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아버지, 그사슬
유일민은 7월 16일 해거름에 휘청거리는 걸음걸이로 판자대문을 밀
고 들어섰다. 연탄 화덕에 저녁밥을 짓고 있던 유일표는 한순간 멈칫하
더니 형을 와락 끌어안았다.
"혀어엉!"
그 소리는 울컥 터져오르는 울음이었다.
"그래, 표내지 말고 들어가자."
유일민이 동생의 등을 두들기며 낮게 말했다. 유일표는 그 말뜻을 얼
른 알아듣고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주인집이나 셋방 사람들은 나와 있
지 않았다. 그동안 가정교사를 맡고 있는 고3 학생의 기본실력을 길러
주느라고 당분간 입주한 거라고 둘러댔었다
"그래, 어찌 지냈냐?"
유일민은 가방을 떨어뜨리듯 놓으며 흐릿하게 웃음지었다. 그러나 눈
에는 눈물이 번지고 있었다. 유일표는 그제서야 형이 가방을 들고 있었
다는 것을 알았다. 그 순간, 공부는 해서 뭘 해,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나야 뭐......, 근데 형 몸이 왜 그래? 고문당했어?"
"고문당하긴. 오래 갇혀서 수사받느라고 시달려서 그렇지." 유일민은
힘없이 주저앉으며 등을 벽에 기대고는, "엄니는 어찌 되셨냐?"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응 선희한테서 나흘 전에 편지가 왔는데, 그때까지 못 나오셨대."
"그래, 아마 엄니도 오늘 풀려나셨을 게다 더 걱정하지 마라."
유일민은 눈을 감으며 뒷머리를 벽에 기댔다.
"근데 형의 죄가 뭐야?"
유일표가 불쑥 물었고, 유일민은 고개를 바로 세우며 더디게 눈을 떴다.
"죄는 무슨 죄 . 죄가 없으니까 풀려났지."
"이건 순 나쁜 놈의 새끼들이야.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무조건 잡
아다가 두 달씩이나 죽을 고생을 시키고. 이 군발이새끼들을 그냥!"
유일표는 부르르 떨며 이를 갈았다.
"일표야, 너 몇 살이냐 어린애가 아니잖냐. 억울하지 않을 수 없지만
분한 것을 표내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너 운명이라는 말 알지? 다 운
명이라고 생각해라."
"학생, 일표 학생. 밥 타네, 밥!"
밖에서 외치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유일표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유일민은 다시 고개를 뒤로 젖히며 눈을 감았다. 두 달......, 몸서리
가 쳐졌다.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얻어맞기는 꽤나 많이
얻어맞았다. 정강이를 걷어채이고 따귀를 얻어맞고......, 그러나 그런
것은 거친 군인들의 버릇으로 넘길 수도 있었다. 정작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무조건 빨갱이로 몰아대는 공포 분위기와, 터무니없는 의심을 품
고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수사였다. 그들은 두 가지를 집요하게 추궁해
댔다. 그동안 아버지가 남파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느 누군가로부터
소식 한 번 전해 듣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되고, 그걸 속이고 있다는
거였다. 그리고 또 하나, 학생들의 통일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것은
위장일 뿐이며, 비밀리에 배후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의심을 품고 있었
다. 통일운동은 곧 아버지와 접촉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무관심하거
나 방관했다는 것은 뻔한 속임수라는 우격다짐이었다. 혼자였다면 그들
이 원하는 대로 해버리고 싶을 만큼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나 어머니가
꺾일 리 없는데 자신이 꺾일 수 없었다.
유일민은 무슨 중병 환자처럼 몸이 허약해 보였다. 핏기라고는 없이
초췌한 얼굴은 메말라 광대뼈가 불거져 있었고, 감고 있는 눈자위는 움
푹 들어가 그늘져 있었다.
"형, 형, 어서 밥 먹어."
유일민은 설핏 든 잠 속에서 악몽에 시달리다가 눈을 떴다.
"응, 밥이 어찌 이리 빨리 됐냐?"
"날마다 형 밥을 해왔거든."
날마다......, 유일민은 가슴이 찡 울렸다. 눈물이 금방 목을 가득 채
웠다.
"그동안 너 어떻게 살았니?"
저금통장에는 한 달 정도 살 돈밖에 없었던 것이다.
"응, 친구들이 도와주고, 가게에 외상도 좀 지고 그랬어. 빨리 먹어."
