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濟의 熊津과 漢城 _ 황산벌, 웅진은 산동성에 있다.
백제의 웅진과 한성
↓
백제의 웅진(熊津)은 태산(泰山) 서쪽에 있고
백제의 한성(漢城)은 하북성(河北省)에 있었다.
- 오재성님 홈페이지에서 발췌했습니다.(참조:우리역사의 비밀) -
이 부분은 과학적으로 검증이 가능한 부분입니다 ! 여러가지 논란이 있겠지만
이것보다 더 정확하고 과학적인 논거를 가진 내용들이 나오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
웅진(熊津)은 태산(泰山)서쪽에 있었다.
우리는 현재까지 웅진이 충청도 공주 지역이었다고 알아왔다.
그러나 한국에는 백제 패망때의 지명이 하나도 없으며
당평 백제비가 부여에만 둘이 있는 등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으나,
백제가 진출했었다는 중국의 산동성, 하북성, 강소성, 안휘성등에는
백제패망때의 지명이 많이 있으니,
사서와 일치하는 백제패망지역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며,
한국에서 백제가 패망했다는 것은 역사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자왕(義慈王)이 있을때 전쟁터의 명칭을 볼수있는데 44개의 전투지역 지명이 있는데
한국에는 확실하지 않은 황산이 있을 뿐이고 공주(公州)에 흐르는 물도 금강인데
역사를 말할 때 백마강(白馬江)이라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중국의 동부 즉 옛요동(遼東:요의 동쪽)에는 많은 지명이 있다.
하북성(河北省)에 평원(平原)
산동성(山東省)에 황산(黃山),동명(東明),대산(大山),박산(博山),
백마하(白馬河),백마(白馬)가 있으며 치청래(淄靑萊)가 있고
강소성(江蘇省)에 해(海)가 있다.
하남성(河南省)에 항성(項城)
안휘성(安徽省)에 주류성(周留城),독산(獨山),동성(桐城),잠산(岑山)
강소성(江西省)에 덕안(德安)이 있다.
그리고 우이도(隅夷道)는 우이(隅夷)의 지역을 뜻하는데
隅夷는 요의 동쪽 지명이지 반도의 지명이 아니다.
혹시 허이(虞夷)를 나타내는 것은 아닐까 ?
왜 이렇게 백제의 패망때의 지명이 중국 동부에 많은가?
중국인들이 우리의 百濟의 지명이 좋아서 집중적으로 옮겼겠는가?
아니다. 바로 요동(遼의 동쪽)에 백제(百濟)가 있었기 때문이다.
의자왕때의 지명이외에 삼국사기에서 기록된 지명에
"사자하, 독산성, 석문"등의 지명이 있고 한수(漢水)가
하수(河水)임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족의 기록에서도 百濟의 지명이 있는데
송서(宋書) 양서(梁書) 史에 진평, 고평(晉城, 高平)이 있다고 했으며 남제서(南齊西)에서
광양 조선 대방 광릉 청하 낙랑 성양(廣陽 朝鮮 帶方廣陵 淸河 樂浪 城陽)등
군의 명칭이 요의 동쪽에 있다.
이중에서 "나전(羅專)칠기"는 섭라(涉羅) 즉 흡, 섭인 신안에서 발달하였는데
고구려가 백제에게 빼앗긴 땅인데 신라가 고구리민이 되었다가 백제의 속민이 되고
해방된 신라에 의해 요동백제가 멸망하는 과정의 유물생산지
그리고 지명은 바뀌어도 생산지는 영원한 것이기에
역사를 밝힐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나침반과 나전칠기는 중국동부에 백제와 신라 존재를 밝혀주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그리고 위(魏)와 백제(百濟)의 전투이다.
백제본기에는 동성왕 10년에 魏遺兵來 伐爲我所敗라고 물리쳤음을 짧게 기록하고 있으나,
남제서(南齊西)에는 수 십만의 군대가 백제를 침략했으나,
百濟장수인 沙法名 餐首流 解禮昆 木干那 등이 대파시켜 물리 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반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지명과 문화유산(羅針盤, 羅專칠기)와 전투상황에서
백제웅진은 태산 서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백제(百濟) 한성(漢城)은 하북성에 있다.
우리는 백제 한성이 반도의 현재 서울 근처로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사서에서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백제의 蓋鹵王(위로왕-개로왕이라고함)은 고구려의 침입에 의하여
한성(漢城)이 함락되고 서쪽으로 도망을 하다가 잡혀 아차성(阿且城) 아래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나쁜 방향으로만 이야기 해 왔다.
그러나 蓋鹵王(위로왕 또는 개로왕)은 백제 역사상 가장 많은 일을 하신 분이다.
㉠ 蒸土築城 卽於基內作宮樓閣臺 無不壯麗
흙을 구워 (연화)성을 쌓고 곧 그 안에다 궁실 누각 대사를 마련하되 굉장하고 화려하였다.
