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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굿난장/ 전라도씻김군] 채 수 정 (판소리, 단골)
[소리굿난장/재즈] 박 재 천 (퍼커션)
[운맞이대동굿/소리굿난장] 김 매 물 (황해도굿 만신)
[소리굿난장/경기소리] 김 명 수 (경기소리)
1) 이미 준비가 끝났습니다. 판소리 뿐만 아니라 굿과 국악에 엄청난 에너지와 변화를 몰고올 미래의 단골이자 소리꾼이자 놀이꾼입니다.
[소리굿난장/ 전라도씻김군] 채 수 정 (판소리, 단골)
1970년생으로서 평소에 딸에게 가야금을 가르치고 싶었던 어머니의 권유로 국립국악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판소리를 전공하게 된다.
진도가 고향인 서예가 아버지와 진도 아리랑, 육자배기, 흥타령, 강강술래 등 진도의 민요와 판소리를 즐겨 부르던 고모들의 환경적인 요인이 일찍이 국악을 전공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박록주선생의 법통을 이어받은 박송희 선생님(중요무형문화재 제5호)께 흥보가 공부를 고등학교부터 시작한 이래로 지금까지 선생을 모시고 ‘박록주제 흥보가’ 외에도 ‘숙영낭자전’ 과 ‘박봉술제 적벽가’ 공부를 계속하며 법통을 이어가고 있다.
1990년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음악과에 입학하였고, 대학에 입학해서는 오정숙 선생님께 ‘동초제 춘향가’를 배울 수 있었다.
같은 학교에서 석사과정(한국음악)을 졸업한 후 MBC 라디오 ’좋은 아침 우리가락‘ 구성 작가(5년간)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2000년에는 판소리 미학에 대한 좀 더 넓은 공부를 위해 국문학(경희대학교 국문학과 석사)을 하였으며, 다시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국악(판소리전공)으로 박사과정을 이수한 바 있다.(2005)
전남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등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함과 동시에 프랑스 리용에서 열리는 세계음악 비엔날레(2002)에 참여하여 흥보가 공연과 강의를 하는 등 국내외의 다양한 공연활동에도 전념하고 있다.
2006년에 흥보가 완창발표회를 하였으며, 완창 음반(3CD)을 출시하였다
채수정은 판소리와 국문학과의 만남뿐만 아니라 굿과의 인연도 깊게 맺고 있다.
대학 때부터 고향인 진도의 씻김굿을 배워야 한다는 권유를 10여 년간 집요하게 받다가 결혼 후 첫아이를 낳고서 굿공부를 본격적으로 해야겠다고 결심한다.
자칫 단골네의 길로 나선다는 오해를 살 수 있는 이 결심에 대해 부모님과 남편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후 진도 채정례단골을 찾아 1997년부터 굿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진짜 씻김굿이 나면 진도의 상가에 내려가 채정례단골네 일행과 밤새워 함께 굿을 하면서 학습하는 현장학습방식이었다.
43회에 걸친 현장 굿 학습을 통해 어느덧 단골네로서의 풍모와 실력도 갖춘 상태이며, 채정례 단골로부터 법통을 이어갈 맏제자로 인정받은 상태이다.
굿의 세계를 알고 난 이후 판소리와 굿과의 관계, ‘판’문화에 대한 이해와 감각에 혜안이 생기기 시작하였으며, 굿에 뿌리를 두고 성장해온 여타 국악의 본질과 창작원리 파악에 심취해 있는 단계이다.
채수정은 현대적인 정규대학과정과 전통적인 도제식 학습과정을 동시에 경험하면서 판소리와 굿을 동시에 정통으로 섭렵한 드문 사례이며, 진짜 단골네로서 활동할 자질을 이미 갖춘 상태이다.
채수정의 향후 행보는 거의 명맥이 끊어져 가는 세습단골가의 전라도굿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다.
이는 전라도굿과 단골네의 역사를 새롭게 쓰게 될 것이며, 국악의 새로운 도전에도 굿의 미학과 전문성이 크게 기여하리란 기대를 갖게 해준다.
2) 이 시대의 퓨전과 크로스가 완성도를 획득하여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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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굿난장/재즈] 박 재 천 (퍼커션)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고적대에서 작은북을 연주한 것이 계기가 되어 밴드부(용산고), 음악대학(중앙대작곡), 군악대(육군) ,오케스트라(중앙대) ,그룹사운드(신중현과 뮤직파워), 록 그룹(사주팔자), 재즈그룹(몰이모리), 타악그룹(젠딘), 타악기프로젝트그룹(Drum on Drum), 판소리연구(전남구례), 무속음악(진도), 프리뮤직(강태환듀오). 현대음악 작곡(작곡가 구본우 사사), 전위재즈의 역사를 일본의 비평가 Soejima Teruto 에게서 배우는 등 다양한 음악의 경험과 교육을 토대로 솔리스트 타악 연주자가 되었다.