유일표는 형 앞으로 밥상을 더 밀었다. 쌀이 드문 보리밥에 콩나물국
반찬은 푸성귀 김치 하나였다. 그런 밥상을 형 앞에 내놓는 것이 유일표
는 너무 미안하고 면목 없었다.
"그래, 먹자."
유일민은 무거운 듯 숟가락을 들었다.
"형, 서동철 형이 잡혀갔어."
"......그래......."
유일민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왜 안 놀래?"
"응, 그런 사람들 일소했다는 소식 안에서 들었다. 넌 어떻게 알았냐?"
"형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는 데 혹시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해서 찾
아갔었어."
밥을 먹은 유일민은 이내 잠이 들었다. 그 잠은 다음날을 꼬박 채우고
그 이틀날 아침까지 이어졌다. 그는 밥 때에나 동생의 성화에 못 이겨
가까스로 일어나 겨우겨우 밥을 먹고는 곧 잠에 빠지고는 했다.
몸이 무겁고 기운이 없었지만 잠의 늪에서 벗어난 유일민은 옷을 챙
겨 입었다. 또 가정교사 자리는 날아간 거니까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
고, 어서 학교에 나가보아야 했다. 자리를 소개한 서동철이나마 있었다
면 또 모르겠는데 그도 없어진 형편에서 두 달 동안이나 아무 통고도 없
이 발을 끊은 가정교사를 기다릴 집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한 학기
중에 두 달을 장기 결석한 학교 문제가 어떻게 될 것인지 불안하고 걱정
스러웠다
유일민은 학교로 들어서며 낯선 것 같은 서먹함을 느꼈다. 그건 두 달
동안 결석을 해서 생기는 감정만이 아니었다. 교정에 있는 동료들과 자
신은 다르다는 어떤 소외갈이 그들과 거리를 느끼게 했다.
"난 이 나라를 떠나고 싶소. 여긴 우리 같은 인간들이 설 자리가 없거
든요. 그렇지만 떠나는 것도 맘대로 되지 않을지도 모르죠."
유일민의 의식 속에 그의 말이 떠올랐다. o대학 사회학과를 다닌다
는 그의 처지도 자신과 똑같았다. 사회학을 전공해서 그러는지 그의 안
목은 예리한 데가 있었고, 장래에 대해서는 아주 비관적이었다.
"두고 보시오. 반공주의는 갈수록 강화될 거요. 왜 반공주의를 혁명공
약 첫 번째로 내세웠겠소. 그게 정통성 없는 정권을 유지해 가는 데 가
장 효과적이고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이오. 미국의 지지를 얻는 데도 절
대 유리하고. 상황이 그렇게 전개되어 갈수록 우리 같은 인간들은 내몰
리고 짓밟힐 수밖에 없잖겠소."
학교도 더 다니고 싶지 않다고 했던 그의 모습을 지우려고 애쓰며 유
일민은 강의실로 발길을 서둘렀다.
강의실은 텅 비어 있었다. 유일민은 교무과의 벽보를 보고서야 3 .4학
년의 학기말 시험은 어제로 끝났고, 1 .2학년의 시험이 내일까지라는 것
을 알았다.
유일민은 현기증을 느끼며 벤치에 주저앉았다. 중간고사도 기말고사
도 치르지 못하고 말았다. 중간고사는 5월 20일경이고, 기말고사는 7월
10일경부터 시작되니까 하필이면 갇혀 있었던 시기였다. 한 학기가 망
쳐진 낙담 속에서도 유일민은 교무과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특별한 경
우니까 혹시나 무슨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싶어서였다.
"글쎄, 사정은 딱하지만 어떻게 하겠나. 한 학기 더 다녀야지 다른 방
법이 없네."
교무과장의 사무적인 말이었다.
"우리 신분은 이민 가는 데도 결격사유가 될 수 있소. 그럼 난 입산이
나 할 생각이오."
그의 말이 또 떠올랐다. 그는2~3년 전부터 말이 나오고 있는 브라
질 이민을 꿈꾸고 있었다.
유일민은 휴지조각이 된 한 학기 등록금을 생각하며 벤치에 주저앉
았다.
"그거 큰일났잖아. 신 선배는 어떻게 됐대?"
"신 선밴 아직 무사한가 봐."
"통일운동이고 뭐고 다 끝장이구나. 무조건 잡아넣고 빨갱이로 몰아
대니 원."
