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은 현재 한국의 교육제도를 독일식(구라파식)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다음 카페 『교육공화국』cafe.daum.net/edurepublic 을 운영하고 있다.
이 인터넷 카페의 주된 사상은 이렇다 : “현재 한국의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교육정책과 입시 제도이다. 공교육은 붕괴되고 사교육 비용은 급증하고 학생들은 입시지옥에서 허덕거린다. 언론과 보수 단체들은 하향평준화를 비판하고 그 대신 자립형 고교, 자율형 대학을 부르짖는 소리가 높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영미식의 교육제도는 우리나라의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의 교육개혁의 방향은 유럽식 내지 독일식의 교육제도를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이는 전 교육의 국립화 내지 공립화를 의미한다. 이 제도의 장점은 입시가 사라지고 사교육이 필요 없게 된다는 점이다. 또한 이는 한국 사회의 고질병인 학력, 학벌, 학연을 단절시킬 수 있다. 그리고 전 교육기관을 국립화하는 재원은 26조에 달하는 사교육비를 원용함으로써 원론적으로 가능하다. 그리고 이런 교육의 국가주의 혹은 공화주의는 지역간의 차이와 소외를 극복하고 통일을 준비하는 교육 정책이다. 이런 교육 제도의 정립을 위해서 정치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교육 개혁운동을 『 교육공화국 』운동으로 부른 이유는 교육을 통하여 공화국(Republic)의 이념을 달성하기 하려 하기 때문이다.
우선 공화국의 이념은 위대한 희랍의 철학자 플라톤이 말하는 것처럼 (사회의) 어느 한 계층이 아니라 모든 계층이 행복하도록 통치되는 그런 국가사회를 말한다. 이는 또한 고대의 로마의 공화주의 정치에서 실제로 행해졌던 그러한 정치 이념이다. 이런 공화주의 이념은 국가의 위기 시에 국가의 독립과 통일성을 위해 개인이 자발적으로 희생한다는 애국주의를 내포한다. 그리고 고대 로마의 역사에서 보여지는 사적인 것에 대한 공적인 것의 우위성, 사리사욕에 앞서 공공복리를 위해 부자들이 기꺼이 사재를 털어서 대규모의 건축과 토목공사를 벌였던 그런 국민적 윤리(Ethos)와 시민정신이 이 시대 한국에서 절실히 요청되는 가치관이다. 그리고 우리 시대 독일에서 보여지는 ‘기업가는 생존건설자(Exsistenzgründer)이며 애국자이다’ 라는 사회윤리 등, 이런 정신을 필자는 공화주의 정신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이런 정신을 가진 분들이 많다.
이런 애국주의적 공화주의에 비해 민주주의는 독재나 권위주의에 반대하며, 인간의 자유와 평등에 기초하여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 절차적 정치의 개념이다.
그런데 역사의 경험이 보여주는 것처럼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적 민주주의는 법적, 제도적으로 국가시민의 자유와 평등을 담보하지만 실제로는 야만적 자본주의의 착취구조 때문에 많은 인간들이 시민적 자유마저 상실하고 노예상태로 전락하는 것을 체험했다 ; 이런 배경에서 칼 맑스(K. Marx)의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 사상이 등장한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시장과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계급없는 사회, 무차별적 평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역시 엄청난 역사적 오류였음을 지난 세기는 스스로 보여주고 있다. 그 이유는 주지하는 바, 공산주의가 분배의 평등만을 내세웠지 생산과 효율이라는 자본주의의 장점을 그 체제 내에서 살릴 수 없었기 대문이었다. 더 많은 생산과 발전 그리고 능률을 위해서는 자본이 축적되어야 하고 또 이를 위한 개인간, 집단간의 소득의 불평등을 허용해야 한다. 그리고 사유재산이 분배적 정의에 따른 분배의 결과라고 한다면 그 개인 재산과 소유는 합당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진실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한다 : 사회적 평등과 불평등이라는 두 가지 반대되는 원리들은 둘 다 사회 발전을 위해 필요한 덕목이며 또 이 둘은 서로 의지하고 서로 살린다(相生)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처럼 평등만을 강조하는 사회도 그런 평등을 감독하고 운영하기 위해서는 다시금 특권층이 발생한다. 봉건적인 불평등의 계층구조는 근대의 시민 혁명으로 평등화되었다. 이런 논리는 현실에서도 통용된다 : 사회 구성원에게 다양성과 자유를 주려면 먼저 공통적인 평등적인 조건을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사회란 완전한 평등만으로도 살 수 없고 또 완전한 차등만으로도 살 수 없다. 이 테마는 다른 기회에 상세히 다루기로 하고 필자는 우선 이런 사회존재를 잠정적으로 평등과 불평등의 변증법적 통일이라고 규정해둔다.
