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잠실에 있는 태창가족 본사는 생맥주집인 듯 떠들썩하고 활기찼다. 인테리어도 그렇고, 사무실 분위기는 사뭇 ‘전투적’이었다. 심사숙고 끝에 결정만 하면 고삐를 늦추지 않고 몰아붙이는 김서기(1959년생) 사장의 성격을 닮았다. 런칭 3년 만에 400개 가맹점 운영, 2001년 한 해만 230여 가맹점 개설, 쪼끼쪼끼는 국내 생맥주문화를 리모델링해 가며 단기간에 주류 프랜차이즈의 대표 브랜드로 자리잡았다. |
99년 6월, IMF 쇼크에서 완전히 헤어나지 못한 시절, ‘부산 촌놈’ 김서기는 서울로 올라온다. 기왕이면 큰물에서 사업을 벌이자는 심산이었다. 외환 위기 직후 폐허가 되다시피 한 부산지역을 돌아보며 프랜차이즈 사업을 구상한 것이다. 부산 유명 상권 곳곳의 굳게 내려진 점포들 셔터마다 나붙은 헐값 임대 공고문을 보면서 그는 생각했다. 임대료가 싼 때, 임대료가 싼 곳에서 프랜차이즈 사업를 하는 거다….
경기 변화를 덜 타면서 주택가에서도 먹힐 수 있는 생맥주 전문점을 하는 거다…. 그러나 서울의 생맥주 도매업자들은 끌끌 혀를 찼다. 그를 세상 물정 모르는 촌놈 보듯 했다. 뭐라고? 불황에는 목 좋은 곳에서도 힘든데 동네 골목에서, 그것도 가맹사업을 하겠다고?
“잔뜩 겁을 주더만요. 서울에서는 안 된다면서, 계속 ‘서울 타령’만 해대는 겁니다. 직원들 눈앞에서 힘 빠지는 소리를 해댈 때는 정말…. 개구리는 무심코 던진 돌아 맞아 죽을 수도 있잖아요? CEO가 흔들리면 끝장난다는 생각에 직원들을 붙들고 며칠이나 설득했나 몰라요. 도매상들이 저렇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거, 그만큼 관심이 있다는 거라고 말이지요. 저는 역으로 성공 조짐을 읽었거든요. 확실한 컨셉과 자신이 있었습니다.”
김서기 사장은 생맥주 도매업체에 일단 5개 점포를 열어보자 제안하고 99년 12월, 서울 성내동에 쪼끼쪼끼 1호점을 연다. 1호점은 유동인구가 적어 2년째 점포가 비어 있던 최악 입지. 김사장은 ‘여기서 되면 대한민국 어디서든 다 된다’는 생각에 굳이 그 자리를 택했다. |
■ 생맥주집 인테리어를 해주시면… |
1990년, 부산 서면 1번가, 조금 외진 곳의 지하 1층 지상 4층의 한 건물. 건물 주인과 갓 서른을 넘긴 청년이 마주앉았다. “장사는 해야겠는데 돈이 모자랍니다. 매장 인테리어비를 대주시면, 생맥주집을 성공시켜서 부근 땅값을 올려 놓겠습니다.”일면식도 없는 청년의 같잖은 말에 건물주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렇게 딱 잘라 거절한 지 한 달쯤 지났을까, 건물 주인은 청년에게 전갈을 보내온다. 지하 30평을 내줄 터이니 한번 해보라…
마침내 청년은 생맥주집을 시작하게 된다. 부산 자갈치 시장을 무대로 고기상자 납품업을 하다 거덜나고 1년이나 대인 기피증에 시달렸던 청년은, 진돗개와 함께 산행하는 것으로 소일하다가 문득 생맥주 장사 생각을 했다. 제일 쉬운 장사 같았다. 맥주를 짜 내리면 돈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만만해 보였다. 그러나 가진 돈이라곤 달랑 1500만원 남짓, 청년은 절박함과 배짱으로 건물주를 찾아가 흥정했던 것이다.