몇 학생이 지나가며 하는 말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신 선배는 신무영일 거라고 유일민은 생각했다. 통일
운동에 나섰던 학생들도 이미 수배가 시작된 모양이었다. 수사관들이
왜 그렇게 끈질기게 통일운동과의 연관을 추궁해 댔는지 유일민은 비로
소 깨달았다. 그때 신무영의 그 진지하고도 빈틈없는 논리에 이끌려 통
일운동에 가담했더라면 어찌 되었을 것인가. 지금 풀려나지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마저 빨갱이로 몰렸을 것이 뻔했다. 유일민은 그
아슬아슬함에 몸을 떨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학기에 맞춰 휴학을 할 것인지 어쩔 것인지, 어머니의 건강은 어떠신
지, 가정교사 자리는 또 어떻게 구할 것인지, 착잡한 심정으로 유일민은
교문을 나섰다.
"오빠, 오빠아!"
한 여자가 소리치며 길을 건너 뛰어오고 있었다.
"아니, 너 채옥이......."
유일민은 어리둥절한 채 내달아오는 임채옥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언제, 언제......, 풀려났어요?"
임채옥은 곧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는 듯 허둥거리는 몸짓을
지으며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입술이 떨리고 있는 그 얼굴에는 반가움
과 울음이 뒤섞여 있었고,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너 그걸 어떻게 알았어?"
"오빠 동급생이 가르쳐줬어요. 약속한 날 세 시간을 기다려도 오빠
가 안 나와 다음날 학교에 찾아왔었어요. 근데 오빤 나흘 전에 잡혀갔
다고......".
임채옥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가자, 어디로. 헌데 오늘은 어쩐 일이냐?"
유일민은 당황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걸음을 떼어놓았다. 대낮에 젊은
남녀가 손 잡고 다니는 것은 아예 용납이 안 되고, 어깨를 마주대고 걷
는 것도 눈총을 받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자가 남자 앞에서 운다는 것
은 더없는 흉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날마다 여기 와서 오빨 기다렸어요."
임채옥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뭐라구......?"
유일민은 걸음을 멈칫하며 임채옥을 바라보았다. 그의 가슴에서는 순
간적으로 형용하기 어려운 이상한 바람이 회오리치듯 일어나고 있었다.
"또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하려고 그러세요?"
"아니야, 아니야......"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기다려준 타인......, 그녀가 실한 바람
벽처럼 느껴지고, 그녀에게 기대고 싶은 자신의 감정에 유일민은 놀라
고 있었다.
"채옥아, 너 이러다가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어. 너만 아니고 부모님
까지도 말야."
이 말은 임채옥에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흔들리는 감정을 깨
뜨리는 것이기도 했다.
"걱정 마세요. 난 오빠가 아무 죄도 없이 당하고 있다는 것 다 알아요.
날 잡아간대도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임채옥은 오히려 바짝 다가섰다.
한편, 유일표는 강당에 모인 학생들의 심각하고 진지한 분위기하고는
달리 멍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이번에 새롭게 확정된 대입 국가고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특
징이 있다. 첫째로 국가에서 전국적으로 통일된 시험을 치르게 하는 것
이고, 둘재는 시험문제가 완전 객관식으로, 다시 말해 네 가지 예문 중
에서 답을 고르는......."
교무주임은 이틀 전에 공포된 새 대입고사 요강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부는 해서 뭘 하느냐는 회의에 사로잡혀 있는 유일표의 귀에
는 그 설명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형이 갇혀 있는 동안 그 회의는
자꾸만 깊어져 이제는 헤어나기 어려운 상태가 되어 있었다.
"일표야, 너 아까 무슨 생각을 하느라고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었냐?
대학에 안 갈 놈처럼. 너 요새 무슨 고민 있어? 말도 통 안 하고 말야."
강당을 나오면서 이상재가 유일표의 팔을 붙들었다.
"모르겠다. 돈이 있으면 술이나 실컷 마시고 뻗어버렸으면 좋겠다."
유일표의 입에서 불쑥 나온 말이었다.
"뭐라구? 너 무슨 심각한 고민이 있구나?"
이상재는 유일표의 속마음을 탐지해 내려는 듯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고민은 무슨 고민. 괜히 짜증나고 싫증나고......, 요새 유행하는 말
로 10대의 '이유 없는 반항'이다."
유일표는 건달들의 몸짓을 지어보이며 속마음을 감추려고 했다.
