의 한 개신교회에 라슬로 퇴케시(László Tőkés) 목사가 부임했습니다. 그는 정권에 동조하지 않고 하나님께 동조하면서 참된 교회를 만들어 교인이 2년 만에 5000명으로 늘었습니다. 공산정권은 위협을 느꼈지만 그를 죽이면 위대한 순교자로 만들까봐 1989년 12월 15일까지 그에게 교회를 떠나라고 추방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퇴케시 목사는 떠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비밀경찰이 강제로 퇴케시 목사를 연행하려고 하자 교인들이 인간방패를 형성해 막다가 점차 그 인간방패가 “자유를 달라!”는 시위대로 변했습니다. 12월 17일 새벽, 마침내 비밀경찰은 인간방패를 뚫고 퇴케시 부부를 피투성이로 만들어 연행해 갔습니다. 자신들 눈앞에서 담임목사가 비참하게 끌려가자 교인들은 광장으로 몰려갔고 그날 밤 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수백 명이 총에 쓰러졌습니다. 그러자 교인들과 시민들은 눈이 뒤집혀 더 데모를 했습니다.
그 데모대를 막으려고 챠우세스크는 12월 21일 10만 명의 관제데모 군중대회를 열었습니다. 거기서 자신을 지지하라고 연설할 때 교인들이 뒤에서 야유하자 그 야유가 번지면서 10만 명의 관제 데모대가 10만 명의 반정부 시위대로 돌변했습니다. 그 시위대에 군도 가담하면서 이틀 후 챠우세스크는 체포되었고 다시 이틀 후 성탄절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선고 직후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상황에서 두 부부는 160여발의 총탄을 맞고 총살당했습니다. 대중들의 마음이 돌변해 절대독재자가 총살당하는 데는 채 10일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만약 남북 간에 전쟁이 터지면 처음에는 약간의 피를 흘리겠지만 체제와 경제 경쟁에서 이미 패배한 것을 간파한 북한 장교와 군사들이 총부리를 김정은에게 되돌리면 통제 불능의 상태에서 순식간에 김정은은 체포되고 결국 성난 북한군에 의해 생중계되는 상황에서 총살되거나 자살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가장 겁냈던 사람이 김정일이었고 결국은 군중들의 돌변과 죽음의 공포에 대한 계속된 스트레스가 김정일을 말려 죽인 셈입니다.
요새 북한에도 휴대폰이 보급되면서 옛날에는 북중 접경지역에서 중국 핸드폰으로만 북한 내 일부 지역과 통화가 가능했지만 지금은 남쪽에서 한국 핸드폰을 몰래 가지고 들어간 북한 통신원과의 직접통화도 가능해진 상태입니다. 또한 탈북자들이 북으로 보내는 돈이 북한주민의 사고전환을 이루는 씨앗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 때가 되어 2014년에 북한에 획기적인 변화의 역사가 나타날 것 같습니다. 지금의 어둠은 새벽 여명의 빛이 나오기 직전의 깊은 어둠입니다. 아무리 어둠이 깊어도 광명한 새벽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 큰 은혜를 예비하는 길 >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는 선지자도 끊어졌습니다. 그러다가 400년 만에 희미한 빛이 세례 요한을 통해 비춰졌고 곧 이어 예수님의 찬란한 빛이 비춰졌습니다. 기다림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우리의 기다림도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조만간 고난의 터널을 벗어나 큰 은혜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큰 은혜를 예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이스라엘의 흑암기 4백 년 만에 나타난 위대한 선지자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당시 세례 요한은 강력하게 회개의 말씀을 선포해서 사람들은 그를 메시아로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로마 당국도 바짝 긴장했습니다. 결국 헤롯왕이 세례 요한을 왕실을 비판한 명목으로 체포했습니다. 하나님의 진영에 위기의 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들으시고 잠시 남쪽의 유대 지역에서 사역하시던 예수님은 데모하러 전면에 등장하지 않고 오히려 북쪽의 갈릴리로 물러가셨습니다. 언뜻 보면 용기 없는 비겁한 모습 같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무조건 전진을 외치는 삶이 용기인 줄 압니다. 그러나 지혜가 뒷받침되지 않는 용기와 때를 분별하고 기다릴 줄 모르는 용기는 만용입니다.
다윗은 세 번 왕의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첫째, 사무엘로부터 왕의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삼상 16:13). 둘째, 사울이 죽은 후 블레셋에서 헤브론 지역으로 돌아와 자신이 속한 유다 지파 사람들로부터 왕의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삼하 2:4). 셋째, 사울의 아들인 이스보셋이 암살되자 이스라엘의 각 지파 장로들이 헤브론에 와서 다윗에게 왕의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전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삼하 5:3).
다윗은 처음에 사무엘로부터 왕의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결코 왕이 되려고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사울의 질투로 끊임없이 쫓겨 다녔지만 그래도 기다렸습니다. 나중에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결정적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죽이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마침내 최적의 은혜의 때가 찾아옵니다. 성도는 ‘떼를 잘 부리는 사람’이 되지 말고 ‘때를 잘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거기서 고향인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셨습니다(13절). 왜 그랬을까요? 누가복음에는 고향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했기 때문이라고 나옵니다(눅 4:29-31). 그 외에 갈릴리 지역의 중심도시인 가버나움이 사역상 중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버나움은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의 고향이었고(막 1:29), 세리 마태도 그곳 출신으로 추정됩니다.
본문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가나안 정복전쟁 후 갈릴리 지방은 잇사갈, 스불론, 아셀, 납달리 지파에 분배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북쪽 접경지였기에 이방 제국들의 외침과 지배가 잦아서 혼혈과 혼합문화와 혼합종교가 성행했습니다. 그래서 남쪽 유대인들로부터 ‘이방의 갈릴리’로 불리며 갈릴리에서는 결코 선지자가 나지 못한다고 여겼습니다(요 7:41).
그처럼 갈릴리 지역은 상처가 많고 멸시받고 소외된 어둠의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는 신기합니다. 하나님은 역전과 반전의 역사를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장 외면하는 곳을 찾아 그곳에 큰 빛을 비춰주시고 그 빛을 따라 은혜를 내려주시는 방법을 대단히 선호하십니다. 그처럼 아무리 흑암이 짙은 환경과 지역이라도 하나님의 큰 빛이 비추면 바로 거기서부터 은혜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본문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이 구절에서 ‘흑암에 앉은 백성’이란 말은 멸시받고 소외된 갈릴리 사람들을 지칭하는데 그들에게 큰 빛이 비춰진 것입니다. 큰 빛이 무엇입니까? 바로 복음입니다. 그처럼 복음이 들어가면 흑암이 물러가고 생명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특히 어둠과 고통에 싸인 심령들에게 그 빛은 더욱 강하게 비칩니다.
보잘 것 없는 제자들에게 복음의 빛이 비치자 그들이 얼마나 큰 인물이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학력도 별로였고 외모도 별로였습니다. 삶의 자세나 태도가 탁월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중에도 핵심 이너써클 3명이 있었습니다. 바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예수님은 특별한 장소에서 그들 3명만 데리고 가실 때가 많았습니다. 그것을 제일 질투했던 사람이 바로 가룟 유다였습니다. 자기가 보기에는 하찮은 것들이 자기보다 더 예수님과 가까워지는 것 같으니까 자신은 예수님으로부터도 더 마음이 멀어졌습니다.
그런 질투심을 감추려고 예수님을 공격할 명분을 찾다가 찾지 못하니까 예수님이 특별한 장소에 3명의 제자만 자주 데리고 가시는 문제로 은근히 험담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차별하시는 것 같아!” 그 말에 제자들이 아무도 동조하지 않자 결국 예수님을 죽이려고 혈안이 된 대제사장을 찾아가 밀고한 것입니다.
이너써클이 있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 충성심과 책임감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이너써클을 보면 차별의식을 가지기보다 오히려 “나도 더 사랑받는 태도와 자세로 이너써클이 되자!”는 도전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특별히 자주 데리고 다닌 것은 그들이 가장 예수님과 마음과 비전을 함께 했던 순종적인 제자들이었기 때문이지 다른 제자나 가룟 유다를 멸시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게는 그의 재능을 따라 돈 궤를 맡겼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수님의 공동체의 재정집사 역할을 맡긴 것입니다. 재정집사의 위치를 생각할 때 가룟 유다가 소외감을 가질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결국 능력이 아닌 자세 때문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이너써클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이너써클들조차 약점이 많았습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성급합니까? 야고보와 요한도 원래는 대단한 성격파들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중요한 때 졸기도 잘했습니다. 변화산에서도 졸았고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중요한 기도 시간에도 졸았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이름처럼 베드(bed)로 가는 것을 좋아하는 잠도 많고 잘 졸았던 제자였습니다. 그런 부족한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서 얼마나 멋진 대 역사의 주인공이 됩니까?
어떻게 그런 극적인 존재의 변화가 있게 되었습니까? 가장 큰 이유는 예수님을 만나 복음의 큰 빛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연약한 존재도 복음 안에서는 멋진 역전 인생이 가능합니다. 역사상 복음을 받아들여 인생의 대 반전을 이룬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그 복음의 빛은 흑암의 고통에 싸인 사람들에게는 더욱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그럴 때일수록 더욱 믿음을 굳건히 하십시오.
본문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천국의 역사는 가까이 왔습니다. 그 천국을 얻어 누리려면 무엇이 가장 필요합니까? 바로 회개입니다. 은혜와 축복의 때도 가까이 왔습니다. 그 은혜와 축복을 얻어 누리려면 무엇이 가장 필요합니까? 역시 회개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는 가진 것이 없다고 합니다. 왜 가진 것이 없습니까? 무엇이든지 자기가 잘하는 것은 반드시 있습니다. 그것을 잘 활용하면 성공적인 길을 가지 못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남의 것을 부러워하며 따르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특징 이상의 특장(특별한 장점)을 앞세워 비전을 따라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것을 지나치게 내세우는 것은 교만이지만 자기 것을 소중히 여기고 앞세우는 것은 교만이 아닙니다. 자기가 잘하는 것을 앞세우지 않으면 어떻게 비전을 이루겠습니까?
공동체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공동체에 주신 특장을 감사하고 중시해야 하나님의 일을 비범하게 감당하고 결국은 승리합니다. 그처럼 우리에게 있는 특장을 생각하고 감사하고 중시하십시오. 우리에게 없는 것을 자꾸 생각하면 자신감을 잃지만 우리에게 있는 것을 자꾸 생각하면 자신감을 얻습니다. 교만은 없어야 하지만 자신감은 가져야 하기에 우리의 특장을 통해 자신감을 얻고 비전의 땅으로 나가야 합니다.
결국 이 세상에 성공적인 삶의 기반이 없는 성도는 한 명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잘 개발하는 것입니다. 자기 것을 어떻게 개발합니까? 땀과 노력으로도 어느 정도는 개발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잘 개발되도록 하나님이 최적의 기회를 주셔야 합니다. 그런 기회가 주어지는 은혜가 임하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는 은혜의 문을 여는 가장 효과적인 통로입니다. 회개는 자본보다 중요하고 노력이나 재능보다 중요합니다. 진심으로 회개하면 어디선가 신비한 변화의 역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지금 세상이 어둡다고 느낀다면 더욱 사명감을 가지고 선한 영향력를 미치는 존재가 되는 꿈을 꾸십시오. 그 꿈과 비전을 이루게 하는 첫 시발점도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하면 천국이 가까워지고 큰 은혜가 가까워지고 비전 성취도 가까워집니다.
< 내일의 은혜를 예비하십시오 >
지금 자신의 모습이 부족해 보여도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도 주셨는데 다른 은혜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우리는 예수님처럼 소중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 소중한 인생으로 멋진 작품인생을 만들어 갈 기회도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때를 준비하며 기다리십시오.
큰 꿈과 비전은 대개 단번에 이뤄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나가겠다는 기본자세가 필요합니다. 한 걸음 나가면 두 걸음 나가는 것이 쉬워지고 두 걸음 나가면 세 걸음 나가는 것이 쉬워지면서 점차 가속도가 붙습니다. 첫 단계가 잘 안 풀리면 손에 잡히는 작은 일부터라도 시작하십시오. 그렇게 한 가지 작은 일을 이루면 그 일을 통해 새로운 일이 이뤄지면서 점차 성공과 발전이 구체화될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결코 배반이 없습니다. 기도와 땀도 결코 배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으로부터 창조성과 지혜를 구하십시오. 그 창조성과 지혜를 앞세워 열정적으로 일하십시오. 지금은 게임 하나로도 몇 천억 원을 버는 시대입니다. 물론 돈을 쫓지는 마십시오.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과 기쁨과 편리와 유익을 주겠다는 마음으로 나가면 돈은 저절로 좇아옵니다. 어떤 사람은 컴퓨터 바이러스를 막아주는 일을 하다가 큰돈을 벌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터넷에서 과거의 동창 찾는 일을 해주다가 큰돈을 벌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면서 사방에 깔린 물질적인 영역을 정복하는 길을 찾을 줄 아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지혜입니다. 그런 지혜가 믿음 안에서 추구되면 그것이 바로 영안이 있는 것입니다. 영안을 신기한 환상을 보는 것으로만 알면 그 인생은 무력하고 무책임한 인생이 됩니다. 영안이 열린 사람이란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뜻으로 삼고 많은 영혼을 구원하고 많은 영혼의 눈물의 닦아주겠다는 찬란한 비전을 가지고 나가는 사람입니다. 그처럼 영안은 찬란하고 좋은 비전을 선도해야 합니다.
저도 성도들과 목회자들을 돕겠다고 인터넷 말씀사역을 하다가 보니까 문서선교의 비전이 점점 커지고 구체화되었습니다. 현재 41개의 성경강해 설교파일을 완성했습니다. 그 중 3개 파일은 이미 출판되었고 나머지 파일은 2-3번째 교정 중이고 <산상수훈>과 <스가랴>는 출판 직전 단계인 5번째 교정에 들어간 상태입니다. 언제 출판될지 모르지만 그렇게 계속 준비해놓으면 출판 기회도 올 줄 믿습니다. 더 나아가 저희 문서선교의 비전에 함께 동역해줄 루디아나 데오빌로도 하나님이 어디선가 예비해놓으신 줄 믿습니다.
여러분들도 자신이 잘하는 분야를 찾고 앞세워서 하나님의 지혜와 창조성을 구하며 열심히 큰 은혜의 때를 준비하십시오. 그러면 조만간 반드시 좋은 날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날에 음지의 헌신자로서 자신이 이룬 성공을 나누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활용한다면 얼마나 그 인생이 복된 인생이 되겠습니까? 그런 복된 인생을 꿈꾸며 이번 한 주간도 열심히 살아서 내일의 큰 은혜를 예비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
마 4:12~25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뜻을 이루시고자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행하신 최초의 일들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유다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외치며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기 시작했을 때(마3:1-6) 갈릴리에 계시던 예수님께서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시려고 요단강으로 가셨습니다(마3:13).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성령에게 이끌리셔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려 유다 광야로 가셨습니다(마4:1). 광야에서 마귀의 모든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서 그의 공생애의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다 지파의 자손으로 태어나셨고,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나셨는데 왜 하필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게 되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헤롯 왕이 그를 죽이려 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 남편 요셉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을 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헤롯이 죽자 그들은 돌아왔지만 헤롯의 아들이 유대의 임금이 되었음을 듣고는 유대 땅으로 가지 않고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이란 동네로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나사렛은 갈릴리 지방의 남부 내륙에 있던 아주 미미한 동네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런 곳에서 살게 되신 것은 선지자들의 예언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었다고 마태복음의 저자는 설명했습니다. 그는 마2:23에서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이란 말은 또한 아주 먼 곳 또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미천한 곳에서 온 사람이란 뜻이기도 합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 형제에 이어 예수님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된 빌립이 자기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말하기를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하자 나다나엘이 대뜸 대답하기를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3-46) 한 것처럼 나사렛은 정말 외지고 미천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런 곳에서 살게 되신 것은 복음과 하나님의 구원의 관심이 가장 미천한 이들에게까지 미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의 모든 시험을 이기셨을 때 나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옥에 갇힌 이상 유대에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어진 예수님께서는 일단 고향 갈릴리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셨습니다(본문 12-13절). 가버나움은 나사렛에서는 동북쪽으로 3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갈릴리 호수 서북쪽 연안의 마을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정말 바다 같이 넓은 호수이고 예수님 당시에는 그 연안을 돌아가며 약 30개의 어촌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버나움이 가장 컸습니다. 나사렛보다 훨씬 큰 마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으로 사역의 본거지를 옮기신 데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우선 나사렛에서의 심한 반대를 피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눅4:16-30 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경을 읽으시고 말씀을 전하실 때 나사렛 사람들은 그 은혜로운 말씀에 놀라면서도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눅4:22) 했고 예수님께서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눅4:24)고 말씀하실 만큼 예수님께 냉냉했으며 심지어는 예수님께 화를 내며 그를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기까지 했음을(눅4:29)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차피 복음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영향을 주며 보다 빨리 전해지게 하기 위해서라도 외진 작은 마을 나사렛보다는 가버나움을 택하셨을 것입니다. 마태는 그것도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지기 위해서였다고 보았습니다. 본문 14-16절에서 그는 쓰기를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합니다. 실제로 이사야는 사9:1-2에서 말하기를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스불론과 납달리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 두 지파의 이름입니다. 가나안 땅을 열두 지파에게 나누어줄 때 납달리 지파는 갈릴리 호수의 동쪽 연안을 제외한 전 연안을 둘러싸는 지역의 땅을 받았습니다. 스불론 지파는 납달리 지파의 서남쪽으로 붙어 있는 지파였습니다. 두 지파는 주전 732년 경 앗수르인들에게 끌려갔습니다. 그 때 이후로 그 지역에는 수많은 이방인들이 이주해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흑암에 덮인 변두리 지역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거기로 가신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의 빛이 모든 사람을 비추는 것임을 말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에서 갈릴리를 가리켜 “이방의 갈릴리”라 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갈릴리는 비옥한 지역이었습니다. 버려진 땅 없이 전체가 경작되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구도 많았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갈릴리에서는 가장 작은 마을에도 만오천 명 이상의 주민이 살았다고 합니다. 중요한 도로들이 그 지역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유대는 아무 곳으로도 통하지 않고, 갈릴리는 모든 곳으로 통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자연히 다양한 인종의 이방인들이 거기 밀려와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미 이사야 당시부터 갈릴리의 주님의 절반은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 사람들은 이방인들이 많이 섞여 사는 갈릴리를 멸시하거나 낮추어보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이방의 갈릴리”라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일대의 사람들은 유대인들로부터 “흑암에 앉은 백성” 또는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로 여겨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줄곧 빛은 계시에 대한 지식과 순종을 가리키고 어둠은 무지와 불순종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갈릴리에서 사시게 됨으로써 흑암에 앉은 백성,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되실 것이라고 이사야는 예언을 했고, 바로 그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마태는 본 것입니다.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으로 삶의 본거지를 옮기신 예수님은 그때부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며 그의 복음 선포와 구원의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본문 17절).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와 구원의 사역을 시작하시며 제일 먼저 던지신 것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는 말씀이라는 사실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이것은 당시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백성에게 그들이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이유가 그들의 죄 때문이라고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을 얻을 것인데 하나님의 백성이 구해야 할 것은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난 지상의 독립국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임을 상기시키는 말씀입니다. 로마 제국의 치하에서 신음하던 백성에게 “천국이 가까웠다”는 말씀은 희망을 주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이 가까웠으니만큼 동시에 회개도 촉구하셨습니다. 그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신 것입니다.
천국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로 부르신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들이고 어부들이었습니다. 유대의 명문대가의 학식 많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차별하며 천시하던 갈릴리에서 주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은 모두 주님께서 부르실 때 즉각적인 응답을 했고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는 주님께서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말씀하시자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본문 19-20절). 야고보와 요한 형제도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본문 22절).
예수님이 시작하신 사역에 대해 마태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본문 23-24절)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에게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가르치셨다는 것은 산상수훈과 많은 천국 비유에서 보는 대로의 하나님나라의 성격과 목적을 알게 하신 것을 말합니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며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주권적으로 이루고저 하시는 뜻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선포하신 것을 말합니다. 귀신들을 쫓아내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들을 고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다는 표지입니다.
이것은 곧 오늘날 교회와 주님의 제자 된 우리가 힘써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먼저는 교회에 모여 예배하며 가르치고 배우기를 힘써야 합니다. 둘째는 교회 안에 모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 두루 다니며 천국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우리 주변에서 우리의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사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에 관한 소문은 온 수리아에 퍼졌습니다. 이스라엘은 당시 로마 제국의 영토인 수리아에 속해있었습니다. 수리아는 갈릴리를 제외한 팔레스타인 전 지역을 말합니다. 갈릴리에서의 예수님의 사역에 관한 소문이 갈릴리뿐 아니라 그 주변의 전 지역에 퍼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을 알리는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크게 네 가지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가장 멀고 외진 곳,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작은 마을 나사렛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입니다. 또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되셨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회개할 것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투쟁을 촉구하시고 독립국가나 지상의 복지국가를 세우자고 외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복음전파와 구원의 사역을 위해 제자들을 택하여 기르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을 모두 갈릴리의 사람들로 세우셨다는 사실입니다.
넷째,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귀신 들린 자들과 병약한 모든 이들을 다 고쳐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네 가지 일들은 예수님께서 옛날 갈릴리 사람들에게만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대로가 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나사렛처럼 극동의 이름 없는 작은 땅에 사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 하의 흑암과 같은 땅에서 절망 가운데 그늘진 세월을 살고 있던 우리에게 광복을 주신 것입니다. 나라 잃고 압제와 수탈과 치욕을 당하며 살던 우리 민족에게 복음의 빛을 던져주시고 믿음을 주시며 하나님 앞에 회개운동을 일으키게 하시고 영적 대부흥운동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하는 믿음을 주시고 그 안에서 소망을 잃지 않게 하셨습니다. 가장 늦게 복음을 들은 민족이지만 가장 많은 교회를 세우게 하시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이 작은 땅에서 수없이 많은 주의 제자들이 생겨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르쳐주시고 복음을 전파하시며 우리 민족을 지배하고 있던 온갖 귀신들을 쫓아내주시며 민족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던 병들과 우리의 연약함을 치유하여주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민족에게 주신 모든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변치 않을 귀한 사명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복음의 빛을 온 세상에 널리 비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신실한 주의 제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실한 주의 제자들이 되기 위하여 우리의 배은망덕한 모든 죄를 통렬히 회개하며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참된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가난이나 질병이나 불의한 권력에 의해 고통 받는 모든 이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보살피고 치유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광복을 주시고 놀라운 복을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바르게 응답하는 길이라 믿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
마 4:12-17 / 유영설 목사
1.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의 공생애와 관련이 있는 지명이 몇 곳이 나옵니다. 먼저 나사렛은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던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출생하신 곳은 ‘베들레헴’이지만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는 곳은 ‘나사렛’입니다. 사실상 예수님에게 나사렛이 고향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위해서 이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한 사람에게 ‘고향’이 가져다주는 느낌이나 의미가 얼마나 큽니까? 인생살이에서 돌아가고 싶은 곳이 고향입니다. 사전을 보면 고향은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고향을 찾는 의지가 강렬합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을 통해 어린 시절 예수님의 나사렛 삶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모와 함께 지내시면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여행하신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하는 시간을 통해 가족의 추억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부모의 생각, 행동, 사상 등 삶을 배웠습니다. 부모로부터 깊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부모에게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마음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이를 보고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라면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더욱 많이 사랑을 받으셨습니다(눅 2:51-52). 그러나 이제 공생애를 위해 고향을 떠나셔야 했습니다.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관심과 사랑, 돌봄으로부터 멀어짐을 의미합니다. 누구든지 인생의 꿈을 펼치려면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고향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2. 나사렛을 떠난 예수님이 가신 곳은 ‘가버나움’입니다. 마태복음 저자는 가버나움의 위치를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 바닷가에 있는 가버나움”이라고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불론은 가버나움의 서남쪽에 있고 납달리는 가버나움의 서북쪽에 있습니다. 통상 남쪽은 제단을 중심으로 우측이라 하고 북쪽은 제단을 중심으로 좌측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물 던지라 명령하신 곳이 배 오른편이며, “지혜 자의 마음도 오른쪽에 있고 우매 자의 마음은 왼쪽에 있느니라.”(전 10:2) 이처럼 오른쪽의 의미는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좌측은 그와 반대로 그릇된 길, 저주받은 곳으로 이해됩니다. 여기서 스불론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다, 선하다는 뜻이며, 택함 받은 주의 백성’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납달리는 그릇된 길, 시기, 질투, 저주받은 곳, 죄악 중에 사는 삶의 형태를 뜻합니다. 이와 같은 뜻을 가진 스불론과 납달리의 중간 지역에 있는 가버나움(Capernahum)은 캐파르(마을)+나훔이 합쳐진 지명으로 ‘나훔의 마을’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선지자 나훔과 관련 있는 마을은 아닙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께서 시몬, 안드레, 야고보, 요한,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곳입니다. 이곳에서 귀신들린 자도 고치시고, 열병에 걸린 베드로의 장모 고치셨고, 중풍병자, 손 마른 자,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심, 회당 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셨습니다. 가버나움은 말씀과 능력으로 많은 사람의 삶이 치유와 회복되는 현장이었습니다. 가버나움은 수많은 사람들이 새 생명을 얻고 인생의 보람과 기쁨을 회복했던 현장이었습니다.