여기서 말하는 불평등이란 달리 말하면 다양성 혹은 차이성을 말한다. 그래서 불평등을 인정한다는 말은 실은 개인간의 여러 가지 종류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 사상, 정서, 체력, 나이, 지식, 온갖 종류의 능력 등등. 불평등이란 말에는 사회적 차별대우나 착취 혹은 특권 등의 뉘앙스가 있기는 하나 원래는 그 의미가 단순히 “같지않음, 다름” 등의 뜻이다. 따라서 이런 개인들 간의 다양한 차이와 개성, 인격을 존중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라고 하면 필연적으로 경제적 차이도 인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경제, 사회적 차이가 선천적으로 확립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 다시 말해 부모가 부자라고 해서 그 자녀도 자동적으로 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개인적 부와 권력은 그 사람이 자기의 일평생 노력으로 획득한 것에 한정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유산의 상속에 반대하고 100% 국고환원을 요구한다.
그런데 현재 한국사회의 모순은 부와 특권뿐만 아니라 지식까지 대를 이어 세습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현재 미국에서 기승을 부리는 양키문화의 오염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 이는 공화주의 정신에 위배되는 매국적인 관습이다. 특히 교육 문제에 있어서 공화주의 정신은 실종되고 부자들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최고의 교육의 기회를 주려고 돈을 뿌리고 있으며 그 밖의 중산층들도 그들이 현재 지닌 부와 특권을 고스란히 자녀들에게 넘겨주기 위하여 혹은 더 나은 신분으로의 상승을 위해서 처절한 사투를 부리고 있다 : 영어 조기 교육, 조기 해외 유학 혹은 족집게 과외 등.
이제 주제는 요즘한참 문제인 강남의 일류 학원들과 고액과외 등이다. 서민들은 꿈도 꿀 수 없는 교육환경을 강남의 부유층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베풀고 있다.
필자는 위에서 개인의 차이, 특히 능력의 차이와 그에 따른 보수의 차이를 인정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만약 한 개인이 내적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돈이 없어서 교육을 받지 못해서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면 그리고 이런 사례가 대규모로 발생한다면 이는 공동체의 파멸을 야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가 주장하는 것은 출발의 평등과 결과의 차등 인정이다. 다시 말해 교육기회의 완전한 균등을 원한다. 그런 다음에는 그런 기회를 이용하여 학업을 마치고 난 사람들이 어떻게 부와 권리를 모으고 늘이는가 하는 문제는 개인의 자유에 맡기자는 것이다. 이런 모델을 필자는 독일의 교육시스템에서 찾고 있다. 거기서는 부자집의 아이나 가난한 집의 아이나 모두 같은 학교, 같은 선생,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고 또 같은 수영장, 같은 축구장에서 취미생활을 한다. 그러면서 독일의 국력은 막강하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 위대한 과학자와 예술가들이 나왔다. 미국이 물론 국력 세계 1위라고 하지만 미국은 독일과 달리 엄청난 땅과 자원이 있는 자원 강국이다.
그리고 유럽의 국가들은 세계대전이후로 미국에 많은 인적 자원을 빼앗겨야 했다.
