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최초의 안씨는 어디에서
갈라져 나왔는가?
안씨는 이원(신라 경애왕, 800년대)의
아들 중 큰아들 (안방준)이 죽산안씨,
둘째아들(안방걸)이 광주안씨로 시작함.
광주안씨 9대인 안자미님이 순흥안씨로
갈라져 나옴.
순흥안씨 7대인 안원형(둘째아들, 죽성군,
안향선생의 증손자)이 신죽산안씨로 갈라져
나옴.
(신죽산안씨는 순흥안씨 죽성군파라고도 함)
순흥안씨 7대인 안원린 (세째아들,
안향선생의 증손자)에서
탐라안씨로 갈라져 나옴.
첫째아들은 순흥안씨를 이어감.
현재 죽산안씨라고 하면 순흥안씨
죽성군파인 신죽산이 대부분임.
항렬이 신죽산 21대손 규(기),
22대손 종(용), 23대손 순(태),
24대손 병(주), 25대손 섭(열),
26대손 재(교), 27대손 진(현)은
신죽산안씨 임.
전라도 보성 장흥등의 안씨는
신죽산안씨 등이 주로임.
신죽산안씨 25대손은 순흥안씨
(안자미님부터) 31대손이며,
안향선생 (문성공, 안자미님의 증손자)
28대손임.
위에서 보듯이 안씨는 죽산, 광주,
순흥, 신죽산, 탐라 모두 한조상임.
고려조, 조선조 초기에 세를 크게
형성했으나 단종복위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많이 죽고 노예로 전락하다
퇴계 이황의 상소로 복위하여 다시
세를 형성해 감.
신죽산안씨(순흥안씨 죽성군파)들중
많은 사람들이 종손인 죽산안씨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음.
신죽산안씨(순흥안씨 죽성군파,
안원형님으로 부터 25대손,
항렬 섭자임,
그렇다면 안자미님으로 부터는
31대손이며, 안향선생(문성공)
부터는 28대손님
신죽산안씨는 순흥안씨
(순흥안씨 죽성군파)해도 무관
할 것임.
안씨 본의 순서를 보면 최초시조는
이원(당나라 황실)
첫째 아들 : 죽산안씨
둘째아들 : 광주안씨
광주안씨--->순흥안씨--->신죽산안씨. 탐라안씨
안씨들 조상도 같으니 다같이 도우며
안향, 안창호, 안중근 선생처럼 이 세상을 밝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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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죽산안씨의 거짓족보로
순흥안씨 시조를 모독
순흥안씨 후손은
죽산안씨의 거짓족보로
순흥안씨 시조를 모독합니다.
죽산안씨가 1976. 1999.에 그들의 족보를 날조하여(捏造)
거짓족보 (僞譜)로 만들 이유와 필요가 무엇일까?
참조 문헌 등을 고찰하여 고증하면서
그들의 범죄적 행위를 규탄한다.
죽산안씨는 본관을 같이 한 준(濬.또는 漢平).
영의(令儀)를 시조로 한
2개의 문중(門中)은 족보를
1744년. 1805년에 각각 만들기 시작한다.
이들 시조라는 사람들은 고려중기 때 사람들이다.
이 시조들과 이하 윗대 선조를 조종운(趙從耘.풍양조씨.
1608-1683.익위사익찬)이 붓으로 베껴(筆寫) 간행한
[씨족원류(氏族源流)]의 기록을 베끼고
가승을 포함 하여 시조 이하 선조(世系)를 세웠다.
그러는 중에 순흥안씨(順興安氏)측의
소위 [전의록(傳疑錄)]이 1800년대부터 등장(登場)한다.
순흥이 전의록을 기록하는 배경은
광주안씨의 시조 아래 12대 결세(系缺)을
원주 (原州) 사는 안 처 대 ( 安 處 大 ) 가
[사간공후 감찰공파 29세손.
1730년대 까지 생존하나 자손이 없음.
외가가 원주라(原州元씨) 원주에서 거주.
안정복 (호 順菴. 1712-1792.영조. 정조 때 실학자)공의
조부 서우(瑞羽. 울산부사역임)과
같은 항열(同行)이며 서우공과 같은 집안의 처지로
서우공이 文科하여 한성에서 벼슬할 때
왕래가 빈번 했을 것임.]