3.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한 스불론과 납달리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가 예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가버나움의 기적의 현장이 보여줍니다. 여러분 ‘선과 악’은 오늘의 세상에도 공존합니다. 때때로 선한 자보다 악한 자가 이기고 형통하는 문제로 고민하기도 합니다. 선한 사람에게 오는 불행 때문에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그 인생의 주권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선하기 때문에 좌절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선한 사람도 악한 자의 유혹을 받아 넘어지기도 합니다. 가버나움의 예수님은 말씀과 이적을 통해 사람을 변화시켜 제자 삼으심으로 그것을 증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버나움 사역 목적은 선지자 이사야의 입을 통해 말씀하신 것을 이룩하려고 하셨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죄 속에서 온갖 환란과 시험을 겪으며 살아가는 스불론 사람과 납달리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계획 실천이 예수님의 가버나움 사역입니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계 속에서 사는 사람에게 가버나움의 수많은 영혼이 구원받은 체험은 선과 악 사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원의 모형, 증인, 모델이라는 의미입니다.
4. 오늘날 스불론과 납달리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나는 선하게 산다(스불론)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깨끗하고 완전하고 문제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하고 죄를 인정하지 않는 교만입니다. 자기를 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악한 자의 삶(납달리)을 사는 사람은 권세의 노예가 되고, 자기 힘을 의지하고, 지식과 재물을 믿고, 자랑하고, 이것이 자기 존재를 높이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와 같은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백성을 “흑암에 사는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사실상 소망 없이 죄 속에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선지자의 입을 통해 소망도 없이 죄 속에 살아가는 영혼을 깨우쳐 인도하여 주실 큰 빛,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리니 그가 생명의 말씀을 너희에게 주시어 평안과 위로와 구원의 소망을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죄가 지배하는 인생은 살아있으나 죽은 자입니다. 바울은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한다.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것을 행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있는 죄니라”(롬7:19-20) 라고 고백했습니다. 곤고한 자신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했습니다. 예수님의 선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스불론과 납달리도 모두 회개해야 사는 길이 열립니다. 가버나움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죄를 회개할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에 말씀과 능력으로 삶의 표준과 소망을 제시했습니다. 가버나움의 가르침과 이적사건이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 속에 사는 오늘의 사람들에게 문제해결의 길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흑암과 멸시의 땅으로
마 4:12-17 / 이정선 목사
왕이 행차를 하게 되면 그 앞에 먼저 가서 나팔을 불며 왕의 행차를 알리는 전령이 있습니다. 그 전령의 나팔 소리를 듣고 사람들은 왕의 행차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전령이 요란하게 나팔을 불고 나서 드디어 왕의 행차가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왕이 도착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전령이 여전히 요란하게 나팔을 불고 있다면 어떻겠어요? 곤란하지요? 전령의 역할은 왕이 도착하기 전까지입니다. 왕이 도착한 후에는 전령의 역할과 존재가 더 이상 드러나면 안 됩니다.
세례 요한은 바로 그 전령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나타나서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또 물로 세례를 베풀면서 곧 불과 성령으로 세례 주실 분이 오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께서 사람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비록 사람들이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요한이 말하던 그분이 오신 것입니다. 이제 그분의 시대가 도래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요한복음에서는 요한이 옥에 갇히기 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대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세례를 주신 것으로 나옵니다. 그것을 보고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렇게 얘기하지요. “선생님이 전에 말씀하시던 그 사람이 세례를 주니까 사람들이 다 그리로 몰려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인기가 세례 요한을 앞지르고 있다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거지요. 거기에 대해서 요한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네, 그는 자신이 예수님의 라이벌이 아니라 그분 앞에 나가서 외치는 전령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의 행차가 도착한 다음에는 섭섭하지만 더 이상 전령이 필요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마태는 그 부분을 아주 유심히 관찰하고 그의 기록에 정리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이 구절이 마태의 관점에서는 아주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이제 요한은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역할을 다했단 말이지요. 이제 왕이 활약하실 시간입니다. 더 이상 요한이 활약을 하면 안 돼요. 이제 요한은 무대 뒤로 사라져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요한이 그의 역할을 모두 수행하기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요한이 옥에 갇히는 때에 맞추어 예수께서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십니다. 요한이 옥에 갇혔다는 것은 이제 예수께서 나서야 할 시점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요한이 옥에 갇혔다는 것은 매우 슬픈 소식입니다.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순간이었습니다. 이제 수천 년을 기다려온 메시야의 시대가 온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17절에서 말하기를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셨다고 하는 것이지요. 요한의 시대가 가고 그리스도의 시대가 오는 순간인 것입니다.
요한이 옥에 갇혔다는 슬픈 소식에 우선 예수께서는 갈릴리로 물러가셨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친척이기도 한 요한이 억울하게 옥에 갇혔다는 것을 들으셨습니다. 그것은 또한 그분이 이제 공식적으로 사역을 시작해야 한다는 신호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십니다.
갈릴리 나사렛은 예수님의 고향입니다. 고향처럼 그립고 포근한 곳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아무리 출세를 하고 재물을 모았어도 결국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제가 엊그제 짐바브웨에서 온 사람이 하는 말을 들었는데, 수확철에는 900명을 고용할 정도의 커다란 커피 농장을 가지고 있었답니다. 농장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커다란 댐까지 만들었다고 했다더군요. 무가베 정권이 들어선 후 극심하게 탄압을 당했는데, 어느 날 밤에 통지서가 왔더랍니다. 이제부터 이 농장은 정부의 소유이기 때문에 24시간 내에 떠나라는 거예요. 물론 아무것도 가지고 나가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해서 뉴질랜드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생각해 보면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얼마나 한이 맺혔겠어요? 그래도 그 사람 하는 말은 자기가 죽으면 화장을 해서 고향의 농장, 자기가 건설한 그 댐에다 뼛가루를 뿌려달라고 하겠답니다.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특히 마음이 고단하고 몸이 지쳐 있을 때 고향은 더 그리워집니다. 우리 예수님에게도 어린 시절의 추억이 배어 있고, 부모님께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던 고향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목수 일을 배워 가족들을 부양했던 그 작은 동네, 아직도 사랑하는 어머니와 동생들이 살고 있는 나사렛이 바로 그곳입니다. 요한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은 고향으로 물러가셨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고향에서 사역을 시작할 작정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곧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으로 이사를 가셨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왜 고향 나사렛을 떠나야 했는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누가는 그 이유를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예수께서 고향 나사렛에 가셔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자 나사렛 사람들은 목수가 갑자기 선생 노릇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그를 끌고는 산 낭떠러지로 끌고 가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그 성난 동네사람들의 손에서 빠져나오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더 이상 고향에 머물지 않으시고 가버나움으로 이사를 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이 땅에 구세주로 오신 메시야의 고향이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또 그 동네에 함께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큰 행운입니까? 그야말로 하늘로 통하는 문이 자기 동네에 있었던 것 아니에요? 그러나 그 사람들은 그 축복을 스스로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했어요. 하나님의 아들을 동네에서 쫓아내버렸어요.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도록 제자들을 내보내시면서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발의 먼지를 떨어버린다는 것은 그들이 거부하고 배척했기 때문에 모든 책임은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예수님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은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아버지를 배척하고 떠난 아들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랑의 아버지로 묘사됩니다. 범죄하고 배반하기를 반복하는 이스라엘을 길이 참으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이시지요. 그러나 비록 사랑하는 고향이지만 자기를 배척하는 나사렛에서 더 이상 일하지 못하시고 떠나셔야 했단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가운데 찾아오셔서 역사하시려 할 때 우리가 순종하고 헌신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나타날 수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가신 곳이 가버나움이었습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숫가에 있는 제법 큰 도시입니다. 고향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에 가셔서 사역을 시작하게 되셨는데, 이것을 가리켜 마태는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신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9장 1,2절에서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제비를 뽑아 각 지파 간에 땅을 나누었는데, 갈릴리 지역은 스불론 지파와 납달리 지파, 아셀 지파, 잇사갈 지파에게 배당된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중심은 예루살렘이었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이 땅은 자연히 소외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이 지역은 솔로몬 때부터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의 역사와 사회의 주변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솔로몬이 성전과 왕궁을 20년에 걸쳐 화려하게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두로 왕 히람으로부터 건축자재를 공급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히람은 레바논의 백향목과 잣나무, 금을 거의 무제한으로 솔로몬에게 공급했고, 그 모든 공사를 마친 후에 솔로몬은 히람에게 갈릴리 땅의 성읍 20개를 대가로 주었습니다. 다른 나라에 물건 값으로 주어버릴 만큼 갈릴리 땅이 중앙으로부터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는 증거일 수도 있겠네요.
그 후에 팔레스타인이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이집트, 시리아 등에 의해 차례로 정복되고 갈릴리 지역에 포로와 이민족의 이주가 반복되면서 혼혈인종, 혼합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유대인들로부터 이방의 갈릴리라고 불리게까지 된 것입니다. 그렇잖아도 하찮게 생각되던 땅인데, 그나마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라는 자존심 하나로 사는 유대인들 보기에 이방인들과 혼혈 족속이 되어버린 갈릴리 사람들은 얼마나 멸시와 천대의 대상이었겠습니까?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메시야를 만났다고 소개하면서 그분은 바로 나사렛 예수라는 분이라고 하자 나다나엘이 대뜸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갈릴리처럼 천하고 멸시받는 곳에서는 메시야 같은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된 믿음이었던 것이지요.
그토록 간절히 기다렸던 메시야가 오셨는데, 그렇다면 그분은 당연히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있는 곳,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서 그 사역을 시작하셔야 마땅할 것 같았는데, 놀랍게도 멸시와 천대를 받고 소외를 당하고 있는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셨다는 사실을 마태는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처럼, 출세를 하고 뭔가 큰 일을 하려면 당연히 중심지로, 예루살렘으로 가야 할 터인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단 말이지요. 왜냐하면 그분은 똑똑하고 거만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아니라 버림받고 고통당하는 변방 사람들, 동족으로부터 이방인 취급을 당하는 갈릴리의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 흑암에 앉은 백성에게,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되시러 오신 분입니다.
오늘 우리 중에 똑똑하고 집안이 좋은 것 때문에 예수 믿은 사람 있습니까? 의롭고 착한 사람이어야 예수를 믿을 수 있었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가 모두 죄와 사망의 흑암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하는 것은 그 어둠 속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흑암에 갇힌 채 버려진 우리 인생들에게 찾아오셔서 빛이 되신 그 주님을 만나실 수 있기 바랍니다. 그분을 통해서 우리 삶에 빛이 비취고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전혀 다른 인생,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축복된 생애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갈릴리에서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마 4:12-17 / 김태환 목사
윌리암 버클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무릇 자신의 뜻을 정한 사람은, 이제 언제, 어디서, 누구와 함께 일할 것인지를 정해야 한다.” 그의 말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말입니다. 자신의 뜻은 그 사람의 비젼이라고도 할 수 있고, 그 사람의 미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뜻이 정해졌다고 할지라도 언제, 어디서, 누구와 함께 그 뜻을 펼쳐 나가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비젼이나 미션 못지 않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버클리의 말은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 간의 금식 기간을 통하여 집중적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사역을 생각했습니다. 사탄의 유혹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능력을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라고 하는 유혹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해 보라고 하는 유혹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역의 본질을 흐려 놓으려고 하는 사탄의 유혹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그렇듯이 그리스도인의 사역의 본질(本質)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모든 사역자들은 영광을 자기에게 돌리려고 하는 사탄의 유혹과 싸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신 때는 세례 요한이 붙잡힌 때였습니다. 세례 요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forerunner였습니다. 그는 자기 분수를 잘 알았습니다. 그는 자기 다음에 오실 분을 위해서 준비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광야의 외치는 소리”로서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백성들이 그를 메시야로 알고 환호했을 때도 그는 자신을 가리키지 않고 세상의 죄를 짊어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를 가리켰던 해바라기 같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 그가 체포되었습니다. 헤롯 왕의 비리를 폭로(暴露)하는 바람에 왕의 분노를 산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체포되었습니다.
역사에는 이이러니가 있습니다. 불의한 사람들이 득세(得勢)하고, 의로운 사람이 핍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이 인정을 받았던 때는 일찌가 없었습니다. 늘 불의한 사람들이 잘되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고,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반면에 정의롭게 살았던 사람들은 늘 고난을 받았고, 가난했고, 자기 것을 빼앗겼고, 목숨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세례 요한의 삶도 그랬습니다. 그는 세속(世俗)의 삶을 거부하고 광야로 나갔습니다. 몸에 약대 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았던 그의 삶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외쳤던 메시지는 세속에 물든 사람들의 관심을 하나님께로 끌어 오기에 충분했습니다. 사람들은 너도 나도 요단강으로 몰려와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영적인 각성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런 세례 요한이 체포된 것입니다. 왕의 불의(不義)를 덮어 놓았더라면 괜찮았을텐데, 괜히 들춰내는 바람에 왕의 분노를 산 것입니다. 왕이 자기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이 옳지 않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입니다(마가복음 6:17). 감옥에 갇힌 요한은 얼마 있지 않아서 목이 잘려 죽습니다. 그전에 얼마든지 타협(妥協, compromise)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의 나이가 예수님보다 6개월 정도 빠르다고 하니까 그는 많아야 31살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굉장히 아쉽습니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이 살아야 합니다. 31살의 나이로 죽는다면 얼마나 아쉽습니까? 그것도 살다가 그냥 죽는 것도 아니고, 바른 말 했다가 목이 잘려 죽은 것입니다.
일생을 아프리카 복음 사역에 바쳤던 선교사 리빙스톤(David Livingstone, 1813-1873)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사명을 다 할때까지는 죽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요한의 비극적인 짧은 생애는 우리에게 아쉬움을 안겨주지만, 그는 자기 사명을 다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forerunner”로서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훌륭하게 완수했습니다. 마치 모세의 사명이 광야에서 끝이 난 것처럼, 요한의 사명은 거기까지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바야흐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요한의 생애는 불행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사역의 시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사역의 중심지를 갈릴리 가버나움으로 정하셨습니다. 자기 고향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으로 이사를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방에도 가시고 유대 지방에도 가셨지만, 예수님의 사역은 주로 갈릴리 지방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 옛말에도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한양으로 보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뜻을 한번 펼쳐 보기 위해서 자신의 사역지를 유대의 예루살렘으로 정할만 한데, 예수님은 갈릴리 가버나움을 자신의 사역지로 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형제들에게 불만의 원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당신이 하시는 일을 보이십시오. 이런 곳에 숨어 계시면 누가 당신을 알아보겠습니까? 당신이 위대하신 것을 세상에 증명해 보이란 말씀입니다(요한복음 7:3-4)."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이 말씀을 기록하면서 이렇게 토를 달았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형제들조차도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요한복음 7:5).”
그러면, 여러분,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버나움을 자신의 사역지로 정한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이스라엘의 지형은 왼편으로는 지중해 바다를 낀 남북으로 길쭉은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오른 편으로는 윗쪽에 갈릴리 호수가 있고, 그 호수에서 물이 흘러나와 요단강이 흐르고, 그 밑에 사해(死海)바다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크게 세 지방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윗쪽이 갈릴리, 가운데가 사마리아, 그 밑이 유대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갈릴리를 중심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여기에 우리에게 익숙한 지명(地名)들은 대부분 갈릴리에 있습니다. 가나, 산상설교를 하신 산, 나사렛, 나인, 벳세다, 갈릴리 바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 나오는 가버나움 등이 모두 갈릴리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역지를 정하신 무슨 목적이 있겠습니까? 몇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갈릴리 지방에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갈릴리는 가로 40km, 세로 80km 정도 되는 작은 지방입니다. 하지만 인구 밀도가 조밀(稠密)했습니다. 그리고 땅은 비옥(肥沃)했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갈릴리에만 204개 마을이 있었고, 마을마다 평균 5,000명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지역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하신 말씀이 있지요?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태복음 4:19).” 마치 어부가 그물을 던지기 위해서 고기가 많은 곳을 찾는 것처럼, 예수님도 사람들이 많은 지역을 선정하여 그물을 던진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사는 보스톤은 메싸추세츠 주의 가버나움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을 선교의 중심지로 삼으신 것처럼, 우리는 보스톤을 선교의 중심지로 삼아야 합니다. 정말 여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미국 사람들은 얼마나 살고, 외국인들은 얼마나 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선교의 일차 타겟(target)으로 삼고 있는 한국 유학생만 하더라도 얼마나 많습니까? 적게 잡으면 약 7,000명쯤 될까요? 많이 잡으면 약 10,000명쯤 될까요? 게다가 해마다 유학생 수가 증가(增加)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에는 조기 유학(早期留學) 붐이 불어서 할 수만 있다면 일찍 유학을 나오려고 합니다. 7,000명이나 10,000명의 유학생 중에 교회에 나가는 학생들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많이 잡아서 한 10%나 될까요? 10%면 700명에서 1,000명입니다. 그만큼 될까요?
보스톤은 선교의 황금어장입니다. 뉴잉글랜드에 한인교회가 약 60개 됩니다. 그러나 그 교회 중에 학원 선교에 적합한 지역에 위치한 교회는 몇 교회 안 됩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학원 선교에 적극적인 교회가 없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더 전략적으로 접근하면 많은 열매를 거둘 수가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교회가 이런 비젼을 가진 사람들을 모을 때입니다. 그리고 함께 전략을 세워야 하는 때입니다. 이제는 우리교회가 가만 앉아서 선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가서 사람을 낚는 사역을 할 때가 되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선교지로 정하신 데에는 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 37-100)는 갈릴리 사람들에게 대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혁신적 (革新的)인 것을 좋아하고, 천성적으로 변화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선동(煽動)을 매우 좋아했다.” 갈릴리 사람들은 누가 선동하면 곧잘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릴리에서 데모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성경에 재미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누가복음 13:1).” 빌라도는 로마의 총독인데, 아마 갈릴리에서 일어난 폭동을 진압하고 주동자들을 처형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사도행전 5:36-37).” 드다나 유다는 모두 갈릴리 사람들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문제는 갈릴리 사람들이 변화되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늘 새로운 사상(思想)을 원했습니다. 그러면 왜 갈릴리 사람들만 그렇게 변화되기를 좋아했겠습니까? 이 질문에 실마리가 되는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 13,14,15절에 나와 있습니다. 가버나움을 “스블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스블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라고 했습니다. 스블론(Zebulun )과 납달리(Naphtali)는 이스라엘의 12지파에 속한 지파 이름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두 지파는 갈릴리 지방 북쪽을 분배(分配)받아 이곳에 거주했습니다. 이곳은 이방인의 땅과 접경(接境)을 이루는 곳입니다. 자연히 이 두 지파는 이스라엘의 변경(邊境)으로 취급되어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자연히 그 두 지파 사람들도 이스라엘의 주류(主流) 세력에서 제외 되었습니다.
사회학적인 용어(用語)로 이런 사람들을 “주변인(周邊人, marginal people)”이라고 합니다. 원래 margin이라는 것은 종이에 글씨가 씌어지지 않은 가장자리 여백(餘白)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종이 안에 text가 써지는 부분을 그 사회의 주류(主流) 세력이라고 한다면, 여백은 그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 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사람들이 새로운 사상을 잘 받아 들이겠습니까? 아니면 그 사회의 주변인, marginal people들이 새로운 사상을 잘 받아들이겠습니까? 주변인들이 잘 받아들입니다. 주류 세력들은 항상 보수적(保守的)입니다. 변화를 싫어합니다. 지금 자기들이 누리고 있는 것으로 만족한데, 왜 변화를 바라겠습니까?
근래에 들어 한국 이민(移民) 역사 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미국 사회에서의 한국교회의 역할을 강조하는 말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도 이런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어디까지나 미국 사회에서 주류가 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marginal church라는 것이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혹은 한국인들은 이 사회의 marginal로서 주어진 특권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미국 사회에서 주류가 되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오히려 marginal 교회로서 쇠퇴해 가는 미국 교회에 변화의 바람을 불어 넣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 교회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본다고 해도 예수님은 선교지를 정하는데 천재적인 센스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이야말로 천국 복음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갈릴리 사람들의 특성에 대하여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두려움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비겁하지 않았으며, 그들은 이익(利益)보다는 명예(名譽)에 열망이 더 강했다.” 예수님은 이런 갈릴리 사람들을 선교의 대상으로 삼아 그의 사역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갈릴리 가버나움을 선교지로 정하고 천국 복음을 전한 것을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다. 예수님의 사역으로 이사야서 9:1-2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여러분, 지난 수요일에 시작된 화제의 영화「예수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을 보셨습니까? 워낙 화제가 되었던 영화니까 이제는 많이들 보셨겠네요? 그 영화에서도 보면 대제사장들이나 로마 사람들이 예수님을 뭐라고 부릅니까? 예수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 갈릴리 사람(the Galilean)”이라고 부르지요? 예수님께서 나사렛에 가서 사실 때는 “나사렛 사람(Nazarene)”이라고 불리우더니, 이제는 “갈릴리 사람”이라고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선교지인 갈릴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곳에 그의 피와 땀과 눈물을 쏟으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만나고 싶어했던 장소도 갈릴리였습니다 (마가복음 14:28, 16:7).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사역을 시작하신 그 의미가, 우리는 잘 몰랐지만,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했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선교는 흑암에 앉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어 주는 것입니다. 선교는 사망의 그늘에 앉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한 인간의 운명을 경영(經營)하는 것이고, 한 지역의 운명을 경영하는 것이고, 선교는 한 국가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경영하는 것입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제물포 항에 세 사람의 선교사가 내렸습니다.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와 그의 부인, 그리고 언더우드(Horace Horton Underwood, 1890-1951) 선교사였습니다. 두 사람은 신학교 연맹에서 만나 세계 선교의 꿈을 키워왔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커네티컷 주에서 열렸던 캠퍼스 부흥회에서, 미전도 종족인 조선민족에게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정보를 듣고 함께 선교사로 헌신했던 사람들입니다. 제물포 항에 첫 발을 내 딛는 그 감격적인 순간에 그들은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여! 우리는 부활의 아침에 이 땅에 도착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권세와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죽어가는 이 민족에게 빛을 비추어 주십시오.” 그들이 기도했던대로 우리 민족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이 비추었습니다.
한 민족에게 초점을 맞출 필요 없이, 여러분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어 보십시오. 여러분, 베드로전서 2:9-10 말씀을 아시지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저와 여러분은 이렇게 복음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로마서 1:1).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파하는 그의 사명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예수님을 보십시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17절).”
“전파한다”는 말은 희랍어로 “케루쎄인(kerussei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왕으로부터 사명을 띠고 온 전령자의 선포(宣布)를 말합니다. 영어로 “preach”라고 번역했는데, 우리 말로는 “설교한다”는 뜻이지요? “당신 지금 나에게 설교합니까?” 그러면 별로 어감(語感)이 좋지 않습니다. 설교를 지겨워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설교에 확신(確信)과 권위(權威)가 점차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설교에는 이 두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말씀에 대한 확신과 권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온 땅을 두루 다니시면서 천국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여러분, 회개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 가십시오. 지금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 보십시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는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예수님의 목소리에는 긴박(緊迫)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는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열망(熱望)이 있었습니다.
복음이 부끄러우십니까
마 4:12-17 / 권오서 목사
들어가는 말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600만 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유대인들을 학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럽 각국에 많은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러나, 전후 독일은 철저한 보상을 통해서 마침내 유럽연합(EU, European Union)을 창출해 냈고 그 결과 공동의 발전과 성장을 꾀하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은 1·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동아시아 지역에 있는 여러 국가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혀 놓고도, 특히 우리나라의 역사를 왜곡하고 위안부를 징집하는 등 막대한 정신적, 육체적 피해를 끼쳐놓고도 보상은커녕, 시대적 흐름에 역행하는 일들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독일을 바라보는 시선과 일본을 바라보는 시선이 매우 다릅니다. UN 상임 이사국 진출을 앞둔 두 나라이지만, 독일을 바라보는 시선과 일본을 바라보는 시선은 완전히 다릅니다. 왜 다를까요? 반성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의 차이입니다. 독일은 철저한 반성과 보상을 통해서 미래지향적인 자세를 취한 반면, 일본은 겉으로는 반성하고 있지만 여전히 과거지향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과거 제국주의 시대 때의 야심을 아직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국가간에도 철저한 반성과 보상이 필요하듯,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철저한 회개가 필요합니다. 철저한 회개가 없이는 결코 변화도, 부흥도 없습니다.