또한 각종 전위음악제의 프로듀싱과 독립레이블 '상중하뮤직'을 갖고 있다.
그는 부인인 미연(피아노, 작고)과 함께 활동하면서 “그들만의 독창적이고 현대적인 다양한 음악방식(재즈와 전통 음악의 접목)을 통해 세계적 추세인 프리 뮤직 4세대의 길을 가는 국내 유일의 '컨템포러리 아방-가르드(Contemporary Avant-Garde)' 연주 듀오”란 평가를 이끌어내고 있기도 하다.
열악한 한국의 프리재즈계에서 강태환(알토섹소폰)과 더불어 왕성한 해외 연주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음악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는 박재천 음악세계의 기저는 '물리적 충돌' 현상이 아닌 '화학적 융합'이라는 음악철학이며, 이 위에 세워진 그의 연주방식이다.
이는 현재 4세대 프리뮤직계에 충격을 주고 있다.
그의 연주방식은 한국전통장단을 변형하여 서구적인 beat system 의 보편적인 rhythm 구조로의 전환에 촛점을 맞춘 연주방식을 택하며, 이를 자신의 주요한 과제의 하나로 설정하고 있다.
국악에 대한 깊은 관심은 타악연주자로서 박재천의 타악 세트를 한국의 전통악기와 서양의 여러 가지가 섞여있는 독창적인 형태를 갖게 만들었다.
즉, 놋그릇, 꽹과리, 장구, 북 등 한국 토속 타악기 소리를 근간으로 직접 구성한 드럼, 봉고, 오카탐 등 외국의 타악기와 버무림으로서 독특한 소리세계로 이끌어 준다.
뿐만 아니라 앉아서 연주하는 동양의 정신적 자세를 취하는 몇 안 되는 연주자가 되었으며, 민속적인 음악의 소재들에서 현대적인 여러 기법으로의 발전적 형태를 추구한다.
즉흥음악연주시" interplay(상호작용)에 민첩한 연주자" 로 정평이 나있는 상태이다.
처음 대중음악으로부터 시작한 그는 학창시절 정상적인 교육과정에 반항하며 괴팍하리만치 자유로운 영혼에만 본능적으로 순응했던 여정을 갖고 있다.
대학 3학년 때는 인간문화재인 명창 박귀희 선생으로부터 국악 공부를 하면서 우리 가락의 오묘함에 매료되었다.
89년 울적한 마음도 식히고 국악공부에 더욱 정진하러 전남 구례로 훌쩍 내려갔다.
동편제 판소리의 명인 강도근 선생의 제자 임윤명에게 판소리를 구례 민속 농악단 상쇠인 유순자에게 장구와 꽹과리를 익혔다.
또한 토속적인 무속음악을 익히기 위해 진도 무당인 정보살 일행에 북잡이 노릇을 하며 음악순례를 했다.
새로운 대중가요가락을 빚고 싶은 마음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섭외한 가수들은 “웬 판소리, 민요냐”는 비아냥만 늘어놓았다. 그래서 직접 노래도 했다.
사물놀이와 대금의 토속가락에 신디사이저와 첨단의 컴퓨터음향으로 무장한 <박재천 사주팔자-서울음반, SPDR-261,91년6월>. 박재천은 “타이틀의 사주팔자는 개똥이다.
나는 anti 사주팔자를 말하고 싶었다. 원초적인 사주팔자에서 더 큰 신 예수님으로 가는 과정을 컨셉으로 음악을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일부 팬들은 <사주팔자>의 비범함을 눈치챘지만 당시 한창 불던 서태지 열풍을 넘지 못하고 주저앉게 된다.
음악 PD 김진성도 “나는 제2의 한대수가 탄생한 줄로만 알았다.”는 평을 들은 사주팔자는 파격적인 시도와 그 완성도로 인해 사적인 재평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판단이다.
서태지뿐만 아니라 박재천도 우리 대중 가요판을 뒤집으리라 생각했다. 이 음악을 대중가요에 뿌리내리지 못했던 것이 죄스럽기만 하다”며 아쉬움을 지우지 못한다.
설상가상 박재천은 MBC로부터 7주간이나 가요차트 1위를 고수하던 김국환의 <타타타> 백음악으로 <사주팔자>의 판소리와 연주를 해달라는 굴욕적인 제안을 받자 미련없이 가요판을 떠났다.