그가 1719년에 충북 충주 위류면(忠州圍柳面)의
순흥안씨집(혹운 순흥의 外孫 김씨家)에서
윗대 12대를 베껴서(筆寫)
한성의 서우공에게 갖다 주었는데
그 기록 중에 순흥의 시조인
자미(子美)공의 이름(名. 諱)를
광주안씨 10세(휘 弘美)의 아우(弟)로 기록하였으니
순흥 측에서 시조의 윗대(先系)로
반신반의(半信半疑)로 선뜻 인정(認定)이 어려우니
족보에 별도로 [전의록(傳疑錄)]으로 하면서
소위 “농서이씨 동래설(隴西李氏 東來說)”까지
섞어서 기록 한 것이 보인다.
이 풍설(風說)을 광주안씨 안정복은(順菴)은
[거짓을 바르게 밝힘(辨誣)]로 경계(警戒)하였다.
이런 현상을 1930년대 까지
죽산안씨 측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유는 그 조상선대의 계통이(系出)이
광주와 순흥의 일이므로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09년쯤 안윤채(安潤采.彩).
안력(安瓅.重瓅)이 죽산안씨라고 하면서
“麗末世譜”. “안윤채집의 문서(家錄)”.
“麗末御本古譜”라는 문건을
죽산안씨세보(1923.계해)의 범례에 써놓고
“믿지 않는다(尙難徵信)”하고.
[안씨동원보(安氏同源譜)]라고 하여
죽산의 족보에는 부록(別錄)으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1924.윤창현 편찬)에
안씨근원(安氏根源)으로 기록하였다.
1908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그것이 기록되기도 하였다.(순흥의 安在亨의 기록과 일치.)
조선씨족통보와.
1923년 죽산안씨세보 속의
안윤채 가록의 거짓을 꾸며
광주안씨 2世이하의 이름(휘)을 모방(模倣)하여
항열자(行列字)처럼 그럴듯하게 만들고,
심지어 시조라는 안방준(安邦俊)은
809-879년으로낳고,
죽은 해로 하고.
2세부터 6세. 8세의
부인의 姓과 그 父名.
官職까지 新羅末.
高麗初(800-980년) 사람인 것처럼
그 기록을 조작(造作)하여.
두 문중(濬. 令儀)을 하나로 묶어
동성동본(同本同姓)의 곤궁(困窮)을
피해 보자는 것이라 추정한다.
이원의 세 아들이 신라 경문왕 때
갑신외란(甲申外亂)이니 왜란(倭亂)이니
사실(史實)에 없는 전공(戰功)으로 성을 받고(賜姓)
이름을 바꾸고(改名). 군호를 받고(封君) 하는 등
거짓을 꾸미고. 광주안씨. 순흥안씨 시조와
상대 선조들을 끼워 넣어, 거짓족보(僞造族譜)를 만든 것이다.
뿐만 아니라,
1976년 대동보의 착오부분을 고친다면서
1999년 대동보에서는 중국 당나라
고조(첫 황제 高祖. 李淵)의 일가라 하여
종실인(宗室人)이 이원(李瑗)이고
고성이씨의 시조 이황(固城 李璜)과 형제라면서
당나라 황제의 일족이고
중국사람의 후손인양 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짓이다.
중국 당나라의 역사서인 구당서.
신당서(舊唐書. 新唐書)의
당나라 종실인 국정(國貞)의 아들이 아니다.
더구나 저들은 광주. 순흥. 신죽산. 탐진 안씨가
죽산안씨와 한 할아버지 자손 혈통이라고
현혹(眩惑)하는 거짓을 저지르고 있다.
(‘76죽산대동보간행사-안명선.’99죽산대동보간행사-안효열.
안씨원류-안국승.죽산대종회보7.8호-안국승.죽산대종회보10호-안민규.)
오 늘 날 2 0 세 기.
21세기의 열린시대에
족보를 거짓으로 꾸며
중국 당나라 황제의 일족인양
성씨 시조를 세움은
부끄러운 짓을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광주. 순흥안씨는 죽산안씨 시조가 누구든
관계치 않을 일임에도
두 문중의 시조와 상대 선조를
방자하게 끼워 넣어 모독함에 분노하는 것이다.
그러나, 광주안씨 대종회는
2007. 2월. 5월에 죽산안씨 대종회에
이를 온건한 표현으로 통지하였다.
죽산안씨 측은 이 잘못을
철저하게 깨닫고
모든 기록과 기사를 다 고쳐야 할 것이다.
아울러 광주안씨 . 순흥안씨 후손들은 이 사실을 알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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