90년대 부산 명물 생맥주집 ‘영타운’은 이렇게 시작된다. 생맥주는 왜 500㏄, 1000㏄ 잔에만 파나? 왜 맥주잔 모양은 하나 같이 똑같지? 청년은 이른바 발상의 전환, 뒤집어 보기를 통해 ‘확실한 차별화’로 승부수를 던진다. 세숫대야와 양동이에 생맥주를 담고 국자로 따라 마시게 하고, 보통 2000원 이상 받던 기본 마른안주를 단돈 300원에 내놓았다.
여자의 나신(裸身)을 본따 만든 ‘비너스잔’도 개발했다. 생맥주 메뉴 이름도 이판사판, 횡설수설, 비몽사몽… 시쳇말로 엽기적인 시도였다. 특이하고 값싼 영타운은 부산의 젊음들 사이에 폭발적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엄청난 판매량으로 부산지역 주류업계 입을 쩍 벌어지게 한다. 당시 비슷한 규모 생맥주집이 하루 2만㏄ 한 통 파는 게 고작인 데 견주어 무려 15통이나 팔아 치웠다.
“어떻게 그리도 많이 파는지, 주류상들이 와서 지켜볼 정도였어요. 매일마다 골목에 장사진치기가 일쑤였는데, 신속한 서비스로 보답하려고 아르바이트를 테이블당 한 명씩 썼습니다. 왔다가 그냥 가는 손님들에게는 껌이나 티슈 선물을 주고요. 손님들은 손님들대로 줄 서 있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내주느라, 술 마시다가 다시 줄을 섰다 들어오고 그러니, 고맙고 미안해서라도 막 퍼줬어요. 막 퍼주니 엄청 팔아도 남는 게 없었는데, 나중에 정량대로 팔다보니 월 1000만원 순익은 족히 남더군요.”
하지만 장사가 잘되자 건물주는 그만 다른 마음을 먹는다. 직접 맥주집을 할 요량으로 청년더러 가게를 비우라고 한 것. 약속이 틀리다며 청년이 버티자 주인은 건물을 팔아버리고 사라진다. 새 주인 또한 지상 4개 층에 레스토랑을 연답시고 연일 공사를 해대며 영업 방해를 일삼았지만, 생맥주집 매출은 시들 줄을 몰랐다. 청년은 레스토랑 오픈 두 달 후부터는 맥주집에 넘치는 손님을 레스토랑으로 올려주더니, 결국 건물주가 꼬리를 내리자 지하부터 4층까지 통째로 생맥주집을 운영하게 된다. 덩치가 커진 영타운은 하루 2만㏄ 50통, 월 3000만㏄를 파는 맥주왕국이 된다. 93년부터 95년까지 단일 매장으로는 국내 최대량을 기록했을 정도. 청년은 돈벼락을 맞았다. |
■ 머리 아닌 가슴으로 사업하고 싶다 |
쪼끼쪼끼 김서기 사장이 바로 영타운 신화의 주인공이다. 쪼끼쪼끼의 성공은 부산에서 대형 맥주점을 운영한 김사장의 경험, 그 특유의 ‘뒤집어 보기’에서 나온 아이디어, 타고난 배짱과 눈썰미가 어우러진 것이다. 직장 근처 유흥가에서 주거지 근처 중소형 주점으로 술장소 이동, 직장 동료에서 이웃과 가족으로 술상대 교체, 고알콜에서 저알콜로 술취향 변화 등 90년대 초반에서 후반으로 넘어오면서 새롭게 바뀐 음주문화를 꿰뚫은 그의 프랜차이즈 전략이 제대로 맞아떨어져 쪼끼쪼끼 대박이 터졌다고 할까. 20대 위주 고객층에서 과감히 벗어나고, 변두리 입지 조건을 역이용한 김사장의 생각은 빛을 발했다.
김사장은 ‘온가족이 모여 앉아 차를 마시듯 생맥주를 마시는 곳’이라는 컨셉을 잡았다. 가족 중심의 지역 커뮤니티 공간을 만들 목적으로 탄생한 브랜드인 만큼, 쪼끼쪼끼는 기존 생맥주집과 비교해 몇 가지 ‘출점 전략’의 차별성을 갖는다.첫째, 입지의 차별화다. 쪼끼쪼끼는 시내 요지가 아닌 아파트 단지와 주택가를 고집했다. 주거지와 가까운 편안한 곳에 휴식 공간을 제공한다는 뜻에서다. 둘째, 점포의 중소형화다.