그런데 현 정부는 국민복지나 공화주의 정책에 근거한 교육투자가 아니라 미국식의 시장주의와 사교육 우선의 관점에서 현행의 교육제도를 바꾸려고 한다. 이것은 실은 김영삼 정부 때부터 추진된 잘못된 교육개혁 정책이다. 이들 정치인들은 현재 한국교육의 최대 문제인 입시위주의 교육에 대해 전혀 개선책을 내어 놓지 못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 필자는 대학 입시제도의 폐지를 요구한다. 그리고 전대학의 국립화, 공립화를 통해 공교육을 정상화하고 독일에서처럼 대학 졸업시험제도를 통해 대학과 대학생의 학력을 통제하기를 바란다. 이게 선행되지 않으면 어떤 입시제도의 개혁도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해방이후 한국 사회는 수십 번에 걸친 대학 입시제도를 단행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 그런 북새통 속에서 아이들만 죽어났다.
이런 관점에서 필자는 교육공화국 운동을 구상하게 되었다. 이는 공화주의적 교육, 즉 국가교육주의를 말한다. 이는 (대학)교육 민영화에 반대하는 것이다, 이는 교육의 시장주의에 대비되는 교육의 사회주의를 말한다. 또 이는 교육을 통해 공화국의 이념 수행이라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즉 민족의 통일과 자주 독립 그리고 민족의 번영과 복지 등등 이 모든 것의 기초에는 모든 국민의 공교육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교육공화국 운동이고 현재는 주로 인터넷 교육개혁운동으로 이루어 진다 그러나 앞으로는 학생운동, 민중운동의 차원에서 전개되어질 것이다. 이 운동은 정치화 되어야 한다.
2. 이해찬 1세대의 외침
그리고 이 책 『이해찬 세대의 외침, 사교육과 입시 없는 나라를 위하여』의 집필 동기와 내용 구성에 대해 말하겠다. 위에서 언급한 이념과 목표에 따라 필자는 주로 인터넷 홈페이지에 여러 가지 글들을 올리고 또 신문(한겨레 신문)에도 몇 차례 교육관련 기사를 게재했다. 따라서 이 책 「제 1부 교육공화국을 위한 이론적 작업」 에서는 교육공화국 운동에 관한 필자의 논문과 짧은 글들을 실었고 「제 2부 이해찬 세대의 외침」에서는 필자가 가르친 2002년 1학기 경희대학교 교양과목 [사회 윤리의 제문제]를 수강한 학생들이 쓴 교육제도에 관한 레포트와 그에 대한 필자의 논평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 학생들 중 대다수가 소위 이해찬 1세대라고 불리는 1983 년생, 2002학번들이 많았었다. 그들은 이해찬 전 교육부 장관의 교육 정책인 소위 “열린 교육”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열린 교육을 받고 난 그들은 “단군이래 최저 학력”을 소지했었다고 놀림을 받은 세대이며 또 나중에는 입시제도의 변덕으로 큰 피해를 본 당사자들이다. 그 중 한 학생은 이렇게 자신의 입시 시절을 회고하고 있다 :
“각자의 특기와 적성 하나만을 가지고도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로 많은 이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던 그 이해찬 씨의 1세대라고 하는 사람 중에 나도 한 사람이다. 실로 엄청난 교육 정책의 뒤집기와 흔들기로 어찌나 마음 고생을 시켰던지 이루 말로 표현 할 수가 없다. 단군 이래 최저 학력이란 말을 들으면서도 여러 가지 불이익과 어려움을 당했던 세대가 바로 올해 입학한 우리 1학년들인 것이다”.
물론 이해찬 장관 혼자 우리나라 조령모개식, 임기응변적 교육 정책 변화의 책임을 전부 질 이유는 없겠지만 그래도 가장 상징적으로 그런 사태를 보여주기 때문에 제목을 그렇게 붙였으니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을 『이해찬 1세대의 외침 – 교육 공화국을 위하여』라고 붙이게 되었다.