"너, 괜히 얼렁뚱땅 넘기려고 하지 말어. 지금은 시간 없으니까 좀 있
다가 방과후에 얘기해. '이유 없는 반항'은 아무나 하냐? 잘살고 속편한
미국애들이나 하는 거지. 특히 넌 어른처럼 철이 들어버린 놈이잖아. 괜
히 날 속이려고 하지 말어. 네 얼굴에 다 써 있으니까."
이상재는 유일표의 어깨를 두들기고는 자기 교실 쪽으로 발길을 서둘
렀다.
유일표는 자신에게 마음 쓰는 이상재를 고마운 마음으로 바라보았
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고민
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다. 연좌제에 대해 말하다 보면 아버지에 얽
힌 집안 사정을 다 얘기해야 하고...... 그건 흠만 내보이는 것일 뿐 해
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부질없는 짓이었다. 연좌제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은 이쪽의 절박함을 이해하기 어렵고, 괜히 경계심만 갖게
하거나 사이가 멀어질 수도 있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형이 경찰에 처
음 끌려갔을 때 이규백 형과 김선오 형이 보인 냉담함은 잊을 수가 없
었다.
"그건 이해해야 해. 그 사람들의 인간성이 나빠서 그러는 게 아니니
까. 사상 문제는 생사를 좌우하는 문제니까 우리라도 그럴 수밖에 없어.
나쁜 건 모든 사람들을 그렇게 만든 나라야. 서운한 마음은 아는데 그
사람들한테 유감은 갖지 마. 그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그래 놓고 우리
한테 미안하고 면목없을 테니까."
형은 솔직하게 말했다. 자기도 그 선배들한테 너무 놀랐고 서운하다
고. 그래서 형의 말대로 그들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한 번 실망
해 버린 마음은 그전으로 돌이켜지지 않았다. 웃으면서 대했지만 마음
에는 유리벽 같은 것이 막혀 거리감이 좁혀지지 않았다.
모든 것을 털어놓았을 때 이상재는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지 두려움
이 앞섰다. 이상재도 그 두 사람처럼 변할 수 있었다. 그건 정말 두려운
일이었다. 그들은 관계를 하지 않아도 아무렇지도 않은 타인이었다. 그
러나 이상재는 형제처럼 정이 깊어진 친구였다. 그런 친구를 나라가 조
성해 놓은 공포 때문에 잃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또 다른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 사실을 두려워해서 태도
가 변한다면 그게 진정한 친구일 수 있는가. 진정한 친구라면 그런 것을
초월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이상재의 우정이 어느 정도인지 재보고
싶은 유혹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 유혹을 뿌리쳤다. 일방적으로 친구의 우정을 측정한다는
것이 너무 야비했고, 자신이 이상재의 진정한 친구라면 그런 짓을 하지
말아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자, 빵집으로."
교문을 나서며 이상재가 말했다.
"참 골치 아프다. 나라에 할 일도 많을 텐데 뭐 하려고 대입 제도까지
그렇게 완전히 뒤바꾸느라고 이 난리냐. 군인들이 뭘 안다고."
유일표는 자신에게 신경 쓰는 것을 둔화시키려고 일부러 자신들에게
가장 다급한 관심사를 꺼냈다.
"그러게 말야. 바꾸더라도 2학년부터나 적용하든지. 꼭 군대식으로
무조건 '돌격 앞으로!'야. 이러니까 자꾸 욕을 얻어먹지. 그나저나 우린
앞으로 정말 골치 아프게 생겼다.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객관식에 적응
해야 되니 말이야."
"우리보다 골치 아픈 건 선생들이야. 갑자기 객관식으로 시험문제를
내야 하니 그거 어찌 되겠어. 생고생들 하게 생겼지. 월급 더 받는 것도
아닌데."
"어쩌겠냐. 다들 당하는 수밖에."
이상재가 빵집 문을 밀치며 탄식하듯 했다.
"말해 봐. 무슨 고민인지."
빵을 시키고 나서 이상재는 앉음새를 고쳤다.
"별거 아니야. 어머니가 좀 아프셔."
유일표의 입에서 나간 말이었다.
"어디가? 나쁜 병이냐?"
이상재가 긴장하며 연달아 물었다.
"아니, 나쁜 병은 아니고, 너무 과로를 해서 그렇대나 봐."