기존 메이저 맥주 브랜드를 앞세운 체인과 달리 대형화를 마다하고 최소기준 25평 정도의 ‘서민 사랑방’을 만들었다. 셋째, 커피숍 같은 맥주집 인테리어. 가족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밝고 가벼운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다. 어설픈 개성과 특화보다는 일상적인 편안함을 추구했다. 테이블 칸막이를 치우고, 주방도 훤히 보이도록 했다. 넷째, 1층에만 출점한다. 1층 점포 원칙을 고수한 까닭도 가족 손님을 위한 배려에 있다. 지하 매장은 쪼끼쪼끼가 추구하는 가족문화에 반하는 구태악습(舊態惡習) 음주문화가 되풀이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2층 이상 매장은 가족 손님이 드나들기에 다소 불편할뿐더러 탁 트인 공간에서 가족들이 모여 생맥주를 즐기는 공간을 만들려는 취지에서 철저하게 1층 점포만 개설했다.
물론 시원하고 뛰어난 맥주 맛이 성공의 바탕이다. 쪼끼쪼끼는 ‘비어 클리너’로 하루 두 번 자동 세척한 맥주관을 통해 받은 신선한 생맥주를 영하 20℃에서 꽁꽁 얼린 맥주잔에 담아 생맥주 원맛을 그대로 살려냄으로써 런칭 초기부터 맥주 애호가들의 입소문을 탔다. 생겨나는 가맹점마다 다운타운에서나 가능한 하루 5통(2만㏄들이) 판매가 거뜬해지자 쪼끼쪼끼 맛은 소문에 소문을 타게 되고, 손님과 가맹점주가 또 다른 가맹점을 소개하고 유치하는 효과를 가져와 단기간에 많은 가맹점을 확보할 수 있었다. 모집 광고를 통한 가맹점망 확충이 아닌 ‘가맹점 매출을 증대함으로써 가맹점들 스스로 세포분열 하도록 만든다’는 김서기 사장의 전략이 그의 눈초리만큼이나 매섭다. |
■ 당신도 망할지 모른다 아이가 |
김서기 사장이 다양한 생맥주를 개발, 출시하는 것도 쪼끼쪼끼의 가족 손님들을 위한 것. 아울러 가맹점 매출 증대를 위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름하여 ‘서기생맥주’는 술을 잘 못 마시는 사람과 여성 고객을 위해 쪼끼쪼끼가 독자 개발한 저알콜 기능성 맥주로, 생맥주 원맛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색다른 맛을 동시에 즐기는 신개념 맥주다. ‘생맥주 칵테일’로 이해하면 된다. 국내산 매실 농축 원액을 첨가한 ‘그린생맥주’는 위와 장에 부담이 없다. 오미자 원액 11%를 넣은 ‘오미생맥주’는 단맛, 신맛, 쓴맛, 짠맛, 매운맛이 절묘하다. 칡·구기자·대추·감초 등의 한방 원액을 함유한 ‘흑한방생맥주’는 간 해독과 숙취에 좋다. 대추와 감초로 쓴맛을 없앴다. 헤이즐넛 원액을 사용한 ‘커피생맥주’는 입 안 가득 커피 향이 그만이다. 최근에는 남자들 정력에 좋다는 ‘복분자생맥주’도 선보였다. “직접 만들고 시음 하느라 대낮부터 벌게 가지고 다녔어요. 전부터 노란색 맥주 말고 뭐 없나 궁리했는데, 색깔에다 건강 기능을 접목해 보니 답이 나오더군요. 맛 문제를 해결하느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서기생맥주를 지방에 내다 팔았으면 돈 좀 벌었을 건데, 직원들이 오히려 반대하더군요. 쪼끼쪼끼 가맹점을 위해서 말입니다.”