대학생들의 레포트를 게재한 이유는 그들이 얼마 전까지 직접 입시의 노예가 되어 신음했었고 따라서 한국 교육제도의 질곡과 모순을 가장 생생하게 그러나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고찰해 볼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생들의 글에 다른 자료들이 인용부호 없이 삽입된 경우도 있으나 여기서는 그런 것을 일일이 비판하지 않고 교육 현실의 객관적인 서술이라는 면에서 그들의 생각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지나간 시절의 고통과 앞으로의 걱정이 표현된 글들을 읽으면서 도달한 결론은 독일식의 교육 공화주의, 교육 국가주의였다. 현 정부가 추진중인 교육 시장주의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고통을 무시하고 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12년의 교육기간동안 아이들의 정신과 육체는 병 들어간다. 김대중, 이해찬 식의 교육개발은 지식기반사회의 인재양성이라는 허울좋은 구호 속에 실은 인재를 썩히고 있다. 야당인 한나라당은 집권하면 지금보다 더 시장주의 교육을 시행할 것이다. 물론 그들의 표현은 ‘하향평준화 깨트리기’ 혹은 ‘교육의 수월권(秀越權) 보장’ 혹은 ‘수준별 교육’이니 하는 구호가 될 것이지만. 그러나 한국의 고질병인 학벌사회를 묵과하는 어떤 입시제도나 명문고등학교 설립 혹은 대학 자율화 등의 논리도 현실의 왜곡된 구조를 해방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와 인간 소외의 질곡을 더할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학생들의 레포트에 일일이 논평을 붙였다. 그런데 그 방향성은 학과점수의 기준이 아니라 주로 교육공화국의 입장에서 본 것이다. 그래서 객관적인 평가라기 보다는 교수의 주관적인 관점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학생들의 글이 자료들을 자기 것으로 소화시키지 못하고 베낀 부분도 많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일일이 지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런 자료들이 한국교육의 문제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것이 많아 학생들의 개인적인 한계를 많이 보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내용적으로 비슷비슷한 글들이 많다. 그러나 그 생생한 개인적 체험의 진실성 때문에 지루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학생들이 쓴 레포트에 논평을 붙여 다시 학생들에게 레포트를 돌려 주는 것이 독일에서 교수가 학생 지도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 방법을 실현하기는 힘들었다, 왜냐하면 박봉의 강사 월급에 비해 그 일이 너무 시간을 많이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 경희대 학생들의 레포트는 특별히 출판을 위한 것인 만큼 한 번 모든 레포트에 논평을 붙여 보았다. 80개의 레포트를 읽고 논평을 쓰는데 꼬박 20일이 걸렸다. 평소 강의 과제 레포트는 결코 그렇게 할 수가 없을 것이었다.
독일에서는 학부생 레포트부터 박사과정 레포트 그리고 박사학위 논문까지 교수가 지도하는 방식은 같다 : 세미나하고 참고서적 알려주고 레포트 제목을 주고 쓴 레포트 비평해 준다. 그러나 그런 과정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는 거기서 공부해 본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예를 들어 레포트 –거기서는 단순히 숙제(Hausarbeit)라고 한다- 하나 제대로 쓰는데 6개월이 걸린다. 잘못 쓰면 지도 교수가 성적을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든지 아니면 고치라고 되돌려 준다. 그러면 또 한 학기 지나간다. 그러다 보면 한 10년 금방 지나간다. 그러나 그런 과정, 즉 자기기 쓴 글을 지도 교수의 논평과 같이 다시 돌아 보며 새로 고치는 과정에서 엄청난 공부를 하게 되고 생각은 심화된다. 우리나라에서 창의력과 독창성을 많이 이야기하지만 대량적인 객관식 시험으로는 절대로 학생들이 독창성과 깊이 있고 풍부한 전문지식을 획득하도록 유도할 수 없다. 앞으로 한국에서도 이런 주관식 시험으로 평가해야 한다. 따라서 수능시험 같은 대량적, 획일적, 객관식 국가고사는 반드시 폐지해야 한다.
3. 한국의 교육정책의 정립을 위한 준비
오늘은 순수 학문적 관심을 좀 벗어나 한국의 현실, 아니 그 현실의 일부인 교육 현실을 비판하고 새로운 교육의 이상을 제시하고, 또 그것을 현실화하기위한 노력의 광장입니다. 많은 관심과 성원 그리고 가차없는 비판으로서 교육의 발전을 성취하기를 원합니다.
사실 이 교육 문제는 필자의 독일 생활 9년 내내 부심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와 정치문제를 두고 나는 쾰른 대학에 유학 중이던 많은 한국인 학생들과 점심 먹고 나서 매일 거의 두 시간씩 토론하였습니다. 그 중 일부는 귀국했고 필자와 가장 많이 이야기를 한 채이병씨(토마스 아퀴나스 전공)는 이제 학위논문의 마무리 단계입니다.