"나쁜 병은 아니니 천만다행이다. 너무 고생을 하시니까 병 나는 거야
당연하지. 넌 그럴수록 힘내야지 왜 그렇게 맥이 빠져 있냐. 물론 가보
지도 못하고 걱정이야 많이 되겠지만, 어머니 고생이 빨리 끝나게 하려
면 네가 좋은 대학부터 붙어야 되잖아. 제발 힘 좀 내라. 네가 우울하니
까 나까지 그리 된다. 자아, 어서 빵 먹어."
"알았어. 힘내야지."
유일표는 정말 힘을 내는 것처럼 포크로 빵을 콱 찍었다.
"근데, 너 학과는 정했냐?"
이상재의 말에 유일표는 가슴이 뜨끔해졌다.
"글쎄, 급한 것 아니니까 좀더 생각해 봐야지."
"너 참 이상하다. 평소의 성격을 봐서는 과단성 있게 남들보다 먼저
정할 것 같은데. 너 정치학과 가는 건 어떠냐? 말솜씨 좋고, 행동적이
고,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응, 그것도 생각 중이야."
유일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정치'는 어머니가 제일 싫
어하는 것이었다. 아버지 때문에 그 옆에는 얼씬거리지도 말라는 것이
어머니의 당부였다.
"뭐, 오래 생각할 것 없어. 대학은 자기 적성에 맞춰 가야지 근데 한
가지 웃기는 일이 있다. 장경식이 그놈이 정치학과를 갈까 어쩔까 재고
있어. 제놈 적성에 영 안 맞는지도 모르고. 아마 아버지가 아들이 국회
의원 노릇하기를 바라는 모양인데, 돈 많으니까 부산바닥에서 나서면
될지도 모르지. 개네 아버지가 돈만 많으니까 이젠 아들을 통해 권력을
갖고 싶은 모양이야."
"그럴 수도 있겠지." 유일표는 씁쓰레하게 웃으며 빵을 씹어 넘기고
는, "너 전에 얼핏 이런 말 한 적 있었지. 넌 6. 25때 인민군을 보지 못
했다고 그게 무슨 소러지?" 그는 장경식의 얘기가 싫어서 갑자기 화제
를 돌렸다.
"그야 당연하지. 난 부산사람이잖아."
"부산사람......?"
"너, 국사 점수 낙제냐? 부산은 낙동강 전선으로 끄떡없이 보호됐잖
아. 그 덕으로 난 인민군들은 말할 것도 없고 빨치산들도 하나도 보지 못
했어. 그 대신 미군이나 구호물자, 양공주나 피난민들을 보면서 6 .25가
끝났어. 부산사람들은 제일 안전하고 편안하게 6 .25를 치른 셈이지."
"맞아 낙동강 전선. 내가 미처 그 생각을 못했구나. 그쪽 사람들은 아
주 큰 혜택을 받은 셈이네. 세금 몇 배로 더 내야 되겠는데."
유일표는 웃으면서 농담을 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이상재에게 속내를
털어놓지 않기 잘했다고 생각했다. 인민군이나 빨치산을 본 일이 없이
6 .25를 치른 이상재가 연좌제 같은 것에 관심이 있을 리 없었다. 6 .25를
그렇게 치른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 새삼스러웠고, 은근히 이상재가 부
럽기도 했다.
"그만 가자."
유일표는 가방을 끌어당겼다.
"힘내, 힘. 새 전쟁 시작이잖아."
이상재가 주먹을 쥐어 보였다.
유일표는 전차에 흔들리며 형을 생각하고 있었다. 형은 대학을 계속
다닐 것인지 어쩐지 알 수가 없었다. 어렵게 가정교사까지 해가며 대학
을 나와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는가. 겉으로 말은 하지 않지만 형도 혼자
서 많이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형은 얼마나 참담하고 절망스러울 것인
가. 형은 ROTC를 지원하려고 하기 전까지만 해도 연좌제라는 올가미
를 알지 못한 모양이었다.
연좌제라는 그 흉물의 존재를 알기 전까지는 아버지가 남겨준 것은
경찰의 감시와 가난이었다. 아버지가 내려오지만 않는다면 감시는 무
서울 것이 없었고, 가난은 언젠가는 물리칠 자신이 있었다. 형과 자신
이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을 구하게 되면 가난에서는 이내 벗어날 수
있었다.