본 론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세례 요한이 잡혀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 사실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말씀을 선포합니다. 17절 말씀 “이때부터-세례 요한이 잡혀 감옥에 갇힌 후부터-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의 메시지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여러분, 세례 요한의 메시지와 공통점이 있지 않습니까? 세례 요한 역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선포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상식적으로 세례 요한과 예수님께서 선포한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말씀만 있었겠습니까? 매일같이 입만 열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했겠어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수많은 메시지를 선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요? 이 말씀이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메시지였기 때문입니다. 썩어 뭉그러진 당시 세태를 바라보면서, 이 세대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회개하는 것”-이것이 가장 급선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말씀들을 기록할 수 있었지만, 이 말을 중심적으로 그리고 가장 먼저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1907년 평양에서는 “평양 대부흥회”가 있었습니다. 1500명 정도가 모인 이 집회에 길선주 장로가 말씀을 들고 섰는데, 집회 시간이 흘러도 아무런 변화도 없었습니다. 집회는 말 그대로 무미건조했습니다. 그런데, 이 집회가 어떻게 해서 우리 민족의 영적 분수령이 되었습니까? 길선주 장로의 회개 때문이었습니다. 길선주 장로는 친구가 부탁한 유산의 일부를 가로챈 지난 날의 자신의 죄를 회중들 앞에서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은 성도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때부터 회중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했으며, 결국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이 부흥을 가져왔습니까? 바로 회개였습니다. 회개가 한국 교회를 부흥시켰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민족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었습니다.
마태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중풍병자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들것에 실려 예수님 앞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고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네 병이 나았느니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중풍병자의 관심사는 병이 낫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사는 병이 낫는 것보다 죄 사함의 확신을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죄 사함의 확신을 가지는 것이 예수님의 관심사인 것을 모르니까, 서기관들이 속으로 험담을 하지 않습니까? “어찌 하나님이나 할 수 있는 것을 인간이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5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6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왜 하셨겠습니까? 회개의 자리, 죄 사하심의 자리로 초청하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회개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죄인들에게 회개의 자리로, 용서의 자리로 나오라고 말씀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를 믿기보다, 말씀에 대한 자신들의 풀이와 해석을 더 신뢰했던 서기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오라고 말씀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 보다 분명하게 말씀드린다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회개의 자리로 나올 것을 명령하시는 것 아닙니까?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을 면밀히 살펴보세요. 회개가 있습니까? 찬송가 331장은 우리에게 이런 찬송을 들려줍니다. “1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 나 죄의 길에 시달려 주여옵니다. 2그 귀한 세월 보내고 이제 옵니다. 나 뉘우치는 눈물로 주여옵니다. 후렴) 나 이제 왔으니 내 집을 찾아 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주소서!” 여러분, 이 찬송가의 가사처럼, 죄의 길에 시달려 주 앞에 나오고, 뉘우치는 눈물로 주 앞에 나오고 있습니까? 더 이상 죄된 삶에서 살 수 없노라고 몸부림치며 ‘주님 날 받아주옵소서’하는 심정으로 주 앞에 나옵니까?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우리 눈에서 언제 눈물이 흘렀는지 기억조차 없습니다.
이 시대의 마지막 선지자이자, 영적 폭발력이 있는 복음전도자로 열심히 사역하고 있는 레오나드 레이븐힐(Leonard Ravenhill)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눈물’을 가르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령님의 감동 없이는 눈물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죄에 대해 비통함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이 석사 학위, 박사 학위를 아무리 많이 받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지금 우리에게는 중보기도로 눈물이 마를 날 없는 두 눈이 필요하다. 독실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 앞에서 우는 것만큼 우리가 기도의 골방에서 운다면, 부흥의 불길이 요원(燎原)의 불길처럼 타올라 더러운 것들을 전부 태워버릴 것이다. 지금 그리스도인은 회개해야 한다. 그러면 세상이 깨어질 것이다. 먼저 그리스도인이 울어야 한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제단 앞으로 몰려나와 회개의 눈물을 뿌릴 것이다.
구세군의 창설자인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를 아시지요? 그가 구세군을 창설한 후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사역에 동참을 했습니다. 뜻을 모아 사역에 동참하기로 한 사역자들은 맡겨진 사역지에서 열심히 섬겼습니다. 그러나, 별다른 열매를 맺지 못해 윌리엄 부스 목사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썼습니다. “우리가 모든 수단을 다 써보았으나 사람들이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때 부스 목사님이 뭐라고 답장을 보냈는지 아십니까? “울어보십시오.”
성도 여러분, 속회가, 교회학교가, 선교회가, 성가대가 부흥하지 않는다고 한숨 쉬고 있지는 않습니까? 무슨 대단한 장벽에 막힌 것처럼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울어보세요. 답답한 마음, 예수님께 아뢰세요. 눈물 콧물 흘리면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간구해보세요. 우리 주님께서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놀라운 부흥을 허락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우리들 가운데 회개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습니까? 부부간에 문제가 있어도 자신의 잘못이라고 먼저 말하기보다 상대방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자신들의 삶은 인격적이지 못하면서도, 자녀들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고 있으면서도 자녀들이 탈선한다며 나무라기만 할 줄 아는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먼저 상처를 주고도 내가 먼저 상처를 받았다고, 그래서 당신도 상처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회개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실 지나칠 정도로 자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회개할 줄 모릅니다.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고 짓밟혔을 때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광경을 두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이 이교도들에 의해 유린되는 것을 보면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슬픔에 잠겼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 이렇게까지 처참하게 짓밟혀야 하는지 의문을 가지고 불타버린 잿더미 위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 폐허 위에서 눈물로 슬픔의 노래를 쓰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 깨달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레미야애가 3장 40절·41절 말씀입니다. “40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41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한 마디로 무엇입니까?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자, 우리가 우리의 행위를 조사하자, 우리의 살 길은 지금이라도 회개하는 것이라는 뿐’이라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정말 우리 민족이 회복되기를 원한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새로운 도약을 시작하려면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돈과 권력이 결탁하여 만들어내는 온갖 비리를 단절시켜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온 삶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가정이 살 길이요, 우리 민족이 살 길이요, 이 나라가 살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정을 살리기 위해, 직장을 살리기 위해, 교회를 부흥케 하기 위해, 이 나라와 민족의 회복을 위해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회개하면 가정이 삽니다. 내가 회개하면 직장이 삽니다. 내가 회개하면 교회가 삽니다. 내가 회개하면 나라와 민족이 삽니다. 통곡하셔야 합니다. 예레미야처럼 잿더미에 올라가서 눈물을 흘리며 통곡해야 합니다. 더 이상 ‘나는 잘못 없다’고 우길 때가 아닙니다. 우긴다고 해서 죄가 감춰지지 않습니다. 죄는 회개할 때 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짧지만 강하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선포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를 통해서 세 가지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첫째, 자아관이 바뀝니다.
오늘 본문 4장 18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데, 이 기록은 누가복음 5장에 기록된 내용과는 좀 다릅니다. 마태복음은 무조건 부르시지만, 누가복음은 다릅니다. 누가복음은 이렇습니다. 게네사렛 호수가에서 고기를 잡던 베드로는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의 배에 오르셔서 몰려든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고는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선생님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한 마디로 잡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그리고는 그물을 던졌는데 아주 많은 고기를 잡게 됩니다. 이때, 베드로가 어떻게 행동합니까?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지금 베드로가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죄인” 도대체 베드로가 무엇을 잘못했단 말입니까? 오히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러면 죄인이 아니지요. 말씀에 순종했는데 어떻게 죄인입니까? 하지만, 성도 여러분 우리는 베드로가 이 순간 무엇을 깨달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가 깨달은 것이 무엇일까요? 베드로는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겠노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겁니다. 말씀에 의지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말씀에 비추어 봤다-이 말씀입니다. 그랬더니, 자기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 죄인이었는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선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 이제 자신이 살 길은 회개하는 것밖에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회개가 베드로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회개는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도 죄인이요, 여러분들도 죄인입니다. 이점을 분명히 깨닫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회개해야 할 죄인입니다.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더 큰 죄인입니다.
둘째,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집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처음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를 때 사용하던 호칭은 “선생님”이었습니다.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베드로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회개한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가룟 유다를 보세요. 그는 끝까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회개한 사람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때의 일입니다. 여왕은 이따금 가난한 백성들의 집을 예고없이 방문해 음식을 나누며 대화하곤 했습니다. 하루는 어느 독실한 그리스도인 과부의 집에 들어가서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과부의 신앙이 뛰어남을 알고 있는 여왕은 이 여인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의 집을 방문했던 이들 중에 가장 명예로운 손님은 누구였소?” 과부는 지체하지 않고 “예, 바로 여왕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대답을 기대했던 여왕은 조금 실망스러워 “혹시 당신 집을 방문했던 가장 명예로운 손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닐까요?”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과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제게 손님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항상 저와 함께 여기에 살고 계시는 이 집의 주인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손님이십니까? 아니면 주인이십니까? 물질, 명예, 권력, 자식, 학벌, 건강이 여러분의 주인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께서 여러분의 주인이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소유관이 바뀝니다.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죄인”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내가 너로 사람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이 부르심 앞에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가족을 포기합니다. 일터를 포기합니다. 부유하지는 않지만 먹고 살 수 있게 해주었던 배와 그물을 포기합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는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돈이 없으면 불안했고 가족들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으면 편히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일을 하지 않고서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죄인이라고 말한 이상, 그런 것들이 염려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결국에서는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삶을 살게 되지 않습니까?
예전에 부흥회를 인도하시던 목사님들께서는 “지갑이 열려야 진정한 회개”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어떤 분들은 이 말을 들을 때, 교회에서 돈만 밝힌다며 심한 거부감을 보이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진짜 그래요. 가룟 유다가 그 명백한 증거이지 않습니까? 돈 때문에 예수님을 팔아넘기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진정 회개하셨습니까? 소유관이 바뀌었는지 자신을 돌아보세요. 회개한 사람은 주님을 위해서 드립니다. 주님을 위해서 바칩니다. 왜요?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인 것을 비로써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정 리
예수님께서 짧지만 아주 강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성도 여러분, 회개해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통곡해야 합니다. 뼈를 깎는 아픔이 있다 하더라도 잘못된 것은 도려내야 합니다. 회개 없이 회복 없습니다. 회개 없이 치유되는 법은 없습니다. 이 시대에 석·박사 등 석학들이 많이 배출된다 하더라도 회개 없이는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가 살 길은 철저한 회개뿐입니다. 가정이 회복되고, 교회가 부흥하고, 이 나라와 민족이 살 길은 회개뿐입니다. 회개할 때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회개할 때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회개할 때 소유관이 달라집니다. 회개가 유일한 대안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잿더미에 올라가야 할 때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통회자복 해야 할 때입니다. 나의 교만함을, 나의 무지함을, 나의 이기심을, 나의 욕심과 분노를, 나의 질투와 시기를 십자가에서 그 크신 사랑을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 철저히 고백함으로써 용서함 받아야 합니다. 회개를 통해서 부흥의 역사를 맞이하게 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돌아서야 합니다
마 4:12-17 / 김광일 목사
엘리스 쿠퍼라는 록 스타가 있습니다. 그는 무대 위에서 살아있는 뱀을 어깨에 메고 연기를 하였으며, 스스로 제 목을 베는 흉내를 끔찍하게 내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큰 충격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의 로큰롤은 반항과 부도덕과 우상숭배를 부추겼고 난폭성을 드러내어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던 그가 1995년에 기독교로 개종하였다고 발표하자 모든 사람들이 놀라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애리조나 주의 페닉스에 있는 교회에 출석하면서 성가대원으로, 또 교회 자원봉사자로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겸손한 모습을 유지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이 성장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남은 여생을 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변화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사역을 기록하고 있는데, 사역의 시작이 "회개하라"(repent)는 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회개하라"라는 말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단어였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공격적인 선언이기도 하였습니다. 때문에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에게는 매우 불쾌감을 갖게 하였습니다. 지금도 강단에서 "회개"를 선포할 때마다 듣는 사람들은 매우 불쾌감을 느끼거나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이유로 강단에서 "회개하라"는 말과 "지옥"이라는 말을 될 수 있는 대로 삼가려는 경향이 역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시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이 너무 크시기에 간곡히 호소하여 멸망의 지옥을 향해 달려가는 발걸음을 멈추게 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방향을 바꾸게 하시려는데 있었습니다.
회개하라는 희랍어 "메타노이아"는 방향을 바꾸라는 의미가 강하게 함축되어 있습니다. 회개는 "돌아서라"는 말입니다. 멸망의 길에서 구원의 길로 돌아서라는 외침입니다.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는 말입니다. 추한 인생을 살던 록 뮤직스타였던 엘리스 쿠퍼가 예수님에게로 돌아선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도 돌아서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하여 애끓는 마음을 가지고 돌아서라고 외쳐야 합니다. 세상을 향하던 심령들이 매일 매일 주님 앞으로 돌아서야만 합니다. 돌아서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 음성을 듣고 이제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어떻게 돌아설 수 있습니까?
첫째로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시카고의 윌로우 크릭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빌 하이벨스 목사님의 경험담입니다. 한번은 연착된 비행기를 공항에서 기다리면서 어떤 승객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하이벨스 목사님께 그의 인생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다 털어놓았습니다. 그에 의하면 이 세상이 언제나 그에게 적대적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부인도 그를 떠나버렸고 직장에서도 쫓겨났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를 외면하였습니다. 인생이 공평하지 않았다고 불평하였습니다. 겉잡을 수 없이 불평을 털어놓았습니다. 그 사람이 이야기를 마친 다음에 하이벨스 목사는 몇 가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당신은 아내에게 늘 좋은 남편, 사랑하는 남편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내에게 좋은 남편이 되지 못했음을 시인했습니다. "당신은 직장에서 모범사원으로 열심히 충성하였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는 솔직히 고백하기를 성질을 참지 못해서 여러 번 그의 상사를 비난하고 상처를 입혔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돈을 하찮은 일을 위해 사용한 적이 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는 실제로 감당할 수 없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자기 인생을 그렇게 만든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원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행동이 오늘의 자신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책임을 지지 않으면 돌아설 수가 없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집니다.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나 당면한 상황을 결코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인배들은 늘 원망을 합니다. 형편을 원망합니다. 부모를 원망합니다. 직장의 상사를 원망합니다. 배우자를 원망합니다. 자녀를 원망합니다. 원망과 불평에 사로잡힌 채 파멸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대해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현실에 대한 불평보다는 어리석을 만큼 도전적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인생을 스스로 책임을 지고 미래를 만들어 내기 위해 도전했던 사람들이 성공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불평의 자리와 무책임의 자리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둘째로 자신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향하도록 해야 합니다
리차드 다오선박사는 1차대전 당시 영국군인으로 일본 포로수용소에 갇힌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질병으로 죽어 가는 병사들을 보았습니다. 대부분의 질병들은 오염된 물을 마시는 것으로부터 왔습니다. 수용소 근처에 있는 습지와 강물들은 심하게 오염되어 있었습니다. 위장을 해치는 바이러스와 탈수증, 이 모든 것들은 불치의 병을 유발하여 수용소 안에서 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빼앗아 갔습니다. 어느 날 다오선박사는 누군가 그에게 충고를 해준 것이 기억났습니다. 익지 않은 코코넛 안쪽에 있는 물이 거의 균이 없다는 조언이었습니다. 코코넛나무는 수용소 근처의 늪지 언덕에 얼마든지 많이 있었습니다. 다오선박사는 코코넛을 잘라서 그 물을 탈수증과 질병에 걸려 있는 사람들에게 먹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많은 병사들이 건강을 되찾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오선박사는 그 코코넛들이 살균한 물을 가득 채운 채 오염된 늪지와 강물 옆에서 자라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너무 놀랐습니다. 코코넛 나무 뿌리의 조직이 사람을 죽이는 오염된 물을 취하여 그것을 순수하고 깨끗한 물로 바꾸어서 생명을 살려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께서 하시는 일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의 더럽고 불결한 것들과 약하고 무기력한 것들을 취하셔서 순수하고 경이로운 것으로 바꾸어 주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잘못된 것들들 받아드리셔서 본래 창조하실 때 원하셨던 사람으로 바꾸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못된 짓을 계속적으로 하는 사람을 볼 때 "저 사람은 안돼. 도저히 불가능한 사람이야"라고 제쳐놓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언제나 변화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십니다. 누구든지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처럼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보십니다. 때문에 누구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보시기에 하나님께로 돌아서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새로운 목표를 발견합니다. 새로운 생명의 활력을 발견합니다.
우리의 삶을 예수님에게로 돌려야 합니다. 그리하면 새롭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향해서 방향을 돌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인생을 변화시키도록 돌아서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공동체와 연합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990년에 야구의 내야수인 브렛 버틀러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선수들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선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후리 에이전트, 즉 자유계약선수가 되었을 때 다저스가 그에게 좋은 조건을 제시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다저스팀(L. A. Dodgers)을 택하였습니다. 몇 달 후 샌프란시스코에서 다져스팀과 자이언츠팀이 경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부틀러는 샌프란시스코의 가장 무서운 적수인 다저스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습니다. 부틀러가 운동장에 나왔을 때 군중들은 그에게 크게 열렬한 환영을 보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시민들은 아직도 부틀러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틀러가 아직 자이언트를 마음에 두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부틀러는 의외의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새로운 매니져요, 감독인 다저스팀의 토미 라솔다감독에게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포옹을 하면서 자신은 자이언츠팀이 아니라 다져스팀의 일원임을 군중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부틀러가 나는 이제 다져스에게 충성할 뿐 더 이상 자이언트에 소속되어 있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군중들은 그에게 응원을 보내다가 이 행동을 보고 조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부틀러는 훗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나의 인생의 한 페이지를 바꾸는 순간이었다. 지금 나는 다져스 선수이다. 나는 자이언츠 선수가 아니다. 그것은 명확한 현실이었다. 나는 그들이 내가 다져스팀의 선수라는 것을 알기를 원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감독 하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도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에 충성심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와 연합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된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완전히 돌아서서 주님만을 바라보게 될 때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적 삶에서 기쁨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홀로 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나홀로 신앙생활을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애틀랜타 장애인 올림픽 때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뇌성마비 장애자들이 100m달리기를 하는데 뒤따라오던 뇌성마비 중증장애자가 하나 넘어지니까 앞서가던 선수들이 모두 뒤돌아와서 함께 어깨동무를 하면서 끝까지 달렸다고 합니다. 보통 올림픽은 빨리 뛰는 선수가 1등의 금메달을 따기 때문에 목숨을 건 경쟁이었지만 장애인들은 달랐습니다. 함께 뛰어감으로 그것보다 더 멋진 경기를 보여 주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이 세상에서 완전히 돌아서서 주님의 지체가 되어 함께 연합되었음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가족의 한 지체입니다. 모두가 한 부분이 되어야 합니다. 서로 서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교회는 바로 사랑의 정을 나누는 곳이어야 합니다. 아플 때 함께 기도해 주고, 근심과 걱정거리가 있을 때 함께 염려하고 걱정해 주어야 합니다. 기쁜 일이 있을 때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 줍니다. 이제 나홀로 신앙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건강한 몸인 교회는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 충성을 다할 때 놀라운 기쁨과 소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에게로 돌아서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족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찾아오고 계십니다. 그 예수님을 향해 돌아서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돌아서야만 합니다. 돌아서면 우리의 삶을 온전케 하시는 주님께서 여러분을 희망과 축복의 나라로 인도하실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큰 빛으로 오신 예수님
마 4:12-18 / 성홍모 목사
지난주간은 연예인들의 사생활과 스캔들, 그들의 돈 문제 등을 조사한 연예인X파일 문제로 시끄러웠습니다. 이 문건이 누가 어떤 경로를 통하여 유포되었던지 간에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인기 연예인들의 신상정보를 수집하였던 기획사가 잘못을 시인하였으며, 사과 성명을 발표하였지만, 기획사나 연예인 모두가 철저한 자기 반성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사람들에게는 자기만의 사생활이 있고, 남에게는 차마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은 부분도 있는 법입니다. 사람은 과거의 잘못을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기도 하고, 예전의 모습은 떠올리고 싶지도 않으며, 묻어버릴 수 있다면 다시는 머리를 들지 못하게 묻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일들도 있는 법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모든 사람의 프라이버시가 침해받지 아니하며, 책임적이면서, 자유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사생활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감시용 카메라가 따라다닌다거나, 누가 우리의 살아가는 일거수일투족을 녹화하고 있다고 하면 이것은 무서운 일이며,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차제에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더러운 탁류문화를 정화하고 정직한 사람이 성공한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연예인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정직하게 살아야 하고 깨끗한 도덕성을 회복하고, 연예인이라도 사회의 공인이라는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사회에서 어떤 평을 듣고 있습니까?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사람은 여론을 무서워하고, 사람은 두려워하면서 정작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사람을 두려워할 것이 없고, 하나님을 두렵게 생각하지 아니하면 사람을 두려워하고 사람에게 매이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큰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헤롯 안티퍼스에게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 나와 세례를 받으시면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지만, 예수님은 남부 유대 광야에 금식하시면서 기도하셨고, 마귀의 시험도 받으셨습니다. 이제 갈릴리로 돌아가시면서 본격적인 메시아로서 활동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12절에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새번역 성경에서는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다고 하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돌아가셨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개역성경의 이런 문장이라고 하면 마치 예수님이 요한처럼 잡힐 것으로 염려하여 겁을 먹고 도망치고 피신한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갈릴리 지역을 벗어나 유대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갈릴리 사역으로 돌아가시고 있습니다. "물러가셨다가"라고 하면 마치 무엇이 무서워 피신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아니라, 그냥 갈릴리로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같은 병행구절인 막1:14에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다."라고 했습니다. "갈릴리에 오셔서 "라고 하였습니다.
"물러가셨다가"라는 말은 그리스 말로 "아나코레오"라고 하는데, 되돌아가다.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이 말에는 물러나고, 도피하고, 피신한다는 뜻도 들어있지만, 예수님의 본격적인 사역의 출발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은 유대 땅 베들레헴이고, 자라나신 곳은 갈릴리의 나사렛이지만, 주로 활동하신 곳은 갈릴리 해변의 가버나움이란 동네였습니다. 예수님은 본격적인 전도를 위하여 가버나움을 본 동네로 삼아 거처를 옮기시고 전도의 전초기지가 되게 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잡혀 들어가고 갈릴리의 민심이 뒤숭숭할 것인데, 예수님은 메시아로서의 공생애를 힘차게 살아가시는 것입니다. 요한은 쇠하여지고 있으며, 예수님은 흥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이방인 취급을 받을 때도 있었고, 오늘 본문에서도 이방의 갈릴리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우월의식에 사로잡혀 있었고, 갈릴리 사람으로 중앙에 나가서 출세하려면 갈릴리를 떠나 유대로 나가야 했습니다. 갈릴리는 소외당하고, 외면당하던 땅, 그래서 이방 문화에 쉽게 노출되었고, 멸시와 천대를 받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잡혀 들어가고 어떠한 어려움이 있을지 모르는 갈릴리를 주무대로 하여 공생애의 역사를 펼치고 있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보면서 옛날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하신 말씀을 생각하였습니다.
15-16절입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한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전부터 갈릴리 지역은 그늘진 죽음의 땅이었고, 어둠에 앉은 백성들이 살아가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방 사람이나 살만한 땅이라고 하여 이방의 갈릴리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소외된 지역, 이방의 갈릴리에 큰 빛이 비추었습니다.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으로 이사오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갈릴리는 세계적인 고장이 되었습니다. 어둠의 백성들이 살아가고 있었고, 그늘진 죽음의 땅이었는데, 이곳에 복음의 밝은 빛이 비추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참 빛으로 오셨습니다.