그가 귀국하면 다시 정치와 사회 전반에 관해 많은 토론을 나누고 싶습니다. 독일에서 토론이 붙은 만큼 자연히 우리의 관심은 조국의 교육적 상황들 이외에도 독일의 교육제도와 교육의 현실을 지향했었습니다. 유학생 동료들로부터 많은 자극을 받은 필자는 따로 시간을 내어 여러 나라의 교육제도를 서로 비교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한국의 교육 현실을 역사적, 세계적인 좌표 안에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습니다.
필자는 다른 여러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사회가 당면한 수없이 많은 문제 영역 중에서도 교육개혁의 문제가 가장 시급하고 근본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현금의 IMF 사태 이후 관치금융의 근절과 대기업 구조개혁 등의 문제 그리고 지난 7월 남북 정상회담 이후부터의 분단의 극복과 통일의 문제 등이 시급한 문제들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대학 입시제도를 비롯한 수 많은 교육 정책의 문제들이 도사리고 앉아 있습니다. 해마다 장관이 바뀔 때마다 교육정책은 바뀌고 새로운 개선책들이 나오지만 아직 근본적인 문제는 전혀 풀리지 않은 채 대학생들은 등록금 인상 저지 투쟁을 벌이고 그에 못지않게 고등학생, 중학생 그리고 심지어는 초등학생까지 학교 문제, 재단의 비리 규탄시위를 하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더욱 근원적인 문제는 한국의 고등교육 기관과 그 학문적 수준이 극히 저조하다는 것입니다. 신문 지상을 통해 이미 늘리 알려진 것처럼, 한국에서 제일 똑똑하다는 국립 서울 대학교의 연구 실적이 세계에서는 대단히 저조합니다. 그와 또 다른 이유에서 어떤 사람들은 서울대를 폐지하자는 말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 나는 나의 어머니와 또 많은 한국의 부모들의 교육열, 치마바람 등의 사실들을 생각해 봅니다. 자기 몸 희생하면서 오직 자식들 잘되기 만을 바라는 어머니들, 이들의 노고와 희생이 이제 어디에서나 보람을 거둘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잘못된 교육에서 잘못된 역사, 비참한 현실이 나옵니다. 사실 지난 IMF 경제 위기도 권위주의적이고 불합리한 정치 뿐만 아니라 그간 수 십년에 걸쳐 누적된 잘못된 교육의 역할이 중차대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대학교육을 받지 않은 현 김대중 대통령이 그 이전의 고등교육을 받은 대통령들보다 똑똑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면 우리 나라 교육이 얼마나 인재를 키우지 못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대충 이 정도로 교육의 문제 상황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교육 모순의 핵심적 고리를 풀어 보겠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육이, 일본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인재 양성보다는 인재 선발에 치중한다는 것입니다. 필자는 독일에서 유럽인들에 의한 일본 교육제도 비판의 시각을 감지했었습니다. 유럽인들은 일본 교육의 약점이 인재의 교육, 양성(Bildung)보다는 인재의 조기적인 선발(Auswahl)에 있다고 봅니다. 바로 일본 특유의 입시지옥을 암시하는 것 입니다. 이런 일본 교육에 관한 구라파의 평가는 한국의 경우 그대로 적용됩니다. 입시 중심의 교육을 극복하고 교육과 양성 중심의 교육이 한시 바삐 정착되어야 합니다.
사실 일본의 교육 문화는 우리에게 너무 친밀하고 내면화 되었기 때문에 한국인은 일본 교육 제도에 대해 객관적인 시점을 확보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일본의 사무라이 유치원(엘리뜨 유치원)에 대해서 필자는 우연히 독일 TV에서도 보고 귀국하여 한국 TV에서도 보았는데, 그 방송의 태도가 두 나라에서 완전히 달랐습니다; 독일 RTL 방송은 추운 겨울에도 웃통 벗고 달리는 일본 유치원의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준 뒤 그렇게 시키는 유치원을 풍자적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어린이 프로를 보니 그것을 멋있게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필자는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6년 개근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 개근 및 전근 등을 선생님들이 장려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이 쉬워 6년 개근이지 실제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개근을 하기 위해 어린 안재오는 섭씨 40 도의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밥하는 누나의 등에 업혀 등교했었고 이를 본 담임 선생님은 칭찬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독일에 살아 보니까 그런 일, 즉 (심하게) 아픈 애가 학교에 가는 것은 칭찬 받을 일이 아니라 또라이 짓이었습니다.