국악에 대한 깊은 경험과 해박한 지식, 이면까지도 꿰뚫어보는 국악에 대한 혜안을 바탕으로 한국전통음악 연주자와 새로운 음악작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양쪽 음악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와 그간의 다양하면서도 풍부한 경험은 “'물리적 충돌' 현상이 아닌 '화학적 융합'”이라는 그의 음악철학을 가능하게 하였을 것이며, 국악과 양악의 크로스오버나 퓨전이 음악적으로 융해되어 새롭게 창출되어야 할 과제를 풀어나가는데 있어 그의 역할이 자못 기대된다. 16장의 앨범을 국, 내외에서 발매하였다.
3) ‘우리의 어머니’가 작두날 위에서 추는 춤과 공수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팬클럽 있는 무당, 무당의 사표를 만나십시오!
[운맞이대동굿/소리굿난장] 김 매 물 (황해도굿 만신)
일명 인천 ‘신기촌 매물이만신’이라고 불리는 김매물 만신은 기묘년(1939) 구월 초이튿날 황해도 해주 결성에서 태어났다.
전쟁통에 어려서 덕적으로 피난 내려와 열아홉에 중선배 기관장이었던 전덕선에게 시집가 아들 하나에 딸 넷을 둔다.
어려서부터 무병을 앓아온 김만신은 시집간 지 6년만인 25살에 내림을 받는다.
덕적도 국수봉 신령인 최영장군을 몸주신으로 모신 김만신은 특별한 수업 없이도 굿 잘하고 영검한 무당으로 덕적에서 이름을 날린다.
38살에 인천으로 옮긴 후 줄곧 신기촌에서 간판 하나 없이 신의 길을 가고 있다.
황해도 굿 전반에 대해 밝은 김만신이지만 특히, 뱃굿과 물진오기굿으로 유명했다.
인천 부둣가 중선배들의 뱃굿은 도맡다시피 해 그 명성이 높았으며, 물에 빠져 죽은 혼을 건져내 저승천도하는 물진오기굿에선 “진짜 귀신이 있다”는 확신을 갖게 만들 정도로 평판을 받아왔다.
김만신의 굿은 편안하면서도 기품이 있다. 기품이 있으면서도 우아한 춤 솜씨는 가히 일품으로 김만신의 표정과 함께 안정된 굿으로 특징짓게 해주는 주된 요소이다.
거의 완벽한 발디딤과 맴돌이가 김만신의 뛰어난 춤사위를 만들어 내는 토대일 것이다.
해박한 굿문서에 뛰어난 기예와 영험력보다 더 김만신에게 주목해야할 점은 종교인으로서의 김매물만신이다.
옆집 아줌마 같이 수더분한 생김새와 차림새, 그리고 온갖 신의 풍파와 인간고락을 이겨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기품 있으면서도 한없이 편안한 눈길과 표정. 변항없는 정성과 자세로 신과 사람을 대하는 모습은 “진정한 무당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평해도 무리가 없다.
그래서 항상 김만신에게는 사람이 따른다. 김만신의 단골들은 인간적인 정리를 바탕으로 한 나름대로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김매물만신 팬클럽이 결성되어 있으며, 이들이 중심이 되어 마련하는 ‘새해맞이굿’이 매년 12월 31일 날밤을 새워 서울 인사동에서 펼쳐져 많은 대중과 교감하는 자리를 가지고 있다.
이번 굿음악제에서도 가장 큰 어른으로서의 역할이 부여되어 있으며, 소리굿난장에서는 가장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작두타기를 해주실 것이다.
작두 위에서 나올 공수가 자못 궁금해지기도
4) 혹시 제2의 장사익을 그려보신 적 있으십니까?
바로 이 사람을 주목하십시오!
[소리굿난장/경기소리] 김 명 수 (경기소리)
1955년 서울에서 소리꾼집안의 후예로 태어났다. 전설적인 경기소리 명인으로 재조명되는 김옥심이 그의 친고모이다.
어린 시절 고모집을 드나들면서 당대 최고 명인들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으며, 귀동냥으로 고모의 소리를 따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철이 들어서는 경서도 소리의 중시로 알려진 이창배 선생에게서 한문과 경기소리를 학습하였다.
그러나 군대를 다녀온 후에 전업적인 소리꾼의 길을 접게 된다.
직업을 갖고 평범한 생활인(만도기계 지게차 운전자)으로 접어든 후 50대를 넘기면서도 같은 직장 같은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렇다고 소리를 접은 것은 아니다. 소리에 대한 사랑과 열정은 한 순간도 소리공부을 놓아본 적이 없으며, 현재 살고 있는 원주의 치악산 자락에 자신만의 독공자리를 마련하여 틈만 나면 공력 쌓기에 여념이 없다.