가난은 참 고통스럽고 지긋지긋한 것이었다. 가난은 누나를 요정으로
밀어 넣었고, 끝내 누나를 잡아먹고 말았다. 그러나 누나가 남겨놓고 간
돈은 겨우 굶주림을 면할 수 있는 밑천일 뿐이었다. 형이나 자신이 학교
를 다닌다는 것은 가난의 수렁에서 계속 허덕거려야 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중학생이 되었어도 새 모자는 생각지도 못하고 남의 것을 얻어 썼으
며, 더구나 교복은 비싸 재봉틀도 없이 어머니가 손수 만들었고, 학년이
바뀌어도 새 책을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 어디에서나 가난은
감출 도리 없이 남루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중학생 때는 이발을 이
발소에서 하게 되어 그나마 형편이 좀 나아진 편이었다. 국민학생 때는
이발소에 가지 못하고 집에서 어머니가 가위로 깎았다. 아무리 잘 깎고
다듬는다 해도 이발기계처럼 말끔하게 되지 않고 가위 흔적이 머리를
감고 돌아가며 남게 마련이었다. 머리가 약간 길어나 그 흔적이 지워질
때까지 아이들에게 '토란 대가리'라고 놀림을 당해야 했다. 가위 흔적이
토란의 털무의와 너무 흡사했던 것이다.
깁고 또 기워 입은 속옷과 달리 겉으로 드러난 가난은 큰 괴로움이고
고통이었다. 그러잖아도 창피스럽고 부끄러운 것을 참고 견디기 어려운
데 남들에게 자꾸 놀림감이 되고 업신여김을 당하게 되면서 창피스러움
과 부끄러움은 괴로움과 고통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마음에도 차츰 변
화가 일어났다. 잘사는 사람들을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싶은가 하면,
호화로운 상점 같은 데 들어가는 게 쭈뼛거려지고 주눅이 들었다. 그뿐
이 아니었다. 어느 때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웃음거리가 되며 겹겹의
누더기를 벗기도 하고, 어떤 으리으리한 건물에 들어가려다가 거지 취
급을 당해 내쫓기는 꿈을 자주 꾸기도 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아무렇지
도 않은 척했고, 특히 어머니 앞에서는 그런 속마음을 전혀 내색하지 않
았다.
물론 형하고도 그런 얘기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형이라고
그런 마음이 없을 리 없었다. 더구나 형은 나이가 많은 만큼 자신보다
더 오래 가난에 찌들리고 시달려온 처지였다 형이 늘 우울하고 그늘져
있는 것은 어려서부터 경찰한테 당한 고통 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었다.
거기에는 가난이 준 병이 합해져 있을지도 몰랐다.
가난이 남겨놓은 상처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자전거포에서 자전거
를 빌릴 수가 없어서 지금까지 자전거를 타지 못하는 사내로 만들었고,
중학교 3학년 때와 고등학교 2학년 때 실시하는 수학여행도 가지 못했
다. 특히 중학교 때 수학여행을 가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큰 슬픔으로
가슴에 남아 있었다. 어쩌면 처음 당한 일이라서 그런지도 몰랐다. 경주
를 향해 새벽안개 속으로 사라지던 버스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려고 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아픔들은 하잘것없는 것이었다. 연좌제라는 괴물은
내일을 위협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을 피해 선택할 수 있는 대학의
학과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을 피해 고를 수 있는 직업이 무
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을 피해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는 길이 무엇
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형이 ROTC 지원을 포기한 것을 어머니에게 비밀로 했듯이 이 일도
알릴 수가 없었다. 형과 자신이 좋은 대학을 나와서 당당하게 출세하는
것이 어머니의 유일한 바람이고 희망이었다. 어머니가 그 꿈을 포기해
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찌 될 것인가 어머니를 보호하는 유일한
길은 어머니가 그 일을 서서히, 하루라도 늦게 알게 하는 것뿐이었다.
아버지......, 그 모습이 자꾸만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우
리가 이런 일을 당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이런 것을 안다면
아버지는 어떤 심정일까. 북쪽에는 분명 월남한 사람들의 가족들이 있
을 텐데, 그들에게 북쪽에서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결코 보호해
줄 리는 없고, 남쪽과 똑같이 감시하고 학대하고 연좌제를 들이대는 것
인가.
유일표는 더는 세상을 살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전차에서 떠밀려 내
렸다. 버스 요금은 배 가까이 오르고 전차 요금은 그대로 25환이라 전차
는 터져나갈 지경이었다.
카페 게시글
조정래님의 한강
한 강 = 제1부 격랑시대 (2권)ㅡㅡㅡ 33. 아버지 그 사슬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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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10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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