㉡ 取大石於郁(우)里河作槨以葬父骨
우리하에서 큰돌을 가져와 곽을 만들어 아버지의 뼈를 장사지내고
㉢ 緣河樹堰 自사城之東至崇山之北
하수(河水)를 따라 제방을 쌓되 사성의 동에서 숭산의 북까지 이르렀다.
㉣ 외교적으로 위(魏)에 대방태수 장무를 보내어 군사를 빌리려고 努力도 했다.
우리는 위의 기록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 있으니
첫째 연와로 성을 쌓았다는 것
둘째 하수에 제방을 쌓았다는 것이다.
반도에는 연와의 성이 없으나 황하 유역에는 모두 연와의 성이다.
하수는 황하의 옛 이름이다. 현제 제방이 있다는 점이다.
또 하수(황하)에는 숭산이 있다는 것은 기록은 일치하고 있다.
하수의 북쪽에 대방이 있다는 점이다.
蓋鹵王(위로왕 또는 개로왕)의 기록에서
① 벽돌의 성터가 있어야 한다.
② 하수가 있고 제방이 있어야 한다.
③ 숭산과 대방이 있어야 한다.
④ 동쪽끝에 있다.
⑤ "남으로 유씨(劉氏)과 통하고, 북으로 유유와 약속하여"라고 했으니
필자의 위치에 일치하는 지역이어야 하고
⑥ 아차성, 사성(阿且城, 蛇城) 쌍현성 등이 있어야 한성이 될수 있다는 것이다.
蓋鹵王(위로왕)이전에 지명으로는
石門(석문214년) 諸城(제성155년) 樂浪郡(太守)帶方(대방286)
阿且城(아차성286년) 蛇城(사성 286년)등이 있어야 한성이 될 수 있다.
하북성에 대방, 석문이 있고
산동성에 제성이 있고
하남성에 숭산이 있고
황하(黃河)의 옛 이름이 하수(河水) 그리고 한수였다.
숭산(崇山)의 북쪽 황하(黃河)에서 동으로 제방이 현존하고 있으며
요(遼)의 동쪽에는 벽돌의 성으로 되어있다. 이렇게 모두
조건에 맞는 것은 중국중부 지역이지 반도가 아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한성(漢城)이 있었을까?
신라본기 현덕왕 8년 한산주(漢山州)에 당은현(唐恩縣)이 있다.
현덕왕 15년 수성군(水城郡)과 당은현을 합병하였다.
황산, 대산, 백마하의 북쪽에 평원과 청하가 있다. 그사이에 은(恩)이란 지명이 있다.
한성(漢城)은 하북성에 있을 평양성 또는 장안성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을 것이다.
지도상에 현존하는 백제의 지명 (고지도와 현재지도 추적, 공통부문)
원본이 약간 흐린 관계로 잘 안보입니다 ! 이해 바랍니다..
참고로 일간신문에 나와 있는 관광명소를 유심히 보십시요.
얼마나 우리가 알고 있는 삼국시대의 지명이 많은지..-편집자註-
"웅진" 표시는 가장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지역(현재지명 "비성")입니다.
현재 반도의 부여가 사비성으로 지금까지 우리는 알아왔다. 그러면 부여박물관에 가보라
어디에 사비성이라는 유물이 있는가 ? "내지성"이라는 명문의 비문이 있다.
1980년대에 500원에 탁본을 판매도 하였다. 그곳은 "내지성"이지 사비성이 아니다,
필 자 註
21세기를 맞이하여 지금 대한민국은 수도이전의 큰 문제에 닥쳐있다.
지금 대한민국의 1년예산이 110조정도인데
수도이전 비용으로 100조정도가 소요될 것이라고 한다. 이렇듯 수도를 이전하는 것은
한나라의 국운을 좌우하는 대규모 역사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백제도 웅진에서 사비로 수도를 옮겼다고 한다.
물론, 당시의 화폐가치와 경제규모가 다르므로 절대적인 금액을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 당시도 엄청난 대규모자금과 노동력이 들었을 것은 분명하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장비의 발달도 없었으니
직접백성의 노동력을 사용하여야 하므로 그 부담이 엄청난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웅진은 지금의 공주이고, 사비는 지금의 부여라고 한다.
하지만, 이곳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다.
백제 성왕이 수도를 옮긴 것은 다 이유가 있지만, 막대한 재정부담을 견뎌야 한다.
자칫하면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역사에 자세히 나와 있다.
그런데, 공주에서 부여로 옮겼다면 이치에 맞지가 않다. 별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바로 옆으로 이전하기에는 비용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반도에서 일어난 일이었을까?
첫댓글 학교 다닐때 국사시간에 뭔가 안맞다 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고 이해가 가지 않았었는데.. 역시
한민족의 역사는 축소.조작.편집되었고
매우 심하게 왜곡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