빛이라는 말은 "포스테르"라고 하여 하늘의 빛, 해와 달의 빛, 오늘에는 전기 불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밝은 빛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빛을 사용할 때는 돈을 내야하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빛은 무한정 값없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필요한 것이기에 돈 없이 값을 내지 않고 공급해주시고 있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사람은 이 땅에 살아갈 수 없습니다. 빛이란 인간의 생존에 가장 중요한 것이기에 값없이 무한정 공급해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빛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고, 창조하신 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빛이 없다고 하면 모든 생물체는 죽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식물은 빛을 받아 생명을 유지할 수 있기에 결국은 모든 생물은 빛 속에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를 빛 속에 두고 빛 속에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 생활에 필요한 필수 불가결한 것들이 있습니다. 물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땅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공기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 생명체들은 빛이 있어야 합니다. 빛을 내어주는 태양이 있기에 이 지구는 우주의 온실이요,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습니다. 너무나 소중하고 값을 메길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기에 값없이 무한정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다윗 왕은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시편27:1)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이시며, 진리의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빛은 생명과 진리와 참된 것을 상징합니다. 빛에는 거짓이 들어있지 아니하고, 참된 진리와 생명을 주고 있습니다. 빛이 있어야 참과 거짓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빛이라고 할 때에 눈에 보이는 빛만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을 비추고 영혼을 살리는 빛이 있습니다. 이 영혼을 살리고 우리의 심령을 비추어주는 빛은 생명의 빛이십니다.
예수님이 가장 칭찬하신 사람이 있는데, 그는 세례요한이었습니다. 여인이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고 하셨으며, 그는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그런 세례요한이라고 해도 이 세상의 빛이 아니요,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사람일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습니다. 그는 빛이 아니요,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오신 사람이었습니다.
요1:4절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나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셨으며, 요1:9에서는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요8:12에서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빛이요,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의 빛을 얻게 됩니다. 요9:5에는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세상 모든 사람을 비추시는 영적인 빛이요, 생명을 살리는 진리의 등불이 되시고 있습니다.
빛은 살리는 것이요, 어둠은 죽이는 것이요, 빛은 진리요, 어둠은 거짓과 죽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빛과 어둠이 교차되는 것을 보면서 이 세상은 빛과 어둠이 싸우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빛은 보여주는 것이요, 빛은 인도자이며, 빛은 경고를 주기도 합니다.
저는 우리가 믿는 예수님만이 인생의 해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마지막 죽음이라는 한계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모두다 헛것이요, 다 두고 갈 것이요, 썩어질 영광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빛은 오직 주님뿐이십니다. 지금 건강하고 씩씩하고 잘 나가는 때에는 예수님의 소중함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거친 숨을 몰아쉬고 손과 발이 차가워지고 맥박이 200을 넘어서고 죽음을 바라볼 때에 우리 인생에게 소망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생에게 있어 물질이란 잠시 유용하였지만, 물질이 해답이 아닙니다. 명예도 아닙니다. 그의 건강이나 지식도 아닙니다. 나의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해답입니다. 예수님만이 한 줄기 생명의 빛이요, 그 빛을 따라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빛이시라고 외쳤습니다. 사9:1-2에서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오늘 마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께서 유대 지역에서 돌아와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실 때에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진리의 빛이요,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되셨습니다. 우리 민족은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무지몽매한 민족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영적으로 암흑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처럼 어둠에 앉은 백성이었고,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백성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어둠에 앉아 있으니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살아야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입니까?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아 있으니, 하는 일마다 영혼을 해치는 일이요, 죄악을 일삼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은 생명의 빛을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도 영원한 빛, 정말 죄를 낱낱이 찾아내고, 영원한 생명의 길을 갈 수 있는 밝은 빛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늘진 죽음의 땅, 어둠에 앉은 백성이란 말은 우리에게 심각한 경고의 말씀이 되고 있습니다.
킬링필드라는 영화가 상영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제목 그대로 킬링필드 즉 죽음의 땅이라는 말입니다. 캄보디아 내란을 취재하던 '타임즈'지의 특파원 시드니 쉔버그 기자와 공산화된 캄보디아에 홀로 남겨진 친구 '디스 프란'이란 사람과의 인종과 국경을 뛰어 넘는 우정을 감동적으로 그린 작품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인간의 제도나 사상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폭력이 얼마나 야만적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야수성, 무참한 살육의 현장, 질병의 공포, 어둠에 앉은 땅, 그늘진 죽음의 땅을 그리고 있습니다. 공산혁명을 이루겠다고 사람을 죽이는데, 조금만 공부한 사람이라고 공산혁명에 방해된다고 하여 대학을 나온 사람은 다 죽였습니다. 똑똑해 보이는 사람이라면 죽였습니다. 심지어 안경을 썼으니 공부 좀 했을 것이라고 죽였습니다. 3년 간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인구 800만 명 중에 200만 명을 죽였습니다. 이 지구상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제2차 대전 중에 독일은 유태인 600만명을 죽였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어둠에 앉은 백성이요,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입니다. 빛이 없습니다.
우리 민족도 어둠에 앉은 백성이요, 그늘진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3년 간 한국전쟁으로 서로 죽이고 죽는 참담함을 겪어야 했습니다. 우리에게 빛이 없었습니다. 갈릴리를 향하여 어둠에 앉아 있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를 지적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이는 갈릴리를 향하여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온 땅을 향한 말씀입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어두운 방안이라도 한 죽기 빛이 들어오면 어둠을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온통 어둠을 가득 차 있다고 하여도 우리 주님을 영접하고, 우리 주님을 모셔들이면 그 때부터 우리 안에 빛으로 가득차게 되어 있습니다.
흑암에 앉아 있는 자에게, 사망의 그늘과 죽음의 땅에 앉아 있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오직 예수님 만이 생명입니다. 예수님 만이 구원입니다. 예수님 만이 참 소망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밝은 빛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밤이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대낮같이 밝은 전기불이 있기 때문입니다. 등불만 있으면 한밤중이라도 길을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죄악 세상을 힘차게 살아가려면 등불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고, 우리 영혼을 밝혀주는 빛으로 오신 주님을 모셔들여야 합니다. 아직도 캄캄한 어둠에 앉아 있는 성도들이 있습니까? 전혀 출구를 찾을 수 없는 캄캄한 방에 갇혀 있는 성도들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모셔들이고, 성령의 밝은 조명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빛이신 주님과 영적으로 사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과 걸어가는 하루는 빛 가운데 살아가는 하루요, 천국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빛이신 주님을 버리고, 죄악의 어둠에 빠지면 그의 영혼은 어두움이요, 살아있으나 죽음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빛을 발견한 사람이요,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의 빛, 생명의 빛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빛 가운데서 살아가야 합니다. 어둠을 떨쳐버리고 밝은 빛 가운데 걸어가려고 힘써야 합니다.
에디스 와튼이란 사람은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빛을 발산하는 방법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촛불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빛을 반사하는 거울이 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빛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성도들입니다.
발명왕 에디슨이 전기를 발명한 이후에 우리는 밝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미국의 도박 도시 라스베가스의 밤은 문자 그대로 휘황찬란한 밤의 도시입니다. 우리나라 시청 앞에 나가기만 하면 얼마나 밝고 화려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밝은 도시인데,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다 어둠의 일 뿐입니다. 사람들에게 빛이 없습니다. 하는 일마다 어둠의 일뿐입니다.
옛날 호롱불 피워놓고 공부하고 바느질하던 시대에는 양심의 빛이 더 밝았습니다. 지금 이 세상의 불은 밝은데, 마음의 불을 어둡기만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에 영적인 빛을 필요로 합니다. 세상의 모든 어둠을 몰아내고 밝은 대낮같이 살아가게 하시는 이는 우리 주님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따라 저 천성을 향하여 힘있게 달려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갈릴리의 먼지 나는 시골길
마 4:23-25 / 이정선 목사
저는 종종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만약 자동차가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예를 들어 여기서 마운트까지 넘어가는 데 한 15분가량 걸리는데, 만약 자동차가 없다면 아침을 든든히 먹고 열심히 걸어서 점심때쯤 도착해서 일을 보고 다시 돌아오면 해가 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에 매주 해밀턴을 다녀오는데, 여기서 해밀턴까지의 거리가 딱 100km입니다. 조금 서두르는 기분으로 운전을 해서 가면 1시간 30분이면 갑니다. 그런데 자동차가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괴나리봇짐을 지고 열심히 걸어서 카이마이 산을 넘으면 아마 해가 지겠지요? 그러면 주막이나 또는 민가에 들러 하룻밤을 보내고 그 다음날 아침에 또 서둘러 길을 재촉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 100km 행군을 하는데 보니까 50분 행군하고 10분 휴식하는 것으로 해서 딱 24시간이 걸리더군요. 그러니 군대의 행군이 아닌 여행길이라면 사흘이나 나흘이 걸려야 해밀턴에 도착하지 않겠어요? 올 때도 마찬가지로 그만한 날이 소요될 것이구요.
예수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면서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가르치셨다고 했는데, 만약 제가 그 예수님께 선물을 하나 해드릴 수 있다면 자동차를 한 대 사드리고 싶습니다. 갈릴리 지역이라고 해봐야 남북으로 약 80km, 동서로 약 45km밖에 되지 않는 작은 지역입니다. 그러나 자동차가 있는 우리에게는 작은 지역이겠지만 자동차가 없이 늘 걸어서 여행을 하셔야 했던 주님께는 갈릴리 지역만 해도 엄청나게 넓은 지역이었을 것입니다. 뙤약볕 아래 먼지 나는 길을 걸어서 이 동네 저 동네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셨을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다리도 많이 아프셨을 것이고, 배는 고픈데 먹을 것이 마땅치 않았던 적도 많았을 것입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잠자리는 얼마나 편했는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이 그렇게 많은 능력을 뒀다 뭐에 쓰시려고 하시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손가락 하나 까닥하시면 모든 사람들이 벌벌 떨며 복종을 할 텐데,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을 그냥 내버려두시니까 끔찍한 범죄도 일어나고 잔인한 전쟁과 학살도 일어나잖아요? 또 지진이나 쓰나미 같은 재해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능력을 조금만 행하시면 우리가 사람들에게 예수 믿어야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수고하면서 전도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제가 엊그제 터키의 쿠르드족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선교사님을 만났는데, 무슨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거기 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더군요. 전도를 하면 즉시 추방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조금만 신경써주시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을 터인데,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시는군요.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이 원망스러워질 때도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야 하는지, 하나님은 왜 그냥 침묵하고 계시는지 이해가 되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기도하고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큰 잘못을 한 것 같지도 않은데,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충성스럽게 살아보려고 애를 썼는데, 축복은커녕 고난이 닥칠 때 우리는 혼란하고 낙심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오셔서 기적을 일으켜주시지 않는 걸까요? 과연 하나님은 그 많은 능력을 아꼈다가 어디에 쓰시려는 걸까요?
갈릴리의 척박한 땅을 고향으로 삼으시고 그 땅을 두루 다니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하셨던 예수님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그분은 왜 하필 자동차도 없는 그 시대에 오셔서 그렇게 고생을 하셨을까요? 땀과 먼지를 뒤집어쓴 피곤한 육신을 그대로 땅에 눕히고 잠을 청하셨을 그 주님, 능력이 없어서 그러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에도 언급되고 있습니다만, 예수께서는 각종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분은 의과대학을 졸업하지도 않으셨고 침술을 배우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죽은 사람도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를 향해 잠잠하라고 명하실 때 바람이 멈추고 바다가 잔잔해졌습니다. 그분은 배가 없이도 물 위를 걸어서 호수를 건너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한 시간에 4km를 걸으며 발이 부르트도록 여행을 하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분은 왜 그렇게 고생을 사서 하셨을까요? 그것은 고생하는 우리와 똑같이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슬퍼하는 것처럼 그분도 슬픔을 겪으셨고,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이 그분이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 앞에서 우리의 고난이 부당하다고 따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느냐고 항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을 아시고 하나님 자신이 우리처럼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카운셀링을 공부하면서 많은 것을 깨닫고 배우는데, 사람들이 고통과 문제를 가지고 카운슬러에게 찾아옵니다. 여기서 그 카운셀러의 역할은 그 사람들의 고통과 문제를 해결하고 없애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카운셀러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어요. 카운셀러가 하는 일은 그 고통과 문제에 짓눌려 못살겠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그 문제를 안고 살 수 있도록 강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알 수 없는 고난이 찾아올 때, 우리가 신음하며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당장 오셔서 그 고통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을 벗겨주시는 것보다 우리가 그 고통을 감당하고 살 수 있을 만큼 강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그 고난에 짓눌려 압사당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더 강하게 훈련되고 더 아름답게 다듬어진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았던 욥은 그의 고통 가운데서 말하기를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고 했던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에게 고난이 찾아올 때, 갈릴리의 뙤약볕 길을 걸으셨던 주님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큰 위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 고난에 짓눌려 살지 않고 그 고난을 이겨내고 더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셨기에, 그분 스스로 그 고난 가운데 계시면서 우리를 응원하셨던 것입니다. 몇 년이 지나도 개종자 하나 얻지 못할 만큼 힘겨운 선교사역을 해야 하는 선교사들을 위로하고 응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이 그렇게 스스로 샌들을 신고 먼지 나는 갈릴리 땅을 걸어 이 동네 저 동네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하셨던 것입니다.
23절에 보면 특별한 단어 세 개가 나오는데, 가르치셨고, 전파하셨고, 고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예수님의 사역의 내용입니다. 가르치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교훈이지요. 복음서는 예수님의 교훈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특히 바로 다음에 나오는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교훈의 핵심이라고 할 만하지요.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교훈하신 것이 가르치심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전파하셨다고 했는데, 천국 복음을 믿도록 선포하시고 전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천국 복음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매우 정치적인 용어입니다. 마치 왕이 정복한 땅에 입성하면서 ‘이제 이 성은 내가 접수한다.’ 하고 외치는 것과도 같습니다. 마태는 하나님이라는 단어 대신 하늘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하나님나라라고 하지 않고 하늘나라(천국)라고 표현했다고 했지요? 말하자면 새로운 나라, 하나님나라의 도래가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선포하시는 예수는 그 나라의 왕이십니다. 마태복음의 테마는 왕이신 예수입니다.
예수님의 세 번째 사역은 고치시는 것입니다.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고 했는데, 24절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이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 언급되지 않은 수많은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치유를 받았을 것입니다만, 마태는 대표적으로 불치병이나 난치병이 언급하고 있겠지요. 육체적인 질병과 정신적인 질병을 모두 포함해서 인간이 고통을 겪게 되는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주님은 그렇게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수많은 병자들을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다고 했어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아름답게 지으신 인간, 창조의 절정인 인간이 그렇게 파괴되고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무척 마음이 아프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고통 중에 신음할 때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마음 아파하실지 상상이 되십니까? 그 주님의 자비하심이 여러분에게 큰 위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우리가 보통 그것을 영적인 부분이라고 분리해서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구원은 영적인 구원이 따로 있고 육적인 부분은 해당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의 육신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이 썩을 육신이 썩지 않을 영광스러운 육신을 입게 될 때 구원이 완성될 것입니다. 기독교 사상에 가장 악영향을 끼친 것이 영지주의적 이원론인데,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치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은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계시는 거예요.
이 예수님의 세 가지 사역은 사도와 교회를 통해서 계승되고 있습니다. 오늘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은 바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서 알아야 할 것들을 올바로 가르치며, 또한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으로 병자들을 고치신 그 사역은 다양한 영역에서 세상을 섬기는 것으로 시행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주께서 행하셨던 사역이 오늘 우리 교회와 우리의 삶을 통해서 시행될 때 그곳에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그 부르심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구요. 오늘 우리가 과연 예수님의 사역과 삶을 구현하고 있습니까? 비록 우리가 연약하지만, 갈릴리 그 시골길을 걸으시던 예수님이 오늘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와 함께 역사하심을 믿습니다. 그 주님을 힘입어 복음의 놀라운 소문을 멀리까지 퍼뜨릴 수 있는 우리 교회, 또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세가지 사역
마 4:23-25 / 김태환 목사
올해 사순절(Lent)은「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이라는 한 편의 영화 때문에 화제인 것 같습니다. 지난 금요일에는 우리교회 중고등부 학생들이 단체로 그 영화를 보았습니다. 본 학생들이 많이들 울었다고 합니다. 제 딸에게도 물었더니 “It was so great movie!” 그러더군요. 단순히 teenager들이 감상적(感傷的)이어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청년부 학생들 중에서도 참 감동적이었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아직 안 보신 분들은 남들이 다 좋다고 하니까 한번 가 보세요. 아니면, 고난주간(4월 4일-10일)까지 기다렸다고 보시든지요.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저희 회당(會堂, Synagogue)에서 가르치셨다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온 갈릴리”라는 말은 “throughout Galilee”라는 말입니다. 갈릴리 안에서도 특정한 지역을 정해 놓고 사역을 하신 것이 아니라,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다 보면 아주 감동적인 말씀을 만나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안정(安定)된 삶을 살고 싶어합니다. 유목민(Beduin)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의 농경문화를 동경하게 된 것도 모두 안정된 삶을 살고 싶다는 유혹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예수님의 소문이 사방에 퍼져 나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원했습니다. 그리고 아예 같이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느 한 곳에 오래 동안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유일하게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도 원하니까 그 사람들과 이틀을 머무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요한복음 4:40). 그러나 이틀 후에 예수님은 그곳을 떠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나를 원한다는 것은 참 큰 유혹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같이 있고 싶은 욕구(欲求)가 있습니다. 한번은 저녁 늦게까지 병자들을 고쳐 주신 예수님께서 새벽 미명(未明)에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이 때 제자들이 찾아 와서 “주님,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찾고 있습니다(Lord, everyone is looking for you.)." 이 때 예수님께서 어떤 대답을 하신지 아십니까? “이제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서 거기서도 전도해야 하겠다. 나는 이를 위하여 왔다(마가복음 1:38).”
참, 감동적인 말씀 아닙니까? 예수님에게 있어서 전도(preaching)는 시각(時刻)을 다투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전도를 언제든지 기회가 주어진다면 해야 하는 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되도록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지역에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시각을 다투는 시급한 일이었습니다. 훗날 바울이 정의(定義)한대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16, The godpel is the power of God for the salvation of everyone who believes.).” 복음을 듣지 않고는 누구도 구원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전도자에게는 사람의 영혼에 대한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 지역으로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않느냐? 눈을 들어 밭을 보라. 벌써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요한복음 4:35).” 이 말씀에 “넉 달(four months)”이란 말과 “지금(now)”이라는 말이 대조(對照)되어 있습니다. “넉 달”이라는 말은 사람의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과 긍휼의 마음이 없는 사람들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지금”이라는 말은 영원 구원의 시급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직 멀었어. 아직은 때가 아니야. 때가 되면 누군가 그 일을 하겠지!” 그러나 우리 주님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이미 추수할 때가 된 곡식들로 보였습니다. 누군가 낫을 대기만 하면 되는 그런 사람들로 이 세상이 꽉 차 보였습니다.
사마리아의 수가의 우물 가에서 한 여자에게 복음을 전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요한복음 4:32).”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마을에서 먹을 것을 구해가지고 막 돌아 온 참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의 뜻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식사를 하셨기 때문에 배가 불러서 더 먹을 수가 없다는 말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배고픔을 잊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참 만족을 얻는 일이었습니다. 너무 좋고 기쁠 때는 밥이 먹히지 않습니다. 먹어도 맛을 모릅니다. 예수님에게는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그런 일이었습니다. 잃은 양 한마리를 찾은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에 참가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두번째 사역은 가르치는 teaching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주로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내용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의 회당은 처음에는 성전에 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 예배의 장소를 제공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주로 교육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회당에 가면 회당장이 있습니다. 회당장은 회당을 관리하는 책임자입니다. 회당장이 하는 일은 가르치고 설교할 랍비를 초청하는 일이었습니다.
누가복음 4:16-17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가셨던 일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자기 규례대로(as was his custom)”란 말을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늘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나라렛이면 예수님이 자란 고향입니다. 나사렛은 작은 마을입니다. 그런데 회당장이 예수님을 랍비로 알고 이사야의 글이 적인 두루마리를 드렸다는 것은 얼른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랍비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목수의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날 나사렛의 회당에서 이사야 61:1-3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을 읽으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슴하셨습니다.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Today this scripture is fulfilled in your hearing.).”
이건 제 생각입니다만, 나사렛의 회당에 가신 예수님께 랍비들에게 있었던 권위(權威, authority) 이상의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회당장은 예수님을 몰랐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거기 모였던 나사렛 사람들도 성인(成人)이된 예수님을 몰랐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가지고 계셨던 권위에 압도되어 회당장은 두루마리를 드린 것 같습니다. 이사야 61장은 의심할 바 없이 메시야의 사역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부으심으로 이사야서에 기록된 말씀이 오늘 너희에게 이 말씀을 읽는 나를 통하여 모두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은혜(the LORD'S favor)의 선포였고, 동시에 천국은 하나님의 심판(vengeance)의 선포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니느웨(Ninevites)에 임박햇다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거부했던 요나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2,000년에 단기선교 대원 10여 명을 데리고 탈북자들을 찾아 갔습니다. 가서 탈북자들에게 성경공부를 일대일로 시켰습니다. 성경공부라야 불과 3일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인데……저 자신도 그랬지만, 그 때 같이 갔던 한 자매가 절박한 목소리로 탈북자 자매에게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니까 꼭 기억해애 돼요? 알았지요?” 이렇게 성경을 가르쳤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포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의 선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절박함이 있어야 합니다. 왜 그렇게 절박합니까? 한 생명이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천국은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영(the Spirit)이듯이, 그분이 다스리는 나라도 영적인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가르치기 위하여 비유(parables)를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비유의 소재는 일상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평범하고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특징은 그것이 쉬워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어떤 사람에게는 끝내 이해되지 않은 채 감추어진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비유의 이중성(二重性)이라고 할까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는 이중성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쉽게 이해가 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철저하게 그 메시지가 감추어집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사역은 백성들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는 치유(治癒, healing) 사역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갈릴리는 물론 온 수리아(Syria)에까지 퍼졌습니다. 예수님에게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24절)”을 데려왔습니다. 모두 다 잘 낫지 않은 불치(不治)의 병들이었습니다. 그 외에 문둥병 환자들(마태복음 8:2, 누가복음 17:12), 혈루증(血瘻症, disease with an issue of blood, 마태복음 9:20) 환자들도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병이 낫는 기적(奇蹟, miracle)을 체험했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기적의 의미는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베푸신 기적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표적(表迹, signs)이라는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소자야, 안심하라. 네가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말을 듣고 율법학자들이 분개했습니다. 당신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冒瀆, blasphemy))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이 말에 예수님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면서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마태복음 9:2-8)!”
이 말씀을 잘못 생각하면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세요. 중풍병으로 누워 있는 사람에게 “죄사함을 받으라”는 말과 “일어나라”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어렵습니까? “일어나라”는 말이 더 어렵지요? 그런데 실제로 이 중풍병 환자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는 죄를 사해 주시는 권세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네 죄사함을 받으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도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그 기적 자체 보다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또 하나 기적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는 것입니다. 마태가 그의 복음서에 기록한 것처럼 “그는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신 것(He took up our infirmities and carried our diseases., 마태복음 8:17, 이사야 53:4).”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모든 연약한 것, 우리들의 병을 대신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 주시려고(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마태복음 20:28)” 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연약한 우리를 섬기려고 오셨습니다. 병을 고쳐 주신 것은 그분의 섬김의 삶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분은 병들어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섬기셨고, 소외된 사람들을 섬기셨고,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셨고, 죄인들을 섬기셨습니다. 건강하고, 부유하고, 의로운 사람들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대로 그런 사람들을 친구로 삼지 말라고 하시면서, 스스로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a friend of tax collectors and sinners, 마태복음 11:19)”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아 우리에게 오셔서 이 세가지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절박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파하시고, 천국를 가르치시고, 약한 사람들을 섬기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대충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에 충실하기 위하여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우리의 주님(The Lord)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주님이 되셨을 뿐만 아니라 장차 모든 인류의 주님이 되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문제는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을 본 사람들이 그 영화에 십자가까지만 있고, 부활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영화를 잘못 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마지막에 아주 인상 깊은 장면으로 나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마지막 한 장면으로 처리되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새로운 역사가 시작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20장에만 나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절, As the Father has sent me, I am sending you. 21절).” 그리고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시면서 “성령을 받으라(Receive the Holy Spirit).” 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처럼, 주님은 자기 제자들을 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의 사역이 그의 제자들에게 위임(委任, commission)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여러분에게 중요합니까?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사역이 오늘 여러분에게 그대로 위임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이 세가지 사역을 하고 있습니까? 무슨 사역입니까?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 천국을 가르치는 사역, 약한 사람들을 섬기는 사역입니다. 이 사역이 자신에게 위임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서는 우리는 절대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 수 없습니다. 무늬만 제자로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자신에게 3가지 질문을 던지십시오. “나는 복음을 전파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천국을 가르치고 있는가?” “나는 약한 사람들을 섬기고 있는가?” 예수님은 세가지 사역 중 그 어느 사역도 소홀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우리도 이 세가지 사역을 해야 합니다.
