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화가의 진솔한 우정을 상징하는 그림 시화상간도 (詩畵相看圖)이다.
뒷 등이 보이는 이가 화가 겸재 정선이고, 정면에 앉은 이가 시인 사천 이병연이다.
그들을 둘러싼 늙은 소나무, 굳센 바위, 맑은 물은 모두 좋은 벗 변치않는 우정을 상징한다.
그들은 벗이었다.다섯 살 더 나이가 든 사천 이병연은 당시를 대표하는 진경(眞景)시인이다.
다섯 살 어린 겸재 정선은 조선의 산하와 인물을 사실 그대로 그림으로 그려낸 화성(畵聖)이다.
이들 시인과 화가는 삼연 김창흡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이들은 스승 김창흡에게서 주역(周易)을 배웠다.
삼연 김창흡에게서 배우고 익힌 주역을 그림과 시에 그대로 녹여낸 이들은 '좌사천 우겸재'로 존경받은 막역한 사이다.
사천이 시를 써서 보내면 겸재가 그림으로 화답한다. 거꾸로 겸재가 그림을 보내면 사천이 시로 응수한다.
시와 그림을 주고 받는 그림 <시화상간도(詩畵相看圖>는 시인과 화가의 다정한 우정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화가 겸재 정선이 65세에 양천현감으로 나가게 되자 시인 사천 이병연이 우정의 시를 보낸다.
與鄭謙齊 有詩去畵來之約 期爲往復之始
겸재 정선과 더불어 시가 가면 그림 온다는
기약이 있어 약속대로 가기 오기를 시작하였다.
我詩君換畵相看 輕重何言論價看
詩出肝腸畵輝手 不知難易更誰難
내 시와 자네의 그림 서로 바꿔 볼 적에
둘 사이 경중을 어찌 값으로 따지겠나
시는 간정에서 나오고 그림은 손으로 휘두르는 것
모르겠네,누구 쉽고 또 누가 어려운지
겸재 정선의 대표작인 그 유명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이다. 국보 제216호다.
이 인왕제색도는 한마디로 비 개인 인왕산 그림이다.
인왕산은 산 전체가 백색화강암으로 되어 있는 바위산이 특징이다.
백색 화강암을 그리려면 흰색으로 표현해야 한다.겸재는 온통 진한 묵으로 그렸다.
이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림 우측 앞에 조그마한 기와집 한 채가 있다.
이를 두고 죽마고우였던 사천 이병연의 집이라는 해석이 있다.
정선과 이병연은 인왕산자락 마을에서 태어나 함께 자란 친구다.
이병연이 병으로 생사를 헤매게 되자, 정선은 그의 쾌유를 바라는 마음으로
함께 놀던 인왕산의 비가 개는 모습(인왕제색도)을 그려 전했다.
겸재는 집 마루에 앉아 종이를 펴고 붓을 들었다.
인왕산 아래부터 피어난 안개가 길게 띠를 이루며 위로 번지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던 겸재는 큰 붓을 들어 화강암 덩어리 인왕산을 쓱쓱 그렸다.
겸재는 붓질 하나하나에 간절한 마음을 담았다.
이때 겸재는 60여년을 형제처럼 지내온 사람을 떠나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바로 인왕제색도는 사천 이병연이 어두운 비구름이 개이듯
병이 나아 저 당당한 인왕산처럼 다시금 웅장하고 굳건한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려낸 그림이다.
겸재가 사천의 집 주위를 수목들이 호위하듯이 빙 둘러 그려낸 것만 보아도 사천이 병을 이겨내고 당당한 소나무처럼
일어나길 바라는 겸재의 마음을 잘 알 수 있다.
향교 앞 연립주택이 빽빽하게 들어선 곳이 양천현아 터다. 길 가운데 ‘양천현아지’(陽川縣衙址)라 새긴 비석이 보인다.
65세이던 1740년(영조 16)부터 5년 동안 종5품 경기도 양천현령을 지냈다. 양천현은 지금의 서울 강서구와 양천구 일대였다.
양천현아(縣衙)는 강서구 가양동의 한강변 궁산(宮山) 남쪽에 있었다.
겸재가 ‘경교명승첩’에 ‘양천현아’와 ‘종해청조’(宗海廳潮)를 남겨 놓았다.종해헌은 양천현의 동헌이었다.
‘종해청조’는 ‘종해헌에서 흘러가는 물소리를 듣는다’는 뜻이다. 종해헌 건물은 1977년까지도 남아 있었다고 한다.
겸재는 양천현감으로 재직하는 동안 한강 주변의 풍광을 담은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과 연천 임진강변
을 묘사한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 그리고 임지(任地)의 명승을 그린 ‘양천팔경’(陽川八景)을 남겼다.