부모(가맹본사)는 이렇게 자식(가맹점)을 위하지만, 자식은 종종 부모 속을 썩인다. 양주 판매만 해도 그렇다. 쪼끼쪼끼 컨셉에 양주가 가당키나 한가? 김서기 사장은 가맹점주 헛욕심이고 다 제 살 깎기라고 단언한다. 그 역시 여느 프랜차이즈 기업 사장처럼 ‘사람(가맹점) 관리’가 가장 어렵다고 토로한다. 특히 본사의 정품을 써야 한다고 아무리 교육해도 일부 점주가 말을 듣지 않을 때 사업 한계를 느낀다고. 고민 끝에 그는 본사가 제공하는 생맥주 원료를 쓰지 않고 시중 유통되는 유사 재료를 쓰는 가맹점을 가려내 특별 관리한다. 궁여지책으로 정품 사용 가맹점에는 ‘이 가맹점은 정품만을 취급하는 곳입니다’라는 문구가 인쇄된 포스터를 부착, 고객 신뢰를 이끌어내고 있다.
“회사 대 가맹점의 문제보다도, 가맹점과 가맹점간 문제가 더 큽니다. 점주들이 다른 가맹점 입장은 도통 생각을 안 해요. 현재 가맹점주 모임인 ‘고객만족마케팅연구위원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역별 가맹점주 커뮤니티를 형성해서 점주들의 희구를 모으고, 지역 특성에 맞는 마케팅 등 쪼끼쪼끼의 발전 방향을 공동 모색하자는 거지요.”
슈퍼바이저는 가맹점주 건강 관리와 기분 관리에 특히 신경 쓴다. 점주의 건강과 기분에 따라 매출이 오르락내리락한다는 것이 김서기 사장의 지론이기 때문. 한편 김사장의 가맹사업 수성 전략은 ‘폐점할 곳은 과감하게 폐점한다’는 것이다. 점주가 개별 행동할 경우 경고하고 재교육시키지만, 질 낮은 싸구려 물건을 써서 쪼끼쪼끼의 위상에 먹칠하는 등의 행위를 계속하는 가맹점은 재계약시 가차없이 쫓아낸다. 프랜차이즈 사업은 가맹점 통일성이 생명이고, 엉터리 가맹점을 죽이는 것이 다른 모든 가맹점을 살리는 길이기 때문이다. |
■ 해가 지면 쪼끼쪼끼가 뜬다 |
2001년 이후 김서기 사장은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쪼끼쪼끼가 ‘뜨자’ 유사상표가 난무한 것. 블랙쪼끼·쭈끼쭈끼·쪼끼타임·한쪼끼 두쪼끼·조끼조끼·블루조끼·쪼끼닷컴·짜끼짜끼·칼라쪼끼·쭈끼쪼끼 등 ‘쪼끼’를 도용한 상호가 줄을 이었다. 유사상표로 인한 가맹본부 이미지 손실도 그렇지만, 점주들의 피해가 극심하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또 유사상호에 속아넘어갔거나 쪼끼쪼끼 가맹 조건보다 ‘싼 맛’에 다른 상표를 선택했다가 낭패를 본 피해자들도 속출했다. 김사장은 이들 모두의 권익을 위해 쭈끼쭈끼·블랙쪼끼 등을 상대로 유사상표 사용금지 가처분 결정을 받아냈으며, 여타 유사상호에 대해서도 사용금지 가처분 신청을 낸 상태다.
“그 사람들, 남의 것을 모방하고도 죄 의식이 없더군요. 이제 우리나라도 유사상표를 도용하는 법인이나 개인에게 보다 강력히 대응해서 지적재산 보호를 엄격히 관리해야 합니다. 그래야 프랜차이즈 산업이 건전하게 커나가지 않겠습니까?”
사족(蛇足). 맥주 회사들은 앞으로 맥주 CF 찍을 때 다음에 유의하기 바란다. 모델들로 하여금 비장한 표정을 짓게 하지 말라. 맥주 한 모금 들이키고 인상 쓰며 카! 소리내게 하지 말라. 그것은 맛이나 냄새가 몹시 맵거나 독할 때 내는 소리다. 자꾸 그러니까 우리나라 술문화가 이 모양이다. 술은 우리 일상의 애환을 달래주는 친구다. 특히 맥주는 대중적 편안함으로 다가가야 한다. 맥주 광고는 패밀리를 타깃으로 만들기 바란다. 이것이 김서기 사장의 간절한 부탁이요 바람이다.
글 연용호 편집국장·사진 홍덕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