오늘날은 고도의 전문사회가 되어서 사회는 전문가를 원합니다. 어느 분야의 전문 지식을 가진 전문가를 원합니다.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좁은 분야라도 고도의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을 찾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도 아니고 세가지 사역을 한꺼번에 할 수 있을까요?
우리 시대의 사역은 전문인(專門人) 사역입니다. 올 해 단기선교사 모집 중에 전문인 선교사 모집이 있습니다. 의료선교, 음악선교 같은 것이 전문인 사역의 모델입니다. 아프리카 람바레네에가서 선교사의 삶을 살았던 쉬바이처 같은 사람은 일찍이 의료 사역 분야를 개척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은 아프리카 오지(奧地)에 들어가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고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그렇지만 잘 생각해 보세요. 그렇다고 쉬바이처가 가르치는 사역은 하지 않았다고 하겠습니까? 복음을 선포하는 사역은 하지 않았다고 하겠습니까? 걱정할 것 없습니다. 어느 한 분야라도 그 분야에 온전히 헌신하게 되면, 다른 두 분야는 걱정할 것 없습니다.
문제는 나의 삶을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서 내 삶을 헌신하는다는 자기 삶에 대한 비젼과 열망(熱望)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살았듯이 나도 그렇게 살겠다는 생의 결단입니다. 이것은 결코 오늘 우리가 새롭게 발견한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2000년 전에 그의 제자들이 그렇게 살도록, 자신의 사역을 그의 제자들에게 위임해 주신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 그의 제자들에게 친히 위임해 주신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과 저에게, 그리고 이 교회에게 위임해 주신 것입니다.
복음의 3대 원칙
마 4:23-25 / 김상수 목사
어제 아침 KBS뉴스시간에 미국의 부시대통령이 한국기자와 인터뷰 하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나는 원칙에 강한 사람입니다. 북한이 대량살상무기를 생산하면서 백성들을 굶주리게 하는 것은 원칙에 맞지 않는 일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원칙을 붙든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불가불 부득이한 일로 고생하는 일이 있지만 많은 경우가 원칙을 붙들지 못해서 고생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녀들이 부모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결혼문제에 있어서는 부모가 자식을 이기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부모님들은 합당치 않는 결혼이라고 하지만 당사자들은 사랑에 눈이 멀어 결혼을 하게 됩니다.
결혼 후에 잘못된 부분들이 보이게 되어 이혼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자녀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원칙을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얼마든지 우리 주위에도 이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신앙생활에도 원칙을 존중하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의 원칙이 무엇일까요? 영적인 부분을 붙들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신앙은 먹고사는 육신의 문제가 아니고 영혼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육신의 문제는 직장과 가정에서 해결하시고, 영적인 문제는 교회에 오시면 해결할 수 있도록 구하시고 또 하나님과의 관계에 기준을 두어야 합니다.
이 원칙을 제대로 붙들지 못하면 교회에 와서도 직장 생활하는 것처럼 인간의 생각이나 자신의 머리를 가지고 모든 것을 바라보고 판단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오면 하나님이 보여야 하는데 사람이 보이며, 사람의 일이 자꾸만 보여 결과적으로 시험에 들게 되고 영혼의 손실을 보게 되어 믿음에서 떠나게 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한때 KBS방송에서 [노자] 강의를 한 김용옥 교수님이 있습니다. 그분은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학교에서 강의 중 “여러분! 저는 학생시절목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중도에 포기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는 세 가지 말-믿어라! 돈내라! 집짓자!-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목사가 되어서 뭐하겠냐!”는 생각 때문에 그만 두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분이 박학다식하며 유명한 분이지만 그 영혼을 볼 때 답답하고 측은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꼭 기억합시다. 무엇이든지 원칙에서 벗어나면 그것은 곧 탈선입니다. 기차가 달선하면 죽게 됩니다. 학생이 공부하지 않는 것은 탈선이며 결과는 파멸입니다. 정치가가 원칙에서 벗어나면 부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가 원칙에서 벗어나 살게 되면 타락합니다. 타락하면 부패보다 더 악해집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다가 타락하면 불신자 보다 더 악하게 됩니다.
교회가 원칙에서 벗어나면 교회도 부패하고 타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중세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을 벗어나 타락하게 되어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이러한 원리에 입각해서 목회의 방향을 “바른 신앙, 바른생활, 바른 교회”가 되자 입니다. 교회가 복음의 원칙을 벗어버리면 버림을 받게 되어 빛이 없는 등잔과 맛이 없는 소금과 같이 되어 사람에게 밟히는 존재가 됩니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 존재의 가치를 상실하게 되면 버림을 받아 남에게 밟히는 천덕꾸러기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교회와 성도가 복음의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는 하나님의 축복받는 공동체가 되어야겠습니다.
여러분! 복음의 원칙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일생이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그분이 복음을 전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이 바로 복음입니다.
또한 23절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 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와 같이 예수님처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는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고치셨다”는 세 가지의 동사가 나와 있습니다. 이 세 가지의 원칙이 우리교회의 목회원칙과 성도님들의 신앙의 원칙이 되어야합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에 항상 마음에 두어야 할 부분은 처음이 잘되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시작은 미약하지만 나중이 창대하며 잘 되는 것이 축복입니다.
성도들의 신앙의 목표와 초점을 항상 그곳에 두고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는 가르치는 사역입니다.
교회는 가르치는 일과 성도는 배우는 “교육”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무엇을 가르치고 배워야 할까요? 성경말씀에 우리가 배워야 할 대상은 오직 주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주보다 더 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세상에서 배웠던 학문과 모든 지식은 내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했으며,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최고의 지식이며, 최고의 고상한 것임을 깨달아 세상에서 알고 있었던 모든 지식을 분토와 같이 여겼다고 고백했습니다.
위에서 김용옥 교수를 측은하게 생각한다는 이유는 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비밀을 깨달은 자는 세상의 모든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모든 학문들이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 있는 지식들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교육을 중요하게 인식하며, 예수님을 잘 배우고, 알고,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육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유일한 방편입니다.
어린아이를 키울 때 미국에서 키우면 미국시민으로, 중국에서 키우면 중국시민으로 언어뿐 아니라 모든 사고도 그 나라 식으로 됩니다. 그래서 교육에 의해서 인간이 결정되어집니다.
제가 러시아 볼가돈스크에 갔을 때 그곳에 사는 한인회장에게 예수님을 전해보았을 때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저는 어렸을 때부터 50이 가깝도록 이곳 공산주의 무신론 사상밖에 배운 것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제 머리 속에는 하나님이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자라며 어떤 교육을 받느냐는 것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교육받지 않고는 인격적인 인간이 되지 못하듯이 성도도 교육을 받지 않는 성도는 인격적인 신앙인이 될 수 없습니다.
70년대 한국교회는 교육보다 부흥회를 열심히 했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80년대 초부터 선교단체들이 교회 밖에서 열심히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선교사님들이 교회 안에서도 교육할 수 있도록 협력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제자훈련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의 공로입니다.
현재 성도들 가운데 주일 한번 드리는 예배로 바른 신앙인이 되려고 하는 분들이 있지만 절대로 바른 신앙인이 될 수 없습니다. 지식은 반드시 체계를 갖추어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신앙의 지식도 체계없으면 바른 신앙지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교육을 통하여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이 바르고 체계적으로 알아가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아는 지식으로 그의 능력도 맛보아야 하며, 몸으로 실천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영혼구원에 헌신해야 하며 그들을 교육하여 새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본분이며, 교회의 중요한 사명인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교인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첫째는 교육을 등한히 했으며, 둘째는 많은 교회가 70-80년대에 교역자들의 이동이 빈번했습니다. 그 결과로 어머니가 자주 바뀌는 아이처럼 올바른 인격으로 자라지 못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 한국교회 성도들의 모습이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는 사회적으로 어려운 때에 많은 성도들이 이사하게 되어 교회를 자주 옮기는 경우로 여러 목사님을 통해 신앙생활을 하게 된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바르게 자랄 수 가 없었습니다.
현재는 사회적으로도 안정된 가운데 자주 교회를 옮기지 않고 한 목회자에게서 교회가 실시하는 여러 제자훈련에 참여하여 바른 교육으로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교회에서는 초급반, 중급반, 고급반, 사역자반이 있습니다. 또한 목요일 아침6시에는 직장에 다니시는 성도님들을 위해서 한 시간 제자 훈련 후에 7시에 아침식사를 무료로 제공해드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제자훈련에 많이 참석하셔서 바르게 성장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복음은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을 말합니다. 기쁜 소식은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난치병에 걸린 환자가 어느 병원에서 병을 고치게 되었을 때에 그는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하며 알리고 다닙니다.
우리도 지옥에 가야할 사람들인데 영원한 천국백성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왜 복음을 전하지 못할까요?
제대로 은혜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시며”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들에게도 이 복음을 전하라고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폴 뉴만은 “나는 쇠사슬에 꿴 하나의 구슬이고 다른 사람들을 연결할 수 있는 끈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나를 공연히 창조하지 않았다”라고 하였습니다.
성도의 모든 삶의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일인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알려주고 그들을 인도하여 구원하는데 두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혼구원이 얼마나 중요한지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배와 부모를 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직장과 사업과 육신의 어떤 일 보다도 하나님의 일인 천하보다 귀한 영혼 구원하는 일이 최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무엇을 우선으로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제 직장이 사업처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선교지라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그래서 원칙에 맞는 삶을 살아 간다면 마28:20절에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붙잡고 개척교회 때부터 20년이 지나도록 아무리 어려워도 돈을 구하러 어디를 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맡기며 지금까지 지켜주신 하나님을 믿으며 나아왔습니다.
죠지 투르엣 목사님은 “예수님께 한 영혼을 인도하는 것은 이 세상 살아가면서 얻을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알고 있는 지식은 별로 소용이 없는 것 같습니다. 고기 잡으러 가는 배가 다 갖추어 놓고 그물도 갖추어 놓고 바다에 가서 그물을 던지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며칠 전 노회에서 교회성장세미나를 했을 때 강사 목사님께서 교회 개척한 지 10년인데 일 천 명의 성도가 모인다고 하셨습니다.
그 목사님이 군인들이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리는 훈련을 할 때에 처음에 자기 스스로 뛰어 내리는 사람이 없고, 모두 뒤에서 밀어서 뛰어내린 것처럼 전도도 성도들이 전도하러 나갈 때는 울상이 되어 나가는데 몇 번 나갔다 들어오면 자신감을 얻어서 얼굴이 환해가지고 들어온다고 하시면서 무조건 전도하러 내보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억지로라도 이런 정신을 가지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성도는 두 그룹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 그룹은 마음이 깨끗한 성도들로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기쁨으로 할 뿐 아니라 이유가 없습니다. 또 한 그룹은 마음이 깨끗지 못한 사람들로 여러 가지 이유와 불평과 잔꾀를 많이 부립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회개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기쁨으로 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어느 성도님이 타 지방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목사님! 집안일이 많아 전도하러 못나가니 마음에 불이 납니다. 전도하고 싶어 죽겠는데 집안일에 매여 나가지 못하니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왜 그 분은 그런 은혜를 받았을까요? 그분은 하나님 앞에 깨끗한 심령을 가신 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깨끗한 심령이 되면 은혜 충만을 받고 많은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모두 이런 은혜를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또한 선교는 교회가 해야 할 몫입니다.
앞으로 선교의 비전은 평신도 선교입니다. 평신도들이 자동차 정비사, 교사, 간호사, 의사, 컴퓨터전문가등 다양한 분야의 선교사들을 요구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목사님들은 비자가 잘 나오지 않지만 평신도들은 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캄보디아에 황기수 장로님은 한국과 미국에서 좋은 직장에서 일을 하시던 분인데 현재 환갑이 넘으셔서 캄보디아에서 목수일을 하시며,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일꾼들이 우리 성도들 중에서도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시대는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영국의 WEC 본부 정보실에 근무하시는 정기철 선교사님에게서 메일이 왔습니다. 메일의 내용은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가 미국의 각 학교에 배포해 달라는 이슬람교의 소개문 몇 만부를 미국 정부에 가지고 왔다는 것입니다.
미국 정부는 사우디아라비아 대사에게 “당신들이 가져온 소개지만큼 성경책과 예수 영화와 맞바꾸자”라는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영국의 웹 본부에 성경을 보내달라는 메일이 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시대가 급속하게 변화되는 시대에 대처할 수 있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치유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복음은 생명을 살리며, 치유하고, 병을 고치며 새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병이라는 것은 영어로 'disease'라고 합니다. 'dis'는 ‘아니다’, ‘ease'는 ‘평안하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병은 ‘평안하지 않은 것’이 병이라는 것입니다. 육신이 평안하지 않으면 육신의 병이며, 마음이 평안하지 않으면 마음의 병입니다. 심령이 평안하지 않으면 심령의 병입니다. 이 모든 병을 치료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가정, 사업, 직장, 자녀 등의 많은 문제들을 치료하는 방법은 예수님께 나아와 내어 놓아야 합니다.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아픈 곳을 다 내어놓는 것과 같이 교회 앞에 다 내어 놓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치유 받고, 나아가서 은혜 받은 것을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지역사회를 위해 하는 봉사사역입니다. 이 일을 힘써 하나님의 사역을 돕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가운데 특별히 개인적으로 문제가 있어 치료를 받아야 할 분이 있습니까? 칼 메닝거라는 정신의학자에게 많은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정신적으로 불안할 때에 어떤 충고를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상식적인 대답으로 병원에 가라는 말이 아니라 “당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찾아가 그들을 도와 보십시오. 그러면 나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모든 성도님들은 복음의 원칙에 충실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바른 교육으로 잘 배우시고, 나아가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하며, 그들을 치유해 새롭게 만들며, 가정과 교회가 새로워지고 직장이 새로워지며,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성취해 드리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앞에 섰을 때 영광스런 상급으로 준비될 것이며, 땅위에서도 우리의 마지막이 아름답게 준비되어질 줄로 믿습니다.
처음보다 맨 마지막이 좋아야 합니다.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 합니다. 젊었을 때에 힘쓰고 노력하여서 어떠한 환란과 핍박이 닥쳐와도 말씀의 원칙대로 산다면 나이가 많아진 후에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셔서 아름다운 영광으로 준비해 주실 줄 믿습니다.
‘와, 보라!’고 말하십시오!
마 4:23-25, 요1:43-46 / 전순기 목사
요즘 교회들마다 부흥과 성장이 멈추고 정체 현상을 경험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전도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더 많이 설교하고 더 많은 전도 프로그램들을 개발해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의 열매는 미미합니다. 그런데 저는 다른 교회 목사님들보다 비교해 보면, 상대적으로 전도에 대해서 덜 강조하는 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도에 대한 중요성을 덜 느끼고 있다던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전도는 주님의 지상 명령이기에 저도 늘‘어떻게 하면 성도들로 하여금 전도하는 삶을 살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다만 전도하는 일이 일반 성도들에게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인지 알고 있고, 또 전도하자고 자꾸 강조한다고 해서 전도가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에 강요하지 않는 것일 뿐입니다.
제가 확신하는 것은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구원의 감격과 감사가 넘치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전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전도하라고 강조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복음을 더 잘 전하려고 힘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제 믿음대로, 안양 교회 성도들은 은혜 받은 만큼 자연스럽게 전도하고 있고, 그 열매를 보고 있어서, 안양 교회는 지금까지 중단 없이 꾸준히 부흥하고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전도는 지상 명령으로 주어진 것이기에 우리는 항상 힘써야 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일 년에 두 번, 전반기와 후반기에 한 번씩 만이라도 온 성도 개개인이 그리고 모든 목장들이 마음을 모아서 기도하며 전도에 힘쓰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제 5월 마지막 주일을 초청 주일로 삼고, 한 달 동안 집중적으로 기도하고 사람들을 초청하려고 합니다.
대체로 성도들에게 전도란 무척이나 어렵고 힘든 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오늘 요한복음 본문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전도하는 걸 보면, 전도하는 일이 그렇게 어렵고 힘든 일로 보이지 않습니다. 전도자가 되기 위해서 무슨 대단한 훈련을 받아야 되거나 오랜 신앙의 경력이 쌓여야 하는 것도 아님을 보여줍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을 만난 그 다음날 즉시로 형제 베드로에게 전도했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빌립도 주님을 만난 즉시로 친구 나다나엘에게 전도해서 열매를 맺었습니다. 도대체 이들은 어떻게 이렇게 자연스럽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전도의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까? 이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 비결을 배워봅시다.
입소문 마케팅
여러분들은 입소문 마케팅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어떻게 하면 상품이나 서비스를 효과적으로 많이 팔수 있을 것인가를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마케팅이라고 합니다. 다양한 마케팅 방법 중에 가장 효과적이고 값이 싸게 먹히는 마케팅을‘입소문 마케팅’이라고 합니다. 입소문 마케팅을‘버즈 마케팅’이라고도 합니다.
입소문 마케팅이란 제품을 경험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자연스럽게 자신이 경험한 것을 선전해 주는 것입니다. “00 화장품 내가 써 보니까 너무 좋더라. 이 기계가 너무 편리하더라.”“어느 식당의 00 음식, 정말 맛이 끝내 주더라!”이런 말들은 영향력이 매우 큽니다. 그래서 식품 회사들은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내면 시식회를 열고, 화장품 회사는 새로운 화장품을 만들어내면 샘플을 만들어서 공짜로 나눠줍니다.
우리 주변에 입소문 마케팅으로 성공한 상품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모든 주부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만도의 김치냉장고‘딤채’가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겁니다. 처음에 김치전용 냉장고를 만들어낸다고 했을 때에,‘과연 사람들이 김치 하나만 보관하려고 그 비싼 냉장고를 살까?’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김치 냉장고를 써 본 사람들이 “김치 냉장고가 좋다. 김치 맛이 끝내준다. 김치가 시지 않고 여러 달 보관이 된다.”소문을 내기 시작하자, 판매량이 급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딤채가 출시된 95년도에 4,000대가 팔렸고, 그 다음에는 20,000대, 그 이듬해에는 85,000대가 팔렸습니다. 대박이 난 것입니다. 지금은 김치 냉장고가 없는 가정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입소문으로 전해지는 복음
입소문 마케팅은 상품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관광지도 해당됩니다. 식당도 적용됩니다. 그리고 복음에도 적용이 됩니다. 마가복음 1장 28절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소문이 어떻게 무엇을 통해서 퍼졌을까요? 입소문으로 퍼진 것입니다.
여기에 입소문이라는 게 얼마나 효과적인 지를 잘 표현해 주는 단어가 두 단어가 있는데, ‘곧’이라는 단어와 ‘온’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들은 입소문이 얼마나 빨리 퍼지고 널리 퍼지는 지를 보여줍니다. 소문은 ‘곧’즉시로 퍼져 나갔고, 그 소문은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복음서 다른 곳에서도 예수님의 소문이 속속 멀리 퍼져나가는 모습을 기록한 말씀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마태복음 4장 24절에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고 했고, 9장 26절에는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고 했고, 31절에는 “저희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전파하니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2장 1절에는“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라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밖에도 여러 성구들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첨단 기법의 광고가 유행합니다. 전에는 물건 자체를 광고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기업들이 물건 자체보다는 기업 이미지를 광고하는 일에 더 많은 돈을 투자합니다. 광고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광고들이 많습니다. 광고를 보면 한 편의 짧은 드라마를 보는 것도 같고, 아름다운 경치 구경을 한 것 같은 느낌만 들어서 좋은 인상만 남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고도의 경영학적이고, 심리학적인 기법이 사용된 광고들입니다.
오늘날에는 교회들도 세상의 경영학적인 마케팅 원리에 영향을 많이 받아서 첨단 광고 기법을 동원하고, 텔레비전과 라디오, 또는 다양한 영상 매체들을 사용하여 교회를 홍보하고 복음을 전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한 번 물음표를 던져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과연 그런 현대적인 방법, 경영학적인 마케팅의 원리와 첨단 광고 방법으로 복음을 소개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합당한 것인가?”“과연 그런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그 결과 정말로 주님이 원하시는 그런 복음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인가?”질문해 보고 답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는 첨단 광고 시대를 살아가면서, 광고 홍수에 시달리고 있다고 모두들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광고에는 고도의 설득 심리학적인 기제가 적용됩니다. 그래서 생각 없이 광고를 보다 보면, 그 물건을 사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또 먹고 마시지 않으면 자신이 불행한 것처럼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중 생각하지 않고 카드를 긁어버리게 됩니다.
문제는 그렇게 광고에 설득 당해서 무엇을 사고, 입고, 바르고, 먹었을 때에, 결과적으로 만족하고 행복해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내가 속았다. 내가 미쳤지!”나중에 후회하게 됩니다.“다시는 광고에 현혹되지 말아야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광고주들이 소비자들을 설득하려 물건을 사게 하려고 노력하는 만큼, 이제는 소비자들도 광고에 설득 당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광고를 대하게 되면 경계심을 가지게 됩니다. 보통 텔레비전을 보다가, 광고가 나오면, 짜증이 납니다. 그래서 그 광고가 끝날 때까지 다른 채널로 돌렸다가 돌아오기도 합니다. 이것이 광고가 주는 부정적인 효과입니다. 광고가 사람들의 마음을 설득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의 마음을 닫게 만들기도 하는 겁니다.
그러나 공개적이고 물량적인 광고에는 경계심을 갖는 사람들도 가까운 사람들의 말에는 경계심을 갖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의 말은 마음의 문을 쉽게 열고 받아들이는 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심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근에 와서 사람들이 더욱 더 주목하는 광고 기법이 입소문 마케팅인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 당시에는 신문이나 라디오나 텔레비전과 같은 다른 광고 방법이 없었습니다. 유일한 수단은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전달되는 것이었습니다. 입소문 광고는 광고 방법으로 치면 가장 원시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복음을 전파하는 가장 효과적이며 성경적인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인격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격을 표현하는 말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첨단 문명 시대를 살아가고 있고, 아무리 좋은 문화적인 시설이나 도구들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해도, 복음을 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을 일대일로 만나서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입소문 전도라고 확신해도 좋은 것입니다.
“와 보라!”고 말하라!
전도가 뭐냐고 물으면, 본문을 근거로“와 보라!”고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라고 저는 정의하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와 보라!”고 하셨습니다. 빌립도 나다나엘에게 “와 보라!”고 말했습니다. 와 보라는 말은 네가 와서 직접 보고 결정하라는 겁니다. 설득하거나 강요하지 않고 단지 소개만 하고, 결정은 상대방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것도 강요받아서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자기가 주인이기를 원하고, 주인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이 인간에게 최고로 좋은 선물임에도 불구하고 강요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강요하시지 않고,“와 보라!”고 하신 겁니다.
“와 보라!”고 하셨는데, 어디로 와서 무엇을 보라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와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미 여러 번 들어서 잘 알고 있듯이 메시아라는 말은‘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쓰신다는 말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성령을 부어주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 즉 왕, 제사장, 선지자들이 기름부음을 받아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자들입니다. 기름부음을 받는 제사장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신하여 속죄를 위한 제사를 드려주는 일을 합니다. 또 기름부음을 받은 왕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든 위험과 악에서부터 보호해주고, 갈 길을 몰라 방황하는 백성들은 옳은 길로 인도해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런저런 궁핍과 결핍에 시달림으로 고통 받을 때에 모든 필요를 공급해 줌으로 행복하게 해 줍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선지자들은 무엇을 어떻게 선택하고 결정해야 할지를 모른 자들에게는 올바른 길을 가르쳐줍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런 일을 하시는‘기름 부음을 받은 자’곧 구원자라는 겁니다. 오늘 함께 읽은 마태복음 4장 23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들 중에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다고 했습니다. 병들고 약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살아 있기는 하지만, 살아 있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소망이 없는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지겹게 자신을 괴롭히던 질병이 떠나가고, 연약함이 떠나갔습니다. 병석에 누워서 고생하던 사람이 이제 밖으로 뛰쳐나와 요즘과 같은 푸르른 산하를 보고, 꽃냄새가 가득한 공기를 마시며, 푸른 하늘을 쳐다볼 수 있을 때에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만나면 모든 영육간의 질병과 연약함이 떠나갑니다. 마음의 병이 고쳐집니다. 절망이 변하여 희망이 됩니다.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패배 의식과 좌절과 낙심은 사라지고 새로운 소망이 생기고 삶의 열정이 생깁니다. 근심과 걱정이 떠나가고 마음에 평화의 강물이 흐릅니다. 사는 게 힘들고 지겹기만 하던 사람이 마음속에서부터 기쁨이 샘솟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원망과 불평, 미움으로 가득하던 마음에 바다 같은 사랑이 넘실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날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고, 경험해야 하는 구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이처럼 새로운 삶이 시작이 됩니다. 환경은 여전하지만, 내 마음에 일어난 구원의 역사 때문에 모든 게 새롭게 보이는 것입니다.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됩니다. 직업도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 원만하고 좋은 관계를 맺어나가게 됩니다. 이렇게 함으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의 의미를 깊이 경험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만나 구원을 경험하고 나면, 세상에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보다 더 행복한 생활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는 벅찬 가슴을 가지고 이 구원을 전하고 싶어집니다. 내가 누리는 이 행복의 비밀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님을 자랑하게 됩니다. 또 나로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고, 이 구원의 행복을 누리게 해 주는 교회를 자랑하게 됩니다. 또 나에게 날마다 생명의 주님을 알도록 설교해주고 가르쳐주는 목사님도 자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우리 교회 와 봐라, 우리 목사님 설교 한 번 들어봐라.”고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전도하는 것입니다.