그리고 유치원의 경우 아픈 애는 -다 나을 때까지- 유치원에 갈 수 없고 또 다 나아서 유치원에 다시 갈 때는 반드시 의사의 증명서, 즉 다른 아이에게 그 병이 전염될 수 없다는 증명서를 부모가 가지고 유치원에 갑니다.
또 다른 일본식 교육 풍조의 예로 조기 교육 붐을 들겠습니다. 여기에 대해 자세히 말하는 것은 본 논문의 취지를 벗어 나기 때문에 한 가지만 말하면, 한국의 학부모들의 조기교육열은 역시 일본의 모방이라는 것이며, 필자의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은 예능의 몇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조기 교육이 해롭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적으로 정신활동을 시작하는 성년기가 되면, 필요한 지식의 양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에 어린 시절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습득한 영어 단어, 문장 몇 개는 그 때 아무런 차이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나는 이것을 인간 정신의 무한성이라고 명명합니다. 또한 엄마의 손에 끌리어 강제로 받는 학원이나 개인 지도는 아동의 학습 흥미를 쇠퇴시키기 때문에 결국 안 하느니 보다 못한 것입니다.
다시 한번 요점을 정리하면 인간 정신의 자발성은 그것이 책임의식과 결부될 때 무한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결국 그런 정신의 소유자가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필자는 일본에 대해 하등의 편견이 없습니다. 그리고 필자가 만난 일본인들은 인간적으로 매력적이었습니다. 과거에 일본이 한국을 지배했기 때문에 혹은 근래 일본인들의 복고주의, 우경화, 재무장, 역사왜곡의 역겨움 때문에 이렇게 일본의 교육 방식을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일본식의 교육제도가 인간성의 고유한 발전을 방해하고 또 사회 발전에 도움이 안되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 뿐입니다.
그러면 다시 대학 교육의 문제로 돌아 갑시다. 필자의 견해를 따르면 오늘 날 세계적으로 보아 대학 교육 제도는 근본적으로 양대 조류가 있으며 또 그 양대 조류를 혼합한 세 번째 조류가 있다고 봅니다: (유럽)대륙식, 영미식 그리고 일본식. 대륙식의 대학 교육을 시행하는 나라는 프랑스, 독일, 스웨덴 등 유럽 대륙의 많은 나라들이 있으며, 그 모범은 독일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영미식은 영국과 미국 등에서 시행하고 그 모범은 역시 미국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식은 일본, 한국 대만 등에서 시행되고 그 모범은 당연히 일본입니다. 위의 세가지 유형의 대학제도를 설명의 편의를 위해 간단히 독일식, 미국식 그리고 일본식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독일식은 근본적으로 교육의 국가주의라고 규정됩니다. 여기서는 모든 국민의 교육 비용을 원칙적으로 국가 또는 사회가 부담합니다, 그러니 교육의 주체도 자연히 개인이나 단체가 아니라 (국가)정부가 됩니다. 이 때 실제로 학생이 지불하는 교육비나 등록금이 극히 적습니다 - 독일의 경우 2000년 현재 평균적으로 교통카드 포함해 한학기에 십만원 (190 마르크, 1 마르크= 510원). 여기에 비해 미국식의 경우 대학교육의 주체는 연방정부나 주정부가 아니라 각 개별 대학입니다. 따라서 미국은 대학교육의 개인주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주정부의 교육부에서 하는 일도 대학 재정지원이나 장학금지원 그리고 통계 등에 국한되고 있습니다. 또한 연방정부의 교육부에는 우리나라처럼 대학담당 부서가 전혀 없다. 이는 달리 말해 국가 차원의 대학 교육 정책이 없다는 것이다. (현재 대학 자율화를 부르짖는 한국 정부의 경우 이 대목을 벤치마킹해야 합니다. 앞으로 상세히 논하겠지만 정부가 진짜로 대학의 자율화, 자립화를 원한다면 교육부의 대학담당 부서를 없애고 중앙적인 대학정책을 폐지하면 미국과 같은 대학의 자율화, 자립화는 금방 이루어 집니다.)