뿐만 아니라 경기소리에 나오는 고사와 문장을 독학으로 해석하면서 한문학에 대한 연구도 깊이 진척시키나가는 중이다.
특히, 우리에게 매력으로 다가오는 것은 칸초네와 팝송에 대한 자신만의 해석과 흡수이다.
통기타 세대인 그는 어린 시절 자연스럽게 기타를 잡게 되었으며, 자신이 사랑하는 경기소리를 기타반주에 실어 부르는 방법을 음악적으로 터득하였다.
경기소리 창법에 바탕을 두고 통성으로 시원하게 뽑아내는 그의 칸초네와 팝송은 기타 반주와 어우러지면서 또 다른 음악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현장에 맞게 즉흥적으로 팝송의 가사를 바꾸며 읊어나갈 경우엔, 음유시인과는 또 다른 세계, 즉 서울굿의 공수나 축원·덕담을 내려주는 무당 역할의 소리꾼으로 전환되어 버린다.
노동을 하는 생활인의 진솔함과 건강함이 그의 성음과 소리맛에 깊이 배어 있으면서도 정통적인 학습법을 바탕으로 한 득음에 가까운 통성의 소리맛을 함께 갖고 있는 귀한 존재이기도 하다.
자신이 아끼고 애창하는 경기소리와 서양의 대중음악을 완성도 높게 결합하여 누구나 들으면 좋아할 이 시대의 음악으로 변신시켜냈다는 점이 이번 굿음악제에서 주목하는 그에 대한 가치이다.
제2의 장사익으로 등장할 수 있는 자질과 연륜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판단이다.
김옥심 (경기소리)
1925년 6월 16일 서울에서 태어나 87년 11월경 작고한 경기 소리의 명창이다.
김옥심 명창은 1958년 광복 후 제1회 전국민요 경창대회에서 1등을 하는 등 1950~80년에 걸쳐 최고의 경기 명창으로 활동하였으며 이 시기에 발매 된 유성기 음반, LP레코드에는 그의 소리가 들어가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약 100여종),인간문화재 이은주, 묵계월 명창과 함께 트리오로 전성기를 누렸고, 특히 정선아리랑 ,한오백년은 그의 특기로 그가 불러야만 제맛이 난다고 일컫는다.
김옥심의 목소리는 경기 소리를 위해 하늘이 내린 천성으로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 맑고,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듯 윤기가 넘치며 가사를 음미하듯 호소력 또한 일품이여서 듣는 이마다 그의 소리에 탄복 않는 이 없었다.
김옥심 명창은 경기 소리의 특징을 가장 완벽하게 갖추어 소화해내므로 혹자는 100년에 하나 나오기 어려운 명창으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창배
벽파는 경서도 소리의 중시조이자 경제시조창(京制時調唱: 서울, 경기 지방의 독특한 시조 창법. 박절이 엄정하고 속목을 쓰는 것이 특징)의 대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벽파는 경서도 소리의 예술적 위상뿐 아니라 학문적 위상까지 높인 인물로 평가됨은 물론, 현존하는 경서도 소리의 체계적 전승과 발전에 큰 공을 세운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경서도 소리를 주로 불렀던 사람들은 선소리패(일명 산타령패: 예전 서울 마포, 왕십리 등지에서 산타령을 주로 부르던 소리꾼들)나 기생층이었다.
벽파는 이들이 불렀던 '12잡가' 나 휘몰이잡가, 서도잡가 등이 환갑날 잔치소리나 기생들이 술을 팔 때 부르는 소리로 천시되는 것을 걱정하여, '예술성'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재정립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가요집성'이라는 책을 내고, '청구고전성악학원'을 만들었다고 한다.
다른 명인, 명창들과 겨뤄 벽파의 공이 더욱 도드라지는 것은 한국전쟁 이후 나라도 하기 어려운 '체계적인 제자양성'이란 국악계의 큰 숙제를 혼자서 해냈다는데 있다고 국악인들은 입을 모은다.
어려운 때에 주변의 만류에도 청구고전성악학원을 세우고 배출해낸 제자들은 현 선소리 타령 인간문화재인 용주를 비롯 지화자, 안숙정, 이춘희, 김영임, 전숙희, 최창남 등 내로라하는 경서도 명창들이다.
그는 1951년 국립국악원 국악사가 되고, 60년부터는 국악예술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선소리산타령’의 보존회를 조직하여 소리타령의 보급과 후진양성에 힘써 왔으며, 68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산타령’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더더구나 벽파는 12잡가를 비롯 많은 민요의 사설을 지은 것으로도 유명하며, 경서도민요의 틀을 잡은 대단히 중요한 인물로 꼽힌다.
첫댓글 얼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