‘와,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신감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로 오는 자들의 모든 필요를 채우실 수 있는 자신감이 있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비록 인간의 육신을 입으심으로 스스로 신성을 제한하셨지만,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능력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모든 연약함도 체험해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께로 나오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어떤 죄인도 받아서 용서하실 수 있었고, 어떤 절망적인 인생들도 회복시켜 새 소망을 주실 수가 있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 나온 사람 중에 단 한 사람도 실망하고 돌아간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필요를 채움 받았습니다. 눈 먼 자는 눈을 떴고, 귀머거리의 귀는 열렸습니다.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게 되었습니다. 앉은뱅이는 일어나 걸으며 뛰며 주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녀 문제로 나온 자들은 문제 해결을 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지고 있습니까? 또 안양 교회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러면 자신감을 가지고 사람들을 안양 교회로 초대하시기 바랍니다. “와 보라!”고 말하십시오. 사람들을 데리고 교회로 오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하실 일은 사람들에게 “와 보라!”고 말하고 사람들을 데려다 놓는 것까지입니다. 그 다음에는 주님께서 일하실 것입니다.
먼저 경험하고 행복해져라!
효과적인 입소문 전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이 먼저 경험하고 행복해져야 한다는 조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마음과 마음으로 통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마음으로 하는 말과 입으로 하는 말을 다 구분을 합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말을 할 때에 그 사람 자신이 경험해 보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그냥 입으로만 하는 말인지를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슴에서 나온 말은 가슴으로 전달이 되고, 머리에서 나온 말은 머리로 전달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진솔한 체험에서 나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힘이 있고 감화력이 있습니다. 예화) 얼마 전에 “브리튼스 갓 탤런트(Britain's Got Talent)”라는 영국의 신인 발굴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휴대폰 외판원이었던 폴 포츠라는 사람이 놀라운 실력으로 노래를 불러 심사위원들을 경악케 하고, 관중들의 기립 박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그는 못 생겼습니다. 어린 시절 왕따를 당했습니다.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꿈을 잃지 않고 노력해서 자신의 꿈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행복해졌습니다. 그래서 그의 노래를 들으면 가슴을 울리는 감화력이 있습니다.
예화) 저는 옛날에는 한방 의학에 대해서는 신뢰가 잘 가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한약은 금방 효과가 나지 않고, 먹어 두면 나중에 효과가 난다는 말을 하는 것을 자주 들었기 때문에, 급한 병에는 도움이 안 되는 것으로 알았었습니다. 그런데 첫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한방 치료의 위력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의 장이 약했는지, 자주 설사를 하는데, 소아과에 가면 금방 지사제를 주어서 설사를 멈춰 주지만, 근본 치료가 되지 않으니까 자꾸 설사병이 도졌습니다. 점점 사태가 악화되어서 아이의 설사가 심해지고, 설사가 소변처럼 나오고, 변에 피가 섞이고, 장의 점막까지 상해서 변으로 나오는 곱똥까지 누게 되는 지경까지 갔습니다. 그 때에 누가 경희대학 병원 한방 소아과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한방 소아과 과장님이 약을 세 첩을 지어주면서 달여 먹이라고 했습니다.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약을 달여 먹였는데, 도리어 설사를 더 하는 겁니다. 놀래서 전화를 했더니, 그냥 믿고 먹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계속 그 약을 먹였더니 이번에는 설사가 멎고 변이 좋아지는 겁니다. 그 때 저는 “어떻게 같은 약이 설사를 더 하게 만들다가 이번에는 멈추게 하는가?”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일을 통해서 한약에 대한 잘못된 선입관과 고정관념이 깨져 버렸습니다.
그렇게 치료를 시작해서 약 3개월 정도 한방 병원에 다니면서 치료를 했는데, 담당 의사는 약을 조금씩 바꿔 가면서 치료를 해서 근본적으로 설사병을 완치시켰습니다. 설사병을 완전히 치료한 후에 보약 처방을 해 주었습니다. 그것도 일반 보약을 먹인 후에 마지막으로 녹용이 들어간 보약을 주는 것입니다. 그 후에 아이는 더 이상 위나 장 때문에 고생하지 않을 만큼 건강이 아주 좋아졌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한약은 효과가 느리다는 말은 잘못된 말이고, 바르게 진단하고 바른 처방만 하면 효과는 즉시로 나타나며, 양약보다 더 우수한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88년도에 서대문 교회에서 사역을 할 때에 간염으로 일 년간 투병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같은 교회를 다니는 집사님 중에 경희대 한의학과를 나온 한의사가 있었는데, 그 분이 저를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 분의 치료를 받으면서 저는 간염도 치료할 수 있었고, 전반적으로 몸 상태를 많이 개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한의학에 대한 신뢰가 더해졌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아내가 건강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양방에서는 방법이 없어 절망적이었는데, 그 한의사를 통해서 치유되고 회복되었습니다. 저는 그 한의사와 오랜 교제를 통해서 그의 인격과 신앙을 압니다. 그의 의사로서의 실력을 몸으로 경험해 보았습니다. 그는 정말 신뢰할 만한 실력 있는 의사입니다. 그래서 저는 자꾸 입소문을 내게 됩니다. 어려운 병에 걸려 양방에서는 길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 자꾸 그 의사를 소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의사를 만나서 건강이 좋아지는 사람들을 보면 흐뭇합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닙니다. 그 의사가 제게 소개비를 주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경험하고 큰 유익을 얻었고 행복해졌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소개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입소문 마케팅이 성공하려면, 소개하는 제품을 자기가 먼저 경험해 보고, 그 물건이 정말로 좋은 것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제품을 사용함으로 자신이 먼저 행복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 있게 소개할 수 있고, 그 말에 힘이 실리는 법입니다.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들은 다 역사적으로 일어났던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그냥 전해주는 것은 힘이 없습니다. 이제 그것을 내가 주관적인 체험으로 경험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내가 예수님을 만나서 눈이 열리는 경험을 해 보아야 하고, 귀가 열리는 경험도 해 보아야 하고, 벙어리 되었던 혀가 풀려 찬송하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경험도 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 영육간의 필요가 채워지는 경험을 해 보아야 합니다. 한 마디로 내가 주님의 구원을 체험해 보고, 그래서 행복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전하는 입소문이 힘을 가지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구원을 경험하시고 행복해 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좋은 인간관계를 맺어라!
입소문 마케팅! 입소문 전도의 효과를 결정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전하는 자와 전달 받는 자와의 관계입니다. 피차 서로가 서로를 잘 아는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안드레와 베드로, 빌립과 나다나엘의 관계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들이 서로 좋은 인간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해 옴으로 서로를 잘 알고 신뢰하는 사이였다는 사실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신뢰하는 사이기 때문에, 상대방이 언제나 나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는 친구라는 것을 서로 잘 압니다. 그러니 가 보자고 할 때에 흔쾌히 따라나섰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효과적인 입소문 전도의 원리를 하나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내는 입소문이 효과적인 전도의 열매를 맺고자 한다면, 먼저 서로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좋은 관계를 맺으려면, 서로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가짐으로 서로를 알아가야 합니다. 흉허물 없는 사이가 되어야 합니다. 항상 좋은 것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투자되어야 하고, 물질도 투자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주는 것만 생각하고 “나는 가진 게 없어 줄 게 없어.”라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좋은 인간관계라는 것은 일방적으로 주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주고받는 관계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좋은 것을 상대방에게 주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이 가진 좋은 것을 내게 줄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건강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받을 때보다 줄 때에 기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피차 주고받으면서 좋은 이웃 관계를 충분히 즐기십시오.
상대방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상대방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은 선한 마음을 가지고 다가가십시오.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서로 사귀십시오. 주님께서 때가 되면 나의 선한 마음을 받으시고 내가 전도하고자 하는 그 영혼을 구원해 주실 줄 믿고, 내가 그 통로가 되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함께 살아가십시오.
그러나 너무 미루지는 마십시오. 너무 미루고 인간적인 교제만 하다 보면, 나중에는 예수님을 소개하는 말을 하기가 더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얼마나 교제를 해야 인간관계가 충분히 무르익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저 기회가 되는대로 시도해 보는 겁니다. 이번 기회가 주님이 주신 기회일지 모른다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초대하십시오. 주님이 정하신 때가 되었다면, 여러분들이 초대하는 태신자의 마음이 움직여 따라 나올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전도하는 일이 어렵다는 편견과 고정 관념을 깨트리시기 바랍니다. 전도는 내가 먼저 좋은 것을 경험한 사람이 자기가 아끼는 사람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입소문을 내는 것이 전도입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이 좋으면, 소문을 내십시오. 내가 다니는 교회가 좋으면 소문을 내십시오. 여러분의 목사가 좋으면 소문을 내십시오. 그게 진심이면 여러분들이 내는 입소문에 힘이 실릴 것입니다.
이미 신앙생활의 맛을 보시고,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누리는 분들은 열심히 입소문을 내시고, 아직 신앙생활의 맛을 보지 못하신 분들은 열심을 내어 기도하고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해 봄으로 신앙생활의 맛을 보십시오. 내가 먼저 경험하고 충만해지는 것이 우선입니다. 잔이 가득 차면 흘러넘치는 것처럼, 내 안에 예수님으로 인한 구원의 기쁨과 행복이 넘치면, 나도 자연스럽게 입소문 전도자가 되실 것입니다.
이번 주부터 기도로 준비하시고 5월 31일 주일에 여러분들이 마음에 품은 태신자들을 “와, 보라!”고 말하시고 데려 오시기로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 태신자 초청은 개인적으로도 힘쓸 뿐 아니라, 목장 별로 함께 힘을 모아 보시기 바랍니다.
목장에서 모일 때마다 각자의 태신자들을 내어놓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목장 예배에 초대하여 교제하는 기회를 먼저 만들어 보십시오. 그리고 5월 마지막 주일 예배에 초대하시기 바랍니다. “와 보라!”고 말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상교회의 사명
마 4:23-25 / 이용효 목사
어느 날 아침에 한 성도가 스펄전 목사님께 찾아와서 부탁을 했습니다. “목사님 지금 제가 나가는 교회에서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좋은 교회, 완전한 교회를 한곳 소개해주십시오.” 그때 스펄전 목사님께서 대답하길 “당신이 그러한 교회를 찾으면 나에게 꼭 알려 주십시오. 나도 그 교회에 가서 신앙생활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당신은 그 교회에 등록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당신이 그 교회의 교인이 되는 순간부터 그 교회에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있는 교회는 모두 문제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나요? 무엇보다도 우리 모두 허물이 있고, 죄의 근성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지상의 모든 교회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 있습니다. 즉, 세워져가는 중에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엡 2:21-22에서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고 있는 중이니라.” 교회는 in progress 즉, 진행형입니다. 여러분, 건물을 짓고 있는데 완성되지 아니한 건물 안에 들어가 보십시오. 이것저것 부족한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눈에 보이는 교회는 완벽할 수가 없습니다. 항상 문제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개척하였고, 개인적인 애정을 가지고 있던 빌립보교회도 유오디아와 순두게 같은 성도들이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교회에는 항상 문제가 있기에 오히려 모든 성도들은 더욱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만을 의지하고, 더욱 겸손해야합니다. 그렇지만 이 지상교회는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을 대신 하도록 지상에 두신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지는 진리의 터전이며,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전하는 구원의 방주가 되며, 계속적인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의 처소입니다. 그렇다면 지상에 남겨두신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지상교회의 사명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입니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교회는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첫째 목적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복음입니다. 예수 십자가의 피 뭍은 복음뿐입니다. 이 세상은 소망이 없습니다. 지난 주간에 일어났던 사건을 보면, 북한 장거리 미사일 발사로 인한 소동이 계속되고 있고, 소위 박연차회장 리스트에 걸려 국회의원이 의원직을 사임하였고, 장자연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있던 방송국 피디들 감독들 스폰스들이 경찰에 조사를 받고 있고, 16살 소녀들이 음란 동영상을 보고 난 뒤 그 부모들이 이를 알고 서로 싸움이 붙어 경찰에 고소한 사건, 25일에는 공무원시험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딸을 밀친 어머니를 경찰에 고소하여 어머니가 입건된 사건, 많은 자살 사건들, 많은 살인사건들, 불황으로 30~40대 우울증환자 급증, 등 입에 올리기조차 부끄러운 뉴스들이 온통 신문과 방송에서 연일 쏟아지고 있습니다. 정말 이 세상은 십자가 복음 외에는 소망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제적인 문제, 자식들의 문제, 질병의 문제, 가정의 문제, 정신적인 문제, 미래에 대한 불안 이 모든 것들은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인류 역사와 함께 끊임없이 이어져 왔고 갈수록 점점 그 도가 넘치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인간의 교육이나 과학이나 종교나 철학이니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죄의 문제요 죄의 문제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서 만이 해결되고 치유됩니다. 인류의 영원한 숙제요, 공포의 대상, 저주의 원인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청산하셨습니다. 십자가위에서 죽으시기 전 마지막으로 크게 외치신 말씀이 “다 이루었다” 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상업용어로서 <지불 완료하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대가를 완전히 치르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그 보혈로 완전히 탕감 받았습니다. 더 이상 치러야 할 죄의 대가가 없어졌습니다.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죄 용서 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이것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죽게 하시고 나를 살리셨습니다. 이것이 사실이고 피 뭍은 하나님의 사랑이 진실이라면 내가 아무렇게나 살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십자가의 피 뭍은 사랑을 알지 못하고 죄악에 메여 살고 마귀의 사주팔자 운명에 메여 살고 저주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캄보디아에서는 부모가 죽어 장사 지낼 때 자녀들이 춤을 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는 가난과 질병과 수고와 고통과 슬픔과 아픔이 많고 괴로움이 가득한 세상인데 이 세상을 떠나서 이 모든 질고를 벗어 버렸으니 춤을 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죄 많은 인간이 이 땅을 떠나면 영원한 심판과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죄 많고 고통스러운 이 세상을 떠날 때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갑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천국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천국은 이 세상 어떠한 종교 어떤 책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영접하는 그 사람 마음속에 이루어지고, 생활 속에 이루어지면서, 영원한 천국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 천국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을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3장에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되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거지는 불행한 인류의 상징과 같은 사람입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기에 불구자 중에 불구자였고 거지 중에 거지였습니다. 무식하고 고독한 사람, 남에게 도움만 받고 사는 사람, 그래서 성품은 비뚤어지고 어두운 사람, 구걸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 소망이라고 없는 사람, 이런 앉은뱅이 거지에게 베드로와 요한이 다가갔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정치가도 아니고 학자도, 문화인도 사회사업가도 아닙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볼 때는 무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이 영생이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이 풍성한 삶인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포켓에는 금도 없고 은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보다 더 귀한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지가 구한 것은 오늘날 전 인류가 구하고 갈망하고, 싸우고 목말라하는 전체를 의미합니다. 경제적인 것, 문화적인 것, 지성적인 것, 종교적인 것 모두를 말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가진 것은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이름을 주었습니다. 그때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육체와 정신이 온전해 져서 하나님을 찬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전인적인 구원, 통전적인 치유가 임한 것입니다. 60억 인류의 전 에너지와 동정과 눈물과 희생을 모은다고 하여 이 앉은뱅이가 일어날 수 있나요? 여러분 사람을 구원하는 생명이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누구를 통하여 전달됩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기도와 전도를 통하지 않고는 이 세상에 전파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이 이름의 능력을 확신하는 사람들이라면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영원한 생명에너지, 영혼과 육신에 건강을 주고 부요를 주는 능력의 복음을 기독교인들이 전하지 않기에 하나도 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환상가운데 지옥에 가서 보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지옥의 불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고통 중에 한 사람의 이름을 알면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그 한사람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분이 “그 이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라고 외쳤는데 그들이 그 외침은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이 땅에서 예수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죽은 다음에는 그 이름의 능력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오직 예수 오직 전도를 위해 살았던 것입니다. 고전 2: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2000년 전이나 오늘이나 교회가 첫째로 감당해야하는 사명은, 세상을 향하여 예수님이 구주되심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누가복음7장11~17절에 보면 나인이란 성에 살던 한 과부의 독자가 죽어 이 청년의 시체를 상여에 싣고 공동묘지에 장사 지내려 가는 길에 마주 오시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슬피 울고 있는 과부를 향하여 울지 말라고 하신 후 관에 손을 대시며 죽은 시체에게 청년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일어나라 고 하자 죽었던 청년이 다시 살아나 어머니에게 안겼고 온 성에 큰 기쁨이 일어났습니다. 이 세상은 온통 어두움과 죽음의 권세아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인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상여를 따랐지만 과부의 눈물을 멈추게 하지 못하였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지만 예수께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누가 죽음의 행렬을 멈추라고 할 수 있나요/ 누가 죽은 자에게 일어나라고 할 수 있나요/ 누가 죽음을 생명으로 바꿀 수 있나요/ 누가 이 슬픔을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할 수 있나요/ 오직 예수그리스도/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증인이 되라고 하셨고 온 천하에 다니면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막16:15~18절, 마28:18~20절, 행1:8절) 이태리의 한 남자가 작년 8월에 860억 원의 복권에 당첨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복권을 8월 16일까지 보험회사에 제출해야 되는데, 자기 딸의 결혼 준비에 바빠 뛰어다니다 보니 이틀이 지났습니다. 그래서 그 복권에 당첨된 것이 무효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 남자는 졸도하여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2시간 만에 깨어났지만 그 복권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딸의 결혼 준비가 바빠도 먼저 860억을 챙겨 놓았어야 했습니다. 기회를 놓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전도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달란트 비유를 통해 반드시 계산할 때가 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에는 이 세상의 사장, 국회의원, 장관, 이사, 대학총장 ,병원원장 같은 것들이 귀할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런 것들이 별 것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흙덩이에 불과합니다. 이 세상 가장 가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복음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복음이 내게서 힘을 잃어버리고 나도 신앙의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헌신된 한 사람을 통하여 시대를 변화시키셨습니다. 당신이 복음 앞에 헌신하면 하나님은 존귀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들이 성결한 삶을 살면서 세상이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 영향력을 끼쳐서 복음을 전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5:13~16절소금과 빛, 베드로전서2:9 왕 같은 제사장) 특별히 다음주일은 새순축제로 이웃을 초청하여 복음을 전하는 날입니다. 주님은 강권하여 주의 전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복음을 적극적으로 지역과 모든 민족들에게 전하는 귀한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지상교회의 사명은 가르치는 일입니다. 교회에 주어진 중요한 사명중 하나는 성도들에게 말씀으로 잘 교육시켜야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주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하라”고 하셨고, 신명기6:6~7절에는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라고 하여 가르치는 일에 전력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거저 주시지만 제자는 가르침을 통해 세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주님의 삶이 경건하고 거룩하여 듣는 이 들이 그 말씀의 권세를 인정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때로는 시청각 교육을 하셨습니다. 산이나 바다나 들을 교육장소로 활용하셨고 공중의 새나 들에 핀 백합화나 혹은 씨 뿌리는 것이나 추수하는 것을 비유로 하여 오묘한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교회의 중요한 사명은 교육입니다. Teaching ministry. 이것은 주일학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 까지 모든 교인들을 말씀으로 양육시킬 사명이 교회에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우리들의 자녀들에게 신앙교육을 잘 시켜야합니다. 10년 전부터 전체 한국교회의 어린이 숫자가 해마다 약 10%씩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주일학교의 위기입니다. 이는 결국 한국교회의 위기 입니다. 과거 세계를 놀라게 하였던 70~80년대의 한국교회의 부흥은 주일학교 성장기였던 5,60년대 어린이 성도들이 이끌어낸 결과로, 현재와 같은 감소 추세가 지속된다면 3,40년 뒤의 한국교회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내다봅니다. 한마디로 어린이들의 부흥 없이는 한국교회의 미래에 소망이 없습니다. 왜 어린이 성도가 줄어들고 있는 걸까요? 전문가들은 저 출산 현상으로 아기를 적게 낳고 있으며 늦게 결혼을 하며, 과도한 사교육 열풍, 그리고 어린이들의 흥미를 끌만한 교회교육 프로그램의 부재 등을 주일학교의 감소의 원인으로 꼽고 있습니다. 주5일 근무제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주말을 이용한 학원 강의 프로그램이 생겨났고, 컴퓨터 게임과 같이 교회보다 재미있는 것이 세상에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녀들의 신앙교육의 일차 책임은 가정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녀의 신앙교육을 가정에 두었습니다. 부모님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부모가 자녀들에게 좋은 신앙의 모델이 되어 자녀들을 열심히 사랑하여 바른 길로 인도하기를 원합니다. 아들을 서울대 전체수석으로 졸업 시킨 박삼순전도사가 다니엘 학습법이라는 책의 서두에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저는 오직 자녀들에게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 훈련만 강조했습니다. 저는 오로지 기도와 말씀의 신앙훈련으로 자녀를 교육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제 자식들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큰딸 수미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연주자가 되기 위해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피아니스트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큰아들 동환이는 서울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으며, 막내 경한이는 고려대 의대에 들어가 장차 슈바이처처럼 인류에 봉사하는 의사가 될 것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자식들을 둔 저를 부러워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자식들이 겉보기에 잘 되었다고 자랑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이 아닙니다. 그들 모두 기도하고 말씀 보며 찬송하고 예배하는 하나님 중심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힘주어 말하고 싶기 때문에 이 책을 쓴 것입니다. 그들이 공부를 잘하고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에도 잘된 이유를 굳이 들라면 오직 하나, 자식들에게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 훈련을 강조한 것밖에 별다른 비결이 없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후 3:16~18)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시고 십계명을 가르치십시오. 잠언22:6절“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 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렇습니다. 교회의 중요한 사명은 가르치는 것입니다. 교사의 사명이 너무나 크고 중요하기에 상급도 클 것입니다. 3. 지상교회의 사명은 치유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들을 고치셨다고 하셨습니다. 병은 병원이나 약국의 약으로 고칠 수도 있지만 모든 약한 것은 병원에서 고칠 수 없습니다. 현대인들은 마음도 정신도 육체도 너무 약해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병들고, 상처받고 문제 있는 사람들을 치료하시고 고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8:1~5절에 보면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원하시며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라고 하자 주님께서는 그 환부에 손을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고 그 나병환자는 즉시 나음을 입었습니다. 주님은 깊은 동정심으로 그 나병환자를 대하셨고 주님은 그 나병환자가 치유되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주님의 몸인 교회도 사람들을 고치는 사역을 감당해야합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정신적으로 심적으로 병들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을 호소하고 있고 많은 분들이 자살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정에 부부간에 갈등이 없는 가정이 거의 없고, 자녀의 문제, 시댁과 처가의 문제로 고민하고 직장의 문제로 걱정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들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이름과 보혈의 능력을 믿고 기도하여 주고 위로하고 소망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4: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어떤 날선 검보다 예리하여 사람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며 그 심령을 수술한다.”고 하였습니다. 교회에서 말씀을 듣고 찬양을 부르는 중에 치유 받은 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으로 하면 은행이나, 세상의 금융회사들이 가장 많이 있습니다. 교육으로 하면 좋은 고등학교, 좋은 대학들 많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빌 게이츠 재단 같은 든든하고, 돈 많이 있는 구제기관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은 돈, 지식, 이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치료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으로 세상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순모임에서) 교회는 우리의 심령을 치료하고, 육신을 치료하고, 인생을 치료하고, 사람을 치료하는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여야합니다. 여러분 교회는 치료하는 사역을 감당해야합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모든 사람들의 영혼과 육신의 상처가 치료되고 고침 받는 은혜로운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 앞에 바른 교회가 되어서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1)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순수하게, 바르게 전파하기를 바랍니다. 2)하나님의 말씀으로 온 성도들이 신앙 교육을 잘 시키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3) 생활 속에서 많은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와 힘과 소망을 주는, 상처를 치유하는 교회가 되어 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주님이 하신 일과 우리가 해야할 일
마 4:23-25 / 최종천 목사
봄이 우리 주변에 촉촉이 내리고 있는 2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과 더불어 우리 하나님 앞에 주일에 아름다운 예배를 드릴 수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을 통해서 왜 나를 부르셨을까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님이 나다나엘을 미리 아신 것처럼,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을 미리 아신 것처럼 우리 인생들은 주님을 몰랐지만 주님은 우리 인생들의 모든 것을 아시고 바로 우리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주님 앞에 나올 수밖에 없도록 부르셨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그 어떤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영적인 힘이 있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앉아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으로 우리가 어떤 길을 가게 될 지, 어디까지 이르게 될지를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길을 아시고 우리를 부르셔서 그 길을 가게 할 준비와 훈련을 주시고 그리고 능력을 부여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에 감사하며 확신과 감격 속에서 우리를 부르셔서 가게 할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기쁨으로 가야 할 것입니다.