미국식의 대학 정책은 대학의 개인주의(개별 대학 중심주의) 그리고 대학교육의 시장주의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학 입학부터 졸업까지 전과정을 대학 총장이나 이사회에서 자율적으로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미국 대학은 사립이나 공립을 막론하고 하나의 회사라고 생각하면 그것을 가장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총장(President)은 사장이고 교수는 사원 그리고 학생은 손님인 셈이지요. 따라서 등록금 문제도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서 결정됩니다, 즉 좋은 대학은 엄청 비싸고 (평판이) 좋지 않은 대학은 그만큼 쌉니다. 그래도 등록금이 독일보다는 평균적으로 월등 비싸고 한국 보다도 비쌉니다. (한 학기 5,000,$ - 20,000, $)한국의 경우 사립 대학이나 공립 대학이나 모두 교육부의 대학정책을 따른다는 점에서 독일식입니다, 그러나 대학재정의 대부분이 등록금 수입에 의존하는 면에서는 미국식입니다.( 일본도 이와 유사할 것으로 사료된다.) 다시 말하면 정부는 대학을 통제만 하고 재정 책임은 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미국 같은 나라는 대학의 학사 행정을 모두 그 대학 자치에 맡기면서도 많은 재정 원조를 합니다. 한국의 대학 교육의 현실은 이처럼 획일적-중심적 요소와 자유주의적-탈중심적 요소의 혼합에서 오는 혼란의 양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여기서 야기되는 문제가 결국 입시지옥, 과열 사교육, 재단비리 등의 사회적 부조리와 무능한 인재의 배출이라는 국가적 손실입니다. 지금 교육 행정은 가능한 미국식 대학 자율주의를 지향합니다. 필자는 미국식에 대한 편견은 없습니다. 그러나 벌써 십년 이상 대학 자율화를 떠들면서도 아직까지 그것이 정착되지 않는 것을 볼 때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정부가 미국식의 대학교육의 자율주의, 시장주의를 선포하면서도 실제로는 모든 것을 획일적-국가중심적으로 처리하는 자기 모순을 범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지금껏 교육부 장관들은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우를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미국식 대학 시스템의 장점만 보고 그것이 작동하는 기본조건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교육부의 대학국, 고등교육 지원국인지를 폐지하면 대학 자율화 절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 역시 혁명적 결단을 필요로 합니다. 교육 정치인들은 한 제도의 개혁이 요청하는 복잡한 현실의 총체적 요소들을 보지 못하고 일면적이고 근시안적인 태도로 현실을 조급하게 칼질하려 했으나 그들은 도리어 항상 그 (잘못된) 현실에 의해 스스로 난자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특성은 강력한 자발성입니다. 특히 사립대학의 경우 학부제, 대학원 중심제, BK21 등의 각 대학의 사정에도 맞지 않는 중앙집권적인 대학정책을 없애면, 교육부 재정 지원 없이 그 학교 등록금 수입만 가지고도 지금의 상태보다 훨씬 좋은 대학의 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은 학부제, 대학원 중심제, BK21 등의 정부 시책이 그 자체로 나쁘기만 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각 대학이 스스로 자유롭게 취사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육부가 과감하게 대학의 자율화를 취하지 못하는 이유를 모를 리 없습니다. 그것은 과감한 자유, 자율화가 야기할 사회적 혼란 때문입니다.예를 들면 기부금 입학의 경우 미국에서라면 그것은 대학 행정의 고유한 권한이지만 한국같이 좁고 역사가 오래된 나라에서 사람들은 유달리 시기심이 강하고 (사회적) 차별대우를 결코 참지 못합니다. 따라서 미스코리아의 특혜 입학에 대해 우리 사회나 언론은 그렇게 예민하고 시끄러운 것입니다. 이 정도로 교육적 상황의 묘사와 그 문제의 제기를 시도했습니다. 앞으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대안을 추적하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