나를 부르셔서 주님을 알게 하시고 주님의 뜻과 일을 맡기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이루는 삶이 인생의 최고의 기쁨이요, 감격과 보람임을 믿습니다.
오늘은 내 삶이 주님께 드려지기를 소원합니다하는 두 번째 시간으로써 주님이 하신 일과 우리가 해야 될 일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나의 주로 믿고 따른다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은 주님이 하신 일을 알고 우리도 그 주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도 그대로 이루기를 소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여정에서 행하며 이루며 따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하신 일을 우리도 이룰 때 우리 삶은 비로소 성도로서의 자존감을 찾고 참된 가치를 실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에 시들하다는 것은 우리를 감격시킬 삶의 사역의 기쁨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 길을 찾고 내 할 일을 찾고 내 삶의 의미를 실현하는 성도는 지루할 틈도 없고 권태에 빠질 수가 없고 인생을 슬픔가운데 방치할 틈이 없습니다. 잠시잠깐은 슬프고 고통스럽고 아플지 몰라도 그가 해야 할 긴박한 삶의 사명감 때문에 곧 다시 일어나 그가 해야 할 일을 위하여 달려가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요즘 성도들이 교회 3기사역의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사역과 헌신의 길을 찾아나서는 것들을 봅니다. 이러한 성도들을 보면 헌신하고 봉사하고 어려운 주님의 백성들을 찾아 그들을 세우는 일에 가슴이 벅차하며 그 일을 어떻게 하면 아름답게 할 수 있을까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애를 쓰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 삶에 탄력과 에너지가 넘치는 것을 봅니다. 저는 목사로서 이러한 성도들을 보면 한없는 마음의 기쁨과 감사를 느낍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사역의 모든 준비를 이루시고 마지막으로 제자를 부르셔서 준비를 완료하게 하신 후에 하신 일을 살펴보며 주님이 하신일과 그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병자들을 고치신 주님의 사역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즉 주님이 이 지상에 하신 일은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라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가르치시고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제까지 백성들이 막연히 기대하고 있었던 하나님나라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을 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치고 선포하셨던 복음은 이제까지 백성들을 욱죄이고 있었던 율법이 아니라 이들을 자유롭게 하는 사랑과 자유의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소망의 복음을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을 보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이루지도 못하고 죄악감속에 스스로를 포기케 하는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으로 구원을 받고 생명을 얻고 진리를 소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도무지 소망이 없는 자들에게 복음의 소망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회개의 복음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은 말씀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죄로부터 종노릇하는 자신의 삶을 벗어나 진리 자체이신 주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영원한 자유를 얻을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더 이상을 죄를 짓지 않아도 되고 죄에 매여 있지 않아도 되고 더 이상은 죄로부터 종노릇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유와 진리 속에 주의 역사를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죄로부터의 돌이킴, 죄로부터의 풀려남, 하나님을 거부하던 삶이 하나님으로 돌아서는 회개의 역사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거역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던 죄악의 상태를 벗어나 영원한 자유를 얻는 은혜의 백성들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의 복음을 가르치고 선포하셨습니다.
<마태복음 9장 12절>을 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자에게라야 쓸데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의인을 위하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위하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외되고 슬프고 위로받아야 할 자임을 자인하는 자들에게, 본인이 죄인임을 스스로 고백하는 자들에게 사랑과 자비로 다가오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필요없고 주님의 자비가 필요없는 교만한 인생들에게가 아니라 주님만이 유일한 소망이요, 길도 없고 주님만이 삶에 은혜와 은총일 수밖에 없는 백성들 가엾은 인생들을 위하여 주님은 오셔서 사랑과 자비의 복음을 전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진정한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길을 가르쳤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을 향한 갈급한 갈망이 있는 목마른 자들에게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자가 천국에 가기가 마치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에 대하여 비유로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들판에 가득한 모든 소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밤에 그 영혼을 취하면 그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청년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부자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 어찌하면 내가 영원한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 어찌하면 주님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라고 소망합니다.
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오라고 말씀하실 때 이 청년은 재물이 많아서 그것 때문에 심히 근심하며 결국은 주님을 선택하지 못하고 근심하며 슬픈 얼굴로 돌아감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십니까?
이 세상의 어떤 것에 집착을 가지지 않고 주님의 나라가 진정으로 필요하고 소망하는 자들에게 구원이 이르고 천국이 이름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또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9장 23절>을 보면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 구원의 백성이 된다는 것,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다만 피상적인 내용이 아니라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삶이 있어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예수만 믿으면 모든 것이 만사형통된다는 값싼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에게 구원에 이르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진정으로 무엇인가를 가르치셨습니다. 쉽지는 않지만 주님이 주신 기쁨과 은혜로 그것이 무거운 짐이 아니라 기쁨의 역사가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가 우리를 누르고 힘들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자유를 주고 진정한 기쁨을 주신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결국 그것이 우리를 억누르는 무게만이 아니라 어느 날 문득 우리를 자유케 하는 진리의 축복임을 깨닫게 됩니다.
어제도 설교를 쓰면서 뭐 언제든지 설교를 쓰면서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괴로운 일일까 기쁜 일일까를 생각합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언제까지 이 일을 해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요. 부담을 생각하면 힘든 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오늘도 6천 명 정도 되는 우리 성도들이 이 말씀을 들을 텐데 그 성도들이 목사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서 마음에 기쁨과 각오와 은혜를 받는다면 더없이 기쁘겠죠.
그러나 또 그와 같은 기대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에 부담이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만약에 아무런 마음의 감동도 없이 주의 성령의 역사하심도 없이 만약에 정말 무의미한 시간을 가진다면 그것은 목사로서 견딜 수 없는 일이겠죠. 어떻게 생각하면 설교하는 것이 참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이 일이라고 생각하면 한 번이라도 덜 하는 것이 낫겠지요. 그런데 그것이 일일뿐 아니라 때로는 기쁨이라고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제가 주일날 여러 번 설교를 하는데 그 중에서 5부 설교가 가급적 가장 짧습니다. 왜냐하면 여러 번 하니까 문장도 외우게 돼서 가급적 전달되게 의미가 충분하면 한 문장이라도 생략하는 경우가 많아요. 왜냐하면 힘이 드니까 한 줄이라도 뺍니다. 그래서 5부 설교가 좀 짧아요. 그러니까 목사님 설교가 좀 길다고 생각되시면 5부에 참석하면 됩니다. 그리고 제가 5부 설교를 제일 즐거운 마음으로 합니다. 왜냐하면 이번만 하면 오늘 끝이다 하는 생각이 드니까 상당히 마음에 해방감을 느끼게 됩니다. 힘들다는 뜻이겠죠. 하지만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도 제 생각에 이제까지 이 교회에서 근 20년 가까이 있지만 우리 성도님들이 어떻게 좀 줄어들어서 예배부수가 좀 줄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저 한 번 한 번 이렇게 설교할 수 있는 것이 더 기쁨이고 또 은혜고 마음에 원한다면 성도들이 더 많아져서 한 번 더 설교해도 기쁜 일이라고 마음에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같은 원리입니다. 십자가의 기쁨은 어느 날 내게 주어진 십자가가 너무 힘들었는데 문득 생각해 보니까 내가 그 십자가 때문에 보호받고 내 자신이 바로 가게 되는 근원임을 느끼게 될 때 그 힘든 것을 넘어서 기쁨과 감사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요즘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 인생들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죄악의 생각들이 있지요.
슬픔, 분노, 시기, 질투, 우울, 고독, 외로움, 그리고 삶의 고통과 괴로움,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는 삶이란 불가능해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셨듯이 우리 삶의 이 모든 무거운 짐을 주님 앞에 내려놓게 하시면, 또 주님이 그것을 받아주셔서 우리의 어깨에서 그것을 벗어주게 하신다면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우리 삶에서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우리가 이 짐을 지고 산다면 끝없는 괴로움 속에 살지만 어느 날 벗어버리면 내가 왜 이것을 이제까지 지고 있었을까하는 의아함이 들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그 복음은 우리 삶에 실제적 자유를 그리고 우리에게 후련함과 벗어남을 준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를 믿었는데 내가 아직까지도 고통가운데 산다는 것은 십자가 자체가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십자가의 능력을 받기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십자가의 능력이 우리를 용서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하기 싫은 것입니다. 나의 죄악된 심성이 나를 주장하고 상대를 용서하기 싫어하고 내가 죄악을 벗어나기 싫어하는 것이죠. 인간의 죄악을 버리고 인간의 죄악된 습성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자유함을 누리며 사는 삶을 우리는 꼭 누려야만 합니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나누고 베풀고 우리의 삶을 줄 수 있는 이와 같은 삶이 우리에게 얼마든지 충분히 가능하다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음이라는 것은 우리들에게 너무나 큰 축복입니다. 어느 순간-나 하나를 내려놓는 순간 우리 인생에는 너무나 많은 새로운 능력과 역사의 장면이 열려진다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백성 중에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인생들을 가르치고 복음을 선포하시고 인생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쳐주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심정을 봅니다. 인생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 고통을 덜어주시려고 가슴아파하신 주님을 봅니다.
고통으로부터 해결해주신 복음의 능력을 발휘하셨습니다. 주님은 병든 자, 배고픈 자, 귀신들린 자, 각종 고통 들린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시는 복음의 해결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인생의 근원적인 고통에서의 해결은 다만 복음을 전하는 보조적인 요소로서만이 아니라 주님은 그 고통당하는 자에 대한 자비와 연민을 가지고 가엾이 여기시고 그들을 고쳐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그들 병고치고 귀신 쫓고 그들을 먹여주셨어요. 그러면 그들의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예수님의 복음을 잘 받아들일 것을 기대해서 그들을 고쳐주신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결과는 그러했죠. 그러나 주님이 그것만 목적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이고 하나님 자체이세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주님이 복음을 전하는데 누가 그 복음의 말씀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 지난주에 말씀드렸죠?
“나를 따르라”
그들의 병을 고쳐준 것도 아니고 기적을 일으킨 것도 아니고 단순히 이 말씀을 하셨을 때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는 예수님을 순간에 따르게 되었어요.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모자라 주님께서 이와 같은 치유의 역사를 통해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도움이 되었겠지만 주님께서는 인생에 대한 애틋한 애련의 심정을 가지고 주님은 그들을 고쳐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 잊으시면 안 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면서 내가 물고기 두 마리 떡 다섯 개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베풀면 저 사람들이 내 말을 들으리라 생각해서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푼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배고픈 자들을 볼 때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더욱 더 신뢰하게 되었지만 예수님의 마음엔 우선적인 이와 같은 것들이 있었던 것이죠. 우리가 사랑과 자비를 베풀 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내가 꼭 저 사람을 교회에 데려오기 위해서 내가 저 사람에 사랑과 자비를 베푼다하는 마음이전에 그 인생들에 대한 우리의 따뜻함과 사랑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있기에 그들을 돕게 되고 그 결과 그들에게 그 빵 한 개와 그리고 그들의 병을 고쳐주는 것보다 더 소중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으로 그들의 인생을 치유해주고 싶어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정말 예수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의 심정이 있다면 예수그리스도의 놀라운 능력과 은혜를 우리가 실행하게 된다면 그것자체가 우리에게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그 심정에 있어서 백성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심정을 가지고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볼까요?
인생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주님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달라요. 주님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있었지만 불쌍히 여기는 능력도 계셨단 말이죠. 불쌍함을 해결하실 능력도 가지셨던 거죠.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 자신이었으니까요. 주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면서도 무덤에 갇힌 지 사흘 만에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셔서 우리 인간들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병든 자가 주님 앞에 나오시면 외면한 적이 없어요. 주님은 그들을 치유할 능력을 가지고 그들을 치유하셨습니다.
가끔 목사로서 어리석은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목사도 엉뚱한 생각을 할 적이 있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정말 우리 성도들이 질병으로부터 고통당하는 것을 보면 꼭 기도하고 싶어요. 꼭 낫게 해드리고 싶어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목사가 우리 성도님들을 위해서 기도할때마다 꼭 하나님께서 그들의 아픈 것을 낫게 해 주시고 어려운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게 해 주십시오.”
그런데 어떤 때는 정말 주님이 능력이 없는 것은 분명히 아닌데 간절히 기도해도 그 어려움의 상태가 지속되는 것을 봐요. 그럼 주님이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닌데 내가 능력이 없는 목사는 아닌가? 아무리 기도해도 어려운 문제가 지속되는 것을 볼 때 낙심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목사를 너무 무시하진 마세요. 또 기도들어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 가지고 있다가도 마음에 위로될 때가 있습니다. 만약에 목사가 기도할때마다 아픈 사람이 그 때마다 100% 다 낫는다면 어떻게 될까를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아마 전국에 몸이 아픈 사람들은 다 교회로 몰려들 것 같아요. 여러분 예배도 못 드려요. 전국에서 온 사람들이 여기 가득가득 모여들어서요. 그럼 좋겠어요?
제가 생각하기에 전국의 모든 환자들이 몰려올 뿐 아니라 온 세계에 있는 환자가 다 올 것 같아요. 여러분 어디 가서 그 사람이 기도만 받는다면 어떤 병도 낫는다고 하면 비행기표 구해서 안 가실 것 같아요? 그러면 제가 설교할 틈도 없고, 책을 볼 틈도 없고, 어떤 다른 일을 할 틈도 없고, 우리 성도들과 만날 틈도 없고, 기도해드릴 틈도 없을 것 같아요. 정말 목사가 기도하면 다 낫는다고 생각하면 마지막 소원을 가진 사람들이 다 몰려올 것 아니에요? 그럼 절대 정상적인 삶을 이룰 수가 없을 것 같아요. 그럼 혹시 이런 마음이 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내가 의사는 아닌데, 성도의 병만 낫게 하는 것이 목회의 전부가 아닌데, 말씀도 가르쳐야 하고 성도를 위로해주어야 하고 또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 목사인데 생각하면 조금 힘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지금 이 상태가 제일 행복한 것 같아요.
저는 지금 이 상태가 제일 행복한 것 같아요. 여러분들도 지금 이 상태가 제일 행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때로는 내가 부족한 것이 있어도, 때로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해도, 또 때로는 내가 계획한 것이 뜻한 대로 안 되어도 가만히 생각하면 지금 이 상태가 나에게 제일 행복한 상태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 하나님의 능력이 너에게 족하도다.” 하고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요. 지금의 상태가 가장 행복한 상태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알맞은 상태니까 주님께서 지금의 상태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생각해 봤어요. 주님은 그에게 나온 모든 일을 긍휼히 여기시고 주님께 나오면 반드시 나음을 얻겠다는 믿음을 가진 그들의 믿음을 칭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낫게 해주셨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사람이 에워싸서 꼼짝을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해가 지면 밀물처럼 왔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게 되고 주님은 홀로 계셨습니다. 주님은 고적감속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을 나는 새도 둥지가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시며 주님의 고독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은 그의 마지막 사역까지도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일을 피곤해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심정을 생각해 보면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날이 얼마 없는데 이렇게라도 너희와 같이 있을 때 무엇이라도 기쁨을 주고 싶으셨던 겁니다. 마지막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을 당하는 그 순간에도 한편 강도가 “나를 기억하소서.” 하고 그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 앞에 그를 의탁할 때 “네가 낙원에 있을 것이다.” 라고 그를 구원하시는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주님은 그 어떤 고통의 순간에도 그의 자비와 사랑을 필요로 하는 자를 위하여 그의 사랑과 자비를 베푸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어떤 백성도 귀찮아하지 않으셨어요. 주님은 성경 어디를 보아도 그를 쫓아오는 가엾은 백성을 귀찮아하신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그를 못 박으라고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저주하고 욕하는 자들에게까지 그들은 자기의 죄를 알지 못한다고 주님 앞에 용서를 구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인간들의 아픔과 슬픔과 고통을 해결해주셨고 그 육신의 해결 뿐 아니라 영원한 구원의 복음을 전하셨고 십자가에 스스로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영원한 죽음의 죄악에서 구원하시는 능력을 발휘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신 복음을 실제로 실행하심으로 언어가 아닌 실제의 능력으로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모든 고통을 해결하신 것이죠.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 모든 것의 대가를 전혀 요구하지 않으셨어요.
명을 고쳐주어도, 귀신을 쫓아도, 기적의 떡을 주어도 주님은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셨어요. 우리 인생은 우리의 사랑과 수고에 대하여 섭섭한 대응이 돌아오면 마음에 상심하게 돼요. 그러나 주님은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사랑을 주기 위해서 오신 분이지 사랑을 받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셨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그의 모든 것을 쏟아주기 위해서 오신 분이지 세상 사람들의 모든 것을 받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셨습니다. 저는 이 사실이 너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우리는 사랑받으려고 하고 위로 받으려고 합니다. 조금 어려우면 상처받았다고 합니다. 그 대가로 열렬히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어떤 것이 옳은지 그른지 분별 못하고 내 생각대로 정죄하고 판단하고 어리석게 주님이 주신 내 생명 자체까지도 어둠의 세계를 헤매게 만듭니다. 주님은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셨어요.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마지막까지 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과연 무엇인가입니다.
우리도 역시 주님이 하신 것처럼 가르치고 전파하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주는 일입니다. 우리는 주님처럼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라도 주님의 구원과 천국의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무거운 짐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쉬게 되는 소망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진리로 인하여 자유케 되는 회개와 자유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병든자에게라야 의원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의 사랑과 자비와 힘이 필요로 되는 이들에게 우리를 주고 베푸는 사랑과 자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은 입술의 언어가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발언되고 진행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실제를 통해 천국에 이르는 말씀을 실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럼으로 주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우리들을 통하여 실제로 실현되는 모습을 보여주어 주의 복음을 삶으로 입증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자로서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주님이 하신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입증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있어도 기뻐할 줄 앎으로 주님의 복음의 능력은 고난을 능가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맑아지며 우리의 인격이 아름답게 변화되는 것을 보여줌으로 주님의 복음은 인생이 성품과 삶의 습관까지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슬픔과 아픔과 고난으로 우리가 죽어가는 순간이 와도 우리는 오히려 그 어려움의 순간에 담대하며 그 모든 것을 순연하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이라는 인생의 최악이 다가와도 결코 죽음이 우리 믿음을 상해하지 못하고 죄악이 우리 백성의 영혼을 좌우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의연하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기쁨의 성취를 통해서 주님의 능력을 보여주기도 해야 하나 고난을 순연히 받고 고난가운데 굴하지 않음을 통해서 주님의 복음은 고난까지도 능가할 수 있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어려운 소원이 있어요. 어려운 아픔이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능력으로 보여주어야 해요.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기도와 소원과는 달리 너무 오랫동안 고통이 지속된다고 할지라도 의연하게 결코 하나님의 백성은 고통보다 더 큰 모든 아픔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역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합니다.
어떤 일이 잘 안될 때가 많죠. 누구나 겪는 어려운 일입니다. 전혀 이상할 것 없습니다. 다만 이 어려운 것을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라고 말씀드립니다.
정말 기도하고 애써서 어려움을 딛고 그 일을 잘 되게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그래도 안 된다면 이 가운데 하나님의 어떤 뜻이 있는가를 깊이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은혜를 누리는 것도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아파본 사람들이 건강의 고마움을 알죠. 조금이라도 건강해지면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것을 사용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기를 원합니다.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겸손할 수가 없어요. 삶의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겸허한 인생을 살수가 없습니다. 수시로 느끼지만 시간이 지나서 보면 아픔이라는 것도 결국 인생의 긴 길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감사의 요건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별것도 아니고 걱정할 일도 아니니 제가 편안하게 말씀드려도 될 것 같습니다.
제가 근래에 한 두어 달 정도 허리가 아파서 굉장히 불편함을 좀 겪었습니다. 아주 못 참을 정도나 수술해야 될 정도는 아니고 불편할 정도였습니다. 살아가는데 지장도 없고요. 그런데 부끄러운 얘기입니다. 제가 기도할 때 제가 제 허리에 손을 대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허리가 불편해서 여러 가지로 불편한데 꼭 낫게 해주십시오.”
목사가 자기 아픈 것도 해결 못하는 게 무슨 성도를 위해서 기도하나, 무슨 효험이 있겠나? 하고 생각하시면 제가 할 말은 없겠지만 목사도 아프면 그렇게 기도해요. 부끄럽지만 그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약한 것들이 목사도 있잖아요. 기도하다보면 기도하는 것 중에 제목이 빠져요. 그 말은 다 해결되어서 없어졌다는 거죠.
우리 기도하다가 그렇잖습니까? 해결된 기도는 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허리가 불편하니까 좀 불편하더라고요. 잘 때 똑바로 누워서 못자잖아요. 다리를 구부려야 등이 붙는다든가 다리를 쭉 펴면 바로 못 드러누우니까 옆으로 드러눕는다는가... 아주 불편하더라고요. 잠도 잘 못자고 피곤한 것 같아요.
주변의 도움도 받고 또 하나님께서 서서히 편안하게 해주셔서 요 며칠 전부터 아주 편안해요. 통증도 없고 굉장히 편안한 것 같아요.
가끔가다가 목사가 좀 불량스럽게 인사할 때가 있을 겁니다. 그때는 목사가 불량스럽다라고 생각하지 말고 목사님 오늘 허리가 아프신가보다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꼭 그렇게 고깝게 보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허리가 불편한 게 좀 풀어지고 편안해지니까 굉장히 기분이 좋은 것 같아요. 요즘 봄이 오니까 참 따뜻하잖아요. 뭐 봄이 돼서 추위가 풀리는 것처럼 허리도 풀려지니까 굉장히 기쁘고 고마운 것 같더라고요. 너무너무 고마운 거예요.
정말 때로는 아프다가 낫게 되는 것도 참 감사하다하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삶에 고난이라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더 깊이 깨닫게 하시는 것 같아요. 믿음이라는 것은 결국 고난을 면케 해주심이 축복이고 고난을 통해 얻는 것을 더욱더 감사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 성도님들 때로는 우리가 고난을 겪음도 하나님의 축복임을 믿고 그 가운데 감사할 수 있는 믿음까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라감으로 우리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를 부인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억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죠.
살다보면 이러한 마음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이제는 참 마음이 편해진다. 별로 고까운 것도 없어지고 사람들이 이해되어지고 오히려 인생들이 가엾어진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어떤 소리 들어도 마음 쓰이지 않고 또 어떤 사람을 봐도 괘씸하지 않고 정말 마음속에 가엾은 마음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내 생각과 내 마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기쁨,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한 내 삶을 드리는 것이 기쁨이라고 생각한다면 나 자신을 부인한다는 것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죠.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주님께서 사랑하는 인생들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우리를 감격 속에 살게 하는 거죠.
제가 교회에서도 이렇게 보니까 봉사하고 헌신하고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사역하는 사람들이 더욱더 행복하고 기뻐하는 것을 봐요. 봉사와 헌신을 해도 그 가운데 아무런 불평 없고 불만 없고 그 가운데서도 정말 감사와 기쁨만이 있는 분들이 더욱 더 행복해 하는 것을 봅니다. 봉사하고 헌신하면서도 마음 쓸리는 것 있고 불편한 것이 있으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도 주님처럼 이제는 사랑과 자비의 심정을 가지고 몸이 아프고 영혼이 곤핍한 자를 치료하고 일으켜 세워주고 배고픈 자를 먹이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을 이제는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치료하고 위로하고 먹이는 일에 마음을 써야 합니다.
우리가 인류애실천이라고 했는데 정말 그것을 우리에게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가 인류애실천이라고 하는 마음에 축복의 단어를 받았어요. 해야 할 길이 보이고 가야 할 길이 보이고 살아야 될 이유가 있는 거죠. 주님을 따른다는 영적인 확신이 있는 거죠.
우리는 주님이 아닙니다. 주님과 같은 능력은 없어요.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그 능력을 가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힘을 다하여 최선을 다할 때 주님의 능력이 그 자리에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능력을 위해서 준비를 해야 합니다. 헌신과 우리의 사랑과 은혜를 가지고 우리는 봉사와 헌신의 구조를 이루고 우리의 경험을 비축하고 인적자원을 비축하고 우리의 재원을 비축해야 합니다. 현재적인 실행과 앞으로 될 일을 준비하는 두 가지 트랙을 동시에 준비해야 됩니다. 우리도 사랑과 자비의 수고 속에 주님처럼 대가를 요구하지 않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서 결국 인생을 승리로 살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마지막으로 내가 모든 수고한 것에 대한 대가를 기다리지 않는 겁니다.
늘 말씀드렸지만 무대 뒤로 조용히 사라질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해요. 대가를 기대하는 순간부터 우리의 인생은 누추해져요. 대가를 기대하는 순간부터 우리 인생은 너무 초라해지는 겁니다. 마음의 기쁨이 없어져요.
자녀를 기르는 것도 우리가 잘 섬기고 잘 대해줄 수 있는 거기까지가 우리의 기쁨이지 내가 얼마나 성실하게 잘 대해주었는가가 우리의 기쁨이지 그 자녀들이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그들이 내 마음을 얼마나 기쁘게 하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죠.
어떤 일을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수고할 수 있는 거기까지가 기쁨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반응이 어떤지, 어떤 결과가 일어났는지, 거기에 대해서 집착하게 되면 우리는 영원한 기쁨은 가질 수가 없어요.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사랑을 베푸는 것까지가 우리의 축복입니다.
내가 이러는데 당신은 뭐야? 하는 순간 우리 인생은 초라해지는 거죠.
주님이 대가를 기대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 삶에 어떤 대가도 기대하지 않고 내가 당신을 섬길 수 있음에,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음에, 내가 나를 주고갈 수 있음에 그 자체가 기쁜 것이라면 우리는 주님처럼 아름다운 삶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요즘 제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리하는 삶입니다. 자꾸 자꾸 뭔가를 정리하고 싶어져요. 가급적이면 아주 단순한 삶을 살아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여기서 단순한데서 더 단순히 만들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 언제 주님 앞에 갈 지 모르는데 주님 앞에 갈 때 가급적이면 주변에서 금방 정리해줄 수 있도록 내 삶도 다 정리해놓고 가야하겠다 라고 생각합니다.
요새 제 마음에 이런 생각합니다.
마치 아주 중환자가 혹시 이런 얘기 들을 수가 있습니다. 말씀드리지 않아야 되겠지만 혹시라도 말씀드리는 것이 유익할 것 같아서 말씀을 드립니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몇 개월, 혹은 일 년 정도 아마 지금의 상태로 볼 때는 그렇게 예상되는데 미리 마음도 준비하시고 삶도 미리 정리하셔서 아름다운 삶에 완성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하는 얘기를 들을 수 있지 않겠어요?
제 마음에 또 그런 생각을 가져요. ‘내가 올해는 일 년만 내 삶이 있다고 생각하자. 일 년 후에 내 삶이 다 마쳐진다고 생각하자.’ 그러면서 살기를 마음에 결심하고 있습니다.
이제 올해 2월 지나갔으니까 내가 이제 내 삶이 딱 열 달 남았다고 생각하자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 옆의 사람하고 한 번 인사합시다.
“내 삶은 딱 열 달 밖에 안 남았습니다.”
여러분 그러면 지금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열 달 남은 환자처럼 사시면 여러분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무슨 말을 들어도 그렇게 고깝겠습니까?
무슨 말을 들어도 마음 쓰이겠어요? 화나겠어요?
아마 별로 화날 것도 없을 것 같아요.
내가 저런 일에 화내다니 지금 나는 그런 시간이 없어. 여유가 없어. 내가 꼭 해야 될 일에 마음 쓰고 내가 꼭 마음 써야 될 일에 마음 쓰는 거죠.
내 마음에 상심하는 말을 하면 ‘그래. 저것도 나에게 관심이 있으니까 하는 말이야. 내게 관심조차 없으면 내게 무슨 말이라도 하겠어?’ 라고 생각하고 꼭 하고 싶을 일 하고 가는 겁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도 있잖아요.
내가 열 달 정도 생명의 수한이 남았다고 하면 한 서너 달 지나면 이제는 내 손으로 내 입에 밥 못 떠 넣을 겁니다. 그 때는 생명의 수한이 며칠 더 있어도 내 손으로 내 입에 밥 넣지 못할 걸요?
그 때 생각해서 지금 내가 내 몸 움직이고 다른 사람에게 대접해도 그 사람이 받아줄 수 있을 때 다른 사람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주고 사랑을 주고 그에게 기쁨을 주다가 가야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 들지 않아요?
여러분 우리가 조금 더 지나서 예를 들어서 열 달 정도 더 살 수 있는데 한 서너 달 지나서 우리가 움직이지 못할 상태가 되었어요.
다른 사람에게 얘기해 봅시다.
“내가 마지막으로 당신을 위해서 꼭 대접을 하고 싶은데 한 번 꼭 내 대접을 받아주세요.”
그런데 그 사람이 뭐라고 그러겠습니까?
“이렇게 몸도 불편하신데 다음에 꼭 나으셔서 대접해주세요.”
이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대접을 받아주는 것만 해도 감사해요. 그렇죠?
자, 옆에 사람에게 인사 한 번 합시다.
“내가 대접하는 것 받아만 주셔도 감사합니다.”
그래요. 우리가 대접하는 것 받아만 주셔도 감사한 겁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 받아만 주셔도 감사한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감사하지 못할 모두가 감사하는 겁니다. 모두가 감사하는 거예요.
감사할 수밖에 없어요.
이런 생각하면 우리 인생은 감사하고 감격하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너무나 소중한 겁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내가 눈 떠 있구나! 내 삶이 움직이네.
너무나 소중한 하루란 말이죠.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삶 잘 정리합시다. 잘 정돈합시다.
주를 위해서 우리에게 오늘 또 하루를 주셨다면 그것을 잘 살아봅시다. 주님이 살았던 것처럼 우리에게 하루하루 주의 뜻을 이루며 살아갑시다.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더 큰 은혜를 이루실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에게 주의 축복이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
마 4:23~24 / 이영훈목사
마태복음 4장 23~24절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이 세상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이 마음의 병, 육신의 병을 앓고 있습니다. 삶에 좀 여유가 생기고 풍요로운 것 같은데 오히려 마음에 공허감을 메울 길이 없어서 갖가지 중독에 빠집니다. 알코올 중독, 도박 중독 최근에는 마약이 범람해서 마약 중독에 빠진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신적인 문제도 심각해서 질병관리청 조사에 따르면 우울증 환자가 계속 증가하고 있는데 2017년도 69만 1164명 이었던 것이 2021년에는 93만 3481명으로 35.1%가 증가했습니다. 연평균 7.8%씩 증가했고 총진료비도 2017년 3,038억 원에서 2021년 5,271억 원으로 73.5%, 연평균 14.8%가 늘어났습니다. 지금은 우울증 환자가 100만 명을 훨씬 넘어섰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어떻게 해야 이 같은 마음의 병, 육신의 병에서 놓여남을 받을 수 있습니까? 물질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물질이 풍요함을 가져올수록 마음의 공허함은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를 마음의 병에서, 육신의 병에서 고쳐주실 분은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온 인류의 희망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모든 질병에서 놓여나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 절망에 처한 자에게 희망을 전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온 인류의 죄와 사망과 저주와 질병을 짊어지고 돌아가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죄에서 놓여남을 받고, 가난과 저주와 질병에서 놓여남을 받고, 주님 안에서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그 중요한 사역을 마태복음 4장 23절에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1) 가르치심
2) 전파하심
3) 치료하심
주님은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많은 병을 고치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심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심
마태복음 4장 23절입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예수님은 이 땅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힘쓰셨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우리 사람은 평생 배워야 합니다. 배우지 않으면 우리는 이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배워야 합니다. 우리 육체가 어린아이로부터 장성한 어른이 되기까지 자라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지식을 쌓으며 자라야 합니다.
예수님 믿고 나서도 우리가 영적으로 날마다 더 건강하게, 더 성숙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많은 무리 앞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때로는 예수님의 제자들 앞에서 말씀을 가르치기도 하셨습니다. 공생애 초기에 갈릴리 언덕에서 사람들을 가르친 말씀을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5-7장: 공생애 초기의 가르치심, 산상수훈
마태복음 5장, 6장, 7장에 그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얼마나 권세가 있었던지 당시 유대교의 율법 선생님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가르치는 그런 가르침과는 달리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세와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5장, 6장, 7장에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야 될 것인가를 주님이 가르쳐주셨습니다. 특별히 너희는 세상에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13-14절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주님이 가르치신 말씀대로 우리는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소금은 음식이 부패되는 것을 방지하고 음식의 맛을 내게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이 죄로 인해 부패되는 것을 막아내는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바르게 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죄악이 만연하지 못하도록 우리가 가는 곳마다 어두운 세상의 소금이 되어서 부패하고 썩어지고 망가져가는 것을 방지하고 막아내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절망에 처한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인생을 행복하게 살게 만들어주는 행복의 전도사들이 되어야 합니다.
음식에 소금이 없으면 맛이 없듯이, 우리의 삶에 주님이 주신 기쁨이 없으면 삶의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기쁨을 주고, 주의 사랑을 나눠주는 주님의 일꾼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됩니다. 빛은 어둠을 밝힙니다. 이 세상이 너무나 어두워졌습니다. 우리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빛을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우리도 빛이 희미해져 가니까 세상이 이 죄로 뒤덮여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빛을 발해야 됩니다. 흑암의 권세를 물리쳐야 합니다. 절망에 처한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상처 입은 사람을 위로해주고, 저들에게 용기를 주며, 저들을 살려내는 역할을 우리가 감당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만연한 죄악의 모습이 더 이상 더 뿌리 내리지 못하도록 사랑의 빛, 치료의 빛, 은혜의 빛을 발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공생애 초기인 마태복음 5, 6, 7장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삶의 기본 원리를 가르쳐 주셨다고 하면 공생애의 마지막 가르침에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일꾼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될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흔히 ‘다락방 강화’라고 하는데 십자가 달리시기 전날 밤 다락방에서 열두 명의 제자를 놓고 전하신 말씀이 요한복음 14, 15, 16장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14-16장: 공생애 마지막 가르치심, 다락방 강화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이 천국에 가지만 다시 오셔서 우리들을 그곳으로 데려가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의 삶을 계승해 나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5장 26절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시는데, 그 성령님이 우리로 주의 말씀을 깨닫게 하고 주의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나면 우리 마음 가운데 성령님이 임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서 우리가 세상에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주님의 귀한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절망에 처해서 우리에게 손짓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귀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에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주님의 귀한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천국복음을 전파하심
예수님이 둘째로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4장 23절에 성경을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가르치시고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죄와 사망 가운데 절망의 삶을 살아가던 우리에게 오셔서 구원의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죄에서 놓여남을 받고 주님이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고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살다가 이 세상을 마치는 그 순간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우리에게 “내가 구원의 길이다.”라고 이야기 하지만 신천지 교주도 JMS 교주도 참된 구주가 아닙니다. 그들을 따라가면 망하고 맙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길이고 진리고 참 생명이 되십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다른 진리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참진리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생명은 지나가는 생명이지만 예수님이 주신 생명은 영생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밤에 니고데모라고 하는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율법학자이자 선생님이었습니다. 산헤드린 공의회라고 하면 당시 이스라엘의 최고 권력을 가진 70명으로 구성된 공의회의 의원인데 우리나라로 말하면 국회의원과 같은 사람인데, 이런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서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율법학자이자 선생님이었고,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이었지만은 그 마음에 무언가 채우지 못하는 공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들어보니 예수님에게 갔던 자는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는 얘기에 그도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니고데모 한 사람을 앉혀놓고 성경 전체의 요절이 되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을 니고데모가 아멘으로 받았습니다. 그날로 그는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됐습니다. 그는 그의 신분 때문에 드러내놓고 예수님을 믿지 못했지만, 끝까지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주님의 사역을 지지하고 주님 사역의 증인으로서 그가 남아 있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 권력을 다 가졌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돈을 많이 가졌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많이 배웠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이 없으면 그것은 텅 빈 인생입니다. 그에게 다가오는 절망, 고통, 괴로움을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마다 그의 인생이 변화되었습니다. 새 삶을 얻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어떤 무거운 짐을 졌든지 그 짐을 주님 앞에 내려놓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내 마음의 짐, 생활의 짐, 육신의 짐, 질병의 짐을 내려놓을 때 주님이 우리를 모든 절망에서 자유하게 하시고 우리 마음에 평안함을 넘치게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 우리가 이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며 믿지 않는 수많은 영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분부하신 것이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입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올해 우리가 5만 명 전도 목표를 놓고 열심히 전도하는데 지금 5월 말까지 약 5,000명 정도 전도했어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아직 박수칠 것은 아니고 우리가 앞으로 5만 명씩 십 년 동안 우리가 100만 성도들을 이루기까지 복음을 전하자고 했는데 제가 최근에 책을 한 권을 읽으면서 내 마음속에 주님이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북한에 있는 이천오백 만 불쌍한 영혼을 위해서 기도해라.”
이지성이라고 하는 작가가 쓴 『이지성의 1만 킬로미터』라고 하는 책인데, 그 책은 선교사님이 북한에서 탈북한 사람들을 인도해서 중국을 지나서 라오스를 거쳐 태국까지 인도해오는 과정을 이분이 따라다니면서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적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탈북하던 사람이 붙잡혀 다시 끌려가기도 하고, 넘어왔다가 인신매매로 팔려가기도 하고,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이 선교사님이 수 천, 수 만의 사람을 구해냈는데 그걸 다 기록했어요. 탈북하는 사람이 북한에서 탈출해서 중국을 거쳐 라오스, 태국까지 오는 데가 1만 킬로미터입니다. 며칠이고 그 산 넘고 산을 넘고 넘어와서 태국에 도착하면 거기서 불법 체류자로 신고를 당하고, 붙잡혀서 감옥에 가면 그다음에 한국으로 오게 됩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그 일을 한 선교사님이 수많은 사람을 구원해냈는데, 북한의 2,500만 명은 지금도 예수님이 누군지 모르고 절망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지금 북한에 기근이 들어서 아이들이 나가서 시장 바닥에서 뭘 집어먹는 꽃제비들이 늘어나고 있고, 기아 상태로 죽어가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북한이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전체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주여, 북한의 문을 열어주셔서 복음이 들어가게 하여주시고, 복음이 들어가 저들을 살리게 하여주옵시고, 그리하여 남북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통일되는 역사가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어떠한 힘으로, 능력으로도 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북한을 살리고 북한을 변화시키고 남과 북을 하나 되게 만드는 놀라운 기적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복음을 전해야 되는 것입니다.
3.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심
나가서 셋째로 예수님은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입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예수님이 공생애에 하신 사역 가운데 3분의 2가 병을 고치시는 일이었습니다. 많은 병자가 예수님께 몰려왔는데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예수님께 다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마음의 병을 고침 받고 육신의 병을 고침 받고 건강한 몸이 되어서 저들이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신다는 소문이 퍼지자 수많은 사람이 몰려왔습니다.
마태복음 4장 24절은 설명합니다.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할렐루야! 하루는 한센병 환자가 예수님 앞에 찾아왔습니다. 당시 한센병, 나병 환자들은 치료받을 수 없는 병이기 때문에 격리되어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근처에 오지 못합니다. 만약에 사람들이 모르고 자신의 근처에 다가오면 “나는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쳐야 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사람들이 있는 곳에 나타나면 던진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그런 위험에도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자기의 병을 고침 받기 위해서 예수님 앞에 나왔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에게 손을 대 안수하시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 3절입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할렐루야! 나병에서 놓여남을 받은 것입니다. 날 때부터 맹인이 되어 평생 거지로 밖에 살 수 없던 불쌍한 영혼들이 주님 앞에 나와서 눈을 뜨게 해달라고 외쳤습니다.
마태복음 9장 27절입니다.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예수님이 저들을 불쌍히 여시고 가서 손을 대 안수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때 그들의 눈이 뜨게 된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보시면 기적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찾아다니지 말고 예수님 앞에 나와서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개인의 문제, 가정의 문제, 생활의 문제 모든 문제를 주님이 해결해 주시고 마음의 병, 육신의 병을 주님이 다 치료해주실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보시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어린 딸을 잃고 눈물 흘리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예수님이 살리시고 또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아들 하나 의지하고 살고 있었던 그 아들이 죽은 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살려주시고. 마르다 마리아의 오라버니 나사로도 예수님이 살려주셨습니다. 모든 병자를 고치셨을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눈물 흘리는 그들의 가족들을 살려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치유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믿는 우리가 가는 곳마다 사람을 살려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치유해야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그 예수님을 우리가 믿고 만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질병을 쥐고 짊어지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가 이사야서 53장 5절에 이와 같이 예언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할렐루야, 교회는 병원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모든 사람이 마음의 병도 치유함 받고 육신의 병도 치유함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병 고치는 것이 사라지면 교회는 문을 닫아야 되는 것입니다. 왜, 교회가 병원인데 병원에서 병을 못 고치면 우리가 갈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세상에 병원들이 육신의 병을 고친다고 하지만 못 고치는 병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불치의 병이 얼마나 많은지 또 의사가 병명도 모르는 희귀병이 요즘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며칠 전에 제가 영락교회 김운성 목사님하고 아침 식사를 같이 하면서 얘기를 나눌 시간이 있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아들의 부인이 세상을 떠났는데 죽기 전에 “나를 꼭 내 남편에 같이 묻어 달라.”라고 하는 유언을 해서 그 유골이 한국에 왔습니다. 한국에 온 유골을 양화진에 묻어야 되는데 절차상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양화진에 묻히게 해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연세대학교 총장님하고 모여서 미팅했습니다.
근데 김운성 목사님이 그날 갑자기 간증을 하시는 거예요. “제가 어릴 때 희귀병에 걸렸습니다. 목이 돌아가고 몸이 마비가 됐는데 병원에서 병명도 몰랐습니다. 저는 평생 그런 몸이 되어 환자로 지낼 수밖에 없었던 상태였습니다. 약이 없고, 치료도 되지 아니하고 그런데 서대문의 순복음교회에 가면 병을 고친다는 얘기를 듣고 제가 수요일 저녁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조용기 목사님이 설교를 다 마치고 신유기도 시간에 오늘 이 자리에 희귀병으로 몸이 마비돼서 온 사람 고침을 받았다라고 선포했고 저도 저건 내 기도다~! 아멘! 하고 일어났습니다.”
아멘하고 일어나서 보니까 자기 혼자만 일어났더래요. 그런데 그날 그 순간 그의 병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지금까지 저를 여러 차례 봤는데 왜 지금 와서 그 얘기를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지금 영락교회의 담임 목사님이 되셔서 목회를 잘하고 계십니다. 저렇게 훌륭한 목사님으로 그때 그 소년이 지금으로부터 약 50여 년 전에 치료받은 얘기를 간증한 얘기를 듣고 제가 큰 은혜 받았습니다. 주님은 살아계십니다. 주님은 변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변함이 없는데. 우리의 믿음이 약해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옷자락에 손만 대도 병이 고침 받았습니다. 믿고 나와서 “내가 믿습니다.” 할 때 모든 병에서 놓여남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믿음이 없어가지고 “주여, 고쳐주시옵소서 안 고쳐주시면 병원에 가겠습니다.” 아예 약을 사다 놓고 “감기가 왔을 때 여기 올려놓고 지금 39도인데 고쳐주시옵소서. 아이고 안 내려가네. 약 먹어야 되겠다.”
그러면 처음부터 ‘하나님 지금 내가 감기 걸렸는데 약 먹고 빨리 낳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하고 약을 먹든가 아니면 기도로 낫던가 해야 하는데, 오늘날 우리 믿음이 약해져서 우리 삶에 많은 문제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강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해서 병원에 가지 말라는 건 아닙니다. 병원에 갈 때는 또 하나님이 병원을 통해서 의사를 통해서 병을 고치시니까요. 우리가 어떤 것을 통해서도 고침 받을 수가 있는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불가능이 없으시고 예수님이 치료자가 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갈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요한3서 2절의 축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최근에 『하나님의 노크』라는 책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다시금 체험하고 지금 그 이야기를 간증하려고 합니다. 이 책은 배에스더 사모라는 분이 세 가지 중독에서 벗어나고, 큰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살아나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간증입니다. 배에스더 사모님은 식이장애, 급성 알코올 중독, 약물중독에서 치유 받아서 지금은 거동교회 사모님으로 귀한 찬양 사역, 치유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모태 신앙이었던 배에스더 사모는 외할머니와 어머님의 뜨거운 기도 가운데 어려서부터 무용과 발레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학교 1학년 때 도서관에서 밤늦게 공부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큰 사고를 당했습니다.
‘내가 3대째 예수를 믿는데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하나님께 묻고 또 물었습니다. 이 같은 생각에 두려움과 공포에 빠져서 급기야 자살 시도까지 합니다. 이후 이것이 트라우마가 되어 음식이 차오를 때까지 계속 먹고 토해내는 것이 식이장애, 폭식증입니다. 계속 음식을 먹고 꽉 차오르면 또 토해내고 음식을 먹고 토해내고 또 토해내고 그래서 이 식이장애로 인해 고통을 당하면서 잠을 자지 못하니까 잠을 자려고 술을 입에 댔는데 한 병, 두 병 계속 술을 마시다가 급성 알코올 중독이 되서 알코올 중독 치료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일련의 일로 또 우울증도 오고 불면증이 와서 수면제를 계속 먹다 보니까 이제는 약이 없으면 잠을 못 자는 약물중독에 빠지게 됐습니다. 그래서 알코올 중독과 약물중독에서 나를 구원해줄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생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주일간 금식하며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를 살려주시옵소서. 살려주시옵소서.’ 눈물로 금식하며 기도하고 또 기도하니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성령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그 긴 긴 절망의 터널을 지나고 나서 하나님이 그의 삶을 새롭게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토하는 식이장애, 알코올 중독, 약물중독에서 자유함을 받았습니다.
‘야~ 이제 내가 새 삶을 사게 되었다.’ 했는데 뭘 꺼내다가 동전이 떨어져서 줍는 순간 차가 와서 그를 들이받았습니다. 차에 부딪힌 그가 공중으로 떳다 떨어졌는데, 그 차가 멈추지 않고 와서 그를 깔고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갈비뼈가 15대가 부러지고, 날개 뼈가 하나 부러지고, 폐는 새카맣게 멍이 들고 피를 토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죽음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 말씀이 들려옵니다.
“사랑하는 내 딸 에스더야, 내가 나의 때에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니 너는 기도만 해라.”
그는 중환자실에서 깨어나서 팔다리를 만지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비록 이런 몸이지만, 내가 살아 있는 한 오직 하나님만 높이는 춤을 만들 것이고 추겠어요.”
갈비뼈가 15개가 부러졌으니 그 후유증, 통증에서 회복하는 것은 얼마나 힘들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책을 보니까 ‘살아있음에 감사했다.’ 이말 여러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자동차가 내 위를 타고 지나갔어도 갈비뼈가 15개 부러졌어도 살아있어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예수님 믿는 사람에게 주신 축복이 바로 감사의 축복입니다.
절대 긍정, 절대 감사가 여러분의 운명을 바꿔놓는 것입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다시 세우셨습니다. 이제는 사모로서 찬양 사역자로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그 책 『하나님의 노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중독의 문제는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교회 안에서도 여러 형태의 중독으로 고통당하는 영혼들이 많이 있다. 전심으로 내게 노크해 오셨던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상한 마음으로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동일한 손길로 노크하시리라 믿는다. 중독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숨기는 것이 고통이고 부끄러움이다. 하나님께서 만지시고 싶어 하신다. 그리고 반드시 고치신다. 그러므로 반드시 살아내어 하나님께서 하실 일들을 보길 바란다.”
할렐루야! 모든 중독에서 벗어나시길 바랍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여러분 가운데 어떤 중독에 빠졌다면 예수님을 믿고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알코올 중독에서, 마약 중독에서, 도박 중독에서, 게임 중독에서 모든 중독에서 벗어나시길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참된 자유함을 얻어서 하나님의 영광에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살아계십니다. 지금도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살아있는 것이 그것이 은혜이고 그것이 감사할 것이고 그것이 내 존재의 이유입니다. 여러분 살아있는 동안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송가 438장 (통 495): 내 영혼이 은총입어>
1절 내 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보니
슬픔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후렴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2절 주의 얼굴 뵙기 전에 멀리 뵈던 하늘나라
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 날로 가깝도다
3절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여러분 모든 중독에서 놓여남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병에서 오늘 놓여남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우리가 건강한 몸으로 남은 여생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쓰임 받게 하여주옵소서. 우리 다 같이 기도합니다. 주여! 주여! 주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